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이사야 56장은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는 복수 명령으로 시작하여 공동체 전체를 부른다. 명령의 이유는 하나님 편에서 나온다.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백성이 행할 ‘의’(וַעֲשׂוּ צְדָקָה, 와아수 체다카)와 하나님께서 나타내실 ‘공의’(וְצִדְקָתִי, 웨치드카티)는 같은 명사다. NET는 뒤의 것을 하나님께서 백성을 공개적으로 옹호하시는 일로 옮기면서 ‘의’로도 읽을 수 있다고 밝힌다. NET 노트가 밝히는 직역은 ‘나의 구원은 오기에 가깝고, 나의 공의는 드러나기에 가깝다’이다.1 개역개정의 “가까이 왔고”는 구원이 이미 도착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지만, 히브리어는 곧 올 구원의 임박함을 말한다. 1절은 백성의 행위를 구원의 값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구원을 가져오실 하나님을 기다리는 백성은 지금 그분의 뜻에 맞게 판단하고 행해야 하며, 기다림은 불의를 내버려 둘 핑계가 되지 못한다.
2절은 히브리어로 ‘복되도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복 있는 사람을 묘사한다. 그는 ‘사람’(אֱנוֹשׁ, 에노쉬)과 ‘사람의 아들’(וּבֶן־אָדָם, 우벤 아담)로 불린다. 둘 다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3절 이하의 이방인과 고자가 들어설 자리가 이미 열려 있다. 그는 이 길을 “굳게 잡는” 사람이며, 같은 동사가 4절과 6절에서 언약을 굳게 잡는 일로 다시 나온다.1 원문은 “안식일을 지켜”와 “그의 손을 금하여”를 같은 ‘지키다’ 분사로 묶는다. 이 동사는 1절의 “지키며”와 어근이 같고 4절과 6절에서도 반복되어, 정의와 안식일과 손과 언약을 하나의 생활로 묶는다. 하나님께 속한 시간을 지키는 일과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일이 함께 간다. 예배를 중시한다는 말이 손으로 행하는 불의를 가리는 방패가 될 수는 없다.
3절은 이방인과 고자의 두려움을 들려주고, 하나님은 4-5절에서 고자에게, 6-7절에서 이방인에게 답하신다. 이방인, 고자 순서로 나온 두려움이 고자, 이방인 순서의 약속으로 되돌아오는 교차 구조다. 8절에는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하나님의 선언이 놓인다. 1절에서 공동체 전체에 주신 정의의 요청은 그 공동체 안에서 자기 자리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문제로 이어진다.
3절의 두 문장은 모두 “말하지 말며”, “말하지 말라”라는 금지로 시작한다. 첫째 목소리는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이다. Ogden과 Sterk의 UBS 핸드북은 ‘이방의 아들’이라는 이 표현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를 가리키며, 단수형이지만 집단을 뜻한다고 설명한다.2 NET는 “연합한”을 ‘스스로 붙은’ 사람으로 풀이한다. 이미 여호와께 붙어 있는 사람이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고 두려워한다. “반드시 갈라내시리라”(הַבְדֵּל יַבְדִּילַנִי, 하브델 야브딜라니)는 같은 동사를 겹쳐 써서 그 일이 확실히 일어나리라는 두려움을 강조한다.12 둘째 목소리는 고자다. 그는 “나는 마른 나무라”(הֵן אֲנִי עֵץ יָבֵשׁ, 헨 아니 에츠 야베쉬)고 말한다. 개역개정은 앞의 헨을 따로 옮기지 않았는데, UBS 핸드북은 이 말이 남에게 보라고 하는 말보다 탄식에 가깝다고 본다. 같은 해설에 따르면 마른 나무는 이름을 이을 후손이 없다는 비유이며, 고자가 하나님의 백성에서 배제될까 두려워한 직접 이유는 신명기 23:1의 규정에 있다.2 하나님은 두 사람이 혼자 자기 신분을 결론짓도록 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먼저 고자들에게 답하신다(4절). 3절의 단수 ‘고자’가 복수로 바뀌어 그 무리 전체를 부른다. 그들은 돌아오는 안식일마다 지키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고 언약을 굳게 잡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겠다고 하신다. “기념물과 이름”(יָד וָשֵׁם, 야드 와쉠)은 문자적으로 ‘손과 이름’이며, NET는 ‘손’이 기념물을 가리키는 다른 용례가 있다고 밝힌다.1 UBS 핸드북은 두 말이 한 가지를 가리키며 이 기념물이 자녀보다 더 오래가고 의미 있다고 설명하고, 아들이 없어 스스로 비석을 세운 압살롬의 사무엘하 18:18을 같은 뜻의 용례로 든다. 또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하신다는 말의 ‘끊어짐’이 레위기에서 죄를 지은 사람을 백성 중에서 끊는다고 할 때의 표현과 이어지며, 이 줄 전체가 55:13의 끝 줄과 매우 비슷하다고 본다.3 55:13에서 회복된 땅의 나무들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할 때, ‘기념’과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는 56:5의 ‘이름’, ‘끊어지지 아니하게’와 같은 말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해 세우시는 표징의 확실함이 고자 한 사람의 이름에도 주어진다.
5절은 “그들에게” 주겠다고 하다가 영원한 이름은 ‘그에게’ 주겠다고 단수로 말한다. 개역개정은 둘째 대상을 따로 옮기지 않았지만, 원문에서는 무리 전체에 주신 약속이 그 안의 한 사람에게도 미친다. “내 성 안에서”는 직역하면 ‘나의 성벽들 안에서’이며, UBS 핸드북은 이를 성전과 그 성벽으로도, 성전과 예루살렘 성벽으로도 읽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개역개정은 뒤의 읽기를 따른다.3 하나님은 고자가 먼저 몸의 조건을 바꾸거나 후손을 얻어야 자기 집에 속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자녀를 통한 가문의 기억이 중요하던 사회에서 하나님 자신이 그 이름의 지속을 보장하신다.
6-7절은 이방인들에게 돌아간다. 3절의 단수 ‘이방인’이 여기서는 복수로 나온다. 그들은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고 그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고, 안식일을 지키며 언약을 굳게 지킨다. 출신이 달라도 그들의 소속은 예배와 사랑과 생활로 드러난다. 54:17은 회복된 시온의 기업을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라 불렀고, 56:6은 그 종들 가운데 이방인이 들어설 수 있음을 보여 준다. 7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성산으로 인도하고 기도하는 집에서 기쁘게 하시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제단에서 기꺼이 받으신다. 인도하고 기쁘게 하시는 행위자는 하나님이다. 3절에서 두려워하던 사람이 성전 안에서 기뻐하며, 성전 주변에 겨우 머무는 손님으로 남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이다. 이 줄을 여는 ‘이는’은 1절과 같은 이유의 접속사다. UBS 핸드북은 “일컬음이 될”이 이름표를 붙이는 데 그치지 않고 성전이 실제로 기도의 처소로 인정받는다는 뜻이며,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라는 “만민”에는 이스라엘도 포함된다고 설명한다.4 NET는 “기도하는 내 집”을 직역하여 ‘내 기도의 집’으로 옮긴다.1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 성소에 나아와 예배하도록 이끄시고 그 예배를 받겠다고 약속하신다.
8절은 말씀하시는 분을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라고 부른다. 그분은 “내가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고 하신다. 이 줄(עוֹד אֲקַבֵּץ עָלָיו לְנִקְבָּצָיו, 오드 아카베츠 알라우 레니크바차우)을 NET는 문자적으로 ‘아직 내가 그 위에, 그의 모인 자들에게 모으리라’로 옮기며 뜻이 분명하지 않다고 밝힌다. NET는 두 대명사가 이스라엘을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전치사를 예레미야 49:5처럼 목적어를 이끄는 것으로 읽어 ‘내가 그에게 그의 모인 자들을 더 모으리라’로 옮길 수 있다고 제안한다.1 이 읽기는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계속 모으시는 데 초점을 두고, 개역개정은 이미 모인 무리에 새로 더해질 사람들을 드러낸다. 한 절 안에서 ‘모으다’의 어근이 세 번 쓰여 말씀하시는 분의 성품과 앞으로 하실 일이 일치함을 보여 준다. 8절의 대명사만으로 모인 사람들의 범위를 다 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3-7절에서 언약을 붙든 이방인과 고자에게 하나님의 집 안의 자리를 약속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모으시는 백성은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들과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을 함께 품는다. 1절의 가까운 구원은 이렇게 구체화된다.
성경신학적 통찰
신명기 23:1-8은 생식기가 상한 사람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고, 암몬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에돔과 애굽 사람은 삼 대 후에 들어올 수 있다고 민족마다 달리 규정한다. 그 이유도 출애굽 길에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했는지, 형제 관계와 객으로 살았던 기억에 있다. 이 규정을 배경으로 읽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내 집에서” 고자에게 이름을 주겠다고 하신 말씀의 무게가 드러난다. 56장의 이방인과 고자는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 이름을 사랑하고 언약을 붙드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혈통과 신체 조건 때문에 생긴 배제의 염려를 자신의 새 말씀으로 다루시며, 총회의 거룩함을 지키려던 경계 안쪽에 그들의 자리를 마련하신다.
56장이 이방인과 고자에게 요구하는 안식일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가족만의 것이 아니었다. 출애굽기 20:10은 종과 가축과 “네 문안에 머무는 객”도 쉬게 하고, 신명기 5:12-15는 그 이유를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종이었다는 구원의 기억에 둔다. 레위기 19장은 “너희는 거룩하라”(19:2)는 말씀 뒤에 안식일 준수를 명하고(19:3), 거류민을 학대하지 말고 자기 같이 사랑하라고 한다(19:33-34). 거룩함과 안식일과 나그네 사랑이 한 장에 묶여 있다. 56:1-2가 구원의 가까움과 안식일과 악을 행하지 않는 손을 연결하는 것도 이 흐름에 있다. 하나님께 속한 시간을 지킨다는 고백에는 자기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을 쉬지 못하게 하는 삶을 돌아볼 책임이 따른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의 안식일은 같은 구원의 기억에 참여하는 삶이다.
이사야 2:2-4는 말일에 만방이 여호와의 산으로 모여들어 그 길을 배우리라고 말한다. UBS 핸드북도 56:7의 “나의 성산”을 2장의 여호와의 전의 산과 연결하고,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2:3과 비교한다.4 2장에서는 민족들이 가르침을 받으러 올라오고, 56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을 인도하여 그 예물을 받으신다. 2장의 열방은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무기를 농기구로 바꾼다. 열방의 참여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고 사는 공동체를 이루며, 1절의 정의와 의가 기도의 집 약속에 앞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배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 행동을 그대로 두는 종교적 장식이 될 수 없다.
열왕기상 8:41-43에서 솔로몬은 먼 땅에서 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이방인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간구한다. 땅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려는 것이다. 성전 봉헌 때부터 이방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었고, 56:7은 그들을 성산으로 인도하고 기쁘게 하시며 예물을 받겠다는 약속으로 그 관계를 분명하게 한다. 이스라엘에게 맡겨진 예배의 자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열방의 기쁨을 향해 열려 있다.
54:1-3은 잉태하지 못한 여인 같은 시온에게 노래하라 하고 장막터를 넓히라고 명한다. 56:3-5는 후손을 낳지 못하는 고자 한 사람의 소속과 이름에 응답한다. 두 약속은 하나님의 회복이 상실과 수치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어지지만,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되지는 않는다. 시온에는 많아질 자녀가, 고자에게는 자녀보다 나은 이름이 약속된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가치를 혈연의 지속이라는 한 가지 방식으로만 인정하지 않으신다.
56:6에서 이방인이 여호와의 종이 된다는 말은 54:17의 “여호와의 종들”과 이어진다. 그 호칭은 공동체의 가장자리에서 허드렛일만 하라는 뜻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7절은 그의 기도와 제물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명시한다. 이방인은 출신 때문에 영원히 방문자 신분에 머무르도록 약속받지 않고, 하나님께 연합한 사람으로 그 집 안에서 예배하는 소속을 받는다.
55:13의 회복된 땅을 알리는 “영영한 표징”과 56:5의 고자에게 주시는 이름은 같은 낱말과 같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를 쓴다. 공동체의 회복을 알리는 확실한 표징이 개인에게 주어지는 이름과 어울린다. UBS 핸드북이 용례로 드는 사무엘하 18:18에서 압살롬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다고 말하며 스스로 비석을 세웠다.3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름과 기억은 후손의 존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이사야의 고자는 권력으로 기념비를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집 안에 이름을 주시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땅과 도시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갈 사람의 존엄도 회복한다.
55:6-7은 가까이 계신 여호와를 찾고 불의한 길을 버려 돌아오라고 부르며, 그분이 긍휼히 여기시고 너그럽게 용서하신다고 말한다. 55:6의 “가까이 계실 때에”와 56:1의 가까운 구원을 이어 읽으면, 백성을 맞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께 응답하는 삶의 변화가 연결된다. 안식일의 쉼과 거류민 사랑, 정의로운 판단과 열방의 기도는 모두 여호와와 맺은 관계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모으시는 백성은 혈통을 확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용서와 구원의 약속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공동체다.
기독론적 해석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이사야 56:7을 인용하셨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막 11:17). 마가는 “만민”이라는 말을 그대로 담는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전의 목적을 밝히시며 그 목적을 어긴 행위를 심판하셨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를 죽일 방법을 꾀했다(11:18). 이 심판은 이스라엘의 성경을 따라 행하시는 유대인 메시아의 행동이며, 예수를 따르는 교회도 그 말씀의 판단을 받는다.
요한복음 2:19-22에서 예수는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시는데, 그것은 자기 육체를 가리킨 말씀이었고 제자들은 부활 뒤에 그 말씀을 기억하고 믿었다. 하나님의 임재에 나아가는 길이 그리스도 자신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의 기쁨은 건물에 들어갈 허락보다 죽으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 근거한다.
히브리서 10:10-22는 그 길을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리신 몸과 피로 설명한다. 그 피를 힘입은 사람들은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어 하나님께 나아간다. 이사야 56:7은 이방인의 번제가 받아들여지는 성전 예배를,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접근을 말한다. 예배 형태는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받아 주시는 관계는 이어진다. 그분께 의지하는 사람은 출신이나 가문의 명예로 자격을 마련할 필요가 없으며,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한다(10:23-25).
사도행전 8:26-40에서 에디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는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사야 53:7-8을 읽고 있었다. 주의 사자와 성령이 빌립을 그에게 보내셨고, 빌립은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다(8:35). 내시는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고 물었고, 세례를 받은 뒤 “기쁘게 길을 가”게 되었다(8:36, 39). 사도행전은 이사야 56장을 직접 인용하지 않으며, 그의 혈통이나 신체 조건을 조사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고난받는 종을 통해 예수를 알고 거리낌 없이 세례를 받아 기뻐하는 외국 궁정의 내시는, 고자와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집 안의 이름과 기쁨을 약속한 56:3-7을 떠올리게 한다.
에베소서 2:11-22는 이방인 신자들이 전에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었으나(2:12)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말한다(2:13). 그리스도께서는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2:14) 두 집단을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지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며(2:19),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간다(2:18). 이사야 56:3의 이방인은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갈라질까 두려워했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분리를 없앴다고 말한다. 바울이 말하는 ‘동일한 시민’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의 언약들 안으로 이방인이 함께 들어온 모습이다.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처소(2:20-22)에서, 공동체를 만드는 힘은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흡수하는 힘보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화평에 있다.
요한복음 11:51-52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을 풀이하면서, 예수께서 그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려고 죽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으시겠다는 이사야 56:8의 약속과 같은 방향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 주셔서 흩어진 사람들이 하나가 된다.
예수는 자신을 부활과 생명이라고 하시며 자신을 믿는 사람에게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약속하신다(요 11:25-26). 자녀보다 나은 영원한 이름의 약속을 이 생명과 함께 읽으면, 후손이 없다는 불안이 사람의 마지막 미래를 결정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아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신다. 혼자 사는 사람과 자녀가 없는 사람도 그리스도께 속한 한 가족이며, 주님께서 완성하실 생명을 기다리는 공동체의 일원이다.
현대적 적용
이방인과 고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지 못하리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신 뒤 구체적인 자리와 이름을 약속하셨다. 다른 나라에서 왔거나 장애가 있거나 자녀 없이 사는 성도가 공동체의 말과 관행 때문에 늘 손님처럼 남아 있다면 이 약속과 어긋난다. 그들도 이름이 불리고 예배와 섬김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집의 식구다. 하나님께서 받아 주신 이방인은 여호와의 종으로 섬기는 사람이므로, 교회는 그들을 도움받는 대상으로만 두지 않고 함께 섬기는 가족으로 맞는다.
고자의 “나는 마른 나무라”는 말은 자녀를 통해 이름을 남기지 못하는 상실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그 상실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고 자녀보다 나은 이름을 자기 집 안에 주겠다고 하셨다. 자녀가 없는 삶을 결함으로 보거나 출산과 가정 형성만을 하나님의 복의 표시로 말하는 설교와 대화는 이 본문 앞에서 고쳐져야 한다. 기도하면 반드시 자녀가 생기리라고 말하거나 몸의 사정을 캐묻는 일은, 하나님의 약속 대신 상실을 설명하고 믿음을 입증하라는 짐을 지운다. 신앙의 유산은 혈연으로만 이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집에서 함께 기도하고 섬긴 사람들을 통해서도 이어진다.
1-2절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과 손을 지켜 악을 행하지 않는 일을 같은 동사로 묶는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안식일은 주인만이 아니라 종과 나그네의 쉼까지 지켰다. 예배를 소중히 여긴다는 고백은 함께 일하는 사람의 쉼을 빼앗지 않는 삶으로 이어진다. 정의를 지키라는 명령은 공동체의 판단에도 적용된다. 오래 다닌 사람의 말은 쉽게 믿고 새로 온 사람이나 말이 서툰 사람의 말은 충분히 듣지 않는다면, 친분이 정의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을 인용하시며 성전의 목적을 어긴 행위를 심판하셨다. 교회도 내부 사람만 아는 말과 관습을 성경의 가르침과 같은 무게로 요구하여 새로 온 사람의 길을 막고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한다. 이 말씀을 가르칠 때 유대인은 언제나 배타적이고 교회만 환대한다고 말하면, 이스라엘의 성경 안에 있던 나그네 사랑과 이방인의 기도를 지우고 본문의 역사를 왜곡하게 된다. 예수의 비판은 먼저 예배하는 교회 자신의 삶을 향하며, 다른 민족을 낮추는 말과 출신에 따라 신뢰를 달리하는 태도를 고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