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시온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62:10-12의 선포 뒤에, 성벽의 파수꾼이 부르는 듯한 질문이 들린다.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63:1).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이 세운 이웃 나라이고 보스라는 그 성읍이다. NET는 여기서 에돔을 여호와를 대적하는 세력의 전형으로 본다.1 “에돔에서”(מֵאֱדוֹם, 메에돔)와 2절의 “붉으며”(אָדֹם, 아돔)는 같은 어근 자음과 비슷한 소리로 이어진다. 옷을 붉게 물들인 것이 무엇인지는 3절에서 밝혀진다.

다가오는 이는 화려한 옷을 입고 큰 능력으로 나아온다. “걷는”으로 옮긴 צֹעֶה(초에)는 본래 “몸을 굽히다”라는 뜻이어서, NET는 마지막 자음 하나를 고쳐 “행진하다”로 읽는다.1 그는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라고 자신을 밝힌다. 이사야 후반부에서 공의와 구원은 약속대로 백성을 건지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행동을 가리키며 자주 짝을 이룬다(46:13; 51:5). 이 용사는 자신의 진노와 원수 갚는 날과 구속할 해를 말씀하시는 여호와이시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처럼 붉은 이유를 묻자(2절), 여호와는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라고 답하신다. 민족들 가운데 함께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선혈”(נִצְחָם, 니츠함)은 본래 “그들의 즙”이라는 뜻으로 포도즙틀 비유를 이어 가지만, 실제로 옷을 물들인 것은 짓밟힌 자들의 피다. NET는 에돔을 앞세운 민족들을 진노의 대상으로 보고, 이 장면을 전쟁의 살육에 관한 비유로 풀이한다.1

3절의 “더럽혔음이니”(אֶגְאָלְתִּי, 에그알티)는 다음 절의 “구속”과 뜻은 다르지만 어근 자음이 같아 소리가 서로 울린다. 여호와는 “원수 갚는 날”과 “내가 구속할 해”가 왔다고 말씀하신다(4절). 하나님의 보복은 시온의 송사를 바로잡는 신원이다(34:8). “구속할 해”의 גְּאוּלַי(게울라이)는 복수 추상명사 “나의 구속”으로 보거나 수동분사 복수형 “내가 구속한 이들”로 읽을 수 있으며, 개역개정은 앞의 뜻을 따른다.4 구속자는 친족의 땅을 되찾고 억울하게 흘린 피를 갚는 가까운 친척이었다(민 35:19-27; 신 19:6-12). NET는 원수 갚는 날과 짝을 이루는 이 문맥에서 피를 갚는 친족의 역할을 강조한다.1 여호와는 백성을 되찾으시면서 그들을 짓밟은 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신다.

5절에서 여호와는 돕거나 붙들어 줄 자가 없어 놀라셨고, 자신의 팔로 구원하시며 자신의 분노를 의지하셨다고 말씀하신다. NET는 중재자가 없어 자기 팔로 구원하신 59:16과 연결한다. 6절의 “취하게 하고”는 진노의 잔을 마시게 하는 그림으로, 시온을 억압한 자들이 자기 피에 취하고 예루살렘의 분노의 잔을 넘겨받는 49:26과 51:22-23에 이어진다.1 3절에서 옷에 튄 “선혈”이 6절에서는 땅에 쏟아진다. BHS는 6절 끝에 닫힌 단락 표시인 세투마를 두어 심판 장면을 닫는다.

7절부터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표하는 화자가 여호와의 옛 은혜를 회고한다. UBS 해설은 이 “나”를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예언자로 보고, 여기서 공동체의 탄식이 시작된다고 설명한다. “말하며”(אַזְכִּיר, 아즈키르)는 “기억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여호와의 자비들”(חַסְדֵי, 하스데)로 시작한 절은 “그의 많은 자비”(חֲסָדָיו, 하사다브)로 끝나고, 그 사이에 “우리에게 베푸신”,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이라는 말이 교차하여 언약의 신실한 사랑과 행적이 절 전체를 감싼다. “그의 사랑을 따라”는 그분의 긍휼을 뜻하며, 큰 은총은 백성의 공로가 아닌 그 긍휼과 자비에서 나온다.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부르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셨다(8절). 여기서 “거짓을 행하다”는 언약의 신의를 저버림을 가리킨다.1 자녀들이 신의를 지키리라는 하나님의 기대와 뒤의 반역이 맞선다. 에돔에서 오시는 구원의 용사는 옛적에 이스라엘을 건지신 구원자시다. 공동체는 그 은혜를 근거로 현재의 고통을 아뢴다.

9절의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에는 본문 판독의 차이가 있다. BHS 본문에 적힌 לֹא(로)는 “아니다”라는 부정어지만, 마소라 난외의 케레는 소리가 같은 לוֹ(로), 곧 “그에게”다. NET는 케레를 따라 “그들의 모든 환난에 그에게도 환난이 있었다”로 옮기며, 개역개정의 “동참하사”도 이 뜻을 따른다. “자기 앞의 사자”(וּמַלְאַךְ פָּנָיו, 우말아크 파나브)는 “그의 얼굴의 사자”로, NET는 출애굽기 14:19의 사자와 33:14-15의 하나님의 얼굴에 연결하고 10-11절의 성령, 14절의 여호와의 영과 같은 분을 가리킬 수 있다고 본다.1

9절에서 개역개정이 두 번 “구원하다”로 옮긴 동사는 서로 다르다. 뒤의 “그들을 구원하시고”는 “그가 친히 그들을 구속하셨다”(הוּא גְאָלָם, 후 게알람)로, 4절의 “구속할 해”와 같은 어근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로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백성을 드시고 안으셨다. 이 동작은 먼 광야 길에서 백성을 들어 올려 짊어지고 가시는 모습이다.

그러나 백성은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했다(10절). “근심하게 하다”는 상처를 주어 마음 아프게 한다는 말이다. “그의 거룩한 영”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이 장 10-11절과 시편 51:11(BHS 51:13)에만 나온다.1 백성을 친히 구속하신 하나님이 이제 그들의 대적이 되어 친히 싸우셨다.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용사의 팔이 반역한 자기 백성도 향한다. 공동체는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자신들이 받은 심판도 고백한다.

11절의 “기억하다”(וַיִּזְכֹּר, 바이즈코르)는 3인칭 단수 “그가 기억하였다”로 시작하지만, 뒤의 “옛적 날들”, “모세”, “그의 백성”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읽기가 달라진다. 개역개정과 NET는 백성을 주어로 옮긴다.1 백성은 모세 시대를 기억하며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 그들 가운데 성령을 두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두 번 묻는다. 개역개정의 “이제”는 히브리어에 따로 없지만 현재의 탄식을 살린다. “양 떼의 목자”는 히브리어에서 복수형으로, 모세와 아론처럼 백성을 이끈 지도자들을 가리킬 수 있다. 시편 77:20(BHS 77:21)도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양 떼처럼 인도하신 하나님을 노래한다.

12-13절은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시고 물을 가르시며 깊음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행동으로 11절의 물음을 이어 간다. 개역개정은 13절 끝에 “이제 어디 계시냐”를 보충해 이 연결을 살렸다. 바다를 가른 힘은 모세를 이끈 하나님의 영광의 팔에서 나왔고, 백성은 깊은 바다를 들판의 말처럼 넘어지지 않고 건넜다. 그 구원으로 하나님은 영원한 이름을 얻으셨다.

14절에서 여호와의 영은 가축이 골짜기의 풀밭으로 내려가듯 백성을 쉬게 하신다. 이는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는 출애굽기 33:14의 약속을 떠올리게 한다. 회고는 “주께서 이와 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라는 직접 고백으로 바뀌며, 12절의 “영원한 이름”과 14절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출애굽 회고를 감싼다. 이 고백에서 15절 이후 아버지와 구속자를 부르는 간구가 시작되어 64장 끝까지 이어진다. 개역개정 64:1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는 BHS 63:19 후반부이며, 개역개정 64:2-12는 BHS 64:1-11에 해당한다.

성경신학적 통찰

이사야 63:1-14는 60-62장이 그리는 시온의 회복과, 그 회복을 아직 보지 못한 공동체의 탄식이 만나는 자리에 있다. 62장은 시온이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불릴 날을 약속하며 끝나고(62:12), 63:1-6은 그 구속을 가로막던 원수들을 여호와께서 홀로 심판하신 장면을 보여 준다. 이어지는 63:7-64:12는 옛 은혜와 반역을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다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기를 구하는 기도다. 원수가 성소를 유린했고(63:18) 거룩한 성읍들은 광야가 되었다(개역개정 64:10, BHS 64:9). 공동체는 약속과 현실 사이의 긴장을 덮지 않고,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호소한다.

59:15-21은 63:1-6을 미리 보여 준다.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신 여호와는 자기 팔로 구원을 베푸시고(59:16), 공의를 갑옷으로, 보복을 속옷으로, 열심을 겉옷으로 입으신다(59:17). 그 전투의 옷이 63장에서 피로 물든 의복으로 나타나고, 63:5는 59:16의 표현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한다. 59:20은 구속자가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고 말한다. 구속은 혈통만으로 정해지지 않으며, 63:10에서도 하나님은 반역한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셨다. 59:21은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대대로 떠나지 않을 언약을 약속한다. 63:11의 백성은 옛적 그들 가운데 두신 거룩한 영을 기억하고, 59:21은 그 영이 다시는 떠나지 않을 미래를 바라본다.

34:5-8은 이미 에돔과 보스라를 심판의 자리로 그리며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라”(34:8)고 말한다. 날과 해를 짝지은 이 표현은 61:2의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 63:4의 “원수 갚는 날”과 “구속할 해”로 이어진다. 세 본문 모두에서 하나님의 보복은 짓밟힌 시온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일과 묶여 있다. 62:11의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는 40:10을 되풀이한다. 위로의 소식과 함께 오시던 여호와가 63장에서는 에돔에서 오시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63장의 4절 ‘구속할 해’, 9절 ‘그들을 구원하시고’, 16절 ‘우리의 구속자’는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 이사야 후반부는 여호와를 자주 이스라엘의 구속자로 부른다(54:8; 60:16). 레위기 25장과 룻기에서 구속자는 가난해진 친족의 기업과 삶을 되찾아 주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하나님께서 이 칭호를 취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자기 가족으로 여기신다는 뜻이다. 54:8이 잠시의 진노와 영원한 자비를 대조하듯, 63장도 하나님께서 반역한 백성의 대적이 되신 일(63:10)을 숨기지 않으면서 그분을 ‘우리의 구속자’로 부른다(63:16). 하나님의 진노가 구속자와 백성의 관계를 끝내지 못한다는 믿음이 이 기도를 지탱한다.

51:9-10에서 백성은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라고 부르짖으며, 바다를 말리고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분을 기억한다. 출애굽 때 바다를 가르신 팔이 지금 다시 일어나기를 구하는 63:11-13의 기도와 닮았다. 만민을 심판하는 그 팔은 섬들이 의지할 피난처도 된다(51:5). 51:17에서 예루살렘이 마신 분노의 잔을 하나님은 51:22-23에서 거두어 압제자들의 손에 두신다. 49:26은 압제자들이 자기 피에 취하고, 그 결과 모든 육체가 여호와를 구원자와 구속자로 알리라고 말한다. 63:6에서 민족들을 ‘취하게’ 하신 일은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63:9-14의 회고는 출애굽기를 따라간다.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는 뒤로 옮겨 가 백성을 지켰고, 백성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었다(출 14:19, 22). 하나님은 독수리 날개로 백성을 업어 인도하셨다고 상기시키시며(19:4) 그들을 ‘내 소유’로 부르셨다(19:5-6). 63:9의 “드시며 안으셨으나”와 63:8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가 이 기억과 부름을 담는다. 금송아지 사건 뒤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던 하나님은 모세의 간구에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33:14). 63:14의 “편히 쉬게 하셨도다”는 그 약속을 고백한다. 반역 이후에도 함께 가기로 하신 하나님이 계셨기에, 63:10에서 반역을 고백한 공동체가 다시 호소할 수 있다.

신명기 32장에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야곱을 호위하시고 독수리가 새끼를 업듯 인도하셨지만(32:10-12), 그 백성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렸고 노래는 그들을 진실하지 못한 자녀라 탄식한다(32:15-20). 63:8의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에 대한 기대가 이 탄식과 맞물린다. 시편 78:40도 광야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슬프시게 한 일을 묻는다. 63:10의 ‘반역하여’와 ‘근심하게 하였으므로’는 이 오래된 고백의 언어를 잇는다. 7절이 자비로 시작하고 자비로 끝나므로, 뒤따르는 반역의 기억은 하나님의 헤세드에 둘러싸여 고백된다. 그래서 공동체는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개역개정 64:9, BHS 64:8)라고 아뢸 수 있다.

이사야는 출애굽을 지나간 추억으로 두지 않는다. 43:16-19에서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신 하나님은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라고 하신다. 43장은 옛 일을 넘어서는 새 일을 바라보게 하고, 63장은 옛 일을 근거로 새 일을 구한다. 40:11에서 양 떼를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는 목자, 52:12에서 백성의 앞에서 행하고 뒤에서 호위하시는 하나님은 63:11-14가 기억하는 출애굽의 하나님과 같다. 공동체가 출애굽을 기억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다시 행하시기를 구하기 때문이다.

63:10-11은 반역 때문에 근심하시는 ‘그의 거룩한 영’을, 63:14는 백성을 쉬게 하신 ‘여호와의 영’을 말한다. 이사야는 앞에서 하나님의 영이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왕 위에 머물고(11:2), 택하신 종과 기름 부음 받은 이에게 임하며(42:1; 61:1), 자손에게 부어지리라고 약속했다(44:3). 출애굽 때 백성 가운데 계셨고 반역으로 근심하신 그 영이 장차 다시 부어져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59:21). 백성은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기를 구하며 기도를 맺고, 신약은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증언한다.

기독론적 해석

원수가 성소를 유린하고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된 시대에(63:18; 개역개정 64:10-11, BHS 64:9-10) 이 본문은 두 가지를 말한다. 시온을 괴롭힌 세력을 하나님이 그냥 두지 않으신다는 약속과, 출애굽의 은혜와 자신들의 반역을 기억하며 “이제 어디 계시냐”고 묻는 기도다. 민족들 가운데 여호와와 함께할 사람은 없었고(63:3, 5), 구원받은 백성 자신이 반역하여 구원자를 대적으로 만들었다(63:10). 원수를 심판하는 것만으로는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반역한 백성도 심판 아래 놓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백성의 죄를 다루면서도 백성을 버리지 않는 구원을 기다리게 하고, 신약은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구원을 증언한다.

요한계시록 19:11-16은 63:1-6의 장면을 그리스도께 돌린다. 백마를 탄 이는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고,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린다(19:13).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고, 옷과 다리에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이름이 있다(19:15-16). 이사야에서 돕는 자 없이 홀로 포도즙틀을 밟으신 여호와의 자리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둔다. 그 옷은 전투가 묘사되기 전부터 피에 젖어 있고 그의 무기는 입에서 나오는 검이다(19:15, 21). 14:19-20도 땅의 포도를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져 “성 밖에서” 밟는 장면으로 같은 심상을 잇는다. 마지막 심판의 권한은 그리스도께 있으며, 그 심판은 공의와 진실을 따라 행해진다.

이사야 63:3, 6의 피는 여호와께 짓밟힌 민족들의 피다. 요한계시록 19:13의 피 뿌린 옷도 심판하러 오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에 속하며, 본문은 그 피가 누구의 피인지 밝히지 않는다. 진노의 잔은 이사야의 심판과 예수의 고난을 잇는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마시던 분노의 잔을 압제자들에게 넘기셨지만(51:17-23; 63:6), 겟세마네에서 예수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그 잔을 받으셨다(막 14:36). 마지막 날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실 분이 먼저 진노의 잔을 스스로 마시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은 그 심판의 날을 두려움만으로 기다리지 않는다.

59:16과 63:5에서 하나님은 중재자도, 붙들어 줄 자도 찾지 못하셨다. 신약은 그 빈자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채우셨다고 증언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한 분이다(딤전 2:5). 그분의 길도 홀로 가는 길이어서, 체포되시던 밤 제자들은 다 그를 버리고 도망했다(막 14:50).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는 53:1의 물음을 요한복음 12:38은 예수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적용한다. 홀로 구원하시고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신 그 팔이(63:5, 12) 고난받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다.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장을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 응하였다고 선언하셨다. 누가가 기록한 인용은 61:1-2 전반부에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58:6의 구절을 결합한 것이다.3 낭독은 ‘주의 은혜의 해’에서 끝나고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은 그 자리에서 선포되지 않았다. 34:8, 61:2, 63:4가 짝지은 보복의 날과 구속의 해 가운데, 예수의 첫 오심은 은혜의 해를 여는 일이었다. 보복의 날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요한계시록 19장은 그 날을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둔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며 은혜를 선포하시는 때이므로, 교회는 심판의 칼을 들지 않고 은혜의 해를 전하며 심판을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 맡긴다.

63:9은 하나님이 백성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셨다고 고백한다. 애굽에서 하나님은 백성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들으며 그 근심을 아셨다(출 3:7). 하나님의 아들은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시고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며,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실 수 있다(히 2:14-18). 광야에서 얼굴의 사자와 거룩한 영으로 백성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 예수라는 이름은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을 알린다(마 1:21). 63:8의 구원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백성을 원수의 손에서뿐 아니라 그들 자신의 죄에서 구원하신다. 63:10이 드러낸 반역의 문제가 여기서 다루어진다.

바울은 조상들이 바다 가운데로 지나고 광야에서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다고 말하며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덧붙인다(고전 10:1-4).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대부분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그 일은 말세를 만난 교회를 깨우치려고 기록되었다(10:5, 11). 이사야 63장처럼 바울도 출애굽의 은혜와 반역을 한 이야기로 읽는다.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출 33:14)고 약속하시고 영으로 백성을 쉬게 하신 하나님은(63:14), 그리스도 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직접 쉼을 주신다(마 11:28).

백성은 양 떼의 목자들을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다(63:11). 그 목자들은 연약했고 모세조차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신 34:4). 예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이시다(요 10:11). 히브리서 13:20은 영원한 언약의 피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을 말한다. 목자들을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하나님이 큰 목자를 죽음에서 이끌어 내셨으므로, 홍해의 기억은 부활의 소망으로 이어진다.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63:10)는 에베소서 4:30에서 교회를 향한 경고로 다시 들린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그 영은 높아지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받아 부어 주신 영이다(행 2:33). 바울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로 더러운 말과 악독과 노함과 비방을 들고(엡 4:29, 31),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신 것같이 서로 용서하라고 권한다(4:32). 이사야의 공동체가 반역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했듯이, 교회도 성령을 근심하게 한 죄를 고백하고 받은 용서에 기대어 서로를 용서한다.

홀로 포도즙틀을 밟으신 여호와의 모습은 마지막 날 공의로 심판하실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고, 백성의 환난에 동참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사람이 되어 고난받으시고 진노의 잔을 마신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다. 반역한 백성의 대적이 되셨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백성의 죄를 짊어지셨으므로,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은 마지막 심판을 그분의 공의가 완성되는 날로 기다린다. 63:16의 ‘우리의 구속자’라는 고백은 피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신 어린양을 향한 찬송으로 이어진다(계 5:9).

현대적 적용

하나님은 짓밟힌 이들의 억울함을 잊지 않으시며 정하신 날에 바로잡으신다. 그 심판은 하나님 “홀로” 행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고, 원수가 주리면 먹이며 선으로 악을 이긴다(롬 12:17-21).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신다는 약속은 개인의 보복을 허용하지 않는다.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59:15-16)께 보복을 맡기는 사람은 불의를 외면할 수 없다. 피해자에게 서둘러 용서를 요구하며 가해를 덮는 일은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 악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는다는 사실은 피해를 가볍게 여기거나 가해자의 책임을 없애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에돔을 오늘의 특정 민족이나 정치적 반대자와 동일시하여 미움을 정당화할 수 없다. 10절에서 하나님은 반역한 자기 백성의 대적도 되셨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고백한 반역은 교회도 돌아보아야 할 죄다. 바울은 같은 경고를 교회에 적용하며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권한다(엡 4:30; 고전 10:11). 교회는 원수를 향한 심판만 구할 수 없고 자기 죄도 고백해야 한다.

공동체는 옛 출애굽을 기억하며 “이제 어디 계시냐”고 묻는다. 15절 이후에는 자비와 사랑이 그쳤다고 호소하면서도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우리의 구속자”라 부른다(63:16). 탄식은 그 관계 안에서 드리는 기도다.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사람도 현재의 고통과 응답의 부재를 숨김없이 아뢸 수 있다.

그리스도는 먼저 진노의 잔을 받으시고 구원의 길을 여셨으며, 다시 오셔서 공의로 심판하신다. 교회는 그분의 은혜를 선포하며 죄에서 돌이키라는 부름을 듣고 전한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이들도 성령을 근심하게 할 수 있으므로, 악독과 비방을 버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신 대로 서로 용서해야 한다(엡 4:30-32). 구원의 은혜는 반역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