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이사야 45:18-25는 우상 제작자의 수치와 이스라엘의 영원한 구원을 말한 14-17절에 이어진다. BHS는 17절 뒤에 열린 단락 표시를 두어 18절에서 새 단락을 시작한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는 UBS 핸드북에서 44:24-45:25를 고레스에 관한 노래로 읽는다. 두 저자는 개역개정의 “대저”(כִּי, 키)가 여기서 “참으로”라는 강조일 가능성이 크며, 18절 마지막 줄에 이르러 여호와 자신의 말씀이 시작된다고 설명한다.1 그 전에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가 소개된다.

18절은 하나님을 하늘을 창조하고 땅을 빚어 만들며 견고하게 세우신 분으로 소개한다. UBS는 창세기 1-2장에서도 쓰인 창조 동사들이 하나님의 행위를 거듭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개역개정의 “그는 하나님이시니”를 뒤의 “땅을 지으시고”와 연결하여 “땅을 빚고 만드신 하나님”으로 읽는 번역을 선호한다.1 이 소개는 창조의 목적을 밝히는 다음 선언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땅을 “혼돈하게”(תֹהוּ, 토후) 두려고 창조하지 않으셨고 사람이 거주하도록 지으셨다. 토후는 창세기 1:2의 “혼돈하고”에도 쓰여, 질서를 얻기 전의 세계를 가리킨다.1 “사람이 거주하게”에서 “사람”은 히브리어에 따로 없는 말로, 개역개정이 거주할 주체를 밝혀 넣었다. 바로 앞 44:26에서 예루살렘에 사람이 살고 황폐한 유다 성읍이 복구되리라는 약속도 이 창조의 목적에 근거한다. 창조주께서는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라고 선언하신다. 유일하심에 대한 이 고백은 21-22절에서도 반복된다.

19절에서 하나님은 감추어진 곳과 캄캄한 땅에서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신다. “감추어진 곳”(בַסֵּתֶר, 바세테르)은 15절의 “스스로 숨어 계시는”(מִסְתַּתֵּר, 미스타테르)과 같은 어근이다. UBS는 은밀함을 나타내는 어둠의 비유가 이방 신들의 모호한 소통 방식과 대조될 가능성도 제시한다.2 15절에서 하나님의 숨으심을 고백한 백성도 그분이 알려 주신 말씀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은 고레스의 이름과 그가 할 일을 미리 알리셨다(44:28; 45:1).

하나님은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혼돈 중에서 찾으라”(תֹּהוּ בַקְּשׁוּנִי, 토후 바케슈니)고 하지 않으셨다. UBS는 19절의 토후를 “헛되이”라는 비유로 풀이한다.2 18절에서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를 뜻하던 말이 여기서는 결실 없는 찾음을 가리킨다. 땅을 거주하도록 지으신 하나님은 백성에게 아무 소득 없이 자신을 찾으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의를 말하고 정직한 것을 알리느니라”라는 선언도 그 말씀의 신뢰성을 밝힌다. UBS는 여기서 “의”(צֶדֶק, 체데크)와 “곧은 것”이 모두 진실을 뜻한다고 설명한다.2

20절의 “모여 오라”, “함께 가까이 나아오라”는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을 하나님의 법정으로 부른다. UBS는 그들을 고레스의 원정에서 살아남은 여러 민족의 피난민으로 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한다.3 그들은 나무 우상을 메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한다. UBS는 신상을 메는 모습을 경배를 받도록 우상을 옮기는 행렬로 풀이한다.3 44:17에서 “나를 구원하라”고 간청받던 형상은 아무도 건질 수 없다. 46:1-2, 7에서도 사람들이 떠메야 하는 우상은 짐이 되고, 자신도 포로로 잡혀가며 고난 중에 응답하지 못한다.

21절은 열방에게 주장을 알리고 진술하며 함께 의논해 보라고 요구한다. “진술하고”에 해당하는 말은 가까이 가져오라는 뜻으로, 히브리어에는 가져올 대상이 없어 여러 번역이 변론이나 증거를 보충한다. 쟁점은 누가 이 일을 옛적부터 알려 주었느냐는 것이다. UBS는 “이 일”을 고레스의 등장으로 보고 41:26-27과 44:7-8의 질문에 연결한다.4 19절에서 진실을 알리신 분은 이제 열방에게 같은 증거를 요구하시며 자신만이 사건을 미리 알리셨음을 밝히신다.

그분의 이름은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אֵל־צַדִּיק וּמוֹשִׁיעַ, 엘 차디크 우모시아)이다. 히브리어의 두 칭호 “의로운 하나님”과 “구원자”를 개역개정은 행위를 드러내어 옮겼다. UBS는 이 문맥의 “의로운”이 정의로우심과 승리를 포함한다고 설명한다.4 20절의 신은 구원하지 못하지만 여호와는 약속을 지키고 백성을 건지시는 구원자이시며, 그분 외에 다른 이는 없다.

22절은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פְּנוּ־אֵלַי וְהִוָּשְׁעוּ, 페누 엘라이 베히바셰우)고 초청한다. 사람은 자신이 의지하던 대상에게서 하나님께 얼굴을 돌리고, 구원은 하나님께 받는다. UBS는 두 명령의 관계를 돌이킴과 그 결과로 읽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땅의 모든 끝”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가리키며, 이 문맥에서는 고레스의 공격을 받은 민족들이 시야에 있다.5 20절에서 무지하다는 판결을 들은 피난민들도 유일하신 구원자께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는다.

23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며 그 약속을 굳히신다. UBS는 이를 하나님께서 자기 명예를 걸고 약속하시는 것으로 설명하며, 입에서 나가 돌아오지 않는 말은 철회되지 않는 약속이라고 풀이한다.6 개역개정의 “공의로운 말”은 그 말씀의 진실함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모든 무릎이 자신에게 꿇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약속하신다. 무릎과 혀는 사람 전체의 응답을 가리키며, UBS는 혀의 맹세를 여호와께 드리는 충성의 맹세로 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한다.6 자신을 걸고 맹세하신 하나님께 모든 사람이 충성을 맹세할 날이 온다.

24절의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לִי אָמַר, 리 아마르)는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라는 고백을 이끈다. UBS는 여호와께서 23절의 맹세자들이 하는 고백을 인용하신다고 보며, 그 인용이 24절 앞부분까지인지 25절까지인지는 번역마다 다르다고 설명한다. “공의와 힘”(צְדָקוֹת וָעֹז, 체다코트 바오즈)에서 공의는 복수형이며, 힘과 짝을 이루어 승리를 뜻할 가능성이 크다. 여호와만 승리하고 강하시다는 뜻과 여호와를 통해 사람이 승리와 힘을 얻는다는 뜻으로 모두 읽을 수 있다.7

개역개정은 24절 후반을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온다는 말과 그분께 노하는 자가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말로 나눈다. UBS는 “그에게 노하던 모든 자”를 나아오다와 부끄러움을 당하다의 공동 주어로 읽는다.7 이 경우 하나님께 맞서던 자들이 그분 앞에 나아와 수치를 당한다. 모든 무릎이 꿇는 날에는 구원의 기쁨과 대적자의 수치가 구별된다. 본문은 지금 구원자께 돌아오라고 초청한다.

25절은 “여호와 안에”라는 24절의 말을 되풀이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약속한다. UBS는 “여호와 안에”를 그분이 하신 일 때문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의롭다 함을 얻고”(יִצְדְּקוּ, 이츠데쿠)에 승리와 정의의 뜻이 담겼다고 설명한다. “자랑하리라”는 그분이 하신 일로 기뻐한다는 뜻이다.8 개역개정이 24절 끝에 넣은 “그러나”는 히브리어 25절에는 없지만, 대적자의 수치와 이스라엘의 기쁨을 구별한다. 야곱 자손을 헛된 찾음에 내버려 두지 않으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맺은 약속을 지키며 열방도 구원으로 부르신다.

성경신학적 통찰

창세기 1:1-3에서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에 덮여 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빛이 생긴다. 이사야 45:18-19은 이 창조의 혼돈과 어둠을 포로기의 현실에 비춘다. 땅을 거주하도록 지으시고 말씀으로 질서를 주신 하나님은 성읍이 무너지고 백성이 흩어진 황폐함에서 다시 살 길을 주실 수 있다. 44:24-28에서도 창조주께서 예루살렘의 거주와 성읍의 복구를 약속하고 고레스를 통해 그 뜻을 이루신다.

신명기 30:11-14의 명령은 하늘이나 바다 밖에서 특별한 지식을 얻어 와야만 알 수 있는 말씀이 아니다. 백성의 입과 마음에 가까이 있어 듣고 행할 수 있다. 15-20절에서는 생명이신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의지하라고 부른다. 이사야 45:19, 22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신 뒤 돌아오라고 명하신다. 말씀을 들은 백성에게는 응답할 책임이 있다.

이사야 43:9-12에서도 열방이 법정에 모이고, 어느 신이 사건을 미리 알리거나 실제로 구원했는지 증인을 세우라는 도전을 받는다. 그때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증인으로 부름받으며, 45장에서는 열방 자신이 증언대에 선다. 두 장면 모두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그분이 미리 하신 말씀과 실제 구원의 역사에 연결한다.

창세기 22:16-18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시며 아브라함의 씨로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약속하신다. 이사야 45:23의 맹세도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에 근거하며 먼 민족들이 그분을 인정할 날을 향한다. 열방을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은 19절의 야곱 자손과 25절의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약속도 지키신다. 열방의 구원과 이스라엘을 향한 신실하심은 같은 구원자께 근거한다.

이사야 55:6-11은 악한 길과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너그러운 용서를 받으리라 약속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와 눈이 땅에서 열매를 맺게 하듯 그 뜻을 이루고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 45:23의 철회되지 않는 말씀도 이 약속과 이어진다. 백성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약속하신 구원과 용서를 믿고 돌아온다.

시편 22:25-31에서는 구원받은 사람의 회중 찬송이 땅의 모든 끝과 후손에게까지 이어진다. 모든 민족은 나라를 다스리는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와 예배한다. 이사야 2:2-4의 민족들도 여호와의 길을 배우고 그분의 판단을 따라 전쟁 도구를 농사 도구로 바꾼다. 여호와께 돌아와 경배하는 삶에는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이웃을 대하는 변화가 따른다.

예레미야 9:23-24는 지혜와 용맹과 부 대신 땅에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여호와를 아는 것을 자랑하라고 한다. 이사야 45:24-25에서도 의와 힘은 여호와께 있으며 백성의 자랑은 그분이 베푸신 구원에 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백성은 그분의 성품을 따라 이웃에게 사랑과 정의를 행해야 한다.

기독론적 해석

바울은 로마서 14:11에서 이사야 45:23을 “기록되었으되”라는 표지와 함께 인용하여 모든 무릎이 하나님께 꿇고 모든 혀가 자백하리라고 말한다. 빌립보서 2:9-11에서는 같은 언어를 높아지신 예수께 적용하여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에 꿇고 모든 입이 그분을 주라 시인하리라고 한다. 이사야에서 유일하신 여호와께 드리는 경배가 예수께 돌아가며, 그 고백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

고레스는 백성을 해방하는 일을 맡았어도 여호와를 알지 못했고(45:4-5, 13), 증인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도 눈과 귀가 있어도 보거나 듣지 못하는 백성이었다(42:19; 43:8-10). 신약은 모든 무릎이 꿇을 하나님의 맹세가 이루어지는 자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둔다. 사도들은 그분의 이름으로 구원을 선포하며 그 증언을 이어 간다.

로마서 14:7-12에서 성도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의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는 말씀을 음식과 날을 두고 다투던 교회에 적용한다. 먹는 사람과 먹지 않는 사람 모두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께 받아들여졌으므로 서로 업신여길 수 없다. 각 사람은 자기 일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 같은 주님께 속한 형제의 양심을 자신의 취향으로 지배해서는 안 된다.

빌립보서 2:6-11에서 높임받으신 분은 종의 형체를 취하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복종하신 예수이시다. 그 이름 앞에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무릎이 꿇는다. 이사야의 땅끝을 향한 전망은 그리스도의 높임 안에서 온 우주에 미치며, 그분을 주라 고백하는 교회는 낮아지신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사도행전 4:8-12에서 베드로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하나님이 일으키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가 건강해졌다고 증언하며,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선포한다. 이사야의 유일한 구원자께 돌아오라는 초청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죽음과 부활의 은혜로 선포된다. 요한복음 18:19-23에서 예수께서는 회당과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치셨으니 들은 이들에게 물으라고 하신다. 자신을 친 사람에게도 잘못 말한 것이 있으면 증언하라고 요구하신다. 이는 이사야 45:19의 감추어지지 않은 진실한 말씀이라는 주제와 이어진다.

로마서 3:21-26은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의 속량을 통해 나타나며,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면서 예수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신다고 증언한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지만 믿는 자는 차별 없이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이사야 45:21의 의로우신 하나님과 구원자라는 칭호는 십자가에서 드러난 의와 구원에 연결된다. 고린도전서 1:28-31에서는 낮고 멸시받는 이들을 택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게 하신다.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권면처럼,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자격 대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한다.

히브리서 6:13-20은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신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으므로 피난처를 찾은 사람에게 큰 위로가 있다고 말한다. 그 소망은 닻처럼 견고하여 예수께서 먼저 들어가신 하나님의 임재에 닿는다. 이사야의 철회되지 않는 말씀을 믿는 성도는 미래의 모든 경로를 알아서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과 길을 여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기다린다.

현대적 적용

하나님은 사람이 듣고 응답할 수 있도록 자신의 이름과 구원을 알리셨다. 그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은 자신만 아는 비밀이나 영적 확신을 하나님의 권위와 동일시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약속을 믿는 것과 취업이나 치료처럼 개별 사건의 결과와 시점을 미리 안다고 주장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구원하지 못하는 우상을 메던 사람들도 구원자의 초청을 받는다. 재산이나 인맥, 성과에 삶의 최종 안전을 맡기는 사람은 자신이 의지하는 것이 실제로 구원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하나님께 돌이키는 사람은 먼저 완전해져야 구원을 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께 자신을 맡긴다.

하나님께 노하는 자에게 수치가 있으리라는 경고는 그분께 맞서는 삶을 향한다. 상실의 아픔을 하나님께 아뢰는 탄식은 하나님을 등지고 거스르는 태도와 구별된다. 시편 22편처럼 버림받은 듯한 고통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가 될 수 있다. 이사야의 구원자는 지금 분노하던 사람에게도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선다면 지도자와 회중도 자신이 한 일에 답해야 한다. 음식과 날의 차이로 같은 주님께 속한 성도를 업신여길 수 없으며, 심판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이유로 확인된 불의의 책임을 덮을 수도 없다.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은 십자가까지 낮아지신 주님을 따라야 하며, 집단의 힘으로 이웃을 굴복시키거나 침묵시켜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과 땅끝을 향한 초청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넓은 긍휼을 드러낸다. 교회는 유대인에게 주신 약속을 버림의 이야기로 바꾸거나 다른 민족과 종교의 이웃을 멸시할 수 없다. 구원을 부르는 초청을 분명히 말하며 자신도 은혜로 받아들여진 사람임을 기억해야 한다.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자신의 바람을 하나님의 확정된 일정으로 바꾸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구원자의 약속을 붙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