본문 분석
이사야 41:1-20은 BHS의 단락 표지에 따라 열방의 재판(1-7절), 종 이스라엘을 향한 위로(8-13절), 버러지 같은 야곱을 향한 약속(14-16절), 광야를 바꾸시는 약속(17-20절)으로 나뉜다. 40:27에서 야곱은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고 탄식했다. “내 송사”(מִשְׁפָּטִי, 미쉬파티)는 자신이 받아야 할 정당한 판결을 가리킨다. 41장은 하나님이 그 재판을 여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절에서 하나님은 먼 해안 지역의 민족들인 섬들에게 잠잠히 듣고 재판정으로 나아와 말하라고 명하신다. 40:15에서 “떠오르는 먼지”에 비유된 민족들이 이제 소환을 받는다. “힘을 새롭게 하라”(יַחֲלִיפוּ כֹחַ, 야할리푸 코아흐)는 40:31의 “새 힘을 얻으리니”와 같은 표현이다.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에게 약속된 힘을 열방이 스스로 얻어 자기 주장을 펴 보라는 도전이다. “우리가 서로 재판 자리에 가까이 나아가자”라는 청유에서 하나님도 소송의 당사자로 나아가신다. 자기 송사가 외면당했다고 여긴 야곱 앞에서 하나님이 열방과 변론하신다.
2절은 동방의 정복자를 누가 일으켰느냐고 묻는다. “일깨워서”(הֵעִיר, 헤이르)는 움직이게 한다는 뜻이며, 25절에서 하나님이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라고 답하실 때도 같은 동사가 쓰인다. 본문은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핸드북은 그를 하란에서 온 아브라함으로 보는 견해를 소개하면서도 넓은 문맥에 따라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로 본다. 고레스는 메대와 바사를 장악한 뒤 주전 539년 바벨론을 정복하고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락했다. “동방”은 포로들이 살던 바벨론의 동쪽에 있는 바사를 가리킨다.1 44:28과 45:1에서는 고레스의 이름이 직접 나온다.
“공의로”(צֶדֶק, 체데크)는 이사야에서 승리나 구원을 가리키기도 한다. UBS 핸드북은 여기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거두는 군사적 승리를 정의의 승리로 풀이한다. 이어지는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יִקְרָאֵהוּ לְרַגְלוֹ, 이크라에후 레라글로)는 두 가지로 읽힌다. ‘의 또는 승리가 그의 발에서 그를 만난다’고 읽으면 가는 곳마다 승리한다는 뜻이 되고, 동사를 ‘부르다’로 읽으면 하나님이 그를 불러 섬기게 하신다는 뜻이 된다. UBS 핸드북은 4절에서 같은 동사가 ‘부르다’라는 뜻으로 쓰인다는 점에서 뒤의 해석을 택한다.1 개역개정의 “자기 발 앞에 이르게”도 하나님이 고레스를 불러 쓰신다는 이해에 가깝다.
2절 후반에서 하나님은 열국을 정복자에게 넘겨주시고 왕들을 다스리게 하신다. 왕들은 그의 칼 앞에서 티끌이 되고 활 앞에서는 바람에 불리는 초개가 된다.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 같게”(כְּקַשׁ נִדָּף קַשְׁתּוֹ, 케카쉬 닛다프 카쉬토)에서 ‘초개’와 ‘그의 활’은 소리가 비슷하다. 40:24에서 권력자들을 초개처럼 날려 보내시던 하나님의 일이 한 정복자의 원정에서 드러난다. 그는 열국을 쫓아가면서도 “안전히”, 곧 평화와 무사함을 뜻하는 שָׁלוֹם(샬롬) 가운데 지나간다. 3절 후반은 개역개정처럼 전에 “가 보지 못한 길”로 읽거나, 발이 땅에 닿지 않을 만큼 빠른 진군으로 읽을 수 있다.4
4절에서 하나님은 이 일을 누가 행했으며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고 물으신 뒤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고 답하신다. 세대들을 불러내시는 분이 한 정복자도 부르셨다. “내가 곧 그니라”(אֲנִי־הוּא, 아니 후)는 43:10, 13에서 다시 나오고, 44:6은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고 선언한다. 처음과 나중을 다스리시는 여호와께서 고레스의 등장을 자기 일이라고 밝히신다.
5-7절에서 섬들은 하나님의 일을 보고 두려워한다. “보고”(רָאוּ, 라우)와 “두려워하며”(וְיִירָאוּ, 베이라우)의 비슷한 소리는 그 반응을 연결한다. “땅 끝”(קְצוֹת הָאָרֶץ, 케초트 하아레츠)은 40:28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미치는 곳이며, 9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부름받은 곳이다. 같은 땅 끝에서 열방은 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붙들린다. 열방은 함께 모여 서로 “힘을 내라”고 격려하며 우상을 만든다. 그들이 서로 “도우며”에 쓰인 동사는 10, 13, 14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시겠다고 하실 때도 쓰인다.
7절의 목공과 금장색은 40:19의 장인과 장색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개역개정은 히브리어에서 한 번 쓰인 “격려하며”를 두 작업자 쌍에 각각 붙여 옮긴다. “힘을 내라”, “격려하며”, “못을 단단히 박아”는 모두 강하게 하거나 굳게 붙든다는 같은 어근의 표현이다. 장인들은 땜질을 보고 “잘 된다”고 하며 우상이 “흔들리지 아니하게” 못을 박는다. 40:20에서도 사람이 우상을 흔들리지 않게 세웠다. 사람을 지켜 줄 신을 사람이 손수 붙들어 매는 장면은 20절에서 여호와의 손이 광야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장면과 대조된다.
8절의 “그러나 너”에서 하나님은 열방을 떠나 이스라엘을 부르신다. “너”는 단수이지만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나의 종”(עַבְדִּי, 아브디)은 40장 이후 처음 나오는 종의 호칭이며 42장 이하로 이어진다. UBS 핸드북은 하나님이 언약에 따라 택하신 백성의 주인이시기에 그들을 종이라 부르신다고 설명한다.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זֶרַע אַבְרָהָם אֹהֲבִי, 제라 아브라함 오하비)에서 ‘나의 벗’은 문법상 ‘나를 사랑하는 이’로 읽을 수 있다. 핸드북은 참고 번역들이 “나의 벗”을 택한다고 보고하면서 어떤 언어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이’로 옮기도록 제안한다.2 역대하 20:7의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과 야고보서 2:23의 “하나님의 벗”도 이 관계를 말한다.
8절에서 시작한 문장은 10절까지 이어진다. UBS 핸드북에 따르면 9절의 네 동사와 10절의 세 동사는 ‘내가 너를’이라는 어미 ‘-티카’로 끝나 운율을 이룬다.2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붙들며”에 쓰인 הֶחֱזַקְתִּיךָ(헤헤자크티카)는 우상을 단단히 박는 동사와 어근이 같다. 사람이 우상을 붙들어 매는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붙드신다. 정복자와 세대들을 부르신 하나님이 종 이스라엘도 부르시고 택하셨다. “싫어하여 버리지”는 거절하거나 내버린다는 한 동사를 풀어 옮긴 말이다. 성전과 땅을 잃은 포로 생활에서도 하나님은 그 택하심을 거두지 않으셨다.
10절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는 약속에 근거한다. “놀라지 말라”(אַל־תִּשְׁתָּע, 알 티쉬타)의 드문 동사는 23절에서 열방의 신들에게 무슨 일이든 해 보라고 도전하시는 구절에도 나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굳세게 하며 돕고 붙들겠다고 거듭 약속하신다. 이 세 동사는 완료형이지만 예언적 약속에서는 정하신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기도 하므로 개역개정은 미래로 옮겼다. 두 번 나오는 “참으로”도 그 약속을 강조한다.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בִּימִין צִדְקִי, 비민 치드키)의 ‘의’는 2절의 “공의”와 같은 낱말이다. 정복자를 부르신 하나님의 의가 종을 붙드는 구원으로 나타난다. “붙들리라”의 동사는 42:1의 “내가 붙드는 나의 종”으로 이어진다.
11-12절은 이스라엘에게 노하고 다투고 싸우고 치는 자들의 끝을 말한다. “너와 다투는 자들”(אַנְשֵׁי רִיבֶךָ, 안셰 리베카)은 직역하면 ‘네 소송의 사람들’이어서 1절의 법정 장면과 이어지며 21절의 우상들에 대한 소송도 떠올리게 한다. 분노와 소송, 다툼과 전쟁으로 적대가 짙어져도 그들은 수치를 당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허무한 것 같이” 된다. 40:17에서 열방의 무력함을 표현한 두 낱말이 여기서 다시 쓰이고, 24, 29절에서는 우상들에게도 같은 판결이 내려진다. 이스라엘이 싸우는 장면 없이 대적들이 찾아도 만나지 못할 만큼 사라진다.
13절에서 여호와는 “네 오른손을 붙들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9절과 같은 어근의 분사 מַחֲזִיק יְמִינֶךָ(마하지크 예미네카)는 붙들고 계시는 모습을 그린다. 45:1에서는 고레스의 오른손도 붙드신다. 고레스는 열국을 항복시키는 일을 위해, 이스라엘은 택하신 종으로서 붙들린다. 절 끝의 “내가 너를 도우리라”는 ‘나’를 앞세워 돕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열방이 서로 돕던 동사가 하나님의 약속이 된다.
14절의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תּוֹלַעַת יַעֲקֹב, 톨라아트 야아코브)는 비교어 없이 이스라엘을 직접 버러지라 부른다. ‘버러지’가 여성 명사여서 이 절의 “두려워하지 말라”와 도움·구속의 약속에도 여성형이 쓰인 것으로 보인다. UBS 핸드북은 애정 어린 호칭이라는 견해도 소개하지만, 이스라엘의 연약하고 낮은 처지를 드러내는 비유로 읽는다.3 시편 22:6의 “나는 벌레요”에도 같은 낱말이 쓰인다. 히브리어 성경은 표제를 1절로 세므로 그 구절은 22:7이다.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מְתֵי יִשְׂרָאֵל, 메테 이스라엘)의 첫 낱말은 보통 ‘사람들’이라는 뜻이나 ‘버러지’와의 병행 때문에 다른 읽기가 제안되었다. UBS 핸드북은 많은 학자가 칠십인역처럼 ‘적은 무리’로 읽으며 사해사본은 ‘죽은 자들’이라는 읽기를 제시한다고 보고한다. ‘이’나 ‘구더기’를 뜻하는 아카드어와 연결하는 제안에 대해서는 사본 근거가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뜻으로 번역하도록 권한다.3 개역개정은 일반적인 뜻인 “사람들”을 택한다. 이 낮은 백성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그들의 “구속자”라고 밝히신다. UBS 핸드북은 이사야에서 하나님께 이 칭호를 쓰는 첫 구절이 여기라고 설명한다. 구속자는 어려움에 빠진 친족을 돕고 보호할 법적 책임을 진 사람이다. 보아스가 친족의 기업 무를 권리와 책임을 떠맡는 룻기 4:1-12가 그 예다. 값 주고 되찾는다는 낱말의 일반적인 뜻보다 이 문맥에서는 친족의 도움과 보호가 강조된다.3 그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קְדוֹשׁ יִשְׂרָאֵל, 케도쉬 이스라엘), 곧 1:4에서 이스라엘이 만홀히 여긴 바로 그분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버러지 같은 야곱의 친족처럼 나서신다.
15절에서 버러지는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가 된다. 타작기는 바닥에 날카로운 돌이나 쇠붙이를 박은 널판으로 짐승이 곡식 단 위로 끌어 낟알을 떨어 내는 농기구다. 그 기구로 산들을 부수고 작은 산들을 겨로 만든다는 그림은 약한 백성이 하나님의 손에서 큰 장애를 부수는 도구가 됨을 나타낸다. ‘작은 산’은 40:4, 12에서 “언덕”으로 옮긴 낱말이다. 40장에서 하나님이 낮추시고 저울에 다시던 산들이 이스라엘 앞을 가로막은 장애가 된다. UBS 핸드북은 산과 언덕을 대적으로 보는 해석과 현재의 어려움으로 보는 해석을 소개하며 앞의 견해를 선호한다.5
16절에서는 타작한 곡식을 공중에 던져 겨를 날리는 키질이 이어진다. “회오리바람이”(וּסְעָרָה, 우세아라)는 40:24에서 권력자들을 초개처럼 날려 보내던 바람과 같다. 권력자와 열국과 산들이 모두 겨와 초개처럼 흩어진다. 이어 “그러나 너”라고 이스라엘을 부르며 14-15절의 여성형에서 남성형으로 돌아온다. 이스라엘이 즐거워하고 자랑할 대상은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다. 산을 부순 공로는 하나님께 돌아간다.
17절의 “가련하고 가난한 자”(הָעֲנִיִּים וְהָאֶבְיוֹנִים, 하아니임 베하에브요님)는 고난과 억눌림 아래 있으며 생계가 궁핍한 사람들이다. 물을 구해도 얻지 못해 혀가 마르는 그들에게 여호와는 “응답하겠고”(אֶעֱנֵם, 에에넴)라고 약속하신다. 응답을 뜻하는 말과 앞의 ‘가련한 자들’은 소리가 비슷하다. 이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신다. 9절에서 과거의 택하심을 확인하신 하나님이 앞으로 목마를 때도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44:3의 “목마른 자”도 이 절의 “갈증”과 어근이 같다.
18절에서 하나님은 헐벗은 산에 강을 열고 골짜기에 샘을 내며 광야를 못으로,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바꾸신다. 높은 곳과 낮은 곳, 광야와 마른 땅에 물이 흐른다. 43:19-20도 택하신 백성에게 마시게 하려고 광야에 길과 강을 내시겠다고 약속한다. 19절에서는 백향목, 싯딤 나무, 화석류, 들감람나무, 잣나무, 소나무, 황양목을 광야와 사막에 두신다. 나무 이름 가운데 몇은 정확한 수종을 정하기 어려워 번역이 다르지만, 산지의 백향목과 건조한 땅의 싯딤 나무를 포함한 일곱 나무가 같은 숲을 이룬다. 절 끝의 “함께”는 1절에서 “서로”로 옮긴 낱말이다.
20절에서 사람들은 이 변화를 “보고 … 알며 … 헤아리며 깨달으리라”고 한다. ‘헤아리다’는 본래 ‘두다’라는 뜻으로 22절의 “마음에 두고”처럼 ‘마음’이 생략된 표현이다. 네 동사 뒤에는 “함께”가 붙는다. 40:5에서 모든 육체가 함께 보리라고 했듯이, 여기서도 무리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깨닫는다. 5절에서 보고 두려워한 섬들은 우상을 만들었지만, 이들은 여호와의 손이 광야를 지으셨으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창조하셨음을 안다. “창조하신 바”(בְּרָאָהּ, 베라아흐)는 40:28에서 땅 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을 부른 동사와 같다. 우상을 고정하는 장인의 손과 광야를 새롭게 짓는 하나님의 손이 다시 대조된다.
성경신학적 통찰
이사야 41:1-20은 바벨론 포로기의 백성에게 주어진 위로의 말씀이다. 구약은 처음부터 열방을 다스리시는 창조주와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신 언약의 하나님을 같은 분으로 증언한다. 그래서 이사야 41장은 고레스의 정복이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말하다가 곧바로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라는 부름으로 넘어간다.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과 작은 백성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은 같은 손이다.
1절과 21절의 재판 장면은 예언서에 자주 나오는 소송의 틀을 따르는데, 여기서는 그 쓰임이 뒤집힌다. 호세아 4:1에서 여호와는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신다고 하시고, 미가 6:1-2에서는 산들과 땅의 기초 앞에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신다. 이사야 1:18에서도 하나님은 죄로 붉게 물든 이스라엘을 향해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부르셨다. 이 본문들에서 피고는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이다. 이사야 41장에서는 하나님이 열방과 그 신들을 피고석에 부르시고, 이스라엘은 그 재판에서 보호받는 쪽에 선다. 11절의 “너와 다투는 자들”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자들이지만, 그 소송은 패소로 끝난다. 이 재판이 40:2에서 예루살렘의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된 뒤에 열린다는 순서가 중요하다.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소송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편에 서서 열방의 우상들과 다투신다.
창세기 12:1-3에서 여호와는 아브람을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에서 불러내시고, 큰 민족과 복을 약속하시며,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고 하신다. 이사야 41:8-9는 이 부르심을 포로기의 이스라엘에게 다시 들려준다. 하나님은 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르시고 “땅 끝에서부터” 붙들어 부르셨다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와 하란이라는 먼 곳에서 불려 나왔듯이, 이스라엘의 존재도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시작되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도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다. 창세기 15:1에서 하나님은 자식 없이 늙어 가는 아브람에게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자신이 그의 방패요 상급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이삭(창 26:24)과 야곱에게 이어졌다. 특히 창세기 46:3-4에서 하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야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와 함께 내려가고 반드시 그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고 약속하셨다. 고향을 떠나 이방 땅으로 내려가던 조상 야곱에게 주신 그 약속이, 바벨론에 끌려가 있는 “야곱”에게 이사야 41장에서 다시 주어진다.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은 그 자손이 땅을 잃은 자리에서도 효력을 잃지 않는다.
역대하 20:6-7에서 여호사밧은 모압과 암몬 자손이 쳐들어온 위기 앞에서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기도하며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한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여 백성에게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하시며, 이 전쟁이 그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0:15-17). 그날 유다는 칼을 들지 않았고, 대적들은 서로를 쳐서 무너졌다(20:22-23). 이사야 41:11-12에서도 이스라엘이 싸우는 장면은 없고, 대적들이 찾아도 만나지 못할 만큼 사라질 뿐이다. 열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함께 붙드는 여호사밧의 기도가 이사야 41장에서는 하나님 편에서 주시는 응답으로 나온다. 1-7절은 열방이 하나님의 손 아래 있음을 법정 장면으로 보여 주고, 8-13절은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사랑하여 붙드신다고 말한다.
신명기 7:6-8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를 수효에서 찾지 않는다.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려고 애굽에서 속량하셨다. 이사야 41:14의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는 이 작음을 더 날카롭게 그리고, 하나님은 그 작은 백성의 구속자가 되신다. 선택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랑과 맹세에 근거했고, 포로기에도 그 근거는 바뀌지 않았다. 신명기 4장은 우상 문제와 포로를 한데 내다본다. 호렙에서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고 음성만 들은 백성은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아야 했다(4:15-18). 모세는 그들이 이 경고를 어기면 흩어진 땅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목석의 신들을 섬기게 되리라고 경고하면서도(4:27-28), 거기서 하나님을 찾으면 만날 것이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고 약속한다(4:29-31). 이사야 41장은 그 두 말씀이 맞닿는 자리에 서 있다. 열방의 장인들은 목석의 우상을 못으로 고정하고, 하나님은 흩어진 백성을 향해 “버리지 아니하였다”(9절),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17절)고 말씀하신다.
우상을 조롱하는 이사야의 언어는 구약의 다른 예언과 시에서도 메아리친다. 예레미야 10:3-5는 숲에서 벤 나무를 장인이 다듬고 은과 금으로 꾸민 뒤 못과 장도리로 고정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우상을 그리며, 그것이 말하지도 걷지도 못하여 사람이 메고 다녀야 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시편 115:4-8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이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 말한 뒤, 그것을 만드는 자들과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아지리라고 경고한다. 이사야 41:7의 못 박힌 우상은 이 전통 안에 있다. 우상을 붙드는 사람은 결국 우상처럼 말하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간다. 반면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보고 알고 헤아리고 깨닫는 존재가 된다(41:20).
출애굽기 3:7-12에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받는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내려와 그들을 건져 내겠다고 하시며, 자신이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겠느냐고 주저하는 모세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다. 신명기 31:6-8에서 모세는 백성과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거듭 말하며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라고 약속한다. 여호수아 1:9에서도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고 하시며, 그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하겠다고 하신다. 이사야 41:10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는 출애굽과 정복 시대의 이 격려를 그대로 잇는다. 다른 점은 듣는 이의 처지다.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의 백성은 약속의 땅 앞에 섰고, 이사야의 백성은 그 땅을 잃은 뒤에 같은 말씀을 듣는다. 땅을 얻을 때 주신 약속이 땅을 잃었을 때에도 철회되지 않았다.
41:14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네 구속자”라 부르신 일은 이스라엘의 가족법과 출애굽 전통을 함께 불러온다. 레위기 25:25, 47-49에 따르면 가난하여 땅을 팔았거나 종으로 팔린 사람이 있으면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무르거나 그 사람을 속량할 책임을 졌다. 룻기 4장에서 보아스는 그 책임을 공적으로 떠맡아 나오미 집안의 이름을 이어 간다. 출애굽기는 이 가족의 언어를 하나님께 적용한다. 6:6에서 하나님은 편 팔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속량하겠다고 하시고, 15:13의 바다 노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구속하신 백성으로 부른다. 이사야 41:14는 출애굽의 그 구속자를 포로기의 백성 앞에 다시 세운다. 43:1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시고, 44:6에서 개역개정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옮긴 칭호도 41:14의 “구속자”와 같은 낱말이다. 거룩하신 이가 친족의 자리에 서신다는 이 고백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백성을 위해 나서시는 근거가 된다.
출애굽기 17:1-7에서 르비딤에 이른 백성은 마실 물이 없자 모세와 다투고 여호와를 시험했다. 그래도 하나님은 호렙의 반석에서 물을 내셨다. 이사야 41:17-18은 광야의 목마름과 물이라는 같은 장면을 새 출애굽의 약속으로 다시 쓴다. 이번에는 다툼 대신 “가련하고 가난한 자”의 갈증이 앞에 나오고, 하나님은 반석 하나에서 그치지 않고 헐벗은 산과 골짜기와 광야 전체를 물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신다. 이사야 35:6-7도 광야에 물이 솟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며 메마른 땅이 원천이 되리라고 했다. 43:19-20은 이 일을 “새 일”이라 부르며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어 택하신 백성에게 마시게 하겠다고 한다. 44:3은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로 시작하여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부어 주겠다고 이어 가면서 물과 하나님의 영을 함께 묶는다. 첫 출애굽에서 광야의 물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여 주었듯이, 포로에서 돌아오는 새 출애굽에서도 광야의 물은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 길을 가신다는 표징이 된다.
하나님이 이방 왕을 자기 일에 쓰신다는 증언도 이사야 41장에만 있지 않다. 예레미야 25:9에서 하나님은 유다를 치러 오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내 종”이라 부르신다. 역대하 36:22-23과 에스라 1:1-4는 여호와께서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는 조서를 내리게 하셨다고 기록한다. 심판의 도구도, 귀환의 도구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방 정복자와 이스라엘을 같은 자리에 두지 않는다. 45:4에서 하나님은 고레스에게 “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고 하신다. 고레스가 부름을 받은 목적은 종 야곱을 위한 것이었다. 41장에서 고레스는 이름 없이 “동방에서” 일깨워진 도구로 등장하지만, 이스라엘은 “나의 종”, “내가 택한”,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언약의 호칭으로 불린다.
41:8에서 시작된 종의 주제는 이사야 40-55장을 따라 깊어진다. 42:1은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이 이방에 정의를 베풀 것이라고 하지만, 42:19는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고 묻는다. 종으로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그 부르심을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이 드러난다. 49:3-6에서는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종이 야곱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이방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한다. 41장에서 땅 끝에서 불려 온 종은 결국 땅 끝까지 구원을 전하는 종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붙드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연약함을 넘어 이 종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기독론적 해석
이사야 41:1-20의 일차적인 뜻은 바벨론 포로기의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이다. 하나님은 고레스를 일으켜 바벨론을 무너뜨리시고, 붙드시는 종 이스라엘을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역대하 36장과 에스라 1장은 이 약속이 고레스의 조서로 실제 역사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돌아온 공동체의 형편은 이사야가 그린 광야의 강과 숲에 미치지 못했다. 느헤미야 9:36-37에서 백성은 조상들에게 주신 땅에서 자신들이 여전히 이방 왕들의 종이 되어 그 소산을 바치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사야 42:18-25도 종 이스라엘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고 책망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했으나, 그 약속을 받은 종은 자기 힘으로 부르심을 다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본문은 종에 대한 약속이 더 온전히 이루어질 날을 바라보게 한다.
신약은 이 종의 약속을 예수께 적용한다. 마태복음 12:15-21은 예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자신을 알리지 말라고 경고하신 일을 이사야 42:1-4의 성취로 인용한다. 41:10에서 하나님이 붙드시겠다고 하신 종, 42:1에서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이라 하신 그 종이 예수 안에서 나타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16에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하신 약속이 여럿을 가리키지 않고 한 사람, 곧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이사야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른 이스라엘의 소명은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모인다. 이스라엘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자리에서,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보고 듣고 순종하시는 종으로 서신다.
누가복음 1:46-55에서 마리아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노래하며 이렇게 맺는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54-55절). 하나님이 종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신다는 마리아의 고백은 이사야 41:8-14가 붙든 약속과 같은 자리에 서 있다. 마리아는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52-53절). 이사야가 버러지 같은 야곱과 목마른 가난한 자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마리아는 예수의 잉태에서 시작된 일로 노래한다.
14절의 버러지 이미지는 시편 22편과 이어진다. 시편 22:6에서 고난받는 의인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라고 탄식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 시편의 첫 절로 부르짖으셨고(마 27:46), 십자가 아래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그를 조롱한 장면(마 27:39-43)은 시편 22:7-8을 떠올리게 한다. 신약은 예수께서 시편 22편의 고난받는 자의 자리에 서셨다고 증언하고, 그 시편에서 ‘벌레’로 옮긴 말은 버러지 같은 야곱을 부를 때와 같은 낱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낮고 보잘것없는 자의 자리까지 내려오셨다. 빌립보서 2:7-8은 그분이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한다. 버러지 같은 야곱을 붙드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버러지의 자리에 친히 서셨고, 그 자리에서 낮은 자들을 붙들어 일으키신다.
14절의 “구속자”는 가까운 친족이 어려움에 빠진 가족을 위해 나서는 법적 책임에서 나온 말이다. 히브리서 2:11-15는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났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또 자녀들이 혈과 육에 속하였으므로 그도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지니셨고, 그 목적은 죽음을 통해 마귀를 멸하시고 죽기를 무서워하여 한평생 종노릇 하던 이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고 밝힌다. 이어 2:16은 그분이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시지 않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신다고 말한다. 구속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실제로 백성의 친족이 되셨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약속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하시는 일로 깊어진다. 이사야 41장의 구속자는 값을 치르는 일보다 친족으로서 돕고 보호하는 일에 초점이 있다. 신약은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다는 사실을 더한다(막 10:45). 디도서 2:13-14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 주어 사람들을 모든 불법에서 속량하고 깨끗하게 하시며,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다고 말한다. 약한 백성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시는 사랑과 그분께 속한 백성의 새 삶으로 이어진다.
10절의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는 마태복음의 처음과 끝에서 다시 울린다. 마태복음 1:23은 예수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임마누엘로 소개하고, 28:20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붙드신다는 약속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어진다. 요한복음 10:28-29에서 예수는 아무도 자기 양들을 자기 손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하신다. 요한계시록 1:17-18에서 영광중에 나타나신 예수는 죽은 자 같이 엎드린 요한에게 오른손을 얹고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하시며,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나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고 밝히신다. 이사야 41:4의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41:10과 13절의 “두려워하지 말라”, 오른손으로 붙드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이 한 장면에 모인다. 역사의 처음과 끝을 쥐신 하나님의 권위가 죽고 살아나신 주님의 자기 선언에 나타난다.
10절의 “나의 의로운 오른손”에서 하나님의 의는 백성을 붙들어 구원하시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바울은 로마서 3:21-26에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하며, 그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친다고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세우셔서 자신이 의로우신 분이심을 나타내시고,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 이사야 41장에서 정복자를 부르시고 종을 붙드시던 그 의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인을 붙드시는 의로 드러난다.
요한복음 7:37-39에서 예수는 명절 끝날에 서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신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하시며, 요한은 이것이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이사야가 약속한 광야의 물(41:17-18)과, 물과 영을 함께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44:3)은 예수의 이 초대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목마른 가난한 자에게 응답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친히 자기에게 와서 마시라고 부르신다. 요한계시록 21:6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는 자신이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밝히시며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고 하신다. 광야에 강을 여시겠다는 이사야의 약속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된다.
바울은 로마서 11:1-2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고 묻고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답한다. 자신도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라고 밝히며,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이사야 41:9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않으셨다고 하셨다. 바울도 이스라엘이 택하심을 따라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이며,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말한다(11:28-29). 동시에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들이며, 그 가지들을 향해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11:17-18). 갈라디아서 3:29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드신 하나님의 신실함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에게까지 넓어지되, 처음 택하신 백성을 향한 약속도 거두어지지 않는다.
15-16절에서 버러지 같은 이스라엘은 산들을 부수는 타작기가 된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는 십자가에서 드러난다. 골로새서 2:15는 그리스도께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고 말한다. 로마서 16:20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사탄을 성도들의 발 아래에서 속히 상하게 하시리라고 약속한다. 약한 공동체가 거대한 장애를 넘어서는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하고,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고린도전서 1:27-31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 목적이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씀으로 맺는다. 41:16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모양으로 이루어진다.
2절의 동방의 정복자와 그리스도 사이에도 대조가 드러난다. 이사야 45:1은 고레스를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부른다. 고레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쓰임을 받았고(45:4), 그의 칼은 열국을 티끌처럼 흩었으며, 그가 가져온 해방은 유다의 주인이 바벨론에서 바사로 바뀌는 정치적 귀환이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이,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알고 끝까지 순종하셨고, 열국을 칼로 정복하지 않고 자기 몸을 내어 주어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신다. 고레스를 부르신 하나님의 주권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역사를 새롭게 하는 더 깊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현대적 적용
6-7절에서 서로 “힘을 내라”고 격려하는 사람들은 우상을 못으로 단단히 박고 있다. 격려가 향하는 대상이 문제다. 두려움 때문에 재산이나 권력을 자기 생명의 보증으로 삼으면 사람은 자신이 붙들어 두어야만 서 있는 우상에 매달린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분은 그들이 세운 신이 아니라 그들을 택하고 붙드시는 하나님이다.
8-10절에서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을 “나의 종”, “내가 택한”,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르신다. 땅을 잃고 포로가 된 처지도 그 부르심을 취소하지 못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은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는 약속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두려워한다는 이유로 믿음이 없다고 몰아세우면, 연약한 백성을 굳세게 하시겠다는 위로를 거꾸로 사용하게 된다. 성도는 두려움과 낙심을 하나님께 아뢰며 그분의 붙드심을 의지할 수 있다.
14절에서 하나님은 버러지 같은 야곱의 구속자가 되신다. 연약함과 작음은 그분의 도움에서 제외되는 이유가 아니다. 바울도 주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는 말씀에 따라 자기 약함을 자랑했다(고후 12:9-10). 히브리서 13:5-6은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 알라고 권하며,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도우신다는 약속을 그 근거로 삼는다. 붙드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규모나 재산으로 자기 가치를 입증하려는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
15-16절의 타작기는 하나님이 약한 백성으로 큰 장애를 무너뜨리시는 그림이다. 이 약속을 상대를 짓밟으라는 명령으로 사용할 수 없다. 11-12절에서 대적을 사라지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며, 16절에서 이스라엘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자랑한다. 로마서 12:17-21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권한다. 승리를 바라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에는 보복을 내려놓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는 태도가 따른다.
동방의 정복자도 하나님의 부르심 아래 있다(2-4절). 어떤 정치 지도자가 역사를 구원하리라는 기대와 세상이 하나님의 손을 벗어났다는 절망은 모두 여호와께서 처음과 나중을 다스리신다는 말씀 앞에서 수정되어야 한다. 고레스는 종 이스라엘을 위해 쓰임받는 도구다. 디모데전서 2:1-2가 권하듯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되 궁극적인 소망은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께 둔다.
17-20절의 가난한 이들은 물이 없어 혀가 마르는 사람들이다. 생수의 약속을 영적 위로로 읽을 때에도 이 실제 궁핍을 지울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을 외면하면서 그들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본문의 위로와 어긋난다. 그들의 필요를 돌보는 섬김도 교회의 힘을 자랑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광야의 회복을 보고 사람들이 알아야 할 분은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