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이사야 40:12-31은 위로를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실 수 있는지 묻는 백성에게 창조주의 능력과 지혜를 밝힌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강한 팔로 다스리며 어린 양을 품으신다고 했다. 이제 바다와 하늘을 헤아리고 열방과 통치자를 다스리며 별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는 분을 찬양한다. 마지막에 야곱은 자기 길과 송사가 하나님께 잊혔다고 탄식한다. 창조주에 관한 긴 논증은 그 지친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는 약속으로 향한다.
12절은 손바닥으로 물을 헤아리고 뼘으로 하늘을 재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고 저울로 산과 언덕을 다는 모습을 그린다. 사람에게는 너무 큰 세계가 하나님께는 헤아릴 수 있는 피조물이다. 거듭되는 “누가”라는 질문에 청중은 창조주 외에 아무도 없다고 답하게 된다. 어린 양을 품으시는 하나님이 양 떼를 둘러싼 세계 전체를 지으시고 다스리신다.
하늘을 “쟀으며”(תִּכֵּן, 티켄)라는 12절의 동사는 13절에서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תִכֵּן, 티켄)라는 질문으로 반복된다. 하늘을 헤아리신 분의 영을 누가 헤아리거나 지도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영”(רוּחַ, 루아흐)은 영과 바람, 기운을 가리킬 수 있으나, NET는 조언과 가르침이 이어지는 이 문맥에서 하나님의 마음이나 판단 능력을 뜻할 가능성이 크다고 이해한다.1 이어지는 모사에 관한 질문도 하나님께 조언하여 그분의 생각을 결정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백성이 경험한 현실만으로 하나님의 지혜 전체를 헤아릴 수 없다.
14절은 누가 하나님께 정의의 길과 지식과 통달의 도를 가르쳤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의 어휘는 27-28절의 탄식과 응답을 잇는다. 14절의 “정의”와 27절의 “내 송사”(מִשְׁפָּטִי, 미쉬파티)는 같은 명사이며, 14절의 “통달”과 28절의 “명철”(לִתְבוּנָתוֹ, 리테부나토)도 같은 말이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연결이다. 누구에게도 정의와 통달을 배우실 필요가 없는 하나님이 야곱의 송사를 모르셔서 지나치시는가? 하나님의 한없는 명철이 그 탄식에 답한다.
15절은 열방을 통의 물 한 방울과 저울의 작은 티끌에 비긴다. 12절에서 산을 달던 저울 위에 이제 민족들의 규모가 놓인다. 먼 섬들까지 미세한 먼지처럼 들려 올라간다. 백성의 삶을 압도하는 제국도 창조주와 경쟁할 무게를 지니지 못하며 그분의 구원 약속을 무효로 만들지 못한다.
레바논의 모든 나무를 땔감으로 쓰고 짐승을 번제로 드려도 창조주의 위대함에 상응하는 예물이 되기에는 부족하다(16절). 17절은 열방을 “아무것도 아니라”,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긴다고 한다. 개역개정은 하나님을 주어로 풀었지만, “여겨진다”(נֶחְשְׁבוּ־לוֹ, 네흐셰부 로)는 수동 구문이며 15절의 “같고, 같으며”에도 같은 동사가 쓰인다. 열방의 무게는 그들이 내세우는 크기로 정해지지 않는다. “빈 것”은 창세기 1:2의 “혼돈”과 같은 단어이다. 이 표현은 열방의 권세를 상대화한다. 이 단락의 결론에서 하나님은 작고 지친 백성에게 능력을 주신다.
18절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고 하며 무슨 형상을 그분과 비교하겠느냐고 묻는다. 19-20절에서 장인은 우상을 부어 만들고 금으로 입히며 은 사슬을 만든다. 궁핍한 사람도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해 우상이 흔들리지 않도록 세운다. 사람을 지켜 주리라 기대하는 형상이 사람의 기술과 재료에 의존한다. 바다와 하늘을 재신 하나님과 사람이 받쳐 세워야 하는 우상의 차이가 제작 과정에서 드러난다.
21절의 네 질문은 백성이 이미 듣고 배운 창조주의 지식을 되새긴다. “알다”와 “깨닫다”는 13-14절에서 하나님을 가르친 자가 있는지 물을 때 쓴 어근을 되풀이한다.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친 사람은 없지만 백성은 하나님을 알고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 질문의 “땅의 기초들”(מוֹסְדוֹת הָאָרֶץ, 모스도트 하아레츠)에는 “창조될”이라는 동사가 없다. 개역개정은 앞의 “태초부터”와 짝지어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라고 풀었으며, 구문상 “땅의 기초들을 깨닫지 못하였느냐”처럼 깨달음의 대상으로 읽을 수도 있다. 두 해석 모두 땅을 세우신 분에 관한 지식을 묻는다.
22절에서 하나님은 땅 위에 앉으시고 사람들은 그 아래 살며 하늘은 거주할 천막처럼 펼쳐진다. “앉다, 거주하다”라는 같은 동사가 하나님의 좌정과 사람의 거주, 천막의 쓰임을 잇는다. 개역개정의 “땅 위 궁창”(חוּג הָאָרֶץ, 후그 하아레츠)은 땅의 둥근 테나 둘레를 나타낸다. 땅의 둘레 위에서 온 땅을 내려다보시고 하늘을 차일처럼 펼치시는 창조주의 능력을 시적으로 그린다.
23-24절에서 하나님은 귀인들을 없애고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신다. 17절에서 열방에 쓴 “아무것도 아님”과 “빈 것”이 통치자들에게 다시 쓰인다. “겨우”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되어 심기고 뿌려져 땅에 뿌리박기 무섭게 말라 버리는 권세를 그린다. 개역개정의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에서 “하나님이”는 문맥에 따라 보충한 주어이다. “말라”는 40:7의 “풀은 마르고”와 같은 동사여서 권력자를 유한한 풀에 비긴다. 두 절의 “불다”는 서로 다른 동사지만, 여호와의 기운 앞에 마르는 이미지는 이어진다. 백성을 억누르는 왕권도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지 못한다.
25절에서는 “거룩하신 이”(קָדוֹשׁ, 카도쉬)가 직접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고 물으신다. 18절의 질문을 하나님 자신이 되받으신다. 26절은 눈을 들어 누가 별들을 창조하였는지 보라고 한다. “만상”(צְבָאָם, 체바암)은 군대처럼 질서 있게 늘어선 별의 무리를 가리킨다. 창조주는 그 수를 아시고 각각 이름을 부르시며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신다. 이 하늘의 광경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놓치셨다는 의심에 답한다.
27절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은 자기 길이 여호와께 숨겨졌고 자기 송사가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고 호소한다. “벗어난다”(יַעֲבוֹר, 야아보르)는 “지나가다”라는 뜻을 지녀 자기 사정이 하나님 앞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채 지나친다는 탄식을 담는다. 백성은 정당한 판결을 바라며 여전히 “내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별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자신만은 놓치신 것 같은 고통을 그 관계 안에서 토로한다.
28절은 야곱을 단수 “너”로 불러 이미 듣고 아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한다. 여호와는 영원하신 하나님이며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다. 피곤하지도 곤비하지도 않으시고 그 명철을 헤아릴 끝이 없다. 14절에서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으셨던 “통달”이 여기서 “명철”로 다시 나온다. 백성은 하나님의 판단을 다 설명할 수 없어도 시간과 지식의 한계로 자신들을 놓치지 않으시는 창조주께 송사를 맡길 수 있다.
29절에서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힘없는 자에게 힘을 더하신다. “능력”(כֹּחַ, 코아흐)과 “힘”(אוֹנִים, 오님)은 26절에서 별의 무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묘사한 말이다. 그 힘이 연약한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 된다. “힘이 없음”은 앞서 열방과 통치자의 무력함을 묘사한 말과도 연결된다. 30절에서는 소년과 장정도 피곤하고 곤비하며 반드시 넘어지고 쓰러진다. 같은 동사를 겹친 “넘어지며 쓰러지되”(כָּשֹׁול יִכָּשֵׁלוּ, 카숄 이카셸루)가 그 확실성을 강조한다. 본래 강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하나님께 힘을 받아야 한다.
31절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וְקוֹיֵ, 베코예)이다. 개역개정의 “오직”은 앞 절의 지친 젊은이들과 이들을 대조한다. “새 힘을 얻으리니”(יַחֲלִיפוּ כֹחַ, 야할리푸 코아흐)는 바꾸다는 뜻의 사역형으로 소진된 힘이 새 힘으로 바뀌는 일을 그린다. 독수리 구절에는 “올라가다”(יַעֲלוּ, 야알루)와 “깃, 날개”(אֵבֶר, 에베르)가 전치사 없이 나란히 나온다. UBS 핸드북은 개역개정처럼 날개 치며 올라가는 번역과 깃털이 새로 돋는 번역을 소개한다. 앙망은 하나님께 의지하여 도움을 기대하는 것이며, 새 힘은 기가 꺾인 포로들의 몸과 마음에 주어지는 힘이다. 달리고 걷는 두 동사는 삶의 다양한 활동을 대표한다.2
피곤함과 곤비함의 반복은 28-31절을 묶는다. 하나님은 피곤하지도 곤비하지도 않으시고(28절), 피곤한 자에게 힘을 주시며(29절), 젊은이도 피곤하고 곤비하다(30절). 마지막에는 두 동사의 순서를 바꾸어 앙망하는 자가 달려도 곤비하지 않고 걸어도 피곤하지 않으리라고 약속한다(31절). 하나님께 쓰였던 부정문이 그분께 힘을 받는 사람에게 이어진다. 이 약속은 지친 포로들이 다시 삶을 감당할 소망을 준다. 야곱의 길과 송사를 아시는 창조주가 그들을 붙드신다.
성경신학적 통찰
이사야 40:12-31은 창조주에 대한 믿음으로 지친 야곱을 다시 일으킨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 지금 자기 길과 송사를 잊으셨다고 느끼는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 우상은 사람이 세워야 하고 통치자는 식물처럼 마르지만 하나님은 지치지 않고 연약한 이를 붙드신다.
창세기 1:1-19에서 하나님은 빛과 어둠, 하늘과 물, 땅을 구별하고 광명체와 별에 자리와 역할을 주신다. 이사야 40:12의 측량과 26절의 별의 무리도 그 질서를 베푸시는 창조주를 찬양한다. 별은 그분이 수를 세고 이름을 부르시는 피조물이다. 창세기 1:2의 “혼돈”은 이사야 40:17, 23에서 열방의 “빈 것”과 사사들의 “헛된 것”을 나타내는 단어와 같다. 열방의 위세는 창조주가 세우신 질서와 견줄 수 없다.
출애굽기 19:3-6에서 하나님은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자신에게로 데려왔다고 말씀하신다. 이사야 40:31에서는 하나님께 힘을 얻은 백성이 독수리처럼 날아오른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업어 오심을, 이사야는 백성의 새 힘을 강조한다. 두 본문에서 구원받은 백성의 힘은 하나님께 의존한다.
출애굽기 3:7-12에서 하나님은 백성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들으며 근심을 아신다. 그들을 구출하시겠다는 약속은 이사야 40:27의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라는 탄식과 맞닿는다. 누구에게도 지식을 배우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백성의 고통을 아시고 구원하신다. 출애굽의 기억은 현재의 고통 가운데 그분께 호소할 관계와 신실함의 근거를 준다.
출애굽기 15:7-18은 대적이 지푸라기처럼 사라지고 하나님의 바람 앞에서 힘을 잃는다고 노래한다. 신들 가운데 누가 여호와와 같으냐고 물으며 구속한 백성을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시는 왕을 찬양한다. 이사야 40:18, 25의 비교 질문과 24절의 바람에 날리는 통치자들도 그 주권을 고백한다. 백성을 지배하는 권세는 그들의 영원한 운명이 될 수 없다.
이사야 35:3-10은 약한 손과 떨리는 무릎을 붙들고 하나님이 오셔서 구원하실 것을 알리라고 한다. 속량받은 사람들은 광야의 대로로 시온에 돌아온다. 40장 앞부분의 광야 길과 뒷부분의 새 힘도 이 회복의 소망을 잇는다. 하나님이 연약한 이를 붙드시기에 백성은 다시 걸어갈 수 있다.
시편 103편은 사람의 젊음을 독수리처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지임을 아시며 풀과 꽃처럼 짧은 인생을 언약의 인자로 돌보신다. 이사야 40장의 먼지와 풀, 바람과 독수리도 유한한 백성을 새롭게 하시는 소망을 그린다. 시편 121편에서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는 창조주는 백성의 나가고 들어옴을 지키신다. 피곤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지친 사람의 삶을 붙든다.
시편 147:1-6은 예루살렘을 세우고 흩어진 백성을 모으며 상한 마음을 고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 뒤, 별의 수와 이름을 아시며 능력과 명철이 한없으시다고 고백한다. 이사야 40:26-29에서도 별을 아시는 지식과 지친 이를 돌보시는 능력이 이어진다. 야곱은 자기 권리와 필요를 그분께 계속 호소할 수 있다.
시편 115:3-8의 우상은 사람이 은금으로 만들었으나 말하고 보고 듣지 못한다. 이사야 40:19-20의 우상도 제작자에게 의존한다. 이사야 46:1-4에서는 벨과 느보가 짐승에게 실린 짐이 되어 함께 포로로 가는 반면, 하나님은 백성을 태에서부터 품고 노년에도 업어 구원하신다. 사람이 떠받쳐야 하는 신과 사람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차이이다.
이사야 6:1-7의 거룩하신 여호와는 예언자의 부정함을 드러내시고 정결의 은혜를 주신다. 40:25의 “거룩하신 이”도 피조물과 견줄 수 없으시며 지친 야곱에게 힘을 주신다. 이사야 55:6-13에서는 사람보다 높으신 생각과 길로 돌아오는 자를 용서하고 말씀하신 회복을 이루신다. 백성은 다 헤아릴 수 없는 지혜를 지닌 그분의 신실함에 기대어 기다린다.
기독론적 해석
마가복음 1:3은 이사야 40:3을 인용하여 세례 요한이 예수의 오실 길을 준비한다고 밝힌다. 이사야 40:12-31은 같은 장에서 그 오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찬양한다. 지친 백성에게 찾아오시는 구원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선포된다.
요한복음 1:1-5는 만물이 말씀을 통하여 지어졌고 그분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한다. 별의 무리와 온 땅을 지으신 하나님에 관한 이사야의 찬양은 그리스도를 통한 창조의 증언과 연결된다. 요한복음 4:5-14에서 예수는 길을 걸어 피곤하여 우물가에 앉으시며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의 물을 약속하신다. 히브리서 2:14-18도 그분이 혈과 육을 지니고 고난을 겪어 시험받는 이를 도우신다고 한다.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는 사람의 연약함을 몸소 겪으셨다.
바울은 로마서 11:34에서 이사야 40:13을 직접 인용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고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는 질문이다. “주의 마음”(νοῦν κυρίου, 눈 퀴리우)은 헬라어 구약의 표현으로, 개역개정 이사야의 “여호와의 영”에 대응한다. 이 문맥에서 영과 마음은 사람이 가르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킨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원을 논한 바울은 그 역사를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한다.
로마서 11:1-6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고 은혜로 남은 자가 있다고 말한다. 17-24절은 접붙임 받은 이방인에게 원래 가지들을 향해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25-36절은 야곱을 향한 언약과 후회 없는 부르심을 말한 뒤 측량할 수 없는 판단과 길을 찬양한다. 이사야에서 야곱의 탄식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지혜는 로마서에서도 백성을 향한 신실함을 밝힌다. 이방인 신자는 그 긍휼을 받아 누린다.
고린도전서 2:10-16도 이사야 40:13을 인용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일을 아시며 성도는 그 영을 받아 은혜로 주신 것을 안다. 16절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 가르치겠느냐고 물은 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선언한다. 이 깨달음은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정복하여 얻은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알리신 은혜이다. 받은 깨달음이 사람의 모든 판단을 무오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고린도전서 2:6-9에서 그 지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영광의 주와 연결된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그 지혜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사야 40:23-24의 통치자들이 영원하지 못하듯, 십자가를 집행한 권세도 구원의 결말을 결정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자기 백성을 살리셨다.
고린도후서 12:7-10에서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떠나도록 세 번 간구했으나, 주님은 은혜가 족하며 능력이 약함 가운데 온전해진다고 말씀하셨다. 이사야 40:29의 힘은 이 증언과도 연결된다. 하나님은 약한 조건을 즉시 없애지 않으실 때에도 그 안에서 살아갈 힘을 주신다. 빌립보서 2:5-11은 종의 형체로 낮아져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높이셨다고 고백한다. 위대하신 분의 능력은 백성을 위한 낮아지심으로 나타난다.
베드로전서 1:1-6은 시험 가운데 근심하는 나그네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로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으며 장차 나타날 구원을 기다린다. 13, 21절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주실 은혜를 바라며 하나님께 믿음과 소망을 두라고 한다. 이사야의 앙망처럼 기다림은 신실하신 하나님께 향한다.
베드로전서 1:23-25는 이사야 40:6-8의 풀과 영원한 말씀을 인용하고 그 말씀이 독자들이 들은 복음이라고 밝힌다. 같은 말씀으로 새 생명을 받은 이들은 형제를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 로마서 8:31-34는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과 죽고 살아나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성도는 현재의 피로와 지연 속에서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 구원 사건에서 알고 그분께 힘을 구한다.
현대적 적용
야곱은 자기 길이 하나님께 숨겨지고 송사가 지나쳐졌다고 탄식하면서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오래 기다리다 지친 사람도 그 관계 안에서 고통을 아뢸 수 있다. 하나님은 탄식하는 백성에게 자신의 한없는 명철과 돌봄을 약속하신다.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을 감추어야만 그분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의 가르침도 필요 없으신 분은 하나님이다. 목회자와 교사, 권한을 맡은 사람의 판단에는 한계가 있다. 자기 의견을 하나님의 지혜와 같은 자리에 놓아 다른 사람의 질문과 호소를 막을 수 없다. 별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는 창조주 앞에서 사람의 권한과 지식은 유한하다.
우상은 사람을 지켜 주기 전에 사람이 받쳐 세워야 한다. 그 우상을 붙드는 사람은 자신이 만든 것에 궁극적인 안전을 맡긴다. 열방과 통치자도 마르는 풀과 같으므로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하거나 자기 집단의 힘을 자랑할 때 그 한계를 기억해야 한다. 창조주께 의지하는 백성은 강한 나라나 지도자에게 구원의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피곤하지 않으신 하나님이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신다. 소년과 장정도 지친다는 말씀은 젊음과 유능함으로 자기 삶을 끝까지 지탱할 수 있다는 기대를 꺾는다. 힘이 부족한 사람도 하나님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다. 새 힘의 약속을 사람에게 더 일하라고 강요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 없다.
앙망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실 도움을 기다린다. 기도의 횟수나 의식으로 그 힘을 확보하거나 자기 시간표대로 응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달리고 걷는다는 약속은 다시 삶을 감당할 소망을 준다. 바울이 육체의 가시 가운데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듯, 병과 피로가 지속되는 사람도 그 은혜에 기대어 살아갈 수 있다.
이 위로는 먼저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 로마서 11장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방인 신자에게 원래 가지를 향해 자랑하지 말라고 한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함에서 소망을 얻고 같은 긍휼을 받은 사람으로 그분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