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사람 (1-4절)
1절에서 바울은 11장부터 이어 온 어리석은 자의 자랑을 계속한다. “부득불 자랑하노니”는 11:30의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를 다시 잇는 말이고, 바울은 그 자랑에 “무익하나마”라는 단서를 붙인다. 고린도 교회에는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전하며 자기 자랑으로 바울과 같이 인정받으려는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11:4, 12-13). 바울은 그들의 방식으로 자랑해야 하는 처지를 어리석은 일로 여기면서도 “주의 환상과 계시”로 이야기를 이어 간다. 이 표현은 주께서 주신 환상과 계시를 가리키며, 여기의 ‘주’는 8절의 ‘주’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1
2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 곧 그리스도께 속한 한 사람을 안다고 말한다. 7절에서 이 계시가 바울 자신의 것으로 이어지므로 이 사람은 바울 자신이다. 바울은 그 일이 십사 년 전에 있었다고 시점을 밝히지만 당시 형편은 설명하지 않는다. 2절의 “이끌려 간”(ἁρπαγέντα, 하르파겐타)과 4절의 “이끌려 가서”(ἡρπάγη, 헤르파게)는 수동형이며, 그를 옮기신 분은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2 바울은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라고 두 번 말한다. 자기 경험을 삼인칭으로 말하고 세부를 모른다고 하는 이 서술은 자신을 실제보다 작게 말하는 반어적 어조에 속한다. 바울은 반대자들이 중시한 황홀한 하늘 체험을 이렇게 풍자하듯 말하여, 그런 체험이 사도직을 입증하지 못함을 드러낸다.3
2절의 셋째 하늘과 4절의 낙원은 같은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유대 문헌은 흔히 일곱 하늘을 말하지만 세 하늘을 말하기도 했고, 바울은 셋째 하늘을 낙원과 같은 곳으로 말하므로 세 하늘을 생각했을 것이다.4 4절에서 바울은 그곳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ἄρρητα ῥήματα, 아르레타 레마타)을 들었다고 하고, 그것을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덧붙인다. 뒤의 표현(οὐκ ἐξὸν ... λαλῆσαι, 우크 엑손 ... 랄레사이)은 사람이 그 말을 하도록 허락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바울은 들은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다.
자랑을 그치는 이유 (5-6절)
5절에서 바울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지만 자기를 위해서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6절에서 그는 자랑하더라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을 것은 “참말을 함이라”고 하면서도 자랑을 “그만두노라”라고 한다.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2-4절의 삼인칭 서술에서는 바울의 의도가 어조로만 드러나지만, 6절에서 그는 자랑을 그치는 이유를 직접 밝힌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이 공개할 수 없는 계시의 크기로 자기를 평가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서 직접 보고 들은 그의 말과 행동으로 평가하기를 바란다.
계시의 탁월함과 육체의 가시 (7절)
7절 첫 구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τῇ ὑπερβολῇ τῶν ἀποκαλύψεων, 테 휘페르볼레 톤 아포칼륍세온)는 구문이 매우 어렵다. 문장을 어디서 나누느냐에 따라 이 구절은 다른 사람들이 바울을 높이 평가할 이유가 되기도 하고, 바울이 교만해질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5 개역개정은 이 구절을 가시가 주어진 이유로 옮겨 바울 자신의 자만과 바로 연결한다. NA28은 이 구절 뒤에 마침표를 찍고 “그러므로”(διὸ, 디오)로 새 문장을 시작한다. 그러면 이 구절은 6절에 붙어, 누가 바울을 보고 들은 것 이상으로 생각할 까닭을 밝힌다. 개역개정에는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이 접속사는 다수 사본에 없지만, 이를 포함한 사본들의 분포와 질, 그리고 문법상 거친 표현이라는 점을 보면 원문일 가능성이 높다.6 ‘그러므로’가 원문에 있으면 앞 구절을 뒤 문장에 넣어 가시가 주어진 이유로 읽기 어려우므로, NA28의 구분을 따르는 편이 낫다. 그렇게 읽으면 6절과 7절 첫 구절은 다른 사람들이 바울을 지나치게 높일 위험을 말하고,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문장은 바울 자신이 지나치게 높아질 위험을 말한다. ‘그러므로’가 앞의 계시 이야기를 받으므로 두 위험은 모두 계시의 탁월함과 관련되지만, 앞의 것은 바울이 자랑을 그친 이유이고 뒤의 것은 가시가 주어진 목적이다.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문장의 처음과 끝에 같은 목적절 “너무 자만하지 않게”(ἵνα μὴ ὑπεραίρωμαι, 히나 메 휘페라이로마이)가 두 번 나와 가시가 주어진 목적을 강조한다. 그 사이에서 바울은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라고 말한다. ‘주셨으니’(ἐδόθη, 에도테)는 ‘주어졌다’는 수동형으로 주신 분을 밝히지 않는다. 대부분의 해석자는 그 행위자를 하나님으로 보며, 사탄으로 보더라도 바울은 욥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로 이해한다.7 가시(σκόλοψ, 스콜롭스)는 살을 찌르는 뾰족한 것을 가리키는 비유다. 이것을 특정한 질병으로 보는 여러 제안은 성경의 근거가 약하다. ‘육체’를 몸으로 사는 삶 전체로 보아 가시가 바울의 대적자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8 11:13-15에서 바울이 거짓 사도들을 사탄의 일꾼이라고 부른 점은 이 해석과 어울리지만, 본문은 가시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바울은 그 사자가 자기를 “쳐서” 괴롭힌다고 말한다. 이 동사(κολαφίζῃ, 콜라피제)는 주먹으로 때린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가시가 주는 고통을 비유한다. 바울은 이 고통을 자기 자만을 막는 목적과 연결하여 이해했다.
세 번의 간구와 족한 은혜 (8-9절)
8절에서 바울은 이것이 자기에게서 떠나가게 해 달라고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가리킨다. 바울은 고통을 잠잠히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떠나기를 거듭 구했다. 9절의 “나에게 이르시기를”은 8절의 간구에 대한 대답이며, 바울이 9절 끝에서 이 대답에 나오는 능력을 “그리스도의 능력”이라고 부르므로 대답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9 대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였다. 원문은 ‘족하다, 네게’(ἀρκεῖ σοι, 아르케이 소이)를 문장 맨 앞에 두어 은혜의 충분함을 강조한다.10 주님은 가시를 없애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은혜가 바울에게 충분하다고 대답하셨다. 바울은 이 대답을 들은 뒤 자기 약함을 자랑하겠다고 하므로, 가시는 그가 계속 감당해야 할 약함으로 남은 것으로 보인다.
이어지는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은혜가 족한 이유를 밝힌다. NA28의 이 구절에는 ‘내’에 해당하는 대명사가 없다. 그러나 9절 끝이 이 능력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밝히므로, 개역개정의 ‘내 능력’은 뜻을 바르게 전한다.11 ‘온전하여짐’(τελεῖται, 텔레이타이)은 도덕적 완전함보다 이룸과 완성을 뜻한다. 사람이 약하여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그분의 능력이 제 일을 다 이룬다는 말이다.12
약함을 자랑하는 이유 (9-10절)
9절 후반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라고 말하고, 그 목적을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밝힌다. ‘머물게’로 옮긴 동사(ἐπισκηνώσῃ, 에피스케노세)는 장막을 치듯 거처를 삼는다는 뜻으로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온다.13 바울이 자랑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때부터 그에게 머물기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약함을 자랑할 때 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 계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난다.14
1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라고 말한다. ‘기뻐하노니’(εὐδοκῶ, 유도코)는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 목록은 11:23-29에서 바울이 열거한 매 맞음과 파선과 굶주림과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를 떠올리게 한다. 바울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약함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겪는 것이다. 그는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하여, 약함이 사라진 뒤가 아니라 약한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강하다고 고백한다.
마땅히 받아야 했던 인정과 사도의 표 (11-12절)
11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다시 직접 말한다. 6절에서는 자랑하더라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여기서는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라고 하여 11장부터 해 온 자랑을 어리석은 자의 말로 돌아본다. 그렇게 된 것은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다. 성도들이 마땅히 바울을 인정하고 추천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칭찬을 받아야’로 옮긴 동사(συνίστασθαι, 쉬니스타스타이)는 추천받고 인정받는다는 뜻으로, 10:12, 18에서 자기를 칭찬하는 자와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를 대비할 때 쓴 동사와 같다. 바울은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라고 말하면서도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고 말한다(11:5).
12절에서 바울은 “사도의 표”가 성도들 가운데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동사 κατειργάσθη(카테이르가스테)는 ‘이루어졌다’는 수동형이지만, 문맥상 그 일을 행한 사람은 바울 자신이며 개역개정의 “내가 ... 행한 것이라”도 그렇게 옮긴다.15 ‘표’와 ‘표적’은 원문에서 같은 명사(σημεῖα, 세메이아; σημείοις, 세메이오이스)다. 앞의 것은 참 사도를 알아보게 하는 표지라는 넓은 뜻이고, 뒤의 것은 기적이라는 좁은 뜻이다.16 개역개정은 “모든 참음”(ἐν πάσῃ ὑπομονῇ, 엔 파세 휘포모네)을 표적과 기사와 능력과 한 목록으로 옮긴다. 이렇게 읽는 것도 문법상 가능하지만, 원문에서 참음만 전치사 ἐν(엔, ‘가운데’)과 함께 나오므로 사도의 표가 모든 참음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뜻으로 읽는 편이 낫다.17 바울은 6:4에서도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신을 추천했다. 고린도 교회에서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나타났지만, 그 사역은 고난을 견디며 계속된 참음 가운데 이루어졌다. 기적을 참 사도의 표 자체로 삼는 번역은 11-13장에서 바울이 하는 말과 어긋나 보인다.18 바울은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성도들이 직접 본 자신의 인내하는 사역을 상기시킨다.
폐를 끼치지 않은 일에 대한 풍자 (13절)
13절에서 바울은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묻고, 유일한 예외로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을 든다. ‘폐를 끼치다’로 옮긴 동사(κατενάρκησα, 카테나르케사)는 남에게 짐이 된다는 뜻이다. 11:9에서 바울은 같은 동사로,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자기 부족을 채웠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는 실제로 용서를 구하는 말이 아니라 풍자다.19 11:7-11에서 바울은 사례를 받지 않은 일이 그들을 사랑하지 않아서냐고 묻고 하나님이 아신다고 답했다. 13절의 풍자도 그 선택을 사랑이 부족하다는 증거로 여기는 태도를 되받는다. 14절부터 바울은 같은 재정 방침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을 이어서 설명한다.
성경신학적 통찰
풍성한 선물과 계속되는 의존
1-10절에서 바울은 넘치는 계시를 받은 사람이면서, 가시 때문에 주님께 간구하고 그분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받은 선물이 크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 되지는 않는다. 신명기 8장은 이스라엘의 역사로 같은 관계를 가르친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구출하신 백성을 광야에서 낮추시고 만나로 먹이셔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8:2-3). 모세는 그들이 약속의 땅에서 풍요로워진 뒤 자기 능력과 손의 힘으로 재물을 얻었다고 말할 위험을 경고하고,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한다(8:17-18). 두 본문의 상황은 다르다. 신명기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언약 백성에게 광야의 훈련과 앞으로의 풍요를 말하고, 바울은 사도직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자기 계시와 고통을 말한다. 그러나 두 본문 모두 받은 선물을 자기 충족의 근거로 삼는 교만을 경계하고,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계속 의지하게 한다.
사탄의 사자와 하나님의 다스리심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부르면서도 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졌다고 말하는 바울의 고백은 욥기 1-2장을 떠올리게 한다. 욥기에서 사탄은 욥을 치지만 여호와께서 정하신 한계 안에서만 움직인다(욥기 1:12; 2:6). 두 본문은 고통을 주는 적대 세력이 실제로 있으나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이해한다. 다만 욥은 하늘에서 오간 대화를 알지 못한 채 고통의 이유를 하나님께 묻고, 바울은 자기 가시를 자만을 막는 목적과 연결하여 고백한다. 욥의 친구들은 긴 논쟁에서 욥의 고난을 그의 잘못과 연결했다. 욥기 42:7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에 관하여 한 말이 욥의 말처럼 옳지 못하다고 하신다. 바울이 깨달은 가시의 목적은 자기 경험에 대한 고백이며, 다른 사람의 고통을 설명하는 일반 원리가 되지 않는다. 욥과 바울은 모두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자기 사정을 아뢰었다.
주 안에서 하는 자랑
바울이 계시보다 약함을 자랑하는 이유는 이 편지가 앞에서 밝힌 원칙과 이어진다. 10:17에서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 말하고, 10:18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는 사람은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라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라고 한다. 고린도전서 1:26-31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이 세상의 약하고 천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가르치고, 같은 말씀으로 결론을 맺는다. 12장에서 바울은 이 원칙을 자기 경험에 적용한다. 그는 계시의 크기를 자기 자격으로 내세우지 않고, 약한 자신에게 머무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자랑한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사도의 진실성을 계시의 크기로 재지 않고, 주께서 그를 통해 하신 일로 알아보기를 바란다.
기독론적 해석
간구에 대답하시는 그리스도
9절에서 바울의 간구에 대답하신 분은 “내 은혜”를 말씀하시고, 바울은 그 은혜가 족한 이유로 말씀하신 능력을 곧이어 “그리스도의 능력”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8절에서 바울이 세 번 간구한 “주”는 그리스도이시다.20 바울은 고통을 두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직접 기도했고, 그리스도께서는 일인칭으로 대답하셨다. 그 대답은 가시를 없애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자신의 은혜가 족하다는 말씀이었다. 이 단락에서 그리스도는 지금 기도를 들으시고 말씀으로 대답하시며, 약한 종에게 자신의 능력이 머물게 하시는 살아 계신 주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 “내 은혜”라고 하신 은혜는 이 편지가 말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다. 8:9에서 바울은 그 은혜를 부요하신 분이 성도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일로 설명하고, 편지 끝 13:13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도들과 함께 있기를 빈다. 바울에게 족하다고 하신 은혜는 자기를 내어 주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베푸시는 호의와 도움이다. 바울이 의지하는 것은 남은 힘이나 과거의 계시가 아니라 이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이시다.
약함 가운데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능력
13:4는 9절의 약함과 능력이 그리스도 자신의 길과 이어져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신다. 바울은 이어서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 말한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일은 그리스도만이 이루신 구원 사역이며, 바울의 가시나 고난이 그 사역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약한 사람으로서,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는 능력을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경험한다.
10절의 “그리스도를 위하여”는 바울이 기뻐하는 약함이 그리스도를 섬기다가 겪은 것임을 밝힌다. 그는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 가운데서 사역을 그치지 않았고, 12절의 사도의 표도 모든 참음 가운데 이루어졌다. 바울이 약할 때 강한 것은 고난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이 약한 그에게 머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11절에서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라고 말하면서도 사도직을 내려놓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높이지 않고, 자기에게 머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고린도 교회를 섬긴다.
현대적 적용
체험을 말하고 듣는 정직함
6절에서 바울은 참말을 할 수 있었지만, 성도들이 자기를 보고 들은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자랑을 그쳤다. 교회가 특별한 체험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그 이야기로 한 사람의 권위를 세우지 않고, 그가 전하는 복음과 공동체 안에서 보여 온 삶으로 그를 알아보아야 한다. 체험을 말하는 사람도 바울처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별하여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 바울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두 번 말했다. 경험한 일과 그 경험에 대한 자기 해석을 나누어 말하고, 확실히 알지 못하는 일을 하나님의 직접 명령처럼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는 데서 이 정직함이 드러난다.
고통 가운데 함께 구하는 교회
바울은 가시가 떠나가기를 세 번 간구했다. 해결되지 않는 고통을 지닌 사람도 그것이 떠나기를 주님께 구할 수 있고, 교회는 그 기도를 믿음이 부족한 증거로 보지 않고 함께 기도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그리스도께서 간구하는 바울에게 직접 하신 대답이었다. 그 은혜를 의지한 바울도 고린도에서 쓸 것이 부족할 때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의 도움을 받았다(11:9). 교회는 은혜가 족하다는 말을 고통받는 사람의 실제 필요를 외면하는 말로 쓰지 않고, 기도와 함께 그 필요를 나누어 진다.
바울이 가시를 자만을 막는 목적과 연결한 것은 자기 계시와 고통과 주님의 대답을 돌아본 고백이다. 이 해석을 다른 사람의 고통에 같은 원인으로 대입하면 욥의 친구들과 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상대의 형편을 알지 못하면서 교만 때문에 아프다거나 특정한 죄 때문에 문제가 계속된다고 말하면, 도움을 구한 사람은 더 고립된다. 교회는 고통의 이유를 서둘러 설명하기보다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주님께 구한다.
약함의 자랑과 해로운 행동의 구별
약함을 자랑한다는 말씀은 해로운 행동을 덮는 명분이 될 수 없다. 바울이 자랑한 약함은 그리스도를 섬기며 겪은 능욕과 궁핍과 박해였다. 11:20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종으로 삼고 빼앗고 스스로 높이며 뺨을 치는 사람들을 고린도 교회가 용납한다고 꾸짖었다. 교회는 그런 행동으로 생긴 피해를 약함의 은혜로 덮지 않고, 그 행동을 멈추게 하고 피해를 바로잡는다. 사역자도 자기 약함을 책임을 피하는 이유로 삼지 않는다.
사역자를 분별하는 기준
12절에서 바울은 사도의 표가 모든 참음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교회가 사역을 분별할 때도 능력의 역사가 있었는지만 보지 않고, 그 사역이 고난을 견디며 성도들을 세웠는지를 살핀다. 바울의 삶에는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나타났지만, 그는 떠나기를 구한 가시 대신 은혜가 족하다는 대답을 받았다.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고통이 계속되는 성도도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에서 멀어졌다고 여길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약한 바울에게 자기 능력이 머물게 하셨다.
13절의 풍자는 사역자의 재정 선택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바울이 생활비를 받지 않은 것은 사랑이 적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교회의 도움을 받아 고린도를 섬겼고 그 선택의 이유를 설명했다(11:7-11). 교회는 사역자가 지원을 받는지 받지 않는지로 신앙의 우열을 재지 않고, 그 이유를 직접 듣고 판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