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63:7-14에서 출애굽 때의 자비와 인도를 회상하던 공동체는 15절에서 간구로 들어선다.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UBS 번역 핸드북을 쓴 Graham S. Ogden과 Jan Sterk는 이 첫 호소를 탄식 기도의 시작으로 보고 시편 80:14의 같은 간구와 견주며, “처소”가 하늘과 나란히 놓여 하나님의 높은 거처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2 “영화로운”은 12절의 “영광의 팔”과 14절의 “이름을 영화롭게”에 쓰인 말이다. 백성을 인도하며 드러내신 영광이 이제는 먼 하늘에만 머무는 듯하다.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어디’는 11절에서 모세 시대의 하나님을 두고 두 번 물었던 말인데, 15절에서는 하나님께 직접 묻는다. 열성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전적인 헌신을, 능하신 행동은 그 헌신을 이루는 힘을 가리킨다. 개역개정의 “간곡한 자비와 사랑”(הֲמוֹן מֵעֶיךָ וְרַחֲמֶיךָ, 하몬 메에카 베라하메카)은 문자대로 ‘주의 속이 끓어오르는 소리와 주의 긍휼’로, 감정이 배 속에서 일어난다고 여긴 표현에서 나온 깊은 연민의 관용구다.2 7절에서 찬송의 근거였던 그 긍휼이 이제 “내게 그쳤나이다”(הִתְאַפָּקוּ, 히트아파쿠). 이 동사는 감정이나 행동을 억누르고 참는다는 뜻이며, 기도의 마지막 64:12에서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תִתְאַפַּק, 티트아파크)로 다시 나온다. UBS 해설은 이 반복이 63:15-64:12 전체를 감싼다고 보고 번역에서도 두 곳에 같은 동사를 쓰라고 권한다.2 개역개정은 두 곳을 달리 옮겨 이 연결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단수 “내게” 뒤에 16절부터 ‘우리’가 이어져, 한 사람의 탄식과 공동체의 탄식이 겹친다.
16절은 그 물음의 근거를 밝힌다. 공동체는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고 이 절에서 두 번, 64:8에서 한 번 더 고백한다. 그 사이에서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곧 조상 야곱이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51:2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생각하라고 하셨지만, 폐허 속의 후손은 조상의 이름에서 도움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공동체는 혈통보다 오래된 관계에 기댄다. 절 끝(גֹּאֲלֵנוּ מֵעוֹלָם שְׁמֶךָ, 고알레누 메올람 셰메카)은 글자대로 ‘우리의 구속자, 옛적부터 주의 이름’이며, 개역개정은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로 옮겼다. 구속자는 가난해져 땅을 판 친족을 위해 그 땅을 무르는 가까운 친족이다(레 25:25). 62:12는 회복된 백성을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부를 날을 약속했고, 그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자리에서 그들은 이 이름을 부른다.
17절의 질문은 대담하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떠나게 하시며”는 문자적으로 ‘헤매게 하십니까’이고, “완고하게 하사”는 출애굽기에서 바로의 마음이 굳어진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UBS 해설은 구약이 하나님을 재난까지 포함한 모든 일의 근원으로 보면서도 사람의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굳게 하시고 바로도 스스로 마음을 굳게 한 출애굽기와 견준다. 또 이 긴장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고 인정하며 번역에서 질문의 힘을 약화시키지 말라고 권한다.3 같은 공동체가 64:5-7에서 자기 죄를 자백하므로, 이 질문을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교리 진술로 읽을 수는 없다.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면 돌아설 힘조차 없다는 절박한 탄식이다.
그래서 질문은 곧 간구로 바뀐다.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주의 길에서 떠났다고 고백한 백성은 자신들이 돌아오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먼저 돌아오시기를 구한다. 그 근거로 공로가 아니라 ‘주의 종들’, ‘주의 기업’이라는 소속을 내세운다. 18절은 약속의 땅을 누린 시간이 ‘잠깐’이었다고 탄식하며, 62:12에서 약속된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름과 원수가 성소를 “유린한” 현실을 맞세운다. “유린하였사오니”는 63:6에서 여호와께서 만민을 “밟았으며”라고 하실 때와 어근이 같다. 원수를 밟으시는 환상을 들은 백성이 지금은 원수에게 밟힌 성소를 본다. 19절 전반부는 히브리어로 ‘우리는 옛적부터 주께서 다스리지 않으신 자들, 주의 이름이 그들 위에 불리지 않은 자들이 되었다’이다. 개역개정은 히브리어에 없는 ‘같이’를 두 번 넣었는데, 문맥상 그런 자들과 다름없이 되었다는 탄식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주의 이름이 그들 위에 불리지 않았다’(לֹא־נִקְרָא שִׁמְךָ עֲלֵיהֶם, 로 니크라 시므카 알레헴)는 소유 관계를 부정하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주인의 이름을 잃은 사람들처럼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 대목에서 장절 구분이 달라진다. 개역개정 64:1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63:19의 후반부이고, 개역개정 64:2-12는 히브리어 64:1-11에 해당한다.1 아래 장절은 개역개정을 따른다. 64:1의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לוּא־קָרַעְתָּ שָׁמַיִם יָרַדְתָּ, 루 카라타 샤마임 야라드타)는 간절한 소원을 나타내는 말로 시작한다. “가르고”는 르우벤이 요셉을 잃고 옷을 찢을 때처럼(창 37:29) 세게 찢는 동작이다. UBS 해설은 이 간구를 하늘이라는 휘장 뒤에 계신 하나님께 그 휘장을 찢고 나오시라고 구하는 시적 표현으로 설명하고, 하나님께서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는 시편 18:9와 144:5보다 훨씬 격렬하다고 지적한다.4 “강림하시고”는 출애굽기 3:8에서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라고 하실 때의 동사다. 백성은 출애굽 때처럼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건지시기를 구한다.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מִפָּנֶיךָ הָרִים נָזֹלּוּ, 미파네카 하림 나졸루)에 대해 NET 노트는 마지막 동사를 ‘진동하다’로 보고, 이 동사가 쓰인 다른 곳은 사사기 5:5뿐이라고 설명한다.1 드보라의 노래에서도 여호와께서 싸우러 나오실 때 산들이 진동한다. 같은 자음을 ‘흐르다’로 읽어 산들이 녹아 흘러내린다고 옮기는 영어 번역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견고한 산조차 버티지 못한다. 백성은 불이 섶을 사르고 물을 끓이듯 하나님의 강림이 세상을 뒤흔들어,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고 나라들이 주 앞에서 떨기를 구한다(64:2). 63:12, 14에서 출애굽으로 이름을 영화롭게 하신 일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64:3-4는 간구의 근거를 과거에서 찾는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לֹא נְקַוֶּה, 로 네카웨)은 기본 뜻이 ‘기다리다, 바라다’인 동사여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두려운 일은 백성이 기대하고 계산한 범위를 넘어섰다. 이어서 64:1의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이 회상의 문장으로 되풀이되어, 전에 하신 일을 다시 하시기를 구하는 후렴이 된다. 64:4는 귀와 눈을 차례로 들어,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해 이처럼 일하시는 신은 주 외에 아무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고백한다. 개역개정은 40:31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וְקוֹיֵ, 베코예)에도 ‘앙망하다’를 썼는데, 그곳의 동사는 64:3에서 “생각하지 못한”으로 옮긴 동사와 어근이 같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이 헛되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만이 기다리는 이를 위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64:5에서 하나님은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אֶת־שָׂשׂ וְעֹשֵׂה צֶדֶק, 에트 사스 베오세 체데크)를 맞아 주신다. “선대하시거늘”의 기본 뜻은 ‘만나다’이며 여기서는 호의로 맞아 주는 뜻이다. 히브리어는 ‘기뻐하는 자와 의를 행하는 자’라는 두 분사이고 개역개정은 이를 하나로 묶었다. UBS 해설은 칠십인역에 첫 분사가 없다고 설명하면서도 히브리어 본문을 유지하기를 권한다.5 그런데 다음 구절(הֵן־אַתָּה קָצַפְתָּ וַנֶּחֱטָא, 헨 아타 카차프타 와네헤타)은 히브리어로 ‘보소서, 주께서 진노하셨고 우리는 죄를 지었습니다’이다. 개역개정은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로 순서를 바꾸어 인과를 분명히 했다. UBS 해설은 이 강조 구문을 ‘주께서 진노하셨는데도 우리는 계속 죄를 지었다’로 읽고 ‘그런데도’로 옮기기를 권한다.5 이렇게 읽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죄를 낳았다는 뜻이 되지 않는다. 백성은 진노 아래에서도 돌이키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64:5의 마지막 구절(בָּהֶם עוֹלָם וְנִוָּשֵׁעַ, 바헴 올람 베니와셰아)은 이 기도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으로, 글자대로는 ‘그것들 안에 오래(또는 영원히),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받으리라’이다. NET는 이대로는 뜻이 잘 통하지 않는다고 보고 ‘우리가 악하였다’로 고치는 읽기를 소개한 뒤, 히브리어 본문을 유지하면서 마지막 말을 질문으로 옮긴다.1 개역개정도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는 질문을 택했다. UBS 해설은 히브리어에 의문 표지가 없고 ‘그것들’이 앞의 ‘주의 길’을 가리킬 수 있으므로 ‘우리가 주의 길에 머물면 구원을 받으리라’로 읽을 수 있다고 제시하며, 본문이 불분명하다는 사실을 각주로 밝히라고 권한다.5 질문으로 읽으면 다음 절의 자백으로 이어지는 절망의 탄식이고, 진술로 읽으면 주의 길로 돌아가면 구원이 있다는 희망의 고백이다. 어느 쪽이든 공의를 행하는 자를 맞으시는 하나님과 죄를 지어 온 백성 사이의 거리를 드러낸다.
64:6은 그 거리를 네 그림으로 그린다.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의 ‘부정하다’는 본래 성소에 나아갈 수 없는 제의적 상태를 가리키며, 이사야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6:5)처럼 이 말을 죄의 고백에 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의 “더러운 옷”(וּכְבֶגֶד עִדִּים, 우케베게드 잇딤)을 NET는 문자적으로 ‘월경의 옷’이라고 설명한다.1 레위기 15:19, 31의 규정은 성소에 가까이 나아가는 질서를 다루며 몸의 자연스러운 일을 죄로 정하지 않는다. 이사야는 그 정결 규정의 그림을 빌려, 백성이 내세울 만하다고 여긴 의로운 행위들조차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이 비유가 겨누는 대상은 공동체의 죄와 자기 의다. 이어서 백성은 잎사귀처럼 시들고 그 죄악이 바람처럼 그들을 몰아간다. 40:7에서는 여호와의 기운이 풀을 시들게 했고, 여기서는 백성의 죄악이 바람이 되어 마른 잎을 쓸어 간다.
64:7은 기도할 사람조차 없다고 말한다. UBS 해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를 기도와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이 없다는 과장법으로 보고, 63:19의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와 연결한다.6 하나님의 이름이 백성 위에 불리지 않고, 백성도 그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스스로 분발하여”는 51:17에서 하나님이 예루살렘에게 “깰지어다 깰지어다”라고 부르신 동사와 어간이 같다. 지금은 그 부름에 응답해 일어나는 사람이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셨기 때문이다. 마지막 동사(וַתְּמוּגֵנוּ, 와테무게누)는 ‘녹이다’라는 뜻이며, 개역개정의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는 히브리어로 ‘우리 죄악의 손에’이다. NET는 이 동사를 ‘주께서 우리를 넘기셨다’로 고쳐 읽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죄에 버려두셨다는 뜻으로 설명한다.1 UBS 해설은 히브리어 동사가 ‘넘기다’보다 ‘녹다, 쇠약해지다’에 가깝다고 밝히며 ‘우리 죄악의 손아귀에 버려두셨다’는 번역을 제안한다.6
64:8은 “그러나 … 이제”로 방향을 바꾼다. 자백 끝에 공동체는 세 번째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라고 말한다. “토기장이”는 문자대로 ‘우리를 빚으시는 이’로, 창세기 2:7에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고 할 때의 동사다. 45:9에서 이 비유는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따지지 말라는 경고였지만, 64:8의 진흙은 따지지 않고 호소한다.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는 손수 만드신 것을 버리지 말아 달라는 간구다. 진흙은 스스로 모양을 바꾸지 못하지만 토기장이는 망가진 그릇을 다시 빚을 수 있다. 공동체는 이 관계를 근거로 다음 절에서 구체적으로 구한다.
64:9의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는 64:5의 “진노하셨사오며”와 같은 동사다. 백성은 하나님의 진노가 정당했음을 인정하면서 그 진노가 지나치지 않기를 구한다.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의 ‘영원히’를 NET는 ‘계속해서’로 옮긴다.1 하나님께서 죄를 기억하신다는 말은 죄를 계속 문제 삼아 벌하신다는 뜻이며,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43:25)는 약속이 그 반대편에 있다. “구하오니 보시옵소서”는 63:15의 첫 간구 “굽어 살피시며”와 같은 동사여서, 기도는 처음처럼 다시 보아 달라고 구한다. 그 이유는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이다. 6절에서 “다” 부정하고 “다” 시든다고 고백한 공동체가 8절에서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 9절에서는 “다” 주의 백성이라고 말한다. 같은 ‘우리 다’가 죄의 고백과 소속의 고백을 하나로 묶는다.
64:10-11은 눈앞의 폐허를 하나님께 보여 드린다. 주의 거룩한 성읍들과 시온은 광야가 되었고 예루살렘은 황폐해졌다. 62:4에서 다시는 시온을 “황무지”라 부르지 않겠다고 하신 그 말이 지금 예루살렘을 묘사한다. 10절은 성읍들을 “주의” 거룩한 성읍이라 부르고, 11절은 성전을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라 부른다. 하나님의 것도, 백성이 사랑한 것도 무너졌다. UBS 해설은 이 집을 열왕기하 25:9가 기록한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으로 보고, “아름다운”이 63:12, 14-15의 “영광”, “영화로운”과 같은 말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은 ‘아끼는 것들’이라는 복수 명사로, 성전을 포함한 유다의 소중한 장소 전체를 가리킨다.7 63장에서 하나님께 돌린 영광의 말이 불탄 성전을 묘사한다. 백성은 조상들이 찬송하던 자리를 상기시키며 하나님과 맺은 오랜 관계를 근거로 폐허를 돌아보시기를 구한다.
64:12는 “일이 이러하거늘”, 곧 ‘이런 일들을 두고도’ 하나님께서 아직 가만히 계시려 하시느냐는 질문으로 기도를 끝낸다. “가만히 계시려”는 63:15의 “그쳤나이다”와 같은 동사로 기도의 시작과 끝을 잇는다. “잠잠하시고”는 62:1에서 예언자가 시온을 위해 잠잠하지 않겠다고 하고, 62:6에서 성벽 위의 파수꾼들이 주야로 잠잠하지 않게 세워질 때 쓰인 동사다. 62:6-7은 파수꾼들에게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기까지 그분도 쉬지 못하시게 하라고 명했다. 이 기도는 그 명령에 응답하여, 잠잠하지 않던 이들이 하나님께 더 이상 잠잠하지 마시라고 아뢰는 기도다. 마지막 “심한 괴로움”의 ‘심한’은 9절에서 “너무” 분노하지 마시라고 할 때의 말이다. 기도는 답을 듣지 못한 채 질문으로 끝나고, 하나님의 응답은 65장에서 시작된다.
성경신학적 통찰
63:7-64:12는 구약의 공동체 탄식 전통 안에 있다. 공동체는 하나님의 과거 행적을 회상하고(63:7-14), 현재의 고통을 호소하며(63:15-19), 하나님의 개입을 구하고(64:1-4), 죄를 자백한 뒤(64:5-7), 관계를 근거로 간구하며 답을 기다린다(64:8-12). 시편 44편은 옛 구원을 회상한 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라고 부르짖고(44:23-24), UBS 해설이 63:15와 견주는 시편 80편도 하늘에서 굽어보시기를 구한다.2 이 전통에서 하나님께 “어찌하여”라고 묻는 일은 불신앙이 아니다. 백성은 언약의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리라 믿기에 약속과 현실 사이의 틈을 그분 앞에 내놓는다. 이사야서는 이 기도를 회복 약속(60-62장)과 하나님의 응답(65-66장) 사이에 두어,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때에 백성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 준다.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이라는 간구는 이스라엘이 기억하는 하나님의 강림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받는 백성을 건지려고 내려가셨고(출 3:8), 시내산에 불 가운데 강림하실 때 온 산이 크게 진동했다(출 19:18). 드보라의 노래도 여호와 앞에서 산들이 진동했다고 노래하고(삿 5:4-5), 시편 18:9와 144:5는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구한다. 64:3의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은 출애굽과 시내산의 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성전이 무너진 지금 백성은 가로막힌 하늘을 찢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구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백성 위에 불린다는 표현은 언약의 소속을 가리킨다(신 28:10). 예레미야 14:9의 공동체는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구하고, 다니엘은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아 달라고 기도하며 그 간구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라고 고백한다(단 9:18). 이사야 64:6의 더러운 옷 같은 의와 64:9의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는 다니엘의 기도와 같은 논리를 따른다.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과 긍휼에 기대어 간구한다.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부르는 일은 구약에서 드물지만 그 뿌리는 출애굽에 있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선언하셨다(출 4:22). 모세는 배은망덕한 백성을 꾸짖으며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고 묻는다(신 32:6). 이 노래에서 나란히 나온 아버지와 지으신 이라는 칭호를 이사야 64:8은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와 “주는 토기장이시니”로 다시 나란히 놓는다. 모세의 책망에 쓰인 칭호가 회개하는 공동체의 간구가 된 것이다. 예레미야 31:9에서도 하나님은 돌아오는 백성의 아버지이시다. 토기장이 비유는 이사야서에서 먼저 교만을 꾸짖는 데 쓰였고(29:16; 45:9), 예레미야 18:4-6에서는 터진 그릇을 다시 빚는 토기장이를 통해 심판의 경고와 다시 빚으실 가능성을 함께 담는다. 64:8의 진흙은 그 토기장이를 탓하지 않고, 자신이 그분의 손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근거로 버리지 말아 달라고 구한다.
64:7의 숨겨진 얼굴은 언약의 경고(신 31:17-18)와 죄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렸다는 59:2의 진단을 받아들인다. 동시에 공동체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54:8)는 약속을 안다. 그래서 64:9에서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라고 구할 수 있다. 하나님은 허물을 도말하고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셨고(43:25), 새 언약도 같은 약속을 담는다(렘 31:34). 레위기 26:40-42는 백성이 자기와 조상의 죄악을 자복하면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시리라고 말한다. 64:9의 공동체는 죄는 기억하지 마시고 언약은 기억해 주시기를 구한다. 솔로몬의 기도(왕상 8:46-50), 느헤미야 9장, 다니엘 9장처럼 이 공동체도 ‘우리’와 조상의 죄를 한데 묶어 고백한다. 다만 솔로몬이 향하라고 했던 성전은 이제 서 있지 않고, 백성은 폐허에서 성전이 없어도 들으시는 하나님께 직접 아뢴다.
64:11의 불탄 성전은 바벨론의 예루살렘 파괴를 떠올리게 한다(왕하 25:9). 시편 74편은 원수들이 주의 성소를 불살랐다고 탄식하고, 예레미야애가는 이방인이 성전의 보물에 손을 댄 일을 슬퍼하며(애 1:10)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5:20)라고 물은 뒤 응답을 기록하지 않은 채 끝난다. 이사야 64:12도 질문으로 끝난다. 이사야서는 이 기도가 드려진 정확한 때를 밝히지 않지만 기도는 성전 파괴의 기억을 안고 있다. 성경은 그런 질문을 지우지 않으며, 이사야서에서는 그 질문 바로 뒤에 하나님의 응답이 이어진다.
65장에서 하나님은 이 탄원에 답하신다.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65:1)는 63:19와 64:7의 이름 탄식을 되받는다. 백성은 하나님이 숨으셨다고 탄식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줄곧 부르셨다고 대답하신다.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65:6)는 64:12의 질문에 대한 답이지만 먼저 패역한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향한다. 63:17에서 백성이 “주의 종들을 위하사”라고 구한 말을 하나님은 65:8에서 “내 종들을 위하여”로 받으신다. 하나님의 응답은 그분을 버린 자들과 그분을 찾는 종들을 구별한다.
하늘을 가르고 오시라는 간구에 하나님은 무너진 것을 옛 모습대로 되돌리는 일보다 큰 응답을 약속하신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전 환난이 기억되지 않고(65:16-17), 황폐한 예루살렘은 우는 소리가 없는 즐거운 성이 되며(65:18-19), 하나님은 부르기 전에 응답하신다(65:24). 하나님은 자신이 사람이 지은 집에 갇히지 않으시며 통회하는 사람을 돌보신다고 하시고(66:1-2), 아버지를 부른 백성을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하듯 위로하신다(66:13). 이 흐름에서 백성 가운데 그 일을 이룰 사람은 없었다. 하나님은 중재자가 없어 자기 팔로 구원하시고(59:16; 63:5),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리라고 약속하신다(59:20). 이사야서는 그 구속자가 어떻게 오실지 다 밝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백성의 죄와 폐허를 해결하시리라는 기대를 남긴다. 신약은 그 기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증언한다.
기독론적 해석
이 탄원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한계를 정직하게 드러낸다. 조상은 후손을 알아보지 못하고(63:16), 백성의 의로운 행위는 더러운 옷 같으며(64:6), 주의 이름을 부르고 일어나 주를 붙잡는 사람이 없고(64:7), 성전은 불탔다(64:11). 하나님 편에서도 중재자가 없어 자기 팔로 구원하신다(59:16; 63:5). 백성 가운데 중재할 사람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오셔야 한다.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소서”라는 간구는 이 필요를 가장 날카롭게 표현한다.
마가복음 1:10에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신다. 마태와 누가는 “하늘이 열리고”라고 쓰지만 마가는 찢어지고 갈라지는 동작의 동사를 쓴다. 마가가 이사야 64:1을 인용한다고 밝히지 않으므로 인용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하늘이 갈라지고 하나님의 영이 내려오는 장면은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라는 간구와, 백성 가운데 성령을 두신 63:11, 14의 회상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는 소리가 난다. 백성이 아버지를 불렀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보내심으로 답하신다. 예수는 곧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다(1:15).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다고 탄식한 백성(63:19)에게 그 다스림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이다. 차이도 분명하다. 이사야의 공동체는 불과 진동 속의 강림을 구했지만, 마가복음에서 하늘은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나온 무리 가운데 선 한 사람 위로 열린다. 마가는 같은 동사를 십자가 장면에서 한 번 더 쓴다. 예수께서 숨지실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지고(15:38), 이방인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5:39)라고 고백한다. 원수들과 나라들이 주의 이름을 알기를 구한 64:2에 비추어 보면, 한 이방인이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는 일은 불과 진동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일어난다.
64:6은 사람의 의로운 행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율법에서 난 자기 의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얻고자 하며(빌 3:9),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고 말한다(고후 5:21). 바울이 이사야 64:6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두 본문은 같은 문제를 다룬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죄인의 더러움을 대신 짊어지신 아들을 통해 공동체의 호소에 답하신다. 이 은혜는 공의를 행하라는 부름을 없애지 않는다.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맞아 주시는 사람, 곧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는다(64:5).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르며 그 이름과 나라와 죄 사함을 구하라고 가르치셨다(마 6:9-12). 그 기도의 뼈대는 63:15-64:9의 탄원과 겹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은 신자들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시고(롬 8:15), 반역으로 근심하셨던 성령(63:10)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부름도 이어진다(엡 4:30). 교회는 이스라엘의 기도를 대신 차지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 기도에 참여하여 같은 아버지를 부른다. 깨어 주를 붙잡는 사람이 없다는 64:7의 자리에는, 제자들이 잠든 겟세마네에서 “아빠 아버지여”라고 기도하신 예수가 서 계신다(막 14:36-37). 얼굴을 숨기셨다는 백성의 탄식처럼 예수는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15:34).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탄식은 십자가에서 탄식하신 아들의 기도 안에서 아버지께 올라간다.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라는 64:9의 간구는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는 새 언약(렘 31:34)과 맞닿는다. 히브리서 10:17-18은 이 약속을 인용하여 죄를 사하셨으므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다고 결론짓고,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리신 몸의 제사가 그 약속을 이루었다고 설명한다(10:10-14). 불탄 성전 앞에서 제사의 자리를 잃은 이사야의 공동체가 드린 기도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제사로 응답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면서도 정죄의 두려움에 갇히지 않는다(롬 8:1).
불탄 성전 앞의 탄식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예수의 말씀과 이어지며, 요한은 그것이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킨 말씀이라고 설명한다(요 2:19-21).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시는 자리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새로 세워지고, 히브리서는 그의 육체인 휘장 가운데로 열린 새로운 살 길을 말한다(히 10:19-20). 사람이 지은 집에 갇히지 않으시는 하나님은(사 66:1) 성령으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며,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 이 연결이 불탄 성전을 두고 흘린 이스라엘의 눈물을 가볍게 만들지는 않는다. 예수께서도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다(눅 19:41).
바울은 고린도전서 2:9에서 “기록된 바”라는 말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사야 64:4와 가깝지만 글자 그대로의 인용은 아니다. 이사야는 ‘자기를 기다리는 자’를, 바울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말한다. 바울에게 그 감추어졌던 일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고 성령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지혜다(2:2, 7-10). 진흙과 토기장이의 고백도 신약에서 이어진다.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신자는 깨지기 쉬우나 그 안에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담기고(고후 4:6-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5:17). 이사야 65:17의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고, 토기장이께서는 진흙을 버리지 않으시고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로 지으신다(엡 2:10).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이 탄원이 끝나지는 않았다. 교회는 여전히 폐허와 불의와 고난 속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고, 하늘로부터 친히 강림하실 주를 기다린다(살전 4:16). 요한계시록 21:1-4는 이사야 65:17을 이어 새 하늘과 새 땅, 사람들과 함께 있는 하나님의 장막,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며, 성경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로 끝난다.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소서”라는 이사야의 부르짖음은 한 번 오셨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기도로 이어진다. 교회는 이미 오신 아들 때문에 소망을 품고, 아직 오지 않은 완성을 기다리며 탄식한다(롬 8:22-23).
현대적 적용
이 본문은 “어디 있나이까”, “어찌하여”,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라고 묻는 기도를 성경 안에 담았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정직하게 묻는 것도 기도다. 이 공동체는 질문만 쏟아 놓지 않았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구속자이시며 토기장이이심을 기억하고,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죄를 자백한 뒤 구할 것을 분명히 말했다. 정직한 탄식과 신뢰의 고백이 한 기도 안에 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고난당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데 쓰일 수 없다. 폭력이나 부당한 대우를 겪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토기장이시니 그냥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64:8을 거꾸로 쓰는 일이다. 토기장이를 고백한 공동체는 바로 다음 절에서 보아 달라고 외쳤고 마지막에는 아직도 잠잠하시냐고 항의했다. 교회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욥의 친구들처럼 성급히 이유를 설명하기보다 함께 탄식하며 그 형편을 하나님 앞에 아뢴다.
64:5-7의 자백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말한다. 교회 안의 부패나 상처를 두고 지도자 한 사람만 문제 삼고 침묵하거나 방조한 공동체의 책임은 묻지 않는다면 이 자백에 미치지 못한다. 고백은 말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고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는 일이다(58:6-7). 교회의 잘못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공동체는 피해자의 말을 먼저 듣고 사실을 밝히며 회복과 재발 방지의 책임을 져야 한다. 피해자에게 서둘러 용서를 요구하는 일은 이 본문의 자백과 거리가 멀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는 출석 인원과 헌금과 봉사 시간, 오랜 신앙 경력과 직분을 하나님 앞에 내세우려는 자기 의를 경계하게 한다. 그렇다고 선한 일을 그만두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를 맞아 주시며(64:5), 신자는 선한 일을 자랑의 근거가 아니라 받은 은혜의 응답으로 행한다. 이 구절을 가르칠 때 ‘월경의 옷’이라는 원문의 그림을 여성의 몸이나 월경을 부끄러운 것으로 만드는 데 쓰면 본문이 겨누지 않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비유의 대상은 공동체의 죄와 자기 의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라는 고백은 오래 끊지 못한 중독이나 반복되는 분노, 깊은 우울 앞에서 스스로를 고칠 힘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출발점이 된다. 64:7은 그런 상태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64:8은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다는 데서 다시 시작한다. 이 고백은 체념이 아니다. 진흙은 토기장이를 부르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며, 그 호소는 정직한 기도와 믿을 만한 공동체 앞의 고백, 필요한 상담과 치료로 이어질 수 있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는 고백이 아버지에게 상처 입은 사람에게는 쉽게 들리지 않을 수 있다. 이 본문의 아버지는 속이 끓어오르는 긍휼을 지니시고(63:15), 조상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자녀를 알아보시며(63:16), 손수 지은 것을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고(64:8), 같은 하나님이 어머니처럼 위로하신다(66:13). 교회는 사람의 아버지 경험을 그대로 하나님께 옮기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64:2에서 백성은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기를 구하며 원수를 다루는 일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특정 집단이나 민족을 향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쓸 수 없다. 이방인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본 자리는 십자가였다(막 15:39). 교회도 자기를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말과 섬김으로 증언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한다(마 5:44). 하나님은 자기를 기다리는 자를 위해 일하신다(64:4). 응답이 오기 전에도 하나님을 부르기를 멈추지 않은 이 공동체처럼, 교회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억눌린 자를 풀어 주며 무너진 곳을 보수하는 일(58:6-12)로 그 기다림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