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이사야 41장은 열방의 신들을 심문하는 두 법정 장면 사이에 종 이스라엘을 향한 위로를 배치한다. 1-4절에서 하나님은 민족들을 재판 자리로 부르시고,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 열국을 넘겨주신 분이 “나 여호와”라고 답하신다. 섬들이 두려워하며 흔들리지 않도록 우상에 못을 박는 동안(5-7절), 하나님은 버러지 같은 야곱의 오른손을 붙드시고 광야에 물과 나무를 주겠다고 약속하신다(8-20절). 21-29절은 다시 법정으로 돌아가 그 신들에게 증거를 요구하고 판결을 내린다.

하나님은 우상들에게 소송을 제기하고 “확실한 증거”를 내놓으라고 명하신다(21절). “너희 우상들은”은 개역개정이 상대를 밝히려고 보충한 말이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이사야 번역 핸드북은 “증거”를 법정에서 피고가 내놓는 논증으로 풀이한다. “가까이 가져오라”와 “내놓으라”는 명령은 1절에서 재판 자리로 나오라고 부르신 말을 되받는다.2 말씀하시는 분은 “야곱의 왕”(מֶלֶךְ יַעֲקֹב, 멜레크 야아코브)이시다. 자기 송사가 하나님에게서 벗어났다고 탄식한 야곱(40:27)을 위해 하나님이 왕으로서 법정을 여신다. 하나님은 원고이면서 재판장이시고, 신들은 자신이 신이라는 주장을 입증해야 한다.

22절은 신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리라고 요구한다. 첫 명령은 히브리어에서 “그들이 가져와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는 3인칭이지만, 개역개정은 “진술하라”로 옮겨 직접 명령하는 형식으로 통일했다. UBS 핸드북은 “그들”을 신들로, 가져올 것을 21절의 논거로 이해한다. NIV는 첫 “그들”을 민족들로 보며, 일부 번역은 고대 역본을 따라 “가까이 오라”로 옮긴다. 핸드북은 사해사본이 뒷받침하는 마소라 본문을 따른다. “장차 당할 일”은 진행 중인 일로도 읽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번역은 미래의 일로 옮긴다.3

신들은 “이전 일”(הָרִאשֹׁנוֹת, 하리쇼노트)의 뜻과 결말도 설명해야 한다. UBS 핸드북은 앞으로 올 일과 대조되는 과거의 사건으로 보고, NJPS의 각주는 신들이 예고하여 이미 성취된 일로 이해한다. “우리가 마음에 두고”는 하나님과 법정의 청중이 그 증거를 따져 보겠다는 뜻이다.3 신들은 지난 일을 미리 알렸고 그 말이 이루어졌음을 입증하거나 앞으로 올 일을 말해야 한다. 이 요구는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시고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46:10)의 사역과 대조된다.

“뒤에 올 일”을 알리면 “너희가 신들인 줄 우리가 알리라”(23절). 그것도 못 한다면 “복을 내리든지 재난을 내리든지 하라”고 하신다. 히브리어는 “선을 행하든지 해를 끼치든지 하라”(אַף־תֵּיטִיבוּ וְתָרֵעוּ, 아프-테티부 베타레우)로, 양 끝을 들어 어떤 일이라도 해 보라는 도전이다.4 하나님은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시는 분이지만(45:7), 신들은 어느 것도 하지 못한다.

23절의 “놀라리라”(וְנִשְׁתָּעָה, 베니쉬타아)는 10절의 “놀라지 말라”에 쓰인 동사와 같다. UBS 핸드북은 어원이 불확실한 이 동사를 10절에서는 “두려워하다”, 23절에서는 “바라보다, 응시하다”로 이해한다.1 “보고”에 관해서는 RSV가 BHS의 수정 제안을 따라 “두려워하다”로 옮겼지만, 핸드북은 원래 본문이 “보다”이며 수정안을 뒷받침할 본문 증거가 없다고 설명한다.4 이스라엘에게 놀라지 말라 하신 하나님은 신들에게 청중이 눈여겨볼 만한 일을 한 가지라도 해 보라고 요구하신다.

24절은 신들의 존재와 행위 모두에 판결을 내린다.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는 “없음에서 나왔다”(אַתֶּם מֵאַיִן, 아템 메아인)로, NIV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못하다”로도 옮길 수 있다. “너희 일은 허망하며”의 מֵאָפַע(메아파)도 UBS 핸드북은 “없음에서 나왔다”로 직역한다.5 4절에서 역사를 행하신 분은 여호와셨고, 이 신들이 행한 일은 허망하다. 열방과 이스라엘의 대적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말씀하신 판결(40:17; 41:11-12)이 그들의 신들에게도 내려진다.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는 판결은 신들을 섬기기로 택한 사람에게까지 미친다. “가증한 것”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거부하시는 대상, 특히 다른 신 숭배를 가리키는 말이다.5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는데(8-9절),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신을 택한다. 44:19가 우상을 가증한 물건이라 부르듯, 여기서는 그것을 택한 사람도 책망받는다.

25절에서 하나님은 신들이 내놓지 못한 증거를 친히 제시하신다.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의 הַעִירוֹתִי(하이로티)는 2절의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서”라는 물음에 답한다. UBS 핸드북은 이 사람을 2절과 같은 고레스로 본다. 히브리어는 하나님이 일으키신 일과 그 사람이 온 일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서술하고, 개역개정은 둘째 동사를 “오게 하며”로 옮긴다. 바사는 바벨론 동쪽에 있었지만, 고레스는 북쪽 지역을 장악한 뒤 북쪽에서 바벨론을 공격했다.6 44:28과 45:1은 그를 “내 목자”,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라고 밝힌다.

“내 이름을 부르는 자”(יִקְרָא בִשְׁמִי, 이크라 비쉬미)는 마소라 본문의 읽기다. UBS 핸드북에 따르면 RSV, NIV, NJPS는 이를 “그가 내 이름을 부를 것이다”로 읽고, 사해사본을 따르는 NRSV, NJB, NAB는 “그가 그의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로 읽는다. REB는 본문을 고쳐 “내가 내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로 옮기며, 또 다른 수정안은 “그가 내 이름으로 불린다”이다. 핸드북은 마소라 본문을 따라 현재 시제로 옮기기를 권한다.6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자들이라 하고(43:7), 하나님이 고레스의 이름을 부르셨다고도 말한다(45:3). 마소라 본문대로라면 고레스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45:4-5는 그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거듭 말한다. 이 구절은 고레스를 쓰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며, 그의 내적 신앙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고레스는 통치자들을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듯이 꺾는다. 개역개정의 “그가 이르러”는 마소라 본문을 따르지만, RSV는 뒤의 “밟다”와 짝을 이루도록 “짓밟다”로 고친다. UBS 핸드북은 이 수정에 본문 증거는 없으나 문맥상 뜻이 통한다고 보는 주석가들이 많다고 설명한다. “석회”는 회반죽을, 토기장이가 밟는 진흙은 그릇을 빚기 전에 이기는 젖은 흙을 가리킨다.6 이 정복자도 45:9-13에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진흙이다.

“누가 처음부터 이 일을 알게 하여”라는 26절의 물음은 고레스의 승리를 누가 오래전에 예고했느냐는 뜻이다. 여기서 “옳다”(צַדִּיק, 차디크)는 도덕적 의로움보다 “그 말이 맞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알리는 자도, 들려주는 자도, 그 말을 들은 자도 없다고 세 번 되풀이하여 신들의 침묵을 확증하신다. 마지막 “너희 말”에서는 3인칭으로 가리키던 신들을 다시 2인칭으로 부른다.7

27절 첫 행은 “처음으로 시온에게, 보라, 보라 그들을”이라고 읽힐 만큼 압축되어 있다. UBS 핸드북은 뜻이 분명하지 않다고 보면서, RSV의 본문 수정, 칠십인역의 “내가 시온에 통치권을 주리라”, 사해사본을 참고하여 하나님이 시온에 처음 전령을 세우신 것으로 옮긴 REB를 소개한다. 핸드북은 마소라 본문을 유지하고 하나님이 시온에 먼저 알리셨다는 NIV의 번역을 따른다. 개역개정도 주어와 동사를 보충하여 “내가 비로소 시온에게 너희는 이제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로 옮긴다. “그들”은 돌아오는 유다 포로들을 가리킬 가능성이 크지만, RSV처럼 고레스에 관한 하나님의 예고로 읽을 수도 있다.8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을 전할 자”(מְבַשֵּׂר, 메밧세르)를 주신다. UBS 핸드북은 이 말 자체를 “전령, 소식을 전하는 자”로 풀고, “좋은 소식”은 번역에서 보충되었으며 전령의 이름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설명한다.8 40:9에서 같은 동사의 여성형으로 불린 전령은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고 외친다. 시온으로 돌아오는 백성과 그들을 이끄시는 하나님이 기쁜 소식의 내용이다.

28절에서 하나님은 미래를 예고하거나 질문에 답할 신을 찾으시지만 한 명도 없다. “그들 가운데에 … 조언자가 없도다”의 조언자는 열방의 신들을 가리킨다.9 40:13-14에서 하나님은 누구의 조언도 받지 않고 창조하셨다. 신들 가운데에는 대답할 조언자조차 없다. 목마른 가련한 자들에게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17절)과 달리 이 신들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한다.

29절의 “그들은 다 헛되며”에서 אָוֶן(아벤)은 마소라 본문에서 보통 “괴로움, 불행” 또는 “죄악”을 뜻한다. 대부분의 번역은 사해사본을 따라 “아무것도 아님”으로 옮긴다. Hebrew Old Testament Text Project는 마소라 본문을 유지하자고 제안하며, 이 경우 신들이 재앙을 일으키는 존재라는 뜻이 된다. 개역개정은 “헛되며”로 옮겨 공허를 강조한다. “부어 만든 우상들”은 제물이 아니라 틀에 부어 만든 신상이며, “그들의”는 그 신들을 본떠 만든 형상이라는 뜻이다.10

마지막 판결은 “바람과 공허”(רוּחַ וָתֹהוּ, 루아흐 바토후)다. 신상의 무가치함을 그리는 비유다.10 “공허”(תֹהוּ, 토후)는 열방과 사사들과 우상 제작자에게도 쓰이는 말이다(40:17, 23; 44:9). 하나님은 땅을 공허하게 두지 않고 사람이 살도록 지으셨으나(45:18), 신상은 공허로 판결받는다. 24절의 “너희”가 29절에서는 “그들”로 바뀌어 판결이 청중에게 선포된다. 바로 뒤 42:1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붙들고 택하신 종을 보라고 하신다.

성경신학적 통찰

이사야 40-48장에서 하나님은 여러 차례 열방과 그 신들을 법정으로 부르신다(41:1-7; 41:21-29; 43:8-13; 44:6-8; 45:20-25). 그때마다 누가 이전 일을 알렸고 장래 일을 말할 수 있느냐고 물으시고, 신들이 대답하지 못하는 자리에서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44:6),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45:21)라고 선언하신다. 배경은 바벨론 포로기다. 바벨론의 신 벨과 느보는 짐승의 등에 실린 짐이 되어 자기들도 잡혀 간다(46:1-2). 이사야는 패배한 백성의 하나님이 승리한 듯 보이는 제국의 신들을 심문하신다고 선포한다. 41:21-29는 이 법정에서 신들에게 내려진 첫 판결이다.

출애굽기 15:11-18에서 홍해를 건넌 백성은 신들 가운데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고 노래하며 영원히 다스리실 왕을 고백했다. 이사야 41:21의 “야곱의 왕”은 그 고백을 포로기의 법정에서 다시 부른다. 신명기 4장은 언약을 버린 이스라엘이 흩어진 땅에서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게 되리라고 경고하면서도(28절), 그곳에서라도 하나님을 찾으면 만나리라고 약속한다(29-31절). 이어 애굽에서 행하신 일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32-35절). 신명기에서 증거가 출애굽이었다면, 이사야에서 증거는 고레스를 일으켜 포로 귀환의 길을 여시는 일이다. 흩어진 백성을 잊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이 이 법정에서 역사로 나타난다.

신명기 18:21-22는 선지자의 말이 이루어지는지로 여호와의 말씀을 분별하게 한다. 이사야 41장은 이 기준을 신들에게 들이댄다. 신들은 지난 일을 미리 말했다는 증거도, 앞으로 올 일을 말할 능력도 내놓지 못한다. 반면 하나님은 종의 말을 세우시고 사자들의 계획을 이루신다(44:25-26). 처음 일들을 예로부터 알리셨다가 홀연히 이루셨으며(48:3), 이스라엘이 그 일을 자기 신상이 행했다고 말하지 못하도록 미리 알리셨다(48:5). 하나님의 입에서 나간 말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55:11). 참 신과 거짓 신은 말과 사건이 일치하는지로 갈린다.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불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왕상 18:29). 여호와께서 불로 응답하시자 백성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외쳤다(18:39). 이사야 41:28의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는 같은 침묵을 법정의 언어로 말한다. 갈멜산에서는 이스라엘 땅 안에서 바알과 겨루었고, 이사야에서는 포로가 된 이스라엘이 제국의 신들 앞에서 같은 판결을 듣는다. 41장 안에서도 하나님은 목마른 가련한 자들에게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라고 약속하시고(17절), 신들은 물어도 대답하지 못한다(28절). 갈멜산의 하나님은 불로, 포로기의 하나님은 광야의 물과 귀환의 길로 응답하신다.

시편 115:4-8은 말하지도 보지도 못하는 우상을 묘사한 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라고 말한다. 예레미야 10장도 사람이 메고 다녀야 하는 우상은 화도 복도 줄 수 없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복이든 재난이든 내려 보라는 이사야 41:23의 도전과 같은 논리다. 이사야 44:9-20의 목공은 나무 한 토막의 절반으로 떡을 굽고 고기를 구우며, 나머지로 신상을 만들어 그 앞에 엎드리면서도 그것이 가증한 물건인 줄 깨닫지 못한다(44:19). 41:24의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는 이 흐름 안에 있다. 말하지 못하는 신을 택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된다.

이사야 44:28-45:7은 고레스를 “내 목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부르며, 하나님이 그의 오른손을 붙드시고 그 앞에 성문을 여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종 야곱을 위해 그의 이름을 부르셨고(45:4), 고레스는 하나님의 성읍을 건축하고 사로잡힌 백성을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는다(45:13). 에스라 1:1-4와 역대하 36:22-23은 하나님이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귀환과 성전 건축의 조서를 내리게 하셨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왕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종 이스라엘(41:8)을 위해 쓰인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밖의 역사까지 다스리신다.

예레미야 18장은 이스라엘과 열방이 토기장이 손의 진흙처럼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말하고, 이사야 29:16과 45:9도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따지는 어리석음을 꾸짖는다. 41:25에서 통치자들을 진흙처럼 밟는 고레스도 45:9-13에서는 하나님이 공의로 일으키신 진흙이다. 포로 된 이스라엘을 짓누르던 제국의 통치자들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한 사람 앞에서 밟히고, 그 사람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정복자의 힘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27절의 이름 없는 전령은 이사야 40-66장에서 점점 뚜렷해진다. 40:9의 전령은 높은 산에 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고 외치고, 52:7-10의 전령은 시온에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소식을 가져온다. 파수꾼들은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것을 보고, 땅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본다. 61:1-2에서는 주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이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한다. 소식의 내용은 다스리시고 돌아오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다.

신들의 편에는 알리는 자도 듣는 자도 없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나의 증인”으로 세우신다(43:9-10; 44:8). 그 증인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다(42:18-19; 43:8). 그래도 하나님이 먼저 알리시고 구원하시고 보이셨으므로, 그들은 그 일을 본 자로서 증언한다(43:12). 41:21-29의 법정에서 하나님 편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성취를 본 백성이 서 있다.

45:20-22에서 하나님은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던 열방의 피난민을 부르시고,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고 초청하신다. 다시 열린 법정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으로 소개하신다(45:21). 자기 영광을 다른 자에게, 자기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42:8)이 우상에게 내리신 판결은 우상을 의지하던 사람들이 그분께 돌아올 길을 연다.

기독론적 해석

여호와는 신들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판결하시고, 고레스를 일으켜 귀환의 길을 여시며, 예루살렘에 소식 전할 자를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고레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쓰였고(45:4-5), 증인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종이었다(42:19; 43:8). 에스라 9장과 느헤미야 13장은 돌아온 공동체 안에서도 언약 위반이 다시 드러났다고 기록한다. 29절의 판결 바로 뒤에서 하나님은 “내가 붙드는 나의 종, …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고 말씀하신다(42:1). 마태복음 12:17-21은 이 42:1-4를 예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고 경고하신 일에 적용한다. 신약은 바람과 공허로 판명된 신상들의 자리에 하나님이 세우신 종을 예수라고 증언한다.

요한복음 13:18-19에서 예수는 제자 중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것을 미리 말씀하시며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고 하신다. 이사야에서 하나님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알리는 것을 참 하나님의 증거로 삼으셨고(41:22-26), 그 목적을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고 밝히셨다(43:10). 예수는 떠나가실 일도 같은 목적으로 미리 말씀하셨다(요 14:29). 신들은 앞으로 올 일을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지만, 예수는 배신과 십자가를 미리 말씀하시고 그 길을 그대로 걸으셨다.

예수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고 거듭 가르치셨다(막 8:31; 9:31; 10:33-34).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으나 그 일은 말씀대로 일어났다. 부활하신 예수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자신에 관하여 기록된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시며 제자들을 그 증인으로 세우셨다(눅 24:44-48). “누가 처음부터 이 일을 알게 하였느냐”(26절)는 물음에, 신약은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알리셨다고 답한다. 이사야 43:10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증인이었듯, 부활 후의 제자들은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행 1:8).

고레스는 칼과 활로 열국을 꺾고(41:2) 사로잡힌 백성을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았다(45:13). 하나님은 예수의 십자가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시고 이기셨으며(골 2:13-15), 그리스도의 백성은 은이나 금 같은 썩어질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되었다(벧전 1:18-19). 고레스가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한 채 바벨론의 성문을 열었다면,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아들로서(요 17:6) 죄와 죽음에 갇힌 자들을 해방하신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다(막 1:14-15). 이사야 52:7의 전령이 시온에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외친 소식과 같은 내용이다. 나사렛 회당에서는 이사야 61:1-2를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 듣는 이들의 귀에 응하였다고 말씀하셨다(눅 4:16-21). 40:9의 전령이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고 외쳤다면, 요한복음 1:14는 육신이 되신 말씀에게서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바울은 이사야 52:7을 인용하여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한다(롬 10:15). 41:27의 전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을 보여 주는 소식과 그 소식을 땅 끝까지 전하는 사도들의 사명으로 이어진다.

신들 가운데에는 대답할 조언자가 없고(28절), 하나님께는 조언자가 필요 없다(40:13). 바울은 이사야 40:13을 인용하며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한다(롬 11:33-36).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 부르고,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한다(고전 1:24; 골 2:3). 이사야 9:6은 오실 왕의 이름을 “기묘자, 모사”라 부르며, 개역개정은 40:13에서도 같은 “모사”라는 말을 쓴다. 하나님께 조언할 자는 없지만,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아버지를 나타내신다(요 1:18). 그리스도인은 이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운다.

아덴에서 바울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고 말한다. 이어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으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고 선포한다(행 17:24-31). 이사야에서 증거가 해 돋는 곳에서 일으키신 한 사람이었다면, 바울에게 결정적 증거는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일이다. 부활하신 그분이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시므로, 사람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이켜야 한다.

바울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 말한다(고전 8:4). 이사야 41:24의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와 같은 판결이다. 바울은 이 고백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은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덧붙인다(8:6). 빌립보서 2:9-11은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는 이사야 45:23을 예수께 적용한다. 자기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42:8) 앞에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일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빌 2:11).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는 이사야 41:4와 44:6에서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돌리신 칭호인 “처음과 마지막”으로 자신을 부르신다(계 1:17; 22:13).

법정의 신들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했고, 그 침묵은 그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증거였다. 예수도 대제사장과 빌라도 앞에서 거의 대답하지 않으셨다(막 14:60-61; 15:4-5). 우상의 침묵은 공허에서 나왔지만, 예수의 침묵은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사 53:7)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죄인이 받을 심판을 대신 받으시는 종의 침묵이었다. 신들 가운데 누구도 “옳다”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26절), 육신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셨고(딤전 3:16) 우리를 의롭다 하시려고 살아나셨다(롬 4:25).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

현대적 적용

신이라 불리는 것들은 지나간 일의 뜻과 앞으로 올 일을 설명하고 실제로 행할 수 있는지 심문받는다. 인간의 예측과 권력에 삶의 안전을 맡기는 사람에게도 이 물음이 주어진다. 야고보서 4:13-15는 내일의 일을 계획하는 사람에게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고 말하라 권한다. 미래에 관한 지식과 권세는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속한다.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는 판결은 우상을 의지하는 사람의 책임을 묻는다. 하나님이 야곱을 먼저 택하셨는데(41:8-9), 야곱은 대답도 구원도 할 수 없는 신들을 택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참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을 섬기며 부활하신 아들을 기다렸다(살전 1:9-10).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고백은 우상을 버리고 그분을 섬기는 선택을 요구한다.

17절에서 하나님은 목마른 가련한 자들에게 응답하겠다고 약속하시고, 28절에서는 신들이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한다. 기도하는 성도는 자기 목마름을 하나님께 아뢴다. 응답이 늦어질 때에는 시편 13편의 기도자처럼 어느 때까지냐고 물을 수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는 원하는 결과와 시기를 스스로 보장받는 행위가 아니다.

본문의 법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고하는 말에도 책임을 묻는다. 신명기 18장은 이루어지지 않은 말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받지 말라고 했다. 종말의 날짜나 정치·경제의 결과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고한 말이 빗나가면 그 말을 배척해야 한다. 교회의 선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알지 못하는 고레스를 불러 포로의 귀환을 여셨다. 세상의 통치자도 하나님의 뜻에 쓰임받지만, 그 통치자가 신앙의 소망을 대신할 수는 없다. 성도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딤전 2:1-2), 그들의 권력도 야곱의 왕 아래 있음을 기억한다. 통치자들을 진흙처럼 밟은 고레스 역시 하나님 손의 진흙이다.

시온에 주어진 기쁜 소식은 하나님이 포로의 귀환을 여시고 통치하신다는 소식이다(40:9; 41:27; 52:7). 교회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고 그분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사도들의 증언을 선포한다(행 17:3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소망을 둔 성도는 바람과 공허로 판결받은 것들을 버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