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개역개정에서 번호를 붙이지 않은 표제가 BHS에서는 1절이므로, 개역개정 22:1-21은 BHS 22:2-22에 해당한다. 표제는 다윗의 시를 인도자가 “아얠렛샤할에 맞춘” 노래로 소개한다. 이 말은 ‘새벽의 암사슴’이라는 뜻이며 곡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시인은 하나님의 침묵과 사람들의 조롱을 아뢰다가 조상들의 구원과 자기 출생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다시 부른다. 21절의 응답은 22절 이하의 회중 찬송과 땅끝의 예배로 이어진다.

첫 질문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אֵלִי אֵלִי לָמָה עֲזַבְתָּנִי,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다. 시인은 버림받은 듯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두 번이나 “내 하나님”이라 부른다. UBS 해설은 이 부름에서 고난 중에도 지속되는 의존 관계를 읽는다. 이어지는 히브리어 문장은 구원과 신음 소리에서 하나님이 멀리 계심을 아뢴다. 개역개정은 그 뜻을 “돕지 아니하시오며”,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로 풀어 옮겼다.1 1절의 신음과 13절의 사자 울음은 같은 어근으로 표현된다. 원수는 사자처럼 울부짖고 시인은 신음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신다.

2절에서 시인은 낮과 밤으로 하나님을 부른다. 개역개정의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에서 ‘잠잠함’에 해당하는 말(דוּמִיָּה, 두미야)은 평온과 안식을 뜻할 수도 있다. 개역개정은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는 뜻을 택했고, UBS 해설은 쉼이나 안식을 얻지 못한다는 이해도 제시한다.1 기도하는 내내 응답도 평안도 없는 처지다.

3-5절에서 시인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조상들의 구원을 기억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분이다. 이 표현(יוֹשֵׁב תְּהִלּוֹת יִשְׂרָאֵל, 요셰브 테힐로트 이스라엘)은 찬송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과 찬송을 보좌로 삼으신다는 뜻으로 읽힌다. UBS 해설도 왕의 보좌 이미지를 제시한다.4 조상들은 주를 의뢰했고, 부르짖었으며, 건짐을 받아 수치를 당하지 않았다. 출애굽의 구원을 노래해 온 이스라엘의 찬송을 기억할수록 시인은 자기에게 응답이 없는 현실을 더 아프게 느낀다.

6-8절에서 시인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고 탄식한다. 구원받은 조상들과 달리 그는 비방과 조롱을 당한다. 사람들은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시면 건지실 것이라고 비웃는다. 개역개정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에 해당하는 첫 낱말(גֹּל, 골)은 마소라 본문의 모음점대로라면 “여호와께 맡겨 보라”는 명령으로 읽힌다. NET 주석은 뒤의 3인칭 표현과 맞추어 ‘그가 맡겼다’는 완료형으로 모음을 달리 읽는 견해도 소개한다.5 어느 읽기에서든 조롱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의 고난을 그 신뢰가 헛되다는 증거로 삼는다. 4-5절에서 구원을 가리키던 동사들이 그들의 조롱 속에서 되풀이된다.

9-10절의 시인은 하나님과 자기 관계가 의식적인 신뢰보다 먼저 시작되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그를 모태에서 이끌어 내시고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부터 의지하게 하셨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맡겨진 사람이므로, 그는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라고 말한다. 1절의 “내 하나님”이라는 부름은 이 오랜 돌보심에 근거한다. 11절에서는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라며 하나님께 멀리 계시지 말라고 구한다. 가까이 닥친 환난과 멀리 계신 하나님 사이에 홀로 선 사람의 간구다.

12-13절의 원수들은 시인을 에워싼 바산의 힘센 소들과 먹이를 찢으며 울부짖는 사자로 그려진다. 요단 동쪽 바산은 좋은 목초지와 튼튼한 가축으로 알려진 땅이었다. NET 주석은 이 소들이 위협적인 원수를 나타낸다고 설명한다.5 아모스 4:1에서도 바산의 소는 가난한 사람을 압제하는 부유한 이들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사방을 막아선 원수들의 힘과 사나움이 부각된다.

14-15절에서 시인은 물처럼 쏟아지고 뼈마디가 어긋나며 마음이 밀랍처럼 녹는다고 아뢴다. 몸을 지탱할 힘과 버틸 용기가 사라졌고, 힘은 질그릇 조각처럼 말랐으며 혀는 입천장에 붙었다. 그런데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의 동사(תִּשְׁפְּתֵנִי, 티슈페테니)는 하나님을 향한 2인칭이다. 원수들이 죽음을 재촉하는 상황에서 시인은 자기를 죽음의 먼지에 두신 하나님께까지 항변한다. 생명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고통의 가장 깊은 원인을 묻는다.

16절에서는 개들 같은 악한 무리가 시인을 에워싼다. 개의 공격은 열왕기하 9:36처럼 수치스러운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악한 무리에게 둘러싸인 시인은 응답을 받은 뒤 찬송하는 회중 가운데 서게 된다(22절). 개역개정은 절 끝을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로 옮기지만, BHS의 “사자처럼 나의 손과 나의 발”(כָּאֲרִי יָדַי וְרַגְלָי, 카아리 야다이 베라글라이)에는 동사가 없다. UBS 해설에 따르면 칠십인역은 ‘파다’, 아퀼라·심마쿠스·히에로니무스는 ‘묶다’로 읽었고, 두 히브리어 사본에도 “그들이 묶는다”라는 읽기가 있다. 해설은 히브리어 구약 본문 프로젝트(HOTTP)가 마소라 본문의 형태를 ‘물어뜯고 있는’이라는 복수 분사로 이해한다고 보고하면서 여러 해결책의 불확실성을 인정한다.2 개역개정은 손발에 가해진 폭력을 ‘찌르다’로 표현한다. 마소라 본문의 ‘사자처럼’을 따르면 13절의 사자가 다시 나타나 손과 발을 위협한다.

17-18절에서 시인은 자기 뼈를 셀 만큼 쇠약해졌고, 원수들은 그 몸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지금 자기 뼈를 ‘세는’ 사람이 22절에서는 같은 동사로 하나님의 이름을 형제들에게 ‘선포한다’. 원수들은 그가 이미 죽은 사람인 듯 옷을 나누고 제비를 뽑는다. 개역개정의 “겉옷”과 “속옷”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모두 몸에 입는 옷을 가리키며 병행한다. 두 줄은 한 행위를 거듭 표현할 수 있다. 죽어 가는 사람의 마지막 소유를 먼저 나누는 행위는 그의 존엄마저 빼앗는다.

19절에서 시인은 원수와 고통의 묘사를 멈추고 “여호와여”라고 부른다. “멀리 하지 마옵소서”는 1절과 11절의 간구를 되받는다. 자기 힘이 말라 버린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나의 힘”이라 부르며 속히 도와 달라고 청한다. 20절의 “내 유일한 것”(יְחִידָתִי, 예히다티)은 앞줄의 “내 생명”과 병행하며 단 하나뿐인 생명을 가리킨다.3 그는 조롱하는 자들이 비웃으며 쓴 ‘건지다’라는 말을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돌려 드린다.

20-21절의 개, 사자, 들소는 앞서 나온 소, 사자, 개의 위협을 거꾸로 되짚는다. 21절 후반의 마지막 말은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나이다”(עֲנִיתָנִי, 아니타니)다. 개역개정은 그 응답을 구원으로 풀어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로 옮겼다. UBS 해설에 따르면 칠십인역·시리아어역·히에로니무스는 이 자리를 동사 없이 ‘나의 괴로운 자신’과 같은 말로 읽고, HOTTP는 마소라 본문의 동사를 유지한다. UBS 해설은 21절 후반까지 간구로 묶는 편을 선호하면서도 마소라 본문을 따라 구원을 고백하는 번역을 허용한다.3 마소라 본문에서는 2절의 ‘응답하지 않으심’이 이 마지막 낱말에서 뒤집힌다. 고대 역본을 따르면 21절까지 간구가 이어지고 22절에서 찬송으로 전환한다. 두 경우 모두 시인은 회중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게 된다.

성경신학적 통찰

시인이 거듭 부르는 “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하신 약속(출 6:7; 레 26:12)에 근거한다. 그 관계를 믿기에 시인은 버림받은 듯한 현실 앞에서 “어찌하여”라고 묻는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응답 없는 현실 사이의 고통을 언약의 하나님께 아뢴다.

4-5절의 조상들은 부르짖음에 응답하신 하나님을 경험했다. 출애굽기 2:23-25에서 하나님은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의 탄식을 들으시고 조상들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다. 3:7에서는 백성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들었으며 그 근심을 안다고 말씀하셨다. 홍해 앞에서 부르짖은 백성을 구원하신 일도 그 기억에 속한다(출 14:10, 30). 시편 22편의 시인은 같은 하나님을 부르는데도 아직 건짐을 받지 못했다. 21절의 응답과 24절의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는 그 구원의 기억이 자기 삶에서도 이어졌다는 고백이다.

시편 13편도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는 듯한 고통 속에서 응답을 구하고, 주의 사랑을 의지하며 찬송을 약속한다(1-6절). 시편 22편은 조상들과 자기 출생까지 기억하고 무너지는 몸을 자세히 아뢰며 그 길을 걷는다. 시편 25:2-3은 주를 의지하는 사람이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다. 시편 22:5의 조상들은 바로 그 구원을 경험했지만,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고도 비방과 조롱을 당한다. 탄식은 그 어긋남을 숨기지 않는다.

욥기 19장에서 욥도 하나님께 응답받지 못하고 친지와 친구들에게 버림받았다고 탄식한다. 고통의 원인을 욥의 죄에서 찾던 친구들은 그를 더 괴롭혔다. 욥은 그 가운데서 살아 계신 대속자를 고백한다(19:25). 시편 22편의 조롱하는 자들도 고난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증거로 삼는다. 그러나 21절의 응답과 24절의 들으심은 그들의 판단을 뒤집는다. 시편 69편 역시 까닭 없는 미움, 비방, 위로자의 부재를 아뢰지만, 자기 죄를 고백하고 원수의 심판을 구한다. 시편 22:1-21에는 자기 죄의 고백이나 보복의 청원이 없고 건짐을 구하는 기도가 이어진다.

시편 23:4의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고백은 22편의 ‘멀리 계심’과 이웃한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확신하는 기도와 그분을 찾지 못해 부르짖는 기도가 같은 시편집 안에 있다. 이사야 49:14-16에서도 시온은 주께서 자기를 버리고 잊으셨다고 탄식한다. 하나님은 젖먹이를 잊지 않는 어머니보다 더 깊이 시온을 기억하신다고 답하신다. 시편 22:9-10에서 모태와 젖먹이 시절을 돌보신 하나님은 이사야 46:3-4에서 모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품으시는 분이다. 이사야 41:14에서는 ‘버러지 같은 야곱’을 도우시며, 54:7-8에서는 잠시 버림받은 백성을 영원한 자비로 모으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는 듯한 고통은 시편 13:1, 69:17, 이사야 54:8에도 나온다. 시편 22:1-21에는 ‘얼굴’이라는 표현이 없지만, 24절은 하나님께서 곤고한 자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않으시고 얼굴을 숨기지 않으셨다고 밝힌다. 사람들이 그를 멸시한 6절의 현실과 하나님께서 그를 대하신 태도가 대조된다. 시인의 구원은 조롱하는 사람들의 판단이 하나님의 판단과 달랐음을 드러낸다.

이사야 50:6-10의 종은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면서도 주 여호와의 도움을 믿는다. 이사야 53장의 종도 멸시받고 하나님께 징벌받는 사람으로 오해받지만, 실제로는 다른 이들의 허물과 죄악을 담당한다. 시편 22편은 의지하는 하나님께 응답받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조롱받는 고난을 말하며, 이사야 53장은 그 종의 고난이 많은 사람에게 끼치는 구원의 유익을 밝힌다. 대속의 의미는 이사야의 종에게서 명시된다.

시편 22편 전체에서는 한 사람의 건짐이 회중의 찬송(22-25절), 가난한 이들의 먹음(26절), 땅끝과 모든 족속의 예배(27절), 후대의 증언(30-31절)으로 이어진다. 창세기 12:3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모든 족속의 복과도 연결되는 전망이다. 하나님께서 한 고난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일을 온 세대와 민족이 듣고 하나님께 돌아온다.

기독론적 해석

시편 22편은 다윗의 이름이 붙은 이스라엘의 기도다. 시인은 조롱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자기 구원을 구하며, 자기 고난이 다른 사람의 죄를 담당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21절의 응답은 죽음의 문턱에서 얻은 건짐이다. 다윗도 죽어 장사되었다는 사도행전 2:29의 증언처럼, 그 건짐 뒤에도 인간의 죽음은 남아 있었다. 신약은 이 고난자의 기도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결한다.

마태복음 27:46에서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신다. 마태는 그 뜻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풀이한다. 개역개정 마가복음 15:34도 첫 부름을 ‘엘리’로 옮기지만, 헬라어 본문은 마태의 ηλι(엘리)와 마가의 ελωι(엘로이)를 구별한다. 곁에 있던 이들은 그 외침을 엘리야를 부르는 소리로 잘못 들었다(마 27:47). 예수께서는 시인의 기도를 자기 말로 드리셨다. 버림받음의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나의 하나님”이라는 부름을 붙드셨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는 탄식은 예수께서 당하신 모멸을 떠올리게 한다. 이사야 52:14의 종은 모습이 심하게 상했고, 빌라도 앞의 예수는 가시관과 자색 옷을 입은 채 무리에게 내놓이셨다(요 19:5-6). 빌립보서 2:7-9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며,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 시편에서 짓밟힌 고난자가 회중의 찬송에 이르듯, 예수의 낮아지심 뒤에는 하나님의 높이심이 있다.

마태복음 27:39-43의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면 구원해 보시라고 비웃는다. 시편 22:7-8의 조롱이 십자가 곁에서 반복된다. 누가복음 23:35에서도 백성은 서서 구경하고 관리들은 비웃는다. 군인들은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갖는다(마 27:35). 요한복음 19:23-24는 옷을 네 깃으로 나누고 통으로 짠 속옷을 제비 뽑은 일을 시편 22:18의 성취로 밝힌다. 시편에서 한 행위를 병행하여 표현할 수 있었던 두 줄이 요한복음에서는 두 행동으로 나타난다.

예수의 “내가 목마르다”(요 19:28)는 말씀은 시편 22:15의 마른 혀와 69:21의 초를 떠올리게 한다. 요한은 이때 어느 구절이 이루어졌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마태복음 27장과 요한복음 19장은 시편 22:16을 인용하지 않으며, 요한은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일을 스가랴 12:10에 연결한다(요 19:34, 37). 시편 22:16의 ‘찔렀다’는 읽기에서 십자가의 못 박힘을 보는 해석은 앞서 살핀 본문 전승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사나운 무리에게 둘러싸여 손발을 공격받는 고난자의 모습은 두 읽기 모두에 남아 있다.

예수의 고난이 다른 이들을 구원한다는 뜻은 이사야 53장과 신약에서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고(고후 5:21),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갈 3:13).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목숨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막 10:45). 그는 그 사명을 이루시는 중에도 하나님을 부르셨고, 마지막에는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셨다(눅 23:46). 날 때부터 하나님께 맡겨졌다는 시편 22:10의 신뢰가 예수에게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히브리서 5:7-9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구원하실 분께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여 들으심을 얻으셨으며,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말한다. 그 들으심은 부활로 드러났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고(히 13:20), 사망은 그를 붙들어 둘 수 없었다(행 2:24). 시편의 시인이 죽음 앞에서 건짐을 받았다면 예수께서는 죽음을 지나 다시 살아나셨다. 히브리서 2:10-12는 고난을 통해 구원의 창시자가 되신 그리스도께 시편 22:22를 적용한다. 그는 구원받은 이들을 형제로 부르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고 찬송하신다.

십자가 곁에서는 이방인 백부장과 군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고(마 27:54),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 부르며 모든 민족에게 보내셨다(마 28:10, 19). 시편 22:27의 땅끝 예배는 그리스도의 구원과 교회의 선교에서 펼쳐진다. 시편의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31절)와 예수의 “다 이루었다”(요 19:30)는 직접 인용 관계가 확인된 표현은 아니지만 모두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가리킨다. 베드로전서 2:21-25는 그리스도께서 모욕을 보복하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께 자신을 맡기셨으며,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한다. 그를 통해 길 잃은 이들이 영혼의 목자께 돌아온다. 시편 22편 뒤에 목자를 노래하는 23편이 이어지듯,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는 구원하신 양들을 돌보신다.

현대적 적용

응답 없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어찌하여”라고 물을 수 있다. 시인은 하나님이 멀리 계신 듯한 현실을 숨기지 않았고 예수께서도 이 기도로 부르짖으셨다. “내 하나님”이라 부르며 지금의 고통을 아뢰는 사람은 믿음을 버린 사람이 아니다. 조상들을 건지신 일과 모태에서부터 돌보신 일을 기억하는 기도는 현재의 고통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붙든다.

조롱하는 자들은 고난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증거로 삼았다. “믿음이 부족해서”라는 말로 병과 실패의 원인을 재단하는 사람은 그들의 자리에 설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멸시한 고난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24절). 다른 이의 고통을 구경하고 퍼뜨리며 수치를 더하는 행동, 성공과 능력으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태도는 이 시편이 폭로하는 조롱과 맞닿는다. 시인은 스스로를 벌레라 부를 만큼 짓밟혔지만, 모태에서부터 자기를 돌보신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했다.

시인은 무너지는 몸과 죽음의 두려움을 하나님께 자세히 아뢰며 건짐을 구한다. 그리스도께서도 부당한 고난을 하나님께 맡기셨다(벧전 2:23). 이 의탁은 가해자의 불의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피해자는 보호와 법적 도움을 구할 수 있고, 교회는 가해자의 책임을 물으며 피해자를 지켜야 한다. 최종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신뢰와 지금 불의를 막는 책임은 충돌하지 않는다.

21절의 응답에 이르기까지 긴 탄식이 이어진다. 고난당하는 이에게 감사와 찬송을 서둘러 요구하면 아직 끝나지 않은 탄식을 막게 된다. 응답을 받은 시인의 증언은 그를 재촉할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고난자의 소리를 들으신다는 소망이다. 건짐을 경험한 사람은 그 일을 회중 앞에 고백하고 고난 중에 드린 서원을 지킨다(22-25절).

그리스도인은 이 탄식을 먼저 드리신 예수께 의지하여 하나님을 부른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대제사장이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히 4:15; 7:25). 예수께 드러난 하나님의 응답은 십자가를 지나 부활에 이르렀다. 지금 응답을 기다리는 사람도 고통의 밤을 아시는 그분께 자기 탄식을 맡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