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56:8까지 쫓겨난 사람을 모아 성산으로 인도하시던 하나님이 9절에서는 들과 숲의 짐승들을 “먹으러 오라”고 부르신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이사야 핸드북은 짐승을 이스라엘의 적대 민족으로, ‘먹다’를 멸망의 비유로 읽는다. 목적어는 없지만 뒤의 지도자 고발 때문에 그들이 먹잇감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3 백성을 지켜야 할 지도자들의 실상이 이어서 드러난다.

10절의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눈이 멀고 무지하다. 히브리어의 ‘그의 파수꾼들’을 개역개정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로 밝혀 옮겼다. 그들은 위협을 보지 못하고, 짖지 못하는 경비견처럼 경고하지 못한다. “무지하며”는 교육의 부족보다 어리석고 무책임한 지도력을 고발한다. 누워 잠을 좋아하는 모습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개의 비유다.4 NET는 도덕적 방향을 제시할 영적 지도자, 아마 선지자와 제사장을 가리킨다고 본다. “꿈꾸는 자들”(הֹזִים, 호짐)은 다른 곳에 나오지 않는 어근의 말이다. NET가 소개하는 BDB의 풀이는 ‘꿈꾸다, 헛소리하다’이고 HALOT의 풀이는 ‘헐떡이다’다. 후자는 앞뒤의 개 비유를 잇는다.1

11절의 개들은 아무리 먹어도 만족을 모른다. “탐욕이 심하여”(עַזֵּי־נֶפֶשׁ, 앗제-네페쉬)는 채워지지 않는 식욕을 그린다.1 “알지 못한다”는 말은 10절의 무지와 11절의 만족하지 못함, 깨닫지 못함에 반복된다. 10절의 לֹא יָדָעוּ(로 야다우)와 11절의 לֹא יָדְעוּ(로 야드우)는 휴지 악센트에 따른 모음 차이가 있을 뿐 같은 형태다. 경고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만족도 깨달음도 없다. 이제 그들은 목자로 불리지만 “다 제 길로” 가며 양 떼를 돌보지 않는다. “자기 이익”(לְבִצְעוֹ, 레비츠오)은 부당하게 얻는 재물이다. “사람마다”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는 관용어의 뜻이 담겼다.5 같은 탐욕은 57:17에서 하나님이 노하신 이유로 다시 나온다.

12절의 지도자들은 “오라”(אֵתָיוּ, 에타유)며 서로 술자리로 부른다. 9절에서 짐승을 부르던 것과 같은 말이다. UBS는 지도자가 다른 지도자들을 함께 취하자고 끌어들이며, 내일도 오늘보다 더 풍성하리라는 말은 술 취한 허세라고 설명한다.6 짐승은 이미 심판의 먹이를 향해 부름받았는데 목자들은 풍요로운 내일을 장담한다. 같은 부름이 지도자들의 안일함을 폭로한다.

57:1에서는 의인이 죽고 신실한 사람들이 거두어져도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 UBS는 “의인”(הַצַּדִּיק, 핫찻디크)이 단수여서 특정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면서도, 이어지는 복수 때문에 집단으로 보는 견해도 소개한다. 개역개정은 절 끝의 같은 단수를 “의인들은”으로 옮겼다. “진실한 이들”은 “헤세드의 사람들”(וְאַנְשֵׁי־חֶסֶד, 베안셰-헤세드)로,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이다.7 “거두어 감”은 죽음을 뜻한다. 깨닫지 못하는 목자 아래서 의인의 죽음을 깨닫는 사람도 없다.

57:1 끝의 “악한 자들 앞에서”는 מִפְּנֵי הָרָעָה(미프네 하라아), 곧 ‘악 또는 재앙으로부터’에 해당한다. 개역개정은 단수의 악을 악한 사람들로 풀었다. 악 때문에 의인이 죽었다는 읽기와 다가올 재앙을 피해 거두어졌다는 읽기가 모두 가능하다. NET는 박해받는 경건한 사람을 향한 사회의 무관심을 탄식하는 읽기를 택하면서, 2절의 안식을 따라 하나님이 고난에서 건지려고 데려가셨다는 읽기도 소개한다.2 UBS도 두 의미를 모두 허용한다.7 의인의 죽음을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고발은 어느 쪽에서도 같다.

2절은 그 의인이 평안에 들어가 침상에서 쉰다고 말한다. “들어간다”는 단수이고 “쉬리라”는 복수이며, “바른 길로 가는 자들”도 히브리어로는 단수다. 개역개정은 이를 모두 복수로 옮긴다. 한 사람의 죽음과 신실한 이들의 안식이 겹친다. “그들의 침상”(מִשְׁכְּבוֹתָם, 미쉬케보탐)은 방해받지 않고 쉬는 무덤이다.2 누가 그들을 죽였는지는 밝히지 않으나, 세상이 외면한 이들이 평안에 들어갔다고 증언한다. 이 침상은 7-8절에서 음행의 자리로 다시 등장한다.

3절은 “그러나 너희는 이리로 가까이 오라”는 말로 재판에 부른다. “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은 출생을 조롱하는 말이 아니라 점술과 다른 신을 섬기는 백성의 행위를 가리킨다. UBS는 구약이 우상 숭배를 성적 배신으로 자주 그리며 실제 제의적 성행위도 따랐다고 설명한다.8 “간음자와 음녀”의 히브리어 זֶרַע מְנָאֵף וַתִּזְנֶה(제라 메나에프 밧티즈네)는 ‘간음하는 남자와, 음행한 여자의 자손’으로, 뒤의 말이 명사가 아닌 “그녀가 음행했다”라는 동사형이다. NET는 두 글자가 뒤바뀌었다는 가정 아래 ‘간음한 여자와 창녀’로 고치는 제안을 소개한다. 현대 번역 대부분과 개역개정은 두 말을 명사로 옮긴다.2 4절은 입을 벌리고 혀를 내미는 희롱을 꾸짖으며, 그들을 패역의 자식과 거짓의 후손이라 부른다.

5절은 푸른 나무 아래서 음욕을 피우고 골짜기 바위 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 죄를 고발한다. “상수리나무 사이”(בָּאֵלִים, 바엘림)는 ‘신들 가운데서’로도 읽을 수 있으나 대부분의 번역은 나무로 옮긴다. “모든 푸른 나무 아래”는 예레미야 2:20, 3:6, 13처럼 우상 숭배가 널리 퍼졌음을 강조한다. “골짜기”는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와디다. UBS는 몰렉이나 바알에게 드리던 인신 제사가 이스라엘에도 스며들었고 요시야가 금지하려 했다고 설명한다(왕하 23:10). 다만 골짜기와 바위 틈에서 행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9 NET는 앞줄을 다산 제의의 성행위로, 뒷줄을 아이 제물로 읽는다.2 자녀와 풍요를 얻으려는 제의가 자녀의 생명을 빼앗았다.

6절에서 백성은 골짜기의 매끄러운 돌을 자기 몫과 제비로 삼아 전제와 예물을 바친다. “매끄러운 돌들”과 “네 몫”이 나란한 בְּחַלְּקֵי־נַחַל חֶלְקֵךְ(베할레케-나할 헬케크)는 비슷한 자음과 소리로 그 선택을 들려준다. NET는 다음 줄의 제물을 근거로 이 돌들을 우상으로 읽는다. 끝의 “내가 어찌 위로를 받겠느냐”(הַעַל אֵלֶּה אֶנָּחֵם, 하알 엘레 엔나헴)는 어렵다. 첫 글자를 의문사로 두면 이런 일 때문에 마음을 돌이키겠느냐는 반문이다. 앞 낱말의 끝 글자가 잘못 반복되었다고 보면 1:24처럼 ‘스스로 위로를 얻다’, 곧 ‘원수를 갚다’로 읽을 수 있다.2

7-8절은 언약 백성을 남편을 떠난 한 여인으로 그린다. 여성 단수 동사와 접미사가 이어지는 까닭이다.2 고발 대상은 특정 여성이 아니라 지도자와 백성 전체의 불충이다. “높고 높은 산 위”에 제사를 드리는 침상을 폈다. 2절에서 의인이 안식하던 침상과 같은 낱말이 여기서는 음행의 자리가 된다. 산이 “높이 들렸다”는 표현은 15절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지극히 존귀하며”와도 이어진다. 높은 산에 우상의 침상을 편 백성과 달리, 참으로 높으신 하나님은 통회하고 겸손한 사람과 함께 계신다.

8절의 “기념표”(זִכְרוֹנֵךְ, 지크로네크)는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우상 표지다.2 UBS는 집에서 드린 예배의 흔적으로 볼 가능성이 크다고 하면서 제의 장소 출입구로 보는 견해도 소개하고, ‘남자’와 관련된 말놀이로 남근 상징을 가리킬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10 말씀을 기록하라던 신명기 6:9의 문설주 뒤에 다른 신의 기념표가 놓였다. “기념표”와 같은 어근인 “생각하다”가 11절의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며”에 다시 쓰인다. 그들은 기억의 표를 세웠으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

8절 가운데의 짧은 문장들은 뜻을 정하기 어렵다. 개역개정의 “나를 떠나 벗고”에서 ‘벗고’는 피엘 동사 גִּלִּית(길리트, ‘네가 드러냈다’)인데, 히브리어에는 무엇을 드러냈는지 목적어가 없다. NET는 이 형태를 칼형 ‘떠났다’로 고쳐 읽는다. “그들과 언약하며”는 직역하면 ‘네가 그들에게서 너를 위해 잘랐다’(וַתִּכְרָת־לָךְ מֵהֶם, 밧티크라트-라크 메헴)이다. NET는 이 동사가 남성형으로 보이는 점, ‘언약’이라는 명사가 없는 점, ‘~와 함께’ 대신 ‘~에게서’라는 전치사가 쓰인 점을 들어 동사를 ‘사다’로 고쳐 읽고 ‘그들에게서 호의를 산다’로 옮긴다.2 UBS 해설은 ‘그들 가운데 몇과 언약을 맺었다’와 ‘그들 가운데 몇에게 뇌물을 주었다’(겔 16:30-34 비교)를 모두 가능한 해석으로 본다. 개역개정은 본문을 고치지 않고 언약의 뜻으로 옮겼다. 끝의 “그 벌거벗은 것을 보았으며”에서 ‘벌거벗은 것’은 히브리어로 ‘손’이다(יָד חָזִית, 야드 하지트, ‘네가 손을 보았다’). 이 문맥에서 ‘손’은 남성 성기를 가리키는 완곡어이고, ‘보다’도 성적 접촉을 가리키는 완곡어다. UBS 해설은 이 낱말이 56:5에서 고자들에게 약속된 “기념물”(יָד וָשֵׁם, 야드 바셈, ‘기념물과 이름’)에도 쓰였다고 짚는다.10 같은 낱말이 56:5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기념을, 57:8에서는 백성의 성적인 불충을 그린다. 하나님께 연합한 고자는 하나님의 집에서 ‘손’을 받고,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우상의 침상에서 ‘손’을 바라본다.

9절의 “몰렉에게”는 마소라 모음으로 לַמֶּלֶךְ(람멜레크), 곧 “그 왕에게”다. NET는 5절의 아이 제물 때문에 모음을 바꾸어 ‘몰렉’으로 읽는 견해와, 신하가 왕에게 조공을 바치듯 우상에 헌신한다는 읽기를 소개한다.2 UBS도 모음만 바꾸어 몰렉으로 읽는 번역들을 설명하며, 동사구는 사해사본과 칠십인역을 따라 ‘기름을 선물로 바쳤다’로 읽거나 마소라 본문대로 ‘기름을 가지고 나아갔다’로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솔로몬이 몰렉 산당을 지었고(왕상 11:7) 요시야는 그 숭배를 금지했다(왕하 23:10). “먼 곳”(מֵרָחֹק, 메라호크)과 “향품”(רִקֻּחָיִךְ, 릭쿠하이크)은 소리로 연결된다. 사신을 스올까지 보냈다는 말은 섬길 신을 찾아 지하 세계까지 내려간다는 과장으로 그 헌신을 폭로한다.11

10절에서 먼 길에 지친 백성은 “가망이 없다”(נוֹאָשׁ, 노아쉬)고 말하지 않는다. “네 힘이 살아났으므로”는 “네 손의 생명을 네가 찾았다”(חַיַּת יָדֵךְ מָצָאת, 하야트 야데크 마차트)로, NET는 생명을 새로워짐으로, 손을 힘으로 풀이한다.2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대신 다른 신을 찾는 일에 끈질기게 힘을 쏟는다.

11절은 누구를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UBS는 두려움의 대상이 다른 신, 아마 몰렉이라고 본다. “거짓”은 겉으로 전통적인 예배를 유지하며 실제로 다른 신을 섬긴 불충이다.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는 1절을 되풀이하여, 의인의 죽음을 외면한 백성이 하나님도 외면했음을 드러낸다. “내가 오랫동안 잠잠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NRSV처럼 고쳐 ‘눈을 감다’로 읽는 번역도 있지만 UBS는 마소라 본문을 권한다. 절 앞뒤에는 같은 ‘두려워하다’ 동사가 놓인다.12 NET는 하나님의 인내 때문에 백성이 처벌 없이 죄를 지어도 된다고 여겼다고 설명한다.2 다른 신을 두려워한 백성은 오래 참으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

12절의 “네 공의를 내가 보이리라”는 반어다. NET는 “네 이른바 의와 네 행위를 내가 고발하리라”로 옮긴다.2 56:1에서는 “나의 공의”가 나타나 구원을 이루지만, 여기서 드러나는 “네 공의”(צִדְקָתֵךְ, 치드카테크)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역개정은 “네가 행한 일”을 뒤 문장의 주어로 옮겼으나, 히브리어는 공의와 행위를 모두 ‘알리리라’의 목적어로 둔 뒤 “그것들이 너를 돕지 못하리라”고 한다. 백성이 내세우는 행위는 그들을 구하지 못한다.

13절에서 부르짖을 때 “네가 모은 우상들”이 구원하게 해 보라는 조롱이 나온다. “네 모은 것들”(קִבּוּצַיִךְ, 킵부차이크)은 다른 곳에 나오지 않는 명사다. NET는 종교 집회와 의식일 가능성도 두지만 우상이라는 문맥과 뒷줄 때문에 우상의 무리로 이해하는 견해를 소개한다.2 UBS도 우상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되 해석상의 추정임을 밝힌다. 그것들은 바람과 “기운”(הָבֶל, 하벨)에 날려갈 것이다. “바람”(רוּחַ, 루아흐)은 영이나 숨도 뜻하므로 하나님의 영이 그 도움을 날려버린다고 읽을 수도 있다.13 56:8에서 하나님이 흩어진 사람을 “모으시는” 데 쓴 어근으로 백성이 우상을 모았다는 말이 이어진다.

그와 달리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땅과 성산을 기업으로 받는다. NET는 “나를 의뢰하는 자”(וְהַחוֹסֶה בִי, 베하호세 비)의 피난을 충성의 환유로, 성산을 얻는 약속을 하나님의 임재에 자유롭게 나아감으로 설명한다.2 UBS는 성산을 시온이나 이스라엘 땅 전체로 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가 그 땅에서 계속 살며 차지하리라는 약속으로 읽는다(신 8:1; 시 37:9, 11).13 “거룩한 산”은 56:7에서 이방인에게 약속된 “성산”과 같은 표현이다. 높은 산의 우상 침상을 택했던 백성에게 하나님은 자신께 피하여 거룩한 산을 얻을 길을 여신다.

성경신학적 통찰

에스겔 34:2-5는 자기만 먹고 약하고 병들고 상한 양과 잃은 양을 돌보지 않은 목자들을 고발한다. 양들은 들짐승의 밥이 되었다. 이사야 56:9-11과 같은 그림이다. 양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목자들의 입에서 양을 건져 친히 돌보고, 다윗을 한 목자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신다(겔 34:10, 15-16, 23). 이사야 56:8의 쫓겨난 자들을 모으시는 하나님과 40:11의 어린 양을 품으시는 목자가 이 약속과 이어진다. 지도자의 권한은 자기 풍요보다 맡은 사람을 돌보는 데 쓰여야 한다.

예레미야 7:30-31은 유다가 성전을 더럽히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에서 자녀를 불살랐다고 고발한다. 하나님은 명령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은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요시야는 도벳을 더럽혀 몰렉에게 자녀를 불로 지나가게 하지 못하게 했다(왕하 23:10). 이사야 57장의 높은 산과 골짜기, 문설주 뒤에서도 예배와 생활이 우상에게 넘어갔다. 익숙하고 오래된 제의라도 생명을 해치는 행동을 하나님의 뜻으로 만들지 못한다. 이 고발은 하나님의 백성 자신을 향한다.

예레미야 3:6-10은 높은 산과 푸른 나무 아래서 행음한 북이스라엘과, 그 배신을 보고도 거짓으로 돌아온 유다를 고발한다. 결혼 언약의 비유에서 두 여인은 실제 여성의 도덕성을 대표하지 않고 두 공동체의 불충을 가리킨다. 이사야 57장의 여인도 지도자를 포함한 백성 전체다. 이들은 예배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신뢰의 대상을 바꾸었다. 회개는 의식 몇 가지를 바꾸는 일에 머물지 않고 여호와를 다시 신뢰하고 그분께 충성하는 응답이다.

신명기 6:4-9는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말씀을 마음에 두며 자녀에게 가르치고 문설주에 기록하게 한다. 이사야 57:8에서는 바로 그 문설주 뒤에 우상의 표를 둔다. 무엇을 기억하고 누구에게 삶을 맡기는지가 바뀌었다. 종교적 표지가 있어도 실제 말과 판단과 행동이 다른 신뢰를 따르면, 그 표지가 언약의 충성을 대신하지 못한다.

민수기 18:20에서 하나님은 땅을 기업으로 받지 않는 아론에게 자신이 분깃과 기업이라고 약속하신다. 이는 아론의 특별한 직분에 관한 규정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삶을 지탱하는 몫이라는 점에서 골짜기의 돌을 분깃으로 삼은 이사야 57:6과 대비된다. 57:13은 하나님께 피하는 자에게 땅과 성산을 약속한다. 시편 37:9, 11도 악인의 번성을 보고 조급해하지 말며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리라고 한다. UBS 역시 두 본문을 비교한다.13 자기 행위와 우상이 구원하지 못할 때, 하나님이 백성이 살아갈 자리를 주신다.

이사야 22:12-14의 사람들은 애곡하라는 부름에도 내일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자고 한다. 56:12의 지도자들은 내일도 더 풍요로우리라 장담한다. 체념과 낙관은 다르지만 하나님의 판단을 외면하고 현재의 책임을 잊는다는 점은 같다. “다 제 길로” 간 목자들의 모습은 53:6의 온 백성에게도 해당한다. 그곳에서 여호와의 종은 백성의 죄악을 담당한다. 57:12의 자기 의를 내려놓고 13절의 피난처로 돌아갈 은혜가 필요하다.

56:1-8에서는 하나님께 연합한 이방인과 고자에게 성산과 이름이 약속되지만, 56:9-57:13에서는 언약 공동체 안의 지도자와 백성이 책망받는다. 출신이나 이미 가진 지위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충성을 대신하지 못한다. 55:6-7은 악한 길과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고 너그럽게 용서하신다고 부른다. 57:13의 약속도 우상에 쏟던 열심에서 돌아설 길을 열며, 57:15에서는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통회하고 겸손한 자를 소생시키겠다고 하신다.

기독론적 해석

요한복음 10:11-16에서 예수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이시다. 이리를 보면 달아나는 삯꾼과 달리 자기 양을 아시고 자신을 내어주신다. 짐승이 와도 경고하지 않고 자기 배를 채우던 이사야 56장의 지도자들과 반대되는 모습이다. 하나님이 친히 돌보시고 다윗을 목자로 세우시겠다는 에스겔 34장의 약속이 예수의 사역에서 이루어진다.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도 모아 한 무리가 되게 하신다는 말씀은 이사야 56:8의 더 모으시겠다는 약속과 이어진다.

예수는 양을 아는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아시는 관계에 견주신다(요한복음 10:14-15). 자기 이익만 아는 지도자와 달리 그 앎으로 양의 생명을 돌보신다. 그분은 아버지의 계명을 따라 목숨을 스스로 내어주고 다시 얻으신다(10:17-18). 히브리서 13:20-21은 영원한 언약의 피로 큰 목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선한 일에 온전하게 하시기를 구한다. 살아 계신 목자의 은혜가 탐욕과 무감각을 버리는 순종을 가능하게 한다.

이사야 57:1-2는 당대 신실한 이들의 외면당한 죽음과 평안을 말한다. 베드로전서 2:22-25는 죄 없으신 예수께서 부당한 고난을 받고도 욕과 위협으로 갚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셨다고 증언한다. 그분은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여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셨다. 이사야 57장의 의인들에게 다른 사람의 죄를 담당하는 역할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을 탄식한 말씀은 의인의 고난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구원하신다는 복음과 이어진다.

베드로전서 2:25는 양처럼 길 잃었던 사람들이 영혼의 목자와 감독에게 돌아왔다고 한다. 이사야 53:6에서 제 길로 간 양들의 죄를 종이 담당한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왔기 때문에 받아주신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담당하여 회복하셨다. 자기 의가 도움이 되지 못한 이사야 57:12 뒤에 열린 피난의 길처럼, 신자는 공로보다 주의 구원을 의지한다. 그 은혜를 받아 돌아온 사람은 의에 대해 살도록 부름받는다.

마태복음 5:5에서 예수는 시편 37:11처럼 온유한 자에게 땅의 상속을 약속하신다. 이사야 57:13의 피난과 상속도 이 흐름과 이어진다. 히브리서 9:15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속량된 사람들이 영원한 기업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사야는 회복된 땅과 성산에서의 삶을, 히브리서는 새 언약의 중보와 영원한 기업을 말한다. 주님은 하늘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계시며 다시 나타나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다(9:24, 28). 신자는 눈앞의 안정이나 강한 권력의 보호를 사서 미래를 보장하려 하기보다 이 약속을 의지한다.

고린도전서 10:14-22는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 명한다.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하는 잔과 떡을 받는 사람은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할 수 없다. 이사야 57장이 결혼 언약의 배신을 고발하듯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근거로 우상과의 사귐을 끊게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던 백성에게 주신 경고는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는 질문으로 교회에도 들린다.

한 떡에 참여하는 여러 사람은 한 몸이다(고린도전서 10:16-17). 우상 선택은 그리스도와 그분께 속한 사람들의 관계를 해친다. 이사야에서 의인의 죽음을 마음에 두지 않은 이들이 하나님도 기억하지 않았듯, 그리스도의 식탁에 모인 교회는 주님을 기억하며 이웃의 생명을 돌보아야 한다. 새 언약의 잔을 받는 교회는 주께서 오실 때까지 그 죽음을 선포한다(11:23-26).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을 살리신 분께 충성하며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길을 버린다.

고린도전서 15:32-34는 부활이 없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는 태도가 나올 것이라 말하고, 깨어 의를 행하라고 권한다. 이사야 22장의 술자리와 56:12의 안일함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체념이나 풍요의 장담으로 현재의 불의를 정당화할 수 없다. 지도자도 구원받은 양이며 다른 사람의 양심과 미래를 소유하는 주인이 아니다. 죽고 살아나신 목자께 의지하여 자기 죄를 드러내고 돌이킬 수 있다.

현대적 적용

짖지 못하는 파수꾼과 자기 배만 채우는 목자는 위험을 외면한 지도자다. 학대와 부정, 약한 이의 피해 앞에서 자기 자리와 이익 때문에 침묵하는 지도자는 이 책망을 들어야 한다. 맡은 사람의 돈과 수고로 자기 안락함만 늘리면서 내일의 풍요를 장담할 수 없다. 권한을 맡은 이는 백성을 돌보시는 주인께 책임을 진다.

의인이 죽어도 마음에 두지 않는 무감각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불충과 이어진다. 억울한 죽음과 이웃의 상실을 자기 생활에 상관없는 일로 넘길 수 없다. 의인이 평안에 들어간다는 소망 때문에 그 죽음을 가볍게 여기거나 남은 이의 슬픔을 서둘러 끝낼 이유도 없다. 본문은 그 죽음을 애도하고 공동체의 외면을 책망한다.

백성은 더 많은 생명과 풍요를 얻으려는 제의에서 자녀의 생명을 빼앗았다. 어른의 성공과 안정을 위해 아이의 안전을 희생시키는 욕심도 이 고발 앞에 선다. 성적 비유는 특정 여성이나 어떤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를 낮추는 말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불충을 드러낸다. 종교의 이름으로 성적 폭력과 착취를 가릴 수 없다.

말씀을 기록할 문설주 뒤에 우상 표를 세운 백성은 종교적 표지와 실제 충성이 갈라진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가르치면서 성과와 이익을 위해 거짓을 허용하면 말과 삶이 어긋난다. 잘못된 길에 들인 수고가 많아도 그것이 계속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우상을 향한 열심을 멈추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한다.

백성이 내세운 “공의”와 행위는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 예배와 헌금과 봉사를 이웃의 고통과 자기 잘못을 덮는 근거로 삼을 수 없다. 하나님의 오랜 침묵도 죄를 허락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재물이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하고 이웃을 희생시킨다면, 실제로 누구를 피난처로 삼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께 피하는 이는 자기 노력이 아니라 땅과 성산을 주시는 분을 의지한다. 그리스도의 식탁을 받는 교회도 자신을 위해 몸을 내어주신 주님께 속한다. 그 은혜를 고백하면서 다른 이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 부활하신 목자의 약속은 탐욕을 버리고 이웃의 생명을 지킬 힘과 소망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