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고레스에게 하신 말씀이 끝나자 8절은 하늘과 땅에 의와 구원을 내라고 명한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이사야 핸드북은 이를 고레스에게 하신 말씀(2-7절)과 이스라엘의 반응(9-13절) 사이에 놓인 찬가풍의 간주로 본다. “나 여호와”와 “창조하다”라는 표현은 앞 문맥과 이어진다. 히브리어 첫 줄에는 목적어가 없고 둘째 줄에 “의”(צֶדֶק, 체데크)가 나오지만, 개역개정은 첫 줄에도 공의라는 목적어를 밝혀 두 줄의 병행을 살린다.1 비가 내리고 땅이 열려 싹을 내듯, 피조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도록 부름받는다.
UBS는 이 문맥의 “의”를 포로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승리’로 읽기를 선호하면서도 ‘의’나 ‘구원하는 정의’라는 번역도 소개한다. “구원”(יֶשַׁע, 예샤)은 바벨론 포로에서의 구출을 뜻하며 40-55장에서 이 낱말은 여기에 처음 나온다. 하늘과 땅은 서로 다른 과업을 맡기보다 모두 의와 구원을 내도록 부름받는다. “창조하였느니라”(בְּרָאתִיו, 베라티우)의 단수 목적어를 개역개정은 “이 일을”로 푼다. 핸드북은 하늘과 땅이라면 복수가 필요하므로, 그 대상이 고레스보다 앞서 말한 승리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1 고레스의 군사력으로 이루어지는 듯 보이는 구출의 근원은 창조주 하나님이다.
BHS는 8-10절 끝에 작은 단락 표시를, 13절 끝에 큰 단락 표시를 둔다. 9-13절의 논쟁은 “화 있을진저”로 시작한다. UBS는 9-10절을 고레스를 통한 구원에 반발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선지자의 논평으로 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한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는 마소라 본문의 חֶרֶשׂ אֶת־חַרְשֵׂי אֲדָמָה(헤레스 에트-하르세 아다마), 곧 ‘땅의 질그릇 조각들과 함께 있는 한 조각’을 옮긴 말이다. RSV, NRSV, REB는 본문을 고쳐 ‘토기장이와 다투는 질그릇’으로 읽는다. Hebrew Old Testament Text Project(HOTTP)는 마소라 본문을 지지하며, 핸드북은 두 읽기를 모두 허용한다.2 “지으신 이”(יֹצְרוֹ, 요츠로)는 같은 절에서 “토기장이”로도 옮겨진다. 그릇을 빚는 이의 모습에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겹친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고 따지고, 그릇이 “손이 없다”고 흠을 잡는다. “손”(יָדַיִם, 야다임)은 한 쌍을 가리키는 쌍수형이다. UBS는 이를 그릇의 손잡이 한 쌍으로 읽어, 손잡이 없는 그릇이 손잡이를 달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모습으로 이해한다. GNT와 REB는 토기장이의 두 손으로 보아 솜씨가 없다는 불평으로 옮긴다.2 이어 11-12절의 하나님은 “내 손으로 한 일”,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라고 응답하신다. 비유는 자기 기대에 맞지 않는 구원 방식을 이유로 창조주를 심판하려는 태도를 겨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탄식하는 기도까지 금하는 문맥은 아니다.
10절은 아버지와 해산하는 어머니에게 무엇을 낳느냐고 따지는 자식을 꾸짖는다. 개역개정의 “어머니에게는”은 “여인에게”(וּלְאִשָּׁה, 울레잇샤)를 문맥에 따라 옮긴 말이다. 진흙과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따지듯 자식은 자신을 낳은 부모에게 따진다. 이 비유는 11절의 “내 아들들”로 이어지며, 이스라엘을 지으시고 기르신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드러낸다. 9-10절이 선지자의 논평이라면 11절부터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
11절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이라는 호칭은 9절의 창조주를 다시 가리킨다. UBS는 이를 43:1의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와 연결한다. 이어 마소라 본문은 “장래 일들을 내게 물으라,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라”에 가깝다. “물으라”(שְׁאָלוּנִי, 셰알루니)는 명령형이고, “명령하라”(תְּצַוֻּנִי, 테차부니)는 미완료형이다. RSV와 REB는 본문을 고쳐 “감히 내 자녀에 관하여 나에게 묻겠느냐”로 읽는다. UBS는 마소라 본문을 유지하면서 수사 의문으로 옮기는 Bible en français courant과 NIV를 선호하며, 개역개정도 “물으며”, “명령하려느냐”로 반문을 만든다. 9절의 그릇과 10절의 자녀는 11절에서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이라는 역순으로 돌아온다.3
명령으로 읽으면 장래 일은 하나님께 묻되 자녀와 손으로 하신 일은 그분께 맡기라는 뜻이 된다. UBS도 이런 번역 예를 제시한다.3 반문으로 읽으면 자녀를 회복하시는 일을 백성이 지휘하려 하느냐는 꾸짖음이다. 두 읽기는 질문의 초청인지 태도의 책망인지에서 갈리지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권한을 앞세운다. 12절의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는 11절의 “명령하려느냐”와 같은 동사를 쓴다. 백성이 명령하려는 상대는 하늘의 군대에게 명령하시는 분이다.
12절은 “내가”를 거듭 강조하며 땅과 사람을 지으시고 하늘을 펴신 하나님의 권한을 밝힌다. 그 창조주가 13절에서 고레스를 “일으킨지라”(הַעִירֹתִהוּ, 하이로티후)고 말씀하신다. UBS에 따르면 41:2, 25에서 동방과 북방의 인물을 일깨우실 때 쓴 동사와 같다. “공의로”(בְצֶדֶק, 베체데크)는 하나님의 의나 고레스의 정당한 승리를 가리킬 수 있으며, 핸드북은 후자를 선호한다. 하나님은 고레스의 길을 순탄하게 하시고, 그가 예루살렘을 건축하게 하신다. 이는 44:26, 28의 약속을 되풀이한다.4 41:25에서 고레스가 고관들을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듯 하리라고 했던 표현도 이 논쟁과 이어진다.
고레스는 “값이나 갚음이 없이” 포로를 놓는다. “갚음”의 בְשֹׁחַד(베쇼하드)는 구체적으로 ‘뇌물로’라는 뜻이다. UBS는 앞의 “값”을 일을 마친 대가로, 뒤의 말을 1:23처럼 ‘뇌물’로 옮기는 편이 낫다고 설명한다.4 하나님은 고레스에게 보수나 뇌물을 지불하여 일하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왕도(45:4-5) 백성을 놓고 성읍을 세우는 구원의 목적을 수행한다.
14절의 “너”는 여성 단수로, 시온을 여인으로 부르는 방식과 맞는다. 말씀을 받는 대상은 포로에서 돌아올 이스라엘이다. 43:3에 나온 애굽, 구스, 스바가 다시 등장한다. UBS는 “애굽의 소득”과 “구스가 무역한 것”을 그 민족들이 생산하여 이익을 얻는 물품으로 읽는다. REB처럼 노동자와 상인으로 고쳐 읽을 본문 증거는 없다. “스바의 장대한 남자들”은 키가 큰 사람들이다.5 사슬에 매여 뒤따라오는 모습은 고대 전쟁의 패자와 승자의 역전을 그린다. UBS는 “굴복하고”를 창세기 42:6에서 요셉의 형들이 절하듯 깊은 경의를 표하는 몸짓으로 보고, “간구하기를”은 문자적으로 ‘기도하다’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의 אַךְ(아크)는 ‘참으로’나 ‘오직’으로 읽을 수 있다.5 열방의 고백은 이스라엘의 독자적인 힘보다 그 가운데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향한다. 포로였던 백성의 회복은 그분의 함께하심에서 온다.
15절은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직접 부른다. GNT, NAB, NJPS는 스바 사람들의 말이 이어진다고 보지만, UBS는 14절의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뀌므로 선지자의 고백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고 판단한다.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אֵל מִסְתַּתֵּר, 엘 미스타테르)은 자기를 숨기시는 분을 뜻한다. 핸드북은 신상과 달리 보이는 형체가 없다는 뜻일 가능성도 소개한다.6 하나님은 백성이 납득하기 어려운 이방 왕을 통해 일하시지만 여전히 “구원자”다. 그 구원의 길은 사람이 다 알아볼 수 없으며, 선지자는 바로 그 하나님께 기도한다.
16절의 우상 제작자들에게 선언된 부끄러움과 욕은 17절에서 이스라엘이 겪지 않을 것으로 약속된다. 백성은 여호와께 구원을 받는다. “영원한 구원”(תְּשׁוּעַת עוֹלָמִים, 테슈아트 올라밈)에 대해 UBS는 이스라엘을 건지신 일이 오래 지속되는 유익을 가져온다는 뜻으로 설명하며 신약의 ‘영생’과 구별한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3인칭으로 말하다가 “너희”라고 직접 부른다.7 8절의 “구원”, 15절의 “구원자”, 17절의 “구원을 받아”와 “구원”은 같은 어근이다. 하늘과 땅에 구원을 싹트게 하라는 명령은 구원자를 부르는 고백과 지속되는 구원의 약속으로 맺어진다. 자기가 만든 우상을 의지한 자들은 수치를 겪지만, 하나님이 지으신 백성은 그분의 건지심으로 장래를 얻는다.
성경신학적 통찰
예레미야 18:1-11에서 토기장이는 손에서 터진 그릇으로 다른 그릇을 만든다. 하나님은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 백성이 자기 손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악에서 돌이키면 재앙을 돌이키시며, 선을 약속받은 민족도 악을 행하면 심판하신다. 이 비유는 백성에게 악한 길을 떠나라고 요구한다. 이사야 45장에서는 같은 창조주의 권한이 백성을 놓아줄 고레스를 일으키시는 구원에 나타난다.
이사야 29:15-16에서는 자기 계획을 하나님께 숨기는 사람들이 지으신 이에게 총명이 없다고 말한다. 45:9에서는 백성이 하나님의 일을 다 알아야 승인할 수 있다는 듯 따진다. 한쪽은 하나님이 모른다고 생각하고 다른 쪽은 자신이 다 안다고 여긴다. 두 비유는 피조물이 창조주를 자기 판단 아래 두려는 태도를 꾸짖는다.
이사야 64:7-12의 백성은 얼굴을 숨기시는 하나님께 황폐한 성읍과 불탄 성전을 아뢴다. 그들은 죄를 인정하면서도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고, 하나님을 아버지와 토기장이라고 부른다. 45장에서 따지는 데 쓰인 비유가 여기서는 자비를 구하는 기도가 된다.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께 탄식하고 회복을 구할 수 있는 까닭은 그분께 속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45:10-11의 “내 아들들”도 그 장래를 책임지시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드러낸다.
이사야 43:1-7에서 이스라엘을 지으신 하나님은 이름을 불러 자기 것으로 삼으시고, 물과 불 가운데 함께하시며 흩어진 자녀를 모으신다. 43:3에서는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속량물로 내주셨다고 하며, 45:13에서는 고레스가 보수나 뇌물 없이 포로를 놓으리라고 말씀하신다. 45:14에는 같은 민족들의 소득과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온다. 52:1-6은 딸 시온에게 목의 줄을 풀고 일어나라 명하고, 돈 없이 속량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리라고 약속한다. 각 비유는 열방을 속량물로 주심, 고레스에게 대가를 주지 않으심, 돈 없이 속량하심을 구별하여 말한다. 그 자유의 근원은 백성이 치른 값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다.
에스라 1:1-6에서 여호와는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귀환과 성전 건축을 공포하게 하신다. 백성도 마음이 움직여 일어나고, 주변 사람들은 은과 금과 물품으로 돕는다. 이방 왕을 통해 열린 자유 안에서 백성은 길을 떠나고 성전을 세우는 수고를 감당한다. 이사야 45:13의 구원은 역사 속에서 성읍과 예배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이 된다.
이사야 8:17에서 선지자는 야곱의 집에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기다린다. 그때의 숨으심은 심판의 경험이고, 45:15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이 감추어져 있다. 이사야 8:11-20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따라가거나 숨은 길을 안다는 이들을 찾기보다 여호와를 거룩하게 여기고 증거의 말씀을 간직하게 한다. 기다림의 근거는 하나님의 행동을 미리 예측하는 능력보다 그분이 주신 말씀에 있다.
시편 85편은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죄를 용서하신 은혜를 기억하며 다시 회복을 구한다.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85:11)라는 그림은 이사야 45:8과 주제가 닮았다.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구원에 응답하고, 의와 화평과 인애와 진리가 만난다. 백성은 구원의 시작을 경험한 뒤에도 다시 살려 달라고 기도하며, 어리석은 길로 돌아가지 말라는 권고를 듣는다(85:8). 이사야 45장의 이스라엘도 자기 기대와 다른 구원을 거부하고 우상에 의지하던 길에서 돌아서야 한다.
기독론적 해석
로마서 9:20-21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에 반문하는 사람에게 지음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따질 수 있느냐고 묻고, 토기장이가 여러 그릇을 만들 권한을 말한다. 질문은 이사야 29:16과 45:9의 비유와 같은 형식이다. 이사야에서는 이방 왕을 쓰시는 방식이, 로마서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가운데서 긍휼의 그릇을 부르시는 방식이 논쟁이 된다(9:23-24). 사람은 누가 자비를 받아도 되는지 결정할 수 없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조상들 때문에 사랑을 입었으며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고 말한다(11:28-29).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신실하심도 지키신다.
로마서 11장의 이방인 신자들은 원가지를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는 경고를 듣는다. 접붙은 가지를 뿌리가 지탱한다. 예상 밖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버림받았다고 선언할 권리를 얻은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붙드실 능력도 하나님께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스라엘의 약속을 읽으며 자기가 받은 긍휼을 고백한다.
고린도전서 1:18-25에서 십자가는 표적과 지혜를 구하는 기대에 어긋나지만, 부르심받은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시다. 이사야 45장의 낯선 구원 방식처럼, 십자가도 인간의 성공 기준에 맞지 않는다. 두 본문은 구원 방법을 정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다만 고레스는 하나님을 모르면서 쓰임받은 왕이고, 요한복음의 아들은 아버지를 아시고 나타내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쓰신 여러 일꾼 중 하나와 같은 관계에 계시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4:24-25에서 외부인은 교회의 예언을 듣고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고 말한다. 명시적 인용 표지는 없지만, 이 고백은 이사야 45:14에서 열방이 시온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말과 닮았다. 고린도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동체 안에서 그 고백이 나온다. 사슬에 매여 굴복하는 대신, 알아들은 말씀이 마음을 드러내어 스스로 경배하게 한다. 이사야의 열방 고백과 이어지는 대상은 공동체의 위세보다 그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는 고백 때문에 교회의 모든 행동이 승인되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 교회도 책망받았으며, 바울은 자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예수를 위해 성도들의 종이 된 자신을 선포한다고 말한다(고린도후서 4:5). 하나님의 백성도 말씀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회개해야 한다. 이사야에서 열방의 인정이 향한 분처럼 교회가 구할 영광도 하나님께 돌아간다.
값이나 뇌물 없이 포로를 놓으시는 약속은 먼저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된다. 로마서 5:6-11에서 그리스도는 죄인이며 원수였던 사람들을 위해 죽으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다. 이사야의 구출은 성읍과 공동체를 되찾는 역사적 해방이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죄로 멀어진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연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공로로 자유를 샀다고 말할 수 없다.
요한복음 1:14-18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나타내신다. 이사야 45:15의 숨으시는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방식으로 자기를 알리시는 구원자다. 그 계시의 절정은 사람이 만든 신상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오신 아들이다. 빌립보서 2:6-11에서 아들은 종의 형체를 취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며 하나님은 그분을 높이신다. 겉으로 수치스러운 자리에서 구원이 이루어졌다. 고난을 겪는 신자도 자기를 내어주신 그리스도께 의지한다.
히브리서 5:7-9의 아들은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고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다. 이는 죄를 범하던 아들이 개선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 고난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이루셨다는 뜻이다. 이사야 45:17의 “영원한 구원”이 포로에서의 구출이 지속되는 유익을 약속한다면, 히브리서의 영원한 구원은 고난을 거쳐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신 아들을 근원으로 삼는다. 그분은 자신을 단번에 드리고 살아 계셔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신다(7:24-27). 이 구원은 고레스의 생애나 바사 제국의 존속에 매이지 않는다. 신자는 고난을 앞서 겪으신 아들에게 의지하여 아픔을 정직하게 아뢰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수 있다.
현대적 적용
9-11절은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자기 기대에 맞추어 심판하려는 태도를 꾸짖는다. 원하는 일을 기도하면서도 그 방법까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는 요구는 내려놓아야 한다. 이사야의 백성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왕을 통해 구원받았듯,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범위를 자기 이해에 가두면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
토기장이의 자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다. 목회자나 부모나 기관의 책임자는 다른 사람을 지은 분이 아니다. 자기 결정에 질문하는 사람을 하나님께 대드는 진흙이라 부를 권한이 없다. 창조주 앞에서 모든 사람이 피조물이라는 고백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양심과 삶을 소유하려는 태도를 막는다.
이사야 64장의 백성은 하나님을 아버지와 토기장이라 부르면서 황폐한 성읍과 불탄 성전을 아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잃은 것을 숨기거나 슬픔을 눌러야 할 이유가 없다. 예수께서도 고난 중에 눈물로 간구하셨다. 자신을 맡기는 기도 안에서 아픔을 말하고, 이해하지 못한 길에서도 순종할 힘을 구할 수 있다.
고레스를 쓰신 하나님은 교회가 익숙하게 여기는 경계 밖에서도 일하신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이의 선한 수고에도 감사할 수 있다. 다만 도움을 준 권력자가 구원자의 자리를 얻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인물을 곧바로 고레스라 부르며 모든 행동에 신적 승인을 부여할 수 없다. 감사하면서도 잘못을 살피고 피해의 목소리에 응답할 책임이 있다.
열방이 사슬에 매여 오는 장면은 포로였던 백성의 회복을 약속한다. 교회가 다른 사람을 굴복시킬 권한을 주는 말씀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외부인이 경배하는 분은 하나님이며, 그 마음을 드러내는 것도 그분의 말씀이다. 은혜를 받은 교회는 자기 위세를 높이거나 이웃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을 향한 약속을 읽는 이방인 신자는 유대인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는 로마서 11장의 경고도 들어야 한다.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은 모든 사건의 이유를 당장 알아야만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구원의 길이 보이지 않아도 그분은 구원자이시다. 이스라엘의 수치를 끝내시는 능력이 백성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았듯, 신자의 소망도 자기 체면을 회복하는 힘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다. 그리스도는 앞서 고난을 겪으셨고 지금도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여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