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이사야 60-61장은 시온의 빛과 슬픔을 대신할 기쁨을 약속했지만 성은 여전히 무너져 있었다. 62장은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이라는 결심으로 시작한다. 두 동사는 입을 다물지 않고 활동을 멈추지 않겠다는 뜻이다. UBS는 “시온을 위하여”를 시온에 대한 사랑과 그 유익을 위한 행동으로 풀이한다.1
화자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UBS는 1절을 예언자의 말로 읽으며, 그가 2절부터 시온을 ‘너’라고 부른다고 설명한다.1 6절에서 파수꾼을 세우는 ‘나’에 대해서도 NET는 예언자일 가능성을 높게 보지만, UBS는 하나님 또는 예언자로 열어 둔다.115 1절의 결심과 6절의 명령은 잠잠하지 않는다는 동사와 회복이 이루어질 때까지라는 기한으로 이어진다.
1절의 화자는 시온의 의가 새벽빛처럼, 구원이 타오르는 횃불처럼 나타날 때까지 쉬지 않겠다고 한다. “나타나도록”에 해당하는 עַד(아드)는 그 결심의 기한을 나타낸다. “의”(צִדְקָהּ, 치드카흐)는 백성의 결백을 밝혀 주시는 일이나 그들을 건져 내시는 일로 읽을 수 있으며, 뒤의 경우 ‘구원’과 평행한다. 59:9에서 백성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라고 탄식했고 60:3은 왕들이 광명으로 나오리라고 약속했다. 화자는 그 빛이 모두에게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횃불 같이”(כְּלַפִּיד יִבְעָר, 켈라피드 이브아르)에는 개역개정에서 따로 옮기지 않은 ‘타오르다’라는 동사가 포함된다.1
2절에서 열방과 왕들이 시온의 공의와 영광을 본다. 1절의 “의”와 2절의 “공의”는 같은 히브리어 명사다. 60:1-3에서 시온 위에 임한 여호와의 영광이 이제 왕들 앞에 드러난다. 시온은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을 받는다. 이름을 정한다는 יִקֳּבֶנּוּ(이코벤누)는 지정하거나 구별하여 부른다는 뜻으로, 이름을 주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다.11 아브람과 야곱이 새 이름을 받은 것처럼(창 17:5; 32:28) 이 이름은 하나님이 시온과 맺으실 관계를 선언한다.
3절에서 시온은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עֲטֶרֶת תִּפְאֶרֶת, 아테레트 티프에레트)이 된다. 두 낱말은 소리가 비슷하며, ‘아름다운’은 60:7의 “영광”과 같은 명사다. 평행구의 “왕관”은 왕의 두건이나 머리 장식을 가리키며 3:23의 일반 장신구에도 쓰인다. 관이 머리 대신 손에 있다는 점에서 UBS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고 그분이 쓰신다는 뜻으로 풀이한다.2 49:16에서 시온을 새기셨던 손바닥에 이제 왕관이 들린다. 60:19에서 하나님이 시온의 영광이 되셨다면 여기서는 시온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4절은 “버림 받은 자”(עֲזוּבָה, 아주바)와 “황무지”(שְׁמָמָה, 셰마마)라는 이름을 물리친다. 첫 이름은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를 떠올리게 한다. UBS는 두 이름을 백성이 자신을 바라보던 부정적인 시각과 연결하고 49:14-23, 54:6-7의 탄식을 가리킨다. 주전 587년 바벨론의 파괴로 땅이 황폐해졌으며, 여성 명사인 황무지도 혼인 비유 안에서 ‘버림받은 아내’로 옮길 수 있다고 본다.3 성의 함락과 황폐, 버림받았다는 경험을 담은 이 이름들이 다시는 불리지 않을 것이다.
새 이름 “헵시바”(חֶפְצִי־בָהּ, 헤프치-바흐)는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는 뜻이며 므낫세의 어머니 이름으로도 쓰인다(왕하 21:1).11 UBS는 ‘기쁨’이 44:28과 46:10처럼 뜻이나 목적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시온을 기뻐하시며 그를 향한 뜻을 정하신다. 땅의 이름 “쁄라”(בְּעוּלָה, 베울라)는 ‘결혼한 여자’다. 이어지는 “기뻐하실 것이며”는 현재의 상태로도 읽을 수 있지만 개역개정은 미래 약속으로 옮긴다. ‘결혼한 것처럼 된다’는 것은 땅이 다시 여호와의 은총 아래서 복과 보호를 누린다는 뜻이며, 혼인 비유는 보호와 공급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낸다.113
5절의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יִבְעָלוּךְ בָּנָיִךְ, 이브알루크 바나이크)는 청년의 혼인에 비유된다. ‘결혼하다’와 ‘취하다’는 4절의 쁄라와 같은 어근이다. 아들들이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난점 때문에 자음은 그대로 두고 모음을 바꾸어 ‘너를 건축하신 이’로 읽자는 제안이 있다. UBS는 많은 현대 번역이 이 제안을 따르지만 Hebrew Old Testament Text Project는 마소라 본문 ‘네 아들들’을 강하게 권한다고 보고하며, 동사를 ‘소유하다’로 읽는다.4 NET도 고대 역본들의 지지와 동사의 기본 뜻, 시온의 자녀가 땅을 차지한다는 49:20과 54:3의 비유를 들어 수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11 이 읽기에서 흩어진 주민들이 돌아와 땅을 다시 차지한다.
둘째 줄에서는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듯 하나님이 시온을 기뻐하신다. “기뻐함”과 “기뻐하시리라”는 같은 어근이다. UBS는 이 줄의 초점을 회복된 관계와 이루어진 약속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61:10과 연결한다.4 61:10에서는 구원의 옷을 입은 이가 신랑과 신부의 모습으로 하나님 때문에 기뻐했고 여기서는 하나님이 시온 때문에 기뻐하신다. 60:15의 “대대의 기쁨”도 같은 명사다. 5절의 첫 줄이 주민과 땅의 관계라면 둘째 줄은 하나님과 시온의 관계다.
6절에서 성벽 위의 파수꾼들은 주야로 잠잠하지 않는다. 고대 성읍의 파수꾼은 적이나 전령을 살피고 알렸지만(삼하 18:24-27) 이들은 하나님께 아뢴다. UBS는 예언자, 지도자 또는 천상의 존재에 대한 비유로 보며 그 역할을 중보로 설명한다.5 1절의 “잠잠하지 아니하며”와 같은 동사가 파수꾼들의 직무로 이어진다. 49:16에서 하나님이 항상 보고 계신 성벽 위에 이제 항상 기도하는 이들이 선다.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הַמַּזְכִּרִים, 함마즈키림)은 하나님께 약속을 상기시키는 이들이거나 여호와를 계속 부르는 기도자들로 읽을 수 있다. UBS는 다음 절과의 연결 때문에 첫째 읽기를 선호하고 NET는 둘째 번역도 가능하다고 본다.511 “너희는 쉬지 말며”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에는 같은 ‘쉼’이라는 명사가 쓰인다. 기도자들은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쉼을 드리지 말아야 한다. 1절처럼 기한을 나타내는 עַד(아드)가 뒤따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견고히 세우고 온 땅의 찬송과 자랑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도하게 한다.11
8절에서 여호와는 오른손과 능력의 팔로 맹세하신다. UBS는 오른손을 맹세할 때 드는 손과 연결하며, 손과 팔이 모두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뜻한다고 설명한다.6 NET도 같은 상징을 읽는다.11 맹세에서 אִם־אֶתֵּן(임-에텐)은 ‘결코 주지 않겠다’라는 강한 부정이다. 백성이 수고한 곡식과 새 포도주를 원수에게 넘겨주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이다. UBS는 외적의 점령과 강탈을 끝내겠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세금인지 군대의 징발인지는 밝혀지지 않으며 이방인이 마시는 일 자체가 아니라 힘으로 빼앗는 일이 문제다.6
“네가 수고하여 얻은”에서 수고는 지치도록 일한다는 뜻이며, 40:28에서 하나님이 “곤비하지 않으시며”라고 할 때 쓰인 동사와 같다.6 곤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지치도록 일한 백성의 소출을 지키신다. 9절의 거두는 이와 먹고 마시는 이에게는 같은 곡식과 포도주를 받는 접미어가 붙어 수고한 사람이 자기 소출을 누림을 나타낸다. 그들은 여호와를 찬송하며 성소 뜰에서 먹고 마신다. UBS는 이를 감사와 제물, 성전 뜰의 화목제 식사로 읽고 새 성전의 회복까지 내다본다.7 수고의 열매를 누리는 식탁이 하나님 앞의 예배가 된다.
10절의 거듭된 명령은 돌아오는 이들을 맞으라고 재촉한다. UBS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성읍 문 밖으로 나가 포로나 예배하러 오는 이방인을 맞을 길을 닦는 장면으로 풀이한다.8 “길을 닦으라”(פַּנּוּ דֶּרֶךְ, 판누 데레크)는 40:3의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명령과 같다. 큰 길을 수축하는 것은 흙을 돋우어 쌓는 일이며 57:14를 반복한다. 돌을 골라내는 일은 5:2의 포도원 조성과도 연결된다. 끝으로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הָרִימוּ נֵס עַל־הָעַמִּים, 하리무 네스 알-하아밈)고 한다. 49:22에서 하나님이 드신 기치를 여기서는 주민들이 든다. UBS는 이를 열방에게 회복을 보이거나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이끄는 표지로 읽는다.8 반복 명령은 40:1의 “위로하라 … 위로하라”처럼 다급함을 나타낸다.
11절에서 여호와는 땅 끝까지 소식을 알리시고 “딸 시온”, 곧 예루살렘 주민에게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고 말하게 하신다. “이르렀느니라”(בָּא, 바)는 완료형 또는 분사로 읽혀 ‘이르렀다’와 ‘오고 있다’가 모두 가능하다. NET는 ‘네 구원자가 오신다’고 옮기며 UBS도 구원하러 오시는 하나님으로 풀이한다.119 뒤의 남성 대명사 ‘그에게’, ‘그 앞에’는 여호와를 가리킨다.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는 40:10과 같은 표현이다. NET는 되찾아 돌아오는 백성을 여호와의 상급으로 보며, UBS는 GNT가 ‘그분이 구하신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로 옮겼다고 소개한다.119
12절에서 귀환자들은 “거룩한 백성”,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불리고, 성은 “찾은 바 된 자”,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불린다. 개역개정은 모두 ‘너’에게 붙이지만 히브리어는 앞의 두 이름을 ‘그들’에게, 뒤의 두 이름을 ‘너’에게 준다. UBS는 ‘그들’을 가까이는 귀환민으로, 넓게는 기존 주민을 포함한 유다 백성 전체로 읽는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구별되고 그분이 건져 내어 데려오신 백성이다.10 “찾은 바 된 자”(דְרוּשָׁה, 데루샤)는 열방이 찾아오는 성(2:2-3) 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으로 읽힌다. 마지막 이름의 ‘버리다’는 4절의 “버림 받은 자”와 같은 동사다. 옛 이름에 부정어가 붙어 포로 생활의 역전을 알리며, 2절에 약속한 새 이름을 완성한다.10
성경신학적 통찰
이사야 62장은 40장의 위로와 귀환, 49장과 54장의 버림받은 어머니와 아내, 60-61장의 빛과 화관을 잇는다. 그러나 59장의 백성은 여전히 빛을 바라면서 어둠 가운데 있다고 탄식하고 64:10(BHS 64:9)은 시온과 예루살렘의 황폐를 아뢴다. 파수꾼들은 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한다.
54:1의 ‘황폐한 여자’와 ‘남편 있는 여자’는 62:4의 황무지와 쁄라를 같은 어근으로 미리 제시한다. 54:5는 창조주를 남편과 구속자라 부르고, 54:6의 “버림을 받아 … 아내”는 62:4의 “버림 받은 자”와 같은 형태인 עֲזוּבָה(아주바)를 쓴다. 하나님은 “내가 … 너를 버렸으나”라고 실제 심판을 인정하시면서도 잠시의 진노 뒤에 큰 긍휼로 모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54:7-8). 산들이 떠나도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는다(54:10). 54장의 관계 회복이 62장에서는 열방 앞에 부르는 이름이 된다.
49:14-22에서 버림받고 잊혔다고 탄식한 시온에게 하나님은 어머니가 자식을 잊어도 자신은 잊지 않으며 그 성벽을 항상 보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62:6은 같은 ‘성벽’과 ‘항상’이라는 말로 파수꾼의 기도를 그린다. 49장에서 돌아오는 자녀는 시온이 신부처럼 두를 장식이며 황폐한 땅을 채울 주민이었다. NET는 이 약속을 들어 62:5의 ‘네 아들들’을 설명한다.11 49:22에서는 하나님이 드신 기치를 보고 열방이 자녀를 데려왔다. 62:10에서는 주민들이 그 기치를 들고 하나님이 시작하신 귀환을 맞이한다.
40:3의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명령은 62:10에서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는 명령이 된다. 40:10의 상급을 가지고 오시는 하나님은 이어지는 11절에서 양 떼를 품는 목자이시다. 하나님이 오시며 그분이 이끄시는 백성도 돌아온다. 57:14의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와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도 62:10과 같은 동사들을 쓴다. 57장에서는 걸림돌을 들어 치우고 62장에서는 기치를 높이 든다. 52:7-10의 파수꾼들은 여호와의 귀환과 열방 앞에 드러난 구원을 보고 노래했다. 62장에는 같은 하나님의 팔, 땅 끝, 열방이 보는 구원이 나오지만 파수꾼들은 성취를 기다리며 기도한다.
에스겔의 파수꾼은 하나님께 들은 말씀으로 백성에게 경고한다(겔 3:17; 33:7). 이사야 62장의 파수꾼은 백성의 형편과 하나님의 약속을 아뢴다. 하박국도 파수하는 곳에서 응답을 기다렸고 하나님은 묵시가 더뎌도 정한 때에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다(합 2:1-3). 시편 130:6의 기도자는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주를 기다린다. 이사야 62:1의 새벽빛 같은 구원도 이런 기다림의 대상이다.
60:15의 버림받은 시온과 대대의 기쁨, 61:10의 신랑과 신부는 62:4-5로 이어진다. 63:7에서 자비를 “말하며”에 쓰인 אַזְכִּיר(아즈키르)는 62:6의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과 같은 동사다. 기도자는 자비를 상기하며 시작해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라고 구하고(63:15), 아직도 잠잠하시겠느냐고 묻는다(64:12). 개역개정 64:1은 BHS 63:19 후반부이고 개역개정 64:12는 BHS 64:11이다. 마지막 질문의 “잠잠하시고”(תֶּחֱשֶׁה, 테헤셰)는 62:1, 6의 ‘잠잠하다’와 같은 동사다. 예언자와 파수꾼이 잠잠하지 않듯 공동체는 하나님께 침묵을 거두어 달라고 구한다.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읽을 수 있는 65장은 부르기 전의 응답(65:24), 새 하늘과 새 땅(65:17), 백성을 기뻐하시는 하나님(65:19)을 약속한다. 마지막 기쁨의 동사도 62:5와 같다.
출애굽기 19:4-6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신다. 62:12도 ‘거룩한 백성’을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와 짝지어 구원과 소속을 잇는다. 반면 신명기 28:30, 33은 언약을 어긴 백성의 포도와 소출을 다른 민족이 먹으리라고 경고했다. 느헤미야 9:36-37에서도 백성은 죄 때문에 그 땅의 소산이 이방 왕에게 돌아간다고 고백한다. 62:8-9의 맹세와 65:21-22의 약속은 이 저주를 뒤집어 일한 사람이 자기 열매를 누리게 한다. 신명기 14:22-23의 언약의 식탁처럼 62:9의 백성도 성소 뜰에서 소출을 먹고 마시며 여호와를 찬송한다.
이 회복은 열방에도 열려 있다. 56:6-7은 여호와와 연합한 이방인을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집에서 기쁘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회복을 이루시는 분은 친히 오시는 하나님이다. 59:20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리라고 약속하고 63:5에서는 돕는 이 없이 여호와의 팔이 구원한다고 말씀하신다. 파수꾼의 기도는 하나님이 친히 오시기를 구한다. 신약은 이 기다림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연결한다.
기독론적 해석
이사야 62장은 폐허 속에서 회복을 기다리던 예루살렘에 새 이름과 끊이지 않는 기도, 수고의 열매를 누리는 식탁을 약속한다. 그러나 느헤미야 시대에도 소출은 이방 왕에게 돌아갔고(느 9:36-37), 64:7의 공동체는 주를 붙잡는 이조차 없다고 탄식한다. 새 이름과 구원, 기도의 힘도 하나님께 달려 있었다. 신약은 그 기다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응답하셨다고 증언한다.
62장 바로 앞의 61:1-2는 신약에서 예수의 사역을 여는 말씀으로 쓰였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 두루마리를 펴 읽으시고, 이 말씀이 오늘 듣는 이들 앞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다(눅 4:16-21). 61장에서 기름 부음 받은 이는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재 대신 화관을 주고, 그들이 “의의 나무”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고 보냄을 받았다(61:3). 62장은 그 시온이 새 이름으로 불리기까지 잠잠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진다. 61장의 기름 부음 받은 이와 62:1의 화자가 같은 인물인지 본문은 밝히지 않는다. 예수는 두 장이 약속하는 회복을 이루신다.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버림받았다는 이름을 짊어진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들과 함께 잡수셨고(눅 15:1-2),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은 여인을 “딸아”라고 부르셨다(눅 8:48). 62장에서 하나님이 시온의 옛 이름을 지우셨듯이, 예수는 사람들에게서 낙인이 된 이름을 거두고 하나님 앞에서의 새 이름을 주셨다.
마태복음 21:1-11에서 예수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 마태는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한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21:5). 개역개정에서 보듯 첫 구절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은 스가랴 9:9의 첫머리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보다 이사야 62:11의 “딸 시온에게 이르라”에 가깝고, 이어지는 겸손한 왕의 모습은 스가랴 9:9의 내용이다. 마태의 이 인용에서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는 소식은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오시는 왕의 도착으로 들린다. 무리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그를 맞는다(21:9). 예수께서 들어가시자 온 성은 소동하며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21:10). 구원이 시온 딸에게 이르렀지만, 성은 그분을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누가의 입성 장면에서 예수는 성을 보고 우시며, 그들이 평화에 관한 일과 하나님이 돌보러 오신 때를 알지 못했다고 탄식하신다(눅 19:41-44). 62:1의 화자는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않겠다고 했다. 복음서의 예수는 그 시온을 위하여 우셨고, 며칠 뒤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히 13:12). 구원은 겸손한 왕의 고난을 지나 시온에 이르렀다.
파수꾼들은 하나님께 약속을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이었다. 신약은 그리스도를 그 일을 완전하게 하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므로 그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히 7:25). 로마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하고(롬 8:34), 성령께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한다(롬 8:26). 64장의 공동체가 주를 붙잡는 자가 없다고 고백했다면, 신약의 성도는 자신의 기도가 약해질 때에도 그치지 않는 그리스도의 간구 위에 서 있다. 이 사실은 파수꾼의 직무를 없애지 않고, 교회가 밤낮 기도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62:7의 대담한 명령, 곧 하나님께 쉼을 드리지 말라는 명령도 이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도가 하나님을 끈질기게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미 확증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라고 말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덧붙인다(고후 1:20).
예수는 열두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 산에 가서 기도하며 밤을 새우셨고(눅 6:12), 새벽 아직 어두울 때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다(막 1:35). 겟세마네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과 함께 깨어 있으라고 부탁하셨지만, 제자들은 잠들었다(마 26:38-41). 깨어 있어야 할 이들이 잠든 그 밤에 예수는 홀로 깨어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62장의 파수꾼들이 시온을 위하여 밤낮 잠잠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난의 밤에도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다. 예수는 또 제자들에게 한밤중에 친구의 집 문을 두드려 떡을 구하는 비유를 들려주시며, 그 간청 때문에 친구가 일어나 필요한 만큼 준다고 말씀하셨다(눅 11:5-8). 이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셨다(눅 11:9-10). 하나님께 쉼을 드리지 말라는 62:7의 명령은 예수의 가르침 안에서 하늘 아버지를 향한 자녀의 담대한 간청으로 이어진다. 제자들의 기도가 약할 때에도 예수의 기도가 그들을 붙들었다. 예수는 시몬에게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그를 위하여 기도하였다고 말씀하셨다(눅 22:32).
62:5에서 하나님은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듯 시온을 기뻐하신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신을 신랑으로 소개하신다. 금식에 관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예수는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 혼인 집 손님들이 금식할 수 없다고 대답하셨다(막 2:19-20). 세례 요한도 신부를 취하는 이는 신랑이고 자신은 신랑의 음성을 듣고 크게 기뻐하는 친구라고 말했다(요 3:29). 이사야가 여호와께 돌린 신랑의 기쁨을 복음서는 예수의 오심과 연결한다. 요한계시록 21장은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2)고 말하고, 그 성을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21:9)라 부른다. 그 성의 문들에는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쓰여 있다(21:12). 시온에게 주신 혼인의 약속은 지워지지 않고 어린 양 안에서 완성된다. 새 이름의 약속도 이어진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이기는 자에게 새 이름을 새긴 흰 돌을 주시고(계 2:17), 그 위에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그리스도 자신의 새 이름을 기록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계 3:12). 62:2에서 여호와의 입이 정하실 새 이름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이름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는 그 신부를 자기 생명으로 얻으신다. 에베소서 5:25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을 말하고, 이어서 그 교회를 거룩하게 하여 흠 없이 자기 앞에 세우신다고 말한다(엡 5:26-27). 62장에서 시온은 하나님의 결정으로 새 이름을 받았다. 신약은 그 결정이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62:12의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도 같은 빛 아래에서 읽힌다. 베드로전서는 성도가 금이나 은 같은 없어질 것으로 대속된 것이 아니라 흠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되었다고 말한다(벧전 1:18-19). 디도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속량하시고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고 자신을 주셨다고 말한다(딛 2:14). 그리스도는 자신을 내어 주어 백성을 구속하고 거룩하게 하신다. 베드로전서 2:9-10은 편지를 받는 성도들을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 부르며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거룩한 백성의 이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 신자들도 함께 불려 들어온다.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단언한다(롬 11:1-2). 62:12의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선언이다. 그 신실하심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거두어지지 않기에, 이방인 신자도 같은 신실하심을 믿고 기댈 수 있다.
“찾은 바 된 자”라는 이름은 누가 시온을 찾는가를 묻게 한다. UBS 해설이 소개하듯 이 이름은 열방이 예루살렘을 찾아오리라는 약속으로도, 하나님이 그 성을 원하신다는 뜻으로도 읽힌다.10 복음서는 두 방향을 모두 보여 준다. 예수는 삭개오의 집에서 인자가 온 목적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데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9:10).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고, 찾음을 받은 이들이 하나님께 나아온다. 62:11의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는 소식도 신약에서 이름을 가진 한 분으로 다가온다. 천사는 요셉에게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며,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말했다(마 1:21).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안은 시므온은 자기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고백했다(눅 2:30). 요한계시록 22:12에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라고 말씀하시는 이는 22:16에서 “나 예수”라고 자신을 밝히신다. 이 말은 이사야 40:10과 62:11의 “상급이 그에게 있고”를 떠올리게 한다. 차이도 있다. NET는 이사야의 상급을 하나님이 되찾으신 백성 자신으로 해석한다.11 요한계시록에서는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시는 상이다. 그러나 두 본문 모두 오시는 분이 상을 손에 들고 오신다. 이사야가 여호와께 돌린 그 오심을 요한계시록은 예수의 오심으로 기다린다.
62:1-2에서 시온의 의와 구원은 새벽빛과 횃불처럼 열방과 왕들 앞에 드러났다. 요한계시록 21:22-27에서 새 예루살렘에는 해와 달의 비침이 필요 없고,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며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신다. 만국은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간다. 이사야 60:19가 약속한 영원한 빛이 어린 양에게서 비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 말한다(고전 1:30). 교회가 열방 앞에 보일 의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의다. 62:8-9의 맹세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들린다. 65:23은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라고 약속했고, 바울은 부활을 길게 설명한 뒤 성도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고 결론짓는다(고전 15:58).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이시며(고전 15:20), 수고가 빼앗기거나 사라지지 않는 세계가 그분 안에서 시작되었다.
현대적 적용
파수꾼은 하나님이 이미 하신 약속을 붙들고 이루실 때까지 기도한다(6-7절). 하나님을 재촉하여 그 뜻을 바꾸는 기도가 아니라 그분이 하신 말씀에 의지하는 간구다. 예수도 항상 기도하며 낙심하지 말라고 하시고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이들을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치셨다(눅 18:1, 7). 응답이 더뎌 보일 때도 성도는 약속하신 하나님께 아뢸 수 있다.
이 기도에는 탄식이 있다. 64:11-12의 공동체는 성전이 불타고 황폐해진 현실을 아뢰며 하나님께 아직도 잠잠하시겠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64:8에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라고 고백한다. 고통을 숨기고 밝은 말만 해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탄식하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여전히 자기 백성을 들으시기를 구한다.
“버림 받은 자”와 “황무지”라는 이름에는 백성이 겪은 역사와 자신을 바라보던 시각이 담겼다.3 하나님은 그들을 헵시바와 쁄라로 부르시며 기쁨과 보호를 약속하신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실패와 수치로 자기와 이웃의 가치를 고정할 수 없다. 거룩한 백성이라는 새 이름은 하나님께 속하여 그분을 섬길 삶을 부른다. 혼인 비유도 지배와 소유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 없다. 에베소서 5:25에서 남편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이다.
8-9절에서 하나님은 일한 사람이 자기 수고의 열매를 누리게 하겠다고 맹세하신다. 이 약속은 임금을 떼거나 권력으로 타인의 소출을 빼앗는 일을 심판한다. 이방인의 포도주 음용 자체를 금하는 말로 읽어 외국인에 대한 적대를 정당화할 수 없다. 문제는 강탈이다.6 여호와와 연합한 이방인도 하나님의 집에서 기쁨을 누린다(56:6-7). 타국에서 일하는 사람의 노동과 정당한 몫도 같은 존중을 받아야 한다.
9절의 백성은 자기 소출을 성소 뜰에서 먹고 마시며 하나님을 찬송한다. 정당한 수고의 열매를 누리는 삶과 예배가 이어진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 일을 기억하는 성찬에서도 가난한 사람을 부끄럽게 할 수 없다. 바울은 한 식탁에서 어떤 이는 굶주리고 어떤 이는 취한 고린도 교회를 책망했다(고전 11:20-22).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은 이웃의 몫을 빼앗는 행동과 양립할 수 없다.
11절의 구원 소식은 땅 끝까지 알려지고,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을 땅 끝까지 증인으로 보내신다(행 1:8). 약속을 받은 공동체는 구원의 소식을 자기 안에 가둘 수 없다. 그 증언을 지탱하는 것은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이라는 이름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