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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s xmlns:content="http://purl.org/rss/1.0/modules/content/" version="2.0"><channel><title>충성된 성경주해</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link><description>성경 본문을 따라 읽는 주해</description><language>ko</language><item><title>시편 20:1-9 환난 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백성</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ps/20.1-9/</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ps/20.1-9/</guid><description>전쟁을 앞둔 백성은 기름 부음 받은 왕을 위해 기도하며 여호와의 이름을 자랑한다. 왕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백성의 기쁨이 되고, 고난 가운데 기도하신 그리스도는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시편 20편은 전쟁에 나가는 왕을 위한 공동체의 기도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는 표제는 BHS에서 20:1이므로 개역개정 20:1-9는 BHS 20:2-10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개역개정의 절 번호를 따른다. 표제의 “다윗의”는 다윗이 지었다는 뜻으로도, 다윗과 그의 왕가에 속한 시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어느 쪽이든 기도의 중심에는 다윗 계열의 왕이 있다.&lt;/p&gt;&lt;p&gt;1-5절에서 백성은 왕을 “너”라고 부르며 기도한다. 6절에서는 한 화자가 “내가 아노니”라고 확신하고, 7-9절에서는 “우리”의 고백과 간구가 이어진다. 성소와 시온, 소제와 번제는 출전 전 예배를, 깃발과 병거와 말, 엎드러짐과 일어섬은 전쟁을 가리킨다. 특정 왕이나 전쟁을 지목할 정보는 없다. 이어지는 시편 21편은 여기서 구한 구원을 감사하는 노래다.&lt;/p&gt;&lt;p&gt;“응답하시고”(יַעַנְךָ, 야안카)는 미래 서술로도 읽을 수 있지만, 1-5절의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왕을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기원이다. “환난 날”은 적에게 압박받는 위기의 때이며, “높이 드시며”는 적이 미칠 수 없는 높은 곳에 두어 보호해 달라는 뜻이다. 회중이 부르는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에는 환난 날에 야곱에게 응답하시고 그가 가는 길에서 함께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담긴다(창 35:3).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을 가리키며, 1절과 5절, 7절을 잇는다.&lt;/p&gt;&lt;p&gt;2절의 도움은 성소와 시온에서 온다. “붙드시며”라는 간구는 왕이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해 달라는 뜻으로, 8절의 “바로 서도다”에 이어진다. 성전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은 거룩한 하늘에서 응답하신다(6절). 솔로몬도 백성이 전쟁에 나가 성전을 향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들으시기를 구했다(왕상 8:44-45). 성소는 하나님을 가두는 장소가 아니라 백성이 그분의 약속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곳이다.&lt;/p&gt;&lt;p&gt;3절에서 회중은 왕이 드린 소제와 번제를 기억하고 받아 주시기를 구한다. “받아 주시기를”(יְדַשְּׁנֶה, 예닷셰네)은 기름지고 풍성하다는 뜻과 관련되어, 제물을 좋게 여기시기를 바라는 표현이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리며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셨지만(삼상 7:9-10), 사울은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번제를 드려 책망받았다(삼상 13:8-14). 제사는 전쟁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예배다. 절 끝의 “셀라”는 음악이나 예배와 관련된 말이며 정확한 기능은 알려져 있지 않다.&lt;/p&gt;&lt;p&gt;4절의 “네 마음의 소원대로”는 문자적으로 왕의 마음을 따라 허락해 달라는 기도다. 마음에는 바람뿐 아니라 생각과 판단도 포함된다. 이어지는 “모든 계획”은 출전을 앞둔 왕의 결정과 전략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아히도벨의 계략도 꺾으신 분이다(삼하 17:14). 회중은 왕의 소원과 계획을 하나님의 허락에 맡긴다. 4절과 5절에서 되풀이되는 “이루어 주시기를”은 채워 주고 성취해 주시기를 바라는 말이다.&lt;/p&gt;&lt;p&gt;5절에서 회중은 왕이 구원받으면 개가를 부르겠다고 다짐한다. “너의 승리”에 쓰인 말은 구원과 건짐을 뜻하며, 전쟁에서 왕이 얻을 승리를 가리킨다. 시편 21:1은 같은 구원을 하나님이 베푸신 것으로 노래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깃발을 세우는 백성은 왕의 운명에 자신들의 운명이 달려 있음을 안다. 절 끝에서는 왕의 모든 기도에 응답해 주시기를 다시 구한다.&lt;/p&gt;&lt;p&gt;6절의 “이제 내가 아노니”는 간구에서 확신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이 화자가 제사장인지 선지자인지 왕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구원하시는”(הוֹשִׁיעַ, 호쉬아)은 완료형으로, 앞으로 베푸실 구원을 이미 이루어진 일처럼 확신한다. “기름 부음 받은 자”(מְשִׁיחוֹ, 메쉬호)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다(삼상 10:1; 16:13). 1절에서 구했던 응답을 이제는 하나님이 왕에게 베푸실 일로 고백한다. 구원하는 오른손의 힘은 바로의 군대를 꺾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떠올리게 한다(출 15:6).&lt;/p&gt;&lt;p&gt;7절의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에는 히브리어 동사가 따로 없다. 문장 끝의 “자랑하리로다”(נַזְכִּיר, 나즈키르)가 앞의 두 무리와 “우리”에 공통으로 걸린다. Robert G. Bratcher와 William D. Reyburn의 UBS 해설은 이를 승리의 근거로 무엇을 언급하며 자랑하거나 의지하는 뜻으로 풀이하고, 신뢰를 담은 “부르다”가 적절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칠십인역과 시리아어 역본에 기대어 “우리는 강하다”로 읽는 본문 수정 제안도 있다. Dahood는 이 동사를 ‘남자’와 관련된 말에서 이끌어 ‘강하다’로 풀이한다. 개역개정은 한 동사를 앞에서는 “의지하나”, 뒤에서는 “자랑하리로다”로 나누어 옮겼다. 병거와 말의 군사력에 기대는 사람들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회중이 대조된다.&lt;/p&gt;&lt;p&gt;8절의 “그들”은 7절에서 병거와 말을 의지한 사람들이다. “엎드러짐”은 패배를, “일어나 바로 섬”은 승리를 나타내며 앞 행동을 뒤집는다. 히브리어는 과거형으로 이 장면을 그리지만, 출전을 앞둔 시의 흐름에서는 앞으로의 승리를 확신하며 노래하는 표현이다. 2절에서 왕을 붙들어 달라고 기도한 회중은 이제 자신들도 하나님께 붙들려 서리라고 고백한다.&lt;/p&gt;&lt;p&gt;9절은 “여호와여 구원하소서”(הוֹשִׁיעָה, 호쉬아)라는 명령형 간구로 돌아간다. BHS의 구분 악센트는 이 말 뒤에서 끊어 “왕”(הַמֶּלֶךְ, 함멜레크)을 다음 구절과 잇는다. “우리에게 응답하시기를”(יַעֲנֵנוּ, 야아네누)은 3인칭이므로 “왕이 우리가 부르는 날에 우리에게 응답하시기를”로 읽을 수 있다. 이 왕을 지상의 왕으로 볼 수도, 하나님으로 볼 수도 있다. UBS 해설이 소개하는 Hebrew Old Testament Text Project는 구절 경계와 왕의 지시 대상에 따라 네 가지 읽기를 제시하고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곧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왕이 응답하시기를”에서 왕을 사람 또는 하나님으로 읽는 두 해석과,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그가 응답하시기를”에서 응답의 주체를 왕 또는 하나님으로 읽는 두 해석이다. 여러 번역은 칠십인역과 타르굼, 히에로니무스의 번역을 따라 하나님께 직접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라고 간구한다. 개역개정도 왕의 구원과 회중의 응답을 구하는 두 간구로 옮겼다. 여기서 응답은 요청을 듣고 실제로 도와주시는 일이다.&lt;/p&gt;&lt;p&gt;처음의 “환난 날”은 마지막의 “우리가 부를 때”와 맞물린다. 왕을 향한 “너”는 왕을 두고 말하는 “그”를 거쳐 백성의 “우리”로 이어진다. 회중은 확신을 고백한 뒤에도 다시 구원을 구한다. 왕과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은 그들이 이름을 부르는 여호와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병거와 말을 의지하는 군대 앞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구하는 기도는 출애굽의 기억을 따른다. 출애굽기 14:10-31에서 이스라엘은 바로의 병거를 보고 두려워했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싸우셨다. 바다를 건넌 백성은 여호와가 말과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다고 노래하고, 원수를 부수신 오른손을 찬양했다(출 15:1, 6). 홍해 앞의 백성은 서서 구원을 보았고, 시편 20편의 군대는 전장에 나간다. 두 본문에서 구원을 베푸시는 분은 여호와다.&lt;/p&gt;&lt;p&gt;신명기 17:14-20은 왕이 말을 많이 두거나 말을 얻으려고 백성을 애굽으로 돌려보내지 말고, 율법을 읽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형제 위에 마음을 높이지 말라고 명한다. 신명기 20:1-4에서는 적의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아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제사장은 전쟁에 나가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함께 가시며 싸워 구원하신다고 선포한다. 시편 20편의 회중은 그 약속을 의지하며 왕을 위해 기도한다.&lt;/p&gt;&lt;p&gt;이 신뢰는 이스라엘 왕들의 군사 정책도 심판한다. 솔로몬은 병거와 말을 모으고 애굽에서 말을 들여왔다(왕상 10:26-29). 이사야 31:1-3은 애굽의 말과 병거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않는 자들을 책망한다. 애굽은 사람이고 그 말들은 육체이므로, 여호와가 손을 펴시면 돕는 자와 도움받는 자가 함께 넘어진다. 호세아 14:3의 회개도 앗수르의 구원과 말을 타는 일을 버리겠다는 고백을 포함한다. 시편 20:7-8의 경계는 이스라엘의 원수에게만 향하지 않는다.&lt;/p&gt;&lt;p&gt;다윗이 골리앗을 맞설 때에도 무기와 하나님의 이름이 대조된다(삼상 17:41-52). 골리앗은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나왔지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갔다. 다윗은 자신이 쓰는 물매가 아니라 여호와께 구원이 달려 있다고 고백했다. 골리앗이 쓰러지자 이스라엘 군대가 일어나 추격했다. 아직 왕이 되지 않은 다윗의 고백을, 시편 20편에서는 기름 부음 받은 왕을 위해 기도하는 온 백성이 자기들의 고백으로 삼는다.&lt;/p&gt;&lt;p&gt;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백성은 하나님이 먼저 자신을 알리신 은혜에 의지한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3:13-15에서 모세에게 이름을 알리시고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게 하셨다. 아말렉과 싸운 뒤 모세는 제단을 “여호와 닛시”라 불렀다(출 17:15). 그곳의 ‘깃발’과 시편 20:5의 동사는 서로 다른 히브리어지만, 백성이 여호와를 의지하여 모인다는 뜻에서 연결된다. 잠언 18:10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인이 달려가 안전을 얻는 견고한 망대로 부른다.&lt;/p&gt;&lt;p&gt;성소와 하늘을 향한 기도는 왕들의 위기에서도 이어진다. 히스기야는 앗수르가 보낸 위협의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기도했다(왕하 19:3, 14-23). 많은 병거를 자랑하던 앗수르 왕은 예루살렘을 차지하지 못하고 돌아갔다(19:36). 여호사밧도 성전 뜰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고, 백성은 전장에 나가며 여호와를 찬양했다(대하 20:5-22). 시편 20편처럼 백성은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께 간구하고 구원의 확신을 노래했다.&lt;/p&gt;&lt;p&gt;시편 2편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은 하나님이 시온에 세우신 왕이다(2:2, 6). 하나님은 그에게 구하면 나라들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시고(2:8), 그에게 피하는 사람의 복을 선언하신다(2:12). 시편 20편에서는 백성이 그 왕을 위해 실제 환난 가운데 기도한다. 시편 21편에서는 왕이 여호와의 구원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이 그의 마음의 소원과 입술의 요구를 이루어 주셨다고 감사한다(21:1-2). 시편 20:4-5의 간구가 감사로 이어지며, 왕도 여호와를 의지한다(21:7).&lt;/p&gt;&lt;p&gt;왕을 위한 기도에는 다윗의 집을 세우시겠다는 약속이 놓여 있다(삼하 7:12-16). 왕을 “이스라엘의 등불”이라 부른 말에는 왕의 운명과 백성의 삶이 얽혀 있음이 드러난다(삼하 21:17). 그러나 다윗 왕조는 바벨론에 무너졌고 성전도 불탔다. 예레미야애가 4:20은 백성의 생명처럼 여겼던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붙잡혔다고 탄식한다. 현재의 왕을 위한 기도는 왕조의 실패를 겪으며 약속을 온전히 이룰 왕을 기다리는 기도로 이어진다.&lt;/p&gt;&lt;p&gt;스가랴 9:9-10은 시온에 임하는 왕을 공의롭고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는 왕으로 그린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으시며, 그 왕은 이방에 화평을 선포한다. 시편 20편에서 병거와 말보다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던 백성은, 이제 병거와 말을 끊으시는 왕의 통치를 바라본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시편 20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는 본래 전쟁에 나가는 다윗 왕조의 왕이다. 그 왕들은 모두 죽었고, 왕조는 끝내 무너졌다. 기름 부음 받은 왕을 기다리던 소망에 예수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분으로 나타나셨다.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1을 읽으시고 그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다(눅 4:18-21). 베드로도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다고 증언한다(행 10:38). 신약의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칭호다.&lt;/p&gt;&lt;p&gt;예수는 스가랴 9:9의 말씀을 따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다(마 21:4-5). 무리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다(21:9). 호산나는 시편 118:25의 “구원하소서”라는 간구에서 나온 말이다. 시편 20:9의 회중처럼 무리도 다윗의 자손을 맞으며 구원을 외쳤다. 그 왕은 며칠 뒤 로마 권력 앞에서 붙잡혀 십자가에 달리셨다. 병거와 말을 끊는 왕은 자기 몸을 내어 주셨다.&lt;/p&gt;&lt;p&gt;겟세마네에서 예수는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시고, 할 수만 있다면 잔이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면서 자기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기를 구하셨다(마 26:38-39). 시편 20:4에서 백성은 왕의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구했다. 예수는 자기의 소원을 아버지의 뜻 아래 두셨고, 그 순종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셨다.&lt;/p&gt;&lt;p&gt;제자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쳤을 때 예수는 칼을 도로 꽂으라고 하셨다. 아버지께 구하면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실 수 있으나, 그는 성경을 이루는 길로 붙잡히셨다(마 26:51-54). 빌라도 앞에서도 자기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므로 종들이 싸우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요 18:36). 병거와 말 대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신뢰는, 하늘의 군대를 부를 수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왕에게서 온전히 나타난다.&lt;/p&gt;&lt;p&gt;히브리서 5:5-7은 시편 2:7의 아들 선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그가 심한 통곡과 눈물로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에게 간구하여 들으심을 얻었다고 말한다. 아들은 죽음을 피하지 않고 고난을 받으며 순종함을 배우셨다(5:8-9). 하나님은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24, 36). 시편 20:6에서 확신하는 기름 부음 받은 왕의 구원은 그리스도에게서 죽음을 통과하는 부활로 이루어진다. 왕이 구한 생명을 영원히 주셨다는 시편 21:4의 소망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다.&lt;/p&gt;&lt;p&gt;시편 20:3의 왕은 소제와 번제를 드리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엡 5:2). 단번에 드리신 몸의 제사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으며, 그 한 제사는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하게 한다(히 10:10-14).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 그 제사를 받으셨음을 드러내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제사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lt;/p&gt;&lt;p&gt;그리스도가 이기신 원수는 사람을 묶어 두던 죄와 죽음의 권세다. 그는 십자가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이기셨고(골 2:15),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를 멸하시며 죽음의 두려움에 매였던 사람들을 놓아 주셨다(히 2:14-15).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고 일으키셨다(엡 2:5-6). 시편 20편에서 왕의 승리를 백성이 기뻐하듯, 교회는 왕의 승리에 참여하여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주시는 승리를 감사한다(고전 15:54-57).&lt;/p&gt;&lt;p&gt;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믿음은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로 이어진다.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요엘의 말씀을 인용하며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롬 10:9-13). 베드로는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다고 증언한다(행 4:12). 하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를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빌 2:9-11). 교회는 그 이름 아래 모이고, 예수가 가르치신 대로 그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한다(요 16:23-24).&lt;/p&gt;&lt;p&gt;시편의 백성이 성소를 향해 하늘의 응답을 구했다면, 교회는 하늘 성소에서 섬기시는 대제사장을 의지한다(히 8:1-2).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는다(히 4:14-16). 백성의 기도를 받던 왕과 달리, 이 왕은 백성을 위해 간구하신다. 예수는 베드로의 믿음을 위해 기도하셨고(눅 22:31-32), 제자들과 그들의 말로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다(요 17:9, 20). 지금도 항상 살아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위해 간구하신다(히 7:25; 롬 8:34).&lt;/p&gt;&lt;p&gt;히브리서 5:9-10은 온전하게 되신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나님께 대제사장으로 칭함을 받으셨다고 말한다. 시편 20편에서 왕의 구원은 백성의 기쁨이었다. 교회는 들으심을 얻은 아들과 그가 이루신 구원을 의지하여 환난 중에도 기도하며, 그 승리가 온전히 드러날 날을 기다린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회중은 왕의 환난과 예배, 소원과 계획을 위해 기도한다. 바울도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한다(딤전 2:1-2). 지도자를 위한 기도에는 그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아래 두는 일이 따른다. 신명기 17장의 왕처럼 지도자도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 회중은 지도자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구하지 않고,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도록 기도한다.&lt;/p&gt;&lt;p&gt;3절은 하나님이 제사를 기억하고 받아 주시기를 구한다.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권리가 생기지는 않는다. 사울은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번제를 드려 책망받았다(삼상 13:8-14). 예배하며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 계획까지 하나님께 맡긴다. 그리스도가 겟세마네에서 자기 소원을 아버지의 뜻 아래 두신 순종이 우리의 기도를 이끈다.&lt;/p&gt;&lt;p&gt;병거와 말은 승리의 근거로 자랑할 만한 군사력이었다. 오늘의 교회도 재정과 규모, 영향력을 구원의 근거로 내세울 수 있다. 다윗은 물매를 사용하면서도 구원이 여호와께 속한다고 고백했고, 잠언 21:31은 싸울 날을 위해 마병을 준비하되 이김은 여호와께 있다고 말한다. 준비한 수단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대신할 때, 회중은 자신이 누구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lt;/p&gt;&lt;p&gt;6절의 확신 뒤에도 9절의 간구가 이어진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아직 응답받지 못한 것을 계속 구할 수 있다. 예수도 고난 중에 간구하여 들으심을 얻으셨으며,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시편의 승리를 근거로 믿는 사람은 반드시 원하는 방식으로 고난을 벗어난다고 약속할 수 없다. 교회는 이미 들으심을 얻으신 아들을 의지하여 회복을 구하고, 기다리는 중에도 아버지께 자신을 맡긴다.&lt;/p&gt;&lt;p&gt;왕과 백성의 연대는 군사력이나 정치 세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 기도의 왕을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교회는 칼을 도로 꽂으라고 하신 왕의 명령을 따른다. 나라의 안전과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침략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일에 동조하지 않으며, 평화를 이루는 일에 힘쓴다.&lt;/p&gt;&lt;p&gt;5절의 회중은 왕의 구원을 자신들의 기쁨으로 노래한다. 교회도 한 몸이므로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한다(고전 12:26). 그 기쁨의 근거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졌다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에 있다. 환난 중에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교회는 지금도 자기 백성을 위해 간구하시는 왕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07-208/"&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0:7-8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09/"&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0:9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시편 21:1-13 주의 힘으로 기뻐하는 왕</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ps/21.1-13/</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ps/21.1-13/</guid><description>시편 21편은 여호와께서 왕의 기도에 응답하여 관과 생명과 승리를 주신 일을 감사한다. 중심에는 왕의 신뢰와 지존하신 이의 인자하심이 있고, 시는 여호와의 능력을 찬송하며 끝난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시편 21편은 20편과 같은 표제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를 단다. BHS는 표제를 1절로 세므로 개역개정 21:1-13은 BHS 21:2-14에 해당한다. 시는 여호와의 힘으로 시작하고 같은 능력을 찬송하며 끝난다. 개역개정은 1절과 13절에서 같은 명사를 “힘”과 “능력”으로 달리 옮겼다. Robert G. Bratcher와 William D. Reyburn의 UBS 번역 해설은 두 곳을 같은 말로 옮겨 시 전체를 감싸는 반복을 살리라고 권한다. 1-6절의 감사, 7절의 신뢰 고백, 8-12절의 승리 선언에 이어 13절에서 회중이 여호와를 찬송한다.&lt;/p&gt;&lt;p&gt;왕은 자신의 힘이 아닌 여호와의 힘과 구원 때문에 기뻐한다(1절). 히브리어는 “주의 힘으로”와 “주의 구원으로”를 각 행의 앞에 놓는다. 후반절은 “얼마나 크게 즐거워하는지요”라는 감탄이며, 개역개정은 이를 “크게 즐거워하리이다”로 옮겼다. 여기서 구원은 전쟁에서 얻은 승리를 포함한다. 표제가 다윗을 언급하지만 왕의 이름이나 전쟁은 밝혀지지 않아, 다윗 왕조의 다른 왕을 위해서도 부를 수 있는 노래다.&lt;/p&gt;&lt;p&gt;2절의 “마음의 소원”과 “입술의 요구”는 속으로 품은 바람과 입으로 드린 간구를 짝짓는다. “들어 주셨으며”는 문자적으로 “주셨다”는 말로, 4절에서 생명을 “주셨으니”라는 말과 같다.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의 부정어는 왕이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7절), 원수가 뜻을 “이루지 못하도다”(11절)에도 반복된다. 왕에게 주어진 응답과 안정이 원수의 실패와 대조된다. 끝의 “셀라”(סֶּלָה, 셀라)는 낭송이나 연주의 쉼 또는 전환을 표시한다고 흔히 이해하지만 정확한 뜻은 확정되지 않았다.&lt;/p&gt;&lt;p&gt;하나님은 왕을 “아름다운 복으로 영접”하고 머리에 순금 관을 씌우신다(3절). “영접하시고”(תְקַדְּמֶנּוּ, 테카데멘누)는 앞서 맞는다는 뜻을 담는다. 왕은 하나님이 먼저 베푸신 복을 받는다. 관을 “씌우셨나이다”의 동사는 뒤에서 왕을 복으로 삼고, 원수를 화덕 같게 하며, 돌아서게 하는 데 반복된다(6, 9, 12절). 사무엘하 12:30의 다윗이 얻은 금관이 전리품이었다면, 이 시의 관은 하나님이 왕에게 주신 권위를 드러낸다.&lt;/p&gt;&lt;p&gt;왕이 구한 생명에 하나님은 “영원한 장수”로 응답하신다(4절). 히브리어는 “날들의 길이, 영원히 또 영원히”(אֹרֶךְ יָמִים עוֹלָם וָעֶד, 오레크 야밈 올람 바에드)라고 노래한다. 이는 전장에서의 생존과 왕의 긴 날을 바라던 궁정의 언어와 통한다. 밧세바도 다윗에게 만세수를 빌었다(왕상 1:31). 시의 넘치는 표현에는 구한 것보다 넉넉히 주신 은혜가 담기며,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세우겠다는 약속(삼하 7:16)이 겹친다.&lt;/p&gt;&lt;p&gt;“주의 구원”이 왕을 기쁘게 할 뿐 아니라 그의 영광도 크게 한다(5절). 개역개정은 구원을 주어로 세웠지만, 히브리어의 뜻은 “주의 구원으로 그의 영광이 크다”이다. 하나님이 입히신 “존귀와 위엄”은 시편 104:1에서 하나님 자신의 위엄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왕의 위엄은 그에게 맡겨진 선물이다.&lt;/p&gt;&lt;p&gt;6절의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는 “그를 영원히 복들로 삼으신다”(תְשִׁיתֵהוּ בְרָכוֹת לָעַד, 테쉬테후 베라코트 라아드)는 구문이다. 왕은 복을 받아 다른 이에게 복이 되는 자리에 선다. 이는 아브람에게 주신 창세기 12:2의 약속을 떠올리게 한다. 이어지는 “주 앞에서”는 주의 얼굴과 함께한다는 뜻이다. 왕의 기쁨은 승리와 관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데 이른다.&lt;/p&gt;&lt;p&gt;왕이 흔들리지 않는 근거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데 있고, 그를 붙드는 힘은 “지존하신 이의 인자함”(וּבְחֶסֶד עֶלְיוֹן, 우베헤세드 엘욘)에 있다(7절). 인자함은 언약 안에서 끝까지 신실하신 사랑이다. UBS 해설은 이를 여호와께서 왕을 크게 사랑하시는 행위로 풀 수 있다고 설명하며, “흔들리지” 않음을 힘에 밀려 왕좌에서 쫓겨나지 않는 것으로 풀이한다.&lt;/p&gt;&lt;p&gt;8-12절이 부르는 “너”의 정체는 히브리어에 명시되지 않는다. 개역개정은 “왕의 손”, “왕을 해하려”라고 왕으로 해석한다. UBS 해설은 왕으로 보는 견해와 여호와로 보는 견해를 모두 소개한다. “네가 나타날 때”는 여호와께 어울리지만 9절 후반에 여호와가 3인칭으로 나오는 점은 왕을 지지하는 근거다. 왕으로 읽으면 복 받은 왕이 하나님의 힘으로 승리하고, 여호와로 읽으면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신다. “손”과 “오른손”이 원수를 “찾아낸다”는 말은 붙잡는다는 뜻이다.&lt;/p&gt;&lt;p&gt;원수는 “풀무불 같게” 된다(9절). UBS 해설은 여기의 화덕을 굳은 진흙이나 벽돌로 만든 것으로 설명한다. “노하실 때에”의 문자적 표현은 “네 얼굴의 때에”(לְעֵת פָּנֶיךָ, 레에트 파네카)로, 진노한 임재를 가리킨다. “너”가 여호와라면 6절에서 왕을 기쁘게 한 얼굴이 원수에게는 심판이 된다. 이어 여호와가 원수를 삼키시고 불이 그들을 소멸한다. UBS 해설은 화덕, 삼킴, 불이 먹어 치움으로 이어지는 세 행이 심판의 강도를 높인다고 설명한다.&lt;/p&gt;&lt;p&gt;10절의 “후손”과 “자손”은 문자적으로 “그들의 열매”와 “그들의 씨”이며, 자손을 가리키는 은유다. “땅에서” 끊는다는 말은 멸망의 철저함을 나타낸다. 왕조가 바뀔 때 앞 왕의 집안이 멸절된 열왕기상 15:29의 역사에서 보듯, 후손의 단절은 적대 세력이 다시 일어날 미래까지 끊는다는 뜻을 지녔다. 시는 이 두려운 심판을 여호와의 진노에 돌린다.&lt;/p&gt;&lt;p&gt;심판의 이유는 원수가 왕을 해하려 악을 꾸몄기 때문이다(11절). “왕을 해하려”의 히브리어는 “너를 향하여”여서 8절부터 이어지는 대상의 두 해석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이미 꾸민 음모는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는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시편 2:1-2의 군왕들을 떠올리게 한다.&lt;/p&gt;&lt;p&gt;원수는 활시위 앞에서 등을 돌려 달아난다(12절). “돌아서게 함이여”는 문자적으로 “그들을 어깨로 삼으리라”(תְּשִׁיתֵמוֹ שֶׁכֶם, 테쉬테모 셰켐)라는 표현이다. 왕의 머리에 관을 둔 동사가 여기서는 원수를 패주시키는 데 쓰인다. 6절과 9절의 얼굴에 이어 원수의 얼굴이 화살의 과녁이 된다.&lt;/p&gt;&lt;p&gt;13절에서 회중은 여호와께 “높임을 받으소서”(רוּמָה, 루마)라고 노래한다. UBS 해설은 이를 능력으로 위대하심을 나타내 달라는 간구, 능력 때문에 높임을 받으신다는 찬양, 또는 “일어나소서”로 옮기는 번역을 소개한다.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의 두 동사는 “우리가 노래하자, 찬송하자”라는 결심도 담는다. 찬송의 대상인 주의 권능은 하나님이 이루신 능한 일이나 승리를 뜻한다. 왕의 승리를 기뻐한 백성은 마지막에 여호와의 능력을 높인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시편 20편의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20:9)라는 간구는 21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는 감사로 이어진다. 20:5의 “너의 승리”와 21:5의 “주의 구원”은 히브리어에서 같은 형태다. 앞에서는 왕에게 기대한 승리를 말하고, 뒤에서는 그것을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20:7의 히브리어에는 “의지하다”가 생략되어 있지만 21:7은 왕이 여호와를 의지한다고 명시한다. 특정 전쟁을 밝히지 않는 두 시는 위기 때의 공동 간구와 응답 뒤의 감사를 잇는다.&lt;/p&gt;&lt;p&gt;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과 왕위를 견고하게 세우고, 죄를 징계하더라도 인자하심을 거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시편 21:4의 영원한 날과 7절의 인자함은 이 약속과 통한다. 그러나 시편 89:38-39는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관이 땅에 떨어졌다고 탄식한다. 불순종한 왕들과 바벨론 포로기를 거친 이스라엘에게 시편 21편은 지난 승리의 기억이며, 언약을 이루실 왕을 기다리는 노래가 되었다.&lt;/p&gt;&lt;p&gt;신명기 17:14-20의 왕은 병마와 은금을 늘리거나 형제 위에 교만해지지 않고, 율법을 읽어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워야 한다. 시편 21편의 관과 긴 날도 왕이 스스로 확보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고 부와 영광까지 받았으며(왕상 3:11-14), 히스기야는 기도하여 십오 년을 더 살았다(왕하 20:1-6). 하지만 솔로몬은 다른 신들을 따랐고 히스기야도 죽었다. 왕정의 실제 역사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며 영원히 사는 왕에 대한 시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lt;/p&gt;&lt;p&gt;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전쟁이 여호와께 속했고 구원이 칼과 창에 달리지 않았다고 선언했다(삼상 17:45-47). 시편 21:8-9에서도 왕의 손과 여호와의 진노가 원수의 패배를 설명한다. 8-12절의 “너”를 누구로 읽든 승리를 주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 그래서 왕을 위한 노래가 하나님의 권능을 찬송하며 끝난다.&lt;/p&gt;&lt;p&gt;시편 2편의 군왕들은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세운 왕에게 구하라고 명하신다(2:1-8). 생명을 구해 받은 시편 21편의 왕과 뜻을 이루지 못한 원수도 같은 관계에 놓인다. 시편 2:12의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는 해당 낱말을 아람어 “아들”로 읽은 번역이다. UBS 해설은 본문을 달리 읽어 “그의 발에 입맞추라”, “그에게 경의를 표하라”로 옮기는 번역도 소개한다. 시편 21편이 심판을 노래한다면, 2편은 대적에게 경의를 표하고 여호와께 피할 기회도 알린다.&lt;/p&gt;&lt;p&gt;하나님의 얼굴은 왕에게 기쁨이며 원수에게 진노다(21:6, 9). 민수기 6:24-26에서 얼굴을 비추심은 은혜와 평강이고, 시편 34:16(BHS 34:17)에서는 악인의 자취를 끊는 심판이다. UBS도 후자를 21:9의 진노한 임재와 연결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 없이 올라가지 않겠다고 기도했듯이(출 33:14-15), 승리와 왕위가 주는 복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에 이른다.&lt;/p&gt;&lt;p&gt;아브람을 복이 되게 하시고 그를 저주하는 자를 심판하겠다는 약속(창 12:2-3)은 복을 받은 왕과 그 대적의 운명에도 비친다(21:6, 8). 시편 110:5의 진노와 말라기 4:1(BHS 3:19)의 용광로 같은 날은 21:9-10의 불과 철저한 멸망에 상응한다. 아모스 2:4-5는 같은 불을 유다에게 경고한다. 혈통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하지 않는다.&lt;/p&gt;&lt;p&gt;시편 72:17은 왕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 받기를 기도하고, 이사야 9:6-7(BHS 9:5-6)은 다윗의 왕좌에서 정의와 공의로 영원히 다스릴 왕을 약속한다. 시편 21편의 왕도 백성을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며 받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신약은 다윗의 자손 예수에게서 그 영원한 나라의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증언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이스라엘의 왕들은 모두 죽었고 다윗의 왕위도 포로기에 끊어졌다. 바울은 다윗이 죽어 썩음을 당했지만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는 썩음을 당하지 않으셨다고 선포한다(행 13:36-37). 시편 21편의 영원한 생명과 흔들리지 않을 왕에 대한 기대를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읽는다. 누가복음 1:32-33은 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며 하나님께 다윗의 왕위를 받아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리리라고 알린다.&lt;/p&gt;&lt;p&gt;예수는 아버지를 끝까지 신뢰하셨다. 히브리서 2:13은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는 고백을 그의 입에 둔다. 예수는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셨고(요 8:29), 욕과 고난에 보복하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맡기셨다(벧전 2:23). 죽음 앞에서도 자기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다(눅 23:46). 이 신뢰의 길 끝에서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다.&lt;/p&gt;&lt;p&gt;왕의 간구를 들으신 시편 21:2, 4의 하나님께 예수도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히 5:7). 겟세마네에서 잔이 지나가기를 구하면서 아버지 뜻에 자신을 맡기셨고(마 26:39),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히브리서의 “들으심”을 부활과 연결하면 응답은 죽음을 이긴 생명으로 나타난다. 다시 사망의 지배를 받지 않는 그리스도(롬 6:9)에게서 시의 “영원히 또 영원히”는 끝없는 생명에 이른다.&lt;/p&gt;&lt;p&gt;시편 21편 다음에는 응답 없는 부르짖음으로 시작하는 22편이 놓인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자는 그 신뢰 때문에 조롱받는다(22:4-8). 예수도 십자가에서 같은 조롱을 듣고 22:1의 말로 부르짖으셨다(마 27:43, 46). 시편 21:3의 순금 관에 앞서 예수는 조롱의 가시관을 쓰셨다(마 27:29). 22편이 응답과 열방의 예배로 나아가듯이(22:21, 27-28), 예수의 죽음은 부활과 열방을 향한 복음으로 이어진다.&lt;/p&gt;&lt;p&gt;사도행전 13:23-37은 죽임당한 다윗의 후손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일을 약속의 성취로 선포한다. 4:25-28의 교회도 시편 2:1-2를 인용하며 예수를 대적한 자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구원 뜻을 무너뜨리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2:25-33에서 베드로는 시편 16편으로 예수의 부활과 주 앞의 충만한 기쁨을 설명한다. 시편 21:6의 임재 앞 기쁨도 높임 받으신 왕 안에서 온전히 누려진다.&lt;/p&gt;&lt;p&gt;예수는 죽음의 고난을 거쳐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히 2:9). 빌립보서 2:8-11에서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아들을 하나님이 높이시고, 만물이 그를 주라 시인하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 왕의 영광이 하나님 찬송으로 끝나는 시편 21편과 통하는 흐름이다. 요한계시록 19:12, 16의 만왕의 왕은 많은 관을 쓰신다.&lt;/p&gt;&lt;p&gt;그리스도의 구원은 심판을 폐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19:11-15의 왕은 공의로 심판하며, 데살로니가후서 1:7-8은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예수의 심판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원수인 사망까지 멸하신다(고전 15:25-26). 그러나 부활하신 왕의 이름으로 먼저 죄 사함이 선포된다(행 13:38-40). 예수는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셨고(눅 23:34), 주는 회개를 기다리며 오래 참으신다(벧후 3:9). 심판의 경고를 듣는 대적에게도 지금 돌아올 길이 열려 있다.&lt;/p&gt;&lt;p&gt;교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전 15:57). 시편 21:13의 회중처럼 왕의 승리를 선물로 받아 노래하며, 보좌에 앉으신 이와 죽임당한 어린 양을 찬송한다(계 5:11-13). 항상 살아서 백성을 위해 간구하시는 왕(히 7:25)은 이기는 자를 자기 보좌에 함께 앉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계 3:21). 백성이 누리는 영광도 그리스도께 받은 은혜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왕의 소원을 들으시고 생명과 관을 주신 하나님께 회중은 감사한다. 이 시를 기도하는 성도도 응답을 자신의 수완이나 공로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왕의 안정은 군사력이나 재물이 아닌 여호와의 인자하심에 달렸다. 권위를 맡은 사람은 형제 위에 교만해지지 않고 말씀 아래 살아야 한다는 신명기 17장의 요구를 받는다.&lt;/p&gt;&lt;p&gt;생명을 구하는 기도는 정당하다(4절). 그러나 수명의 길이로 하나님의 사랑을 재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와 순교자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 시편 21편의 감사 다음에 22편의 탄식이 있고,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는 십자가를 면하는 방식으로 응답되지 않았다. 성도는 구원을 감사하면서도 아직 응답을 기다리는 탄식을 하나님께 드린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조차 하나님의 마지막 응답을 막지 못한다는 소망이다.&lt;/p&gt;&lt;p&gt;불과 활시위와 후손의 멸절을 노래하는 8-12절에서 심판의 권한은 여호와께 있다. 로마서 12:19-21은 원수를 스스로 갚지 말고, 주린 원수를 먹이며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명한다. 악을 당한 사람은 사실을 밝히고 정당한 보호를 구하면서도, 보복으로 상대나 그 가족을 해칠 권리를 이 시에서 얻을 수 없다. 심판을 맡기고 회개를 구하는 기도는 악을 숨기거나 피해를 감수하라는 요구와 다르다.&lt;/p&gt;&lt;p&gt;시편의 왕을 특정 국가나 정당의 지도자와 동일시하면 그리스도께 속한 자리를 인간 권력에 넘겨주게 된다. 교회는 자신이 지지하는 편의 승리를 하나님의 승리로 선포하기보다 모든 위정자를 위해 기도한다(딤전 2:1-2). 박해 앞에서는 초대 교회처럼 복음을 전할 담대함을 구한다(행 4:29). 권력을 얻었을 때에는 약자를 해치는 음모의 편에 서지 않아야 한다.&lt;/p&gt;&lt;p&gt;왕이 받은 마지막 복은 주의 얼굴 앞에서 누리는 기쁨이다(6절). 실패나 상실로 관을 잃었을 때에도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시편 89편처럼 상실을 탄식할 수 있고, 시험을 견디는 자에게 주신 생명의 면류관을 기다릴 수 있다(약 1:12). 옥중에서도 주 안에서 기뻐하라 권한 바울(빌 4:4)처럼, 그 기쁨은 성취의 크기보다 살아 계신 주께 뿌리를 둔다. 회중은 자신이 얻은 영예를 높이는 대신 구원을 베푸신 여호와를 찬송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11-212/"&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11-12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17/"&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1:7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18/"&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1:8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19-2110/"&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1:9-10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113/"&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1:13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시편 22:1-21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래도 내 하나님</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ps/22.1-21/</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ps/22.1-21/</guid><description>시편 22:1-21은 응답 없는 하나님께 “내 하나님”이라 부르짖는 탄식이다. 조상들의 구원과 모태에서부터 이어진 관계를 붙들고, 조롱과 무너지는 몸과 에워싼 원수 앞에서 구원을 구하다가 응답의 고백에 이른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이 탄식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셨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개역개정에서 번호를 붙이지 않은 표제가 BHS에서는 1절이므로, 개역개정 22:1-21은 BHS 22:2-22에 해당한다. 표제는 다윗의 시를 인도자가 “아얠렛샤할에 맞춘” 노래로 소개한다. 이 말은 ‘새벽의 암사슴’이라는 뜻이며 곡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시인은 하나님의 침묵과 사람들의 조롱을 아뢰다가 조상들의 구원과 자기 출생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다시 부른다. 21절의 응답은 22절 이하의 회중 찬송과 땅끝의 예배로 이어진다.&lt;/p&gt;&lt;p&gt;첫 질문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אֵלִי אֵלִי לָמָה עֲזַבְתָּנִי,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다. 시인은 버림받은 듯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두 번이나 “내 하나님”이라 부른다. UBS 해설은 이 부름에서 고난 중에도 지속되는 의존 관계를 읽는다. 이어지는 히브리어 문장은 구원과 신음 소리에서 하나님이 멀리 계심을 아뢴다. 개역개정은 그 뜻을 “돕지 아니하시오며”, “듣지 아니하시나이까”로 풀어 옮겼다. 1절의 신음과 13절의 사자 울음은 같은 어근으로 표현된다. 원수는 사자처럼 울부짖고 시인은 신음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신다.&lt;/p&gt;&lt;p&gt;2절에서 시인은 낮과 밤으로 하나님을 부른다. 개역개정의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에서 ‘잠잠함’에 해당하는 말(דוּמִיָּה, 두미야)은 평온과 안식을 뜻할 수도 있다. 개역개정은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는 뜻을 택했고, UBS 해설은 쉼이나 안식을 얻지 못한다는 이해도 제시한다. 기도하는 내내 응답도 평안도 없는 처지다.&lt;/p&gt;&lt;p&gt;3-5절에서 시인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조상들의 구원을 기억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분이다. 이 표현(יוֹשֵׁב תְּהִלּוֹת יִשְׂרָאֵל, 요셰브 테힐로트 이스라엘)은 찬송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과 찬송을 보좌로 삼으신다는 뜻으로 읽힌다. UBS 해설도 왕의 보좌 이미지를 제시한다. 조상들은 주를 의뢰했고, 부르짖었으며, 건짐을 받아 수치를 당하지 않았다. 출애굽의 구원을 노래해 온 이스라엘의 찬송을 기억할수록 시인은 자기에게 응답이 없는 현실을 더 아프게 느낀다.&lt;/p&gt;&lt;p&gt;6-8절에서 시인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고 탄식한다. 구원받은 조상들과 달리 그는 비방과 조롱을 당한다. 사람들은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시면 건지실 것이라고 비웃는다. 개역개정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에 해당하는 첫 낱말(גֹּל, 골)은 마소라 본문의 모음점대로라면 “여호와께 맡겨 보라”는 명령으로 읽힌다. NET 주석은 뒤의 3인칭 표현과 맞추어 ‘그가 맡겼다’는 완료형으로 모음을 달리 읽는 견해도 소개한다. 어느 읽기에서든 조롱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의 고난을 그 신뢰가 헛되다는 증거로 삼는다. 4-5절에서 구원을 가리키던 동사들이 그들의 조롱 속에서 되풀이된다.&lt;/p&gt;&lt;p&gt;9-10절의 시인은 하나님과 자기 관계가 의식적인 신뢰보다 먼저 시작되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그를 모태에서 이끌어 내시고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부터 의지하게 하셨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맡겨진 사람이므로, 그는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라고 말한다. 1절의 “내 하나님”이라는 부름은 이 오랜 돌보심에 근거한다. 11절에서는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라며 하나님께 멀리 계시지 말라고 구한다. 가까이 닥친 환난과 멀리 계신 하나님 사이에 홀로 선 사람의 간구다.&lt;/p&gt;&lt;p&gt;12-13절의 원수들은 시인을 에워싼 바산의 힘센 소들과 먹이를 찢으며 울부짖는 사자로 그려진다. 요단 동쪽 바산은 좋은 목초지와 튼튼한 가축으로 알려진 땅이었다. NET 주석은 이 소들이 위협적인 원수를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아모스 4:1에서도 바산의 소는 가난한 사람을 압제하는 부유한 이들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사방을 막아선 원수들의 힘과 사나움이 부각된다.&lt;/p&gt;&lt;p&gt;14-15절에서 시인은 물처럼 쏟아지고 뼈마디가 어긋나며 마음이 밀랍처럼 녹는다고 아뢴다. 몸을 지탱할 힘과 버틸 용기가 사라졌고, 힘은 질그릇 조각처럼 말랐으며 혀는 입천장에 붙었다. 그런데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의 동사(תִּשְׁפְּתֵנִי, 티슈페테니)는 하나님을 향한 2인칭이다. 원수들이 죽음을 재촉하는 상황에서 시인은 자기를 죽음의 먼지에 두신 하나님께까지 항변한다. 생명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고통의 가장 깊은 원인을 묻는다.&lt;/p&gt;&lt;p&gt;16절에서는 개들 같은 악한 무리가 시인을 에워싼다. 개의 공격은 열왕기하 9:36처럼 수치스러운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악한 무리에게 둘러싸인 시인은 응답을 받은 뒤 찬송하는 회중 가운데 서게 된다(22절). 개역개정은 절 끝을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로 옮기지만, BHS의 “사자처럼 나의 손과 나의 발”(כָּאֲרִי יָדַי וְרַגְלָי, 카아리 야다이 베라글라이)에는 동사가 없다. UBS 해설에 따르면 칠십인역은 ‘파다’, 아퀼라·심마쿠스·히에로니무스는 ‘묶다’로 읽었고, 두 히브리어 사본에도 “그들이 묶는다”라는 읽기가 있다. 해설은 히브리어 구약 본문 프로젝트(HOTTP)가 마소라 본문의 형태를 ‘물어뜯고 있는’이라는 복수 분사로 이해한다고 보고하면서 여러 해결책의 불확실성을 인정한다. 개역개정은 손발에 가해진 폭력을 ‘찌르다’로 표현한다. 마소라 본문의 ‘사자처럼’을 따르면 13절의 사자가 다시 나타나 손과 발을 위협한다.&lt;/p&gt;&lt;p&gt;17-18절에서 시인은 자기 뼈를 셀 만큼 쇠약해졌고, 원수들은 그 몸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지금 자기 뼈를 ‘세는’ 사람이 22절에서는 같은 동사로 하나님의 이름을 형제들에게 ‘선포한다’. 원수들은 그가 이미 죽은 사람인 듯 옷을 나누고 제비를 뽑는다. 개역개정의 “겉옷”과 “속옷”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모두 몸에 입는 옷을 가리키며 병행한다. 두 줄은 한 행위를 거듭 표현할 수 있다. 죽어 가는 사람의 마지막 소유를 먼저 나누는 행위는 그의 존엄마저 빼앗는다.&lt;/p&gt;&lt;p&gt;19절에서 시인은 원수와 고통의 묘사를 멈추고 “여호와여”라고 부른다. “멀리 하지 마옵소서”는 1절과 11절의 간구를 되받는다. 자기 힘이 말라 버린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나의 힘”이라 부르며 속히 도와 달라고 청한다. 20절의 “내 유일한 것”(יְחִידָתִי, 예히다티)은 앞줄의 “내 생명”과 병행하며 단 하나뿐인 생명을 가리킨다. 그는 조롱하는 자들이 비웃으며 쓴 ‘건지다’라는 말을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돌려 드린다.&lt;/p&gt;&lt;p&gt;20-21절의 개, 사자, 들소는 앞서 나온 소, 사자, 개의 위협을 거꾸로 되짚는다. 21절 후반의 마지막 말은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나이다”(עֲנִיתָנִי, 아니타니)다. 개역개정은 그 응답을 구원으로 풀어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로 옮겼다. UBS 해설에 따르면 칠십인역·시리아어역·히에로니무스는 이 자리를 동사 없이 ‘나의 괴로운 자신’과 같은 말로 읽고, HOTTP는 마소라 본문의 동사를 유지한다. UBS 해설은 21절 후반까지 간구로 묶는 편을 선호하면서도 마소라 본문을 따라 구원을 고백하는 번역을 허용한다. 마소라 본문에서는 2절의 ‘응답하지 않으심’이 이 마지막 낱말에서 뒤집힌다. 고대 역본을 따르면 21절까지 간구가 이어지고 22절에서 찬송으로 전환한다. 두 경우 모두 시인은 회중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게 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시인이 거듭 부르는 “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하신 약속(출 6:7; 레 26:12)에 근거한다. 그 관계를 믿기에 시인은 버림받은 듯한 현실 앞에서 “어찌하여”라고 묻는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응답 없는 현실 사이의 고통을 언약의 하나님께 아뢴다.&lt;/p&gt;&lt;p&gt;4-5절의 조상들은 부르짖음에 응답하신 하나님을 경험했다. 출애굽기 2:23-25에서 하나님은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의 탄식을 들으시고 조상들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다. 3:7에서는 백성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들었으며 그 근심을 안다고 말씀하셨다. 홍해 앞에서 부르짖은 백성을 구원하신 일도 그 기억에 속한다(출 14:10, 30). 시편 22편의 시인은 같은 하나님을 부르는데도 아직 건짐을 받지 못했다. 21절의 응답과 24절의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는 그 구원의 기억이 자기 삶에서도 이어졌다는 고백이다.&lt;/p&gt;&lt;p&gt;시편 13편도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는 듯한 고통 속에서 응답을 구하고, 주의 사랑을 의지하며 찬송을 약속한다(1-6절). 시편 22편은 조상들과 자기 출생까지 기억하고 무너지는 몸을 자세히 아뢰며 그 길을 걷는다. 시편 25:2-3은 주를 의지하는 사람이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다. 시편 22:5의 조상들은 바로 그 구원을 경험했지만,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고도 비방과 조롱을 당한다. 탄식은 그 어긋남을 숨기지 않는다.&lt;/p&gt;&lt;p&gt;욥기 19장에서 욥도 하나님께 응답받지 못하고 친지와 친구들에게 버림받았다고 탄식한다. 고통의 원인을 욥의 죄에서 찾던 친구들은 그를 더 괴롭혔다. 욥은 그 가운데서 살아 계신 대속자를 고백한다(19:25). 시편 22편의 조롱하는 자들도 고난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증거로 삼는다. 그러나 21절의 응답과 24절의 들으심은 그들의 판단을 뒤집는다. 시편 69편 역시 까닭 없는 미움, 비방, 위로자의 부재를 아뢰지만, 자기 죄를 고백하고 원수의 심판을 구한다. 시편 22:1-21에는 자기 죄의 고백이나 보복의 청원이 없고 건짐을 구하는 기도가 이어진다.&lt;/p&gt;&lt;p&gt;시편 23:4의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고백은 22편의 ‘멀리 계심’과 이웃한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확신하는 기도와 그분을 찾지 못해 부르짖는 기도가 같은 시편집 안에 있다. 이사야 49:14-16에서도 시온은 주께서 자기를 버리고 잊으셨다고 탄식한다. 하나님은 젖먹이를 잊지 않는 어머니보다 더 깊이 시온을 기억하신다고 답하신다. 시편 22:9-10에서 모태와 젖먹이 시절을 돌보신 하나님은 이사야 46:3-4에서 모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품으시는 분이다. 이사야 41:14에서는 ‘버러지 같은 야곱’을 도우시며, 54:7-8에서는 잠시 버림받은 백성을 영원한 자비로 모으겠다고 약속하신다.&lt;/p&gt;&lt;p&gt;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는 듯한 고통은 시편 13:1, 69:17, 이사야 54:8에도 나온다. 시편 22:1-21에는 ‘얼굴’이라는 표현이 없지만, 24절은 하나님께서 곤고한 자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않으시고 얼굴을 숨기지 않으셨다고 밝힌다. 사람들이 그를 멸시한 6절의 현실과 하나님께서 그를 대하신 태도가 대조된다. 시인의 구원은 조롱하는 사람들의 판단이 하나님의 판단과 달랐음을 드러낸다.&lt;/p&gt;&lt;p&gt;이사야 50:6-10의 종은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면서도 주 여호와의 도움을 믿는다. 이사야 53장의 종도 멸시받고 하나님께 징벌받는 사람으로 오해받지만, 실제로는 다른 이들의 허물과 죄악을 담당한다. 시편 22편은 의지하는 하나님께 응답받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조롱받는 고난을 말하며, 이사야 53장은 그 종의 고난이 많은 사람에게 끼치는 구원의 유익을 밝힌다. 대속의 의미는 이사야의 종에게서 명시된다.&lt;/p&gt;&lt;p&gt;시편 22편 전체에서는 한 사람의 건짐이 회중의 찬송(22-25절), 가난한 이들의 먹음(26절), 땅끝과 모든 족속의 예배(27절), 후대의 증언(30-31절)으로 이어진다. 창세기 12:3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모든 족속의 복과도 연결되는 전망이다. 하나님께서 한 고난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일을 온 세대와 민족이 듣고 하나님께 돌아온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시편 22편은 다윗의 이름이 붙은 이스라엘의 기도다. 시인은 조롱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자기 구원을 구하며, 자기 고난이 다른 사람의 죄를 담당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21절의 응답은 죽음의 문턱에서 얻은 건짐이다. 다윗도 죽어 장사되었다는 사도행전 2:29의 증언처럼, 그 건짐 뒤에도 인간의 죽음은 남아 있었다. 신약은 이 고난자의 기도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연결한다.&lt;/p&gt;&lt;p&gt;마태복음 27:46에서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신다. 마태는 그 뜻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풀이한다. 개역개정 마가복음 15:34도 첫 부름을 ‘엘리’로 옮기지만, 헬라어 본문은 마태의 ηλι(엘리)와 마가의 ελωι(엘로이)를 구별한다. 곁에 있던 이들은 그 외침을 엘리야를 부르는 소리로 잘못 들었다(마 27:47). 예수께서는 시인의 기도를 자기 말로 드리셨다. 버림받음의 고통을 겪으시면서도 “나의 하나님”이라는 부름을 붙드셨다.&lt;/p&gt;&lt;p&gt;“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는 탄식은 예수께서 당하신 모멸을 떠올리게 한다. 이사야 52:14의 종은 모습이 심하게 상했고, 빌라도 앞의 예수는 가시관과 자색 옷을 입은 채 무리에게 내놓이셨다(요 19:5-6). 빌립보서 2:7-9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며,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 시편에서 짓밟힌 고난자가 회중의 찬송에 이르듯, 예수의 낮아지심 뒤에는 하나님의 높이심이 있다.&lt;/p&gt;&lt;p&gt;마태복음 27:39-43의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면 구원해 보시라고 비웃는다. 시편 22:7-8의 조롱이 십자가 곁에서 반복된다. 누가복음 23:35에서도 백성은 서서 구경하고 관리들은 비웃는다. 군인들은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갖는다(마 27:35). 요한복음 19:23-24는 옷을 네 깃으로 나누고 통으로 짠 속옷을 제비 뽑은 일을 시편 22:18의 성취로 밝힌다. 시편에서 한 행위를 병행하여 표현할 수 있었던 두 줄이 요한복음에서는 두 행동으로 나타난다.&lt;/p&gt;&lt;p&gt;예수의 “내가 목마르다”(요 19:28)는 말씀은 시편 22:15의 마른 혀와 69:21의 초를 떠올리게 한다. 요한은 이때 어느 구절이 이루어졌는지는 밝히지 않는다. 마태복음 27장과 요한복음 19장은 시편 22:16을 인용하지 않으며, 요한은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일을 스가랴 12:10에 연결한다(요 19:34, 37). 시편 22:16의 ‘찔렀다’는 읽기에서 십자가의 못 박힘을 보는 해석은 앞서 살핀 본문 전승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사나운 무리에게 둘러싸여 손발을 공격받는 고난자의 모습은 두 읽기 모두에 남아 있다.&lt;/p&gt;&lt;p&gt;예수의 고난이 다른 이들을 구원한다는 뜻은 이사야 53장과 신약에서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고(고후 5:21),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갈 3:13).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목숨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막 10:45). 그는 그 사명을 이루시는 중에도 하나님을 부르셨고, 마지막에는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셨다(눅 23:46). 날 때부터 하나님께 맡겨졌다는 시편 22:10의 신뢰가 예수에게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lt;/p&gt;&lt;p&gt;히브리서 5:7-9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구원하실 분께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여 들으심을 얻으셨으며,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말한다. 그 들으심은 부활로 드러났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고(히 13:20), 사망은 그를 붙들어 둘 수 없었다(행 2:24). 시편의 시인이 죽음 앞에서 건짐을 받았다면 예수께서는 죽음을 지나 다시 살아나셨다. 히브리서 2:10-12는 고난을 통해 구원의 창시자가 되신 그리스도께 시편 22:22를 적용한다. 그는 구원받은 이들을 형제로 부르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고 찬송하신다.&lt;/p&gt;&lt;p&gt;십자가 곁에서는 이방인 백부장과 군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고(마 27:54),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 부르며 모든 민족에게 보내셨다(마 28:10, 19). 시편 22:27의 땅끝 예배는 그리스도의 구원과 교회의 선교에서 펼쳐진다. 시편의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31절)와 예수의 “다 이루었다”(요 19:30)는 직접 인용 관계가 확인된 표현은 아니지만 모두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가리킨다. 베드로전서 2:21-25는 그리스도께서 모욕을 보복하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께 자신을 맡기셨으며,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한다. 그를 통해 길 잃은 이들이 영혼의 목자께 돌아온다. 시편 22편 뒤에 목자를 노래하는 23편이 이어지듯,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는 구원하신 양들을 돌보신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응답 없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어찌하여”라고 물을 수 있다. 시인은 하나님이 멀리 계신 듯한 현실을 숨기지 않았고 예수께서도 이 기도로 부르짖으셨다. “내 하나님”이라 부르며 지금의 고통을 아뢰는 사람은 믿음을 버린 사람이 아니다. 조상들을 건지신 일과 모태에서부터 돌보신 일을 기억하는 기도는 현재의 고통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붙든다.&lt;/p&gt;&lt;p&gt;조롱하는 자들은 고난을 하나님께 버림받은 증거로 삼았다. “믿음이 부족해서”라는 말로 병과 실패의 원인을 재단하는 사람은 그들의 자리에 설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멸시한 고난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24절). 다른 이의 고통을 구경하고 퍼뜨리며 수치를 더하는 행동, 성공과 능력으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태도는 이 시편이 폭로하는 조롱과 맞닿는다. 시인은 스스로를 벌레라 부를 만큼 짓밟혔지만, 모태에서부터 자기를 돌보신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했다.&lt;/p&gt;&lt;p&gt;시인은 무너지는 몸과 죽음의 두려움을 하나님께 자세히 아뢰며 건짐을 구한다. 그리스도께서도 부당한 고난을 하나님께 맡기셨다(벧전 2:23). 이 의탁은 가해자의 불의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피해자는 보호와 법적 도움을 구할 수 있고, 교회는 가해자의 책임을 물으며 피해자를 지켜야 한다. 최종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신뢰와 지금 불의를 막는 책임은 충돌하지 않는다.&lt;/p&gt;&lt;p&gt;21절의 응답에 이르기까지 긴 탄식이 이어진다. 고난당하는 이에게 감사와 찬송을 서둘러 요구하면 아직 끝나지 않은 탄식을 막게 된다. 응답을 받은 시인의 증언은 그를 재촉할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고난자의 소리를 들으신다는 소망이다. 건짐을 경험한 사람은 그 일을 회중 앞에 고백하고 고난 중에 드린 서원을 지킨다(22-25절).&lt;/p&gt;&lt;p&gt;그리스도인은 이 탄식을 먼저 드리신 예수께 의지하여 하나님을 부른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대제사장이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히 4:15; 7:25). 예수께 드러난 하나님의 응답은 십자가를 지나 부활에 이르렀다. 지금 응답을 기다리는 사람도 고통의 밤을 아시는 그분께 자기 탄식을 맡길 수 있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21-212/"&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2:1-2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216/"&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2:16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219-2221/"&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2:19-21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23/"&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2:3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Psa&amp;amp;chapter=22"&gt;NET Bible, 시편 22:8 tn 18 및 22:12 sn 27&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시편 22:22-31 형제들에게, 땅 끝과 태어날 백성에게</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ps/22.22-31/</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ps/22.22-31/</guid><description>시편 22:22-31은 응답을 받은 시인이 회중 가운데서 드리는 찬송이다. 찬송은 형제와 이스라엘 회중에서 시작하여 가난한 자의 식탁, 땅의 모든 족속, 죽어 가는 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로 넓어진다. 히브리서 2장은 이 찬송을 형제들 가운데서 부르시는 예수의 노래로 읽는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개역개정 시편 22:22-31은 BHS의 22:23-32에 해당한다. BHS는 표제를 1절로 세므로 개역개정보다 절 번호가 하나씩 크다. 여기서는 개역개정 절 번호를 따른다. 탄식에서 찬송으로 바뀌는 계기는 21절 끝의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עֲנִיתָנִי, 아니타니)다. 2절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וְלֹא תַעֲנֶה, 벨로 타아네)라는 탄식이 응답을 고백하는 말로 바뀐다. UBS 번역 해설은 22-31절을 시편의 둘째 부분으로 보며, 22-24절의 공적 감사와 27-31절의 보편적 통치를 구분한다. 찬송에 참여하는 이들은 형제와 회중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의 자손, 곤고한 자, 모든 민족과 죽을 인생,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으로 넓어진다.&lt;/p&gt;&lt;p&gt;22절에서 시인은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고”(אֲסַפְּרָה, 아사페라) 회중 가운데서 찬송하겠다고 약속한다. ‘선포하다’는 하나님의 행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17절에서 자기 뼈를 “셀 수 있나이다”(אֲסַפֵּר, 아사페르)라고 말할 때 쓴 동사가 이제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는 데 쓰인다. UBS 해설에 따르면 ‘이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는 행적을 가리키며, ‘형제’는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 ‘회중’은 성전에서 함께 예배하는 무리다. 백성의 조롱거리였던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의 찬송에 참여한다.&lt;/p&gt;&lt;p&gt;23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 야곱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찬송과 영광과 경외를 요구한다. 세 명령은 하나님을 높이며 그분께 순종하는 예배를 가리킨다. UBS 해설이 설명하듯 여기의 경외에는 존경과 예배가 포함된다. GNT는 23-24절을 시인이 부를 찬송의 내용으로 묶고, New Jerusalem Bible은 23절만 직접 인용으로 처리한다. ‘자손’의 원뜻은 “씨”(זֶרַע, 제라)이며, 이 말은 30절의 ‘후손’과 이어진다.&lt;/p&gt;&lt;p&gt;24절은 찬송할 이유를 밝힌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의 곤고”(עֱנוּת עָנִי, 에누트 아니)를 멸시하지 않으셨고, 얼굴을 숨기지 않으셨으며, 울부짖음을 들으셨다. 시인을 조롱하던 사람들과 하나님이 다르게 대하셨다. UBS 해설에서 ‘얼굴을 숨기다’는 외면하고 응답하지 않는 행동을, ‘듣다’는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1-2절에서 버림받았다고 호소하던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를 외면하지 않으셨다고 찬송한다. RSV는 과거에 행하신 일로, GNT는 하나님께서 거듭 행하시는 일로 옮긴다.&lt;/p&gt;&lt;p&gt;“곤고한 자의 곤고”에는 다른 해석도 있다. UBS 해설에 따르면 Dahood는 ‘곤고’를 뜻하는 명사를 ‘노래하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로 보아 “곤고한 자의 노래”로 옮겼고, Anderson도 이를 지지한다. New Jerusalem Bible은 “비천한 자의 간청”으로 옮긴다. 개역개정과 RSV는 ‘곤고’라는 읽기를 따른다. 어느 번역을 택하든, 멸시받던 이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것이 찬송의 이유다.&lt;/p&gt;&lt;p&gt;25절에서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다(מֵאִתְּךָ תְהִלָּתִי בְּקָהָל רָב, 메이테카 테힐라티 베카할 라브). 히브리어 문장에는 별도의 서술 동사가 없으며, 개역개정은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로 풀어 쓴다. UBS가 인용하는 Anderson의 설명대로 하나님은 찬송의 근원이자 대상이다. GNT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송의 원인과 주제로 드러낸다. 시편 35:18과 40:9-10처럼 구원받은 사람은 큰 회중 앞에서 감사한다.&lt;/p&gt;&lt;p&gt;이 찬송은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נְדָרַי אֲשַׁלֵּם, 네다라이 아샬렘)라는 약속으로 이어진다. 고난 중에 드리겠다고 약속한 제물을 이제 회중 앞에서 온전히 바친다는 뜻이다. UBS 해설은 25-26절을 감사 제사와 그에 따르는 공동 식사로 풀이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과 곤고한 이들의 배부름이 이어진다. 히브리어는 “주께로부터”라고 하나님을 부르다가 “그를 경외하는 자들 앞에서”라고 회중에게 말하지만, 개역개정과 GNT는 두 줄 모두 “주”로 맞추었다.&lt;/p&gt;&lt;p&gt;26절의 “겸손한 자”(עֲנָוִים, 아나빔)는 성품이 온유한 사람에 한정되지 않는다. 24절의 곤고한 자처럼 가난하고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그들은 감사의 식탁에서 먹고 배부르며, 여호와를 찾는 자들은 그분을 찬송한다. UBS 해설은 이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며 성전에서 예배하는 사람들로 설명한다.&lt;/p&gt;&lt;p&gt;“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יְחִי לְבַבְכֶם לָעַד, 예히 레바브켐 라아드)는 식탁의 손님들에게 베푸는 축복으로 읽을 수 있다. UBS 해설은 이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비는 말로 설명하고, Traduction œcuménique de la Bible도 “길고 행복한 삶”으로 옮긴다. 반면 Bible de Jérusalem, New Jerusalem Bible, New American Bible은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하는 찬송으로 읽는다. 14절에서 자기 마음이 밀랍처럼 녹는다고 탄식하던 시인이 이제 다른 이들의 생명을 축복한다.&lt;/p&gt;&lt;p&gt;27절에서 땅의 모든 끝과 모든 민족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와 예배한다. UBS 해설은 ‘기억하다’를 하나님을 인정하며 고백하고 찬송하는 행동으로 풀이한다. New English Bible 등은 이 절을 민족들이 돌아오게 해 달라는 기도로 옮기지만, 개역개정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로 서술한다. “주의 앞에”(לְפָנֶיךָ, 레파네카)는 하나님을 직접 부르는 말이다. RSV는 고대 역본을 따라 “그 앞에”로 고쳤으나, UBS 해설은 히브리어에서 인칭이 자주 바뀌므로 이문을 상정하지 않고도 이런 전환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lt;/p&gt;&lt;p&gt;민족들이 예배할 근거는 28절의 여호와의 왕권이다.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에서 ‘나라’(הַמְּלוּכָה, 함멜루카)는 다스리는 권세를 뜻한다. 이어지는 “모든 나라”는 그분이 다스리시는 민족들이다. UBS 해설은 첫 문장을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또는 “왕의 권세가 여호와께 있다”로 옮길 수 있다고 설명한다. 곤고한 한 사람에게 응답하신 여호와께서 모든 민족의 왕이시므로, 모든 민족이 그분 앞에 나아온다.&lt;/p&gt;&lt;p&gt;29절의 본문과 번역은 크게 갈린다. 개역개정은 마소라 본문을 따라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하며, 진토로 내려가는 자도 그 앞에 절한다고 옮긴다. UBS가 소개하는 Briggs 등의 제안은 첫머리의 “먹었고”를 “참으로 그에게”로 고쳐 읽고 뒤의 접속사를 빼는 것으로, RSV와 GNT 등이 이를 따른다. Traduction œcuménique de la Bible과 Hebrew Old Testament Text Project는 마소라 본문을 따른다. ‘살진 자들’을 ‘잠든 자들’, 곧 스올의 죽은 자들로 고쳐 읽는 제안도 있다. 마지막의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וְנַפְשֹׁו לֹא חִיָּה, 베나프쇼 로 히야)는 New English Bible처럼 고대 역본을 따라 ‘아니’를 ‘그를 위하여’로 바꾸어 “나는 그를 위하여 살리라”로 옮기기도 한다. 이런 읽기들은 마소라 본문과 구별되는 본문 수정이나 고대 역본의 해석이다.&lt;/p&gt;&lt;p&gt;UBS 해설은 마소라 본문을 따를 때 New International Version의 “땅의 모든 부유한 자가 잔치하며 경배하리라”라는 번역이 뜻을 잘 드러낸다고 본다. 첫 줄의 부유한 자들과 둘째 줄의 죽을 인생이 대조된다. 개역개정의 ‘영혼’은 여기서 스스로 지킬 수 없는 목숨을 뜻한다. 15절의 ‘죽음의 진토’가 29절의 진토로 다시 나타나며, 시인이 누웠던 그 자리로 내려갈 사람도 여호와 앞에 엎드린다. 이들은 절한 결과로 죽는 사람들이 아니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부유한 이부터 죽어 가는 이까지 모두 여호와의 다스림 아래 있다.&lt;/p&gt;&lt;p&gt;30절은 후손의 섬김을 내다본다. ‘후손’은 히브리어로 “씨”이며, UBS 해설에 따르면 한 히브리어 사본과 칠십인역은 “나의 씨”로 읽는다. 마소라 본문의 “그 세대에게” 뒤에는 31절의 “그들이 오리라”가 이어지지만, 칠십인역은 이를 30절의 “오는 세대”로 읽으며 GNT가 이를 따른다. 개역개정은 마소라 본문의 절 구분을 따른다.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יְסֻפַּר לַאדֹנָי לַדּוֹר, 예수파르 라도나이 라도르)는 직역하면 “주에 대하여 그 세대에게 이야기되리라”라는 수동문이다. 여기의 ‘주’는 여호와라는 고유 이름과 구별되는 칭호다. 17절에서 뼈를 세고 22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야기할 때 쓴 동사가 이제 다음 세대에게 주에 관해 이야기하는 데 쓰인다.&lt;/p&gt;&lt;p&gt;31절에서 후손들이 알릴 내용은 “그의 공의”다. UBS 해설은 Bible de Jérusalem, New Jerusalem Bible, New American Bible이 이를 ‘정의, 의’로 읽는다고 소개하면서, 문맥상 RSV처럼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해하는 편을 지지한다. 그 소식을 받을 “태어날 백성”은 지금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장차 듣게 될 사람들이다. 마지막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כִּי עָשָׂה, 키 아사)는 직역하면 “그가 행하셨다는 것” 또는 “그가 행하셨기 때문에”다. 개역개정은 ‘주께서’와 ‘이를’을 보충했다. UBS 해설이 설명하듯 하나님이 개입하여 백성을 구원하셨다는 선언이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다음 세대는 그 구원을 듣게 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시편 22편은 고난 중에 서원한 사람이 응답을 받은 뒤 회중 앞에서 감사하는 이스라엘의 기도 형식을 따른다. 시편 35:18은 큰 회중에서 감사하고 찬송하겠다고 약속하며, 40:9-10은 회중 앞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숨기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개인에게 베푸신 구원이 회중의 찬송이 된다. 시편 22편은 여기에 땅 끝의 민족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백성까지 부른다.&lt;/p&gt;&lt;p&gt;25-26절의 서원과 식탁은 제사 규례를 배경으로 한다. UBS 해설은 감사 제물에 따르던 교제의 식사를 레위기 3:1-5와 연결한다. 레위기 7:11-18은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와 서원이나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화목제의 고기를 언제까지 먹어야 하는지 정한다. 하나님께 드린 제물을 하나님 앞에서 나누어 먹는다. 신명기 16:9-15도 절기의 기쁨에 자녀와 종들뿐 아니라 레위인, 객, 고아와 과부를 참여시킨다. 시편의 곤고한 이들이 감사의 식탁에 앉는 일은 이 율법의 정신을 따른다. 자기 곤고를 멸시하지 않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다른 곤고한 이들과 음식을 나눈다.&lt;/p&gt;&lt;p&gt;창세기 12:1-3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신다. 시편 22편도 야곱과 이스라엘의 자손을 부른 뒤(23절) 모든 민족의 예배를 바라본다(27절). 한 사람과 그 자손에게 베푸신 은혜가 모든 족속에게 이른다. 시편에서는 멸시받던 사람이 응답받은 일을 증언하며 민족들을 예배로 부른다. 시편 67편도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셔서 주의 구원이 모든 나라에 알려지기를 구하고(1-2절), 모든 민족을 공평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송한다(4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라는 마지막 고백(7절)은 시편 22:27과 맞닿는다.&lt;/p&gt;&lt;p&gt;“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22:28)라는 고백은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라는 시편 24:1과 연결된다. 땅을 지으신 분이 민족들을 다스리신다. 시편 24편은 여호와를 찾는 족속을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로 묘사하고, 영광의 왕을 맞게 한다(3-10절). 시편 22편에서 여호와를 찾는 사람들은 곤고한 이들과 먹으며 찬송한다. 그들이 예배하는 분은 고난받는 이에게 응답하신 온 땅의 왕이시다.&lt;/p&gt;&lt;p&gt;이사야 49:1-13의 종도 모태에서부터 부름받고 사람에게 멸시받지만 하나님께 응답을 받는다(1, 5, 7-8절). 이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맡겨졌다고 고백하고 멸시 중에 부르짖는 시편 22편의 시인과 닮았다. 하나님은 종을 이방의 빛으로 삼아 구원이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신다(이사야 49:6). 구원받은 이들은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며, 하늘과 땅은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을 찬송한다(9-13절). 멸시받던 이의 구원, 곤고한 이들의 배부름, 땅 끝의 찬송이라는 흐름이 두 본문에 나타난다. 종은 이스라엘이라 불리면서도 야곱을 돌아오게 하는 사명을 받는다(3, 5절). 시편에서도 한 사람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찬송을 일으키고 민족들의 예배로 이어진다.&lt;/p&gt;&lt;p&gt;이사야 52:7-10은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땅 끝이 그 구원을 본다고 선언한다. 이어서 모습이 심하게 상했던 종이 높이 들리고, 왕들은 처음 듣는 일을 깨달으며 입을 봉한다(13-15절). 시편 22편에서도 죽음의 진토에 눕혀졌던 사람의 구원이 민족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백성에게 알려진다. 이사야 53장은 사람들이 종을 멸시하고 얼굴을 가렸다고 말한다(3절). 그러나 시편 22:24의 하나님은 곤고한 자에게서 얼굴을 숨기지 않으신다. 이사야의 종은 죽음의 고난 뒤에 ‘씨’를 보리라는 약속도 받는다(53:10). 시편의 ‘후손’(22:30)과 연결되는 표현이다. 다만 시편 22편은 시인의 고난을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지는 일로 설명하지 않으며, 이사야 53장은 종이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담당했다고 밝힌다(5, 11-12절). 신약은 이 두 본문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한다.&lt;/p&gt;&lt;p&gt;이사야 66:18-23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 먼 민족들에게 그 영광을 알리고, 흩어졌던 형제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온다.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택하시며 모든 혈육이 자기 앞에 예배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시편 22편도 동족인 형제들 가운데서 시작한 찬송이 모든 족속의 예배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구원을 들은 사람들이 그분을 알리면서 예배할 회중이 넓어진다.&lt;/p&gt;&lt;p&gt;시편의 표제는 이 노래를 다윗과 연결한다. 백성을 대표하는 왕의 고난과 구원은 백성의 운명과 이어진다. 사무엘하 7:12-16은 다윗의 자손과 나라를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시편 22편은 그 나라의 궁극적인 왕이 여호와이시며 민족과 후손이 그분을 섬길 것이라고 고백한다. 다윗 왕국이 나뉘고 성전이 무너진 뒤에도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이 여호와께 돌아올 날을 기다렸다. 신약은 고난을 지나 민족들을 하나님께 이끄시는 분을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시편 22:22-31의 시인은 구원받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고 서원을 갚겠다고 약속한다. 성전과 제물과 식탁이 있는 예배에서 부르던 감사의 노래다. 고난의 구체적인 사정은 밝혀지지 않아 고난받는 이스라엘 예배자들도 자기 기도로 부를 수 있었다. 찬송의 마지막은 한 사람의 생애보다 멀리 내다본다. 모든 민족이 돌아오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백성이 구원을 듣는다. 신약은 이 소망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읽는다.&lt;/p&gt;&lt;p&gt;마태복음은 십자가 사건을 시편 22편의 말로 묘사한다. 군인들은 예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27:35), 지나가는 이들은 머리를 흔들며 모욕하며(39절),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했으니 구원받아 보라고 조롱한다(41-43절). 시편 22:7-8, 18의 고난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예수는 첫 절로 부르짖으신다(마태복음 27:46). 시편은 그 부르짖음 뒤에 응답과 찬송으로 이어진다. 히브리서 5:7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이에게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고 들으심을 얻으셨다고 말한다. 예수께 주어진 응답은 죽음을 지나 이루어진 부활이었다.&lt;/p&gt;&lt;p&gt;히브리서 2장은 시편 22:22의 찬송을 예수의 입에 둔다.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으며, 하나님은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이끄시려고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 온전하게 하셨다(2:9-10).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한 근원에서 났으므로, 예수는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11절).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12절)는 인용에서 시편의 ‘회중’은 ‘교회’가 된다. 개역개정 시편에서 생략된 ‘나의 형제’의 ‘내’도 이 인용에는 들어 있다. 고난을 통과하신 예수가 구원받는 형제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송하신다.&lt;/p&gt;&lt;p&gt;히브리서 2:13은 이사야 8:17-18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시는 예수와 하나님이 주신 자녀들을 말한다. 예수는 그들과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시고, 죽음으로 마귀를 멸하여 죽음의 공포에 종노릇하던 사람들을 놓아 주셨다(14-15절). 시편 22:29의 진토로 내려가는 사람처럼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없는 이들도 그 구원을 의지한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를 하나님이 높이셨고,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에 꿇는다(빌립보서 2:8-11). 시편에서 부유한 자와 죽어 가는 자가 드리던 경배를 신약은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 앞에서 바라본다.&lt;/p&gt;&lt;p&gt;예수는 형제들과 같이 되셔서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으로 그들의 죄를 속하신다. 자신이 시험과 고난을 겪으셨으므로 시험받는 이들을 도우실 수 있다(히브리서 2:17-18). 시편 22:24에서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멸시하지 않으셨고,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 곤고를 친히 겪으신다. 시인은 건짐받은 뒤 곤고한 이들을 식탁으로 불렀다. 그리스도는 형제들의 고난과 죽음을 겪고 죄를 담당하신 분으로서 그들을 아버지께 이끄신다.&lt;/p&gt;&lt;p&gt;시편 22:26의 감사 식탁은 예수의 식사와 주의 만찬에서도 이어진다. 예수는 갚을 능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과 몸이 불편한 이들을 잔치에 청하라고 가르치셨고(누가복음 14:12-14), 광야의 무리를 배불리 먹이셨다(마가복음 6:42). 잡히시던 밤에는 감사하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교회는 그 식사를 통해 주께서 오실 때까지 주의 죽음을 전한다(고린도전서 11:23-26). 구원에 감사하며 먹는 식탁에 가난한 성도가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부유한 사람들이 먼저 먹어 가난한 성도를 부끄럽게 한 일을 꾸짖었다(20-22절).&lt;/p&gt;&lt;p&gt;시편 22:27-28이 여호와의 왕권을 근거로 민족들의 예배를 바라보듯, 부활하신 예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시고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신다(마태복음 28:18-20). 히브리서 2:16은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드신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을 따라 민족들이 회중에 참여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사야 49:6의 이방의 빛과 땅 끝의 구원을 자기 사명으로 받았고, 이방인들은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찬송했다(사도행전 13:47-48). 요한계시록 7:9-10에서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무리가 하나님과 어린 양의 구원을 찬송한다.&lt;/p&gt;&lt;p&gt;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그리스도로 읽으며,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약속의 상속자라고 말한다(갈라디아서 3:16, 29). 시편 22:30의 후손이 하나님을 섬기는 소망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과 민족들이 모이는 데서 읽을 수 있다. 로마서 15:8-12는 그리스도께서 조상들의 약속을 견고하게 하셨고 이방인들은 그 긍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한다. 시편 18:49의 열방 가운데 드리는 찬송을 인용하며, 이스라엘에게 지키신 약속이 민족들의 찬송으로 이어진다고 밝힌다.&lt;/p&gt;&lt;p&gt;시편 22:31의 후손들이 알리는 소식은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는 하나님의 구원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고 장사되셨으며 사흘 만에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받은 그대로 전했다(고린도전서 15:3-4). 교회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다음 세대에게 알린다. 십자가에서 시편의 부르짖음을 기도하신 분이 부활하여 형제들 가운데서 찬송하신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시인은 회중 앞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야기하겠다고 약속한다. 자기 믿음의 크기나 기도의 양을 자랑할 자리가 아니다. 1-21절의 탄식을 지우지 않고 응답을 찬송하므로,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도 그 증언에 참여할 수 있다. 응답받은 사람이 간증할 때에도 응답 전의 어두운 시간을 감추거나, 아직 탄식하는 이의 믿음을 자기 경험으로 평가하지 않아야 한다.&lt;/p&gt;&lt;p&gt;서원을 갚는 일은 응답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동이다. 시인은 하나님께 약속한 제물을 바치며 곤고한 이들과 먹는다. 위기 때 한 약속을 잊지 않는 신실함과 받은 것을 나누는 감사가 여기에 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성급히 하거나, 지도자가 위기에 처한 사람의 약속을 이용하여 헌금과 봉사를 강요하는 태도는 이 감사의 기쁨을 해친다.&lt;/p&gt;&lt;p&gt;감사의 식탁에서는 곤고한 이들이 실제로 먹고 배부른다. 구원받은 사람의 감사는 가난한 이들의 배고픔을 외면할 수 없다. 그들을 감사의 자리에 참여시키고 재물을 나누어 필요를 채우어야 한다. 주의 만찬에서 가난한 성도를 부끄럽게 했던 일을 꾸짖은 바울의 책망도 같은 식탁의 책임을 묻는다(고린도전서 11:20-22).&lt;/p&gt;&lt;p&gt;하나님은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지 않으셨다. 가난과 병과 실패를 믿음 부족의 증거로 여기며 고통받는 이를 낮추는 태도는 이 고백과 어긋난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외치는 시인의 말도 성경의 기도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감사부터 요구하면 그가 하나님께 내놓아야 할 탄식을 막게 된다.&lt;/p&gt;&lt;p&gt;모든 민족은 여호와의 다스림 아래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세를 믿는 교회는 여러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며, 다른 언어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들을 같은 회중의 형제로 맞는다. 한 민족의 문화를 신앙의 척도로 삼거나 교회의 규모를 선교의 목적으로 삼으면, 모든 족속을 자기 앞에 부르시는 왕을 가리게 된다.&lt;/p&gt;&lt;p&gt;풍성한 자도 자기 목숨을 지킬 수 없는 자도 여호와 앞에 엎드린다. 재물과 건강으로 자기 생명을 확보할 수 없다는 고백은, 넉넉한 이에게 재물을 나누게 하고 죽음을 앞둔 이에게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의지하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겪고 부활하셨으므로 성도는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께 탄식하며 찬송할 수 있다.&lt;/p&gt;&lt;p&gt;다음 세대가 들어야 할 소식은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는 구원이다. 부모와 교회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성경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가르친다. 믿음의 증언에는 고난 중의 부르짖음과 응답의 기쁨이 모두 들어 있다. 지금 탄식하는 성도와 감사하는 성도가 같은 회중에 서는 것은 둘 다 고난을 지나신 그리스도의 형제이기 때문이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222/"&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2:22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223-2224/"&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2:23-24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225-2226/"&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2:25-26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227-2228/"&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2:27-28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229/"&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2:29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230-2231/"&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2:30-31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시편 23:1-6 나의 목자, 나의 주인</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ps/23.1-6/</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ps/23.1-6/</guid><description>시편 23편은 여호와를 양 떼를 이끄는 목자로, 이어서 원수 앞에서 상을 차려 주는 주인으로 고백한다. 풀밭과 물가, 어두운 골짜기, 차려진 상과 넘치는 잔을 지나 여호와의 집에 이르는 흐름을 따라 읽고, 선한 목자 예수와의 관계를 다룬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시편 23편은 개역개정과 BHS의 절 번호가 같다. BHS는 “다윗의 시”라는 표제(מִזְמוֹר לְדָוִד, 미즈모르 레다위드)를 1절 앞부분에 넣어 센다. 표제를 독립된 1절로 세어 개역개정보다 절 번호가 하나씩 큰 시편 20-22편과는 다르다. 1-4절에서 여호와는 양을 이끄는 목자이고, 5-6절에서는 손님에게 상을 차리는 주인이다. Robert G. Bratcher와 William D. Reyburn의 UBS 시편 번역 해설도 5절에서 비유가 목자에서 주인으로 바뀐다고 설명한다. 시인은 1-3절에서 여호와에 대해 말하다가 4-5절에서는 “주께서”라고 직접 부르고, 6절에서 다시 “여호와의 집”을 말한다. 풀밭과 물가에서 먹고 마시던 양의 모습은 차려진 상과 가득 찬 잔을 받는 손님의 모습으로 바뀌며, 그 걸음은 여호와의 집에 이른다.&lt;/p&gt;&lt;p&gt;1절에서 시인은 이스라엘의 목자를 “나의 목자”(רֹעִי, 로이)라고 부른다. UBS 번역 해설은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목자로 묘사하는 본문으로 시편 28:9, 77:20, 78:52와 에스겔 34:11-16을 든다. 공동체가 고백해 온 목자를 시인은 자기 삶의 목자로 신뢰한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앞의 고백에 기대어, 여호와께서 목자이시므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모자라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UBS도 두 줄의 인과관계를 드러내어 옮길 수 있다고 제안한다. 원하는 것을 모두 얻으리라는 약속이 아니라, 양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목자를 향한 신뢰다.&lt;/p&gt;&lt;p&gt;2절에서 목자는 양이 먹고 쉴 자리를 마련한다. “푸른 풀밭”의 풀은 갓 돋은 풀(דֶּשֶׁא, 데셰)이며, “누이시며”(יַרְבִּיצֵנִי, 야르비체니)는 양이 눕게 한다는 사역형이다. UBS 번역 해설은 풀이 많아 먹고 쉬기 좋은 들판을 뜻하며, 이 동사에 억지로 눕힌다는 뜻은 없다고 설명한다. 목자가 이끄는 “쉴 만한 물”은 “쉼의 물”(מֵי מְנֻחוֹת, 메 메누호트)로, 해설은 맑은 물이 잔잔히 흐르는 곳으로 이해한다. “인도하시는도다”(יְנַהֲלֵנִי, 예나할레니)는 이사야 40:11에서 어미 양들을 온순히 인도하고 49:10에서 백성을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는 동사와 같다. 목자는 양에게 풀과 물을 공급하고 편히 쉬게 한다.&lt;/p&gt;&lt;p&gt;3절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는 생기와 힘을 되찾게 하신다는 뜻이다. “내 영혼”(נַפְשִׁי, 나프쉬)은 목숨과 생기, 그 생명을 지닌 사람 자신을 가리킬 수 있고, “소생시키시고”(יְשׁוֹבֵב, 예쇼베브)는 ‘돌아오다’라는 동사의 사역적 표현이다. UBS는 2절의 돌보심으로 양이 활력을 되찾는 장면으로 이해한다. 이어 목자는 양을 “의의 길”로 이끄신다. ‘바름, 의’를 뜻하는 צֶדֶק(체데크)을 포함한 이 표현에 대해 UBS는 Anderson의 “행복으로 이끄는 길”과 여러 번역의 “바른 길”, “곧은 길”을 소개한다. 목자의 비유에서는 위험한 곳을 피해 풍성한 풀밭으로 이어지는 바른 길이라는 것이 해설의 판단이다. 여호와의 뜻에 맞는 삶으로 넓혀 읽는 해석은 이 낱말이 구약에서 지니는 윤리적 의미에 기댄다. 목자가 인도하시는 까닭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다. UBS는 이를 자기 명성에 걸맞게 행동한다는 뜻으로 설명하고, 약속을 지키시는 여호와의 명성과 연결한 번역 및 “선한 목자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되지 않는다”는 Taylor의 설명을 소개한다. 시편 25:11에서 시인이 주의 이름을 근거로 용서를 구하듯, 여기서도 인도의 근거는 목자의 신실하심이다.&lt;/p&gt;&lt;p&gt;4절에서 시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안을 걸어간다. “사망의 음침한”에 해당하는 צַלְמָוֶת(찰마웨트)은 번역이 갈리는 낱말이다. UBS에 따르면 칠십인역은 ‘골짜기’를 ‘한가운데’로 옮겼으며, 이 낱말은 욥기 3:5와 시편 107:10 등에서 ‘어둠’을 뜻하지만 마소라 본문의 형태는 칠십인역처럼 ‘죽음의 어둠’이라는 합성어로 읽을 수 있다. 현대 번역도 ‘어두운 골짜기’와 ‘죽음처럼 어두운 골짜기’로 나뉜다. 개역개정은 ‘죽음의 그늘’이라는 전통적 이해를 따른다. 시인이 두려워하지 않는 “해”(רָע, 라)는 이 문맥에서 위험과 해악을 뜻한다. 골짜기는 여전히 위험하지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고백이 두려움을 이긴다. 시인은 여기서 처음으로 여호와를 “당신”이라 직접 부른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목자에 관한 고백이 목자에게 드리는 기도가 된다.&lt;/p&gt;&lt;p&gt;4절의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자의 보호를 눈앞에 드러낸다. UBS에 따르면 개역개정의 “지팡이”는 들짐승을 쫓는 곤봉이고, “막대기”는 몸을 기대는 긴 막대다. Kirkpatrick은 하나의 도구를 두 이름으로 부른 시적 표현으로 보았으나, 대부분의 번역은 둘을 구별한다. “안위하시나이다”는 안심시키고 안전하다고 느끼게 한다는 뜻이다. 두 도구를 다시 가리키는 “그것들이”(הֵמָּה, 헴마)는 “바로 그것들이 나를 안심시킨다”고 강조한다. 양은 목자의 손에 든 도구를 보며 곁에 있는 목자를 신뢰한다.&lt;/p&gt;&lt;p&gt;5절에서 여호와는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리는 주인이다. UBS는 감사 제사 뒤의 교제 식사가 배경일 수 있다며 시편 22:26을 들고, 여호와가 주인이시므로 원수들이 곁에 있어도 손님은 그분의 보호 아래 있다고 설명한다. 원수들이 손님을 해칠 수 없다는 조롱의 어조가 담겼을 가능성도 소개한다.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의 동사(דִּשַּׁנְתָּ, 딧샨타)는 머리를 기름으로 윤택하게 한다는 뜻이다. 같은 어근은 BHS 시편 20:4(개역개정 20:3)의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과 BHS 22:30(개역개정 22:29)의 “풍성한 자”에도 쓰인다. 해설은 손님의 머리에 올리브기름을 발라 주는 환대의 예법을 설명하며 누가복음 7:46을 든다. 왕을 세우는 의식보다 손님을 귀하게 맞는 장면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주인이 포도주를 잔 가장자리까지 채우는 너그러움을 그린다. 이를 독한 술로 취하게 한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UBS는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목자에게서 필요한 것을 공급받던 사람이 이제 주인의 손님으로 풍성한 대접을 받는다.&lt;/p&gt;&lt;p&gt;6절의 “반드시”(אַךְ, 아크)는 뒤따르는 고백을 강조한다. UBS는 “나는 확신하노니”로 옮길 수 있으며, ‘오직’으로 읽어 선하심과 인자하심만이 따른다는 뜻으로 옮길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인자하심”(חֶסֶד, 헤세드)은 언약 관계에서 지키는 신실한 사랑이다. “나를 따르리니”(יִרְדְּפוּנִי, 이르데푸니)의 동사는 흔히 ‘뒤쫓다’를 뜻하지만, UBS는 여기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여호와의 사자처럼 동행하는 모습을 그리므로 ‘함께 가다’로 이해한다. 원수들이 앞에 있어도 시인의 뒤를 따라오는 것은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다. 그 동행은 “내 평생에” 계속된다.&lt;/p&gt;&lt;p&gt;6절의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에는 두 가지 번역 쟁점이 있다. UBS에 따르면 “살리로다”의 וְשַׁבְתִּי(웨샤브티)는 마소라 본문의 모음대로 읽으면 “내가 돌아오리라”다. 같은 자음을 칠십인역처럼 다른 모음으로 읽으면 “내가 거하리라”가 되며, 대부분의 주석과 번역은 이 읽기를 따른다. UBS는 Hebrew Old Testament Text Project를 인용하여 고대 역본과 유대 문법학자들이 모두 ‘앉다, 거하다’로 이해했다고 전한다. 개역개정도 ‘거하리라’를 따른다. 마소라 모음을 따르면 3절의 יְשׁוֹבֵב와 같은 ‘돌아오다’ 동사가 되어, 여호와께서 회복시키신 사람이 여호와의 집으로 돌아오는 그림이 된다. 해설은 이 집을 성전으로 보고 평생 여호와를 예배하며 임재를 누리려는 소망으로 이해하지만, 하늘 처소로 보는 Anchor Bible의 견해도 소개한다. “영원히”로 옮긴 לְאֹרֶךְ יָמִים(레오레크 야밈)은 “날들의 길이 동안”으로, 대개 ‘평생토록’이나 ‘오랫동안’으로 이해한다. BHS 시편 21:5(개역개정 21:4)의 “장수”에도 같은 표현이 쓰이지만, 거기에는 “영원한”에 해당하는 עוֹלָם וָעֶד(올람 와에드)가 덧붙고 여기에는 없다. 개역개정의 “영원히”는 이 표현을 넓게 옮긴 것이다. 시인은 일생 내내 여호와의 집에서 그분의 임재 가운데 살기를 고백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시편 78:52-53은 출애굽을 목자의 일로 기억한다. 하나님은 백성을 양 떼처럼 광야에서 인도하셨고, 그들은 안전히 인도받아 두려움이 없었다. 광야에서 먹을 것과 물을 공급받은 이스라엘의 경험이 시편 23편에서는 한 사람의 “나의 목자”라는 고백이 된다. 시편 78:53과 23:4는 두려움을 이기는 이유를 목자의 인도에서 찾는다.&lt;/p&gt;&lt;p&gt;이사야 63:11-14의 백성은 양 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하나님이 지금 어디 계시냐고 묻는다. 그들은 여호와의 영이 가축을 골짜기로 내려가듯 편히 쉬게 하시고, 백성을 인도하여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기억한다(63:14). “편히 쉬게 하셨도다”(תְּנִיחֶנּוּ, 테니헨누)는 시편 23:2의 “쉴 만한 물”(מֵי מְנֻחוֹת, 메 메누호트)과 ‘쉼’이라는 어근을 공유한다. 백성을 쉬게 하고 인도하여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은 시편 23편의 목자와 같은 분이다. 이사야 63장의 백성은 그 목자가 어디 계시냐고 묻고, 시편의 시인은 그분이 자기와 함께 계신다고 고백한다.&lt;/p&gt;&lt;p&gt;에스겔 34장에서 하나님은 양을 먹이지 않고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책망하신다. 흩어진 양을 친히 찾아 모아 “누워 있게” 하시겠다는 약속(34:15)은 시편 23:2의 풀밭과 겹친다. 하나님은 다윗 계열의 한 목자를 세워 양을 먹이겠다고 약속하신다(34:23). 이사야 56:11도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몰지각한 목자들”을 고발하는 한편, 44:28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에 쓰실 고레스를 “내 목자”라 부른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이름을 표제에 두면서도 그를 양의 자리에 세운다. 백성을 맡은 사람 목자는 먼저 여호와의 양으로 살아야 한다. 실패한 지도자들을 대신하여 여호와께서 친히 돌보시고 다윗 계열의 한 목자를 세우시리라는 에스겔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목자 왕에 대한 기대를 형성한다.&lt;/p&gt;&lt;p&gt;이사야 40:11의 목자는 어린 양을 품에 안고 젖먹이는 어미 양을 온순히 이끄신다. “목자”와 “먹이시며”는 같은 어근에서 나와, 여호와께서 양을 먹이시는 분임을 강조한다.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יְנַהֵל, 예나헬)는 시편 23:2의 “인도하시는도다”(יְנַהֲלֵנִי, 예나할레니)와 같은 동사다. 이사야 49:9-10에서는 포로에서 돌아오는 백성이 길에서 먹고, 헐벗은 산에서도 풀밭을 얻으며,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으리라는 약속으로 이어진다.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그들을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יְנַהֲלֵם, 예나할렘)는 말도 같은 동사를 쓴다. 시편의 풀밭과 물가가 이사야에서는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백성 전체의 길, 새 출애굽의 약속이 된다.&lt;/p&gt;&lt;p&gt;이사야 55:1-3은 돈 없는 목마른 자를 물과 음식으로 초대하고, “좋은 것”과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약속한다. “기름진 것”은 시편 23:5에서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는 동사와 어근이 같고, “좋은 것”도 23:6의 “선하심”과 같은 낱말이다.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는 약속과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חַסְדֵי דָוִד, 하스데 다위드)는 시편의 소생과 “인자하심”(חֶסֶד, 헤세드)을 떠올리게 한다. 한 사람이 누리는 잔칫상은 모든 목마른 자에게 열리는 언약의 잔치와 연결된다. 이사야 65:11-13에서는 여호와를 버린 자들이 갓과 므니에게 상을 차리고 술을 가득 붓는다. “상을 베풀며”는 시편 23:5의 상 차림과 같은 동사와 명사를 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종들이 먹고 마실 때 그들은 주리고 목마르리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의 상에 앉는 사람과 다른 신에게 상을 차리는 사람의 운명이 갈린다.&lt;/p&gt;&lt;p&gt;시편 23:6의 인자하심은 이사야 54장에서 진노와 포로의 시간을 지난 백성에게 주시는 약속이 된다. 하나님은 잠시 얼굴을 가리셨으나 영원한 자비로 긍휼히 여기겠다고 말씀하시고(54:8), 산과 언덕이 옮겨져도 자기 자비와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신다(54:10). 여기서 “자비”는 시편의 헤세드와 같은 말이다. 이사야 54:10의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와 49:10의 “긍휼히 여기는 이”도 같은 어근의 분사로 표현된다. 샘물로 인도하시는 목자는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다. 시인이 평생 동행하리라고 신뢰한 사랑은 진노의 시간을 지난 백성에게도 떠나지 않는다.&lt;/p&gt;&lt;p&gt;시편 23편의 앞뒤에는 고난과 예배의 노래가 놓여 있다. 시편 22편은 버림받음의 부르짖음으로 시작하여, 구원받은 시인이 회중 가운데서 서원을 갚고 겸손한 자들이 먹고 배부르는 장면에 이른다(22:26). UBS는 이런 감사의 식사가 시편 23:5의 배경일 수 있다고 본다. 시편 24편은 여호와의 거룩한 곳에 설 사람이 누구냐고 묻고, “여호와를 찾는 족속”을 말한다(24:3-6). 22:26(BHS 22:27)의 “여호와를 찾는 자”와 24:6의 “여호와를 찾는 족속”에는 같은 동사의 분사가 쓰인다. 그 사이에서 23편의 시인은 여호와의 집에 평생 거하기를 고백한다. 버림받음의 부르짖음에서 감사의 식탁을 지나 거룩한 곳에 서는 예배자로 나아가는 흐름이다. 시편 21:4(BHS 21:5)에서 왕에게 주어진 “장수”도 23:6의 “날들의 길이”와 연결된다. 개인의 신뢰는 출애굽과 왕정, 포로와 귀환, 성전 예배라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울린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시편 23편은 먼저 여호와를 자기 목자로 고백한 이스라엘 사람의 노래다. 이 시에서 목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이시며, 시인은 사람 왕이나 지도자를 목자로 부르지 않는다. 구약은 사람 목자들의 실패를 고발하면서, 여호와께서 친히 목자가 되시리라는 약속과 다윗 계열의 한 목자를 세우시리라는 약속을 함께 남겼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그 기대를 채우지 못했고, 백성은 이사야 63장처럼 그 목자가 어디 계시냐고 물어야 했다. 신약은 이 두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만난다고 증언한다. 요한복음 10:11에서 예수는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시고, 10:14에서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라고 덧붙이신다. 예수는 시편 23편에서 여호와께 드려진 목자의 자리에 자신을 두신다. 동시에 그분은 에스겔 34:23이 말한 다윗 계열의 목자로서 양 떼를 맡으신다. 시편 23편의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한 관계가, 양을 아시는 예수와 예수를 아는 양 사이의 관계로 이어진다.&lt;/p&gt;&lt;p&gt;신약은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부터 그분을 목자 왕의 약속과 연결한다. 마태복음 2:6은 미가서의 예언을 인용하여, 베들레헴에서 나실 다스리는 이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고 말한다. 다윗의 고향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는 에스겔 34:23이 말한 “내 종 다윗”의 자리에 서신다. 그러나 시편 23편의 표제에 이름이 붙은 다윗 자신은 완전한 목자가 아니었다. 그는 들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였지만, 왕이 된 뒤에는 자기 욕심으로 한 사람의 생명과 가정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목자 왕들은 모두 먼저 여호와의 양으로 살아야 했고, 아무도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예수는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신 양이며, 동시에 양 떼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목자다. 그래서 시편 23편의 고백은 예수 안에서 두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는 아버지를 신뢰하며 죽음의 골짜기까지 걸으신 참된 이스라엘이시고, 그분의 백성이 “나의 목자”라고 부를 수 있는 목자이시다.&lt;/p&gt;&lt;p&gt;마가복음 6:34-44에서 예수는 큰 무리가 목자 없는 양 같은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먼저 여러 가지를 가르치시고, 이어 사람들을 푸른 잔디 위에 떼를 지어 앉게 하신 뒤 떡과 물고기로 먹이신다.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 시편 23:2의 목자가 양을 새 풀의 풀밭에 눕히시듯, 예수는 빈 들에서 무리를 푸른 잔디에 앉히시고 먹이신다. 시편 23:1의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가 빈 들의 무리에게 실제로 일어난다. 예수는 양에게 필요한 것을 말씀과 떡으로 채우신다. 시편 23:3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가 목숨과 생기를 지닌 사람 전체의 회복을 말하듯, 예수의 돌보심도 사람 전체를 향한다.&lt;/p&gt;&lt;p&gt;요한복음 10장의 목자는 양을 앞에서 이끈다. 예수는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고, 양들보다 앞서 가며, 양들은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따라간다고 말씀하신다(요한복음 10:3-4). 시편 23:2-3에서 목자가 양을 물가로, 의의 길로 이끄셨듯, 예수는 양의 이름을 부르시며 앞서 가신다. 누가복음 15:4-6에서 예수는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잃은 양 하나를 찾아 나선 목자가, 찾은 양을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돌아오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사야 40:11의 목자가 어린 양을 팔로 모아 품에 안듯, 예수의 비유 속 목자는 지친 양을 직접 메고 온다. 시편 23편처럼, 양을 찾아 돌보고 이끄는 쪽은 목자다.&lt;/p&gt;&lt;p&gt;시편 23편의 목자는 양을 위해 맹수를 막아 섰다. 요한복음 10:11의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이 차이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이 드러난다. 이사야 53:6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한다. 시편 23:3에서 목자는 양을 “의의 길로” 이끄시지만, 이사야 53:6의 양들은 “제 길로” 갔다. 이어 53:7은 그 죄악을 짊어진 이를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에 비긴다. 양 떼를 이끌어야 할 목자가 양들의 죄를 지고 스스로 어린 양이 되어 죽음으로 끌려간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다(마태복음 27:46). 시편 22편의 첫 부르짖음이 예수의 기도가 되었다. 시편 23:4의 양은 목자와 함께 죽음의 그늘 같은 골짜기를 지났다. 예수는 그 골짜기의 가장 깊은 곳인 죽음과 버림받음을 홀로 지나가신 목자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지나는 어두운 골짜기에는 목자가 먼저 걸어간 자국이 있다. 히브리서 13:20은 하나님이 영원한 언약의 피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다고 말한다. 골짜기를 지나신 목자가 다시 살아나 양 떼 앞에 서신다.&lt;/p&gt;&lt;p&gt;베드로전서 2:25는 이사야 53장의 그림을 이어받아,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던 사람들이 이제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분에게 돌아왔다고 말한다. 시편 23:3에서 목자가 “내 영혼을” 돌아오게 하셨듯, 신약에서 그리스도는 길 잃은 양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목자다. 베드로 자신도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뒤 다시 돌아온 사람이었고, 부활하신 예수는 그에게 자기 양을 먹이라고 맡기셨다(요한복음 21:15-17). 시편 23:3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도 여기서 새로운 깊이를 얻는다. 여호와는 약속을 지키시는 자기 이름에 걸맞게 양을 이끄셨다. 그리스도는 그 이름에 걸맞게 양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양을 끝까지 책임지는 목자의 이름으로 드러난다.&lt;/p&gt;&lt;p&gt;시편 23:4에서 시인이 골짜기 한가운데서 드린 고백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계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마태복음은 예수의 탄생을 알리며 그분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임마누엘로 소개하고(마태복음 1:23), 복음서의 마지막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다(마태복음 28:20). 시편 23:4의 목자는 골짜기 밖에서 양을 기다리지 않고 양과 함께 골짜기 안을 걸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질병과 슬픔과 죽음이 있는 사람의 자리 한가운데로 들어오셨다. 시편 23편의 시인은 골짜기에서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보며 안심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와 부활을 지나신 목자의 약속을 붙들고 골짜기를 걷는다. 함께하심의 근거가 목자의 손에 들린 도구에서 목자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깊어졌다.&lt;/p&gt;&lt;p&gt;5절의 주인과 상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읽힌다. 누가복음 7:36-50에서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인 시몬은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는 예법을 지키지 않았다. 그때 그 집에 들어온 한 여인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었고, 예수는 그 여인의 많은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의 눈에 죄인이던 여인이 예수 앞에서 환대받는 사람이 되었다. 예수는 마지막 밤에 제자들과 식탁에 앉아 잔을 주시며 그 잔이 자기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누가복음 22:20). 그 식탁에는 자기를 팔 사람의 손도 함께 있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리시는 주인의 모습이 이 장면에서는 자기를 배반할 사람까지 상에 앉히시는 주인의 모습으로 읽힌다. 같은 밤 예수는 고난의 잔을 자기에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신 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누가복음 22:42). 예수께서 고난의 잔을 마시셨기에, 그분의 백성은 가득 찬 은혜의 잔을 받는다. 교회가 성찬의 식탁에 모일 때마다 시편 23:5의 상과 잔은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는 상과 잔이 된다.&lt;/p&gt;&lt;p&gt;요한복음 10:16에서 예수는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도 인도하여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에스겔 34:23의 “한 목자”가 여기서 이스라엘의 양과 다른 양을 모으는 목자로 나타난다. 시편 22:27이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라고 내다본 일이 이 목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사야 49장에서 샘물 근원으로 인도받던 백성의 귀환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민족들까지 한 목자 아래 모이는 일로 넓어진다. 교회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민족들의 목자도 되신다는 이 약속 위에 세워진다. 시편 23편에서 한 사람이 고백한 “나의 목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과 민족들이 함께 고백하는 목자가 된다.&lt;/p&gt;&lt;p&gt;요한계시록 7:17은 이 시편의 끝을 보여 준다.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바로 앞 7:16은 이사야 49:10처럼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으리라고 말한다. 이사야 53:7에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던 어린 양이 요한계시록에서는 보좌 가운데 계신 목자가 된다. 목자가 어린 양이 되어 죽으셨고,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이제 목자로서 양 떼를 이끄신다. 시편 23:2의 “쉴 만한 물 가”와 이사야 49:10의 “샘물 근원”은 어린 양이 이끄시는 생명수 샘으로 이어지고, 23:6의 “여호와의 집”은 하나님 앞의 영원한 거처로 이어진다. 시편 23:6의 히브리어는 “날들의 길이”, 곧 평생을 말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 평생은 죽음으로 끊기지 않는 생명으로 열린다. 시인이 평생토록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를 고백했다면, 그리스도 안의 백성은 그 고백이 마지막 날 눈물이 씻기는 자리에서 완성되기를 기다린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필요한 것을 아시는 목자를 향한 신뢰다. 원하는 것이 계속 늘어날 때에도 이 고백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소유의 크기로 재지 않게 한다. 목자가 주시는 풀과 물과 쉼을 의지하는 사람은 가진 것을 움켜쥐어 자기 안전을 보장하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이웃의 필요에 응답할 수 있다.&lt;/p&gt;&lt;p&gt;목자는 지친 양을 쉬게 하고 소생시킨다. 쉼과 회복을 스스로 이루어 내야 할 성과로 여기는 사람에게 이 장면은 돌보심을 받는 양의 자리를 일깨운다. 목자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양을 이끄신다. 회복의 소망은 지친 사람의 결심보다 목자의 신실하심에 있다. 그분을 따라 사는 사람은 자기 욕심대로 길을 정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생명을 살리는 바른 인도를 신뢰한다.&lt;/p&gt;&lt;p&gt;시인은 골짜기 한가운데서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기도한다. 그리스도인의 고통을 믿음이 약한 탓으로 돌리거나 서둘러 밝은 결론으로 덮는 말은 이 고백과 맞지 않는다. 골짜기는 어둡고 목자는 그 안에서 함께 걷는다. 죽음과 부활을 지나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도 슬픔과 두려움을 하나님께 직접 아뢸 수 있다.&lt;/p&gt;&lt;p&gt;상은 원수가 사라진 뒤가 아니라 원수 앞에서 차려진다. 적대하는 사람의 평가가 하나님께 받은 존귀함을 빼앗을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인은 보복으로 자기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이 신뢰 때문에 부당한 일을 덮거나 위험한 관계에 머물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원수 앞에서 손님을 보호하시는 주인은 그의 안전도 돌보신다. 하나님의 환대를 받은 사람은 가난한 이웃을 낮추어 대하지 않고 같은 주인의 손님으로 받아들인다.&lt;/p&gt;&lt;p&gt;에스겔 34장과 이사야 56:11이 고발한 지도자들은 양을 먹이지 않고 자기만 먹였다. 사람을 맡은 이는 그들을 자기 이익을 위한 자원으로 삼을 수 없다. 시편의 목자는 양에게 필요한 먹이와 쉼을 마련하고 위험 속에서 지킨다. 여호와의 돌보심을 말하면서 맡은 사람을 소진시키는 지도력은 이 목자의 모습과 어긋난다.&lt;/p&gt;&lt;p&gt;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따른다는 고백은 넘어지고 실패한 날에도 목자의 신실한 사랑을 의지하게 한다. 시인은 일생 동안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를 바랐다. 그리스도의 백성은 그 소망을 어린 양이 목자가 되어 생명수 샘으로 이끄시고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약속 안에서 붙든다(요한계시록 7:17).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도 목자의 돌보심을 신뢰할 근거가 여기에 있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31/"&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3:1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32/"&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3:2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33/"&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3:3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34/"&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3:4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35/"&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3:5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36/"&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3:6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시편 24:1-10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문을 지나 들어오실 왕</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ps/24.1-10/</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ps/24.1-10/</guid><description>시편 24편은 온 땅이 여호와의 것이라는 찬송으로 시작하여,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인지 묻고, 성전 문을 향해 영광의 왕을 맞으라고 외친다. 창조, 예배자의 자격, 왕의 입성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따라 읽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다룬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시편 24편은 온 땅의 주인을 찬양하고(1-2절), 그분 앞에 설 예배자의 삶을 물은 뒤(3-6절), 문들을 향해 영광의 왕을 맞으라고 외친다(7-10절). 표제 “다윗의 시”(לְדָוִד מִזְמוֹר, 레다비드 미즈모르)는 이 시를 다윗과 연결한다. BHS는 표제를 1절 안에, 개역개정은 번호 없이 본문 앞에 두며, 본문 1-10절의 절 번호는 같다. 3절에서 누가 하나님 앞에 오르고 설 수 있는지 묻던 질문은 8절과 10절에서 들어오시는 왕이 누구인지 묻는 질문으로 이어진다.&lt;/p&gt;&lt;p&gt;“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는 1절의 선언은 히브리어에서 소유자인 여호와를 맨 앞에 놓아 강조한다. 땅과 그 안에 충만한 것, 세계와 거기 사는 자들을 짝지어 사물과 생명 모두가 그분께 속한다고 노래한다. Robert G. Bratcher와 William D. Reyburn의 UBS 해설도 이 병행을 사람과 동물을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한 소유 선언으로 읽는다. 2절은 그 이유를 밝힌다. 여호와께서 바다와 강 위에 땅을 세우고 굳게 하셨기 때문이다. UBS는 이 표현을 땅 아래에 거대한 물이 있다고 생각한 고대의 세계상과 연결한다. 사람이 발 딛는 땅은 창조주께 의존하며, 성소에서 맞을 왕은 그 땅과 모든 생명의 주인이시다.&lt;/p&gt;&lt;p&gt;3절은 온 세계에서 여호와의 산과 거룩한 곳으로 시선을 좁힌다. 산에 오르고 성소에 선다는 말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머물 수 있는지 묻는다. UBS는 시온 성전 입구에서 순례자들이 입장 조건을 묻고 제사장이 대답했을 것으로 설명한다. 이 문답에서 예배자는 성소에 도착하기까지 살아온 삶을 질문받는다.&lt;/p&gt;&lt;p&gt;4절의 대답인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는 행동과 그 행동을 움직이는 동기를 가리킨다. UBS도 손과 마음을 외적인 행동과 내적인 동기로 풀이한다. 의식적으로 손을 씻는 예배자라도 이웃을 속이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 좋은 의도를 내세워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는 진실한 행실과 마음이 요구된다.&lt;/p&gt;&lt;p&gt;“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는 자신을 헛된 것에 맡기거나 그쪽으로 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UBS는 허탄한 것이 우상을 가리킬 가능성을 높게 보면서, 거짓을 사랑하거나 악한 일에 생각을 두는 것으로 읽는 해석도 소개한다. 뒤의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은 속일 목적으로 하는 약속과 증언을 금한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은 이웃 앞에서 하는 말의 진실함으로 드러난다.&lt;/p&gt;&lt;p&gt;4절의 “뜻을”에는 본문 전승의 차이가 있다. BHS 웹 본문은 “나의 영혼”(נַפְשִׁי, 나프쉬)으로 읽지만, UBS에 따르면 많은 히브리어 사본과 고대 역본은 “그의 영혼”으로 읽는다. UBS는 “나의 영혼”을 여호와의 이름과 같은 뜻으로 이해하여 출애굽기 20:7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거짓 목적에 사용하지 말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해석도 소개한다. 개역개정의 “뜻을”에는 이 소유 표현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영혼”으로 읽으면 예배자 자신이 무엇을 의지하는지 묻고, “나의 영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풀이하면 그 이름의 남용을 금한다. 두 해석 모두 뒤의 거짓 맹세 금지와 연결된다.&lt;/p&gt;&lt;p&gt;5절에서 예배자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받는다. “받고”(יִשָּׂא, 잇사)는 4절에서 영혼을 헛된 것에 “들다”라는 뜻으로 쓰인 동사와 같은 어근이다. 헛된 것을 향해 자신을 들지 않은 사람이 이제 하나님께 복을 받아 지닌다. 의도 복과 짝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나타난다. 예배자의 진실한 삶은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다.&lt;/p&gt;&lt;p&gt;6절은 이들을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라 부른다. “족속”(דּוֹר, 도르)은 여기서 같은 성품을 지닌 무리를 가리킨다. “주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מְבַקְשֵׁי פָנֶיךָ, 메바크셰 파네카)에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말하던 시가 그분께 직접 말을 건넨다. 이어 마소라 본문에는 “야곱”(יַעֲקֹב, 야아코브) 한 단어가 있어 하나님을 찾는 무리를 야곱이라 부르는 것으로 읽힌다. UBS에 따르면 히브리어 사본 둘과 시리아어역에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있고, 칠십인역도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로 읽는다. 개역개정의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은 이 전승들에 가깝다. 끝의 “셀라”(סֶלָה, 셀라)는 뜻이 분명하지 않은 예전 용어로, 10절 끝에도 나와 두 단락을 마무리한다.&lt;/p&gt;&lt;p&gt;7절은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שְׂאוּ שְׁעָרִים רָאשֵׁיכֶם, 세우 셰아림 라셰켐)라고 외친다. 4절의 영혼, 5절의 복에 이어 이제 문의 머리가 “들다”라는 동사의 대상이 된다. 문의 머리는 상인방이나 아치로 이해되기도 하며, UBS는 머리를 드는 것이 기쁨을 나타낼 가능성도 소개한다. 또 이 장면을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메고 들어오는 행렬과 연결한다. 시 자체에는 언약궤나 특정 행렬이 언급되지 않는다.&lt;/p&gt;&lt;p&gt;“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וְהִנָּשְׂאוּ פִּתְחֵי עוֹלָם, 베힌나세우 피트헤 올람)에서 “영원한”은 오래됨과 영속함을 모두 나타낼 수 있다. UBS는 이미 오래된 예루살렘의 문으로 보는 해석과, 땅의 문을 하늘 거처의 문과 연결하는 해석을 소개한다. 문이 높아져야 하는 목적은 영광의 왕이 들어오시게 하는 데 있다. 9절은 같은 외침을 되풀이하면서 7절의 수동 명령 “들려라”를 능동 명령 “들라”(וּשְׂאוּ, 우세우)로 바꾼다. 개역개정은 둘 다 “들릴지어다”로 옮긴다. 문들을 사람처럼 부르는 외침은 들어오시는 왕의 위엄을 높인다.&lt;/p&gt;&lt;p&gt;8절의 영광의 왕은 “강하고 능한” 여호와, “전쟁에 능한”(גִּבּוֹר מִלְחָמָה, 깁보르 밀하마) 여호와이시다. “능한”은 용사를 가리키는 말로, 왕을 백성을 구원하고 대적을 이기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출애굽기 15:3도 바다에서 구원하신 여호와를 용사로 찬양한다. 10절의 질문은 대명사를 더하여 왕의 신원을 거듭 묻고, 마지막 대답은 “만군의 여호와”(יְהוָה צְבָאוֹת, 전통적으로 아도나이 체바오트로 읽음)라는 이름을 밝힌다. 군대를 거느리시는 그분이 곧 영광의 왕이시다. 온 땅의 주인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들어오시며, 백성은 정결과 진실함으로 그분을 맞는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창세기 1:1-10에서 하나님은 물을 나누고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하여 생명이 살 터전을 마련하신다. 시편 24:2도 사람이 발 딛는 땅을 하나님의 창조에 의존하는 것으로 노래한다. 출애굽기 19:3-6에서는 온 세계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선언과, 구원받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시는 말씀이 이어진다. 시편에서도 온 땅의 주권을 고백한 뒤 그분의 산에 오를 백성의 삶을 묻는다. 구출과 언약의 은혜를 받은 백성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lt;/p&gt;&lt;p&gt;출애굽기 15:1-3은 바다에서 구원하신 여호와를 용사로 찬양하고, 13-18절은 그분이 구속받은 백성을 거룩한 처소와 기업의 산으로 인도하며 영원히 다스리신다고 노래한다. 시편 24편의 거룩한 산과 전쟁에 능하신 왕도 이 구원의 언어와 이어진다. 백성이 성소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고 인도하셨기 때문이다.&lt;/p&gt;&lt;p&gt;출애굽기 20:7의 이름 남용 금지와 16절의 거짓 증언 금지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이웃 앞에서 하는 말을 연결한다. 시편 24:4의 “나의 영혼”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풀이하면 20:7과 더 직접 연결되며, “그의 영혼”으로 읽어도 신뢰와 맹세의 진실함을 묻는다. 시편 15편 역시 성산에 살 사람을 물으며 비방과 이웃을 해치는 행위, 부당한 돈거래를 금하고 손해가 나더라도 맹세를 지키라고 한다. 예배자가 손과 마음으로 행한 일에는 이웃을 대하는 책임이 포함된다.&lt;/p&gt;&lt;p&gt;시편 51:6-12에서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씻음과 정한 마음을 구한다. 시편 24편이 정결한 손과 마음을 요구한다면, 51편은 죄인이 그 정결을 하나님께 받아야 함을 밝힌다. 이사야 6:1-7에서도 온 땅에 충만한 왕의 영광을 본 이사야는 부정한 입술을 고백하고, 제단의 숯불을 통해 죄 사함을 받는다.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받는다는 시편 24:5의 고백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드러내고 자기 백성을 정결하게 하신다.&lt;/p&gt;&lt;p&gt;사무엘상 4:3-11에서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자신들을 구원하리라 기대했지만 전투에 패하고 궤도 빼앗긴다. 21-22절은 이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난 사건이라 부른다. 사무엘하 6:1-15에서는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던 다윗이 웃사의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며, 뒤에 오벧에돔의 집에 내린 복을 듣고 기쁨으로 궤를 맞는다. 하나님의 임재는 백성에게 복과 기쁨을 주며 그분의 거룩함에 대한 경외를 요구한다.&lt;/p&gt;&lt;p&gt;UBS는 시편 24:7-10의 문답을 언약궤 행렬과 연결하며 사무엘하 6:2와 사무엘상 4:21을 참조한다. 궤와 결부된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 떠나거나 돌아오는 영광의 주제가 이 설명을 뒷받침한다. 특정한 행렬의 날짜나 사건은 시에 제시되지 않는다. 시편의 왕은 온 땅과 예배자의 행실을 다스리는 주님이시다. 사람은 승리를 확보하려고 그분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lt;/p&gt;&lt;p&gt;아모스 5:21-24에서 하나님은 절기와 제사와 노래를 거절하고 공의와 정의를 요구하신다. 시편 24편의 깨끗한 손과 마음, 진실한 맹세도 예배와 이웃을 대하는 삶을 분리할 수 없게 한다. 온 땅의 주인을 찬양하면서 그분이 지으신 사람을 해치는 불의를 계속할 수 없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시편 24편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 그분을 왕으로 맞는 노래이다. 구약의 백성은 그 정결의 요구 앞에서 거듭 실패했고, 죄를 고백하며 새 마음을 구했다. 신약은 예수께서 온전한 순종으로 하나님 앞에 서시고 자기 백성을 그분께 나아가게 하신다고 증언한다.&lt;/p&gt;&lt;p&gt;요한복음 1:1-5는 만물이 말씀을 통해 지어졌고 그분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한다. 온 땅이 여호와께 속한다는 시편의 고백은 그리스도를 통한 창조와 연결된다. 고린도전서 10:25-29에서 바울은 시편 24:1을 직접 인용하여 시장의 음식을 양심 문제로 캐묻지 않고 먹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양식이 주께 속하므로 감사히 받되, 같은 식탁에 앉은 이웃의 양심과 유익을 존중해야 한다.&lt;/p&gt;&lt;p&gt;마태복음 5:1-12에서 예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시편에서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듯, 예수의 약속도 정결과 하나님을 만나는 복을 연결한다. 가난한 심령과 애통함, 자비와 의에 대한 갈망을 말하는 산상수훈의 복은 자기 의를 자랑하며 다른 사람을 밀어내는 태도를 허용하지 않는다.&lt;/p&gt;&lt;p&gt;히브리서 7:23-28의 예수께서는 거룩하고 악이 없으며 더러움이 없으신 대제사장으로, 자기 죄를 위한 제사 없이 자신을 단번에 드리셨다. 항상 살아서 간구하시는 그분은 자신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온전히 구원하신다. 히브리서 9:23-28에서는 하늘 자체에 들어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단번의 희생으로 죄를 제거하신다. 하나님 앞에 누가 설 수 있는지를 묻는 성도는 이 정결한 대제사장과 그분의 희생을 의지한다.&lt;/p&gt;&lt;p&gt;히브리서 10:19-25는 예수의 피로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라고 권한다. 마음과 양심의 정결, 몸의 씻음을 말한 뒤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는 권면이 따른다. 그리스도께 받은 정결은 진실한 행실로 이어진다. 히브리서 2:14-18의 대제사장은 혈과 육을 지니고 고난과 죽음을 겪으셨기에 시험받는 사람들을 도우신다. 연약함과 두려움 속에 있는 사람도 그분께 나아가 도움을 구할 수 있다.&lt;/p&gt;&lt;p&gt;고린도전서 2:6-9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영광의 주”라 부른다. 빌립보서 2:5-11에서는 십자가의 죽음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높이시며, 모든 입이 그분을 주로 고백하게 하신다. 영광의 왕을 고백하는 교회는 자기 백성을 살리려고 자신을 내어 주신 주님의 낮아지심을 배운다. 사도행전 1:9-11의 승천과 히브리서의 하늘 성소 입장은 구원을 이루신 아들의 높임과 중보를 증언한다. 성도는 그분의 다스리심에 응답하며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lt;/p&gt;&lt;p&gt;고린도전서 15:20-28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모든 원수를 복종시키고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폐하신다. 시편의 전쟁에 능하신 왕은 이 승리의 소망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다. 이 승리를 믿는 교회가 다른 민족이나 반대자를 하나님의 원수로 몰아 폭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에베소서 2:13-22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목하게 하여 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시고, 성도들을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세우신다. 요한계시록 21:1-4에서 그 임재는 눈물과 죽음이 사라지는 새 창조로 완성된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땅과 거기 사는 이들이 여호와께 속한다면 재물이나 권한을 가졌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 이웃의 생명과 수고도 하나님의 것이다. 창조주를 찬양하는 예배자는 재물을 얻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이웃을 해치는 불의를 버려야 한다.&lt;/p&gt;&lt;p&gt;깨끗한 손과 청결한 마음은 실제 행동과 동기의 진실함을 요구한다. 예배의 봉사와 헌금으로 거짓이나 부당한 이익의 책임을 대신할 수 없다. 잘못을 인정한 사람은 불의를 멈추고, 자신이 입힌 피해에 책임져야 한다. 정결은 가난이나 질병, 장애에 따라 사람을 가르는 잣대가 아니다. 시가 묻는 것은 손과 마음, 충성과 말의 진실함이다.&lt;/p&gt;&lt;p&gt;거짓 맹세 금지는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운 말에도 적용된다. 자기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주장하거나 신앙의 말로 거짓 약속을 정당화하면 그 이름을 욕되게 한다. 돈과 평판을 지키려고 진실을 버리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의지하는지 물어야 한다.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삶은 그분을 신뢰하며 말과 행실을 그분의 뜻에 맞추는 삶이다.&lt;/p&gt;&lt;p&gt;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을 묻는 말씀 앞에서 죄를 숨기거나 기도를 미룰 필요는 없다. 죄를 씻고 새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그리스도의 희생과 중보를 의지하여 나아갈 수 있다. 구원의 하나님께 복과 의를 받는 사람은 잘못을 고백하고 삶을 바꾼다.&lt;/p&gt;&lt;p&gt;영광의 왕을 맞는 예배에서 지도자나 회중은 자신을 왕의 자리에 놓을 수 없다. 강하고 능하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폭력과 모욕을 정당화할 수도 없다. 왕을 찬양하는 바로 그 예배자에게 깨끗한 손과 거짓 없는 말이 요구된다. 십자가로 화목을 이루시고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믿는 교회는 진실과 사랑으로 그분께 순종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41-242/"&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4:1-2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43/"&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4:3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44/"&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4:4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46/"&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4:6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psalm-247/"&gt;Robert G. Bratcher and William D. Reyburn, A Handbook on the Book of Psalms (UBS, 1991), 시편 24:7 번역 해설, UBS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40:1-11 위로하라 내 백성을: 광야 길로 오시는 목자 하나님</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0.1-11/</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0.1-11/</guid><description>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징계가 끝났다고 알리게 하시고, 광야에 난 길로 친히 돌아오신다. 사람은 풀처럼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선다. 강한 팔로 다스리시는 그분이 같은 팔로 어린 양을 품으신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이사야 40장은 바벨론 포로를 예고한 39:5-8에 이어 징계와 상실을 겪은 백성에게 회복을 선언한다. BHS는 2절, 5절, 8절, 11절 끝에 세투마라는 닫힌 단락 표지를 두어 1-2절, 3-5절, 6-8절, 9-11절을 구분한다. 위로의 명령에서 광야의 길과 여호와의 영광으로, 시드는 사람과 영원한 말씀에서 오시는 왕과 목자로 이어진다. 1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5절의 여호와의 입, 8절의 영원한 말씀으로 거듭 나타나 회복의 확실함을 뒷받침한다.&lt;/p&gt;&lt;p&gt;하나님은 “위로하라”(נַחֲמוּ, 나하무)는 명령을 두 번 외치며 징계받은 이스라엘을 여전히 “내 백성”이라 부르신다. 명령을 받는 이들의 신분은 밝혀지지 않는다. 백성에게 자신을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그들의 미래를 다시 여신다. 2절에서는 예루살렘을 한 여인처럼 부르며 “마음에 닿도록” 말하라고 하신다. 이 표현(עַל־לֵב, 알-레브)은 상실을 겪은 도성이 회복의 소식을 듣도록 가까이 말하는 장면을 그린다.&lt;/p&gt;&lt;p&gt;위로의 내용은 예루살렘의 노역이 끝났고 죄악이 사함을 받았으며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다는 선언이다. 세 절은 모두 같은 접속사(כִּי, 키)로 시작한다. 개역개정은 세 절을 선포할 내용으로 잇고, NET는 마지막 절을 앞선 선언의 이유로 읽는다. “노역의 때가 끝났고”(מָלְאָה צְבָאָהּ, 말레아 체바아)는 군역이나 고된 복역이 찼다는 뜻이다.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נִרְצָה עֲוֺנָהּ, 니르차 아오나)는 문자적으로 그 죄악이 “받아들여졌다”는 표현이며, NET는 형벌이 충분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풀이한다. 두 번역은 죄의 형벌을 하나님이 끝내셨고 회복의 길을 여셨다는 문맥에서 만난다.&lt;/p&gt;&lt;p&gt;“배나”(כִּפְלַיִם, 키플라임)는 갑절을 뜻한다. NET는 갑절 형벌과 배상의 다른 성경 용례를 소개한다. 이곳에서는 예루살렘의 무거운 징계가 끝났다는 위로에 속한다.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라는 말이 죄의 심각함을 밝히고, 하나님이 그 징계의 끝을 선언하신다는 말이 용서의 확실함을 밝힌다. 회복은 백성이 고통을 쌓아 구원을 사는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새롭게 대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에 달려 있다.&lt;/p&gt;&lt;p&gt;3절의 익명의 목소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고 사막에서 하나님의 대로를 곧게 하라고 명한다. 길을 닦을 이들의 신분은 밝혀지지 않는다. UBS는 이 길을 하나님이 백성에게 돌아오실 길로 설명한다. “광야에서”(בַּמִּדְבָּר, 밤미드바르)는 다음 행의 “사막에서”(בָּעֲרָבָה, 바아라바)와 병행하여 길을 닦을 장소를 가리킨다. BHS도 “외치는”에 분리 악센트 자켑 카톤을, “광야에서”에 자켑 가돌을 둔다. 개역개정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이 연결을 따른다. 복음서의 인용에서는 광야가 외치는 목소리의 장소로 읽힌다. 이사야에서는 광야의 장애가 제거되어 하나님이 오실 길이 마련되는 장면이 먼저 나타난다.&lt;/p&gt;&lt;p&gt;4절은 골짜기가 높아지고 산과 언덕이 낮아지며 거친 곳이 평탄해지는 모습을 그린다. 누가 지형을 바꾸는지 밝히지 않은 채 하나님이 오실 길에서 장애가 사라지는 결과를 묘사한다. 5절에서는 여호와의 영광, 곧 그분의 능력과 임재가 공개적으로 드러난다.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에서 “그것을”은 앞의 영광을 가리키도록 개역개정이 보충한 말이다. 그 영광을 보게 될 사람들은 6절에서 풀처럼 시드는 존재로 묘사된다. 연약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약속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는 선언에 근거한다.&lt;/p&gt;&lt;p&gt;6절에는 외치라는 명령과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라는 응답이 이어진다. BHS의 “그가 말했다”(וְאָמַר, 베아마르)를 개역개정은 “대답하되”로 옮긴다. UBS는 다른 전승의 “내가 말했다”는 읽기도 소개하며, NET는 두 목소리의 대화로 뜻을 분명히 옮긴다. 어느 읽기에서도 선포자의 신분은 드러나지 않는다. 1-3절의 복수 명령은 여기서 한 사람을 향한 단수 명령으로 바뀌고, 그가 외칠 내용은 시드는 사람과 영원히 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lt;/p&gt;&lt;p&gt;개역개정의 “그의 모든 아름다움”(וְכָל־חַסְדּוֹ, 베콜-하스도)에 쓰인 명사는 보통 인자, 충성, 신실함을 뜻하는 헤세드이다. NET는 인간의 충성, 특히 말로 다짐하는 약속의 신뢰 가능성으로 이해하며, UBS도 지속성과 신뢰할 만함을 강조한다. 사람의 외모뿐 아니라 그가 내세우는 한결같음도 들꽃처럼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풀이가 가능하다. 회복의 약속은 인간의 변함없는 능력에 의존하지 않는다.&lt;/p&gt;&lt;p&gt;풀과 꽃은 그 위에 부는 여호와의 기운 때문에 마르고 시든다. “기운”(רוּחַ, 루아흐)은 바람, 기운, 영을 가리킬 수 있으며 여기서는 풀을 말리는 바람으로 나타난다.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라는 선언은 이스라엘도 그 연약함에서 제외하지 않는다. 8절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를 되풀이한 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고 선언한다. 시드는 풀과 서는 말씀의 대조가 반복을 통해 선명해진다. 인간의 유한함에도 하나님이 하신 회복의 말씀은 무너지지 않는다.&lt;/p&gt;&lt;p&gt;1절과 9절의 “너희의 하나님”, 3절과 8절의 “우리 하나님”은 여러 목소리가 같은 하나님을 가리키게 한다. 위로하는 이와 위로받는 백성이 함께 의지할 분이 친히 돌아오신다. 9절은 높은 산에 올라 힘써 소리를 높이고 두려워하지 말며 유다의 성읍들에게 그 하나님을 보라고 외치게 한다.&lt;/p&gt;&lt;p&gt;“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מְבַשֶּׂרֶת צִיּוֹן, 메바세레트 치온)는 여성 단수 분사로 시작한다. 개역개정처럼 시온에 소식을 전하는 이를 부를 수도 있고, 좋은 소식을 전하는 시온 자체를 부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2절에서 여성형으로 위로를 들은 예루살렘이 이제 다른 성읍들에게 회복을 알린다. 여성 단수 명령들이 이어지는 점도 이 읽기와 어울린다. 두 해석에서 전령이 외칠 소식은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הִנֵּה אֱלֹהֵיכֶם, 힌네 엘로헤켐)이다.&lt;/p&gt;&lt;p&gt;10절은 “보라”를 두 번 되풀이하며 강한 왕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그린다.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는 문자적으로 “그의 팔이 그를 위하여 다스린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심을 나타낸다. 상급과 보응을 지니신 그분의 오심은 백성의 구원과 맞물린다. 이사야 62:11도 같은 표현을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는 소식과 함께 딸 시온에게 들려준다.&lt;/p&gt;&lt;p&gt;11절에서 다스리던 그 팔은 어린 양들을 모아 품는다. 목자라는 이름과 “먹이시며”라는 동사는 같은 어근으로 연결되고, 그분이 양 떼를 먹이고 돌보시는 행동을 묘사한다.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עָלוֹת יְנַהֵל, 알로트 예나헬)는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어미 양들을 이끄는 모습이다. 개역개정의 “온순히”는 서두르지 않는 목자의 걸음을 살린다. 강하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어린 양과 어미 양의 형편에 맞추어 돌보신다.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게 말하라는 첫 위로가 백성의 연약함을 알고 인도하시는 목자의 모습으로 구체화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하나님은 징계받은 이스라엘을 여전히 자기 백성이라 부르고 돌아오겠다고 선언하신다. 바벨론 포로를 예고한 39장 뒤에서 이 언약의 호칭은 죄와 상실을 겪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신실함을 다시 의지하게 한다. 노역의 끝과 목자의 품은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그분의 약속으로 이어진다.&lt;/p&gt;&lt;p&gt;출애굽기 3:7-12에서 하나님은 애굽의 감독자들 아래서 고통받는 백성을 보고 부르짖음을 들으신 뒤 친히 내려가 건져 내겠다고 하신다. 모세를 보내며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사야 40장에서도 하나님이 백성의 형편을 다루고 소식을 전할 이들에게 명령하시며 친히 오신다. 두 본문에서 하나님은 고통받는 백성을 찾아 구원하신다. 다만 예루살렘의 노역은 출애굽기의 학대 상황과 구별된다. 이사야는 자기 백성의 죄를 심판하신 하나님이 징계를 끝내고 회복을 베푸신다고 말한다.&lt;/p&gt;&lt;p&gt;출애굽한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받는다. 이사야 40장의 회복도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다. 여호와의 길을 준비한 뒤 백성은 그 영광을 본다. 하나님은 잃었던 생활을 회복시키시며 그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신다. 출애굽기 15:13-18에서도 하나님은 구속한 백성을 인자와 힘으로 거룩한 처소에 인도하시고 영원히 다스리신다. 그 노래의 강한 팔과 인도하심은 이사야 40:10-11의 왕과 목자에게서 다시 나타난다. 첫 출애굽의 구원 언어가 포로와 황폐함 이후의 회복을 설명한다.&lt;/p&gt;&lt;p&gt;이사야 35:1-10에서는 광야와 사막이 꽃피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며, 하나님이 오셔서 구원하신다는 소식이 두려워하는 백성에게 들린다. 회복된 백성은 거룩한 대로를 따라 시온으로 돌아온다. 35장은 백성이 돌아올 길을, 40장은 하나님이 오실 길을 강조한다. 62:10의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는 명령도 같은 회복을 그린다. 40:11에서 양 떼를 인도하시는 목자는 하나님의 오심과 백성의 귀환을 연결한다. 35장에서 약한 손과 떨리는 무릎을 붙들고 하나님이 오신다고 알리라는 권면은 40장의 위로하라는 명령과도 어울린다.&lt;/p&gt;&lt;p&gt;시편 103:8-18은 죄에 따라 그대로 갚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인간이 먼지임을 아시고 자녀를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처럼 돌보신다고 고백한다. 사람의 날을 풀과 들꽃에 견준 뒤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말한다. 같은 비유를 쓰는 이사야 40:6-8은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선다고 선언한다. 시편 103:17의 “인자하심”은 이사야 40:6의 “아름다움”에 쓰인 명사 헤세드와 같다. 이사야에서 그 낱말을 인간의 신실함으로 읽으면 사람의 한결같음은 꽃처럼 짧고 하나님의 인자는 영원하다는 차이가 드러난다. 이사야 51:12도 풀처럼 사라질 사람을 두려워하는 백성에게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lt;/p&gt;&lt;p&gt;에스겔 34:11-16에서 하나님은 흩어진 양을 친히 찾아 모으고 자기 땅으로 데려와 먹이며, 상한 양을 싸매고 병든 양을 강하게 하신다. 이사야 40:11의 모으고 품고 인도하는 목자와 같은 회복의 사역이다. 에스겔은 강한 양도 하나님의 판단 아래 두어 약한 양이 계속 희생되지 않게 하신다고 말한다. 34:23-24에서는 한 목자, 자기 종 다윗을 세워 먹이겠다고 약속한다. 여호와 자신의 목자 됨을 앞세우는 이사야의 약속과 다윗의 목자를 세우시는 에스겔의 약속은 신약이 예수를 선한 목자로 증언하는 배경이 된다. 두 약속은 먼저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다.&lt;/p&gt;&lt;p&gt;예레미야 31:10-14에서도 이스라엘을 흩으신 하나님은 그들을 모아 목자처럼 지키고 더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신다. 시온으로 돌아온 백성을 먹이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며 위로하신다. 이사야 40장의 위로도 흩어짐과 상실을 겪은 백성을 모으고 먹이며 다시 살게 하시는 구원이다.&lt;/p&gt;&lt;p&gt;이사야 40:27-31에서 야곱은 자기 길이 하나님께 숨겨졌고 자신의 사정이 잊혔다고 탄식한다.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는 약속을 들은 백성도 자기 삶이 하나님께 보이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창조주로서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신다고 대답하신다. 어린 양을 품으시는 목자가 지친 사람의 길도 아신다.&lt;/p&gt;&lt;p&gt;40:1에서 명령으로 시작된 위로는 뒷부분에서 이루어진 일로 선포된다. 49:13은 여호와께서 백성을 위로하셨으므로 하늘과 땅에게 노래하라고 한다. 52:7-12에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알리는 좋은 소식과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모습을 보며 노래하는 파수꾼들이 나온다.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도 백성을 위로하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신 하나님을 노래한다. 40장의 전령과 팔, 모든 육체가 볼 영광은 열방 앞에서 거룩한 팔을 드러내어 땅끝까지 구원을 보게 하시는 이 장면으로 이어진다. 백성은 하나님이 앞뒤에서 지키시는 길로 정결하게 나온다.&lt;/p&gt;&lt;p&gt;이사야 55:10-13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분의 뜻을 이루며 백성이 기쁨으로 나와 평안히 인도받으리라고 약속한다. 비와 눈이 땅에 생명을 주듯 회복의 말씀은 땅의 변화와 백성의 귀환으로 성취된다. 40:8의 영원히 서는 말씀과 40:11의 온순히 인도하는 목자는 이 약속에서도 이어진다. 연약한 백성의 기다림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마가복음 1:2-3은 사자 파송의 말씀과 이사야 40:3을 이사야의 글이라는 표제 아래 묶어 인용한다.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라는 외침은 예수의 오심을 알리는 문맥에 놓인다.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더 능력 있는 분을 가리키며, 이어 예수께서 등장하신다. 마가는 예수의 사역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사건으로 선포한다.&lt;/p&gt;&lt;p&gt;이사야에서는 광야에서 길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사막의 대로와 병행한다. 마가복음 1:3에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인용되고, 곧 광야의 요한이 소개된다. 길이 준비될 장소가 목소리가 들리는 장소와 연결된다. 요한은 뒤에 오실 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사야의 전령이 하나님을 보라고 외치듯 요한은 예수를 가리킨다.&lt;/p&gt;&lt;p&gt;누가복음 3:3-6은 인용을 골짜기와 산, 굽은 곳과 거친 길의 변화까지 이어 가고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선언으로 마친다. 요한은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사람들에게 죄를 인정하고 오시는 분을 맞으라고 촉구한다. 이사야 40:2의 징계 종료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회복을 말하고, 복음서는 그 말씀을 이루시는 예수의 오심 안에서 죄의 용서와 새 삶을 선포한다. 요한의 회개와 세례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구원자를 기다리는 응답이다.&lt;/p&gt;&lt;p&gt;요한이 잡힌 뒤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신다. 마가복음 1:15의 “때가 찼고”와 이사야 40:2의 복역이 찼다는 선언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구원이 시작된다는 주제에서 연결된다. 마가복음 1장은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내보내고 병든 사람을 고치며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미시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사야의 다스리는 팔과 어린 양을 품는 팔처럼, 예수의 사역에서도 구원하는 권위와 연약한 이를 돌보는 긍휼이 드러난다. 이 연결은 직접 인용에 따른 것이 아니라 구원자의 능력과 돌봄이라는 주제에 따른 것이다.&lt;/p&gt;&lt;p&gt;요한복음 10:1-18에서 예수는 양의 이름을 부르고 앞서 인도하는 선한 목자이시다. 양은 그 소리를 알고 따른다. 그분은 위험 앞에서 달아나는 삯꾼과 달리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주신다. 아버지께 받은 권한으로 스스로 생명을 주고 다시 얻으신다. 강한 팔로 약한 양을 품으시는 이사야의 약속은 그리스도의 자기 내어주심 안에서 더 깊은 구원의 내용을 얻는다. 예수의 권한은 백성을 살리는 사랑으로 나타난다.&lt;/p&gt;&lt;p&gt;에스겔 34장은 친히 양을 찾으시는 하나님과 그분이 세우실 다윗의 목자를 약속한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아직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양들도 인도하여 한 무리와 한 목자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다.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은 그리스도의 목자 사역으로 이어지며, 그 돌봄은 다른 양들에게도 미친다.&lt;/p&gt;&lt;p&gt;히브리서 13:20-21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의 피로 양들의 큰 목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다고 말한다. 이어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선한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기를 구한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고 살아나신 목자는 지금도 백성을 붙드신다. 이사야의 영원한 말씀을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하나님의 신실함을 신뢰한다.&lt;/p&gt;&lt;p&gt;베드로전서 1:18-21에서 성도는 사라질 은이나 금으로 얻을 수 없는 속량을 흠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피로 받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고 영광을 주셨으며 성도의 믿음과 소망은 그 하나님께 향한다. 인간의 자원과 한결같음이 풀과 꽃처럼 제한되어도 그리스도의 구원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다.&lt;/p&gt;&lt;p&gt;베드로전서 1:23-25은 성도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다고 말한 뒤 이사야 40:6-8을 직접 인용한다. 사람과 그 영광은 풀과 꽃 같고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문다. “영광”이라는 표현은 칠십인역을 따른다. 히브리어 본문의 “아름다움”을 인간의 신실함으로 읽는 풀이와 표현은 다르지만, 둘 다 사람이 내세우는 것이 오래가지 못함을 말한다. 베드로는 영원한 말씀을 독자들에게 선포된 복음이라고 밝힌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알리는 소식이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약속을 들려준다.&lt;/p&gt;&lt;p&gt;이 인용에 앞서 베드로는 진리에 순종하여 형제를 거짓 없이 사랑하게 되었으므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요청한다. 유한한 사람을 향한 사랑은 영원한 말씀으로 새로워진 삶의 응답이다. 히브리서 9:23-28은 죄를 담당하려 단번에 드려진 그리스도가 지금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며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다시 나타나실 것이라고 말한다. 신자는 이미 이루신 희생과 지금의 중보, 장차 완성하실 구원을 신뢰하며 믿음과 사랑을 이어 간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하나님은 징계받은 백성을 여전히 “내 백성”이라 부르신다. 죄를 진실하게 인정한 사람에게 용서와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린다. 용서를 받는 사람은 자신이 끼친 피해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 피해를 겪은 이에게 지난 일을 잊으라고 강요할 수 없으며, 용서받은 사람의 직무와 관계에는 신뢰와 안전을 살필 시간이 필요하다. 이사야가 말하는 징계는 이스라엘의 언약과 포로 역사에 속하므로, 오늘의 질병이나 상실을 당사자의 죄에 대한 벌로 함부로 설명해서도 안 된다.&lt;/p&gt;&lt;p&gt;복음서는 길을 준비하라는 외침을 회개와 죄의 자복에 연결한다. 그리스도를 맞는 사람은 사실을 숨기던 말을 바로잡고 부정한 이익을 중단하며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받아들인다.&lt;/p&gt;&lt;p&gt;“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라는 말씀은 인간의 생명과 한결같음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게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은 연약한 생명을 버리지 않으시는 목자의 약속이다. 몸이 쇠약해지거나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도 그리스도의 부활과 구원을 소망할 수 있다. 이 약속의 내용은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이며, 입학이나 취업, 사업과 치료에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모두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아니다.&lt;/p&gt;&lt;p&gt;하나님은 강한 팔로 다스리시며 바로 그 팔로 어린 양을 품고 젖먹이는 어미 양을 인도하신다. 그분의 권위를 말하는 사람은 약한 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형편을 존중해야 한다. 사람을 억지로 움직이게 하는 힘을 영적인 권위로 내세울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양을 위해 목숨을 내어 주신 사랑이 교회의 섬김을 이끈다.&lt;/p&gt;&lt;p&gt;위로하는 사람과 위로받는 사람 모두 풀 같은 존재이며 목자의 돌봄을 받는다. 전령이 외칠 소식은 자신의 능력이나 확신이 아니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소망을 두며, 그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에게 요청된 형제 사랑을 실천한다. 기다림 속에서 자기 길이 잊힌 것 같다고 탄식할 때에도 지친 사람을 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Isa&amp;amp;chapter=40&amp;amp;verse=2"&gt;NET Bible, 이사야 40:2 번역 주석&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Isa&amp;amp;chapter=40&amp;amp;verse=6"&gt;NET Bible, 이사야 40:6 번역 주석&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03/"&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2011), 40:3, UBS TIPs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06/"&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2011), 40:6, UBS TIPs 발췌&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40:12-31 비교할 수 없는 창조주, 지친 야곱에게 힘을 주시다</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0.12-31/</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0.12-31/</guid><description>하나님은 바다와 하늘을 재시고 별마다 이름을 부르시는 창조주이시다. 그분은 자기 길이 숨겨졌다고 탄식하는 야곱을 잊지 않으시고 지친 이에게 새 힘을 주신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이사야 40:12-31은 위로를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실 수 있는지 묻는 백성에게 창조주의 능력과 지혜를 밝힌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강한 팔로 다스리며 어린 양을 품으신다고 했다. 이제 바다와 하늘을 헤아리고 열방과 통치자를 다스리며 별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는 분을 찬양한다. 마지막에 야곱은 자기 길과 송사가 하나님께 잊혔다고 탄식한다. 창조주에 관한 긴 논증은 그 지친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는 약속으로 향한다.&lt;/p&gt;&lt;p&gt;12절은 손바닥으로 물을 헤아리고 뼘으로 하늘을 재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고 저울로 산과 언덕을 다는 모습을 그린다. 사람에게는 너무 큰 세계가 하나님께는 헤아릴 수 있는 피조물이다. 거듭되는 “누가”라는 질문에 청중은 창조주 외에 아무도 없다고 답하게 된다. 어린 양을 품으시는 하나님이 양 떼를 둘러싼 세계 전체를 지으시고 다스리신다.&lt;/p&gt;&lt;p&gt;하늘을 “쟀으며”(תִּכֵּן, 티켄)라는 12절의 동사는 13절에서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תִכֵּן, 티켄)라는 질문으로 반복된다. 하늘을 헤아리신 분의 영을 누가 헤아리거나 지도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영”(רוּחַ, 루아흐)은 영과 바람, 기운을 가리킬 수 있으나, NET는 조언과 가르침이 이어지는 이 문맥에서 하나님의 마음이나 판단 능력을 뜻할 가능성이 크다고 이해한다. 이어지는 모사에 관한 질문도 하나님께 조언하여 그분의 생각을 결정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백성이 경험한 현실만으로 하나님의 지혜 전체를 헤아릴 수 없다.&lt;/p&gt;&lt;p&gt;14절은 누가 하나님께 정의의 길과 지식과 통달의 도를 가르쳤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의 어휘는 27-28절의 탄식과 응답을 잇는다. 14절의 “정의”와 27절의 “내 송사”(מִשְׁפָּטִי, 미쉬파티)는 같은 명사이며, 14절의 “통달”과 28절의 “명철”(לִתְבוּנָתוֹ, 리테부나토)도 같은 말이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연결이다. 누구에게도 정의와 통달을 배우실 필요가 없는 하나님이 야곱의 송사를 모르셔서 지나치시는가? 하나님의 한없는 명철이 그 탄식에 답한다.&lt;/p&gt;&lt;p&gt;15절은 열방을 통의 물 한 방울과 저울의 작은 티끌에 비긴다. 12절에서 산을 달던 저울 위에 이제 민족들의 규모가 놓인다. 먼 섬들까지 미세한 먼지처럼 들려 올라간다. 백성의 삶을 압도하는 제국도 창조주와 경쟁할 무게를 지니지 못하며 그분의 구원 약속을 무효로 만들지 못한다.&lt;/p&gt;&lt;p&gt;레바논의 모든 나무를 땔감으로 쓰고 짐승을 번제로 드려도 창조주의 위대함에 상응하는 예물이 되기에는 부족하다(16절). 17절은 열방을 “아무것도 아니라”,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긴다고 한다. 개역개정은 하나님을 주어로 풀었지만, “여겨진다”(נֶחְשְׁבוּ־לוֹ, 네흐셰부 로)는 수동 구문이며 15절의 “같고, 같으며”에도 같은 동사가 쓰인다. 열방의 무게는 그들이 내세우는 크기로 정해지지 않는다. “빈 것”은 창세기 1:2의 “혼돈”과 같은 단어이다. 이 표현은 열방의 권세를 상대화한다. 이 단락의 결론에서 하나님은 작고 지친 백성에게 능력을 주신다.&lt;/p&gt;&lt;p&gt;18절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고 하며 무슨 형상을 그분과 비교하겠느냐고 묻는다. 19-20절에서 장인은 우상을 부어 만들고 금으로 입히며 은 사슬을 만든다. 궁핍한 사람도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해 우상이 흔들리지 않도록 세운다. 사람을 지켜 주리라 기대하는 형상이 사람의 기술과 재료에 의존한다. 바다와 하늘을 재신 하나님과 사람이 받쳐 세워야 하는 우상의 차이가 제작 과정에서 드러난다.&lt;/p&gt;&lt;p&gt;21절의 네 질문은 백성이 이미 듣고 배운 창조주의 지식을 되새긴다. “알다”와 “깨닫다”는 13-14절에서 하나님을 가르친 자가 있는지 물을 때 쓴 어근을 되풀이한다.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친 사람은 없지만 백성은 하나님을 알고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 질문의 “땅의 기초들”(מוֹסְדוֹת הָאָרֶץ, 모스도트 하아레츠)에는 “창조될”이라는 동사가 없다. 개역개정은 앞의 “태초부터”와 짝지어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라고 풀었으며, 구문상 “땅의 기초들을 깨닫지 못하였느냐”처럼 깨달음의 대상으로 읽을 수도 있다. 두 해석 모두 땅을 세우신 분에 관한 지식을 묻는다.&lt;/p&gt;&lt;p&gt;22절에서 하나님은 땅 위에 앉으시고 사람들은 그 아래 살며 하늘은 거주할 천막처럼 펼쳐진다. “앉다, 거주하다”라는 같은 동사가 하나님의 좌정과 사람의 거주, 천막의 쓰임을 잇는다. 개역개정의 “땅 위 궁창”(חוּג הָאָרֶץ, 후그 하아레츠)은 땅의 둥근 테나 둘레를 나타낸다. 땅의 둘레 위에서 온 땅을 내려다보시고 하늘을 차일처럼 펼치시는 창조주의 능력을 시적으로 그린다.&lt;/p&gt;&lt;p&gt;23-24절에서 하나님은 귀인들을 없애고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신다. 17절에서 열방에 쓴 “아무것도 아님”과 “빈 것”이 통치자들에게 다시 쓰인다. “겨우”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되어 심기고 뿌려져 땅에 뿌리박기 무섭게 말라 버리는 권세를 그린다. 개역개정의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에서 “하나님이”는 문맥에 따라 보충한 주어이다. “말라”는 40:7의 “풀은 마르고”와 같은 동사여서 권력자를 유한한 풀에 비긴다. 두 절의 “불다”는 서로 다른 동사지만, 여호와의 기운 앞에 마르는 이미지는 이어진다. 백성을 억누르는 왕권도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지 못한다.&lt;/p&gt;&lt;p&gt;25절에서는 “거룩하신 이”(קָדוֹשׁ, 카도쉬)가 직접 나를 누구와 비교하겠느냐고 물으신다. 18절의 질문을 하나님 자신이 되받으신다. 26절은 눈을 들어 누가 별들을 창조하였는지 보라고 한다. “만상”(צְבָאָם, 체바암)은 군대처럼 질서 있게 늘어선 별의 무리를 가리킨다. 창조주는 그 수를 아시고 각각 이름을 부르시며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신다. 이 하늘의 광경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놓치셨다는 의심에 답한다.&lt;/p&gt;&lt;p&gt;27절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은 자기 길이 여호와께 숨겨졌고 자기 송사가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고 호소한다. “벗어난다”(יַעֲבוֹר, 야아보르)는 “지나가다”라는 뜻을 지녀 자기 사정이 하나님 앞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채 지나친다는 탄식을 담는다. 백성은 정당한 판결을 바라며 여전히 “내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별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자신만은 놓치신 것 같은 고통을 그 관계 안에서 토로한다.&lt;/p&gt;&lt;p&gt;28절은 야곱을 단수 “너”로 불러 이미 듣고 아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한다. 여호와는 영원하신 하나님이며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다. 피곤하지도 곤비하지도 않으시고 그 명철을 헤아릴 끝이 없다. 14절에서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으셨던 “통달”이 여기서 “명철”로 다시 나온다. 백성은 하나님의 판단을 다 설명할 수 없어도 시간과 지식의 한계로 자신들을 놓치지 않으시는 창조주께 송사를 맡길 수 있다.&lt;/p&gt;&lt;p&gt;29절에서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힘없는 자에게 힘을 더하신다. “능력”(כֹּחַ, 코아흐)과 “힘”(אוֹנִים, 오님)은 26절에서 별의 무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묘사한 말이다. 그 힘이 연약한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 된다. “힘이 없음”은 앞서 열방과 통치자의 무력함을 묘사한 말과도 연결된다. 30절에서는 소년과 장정도 피곤하고 곤비하며 반드시 넘어지고 쓰러진다. 같은 동사를 겹친 “넘어지며 쓰러지되”(כָּשֹׁול יִכָּשֵׁלוּ, 카숄 이카셸루)가 그 확실성을 강조한다. 본래 강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하나님께 힘을 받아야 한다.&lt;/p&gt;&lt;p&gt;31절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וְקוֹיֵ, 베코예)이다. 개역개정의 “오직”은 앞 절의 지친 젊은이들과 이들을 대조한다. “새 힘을 얻으리니”(יַחֲלִיפוּ כֹחַ, 야할리푸 코아흐)는 바꾸다는 뜻의 사역형으로 소진된 힘이 새 힘으로 바뀌는 일을 그린다. 독수리 구절에는 “올라가다”(יַעֲלוּ, 야알루)와 “깃, 날개”(אֵבֶר, 에베르)가 전치사 없이 나란히 나온다. UBS 핸드북은 개역개정처럼 날개 치며 올라가는 번역과 깃털이 새로 돋는 번역을 소개한다. 앙망은 하나님께 의지하여 도움을 기대하는 것이며, 새 힘은 기가 꺾인 포로들의 몸과 마음에 주어지는 힘이다. 달리고 걷는 두 동사는 삶의 다양한 활동을 대표한다.&lt;/p&gt;&lt;p&gt;피곤함과 곤비함의 반복은 28-31절을 묶는다. 하나님은 피곤하지도 곤비하지도 않으시고(28절), 피곤한 자에게 힘을 주시며(29절), 젊은이도 피곤하고 곤비하다(30절). 마지막에는 두 동사의 순서를 바꾸어 앙망하는 자가 달려도 곤비하지 않고 걸어도 피곤하지 않으리라고 약속한다(31절). 하나님께 쓰였던 부정문이 그분께 힘을 받는 사람에게 이어진다. 이 약속은 지친 포로들이 다시 삶을 감당할 소망을 준다. 야곱의 길과 송사를 아시는 창조주가 그들을 붙드신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이사야 40:12-31은 창조주에 대한 믿음으로 지친 야곱을 다시 일으킨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 지금 자기 길과 송사를 잊으셨다고 느끼는 백성에게 힘을 주신다. 우상은 사람이 세워야 하고 통치자는 식물처럼 마르지만 하나님은 지치지 않고 연약한 이를 붙드신다.&lt;/p&gt;&lt;p&gt;창세기 1:1-19에서 하나님은 빛과 어둠, 하늘과 물, 땅을 구별하고 광명체와 별에 자리와 역할을 주신다. 이사야 40:12의 측량과 26절의 별의 무리도 그 질서를 베푸시는 창조주를 찬양한다. 별은 그분이 수를 세고 이름을 부르시는 피조물이다. 창세기 1:2의 “혼돈”은 이사야 40:17, 23에서 열방의 “빈 것”과 사사들의 “헛된 것”을 나타내는 단어와 같다. 열방의 위세는 창조주가 세우신 질서와 견줄 수 없다.&lt;/p&gt;&lt;p&gt;출애굽기 19:3-6에서 하나님은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자신에게로 데려왔다고 말씀하신다. 이사야 40:31에서는 하나님께 힘을 얻은 백성이 독수리처럼 날아오른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업어 오심을, 이사야는 백성의 새 힘을 강조한다. 두 본문에서 구원받은 백성의 힘은 하나님께 의존한다.&lt;/p&gt;&lt;p&gt;출애굽기 3:7-12에서 하나님은 백성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들으며 근심을 아신다. 그들을 구출하시겠다는 약속은 이사야 40:27의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라는 탄식과 맞닿는다. 누구에게도 지식을 배우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백성의 고통을 아시고 구원하신다. 출애굽의 기억은 현재의 고통 가운데 그분께 호소할 관계와 신실함의 근거를 준다.&lt;/p&gt;&lt;p&gt;출애굽기 15:7-18은 대적이 지푸라기처럼 사라지고 하나님의 바람 앞에서 힘을 잃는다고 노래한다. 신들 가운데 누가 여호와와 같으냐고 물으며 구속한 백성을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시는 왕을 찬양한다. 이사야 40:18, 25의 비교 질문과 24절의 바람에 날리는 통치자들도 그 주권을 고백한다. 백성을 지배하는 권세는 그들의 영원한 운명이 될 수 없다.&lt;/p&gt;&lt;p&gt;이사야 35:3-10은 약한 손과 떨리는 무릎을 붙들고 하나님이 오셔서 구원하실 것을 알리라고 한다. 속량받은 사람들은 광야의 대로로 시온에 돌아온다. 40장 앞부분의 광야 길과 뒷부분의 새 힘도 이 회복의 소망을 잇는다. 하나님이 연약한 이를 붙드시기에 백성은 다시 걸어갈 수 있다.&lt;/p&gt;&lt;p&gt;시편 103편은 사람의 젊음을 독수리처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지임을 아시며 풀과 꽃처럼 짧은 인생을 언약의 인자로 돌보신다. 이사야 40장의 먼지와 풀, 바람과 독수리도 유한한 백성을 새롭게 하시는 소망을 그린다. 시편 121편에서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는 창조주는 백성의 나가고 들어옴을 지키신다. 피곤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지친 사람의 삶을 붙든다.&lt;/p&gt;&lt;p&gt;시편 147:1-6은 예루살렘을 세우고 흩어진 백성을 모으며 상한 마음을 고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 뒤, 별의 수와 이름을 아시며 능력과 명철이 한없으시다고 고백한다. 이사야 40:26-29에서도 별을 아시는 지식과 지친 이를 돌보시는 능력이 이어진다. 야곱은 자기 권리와 필요를 그분께 계속 호소할 수 있다.&lt;/p&gt;&lt;p&gt;시편 115:3-8의 우상은 사람이 은금으로 만들었으나 말하고 보고 듣지 못한다. 이사야 40:19-20의 우상도 제작자에게 의존한다. 이사야 46:1-4에서는 벨과 느보가 짐승에게 실린 짐이 되어 함께 포로로 가는 반면, 하나님은 백성을 태에서부터 품고 노년에도 업어 구원하신다. 사람이 떠받쳐야 하는 신과 사람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차이이다.&lt;/p&gt;&lt;p&gt;이사야 6:1-7의 거룩하신 여호와는 예언자의 부정함을 드러내시고 정결의 은혜를 주신다. 40:25의 “거룩하신 이”도 피조물과 견줄 수 없으시며 지친 야곱에게 힘을 주신다. 이사야 55:6-13에서는 사람보다 높으신 생각과 길로 돌아오는 자를 용서하고 말씀하신 회복을 이루신다. 백성은 다 헤아릴 수 없는 지혜를 지닌 그분의 신실함에 기대어 기다린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마가복음 1:3은 이사야 40:3을 인용하여 세례 요한이 예수의 오실 길을 준비한다고 밝힌다. 이사야 40:12-31은 같은 장에서 그 오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찬양한다. 지친 백성에게 찾아오시는 구원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선포된다.&lt;/p&gt;&lt;p&gt;요한복음 1:1-5는 만물이 말씀을 통하여 지어졌고 그분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한다. 별의 무리와 온 땅을 지으신 하나님에 관한 이사야의 찬양은 그리스도를 통한 창조의 증언과 연결된다. 요한복음 4:5-14에서 예수는 길을 걸어 피곤하여 우물가에 앉으시며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의 물을 약속하신다. 히브리서 2:14-18도 그분이 혈과 육을 지니고 고난을 겪어 시험받는 이를 도우신다고 한다. 생명을 주시는 구원자는 사람의 연약함을 몸소 겪으셨다.&lt;/p&gt;&lt;p&gt;바울은 로마서 11:34에서 이사야 40:13을 직접 인용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고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는 질문이다. “주의 마음”(νοῦν κυρίου, 눈 퀴리우)은 헬라어 구약의 표현으로, 개역개정 이사야의 “여호와의 영”에 대응한다. 이 문맥에서 영과 마음은 사람이 가르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킨다.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원을 논한 바울은 그 역사를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한다.&lt;/p&gt;&lt;p&gt;로마서 11:1-6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고 은혜로 남은 자가 있다고 말한다. 17-24절은 접붙임 받은 이방인에게 원래 가지들을 향해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25-36절은 야곱을 향한 언약과 후회 없는 부르심을 말한 뒤 측량할 수 없는 판단과 길을 찬양한다. 이사야에서 야곱의 탄식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지혜는 로마서에서도 백성을 향한 신실함을 밝힌다. 이방인 신자는 그 긍휼을 받아 누린다.&lt;/p&gt;&lt;p&gt;고린도전서 2:10-16도 이사야 40:13을 인용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일을 아시며 성도는 그 영을 받아 은혜로 주신 것을 안다. 16절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 가르치겠느냐고 물은 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선언한다. 이 깨달음은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정복하여 얻은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알리신 은혜이다. 받은 깨달음이 사람의 모든 판단을 무오하게 만들지는 않는다.&lt;/p&gt;&lt;p&gt;고린도전서 2:6-9에서 그 지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영광의 주와 연결된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그 지혜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사야 40:23-24의 통치자들이 영원하지 못하듯, 십자가를 집행한 권세도 구원의 결말을 결정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자기 백성을 살리셨다.&lt;/p&gt;&lt;p&gt;고린도후서 12:7-10에서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떠나도록 세 번 간구했으나, 주님은 은혜가 족하며 능력이 약함 가운데 온전해진다고 말씀하셨다. 이사야 40:29의 힘은 이 증언과도 연결된다. 하나님은 약한 조건을 즉시 없애지 않으실 때에도 그 안에서 살아갈 힘을 주신다. 빌립보서 2:5-11은 종의 형체로 낮아져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높이셨다고 고백한다. 위대하신 분의 능력은 백성을 위한 낮아지심으로 나타난다.&lt;/p&gt;&lt;p&gt;베드로전서 1:1-6은 시험 가운데 근심하는 나그네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로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으며 장차 나타날 구원을 기다린다. 13, 21절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주실 은혜를 바라며 하나님께 믿음과 소망을 두라고 한다. 이사야의 앙망처럼 기다림은 신실하신 하나님께 향한다.&lt;/p&gt;&lt;p&gt;베드로전서 1:23-25는 이사야 40:6-8의 풀과 영원한 말씀을 인용하고 그 말씀이 독자들이 들은 복음이라고 밝힌다. 같은 말씀으로 새 생명을 받은 이들은 형제를 마음으로 사랑해야 한다. 로마서 8:31-34는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과 죽고 살아나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성도는 현재의 피로와 지연 속에서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 구원 사건에서 알고 그분께 힘을 구한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야곱은 자기 길이 하나님께 숨겨지고 송사가 지나쳐졌다고 탄식하면서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오래 기다리다 지친 사람도 그 관계 안에서 고통을 아뢸 수 있다. 하나님은 탄식하는 백성에게 자신의 한없는 명철과 돌봄을 약속하신다.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을 감추어야만 그분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lt;/p&gt;&lt;p&gt;누구의 가르침도 필요 없으신 분은 하나님이다. 목회자와 교사, 권한을 맡은 사람의 판단에는 한계가 있다. 자기 의견을 하나님의 지혜와 같은 자리에 놓아 다른 사람의 질문과 호소를 막을 수 없다. 별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는 창조주 앞에서 사람의 권한과 지식은 유한하다.&lt;/p&gt;&lt;p&gt;우상은 사람을 지켜 주기 전에 사람이 받쳐 세워야 한다. 그 우상을 붙드는 사람은 자신이 만든 것에 궁극적인 안전을 맡긴다. 열방과 통치자도 마르는 풀과 같으므로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하거나 자기 집단의 힘을 자랑할 때 그 한계를 기억해야 한다. 창조주께 의지하는 백성은 강한 나라나 지도자에게 구원의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lt;/p&gt;&lt;p&gt;피곤하지 않으신 하나님이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신다. 소년과 장정도 지친다는 말씀은 젊음과 유능함으로 자기 삶을 끝까지 지탱할 수 있다는 기대를 꺾는다. 힘이 부족한 사람도 하나님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다. 새 힘의 약속을 사람에게 더 일하라고 강요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 없다.&lt;/p&gt;&lt;p&gt;앙망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실 도움을 기다린다. 기도의 횟수나 의식으로 그 힘을 확보하거나 자기 시간표대로 응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달리고 걷는다는 약속은 다시 삶을 감당할 소망을 준다. 바울이 육체의 가시 가운데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듯, 병과 피로가 지속되는 사람도 그 은혜에 기대어 살아갈 수 있다.&lt;/p&gt;&lt;p&gt;이 위로는 먼저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 로마서 11장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방인 신자에게 원래 가지를 향해 자랑하지 말라고 한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함에서 소망을 얻고 같은 긍휼을 받은 사람으로 그분을 기다린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Isa&amp;amp;chapter=40&amp;amp;verse=13"&gt;NET Bible, 이사야 40:13 번역 주석&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031/"&gt;Ogden·Sterk, A Handbook on Isaiah (2011), 40:31, UBS TIPs 발췌&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41:1-2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붙든다: 법정에 선 열방과 버러지 같은 야곱</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1.1-20/</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1.1-20/</guid><description>하나님은 섬들과 민족들을 재판 자리로 불러 동방의 정복자를 누가 일으켰는지 물으신다. 두려움에 빠진 열방은 서로 힘을 내라 하며 우상을 못으로 고정하지만, 하나님은 종 이스라엘을 친히 붙드신다. 버러지 같은 야곱의 구속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목마른 가난한 자에게 광야의 강과 숲을 약속하신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이사야 41:1-20은 BHS의 단락 표지에 따라 열방의 재판(1-7절), 종 이스라엘을 향한 위로(8-13절), 버러지 같은 야곱을 향한 약속(14-16절), 광야를 바꾸시는 약속(17-20절)으로 나뉜다. 40:27에서 야곱은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고 탄식했다. “내 송사”(מִשְׁפָּטִי, 미쉬파티)는 자신이 받아야 할 정당한 판결을 가리킨다. 41장은 하나님이 그 재판을 여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lt;/p&gt;&lt;p&gt;1절에서 하나님은 먼 해안 지역의 민족들인 섬들에게 잠잠히 듣고 재판정으로 나아와 말하라고 명하신다. 40:15에서 “떠오르는 먼지”에 비유된 민족들이 이제 소환을 받는다. “힘을 새롭게 하라”(יַחֲלִיפוּ כֹחַ, 야할리푸 코아흐)는 40:31의 “새 힘을 얻으리니”와 같은 표현이다.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에게 약속된 힘을 열방이 스스로 얻어 자기 주장을 펴 보라는 도전이다. “우리가 서로 재판 자리에 가까이 나아가자”라는 청유에서 하나님도 소송의 당사자로 나아가신다. 자기 송사가 외면당했다고 여긴 야곱 앞에서 하나님이 열방과 변론하신다.&lt;/p&gt;&lt;p&gt;2절은 동방의 정복자를 누가 일으켰느냐고 묻는다. “일깨워서”(הֵעִיר, 헤이르)는 움직이게 한다는 뜻이며, 25절에서 하나님이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라고 답하실 때도 같은 동사가 쓰인다. 본문은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핸드북은 그를 하란에서 온 아브라함으로 보는 견해를 소개하면서도 넓은 문맥에 따라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로 본다. 고레스는 메대와 바사를 장악한 뒤 주전 539년 바벨론을 정복하고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락했다. “동방”은 포로들이 살던 바벨론의 동쪽에 있는 바사를 가리킨다. 44:28과 45:1에서는 고레스의 이름이 직접 나온다.&lt;/p&gt;&lt;p&gt;“공의로”(צֶדֶק, 체데크)는 이사야에서 승리나 구원을 가리키기도 한다. UBS 핸드북은 여기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거두는 군사적 승리를 정의의 승리로 풀이한다. 이어지는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יִקְרָאֵהוּ לְרַגְלוֹ, 이크라에후 레라글로)는 두 가지로 읽힌다. ‘의 또는 승리가 그의 발에서 그를 만난다’고 읽으면 가는 곳마다 승리한다는 뜻이 되고, 동사를 ‘부르다’로 읽으면 하나님이 그를 불러 섬기게 하신다는 뜻이 된다. UBS 핸드북은 4절에서 같은 동사가 ‘부르다’라는 뜻으로 쓰인다는 점에서 뒤의 해석을 택한다. 개역개정의 “자기 발 앞에 이르게”도 하나님이 고레스를 불러 쓰신다는 이해에 가깝다.&lt;/p&gt;&lt;p&gt;2절 후반에서 하나님은 열국을 정복자에게 넘겨주시고 왕들을 다스리게 하신다. 왕들은 그의 칼 앞에서 티끌이 되고 활 앞에서는 바람에 불리는 초개가 된다.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 같게”(כְּקַשׁ נִדָּף קַשְׁתּוֹ, 케카쉬 닛다프 카쉬토)에서 ‘초개’와 ‘그의 활’은 소리가 비슷하다. 40:24에서 권력자들을 초개처럼 날려 보내시던 하나님의 일이 한 정복자의 원정에서 드러난다. 그는 열국을 쫓아가면서도 “안전히”, 곧 평화와 무사함을 뜻하는 שָׁלוֹם(샬롬) 가운데 지나간다. 3절 후반은 개역개정처럼 전에 “가 보지 못한 길”로 읽거나, 발이 땅에 닿지 않을 만큼 빠른 진군으로 읽을 수 있다.&lt;/p&gt;&lt;p&gt;4절에서 하나님은 이 일을 누가 행했으며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고 물으신 뒤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고 답하신다. 세대들을 불러내시는 분이 한 정복자도 부르셨다. “내가 곧 그니라”(אֲנִי־הוּא, 아니 후)는 43:10, 13에서 다시 나오고, 44:6은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고 선언한다. 처음과 나중을 다스리시는 여호와께서 고레스의 등장을 자기 일이라고 밝히신다.&lt;/p&gt;&lt;p&gt;5-7절에서 섬들은 하나님의 일을 보고 두려워한다. “보고”(רָאוּ, 라우)와 “두려워하며”(וְיִירָאוּ, 베이라우)의 비슷한 소리는 그 반응을 연결한다. “땅 끝”(קְצוֹת הָאָרֶץ, 케초트 하아레츠)은 40:28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미치는 곳이며, 9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부름받은 곳이다. 같은 땅 끝에서 열방은 떨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붙들린다. 열방은 함께 모여 서로 “힘을 내라”고 격려하며 우상을 만든다. 그들이 서로 “도우며”에 쓰인 동사는 10, 13, 14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시겠다고 하실 때도 쓰인다.&lt;/p&gt;&lt;p&gt;7절의 목공과 금장색은 40:19의 장인과 장색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개역개정은 히브리어에서 한 번 쓰인 “격려하며”를 두 작업자 쌍에 각각 붙여 옮긴다. “힘을 내라”, “격려하며”, “못을 단단히 박아”는 모두 강하게 하거나 굳게 붙든다는 같은 어근의 표현이다. 장인들은 땜질을 보고 “잘 된다”고 하며 우상이 “흔들리지 아니하게” 못을 박는다. 40:20에서도 사람이 우상을 흔들리지 않게 세웠다. 사람을 지켜 줄 신을 사람이 손수 붙들어 매는 장면은 20절에서 여호와의 손이 광야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장면과 대조된다.&lt;/p&gt;&lt;p&gt;8절의 “그러나 너”에서 하나님은 열방을 떠나 이스라엘을 부르신다. “너”는 단수이지만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나의 종”(עַבְדִּי, 아브디)은 40장 이후 처음 나오는 종의 호칭이며 42장 이하로 이어진다. UBS 핸드북은 하나님이 언약에 따라 택하신 백성의 주인이시기에 그들을 종이라 부르신다고 설명한다.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זֶרַע אַבְרָהָם אֹהֲבִי, 제라 아브라함 오하비)에서 ‘나의 벗’은 문법상 ‘나를 사랑하는 이’로 읽을 수 있다. 핸드북은 참고 번역들이 “나의 벗”을 택한다고 보고하면서 어떤 언어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이’로 옮기도록 제안한다. 역대하 20:7의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과 야고보서 2:23의 “하나님의 벗”도 이 관계를 말한다.&lt;/p&gt;&lt;p&gt;8절에서 시작한 문장은 10절까지 이어진다. UBS 핸드북에 따르면 9절의 네 동사와 10절의 세 동사는 ‘내가 너를’이라는 어미 ‘-티카’로 끝나 운율을 이룬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붙들며”에 쓰인 הֶחֱזַקְתִּיךָ(헤헤자크티카)는 우상을 단단히 박는 동사와 어근이 같다. 사람이 우상을 붙들어 매는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붙드신다. 정복자와 세대들을 부르신 하나님이 종 이스라엘도 부르시고 택하셨다. “싫어하여 버리지”는 거절하거나 내버린다는 한 동사를 풀어 옮긴 말이다. 성전과 땅을 잃은 포로 생활에서도 하나님은 그 택하심을 거두지 않으셨다.&lt;/p&gt;&lt;p&gt;10절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는 약속에 근거한다. “놀라지 말라”(אַל־תִּשְׁתָּע, 알 티쉬타)의 드문 동사는 23절에서 열방의 신들에게 무슨 일이든 해 보라고 도전하시는 구절에도 나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굳세게 하며 돕고 붙들겠다고 거듭 약속하신다. 이 세 동사는 완료형이지만 예언적 약속에서는 정하신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기도 하므로 개역개정은 미래로 옮겼다. 두 번 나오는 “참으로”도 그 약속을 강조한다.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בִּימִין צִדְקִי, 비민 치드키)의 ‘의’는 2절의 “공의”와 같은 낱말이다. 정복자를 부르신 하나님의 의가 종을 붙드는 구원으로 나타난다. “붙들리라”의 동사는 42:1의 “내가 붙드는 나의 종”으로 이어진다.&lt;/p&gt;&lt;p&gt;11-12절은 이스라엘에게 노하고 다투고 싸우고 치는 자들의 끝을 말한다. “너와 다투는 자들”(אַנְשֵׁי רִיבֶךָ, 안셰 리베카)은 직역하면 ‘네 소송의 사람들’이어서 1절의 법정 장면과 이어지며 21절의 우상들에 대한 소송도 떠올리게 한다. 분노와 소송, 다툼과 전쟁으로 적대가 짙어져도 그들은 수치를 당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허무한 것 같이” 된다. 40:17에서 열방의 무력함을 표현한 두 낱말이 여기서 다시 쓰이고, 24, 29절에서는 우상들에게도 같은 판결이 내려진다. 이스라엘이 싸우는 장면 없이 대적들이 찾아도 만나지 못할 만큼 사라진다.&lt;/p&gt;&lt;p&gt;13절에서 여호와는 “네 오른손을 붙들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9절과 같은 어근의 분사 מַחֲזִיק יְמִינֶךָ(마하지크 예미네카)는 붙들고 계시는 모습을 그린다. 45:1에서는 고레스의 오른손도 붙드신다. 고레스는 열국을 항복시키는 일을 위해, 이스라엘은 택하신 종으로서 붙들린다. 절 끝의 “내가 너를 도우리라”는 ‘나’를 앞세워 돕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열방이 서로 돕던 동사가 하나님의 약속이 된다.&lt;/p&gt;&lt;p&gt;14절의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תּוֹלַעַת יַעֲקֹב, 톨라아트 야아코브)는 비교어 없이 이스라엘을 직접 버러지라 부른다. ‘버러지’가 여성 명사여서 이 절의 “두려워하지 말라”와 도움·구속의 약속에도 여성형이 쓰인 것으로 보인다. UBS 핸드북은 애정 어린 호칭이라는 견해도 소개하지만, 이스라엘의 연약하고 낮은 처지를 드러내는 비유로 읽는다. 시편 22:6의 “나는 벌레요”에도 같은 낱말이 쓰인다. 히브리어 성경은 표제를 1절로 세므로 그 구절은 22:7이다.&lt;/p&gt;&lt;p&gt;“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מְתֵי יִשְׂרָאֵל, 메테 이스라엘)의 첫 낱말은 보통 ‘사람들’이라는 뜻이나 ‘버러지’와의 병행 때문에 다른 읽기가 제안되었다. UBS 핸드북은 많은 학자가 칠십인역처럼 ‘적은 무리’로 읽으며 사해사본은 ‘죽은 자들’이라는 읽기를 제시한다고 보고한다. ‘이’나 ‘구더기’를 뜻하는 아카드어와 연결하는 제안에 대해서는 사본 근거가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뜻으로 번역하도록 권한다. 개역개정은 일반적인 뜻인 “사람들”을 택한다. 이 낮은 백성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고 하신다.&lt;/p&gt;&lt;p&gt;하나님은 자신을 그들의 “구속자”라고 밝히신다. UBS 핸드북은 이사야에서 하나님께 이 칭호를 쓰는 첫 구절이 여기라고 설명한다. 구속자는 어려움에 빠진 친족을 돕고 보호할 법적 책임을 진 사람이다. 보아스가 친족의 기업 무를 권리와 책임을 떠맡는 룻기 4:1-12가 그 예다. 값 주고 되찾는다는 낱말의 일반적인 뜻보다 이 문맥에서는 친족의 도움과 보호가 강조된다. 그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קְדוֹשׁ יִשְׂרָאֵל, 케도쉬 이스라엘), 곧 1:4에서 이스라엘이 만홀히 여긴 바로 그분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버러지 같은 야곱의 친족처럼 나서신다.&lt;/p&gt;&lt;p&gt;15절에서 버러지는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가 된다. 타작기는 바닥에 날카로운 돌이나 쇠붙이를 박은 널판으로 짐승이 곡식 단 위로 끌어 낟알을 떨어 내는 농기구다. 그 기구로 산들을 부수고 작은 산들을 겨로 만든다는 그림은 약한 백성이 하나님의 손에서 큰 장애를 부수는 도구가 됨을 나타낸다. ‘작은 산’은 40:4, 12에서 “언덕”으로 옮긴 낱말이다. 40장에서 하나님이 낮추시고 저울에 다시던 산들이 이스라엘 앞을 가로막은 장애가 된다. UBS 핸드북은 산과 언덕을 대적으로 보는 해석과 현재의 어려움으로 보는 해석을 소개하며 앞의 견해를 선호한다.&lt;/p&gt;&lt;p&gt;16절에서는 타작한 곡식을 공중에 던져 겨를 날리는 키질이 이어진다. “회오리바람이”(וּסְעָרָה, 우세아라)는 40:24에서 권력자들을 초개처럼 날려 보내던 바람과 같다. 권력자와 열국과 산들이 모두 겨와 초개처럼 흩어진다. 이어 “그러나 너”라고 이스라엘을 부르며 14-15절의 여성형에서 남성형으로 돌아온다. 이스라엘이 즐거워하고 자랑할 대상은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다. 산을 부순 공로는 하나님께 돌아간다.&lt;/p&gt;&lt;p&gt;17절의 “가련하고 가난한 자”(הָעֲנִיִּים וְהָאֶבְיוֹנִים, 하아니임 베하에브요님)는 고난과 억눌림 아래 있으며 생계가 궁핍한 사람들이다. 물을 구해도 얻지 못해 혀가 마르는 그들에게 여호와는 “응답하겠고”(אֶעֱנֵם, 에에넴)라고 약속하신다. 응답을 뜻하는 말과 앞의 ‘가련한 자들’은 소리가 비슷하다. 이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신다. 9절에서 과거의 택하심을 확인하신 하나님이 앞으로 목마를 때도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44:3의 “목마른 자”도 이 절의 “갈증”과 어근이 같다.&lt;/p&gt;&lt;p&gt;18절에서 하나님은 헐벗은 산에 강을 열고 골짜기에 샘을 내며 광야를 못으로,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바꾸신다. 높은 곳과 낮은 곳, 광야와 마른 땅에 물이 흐른다. 43:19-20도 택하신 백성에게 마시게 하려고 광야에 길과 강을 내시겠다고 약속한다. 19절에서는 백향목, 싯딤 나무, 화석류, 들감람나무, 잣나무, 소나무, 황양목을 광야와 사막에 두신다. 나무 이름 가운데 몇은 정확한 수종을 정하기 어려워 번역이 다르지만, 산지의 백향목과 건조한 땅의 싯딤 나무를 포함한 일곱 나무가 같은 숲을 이룬다. 절 끝의 “함께”는 1절에서 “서로”로 옮긴 낱말이다.&lt;/p&gt;&lt;p&gt;20절에서 사람들은 이 변화를 “보고 … 알며 … 헤아리며 깨달으리라”고 한다. ‘헤아리다’는 본래 ‘두다’라는 뜻으로 22절의 “마음에 두고”처럼 ‘마음’이 생략된 표현이다. 네 동사 뒤에는 “함께”가 붙는다. 40:5에서 모든 육체가 함께 보리라고 했듯이, 여기서도 무리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깨닫는다. 5절에서 보고 두려워한 섬들은 우상을 만들었지만, 이들은 여호와의 손이 광야를 지으셨으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창조하셨음을 안다. “창조하신 바”(בְּרָאָהּ, 베라아흐)는 40:28에서 땅 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을 부른 동사와 같다. 우상을 고정하는 장인의 손과 광야를 새롭게 짓는 하나님의 손이 다시 대조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이사야 41:1-20은 바벨론 포로기의 백성에게 주어진 위로의 말씀이다. 구약은 처음부터 열방을 다스리시는 창조주와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신 언약의 하나님을 같은 분으로 증언한다. 그래서 이사야 41장은 고레스의 정복이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말하다가 곧바로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라는 부름으로 넘어간다.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과 작은 백성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은 같은 손이다.&lt;/p&gt;&lt;p&gt;1절과 21절의 재판 장면은 예언서에 자주 나오는 소송의 틀을 따르는데, 여기서는 그 쓰임이 뒤집힌다. 호세아 4:1에서 여호와는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신다고 하시고, 미가 6:1-2에서는 산들과 땅의 기초 앞에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신다. 이사야 1:18에서도 하나님은 죄로 붉게 물든 이스라엘을 향해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부르셨다. 이 본문들에서 피고는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이다. 이사야 41장에서는 하나님이 열방과 그 신들을 피고석에 부르시고, 이스라엘은 그 재판에서 보호받는 쪽에 선다. 11절의 “너와 다투는 자들”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자들이지만, 그 소송은 패소로 끝난다. 이 재판이 40:2에서 예루살렘의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된 뒤에 열린다는 순서가 중요하다.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소송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편에 서서 열방의 우상들과 다투신다.&lt;/p&gt;&lt;p&gt;창세기 12:1-3에서 여호와는 아브람을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에서 불러내시고, 큰 민족과 복을 약속하시며,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고 하신다. 이사야 41:8-9는 이 부르심을 포로기의 이스라엘에게 다시 들려준다. 하나님은 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르시고 “땅 끝에서부터” 붙들어 부르셨다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와 하란이라는 먼 곳에서 불려 나왔듯이, 이스라엘의 존재도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시작되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도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다. 창세기 15:1에서 하나님은 자식 없이 늙어 가는 아브람에게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자신이 그의 방패요 상급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이삭(창 26:24)과 야곱에게 이어졌다. 특히 창세기 46:3-4에서 하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야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와 함께 내려가고 반드시 그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고 약속하셨다. 고향을 떠나 이방 땅으로 내려가던 조상 야곱에게 주신 그 약속이, 바벨론에 끌려가 있는 “야곱”에게 이사야 41장에서 다시 주어진다.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은 그 자손이 땅을 잃은 자리에서도 효력을 잃지 않는다.&lt;/p&gt;&lt;p&gt;역대하 20:6-7에서 여호사밧은 모압과 암몬 자손이 쳐들어온 위기 앞에서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기도하며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한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여 백성에게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하시며, 이 전쟁이 그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0:15-17). 그날 유다는 칼을 들지 않았고, 대적들은 서로를 쳐서 무너졌다(20:22-23). 이사야 41:11-12에서도 이스라엘이 싸우는 장면은 없고, 대적들이 찾아도 만나지 못할 만큼 사라질 뿐이다. 열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함께 붙드는 여호사밧의 기도가 이사야 41장에서는 하나님 편에서 주시는 응답으로 나온다. 1-7절은 열방이 하나님의 손 아래 있음을 법정 장면으로 보여 주고, 8-13절은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사랑하여 붙드신다고 말한다.&lt;/p&gt;&lt;p&gt;신명기 7:6-8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를 수효에서 찾지 않는다.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려고 애굽에서 속량하셨다. 이사야 41:14의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는 이 작음을 더 날카롭게 그리고, 하나님은 그 작은 백성의 구속자가 되신다. 선택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랑과 맹세에 근거했고, 포로기에도 그 근거는 바뀌지 않았다. 신명기 4장은 우상 문제와 포로를 한데 내다본다. 호렙에서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고 음성만 들은 백성은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아야 했다(4:15-18). 모세는 그들이 이 경고를 어기면 흩어진 땅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목석의 신들을 섬기게 되리라고 경고하면서도(4:27-28), 거기서 하나님을 찾으면 만날 것이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고 약속한다(4:29-31). 이사야 41장은 그 두 말씀이 맞닿는 자리에 서 있다. 열방의 장인들은 목석의 우상을 못으로 고정하고, 하나님은 흩어진 백성을 향해 “버리지 아니하였다”(9절),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17절)고 말씀하신다.&lt;/p&gt;&lt;p&gt;우상을 조롱하는 이사야의 언어는 구약의 다른 예언과 시에서도 메아리친다. 예레미야 10:3-5는 숲에서 벤 나무를 장인이 다듬고 은과 금으로 꾸민 뒤 못과 장도리로 고정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우상을 그리며, 그것이 말하지도 걷지도 못하여 사람이 메고 다녀야 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시편 115:4-8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이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 말한 뒤, 그것을 만드는 자들과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아지리라고 경고한다. 이사야 41:7의 못 박힌 우상은 이 전통 안에 있다. 우상을 붙드는 사람은 결국 우상처럼 말하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간다. 반면 하나님께 붙들린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보고 알고 헤아리고 깨닫는 존재가 된다(41:20).&lt;/p&gt;&lt;p&gt;출애굽기 3:7-12에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받는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내려와 그들을 건져 내겠다고 하시며, 자신이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겠느냐고 주저하는 모세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다. 신명기 31:6-8에서 모세는 백성과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거듭 말하며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라고 약속한다. 여호수아 1:9에서도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고 하시며, 그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하겠다고 하신다. 이사야 41:10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는 출애굽과 정복 시대의 이 격려를 그대로 잇는다. 다른 점은 듣는 이의 처지다.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의 백성은 약속의 땅 앞에 섰고, 이사야의 백성은 그 땅을 잃은 뒤에 같은 말씀을 듣는다. 땅을 얻을 때 주신 약속이 땅을 잃었을 때에도 철회되지 않았다.&lt;/p&gt;&lt;p&gt;41:14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네 구속자”라 부르신 일은 이스라엘의 가족법과 출애굽 전통을 함께 불러온다. 레위기 25:25, 47-49에 따르면 가난하여 땅을 팔았거나 종으로 팔린 사람이 있으면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무르거나 그 사람을 속량할 책임을 졌다. 룻기 4장에서 보아스는 그 책임을 공적으로 떠맡아 나오미 집안의 이름을 이어 간다. 출애굽기는 이 가족의 언어를 하나님께 적용한다. 6:6에서 하나님은 편 팔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속량하겠다고 하시고, 15:13의 바다 노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구속하신 백성으로 부른다. 이사야 41:14는 출애굽의 그 구속자를 포로기의 백성 앞에 다시 세운다. 43:1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시고, 44:6에서 개역개정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옮긴 칭호도 41:14의 “구속자”와 같은 낱말이다. 거룩하신 이가 친족의 자리에 서신다는 이 고백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백성을 위해 나서시는 근거가 된다.&lt;/p&gt;&lt;p&gt;출애굽기 17:1-7에서 르비딤에 이른 백성은 마실 물이 없자 모세와 다투고 여호와를 시험했다. 그래도 하나님은 호렙의 반석에서 물을 내셨다. 이사야 41:17-18은 광야의 목마름과 물이라는 같은 장면을 새 출애굽의 약속으로 다시 쓴다. 이번에는 다툼 대신 “가련하고 가난한 자”의 갈증이 앞에 나오고, 하나님은 반석 하나에서 그치지 않고 헐벗은 산과 골짜기와 광야 전체를 물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신다. 이사야 35:6-7도 광야에 물이 솟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며 메마른 땅이 원천이 되리라고 했다. 43:19-20은 이 일을 “새 일”이라 부르며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어 택하신 백성에게 마시게 하겠다고 한다. 44:3은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로 시작하여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부어 주겠다고 이어 가면서 물과 하나님의 영을 함께 묶는다. 첫 출애굽에서 광야의 물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여 주었듯이, 포로에서 돌아오는 새 출애굽에서도 광야의 물은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 길을 가신다는 표징이 된다.&lt;/p&gt;&lt;p&gt;하나님이 이방 왕을 자기 일에 쓰신다는 증언도 이사야 41장에만 있지 않다. 예레미야 25:9에서 하나님은 유다를 치러 오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내 종”이라 부르신다. 역대하 36:22-23과 에스라 1:1-4는 여호와께서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는 조서를 내리게 하셨다고 기록한다. 심판의 도구도, 귀환의 도구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방 정복자와 이스라엘을 같은 자리에 두지 않는다. 45:4에서 하나님은 고레스에게 “내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자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 이름을 불러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고 하신다. 고레스가 부름을 받은 목적은 종 야곱을 위한 것이었다. 41장에서 고레스는 이름 없이 “동방에서” 일깨워진 도구로 등장하지만, 이스라엘은 “나의 종”, “내가 택한”,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언약의 호칭으로 불린다.&lt;/p&gt;&lt;p&gt;41:8에서 시작된 종의 주제는 이사야 40-55장을 따라 깊어진다. 42:1은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이 이방에 정의를 베풀 것이라고 하지만, 42:19는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고 묻는다. 종으로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이 그 부르심을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이 드러난다. 49:3-6에서는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종이 야곱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이방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한다. 41장에서 땅 끝에서 불려 온 종은 결국 땅 끝까지 구원을 전하는 종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붙드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연약함을 넘어 이 종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이사야 41:1-20의 일차적인 뜻은 바벨론 포로기의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이다. 하나님은 고레스를 일으켜 바벨론을 무너뜨리시고, 붙드시는 종 이스라엘을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역대하 36장과 에스라 1장은 이 약속이 고레스의 조서로 실제 역사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돌아온 공동체의 형편은 이사야가 그린 광야의 강과 숲에 미치지 못했다. 느헤미야 9:36-37에서 백성은 조상들에게 주신 땅에서 자신들이 여전히 이방 왕들의 종이 되어 그 소산을 바치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사야 42:18-25도 종 이스라엘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고 책망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했으나, 그 약속을 받은 종은 자기 힘으로 부르심을 다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본문은 종에 대한 약속이 더 온전히 이루어질 날을 바라보게 한다.&lt;/p&gt;&lt;p&gt;신약은 이 종의 약속을 예수께 적용한다. 마태복음 12:15-21은 예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자신을 알리지 말라고 경고하신 일을 이사야 42:1-4의 성취로 인용한다. 41:10에서 하나님이 붙드시겠다고 하신 종, 42:1에서 “내가 붙드는 나의 종”이라 하신 그 종이 예수 안에서 나타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16에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하신 약속이 여럿을 가리키지 않고 한 사람, 곧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이사야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른 이스라엘의 소명은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모인다. 이스라엘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자리에서,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보고 듣고 순종하시는 종으로 서신다.&lt;/p&gt;&lt;p&gt;누가복음 1:46-55에서 마리아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노래하며 이렇게 맺는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54-55절). 하나님이 종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신다는 마리아의 고백은 이사야 41:8-14가 붙든 약속과 같은 자리에 서 있다. 마리아는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52-53절). 이사야가 버러지 같은 야곱과 목마른 가난한 자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마리아는 예수의 잉태에서 시작된 일로 노래한다.&lt;/p&gt;&lt;p&gt;14절의 버러지 이미지는 시편 22편과 이어진다. 시편 22:6에서 고난받는 의인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라고 탄식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 시편의 첫 절로 부르짖으셨고(마 27:46), 십자가 아래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그를 조롱한 장면(마 27:39-43)은 시편 22:7-8을 떠올리게 한다. 신약은 예수께서 시편 22편의 고난받는 자의 자리에 서셨다고 증언하고, 그 시편에서 ‘벌레’로 옮긴 말은 버러지 같은 야곱을 부를 때와 같은 낱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낮고 보잘것없는 자의 자리까지 내려오셨다. 빌립보서 2:7-8은 그분이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한다. 버러지 같은 야곱을 붙드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버러지의 자리에 친히 서셨고, 그 자리에서 낮은 자들을 붙들어 일으키신다.&lt;/p&gt;&lt;p&gt;14절의 “구속자”는 가까운 친족이 어려움에 빠진 가족을 위해 나서는 법적 책임에서 나온 말이다. 히브리서 2:11-15는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났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또 자녀들이 혈과 육에 속하였으므로 그도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지니셨고, 그 목적은 죽음을 통해 마귀를 멸하시고 죽기를 무서워하여 한평생 종노릇 하던 이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고 밝힌다. 이어 2:16은 그분이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시지 않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신다고 말한다. 구속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실제로 백성의 친족이 되셨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약속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하시는 일로 깊어진다. 이사야 41장의 구속자는 값을 치르는 일보다 친족으로서 돕고 보호하는 일에 초점이 있다. 신약은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다는 사실을 더한다(막 10:45). 디도서 2:13-14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 주어 사람들을 모든 불법에서 속량하고 깨끗하게 하시며,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다고 말한다. 약한 백성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시는 사랑과 그분께 속한 백성의 새 삶으로 이어진다.&lt;/p&gt;&lt;p&gt;10절의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는 마태복음의 처음과 끝에서 다시 울린다. 마태복음 1:23은 예수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임마누엘로 소개하고, 28:20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붙드신다는 약속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어진다. 요한복음 10:28-29에서 예수는 아무도 자기 양들을 자기 손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하신다. 요한계시록 1:17-18에서 영광중에 나타나신 예수는 죽은 자 같이 엎드린 요한에게 오른손을 얹고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하시며,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나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고 밝히신다. 이사야 41:4의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41:10과 13절의 “두려워하지 말라”, 오른손으로 붙드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이 한 장면에 모인다. 역사의 처음과 끝을 쥐신 하나님의 권위가 죽고 살아나신 주님의 자기 선언에 나타난다.&lt;/p&gt;&lt;p&gt;10절의 “나의 의로운 오른손”에서 하나님의 의는 백성을 붙들어 구원하시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바울은 로마서 3:21-26에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하며, 그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친다고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세우셔서 자신이 의로우신 분이심을 나타내시고,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 이사야 41장에서 정복자를 부르시고 종을 붙드시던 그 의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인을 붙드시는 의로 드러난다.&lt;/p&gt;&lt;p&gt;요한복음 7:37-39에서 예수는 명절 끝날에 서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신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하시며, 요한은 이것이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이사야가 약속한 광야의 물(41:17-18)과, 물과 영을 함께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44:3)은 예수의 이 초대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목마른 가난한 자에게 응답하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친히 자기에게 와서 마시라고 부르신다. 요한계시록 21:6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는 자신이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밝히시며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라고 하신다. 광야에 강을 여시겠다는 이사야의 약속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된다.&lt;/p&gt;&lt;p&gt;바울은 로마서 11:1-2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고 묻고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답한다. 자신도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라고 밝히며,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이사야 41:9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않으셨다고 하셨다. 바울도 이스라엘이 택하심을 따라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이며,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말한다(11:28-29). 동시에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들이며, 그 가지들을 향해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11:17-18). 갈라디아서 3:29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드신 하나님의 신실함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에게까지 넓어지되, 처음 택하신 백성을 향한 약속도 거두어지지 않는다.&lt;/p&gt;&lt;p&gt;15-16절에서 버러지 같은 이스라엘은 산들을 부수는 타작기가 된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는 십자가에서 드러난다. 골로새서 2:15는 그리스도께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고 말한다. 로마서 16:20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사탄을 성도들의 발 아래에서 속히 상하게 하시리라고 약속한다. 약한 공동체가 거대한 장애를 넘어서는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하고,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고린도전서 1:27-31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 목적이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씀으로 맺는다. 41:16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모양으로 이루어진다.&lt;/p&gt;&lt;p&gt;2절의 동방의 정복자와 그리스도 사이에도 대조가 드러난다. 이사야 45:1은 고레스를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부른다. 고레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쓰임을 받았고(45:4), 그의 칼은 열국을 티끌처럼 흩었으며, 그가 가져온 해방은 유다의 주인이 바벨론에서 바사로 바뀌는 정치적 귀환이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이,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알고 끝까지 순종하셨고, 열국을 칼로 정복하지 않고 자기 몸을 내어 주어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신다. 고레스를 부르신 하나님의 주권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역사를 새롭게 하는 더 깊은 방식으로 나타난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6-7절에서 서로 “힘을 내라”고 격려하는 사람들은 우상을 못으로 단단히 박고 있다. 격려가 향하는 대상이 문제다. 두려움 때문에 재산이나 권력을 자기 생명의 보증으로 삼으면 사람은 자신이 붙들어 두어야만 서 있는 우상에 매달린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분은 그들이 세운 신이 아니라 그들을 택하고 붙드시는 하나님이다.&lt;/p&gt;&lt;p&gt;8-10절에서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을 “나의 종”, “내가 택한”,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르신다. 땅을 잃고 포로가 된 처지도 그 부르심을 취소하지 못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은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는 약속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두려워한다는 이유로 믿음이 없다고 몰아세우면, 연약한 백성을 굳세게 하시겠다는 위로를 거꾸로 사용하게 된다. 성도는 두려움과 낙심을 하나님께 아뢰며 그분의 붙드심을 의지할 수 있다.&lt;/p&gt;&lt;p&gt;14절에서 하나님은 버러지 같은 야곱의 구속자가 되신다. 연약함과 작음은 그분의 도움에서 제외되는 이유가 아니다. 바울도 주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는 말씀에 따라 자기 약함을 자랑했다(고후 12:9-10). 히브리서 13:5-6은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 알라고 권하며,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도우신다는 약속을 그 근거로 삼는다. 붙드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규모나 재산으로 자기 가치를 입증하려는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lt;/p&gt;&lt;p&gt;15-16절의 타작기는 하나님이 약한 백성으로 큰 장애를 무너뜨리시는 그림이다. 이 약속을 상대를 짓밟으라는 명령으로 사용할 수 없다. 11-12절에서 대적을 사라지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며, 16절에서 이스라엘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자랑한다. 로마서 12:17-21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권한다. 승리를 바라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에는 보복을 내려놓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는 태도가 따른다.&lt;/p&gt;&lt;p&gt;동방의 정복자도 하나님의 부르심 아래 있다(2-4절). 어떤 정치 지도자가 역사를 구원하리라는 기대와 세상이 하나님의 손을 벗어났다는 절망은 모두 여호와께서 처음과 나중을 다스리신다는 말씀 앞에서 수정되어야 한다. 고레스는 종 이스라엘을 위해 쓰임받는 도구다. 디모데전서 2:1-2가 권하듯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되 궁극적인 소망은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께 둔다.&lt;/p&gt;&lt;p&gt;17-20절의 가난한 이들은 물이 없어 혀가 마르는 사람들이다. 생수의 약속을 영적 위로로 읽을 때에도 이 실제 궁핍을 지울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을 외면하면서 그들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본문의 위로와 어긋난다. 그들의 필요를 돌보는 섬김도 교회의 힘을 자랑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광야의 회복을 보고 사람들이 알아야 할 분은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시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12/"&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2011), 41:2 번역 주석(UBS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18/"&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2011), 41:8 번역 주석(UBS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114/"&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2011), 41:14 번역 주석(UBS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13/"&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2011), 41:3 번역 주석(UBS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115/"&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2011), 41:15 번역 주석(UBS TIPs)&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41:21-29 너희의 증거를 보이라: 침묵하는 신들과 시온에 소식을 주시는 하나님</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1.21-29/</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1.21-29/</guid><description>야곱의 왕이신 하나님이 열방의 신들을 법정에 세워 지나간 일과 앞으로 올 일을 말해 보라고 요구하신다. 신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바람과 공허로 판결받는다. 하나님은 북방과 해 돋는 곳에서 한 사람을 일으키신 일을 증거로 내놓으시고,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을 전할 자를 주겠다고 약속하신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이사야 41장은 열방의 신들을 심문하는 두 법정 장면 사이에 종 이스라엘을 향한 위로를 배치한다. 1-4절에서 하나님은 민족들을 재판 자리로 부르시고,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 열국을 넘겨주신 분이 “나 여호와”라고 답하신다. 섬들이 두려워하며 흔들리지 않도록 우상에 못을 박는 동안(5-7절), 하나님은 버러지 같은 야곱의 오른손을 붙드시고 광야에 물과 나무를 주겠다고 약속하신다(8-20절). 21-29절은 다시 법정으로 돌아가 그 신들에게 증거를 요구하고 판결을 내린다.&lt;/p&gt;&lt;p&gt;하나님은 우상들에게 소송을 제기하고 “확실한 증거”를 내놓으라고 명하신다(21절). “너희 우상들은”은 개역개정이 상대를 밝히려고 보충한 말이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이사야 번역 핸드북은 “증거”를 법정에서 피고가 내놓는 논증으로 풀이한다. “가까이 가져오라”와 “내놓으라”는 명령은 1절에서 재판 자리로 나오라고 부르신 말을 되받는다. 말씀하시는 분은 “야곱의 왕”(מֶלֶךְ יַעֲקֹב, 멜레크 야아코브)이시다. 자기 송사가 하나님에게서 벗어났다고 탄식한 야곱(40:27)을 위해 하나님이 왕으로서 법정을 여신다. 하나님은 원고이면서 재판장이시고, 신들은 자신이 신이라는 주장을 입증해야 한다.&lt;/p&gt;&lt;p&gt;22절은 신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리라고 요구한다. 첫 명령은 히브리어에서 “그들이 가져와 우리에게 알리게 하라”는 3인칭이지만, 개역개정은 “진술하라”로 옮겨 직접 명령하는 형식으로 통일했다. UBS 핸드북은 “그들”을 신들로, 가져올 것을 21절의 논거로 이해한다. NIV는 첫 “그들”을 민족들로 보며, 일부 번역은 고대 역본을 따라 “가까이 오라”로 옮긴다. 핸드북은 사해사본이 뒷받침하는 마소라 본문을 따른다. “장차 당할 일”은 진행 중인 일로도 읽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번역은 미래의 일로 옮긴다.&lt;/p&gt;&lt;p&gt;신들은 “이전 일”(הָרִאשֹׁנוֹת, 하리쇼노트)의 뜻과 결말도 설명해야 한다. UBS 핸드북은 앞으로 올 일과 대조되는 과거의 사건으로 보고, NJPS의 각주는 신들이 예고하여 이미 성취된 일로 이해한다. “우리가 마음에 두고”는 하나님과 법정의 청중이 그 증거를 따져 보겠다는 뜻이다. 신들은 지난 일을 미리 알렸고 그 말이 이루어졌음을 입증하거나 앞으로 올 일을 말해야 한다. 이 요구는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시고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46:10)의 사역과 대조된다.&lt;/p&gt;&lt;p&gt;“뒤에 올 일”을 알리면 “너희가 신들인 줄 우리가 알리라”(23절). 그것도 못 한다면 “복을 내리든지 재난을 내리든지 하라”고 하신다. 히브리어는 “선을 행하든지 해를 끼치든지 하라”(אַף־תֵּיטִיבוּ וְתָרֵעוּ, 아프-테티부 베타레우)로, 양 끝을 들어 어떤 일이라도 해 보라는 도전이다. 하나님은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시는 분이지만(45:7), 신들은 어느 것도 하지 못한다.&lt;/p&gt;&lt;p&gt;23절의 “놀라리라”(וְנִשְׁתָּעָה, 베니쉬타아)는 10절의 “놀라지 말라”에 쓰인 동사와 같다. UBS 핸드북은 어원이 불확실한 이 동사를 10절에서는 “두려워하다”, 23절에서는 “바라보다, 응시하다”로 이해한다. “보고”에 관해서는 RSV가 BHS의 수정 제안을 따라 “두려워하다”로 옮겼지만, 핸드북은 원래 본문이 “보다”이며 수정안을 뒷받침할 본문 증거가 없다고 설명한다. 이스라엘에게 놀라지 말라 하신 하나님은 신들에게 청중이 눈여겨볼 만한 일을 한 가지라도 해 보라고 요구하신다.&lt;/p&gt;&lt;p&gt;24절은 신들의 존재와 행위 모두에 판결을 내린다.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는 “없음에서 나왔다”(אַתֶּם מֵאַיִן, 아템 메아인)로, NIV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못하다”로도 옮길 수 있다. “너희 일은 허망하며”의 מֵאָפַע(메아파)도 UBS 핸드북은 “없음에서 나왔다”로 직역한다. 4절에서 역사를 행하신 분은 여호와셨고, 이 신들이 행한 일은 허망하다. 열방과 이스라엘의 대적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말씀하신 판결(40:17; 41:11-12)이 그들의 신들에게도 내려진다.&lt;/p&gt;&lt;p&gt;“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는 판결은 신들을 섬기기로 택한 사람에게까지 미친다. “가증한 것”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거부하시는 대상, 특히 다른 신 숭배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는데(8-9절),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닌 신을 택한다. 44:19가 우상을 가증한 물건이라 부르듯, 여기서는 그것을 택한 사람도 책망받는다.&lt;/p&gt;&lt;p&gt;25절에서 하나님은 신들이 내놓지 못한 증거를 친히 제시하신다.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의 הַעִירוֹתִי(하이로티)는 2절의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서”라는 물음에 답한다. UBS 핸드북은 이 사람을 2절과 같은 고레스로 본다. 히브리어는 하나님이 일으키신 일과 그 사람이 온 일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서술하고, 개역개정은 둘째 동사를 “오게 하며”로 옮긴다. 바사는 바벨론 동쪽에 있었지만, 고레스는 북쪽 지역을 장악한 뒤 북쪽에서 바벨론을 공격했다. 44:28과 45:1은 그를 “내 목자”,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라고 밝힌다.&lt;/p&gt;&lt;p&gt;“내 이름을 부르는 자”(יִקְרָא בִשְׁמִי, 이크라 비쉬미)는 마소라 본문의 읽기다. UBS 핸드북에 따르면 RSV, NIV, NJPS는 이를 “그가 내 이름을 부를 것이다”로 읽고, 사해사본을 따르는 NRSV, NJB, NAB는 “그가 그의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로 읽는다. REB는 본문을 고쳐 “내가 내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로 옮기며, 또 다른 수정안은 “그가 내 이름으로 불린다”이다. 핸드북은 마소라 본문을 따라 현재 시제로 옮기기를 권한다.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자들이라 하고(43:7), 하나님이 고레스의 이름을 부르셨다고도 말한다(45:3). 마소라 본문대로라면 고레스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45:4-5는 그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거듭 말한다. 이 구절은 고레스를 쓰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며, 그의 내적 신앙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lt;/p&gt;&lt;p&gt;고레스는 통치자들을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듯이 꺾는다. 개역개정의 “그가 이르러”는 마소라 본문을 따르지만, RSV는 뒤의 “밟다”와 짝을 이루도록 “짓밟다”로 고친다. UBS 핸드북은 이 수정에 본문 증거는 없으나 문맥상 뜻이 통한다고 보는 주석가들이 많다고 설명한다. “석회”는 회반죽을, 토기장이가 밟는 진흙은 그릇을 빚기 전에 이기는 젖은 흙을 가리킨다. 이 정복자도 45:9-13에서는 하나님의 손에 있는 진흙이다.&lt;/p&gt;&lt;p&gt;“누가 처음부터 이 일을 알게 하여”라는 26절의 물음은 고레스의 승리를 누가 오래전에 예고했느냐는 뜻이다. 여기서 “옳다”(צַדִּיק, 차디크)는 도덕적 의로움보다 “그 말이 맞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알리는 자도, 들려주는 자도, 그 말을 들은 자도 없다고 세 번 되풀이하여 신들의 침묵을 확증하신다. 마지막 “너희 말”에서는 3인칭으로 가리키던 신들을 다시 2인칭으로 부른다.&lt;/p&gt;&lt;p&gt;27절 첫 행은 “처음으로 시온에게, 보라, 보라 그들을”이라고 읽힐 만큼 압축되어 있다. UBS 핸드북은 뜻이 분명하지 않다고 보면서, RSV의 본문 수정, 칠십인역의 “내가 시온에 통치권을 주리라”, 사해사본을 참고하여 하나님이 시온에 처음 전령을 세우신 것으로 옮긴 REB를 소개한다. 핸드북은 마소라 본문을 유지하고 하나님이 시온에 먼저 알리셨다는 NIV의 번역을 따른다. 개역개정도 주어와 동사를 보충하여 “내가 비로소 시온에게 너희는 이제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로 옮긴다. “그들”은 돌아오는 유다 포로들을 가리킬 가능성이 크지만, RSV처럼 고레스에 관한 하나님의 예고로 읽을 수도 있다.&lt;/p&gt;&lt;p&gt;하나님은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을 전할 자”(מְבַשֵּׂר, 메밧세르)를 주신다. UBS 핸드북은 이 말 자체를 “전령, 소식을 전하는 자”로 풀고, “좋은 소식”은 번역에서 보충되었으며 전령의 이름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40:9에서 같은 동사의 여성형으로 불린 전령은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고 외친다. 시온으로 돌아오는 백성과 그들을 이끄시는 하나님이 기쁜 소식의 내용이다.&lt;/p&gt;&lt;p&gt;28절에서 하나님은 미래를 예고하거나 질문에 답할 신을 찾으시지만 한 명도 없다. “그들 가운데에 … 조언자가 없도다”의 조언자는 열방의 신들을 가리킨다. 40:13-14에서 하나님은 누구의 조언도 받지 않고 창조하셨다. 신들 가운데에는 대답할 조언자조차 없다. 목마른 가련한 자들에게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17절)과 달리 이 신들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한다.&lt;/p&gt;&lt;p&gt;29절의 “그들은 다 헛되며”에서 אָוֶן(아벤)은 마소라 본문에서 보통 “괴로움, 불행” 또는 “죄악”을 뜻한다. 대부분의 번역은 사해사본을 따라 “아무것도 아님”으로 옮긴다. Hebrew Old Testament Text Project는 마소라 본문을 유지하자고 제안하며, 이 경우 신들이 재앙을 일으키는 존재라는 뜻이 된다. 개역개정은 “헛되며”로 옮겨 공허를 강조한다. “부어 만든 우상들”은 제물이 아니라 틀에 부어 만든 신상이며, “그들의”는 그 신들을 본떠 만든 형상이라는 뜻이다.&lt;/p&gt;&lt;p&gt;마지막 판결은 “바람과 공허”(רוּחַ וָתֹהוּ, 루아흐 바토후)다. 신상의 무가치함을 그리는 비유다. “공허”(תֹהוּ, 토후)는 열방과 사사들과 우상 제작자에게도 쓰이는 말이다(40:17, 23; 44:9). 하나님은 땅을 공허하게 두지 않고 사람이 살도록 지으셨으나(45:18), 신상은 공허로 판결받는다. 24절의 “너희”가 29절에서는 “그들”로 바뀌어 판결이 청중에게 선포된다. 바로 뒤 42:1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붙들고 택하신 종을 보라고 하신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이사야 40-48장에서 하나님은 여러 차례 열방과 그 신들을 법정으로 부르신다(41:1-7; 41:21-29; 43:8-13; 44:6-8; 45:20-25). 그때마다 누가 이전 일을 알렸고 장래 일을 말할 수 있느냐고 물으시고, 신들이 대답하지 못하는 자리에서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44:6),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45:21)라고 선언하신다. 배경은 바벨론 포로기다. 바벨론의 신 벨과 느보는 짐승의 등에 실린 짐이 되어 자기들도 잡혀 간다(46:1-2). 이사야는 패배한 백성의 하나님이 승리한 듯 보이는 제국의 신들을 심문하신다고 선포한다. 41:21-29는 이 법정에서 신들에게 내려진 첫 판결이다.&lt;/p&gt;&lt;p&gt;출애굽기 15:11-18에서 홍해를 건넌 백성은 신들 가운데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고 노래하며 영원히 다스리실 왕을 고백했다. 이사야 41:21의 “야곱의 왕”은 그 고백을 포로기의 법정에서 다시 부른다. 신명기 4장은 언약을 버린 이스라엘이 흩어진 땅에서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게 되리라고 경고하면서도(28절), 그곳에서라도 하나님을 찾으면 만나리라고 약속한다(29-31절). 이어 애굽에서 행하신 일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32-35절). 신명기에서 증거가 출애굽이었다면, 이사야에서 증거는 고레스를 일으켜 포로 귀환의 길을 여시는 일이다. 흩어진 백성을 잊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이 이 법정에서 역사로 나타난다.&lt;/p&gt;&lt;p&gt;신명기 18:21-22는 선지자의 말이 이루어지는지로 여호와의 말씀을 분별하게 한다. 이사야 41장은 이 기준을 신들에게 들이댄다. 신들은 지난 일을 미리 말했다는 증거도, 앞으로 올 일을 말할 능력도 내놓지 못한다. 반면 하나님은 종의 말을 세우시고 사자들의 계획을 이루신다(44:25-26). 처음 일들을 예로부터 알리셨다가 홀연히 이루셨으며(48:3), 이스라엘이 그 일을 자기 신상이 행했다고 말하지 못하도록 미리 알리셨다(48:5). 하나님의 입에서 나간 말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55:11). 참 신과 거짓 신은 말과 사건이 일치하는지로 갈린다.&lt;/p&gt;&lt;p&gt;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불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왕상 18:29). 여호와께서 불로 응답하시자 백성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외쳤다(18:39). 이사야 41:28의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는 같은 침묵을 법정의 언어로 말한다. 갈멜산에서는 이스라엘 땅 안에서 바알과 겨루었고, 이사야에서는 포로가 된 이스라엘이 제국의 신들 앞에서 같은 판결을 듣는다. 41장 안에서도 하나님은 목마른 가련한 자들에게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라고 약속하시고(17절), 신들은 물어도 대답하지 못한다(28절). 갈멜산의 하나님은 불로, 포로기의 하나님은 광야의 물과 귀환의 길로 응답하신다.&lt;/p&gt;&lt;p&gt;시편 115:4-8은 말하지도 보지도 못하는 우상을 묘사한 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라고 말한다. 예레미야 10장도 사람이 메고 다녀야 하는 우상은 화도 복도 줄 수 없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복이든 재난이든 내려 보라는 이사야 41:23의 도전과 같은 논리다. 이사야 44:9-20의 목공은 나무 한 토막의 절반으로 떡을 굽고 고기를 구우며, 나머지로 신상을 만들어 그 앞에 엎드리면서도 그것이 가증한 물건인 줄 깨닫지 못한다(44:19). 41:24의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는 이 흐름 안에 있다. 말하지 못하는 신을 택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된다.&lt;/p&gt;&lt;p&gt;이사야 44:28-45:7은 고레스를 “내 목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부르며, 하나님이 그의 오른손을 붙드시고 그 앞에 성문을 여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종 야곱을 위해 그의 이름을 부르셨고(45:4), 고레스는 하나님의 성읍을 건축하고 사로잡힌 백성을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는다(45:13). 에스라 1:1-4와 역대하 36:22-23은 하나님이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귀환과 성전 건축의 조서를 내리게 하셨다고 기록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왕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종 이스라엘(41:8)을 위해 쓰인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밖의 역사까지 다스리신다.&lt;/p&gt;&lt;p&gt;예레미야 18장은 이스라엘과 열방이 토기장이 손의 진흙처럼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말하고, 이사야 29:16과 45:9도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따지는 어리석음을 꾸짖는다. 41:25에서 통치자들을 진흙처럼 밟는 고레스도 45:9-13에서는 하나님이 공의로 일으키신 진흙이다. 포로 된 이스라엘을 짓누르던 제국의 통치자들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한 사람 앞에서 밟히고, 그 사람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정복자의 힘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lt;/p&gt;&lt;p&gt;27절의 이름 없는 전령은 이사야 40-66장에서 점점 뚜렷해진다. 40:9의 전령은 높은 산에 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고 외치고, 52:7-10의 전령은 시온에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소식을 가져온다. 파수꾼들은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것을 보고, 땅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본다. 61:1-2에서는 주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이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한다. 소식의 내용은 다스리시고 돌아오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다.&lt;/p&gt;&lt;p&gt;신들의 편에는 알리는 자도 듣는 자도 없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나의 증인”으로 세우신다(43:9-10; 44:8). 그 증인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다(42:18-19; 43:8). 그래도 하나님이 먼저 알리시고 구원하시고 보이셨으므로, 그들은 그 일을 본 자로서 증언한다(43:12). 41:21-29의 법정에서 하나님 편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성취를 본 백성이 서 있다.&lt;/p&gt;&lt;p&gt;45:20-22에서 하나님은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던 열방의 피난민을 부르시고,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고 초청하신다. 다시 열린 법정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으로 소개하신다(45:21). 자기 영광을 다른 자에게, 자기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42:8)이 우상에게 내리신 판결은 우상을 의지하던 사람들이 그분께 돌아올 길을 연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여호와는 신들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판결하시고, 고레스를 일으켜 귀환의 길을 여시며, 예루살렘에 소식 전할 자를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고레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쓰였고(45:4-5), 증인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종이었다(42:19; 43:8). 에스라 9장과 느헤미야 13장은 돌아온 공동체 안에서도 언약 위반이 다시 드러났다고 기록한다. 29절의 판결 바로 뒤에서 하나님은 “내가 붙드는 나의 종, …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고 말씀하신다(42:1). 마태복음 12:17-21은 이 42:1-4를 예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고 경고하신 일에 적용한다. 신약은 바람과 공허로 판명된 신상들의 자리에 하나님이 세우신 종을 예수라고 증언한다.&lt;/p&gt;&lt;p&gt;요한복음 13:18-19에서 예수는 제자 중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것을 미리 말씀하시며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고 하신다. 이사야에서 하나님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알리는 것을 참 하나님의 증거로 삼으셨고(41:22-26), 그 목적을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고 밝히셨다(43:10). 예수는 떠나가실 일도 같은 목적으로 미리 말씀하셨다(요 14:29). 신들은 앞으로 올 일을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지만, 예수는 배신과 십자가를 미리 말씀하시고 그 길을 그대로 걸으셨다.&lt;/p&gt;&lt;p&gt;예수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고 거듭 가르치셨다(막 8:31; 9:31; 10:33-34).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으나 그 일은 말씀대로 일어났다. 부활하신 예수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자신에 관하여 기록된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시며 제자들을 그 증인으로 세우셨다(눅 24:44-48). “누가 처음부터 이 일을 알게 하였느냐”(26절)는 물음에, 신약은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알리셨다고 답한다. 이사야 43:10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증인이었듯, 부활 후의 제자들은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행 1:8).&lt;/p&gt;&lt;p&gt;고레스는 칼과 활로 열국을 꺾고(41:2) 사로잡힌 백성을 “값이나 갚음이 없이” 놓았다(45:13). 하나님은 예수의 십자가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시고 이기셨으며(골 2:13-15), 그리스도의 백성은 은이나 금 같은 썩어질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되었다(벧전 1:18-19). 고레스가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한 채 바벨론의 성문을 열었다면, 예수는 아버지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아들로서(요 17:6) 죄와 죽음에 갇힌 자들을 해방하신다.&lt;/p&gt;&lt;p&gt;예수는 갈릴리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다(막 1:14-15). 이사야 52:7의 전령이 시온에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외친 소식과 같은 내용이다. 나사렛 회당에서는 이사야 61:1-2를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 듣는 이들의 귀에 응하였다고 말씀하셨다(눅 4:16-21). 40:9의 전령이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고 외쳤다면, 요한복음 1:14는 육신이 되신 말씀에게서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바울은 이사야 52:7을 인용하여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한다(롬 10:15). 41:27의 전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을 보여 주는 소식과 그 소식을 땅 끝까지 전하는 사도들의 사명으로 이어진다.&lt;/p&gt;&lt;p&gt;신들 가운데에는 대답할 조언자가 없고(28절), 하나님께는 조언자가 필요 없다(40:13). 바울은 이사야 40:13을 인용하며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한다(롬 11:33-36).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 부르고,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한다(고전 1:24; 골 2:3). 이사야 9:6은 오실 왕의 이름을 “기묘자, 모사”라 부르며, 개역개정은 40:13에서도 같은 “모사”라는 말을 쓴다. 하나님께 조언할 자는 없지만,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아버지를 나타내신다(요 1:18). 그리스도인은 이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운다.&lt;/p&gt;&lt;p&gt;아덴에서 바울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고 말한다. 이어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으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고 선포한다(행 17:24-31). 이사야에서 증거가 해 돋는 곳에서 일으키신 한 사람이었다면, 바울에게 결정적 증거는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일이다. 부활하신 그분이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시므로, 사람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이켜야 한다.&lt;/p&gt;&lt;p&gt;바울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 말한다(고전 8:4). 이사야 41:24의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와 같은 판결이다. 바울은 이 고백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은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덧붙인다(8:6). 빌립보서 2:9-11은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는 이사야 45:23을 예수께 적용한다. 자기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42:8) 앞에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일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빌 2:11).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는 이사야 41:4와 44:6에서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돌리신 칭호인 “처음과 마지막”으로 자신을 부르신다(계 1:17; 22:13).&lt;/p&gt;&lt;p&gt;법정의 신들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했고, 그 침묵은 그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증거였다. 예수도 대제사장과 빌라도 앞에서 거의 대답하지 않으셨다(막 14:60-61; 15:4-5). 우상의 침묵은 공허에서 나왔지만, 예수의 침묵은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사 53:7)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죄인이 받을 심판을 대신 받으시는 종의 침묵이었다. 신들 가운데 누구도 “옳다”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26절), 육신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셨고(딤전 3:16) 우리를 의롭다 하시려고 살아나셨다(롬 4:25).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신이라 불리는 것들은 지나간 일의 뜻과 앞으로 올 일을 설명하고 실제로 행할 수 있는지 심문받는다. 인간의 예측과 권력에 삶의 안전을 맡기는 사람에게도 이 물음이 주어진다. 야고보서 4:13-15는 내일의 일을 계획하는 사람에게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고 말하라 권한다. 미래에 관한 지식과 권세는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속한다.&lt;/p&gt;&lt;p&gt;“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는 판결은 우상을 의지하는 사람의 책임을 묻는다. 하나님이 야곱을 먼저 택하셨는데(41:8-9), 야곱은 대답도 구원도 할 수 없는 신들을 택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참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을 섬기며 부활하신 아들을 기다렸다(살전 1:9-10).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고백은 우상을 버리고 그분을 섬기는 선택을 요구한다.&lt;/p&gt;&lt;p&gt;17절에서 하나님은 목마른 가련한 자들에게 응답하겠다고 약속하시고, 28절에서는 신들이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한다. 기도하는 성도는 자기 목마름을 하나님께 아뢴다. 응답이 늦어질 때에는 시편 13편의 기도자처럼 어느 때까지냐고 물을 수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는 원하는 결과와 시기를 스스로 보장받는 행위가 아니다.&lt;/p&gt;&lt;p&gt;본문의 법정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고하는 말에도 책임을 묻는다. 신명기 18장은 이루어지지 않은 말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받지 말라고 했다. 종말의 날짜나 정치·경제의 결과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고한 말이 빗나가면 그 말을 배척해야 한다. 교회의 선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에 근거한다.&lt;/p&gt;&lt;p&gt;하나님은 자신을 알지 못하는 고레스를 불러 포로의 귀환을 여셨다. 세상의 통치자도 하나님의 뜻에 쓰임받지만, 그 통치자가 신앙의 소망을 대신할 수는 없다. 성도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딤전 2:1-2), 그들의 권력도 야곱의 왕 아래 있음을 기억한다. 통치자들을 진흙처럼 밟은 고레스 역시 하나님 손의 진흙이다.&lt;/p&gt;&lt;p&gt;시온에 주어진 기쁜 소식은 하나님이 포로의 귀환을 여시고 통치하신다는 소식이다(40:9; 41:27; 52:7). 교회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고 그분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사도들의 증언을 선포한다(행 17:3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소망을 둔 성도는 바람과 공허로 판결받은 것들을 버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110/"&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1:10,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12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1:21,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122/"&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1:22,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123/"&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1:23,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124/"&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1:24,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125/"&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1:25,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126/"&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1:26,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127/"&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1:27,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128/"&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1:28,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129/"&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1:29, TIPs&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42:1-25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종과 눈먼 종</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2.1-25/</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2.1-25/</guid><description>하나님이 붙드시고 기뻐하시는 종은 외치지 않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면서 이방에 정의를 세운다. 하나님은 그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으로 세우시고, 해산하는 여인처럼 부르짖으며 새 일을 시작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은 많은 것을 보고도 유의하지 않는 눈먼 종으로 드러나고, 탈취당한 백성은 자기들이 범죄하였다고 고백한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이사야 41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우상들을 바람과 공허한 것으로 판결한다. 곧이어 42:1은 “보라”는 같은 부름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종을 내세운다. 이 장은 종의 사명(1-9절), 새 일에 응답하는 찬송과 여호와의 출전(10-17절), 눈먼 종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18-25절)로 이어진다.&lt;/p&gt;&lt;p&gt;하나님이 붙드시고 택하시며 기뻐하시는 종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다. 41:10에서 이스라엘을 “붙들리라” 하신 것과 같은 동사가 쓰이므로, 독자는 먼저 종 이스라엘을 떠올린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핸드북은 이름보다 역할을 앞세운 소개가 기대와 신비감을 더한다고 설명한다. 또 “내가 택한 사람”을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처럼 하나님이 택하신 인물들과 잇는 표현으로 본다. 43:20에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으로 불린다.&lt;/p&gt;&lt;p&gt;종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은 맡은 일을 감당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의 사명은 모든 민족에게 “정의”(מִשְׁפָּט, 미쉬파트)를 베푸는 것이다. UBS 핸드북은 이 정의를 하나님의 계시된 법에 근거한 바른 사회 질서로 풀이한다. 41:1에서 민족들이 불려 온 “재판 자리”도 같은 낱말이다. 민족들을 법정에 부르신 하나님이 이제 종을 통해 그들에게 바른 판결과 질서를 베푸신다.&lt;/p&gt;&lt;p&gt;종은 외치거나 목소리를 높이거나 거리에서 소리를 들리게 하지 않는다(2절). 원문의 둘째 동사에는 목적어가 없어 개역개정이 “목소리를”을 보충했다. 솔로몬의 즉위 때 울렸던 나팔과 환호(왕상 1:34-40), 고관들을 진흙처럼 짓밟는 정복자(사 41:25)와 다른 모습이다. 종이 조용한 동안, 11절에서는 민족들이 소리를 높이고 13-14절에서는 여호와가 외치신다.&lt;/p&gt;&lt;p&gt;종은 “상한 갈대”(קָנֶה רָצוּץ, 카네 라추츠)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וּפִשְׁתָּה כֵהָה, 우피쉬타 케하)을 끄지 않는다(3절). 둘째 그림은 곧 꺼질 듯 희미하게 타는 등잔 심지다. UBS 핸드북은 두 그림을 곤경에 처한 연약한 사람을 보살피는 긍휼로 읽는다. 이사야 36:6에서는 상한 갈대가 의지할 수 없는 애굽을 가리키고, 43:17에서는 애굽 군대가 심지처럼 꺼진다. 압제자의 군대를 끄시는 하나님이 세우신 종은 연약한 사람의 불을 끄지 않는다.&lt;/p&gt;&lt;p&gt;“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לֶאֱמֶת יוֹצִיא מִשְׁפָּט, 레에메트 요치 미쉬파트)는 1절의 사명을 되풀이한다. UBS 핸드북은 “진실로”를 ‘참으로, 확실히’라는 부사로 읽으며, 정의를 진리로 알린다는 해석은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종은 약한 이를 보전하면서 정의를 확실히 이룬다.&lt;/p&gt;&lt;p&gt;4절의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לֹא יִכְהֶה וְלֹא יָרוּץ, 로 이크헤 벨로 야루츠)는 3절의 두 그림을 종 자신에게 돌린다. ‘쇠하다’는 희미하게 타는 심지, ‘낙담하다’는 상한 갈대와 각각 어근이 같다. 종은 상한 것을 꺾지 않으며 자신도 꺾이지 않는다. UBS 핸드북은 NJB와 NJPS가 이 말놀이를 살렸다고 설명한다. 1-4절에서 세 번 나오는 정의의 사명은 온 땅에 미친다. “이르리니”는 그 뒤에 종이 쇠한다는 뜻을 담지 않는다.&lt;/p&gt;&lt;p&gt;섬들은 종의 “교훈”을 앙망한다(4절). UBS 핸드북은 이 문맥의 토라를 가르침으로 풀이한다. 기다린다는 동사 자체가 받게 된다는 결과까지 말하지는 않지만, 문맥은 민족들이 그 가르침을 받으리라는 기대를 품는다. 41장에서 정복자 앞에 떨던 섬들이 이제 종의 교훈을 기다린다. 반면 하나님이 교훈을 크게 하려 하신 이스라엘은 그 교훈을 듣지 않는다(21, 24절).&lt;/p&gt;&lt;p&gt;5절에서 종의 사명을 말씀하시는 분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모든 사람에게 숨과 영을 주신 창조주다. 그가 자기 영을 종에게 주셨으므로 종의 사명도 온 땅을 향한다. 6절에서 “의로” 부르신다는 말은 종이 정의를 이루도록 임명하신다는 뜻일 수도, 하나님이 자신의 의와 신실하심에 따라 부르신다는 뜻일 수도 있다. UBS 핸드북은 두 해석을 모두 허용하며, 단수로 불린 종을 고레스로 보는 견해와 공동체로 보는 견해를 소개한다. “손을 잡아”는 사명을 감당할 힘을 주시는 비유다. “너를 보호하며”(וְאֶצָּרְךָ, 베에초르카)는 ‘지키다’와 ‘빚다’로 읽을 수 있다. REB, NAB, NJB, NJPS는 후자를 택해 창세기 2:7의 창조를 떠올리게 한다. UBS 핸드북은 두 읽기를 모두 받아들인다.&lt;/p&gt;&lt;p&gt;하나님은 종을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으로 세우신다. UBS 핸드북은 앞 표현을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언약을 중재하는 사명으로 풀이하며, “백성”을 다음 줄의 이방과 평행한 온 세계의 민족들로 읽는다. 같은 표현이 나오는 49:8에서는 황무한 땅을 상속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앞선다. 종을 통해 세우시는 언약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민족들의 구원을 향한다. 빛은 이어지는 눈멂과 흑암 속에 길을 밝힌다.&lt;/p&gt;&lt;p&gt;7절에서 종은 눈먼 눈을 열고 갇힌 자를 감옥과 흑암에서 이끌어 낸다. 정의를 “베풀다”와 갇힌 자를 “이끌어 내다”는 같은 동사로 이어진다. 눈이 뽑히고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간 시드기야의 모습은 이 비유가 포로의 현실과 얼마나 가까운지 드러낸다(왕하 25:7). 1절과 6절은 이 구원이 이방에도 미친다고 밝힌다.&lt;/p&gt;&lt;p&gt;8-9절에서 여호와는 자기 영광을 우상에게 주지 않겠다고 하시고 새 일을 알리신다. 이전 일을 말하지 못한 우상들과 달리 하나님은 말씀하신 일을 이루셨다.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는 싹이 돋기 전에라는 그림이다. 43:19의 새 일에도 같은 동사가 쓰인다. 10-12절에서 바다와 섬, 광야와 산꼭대기는 새 노래로 응답한다. UBS 핸드북은 게달을 아라비아 광야의 민족으로, 셀라 주민을 에돔의 성읍 사람들로 풀이한다. 종은 자기 소리를 높이지 않지만 민족들은 여호와를 찬송하며 높인다. 우상에게 주지 않으시는 영광이 온 땅의 찬송으로 하나님께 돌아간다.&lt;/p&gt;&lt;p&gt;13절의 여호와는 열심을 일깨워 대적에게 힘을 드러내는 용사다. “여호와는 용사시니”라는 출애굽의 찬송(출 15:3)이 다시 울린다. 14절에서 오랫동안 자신을 억누르며 잠잠하셨던 하나님은 해산하는 여인처럼 부르짖고 숨을 몰아쉬신다. 포로들이 자기 사정이 하나님께 숨겨졌다고 탄식하던 동안(40:27), 하나님은 참고 계셨다. 용사의 외침과 산모의 진통은 온 힘을 쏟아 새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그린다.&lt;/p&gt;&lt;p&gt;15절에서 하나님은 산과 언덕을 황폐하게 하고 강과 못을 마르게 하신다. “황폐하게”와 앞 절의 “잠잠하고”는 히브리어 소리가 비슷하다. 강이 변한 “섬”은 앞의 먼 섬들과 같은 낱말이지만 여기서는 물이 빠져 드러난 땅이다. 41:18에서 강과 못을 만드시던 하나님이 이제 물을 말리신다. 이는 심판을 그리며, 16절과 이어 읽으면 백성이 지나갈 길을 여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맹인들을 낯선 길로 이끄시고 흑암을 빛으로 바꾸시며, 그들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이미 이룬 일처럼 말씀하신다. 그들이 앞으로 나아갈 때 우상을 의지하는 자들은 뒤로 물러나 수치를 당한다.&lt;/p&gt;&lt;p&gt;18-19절의 “들으라”, “보라”는 명령은 종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고발한다. UBS 핸드북은 “내 종”과 “내가 보내는 내 사자”를 모두 이스라엘로 읽는다. “내게 충성된 자”(כִּמְשֻׁלָּם, 킴슐람)는 이스라엘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뜻과 하나님이 그들을 자신을 위해 구별하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핸드북은 후자가 문맥에 더 잘 맞는다고 보며, 마지막 “맹인”을 대구에 맞춰 “못 듣는 자”로 바꾼 일부 번역에는 반대한다. 하나님이 섬기도록 세우신 자가 눈멀었다는 역설이다.&lt;/p&gt;&lt;p&gt;20절의 이스라엘은 많이 보고도 간직하지 않고 귀가 열려 있어도 듣지 않는다. 종이 다른 이의 눈을 열어야 하는데 자신이 보지 못한다. 7절과 16절에서 맹인은 하나님의 돌봄을 받는 대상이며, 여기서 눈멂은 말씀과 행하심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순종의 비유다. 43:8-10에서도 하나님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이 백성을 이끌어 내어 증인으로 세우신다.&lt;/p&gt;&lt;p&gt;21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의를 따라 교훈을 크게 하고 존귀하게 하기를 기뻐하신다. 개역개정의 “하셨으나”는 원문 22절의 “그런데 그는”에서 이어지는 대조를 앞당겨 드러낸다. 현실의 이스라엘은 약탈당하고 감옥에 갇혀 구할 자도 “되돌려 주라” 말할 자도 없다. 7절에서 종이 갇힌 이를 풀어 줄 바로 그 감옥에 이스라엘이 갇혔다. 23절은 뒤에 올 일에 귀 기울일 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우상들은 장래를 말하지 못했고, 이스라엘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lt;/p&gt;&lt;p&gt;24절은 이스라엘을 약탈자에게 넘기신 분이 여호와라고 밝힌다.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는 원문에서 앞의 여호와를 받는 관계절이며, 개역개정은 이를 독립된 고백으로 옮겼다. 3인칭 서술 가운데 나타난 “우리”는 선지자도 백성의 죄를 고백하는 자리에 세운다. 이어지는 “그들”은 여호와의 길을 따르려 하지 않았고 그의 교훈을 듣지 않았다. 여기서 듣기는 개역개정의 “순종”으로 옮겨진다.&lt;/p&gt;&lt;p&gt;25절에서 자기 영을 종 위에 두신 하나님(1절)은 불순종한 이스라엘 위에 진노와 전쟁을 쏟으신다. 원문은 두 곳에서 같은 “그 위에”를 쓰며, 개역개정은 마지막 절의 대상을 이스라엘로 밝혔다. 백성은 불에 타면서도 깨닫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러나 43:1에서 야곱을 지으신 하나님이 다시 구원을 선포하신다. 42:25에서 몸을 태운 불과 43:2에서 백성을 사르지 못할 불은 같은 동사로 이어진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실 때부터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약속하셨다(창 12:1-3). 이사야 41:8의 이스라엘은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따라서 42장에서 종이 이방과 섬들에 정의와 교훈을 베푸는 일은 선택의 본래 목적을 따른다. 정의를 세우는 종과 불순종한 종 이스라엘의 대조 속에서도 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된다.&lt;/p&gt;&lt;p&gt;출애굽기 19:4-6에서 하나님은 세계가 다 자신의 것이라 선언하시고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셨다. 말씀을 듣고 언약을 지키는 백성은 온 세계 앞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했다. 신명기 4:6-8에서도 이스라엘의 순종은 민족들에게 지혜를 드러내는 증언이다. 이사야 2:2-4의 민족들은 여호와의 산에 올라 그 길을 배우며 시온에서 나오는 율법을 듣는다. 그 “율법”과 42:4의 “교훈”은 같은 토라다. 이스라엘이 듣지 않은 가르침을 종을 통해 열방이 기다리고 배우게 된다.&lt;/p&gt;&lt;p&gt;신명기 4:12, 15-16은 형상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백성에게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한다. 우상을 만들면 흩어져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신들을 섬기게 된다는 경고도 있다(4:25-28). 시편 115:4-8은 우상을 만들고 의지하는 자들이 그와 같아진다고 말한다. 이사야 42장에서도 우상 숭배자들(17절)에 이어 보고 듣지 못하는 이스라엘이 나온다. 그러나 신명기 4:29-31은 흩어진 곳에서 하나님을 찾으면 만나며, 하나님이 조상들과의 언약을 잊지 않으신다고 약속한다. 이사야 42-43장에서도 죄의 고백과 심판 뒤에 구원의 선언이 이어진다.&lt;/p&gt;&lt;p&gt;이사야 6:9-11에서 선지자가 받은 사명은 듣고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백성과 땅의 황폐함을 예고했다. 출애굽의 이적을 겪고도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없다는 신명기 29:4의 고발이 포로기의 심판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사야 29:18과 35:5는 못 듣는 자가 듣고 맹인의 눈이 밝을 날도 약속한다. 42장에서 눈을 여는 종과 맹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신다.&lt;/p&gt;&lt;p&gt;용사로 나가 강과 못을 말리시고 낯선 길로 백성을 이끄시는 하나님은 출애굽의 하나님이다(출 14:13-14; 15:3). 이사야 43:16-19는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시고 애굽의 군대를 심지처럼 끄신 분이 새 일을 행하신다고 선언한다. 바벨론의 감옥에서 백성을 이끌어 내는 구원은 새 출애굽이다. 과거의 구원을 기억하게 하면서도 하나님은 이제 행하실 새 일을 바라보게 하신다.&lt;/p&gt;&lt;p&gt;동방과 북방에서 일으킨 정복자는 44:28-45:1에서 고레스로 밝혀진다. 하나님은 그를 목자와 기름 부음 받은 자로 부르시며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을 다시 세우게 하신다. 42:1의 이름 없는 종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열방에 정의와 교훈을 베푼다. 두 인물을 구별하는 읽기에서 고레스는 귀환의 정치적 길을 열고, 영을 받은 종은 눈을 열고 백성의 불순종을 해결하는 사명을 감당한다. 42:6의 종을 고레스와 연결하는 견해도 있으므로, 두 역할의 구별은 종의 정체를 둘러싼 해석 가운데 하나다.&lt;/p&gt;&lt;p&gt;이사야 11:1-5의 이새의 싹과 61:1의 기름 부음 받은 자도 여호와의 영을 받아 가난하고 마음이 상한 이들을 돌보며 정의와 자유를 가져온다. 42장의 종은 이 왕과 선포자의 사명에 이어진다. 예레미야 31:31-34는 법을 마음에 기록하는 새 언약을, 에스겔 36:26-27은 율례를 행하게 하는 새 마음과 새 영을 약속한다. 하나님의 일을 마음에 두지 않는 백성에게는 이 새 마음이 필요하다. “백성의 언약”으로 세워지고 하나님의 영을 받는 종의 사명은 이 회복을 바라보게 한다.&lt;/p&gt;&lt;p&gt;이사야 49:3의 종은 이스라엘이라 불리면서도 야곱을 일으키고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며 땅 끝에 구원을 베푸는 사명을 받는다(49:5-6). 49:8-9는 그가 백성의 언약이 되어 갇힌 자를 흑암에서 이끌어 낸다고 말한다. 53:5-7에서는 말없이 고난받는 종이 백성의 죄악을 담당한다. 42:24의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는 고백은 53:6의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라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종 이스라엘이 감당해야 할 죄를 한 종이 대신 짊어진다.&lt;/p&gt;&lt;p&gt;시편 96편과 98편도 온 땅에 새 노래를 요청하고, 창조주께서 구원과 공의를 민족들 앞에 드러내시며 세계를 의로 심판하러 오신다고 노래한다. 이사야 42:10-12의 새 노래는 그 찬송을 잇는다. 하나님이 종을 통해 이루시는 새 일에 바다와 광야, 온 민족이 응답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이사야 42장의 종은 이스라엘의 선택을 잇지만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다. 반면 18-25절의 종 이스라엘은 자기 소명을 감당하지 못한다. 마태복음은 42:1-4를 예수께 직접 적용한다. 예수는 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한 종의 사명을 이루시고, 그 백성의 죄까지 짊어지신다.&lt;/p&gt;&lt;p&gt;마태복음 12:9-21에서 예수는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뒤 자신을 죽이려는 의논을 아시고 물러나신다. 그는 따라오는 병자들을 고치며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하신다. 마태는 이를 외치지 않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종의 성취로 인용한다. 이어 예수는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지만 바리새인들은 그 일을 바알세불의 힘으로 돌린다(12:22-24). 눈을 여시는 종과 보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대조가 드러난다.&lt;/p&gt;&lt;p&gt;예수가 세례받으실 때 성령이 그 위에 임하시고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이라 부르셨다(마 3:16-17). 영을 주시고 기뻐하신 종의 소개가 아들의 세례에서 울린다. 변화산에서는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명령이 더해진다(마 17:5). 토라를 듣지 않았던 종 이스라엘과 달리 제자들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시는 아들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마 5:17).&lt;/p&gt;&lt;p&gt;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자신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시며 쉼을 주신다(마 11:28-30). 마태복음 12:20은 그가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돌봄을 심판이 승리할 때까지 이어 가신다고 말한다. 12:21의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는 이사야의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와 표현이 다르다. 열방이 기다리는 가르침은 예수의 이름과 연결된다. 부활하신 예수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자기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신다(마 28:19-20).&lt;/p&gt;&lt;p&gt;시므온은 예수를 이방을 비추는 빛이자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찬양한다(눅 2:29-32). 이사야 42:6과 49:6의 사명이 한 아기에게 모인다. 예수는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하시고(요 8:12), 눈먼 자를 보게 하고 갇힌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일을 자기 사명으로 선언하셨다(눅 4:16-21). 요한복음 9장에서는 맹인으로 난 사람을 고치시며 장애를 그 사람이나 부모의 죄 탓으로 돌리는 생각을 물리치시고(9:2-3), 자신이 본다고 하면서 예수를 거부하는 이들의 죄를 드러내신다(9:39-41). 신체의 눈멂과 말씀을 거부하는 눈멂은 구별된다.&lt;/p&gt;&lt;p&gt;그리스도는 마지막 만찬에서 죄 사함을 위해 흘리는 자기 피를 언약의 피와 새 언약으로 말씀하셨다(마 26:28; 눅 22:20). 종을 “백성의 언약”으로 세우신 약속은 그의 몸과 피로 맺는 언약에 이른다. 이사야 53:5-6처럼 그는 백성의 허물과 죄악을 대신 담당하셨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종이 자신은 상함으로 백성을 살리신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높임 받으신 예수는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셨다(행 2:32-33).&lt;/p&gt;&lt;p&gt;영을 받은 종은 자기 백성에게 영을 주셔서 땅 끝까지 증인이 되게 하신다(행 1:8). 바울과 바나바는 이사야 49:6의 이방의 빛이라는 말씀을 자기 사명으로 받았고(행 13:47), 부활하신 예수는 바울에게 민족들의 눈을 열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게 하는 일을 맡기셨다(행 26:16-18). 교회는 그리스도께 받은 빛을 비추는 증인이다. 그리스도가 모든 민족을 바르게 판단하실 날에 정의는 완성된다(마 25:31-32).&lt;/p&gt;&lt;p&gt;빛을 증언하는 교회도 스스로 부요하다 여기면서 자기 눈멂을 모를 수 있다. 그리스도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그 모습을 책망하고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고 권하신다(계 3:17-18).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라는 고백은 교회에도 필요하다. 교회의 사명과 회복은 자기 힘을 자랑하는 데서 나오지 않고 눈을 여시며 성령을 주시는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종은 상한 갈대를 보전하면서 정의를 확실히 세운다. 교회가 자기 평판을 지키려고 권력 남용이나 폭력, 재정 비리를 덮으면 상한 사람을 다시 짓밟게 된다. 연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일과 잘못을 바로잡는 일은 종의 사명에서 갈라지지 않는다. 가해자는 회개하고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 종의 온유를 내세워 피해자에게 침묵을 요구할 수 없다.&lt;/p&gt;&lt;p&gt;종의 힘은 하나님이 붙드시고 영을 주신 데서 나온다. 교회는 사람의 이름과 규모, 영향력으로 사역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8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겠다고 하신다. 종이 자신을 높이지 않고 연약한 이를 살렸듯, 교회도 자기 영광을 위해 사람을 소모시키는 일을 버려야 한다.&lt;/p&gt;&lt;p&gt;이방에 정의를 베풀고 빛이 되는 사명은 교회가 자기 민족의 유익만을 구할 수 없게 한다. 포로와 약탈의 현실에서 주어진 이 약속은 억압받는 이들의 구원과 회복을 향한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민족과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낮추거나 복음을 강압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모든 민족에게 빛을 비추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바라며 그의 가르침을 따른다.&lt;/p&gt;&lt;p&gt;말씀을 많이 들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귀가 열려 있어도 듣지 않는 종과 같다. 24절의 고백은 실패를 남의 죄로만 돌리는 길을 막는다. 선지자가 “우리가” 범죄했다고 고백했듯 교회도 자기가 지은 죄를 인정하고 돌이켜야 한다. 심판 중에도 깨닫지 못했던 백성에게 43:1은 다시 구속과 소유의 말씀을 들려준다. 회개의 소망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데 있다.&lt;/p&gt;&lt;p&gt;말씀을 거부하는 눈멂의 비유를 실제 시각장애나 청각장애와 도덕적 결함을 연결하는 말로 사용할 수 없다. 예수는 맹인으로 난 사람의 장애를 개인이나 부모의 죄 탓으로 돌리지 않으셨다(요 9:2-3). 이사야 42:7, 16에서도 맹인은 하나님이 눈을 열고 길을 인도하시는 사람이다. 이 본문이 고발하는 것은 신체의 상태가 아니라 보고 듣고도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순종이다.&lt;/p&gt;&lt;p&gt;하나님은 오랫동안 잠잠하셨다가 새 일을 이루시고, 온 땅은 새 노래로 응답한다. 포로의 탄식 속에서 주어진 이 약속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한다. 성공과 재물, 국가와 이념을 구원의 근거로 삼는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을 찬송하는 것이 교회의 응답이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2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2011), Isaiah 42:1, UBS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23/"&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2011), Isaiah 42:3, UBS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24/"&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2011), Isaiah 42:4, UBS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26/"&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2011), Isaiah 42:6, UBS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219/"&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2011), Isaiah 42:19, UBS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21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2011), Isaiah 42:11, UBS TIPs&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43:1-13 너는 내 것이라: 물과 불을 지나는 백성과 하나님의 증인</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3.1-13/</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3.1-13/</guid><description>불에 타고도 깨닫지 못하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그러나 이제” 하시며 다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을 창조하고 지으신 하나님은 그들을 구속하여 이름으로 부르시고, 물과 불 가운데서 함께하시며, 땅 사방에서 아들딸들을 모으신다. 열방이 증인을 내세우지 못하는 법정에서 하나님은 눈먼 백성을 자기 증인으로 세우시고, 자신 외에 구원자가 없다고 선언하신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이사야 43:1-13은 심판의 불길 속에서도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42:24-25)에 이어진다. “지금”으로 옮긴 첫말(וְעַתָּה, 베앗타)은 여기서 “그러나 이제”라는 전환을 이룬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핸드북은 앞의 포로 상황과 뒤의 밝은 미래가 대조된다고 설명한다. 1-7절은 구원을 약속하고, 8-13절은 열방과 이스라엘을 법정에 세운다. 하나님이 지으신 백성이 그분의 증인으로 부름 받는다.&lt;/p&gt;&lt;p&gt;하나님은 야곱을 “창조하신” 분이며 이스라엘을 “지으신” 분이다(1절). 두 동사는 창세기 1-2장의 창조에 쓰였고,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한 백성으로 세우신 일을 가리킨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같은 백성이다. 그들의 기원과 미래가 자신들을 지으신 하나님께 달렸다.&lt;/p&gt;&lt;p&gt;“두려워하지 말라”의 근거는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גְאַלְתִּיךָ, 게알티카)라는 선언이다. 구속은 가난해진 친족의 땅이나 몸을 되찾는 의무에 쓰인 말이다. UBS 해설은 출애굽기 15:13의 구속을 바벨론에서 돌아올 새 구원과 연결한다. 귀환 이전의 백성에게 완료형으로 주어진 선언은 이미 행하신 출애굽을 기억하게 하며 앞날의 구원도 확신하게 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신다. 이름을 부르는 친밀한 관계는 탈취당한 야곱도 여전히 하나님께 속했음을 밝힌다.&lt;/p&gt;&lt;p&gt;2절은 물과 강, 불과 불꽃으로 위험을 그린다. “지날 때에”의 접속사는 “할 때마다”나 “만일”로도 이해할 수 있다고 UBS는 설명한다. 약속은 위험 가운데 “내가 너와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출애굽기 3:12의 임재 약속과 홍해를 건넌 구원을 떠올리게 한다.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의 히브리어 주어는 강들이며, 같은 “휩쓸다” 동사가 이사야 8:8에서는 앗수르 군대의 침공을 묘사한다.&lt;/p&gt;&lt;p&gt;불 가운데서 타지 않는다는 약속도 위험 속의 보존을 말한다. UBS는 다니엘의 친구들이 풀무불에서 보호받은 사건과 비교하고, “지나다”와 “사르다” 사이의 자음 순서가 바뀌는 소리 놀이를 짚는다.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의 동사(תִבְעַר, 티브아르)는 42:25에서 이스라엘을 태운 진노의 불에도 쓰였다. 심판받은 백성에게 이제 같은 동사를 부정하여 보존을 약속한다.&lt;/p&gt;&lt;p&gt;“네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네 구원자”라는 칭호가 약속을 뒷받침한다(3절). UBS는 “대저”를 이유보다 “참으로”라는 강조로 읽을 가능성을 제시하며, 구원자가 이사야서에서 하나님 칭호로 처음 나오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백성이 업신여겼던 거룩하신 분(1:4)이 그들의 구속자이시다(41:14).&lt;/p&gt;&lt;p&gt;애굽은 “너의 속량물”(כָפְרְךָ, 코프레카), 구스와 스바는 “너를 대신하여” 내어 주신 나라들이다(3절). UBS는 포로의 귀환을 위해 애굽을 고레스에게 주시는 그림으로 읽되, 실제 애굽 정복자는 그의 아들 캄비세스였다고 밝힌다. “스바”(וּסְבָא, 우세바)의 철자는 열왕기상 10:1의 שְׁבָא(쉐바)와 다르다. UBS는 아라비아 남부나 홍해 연안 아프리카 북동부로 추정하며 두 지명이 같은 나라일 가능성도 소개한다. 구스는 애굽 남쪽 나일 강 상류의 나라였다. 본문은 제국의 판도가 바뀌는 역사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해방하신다고 선언한다.&lt;/p&gt;&lt;p&gt;그 대가를 내어 주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사랑받기 때문이다(4절). “존귀”의 말에는 무겁게, 곧 귀중하게 여기신다는 뜻이 있다. “네 대신 사람들”의 “사람들”은 인류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낱말이다. UBS는 Revised English Bible의 본문 수정에 이를 지지할 증거가 없다며 마소라 본문을 유지하도록 권한다. 이 사랑을 다른 민족의 생명이 하찮다는 뜻으로 확대할 수 없다. 42:6의 종은 이방의 빛이며, 45:14의 애굽과 구스와 스바도 마침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고백한다.&lt;/p&gt;&lt;p&gt;5-6절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라는 약속이 반복되고, 동서남북의 흩어진 백성을 모으신다. 하나님은 북쪽과 남쪽을 사람처럼 불러 “내놓으라”, “가두어 두지 말라”고 명하신다. 먼 곳과 땅 끝에서 돌아오는 이들은 “내 아들들”과 “내 딸들”이다. 7절의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는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밝힌다. “창조”, “짓다”, 이름을 부르는 말은 1절을 되받아 단락을 감싼다. 그들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lt;/p&gt;&lt;p&gt;8절에서 하나님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הוֹצִיא, 호치)고 명하신다. 이 형태는 완료형이나 부정사와도 같지만 Brown-Driver-Briggs는 여기서 히필 명령형으로 분류한다. UBS는 명령받는 대상은 불분명하나 이끌려 나오는 백성은 불순종한 이스라엘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신체 장애를 죄로 규정하는 말이 아니다. 42:7에서 갇힌 자를 이끌어 내야 할 종이 42:19와 여기서는 자신부터 보지 못하는 백성으로 드러난다.&lt;/p&gt;&lt;p&gt;9절의 열방은 이미 법정에 모인 상태다. 그 신들 중 누가 지금의 일을 미리 알렸으며 이전 일을 설명할 수 있는가. UBS는 “이 일”을 고레스의 승리 등을 포함한 현재 사건으로 읽는다. 신들은 증인을 세워 자신이 옳음을 입증해야 하고, 청중은 듣고 참되다고 말해야 한다. 이는 우상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알리라 요구한 41:21-26의 재판을 잇는다.&lt;/p&gt;&lt;p&gt;열방에게 증인을 요구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나의 증인”, “내가 택한 나의 종”이라고 하신다(10절). 눈먼 종을 버리지 않고 증인으로 세우시며, 자신을 알고 믿고 깨닫게 하신다. “내가 그인 줄”(כִּי־אֲנִי הוּא, 키-아니 후)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임을 밝힌다. UBS는 “나의 전”과 “나의 후”를 시간보다 “나 외에”라는 배타적 뜻으로 읽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지으셨지만, 하나님 곁에 지음을 받은 신은 없다. 이는 44장의 사람이 만들어 내는 우상에 대한 조롱으로 이어진다.&lt;/p&gt;&lt;p&gt;“나 곧 나는”이라는 강조 뒤에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가 따른다(11절). UBS는 여호와만이 포로를 건지실 수 있다는 선언으로 읽는다. 고레스는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이지 구원의 주인이 아니다(45:1-4). 12절의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는 예고, 구원, 다시 알림의 순서다. “보였고”의 원뜻은 “들려주었다”로, 9절에서 우상에게 요구한 동사와 같다. “다른 신”이 이 구원을 행하거나 예고한 적은 없다. UBS는 문자적으로 “낯선 자”인 말을 문맥상 이방 신으로 읽는다.&lt;/p&gt;&lt;p&gt;13절의 “태초로부터”에 해당하는 말(מִיּוֹם, 미욤)은 문자적으로 “날부터” 또는 “오늘부터”이다. UBS는 칠십인역의 “처음부터”와 이를 따른 “영원부터” 번역을 소개하면서, 사해사본이 지지하는 마소라 본문을 권한다. “이날부터도 나는 그다”로 읽으면 앞으로의 역사에서도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강조한다. 이어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가 나온다. 마지막 동사(יְשִׁיבֶנָּה, 예시벤나)는 “그것을 되돌리다”라는 뜻이다. 42:22에서는 이스라엘을 건지거나 되돌려 달라고 할 자가 없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하나님의 손에서 빼내거나 그분의 구원을 되돌리지 못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이스라엘을 창조하고 지으신 하나님(43:1, 7)은 사람을 창조하고 흙으로 빚으신 창세기 1:27과 2:7의 하나님이시다. 이사야 44:2, 24는 모태에서부터 이스라엘을 지으신 분이 만물을 지으셨다고 밝힌다. 포로 된 백성을 다시 세우실 능력은 제국의 힘보다 먼저 계신 창조주께 있다.&lt;/p&gt;&lt;p&gt;레위기 25:25, 47-49의 가까운 친족은 가난으로 팔린 땅과 몸을 무른다. 룻기에서 보아스가 그 책임을 맡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때 그들의 처지를 자기 일로 맡으신다. 출애굽기 6:6의 속량 약속과 15:13의 찬송은 이사야 43:1의 구속을 뒷받침한다. 생명의 속전이 재앙이나 죽음을 대신하는 출애굽기 30:12와 21:30, 사람이 마련할 수 없는 생명의 값을 말하는 시편 49:7-8도 43:3의 몸값을 이해할 배경이다. 스스로 빠져나올 힘이 없는 포로를 위해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신다.&lt;/p&gt;&lt;p&gt;출애굽기 4:22-23에서 하나님은 바로에게 자기 장자를 내보내라고 명하셨다. 호세아 11:1도 애굽에서 부르신 아들을 기억한다. 이사야 43:5-6에서는 같은 해방 명령이 동서남북을 향하고, 아들들과 딸들이 땅 끝에서 돌아온다. 출애굽기 3:12의 임재 약속과 14:21-22의 바다 통과도 43:2에 되울린다. 다니엘 3:24-27과 시편 66:12처럼 백성은 불과 물 가운데서 보존된다. 이사야 48:10은 포로의 시련 자체를 고난의 풀무로 부른다.&lt;/p&gt;&lt;p&gt;선택은 이스라엘의 우월함에서 나오지 않았다. 출애굽기 19:4-6의 자기 소유인 백성과 신명기 7:6-8의 사랑과 맹세가 “너는 내 것”,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이라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신명기 28:64의 흩어짐과 30:1-4의 모으심도 귀환의 배경이다. 다만 이사야 43장은 먼저 회개를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22-24절에서 죄를 고발하신 뒤 25절에서는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허물을 도말하신다고 하신다.&lt;/p&gt;&lt;p&gt;선택받은 이스라엘의 구원은 열방을 향한다. 창세기 12:3의 모든 족속의 복, 이사야 19:24-25의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의 복, 45:14의 애굽과 구스와 스바의 고백, 49:6의 땅 끝까지 이르는 빛이 그 목적을 밝힌다. 43:3-4에서 몸값으로 언급된 나라들에 대해서도 이사야서는 하나님께 나아올 미래를 선포한다.&lt;/p&gt;&lt;p&gt;이사야 6:9-10과 42:18-20에서 백성은 보고도 깨닫지 못한다. 출애굽을 경험했으나 깨닫는 마음이 없다는 신명기 29:4의 진단과도 같다. 그러나 이사야 35:5와 42:7은 눈과 귀가 열릴 회복을 약속한다. 43장의 눈먼 증인은 그 회복을 기다리는 백성이다. 49:5-6에서 종은 야곱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열방을 비추며, 53:10에서는 자기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린다.&lt;/p&gt;&lt;p&gt;신명기 4:32-35는 출애굽을 통해 여호와 외에 신이 없음을 알게 하셨다고 말한다. 이사야 43:10-12에서도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이 증언의 근거다. 44:8과 45:21의 법정도 구원을 미리 알리고 이루시는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임을 선언한다. “내가 그”라는 자기 선언과 아무도 그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말은 신명기 32:39와 맞닿으며, 이사야 41:4와 44:6의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그 백성의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증언하는 데 있다(43:7, 21).&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눈먼 백성이 감당하지 못한 종의 사명을 예수께서 이루신다. 마태복음 12:17-21은 이사야 42:1-4를 인용해 예수의 사역을 설명한다. 누가복음 4:18에서 예수는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는 일을 선포하신다. 요한복음 9장의 치유받은 사람은 자신이 전에는 맹인이었으나 이제 본다는 사실을 증언한다(9:25).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경험한 증인이라는 이사야 43장의 주제와 통한다.&lt;/p&gt;&lt;p&gt;이름을 불러 자기 것으로 삼으신 하나님(43:1)은 요한복음의 선한 목자에게서 드러난다. 예수는 양들의 이름을 불러 인도하시며(요 10:3), 무덤 앞의 마리아도 이름을 부르실 때 그분을 알아본다(20:16). 예수는 제자들이 아버지께 속했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셨으며 아버지와 아들의 소유가 하나라고 기도하신다(17:6, 10).&lt;/p&gt;&lt;p&gt;물 가운데 함께하신다는 약속은 임마누엘의 탄생과 부활하신 예수의 동행 약속에 이어진다(마 1:23; 28:20). 마가복음 6:45-52에서 예수는 바다 위로 제자들에게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베드로전서 1:5-7과 4:12-13은 시련 중의 보존을 약속하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길도 말한다. 죽음을 통해 종 된 자들을 놓아주신 예수(히 2:14-15)가 두려움 속의 백성을 붙드신다.&lt;/p&gt;&lt;p&gt;이사야 43:3-4의 몸값과 마가복음 10:45의 대속물은 사로잡힌 자를 값을 치러 풀어 주는 구원의 주제로 이어진다. 이사야에서는 나라들이 내어지지만 예수는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다. 하나님은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주셨으며(롬 8:32), 성도는 은금이 아닌 그리스도의 피로 대속받았다(벧전 1:18-19). 요한계시록 5:9에서는 각 족속과 나라의 사람들이 어린 양의 피로 구속받는다. 열방도 구원의 대가로만 머무르지 않고 그 구원에 참여한다.&lt;/p&gt;&lt;p&gt;“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43:13)는 요한복음 10:27-30의 확신과 연결된다. 예수는 양들을 자기 손에서도 아버지 손에서도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시며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밝히신다. 듣던 이들은 이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하시는 주장으로 받아들였다(10:31-33). 백성을 붙드시는 그 손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목자의 손이며, 부활 후에도 못 자국이 남아 있다(20:25, 27).&lt;/p&gt;&lt;p&gt;하나님을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신다는 이사야 43:10은 요한복음 8:24, 28의 예수 말씀에서 되울린다. 예수는 인자가 들린 뒤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되리라고 하신다. 13:19에서는 배반을 미리 말씀하여 일이 일어날 때 믿게 하신다. 장차 올 일을 알리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예수의 고난과 부활에서 드러난다.&lt;/p&gt;&lt;p&gt;부활하신 예수는 눈이 가려졌던 제자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성경을 깨닫게 하신 뒤 증인으로 세우신다(눅 24:16, 31, 45-48). 이들은 성령을 받아 땅 끝까지 증언한다(행 1:8). 이사야 43장의 눈먼 증인과 땅 끝의 모으심이 그 사명을 이해할 배경이다. 사도행전 4:10-12은 예수의 이름 외에 구원이 없다고 선언한다. 이사야 43:11의 유일한 구원을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이루셨다는 증언이다. 빌립보서 2:10-11도 이사야 45:23을 사용하여 예수께 무릎 꿇는 예배가 아버지의 영광에 이르게 한다.&lt;/p&gt;&lt;p&gt;흩어진 아들들과 딸들을 모으는 약속은 예수께서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려고 죽으신 일과 통한다(요 11:51-52). 동서에서 사람들이 와서 족장들과 잔치에 앉으며(마 8:11), 고린도후서 6:18의 “자녀”는 “아들들과 딸들”을 함께 가리킨다. 만물을 지으신 그리스도(요 1:3; 골 1:16)는 자신을 내어 주어 백성을 되찾으셨다. 값으로 산 성도는 자신의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 속한다(고전 6:19-20).&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너는 내 것이라”는 선언은 증인의 사명보다 먼저 주어진다. 그리스도인도 성과를 내어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구속받아 그분께 속한 사람으로 사명을 감당한다. 두려움을 이기는 근거도 형편이나 자기 가치의 증명이 아닌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이다.&lt;/p&gt;&lt;p&gt;물과 불 가운데 함께하신다는 약속은 고난을 면하거나 곧 회복된다는 보장이 아니다. 본문은 포로 된 백성을 끝까지 보존하여 자기 뜻을 이루실 하나님을 증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도 환난이나 박해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성도를 끊지 못한다(롬 8:35-39). 고난이 지속된다는 이유로 버림받았다고 판단하거나, 고난받는 이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책망할 근거가 없다.&lt;/p&gt;&lt;p&gt;이스라엘을 보배롭게 사랑하신 하나님은 그 백성을 열방의 빛으로 부르셨다. 선택받았다는 확신으로 다른 민족을 멸시하면 그 선택의 목적을 거스른다.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자기 백성을 살리지 않고 자신을 내어 주셨다. 유일한 구원자를 고백하는 증인도 이웃을 강압하거나 자신의 성공을 과장하지 않고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말해야 한다.&lt;/p&gt;&lt;p&gt;눈먼 백성을 증인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먼저 알고 믿고 깨닫게 하신다. 증언의 내용은 교회가 얼마나 완전했는지가 아닌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이다. 그러므로 잘못을 숨기거나 피해를 외면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은 자기 죄를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자기 손에서 아무도 빼앗지 못하게 하시는 구원자를 신뢰하며, 자신이 구원을 주관하는 듯 행동하지 않는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31/"&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3:1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32/"&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3:2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33/"&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3:3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34/"&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3:4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37/"&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3:7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38/"&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3:8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39/"&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3:9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310/"&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3:10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311/"&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3:11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312/"&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3:12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313/"&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43:13 (TIPs)&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biblehub.com/hebrew/3318.htm"&gt;Brown-Driver-Briggs, Hiphil 형태 및 이사야 43:8 용례 (Bible Hub 재현)&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44:1-20 너를 지으신 여호와와 사람이 깎은 신상</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4.1-20/</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4.1-20/</guid><description>이사야 44:1-20을 절마다 따라 읽으며 이스라엘을 지으시고 영을 부으시는 여호와와 사람이 나무로 깎은 신상의 대조, 처음과 마지막이신 예수와 성령의 약속을 해설한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1-8절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9-20절은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의 작업과 경배를 묘사한다. BHS는 5절 뒤에 열린 단락 표시를, 20절 뒤에 닫힌 단락 표시를 두어 1-5절과 6-20절을 구분한다. 이어지는 21-23절은 두 부분을 구속과 찬양으로 묶는다. 43:22-28의 책망과 심판 뒤에 나오는 “이제”는 이스라엘의 실패 뒤에도 새 말씀을 주시는 여호와의 부르심이다. 그는 여전히 야곱을 “나의 종”, 이스라엘을 “내가 택한” 백성이라 부르신다.&lt;/p&gt;&lt;p&gt;2절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모태에서부터 지으셨고 앞으로 도우실 분이다. ‘짓다’는 토기장이가 그릇을 빚을 때 쓰는 말로, 9-12절에서 사람이 우상을 만드는 행위와 21절에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지으신 행위에 반복된다. 백성을 지으신 하나님과 신을 지으려는 인간이 대조된다. “여수룬”은 신명기 32:15, 33:5, 26과 이곳에만 나오는 이스라엘의 이름이다. 여호와는 그 백성을 한 사람처럼 부르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lt;/p&gt;&lt;p&gt;3절에서 여호와는 마른 땅에 물을 붓듯 자손에게 영과 복을 부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개역개정은 같은 ‘붓다’ 동사를 “물을 주며”와 “나의 영을 … 부어 주리니”로 나누어 옮겼다. “목마른 자”(צָמֵא, 차메)는 다음 행의 “마른 땅”과 병행하므로 메마른 땅으로 읽을 수도 있다. NET은 그 뜻을 택하고 둘째 행에는 ‘흐르게 한다’는 말을 보충한다. 물과 시내, 영과 복, 자손과 후손이 서로 병행한다. 41:17-18과 43:19-20의 광야 물 약속이 여기서는 다음 세대에게 부어지는 생명으로 펼쳐진다. 황폐한 성읍들을 회복하실 하나님은 백성도 새롭게 하신다.&lt;/p&gt;&lt;p&gt;4절의 자손들은 시냇가의 버들처럼 자란다. 40:6-8에서 하나님의 기운 앞에 마르는 풀은 인간의 연약함을 나타냈지만, 여기서는 영을 부으시는 은혜로 새 생명이 돋는다. 시편 137:2에서 포로들이 노래를 멈추고 수금을 걸었던 바벨론 강가의 버들과 달리, 이 버들은 생명과 성장을 가리킨다.&lt;/p&gt;&lt;p&gt;5절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여호와께 속하였다고 고백하고 야곱과 이스라엘의 이름을 취한다. 개역개정의 “그의 손으로 기록하고”(יִכְתֹּב יָדוֹ, 이크토브 야도)에 대해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해설은 대부분의 역본처럼 손에 ‘여호와의 것’이라고 쓰는 읽기를 선호한다.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라”의 동사(יְכַנֶּה, 예칸네)는 기존 이름에 새 이름을 더한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그러면 둘째 행의 야곱 이름과 넷째 행의 이스라엘 이름이 병행한다. 해설은 ‘한 사람은’의 반복을 여러 사람의 다양한 응답으로 읽고, 회복된 이스라엘에 합류하려는 이방인일 가능성을 더 높게 본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관계를 다시 고백하는 읽기도 가능하다. 43:28에서 비방거리가 되었던 이름을 이제 사람들이 기꺼이 자기 이름으로 삼는다.&lt;/p&gt;&lt;p&gt;6절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왕이요 구원자,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구원자”는 친족이 잃은 땅과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속자’라는 뜻이며, 레위기 25장과 룻기의 무르는 일에 배경을 둔다. 같은 말이 22-23절의 구속 선언으로 이어진다. 처음과 마지막이신 여호와는 역사의 시작과 끝을 주장하시고, 그 외에 다른 신은 없다. 7절에서는 다른 신들에게 역사를 미리 알리고 이룬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신다. “영원한 백성을 세운 이후로”는 먼 옛날 백성을 세우신 때부터로도 이해된다. 이는 41:21-23과 43:9의 재판을 잇는 도전이다.&lt;/p&gt;&lt;p&gt;8절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말씀하고 이루신 일의 증인으로 불린다. 원문은 한 백성을 가리키는 ‘너’와 구성원들을 가리키는 ‘너희’를 번갈아 쓰지만 개역개정은 ‘너희’로 통일한다. 여호와는 다른 반석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신명기 32장에서 자신을 가리킨 ‘반석’의 이름을 다른 신이 가질 수 없다는 선언이다. 9절에서는 우상의 증인들이 보지도 알지도 못하여 수치를 당한다. 그들을 가리키는 대명사(הֵמָּה, 헴마) 위에는 BHS의 특별한 점들이 있다. 본문은 그 증인들이 내놓을 지식이 없음을 드러낸다.&lt;/p&gt;&lt;p&gt;9-11절의 우상 제작자들은 허망하고 그들이 아끼는 형상은 무익하다. “허망하도다”는 창세기 1:2의 ‘혼돈’에도 쓰인 말이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신을 만드는 일은 창조의 질서를 거꾸로 돌린다. 장인과 동료들이 법정처럼 모여 서지만, 그들은 사람이라는 한계 안에 있다. 여호와가 자기 백성에게 갖지 말라고 하신 두려움을 오히려 우상 제작자들이 겪는다.&lt;/p&gt;&lt;p&gt;12절의 철공은 힘센 팔로 망치를 두드리지만 배고프고 물을 마시지 못하면 지친다. 3절에서 물과 영을 부으시는 여호와와 달리 그는 자기 갈증도 이기지 못한다. 피곤하지 않으시며 지친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는 창조주(40:28-31)와 대조되는 모습이다. 13절의 목공은 줄과 표시 도구, 깎는 연장과 곡선자로 정교하게 신상을 만든다. 고대 연장의 정확한 모양에는 불확실성이 있지만, 사람이 자기 아름다움을 따라 만들고 정해 준 집에 신을 두는 모순은 선명하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신 창세기 1:26-27의 순서가 뒤집혔고, 호렙에서 형상을 보지 못했으므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신명기 4:15-18의 경고가 무시되었다.&lt;/p&gt;&lt;p&gt;14절은 신상의 재료인 나무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향목·디르사나무·상수리나무가 나오지만 디르사나무의 정확한 수종은 분명하지 않다. 사람이 심어도 나무를 자라게 하는 것은 비다. 개역개정의 “비를 맞고 자라게도 하느니라”에 해당하는 구절(וְגֶשֶׁם יְגַדֵּל, 베게셈 예갓델)은 비가 주어다. 신상의 재료조차 사람의 힘으로만 생겨나지 않는다. 15-17절에서는 한 나무의 절반으로 몸을 덥히고 음식을 만들며, 나머지로 신을 만들어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고 빈다. 불은 실제로 몸을 덥히지만 같은 나무로 만든 신은 구원하지 못한다. 사람이 만든 것을 ‘나의 신’이라 부르는 고백은 여호와께서 지으신 이스라엘을 ‘내 종’이라 부르시는 21절과 대조된다.&lt;/p&gt;&lt;p&gt;18절의 눈과 마음은 무엇을 덧발라 막은 듯 닫혀 있다. 개역개정은 한 동사(טַח, 타흐)를 눈에는 “가려서”, 마음에는 “어두워져서”로 나누어 옮겼다. 그 동사의 주어는 밝혀져 있지 않다. 9절의 우상 증인들처럼 숭배자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이사야 6:9-10과 43:8의 둔한 백성이 떠오른다. 19절은 그가 마땅히 했어야 할 생각을 적는다. 나무 절반으로 떡과 고기를 구워 먹었는데 남은 토막 앞에 어찌 엎드리겠는가. 히브리어에는 의문사가 없으나 개역개정은 “내가 어찌”를 보충하여 그 모순을 물음으로 드러냈다.&lt;/p&gt;&lt;p&gt;20절의 그는 “재를 먹는다”(רֹעֶה אֵפֶר, 로에 에페르). NET은 ‘잿더미 위에서 먹는다’는 가능성도 소개한다. 풀을 뜯거나 먹인다는 이 말은 28절에서 고레스를 ‘내 목자’로 부르는 말과 연결된다. 여호와의 목자는 그분의 뜻을 이루지만 우상 숭배자는 재로 생명을 얻으려 한다. 그를 미혹하는 것은 속은 자기 마음이며, 자기 생명을 구원하지 못한다. 여기서 개역개정의 ‘영혼’은 목숨과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그는 오른손의 것이 거짓임을 묻지도 못한다. 손에 여호와께 속함을 쓰는 5절, 여호와가 백성의 오른손을 붙드시는 41:10, 13과 대조된다.&lt;/p&gt;&lt;p&gt;21-23절에서 여호와는 “내가 너를 지었으니”라며 종을 기억하시고, 허물을 구름같이 없이하셨으니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구속과 용서의 선언이 돌아오라는 명령보다 앞선다. 신상의 재료로 베이던 숲과 나무들까지 이제 구속하신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장인이 신상에 새긴 ‘사람의 아름다움’과 같은 어근으로, 여호와는 이스라엘 가운데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라 하신다. 사람이 만든 형상이 집에 앉아 있는 동안 여호와는 백성을 구속하여 영광을 드러내신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출애굽기 20:2-6은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를 먼저 밝히고, 다른 신과 새긴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명한다. 이사야 44장도 지으시고 도우시며 영을 부으시는 여호와를 먼저 소개한 뒤 우상의 무익함을 폭로한다. 우상 금지는 구원받은 백성의 응답이다. 자손에게 이르는 복 역시 언약의 은혜를 잇는다. 포로가 된 백성에게 여호와는 그들의 실패를 아시면서도 택하신 관계를 다시 선언하신다.&lt;/p&gt;&lt;p&gt;신명기 32:15의 여수룬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구원의 반석을 업신여겼다. 18절은 자기를 낳으신 반석을 잊었다고 책망하고, 37-39절은 그들이 피한 신과 반석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며 여호와 외에는 신이 없다고 선언한다. 이사야 44장의 여수룬, 창조자, 반석, 도움, 유일하신 하나님은 그 배반의 노래를 되받는다. 심판을 겪은 여수룬을 하나님이 다시 부르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lt;/p&gt;&lt;p&gt;시편 115:4-8은 사람이 만든 우상이 말하지도 보지도 못하며 제작자와 의지하는 사람도 그와 같아진다고 말한다. 이사야 44:18의 가려진 눈과 마음이 그 진단을 구체화한다. 시편 115:9-14은 이스라엘에게 도움과 방패이신 여호와를 의지하라 하며 자손의 복을 빈다. 예레미야 10:1-16 역시 나무를 다듬고 꾸며 고정한 우상은 걷지도 복을 주지도 못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살아 계신 왕, 만물의 조성자이신 여호와와 사람이 만든 거짓 신이 대조된다.&lt;/p&gt;&lt;p&gt;이사야 40-48장은 이 논증을 거듭 펼친다. 40:18-20과 41:6-7의 우상은 장인들이 흔들리지 않게 붙들어 주어야 한다. 41:21-29와 43:8-13에서는 우상들에게 미래를 밝힐 증거를 요구하고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증인으로 세운다. 45:20의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기도는 44:17의 간청과 같다. 46:1-7의 벨과 느보는 짐승이나 사람이 메어야 하지만, 여호와는 모태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업고 구원하신다.&lt;/p&gt;&lt;p&gt;영을 부으시는 약속은 민수기 11:29에서 모든 백성이 영을 받기 바란 모세의 소망과 이어진다. 이사야 32:15는 영이 부어지면 광야가 밭이 된다고 하며, 에스겔 36:25-27은 물과 새 영으로 백성을 우상에서 정결하게 하여 순종하게 하신다고 약속한다. 요엘 2:28-29은 아들과 딸, 노인과 젊은이, 남종과 여종에게까지 영이 부어질 것을 말한다. 이사야 44:3-5에서는 그 생명이 다음 세대에 이르고 여호와께 속했다는 고백으로 나타난다.&lt;/p&gt;&lt;p&gt;창세기 1:26-27과 2:7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신다. 신명기 4:15-19은 아무 형상도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사람이나 동물의 모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한다. 시편 106:19-20은 금송아지 사건을 하나님의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꾼 일로 고발한다. 이사야의 목공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다는 창조의 관계를 뒤집어, 사람의 아름다움으로 신을 만든다.&lt;/p&gt;&lt;p&gt;5절의 응답을 이방인의 참여로 읽으면,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신 창세기 12:3의 약속과 연결된다. 이사야 45:14, 22-23은 열방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고백하고 그분께 돌아와 구원받을 것을 말한다. 56:3-7은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도 기도하는 집에서 기뻐하게 하며, 시편 87편은 여러 민족의 사람을 시온에서 난 이로 센다. 44:5의 출신은 명시되지 않았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재헌신이라는 읽기도 보존된다.&lt;/p&gt;&lt;p&gt;호세아 14:1-8에서도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구원과 손으로 만든 신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는다. 여호와는 반역을 고치시고 이슬처럼 생명을 주셔서 백성을 꽃과 나무처럼 자라게 하신다. 이사야 44:21-22의 용서와 귀환, 4절의 버들과 같은 성장이다. 우상을 버린 백성의 회복은 그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이사야 44장의 약속은 고레스를 통한 성읍과 성전의 회복을 기다리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26-28절). 그러나 증인으로 부름받은 그 종도 눈이 있어 보지 못한다(42:19; 43:8). 이사야 42:1과 49:3-6의 종은 영을 받고 정의를 베풀며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이방의 빛이 된다. 53:10-11에서는 자기 생명을 속건제물로 드려 많은 이들의 죄를 담당하고 씨를 본다. 신약은 이 종을 예수로 밝힌다. 택한 종, 영, 자손의 약속이 그분의 사역에서 성취된다.&lt;/p&gt;&lt;p&gt;마태복음 12:17-21은 예수의 사역을 영을 받은 종에 관한 이사야 42:1-4의 성취로 인용한다. 요한복음 7:37-39에서는 예수께서 목마른 자를 자기에게 부르시고 생수의 강을 약속하신다. 요한은 이를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 믿는 이들이 받을 성령으로 설명한다. 인용한 구절이 특정되지는 않지만, 물과 영을 연결한 이사야 44:3은 그 약속의 중요한 배경이다. 마른 땅에 물과 영을 부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께 나아오는 이들에게 주어진다.&lt;/p&gt;&lt;p&gt;사도행전 2:33, 39에서 높임받은 예수는 아버지께 받은 성령을 부으시고 그 약속을 자녀와 먼 데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하신다. 오른손에 거짓을 쥐고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 우상 숭배자와 달리,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높임받은 예수는 생명을 주신다. 갈라디아서 3:13-14은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담당하여 우리를 속량하신 목적을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이르고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데 둔다. 이사야 44:3에서 병행한 영과 복이 그리스도의 속량 안에서 주어진다.&lt;/p&gt;&lt;p&gt;요한계시록 1:17-18에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인자는 요한에게 오른손을 얹고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하신다. 이사야 44:2, 6, 8의 부르심과 호칭이다. 계시록 2:8과 22:13도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과 마지막이라 부른다. 그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다. 이사야에서 사람이 만든 신은 손을 내밀어 구원할 수 없었지만, 살아 계신 주께서는 엎드린 요한을 붙드신다.&lt;/p&gt;&lt;p&gt;예수는 성령을 받은 제자들을 땅끝까지 자기 증인으로 보내신다(행 1:8). 영의 부으심과 증인의 부르심이 이어지는 이사야 44:3, 8과 연결된다. 우상의 증인들은 보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사도들은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신 일의 증인이다(행 2:32). 예수께서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미리 말씀하고 이루신 일은 역사를 미리 밝히고 이루는 신이 누구냐는 이사야의 질문에 응답한다.&lt;/p&gt;&lt;p&gt;목공은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신을 만들지만, 신약의 말씀은 친히 육신이 되어 사람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며(골 1:15; 고후 4:4), 하나님은 그분의 얼굴에 있는 영광을 아는 빛을 어두운 마음에 비추신다(고후 4:6). 로마서 1:21-25의 어두워진 마음, 피조물의 형상, 진리를 바꾼 거짓은 이사야의 우상 숭배 진단과 겹친다. 그 진단 뒤에 로마서는 그리스도 안의 속량으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길을 밝힌다(3:24).&lt;/p&gt;&lt;p&gt;데살로니가전서 1:9-10의 신자들은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장래의 진노에서 구원하실 예수를 기다린다. 사도행전 17:24-31에서 바울도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하나님을 사람의 손과 고안에 의존하는 형상과 구별하고, 부활하신 예수를 통한 심판을 선포한다. 요한일서 5:20-21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신 분을 안다는 고백에 우상을 멀리하라는 권면을 잇는다.&lt;/p&gt;&lt;p&gt;이사야 44:5의 소속 고백과 신약의 성령 인치심(고후 1:22; 엡 1:13)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14:1과 22:4의 백성도 어린 양과 아버지의 이름을 지닌다. 이는 직접 인용보다는 공유하는 소속의 그림이다. 빌립보서 2:10-11은 이사야 45:23을 받아 모든 무릎이 예수 앞에 꿇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리라 말한다. 그리스도는 자기 생명으로 구속을 이루어 우상에서 돌아오게 하신다. 재를 먹던 사람에게 생명의 떡이신 예수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생명을 주신다(요 6:35).&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본문의 사람은 나무로 생활에 필요한 불을 피우다가 같은 나무에게 구원을 청한다. 피조물을 사용하는 일이 숭배로 바뀌는 지점이다. 돈과 성과, 국가의 힘이나 기술도 실제 필요를 채울 수 있지만 생명을 구원할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자기가 만든 것에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을 지켜 줄 능력이 있는지조차 묻지 못한다. 우상 비판은 이방인을 비웃기 전에 하나님 백성이 자기 손으로 이룬 성과와 명성 앞에 무릎 꿇는지 묻게 한다.&lt;/p&gt;&lt;p&gt;두려워하지 않을 근거는 처음과 마지막이신 하나님께서 백성을 지으시고 구속하셨다는 사실이다. 포로의 땅에서도 그 관계는 지속되었다. 피곤한 철공이 만든 신과 달리 여호와는 지친 백성을 도우신다. 인간의 한계와 피로를 인정하고 그분께 생명을 의탁하는 것은 성과로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려는 신앙을 거두는 일이다.&lt;/p&gt;&lt;p&gt;여호와께 속했다는 고백은 영과 복을 먼저 부어 주신 은혜의 응답이다.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다른 이들도 그 이름을 취한다는 전망은 하나님 백성이 자기 혈통과 성취를 자랑할 근거를 없앤다. 교회는 성령을 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증언하며, 그 은혜로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을 같은 백성으로 받아들인다.&lt;/p&gt;&lt;p&gt;우상에서 돌아오는 길은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라는 부르심에서 열린다. 오른손의 거짓을 인정하는 회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향한다. 신상의 재료로 쓰였던 숲의 나무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피조물을 구원자로 높이거나 자기 뜻에 종속시키던 사람도 창조주를 예배하는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온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Isa&amp;amp;chapter=44&amp;amp;verse=3"&gt;NET Bible, 이사야 44:3 번역 노트&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45/"&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4:5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Isa&amp;amp;chapter=44&amp;amp;verse=20"&gt;NET Bible, 이사야 44:20 번역 노트&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44:21-45:7 너를 잊지 않는 구속자, 고레스를 부르신 유일한 주</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4.21-45.7/</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4.21-45.7/</guid><description>허물을 지우시고 돌아오라 부르시는 하나님, 이방 왕 고레스를 목자와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세우신 뜻, 빛과 어둠과 평안과 환난을 모두 다스리시는 여호와의 주권을 이사야 44:21-45:7의 흐름을 따라 읽는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이 일을 기억하라”(זְכָר־אֵלֶּה, 제코르 엘레)는 명령은 우상을 만드는 장면(44:9-20) 다음에 나온다. 포로지의 백성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되새기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 UBS 해설은 ‘이것들’이 이어지는 22절을 가리킬 가능성을 높게 보지만, 앞의 우상 조롱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소개한다. 앞에서는 철공과 목공이 신상을 빚었고, 21절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었으니”라고 말씀하신다. 두 대목에 같은 동사가 쓰인다. 하나님께 빚어진 백성이 자기 손으로 빚은 형상 앞에 엎드릴 이유가 없다.&lt;/p&gt;&lt;p&gt;“너는 내 종이니라”는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할 이유이자 내용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을 섬길 백성으로 지으셨다.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לֹא תִנָּשֵׁנִי, 로 틴나셰니)는 약속에는 드문 동사의 특이한 수동형이 쓰인다. 자기 길이 하나님께 숨겨졌다고 탄식하는 백성(40:27), 주께서 잊으셨다고 말하는 시온(49:14)에게 주시는 대답이다. 이스라엘에게는 기억하라 명하시고,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lt;/p&gt;&lt;p&gt;22절은 “내가 … 없이하였으니”(מָחִיתִי, 마히티)라는 용서의 선언으로 시작한다. 기록이나 얼룩을 닦아 지우는 동사의 완료형으로, 허물과 죄를 지우신 일을 이미 이루어진 일로 말씀하신다. “빽빽한 구름 같이”와 “안개 같이”에 쓰인 두 히브리어 명사는 모두 구름을 가리킨다. 구름이 걷히듯 이스라엘의 죄가 사라진다. 43:25에서도 하나님은 허물을 도말하고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이스라엘의 죄를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으신다.&lt;/p&gt;&lt;p&gt;이 선언 뒤에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שׁוּבָה אֵלַי, 슈바 엘라이)는 명령이 나온다. 근거는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כִּי גְאַלְתִּיךָ, 키 게알티카)다. 구속하셨다는 동사도 완료형이므로, 돌아오라는 부름은 이미 허물을 지우고 구속하셨다는 선언에 근거한다. ‘구속하다’는 가까운 친족이 가난이나 종살이에 빠진 사람을 되찾는 책임을 가리키던 말이다. 43:1처럼 하나님이 그 책임을 친히 지시고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되찾으신다. 44:19에서 자기 행위를 마음에 돌이켜 생각하지 못하던 우상 숭배자와 달리, 이스라엘은 자신을 구속하신 분께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는다.&lt;/p&gt;&lt;p&gt;23절은 “하늘아 노래할지어다”라며 땅속, 산과 숲, 모든 나무를 찬양에 부른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하셨기 때문이다. 우상 제작자가 신상을 깎으려고 고르던 나무들도(44:14) 여호와의 구속을 노래한다.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יִתְפָּאָר, 이트파아르)이라는 말은 13절의 우상에 새긴 ‘사람의 아름다움’과 같은 어근을 쓴다. 사람이 나무에 아름다움을 새기던 장면에 이어,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백성 안에서 영광을 나타내신다.&lt;/p&gt;&lt;p&gt;24절은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구속자요 모태에서 지으신 이로 소개하며 고레스에 관한 새 말씀을 연다. 이어지는 분사들은 창조하고, 점술가의 징표를 폐하며, 종의 말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잇는다. 창조를 말씀할 때 하늘을 “홀로” 펴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나와 함께 한 자 없이”에 관해 NET 번역 주는 기록된 자음 본문인 크티브를 “누가 나와 함께 있었느냐”, 읽도록 제시된 크레를 “나 스스로”로 설명한다. 두 읽기 모두 여호와만이 창조주이심을 말한다.&lt;/p&gt;&lt;p&gt;25절의 점치는 자들과 지혜자들은 바벨론의 주술가와 점성가를 떠올리게 한다(47:12-13). 여호와는 그들의 징표와 예측을 무너뜨리시지만, 26절에서는 자기 종의 말을 세우고 사자들의 계획을 이루신다. 이는 우상들에게 장래 일을 알려 보라고 요구하신 법정 논쟁(41:21-29; 44:7-8)을 잇는다. 여호와께서 미리 하신 말씀은 이루어진다.&lt;/p&gt;&lt;p&gt;26-28절에는 “이르기를”이 세 번 나오며 예루살렘, 깊음, 고레스에 대한 말씀이 이어진다. 예루살렘에는 사람이 살고 유다의 폐허는 재건될 것이다. 종의 말을 ‘세우다’와 황폐한 곳을 다시 ‘세우다’에는 같은 어근이 쓰인다. 27절에서는 깊음과 강물을 마르게 하신다. 폐허를 뜻하는 말과 ‘마르라’는 명령도 같은 자음을 공유한다. 바다를 말려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51:10)이 다시 귀환의 길을 여신다. 바다에 길을 내고 광야에 새 길을 내신다는 43:16-19처럼, 바벨론 귀환은 새 출애굽으로 그려진다.&lt;/p&gt;&lt;p&gt;28절은 이사야서에서 처음으로 바사 왕 고레스의 이름을 밝히며 그를 “내 목자”라 부른다(לְכוֹרֶשׁ רֹעִי, 레코레쉬 로이). 이어지는 말이 고레스를 3인칭으로 가리키므로 그에게 직접 하는 말보다 그에 관한 선언으로 읽기 쉽다. 목자는 백성을 이끄는 왕에게 주던 칭호다(사무엘하 5:2; 에스겔 34장). 바벨론이 주전 587년에 무너뜨린 예루살렘과 성전을 하나님이 고레스를 통해 다시 세우신다. ‘목자’는 44:20에서 우상 숭배자가 ‘재를 먹는다’고 할 때 쓴 동사와 연결된다. 재를 먹던 사람의 모습과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는 직무가 대비된다. 참 목자는 여호와이시며(40:11), 고레스는 그분이 맡기신 일을 한다.&lt;/p&gt;&lt;p&gt;“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에서 ‘기쁨’은 백성을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가리킨다. ‘성취하다’는 26절의 사자들의 계획을 이루신다는 말과 같은 동사다. 28절 후반에서 예루살렘의 재건과 성전의 기초를 명하는 화자는 여호와일 수도, 고레스일 수도 있다. 개역개정의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תִּוָּסֵד, 티바세드)도 성전을 직접 부르는 말로 읽거나, 성전의 기초가 놓이리라는 3인칭 진술로 읽을 수 있다. 여호와의 약속이 고레스의 직무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은 같다.&lt;/p&gt;&lt;p&gt;45:1은 고레스를 직접 부르며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לִמְשִׁיחוֹ לְכוֹרֶשׁ, 림시호 레코레쉬)라고 말한다. 실제로 기름 붓는 예식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권한과 과업을 주셨다는 칭호다. 오른손을 붙드시는 몸짓도 힘을 주신다는 비유다. 이스라엘과 종의 손을 붙드신 하나님(41:13; 42:6)이 이방 왕도 붙드신다. 44:20에서 사람이 오른손에 쥔 우상은 거짓이지만, 고레스의 오른손을 붙드시는 여호와는 그를 통해 뜻을 이루신다.&lt;/p&gt;&lt;p&gt;고레스 앞에서 민족들이 항복하고 왕들의 허리가 풀리며 성문이 열린다. 왕들의 허리를 ‘풀다’와 문을 ‘열다’에는 같은 동사가 쓰인다. 왕들의 무장을 해제하여 힘을 꺾고, 빗장으로 잠긴 무거운 두 짝의 성문도 여신다는 말이다. 2절에서 하나님은 고레스보다 앞서 가셔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고 놋문과 쇠빗장을 부수겠다고 하신다. 고레스의 정복은 이 말씀 안에서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는 일로 설명된다.&lt;/p&gt;&lt;p&gt;3절에서 고레스는 정복한 나라들이 숨겨 둔 보화와 재물을 받는다. 목적은 그를 이름으로 부르신 분이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는 데 있다. 43:1에서 이스라엘을 이름으로 부르신 하나님이 고레스도 부르신다. 3-6절은 그 목적을 고레스의 앎, 종 야곱을 위한 일, 해 뜨는 곳부터 지는 곳까지 모든 이의 앎으로 넓힌다. 4절과 5절은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וְלֹא יְדַעְתָּנִי, 벨로 예다타니)를 반복한다. 고레스의 부르심은 그의 신앙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택과 뜻이 그를 부르신 근거다. 4절의 “칭호를 주었노라”는 44:5에서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라”에 쓴 동사와 같아, 하나님이 백성과 이방 왕에게 직무와 이름을 주시는 일을 잇는다.&lt;/p&gt;&lt;p&gt;5절의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는 45장에 거듭 나오는 후렴이다(6, 14, 18, 21, 22절). 왕들의 허리를 푸신 하나님은 이제 고레스의 허리에 띠를 매어 힘을 입히신다. 그 결과 동쪽과 서쪽의 모든 사람이 여호와 외에 다른 이가 없음을 알게 된다. 43:5에서는 동서로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신다면, 45:6에서는 온 땅이 그분을 알게 된다.&lt;/p&gt;&lt;p&gt;7절은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יוֹצֵר אוֹר וּבוֹרֵא חֹשֶׁךְ, 요체르 오르 우보레 호셰크),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עֹשֶׂה שָׁלוֹם וּבוֹרֵא רָע, 오세 샬롬 우보레 라)라는 대구로 맺는다. 창세기 1-2장의 ‘짓다, 창조하다, 행하다’가 한 절에 쓰이며, 자연과 인간의 정반대 형편을 모두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둔다. “이 모든 일”에는 고레스의 부상도 포함된다. 개역개정의 ‘환난’은 평안과 짝을 이루어 재난과 곤경을 뜻한다. NET는 빛과 어둠을 구원과 심판의 상징으로 읽으며, 고레스를 통한 포로의 평화와 바벨론의 재난을 예로 든다. 아모스 3:6처럼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의 주권을 고백하는 말이다. 사람의 악행을 명하거나 정당화하는 말씀으로 읽으면 평안과 환난이라는 문맥을 잃는다. 마지막 ‘이것들’은 44:21의 ‘이 일을 기억하라’와 같은 말로 단락의 앞뒤를 잇는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출애굽기 20:2-6에서 하나님은 종살이하던 백성을 인도해 내셨다고 밝히신 뒤 다른 신과 형상을 금하신다. 이사야 44:22도 구속을 선언한 뒤 돌아오라고 부른다. 포로지의 백성은 출애굽 때와 같은 순서로 다시 부름받는다. 자기 손으로 만든 나무에게 “나를 구원하라”(44:17)고 비는 백성에게, 그들을 지으신 여호와만 구원하실 수 있음을 일깨운다. 45:5의 다른 신이 없다는 선언은 시내산 계명을 다시 붙들 근거다.&lt;/p&gt;&lt;p&gt;신명기 32장은 여수룬이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잊었다고 책망한다(15, 18절). 이사야도 이스라엘을 여수룬이라 부르지만(44:2), 그들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한다(44:21). 언약을 깬 백성을 하나님이 붙드신다. 신명기 32:39의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라는 선언은 죽임과 살림, 상함과 나음을 한 분 하나님께 돌린다. 이사야 45:5-7도 포로기의 상처와 회복을 그분의 다스림 아래 둔다.&lt;/p&gt;&lt;p&gt;창세기 1:1-5에서 빛을 내신 하나님은 이사야 45:7에서 어둠의 창조주로도 고백된다. 45:18은 땅을 사람이 거주하도록 지으셨다고 말하며, 44:26은 예루살렘에 다시 사람이 살리라고 약속한다. 창조주께서 폐허를 사람이 살 곳으로 회복하신다. 예레미야 10:11-16도 천지를 짓지 않은 신들은 망할 것이며 여호와는 만물의 조성자이시라고 말한다. 두 선지자는 사람이 다듬은 목상과 창조주를 대비한다. 하늘을 펴신 분이 고레스 앞의 성문도 여실 수 있다.&lt;/p&gt;&lt;p&gt;레위기 25장과 룻기에서 기업 무를 자는 가난해진 친족의 재산과 자유를 되찾을 책임을 진다. 출애굽기 6:6과 15:13에서는 하나님이 종살이하는 백성을 구속하고 인도하신다. 이사야 51:10-11은 바다를 말려 구속받은 백성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이 다시 그들을 시온으로 돌아오게 하신다고 노래한다. 44:22-23도 구속, 돌아옴, 찬양으로 이어진다. 45:13은 고레스가 포로를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고 한다. 백성의 귀환은 이방 왕에게 값을 치르는 거래가 아니며, 뒤의 종의 노래는 죄 사함을 위해 허물을 담당하는 종의 고난을 말한다.&lt;/p&gt;&lt;p&gt;‘목자’와 ‘기름 부음 받은 자’는 다윗의 왕권에 사용된 칭호다(사무엘상 16:13; 사무엘하 5:2). 에스겔 34장은 자기만 먹이는 목자들을 책망하며 하나님이 직접 양 떼를 찾고 다윗을 한 목자로 세우시리라고 약속한다. 다윗 왕조가 무너진 때에 고레스에게 이 칭호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 여전히 백성을 위해 일하심을 뜻한다. 예레미야는 느부갓네살도 여호와의 종이라 불렀다(25:9; 27:6). 심판과 회복에 이방 왕을 쓰시는 것이다. 고레스가 다윗의 언약을 계승하는 것은 아니며, 사무엘하 7장과 이사야 9장, 11장이 약속한 영원한 왕권은 그에게서 완성되지 않는다.&lt;/p&gt;&lt;p&gt;에스라 1:1-4에서 하나님은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포로의 귀환과 성전 재건을 허락하게 하신다. 바벨론 강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던 백성(시편 137편)에게 귀환의 길이 열린다. 그러나 돌아온 공동체는 바사의 지배와 재건의 어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다. 회복은 실제였으나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그들의 소망은 하나님 말씀의 신실함에 달려 있었다. 40:2의 사죄 선언은 44:22의 용서와 55:7의 돌아오라는 부름으로 이어진다. 44:26에서 종의 말을 세우시는 하나님은 45:23과 55:11에서 자신의 말씀이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기뻐하시는 뜻을 이룬다고 하신다.&lt;/p&gt;&lt;p&gt;아모스 3:6, 욥기 2:10, 예레미야애가 3:37-38도 재앙과 복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둔다. 그러나 욥의 고난을 그의 죄 탓으로 설명한 친구들은 책망받으며, 예레미야애가 3장은 하나님이 사람을 근심하게 하시는 것이 본심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이사야 45:7은 바벨론의 몰락과 포로의 해방이라는 역사 속에서 들린다. 고난받는 백성은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며 탄식하고 회복을 기다린다.&lt;/p&gt;&lt;p&gt;아브람을 통해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려던 뜻(창세기 12:1-3)은 이사야 45:4-6의 목적에도 나타난다. 야곱을 위한 고레스의 부르심은 온 세상이 여호와를 아는 데 이른다. 45:14의 민족들은 여호와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고 고백하고, 22절에서는 땅의 모든 끝이 돌아와 구원받으라는 초대를 듣는다. UBS 해설은 이를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민족으로 보며, 특히 고레스가 공격한 나라들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49:6은 종의 사명을 땅 끝까지 이르는 구원으로 밝힌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이 단락에서 종은 야곱 이스라엘이고, 기름 부음 받은 자는 고레스다(44:21; 45:1, 4). 고레스는 귀환의 길을 열지만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허물을 지우고 구속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44:22). 종 이스라엘도 보지 못하는 종이라는 책망을 듣는다(42:19). 49장 이후의 종은 야곱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이방의 빛이 되어 땅 끝에 구원을 이르게 한다(49:5-6). 고레스의 정치적 해방과 이스라엘의 사명은 이 종의 사역과 구별하면서 연결하여 읽어야 한다.&lt;/p&gt;&lt;p&gt;이사야 61:1의 화자는 여호와의 영과 기름 부음을 받아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한다.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 말씀을 읽고 성취를 선언하신다(누가복음 4:16-21). 사도행전 4:24-28의 교회는 창조주께 기도하며 예수를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이라 부른다. 고레스와 이스라엘에게 나뉘었던 호칭이 예수께 모인다. 헤롯과 빌라도의 대적도 하나님의 구원 뜻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고레스는 하나님을 모른 채 정복으로 포로를 놓았지만, 예수는 아버지께 순종하여 대적들의 손에 자신을 내주셨다.&lt;/p&gt;&lt;p&gt;고레스에게 위임된 목자의 직무는 포로 귀환을 위한 것이었다.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 예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다. 여호와가 친히 양 떼를 모으시겠다는 이사야 40:11과 에스겔 34장의 약속을 이루시는 목자다. 이사야 53:6은 그릇 행한 양들의 죄악을 종이 담당했다고 말한다. 예수는 양 떼를 죄에서 되찾으시는 목자이자 대속의 종이시다.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를 목자로 고백하는 백성은 이 목자의 돌봄을 의지한다.&lt;/p&gt;&lt;p&gt;이사야 53:5, 11-12는 종이 백성의 허물과 죄악을 담당하여 평화를 이루는 길을 밝힌다. 44:22의 허물 지움과 45:7의 평안을 신약은 예수의 구속에서 읽는다. 예수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시고(마가복음 10:45), 자기 피로 백성을 죄에서 해방하신다(요한계시록 1:5). 하나님의 아들은 혈과 육을 지녀 우리의 친족이 되시고, 죽음으로 종노릇하던 사람들을 놓으셨다(히브리서 2:14-15). 구속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지만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내주신 구원이다.&lt;/p&gt;&lt;p&gt;용서의 선언 뒤에 돌아오라는 명령이 오는 순서는 고린도후서 5:18-21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우리를 화목하게 하셨으므로 사도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한다. 죄를 모르신 이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신 것이 그 근거다. 같은 장은 그리스도 안의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라 부른다(17절). 이스라엘을 지으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지으신다. 바울은 빛을 명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영광을 아는 빛을 마음에 비추셨다고 말한다(4:6). 이사야 45:7의 빛과 어둠의 창조주를 신약은 새 창조의 빛을 주시는 분으로 고백한다.&lt;/p&gt;&lt;p&gt;십자가의 어둠(마가복음 15:33) 속에서도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셨다. 사도행전 4:28의 교회는 그 사건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다고 고백하며, 이사야 53:5는 종의 징계로 백성이 평화를 누린다고 말한다. 헤롯과 빌라도의 악행에 대한 책임은 사라지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일의 결과까지 다스려 구원하신다. 부활은 그 어둠 가운데서 이루신 생명의 응답이다. 이사야에서 고레스의 부상이 바벨론의 재난과 포로의 평화가 되었다면, 십자가와 부활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꺾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이들에게 평화를 준다.&lt;/p&gt;&lt;p&gt;44:24는 여호와께서 홀로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신약은 만물이 말씀으로 지어졌고(요한복음 1:3),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고백한다(골로새서 1:16). 히브리서 1:10-12는 땅의 기초를 두신 주를 찬송하는 시편 102편을 아들에게 적용한다. 그리스도는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의 정체 안에서 고백된다. 이스라엘을 지으신 하나님이 아들 안에서 오셔서 백성을 구속하신다.&lt;/p&gt;&lt;p&gt;45:23에서 모든 무릎과 혀는 여호와께 경배와 충성을 드린다. 로마서 14:11은 이를 하나님의 심판대에 적용하고, 빌립보서 2:10-11은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에 꿇고 예수를 주라 시인하여 아버지께 영광 돌리리라고 말한다. 여호와만 하나님이시라는 고백 안에서 예수께 경배한다. 열국을 항복시킨 고레스와 달리 예수는 죽기까지 낮아지셔서 높임받으셨다. 이 그리스도를 통해 땅 끝의 민족들이 돌아와 구원받으라는 부름(이사야 45:22)을 듣는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하나님은 허물을 지우셨다고 말씀하신 뒤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죄책감 때문에 자격을 갖출 때까지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미루는 사람에게, 돌아갈 근거는 이미 주신 용서다. 용서받은 사람은 그 은혜를 의지하여 실제 잘못을 버린다. 사죄의 선언과 회개의 요구를 떼어 놓으면 이 부르심의 순서를 잃는다.&lt;/p&gt;&lt;p&gt;자기가 만든 것에게 구원을 구하는 우상 숭배는 소유와 평판과 성과에서 생명의 안전을 얻으려는 태도에도 나타난다. 자기 손에 쥔 것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면 그것이 거짓인지 돌이켜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44:19-20). 이스라엘을 지으신 하나님이 구속자라는 고백은, 손에 쥔 것보다 그분의 말씀과 약속에 삶을 맡기도록 요구한다.&lt;/p&gt;&lt;p&gt;하나님이 백성을 잊지 않으신다는 약속은 포로지에서 주어졌다. 고향과 자유를 잃은 현실이 그들을 버리셨다는 증거가 되지 않았다. 오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잊으셨다고 탄식하는 성도도 이 약속을 붙들 수 있다. 점술가의 확신에 기대어 미래를 확보하려 할 때에는, 예측을 무너뜨리고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lt;/p&gt;&lt;p&gt;고레스에게 주어진 직무를 오늘의 특정 정치 지도자에게 그대로 붙여서는 안 된다. 그 칭호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주셨으며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목적에 한정되어 있었다. 어떤 권력자가 성과를 얻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모든 행위를 신성한 것으로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을 모르는 권력 아래서도 교회는 창조주께 기도하고 말씀을 전한다. 사도행전 4장의 교회가 그랬듯, 권력의 위협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폐하지 못한다.&lt;/p&gt;&lt;p&gt;고레스의 승리와 재물에는 야곱의 회복과 온 땅이 하나님을 알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권한과 성공을 자기 이름을 높이는 데 쓰는 사람은 이 목적과 어긋난다. 신자는 맡은 권한으로 약한 사람을 보호하고 부당한 관행을 바로잡을 책임이 있다. 고레스도 목적을 위해 부름받은 도구였으므로 권력과 성공 자체가 구원이 될 수 없다.&lt;/p&gt;&lt;p&gt;평안과 환난을 다스리신다는 말씀은 포로에게 귀환의 소망을 주었다. 이 말씀을 재난당한 사람의 죄를 판정하는 근거로 쓰면 욥의 친구들과 같은 잘못을 범한다. 고통의 이유를 다 안다고 말하며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하나님의 주권을 핑계로 악행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성도는 고난 중에도 탄식하고 회복을 구하며 선하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신뢰할 수 있다.&lt;/p&gt;&lt;p&gt;여호와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고백은 땅 끝을 향한 구원의 초대로 이어진다(45:22). 교회는 다른 민족을 낮추거나 정치적 지배를 확대하여 이 부름에 응할 수 없다.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모든 민족이 같은 구원을 받도록 섬긴다. 하늘과 땅과 숲을 찬양에 부르신 하나님은 구속받은 백성 가운데 자기 영광을 나타내신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42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4:21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428/"&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4:28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1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7/"&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7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Isa&amp;amp;chapter=45&amp;amp;verse=7"&gt;NET Bible, 이사야 45:7 번역 주 2와 해설 주 3&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22/"&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22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23/"&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23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Isa&amp;amp;chapter=44&amp;amp;verse=24"&gt;NET Bible, 이사야 44:24 번역 주 2&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45:8-17 토기장이와 다투는 질그릇, 스스로 숨어 계시는 구원자</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5.8-17/</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5.8-17/</guid><description>이사야 45:8-17을 따라 하늘과 땅에 의와 구원을 내라 명령하시는 창조주, 고레스를 쓰시는 하나님께 반문하는 백성을 향한 화 선언, 열방의 고백과 숨어 계시는 구원자를 해설한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고레스에게 하신 말씀이 끝나자 8절은 하늘과 땅에 의와 구원을 내라고 명한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이사야 핸드북은 이를 고레스에게 하신 말씀(2-7절)과 이스라엘의 반응(9-13절) 사이에 놓인 찬가풍의 간주로 본다. “나 여호와”와 “창조하다”라는 표현은 앞 문맥과 이어진다. 히브리어 첫 줄에는 목적어가 없고 둘째 줄에 “의”(צֶדֶק, 체데크)가 나오지만, 개역개정은 첫 줄에도 공의라는 목적어를 밝혀 두 줄의 병행을 살린다. 비가 내리고 땅이 열려 싹을 내듯, 피조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도록 부름받는다.&lt;/p&gt;&lt;p&gt;UBS는 이 문맥의 “의”를 포로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승리’로 읽기를 선호하면서도 ‘의’나 ‘구원하는 정의’라는 번역도 소개한다. “구원”(יֶשַׁע, 예샤)은 바벨론 포로에서의 구출을 뜻하며 40-55장에서 이 낱말은 여기에 처음 나온다. 하늘과 땅은 서로 다른 과업을 맡기보다 모두 의와 구원을 내도록 부름받는다. “창조하였느니라”(בְּרָאתִיו, 베라티우)의 단수 목적어를 개역개정은 “이 일을”로 푼다. 핸드북은 하늘과 땅이라면 복수가 필요하므로, 그 대상이 고레스보다 앞서 말한 승리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고레스의 군사력으로 이루어지는 듯 보이는 구출의 근원은 창조주 하나님이다.&lt;/p&gt;&lt;p&gt;BHS는 8-10절 끝에 작은 단락 표시를, 13절 끝에 큰 단락 표시를 둔다. 9-13절의 논쟁은 “화 있을진저”로 시작한다. UBS는 9-10절을 고레스를 통한 구원에 반발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선지자의 논평으로 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한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는 마소라 본문의 חֶרֶשׂ אֶת־חַרְשֵׂי אֲדָמָה(헤레스 에트-하르세 아다마), 곧 ‘땅의 질그릇 조각들과 함께 있는 한 조각’을 옮긴 말이다. RSV, NRSV, REB는 본문을 고쳐 ‘토기장이와 다투는 질그릇’으로 읽는다. Hebrew Old Testament Text Project(HOTTP)는 마소라 본문을 지지하며, 핸드북은 두 읽기를 모두 허용한다. “지으신 이”(יֹצְרוֹ, 요츠로)는 같은 절에서 “토기장이”로도 옮겨진다. 그릇을 빚는 이의 모습에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겹친다.&lt;/p&gt;&lt;p&gt;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고 따지고, 그릇이 “손이 없다”고 흠을 잡는다. “손”(יָדַיִם, 야다임)은 한 쌍을 가리키는 쌍수형이다. UBS는 이를 그릇의 손잡이 한 쌍으로 읽어, 손잡이 없는 그릇이 손잡이를 달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모습으로 이해한다. GNT와 REB는 토기장이의 두 손으로 보아 솜씨가 없다는 불평으로 옮긴다. 이어 11-12절의 하나님은 “내 손으로 한 일”,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라고 응답하신다. 비유는 자기 기대에 맞지 않는 구원 방식을 이유로 창조주를 심판하려는 태도를 겨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탄식하는 기도까지 금하는 문맥은 아니다.&lt;/p&gt;&lt;p&gt;10절은 아버지와 해산하는 어머니에게 무엇을 낳느냐고 따지는 자식을 꾸짖는다. 개역개정의 “어머니에게는”은 “여인에게”(וּלְאִשָּׁה, 울레잇샤)를 문맥에 따라 옮긴 말이다. 진흙과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따지듯 자식은 자신을 낳은 부모에게 따진다. 이 비유는 11절의 “내 아들들”로 이어지며, 이스라엘을 지으시고 기르신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드러낸다. 9-10절이 선지자의 논평이라면 11절부터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lt;/p&gt;&lt;p&gt;11절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이라는 호칭은 9절의 창조주를 다시 가리킨다. UBS는 이를 43:1의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와 연결한다. 이어 마소라 본문은 “장래 일들을 내게 물으라,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라”에 가깝다. “물으라”(שְׁאָלוּנִי, 셰알루니)는 명령형이고, “명령하라”(תְּצַוֻּנִי, 테차부니)는 미완료형이다. RSV와 REB는 본문을 고쳐 “감히 내 자녀에 관하여 나에게 묻겠느냐”로 읽는다. UBS는 마소라 본문을 유지하면서 수사 의문으로 옮기는 Bible en français courant과 NIV를 선호하며, 개역개정도 “물으며”, “명령하려느냐”로 반문을 만든다. 9절의 그릇과 10절의 자녀는 11절에서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이라는 역순으로 돌아온다.&lt;/p&gt;&lt;p&gt;명령으로 읽으면 장래 일은 하나님께 묻되 자녀와 손으로 하신 일은 그분께 맡기라는 뜻이 된다. UBS도 이런 번역 예를 제시한다. 반문으로 읽으면 자녀를 회복하시는 일을 백성이 지휘하려 하느냐는 꾸짖음이다. 두 읽기는 질문의 초청인지 태도의 책망인지에서 갈리지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권한을 앞세운다. 12절의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는 11절의 “명령하려느냐”와 같은 동사를 쓴다. 백성이 명령하려는 상대는 하늘의 군대에게 명령하시는 분이다.&lt;/p&gt;&lt;p&gt;12절은 “내가”를 거듭 강조하며 땅과 사람을 지으시고 하늘을 펴신 하나님의 권한을 밝힌다. 그 창조주가 13절에서 고레스를 “일으킨지라”(הַעִירֹתִהוּ, 하이로티후)고 말씀하신다. UBS에 따르면 41:2, 25에서 동방과 북방의 인물을 일깨우실 때 쓴 동사와 같다. “공의로”(בְצֶדֶק, 베체데크)는 하나님의 의나 고레스의 정당한 승리를 가리킬 수 있으며, 핸드북은 후자를 선호한다. 하나님은 고레스의 길을 순탄하게 하시고, 그가 예루살렘을 건축하게 하신다. 이는 44:26, 28의 약속을 되풀이한다. 41:25에서 고레스가 고관들을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듯 하리라고 했던 표현도 이 논쟁과 이어진다.&lt;/p&gt;&lt;p&gt;고레스는 “값이나 갚음이 없이” 포로를 놓는다. “갚음”의 בְשֹׁחַד(베쇼하드)는 구체적으로 ‘뇌물로’라는 뜻이다. UBS는 앞의 “값”을 일을 마친 대가로, 뒤의 말을 1:23처럼 ‘뇌물’로 옮기는 편이 낫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고레스에게 보수나 뇌물을 지불하여 일하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왕도(45:4-5) 백성을 놓고 성읍을 세우는 구원의 목적을 수행한다.&lt;/p&gt;&lt;p&gt;14절의 “너”는 여성 단수로, 시온을 여인으로 부르는 방식과 맞는다. 말씀을 받는 대상은 포로에서 돌아올 이스라엘이다. 43:3에 나온 애굽, 구스, 스바가 다시 등장한다. UBS는 “애굽의 소득”과 “구스가 무역한 것”을 그 민족들이 생산하여 이익을 얻는 물품으로 읽는다. REB처럼 노동자와 상인으로 고쳐 읽을 본문 증거는 없다. “스바의 장대한 남자들”은 키가 큰 사람들이다. 사슬에 매여 뒤따라오는 모습은 고대 전쟁의 패자와 승자의 역전을 그린다. UBS는 “굴복하고”를 창세기 42:6에서 요셉의 형들이 절하듯 깊은 경의를 표하는 몸짓으로 보고, “간구하기를”은 문자적으로 ‘기도하다’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의 אַךְ(아크)는 ‘참으로’나 ‘오직’으로 읽을 수 있다. 열방의 고백은 이스라엘의 독자적인 힘보다 그 가운데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향한다. 포로였던 백성의 회복은 그분의 함께하심에서 온다.&lt;/p&gt;&lt;p&gt;15절은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직접 부른다. GNT, NAB, NJPS는 스바 사람들의 말이 이어진다고 보지만, UBS는 14절의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뀌므로 선지자의 고백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고 판단한다.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אֵל מִסְתַּתֵּר, 엘 미스타테르)은 자기를 숨기시는 분을 뜻한다. 핸드북은 신상과 달리 보이는 형체가 없다는 뜻일 가능성도 소개한다. 하나님은 백성이 납득하기 어려운 이방 왕을 통해 일하시지만 여전히 “구원자”다. 그 구원의 길은 사람이 다 알아볼 수 없으며, 선지자는 바로 그 하나님께 기도한다.&lt;/p&gt;&lt;p&gt;16절의 우상 제작자들에게 선언된 부끄러움과 욕은 17절에서 이스라엘이 겪지 않을 것으로 약속된다. 백성은 여호와께 구원을 받는다. “영원한 구원”(תְּשׁוּעַת עוֹלָמִים, 테슈아트 올라밈)에 대해 UBS는 이스라엘을 건지신 일이 오래 지속되는 유익을 가져온다는 뜻으로 설명하며 신약의 ‘영생’과 구별한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3인칭으로 말하다가 “너희”라고 직접 부른다. 8절의 “구원”, 15절의 “구원자”, 17절의 “구원을 받아”와 “구원”은 같은 어근이다. 하늘과 땅에 구원을 싹트게 하라는 명령은 구원자를 부르는 고백과 지속되는 구원의 약속으로 맺어진다. 자기가 만든 우상을 의지한 자들은 수치를 겪지만, 하나님이 지으신 백성은 그분의 건지심으로 장래를 얻는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예레미야 18:1-11에서 토기장이는 손에서 터진 그릇으로 다른 그릇을 만든다. 하나님은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 백성이 자기 손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악에서 돌이키면 재앙을 돌이키시며, 선을 약속받은 민족도 악을 행하면 심판하신다. 이 비유는 백성에게 악한 길을 떠나라고 요구한다. 이사야 45장에서는 같은 창조주의 권한이 백성을 놓아줄 고레스를 일으키시는 구원에 나타난다.&lt;/p&gt;&lt;p&gt;이사야 29:15-16에서는 자기 계획을 하나님께 숨기는 사람들이 지으신 이에게 총명이 없다고 말한다. 45:9에서는 백성이 하나님의 일을 다 알아야 승인할 수 있다는 듯 따진다. 한쪽은 하나님이 모른다고 생각하고 다른 쪽은 자신이 다 안다고 여긴다. 두 비유는 피조물이 창조주를 자기 판단 아래 두려는 태도를 꾸짖는다.&lt;/p&gt;&lt;p&gt;이사야 64:7-12의 백성은 얼굴을 숨기시는 하나님께 황폐한 성읍과 불탄 성전을 아뢴다. 그들은 죄를 인정하면서도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고, 하나님을 아버지와 토기장이라고 부른다. 45장에서 따지는 데 쓰인 비유가 여기서는 자비를 구하는 기도가 된다.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께 탄식하고 회복을 구할 수 있는 까닭은 그분께 속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45:10-11의 “내 아들들”도 그 장래를 책임지시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드러낸다.&lt;/p&gt;&lt;p&gt;이사야 43:1-7에서 이스라엘을 지으신 하나님은 이름을 불러 자기 것으로 삼으시고, 물과 불 가운데 함께하시며 흩어진 자녀를 모으신다. 43:3에서는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속량물로 내주셨다고 하며, 45:13에서는 고레스가 보수나 뇌물 없이 포로를 놓으리라고 말씀하신다. 45:14에는 같은 민족들의 소득과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온다. 52:1-6은 딸 시온에게 목의 줄을 풀고 일어나라 명하고, 돈 없이 속량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리라고 약속한다. 각 비유는 열방을 속량물로 주심, 고레스에게 대가를 주지 않으심, 돈 없이 속량하심을 구별하여 말한다. 그 자유의 근원은 백성이 치른 값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다.&lt;/p&gt;&lt;p&gt;에스라 1:1-6에서 여호와는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귀환과 성전 건축을 공포하게 하신다. 백성도 마음이 움직여 일어나고, 주변 사람들은 은과 금과 물품으로 돕는다. 이방 왕을 통해 열린 자유 안에서 백성은 길을 떠나고 성전을 세우는 수고를 감당한다. 이사야 45:13의 구원은 역사 속에서 성읍과 예배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이 된다.&lt;/p&gt;&lt;p&gt;이사야 8:17에서 선지자는 야곱의 집에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기다린다. 그때의 숨으심은 심판의 경험이고, 45:15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이 감추어져 있다. 이사야 8:11-20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따라가거나 숨은 길을 안다는 이들을 찾기보다 여호와를 거룩하게 여기고 증거의 말씀을 간직하게 한다. 기다림의 근거는 하나님의 행동을 미리 예측하는 능력보다 그분이 주신 말씀에 있다.&lt;/p&gt;&lt;p&gt;시편 85편은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죄를 용서하신 은혜를 기억하며 다시 회복을 구한다.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85:11)라는 그림은 이사야 45:8과 주제가 닮았다.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구원에 응답하고, 의와 화평과 인애와 진리가 만난다. 백성은 구원의 시작을 경험한 뒤에도 다시 살려 달라고 기도하며, 어리석은 길로 돌아가지 말라는 권고를 듣는다(85:8). 이사야 45장의 이스라엘도 자기 기대와 다른 구원을 거부하고 우상에 의지하던 길에서 돌아서야 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로마서 9:20-21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에 반문하는 사람에게 지음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따질 수 있느냐고 묻고, 토기장이가 여러 그릇을 만들 권한을 말한다. 질문은 이사야 29:16과 45:9의 비유와 같은 형식이다. 이사야에서는 이방 왕을 쓰시는 방식이, 로마서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가운데서 긍휼의 그릇을 부르시는 방식이 논쟁이 된다(9:23-24). 사람은 누가 자비를 받아도 되는지 결정할 수 없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조상들 때문에 사랑을 입었으며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고 말한다(11:28-29).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신실하심도 지키신다.&lt;/p&gt;&lt;p&gt;로마서 11장의 이방인 신자들은 원가지를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는 경고를 듣는다. 접붙은 가지를 뿌리가 지탱한다. 예상 밖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버림받았다고 선언할 권리를 얻은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을 다시 붙드실 능력도 하나님께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스라엘의 약속을 읽으며 자기가 받은 긍휼을 고백한다.&lt;/p&gt;&lt;p&gt;고린도전서 1:18-25에서 십자가는 표적과 지혜를 구하는 기대에 어긋나지만, 부르심받은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시다. 이사야 45장의 낯선 구원 방식처럼, 십자가도 인간의 성공 기준에 맞지 않는다. 두 본문은 구원 방법을 정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다만 고레스는 하나님을 모르면서 쓰임받은 왕이고, 요한복음의 아들은 아버지를 아시고 나타내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쓰신 여러 일꾼 중 하나와 같은 관계에 계시지 않는다.&lt;/p&gt;&lt;p&gt;고린도전서 14:24-25에서 외부인은 교회의 예언을 듣고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고 말한다. 명시적 인용 표지는 없지만, 이 고백은 이사야 45:14에서 열방이 시온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말과 닮았다. 고린도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동체 안에서 그 고백이 나온다. 사슬에 매여 굴복하는 대신, 알아들은 말씀이 마음을 드러내어 스스로 경배하게 한다. 이사야의 열방 고백과 이어지는 대상은 공동체의 위세보다 그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다.&lt;/p&gt;&lt;p&gt;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는 고백 때문에 교회의 모든 행동이 승인되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 교회도 책망받았으며, 바울은 자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예수를 위해 성도들의 종이 된 자신을 선포한다고 말한다(고린도후서 4:5). 하나님의 백성도 말씀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회개해야 한다. 이사야에서 열방의 인정이 향한 분처럼 교회가 구할 영광도 하나님께 돌아간다.&lt;/p&gt;&lt;p&gt;값이나 뇌물 없이 포로를 놓으시는 약속은 먼저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된다. 로마서 5:6-11에서 그리스도는 죄인이며 원수였던 사람들을 위해 죽으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다. 이사야의 구출은 성읍과 공동체를 되찾는 역사적 해방이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죄로 멀어진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연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공로로 자유를 샀다고 말할 수 없다.&lt;/p&gt;&lt;p&gt;요한복음 1:14-18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나타내신다. 이사야 45:15의 숨으시는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방식으로 자기를 알리시는 구원자다. 그 계시의 절정은 사람이 만든 신상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오신 아들이다. 빌립보서 2:6-11에서 아들은 종의 형체를 취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며 하나님은 그분을 높이신다. 겉으로 수치스러운 자리에서 구원이 이루어졌다. 고난을 겪는 신자도 자기를 내어주신 그리스도께 의지한다.&lt;/p&gt;&lt;p&gt;히브리서 5:7-9의 아들은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고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다. 이는 죄를 범하던 아들이 개선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 고난 속에서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이루셨다는 뜻이다. 이사야 45:17의 “영원한 구원”이 포로에서의 구출이 지속되는 유익을 약속한다면, 히브리서의 영원한 구원은 고난을 거쳐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신 아들을 근원으로 삼는다. 그분은 자신을 단번에 드리고 살아 계셔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신다(7:24-27). 이 구원은 고레스의 생애나 바사 제국의 존속에 매이지 않는다. 신자는 고난을 앞서 겪으신 아들에게 의지하여 아픔을 정직하게 아뢰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수 있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9-11절은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자기 기대에 맞추어 심판하려는 태도를 꾸짖는다. 원하는 일을 기도하면서도 그 방법까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는 요구는 내려놓아야 한다. 이사야의 백성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왕을 통해 구원받았듯,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범위를 자기 이해에 가두면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lt;/p&gt;&lt;p&gt;토기장이의 자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다. 목회자나 부모나 기관의 책임자는 다른 사람을 지은 분이 아니다. 자기 결정에 질문하는 사람을 하나님께 대드는 진흙이라 부를 권한이 없다. 창조주 앞에서 모든 사람이 피조물이라는 고백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양심과 삶을 소유하려는 태도를 막는다.&lt;/p&gt;&lt;p&gt;이사야 64장의 백성은 하나님을 아버지와 토기장이라 부르면서 황폐한 성읍과 불탄 성전을 아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잃은 것을 숨기거나 슬픔을 눌러야 할 이유가 없다. 예수께서도 고난 중에 눈물로 간구하셨다. 자신을 맡기는 기도 안에서 아픔을 말하고, 이해하지 못한 길에서도 순종할 힘을 구할 수 있다.&lt;/p&gt;&lt;p&gt;고레스를 쓰신 하나님은 교회가 익숙하게 여기는 경계 밖에서도 일하신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이의 선한 수고에도 감사할 수 있다. 다만 도움을 준 권력자가 구원자의 자리를 얻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인물을 곧바로 고레스라 부르며 모든 행동에 신적 승인을 부여할 수 없다. 감사하면서도 잘못을 살피고 피해의 목소리에 응답할 책임이 있다.&lt;/p&gt;&lt;p&gt;열방이 사슬에 매여 오는 장면은 포로였던 백성의 회복을 약속한다. 교회가 다른 사람을 굴복시킬 권한을 주는 말씀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외부인이 경배하는 분은 하나님이며, 그 마음을 드러내는 것도 그분의 말씀이다. 은혜를 받은 교회는 자기 위세를 높이거나 이웃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을 향한 약속을 읽는 이방인 신자는 유대인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는 로마서 11장의 경고도 들어야 한다.&lt;/p&gt;&lt;p&gt;“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은 모든 사건의 이유를 당장 알아야만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구원의 길이 보이지 않아도 그분은 구원자이시다. 이스라엘의 수치를 끝내시는 능력이 백성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았듯, 신자의 소망도 자기 체면을 회복하는 힘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다. 그리스도는 앞서 고난을 겪으셨고 지금도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여신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8/"&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8&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9/"&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9&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1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11&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13/"&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13&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14/"&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14&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15/"&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15&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17/"&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17&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45:18-25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5.18-25/</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5.18-25/</guid><description>이사야 45:18-25를 따라 사람이 살도록 땅을 지으신 창조주, 은밀하지 않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열방을 향한 초청과 맹세, 여호와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이스라엘을 해설한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이사야 45:18-25는 우상 제작자의 수치와 이스라엘의 영원한 구원을 말한 14-17절에 이어진다. BHS는 17절 뒤에 열린 단락 표시를 두어 18절에서 새 단락을 시작한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는 UBS 핸드북에서 44:24-45:25를 고레스에 관한 노래로 읽는다. 두 저자는 개역개정의 “대저”(כִּי, 키)가 여기서 “참으로”라는 강조일 가능성이 크며, 18절 마지막 줄에 이르러 여호와 자신의 말씀이 시작된다고 설명한다. 그 전에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가 소개된다.&lt;/p&gt;&lt;p&gt;18절은 하나님을 하늘을 창조하고 땅을 빚어 만들며 견고하게 세우신 분으로 소개한다. UBS는 창세기 1-2장에서도 쓰인 창조 동사들이 하나님의 행위를 거듭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개역개정의 “그는 하나님이시니”를 뒤의 “땅을 지으시고”와 연결하여 “땅을 빚고 만드신 하나님”으로 읽는 번역을 선호한다. 이 소개는 창조의 목적을 밝히는 다음 선언으로 이어진다.&lt;/p&gt;&lt;p&gt;하나님은 땅을 “혼돈하게”(תֹהוּ, 토후) 두려고 창조하지 않으셨고 사람이 거주하도록 지으셨다. 토후는 창세기 1:2의 “혼돈하고”에도 쓰여, 질서를 얻기 전의 세계를 가리킨다. “사람이 거주하게”에서 “사람”은 히브리어에 따로 없는 말로, 개역개정이 거주할 주체를 밝혀 넣었다. 바로 앞 44:26에서 예루살렘에 사람이 살고 황폐한 유다 성읍이 복구되리라는 약속도 이 창조의 목적에 근거한다. 창조주께서는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라고 선언하신다. 유일하심에 대한 이 고백은 21-22절에서도 반복된다.&lt;/p&gt;&lt;p&gt;19절에서 하나님은 감추어진 곳과 캄캄한 땅에서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하신다. “감추어진 곳”(בַסֵּתֶר, 바세테르)은 15절의 “스스로 숨어 계시는”(מִסְתַּתֵּר, 미스타테르)과 같은 어근이다. UBS는 은밀함을 나타내는 어둠의 비유가 이방 신들의 모호한 소통 방식과 대조될 가능성도 제시한다. 15절에서 하나님의 숨으심을 고백한 백성도 그분이 알려 주신 말씀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은 고레스의 이름과 그가 할 일을 미리 알리셨다(44:28; 45:1).&lt;/p&gt;&lt;p&gt;하나님은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혼돈 중에서 찾으라”(תֹּהוּ בַקְּשׁוּנִי, 토후 바케슈니)고 하지 않으셨다. UBS는 19절의 토후를 “헛되이”라는 비유로 풀이한다. 18절에서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를 뜻하던 말이 여기서는 결실 없는 찾음을 가리킨다. 땅을 거주하도록 지으신 하나님은 백성에게 아무 소득 없이 자신을 찾으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의를 말하고 정직한 것을 알리느니라”라는 선언도 그 말씀의 신뢰성을 밝힌다. UBS는 여기서 “의”(צֶדֶק, 체데크)와 “곧은 것”이 모두 진실을 뜻한다고 설명한다.&lt;/p&gt;&lt;p&gt;20절의 “모여 오라”, “함께 가까이 나아오라”는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을 하나님의 법정으로 부른다. UBS는 그들을 고레스의 원정에서 살아남은 여러 민족의 피난민으로 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나무 우상을 메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한다. UBS는 신상을 메는 모습을 경배를 받도록 우상을 옮기는 행렬로 풀이한다. 44:17에서 “나를 구원하라”고 간청받던 형상은 아무도 건질 수 없다. 46:1-2, 7에서도 사람들이 떠메야 하는 우상은 짐이 되고, 자신도 포로로 잡혀가며 고난 중에 응답하지 못한다.&lt;/p&gt;&lt;p&gt;21절은 열방에게 주장을 알리고 진술하며 함께 의논해 보라고 요구한다. “진술하고”에 해당하는 말은 가까이 가져오라는 뜻으로, 히브리어에는 가져올 대상이 없어 여러 번역이 변론이나 증거를 보충한다. 쟁점은 누가 이 일을 옛적부터 알려 주었느냐는 것이다. UBS는 “이 일”을 고레스의 등장으로 보고 41:26-27과 44:7-8의 질문에 연결한다. 19절에서 진실을 알리신 분은 이제 열방에게 같은 증거를 요구하시며 자신만이 사건을 미리 알리셨음을 밝히신다.&lt;/p&gt;&lt;p&gt;그분의 이름은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אֵל־צַדִּיק וּמוֹשִׁיעַ, 엘 차디크 우모시아)이다. 히브리어의 두 칭호 “의로운 하나님”과 “구원자”를 개역개정은 행위를 드러내어 옮겼다. UBS는 이 문맥의 “의로운”이 정의로우심과 승리를 포함한다고 설명한다. 20절의 신은 구원하지 못하지만 여호와는 약속을 지키고 백성을 건지시는 구원자이시며, 그분 외에 다른 이는 없다.&lt;/p&gt;&lt;p&gt;22절은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פְּנוּ־אֵלַי וְהִוָּשְׁעוּ, 페누 엘라이 베히바셰우)고 초청한다. 사람은 자신이 의지하던 대상에게서 하나님께 얼굴을 돌리고, 구원은 하나님께 받는다. UBS는 두 명령의 관계를 돌이킴과 그 결과로 읽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땅의 모든 끝”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가리키며, 이 문맥에서는 고레스의 공격을 받은 민족들이 시야에 있다. 20절에서 무지하다는 판결을 들은 피난민들도 유일하신 구원자께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는다.&lt;/p&gt;&lt;p&gt;23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며 그 약속을 굳히신다. UBS는 이를 하나님께서 자기 명예를 걸고 약속하시는 것으로 설명하며, 입에서 나가 돌아오지 않는 말은 철회되지 않는 약속이라고 풀이한다. 개역개정의 “공의로운 말”은 그 말씀의 진실함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모든 무릎이 자신에게 꿇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약속하신다. 무릎과 혀는 사람 전체의 응답을 가리키며, UBS는 혀의 맹세를 여호와께 드리는 충성의 맹세로 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한다. 자신을 걸고 맹세하신 하나님께 모든 사람이 충성을 맹세할 날이 온다.&lt;/p&gt;&lt;p&gt;24절의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לִי אָמַר, 리 아마르)는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라는 고백을 이끈다. UBS는 여호와께서 23절의 맹세자들이 하는 고백을 인용하신다고 보며, 그 인용이 24절 앞부분까지인지 25절까지인지는 번역마다 다르다고 설명한다. “공의와 힘”(צְדָקוֹת וָעֹז, 체다코트 바오즈)에서 공의는 복수형이며, 힘과 짝을 이루어 승리를 뜻할 가능성이 크다. 여호와만 승리하고 강하시다는 뜻과 여호와를 통해 사람이 승리와 힘을 얻는다는 뜻으로 모두 읽을 수 있다.&lt;/p&gt;&lt;p&gt;개역개정은 24절 후반을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온다는 말과 그분께 노하는 자가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말로 나눈다. UBS는 “그에게 노하던 모든 자”를 나아오다와 부끄러움을 당하다의 공동 주어로 읽는다. 이 경우 하나님께 맞서던 자들이 그분 앞에 나아와 수치를 당한다. 모든 무릎이 꿇는 날에는 구원의 기쁨과 대적자의 수치가 구별된다. 본문은 지금 구원자께 돌아오라고 초청한다.&lt;/p&gt;&lt;p&gt;25절은 “여호와 안에”라는 24절의 말을 되풀이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약속한다. UBS는 “여호와 안에”를 그분이 하신 일 때문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의롭다 함을 얻고”(יִצְדְּקוּ, 이츠데쿠)에 승리와 정의의 뜻이 담겼다고 설명한다. “자랑하리라”는 그분이 하신 일로 기뻐한다는 뜻이다. 개역개정이 24절 끝에 넣은 “그러나”는 히브리어 25절에는 없지만, 대적자의 수치와 이스라엘의 기쁨을 구별한다. 야곱 자손을 헛된 찾음에 내버려 두지 않으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맺은 약속을 지키며 열방도 구원으로 부르신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창세기 1:1-3에서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에 덮여 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빛이 생긴다. 이사야 45:18-19은 이 창조의 혼돈과 어둠을 포로기의 현실에 비춘다. 땅을 거주하도록 지으시고 말씀으로 질서를 주신 하나님은 성읍이 무너지고 백성이 흩어진 황폐함에서 다시 살 길을 주실 수 있다. 44:24-28에서도 창조주께서 예루살렘의 거주와 성읍의 복구를 약속하고 고레스를 통해 그 뜻을 이루신다.&lt;/p&gt;&lt;p&gt;신명기 30:11-14의 명령은 하늘이나 바다 밖에서 특별한 지식을 얻어 와야만 알 수 있는 말씀이 아니다. 백성의 입과 마음에 가까이 있어 듣고 행할 수 있다. 15-20절에서는 생명이신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의지하라고 부른다. 이사야 45:19, 22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신 뒤 돌아오라고 명하신다. 말씀을 들은 백성에게는 응답할 책임이 있다.&lt;/p&gt;&lt;p&gt;이사야 43:9-12에서도 열방이 법정에 모이고, 어느 신이 사건을 미리 알리거나 실제로 구원했는지 증인을 세우라는 도전을 받는다. 그때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증인으로 부름받으며, 45장에서는 열방 자신이 증언대에 선다. 두 장면 모두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그분이 미리 하신 말씀과 실제 구원의 역사에 연결한다.&lt;/p&gt;&lt;p&gt;창세기 22:16-18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시며 아브라함의 씨로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약속하신다. 이사야 45:23의 맹세도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에 근거하며 먼 민족들이 그분을 인정할 날을 향한다. 열방을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은 19절의 야곱 자손과 25절의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약속도 지키신다. 열방의 구원과 이스라엘을 향한 신실하심은 같은 구원자께 근거한다.&lt;/p&gt;&lt;p&gt;이사야 55:6-11은 악한 길과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너그러운 용서를 받으리라 약속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와 눈이 땅에서 열매를 맺게 하듯 그 뜻을 이루고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 45:23의 철회되지 않는 말씀도 이 약속과 이어진다. 백성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약속하신 구원과 용서를 믿고 돌아온다.&lt;/p&gt;&lt;p&gt;시편 22:25-31에서는 구원받은 사람의 회중 찬송이 땅의 모든 끝과 후손에게까지 이어진다. 모든 민족은 나라를 다스리는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와 예배한다. 이사야 2:2-4의 민족들도 여호와의 길을 배우고 그분의 판단을 따라 전쟁 도구를 농사 도구로 바꾼다. 여호와께 돌아와 경배하는 삶에는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이웃을 대하는 변화가 따른다.&lt;/p&gt;&lt;p&gt;예레미야 9:23-24는 지혜와 용맹과 부 대신 땅에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여호와를 아는 것을 자랑하라고 한다. 이사야 45:24-25에서도 의와 힘은 여호와께 있으며 백성의 자랑은 그분이 베푸신 구원에 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백성은 그분의 성품을 따라 이웃에게 사랑과 정의를 행해야 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바울은 로마서 14:11에서 이사야 45:23을 “기록되었으되”라는 표지와 함께 인용하여 모든 무릎이 하나님께 꿇고 모든 혀가 자백하리라고 말한다. 빌립보서 2:9-11에서는 같은 언어를 높아지신 예수께 적용하여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에 꿇고 모든 입이 그분을 주라 시인하리라고 한다. 이사야에서 유일하신 여호와께 드리는 경배가 예수께 돌아가며, 그 고백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lt;/p&gt;&lt;p&gt;고레스는 백성을 해방하는 일을 맡았어도 여호와를 알지 못했고(45:4-5, 13), 증인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도 눈과 귀가 있어도 보거나 듣지 못하는 백성이었다(42:19; 43:8-10). 신약은 모든 무릎이 꿇을 하나님의 맹세가 이루어지는 자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둔다. 사도들은 그분의 이름으로 구원을 선포하며 그 증언을 이어 간다.&lt;/p&gt;&lt;p&gt;로마서 14:7-12에서 성도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의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는 말씀을 음식과 날을 두고 다투던 교회에 적용한다. 먹는 사람과 먹지 않는 사람 모두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께 받아들여졌으므로 서로 업신여길 수 없다. 각 사람은 자기 일을 하나님께 아뢰어야 한다. 같은 주님께 속한 형제의 양심을 자신의 취향으로 지배해서는 안 된다.&lt;/p&gt;&lt;p&gt;빌립보서 2:6-11에서 높임받으신 분은 종의 형체를 취하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복종하신 예수이시다. 그 이름 앞에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무릎이 꿇는다. 이사야의 땅끝을 향한 전망은 그리스도의 높임 안에서 온 우주에 미치며, 그분을 주라 고백하는 교회는 낮아지신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lt;/p&gt;&lt;p&gt;사도행전 4:8-12에서 베드로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하나님이 일으키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가 건강해졌다고 증언하며,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선포한다. 이사야의 유일한 구원자께 돌아오라는 초청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죽음과 부활의 은혜로 선포된다. 요한복음 18:19-23에서 예수께서는 회당과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가르치셨으니 들은 이들에게 물으라고 하신다. 자신을 친 사람에게도 잘못 말한 것이 있으면 증언하라고 요구하신다. 이는 이사야 45:19의 감추어지지 않은 진실한 말씀이라는 주제와 이어진다.&lt;/p&gt;&lt;p&gt;로마서 3:21-26은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의 속량을 통해 나타나며,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면서 예수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신다고 증언한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지만 믿는 자는 차별 없이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이사야 45:21의 의로우신 하나님과 구원자라는 칭호는 십자가에서 드러난 의와 구원에 연결된다. 고린도전서 1:28-31에서는 낮고 멸시받는 이들을 택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게 하신다.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권면처럼,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자격 대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한다.&lt;/p&gt;&lt;p&gt;히브리서 6:13-20은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신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으므로 피난처를 찾은 사람에게 큰 위로가 있다고 말한다. 그 소망은 닻처럼 견고하여 예수께서 먼저 들어가신 하나님의 임재에 닿는다. 이사야의 철회되지 않는 말씀을 믿는 성도는 미래의 모든 경로를 알아서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과 길을 여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기다린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하나님은 사람이 듣고 응답할 수 있도록 자신의 이름과 구원을 알리셨다. 그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은 자신만 아는 비밀이나 영적 확신을 하나님의 권위와 동일시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약속을 믿는 것과 취업이나 치료처럼 개별 사건의 결과와 시점을 미리 안다고 주장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lt;/p&gt;&lt;p&gt;구원하지 못하는 우상을 메던 사람들도 구원자의 초청을 받는다. 재산이나 인맥, 성과에 삶의 최종 안전을 맡기는 사람은 자신이 의지하는 것이 실제로 구원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하나님께 돌이키는 사람은 먼저 완전해져야 구원을 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께 자신을 맡긴다.&lt;/p&gt;&lt;p&gt;하나님께 노하는 자에게 수치가 있으리라는 경고는 그분께 맞서는 삶을 향한다. 상실의 아픔을 하나님께 아뢰는 탄식은 하나님을 등지고 거스르는 태도와 구별된다. 시편 22편처럼 버림받은 듯한 고통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가 될 수 있다. 이사야의 구원자는 지금 분노하던 사람에게도 돌아오라고 부르신다.&lt;/p&gt;&lt;p&gt;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선다면 지도자와 회중도 자신이 한 일에 답해야 한다. 음식과 날의 차이로 같은 주님께 속한 성도를 업신여길 수 없으며, 심판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이유로 확인된 불의의 책임을 덮을 수도 없다.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은 십자가까지 낮아지신 주님을 따라야 하며, 집단의 힘으로 이웃을 굴복시키거나 침묵시켜서는 안 된다.&lt;/p&gt;&lt;p&gt;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과 땅끝을 향한 초청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넓은 긍휼을 드러낸다. 교회는 유대인에게 주신 약속을 버림의 이야기로 바꾸거나 다른 민족과 종교의 이웃을 멸시할 수 없다. 구원을 부르는 초청을 분명히 말하며 자신도 은혜로 받아들여진 사람임을 기억해야 한다.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자신의 바람을 하나님의 확정된 일정으로 바꾸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구원자의 약속을 붙든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18/"&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18&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19/"&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19&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20/"&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20&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2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21&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22/"&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22&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23/"&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23&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24/"&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24&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525/"&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5:25&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46:1-13 짐이 된 우상, 백발이 되기까지 업으시는 하나님</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6.1-13/</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6.1-13/</guid><description>이사야 46:1-13을 따라 짐승 등에 실려 가는 바벨론의 신상과 태에서부터 백발까지 백성을 업으시는 여호와, 처음부터 끝을 알리시는 계획과 가까이 온 구원을 해설한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1-2절은 바벨론의 신들이 무너지는 장면이다. 벨과 느보가 차례로 쓰러진 뒤 2절에서 두 동사가 순서를 바꾸어 “일제히” 쓰러졌다고 선언한다. 벨은 므로닥(마르둑)으로도 불린 바벨론의 주요 신이며 느보는 그의 아들로 알려졌다. 예레미야 50:2도 벨과 므로닥을 같은 신의 이름으로 부르고, 벨과 느보의 이름은 고레스 원통에도 나온다. 두 동사를 경배하는 몸짓으로 읽는 견해도 있으나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핸드북은 2절의 포로 행렬에 비추어 몰락으로 읽으며, 이 장면을 패한 바벨론 사람들의 피난으로 이해한다.&lt;/p&gt;&lt;p&gt;사람들이 메고 다니던 신상은 이제 짐승과 가축의 등에 실린다. 히브리어의 “짐승과 가축의 것이 되었다”는 말을 대부분의 번역은 그 등에 실렸다는 뜻으로 읽는다.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נְשֻׂאֹתֵיכֶם, 네수오테켐)은 바벨론 사람들이 운반하던 신상이며,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을 누르는 무거운 짐이 된다. UBS는 짐승이 그 짐 때문에 지쳐 간다고 풀이하고, 축제 행렬에서 신상을 운반하는 장면으로 볼 근거는 본문에 없다고 설명한다. 메다, 싣다, 짐이라는 말이 모여 사람들이 섬기던 신의 무게와 무력함을 드러낸다.&lt;/p&gt;&lt;p&gt;신들은 “그 짐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자신들도 포로가 된다. “짐”은 1절에서 짐승 등에 실린 자기 신상을 가리킨다. “자기들도”에 해당하는 말(וְנַפְשָׁם, 베나프샴)은 문자적으로 “그들의 네페쉬”이며, UBS는 신상 뒤에 있다고 여겨진 신 자체를 가리킨다고 풀이한다.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간 제국의 신들이 이제 포로의 길을 간다. 사람을 지켜 줄 것으로 기대된 신은 자기 형상도 지키지 못한다. 제국의 정치적 우세가 그 신들의 구원 능력을 보증하지 못한다.&lt;/p&gt;&lt;p&gt;3절부터는 여호와께서 야곱의 집과 포로지에 남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그들은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사람들이다. “안겼고”와 “업힌”에 쓰인 두 동사는 1절에서 신상이 짐승 등에 실리고 사람에게 메인다는 말에 쓰였다. 사람이 메어야 하는 바벨론의 신상과 백성을 메시는 여호와가 같은 동사로 대조된다. 개역개정의 “내게”는 히브리어에 따로 없고 문맥에서 그 행위자가 하나님임을 밝힌 말이다. UBS는 이스라엘을 출생부터 노년까지 돌봄받는 한 사람처럼 그린다고 보고, 출생을 출애굽 때 민족이 태어난 일과 연결한다.&lt;/p&gt;&lt;p&gt;백성을 메는 말은 2절의 “짐”과도 같은 어근으로 이어진다. UBS는 이스라엘이 죄 때문에 하나님께 자주 짐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말놀이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들의 어려움에도 하나님은 짐을 내려놓지 않고 지탱해 오셨다. 포로 생활로 관계가 끝났다고 여기는 백성에게 하나님은 민족의 처음부터 이어진 돌봄을 기억하게 하신다.&lt;/p&gt;&lt;p&gt;4절의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는 문자적으로 “노년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이다”(וְעַד־זִקְנָה אֲנִי הוּא, 베아드-지크나 아니 후)이다. 백성이 늙어도 하나님이 같은 분이심을 선언한다. “품을 것이라”는 말(אֲנִי אֶסְבֹּל, 아니 에스볼)은 무거운 짐을 진다는 뜻이며, 7절에서 사람이 신상을 어깨에 멘다는 말로 다시 쓰인다. 따뜻하게 안는 모습과 함께 무거워진 백성을 짊어지는 수고를 그린다.&lt;/p&gt;&lt;p&gt;하나님은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고 약속하신다. UBS는 4절에 독립 대명사 “나”가 다섯 번 나와 하나님이 친히 하셨고 하실 일을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이스라엘을 민족으로 빚으신 분(43:7; 44:2)이 계속 메고 구하신다. “구하여 내리라”는 2절에서 우상이 하지 못한 행동이며, “백발”과 “포로”의 비슷한 소리도 포로 생활 중에 지속되는 돌봄을 암시한다. 백성의 쇠약함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끝내지 못한다.&lt;/p&gt;&lt;p&gt;5-7절은 누구를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는지 묻고 신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따라간다. 사람은 금과 은을 모아 도금장이를 고용하고 신을 만들게 한 뒤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한다. 이어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고 자리에 둔다. UBS가 지적하듯 “들어”와 “메어다가”는 4절에서 하나님이 백성을 “업을 것이요”, “품고” 하실 때와 같은 동사다. 값비싼 재료와 장인의 기술로 만든 신도 놓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부르짖음에 응답하거나 고난에서 구하지 못한다. 6절에서 장인이 만드는 “신”과 9절에서 “나는 하나님이라” 하실 때의 낱말은 같지만, 전자는 사람이 메고 다니며 후자는 백성을 메신다.&lt;/p&gt;&lt;p&gt;8절의 “장부가 되라”(וְהִתְאֹשָׁשׁוּ, 베히트오샤슈)는 구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동사다. “용감하다”는 어근에서 온 말로 보고 “굳게 서라”로 옮기기도 한다. UBS는 “기억하라”, “마음에 두라”와의 병행을 근거로 “생각하라”를 선호한다. “패역한 자들”은 고의로 거역하는 사람들이다. “장부”는 신체적 강함이나 남성다운 기질보다 하나님과 우상을 기억하며 분별하라는 문맥에 속한다. 9절에서는 옛적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라고 명한다. 히브리어는 “나는”을 한 번 쓰고 하나님을 가리키는 두 명사를 잇지만, 개역개정은 “나는 하나님이라”를 두 번 반복하여 그분 외에 다른 이도 같은 이도 없음을 각각 완결된 선언으로 옮긴다.&lt;/p&gt;&lt;p&gt;10-11절에서 하나님은 시초부터 종말을 미리 알리고 말씀하신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나의 뜻이 설 것이니”(עֲצָתִי תָקוּם, 아차티 타쿰)는 그분의 계획이 실현된다는 뜻이다. “기뻐하는 것”은 44:28에서 고레스가 성취할 하나님의 “기쁨”과 같은 말이다. 동쪽의 “사나운 날짐승”(עַיִט, 아이트)과 먼 나라의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은 고레스를 가리킨다. UBS는 맹금의 비유를 적을 빠르게 덮쳐 이기는 모습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앞날을 알릴 뿐 아니라 계획을 수행할 사람을 부르신다.&lt;/p&gt;&lt;p&gt;“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는 네 마디는 반복되는 강조어를 “반드시”로 살린 번역이다. 말하고 계획한 일은 완료형으로, 이루고 시행할 일은 미완료형으로 표현되어 계획과 실행의 주체가 같은 하나님임을 드러낸다. “계획하였은즉”의 동사는 45:18에서 땅을 “지으시고”라고 할 때와 같다. 땅을 빚으신 하나님이 역사의 계획도 빚고 이루신다. 고레스는 그 계획을 수행하도록 불린 사람이다.&lt;/p&gt;&lt;p&gt;12절은 3절처럼 “내게 들으라”는 부름으로 시작한다. “마음이 완악하여”(אַבִּירֵי לֵב, 압비레 레브)는 문자적으로 “마음이 강한 자들”이며 완고함을 가리킨다. UBS는 이들을 고레스를 통한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던 포로민으로 본다. 칠십인역은 “마음이 약한 자들”로 옮기지만 마소라 본문은 사해 사본의 지지를 받는다고 설명한다. “공의에서 멀리 떠난”은 하나님이 베푸실 승리와 구원을 멀다고 여기는 태도로 읽는다.&lt;/p&gt;&lt;p&gt;13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를 가깝게 하신다.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קֵרַבְתִּי צִדְקָתִי, 케라브티 치드카티)은 완료형으로, UBS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확정한다고 설명한다. 백성이 멀다고 여긴 공의를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며, 우상이 주지 못한 구원은 지체하지 않는다. 시온에 구원을 베푼다는 말은 예루살렘 자체의 구원인지 시온을 통해 세상에 구원을 펴심인지 해석이 갈린다.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을 비춘다는 뜻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영광을 주신다는 뜻으로 읽힌다. 모든 읽기에서 시온과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약속은 확정되어 있다. 여기서 공의는 구원과 짝을 이루어 백성을 건져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가리킨다. 완고한 백성을 책망하시는 분이 그들을 메고 구원하신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하나님이 백성을 업으신다는 약속은 출애굽과 광야 전승에 뿌리를 둔다. 출애굽기 19:3-6에서 하나님은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자신에게 인도하신 일을 기억하게 하신 뒤 언약을 지키며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살라고 요청하신다. 업으신 은혜가 순종의 요청에 앞선다. 온 세계의 주인이신 그분의 돌봄은 이스라엘이 작고 약해져도 끊어지지 않는다. 이사야 46장도 백성을 처음부터 돌보셨다는 선언 뒤에 패역과 완고함을 책망한다. 은혜의 기억이 돌이킴과 순종의 근거가 된다.&lt;/p&gt;&lt;p&gt;신명기 1:29-33에서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들을 안듯 백성을 안고 길을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신명기 32:10-12는 황무지에서 백성을 보호하고 독수리처럼 날개에 업어 홀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노래한다. 다른 신은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호세아 11:1-4에서도 하나님은 어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고 걸음을 가르치며 안고 먹이셨으나 백성은 그 돌봄을 알지 못하고 우상에게로 갔다. 이사야 46장은 같은 돌봄을 태에서 백발까지 넓혀, 오랜 불신에도 백성을 붙드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한다.&lt;/p&gt;&lt;p&gt;이사야 40:10-11에서는 강한 팔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어린 양을 품고 젖먹이는 어미 양을 온순히 인도하신다. “품에 안으시며”(וּבְחֵיקוֹ יִשָּׂא, 우베헤코 잇사)의 동사는 46:3-4의 “업힌”, “업을 것이요”와 같다. 어린 양을 들어 올리는 목자와 백성을 태에서 노년까지 메시는 하나님은 같은 돌봄을 나타낸다. 창조주의 능력이 약한 이의 형편에 맞춘 인도로 드러난다.&lt;/p&gt;&lt;p&gt;시편 115:4-8의 우상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소리도 내지 못한다. 이사야 46:7의 움직이지도 응답하지도 못하는 신상과 같다.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물을 때 시인은 그분이 하늘에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신다고 답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살아 일하시고, 보이는 형상은 구원하지 못한다. 시편은 우상을 만들고 의지하는 사람도 그것과 같아진다고 경고한 뒤 여호와를 도움과 방패로 의지하라고 부른다. 이사야의 우상 풍자도 “내게 들으라”는 부름으로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께 돌이킨다.&lt;/p&gt;&lt;p&gt;예레미야 50:1-3에서 바벨론의 함락은 벨과 므로닥의 수치와 연결된다. 51:44에서는 하나님이 벨을 벌하고 그가 삼킨 것을 끌어내신다. 이사야 46:2에서 벨이 포로로 끌려가듯 제국의 신은 자신이 차지한 백성을 끝까지 붙잡아 둘 수 없다. 제국의 우세가 무너질 수 있다는 선포는 그 지배 아래 사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릴 근거가 된다.&lt;/p&gt;&lt;p&gt;이사야 44:6-8의 처음과 마지막이신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리시고 백성을 그 일의 증인으로 세우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46:9-11의 기억과 예고, 계획의 성취가 이 논쟁을 잇는다. 백성의 시작을 아시는 분이 미래의 구원도 알리신다. 믿음은 모든 정보를 가진 사람의 안전보다 말씀하신 분의 변함없음에 의존한다.&lt;/p&gt;&lt;p&gt;46:13의 가까운 구원은 51:4-8에서 만민의 빛으로 확장된다. 섬들도 하나님의 팔을 기다리고 하늘과 땅이 사라져도 그분의 구원과 공의는 폐하여지지 않는다. 고레스를 통한 귀환을 약속한 말씀은 백성의 삶과 더 넓은 세계를 향한다. 56:1-3은 구원이 가까우므로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고 요청하고, 이방인도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분리될 것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한다. 가까운 구원은 하나님의 돌봄에 응답하여 의롭게 살라는 부름으로 이어진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마태복음 11:25-30에서 아버지를 알리시는 아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자신에게 불러 쉬게 하신다. 이 초청은 이사야 46장의 직접 인용은 아니지만, 사람이 메고 다녀야 하는 신과 백성을 짊어지시는 하나님이라는 대조와 주제가 맞물린다. 지친 사람은 구원자를 떠받치기 위해 불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르시는 아들에게 나아가 그분께 배우며 쉼을 얻는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의 멍에를 메는 삶에는 순종의 수고가 있으나, 그 수고는 먼저 부름받고 사랑받은 사람의 응답이다.&lt;/p&gt;&lt;p&gt;이사야 53:4의 종이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였거늘”에 쓰인 두 동사는 46:4에서 하나님이 “업을 것이요”, “품고” 하실 때와 같다. 53:11의 “담당하리로다”와 53:12의 죄를 “담당하며”도 각각 그 동사로 이어진다. 46장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붙들어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53장은 다른 이의 고통과 죄를 감당하는 종의 고난을 말한다. 남의 짐을 실제로 짊어지는 구원이 두 본문을 잇는다.&lt;/p&gt;&lt;p&gt;베드로전서 2:21-25은 죄 없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고 나무에 달려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한다. 그 목적은 우리가 죄에 죽고 의에 살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먼저 자신을 내어 주신 목자에게 돌아온다. 그리스도가 지친 사람에게 주시는 쉼에는 죄의 짐을 감당하신 십자가가 있다.&lt;/p&gt;&lt;p&gt;요한복음 10:27-30에서 예수는 자신의 양들을 아시고 영생을 주시며, 누구도 그들을 자신과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고 하신다. 양은 그 음성을 듣고 따른다. 이사야의 태에서 노년까지 이어지는 돌봄을 읽는 성도에게 이 약속은 변화하는 형편 속에서도 자신을 붙드시는 목자를 신뢰하게 한다.&lt;/p&gt;&lt;p&gt;사도행전 17:16-31에서 바울은 우상이 가득한 아덴에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창조주를 선포한다. 그분은 부족한 것이 있어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아야 하는 분이 아니며 금과 은과 돌에 사람의 기술로 새긴 형상처럼 여겨질 수 없다. 사람이 메는 신과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차이를 이사야와 같은 방향으로 밝힌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고 그분을 힘입어 살아가게 하신다. 바울은 그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증거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명하며 장래의 공의로운 심판을 선포한다. 돌보시는 하나님과 완악함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은 같은 분이다.&lt;/p&gt;&lt;p&gt;로마서 1:16-17은 복음을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부르고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이사야 46:13에서 백성에게 가까이 오는 공의와 구원이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주제로 이어진다. 구원은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는 순서로 선포된다. 시온과 이스라엘을 향한 약속의 역사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도 미친다.&lt;/p&gt;&lt;p&gt;히브리서 13:5-8은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돈 사랑을 버리고 담대히 살라고 권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말한다. 제국의 신들이 쓰러지는 가운데 백성을 계속 메시는 하나님처럼,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은 재물과 형편의 변화에도 지속된다.&lt;/p&gt;&lt;p&gt;요한계시록 22:12-17에서 예수는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이시며 다시 오실 분이시다. 그분은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수를 값없이 받으라고 초대하신다.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고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처음과 마지막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미래를 향한다. 신자는 그 약속을 기다리며 지금 들려오는 부름에 응답한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사람이 만들고 지탱해야 하는 신은 위기에서 사람을 건지지 못한다. 일과 재산, 평판은 생활의 자원이지만 그 상실이 자신의 가치까지 없앤다고 여길 때 삶 전체가 그 대상을 보전하는 일에 매인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탱해야 하는 구원자가 아니라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을 섬긴다는 이유로 교회의 존속과 명성을 위해 성도를 소모시킬 수 없다.&lt;/p&gt;&lt;p&gt;바벨론 신들의 몰락은 제국의 번영이 구원의 능력을 보증하지 못함을 드러낸다. 교회는 정권이나 정당, 시장의 성장과 국가의 힘에 구원자의 자리를 맡길 수 없다. 공적인 책임을 감당하되 권력의 우세를 하나님의 승인과 동일시하지 않아야 한다. 고레스도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도록 불린 사람이다. 그를 쓰신다는 약속이 그의 모든 결정을 신적 권위로 높이지 않는다.&lt;/p&gt;&lt;p&gt;노년과 백발의 약속은 먼저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한 생애로 그린다. 그 안에 드러난 지속적인 돌봄은 사람의 생산성과 기여도로 가치를 매기는 태도를 고친다. 나이가 들고 도움이 필요해져도 하나님이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사람의 존엄은 줄어들지 않는다. 돌보는 사람도 하나님께 업혀 가는 피조물이며 모든 짐을 혼자 무한히 감당할 능력을 요구받지 않는다.&lt;/p&gt;&lt;p&gt;“장부가 되라”는 말은 기억하고 생각하며 마음에 두라는 부름 속에 있다. 두려움과 슬픔을 숨기라는 요구로 사용할 수 없다. 백성은 우상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돌봄을 기억하며 완고한 불신에서 돌아서야 한다.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판단과 행동을 고친다.&lt;/p&gt;&lt;p&gt;하나님의 뜻이 선다는 약속은 고레스를 통한 포로 회복이라는 문맥에서 주어졌다. 자신의 계획이나 현재의 질병과 경제적 어려움이 원하는 때에 해결되리라는 보증으로 옮길 수 없다. 그리스도의 백성은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구원이 가까우므로 정의를 지키고 의를 행하라는 부름에 응답한다. 그리스도가 죄를 담당하신 목적도 우리가 죄에 죽고 의에 살게 하는 데 있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6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6:1&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62/"&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6:2&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63/"&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6:3&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64/"&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6:4&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67/"&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6:7&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68/"&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6:8&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610/"&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6:10&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61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6:11&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612/"&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6:12&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613/"&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46:13&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48:12-22 바벨론에서 나오라: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이의 부름</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8.12-22/</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8.12-22/</guid><description>하늘과 땅을 부르시는 하나님이 고레스를 불러 바벨론을 치게 하시고, 놓쳐 버린 평강을 탄식하신 뒤 포로 된 백성에게 즐거운 소리로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시는 말씀을 절의 흐름에 따라 풀이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이사야 48:1-11에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도 진실과 공의가 없는 야곱을 책망하셨다. 그들의 목은 쇠의 힘줄이요 이마는 놋이지만,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노하기를 더디 하고 멸절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12절은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고 그들을 다시 부른다. 앞서 자기 이름과 출신을 내세웠던 백성에게 “내가 부른”(מְקֹרָאִי, 메코라이)이라는 같은 부르다 동사를 써서 그 이름의 근원을 밝힌다. 복수로 시작한 1절과 달리 단수 명령으로 온 백성을 한 사람처럼 대하신다.&lt;/p&gt;&lt;p&gt;하나님은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고 선언하신다(12절). “나”를 세 번 앞세워 처음 일들을 알리고 이루신 바로 그분이 말씀하심을 강조한다. 41:4의 세대들을 부르시는 분, 44:6의 다른 신이 없는 처음과 마지막이신 분이 이제 야곱을 부르신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분의 부르심에서 비롯되었다.&lt;/p&gt;&lt;p&gt;13절에서 하나님의 손은 땅의 기초를 정하고 오른손은 하늘을 편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하늘과 땅이 일제히 일어선다. 이스라엘을 부르신 분이 피조 세계를 부르시고 15절에서는 고레스를 부르신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즉시 응답하는 것과 달리, 이스라엘은 “들으라”는 말을 거듭 들어야 한다. 8절의 열리지 않은 귀가 18절의 탄식을 준비한다. 평강을 놓친 까닭은 하나님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 백성의 듣지 않음에 있었다.&lt;/p&gt;&lt;p&gt;14절은 모두 모여 들으라고 한다. 청중은 이스라엘일 수도 열방일 수도 있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해설은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부름을 넓게 남겨 두도록 권한다. “그들 중에 누가 이 일들을 알게 하였느냐”에서 일부 히브리어 사본을 따라 “너희”로 옮기는 번역도 있으나, UBS는 마소라 본문의 “그들”을 따르고 이방 신들로 읽는 견해를 소개한다. 백성이 우상에게 공을 돌리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미리 알리셨다는 5절의 논증이 이어진다.&lt;/p&gt;&lt;p&gt;“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고레스이다. “사랑하는 자”(אֲהֵבוֹ, 아헤보)는 문자적으로 “그를 사랑하셨다”라는 동사이다. UBS는 이런 관계에 사랑이라는 표현이 쓰인 곳은 여기뿐이라고 설명하며, 신명기 4:37의 조상 사랑과 견주어 이 표현을 보존한다. “택하다”로 고쳐 읽거나 “나의 친구”로 옮기는 데 반대한다. NET는 “동맹자”로 옮기며 친구나 언약의 상대도 가능한 번역으로 제시한다. 45:1-4에서 고레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도 야곱을 위해 부름받았다. 친밀한 호칭은 그를 통해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관계를 나타낸다.&lt;/p&gt;&lt;p&gt;“나의 기뻐하는 뜻”(חֶפְצוֹ, 헤프초)은 문자적으로 “그의 기뻐하는 뜻”이다. 접미어는 여호와나 고레스를 가리킬 수 있지만, 44:28의 고레스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한다는 말씀은 개역개정처럼 하나님의 뜻으로 읽는 것을 뒷받침한다. “그의 팔”(וּזְרֹעוֹ, 우즈로오)에도 소유자가 명시되지 않아 고레스의 팔이나 여호와의 팔로 읽을 수 있다.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의 동사는 개역개정이 보충한 것이다. UBS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는 해석과 고레스의 힘으로 옮기는 번역, 사해 사본의 한 본문에 따라 “팔” 대신 “자손”으로 읽는 번역을 소개하면서 마소라 본문을 따르도록 권한다.&lt;/p&gt;&lt;p&gt;15절은 “나 곧 내가”를 겹쳐 하나님이 말씀하고 고레스를 부르며 오게 하셨다고 선언한다. 그다음 그의 길이 형통하리라는 결과가 나온다. 45:13에서도 하나님이 고레스의 모든 길을 곧게 하신다. 우상은 아무것도 알리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사람을 부르고 뜻을 이루신다.&lt;/p&gt;&lt;p&gt;16절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것을 들으라”고 다시 부른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숨은 곳에서 말씀하지 않으셨고, 예고한 일이 일어날 때 거기 계셨다고 하신다. UBS는 이 부름이 14절의 모이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 고레스에 관한 말씀을 감싼다고 본다. “처음부터”는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은 처음이나 고레스 사명의 시작으로 읽을 수 있다. “거기에 있었노라”는 사건에 관여하셨다는 뜻으로 풀이한다.&lt;/p&gt;&lt;p&gt;16절 끝에서는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느니라”고 화자가 바뀐다. 개역개정은 앞 문장에 “하셨느니라”를 넣어 경계를 표시한다. “나를 보내셨다”(שְׁלָחַנִי, 셸라하니)고 말하는 이는 여호와를 3인칭으로 부르는 보냄받은 사람이다. 고레스, 이스라엘, 예언자, 메시아 등이 제안되며, UBS는 예언자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보고 NET는 고레스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lt;/p&gt;&lt;p&gt;“그의 영”(וְרוּחוֹ, 베루호)은 “주 여호와와 그의 영이 나를 보내셨다”라는 주어로도, 개역개정처럼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다”라는 목적어로도 읽힌다. UBS는 하나님이 영을 보내시는 용례에 따라 목적어로 읽되, 영이 따로 파송된다기보다 보냄받은 이가 하나님의 영, 곧 능력을 지니고 간다는 뜻으로 푼다. “이제는”은 새로운 발화를 표시하고, 17절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도입한다. 화자의 신원과 구문에 차이가 있어도 파송과 하나님의 영이 연결된다.&lt;/p&gt;&lt;p&gt;17절의 “너희의 구속자”(גֹּאַלְךָ, 고알레카)는 문자적으로 단수인 “너의 구속자”이며 이후의 “네게”, “너를”, “네 하나님”과 이어진다. 레위기 25:25에서 가난해진 친족의 기업을 되찾아 주는 가까운 친척과 같은 계열의 말이다. 곤경에 빠진 백성을 건지시는 하나님과의 가까운 관계를 나타낸다. 43:14에서도 구속자는 백성을 위해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신다.&lt;/p&gt;&lt;p&gt;구속자는 백성을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걸어갈 길로 인도하신다. “유익하도록”(לְהוֹעִיל, 레호일)은 44:10에서 우상이 “무익하다”고 할 때 쓴 동사와 같다. 가르치고 인도한다는 분사형은 그분의 한결같은 모습을 그린다. 15절에서 고레스의 길을 형통하게 하신 분이 이제 이스라엘의 길을 가르치신다.&lt;/p&gt;&lt;p&gt;18절의 “주의하였더라면”(לוּא הִקְשַׁבְתָּ, 루 히크샤브타)은 이미 놓친 기회를 탄식한다. 그랬다면 평강이 강처럼 흐르고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다. NET는 “네 평강”을 언약에 순종하는 백성의 평안과 번영으로, “네 공의”(וְצִדְקָתְךָ, 베치드카테카)를 원수에게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푼다. 이 해석에서 공의는 개인의 도덕성보다 백성을 위한 구원과 회복을 가리킨다. 끊이지 않는 물은 풍성함과 안정의 그림이다.&lt;/p&gt;&lt;p&gt;19절은 자손이 모래처럼 많고 이름이 하나님 앞에서 끊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탄식한다. 아브라함의 약속을 떠올리는 말이다. “끊어지다”는 9절의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와 같은 어근이다. 불순종은 이름이 끊어질 위험을 불렀지만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백성을 끊지 않겠다고 하셨다. 놓친 복을 탄식하신 뒤 바벨론을 떠날 길을 여신다.&lt;/p&gt;&lt;p&gt;20절은 바벨론에서 나와 갈대아인을 피하라고 명령한다. “피하고”(בִּרְחוּ, 비르후)는 도망하라는 긴급한 부름이며 그 떠남에는 즐거운 노랫소리가 따른다. “반포하여”(הוֹצִיאוּהָ, 호치우하)는 소식을 내보내라는 뜻으로, 백성이 “나와서”라는 말과 같은 어근이다. 백성이 바벨론에서 나오듯 구속의 소식도 땅 끝까지 나가야 한다. 하나님이 알리고 들려주셨던 일을 이제 백성이 알리고 들려준다.&lt;/p&gt;&lt;p&gt;그 소식은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이다. “구속하셨다”(גָּאַל, 가알)는 17절의 구속자와 같은 동사이며 완료형으로 여호와의 일을 선포한다. 44:23에서도 같은 선언이 하늘과 땅의 노래를 부른다. 바벨론을 떠나는 백성은 자기 힘으로 자유를 얻었다고 자랑하지 않고 여호와의 구속을 알린다.&lt;/p&gt;&lt;p&gt;21절은 사막에서 목마르지 않고 바위에서 물이 솟는 길을 노래한다. 개역개정은 히브리어 완료형과 연속 미완료형을 과거로 옮겨 출애굽을 돌아보게 한다. NET는 현재형으로 옮기며 바벨론 귀환을 출애굽기 17:6의 물 공급에 겹쳐 읽고 이사야 35:6, 49:10도 같은 그림을 쓴다고 설명한다. 두 해석 모두 출애굽 때 물을 주신 하나님이 새 길에서도 백성을 돌보신다는 소망을 준다.&lt;/p&gt;&lt;p&gt;22절은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라는 경고로 끝난다. 거의 같은 선언이 57:21에 다시 나온다. 18절의 놓친 평강과 마지막의 평강 없음이 맞물린다.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부름과 광야의 물을 받았어도 말씀을 거부하는 삶에는 평강이 없다. 48장에서는 이스라엘이 먼저 책망받았으므로 이 경고도 우선 언약 백성을 향한다. 구속받은 백성은 이제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창세기 22:15-18은 말씀을 준행한 아브라함에게 모래 같은 자손과 천하 만민의 복을 약속한다. 이사야 48:18-19는 명령을 듣지 않은 후손이 그 풍성함을 놓쳤다고 탄식한다. 포로 생활은 땅과 성읍뿐 아니라 자손과 이름이 끊어질 위기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백성을 멸절하지 않으시고 다시 야곱과 이스라엘이라 부르신다. 땅 끝까지 알려야 할 구속의 소식은 열방의 복이라는 언약의 방향을 잇는다.&lt;/p&gt;&lt;p&gt;48:1-2의 백성은 이스라엘의 이름과 거룩한 성 출신임을 내세우면서 진실과 공의를 버렸다. 조상의 이름이 조상처럼 응답하는 일을 대신하지 못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다시 길을 여시기에 백성은 응답할 수 있으며, 그 말씀을 거부한 책임도 진다.&lt;/p&gt;&lt;p&gt;출애굽기 17:1-7에서 목마른 백성은 모세와 다투며 여호와가 함께 계신지를 시험했다. NET는 그 다툼을 소송하듯 맞서는 행동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모세가 반석을 치게 하여 물을 주셨다. 이사야 48:21은 그 공급을 바벨론 귀환의 길에 겹쳐 놓는다. 완고한 백성에게 다시 물을 주시는 은혜이다. 맛사와 므리바라는 이름에는 시험과 다툼의 기억도 남는다. 구출과 공급을 받은 백성도 불순종의 경고를 들어야 한다.&lt;/p&gt;&lt;p&gt;신명기 30:1-20은 흩어진 백성이 돌아오면 하나님이 모으시고 마음에 할례를 주어 사랑하게 하신다고 약속한다. 순종과 번성, 배역과 멸망의 관계는 이사야 48:18-19의 탄식에도 나타난다. 다만 신명기 30장은 돌아옴을 먼저 말하고, 이사야 48장에서는 여전히 완고한 백성에게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길을 여신다. 귀환하는 몸과 함께 듣는 마음이 새로워져야 하며, 그 마음도 하나님께 받아야 한다.&lt;/p&gt;&lt;p&gt;신명기 30:11-14은 명령이 하늘이나 바다 건너에 있지 않고 입과 마음에 가까워 행할 수 있다고 한다. 이사야 48:16에서도 하나님은 숨은 곳에서 말씀하지 않으셨다. 백성은 공개적으로 주어진 말씀을 거부했다. 18절은 지난 실패를 탄식하고 20절은 지금 열린 길에 응답하라고 부른다.&lt;/p&gt;&lt;p&gt;이사야 52:11-12는 바벨론에서 나와 정결하라고 명한다. 48:20의 “도망하라”와 달리 52:12는 도망하듯 황급히 다니지 않으리라고 약속한다. “황급히”는 출애굽기 12:11의 급히 먹는 유월절을 떠올린다. 첫 출애굽의 서두름과 달리 여호와가 앞서 가고 뒤에서 호위하시므로 백성은 보호 아래 떠난다. 각 본문의 속도와 분위기는 달라도 구원자의 인도에 응답하여 길을 나선다는 흐름은 이어진다.&lt;/p&gt;&lt;p&gt;이사야 46장에서 바벨론의 신 벨과 느보는 짐승에게 실린 무거운 짐이다. 여호와는 처음부터 종말을 알리고 동쪽에서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르며 말씀하신 대로 이루신다(46:10-11). 48:12-15의 고레스 부르심도 그 약속을 잇는다. 45:1-7, 13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 왕이 야곱을 위해 부름받아 값을 받지 않고 포로를 놓으리라고 밝힌다. 에스라 1:1-4에서 그 조서는 귀환과 성전 건축의 길을 연다. 하나님은 낯선 이방 왕에게 바벨론을 치고 귀환을 허락하는 과업을 맡기셨다.&lt;/p&gt;&lt;p&gt;이사야 57:19-21은 먼 자와 가까운 자에게 평강과 치유를 선언한 뒤 악인에게 평강이 없다고 경고한다. 48:18의 바다 물결은 끊이지 않는 공의를 그리지만 57:20의 요동하는 바다는 악인의 불안정을 그린다. 같은 이미지의 뜻은 문맥에 따라 달라진다. 하나님은 고치시는 은혜로 부르시며 악한 길에서 돌아설 것을 요구하신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이사야 48장의 바벨론 해방은 포로 유다인에게 잃었던 땅과 공동체로 돌아갈 길을 열었다. 그러나 귀환하는 백성 중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으며, 옛적부터 열리지 않은 귀가 저절로 열리지는 않는다. 고레스의 해방 뒤에도 완고한 마음의 회복이 필요하다.&lt;/p&gt;&lt;p&gt;48:20에서 야곱은 구속받은 종이다. 49:3-6에서는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종이 야곱을 돌아오게 하고 이방의 빛이 되어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한다. 50:4-5에서 그 종은 하나님이 귀를 열어 주셔서 거역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듣지 않는 야곱과 순종하는 종이 대비된다. 누가복음 2:32는 예수를 이방의 빛으로 찬양하고 빌립보서 2:8은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밝힌다. 그리스도는 그 말씀을 끝까지 듣고 순종하셨다.&lt;/p&gt;&lt;p&gt;로마서 6:3-11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사람은 새 생명 가운데 걸으며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도록 부름받는다. 역사 속 바벨론을 떠나는 사건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새 생명은 문맥이 다르지만, 하나님이 여신 자유에 백성이 응답하여 살아간다는 점에서 연결된다. 두 경우 모두 자유의 근원은 하나님의 구원이다.&lt;/p&gt;&lt;p&gt;이사야의 구속자는 곤경에 빠진 친족을 되찾는 가까운 친척을 떠올리게 한다. 45:13과 52:3은 백성이 돈 없이 놓이고 속량되리라고 한다. 베드로전서 1:18-19는 헛된 행실에서의 대속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이루어졌다고 밝힌다. 히브리서 2:14-15에서 그분은 자녀들과 같은 혈과 육을 지니고 죽음으로 죽음의 세력을 멸하여 종노릇하던 사람을 놓아주신다. 구속자의 가까운 관계와 대가는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구체화된다.&lt;/p&gt;&lt;p&gt;요한계시록 1:9-18에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이사야 41:4, 44:6, 48:12의 여호와의 칭호를 사용하시며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지니셨다고 밝히신다. 요한에게 오른손을 얹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주님은 교회의 결말이 박해자의 손에 있지 않음을 알리신다. 이 연결은 48:12의 자기소개에 근거한다. 48:16의 보냄받은 화자는 여전히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lt;/p&gt;&lt;p&gt;이사야 48:16의 파송과 영은 42:1과 61:1의 사명과 이어진다. 하나님은 종에게 영을 주어 이방에 정의를 베풀게 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와 포로를 돌보게 하신다. 누가복음 4:16-21에서 예수는 61장의 말씀을 읽고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신다. 예수께서 직접 적용하신 본문은 이사야 61장이며, 48:16은 같은 선지서의 파송과 영이라는 주제를 나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종의 사명은 약한 자를 살리는 은혜로 나타난다.&lt;/p&gt;&lt;p&gt;누가복음 4:25-29에서 예수는 은혜가 사렙다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미친 일을 기억하게 하신다. 청중은 분노하여 그분을 쫓아낸다. 은혜를 들으면서도 자기 기대와 경계를 고집하여 거부할 수 있다는 긴장은 듣지 않던 이사야의 백성을 떠올리게 한다.&lt;/p&gt;&lt;p&gt;고린도전서 10:1-11에서 바울은 광야의 반석이 그리스도였다고 밝히고, 은혜의 공급을 받은 백성 대다수가 멸망했다고 경고한다. 이사야 48:21을 직접 해석하는 구절은 아니지만 두 본문 모두 광야의 물과 공급을 기억한다.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잔과 귀신의 잔에 대한 경고(고전 10:16-21)는 구속의 선물을 누리는 사람이 누구에게 충성해야 하는지 묻는다.&lt;/p&gt;&lt;p&gt;요한계시록 18:4은 바벨론에서 나와 죄에 참여하지 말라고 부른다. 사치와 권력, 사람의 영혼까지 거래하는 질서가 심판받는다(18:13). 이사야의 포로들은 실제 바벨론을 떠났고 계시록의 교회는 자신이 참여하는 죄와 결별하도록 부름받는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만으로 그 참여가 끊어지지는 않는다.&lt;/p&gt;&lt;p&gt;에베소서 2:14-18은 이사야 57:19의 먼 자와 가까운 자에게 주시는 평강을 그리스도께 연결한다. 그분은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십자가로 한 몸이 되게 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신다. 요한복음 20:19-23에서는 상처를 지닌 채 살아나신 예수께서 평강을 선언하고 성령을 주어 제자들을 보내신다. 구속자가 여시는 평강에는 그분께 돌아와 살며 보내심에 응답하는 새 삶이 따른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들으라”는 부름은 12, 14, 16절에 반복된다. 백성은 몰라서만 실패한 것이 아니다. 공개적으로 주어진 말씀을 거부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내세웠다. 하나님께 부름받았다는 정체성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요구를 담는다. 직분과 경력이 진실과 공의를 대신하지 못한다.&lt;/p&gt;&lt;p&gt;18-19절에서 하나님은 백성이 놓친 평강과 자손의 복을 탄식하시고 곧바로 떠날 길을 여신다. 잘못으로 잃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면서 다시 응답하도록 부르신다. 이 탄식은 분명히 알려 주신 명령을 거부한 언약 백성의 역사에 주어졌다. 자녀가 없거나 형편이 어려운 개인에게 같은 불순종의 판결을 붙일 근거는 주어지지 않았다.&lt;/p&gt;&lt;p&gt;“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는 경고는 불안하거나 슬픈 감정에 대한 판결이 아니다. 말씀을 거부하고 악한 길을 고집하는 삶을 겨냥한다. 이 경고는 먼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던 백성을 향한다. 은혜를 경험하고 예배에 참여하면서도 거짓과 불의를 고집한다면 돌이켜야 한다.&lt;/p&gt;&lt;p&gt;바벨론을 떠나는 백성은 여호와가 야곱을 구속하셨다고 선포한다. 구원의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고백이다. 고레스도 하나님이 불러 사용하신 사람이지 구원자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백성은 낯선 사람을 통해 길을 여시는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lt;/p&gt;&lt;p&gt;귀환하는 길에도 사막이 있으며 백성은 하나님이 주시는 물을 필요로 한다.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고 부족함과 어려움이 모두 끝나지는 않는다. 그 길을 돌보시는 구속자께 의지하면서 말씀을 들어야 한다. 계시록의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부름도 자신이 참여하는 착취와 죄를 버릴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평강을 받는 사람은 이익과 안전을 위해 다른 사람을 소비하는 삶에서 돌이킨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Isa&amp;amp;chapter=48"&gt;NET Bible, Isaiah 48 번역 노트&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Exo&amp;amp;chapter=17"&gt;NET Bible, Exodus 17 번역 노트&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814/"&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48:14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816/"&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48:16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49:1-13 이방의 빛으로 삼아: 헛수고처럼 보이던 종의 사명</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9.1-13/</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9.1-13/</guid><description>태에서부터 부름을 받은 종이 헛되이 수고했다고 탄식하자, 하나님이 그에게 야곱을 돌이키는 일보다 더 큰 사명, 곧 이방의 빛이 되어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는 일을 맡기시는 말씀을 절의 흐름에 따라 풀이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48장은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명령(48:20), 광야에서 물을 내셨던 구원의 회상(48:21), 악인에게 평강이 없다는 선언(48:22)으로 끝난다. 고레스를 통한 바벨론의 몰락과 포로 해방을 선포한 뒤, 49장에서는 여호와의 종이 직접 섬들과 먼 곳의 민족들을 불러 사명을 들려준다. NET는 그를 42장에서 소개된 특별한 종으로 본다. “먼 곳”(מֵרָחוֹק, 메라호크)은 12절의 귀환자들이 오는 곳과 같은 표현이다. 먼 민족들에게 향한 말씀이 먼 곳에서 돌아오는 행렬로 이어진다.&lt;/p&gt;&lt;p&gt;종은 태에서부터 여호와께 부름받았고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이름이 기억되었다고 증언한다.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הִזְכִּיר שְׁמִי, 히즈키르 셰미)는 이름을 마음에 떠올리셨다는 뜻보다는 불러 언급하셨다는 뜻이다. 태와 복중을 병행한 표현은 종이 태어나 무엇을 하기 전부터 하나님이 그의 사명을 정하셨음을 강조한다.&lt;/p&gt;&lt;p&gt;2절에서 하나님은 종의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종을 갈고 닦은 화살처럼 만드신다. NET는 입을 그가 전할 말로 보고, 손 그늘에 숨기신 것은 알맞은 때에 쓰려고 아껴 두신 일로 설명한다. 두 번 나오는 “숨기시며”와 “감추시고”의 목적어는 종 자신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무기이며, 그를 보호하고 쓰실 때를 정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4절에서는 이렇게 부름받은 종이 헛수고를 탄식한다. 사명과 실패의 경험 사이에서 종과 하나님의 대화가 이어진다.&lt;/p&gt;&lt;p&gt;3절에서 하나님은 종을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부르신다.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אֲשֶׁר־בְּךָ אֶתְפָּאָר, 아셰르-베카 에트파아르)은 하나님이 종을 통하여 자기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뜻이다. 재귀형 동사는 하나님이 종을 자랑스러워하신다는 뜻보다 하나님 자신이 영광을 얻으신다는 뜻을 나타낸다.&lt;/p&gt;&lt;p&gt;종을 ‘이스라엘’이라 부르면서 야곱을 돌아오게 하는 일을 맡긴다는 점은 그의 정체에 관한 논의를 낳았다. 41:8-9, 44:21, 45:4에서 종은 백성 전체지만, 여기서는 개인처럼 말하며 이스라엘을 돌이킨다. 예언자 개인, 백성 전체, 백성 안에서 나머지를 책임지는 사람이나 무리라는 견해가 있다. NET는 포로 된 백성과 구별되는 ‘이상적인 이스라엘’로 본다. 종은 모세처럼 언약을 중보하고(8절) 속박에서 이끌어 내며(9절) 이스라엘이 맡았던 열방의 사명을 이룬다. 그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지니고 이스라엘을 위해 일한다.&lt;/p&gt;&lt;p&gt;4절의 “그러나 나는”은 하나님의 영광 선언과 종의 경험을 맞세운다. 종은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고 탄식한다. “무익하게 공연히”(לְתֹהוּ וְהֶבֶל, 레토후 베헤벨)는 비슷한 뜻의 토후와 헤벨을 겹쳐 허무함을 강조한다. 토후는 창세기 1:2에서 땅이 “혼돈하고”라고 할 때 쓰인 말이다. 종은 아무 성과 없이 힘마저 다 써 버렸다고 느낀다.&lt;/p&gt;&lt;p&gt;그러면서도 종은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고 고백한다. “나에 대한 판단”(מִשְׁפָּטִי, 미쉬파티)은 자신에 관한 바른 판단과 정당한 몫을, “나의 보응”(וּפְעֻלָּתִי, 우페울라티)은 일한 사람의 품삯을 가리킨다. 종은 눈에 보이는 결과가 헛수고처럼 보여도 최종 판단과 수고의 값을 하나님께 맡긴다. 탄식과 신뢰가 같은 절에 놓인다.&lt;/p&gt;&lt;p&gt;5절에서 종을 태에서 지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לְשׁוֹבֵב יַעֲקֹב אֵלָיו, 레쇼베브 야아코브 엘라우)는 하나님이 종을 지으신 목적을 나타낸다. 개역개정은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라고 여호와를 설명하지만, 히브리어 구문에서는 종에게 맡긴 사명도 나타난다. 6절은 이 일을 종의 사명으로 명시한다. UBS는 회개와 자주 연결되는 이 동사가 포로에서 몸으로 돌아오는 일과 마음을 돌이키는 일을 함께 가리킨다고 본다.&lt;/p&gt;&lt;p&gt;다음 구절에서 BHS 본문의 부정어 לֹא(로)를 따르면 ‘이스라엘이 모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개역개정의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는 소리가 같은 לוֹ(로, 그에게)로 읽는 뜻이다. 이 형태는 같은 절의 “그의 종으로”(לְעֶבֶד לוֹ, 레에베드 로)에도 나온다. 부정어로 읽으면 이스라엘이 아직 모이지 않는 현실이 4절의 탄식과 이어지고, ‘그에게’로 읽으면 사명의 목표가 드러난다. 이어 종은 여호와 앞에서 영화롭게 되었으며 하나님이 자기 힘이 되셨다고 고백한다. 힘을 다 써 버린 종에게 하나님 자신이 힘이 되신다.&lt;/p&gt;&lt;p&gt;6절에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보전된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는 일은 “매우 쉬운 일”이라고 하신다. 이 표현(נָקֵל מִהְיוֹתְךָ לִי עֶבֶד, 나켈 미흐요테카 리 에베드)은 ‘네가 내 종이 되는 것으로는 너무 가볍다’는 비교의 뜻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더해 열방의 구원까지 맡기시기 때문이다. NET는 수사의문문으로 옮기면서도 회복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질문으로 읽지 않는다.&lt;/p&gt;&lt;p&gt;하나님은 종을 “이방의 빛”(לְאוֹר גּוֹיִם, 레오르 고임)으로 삼아 자기 구원이 “땅 끝까지”(עַד־קְצֵה הָאָרֶץ, 아드-케체 하아레츠) 있게 하신다. 42:6에서도 주신 사명이다. 구원을 땅 끝에 흩어진 이스라엘 포로들의 해방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대부분의 번역은 모든 민족이 받는 구원으로 읽는다. 48:20에서는 야곱을 구속하셨다는 소식을 땅 끝까지 반포해야 했다. 여기서는 그 구원 자체가 땅 끝에 이른다.&lt;/p&gt;&lt;p&gt;7절에서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자 거룩한 이께서 멸시받고 미움받으며 관원들의 종이 된 이에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לִבְזֹה־נֶפֶשׁ, 리브조-네페쉬)는 BHS에서 문자적으로 ‘생명을 멸시하는 이에게’로 읽히는 난점이 있다. NET는 사해사본의 다른 읽기에 따라 ‘멸시받는 이에게’라는 수동의 뜻을 택한다. 하나님이 자기 종으로 지으신 사람이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의 종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신실하신 여호와께서 그를 택하셨기에 왕들과 고관들이 일어서며 경배할 것이다. 멸시받던 종의 높아짐은 52:13-15와 53:3으로 이어진다.&lt;/p&gt;&lt;p&gt;8절에서 하나님은 종에게 “은혜의 때에”(בְּעֵת רָצוֹן, 베에트 라촌) 응답하시고 “구원의 날에”(וּבְיוֹם יְשׁוּעָה, 우베욤 예슈아) 도우셨다고 하신다. UBS는 은혜의 때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때로 읽으며, 두 완료형 동사를 약속으로 보아 미래로 옮길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헛수고라고 느꼈던 종에게 하나님은 호의를 베풀고 도우실 때를 약속하신다.&lt;/p&gt;&lt;p&gt;하나님은 종을 “백성의 언약으로”(לִבְרִית עָם, 리브리트 암) 삼아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를 이루게 하신다. 42:6의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을 잇는 사명이다. 개역개정의 “나라를 일으켜”(לְהָקִים אֶרֶץ, 레하킴 에레츠)에서 ‘나라’에 해당하는 말은 기본적으로 ‘땅’이다. 6절에서 지파들을 일으키던 종은 그들이 살 땅도 일으킨다. UBS는 돌아온 포로들이 유다에 정착하고 바벨론의 파괴 뒤 황무해진 기업을 다시 나누어 받는 일로 풀이한다. 모세가 언약을 중보하고 여호수아가 땅을 나누었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이 사명은 백성이 다시 살아갈 터전을 회복한다.&lt;/p&gt;&lt;p&gt;9절의 “말하기를”(לֵאמֹר, 레모르)은 8절에서 종에게 맡긴 일들에 이어지며 말하는 주어를 따로 밝히지 않는다. 개역개정은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로 옮겨 여호와를 주어로 세운다. 문맥에서는 종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힌다. 갇힌 자에게 “나오라”(צֵאוּ, 체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הִגָּלוּ, 힉갈루)고 하신다. 42:7의 감옥과 흑암에서 이끌어 내는 사명이 여기서 귀환의 시작으로 나타난다.&lt;/p&gt;&lt;p&gt;귀환자들은 길과 헐벗은 산에서 풀을 뜯는 양 떼처럼 그려진다. 10절에서는 주림과 목마름, 더위와 볕에 상하지 않는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이가 이끌어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48:21이 사막에서 바위를 쪼개 물을 내신 일을 회상했다면, 49:10은 돌아오는 길에서도 같은 돌봄을 약속한다.&lt;/p&gt;&lt;p&gt;11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산들을 길로 삼고 대로를 돋우신다. 종을 무기로 만드신 하나님이 이제 장애물이던 산을 길로 만드신다. 40:3의 “우리 하나님의 대로”가 귀환자의 길이 된다. 12절의 사람들은 먼 곳과 북쪽과 서쪽, 시님 땅에서 온다. “서쪽에서”(וּמִיָּם, 우미얌)는 문자적으로 ‘바다에서’이며 지중해가 있는 서쪽을 가리킨다. UBS는 마소라 본문의 סִינִים(시님)과 사해사본의 ‘수에네 사람들’이라는 읽기를 비교하고 수에네를 오늘날 아스완이 있는 상이집트로 본다. 예레미야 44:1처럼 바벨론 침략 때 애굽으로 피한 유다 사람들도 있었으므로 남쪽 끝에서도 백성이 돌아온다고 풀이한다.&lt;/p&gt;&lt;p&gt;13절에서 하늘과 땅과 산들은 여호와께서 백성을 위로하고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기에 노래한다. “위로하셨은즉”은 40:1의 “위로하라”와 같은 동사이며,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는 10절에서 귀환자를 이끄시는 분을 묘사한 동사와 어근이 같다. 길이 되었던 산들이 이제 노래한다. 40장에서 시작한 위로가 종의 사명을 통해 땅 끝까지 미치자 피조세계가 찬양으로 응답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예레미야 1:4-10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모태에 짓기 전에 아셨고, 나오기 전에 구별하여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우셨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의 입에 말씀을 두셨다. 이사야 49:1-2의 종도 태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입을 칼처럼 받는다. 두 사람 모두 자기 계획보다 앞선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사명을 시작하며, 둘 다 사명이 이스라엘을 넘어 나라들에까지 미친다. 예레미야가 젊다며 망설였듯이(1:6) 이사야의 종도 헛수고였다며 탄식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1:8)고 하셨고, 이사야의 종에게는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49:8)라고 답하신다.&lt;/p&gt;&lt;p&gt;예레미야 1:9-10에서 입에 주어진 말씀은 나라와 왕국을 뽑고 파괴하며 다시 건설하고 심는다. 이사야 49:2의 날카로운 입도 역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다. 보냄받은 종의 권위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있다.&lt;/p&gt;&lt;p&gt;이사야 42:1-9는 49장의 사명을 먼저 소개한다. 하나님은 붙드시는 종에게 영을 주시고, 그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신다(42:6). 그 종은 눈먼 자의 눈을 밝히고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낸다(42:7). 49:6, 8-9는 이 표현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한다. 차이는 49장에서 종 자신이 말한다는 데 있다. 42장에서는 하나님이 종을 소개하셨는데, 49장에서는 종이 받은 부르심과 낙심과 새 사명을 1인칭으로 고백한다. 42:8에서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49:3에서는 이 종을 통해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lt;/p&gt;&lt;p&gt;이사야 42:1-4의 종은 상한 갈대를 꺾거나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면서 이방에 정의를 세운다. 49장의 종도 멸시와 낙심을 겪는다. 하나님은 겉으로 강해 보이지 않는 종을 통해 약한 사람을 일으키고 열방에 자기 성품을 알리신다.&lt;/p&gt;&lt;p&gt;창세기 22:15-18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맹세하셨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열방을 향한 복의 통로로 부름을 받았다. NET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아 주변 나라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 주어야 했으나 실패했고, 이상적인 이스라엘인 종이 그 일을 이룬다고 설명한다. 49:6의 “이방의 빛”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열방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일으키시고, 열방에도 구원의 빛을 비추신다.&lt;/p&gt;&lt;p&gt;출애굽기 19:3-6에서 하나님은 백성을 업어 자신에게 이끄신 은혜를 먼저 기억하게 하신 뒤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의 사명을 주신다. 이사야 49장의 종도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흩어진 백성을 일으키고 열방의 빛이 된다. 약한 백성을 회복하시는 은혜가 세계를 향한 사명의 근거다.&lt;/p&gt;&lt;p&gt;49:6의 ‘땅 끝’은 이사야 40-48장에서 이미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담아 온 표현이다. 45:22에서 하나님은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고 부르신다. 열방을 향한 초청이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선언과 함께 주어진다. 48:20에서는 바벨론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다는 소식을 땅 끝까지 반포해야 한다. 49:6은 이 두 흐름을 종의 사명 안에 모은다. 포로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의 구속은 땅 끝에 들려줄 소식이 되고, 그 소식을 들은 민족들은 같은 하나님께 돌이켜 구원을 받도록 부름받는다. 45:23에서 하나님은 모든 무릎이 자기에게 꿇으리라고 맹세하셨는데, 49:7에서는 왕들과 고관들이 종을 보고 일어서며 경배한다. 그 경배의 이유도 종을 택하신 신실하신 여호와께 있다.&lt;/p&gt;&lt;p&gt;이사야 40:1-11은 위로의 말씀과 광야의 대로, 그리고 목자처럼 양 떼를 먹이시는 하나님으로 시작한다(40:11). 49:9-13은 이 장면을 다시 가져온다. 산이 길이 되고 대로가 돋우어지며(49:11), 긍휼히 여기시는 이가 양 떼를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신다(49:10). 출애굽기 17:1-7에서 목마른 백성에게 반석의 물을 주셨던 하나님이 이제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백성을 굶주림과 목마름에서 지키신다. 49장 바로 앞의 48:21도 하나님이 사막에서 바위를 쪼개 물을 내셨던 일을 회상하므로, 이사야는 출애굽 광야의 기억을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길 위에 겹쳐 놓는다. 40장의 약속은 종의 사명 안에서 구체적인 귀환의 길로 그려진다.&lt;/p&gt;&lt;p&gt;이사야 40:1-8은 죄와 형벌을 겪은 백성을 위로하며 풀 같은 사람과 영원히 서는 하나님 말씀을 대조한다. 49장의 종도 힘을 다했다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판단을 맡긴다. 종과 백성은 자신들의 힘이 충분해서가 아니라 말씀하신 하나님이 도우시기에 회복을 기다릴 수 있다.&lt;/p&gt;&lt;p&gt;40:3-5의 대로는 하나님이 오시는 길이며 49:11의 길은 백성이 돌아오는 길이다. 하나님은 광야와 산의 장벽을 바꾸어 먼 곳의 백성에게 오시고 그들을 이끄신다.&lt;/p&gt;&lt;p&gt;이사야 52:13-53:3은 멸시받은 종이 높아지고 왕들이 놀라 입을 봉하는 반전을 그린다. 49:7의 관원들 아래 있던 종도 왕들의 인정을 받는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신실하심이 현재의 멸시를 넘어 종의 장래를 결정한다.&lt;/p&gt;&lt;p&gt;호세아 11:1-4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부르고 걸음을 가르치며 먹이셨으나 백성은 우상을 따랐다. 야곱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이사야 49장의 사명은 이 관계의 회복을 향한다. 흩어진 백성의 귀환에는 마음을 돌이켜 구원자를 알고 받은 은혜를 증언하는 일이 따른다.&lt;/p&gt;&lt;p&gt;시편 85:9-13은 구원과 영광이 가까이 오고 땅이 산물을 내는 회복을 노래한다. 이사야 49장도 돌아온 백성에게 먹을 것과 물, 다시 살 땅을 약속한다. 고난당한 백성이 위로와 긍휼을 얻기에 하늘과 땅과 산이 찬양한다. 구원의 은혜는 공동체가 살아갈 세계를 회복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누가복음 2:25-32에서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이다. 이 표현은 49:13과 40:1의 위로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안고 이 아기가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찬양한다(눅 2:32). NET는 이 절의 구문이 논쟁 중이라고 설명한다. ‘빛’과 ‘영광’을 나란히 놓아 예수가 이방에게는 빛,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라고 읽을 수도 있고, ‘빛’을 전체를 묶는 말로 보아 예수가 모두에게 빛이시되 이방에게는 계시,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시므온은 이사야 49:6처럼 이스라엘과 열방을 함께 품는다.&lt;/p&gt;&lt;p&gt;49:4의 종은 헛되이 수고했다고 탄식하면서도 자기 공의와 품삯을 하나님께 맡겼다. 베드로전서 2:21-23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때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않으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고 말한다. 멸시를 받고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가 왕들의 경배를 받게 되는 49:7의 반전은 십자가에서 버림받고 부활로 높아지신 예수에게서 가장 깊이 드러난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는 부당한 고난을 실제로 당하시면서 보복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판단을 신뢰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lt;/p&gt;&lt;p&gt;베드로전서 2:24-25에서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몸으로 담당하시고 길 잃은 양 같은 사람들을 영혼의 목자에게 돌아오게 하신다. 야곱을 돌아오게 하는 종의 사명은 이 구원의 주제와 연결된다. 포로의 땅과 공동체를 회복하는 이사야의 약속에 이어 신약은 그리스도가 죄를 담당하여 하나님께 돌아갈 길을 여셨다고 증언한다. 신자는 죄를 떠나 의에 대하여 살도록 부름받는다.&lt;/p&gt;&lt;p&gt;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먼저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했고(13:14-43), 다음 안식일에 거부를 당한 뒤 이방인에게로 향하면서 이사야 49:6을 인용한다(13:44-48).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NET는 바울과 바나바가 이사야서의 종이 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으며, ‘땅 끝’이라는 표현이 사도행전 1:8을 떠올리게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종의 사명에 사도들이 참여하여 구원의 빛을 땅 끝까지 비춘다. 사도행전에서 이 일은 회당에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이 먼저 이 소식을 들었다.&lt;/p&gt;&lt;p&gt;사도행전 13:43에서는 많은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른다. 뒤이어 반대와 비방이 일어나 사도들은 이방인에게 향하지만, 말씀을 받아들인 유대인들도 있었다. 이 일은 유대인 전체에 대한 폐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약속대로 예수를 세우고 죽음에서 살리시며 믿는 이에게 죄 사함을 주신다는 복음이 이스라엘과 열방에 전파된다.&lt;/p&gt;&lt;p&gt;바울은 고린도후서 6:1-2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하며 이사야 49:8을 인용한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καιρῷ δεκτῷ, 카이로 데크토)를 인용한 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선언한다. ‘은혜 받을 만한’(εὐπρόσδεκτος, 유프로스데크토스)은 인용문의 δεκτῷ와 어근이 같으며 접두어로 뜻을 강조한다. 종에게 응답하신 은혜의 때가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열렸기에 하나님과의 화목을 미룰 수 없다. 이어지는 6:4-10에서 바울은 환난과 매 맞음, 갇힘 중에도 깨끗함과 인내와 자비와 거짓 없는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말한다. 은혜의 때에도 고난은 계속되며, 일꾼은 눈에 보이는 성과에 의지하지 않고 받은 은혜에 따라 봉사한다.&lt;/p&gt;&lt;p&gt;요한계시록 7:16-17은 이사야 49:10을 이어받아 큰 환난에서 나온 무리가 다시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고 어린 양의 인도로 생명수 샘에 이를 것이라고 약속한다. 여러 나라와 족속과 언어에서 온 이들은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었으며 구원이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다고 고백한다(7:9-17). 열방을 향한 빛과 목마르지 않을 귀환의 약속이 어린 양의 목자 사역에서 이루어진다. 자신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께서 백성을 끝까지 돌보시고 하나님은 그들의 눈물을 씻으신다. 현재의 고난을 지나 이 회복을 바라보는 소망이 고난 중의 봉사를 붙든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종은 하나님께 부름받았으면서도 헛되이 힘을 다했다고 탄식한다(4절). 신앙은 이런 탄식을 숨기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종은 자기 수고가 무의미하다는 결론 대신 하나님께 바른 판단과 품삯을 맡긴다. 성도도 보이는 결과만으로 부르심과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으면서, 낙심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다.&lt;/p&gt;&lt;p&gt;2절에서 종을 감추고 보호하며 쓰실 때를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이 약속으로 오늘의 모든 지연이 더 큰 성공을 예고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종 자신도 헛수고를 겪었다. 하나님께 맡겨진 사명의 가치는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크기로 결정되지 않는다.&lt;/p&gt;&lt;p&gt;종의 날카로운 입은 사람을 모욕할 권한을 뜻하지 않는다. 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야곱을 돌이키고 갇힌 이를 해방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말씀을 맡은 사람도 자기 분노나 명성을 앞세우는 대신 구원자께서 주신 말과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lt;/p&gt;&lt;p&gt;종을 높이시는 약속은 멸시받은 사람의 복수욕을 채우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실제로 부당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께 자신을 맡기셨다(벧전 2:21-23). 보복을 내려놓는 믿음을 피해의 은폐나 가해자의 책임을 덮는 요구로 사용할 수 없다. 종의 판단을 맡으시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다.&lt;/p&gt;&lt;p&gt;하나님은 야곱을 일으키는 사명을 거두지 않고 열방을 향한 빛을 더하신다(6절). 교회는 자기 민족과 익숙한 관계 안에 구원의 소망을 가둘 수 없다.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을 따라 이방인에게도 미친다. 이방인 신자는 자기 우월함을 자랑할 근거 없이 같은 구원자께 감사하며 복음을 증언한다.&lt;/p&gt;&lt;p&gt;귀환자들에게는 땅과 기업, 먹을 것과 물이 약속된다(8-10절). 구원의 기쁨을 말하면서 살아갈 터전과 몸의 필요를 외면하면 이 긍휼을 놓친다. 고난당하는 이를 돌보는 일은 위로를 받은 사람이 응답할 책임이다. 어린 양이 마침내 주림과 목마름을 없애시고 눈물을 씻으시리라는 소망도 현재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게 하지 않는다(계 7:16-17).&lt;/p&gt;&lt;p&gt;바울이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선언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여신 화목의 은혜에 응답하라는 초청이다(고후 6:1-2). 모든 문제가 끝날 때까지 회개를 미룰 이유가 없다. 그 초청을 다른 사람의 결정을 강제로 재촉하는 데 사용할 수도 없다. 바울이 말한 일꾼의 삶에는 진실함과 오래 참음, 자비와 거짓 없는 사랑이 따른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Isa&amp;amp;chapter=49"&gt;NET Bible, Isaiah 49 번역 노트&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93/"&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49:3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95/"&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49:5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96/"&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49:6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98/"&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49:8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912/"&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49:12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Luk&amp;amp;chapter=2&amp;amp;verse=32"&gt;NET Bible, Luke 2:32 번역 노트&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Act&amp;amp;chapter=13&amp;amp;verse=47"&gt;NET Bible, Acts 13:47 번역 노트&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2Co&amp;amp;chapter=6"&gt;NET Bible, 2 Corinthians 6 번역 노트&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49:14-50:3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버림받았다고 말하는 시온에게</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9.14-50.3/</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49.14-50.3/</guid><description>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탄식하는 시온에게 하나님이 젖먹이를 잊지 못하는 어머니보다 더 깊은 기억과 돌아오는 자녀들과 포로를 되찾는 능력으로 답하시고,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말씀을 절의 흐름에 따라 풀이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49:13은 하늘과 땅과 산들을 불러 하나님이 고난당한 백성을 위로하셨다고 노래하게 한다. 그러나 시온은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탄식한다(14절). 개역개정의 “오직”은 이 말이 앞의 찬양과 맞서는 흐름을 드러낸다. 시온은 버림과 잊음을 이미 끝난 일처럼 말한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이사야 해설은 여기의 “잊다”가 기억이 흐려짐보다 일부러 돌아보지 않고 내버려 둠을 뜻한다고 설명한다.&lt;/p&gt;&lt;p&gt;시온은 예루살렘 성과 그 백성을 한 인물로 그린 이름이다. 뒤에 성벽의 재건이 이어지므로 UBS 해설은 여기서 특히 도성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본다. 탄식의 배경은 주전 587년 바벨론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무너뜨린 일이다. 앞서 49:1-13에서 하나님이 포로의 귀환을 약속하셨지만, 시온은 자신이 잊혔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기억과 돌아오는 자녀들(49:15-21), 나라들과 용사(22-26절), 이혼 증서와 채주에 관한 질문(50:1-3)으로 대답하신다.&lt;/p&gt;&lt;p&gt;하나님은 젖 먹는 자식을 잊고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어머니가 있겠느냐고 물으신다(15절). “긍휼히 여기다”는 10절에서 귀환하는 백성을 인도하시는 분과 13절에서 고난당한 백성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 쓰인 말이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자신의 긍휼을 설명하신 뒤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한 여인으로 시작한 질문에서 “그들”이라는 복수형으로 바뀌는데, 칠십인역은 이 자리를 “여인”으로 옮긴다. 복수형은 세상의 어머니들을 묶어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lt;/p&gt;&lt;p&gt;“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וְאָנֹכִי לֹא אֶשְׁכָּחֵךְ, 베아노키 로 에쉬카헤크)는 독립 대명사를 앞세워 “나”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시온이 말한 “잊다”를 질문과 양보절과 약속에서 거듭 받으신다. 인간의 가장 강한 유대가 무너져도 하나님은 시온을 잊지 않으신다. 그 기억은 시온의 성과 자녀들을 회복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lt;/p&gt;&lt;p&gt;16절에서 하나님은 시온을 손바닥에 이미 새기셨고 그 성벽이 항상 자기 앞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시온이 완료형으로 버림받았다고 말한 데 대해 하나님도 완료형 “새겼고”(חַקֹּתִיךְ, 하코티크)로 대답하신다. UBS 해설은 뒤의 성벽 언급과 칠십인역의 읽기를 따라 손바닥에 새긴 것을 시온의 이름보다 성의 그림으로 본다. 하나님은 무너진 예루살렘을 늘 생각하시고 지켜보신다.&lt;/p&gt;&lt;p&gt;17절의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는 마소라 본문에서 “네 아들들이 서두른다”(מִהֲרוּ בָּנָיִךְ, 미하루 바나이크)이다. UBS 해설이 소개하는 사해사본은 “네 아들들” 대신 모양이 비슷한 “너를 세우는 자들”로 읽고, 둘째 행도 “너를 헐던 자들보다”라는 비교로 읽는다. 해설은 de Waard와 Hebrew Old Testament Text Project(HOTTP)의 판단을 따라 두 곳 모두 사해사본을 지지한다. 이 읽기에서는 재건하는 자들이 허물던 자들보다 빨리 움직인다. 개역개정은 마소라 본문을 따라 자녀들의 귀환을 강조한다. 두 읽기 모두 시온을 무너뜨린 바벨론 세력이 떠나가리라는 회복의 약속을 전한다.&lt;/p&gt;&lt;p&gt;“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18절). 시온은 돌아오는 포로들, 곧 앞 절의 자녀들 또는 세우는 자들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라고 자신의 생명을 걸어 보증하시고, 시온이 그 무리를 장식처럼 두르고 신부처럼 단장하리라고 약속하신다. UBS 해설은 이 그림에서 귀환자의 수가 많고 그 귀환이 혼인날처럼 기쁘다는 뜻을 읽는다. 버림받았다고 탄식한 시온이 자녀들로 단장한 신부가 된다.&lt;/p&gt;&lt;p&gt;19절의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 파멸을 당하였던 땅”은 이를 받는 동사가 없어 끊긴 듯한 문장이다. 대부분의 번역은 동사를 보충한다. 그 폐허가 이제 주민 때문에 비좁아지고 시온을 삼켰던 정복자들은 멀리 떠난다. 20절의 “자식을 잃었을 때에 낳은 자녀”는 “네 자식 잃음의 아들들”(בְּנֵי שִׁכֻּלָיִךְ, 베네 쉬쿨라이크)이다. UBS 해설은 포로기 동안 태어난 이스라엘 자녀들로 보며, 자식을 잃은 모습은 주민을 잃고 애도하던 성을 그린 것으로 설명한다. 그 자녀들이 “이곳이 내게 좁으니 넓혀서 내가 거주하게 하라”고 요청한다. “넓혀서”는 문자적으로 “내게서 비켜 다오”, 곧 자리를 내 달라는 뜻이다.&lt;/p&gt;&lt;p&gt;시온은 “누가 나를 위하여 이들을 낳았는고” 하고 놀란다(21절). “낳다”가 남성형이므로 “누가 이들의 아비가 되어 주었는가”로도 읽을 수 있다. 시온은 자녀를 잃고, 더 낳지 못하며, 포로로 끌려가 내쳐진 자기 처지를 네 낱말로 표현한다. 개역개정은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워졌으며 사로잡혀 유리하였거늘”로, NET는 “bereaved and barren, dismissed and divorced”로 옮겨 불임과 이혼의 그림을 살린다. “이들을 누가 양육하였는고”도 “누가 이렇게 많아지게 했는가”로 읽을 수 있다. “나는 홀로 남았거늘”은 유다의 다른 성읍에 주민이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시적 과장이다. 시온이 설명하지 못하는 자녀들의 귀환은 22절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이루어진다.&lt;/p&gt;&lt;p&gt;22절에서 주 여호와는 나라들을 향해 손을 들고 기치를 세우신다. 이는 시온의 자녀들을 데려오라는 신호다. 5:26에서 같은 신호로 유다를 칠 나라들을 부르셨지만, 여기서는 흩어진 자녀들을 돌려보내게 하신다. 나라들은 아들들을 품에 안고 딸들을 어깨에 메어 안전하게 데려온다. 시온이 자신을 잊으셨다고 원망했던 주께서 직접 자녀들을 모으신다.&lt;/p&gt;&lt;p&gt;왕들은 양부가 되고 왕실의 여인들은 유모가 된다(23절). 보통 종이 맡던 양육과 보호를 왕실이 맡으면서 시온과 나라들의 관계가 뒤집힌다.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발의 티끌을 핥는 모습은 패한 왕이 승리한 왕에게 완전히 복종함을 그린 시적 과장이다. 목적은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에 있다. “나를 바라는 자”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의지하는 이들로, 그들이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약속은 그 기대가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뜻이다. 시온이 칼을 드는 대신 하나님이 나라들을 부르셔서 이 일을 이루신다.&lt;/p&gt;&lt;p&gt;24절은 용사에게서 노획물과 포로를 되찾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질문자는 예언자일 수도 시온일 수도 있으나 본문은 밝히지 않는다. 둘째 행의 “승리자에게 사로잡힌 자”는 마소라 본문에서 “의인의 포로”(שְׁבִי צַדִּיק, 셰비 차디크)다. 사해사본과 다른 초기 본문은 25절처럼 “폭군”으로 읽는다. UBS 해설은 비슷한 글자 모양에서 생긴 필사상의 혼동 가능성을 설명하며, HOTTP가 “폭군”을, NJPS가 마소라 본문을 따라 “victor”를 택한다고 소개한다. 개역개정의 “승리자”도 마소라 본문을 살린 번역으로 볼 수 있다. NET는 “conqueror”로 옮긴다. 바벨론의 손에서 포로를 되찾는 일은 인간의 눈에 불가능해 보였다.&lt;/p&gt;&lt;p&gt;25절에서 하나님은 용사의 포로도, 폭군의 노획물도 건져내겠다고 답하신다. 앞 절의 “노획물-포로” 순서가 “포로-노획물”로 바뀌며 질문을 되받는다.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는 시온과 다투는 자와 하나님이 친히 다투시겠다는 뜻이다. “다투다”는 법정의 송사와 실제 싸움에 모두 쓰이며, UBS 해설은 여기서 하나님을 시온 편에 서서 싸우는 전사로 본다. “내가 … 대적하고”, “네 자녀를 내가 구원할 것임이라”는 두 행 모두 “내가 친히”를 강조한다. 시온에게 없는 구원의 힘을 하나님이 행사하신다.&lt;/p&gt;&lt;p&gt;26절에서 압제자들이 자기 살을 먹고 자기 피에 취하는 모습은 서로를 무너뜨리며 멸망하는 세력을 그린 과장된 은유다. UBS 해설도 문자적 식인으로 읽지 않는다. 시온을 삼켰던 자들이 자기 자신을 삼킨다. 그 결과 “모든 육체”, 곧 모든 사람과 민족이 여호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은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이시며, 이 세 칭호는 60:16에 같은 순서로 되풀이된다. “구속자”(וְגֹאֲלֵךְ, 베고알레크)는 팔린 친족을 되찾는 가까운 친척을 가리키는 말에서 왔다.&lt;/p&gt;&lt;p&gt;50:1에서 하나님은 시온의 자녀들에게 어머니를 내보낸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 “이혼 증서”(סֵפֶר כְּרִיתוּת, 세페르 케리투트)는 신명기 24:1-4의 규정을 배경으로 한다. 증서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시온과 관계를 영구히 끊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이어 어느 채주에게 자녀들을 팔았느냐고 물으신다. 빚을 갚지 못한 아버지가 자녀를 종으로 팔던 관습(출 21:7)을 배경으로 하지만, 하나님께는 빚을 진 상대가 없다.&lt;/p&gt;&lt;p&gt;포로가 된 원인은 백성의 죄악과 배역이다. 질문에서는 “내가 … 내보낸”, “내가 … 팔았느냐”라는 능동형이 쓰이지만, 대답에서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라는 수동형과 원인의 표현이 앞선다. 대답은 둘째 질문의 “팔다”를 먼저, 첫째 질문의 “내보내다”를 뒤에 받아 자녀와 어머니 모두의 책임을 밝힌다. 하나님은 관계를 끊거나 채무 때문에 백성을 내버리지 않으셨다. 백성의 죄가 포로를 불러왔다.&lt;/p&gt;&lt;p&gt;50:2는 하나님이 오시고 부르셔도 응답하지 않은 백성을 책망한다. 하나님은 구원의 소식을 가지고 오셨지만 백성은 믿지 않았다.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에서 “손이 짧다”는 힘이 없다는 관용 표현이다. 히브리어는 “짧다”를 거듭 써서 하나님이 구원할 능력을 잃으셨다는 생각을 강하게 반문한다. 앞 절에서 팔린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속량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되찾을 능력이 있으시다.&lt;/p&gt;&lt;p&gt;하나님은 꾸짖음으로 바다를 말리고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신다(50:2). UBS 해설은 이 꾸짖음을 명령으로 보고, 2b-3절이 홍해 사건과 애굽에서 보이신 능력을 가리킬 수 있다고 설명한다. 물고기가 죽어 악취를 내는 장면은 나일 강의 첫 재앙(출 7:18-21)을,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는 장면은 흑암 재앙(출 10:21-22)을 떠올리게 한다. “흑암”(קַדְרוּת, 카드루트)은 어둠과 애도를 겹쳐 놓고, 거친 상복인 “굵은 베”가 그 그림을 이어 간다. 49:18에서 자녀들로 신부를 단장시키신 하나님은 50:3에서 하늘에 상복을 입히신다. 시온의 상실도, 바다와 하늘도 그분의 구원 능력을 무너뜨리지 못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시온의 탄식은 성경의 탄식 전통에 서 있다. 시편 22:1(BHS 22:2)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이사야 49:14의 “나를 버리시며”와 같은 동사를 쓰고, 시편 13:1의 기도자도 하나님이 자기를 영원히 잊으시는지 묻는다. 예루살렘이 무너진 뒤의 애가 5:20에서도 버림과 잊음이 한 쌍으로 나온다. 이사야 40:27의 야곱도 자기 길이 여호와께 숨겨졌다고 말했다. 성경은 이런 탄식을 불신앙의 말로 지우지 않는다. 하나님은 시편 22편의 기도자에게 응답하시고, 40:28-31에서 피곤하지 않으신 창조주를 바라보게 하시며, 49:15-26에서 시온에게 긴 대답을 주신다.&lt;/p&gt;&lt;p&gt;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억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출애굽기 2:24에서 하나님은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의 탄식을 들으시고 조상들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으며, 그 기억은 모세를 부르시는 일로 이어졌다. 이사야 44:21의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49:15는 어머니의 그림으로 다시 확인한다. 손바닥에 새긴 그림(49:16)은 지파들의 이름을 보석에 새겨 대제사장의 두 어깨와 흉패에 달아 여호와 앞에서 기념이 되게 한 출애굽기 28:9-12, 29를 떠올리게 한다. 거기서는 대제사장이 백성의 이름을 지고 하나님 앞에 섰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친히 시온을 자기 손에 새기신다. 62:6에서는 그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워 쉬지 않고 여호와께 기억하시게 하라고 하신다.&lt;/p&gt;&lt;p&gt;50:1의 이혼 증서는 언약을 혼인으로 그리는 성경의 흐름에 있다. 신명기 24:1-4는 남편이 아내를 내보낼 때 이혼 증서를 써 주라고 규정하고, 그 여인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가 다시 떠나면 처음 남편이 그를 다시 맞을 수 없다고 한다. UBS 해설은 이 규정을 50:1의 배경으로 제시한다. 예레미야 3장은 이 규정을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에 적용한다. 하나님은 배역한 북이스라엘에게 이혼서를 주어 내쫓으셨고 유다도 같은 길을 갔다고 책망하시면서도(3:1, 8), 돌아오라고 부르시며 시온으로 데려오겠다고 약속하신다(3:12-14). 호세아 2장도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라는 선언(2:2) 뒤에 영원한 혼약을 약속한다(2:19-20). 이사야 50:1은 유다가 죄 때문에 포로가 되었어도 하나님이 관계를 끝내는 문서를 쓰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되 언약을 버리지 않으신다.&lt;/p&gt;&lt;p&gt;레위기 26장은 언약을 어긴 백성이 원수들의 땅으로 흩어지리라고 경고한 뒤, 그들이 죄악을 자복하면 하나님이 야곱과 이삭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겠다고 말한다(26:40-42). 원수들의 땅에 있을 때에도 그들을 내버리지 않으시고 언약을 폐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26:44). 신명기 30:1-5도 흩어진 백성이 마음으로 돌아오면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하늘 끝에서라도 모으시겠다고 한다. 시온은 포로를 언약의 끝으로 읽었으나, 모세의 언약은 포로를 심판과 회복 사이에 둔다. 50:1이 포로의 원인을 죄로 돌리는 것과 49:15-26이 회복을 약속하는 것은 이 언약 안에서 함께 선다.&lt;/p&gt;&lt;p&gt;50:1의 둘째 질문은 빚 때문에 자녀를 종으로 넘기던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출 21:7; 왕하 4:1; 느 5:5).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런 채주가 없다. 레위기 25장은 가난하여 땅이나 몸을 판 사람을 가까운 친족이 무르게 하고 그를 “기업 무를 자”라 부른다(25:25, 47-49). 개역개정이 이사야에서 “구속자”로 옮긴 말이 같은 동사에서 나왔다. 하나님은 49:26과 54:5, 8에서 시온의 구속자로 자신을 밝히시고, 52:3에서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고 하신다. 빚 때문에 백성을 파신 적이 없으므로 되찾으실 때에도 바벨론에 값을 치를 의무가 없으시다.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50:2)는 팔린 자녀를 되찾을 권리와 능력을 함께 지니신 친족의 물음이다.&lt;/p&gt;&lt;p&gt;50:2-3은 출애굽의 기억에 기댄다. 하나님은 큰 동풍으로 바다를 물러가게 하여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셨고(출 14:21-31), 시편 106:9는 이를 하나님이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말랐다고 노래한다. UBS 해설도 50:2b-3이 홍해 사건과 출애굽 때 보이신 능력을 가리킬 수 있다고 본다. 죽은 물고기의 악취와 하늘을 덮는 흑암은 나일 강의 재앙과 흑암 재앙(출 7:18-21; 10:21-23)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의 손에서 백성을 빼내신 하나님은 바벨론의 강한 손에서도 포로를 되찾으실 수 있다(49:24-25). 이사야 40-55장은 귀환을 광야의 길과 마른 땅의 물로 거듭 그려 새 출애굽으로 이해하게 한다.&lt;/p&gt;&lt;p&gt;민수기 11장에는 이 단락의 두 그림이 함께 나온다. 모세는 자신이 이 백성을 낳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고 가라 하시느냐고 항의했고(11:12), 고기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의심하자 하나님은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고 물으셨다(11:23). 광야의 모세는 양육자의 짐을 버거워했으나, 이사야 49:23에서는 이방의 왕들이 시온 자녀의 양부가 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처럼 포로기에도 질문으로 불신을 드러내시고 행동으로 답하신다. 59:1-2도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라고 말해, 구원이 늦어지는 원인을 하나님의 무력함이 아닌 백성의 죄에서 찾는다.&lt;/p&gt;&lt;p&gt;이사야 후반부는 버림받았다고 탄식한 시온을 차례로 일으킨다. 54:1은 잉태하지 못한 여인에게 노래하라 하며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으리라고 한다. 54:6-8은 시온을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로 부르면서 그 버림을 ‘잠시’로 한정하고 큰 긍휼과 영원한 자비를 약속한다. 60:4는 49:18의 첫 줄을 되풀이하고, 60:16은 49:26의 세 칭호를 같은 순서로 반복한다. 62:4는 시온을 더 이상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않겠다고 하며, 66:13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이라고 말한다. 49:15의 어머니 그림이 하나님이 친히 위로하시는 약속으로 이어진다.&lt;/p&gt;&lt;p&gt;5:26에서 하나님은 기치를 세워 먼 나라를 불러 유다를 치게 하셨고, 11:12에서는 열방을 향해 기치를 세워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겠다고 하셨다. 49:22의 기치는 두 번째 방향을 잇는다. 심판의 도구였던 나라들이 시온의 자녀들을 안아 돌려보낸다. 왕들이 엎드리는 장면의 목적은 나라들의 굴욕에 있지 않고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49:23), 모든 육체가 여호와를 알게 되는 데(49:26) 있다. 종을 이방의 빛으로 삼으시는 49:6, 많은 백성이 여호와의 길을 배우는 2:2-4,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는 창세기 12:3이 이 그림의 바탕이다.&lt;/p&gt;&lt;p&gt;49:25에서 하나님은 시온과 다투는 자와 친히 다투겠다고 하신다. 시편 35:1의 기도자도 여호와께 자기와 다투는 자와 다투어 달라고 구하고, 예레미야 50:34는 이스라엘의 강한 구속자가 그들의 송사를 맡아 땅에는 평안을 주시고 바벨론 주민은 불안하게 하시리라고 말한다. 스스로를 변호할 힘도 포로를 되찾을 군대도 없는 시온의 송사가 하나님의 송사가 된다. 하나님은 백성의 죄를 심판하시면서도 압제하는 세력의 폭력을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 그러나 50:1이 말한 죄의 문제는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았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이 말씀은 먼저 무너진 예루살렘과 흩어진 유다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주전 539년 바벨론이 무너진 뒤 고레스의 칙령으로 포로들이 돌아오기 시작했지만, 귀환 공동체의 현실은 49:19-20의 그림에 미치지 못했다. 느헤미야 7:4의 성읍은 넓고 크지만 주민이 적었고, 느헤미야 9:36-37의 백성은 조상에게 주신 땅에서 오히려 이방 왕들의 종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왕들이 양부가 되는 일도 바사 왕들의 제한된 후원을 넘지 못했다. 포로의 원인인 죄악과 배역도 귀환으로 사라지지 않아, 느헤미야 13장과 말라기는 돌아온 백성이 다시 언약을 어긴 일을 보여 준다. 귀환은 약속의 성취를 시작했으며, 죄의 해결과 모든 민족이 여호와를 아는 구원은 기다려야 했다.&lt;/p&gt;&lt;p&gt;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고 묻고 그럴 수 없다고 답한다(롬 11:1-2).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악해졌어도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11:25-29). 이혼 증서가 없다고 하신 하나님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때에도 그들과 맺은 언약을 버리지 않으신다. 동시에 바울은 이방인이 믿음으로 그 나무에 접붙여졌다고 말한다(11:17). 49:21에서 시온이 놀라던 자녀들은 본래 돌아오는 이스라엘 포로였지만, 바울의 설명은 그 무리를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에 더해지는 이방인까지 품는 그림으로 넓혀 읽게 한다.&lt;/p&gt;&lt;p&gt;바울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우리 어머니”라 부르고, 잉태하지 못한 여인에게 즐거워하라는 이사야 54:1을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에 적용한다(갈 4:26-27). 54:1은 49:14-21의 자식 잃은 시온을 이어 받는 말씀이다. 시온이 자녀들의 출처를 설명하지 못했듯이(49:21), 교회도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낳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요 1:12-13).&lt;/p&gt;&lt;p&gt;예수는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예루살렘의 자녀를 모으려 하셨으나 그들이 원하지 않았다고 탄식하신다(마 23:37). 49:15에서 어머니의 사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처럼 자녀들을 모으려 하신 것이다. 그 거절은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50:2)을 떠올리게 한다. 요한복음 1:11도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예수는 그 성을 보며 우셨고(눅 19:41), 그들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라고 하시며 미래의 만남을 열어 두셨다(마 23:39).&lt;/p&gt;&lt;p&gt;예수는 십자가에서 시편 22:1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마 27:46). 시온은 죄 때문에 포로가 되고도 버림받았다고 느꼈으나 하나님은 이혼 증서를 쓰지 않으셨다. 죄가 없으신 예수는 죄인을 위하여 버림받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셨다. 그때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27:45). 하늘에 흑암과 굵은 베를 입히시는 50:3의 심판과 애도의 언어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예수는 그 자리를 지나 부활하셨고, 그를 믿는 이들은 하나님이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신다는 약속을 붙든다(히 13:5).&lt;/p&gt;&lt;p&gt;백성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다(50:1). 바울도 자신이 죄 아래에 팔렸다고 고백한다(롬 7:14). 값 없이 팔린 자들이 돈 없이 속량되리라는 52:3처럼, 신약은 그 속량의 값을 은이나 금이 아닌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한다(벧전 1:18-19). 예수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려고 오셨다(막 10:45). 하나님은 빚 때문에 자녀를 파신 적이 없지만, 죄에 팔린 자녀를 되찾으시려고 아들을 내어 주셨다. 시온을 내보낸 이혼 증서는 없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는 우리를 거스르던 증서가 지워졌다(골 2:14).&lt;/p&gt;&lt;p&gt;예수는 강한 자를 먼저 결박해야 그 집을 강탈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귀신을 쫓아내는 자신의 일을 설명하셨다(막 3:27; 눅 11:21-22). 이사야에서 용사와 폭군은 바벨론이었지만, 예수의 사역에서는 사람을 사로잡은 더 깊은 세력, 곧 사탄과 죄와 죽음이 드러난다. 예수는 죽음으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를 멸하고 평생 종노릇하던 이들을 놓아 주셨으며(히 2:14-15), 하나님은 십자가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이기셨다(골 2:13-15). 용사의 손에서 포로를 빼앗아 오시는 하나님은 되찾은 자녀를 다시 빼앗기지 않으신다(요 10:28-29).&lt;/p&gt;&lt;p&gt;예수는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셨고, 제자들은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느냐고 두려워했다(막 4:39-41). 구약에서 바다를 꾸짖는 일은 여호와께 속한 일이었으므로(50:2), 이 사건은 “내 손이 어찌 짧아”라는 물음에 새롭게 답한다. 손바닥에 새긴 그림(49:16)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도마에게 보이신 못 자국 난 손(요 20:27)을 떠올리게 한다. 이사야의 그림이 예루살렘을 늘 기억하신다는 약속이라면, 예수의 상처는 그분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실제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확인해 준다.&lt;/p&gt;&lt;p&gt;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 가운데서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했다고 말하고(살전 2:7),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한다(갈 4:19). 사도행전 2장에서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각자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듣는다. 49:22에서 하나님이 손을 들어 나라들을 부르셨듯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신다(마 28:19-20).&lt;/p&gt;&lt;p&gt;신부처럼 단장한 시온(49:18)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 같은 새 예루살렘(계 21:2)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사 자신을 주시고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신다(엡 5:25-27). 시온 앞에 엎드리던 왕들(49:23)은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 성으로 들어가는 땅의 왕들로 이어진다(계 21:24). 그 성에서 하나님은 백성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신다(21:4). 시온의 탄식으로 시작한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성에서 완성된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시온은 버림받았다는 탄식을 하나님께 말하고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는 대답을 듣는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도 시편 13편과 22편의 기도자처럼 탄식할 수 있다. 상실의 고통이 곧바로 사라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백성을 기억하시며, 그 약속에 따라 구원하신다.&lt;/p&gt;&lt;p&gt;자녀를 잃고 더 낳지 못하는 시온의 모습은 무너진 도성과 흩어진 백성을 그린 비유다. 이 말씀은 난임과 유산, 자녀 상실을 개인의 죄에 대한 벌로 설명하지 않는다. 50:1의 이혼 증서도 하나님과 언약 백성의 관계를 다룬다. 이혼이나 사별을 겪은 사람을 정죄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여인처럼 탄식한 시온에게 자녀들의 귀환과 신부의 기쁨을 약속하셨다.&lt;/p&gt;&lt;p&gt;50:1은 오랜 배역 끝에 포로가 된 언약 공동체에 죄를 묻는다. 죄를 고백해야 할 사람은 하나님의 무능이나 변심을 탓하며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고난을 이 구절로 설명하는 데에는 욥기와 요한복음 9장의 경고가 따른다. 하나님은 욥의 고난을 죄의 벌로 몰아간 친구들을 책망하셨고(욥 42:7), 예수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고난을 그나 부모의 죄로 돌리지 않으셨다(요 9:3). 회개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은 언약을 끝내는 증서를 쓰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신다.&lt;/p&gt;&lt;p&gt;용사에게서 포로를 되찾으시며 바다를 말리시는 하나님은 구원할 힘을 잃지 않으셨다. 이 약속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 포로들은 귀환까지 오래 기다렸고, 귀환 뒤에도 약속의 완성을 기다려야 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고통받는 이에게 즉각적인 회복이나 원하는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lt;/p&gt;&lt;p&gt;왕들이 엎드리고 압제자들이 자기 살을 먹는 장면은 권력의 역전과 멸망을 그린 시적 과장이다. 목적은 시온과 모든 육체가 여호와를 아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은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원수가 주리면 먹이며 악을 선으로 이기라는 말씀을 따른다(롬 12:19-21). 이방인 신자도 이스라엘을 향해 자랑할 수 없다(롬 11:18). 하나님은 시온을 잊지 않으시며, 그 신실하심 안에서 나라들을 구원으로 부르신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Isa&amp;amp;chapter=49"&gt;NET Bible, Isaiah 49&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914/"&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49:14&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915/"&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49:15&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916/"&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49:16&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917/"&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49:17&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918/"&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49:18&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919/"&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49:19&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920/"&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49:20&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92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49:21&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922/"&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49:22&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923/"&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49:23&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924/"&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49:24&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925/"&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49:25&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4926/"&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49:26&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0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50:1&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02/"&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50:2&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03/"&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50:3&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50:4-51:8 아침마다 귀를 깨우치시는 주: 배우는 종과 의를 따르는 백성</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50.4-51.8/</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50.4-51.8/</guid><description>아침마다 하나님께 배우며 매 맞음과 침 뱉음을 피하지 않는 종의 고백, 흑암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부름, 그리고 아브라함을 돌아보며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라는 말씀을 절의 흐름에 따라 풀이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50:2에서 하나님은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고 물으셨다. 4절부터 1인칭으로 말하는 사람의 고백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처럼 들린다. 백성은 부르심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 사람은 날마다 귀를 열고 듣는다. 4-9절에서 그는 ‘주 여호와’를 네 번 부르며(4, 5, 7, 9절), UBS 해설은 7절이 4절과 5절처럼 ‘주 여호와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셨다’는 틀로 시작한다고 지적한다. 그가 배우고 듣고 견디고 확신하는 일은 모두 주 여호와께서 먼저 하신 일에서 출발한다. 4-9절은 그를 ‘종’이라 부르지 않지만, 10절이 그의 말을 “그의 종의 목소리”라고 부르므로 이 화자가 여호와의 종임을 알 수 있다.&lt;/p&gt;&lt;p&gt;주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학자들의 혀”(לְשֹׁון לִמּוּדִים, 레숀 림무딤)를 주셨다(4절). 이 ‘학자’는 ‘배우다’와 어근이 같은 말로, 가르치는 사람보다 배우는 사람, 곧 제자를 가리킨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해설은 종이 남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배우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혀’를 말하는 능력과 전해야 할 말로 본다. 그 목적은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려는 데 있다. ‘도와 줄’(לָעוּת, 라우트)은 구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동사여서 뜻이 다소 불확실하다. UBS 해설에 따르면 BDB 사전은 이 말을 ‘돕다’로 풀고, 칠십인역은 ‘알맞은 때에’라는 말을 더해 읽는다. 해설은 ‘곤고한 자’를 몸의 피로보다 낙심으로 지친 사람, 곧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던 포로들로 보고 40:1의 “내 백성을 위로하라”와 연결한다. 40:29에서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신다던 하나님이 이제 종의 말로 그 일을 하신다.&lt;/p&gt;&lt;p&gt;그 혀는 날마다 열리는 귀에서 나온다. 4절 후반은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라고 ‘깨우다’를 두 번 써서 되풀이되는 일을 그린다. UBS 해설은 같은 동사를 반복하며 둘째 동사에 ‘나의 귀’를 덧붙인 이 표현을 계단식 병행으로 보고, 날마다 이어지는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읽는다. 그 목적인 “학자들 같이”도 앞의 ‘학자들의 혀’와 같은 말이어서 4절을 감싼다. 종은 배우는 자의 귀로 들은 만큼 배우는 자의 혀로 말한다. 같은 ‘깨우다’ 동사는 51:9에서 백성이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라고 부르짖을 때 다시 나온다. 아침마다 종의 귀를 깨우시는 하나님께 백성은 그 팔을 깨워 구원해 달라고 호소한다.&lt;/p&gt;&lt;p&gt;5절에서 배움은 순종으로 이어진다. 주 여호와께서 귀를 여셨고, 종은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라고 고백한다. 원문은 ‘나는’을 따로 앞세워 화자를 강조한다. 48:8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했고 그들이 모태에서부터 배역한 자라 불렸다고 하셨다. 귀가 닫혀 배역한 백성과 귀가 열려 거역하지 않는 종이 대조된다. 종은 이스라엘이 실패한 자리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순종을 보여 준다. 개역개정에서 5절은 6절과 한 문장으로 이어져, 6절의 고난을 들은 대로 걸어간 길의 연장으로 읽게 한다.&lt;/p&gt;&lt;p&gt;그 길에서 종은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고, 모욕과 침 뱉음 앞에서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6절). ‘맡기며’는 ‘내가 주었다’라는 말로, 4절에서 주 여호와께서 혀를 “주사”라고 할 때와 같은 동사다. 하나님이 종에게 혀를 주셨고, 종은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내준다. 원문에는 ‘수염’이 없지만 뺨에서 뽑는 것은 수염이므로 개역개정은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로 풀었다. UBS 해설은 ‘맡기다’가 종의 자발성을 보여 준다고 하고, 수염을 뽑는 일은 남자를 모욕하는 전통적인 방식이며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경멸의 표시라고 설명한다. 또 이 종이 고난을 받아들였지만 스스로 찾아 나서지는 않았다고 강조한다.&lt;/p&gt;&lt;p&gt;7절은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로 시작하여 두 결론을 끌어낸다. 원문은 ‘그러므로’를 두 번 쓰고, 개역개정은 이를 “도우시므로”와 “굳게 하였으므로”라는 연결 어미로 옮겼다. 첫 결론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의 동사는 6절의 ‘모욕’과 어근이 같다. 사람들은 모욕을 퍼부었지만 종은 그 모욕에 무너지지 않았다. 둘째 결론은 문자적으로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두었다’이다. 6절에서 가리지 않은 얼굴을 7절에서는 부싯돌처럼 세운다. UBS 해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두 결론의 근거이며, 부싯돌은 무엇이 닥쳐도 맞서겠다는 결심을 뜻하고, 체면을 잃는 일이 중대한 문화에서 이 고백이 큰 무게를 지닌다고 설명한다. 종은 사람들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자기 명예를 맡긴다.&lt;/p&gt;&lt;p&gt;8-9절에서 종의 말은 법정의 언어로 옮겨 간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קָרוֹב מַצְדִּיקִי, 카로브 마츠디키)는 ‘가깝다’를 맨 앞에 두어 판결자가 이미 가까이 계심을 강조한다. UBS 해설은 8절의 낱말들을 모두 재판정의 말로 본다. ‘의롭다 하다’는 재판에서 무죄를 선언한다는 뜻이고, ‘다투다’는 정식으로 고소한다는 뜻이며, “나의 대적”(בַעַל מִשְׁפָּטִי, 바알 미쉬파티)은 문자적으로 ‘내 재판의 주인’, 곧 나를 고소하는 자다. “나와 함께 설지어다”는 원문에서 ‘우리가 함께 서자’는 1인칭 복수 청유형이다. 개역개정은 상대에게 명령하는 말로 옮겼지만, 원문에서 종은 고발자에게 함께 재판정에 서 보자고 청한다. 판결하실 분이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lt;/p&gt;&lt;p&gt;9절은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로 7절의 고백을 되풀이한다. 원문은 7절과 같은 형태이며, 개역개정은 흐름에 맞추어 “도우시므로”와 “도우시리니”로 달리 옮겼다.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의 동사는 ‘악하다고 선언하다’라는 뜻으로 8절의 ‘의롭다 하다’와 정반대의 판결이다. 신명기 25:1도 재판장에게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하라고 명한다. 하나님이 종을 의롭다 하셨다면 누구도 그를 정죄할 수 없다. 고발자들은 옷처럼 해어지고 좀이 그들을 먹는다. 큰 소리로 모욕하던 그들의 힘은 낡은 옷처럼 소리 없이 사라진다.&lt;/p&gt;&lt;p&gt;10절에서 종은 3인칭으로 언급되고 말씀은 청중을 향한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그 종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도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처지에 있을 수 있다. 개역개정의 ‘라도’는 원문에 따로 없지만, 어둠 속을 걷는 일이 신뢰를 그만둘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문맥을 살린다. UBS 해설은 이 청중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킨 포로들로 볼 수 있다고 하고, 어둠 속을 걷는 이가 문법상 종일 수도 있으나 문맥상 청중을 가리킨다고 읽는 해석을 소개한다. 그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이다. ‘의지하다’는 무엇에 몸을 기대는 모습을 그린다. 빛이 없을 때 신자는 하나님께 몸을 기댄다.&lt;/p&gt;&lt;p&gt;11절은 반대편 무리를 향한다. “횃불을 둘러 띤 자”(מְאַזְּרֵי זִיקוֹת, 메앗제레 지코트)에서 마소라 본문은 ‘두르다, 띠다’를 뜻하는 동사를 쓰며, UBS 해설은 사해 사본도 같고 히브리어 구약 본문 프로젝트(HOTTP)도 이 읽기를 지지한다고 소개한다. 해설은 이 무리를 종과 그 메시지를 반대하는 자들로 보고,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걸어가며”를 스스로 위험을 부르는 길에 대한 반어로 읽는다. 이 ‘불꽃’(אוּר, 우르)은 51:4의 “만민의 빛”에 쓰인 ‘빛’(אוֹר, 오르)과 자음이 같고 모음만 달라, 사람이 피운 불꽃과 하나님이 비추시는 빛이 대조된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의 손은 50:2에서 구속하지 못할 만큼 짧지 않다고 하신 그 손이다. 자기 불을 의지하며 걷겠다던 이들은 결국 고통이 있는 곳에 눕는다.&lt;/p&gt;&lt;p&gt;51:1-8은 종의 목소리를 듣는 무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내게 들을지어다”(1절), “내게 주의하라”(4절), “내게 듣고”(7절)라는 세 부름으로 짜여 있다. 종의 목소리를 듣는 일과 하나님께 듣는 일이 하나로 이어진다. 1절의 청중은 “의를 따르며”(רֹדְפֵי צֶדֶק, 로드페 체데크)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자들이다. NET 노트는 이 ‘의’에 대해 ‘의’와 ‘정의’ 외에 NLT의 ‘구원을 바라는’이라는 번역도 소개한다. 6절과 8절에서 공의와 구원이 짝을 이루므로, 이들은 바르게 살려고 애쓰면서 약속된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고 하신다. 두 동사는 수동형이어서 백성이 스스로 생겨나지 않고 어떤 근원에서 떠내어졌음을 강조한다.&lt;/p&gt;&lt;p&gt;그 근원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다(2절). NET 노트에 따르면 반석과 구덩이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가리키고, 이사야는 먼 조상인 두 사람을 듣는 이들을 직접 낳은 부모처럼 말한다. 원문의 ‘너희 아버지 아브라함’,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너희를 낳은’ 사라가 그 표현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곧 그가 하나였을 때 그를 부르고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셨다. ‘창성하게 하다’는 창세기 1:28의 ‘번성하라’와 어근이 같으며, NET 노트도 여기의 복을 생육하는 힘을 주시는 일로 읽을 수 있다고 본다. 아브라함은 혼자였고 사래는 자식이 없었다(창 11:30). 자신들이 너무 적고 약하다고 느꼈을 포로기의 남은 자들에게, 처음부터 민족을 만든 것은 사람의 숫자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복이었다.&lt;/p&gt;&lt;p&gt;3절은 그 하나님이 시온에 하실 일을 말한다. 원문은 ‘여호와께서 시온을 위로하셨다’는 3인칭 완료형으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회복을 이미 이룬 일처럼 말하여 그 확실함을 드러낸다. 개역개정은 이를 “나 여호와가 … 위로하여”라는 1인칭으로 옮기고 “같게 하였나니”라는 과거형으로 어감을 살렸다. 하나님은 사막을 에덴 같게,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신다. 롯이 눈에 보기 좋은 ‘여호와의 동산 같은’ 땅을 골랐다면(창 13:10), 여기서는 하나님이 사막이 된 시온을 직접 동산으로 만드신다. 황폐한 곳에 기뻐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다시 울린다. 2절의 아브라함과 3절의 에덴은 백성의 시작과 세상의 시작을 돌아보게 하여, 처음에 일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lt;/p&gt;&lt;p&gt;4절의 둘째 부름에서 하나님은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고 하신다. ‘귀를 기울이라’는 50:4-5의 ‘귀’와 어근이 같아, 종의 귀를 여신 하나님이 이제 백성 전체에게 귀를 기울이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율법, 곧 하나님의 가르침이 그에게서 나가고 그의 공의가 만민의 빛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의’는 50:8에서 ‘내 재판의 주인’이라 할 때 쓰인 말로, 종의 재판에 쓰인 말이 만민에게 세우시는 정의로 넓어진다. NET 노트는 토라를 ‘가르침’으로 옮길 수 있다고 보고, 개역개정이 “세우리라”로 옮긴 말(אַרְגִּיעַ, 아르기아)을 ‘쉬게 하리라’로 옮긴다. 하나님의 정의가 만민 가운데 머물러 그들을 비춘다는 뜻이다.&lt;/p&gt;&lt;p&gt;5절의 “내 공의가 가깝고”(קָרוֹב צִדְקִי, 카로브 치드키)는 50:8의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와 첫 낱말이 같고, ‘공의’도 ‘의롭다 하다’와 어근이 같다. 종이 확신한 가까운 의롭다 하심이 백성과 민족들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공의로 넓어진다. 개역개정은 4절의 미쉬파트와 5절의 체데크를 모두 “내 공의”로 옮겼다. 이어지는 구절은 직역하면 ‘내 팔들이 민족들을 심판하리라’인데, NET 노트는 이를 민족들을 위하여 정의를 베푸는 일로도 읽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섬들은 그 팔을 두려워하기보다 바라고 의지한다. 42:4의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가 다시 울린다.&lt;/p&gt;&lt;p&gt;6절에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보게 하신다. 1-2절에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보라’고 할 때와 같은 동사다. 그러나 그들이 볼 것은 사라짐이다.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כֶּעָשָׁן נִמְלָחוּ, 케아샨 니믈라후)에 대해 NET 노트는 동사를 ‘찢기다’로 풀 수 있고 완료형이 그 확실함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의 동사는 50:9에서 고발자들이 해어진다고 할 때와 같다. 종의 고발자들에게 일어날 일이 온 땅에 일어나고, 그 땅에 사는 사람들도 함께 죽는다. 그러나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폐하여지다’는 ‘깨지다, 꺾이다’라는 동사다. 가장 견고해 보이는 하늘과 땅보다 하나님의 구원이 더 오래간다.&lt;/p&gt;&lt;p&gt;7절의 셋째 부름은 “의를 아는 자들”과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을 향한다. 1절에서 의를 ‘따르던’ 이들이 여기서는 의를 ‘아는’ 이들로 불리고, 4절에서 하나님에게서 나간다고 한 율법이 이제 그들의 마음에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첫 구절(אַל־תִּירְאוּ חֶרְפַּת אֱנוֹשׁ, 알 티르우 헤르파트 에노쉬)은 직역하면 ‘사람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이다. 개역개정은 ‘사람’을 “그들”로 옮겼지만, 원문은 비방하는 이들이 연약하고 죽을 인간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51:12의 “죽을 사람”도 같은 말이다. “놀라지 말라”는 6절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폐하여지지’ 않는다고 할 때와 같은 동사다. 하나님의 공의가 꺾이지 않으므로 그 공의를 마음에 품은 백성도 비방 앞에서 꺾일 필요가 없다.&lt;/p&gt;&lt;p&gt;8절의 “옷 같이 좀이 그들을 먹을 것이며”는 50:9의 ‘옷’, ‘좀’, ‘먹다’를 다시 쓴다. 종이 자기 고발자들을 두고 한 말을 하나님은 종의 목소리를 듣는 백성의 비방자들에게 적용하신다. 8절 후반은 6절의 약속을 순서를 바꾸어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라고 되풀이한다. 두 낱말이 자리를 바꾸며 6-8절을 감싸고, 그 사이의 7절 백성은 사라지지 않는 공의와 구원에 둘러싸인다. 50:4-9의 종이 개인으로 경험한 의롭다 하심과 보호가 51:1-8에서는 그 종의 목소리를 듣는 공동체의 소망이 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이사야 40-55장에서 ‘종’은 두 방향으로 쓰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나의 종”이라 부르며 위로하시지만(41:8; 44:1), 같은 종을 두고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탄식하신다(42:19-20; 48:8). 50:4-9의 종은 아침마다 귀가 깨워지고 거역하지 않는다.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42:23)는 물음은 50:10에서 “너희 중에 …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로 다시 나타난다. 듣지 못하는 종 이스라엘의 문제는 듣는 한 종이 나타나고 백성이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 풀리기 시작한다.&lt;/p&gt;&lt;p&gt;다른 종의 본문과 이어 읽으면 이 길이 더 분명해진다. 42:1-4의 종은 쇠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이방에 정의를 세운다. 49:4의 종은 헛되이 수고하였다고 탄식하면서도 자기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다고 고백한다. 50장에서 그는 매와 침 뱉음을 당하면서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라고 선언한다. 52:13-53:12에서는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린다(53:3). 50:6에서 모욕 앞에 얼굴을 가리지 않은 종을 이제 사람들이 외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종(50:8)은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53:11)에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종이 된다.&lt;/p&gt;&lt;p&gt;UBS 해설은 50:6의 고난을 예레미야의 경험과 견준다. 예레미야는 말씀 때문에 종일 조롱거리가 되었지만 말씀이 마음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참을 수 없었고, 여호와께서 두려운 용사같이 함께하시므로 박해자들이 넘어지리라고 고백했다(렘 20:7-11). 그러나 곧이어 자기 출생을 저주할 만큼 무너졌다(20:14-18). 50장의 종은 뒤로 물러가지 않고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한다. 48:4에서 쇠의 힘줄 같은 목과 놋 같은 이마는 하나님께 맞서는 완고함이었지만, 에스겔 3:8-9에서 하나님은 그 완고한 백성 앞에 보내신 예언자의 얼굴과 이마를 그들보다 더 굳게 하셨다. 50:7의 굳은 얼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사람들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굳셈이다.&lt;/p&gt;&lt;p&gt;50:8-9의 법정은 40-55장의 법정 논쟁과 이어진다. 하나님은 섬들과 민족들을 재판 자리로 부르시고(41:1), 이스라엘에게 함께 변론하자고 하신다(43:26). 50:8에서는 같은 법정의 말이 종의 입에서 나온다. 54:17은 이 확신이 공동체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모든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정죄를 당하리니’(תַּרְשִׁיעִי, 타르쉬이)는 50:9의 “나를 정죄할 자”(יַרְשִׁיעֵנִי, 야르쉬에니)와 같은 동사이며, 원문은 ‘네가 유죄로 선고하리라’는 능동문이다. 고발자의 무기인 ‘혀’도 50:4에서 종이 받은 ‘혀’와 같은 단어다. 하나님께 받은 혀는 지친 자를 살리고, 하나님의 종들을 거슬러 일어난 혀는 정죄를 당한다. 한 종이 누린 변호가 ‘여호와의 종들’이 물려받는 기업이 된다.&lt;/p&gt;&lt;p&gt;51:7의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는 신명기 6:4-6, 말씀이 입과 마음에 있다는 30:14,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는 의인의 걸음이 실족하지 않는다는 시편 37:31을 잇는다. 이스라엘이 말씀을 마음에 두지 못하자 하나님은 율법을 그 속에 두고 마음에 기록하는 새 언약을 약속하셨다(렘 31:31-34). 51:4에서 하나님에게서 나간 율법이 7절에서는 백성의 마음에 있다. 날마다 귀를 깨우치심을 받는 종이 그 첫 모습이며, 그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율법을 마음에 품는다. 실족하지 않는 의인의 걸음은 뒤로 물러가지 않는 종의 걸음과 만난다.&lt;/p&gt;&lt;p&gt;51:1-2는 구원 역사를 출발점에서 다시 읽게 한다. NET 노트는 아브람을 부르신 창세기 12:1-3을 하나님이 세상을 구속하시는 계획의 출발점으로 설명한다. 약속을 받을 때 아브라함은 혼자였고 사래는 자식이 없었다. 에스겔 33:24에서 예루살렘이 무너진 뒤 남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은 한 사람이었는데도 땅을 얻었으니 수가 많은 자기들에게는 더욱 이 땅이 주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에스겔은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서 땅을 차지하려는 그들을 책망한다. 이사야 51장은 같은 아브라함을 다르게 기억한다. 아브라함이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사람의 권리를 내세우는 근거가 되지 않고, 한 사람을 불러 큰 민족을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한다.&lt;/p&gt;&lt;p&gt;사라의 기억은 시온의 운명과 겹친다. 자녀를 잃은 시온은 돌아오는 자녀들을 보고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라고 놀라고(49:21), 잉태하지 못한 여인에게 노래하라는 부름과 장막터를 넓히라는 명령을 받는다(54:1-3). 사라와 리브가와 라헬, 한나에게 그러셨듯 하나님은 불가능해 보이는 자리에서 생명을 일으키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람의 힘으로 이어진 혈통이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나는 공동체다.&lt;/p&gt;&lt;p&gt;51:3의 에덴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사람을 두어 경작하며 지키게 하신 동산(창 2:8-15)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은 그 동산에서 쫓겨났고 이스라엘도 땅에서 쫓겨나 포로가 되었다. 에스겔 36:35도 포로 후의 황폐한 땅이 에덴 동산같이 되리라고 말한다. 이사야 65:17-18은 새 하늘과 새 땅, 즐거운 예루살렘의 창조를 약속한다. 하늘과 땅은 옷같이 낡아 바뀌어도 하나님은 영원히 같으시다는 시편 102:25-27처럼, 51:6-8은 지금의 창조 세계가 영원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는 그 너머까지 이어진다고 말한다. 51:3의 에덴 회복은 하나님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구원사의 마지막을 미리 보여 준다.&lt;/p&gt;&lt;p&gt;51:4-5의 율법과 정의, 빛과 구원, 섬들의 앙망은 시온에서 율법이 나오리라는 2:2-4, 섬들이 종의 교훈을 앙망하리라는 42:1-4, 종을 이방의 빛으로 삼으시는 49:6을 잇는다. 42장과 49장에서 종에게 맡겨진 일이 51장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일로 선언된다. 하나님께 배운 혀로 말하는 종의 말이 하나님에게서 나가는 가르침이 된다.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창세기 12:3의 약속을 하나님은 종과 그의 목소리를 듣는 백성 가운데서 이루어 가신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UBS 해설은 이 화자를 종으로서 말하는 예언자로 소개한다. 그는 포로기 공동체 안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매와 침 뱉음을 당했고, 하나님이 자신을 의롭다 하실 것을 믿었다. 그러나 귀가 열리지 않은 이스라엘과 박해 속에서 무너진 예언자들을 생각하면, 이 종은 한 예언자의 경험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한 순종을 이루고, 52:13-53:12에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사야서는 그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이사야 53장을 읽던 에디오피아 내시가 선지자가 말한 이가 누구인지 묻자 빌립은 그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전했다(행 8:34-35). 초대 교회는 종의 본문이 남긴 물음의 답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았다.&lt;/p&gt;&lt;p&gt;복음서는 예수를 날마다 아버지께 듣는 아들로 그린다. 많은 병자를 고치신 다음 날 새벽에도 예수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막 1:35). 그는 자신의 교훈이 보내신 이의 것이며 아버지께서 가르치시고 명령하신 대로 말한다고 하셨다(요 7:16; 8:28; 12:49-50).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배우는 자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신 것이다. 히브리서 5:7-9는 예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시고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으며, 온전하게 되신 뒤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말한다. 그 영원한 구원은 51:6, 8에서 하나님이 영원하다고 하신 구원과 이어진다.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라는 고백은 잔이 지나가기를 구하시면서도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기를 구한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가장 깊이 드러난다(마 26:39).&lt;/p&gt;&lt;p&gt;곤고한 자를 말로 돕는 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는 예수의 말씀에서 들린다(마 11:28-30).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예수는 ‘딸’이라 부르시며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다(막 5:34). 그 한마디가 오랫동안 부정한 상태로 지내야 했던 여인을 일으켰다. 54:13의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에서 ‘교훈을 받을’(לִמּוּדֵי, 림무데)은 50:4에서 ‘학자들’로 옮긴 말과 같은 단어다. 예수는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자기에게 온다고 하신다(요 6:45). 한 종이 받았던 배우는 자의 귀가 그리스도께 오는 모든 사람에게 열린다.&lt;/p&gt;&lt;p&gt;누가복음 9:51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말하는데, 원문은 ‘얼굴을 굳게 하셨다’는 표현이어서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한 종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는 인자가 능욕과 침 뱉음과 채찍질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겠지만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미리 말씀하셨다(막 10:33-34; 눅 18:31-33).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얼굴을 가리고 주먹과 손바닥으로 쳤다(막 14:65; 15:19; 마 26:67). 예수는 자기를 잡으러 온 무리 앞에 스스로 나서시고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으며(요 18:4-11),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구하지 않으셨다(마 26:53-54). 등을 ‘맡긴’ 종의 자발성이 예수의 수난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lt;/p&gt;&lt;p&gt;베드로전서 2:21-24는 욕을 당하실 때 맞대어 욕하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자신을 맡기신 그리스도를 신자의 본으로 제시한다. 판결을 하나님께 맡긴 50:7-9의 종과 닮았고, 예수도 십자가에서 자기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다(눅 23:46). 베드로는 그 고난을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다는 이사야 53장의 말로 풀이한다(53:5, 9). 베드로전서가 50장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독자는 모욕 앞에 물러서지 않은 종과 우리의 죄를 지고 매를 맞은 종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읽게 된다. 신자는 자기 죄를 대신 지신 분께 나음을 입은 사람으로 그분의 걸음을 따른다.&lt;/p&gt;&lt;p&gt;공회는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정죄했고(막 14:64), 로마 총독은 그를 범죄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게 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그 판결을 뒤집으셨고, 그리스도는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셨다(딤전 3:16).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50장의 종은 자신이 옳다는 확신으로 고발자들에게 맞섰지만,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데도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고 정죄를 받으셨다(사 53:5-6, 11).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종이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종이 된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롬 4:25).&lt;/p&gt;&lt;p&gt;그래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도 종의 법정 질문을 자기 질문으로 삼는다. 바울은 누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겠느냐고 묻고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답한다. 누가 정죄하겠느냐는 물음에는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킨다(롬 8:31-34).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사 50:8-9)가 거의 그대로 다시 울린다. 신자가 고발 앞에 설 수 있는 근거는 자기 결백이 아니라 의롭다 함을 받으신 종이 그들을 위해 대신 정죄를 받으셨다는 사실이다. 송사하는 혀를 이기는 것이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라는 54:17의 약속이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서 이루어진다.&lt;/p&gt;&lt;p&gt;50:10은 빛이 없는 사람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라고 말한다. 십자가에서 온 땅에 어둠이 덮였을 때 예수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막 15:33-34). 버림받은 듯한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신 이 신뢰는, 빛이 없을 때에도 자기 하나님께 기대라는 요구를 종 자신이 먼저 걸어간 길로 읽게 한다. 그 어둠을 지나신 예수는 세상의 빛이시다(요 8:1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후 4:6). 침 뱉음을 당하신 그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비친다. 반대로 스스로 피운 불로 길을 밝히려는 사람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요 3:19).&lt;/p&gt;&lt;p&gt;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경고했다(마 3:9). 반석에서 떠내어진 백성이라는 이사야의 비유를 떠올리게 하는 이 말은 혈통이 아브라함의 자손 됨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된 씨는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고 말한다(갈 3:7-9, 16, 29). 아브라함은 자기 몸과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롬 4:17-19; 히 11:12). 51:2의 “혼자 있을 때에”가 신약에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증언이 되고, 그 능력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가장 크게 나타났다.&lt;/p&gt;&lt;p&gt;히브리서 1:10-12는 하늘과 땅은 옷처럼 낡아도 주는 영원히 같으시다는 시편 102편의 말씀을 아들에게 돌린다. 51:6에서 하나님의 구원에 돌린 영원함을 아들 자신에게서 보는 것이다. 예수도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자신의 말은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하셨다(마 24:35). 사람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51:7-8은 자기 때문에 욕을 먹고 박해를 받는 사람에게 하늘의 상을 약속하신 팔복(마 5:11-12)과 이어지고,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해 능욕받는 일을 기뻐했다(행 5:41). 그들이 받는 비방은 옷처럼 해어지지만 그들을 의롭다 하신 그리스도의 구원은 대대로 이어진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50:4의 종은 남을 돕는 혀를 받기 전에 아침마다 귀가 깨워지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위로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께 듣고 배우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 지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서둘러 내놓는 해답보다 하나님께 들은 데서 나오는 알맞은 한마디다. 하나님께 배운 혀는 지친 자를 살리지만,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혀는 54:17이 말하는 송사하는 혀가 된다.&lt;/p&gt;&lt;p&gt;6-7절의 종은 사명 때문에 모욕을 당했지만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말씀을 따라 불의를 거절하다 조롱과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은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라는 고백을 붙들 수 있다. 동시에 이 종은 고난을 스스로 찾아 나서지 않았다. 자기 고집과 거친 말로 생긴 반대를 신앙의 고난이라 부를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욕을 당하실 때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다(벧전 2:23). 부당한 대우 앞에서 사실을 밝히고 바른 절차를 밟는 일은 필요하지만, 같은 모욕으로 갚지 않고 판결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께 맡긴다.&lt;/p&gt;&lt;p&gt;8-9절의 법정은 신자가 듣는 고발의 목소리를 생각하게 한다. 지난 잘못 때문에 계속 손가락질을 받거나 이미 회개하고 용서받은 죄가 스스로를 정죄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라는 고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롬 8:33-34). 갚아야 할 잘못이 있다면 사과하고 바로잡되, 이미 용서받은 죄에 묶여 스스로를 정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사람을 공동체가 계속 정죄한다면, 그 공동체는 종을 정죄하려던 자들의 자리에 선다.&lt;/p&gt;&lt;p&gt;50:10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종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도 빛이 없는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오랜 질병이나 응답이 보이지 않는 시간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다. 그때 하나님이 금하신 방법이나 거짓으로 상황을 덮어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내려는 마음이 11절이 경고하는 불이다. 치료와 조언을 구하는 일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정직한 걸음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자기 힘으로 빛을 만들려는 마음이다. 교회는 어둠을 걷는 사람에게 섣부른 설명을 주기보다 그의 곁에 머물며 함께 기도한다.&lt;/p&gt;&lt;p&gt;51:1-2는 작아졌다고 느끼는 공동체에게 아브라함과 사라를 돌아보게 한다. 혼자였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자식 없던 사라에게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신다. 그러나 에스겔 33장의 사람들처럼 아브라함을 자기 권리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역사가 깊은 교회나 믿음의 가문이라는 자부심은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대신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시므로(51:4-5), 그 가르침을 마음에 품은 백성은 먼 곳에서 온 이웃이 공정한 대우를 받고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교회의 문을 연다. 사람의 비방은 옷처럼 해어지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대대로 이어진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04/"&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50:4&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06/"&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50:6&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07/"&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50:7&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08/"&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50:8&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010/"&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50:10&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01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50:11&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Isa&amp;amp;chapter=51"&gt;NET Bible, Isaiah 51 번역 노트&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Gen&amp;amp;chapter=12"&gt;NET Bible, Genesis 12 번역 노트&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54:1-17 버림받은 아내를 다시 부르시는 남편, 흔들리지 않는 화평의 언약</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54.1-17/</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54.1-17/</guid><description>이사야 54:1-17은 황폐한 시온을 자녀 없는 여인과 버림받은 아내로 그립니다. 여호와께서는 시온을 다시 부르시고, 노아에게 하신 맹세처럼 화평의 언약으로 시온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십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이사야 54장은 고난받는 종의 노래(52:13-53:12)에 이어 시온에게 기뻐 외치라고 명한다. BHS의 단락 표지는 1-8절의 아내를 다시 부르시는 약속, 9-10절의 노아 때 맹세에 견준 언약, 11-17절의 성을 다시 세우시는 약속을 구분한다. “노래할지어다”(רָנִּי, 론니)는 여인에게 하는 명령이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해설은 1절의 세 명령이 기쁨의 외침을 촉구한다고 설명한다. 아이를 낳지도 산고를 겪지도 못한 여인에게 많은 자녀를 약속하신다.&lt;/p&gt;&lt;p&gt;“홀로 된 여인”(שׁוֹמֵמָה, 쇼메마)은 황폐한 자라는 뜻도 지닌다. 3절의 황폐한 성읍과 같은 어근이어서 여인의 고립과 성의 폐허가 겹친다. UBS는 홀로 된 여인을 포로 이후 예루살렘, 남편 있는 여인을 포로 이전 예루살렘으로 보며 앞으로 인구가 더 많아지리라는 대조로 읽는다. 49장의 시온은 자녀를 잃은 어머니이고 여기서는 출산하지 못한 여인이지만, 두 비유 모두 무너진 성의 회복을 가리킨다. 개인에게 주시는 출산 약속이 아니다.&lt;/p&gt;&lt;p&gt;장막터와 휘장을 넓히고 줄을 늘이며 말뚝을 견고히 하라는 명령은 많은 자녀를 맞을 준비다(2절). “널리 펴되”의 원문은 “그들이 네 처소의 휘장을 펴게 하라”이고, 개역개정은 시온에게 주는 직접 명령으로 풀었다. 자손이 좌우로 퍼지고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에 다시 살기 때문이다(3절). NET는 “얻다”를 정복으로 옮기면서 “차지하다”라는 뜻도 제시한다. 신명기의 땅을 차지하는 언어가 주민을 되찾을 시온에게 적용된다.&lt;/p&gt;&lt;p&gt;4절에는 수치와 치욕의 말이 거듭 나온다. “놀라지 말라”도 갑작스러운 놀람보다 모욕당해 얼굴을 들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불임으로 멸시받던 라헬과 한나(창 30:23; 삼상 1:6), 율법이 보호한 과부(신 24:17-21)의 처지가 시온의 굴욕에 겹친다. NET는 6-8절을 근거로 여기의 과부가 죽음뿐 아니라 버림받아 남편을 잃은 여인도 뜻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시온의 남편은 살아 계시며 다시 부르신다. 젊었을 때의 수치가 어느 역사적 시기인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lt;/p&gt;&lt;p&gt;5절의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כִּי בֹעֲלַיִךְ עֹשַׂיִךְ, 키 보알라이크 오사이크)에서 두 칭호는 복수형으로 쓰였지만 단수 동사와 함께 한 분을 가리킨다. UBS는 남편을 뜻하는 낱말을 이 문맥에서 가나안 신 바알의 이름과 구별한다. 만군의 여호와는 시온을 되찾으실 가까운 친족 같은 구속자이시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시며 온 땅의 하나님이시다. 이 칭호들은 약속을 이루실 책임과 능력을 강조한다.&lt;/p&gt;&lt;p&gt;하나님은 버림받아 근심하는 젊은 날의 아내를 다시 부르신다(6절). “버림을 받아”와 “마음에 근심하는”은 비슷한 소리로 상실과 상처를 연결한다. “너를 부르시되”는 완료형이지만 개역개정은 앞으로 이루실 일로 옮기고 NET는 “다시 불러들이심”으로 풀이한다. 50:1은 내보냄의 원인을 백성의 죄에서 찾되 영원히 관계를 끊는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심판 이후 관계를 되찾으신다.&lt;/p&gt;&lt;p&gt;7-8절은 작은 순간의 버림과 큰 긍휼, 잠시 가린 얼굴과 영원한 자비를 대조한다. 하나님은 실제로 버리셨고 진노하셨다고 말씀하시지만, 그 진노가 마지막은 아니다. “넘치는 진노”(בְּשֶׁצֶף קֶצֶף, 베셰체프 케체프)는 소리의 반복으로 격렬함을 표현한다. NET는 앞 낱말을 홍수의 변형으로 보는 사전 견해와 힘에 관련짓는 견해를 소개한다. 홍수로 읽으면 9절의 노아 이야기와 이어진다. “영원한 자비”(וּבְחֶסֶד עוֹלָם, 우베헤세드 올람)는 변함없는 언약의 사랑이다. 7-10절에 반복되는 긍휼은 49:15의 어머니보다 확실한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lt;/p&gt;&lt;p&gt;하나님은 노아의 홍수가 다시 땅을 덮지 않으리라고 맹세하신 것처럼 시온에게 다시 진노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신다(9절). 창세기 9장은 이를 언약이라 부르며 무지개를 증거로 삼는다. 이사야는 그 약속을 맹세로 읽어 시온에게 적용한다. 8절의 진노를 같은 어근으로 되받아, 다시 쏟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lt;/p&gt;&lt;p&gt;산이 떠나고 언덕이 흔들려도 자비는 떠나지 않고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는다(10절). 같은 동사들을 긍정과 부정으로 반복하여 대조한다. “화평의 언약”(וּבְרִית שְׁלוֹמִי, 우베리트 셸로미)을 NET는 우정의 언약으로 옮기며 원문이 평화라고 밝힌다. 관계의 회복과 온전한 삶을 포괄하는 이 평안은 13절에서 자녀들의 큰 평안으로 나타난다.&lt;/p&gt;&lt;p&gt;11절에서 버림받은 아내는 폭풍에 시달려 위로받지 못한 성으로 그려진다. “안위를 받지 못한”은 40:1의 “위로하라”를 되울린다. 하나님은 직접 기초와 성벽과 성문을 보석으로 다시 세우신다. “성벽”(שִׁמְשֹׁתַיִךְ, 쉼쇼타이크)은 해를 받아 빛나는 성의 윗부분을 가리킬 수 있으나 정확한 부위는 불분명하다. 보석의 정체도 확정하기 어렵다. NET는 “홍보석”을 보석 또는 루비로 설명하고 “석류석”에 해당하는 말(אֶקְדָּח, 에크다흐)은 구약에서 이곳에만 나온다고 밝힌다. 폐허는 아름답고 견고한 성이 된다.&lt;/p&gt;&lt;p&gt;회복된 성의 자녀들은 모두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자들이다(13절). 해당 말(לִמּוּדֵי, 림무데)은 50:4에서 종이 하나님께 배운 “학자들”과 같은 낱말이다. 종이 받은 가르침을 자녀들이 받으며 큰 평안을 누린다. NET는 여호와를 따르는 자들로 옮긴다. 시온의 회복은 인구 증가와 함께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의 회복이다.&lt;/p&gt;&lt;p&gt;“공의로 설 것”의 공의(בִּצְדָקָה, 비츠다카)는 도시의 정의를 뜻할 수도 있지만, NET는 구원의 문맥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 또는 옹호를 택한다. 학대에서 멀리 있으라는 명령도 확실한 약속을 표현하는 수사적 명령으로 풀이한다. 시온은 강자의 착취와 공포에서 벗어나 굳게 선다.&lt;/p&gt;&lt;p&gt;15절은 분쟁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았다고 밝힌다. 이전 심판에서 앗수르가 진노의 막대기였던 것(10:5)과 달리 새 공격자는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지 못한다. 대적은 넘어지며, NET는 이를 패배 또는 항복으로 풀이한다. 16절은 무기를 만드는 장인과 파괴하는 자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두 번 선언한다. 어떤 무력도 창조주의 통치 밖에 있지 않다.&lt;/p&gt;&lt;p&gt;17절에서 무기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고발하는 혀는 오히려 시온에게 정죄받는다.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의 원문은 “네가 정죄하리라”라는 능동적인 판결이다. “그들이 내게서 얻은 공의”를 NET는 하나님이 주시는 옹호로 풀이한다. 분쟁은 “나로 말미암지” 않지만 공의는 “내게서” 나온다. 이 모든 것은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다. 40-53장의 단수 종에서 여기의 복수 종들로 이어지는 흐름은 53:10에서 고난받은 종이 씨를 본다는 약속과 연결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시온은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탄식했지만 하나님은 어머니보다 확실히 기억하며 손바닥에 새겼다고 응답하셨다(49:14-16). 돌아온 자녀들이 좁다고 외치는 49:20은 54:2의 넓어질 장막을 준비한다. 40:1-2에서 시작된 위로는 49:13과 52:9의 노래, 51:11의 귀환으로 이어진다. 애가 1:2, 9의 위로받지 못한 예루살렘을 하나님이 친히 회복하신다.&lt;/p&gt;&lt;p&gt;50:1의 이혼 증서에 대한 질문, 54:6-7의 다시 부르심, 62:4-5의 신부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깨어진 혼인의 회복을 그린다. 신명기 24:1-4와 예레미야 3:8은 이혼 증서의 심각성을 알려 준다. 호세아 2:14-23도 처음 사랑을 되찾고 공의와 긍휼로 영원히 관계를 맺으며 무기를 꺾는 언약을 약속한다. UBS는 이사야 54:5의 남편을 호세아 2:16과 비교한다.&lt;/p&gt;&lt;p&gt;출산하지 못한 사래와 리브가와 라헬, 아이를 얻어 노래한 한나의 역사는 약속의 백성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어졌음을 증언한다(창 11:30; 25:21; 29:31; 삼상 2:5). 이사야 51:2-3은 사라를 기억하라고 한 뒤 시온의 황폐를 위로하신다. 54장의 많은 자녀도 이 약속 안에 있다. 이사야 56:3-5는 자녀 없는 사람에게 자녀보다 나은 영원한 이름을 약속하여, 하나님의 가족 안의 자리를 생물학적 출산에 한정하지 않는다.&lt;/p&gt;&lt;p&gt;노아에게 세운 언약(창 9:8-17)은 심판 이후 하나님이 스스로 진노를 거두시는 약속이다. 시온은 오랫동안 지켜진 그 약속으로 자신에게 주신 맹세도 신뢰할 수 있다. 에스겔 34:25와 37:26의 화평의 언약은 땅의 안전과 하나님의 임재를 약속한다. 이사야 55:3의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는 54:8, 10의 자비와 같은 히브리어 명사로, 시온의 회복과 다윗의 약속을 연결한다.&lt;/p&gt;&lt;p&gt;예레미야 31:31-37의 새 언약은 법을 마음에 기록하고 죄를 사하여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하나님을 알게 한다. 이는 시온의 모든 자녀가 여호와께 배운다는 54:13과 통한다. 해와 달과 창조 질서가 언약을 보증하듯 54:10의 산과 언덕도 사랑의 확실함을 드러낸다. 창조주를 잊어 학대자를 두려워했던 백성(51:13)은 무기 장인도 지으신 하나님 때문에 안심할 수 있다(54:16).&lt;/p&gt;&lt;p&gt;종들의 기업은 이사야 65:8-15의 남겨 두신 종들이 얻을 땅과 기쁨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여호와를 버린 자들과 구별되며, 56:3-8에서는 언약을 붙든 이방인도 하나님의 집에 참여한다. 보석으로 세워진 시온은 65:17-19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즐거운 예루살렘으로 이어진다. 회복의 끝에는 울음이 사라진 하나님의 성이 있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갈라디아서 4:27은 이사야 54:1을 직접 인용한다. 바울은 하갈과 “지금 있는 예루살렘”, 자유 있는 여자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대비하며 후자를 우리 어머니라 부른다(4:24-26). 사라와 시온을 잇는 배경은 이사야 51:2-3에도 있다. 갈라디아 성도는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이며 성령을 따라 난 사람들이다(갈 4:28-29). 그리스도께 속하여 아브라함의 씨가 되고 유업을 잇는다는 3:16, 29의 논증이 시온의 많은 자녀를 그리스도 안에서 읽게 한다.&lt;/p&gt;&lt;p&gt;53장의 종에게 닥친 버림과 얼굴 가림(53:3)은 54:7-8의 시온이 겪은 고통과 겹친다. 종의 징계로 누린 평화(53:5)가 화평의 언약과 자녀들의 큰 평안으로 이어진다(54:10, 13). 교회는 십자가에서 버림받음을 부르짖으신 예수(막 15:34)에게서 그 종을 읽고, 그의 고난으로 시온에게 화평이 주어졌다고 고백한다.&lt;/p&gt;&lt;p&gt;종이 씨를 보고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한다는 53:10-11 뒤에 54:17의 종들이 나타난다. 빌립은 고난받는 종의 말씀에서 예수의 복음을 설명했다(행 8:32-35). 54:17의 공의는 문맥상 대적의 송사에서 하나님이 백성을 옹호하심이다. 이는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누가 자신을 정죄하겠느냐는 종의 고백(50:8-9)과 연결된다. 로마서 8:33-34은 죽고 부활하여 간구하시는 그리스도를 근거로 같은 확신을 말한다. 이사야의 옹호는 그 문맥을 유지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원이 주는 확신과 이어진다.&lt;/p&gt;&lt;p&gt;시온의 남편이신 하나님은 신약에서 신랑 예수의 사역으로 드러난다. 예수는 자신을 신랑으로 부르셨고(막 2:19-20), 세례 요한은 그의 음성을 기뻐하는 친구라 했다(요 3:29).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시고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세우신다(엡 5:25-27). 버림받은 아내를 다시 부르는 이사야의 남편처럼 예수는 죄인들을 잔치에 부르신다(막 2:15-17).&lt;/p&gt;&lt;p&gt;예수는 자기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고(눅 22:20), 히브리서 8:6-13은 예레미야의 약속으로 그의 중보를 설명한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롬 5:1), 유대인과 이방인은 한 새 사람이 된다(엡 2:14-17). 이사야 54:3의 열방을 얻을 자녀에 대한 약속은 신약에서 이방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의 자녀가 되는 일과 연결된다.&lt;/p&gt;&lt;p&gt;요한복음 6:45은 이사야 54:13을 가리켜 모두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고 인용한다. 예수는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이 자신에게 온다고 설명하시며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리겠다고 약속하신다(6:44, 48, 51). 데살로니가전서 4:9의 성도도 하나님께 배워 서로 사랑한다. 배움의 열매는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믿음과 형제 사랑이다.&lt;/p&gt;&lt;p&gt;가까운 친족처럼 되찾으시는 구속자는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예수의 사역에 이어진다(막 10:45; 벧전 1:18-19). 하나님이 세우실 성은 그리스도를 기초와 모퉁잇돌로 삼아 지어지는 교회와도 연결된다(고전 3:11; 엡 2:20-22; 벧전 2:5). 이 연결의 끝에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이 있다.&lt;/p&gt;&lt;p&gt;요한계시록 21장은 신부와 보석의 성을 한 환상에 모은다. 성은 어린 양의 아내이며(21:2, 9) 기초는 보석으로 꾸며진다(21:19-20). 하나님과 어린 양이 성전이고 어린 양이 등불이시다(21:22-23). 아브라함이 기다린 하나님이 지으실 성(히 11:10)에서 구속받은 백성은 더 이상 죽음과 애통을 겪지 않는다(계 21:3-4). 폭풍에 시달린 시온의 회복은 어린 양의 혼인과 영원한 임재의 기쁨에 이른다(19:7).&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하나님은 눈앞의 폐허보다 자신의 약속을 근거로 시온에게 노래하라고 하신다. 약속을 믿는 찬양은 탄식을 지우지 않는다. 시온의 “나를 버리셨다”는 탄식을 기록한 이사야서는 그 고통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도 선포한다. 수치를 잊게 하신다는 약속을 피해자에게 과거를 말하지 말라는 요구로 바꾸면, 상처 입은 시온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거스른다.&lt;/p&gt;&lt;p&gt;불임 여인은 황폐한 시온의 비유다. 이를 개인의 출산 보장으로 말하거나 자녀 없는 처지를 믿음 부족과 연결할 수 없다. 자녀 없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한 이름을 주신다(56:3-5).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존귀함은 혼인 여부나 출산에 달리지 않는다.&lt;/p&gt;&lt;p&gt;하나님은 언약을 어긴 백성에게 내린 진노를 인정하시며 영원한 자비를 약속하신다. 죄를 범한 사람은 그 자비를 의지해 돌아가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모든 질병과 사고를 이 포로기의 심판과 동일시할 근거는 없다. 버림받은 아내의 비유도 특정 혼인 분쟁의 법적 결론을 정하거나 상처 입은 이에게 관계 회복을 강요하는 규정이 아니다. 본문의 확신은 하나님이 자기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데 있다.&lt;/p&gt;&lt;p&gt;“모든 연장이 쓸모가 없을 것”이라는 약속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주시는 최종적인 옹호다. 사업 성공을 보장하거나 지도자에게 제기된 정당한 비판을 막아 주는 말이 아니다. 여호와께 배우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학대와 공포에서 벗어날 시온의 소망을 말하면서 학대를 숨기거나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을 침묵시킬 수 없다.&lt;/p&gt;&lt;p&gt;회복된 시온의 모든 자녀는 하나님께 배운다. 아버지께 배운 사람은 그리스도께 오고 서로 사랑한다(요 6:45; 살전 4:9). 시온의 넓어진 장막과 열방을 얻는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는 소망이다. 민족이나 교회의 세력 확장을 정당화하기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화평을 받아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그분을 섬기는 삶을 가리킨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passage.php?passage=Isa+54%3A1-17"&gt;NET Bible, Isaiah 54:1-17 번역 노트&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4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2011), 54:1, TIPs 공개 해설&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45/"&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2011), 54:5, TIPs 공개 해설&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55:1-13 값없이 오라, 들으라, 그리하면 살리라</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55.1-13/</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55.1-13/</guid><description>이사야 55:1-13 주해입니다. 하나님은 목마른 자를 값없이 부르시고, 다윗에게 보이신 확실한 은혜를 백성에게 베푸시며, 돌아오는 악인을 너그럽게 용서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으며 기쁨의 귀환을 이룹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이사야 55장은 시온의 회복을 노래한 54장 뒤에서 포로 공동체를 부른다. 첫머리의 “오호라”(הוֹי, 호이)는 여기서 주의를 끄는 외침이며 안타까움도 담길 수 있다. 목마르고 돈 없는 사람들이 물과 포도주와 젖을 사도록 초청받는다. ‘사라’는 말에 ‘돈 없이, 값 없이’가 붙는 역설이다. NET은 보통 값을 내야 얻는 것을 거저 가져가라는 놀라운 제안으로 풀이한다. 생존에 필요한 물과 넉넉한 식탁의 포도주와 젖은 굶주린 백성에게 약속된 풍성한 삶을 그린다.&lt;/p&gt;&lt;p&gt;2절의 “은을 달아 주며”는 은을 저울에 달아 값을 치르던 거래 방식이다. 1절의 ‘돈’과 2절의 ‘은’은 같은 히브리어다. 사람들은 수고해서 번 소득을 양식이 되지 못하고 배부르게 하지 못하는 것에 쓴다. 하나님은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라고 부르신다. 같은 동사를 거듭하는 표현은 청종을 강조한다.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이 먹을 ‘좋은 것’은 용서와 새 언약 관계와 백성의 영예를 가리킨다. 음식을 먹으라는 초청은 말씀을 들어 생명을 얻으라는 부름으로 이어진다.&lt;/p&gt;&lt;p&gt;3절에서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 나아와 들으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고 약속하신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해설은 귀를 기울임을 순종으로, 산다는 말을 더 오래 살거나 더 나은 삶을 누리는 뜻으로 풀이한다. 개역개정의 ‘영혼’에 해당하는 말은 2절의 “너희 자신들”과 같으며 청중 자신을 가리킨다. NET도 신명기 30장의 언약적 번영과 민족의 안전을 배경으로 읽는다. 몸과 분리된 내면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백성의 삶이 회복된다는 약속이다.&lt;/p&gt;&lt;p&gt;하나님은 백성과 영원한 언약을 맺어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חַסְדֵי דָוִד הַנֶּאֱמָנִים, 하스데 다비드 한네에마님)를 주겠다고 하신다. ‘은혜’는 언약에 신실한 사랑을 가리킨다. 히브리어의 ‘다윗의’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보이신 사랑이나 다윗이 보인 신실함으로 읽을 수 있다. NET은 다윗 언약이 온 백성에게 이전된다는 견해, 그 약속이 확대·성취된다는 견해, 새 언약이 다윗 언약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는 견해, 다윗의 신실함이 약속의 근거라는 견해를 소개한다. 4-5절의 비교에 근거하여 셋째를 택한다. UBS는 하나님이 다윗 왕조에 거듭 베푸신 사랑으로 읽으며 이 구절을 왕조의 정치적 복귀 약속과 구별한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의 다윗 왕 기대와 다른 강조점이다. 이 해석들 가운데 앞의 세 견해와 UBS는 다윗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백성과 맺는 언약에 연결됨을 인정한다. 54:8의 영원한 자비가 55:3의 영원한 언약으로 이어진다.&lt;/p&gt;&lt;p&gt;4절의 ‘그’는 만민의 증인과 인도자와 명령자로 세움받은 다윗이다. 5절의 ‘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다윗이 맡았던 증인의 역할을 이제 백성이 이어받아 알지 못하던 나라를 부르고, 그들을 모르던 나라들이 달려온다. 원문은 단수 ‘나라’와 복수 동사를 결합하여 여러 민족을 포괄한다. 서로 알지 못했던 이들이 만나는 까닭은 포로 백성을 영화롭게 하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께 있다.&lt;/p&gt;&lt;p&gt;6-7절은 가까이 오신 하나님을 지금 찾으라고 부른다. “만날 만한 때에”(בְּהִמָּצְאוֹ, 베힘마체오)는 NET의 풀이대로 하나님이 자신을 찾도록 허락하시는 때다. 그분을 찾는 일은 악한 길과 불의한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는 회개다. 예언자는 “우리 하나님”이라 부르며 청중과 같은 자리에서 너그러운 용서를 호소한다. 이는 포로 가운데서 돌아와 하나님을 찾으면 긍휼을 얻으리라는 신명기 4:25-31, 30:1-10, 열왕기상 8:46-53의 약속과 이어진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회개와 포로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회복이 연결된다.&lt;/p&gt;&lt;p&gt;8-9절은 하나님의 생각과 길을 7절의 악한 생각과 길에 맞세운다. 8절의 ‘이는’은 7절의 용서를 뒷받침하며 ‘참으로’라는 강조로 읽을 수도 있다. 원문은 ‘내 생각, 너희 생각’과 ‘너희 길, 내 길’을 교차 배열한다. UBS 해설은 사람이 계획을 이루지 못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뜻을 이루신다는 차이, 백성을 용서하고 돌아오게 하실 능력을 강조한다. 하늘과 땅의 거리는 회복의 뜻을 신뢰하게 하는 비유다. 사람의 제한된 계산으로 하나님의 너그러운 용서와 구원을 재단할 수 없다.&lt;/p&gt;&lt;p&gt;10-11절은 비와 눈이 땅에 생명을 주듯 말씀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한 문장이다. 비에 의존해 농사짓는 땅에서 하늘의 물은 씨와 양식을 낳는다. 2절에서는 사람이 수고하고도 양식을 얻지 못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양식을 주신다. “헛되이”는 빈손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뜻한다. 7절에서 백성은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고, 같은 동사로 표현된 11절의 말씀은 일을 이루지 않은 채 돌아오지 않는다. 보냄받은 사자처럼 그 뜻을 이루는 ‘말’은 이 문맥의 용서와 귀환 약속이다.&lt;/p&gt;&lt;p&gt;말씀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가면 백성도 포로지에서 기쁨으로 나아가 평안히 인도받는다. 11-12절의 ‘나감’은 같은 동사다. 산과 언덕은 노래하고 나무는 손뼉을 치며, 가시나무와 찔레 대신 잣나무와 화석류가 자란다. “여호와의 기념”은 직역하면 여호와께 ‘이름’이 된다는 말이다. NET은 56:5에서 ‘이름’이 ‘기념물’과 짝지어진 용례를 근거로 기념비로 옮긴다. UBS도 56:5의 끊어지지 않을 영원한 이름과 55:13의 표현이 매우 비슷함을 지적한다. 3절의 언약을 ‘맺다’와 13절의 표징이 ‘끊어지다’는 같은 어근이며, 두 절의 ‘영원한’도 같다.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의 회복이 끊어지지 않을 표징으로 남는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UBS 해설은 영원한 언약이 노아, 아브라함, 다윗 가문을 거쳐 이사야 55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지는 흐름을 설명한다. 창세기 9:8-17에서 하나님은 노아와 후손, 모든 생물과 언약을 세우고 무지개를 표로 주셨다. 이사야 54:9-10은 그 맹세를 불러와 산과 언덕이 떠나도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 산과 언덕이 55:12에서는 귀환을 노래한다. 노아 언약의 무지개처럼 55:13의 회복된 나무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리는 표가 된다.&lt;/p&gt;&lt;p&gt;이사야 41:17-20은 광야에 물을 내고 잣나무와 화석류를 심어 사람들이 여호와의 손을 알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44:3은 목마른 자에게 주는 물을 자손에게 부을 영과 복에 연결한다. 48:20-21은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명령을 옛 출애굽의 반석 물에 잇고, 52:11-12는 하나님이 앞뒤에서 보호하시는 귀환을 말한다. 55:1, 12-13의 물과 나무, 나아감은 이 새 출애굽의 약속을 이어받는다. 처음 출애굽의 광야에서처럼 하나님은 돌아오는 백성에게 양식을 거저 주신다.&lt;/p&gt;&lt;p&gt;신명기 30:1-20은 흩어진 백성이 돌아와 말씀을 들으면 긍휼을 얻어 땅으로 돌아오고 생명을 얻는다고 약속한다. 하나님은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고 말씀을 입과 마음에 가까이 두신다. 땅에 들어가기 전 경고를 들었던 백성은 이제 그 저주를 겪은 뒤 용서를 듣는다. 이사야 55장의 들음과 생명, 돌아옴과 긍휼은 그 약속을 포로들에게 적용한다. 하나님께서 먼저 가까이 오셔서 그 말씀을 이루신다.&lt;/p&gt;&lt;p&gt;이사야 40:1-11은 죄 사함과 광야의 길, 영원한 말씀을 선포하여 40-55장의 위로를 연다. 55장은 용서와 귀환, 뜻을 이루는 말씀으로 그 선포에 응답한다. 40장에서 낮아져야 했던 산과 언덕은 55장에서 노래한다. 49:8-13에서는 종이 백성의 언약이 되어 목마르지 않을 귀환을 이루며 산들이 기뻐한다. 종을 통해 회복된 백성은 55:5에서 열방을 부른다.&lt;/p&gt;&lt;p&gt;52:13-53:12의 종은 백성의 죄악을 담당하고 평화와 나음을 이루며 범죄자를 위해 기도한다. 그 뒤 54장은 시온의 자녀와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을 약속하고, 55장은 값없는 식탁을 연다. 55장 자체는 식탁의 값을 누가 치렀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이사야서의 이 순서에서 값없는 용서와 생명은 종의 대속 사역이 맺은 열매로 읽힌다.&lt;/p&gt;&lt;p&gt;사무엘하 7:8-16과 23:5는 다윗 가문과 맺은 언약을 말한다. 왕조가 무너진 뒤 시편 89:49는 다윗에게 맹세한 인자하심이 어디 있느냐고 탄식한다. 이사야 55:3-5는 그 사랑을 백성에게 주시고 증인의 역할을 맡기신다는 약속이다. UBS는 이를 다윗 왕의 귀환을 기대한 예레미야 33:17, 에스겔 34:23과 구별한다. 다윗 계열의 왕과 백성 전체에 미치는 다윗의 은혜라는 두 강조는 신약에서 다윗의 자손 예수에게 연결된다.&lt;/p&gt;&lt;p&gt;예레미야 31:12, 14, 31-34도 포로 백성의 배부름과 새 언약과 죄 용서를 연결한다. 마음에 새긴 법을 강조하는 예레미야와 다윗의 은혜와 열방을 강조하는 이사야는 언약을 깨뜨린 백성에게 먼저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한다. 이사야 56:1-8은 그 초청을 이방인과 고자에게 구체화한다. 고자에게 주시는 끊어지지 않을 영원한 이름은 55:13의 표징을 되울리며, 이방인도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인도된다. 언약 밖으로 밀려날까 두려워하던 사람들도 하나님께 속한 이름을 받는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사도행전 13:23, 32-39에서 바울은 다윗의 후손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선포하면서 이사야 55:3을 직접 인용한다.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라는 표현은 칠십인역을 따른다. 다윗은 죽어 썩었으나 예수는 다시 썩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부활하신 다윗의 자손을 통해 그 확실한 은혜를 백성에게 주신다. 바울은 곧바로 예수를 힘입는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선포하고, 이사야 49:6을 인용하여 이방인을 향한다(행 13:46-48). 이사야 55장의 용서와 열방 초청이 그 설교에서 이어진다.&lt;/p&gt;&lt;p&gt;다윗과 그 왕조, 이스라엘 백성은 죄와 실패 때문에 증인과 인도자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다. 요한계시록 1:5는 예수를 충성된 증인,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 땅의 임금들의 머리라 부른다. 이사야 55:4의 직접 인용은 아니지만, 다윗이 다 이루지 못한 증언과 통치를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고백한다. 약속의 확실함은 인간 왕조의 신실함에 달려 있지 않다.&lt;/p&gt;&lt;p&gt;값없는 초청은 받는 사람이 값을 내지 않는 은혜다. 그리스도는 부요하신 분으로서 가난하게 되어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고(고후 8:9), 하나님은 그분 안에서 죄를 돌리지 않고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후 5:19, 21). 이사야 53장의 대속과 55장의 용서가 예수의 십자가에서 만난다. 죄를 알지 못하신 분이 죄인을 대신하셨기에 죄 사함을 값없이 받는다.&lt;/p&gt;&lt;p&gt;요한복음 6:26-35에서 예수는 썩을 양식을 위한 수고를 돌이켜 영생하는 양식을 구하라 하시며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밝히신다. 자신에게 오는 이는 주리지 않고 믿는 이는 목마르지 않는다고 약속하신다.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는 이사야의 초청이 예수께 나아오라는 부름으로 이어진다. 베드로는 그분께 영생의 말씀이 있다고 고백한다(요 6:68). 누가복음 14:15-24의 큰 잔치는 값을 치를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채워지고, 마지막 만찬에서는 예수께서 자기 몸과 피를 떡과 잔으로 주신다(마 26:26-28). 그는 잔치를 여시며 자기 생명으로 그 은혜를 주시는 분이다.&lt;/p&gt;&lt;p&gt;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생하도록 솟는 물을 약속하고(요 4:13-14), 목마른 이는 누구든 자기에게 와서 마시라고 외치신다(요 7:37-39). 요한은 이를 성령으로 설명한다. 이사야 44:3에서 물과 영이 병행하고 55:1에서 물로 오라고 부르는 약속이 그분께 연결된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고 교회는 ‘아멘’으로 응답한다(고후 1:20). 55:3의 ‘확실한’과 ‘아멘’은 믿을 만함을 뜻하는 같은 어근에 속한다.&lt;/p&gt;&lt;p&gt;55:11의 말은 먼저 용서와 귀환의 약속이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고, 예수께서 보내신 아버지의 일을 이루셨으며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고 증언한다(1:14; 4:34; 17:4; 19:30). 보내심을 받아 뜻을 이루는 말씀의 그림에서 그 사역을 읽게 된다. 바울은 이사야 49:8의 은혜의 때를 인용하여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 선포하며(고후 6:2),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한다(5:20). 가까이 계실 때 하나님을 찾으라는 부르심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열린다.&lt;/p&gt;&lt;p&gt;귀환한 백성은 여전히 이방 왕의 종이었고(느 9:36-37) 다윗 왕조의 왕좌도 회복되지 않았다. 열방과 피조물이 기뻐하는 약속은 예수의 오심과 죽음과 부활로 성취되기 시작하여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 요한계시록 21:6과 22:16-17은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신 예수와 성령과 신부의 값없는 생명수 초청을 나란히 둔다. 다시 저주가 없을 새 예루살렘(22:3)은 가시덤불을 내던 땅의 저주(창 3:18)가 걷히는 완성이다. 이사야의 가시나무 대신 자라는 나무들,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은 그 새 창조의 소망으로 이어진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자격을 예배와 헌금과 봉사로 살 수 없다. 목마르고 돈 없는 사람에게 먼저 열린 초청이기 때문이다. 섬김은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응답이다. 재산과 지위, 봉사 이력을 하나님 백성으로 들어오는 값처럼 요구하는 태도는 그 초청을 거스른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은 ‘영혼’에 갇힌 내면의 만족이 아니라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백성의 회복이므로, 실제로 굶주리는 이웃의 생명도 신앙의 관심에 속한다.&lt;/p&gt;&lt;p&gt;하나님께 돌아오려는 사람은 악한 행실과 그것을 낳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거짓과 부당한 이익을 붙든 채 초청만 즐길 수는 없다. 삭개오가 속여 빼앗은 것을 갚겠다고 한 회개(눅 19:8)처럼,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를 바로잡는 행동이 뒤따른다. 회개를 촉구하는 사람도 “우리 하나님”이라고 말한 예언자처럼 그 부르심 안에 선다. 너그러운 용서의 약속은 죄가 크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미루는 사람을 지금 부른다.&lt;/p&gt;&lt;p&gt;“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라는 말씀은 이 문맥에서 죄인을 용서하고 회복하실 하나님의 뜻을 보증한다. 자신의 계획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긴 채 성공을 보장받으려는 데 이 말을 사용할 수 없다.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 말씀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용서와 언약 백성의 회복을 이룬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해진 이 약속을 믿고 증언한다. 알지 못하던 나라들이 달려오는 것은 교회의 업적을 자랑할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결과다. 회복의 기쁨과 찬송은 그분의 이름을 기린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passage.php?passage=Isa+55%3A1-13"&gt;NET Bible, Isaiah 55:1-13 번역 노트&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53/"&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55:3 TIPs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58/"&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55:8 TIPs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65/"&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56:5 TIPs 발췌&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56:1-8 만민이 기도하는 집, 고자와 이방인에게 주시는 영원한 이름</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56.1-8/</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56.1-8/</guid><description>이사야 56:1-8에서 여호와께서는 가까이 온 구원을 근거로 정의와 의를 명하시고, 백성 중에서 갈라질까 두려워하는 이방인과 고자에게 자기 집 안의 이름과 기도하는 자리를 약속하십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이사야 56장은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는 복수 명령으로 시작하여 공동체 전체를 부른다. 명령의 이유는 하나님 편에서 나온다.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백성이 행할 ‘의’(וַעֲשׂוּ צְדָקָה, 와아수 체다카)와 하나님께서 나타내실 ‘공의’(וְצִדְקָתִי, 웨치드카티)는 같은 명사다. NET는 뒤의 것을 하나님께서 백성을 공개적으로 옹호하시는 일로 옮기면서 ‘의’로도 읽을 수 있다고 밝힌다. NET 노트가 밝히는 직역은 ‘나의 구원은 오기에 가깝고, 나의 공의는 드러나기에 가깝다’이다. 개역개정의 “가까이 왔고”는 구원이 이미 도착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지만, 히브리어는 곧 올 구원의 임박함을 말한다. 1절은 백성의 행위를 구원의 값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구원을 가져오실 하나님을 기다리는 백성은 지금 그분의 뜻에 맞게 판단하고 행해야 하며, 기다림은 불의를 내버려 둘 핑계가 되지 못한다.&lt;/p&gt;&lt;p&gt;2절은 히브리어로 ‘복되도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복 있는 사람을 묘사한다. 그는 ‘사람’(אֱנוֹשׁ, 에노쉬)과 ‘사람의 아들’(וּבֶן־אָדָם, 우벤 아담)로 불린다. 둘 다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3절 이하의 이방인과 고자가 들어설 자리가 이미 열려 있다. 그는 이 길을 “굳게 잡는” 사람이며, 같은 동사가 4절과 6절에서 언약을 굳게 잡는 일로 다시 나온다. 원문은 “안식일을 지켜”와 “그의 손을 금하여”를 같은 ‘지키다’ 분사로 묶는다. 이 동사는 1절의 “지키며”와 어근이 같고 4절과 6절에서도 반복되어, 정의와 안식일과 손과 언약을 하나의 생활로 묶는다. 하나님께 속한 시간을 지키는 일과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일이 함께 간다. 예배를 중시한다는 말이 손으로 행하는 불의를 가리는 방패가 될 수는 없다.&lt;/p&gt;&lt;p&gt;3절은 이방인과 고자의 두려움을 들려주고, 하나님은 4-5절에서 고자에게, 6-7절에서 이방인에게 답하신다. 이방인, 고자 순서로 나온 두려움이 고자, 이방인 순서의 약속으로 되돌아오는 교차 구조다. 8절에는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하나님의 선언이 놓인다. 1절에서 공동체 전체에 주신 정의의 요청은 그 공동체 안에서 자기 자리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문제로 이어진다.&lt;/p&gt;&lt;p&gt;3절의 두 문장은 모두 “말하지 말며”, “말하지 말라”라는 금지로 시작한다. 첫째 목소리는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이다. Ogden과 Sterk의 UBS 핸드북은 ‘이방의 아들’이라는 이 표현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를 가리키며, 단수형이지만 집단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NET는 “연합한”을 ‘스스로 붙은’ 사람으로 풀이한다. 이미 여호와께 붙어 있는 사람이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고 두려워한다. “반드시 갈라내시리라”(הַבְדֵּל יַבְדִּילַנִי, 하브델 야브딜라니)는 같은 동사를 겹쳐 써서 그 일이 확실히 일어나리라는 두려움을 강조한다. 둘째 목소리는 고자다. 그는 “나는 마른 나무라”(הֵן אֲנִי עֵץ יָבֵשׁ, 헨 아니 에츠 야베쉬)고 말한다. 개역개정은 앞의 헨을 따로 옮기지 않았는데, UBS 핸드북은 이 말이 남에게 보라고 하는 말보다 탄식에 가깝다고 본다. 같은 해설에 따르면 마른 나무는 이름을 이을 후손이 없다는 비유이며, 고자가 하나님의 백성에서 배제될까 두려워한 직접 이유는 신명기 23:1의 규정에 있다. 하나님은 두 사람이 혼자 자기 신분을 결론짓도록 두지 않으신다.&lt;/p&gt;&lt;p&gt;하나님은 먼저 고자들에게 답하신다(4절). 3절의 단수 ‘고자’가 복수로 바뀌어 그 무리 전체를 부른다. 그들은 돌아오는 안식일마다 지키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고 언약을 굳게 잡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겠다고 하신다. “기념물과 이름”(יָד וָשֵׁם, 야드 와쉠)은 문자적으로 ‘손과 이름’이며, NET는 ‘손’이 기념물을 가리키는 다른 용례가 있다고 밝힌다. UBS 핸드북은 두 말이 한 가지를 가리키며 이 기념물이 자녀보다 더 오래가고 의미 있다고 설명하고, 아들이 없어 스스로 비석을 세운 압살롬의 사무엘하 18:18을 같은 뜻의 용례로 든다. 또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하신다는 말의 ‘끊어짐’이 레위기에서 죄를 지은 사람을 백성 중에서 끊는다고 할 때의 표현과 이어지며, 이 줄 전체가 55:13의 끝 줄과 매우 비슷하다고 본다. 55:13에서 회복된 땅의 나무들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할 때, ‘기념’과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는 56:5의 ‘이름’, ‘끊어지지 아니하게’와 같은 말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해 세우시는 표징의 확실함이 고자 한 사람의 이름에도 주어진다.&lt;/p&gt;&lt;p&gt;5절은 “그들에게” 주겠다고 하다가 영원한 이름은 ‘그에게’ 주겠다고 단수로 말한다. 개역개정은 둘째 대상을 따로 옮기지 않았지만, 원문에서는 무리 전체에 주신 약속이 그 안의 한 사람에게도 미친다. “내 성 안에서”는 직역하면 ‘나의 성벽들 안에서’이며, UBS 핸드북은 이를 성전과 그 성벽으로도, 성전과 예루살렘 성벽으로도 읽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개역개정은 뒤의 읽기를 따른다. 하나님은 고자가 먼저 몸의 조건을 바꾸거나 후손을 얻어야 자기 집에 속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자녀를 통한 가문의 기억이 중요하던 사회에서 하나님 자신이 그 이름의 지속을 보장하신다.&lt;/p&gt;&lt;p&gt;6-7절은 이방인들에게 돌아간다. 3절의 단수 ‘이방인’이 여기서는 복수로 나온다. 그들은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고 그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고, 안식일을 지키며 언약을 굳게 지킨다. 출신이 달라도 그들의 소속은 예배와 사랑과 생활로 드러난다. 54:17은 회복된 시온의 기업을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라 불렀고, 56:6은 그 종들 가운데 이방인이 들어설 수 있음을 보여 준다. 7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성산으로 인도하고 기도하는 집에서 기쁘게 하시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제단에서 기꺼이 받으신다. 인도하고 기쁘게 하시는 행위자는 하나님이다. 3절에서 두려워하던 사람이 성전 안에서 기뻐하며, 성전 주변에 겨우 머무는 손님으로 남지 않는다.&lt;/p&gt;&lt;p&gt;그 이유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이다. 이 줄을 여는 ‘이는’은 1절과 같은 이유의 접속사다. UBS 핸드북은 “일컬음이 될”이 이름표를 붙이는 데 그치지 않고 성전이 실제로 기도의 처소로 인정받는다는 뜻이며,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라는 “만민”에는 이스라엘도 포함된다고 설명한다. NET는 “기도하는 내 집”을 직역하여 ‘내 기도의 집’으로 옮긴다.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 성소에 나아와 예배하도록 이끄시고 그 예배를 받겠다고 약속하신다.&lt;/p&gt;&lt;p&gt;8절은 말씀하시는 분을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라고 부른다. 그분은 “내가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고 하신다. 이 줄(עוֹד אֲקַבֵּץ עָלָיו לְנִקְבָּצָיו, 오드 아카베츠 알라우 레니크바차우)을 NET는 문자적으로 ‘아직 내가 그 위에, 그의 모인 자들에게 모으리라’로 옮기며 뜻이 분명하지 않다고 밝힌다. NET는 두 대명사가 이스라엘을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전치사를 예레미야 49:5처럼 목적어를 이끄는 것으로 읽어 ‘내가 그에게 그의 모인 자들을 더 모으리라’로 옮길 수 있다고 제안한다. 이 읽기는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계속 모으시는 데 초점을 두고, 개역개정은 이미 모인 무리에 새로 더해질 사람들을 드러낸다. 한 절 안에서 ‘모으다’의 어근이 세 번 쓰여 말씀하시는 분의 성품과 앞으로 하실 일이 일치함을 보여 준다. 8절의 대명사만으로 모인 사람들의 범위를 다 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3-7절에서 언약을 붙든 이방인과 고자에게 하나님의 집 안의 자리를 약속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모으시는 백성은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들과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을 함께 품는다. 1절의 가까운 구원은 이렇게 구체화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신명기 23:1-8은 생식기가 상한 사람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고, 암몬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에돔과 애굽 사람은 삼 대 후에 들어올 수 있다고 민족마다 달리 규정한다. 그 이유도 출애굽 길에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했는지, 형제 관계와 객으로 살았던 기억에 있다. 이 규정을 배경으로 읽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내 집에서” 고자에게 이름을 주겠다고 하신 말씀의 무게가 드러난다. 56장의 이방인과 고자는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 이름을 사랑하고 언약을 붙드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혈통과 신체 조건 때문에 생긴 배제의 염려를 자신의 새 말씀으로 다루시며, 총회의 거룩함을 지키려던 경계 안쪽에 그들의 자리를 마련하신다.&lt;/p&gt;&lt;p&gt;56장이 이방인과 고자에게 요구하는 안식일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가족만의 것이 아니었다. 출애굽기 20:10은 종과 가축과 “네 문안에 머무는 객”도 쉬게 하고, 신명기 5:12-15는 그 이유를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종이었다는 구원의 기억에 둔다. 레위기 19장은 “너희는 거룩하라”(19:2)는 말씀 뒤에 안식일 준수를 명하고(19:3), 거류민을 학대하지 말고 자기 같이 사랑하라고 한다(19:33-34). 거룩함과 안식일과 나그네 사랑이 한 장에 묶여 있다. 56:1-2가 구원의 가까움과 안식일과 악을 행하지 않는 손을 연결하는 것도 이 흐름에 있다. 하나님께 속한 시간을 지킨다는 고백에는 자기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을 쉬지 못하게 하는 삶을 돌아볼 책임이 따른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의 안식일은 같은 구원의 기억에 참여하는 삶이다.&lt;/p&gt;&lt;p&gt;이사야 2:2-4는 말일에 만방이 여호와의 산으로 모여들어 그 길을 배우리라고 말한다. UBS 핸드북도 56:7의 “나의 성산”을 2장의 여호와의 전의 산과 연결하고,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2:3과 비교한다. 2장에서는 민족들이 가르침을 받으러 올라오고, 56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을 인도하여 그 예물을 받으신다. 2장의 열방은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무기를 농기구로 바꾼다. 열방의 참여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고 사는 공동체를 이루며, 1절의 정의와 의가 기도의 집 약속에 앞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배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 행동을 그대로 두는 종교적 장식이 될 수 없다.&lt;/p&gt;&lt;p&gt;열왕기상 8:41-43에서 솔로몬은 먼 땅에서 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이방인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간구한다. 땅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려는 것이다. 성전 봉헌 때부터 이방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었고, 56:7은 그들을 성산으로 인도하고 기쁘게 하시며 예물을 받겠다는 약속으로 그 관계를 분명하게 한다. 이스라엘에게 맡겨진 예배의 자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열방의 기쁨을 향해 열려 있다.&lt;/p&gt;&lt;p&gt;54:1-3은 잉태하지 못한 여인 같은 시온에게 노래하라 하고 장막터를 넓히라고 명한다. 56:3-5는 후손을 낳지 못하는 고자 한 사람의 소속과 이름에 응답한다. 두 약속은 하나님의 회복이 상실과 수치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어지지만,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되지는 않는다. 시온에는 많아질 자녀가, 고자에게는 자녀보다 나은 이름이 약속된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가치를 혈연의 지속이라는 한 가지 방식으로만 인정하지 않으신다.&lt;/p&gt;&lt;p&gt;56:6에서 이방인이 여호와의 종이 된다는 말은 54:17의 “여호와의 종들”과 이어진다. 그 호칭은 공동체의 가장자리에서 허드렛일만 하라는 뜻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7절은 그의 기도와 제물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명시한다. 이방인은 출신 때문에 영원히 방문자 신분에 머무르도록 약속받지 않고, 하나님께 연합한 사람으로 그 집 안에서 예배하는 소속을 받는다.&lt;/p&gt;&lt;p&gt;55:13의 회복된 땅을 알리는 “영영한 표징”과 56:5의 고자에게 주시는 이름은 같은 낱말과 같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를 쓴다. 공동체의 회복을 알리는 확실한 표징이 개인에게 주어지는 이름과 어울린다. UBS 핸드북이 용례로 드는 사무엘하 18:18에서 압살롬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다고 말하며 스스로 비석을 세웠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름과 기억은 후손의 존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이사야의 고자는 권력으로 기념비를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집 안에 이름을 주시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땅과 도시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갈 사람의 존엄도 회복한다.&lt;/p&gt;&lt;p&gt;55:6-7은 가까이 계신 여호와를 찾고 불의한 길을 버려 돌아오라고 부르며, 그분이 긍휼히 여기시고 너그럽게 용서하신다고 말한다. 55:6의 “가까이 계실 때에”와 56:1의 가까운 구원을 이어 읽으면, 백성을 맞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께 응답하는 삶의 변화가 연결된다. 안식일의 쉼과 거류민 사랑, 정의로운 판단과 열방의 기도는 모두 여호와와 맺은 관계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모으시는 백성은 혈통을 확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용서와 구원의 약속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공동체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예수께서는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이사야 56:7을 인용하셨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막 11:17). 마가는 “만민”이라는 말을 그대로 담는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전의 목적을 밝히시며 그 목적을 어긴 행위를 심판하셨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를 죽일 방법을 꾀했다(11:18). 이 심판은 이스라엘의 성경을 따라 행하시는 유대인 메시아의 행동이며, 예수를 따르는 교회도 그 말씀의 판단을 받는다.&lt;/p&gt;&lt;p&gt;요한복음 2:19-22에서 예수는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시는데, 그것은 자기 육체를 가리킨 말씀이었고 제자들은 부활 뒤에 그 말씀을 기억하고 믿었다. 하나님의 임재에 나아가는 길이 그리스도 자신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의 기쁨은 건물에 들어갈 허락보다 죽으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 근거한다.&lt;/p&gt;&lt;p&gt;히브리서 10:10-22는 그 길을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리신 몸과 피로 설명한다. 그 피를 힘입은 사람들은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어 하나님께 나아간다. 이사야 56:7은 이방인의 번제가 받아들여지는 성전 예배를,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접근을 말한다. 예배 형태는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받아 주시는 관계는 이어진다. 그분께 의지하는 사람은 출신이나 가문의 명예로 자격을 마련할 필요가 없으며,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한다(10:23-25).&lt;/p&gt;&lt;p&gt;사도행전 8:26-40에서 에디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는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사야 53:7-8을 읽고 있었다. 주의 사자와 성령이 빌립을 그에게 보내셨고, 빌립은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다(8:35). 내시는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고 물었고, 세례를 받은 뒤 “기쁘게 길을 가”게 되었다(8:36, 39). 사도행전은 이사야 56장을 직접 인용하지 않으며, 그의 혈통이나 신체 조건을 조사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고난받는 종을 통해 예수를 알고 거리낌 없이 세례를 받아 기뻐하는 외국 궁정의 내시는, 고자와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집 안의 이름과 기쁨을 약속한 56:3-7을 떠올리게 한다.&lt;/p&gt;&lt;p&gt;에베소서 2:11-22는 이방인 신자들이 전에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었으나(2:12)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말한다(2:13). 그리스도께서는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2:14) 두 집단을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지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며(2:19),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간다(2:18). 이사야 56:3의 이방인은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갈라질까 두려워했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분리를 없앴다고 말한다. 바울이 말하는 ‘동일한 시민’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의 언약들 안으로 이방인이 함께 들어온 모습이다.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처소(2:20-22)에서, 공동체를 만드는 힘은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흡수하는 힘보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화평에 있다.&lt;/p&gt;&lt;p&gt;요한복음 11:51-52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을 풀이하면서, 예수께서 그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려고 죽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으시겠다는 이사야 56:8의 약속과 같은 방향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 주셔서 흩어진 사람들이 하나가 된다.&lt;/p&gt;&lt;p&gt;예수는 자신을 부활과 생명이라고 하시며 자신을 믿는 사람에게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약속하신다(요 11:25-26). 자녀보다 나은 영원한 이름의 약속을 이 생명과 함께 읽으면, 후손이 없다는 불안이 사람의 마지막 미래를 결정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아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신다. 혼자 사는 사람과 자녀가 없는 사람도 그리스도께 속한 한 가족이며, 주님께서 완성하실 생명을 기다리는 공동체의 일원이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이방인과 고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지 못하리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신 뒤 구체적인 자리와 이름을 약속하셨다. 다른 나라에서 왔거나 장애가 있거나 자녀 없이 사는 성도가 공동체의 말과 관행 때문에 늘 손님처럼 남아 있다면 이 약속과 어긋난다. 그들도 이름이 불리고 예배와 섬김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집의 식구다. 하나님께서 받아 주신 이방인은 여호와의 종으로 섬기는 사람이므로, 교회는 그들을 도움받는 대상으로만 두지 않고 함께 섬기는 가족으로 맞는다.&lt;/p&gt;&lt;p&gt;고자의 “나는 마른 나무라”는 말은 자녀를 통해 이름을 남기지 못하는 상실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그 상실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고 자녀보다 나은 이름을 자기 집 안에 주겠다고 하셨다. 자녀가 없는 삶을 결함으로 보거나 출산과 가정 형성만을 하나님의 복의 표시로 말하는 설교와 대화는 이 본문 앞에서 고쳐져야 한다. 기도하면 반드시 자녀가 생기리라고 말하거나 몸의 사정을 캐묻는 일은, 하나님의 약속 대신 상실을 설명하고 믿음을 입증하라는 짐을 지운다. 신앙의 유산은 혈연으로만 이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집에서 함께 기도하고 섬긴 사람들을 통해서도 이어진다.&lt;/p&gt;&lt;p&gt;1-2절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과 손을 지켜 악을 행하지 않는 일을 같은 동사로 묶는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안식일은 주인만이 아니라 종과 나그네의 쉼까지 지켰다. 예배를 소중히 여긴다는 고백은 함께 일하는 사람의 쉼을 빼앗지 않는 삶으로 이어진다. 정의를 지키라는 명령은 공동체의 판단에도 적용된다. 오래 다닌 사람의 말은 쉽게 믿고 새로 온 사람이나 말이 서툰 사람의 말은 충분히 듣지 않는다면, 친분이 정의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lt;/p&gt;&lt;p&gt;예수께서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을 인용하시며 성전의 목적을 어긴 행위를 심판하셨다. 교회도 내부 사람만 아는 말과 관습을 성경의 가르침과 같은 무게로 요구하여 새로 온 사람의 길을 막고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한다. 이 말씀을 가르칠 때 유대인은 언제나 배타적이고 교회만 환대한다고 말하면, 이스라엘의 성경 안에 있던 나그네 사랑과 이방인의 기도를 지우고 본문의 역사를 왜곡하게 된다. 예수의 비판은 먼저 예배하는 교회 자신의 삶을 향하며, 다른 민족을 낮추는 말과 출신에 따라 신뢰를 달리하는 태도를 고치게 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passage.php?passage=Isa+56%3A1-8"&gt;NET Bible, Isaiah 56:1-8 번역 노트&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63/"&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56:3,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65/"&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56:5,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67/"&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56:7,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56:9-57:13 짖지 못하는 파수꾼과 문설주 뒤의 우상, 여호와께 피하는 자의 기업</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56.9-57.13/</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56.9-57.13/</guid><description>이사야 56:9-57:13은 자기 이익만 좇는 지도자들과 의인의 죽음에 무감각한 공동체, 산과 골짜기와 집 안까지 파고든 우상 숭배를 고발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모은 우상이 바람에 날려 가리라 하시고, 자신을 피난처로 삼는 자에게 땅과 성산을 약속하십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56:8까지 쫓겨난 사람을 모아 성산으로 인도하시던 하나님이 9절에서는 들과 숲의 짐승들을 “먹으러 오라”고 부르신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이사야 핸드북은 짐승을 이스라엘의 적대 민족으로, ‘먹다’를 멸망의 비유로 읽는다. 목적어는 없지만 뒤의 지도자 고발 때문에 그들이 먹잇감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백성을 지켜야 할 지도자들의 실상이 이어서 드러난다.&lt;/p&gt;&lt;p&gt;10절의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눈이 멀고 무지하다. 히브리어의 ‘그의 파수꾼들’을 개역개정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로 밝혀 옮겼다. 그들은 위협을 보지 못하고, 짖지 못하는 경비견처럼 경고하지 못한다. “무지하며”는 교육의 부족보다 어리석고 무책임한 지도력을 고발한다. 누워 잠을 좋아하는 모습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개의 비유다. NET는 도덕적 방향을 제시할 영적 지도자, 아마 선지자와 제사장을 가리킨다고 본다. “꿈꾸는 자들”(הֹזִים, 호짐)은 다른 곳에 나오지 않는 어근의 말이다. NET가 소개하는 BDB의 풀이는 ‘꿈꾸다, 헛소리하다’이고 HALOT의 풀이는 ‘헐떡이다’다. 후자는 앞뒤의 개 비유를 잇는다.&lt;/p&gt;&lt;p&gt;11절의 개들은 아무리 먹어도 만족을 모른다. “탐욕이 심하여”(עַזֵּי־נֶפֶשׁ, 앗제-네페쉬)는 채워지지 않는 식욕을 그린다. “알지 못한다”는 말은 10절의 무지와 11절의 만족하지 못함, 깨닫지 못함에 반복된다. 10절의 לֹא יָדָעוּ(로 야다우)와 11절의 לֹא יָדְעוּ(로 야드우)는 휴지 악센트에 따른 모음 차이가 있을 뿐 같은 형태다. 경고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만족도 깨달음도 없다. 이제 그들은 목자로 불리지만 “다 제 길로” 가며 양 떼를 돌보지 않는다. “자기 이익”(לְבִצְעוֹ, 레비츠오)은 부당하게 얻는 재물이다. “사람마다”에는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는 관용어의 뜻이 담겼다. 같은 탐욕은 57:17에서 하나님이 노하신 이유로 다시 나온다.&lt;/p&gt;&lt;p&gt;12절의 지도자들은 “오라”(אֵתָיוּ, 에타유)며 서로 술자리로 부른다. 9절에서 짐승을 부르던 것과 같은 말이다. UBS는 지도자가 다른 지도자들을 함께 취하자고 끌어들이며, 내일도 오늘보다 더 풍성하리라는 말은 술 취한 허세라고 설명한다. 짐승은 이미 심판의 먹이를 향해 부름받았는데 목자들은 풍요로운 내일을 장담한다. 같은 부름이 지도자들의 안일함을 폭로한다.&lt;/p&gt;&lt;p&gt;57:1에서는 의인이 죽고 신실한 사람들이 거두어져도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 UBS는 “의인”(הַצַּדִּיק, 핫찻디크)이 단수여서 특정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면서도, 이어지는 복수 때문에 집단으로 보는 견해도 소개한다. 개역개정은 절 끝의 같은 단수를 “의인들은”으로 옮겼다. “진실한 이들”은 “헤세드의 사람들”(וְאַנְשֵׁי־חֶסֶד, 베안셰-헤세드)로,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이다. “거두어 감”은 죽음을 뜻한다. 깨닫지 못하는 목자 아래서 의인의 죽음을 깨닫는 사람도 없다.&lt;/p&gt;&lt;p&gt;57:1 끝의 “악한 자들 앞에서”는 מִפְּנֵי הָרָעָה(미프네 하라아), 곧 ‘악 또는 재앙으로부터’에 해당한다. 개역개정은 단수의 악을 악한 사람들로 풀었다. 악 때문에 의인이 죽었다는 읽기와 다가올 재앙을 피해 거두어졌다는 읽기가 모두 가능하다. NET는 박해받는 경건한 사람을 향한 사회의 무관심을 탄식하는 읽기를 택하면서, 2절의 안식을 따라 하나님이 고난에서 건지려고 데려가셨다는 읽기도 소개한다. UBS도 두 의미를 모두 허용한다. 의인의 죽음을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는 고발은 어느 쪽에서도 같다.&lt;/p&gt;&lt;p&gt;2절은 그 의인이 평안에 들어가 침상에서 쉰다고 말한다. “들어간다”는 단수이고 “쉬리라”는 복수이며, “바른 길로 가는 자들”도 히브리어로는 단수다. 개역개정은 이를 모두 복수로 옮긴다. 한 사람의 죽음과 신실한 이들의 안식이 겹친다. “그들의 침상”(מִשְׁכְּבוֹתָם, 미쉬케보탐)은 방해받지 않고 쉬는 무덤이다. 누가 그들을 죽였는지는 밝히지 않으나, 세상이 외면한 이들이 평안에 들어갔다고 증언한다. 이 침상은 7-8절에서 음행의 자리로 다시 등장한다.&lt;/p&gt;&lt;p&gt;3절은 “그러나 너희는 이리로 가까이 오라”는 말로 재판에 부른다. “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은 출생을 조롱하는 말이 아니라 점술과 다른 신을 섬기는 백성의 행위를 가리킨다. UBS는 구약이 우상 숭배를 성적 배신으로 자주 그리며 실제 제의적 성행위도 따랐다고 설명한다. “간음자와 음녀”의 히브리어 זֶרַע מְנָאֵף וַתִּזְנֶה(제라 메나에프 밧티즈네)는 ‘간음하는 남자와, 음행한 여자의 자손’으로, 뒤의 말이 명사가 아닌 “그녀가 음행했다”라는 동사형이다. NET는 두 글자가 뒤바뀌었다는 가정 아래 ‘간음한 여자와 창녀’로 고치는 제안을 소개한다. 현대 번역 대부분과 개역개정은 두 말을 명사로 옮긴다. 4절은 입을 벌리고 혀를 내미는 희롱을 꾸짖으며, 그들을 패역의 자식과 거짓의 후손이라 부른다.&lt;/p&gt;&lt;p&gt;5절은 푸른 나무 아래서 음욕을 피우고 골짜기 바위 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 죄를 고발한다. “상수리나무 사이”(בָּאֵלִים, 바엘림)는 ‘신들 가운데서’로도 읽을 수 있으나 대부분의 번역은 나무로 옮긴다. “모든 푸른 나무 아래”는 예레미야 2:20, 3:6, 13처럼 우상 숭배가 널리 퍼졌음을 강조한다. “골짜기”는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와디다. UBS는 몰렉이나 바알에게 드리던 인신 제사가 이스라엘에도 스며들었고 요시야가 금지하려 했다고 설명한다(왕하 23:10). 다만 골짜기와 바위 틈에서 행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NET는 앞줄을 다산 제의의 성행위로, 뒷줄을 아이 제물로 읽는다. 자녀와 풍요를 얻으려는 제의가 자녀의 생명을 빼앗았다.&lt;/p&gt;&lt;p&gt;6절에서 백성은 골짜기의 매끄러운 돌을 자기 몫과 제비로 삼아 전제와 예물을 바친다. “매끄러운 돌들”과 “네 몫”이 나란한 בְּחַלְּקֵי־נַחַל חֶלְקֵךְ(베할레케-나할 헬케크)는 비슷한 자음과 소리로 그 선택을 들려준다. NET는 다음 줄의 제물을 근거로 이 돌들을 우상으로 읽는다. 끝의 “내가 어찌 위로를 받겠느냐”(הַעַל אֵלֶּה אֶנָּחֵם, 하알 엘레 엔나헴)는 어렵다. 첫 글자를 의문사로 두면 이런 일 때문에 마음을 돌이키겠느냐는 반문이다. 앞 낱말의 끝 글자가 잘못 반복되었다고 보면 1:24처럼 ‘스스로 위로를 얻다’, 곧 ‘원수를 갚다’로 읽을 수 있다.&lt;/p&gt;&lt;p&gt;7-8절은 언약 백성을 남편을 떠난 한 여인으로 그린다. 여성 단수 동사와 접미사가 이어지는 까닭이다. 고발 대상은 특정 여성이 아니라 지도자와 백성 전체의 불충이다. “높고 높은 산 위”에 제사를 드리는 침상을 폈다. 2절에서 의인이 안식하던 침상과 같은 낱말이 여기서는 음행의 자리가 된다. 산이 “높이 들렸다”는 표현은 15절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지극히 존귀하며”와도 이어진다. 높은 산에 우상의 침상을 편 백성과 달리, 참으로 높으신 하나님은 통회하고 겸손한 사람과 함께 계신다.&lt;/p&gt;&lt;p&gt;8절의 “기념표”(זִכְרוֹנֵךְ, 지크로네크)는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우상 표지다. UBS는 집에서 드린 예배의 흔적으로 볼 가능성이 크다고 하면서 제의 장소 출입구로 보는 견해도 소개하고, ‘남자’와 관련된 말놀이로 남근 상징을 가리킬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말씀을 기록하라던 신명기 6:9의 문설주 뒤에 다른 신의 기념표가 놓였다. “기념표”와 같은 어근인 “생각하다”가 11절의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며”에 다시 쓰인다. 그들은 기억의 표를 세웠으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다.&lt;/p&gt;&lt;p&gt;8절 가운데의 짧은 문장들은 뜻을 정하기 어렵다. 개역개정의 “나를 떠나 벗고”에서 ‘벗고’는 피엘 동사 גִּלִּית(길리트, ‘네가 드러냈다’)인데, 히브리어에는 무엇을 드러냈는지 목적어가 없다. NET는 이 형태를 칼형 ‘떠났다’로 고쳐 읽는다. “그들과 언약하며”는 직역하면 ‘네가 그들에게서 너를 위해 잘랐다’(וַתִּכְרָת־לָךְ מֵהֶם, 밧티크라트-라크 메헴)이다. NET는 이 동사가 남성형으로 보이는 점, ‘언약’이라는 명사가 없는 점, ‘~와 함께’ 대신 ‘~에게서’라는 전치사가 쓰인 점을 들어 동사를 ‘사다’로 고쳐 읽고 ‘그들에게서 호의를 산다’로 옮긴다. UBS 해설은 ‘그들 가운데 몇과 언약을 맺었다’와 ‘그들 가운데 몇에게 뇌물을 주었다’(겔 16:30-34 비교)를 모두 가능한 해석으로 본다. 개역개정은 본문을 고치지 않고 언약의 뜻으로 옮겼다. 끝의 “그 벌거벗은 것을 보았으며”에서 ‘벌거벗은 것’은 히브리어로 ‘손’이다(יָד חָזִית, 야드 하지트, ‘네가 손을 보았다’). 이 문맥에서 ‘손’은 남성 성기를 가리키는 완곡어이고, ‘보다’도 성적 접촉을 가리키는 완곡어다. UBS 해설은 이 낱말이 56:5에서 고자들에게 약속된 “기념물”(יָד וָשֵׁם, 야드 바셈, ‘기념물과 이름’)에도 쓰였다고 짚는다. 같은 낱말이 56:5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기념을, 57:8에서는 백성의 성적인 불충을 그린다. 하나님께 연합한 고자는 하나님의 집에서 ‘손’을 받고,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우상의 침상에서 ‘손’을 바라본다.&lt;/p&gt;&lt;p&gt;9절의 “몰렉에게”는 마소라 모음으로 לַמֶּלֶךְ(람멜레크), 곧 “그 왕에게”다. NET는 5절의 아이 제물 때문에 모음을 바꾸어 ‘몰렉’으로 읽는 견해와, 신하가 왕에게 조공을 바치듯 우상에 헌신한다는 읽기를 소개한다. UBS도 모음만 바꾸어 몰렉으로 읽는 번역들을 설명하며, 동사구는 사해사본과 칠십인역을 따라 ‘기름을 선물로 바쳤다’로 읽거나 마소라 본문대로 ‘기름을 가지고 나아갔다’로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솔로몬이 몰렉 산당을 지었고(왕상 11:7) 요시야는 그 숭배를 금지했다(왕하 23:10). “먼 곳”(מֵרָחֹק, 메라호크)과 “향품”(רִקֻּחָיִךְ, 릭쿠하이크)은 소리로 연결된다. 사신을 스올까지 보냈다는 말은 섬길 신을 찾아 지하 세계까지 내려간다는 과장으로 그 헌신을 폭로한다.&lt;/p&gt;&lt;p&gt;10절에서 먼 길에 지친 백성은 “가망이 없다”(נוֹאָשׁ, 노아쉬)고 말하지 않는다. “네 힘이 살아났으므로”는 “네 손의 생명을 네가 찾았다”(חַיַּת יָדֵךְ מָצָאת, 하야트 야데크 마차트)로, NET는 생명을 새로워짐으로, 손을 힘으로 풀이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대신 다른 신을 찾는 일에 끈질기게 힘을 쏟는다.&lt;/p&gt;&lt;p&gt;11절은 누구를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UBS는 두려움의 대상이 다른 신, 아마 몰렉이라고 본다. “거짓”은 겉으로 전통적인 예배를 유지하며 실제로 다른 신을 섬긴 불충이다.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는 1절을 되풀이하여, 의인의 죽음을 외면한 백성이 하나님도 외면했음을 드러낸다. “내가 오랫동안 잠잠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NRSV처럼 고쳐 ‘눈을 감다’로 읽는 번역도 있지만 UBS는 마소라 본문을 권한다. 절 앞뒤에는 같은 ‘두려워하다’ 동사가 놓인다. NET는 하나님의 인내 때문에 백성이 처벌 없이 죄를 지어도 된다고 여겼다고 설명한다. 다른 신을 두려워한 백성은 오래 참으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lt;/p&gt;&lt;p&gt;12절의 “네 공의를 내가 보이리라”는 반어다. NET는 “네 이른바 의와 네 행위를 내가 고발하리라”로 옮긴다. 56:1에서는 “나의 공의”가 나타나 구원을 이루지만, 여기서 드러나는 “네 공의”(צִדְקָתֵךְ, 치드카테크)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역개정은 “네가 행한 일”을 뒤 문장의 주어로 옮겼으나, 히브리어는 공의와 행위를 모두 ‘알리리라’의 목적어로 둔 뒤 “그것들이 너를 돕지 못하리라”고 한다. 백성이 내세우는 행위는 그들을 구하지 못한다.&lt;/p&gt;&lt;p&gt;13절에서 부르짖을 때 “네가 모은 우상들”이 구원하게 해 보라는 조롱이 나온다. “네 모은 것들”(קִבּוּצַיִךְ, 킵부차이크)은 다른 곳에 나오지 않는 명사다. NET는 종교 집회와 의식일 가능성도 두지만 우상이라는 문맥과 뒷줄 때문에 우상의 무리로 이해하는 견해를 소개한다. UBS도 우상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되 해석상의 추정임을 밝힌다. 그것들은 바람과 “기운”(הָבֶל, 하벨)에 날려갈 것이다. “바람”(רוּחַ, 루아흐)은 영이나 숨도 뜻하므로 하나님의 영이 그 도움을 날려버린다고 읽을 수도 있다. 56:8에서 하나님이 흩어진 사람을 “모으시는” 데 쓴 어근으로 백성이 우상을 모았다는 말이 이어진다.&lt;/p&gt;&lt;p&gt;그와 달리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땅과 성산을 기업으로 받는다. NET는 “나를 의뢰하는 자”(וְהַחוֹסֶה בִי, 베하호세 비)의 피난을 충성의 환유로, 성산을 얻는 약속을 하나님의 임재에 자유롭게 나아감으로 설명한다. UBS는 성산을 시온이나 이스라엘 땅 전체로 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가 그 땅에서 계속 살며 차지하리라는 약속으로 읽는다(신 8:1; 시 37:9, 11). “거룩한 산”은 56:7에서 이방인에게 약속된 “성산”과 같은 표현이다. 높은 산의 우상 침상을 택했던 백성에게 하나님은 자신께 피하여 거룩한 산을 얻을 길을 여신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에스겔 34:2-5는 자기만 먹고 약하고 병들고 상한 양과 잃은 양을 돌보지 않은 목자들을 고발한다. 양들은 들짐승의 밥이 되었다. 이사야 56:9-11과 같은 그림이다. 양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목자들의 입에서 양을 건져 친히 돌보고, 다윗을 한 목자로 세우겠다고 약속하신다(겔 34:10, 15-16, 23). 이사야 56:8의 쫓겨난 자들을 모으시는 하나님과 40:11의 어린 양을 품으시는 목자가 이 약속과 이어진다. 지도자의 권한은 자기 풍요보다 맡은 사람을 돌보는 데 쓰여야 한다.&lt;/p&gt;&lt;p&gt;예레미야 7:30-31은 유다가 성전을 더럽히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에서 자녀를 불살랐다고 고발한다. 하나님은 명령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은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요시야는 도벳을 더럽혀 몰렉에게 자녀를 불로 지나가게 하지 못하게 했다(왕하 23:10). 이사야 57장의 높은 산과 골짜기, 문설주 뒤에서도 예배와 생활이 우상에게 넘어갔다. 익숙하고 오래된 제의라도 생명을 해치는 행동을 하나님의 뜻으로 만들지 못한다. 이 고발은 하나님의 백성 자신을 향한다.&lt;/p&gt;&lt;p&gt;예레미야 3:6-10은 높은 산과 푸른 나무 아래서 행음한 북이스라엘과, 그 배신을 보고도 거짓으로 돌아온 유다를 고발한다. 결혼 언약의 비유에서 두 여인은 실제 여성의 도덕성을 대표하지 않고 두 공동체의 불충을 가리킨다. 이사야 57장의 여인도 지도자를 포함한 백성 전체다. 이들은 예배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신뢰의 대상을 바꾸었다. 회개는 의식 몇 가지를 바꾸는 일에 머물지 않고 여호와를 다시 신뢰하고 그분께 충성하는 응답이다.&lt;/p&gt;&lt;p&gt;신명기 6:4-9는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말씀을 마음에 두며 자녀에게 가르치고 문설주에 기록하게 한다. 이사야 57:8에서는 바로 그 문설주 뒤에 우상의 표를 둔다. 무엇을 기억하고 누구에게 삶을 맡기는지가 바뀌었다. 종교적 표지가 있어도 실제 말과 판단과 행동이 다른 신뢰를 따르면, 그 표지가 언약의 충성을 대신하지 못한다.&lt;/p&gt;&lt;p&gt;민수기 18:20에서 하나님은 땅을 기업으로 받지 않는 아론에게 자신이 분깃과 기업이라고 약속하신다. 이는 아론의 특별한 직분에 관한 규정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삶을 지탱하는 몫이라는 점에서 골짜기의 돌을 분깃으로 삼은 이사야 57:6과 대비된다. 57:13은 하나님께 피하는 자에게 땅과 성산을 약속한다. 시편 37:9, 11도 악인의 번성을 보고 조급해하지 말며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와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리라고 한다. UBS 역시 두 본문을 비교한다. 자기 행위와 우상이 구원하지 못할 때, 하나님이 백성이 살아갈 자리를 주신다.&lt;/p&gt;&lt;p&gt;이사야 22:12-14의 사람들은 애곡하라는 부름에도 내일 죽을 것이니 먹고 마시자고 한다. 56:12의 지도자들은 내일도 더 풍요로우리라 장담한다. 체념과 낙관은 다르지만 하나님의 판단을 외면하고 현재의 책임을 잊는다는 점은 같다. “다 제 길로” 간 목자들의 모습은 53:6의 온 백성에게도 해당한다. 그곳에서 여호와의 종은 백성의 죄악을 담당한다. 57:12의 자기 의를 내려놓고 13절의 피난처로 돌아갈 은혜가 필요하다.&lt;/p&gt;&lt;p&gt;56:1-8에서는 하나님께 연합한 이방인과 고자에게 성산과 이름이 약속되지만, 56:9-57:13에서는 언약 공동체 안의 지도자와 백성이 책망받는다. 출신이나 이미 가진 지위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충성을 대신하지 못한다. 55:6-7은 악한 길과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고 너그럽게 용서하신다고 부른다. 57:13의 약속도 우상에 쏟던 열심에서 돌아설 길을 열며, 57:15에서는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통회하고 겸손한 자를 소생시키겠다고 하신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요한복음 10:11-16에서 예수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이시다. 이리를 보면 달아나는 삯꾼과 달리 자기 양을 아시고 자신을 내어주신다. 짐승이 와도 경고하지 않고 자기 배를 채우던 이사야 56장의 지도자들과 반대되는 모습이다. 하나님이 친히 돌보시고 다윗을 목자로 세우시겠다는 에스겔 34장의 약속이 예수의 사역에서 이루어진다.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도 모아 한 무리가 되게 하신다는 말씀은 이사야 56:8의 더 모으시겠다는 약속과 이어진다.&lt;/p&gt;&lt;p&gt;예수는 양을 아는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아시는 관계에 견주신다(요한복음 10:14-15). 자기 이익만 아는 지도자와 달리 그 앎으로 양의 생명을 돌보신다. 그분은 아버지의 계명을 따라 목숨을 스스로 내어주고 다시 얻으신다(10:17-18). 히브리서 13:20-21은 영원한 언약의 피로 큰 목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선한 일에 온전하게 하시기를 구한다. 살아 계신 목자의 은혜가 탐욕과 무감각을 버리는 순종을 가능하게 한다.&lt;/p&gt;&lt;p&gt;이사야 57:1-2는 당대 신실한 이들의 외면당한 죽음과 평안을 말한다. 베드로전서 2:22-25는 죄 없으신 예수께서 부당한 고난을 받고도 욕과 위협으로 갚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셨다고 증언한다. 그분은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여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셨다. 이사야 57장의 의인들에게 다른 사람의 죄를 담당하는 역할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을 탄식한 말씀은 의인의 고난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구원하신다는 복음과 이어진다.&lt;/p&gt;&lt;p&gt;베드로전서 2:25는 양처럼 길 잃었던 사람들이 영혼의 목자와 감독에게 돌아왔다고 한다. 이사야 53:6에서 제 길로 간 양들의 죄를 종이 담당한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왔기 때문에 받아주신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담당하여 회복하셨다. 자기 의가 도움이 되지 못한 이사야 57:12 뒤에 열린 피난의 길처럼, 신자는 공로보다 주의 구원을 의지한다. 그 은혜를 받아 돌아온 사람은 의에 대해 살도록 부름받는다.&lt;/p&gt;&lt;p&gt;마태복음 5:5에서 예수는 시편 37:11처럼 온유한 자에게 땅의 상속을 약속하신다. 이사야 57:13의 피난과 상속도 이 흐름과 이어진다. 히브리서 9:15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속량된 사람들이 영원한 기업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사야는 회복된 땅과 성산에서의 삶을, 히브리서는 새 언약의 중보와 영원한 기업을 말한다. 주님은 하늘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계시며 다시 나타나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다(9:24, 28). 신자는 눈앞의 안정이나 강한 권력의 보호를 사서 미래를 보장하려 하기보다 이 약속을 의지한다.&lt;/p&gt;&lt;p&gt;고린도전서 10:14-22는 우상 숭배를 피하라고 명한다.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하는 잔과 떡을 받는 사람은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할 수 없다. 이사야 57장이 결혼 언약의 배신을 고발하듯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근거로 우상과의 사귐을 끊게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던 백성에게 주신 경고는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는 질문으로 교회에도 들린다.&lt;/p&gt;&lt;p&gt;한 떡에 참여하는 여러 사람은 한 몸이다(고린도전서 10:16-17). 우상 선택은 그리스도와 그분께 속한 사람들의 관계를 해친다. 이사야에서 의인의 죽음을 마음에 두지 않은 이들이 하나님도 기억하지 않았듯, 그리스도의 식탁에 모인 교회는 주님을 기억하며 이웃의 생명을 돌보아야 한다. 새 언약의 잔을 받는 교회는 주께서 오실 때까지 그 죽음을 선포한다(11:23-26).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을 살리신 분께 충성하며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길을 버린다.&lt;/p&gt;&lt;p&gt;고린도전서 15:32-34는 부활이 없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는 태도가 나올 것이라 말하고, 깨어 의를 행하라고 권한다. 이사야 22장의 술자리와 56:12의 안일함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체념이나 풍요의 장담으로 현재의 불의를 정당화할 수 없다. 지도자도 구원받은 양이며 다른 사람의 양심과 미래를 소유하는 주인이 아니다. 죽고 살아나신 목자께 의지하여 자기 죄를 드러내고 돌이킬 수 있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짖지 못하는 파수꾼과 자기 배만 채우는 목자는 위험을 외면한 지도자다. 학대와 부정, 약한 이의 피해 앞에서 자기 자리와 이익 때문에 침묵하는 지도자는 이 책망을 들어야 한다. 맡은 사람의 돈과 수고로 자기 안락함만 늘리면서 내일의 풍요를 장담할 수 없다. 권한을 맡은 이는 백성을 돌보시는 주인께 책임을 진다.&lt;/p&gt;&lt;p&gt;의인이 죽어도 마음에 두지 않는 무감각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는 불충과 이어진다. 억울한 죽음과 이웃의 상실을 자기 생활에 상관없는 일로 넘길 수 없다. 의인이 평안에 들어간다는 소망 때문에 그 죽음을 가볍게 여기거나 남은 이의 슬픔을 서둘러 끝낼 이유도 없다. 본문은 그 죽음을 애도하고 공동체의 외면을 책망한다.&lt;/p&gt;&lt;p&gt;백성은 더 많은 생명과 풍요를 얻으려는 제의에서 자녀의 생명을 빼앗았다. 어른의 성공과 안정을 위해 아이의 안전을 희생시키는 욕심도 이 고발 앞에 선다. 성적 비유는 특정 여성이나 어떤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를 낮추는 말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불충을 드러낸다. 종교의 이름으로 성적 폭력과 착취를 가릴 수 없다.&lt;/p&gt;&lt;p&gt;말씀을 기록할 문설주 뒤에 우상 표를 세운 백성은 종교적 표지와 실제 충성이 갈라진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가르치면서 성과와 이익을 위해 거짓을 허용하면 말과 삶이 어긋난다. 잘못된 길에 들인 수고가 많아도 그것이 계속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우상을 향한 열심을 멈추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한다.&lt;/p&gt;&lt;p&gt;백성이 내세운 “공의”와 행위는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 예배와 헌금과 봉사를 이웃의 고통과 자기 잘못을 덮는 근거로 삼을 수 없다. 하나님의 오랜 침묵도 죄를 허락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재물이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하고 이웃을 희생시킨다면, 실제로 누구를 피난처로 삼는지 돌아보아야 한다.&lt;/p&gt;&lt;p&gt;하나님께 피하는 이는 자기 노력이 아니라 땅과 성산을 주시는 분을 의지한다. 그리스도의 식탁을 받는 교회도 자신을 위해 몸을 내어주신 주님께 속한다. 그 은혜를 고백하면서 다른 이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 부활하신 목자의 약속은 탐욕을 버리고 이웃의 생명을 지킬 힘과 소망을 준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Isa&amp;amp;chapter=56&amp;amp;mode=print"&gt;NET Bible, Isaiah 56 번역 노트&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Isa&amp;amp;chapter=57&amp;amp;mode=print"&gt;NET Bible, Isaiah 57 번역 노트&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69/"&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56:9,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610/"&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56:10,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61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56:11,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612/"&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56:12,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7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57:1,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73/"&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57:3,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75/"&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57:5,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78/"&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57:8,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79/"&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57:9,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71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57:11,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713/"&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BS, 2011), 57:13,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57:14-21 높은 곳에 계시며 통회하는 자와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57.14-21/</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57.14-21/</guid><description>이사야 57:14-21에서 하나님은 백성의 길에서 걸림돌을 치우라고 명하십니다.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신 분이 통회하고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시며, 고집스러운 백성을 고치시고 먼 데 있는 자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 평강을 선포하십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14절은 백성이 돌아올 길을 닦으라는 명령으로 시작한다. 도입의 “그가 말하기를”(וְאָמַר, 웨아마르)은 과거나 미래로 읽을 수 있으며, 개역개정은 절 끝의 “하리라”로 앞으로 들릴 말씀을 나타낸다. NET는 앞에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는 이유로 “내가 말한다”로 고칠 가능성을 언급하되, 하나님의 직접 말씀을 여는 도입은 15절에 있다고 본다. BHS는 14절 끝에 단락 표시를 두어 13절의 기업 약속과 길을 닦으라는 명령을 앞 단락의 결말로 묶고, 15-21절을 별도 단락으로 구분한다.&lt;/p&gt;&lt;p&gt;“돋우고 돋우어”(סֹלּוּ־סֹלּוּ, 솔루 솔루)는 길을 쌓아 평탄하게 하라는 거듭된 명령이다. “길을 수축하여”(פַּנּוּ־דָרֶךְ, 판누 다레크)는 40:3의 “길을 예비하라”와 같은 말이다. 그곳에서는 여호와께서 오실 길, 여기서는 “내 백성의 길”을 준비한다.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치우라는 뜻으로, UBS는 앞 문맥에 비추어 우상 숭배를 중심적인 걸림돌로 읽는다. 자기 마음의 길을 고집했던 백성도 하나님은 “내 백성”이라 부르시며 돌아올 길을 열라고 명하신다.&lt;/p&gt;&lt;p&gt;15절은 그 명령의 이유를 밝힌다. “지극히 존귀하며”(רָם וְנִשָּׂא, 람 웨니사)는 “높고 들린”이라는 뜻이며, 같은 두 어근이 6:1의 높이 들린 보좌와 52:13의 종의 높임에도 쓰인다. 7절에서 백성은 높은 산에 우상의 침상을 폈지만, 참으로 높으신 하나님은 낮은 사람과 함께 거하신다. “영원히 거하시며”(שֹׁכֵן עַד, 쇼켄 아드)에 대해 UBS는 영원히 사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설명한다. NET는 이 칭호를 주권적 통치의 문맥에서 “영원히 다스리시는 분”으로 옮긴다.&lt;/p&gt;&lt;p&gt;높고 거룩한 곳에 계신 하나님은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신다. “통회하는”(דַּכָּא, 닥카)은 짓눌려 부서진 상태를, “마음이 겸손한”(שְׁפַל־רוּחַ, 셰팔 루아흐)은 영이 낮은 상태를 뜻한다. UBS는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교만을 버린 사람으로 설명하고, NET는 회개자와 함께 낙심과 굴욕을 겪은 포로민까지 시야에 둔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목적은 그 영과 마음을 소생시키는 데 있다. “통회-겸손”을 “겸손-통회”로 뒤집는 교차 대구도 그 대상과 살리심을 연결한다.&lt;/p&gt;&lt;p&gt;하나님께서 “소생시키다”(לְהַחֲיוֹת, 레하하요트)라고 하신 말은 새 생명과 활력을 주신다는 뜻이다. 10절에서 백성은 우상을 찾아다니며 “네 힘이 살아났으므로” 지치지 않았다고 했다. NET는 그 표현을 새 힘을 얻는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같은 생명의 어근이 1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낮아진 사람에게 주시는 생기를 가리킨다. 그분은 낮은 사람을 계속 짓눌러 두려고 가까이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게 하신다.&lt;/p&gt;&lt;p&gt;16절에서 하나님은 영원히 다투거나 끊임없이 노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자신이 지으신 생명이 그 앞에서 쇠약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피곤할까”(יַעֲטוֹף, 야아토프)는 기진하고 약해진다는 뜻으로, UBS는 “죽을 것이다”로 옮기면 지나치게 강하다고 설명한다. “내 앞에서”(מִלְּפָנַי, 밀레파나이)는 “나 때문에”로도 읽을 수 있다. 개역개정의 “영과 혼”에서 영은 생명력을, “혼”(וּנְשָׁמוֹת, 우네샤모트)은 생명의 호흡들을 가리킨다. 생기를 불어넣으신 창세기 2:7의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진노를 끝없이 이어 가지 않으신다.&lt;/p&gt;&lt;p&gt;17절은 진노의 원인을 “그의 탐심”이라고 밝힌다. “탐심”(בִּצְעוֹ, 비츠오)은 자기 이익을 가리키며, 56:11에서 목자들이 저마다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는 고발과 연결된다. 하나님은 노하여 백성을 치고 얼굴을 가리셨지만, 백성은 여전히 자기 마음의 길을 걸었다. “내 얼굴을”은 목적어 없이 쓰인 “가리고”에 개역개정이 보충한 말이며 NET도 같은 생략으로 읽는다. NET는 “패역하여”(שׁוֹבָב, 쇼바브)를 배교자의 모습으로 이해한다. 징벌을 받아도 돌아오지 않는 그 삶을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lt;/p&gt;&lt;p&gt;18절의 약속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이다. 고집스러운 삶을 보신 하나님께서 친히 고치고 인도하며 위로를 회복시키겠다고 하신다. NET는 “인도하며”(וְאַנְחֵהוּ, 웨안헤후)를 “쉼을 주다”로 옮긴다. 또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을 같은 사람들로 읽어 슬퍼하는 백성에게 위로를 회복시키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개역개정은 백성과 그를 위해 슬퍼하는 사람들을 구별한다. “다시 얻게 하리라”(וַאֲשַׁלֵּם, 와아샬렘)는 갚거나 온전하게 한다는 뜻으로 19절의 평강과 같은 어근이다. 치료와 위로는 먼저 달라진 백성에게 주는 보상으로 소개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회복을 시작하시며 그들을 새 길로 인도하신다.&lt;/p&gt;&lt;p&gt;19절에서 하나님은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신다. NET는 “창조하는 자”(בּוֹרֵא, 보레) 뒤에 “나”가 필사 중 빠졌을 가능성을 제안하며, 입술의 열매를 찬양이나 슬퍼하던 사람들의 기쁜 외침으로 읽는다. 뒤의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שָׁלוֹם שָׁלוֹם לָרָחוֹק וְלַקָּרוֹב, 샬롬 샬롬 라라호크 웰락카로브)는 평강을 두 번 앞세워 먼 사람과 가까운 사람에게 선언한다. NET는 이 반복을 평강의 충만함에 대한 강조로 읽는다.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확증 뒤에는 “내가 그를 고치리라”가 이어져 치료가 그 평강의 내용임을 밝힌다.&lt;/p&gt;&lt;p&gt;“먼 데”와 “가까운 데”는 흩어진 사람들과 땅에 남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지만, 두 표현을 각각 한 민족으로 고정할 근거는 이 문맥에 없다. 바로 앞 56:3-8에서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과 고자도 하나님의 집으로 부름받았으므로 그 평강은 이스라엘 밖에도 열려 있다. 3절의 가까이 오라는 고발과 9절의 먼 곳에 사신을 보낸 우상 숭배에 쓰였던 말들이 이제 평강을 받는 사람들을 가리킨다.&lt;/p&gt;&lt;p&gt;20절의 악인은 진흙을 밀어 올리는 요동하는 바다에 비유된다. 개역개정은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라고 옮기지만, 히브리어의 “잠잠할 수 없다”(כִּי הַשְׁקֵט לֹא יוּכָל, 키 하쉬케트 로 유칼)는 비유 속 바다를 가리킨다. UBS는 같은 어근으로 바다가 휘몰리고 바닥의 진흙을 밀어 올리는 모습을 묘사하며, 진흙과 더러운 것은 악인이 일으키는 문제의 비유라고 설명한다. 이들은 앞에서 탐욕과 우상을 고집하던 자들로, 15절의 소생을 약속받은 낮아진 사람들과 구별된다.&lt;/p&gt;&lt;p&gt;21절은 48:22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라는 후렴을 되풀이한다. 그곳의 “여호와” 대신 여기서는 “내 하나님”(אֱלֹהַי, 엘로하이)이라 하여 화자가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의 경고를 말한다. 57:2의 의인이 들어간 “평안”, 19절에서 두 번 선언된 “평강”, 21절에서 악인에게 없다는 “평강”은 모두 같은 말(שָׁלוֹם, 샬롬)이다. 평강은 널리 선포되지만 우상과 탐욕의 길을 고집하는 악인은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상하고 불안한 마음 자체가 악함의 증거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낮아진 사람에게 소생을 약속하신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이사야 40:3-4의 길은 포로 된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찾아오시는 길이며, 57:14의 길은 그 백성이 돌아갈 길이다. 62:10에서는 길의 돌을 치우고 만민을 향해 기치를 들라고 한다. 하나님이 오시는 약속은 우상과 죄를 버리고 그분께 돌아오는 응답으로 이어진다. 길을 준비하라는 명령은 흩어진 백성이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며 다시 살아갈 회복을 향한다.&lt;/p&gt;&lt;p&gt;이사야 6:1-7에서 높이 들린 왕을 본 선지자는 부정한 입술을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는다. 66:1-2에서도 하늘을 보좌로 삼으신 창조주는 마음이 가난하고 통회하며 말씀 앞에 떠는 자를 돌보신다. 57:15의 높으신 하나님은 그런 낮은 사람과 함께 거하신다. 죄를 아시는 거룩한 분께서 자신을 의지하는 백성을 살리신다.&lt;/p&gt;&lt;p&gt;시편 51:16-17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멸시하지 않으신다고 기도한다. 시편 34:17-19도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신 여호와를 찬양하며, 의인에게도 고난이 많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상한 마음을 언제나 개인의 악행에 대한 벌로 설명할 수 없다. 이사야 57:15의 낮아진 사람 역시 회개자와 굴욕당한 포로민이라는 두 방향에서 읽혀 왔다. 그들은 자신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lt;/p&gt;&lt;p&gt;52:13-15에서 높임받는 종은 먼저 심하게 상한 모습을 지닌다. 57:15의 높으신 하나님은 낮은 사람 곁에 거하시며 그 마음을 살리신다. 이사야서의 구원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상한 사람을 외면하는 힘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종의 사역을 이루시고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주신다.&lt;/p&gt;&lt;p&gt;창세기 2:7에서 흙으로 지어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생기로 산다. 이사야 57:16도 호흡을 지으신 분이 쇠약해지는 백성을 아신다는 사실을 자비의 이유로 든다. 그분의 책망은 죄를 드러내지만 백성의 생명을 끝없이 소진시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므로, 그분의 백성도 잘못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사람을 회복 불가능한 수치 속에 버려둘 수 없다.&lt;/p&gt;&lt;p&gt;이사야 54:7-10은 잠시 얼굴을 가리신 진노 뒤에 영원한 자비와 흔들리지 않는 화평의 언약을 약속한다. 57:17-19에서도 얼굴을 가리고 노하신 하나님께서 고치고 인도하며 평강을 주신다. 55:10-13에서는 그분의 말씀이 뜻을 이루어 백성이 기쁨으로 나가고 평안히 인도받는다. 회복과 찬양은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행하시는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lt;/p&gt;&lt;p&gt;48:20-22는 바벨론을 떠나 구원을 알리라는 명령 뒤에 악인에게 평강이 없다는 경고를 둔다. 57:19-21도 평강 선포 뒤에 같은 후렴으로 끝난다. 하나님께서 고치시는 은혜를 받으면서 그분을 외면하고 악을 계속 행할 수는 없다. 이 경고는 상한 사람의 절망을 더하기보다 굳어진 삶의 방향을 돌이켜 그분의 인도를 따르라고 부른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에베소서 2:17은 이사야 57:19을 사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먼 데 있는 사람과 가까운 데 있는 사람에게 평안을 선포하셨다고 말한다. 에베소서의 먼 사람은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이방인 신자이며, 가까운 사람은 유대인을 가리킨다. 이사야에서 두 대상을 각각 민족으로 고정하지 않았던 평강의 말씀을, 바울은 십자가로 두 집단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사역으로 읽는다(엡 2:13-18).&lt;/p&gt;&lt;p&gt;그 가까워짐은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한다. 그분께서 원수 된 관계를 십자가로 다루시고 두 집단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신다. 이방인도 같은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성도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간다(엡 2:19-22). 하나님과의 가까움을 받은 사람은 다른 성도가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을 자기 허락에 종속시킬 수 없다.&lt;/p&gt;&lt;p&gt;사도행전 2:38-39에서 베드로는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말한다. 그 약속은 듣는 이들과 자녀들, 주께서 부르시는 모든 먼 사람에게도 주어진다. 멀고 가까움은 구원의 은혜에 서로 다른 자격을 만들지 않는다.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죄 사함과 새 생명을 받는다.&lt;/p&gt;&lt;p&gt;빌립보서 2:6-11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 종의 형체를 취하고 사람이 되어 십자가의 죽음까지 복종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을 지극히 높이셨다. 높이 들리신 하나님께서 낮은 자와 거하신다는 이사야 57:15의 약속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신 요한복음 1:14의 사건과 연결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고통 속에 오셔서 자신을 내어 주시고 은혜와 진리로 아버지를 알리셨다.&lt;/p&gt;&lt;p&gt;마태복음 11:28-30에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자신에게 불러 쉼을 주신다. 그 쉼에는 주님께 배우고 그분의 멍에를 메라는 요청이 따른다. 낮아진 사람의 영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친 사람을 쉬게 하고 새 삶으로 인도하신다. 탐욕을 계속 붙든 채 평강을 요구하는 삶은 이 인도를 거스른다.&lt;/p&gt;&lt;p&gt;누가복음 3:4-6에서 세례 요한은 이사야 40장의 길 준비 말씀으로 주님의 오심을 예비한다. 그가 가르친 회개의 열매는 옷과 먹을 것을 나누고, 정해진 세금 이상을 거두지 않으며, 강탈과 거짓 고발을 버리는 행동이다(눅 3:10-14). 이사야 57:14의 길 준비와 17절의 탐욕 고발도 이런 응답과 연결된다. 주님을 맞는 사람은 이웃을 해치며 자기 몫을 늘리던 생활을 멈추어야 한다.&lt;/p&gt;&lt;p&gt;베드로전서 2:24는 이사야 53:5의 나음 약속을 사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죄를 담당하심으로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사야 53:5의 평화와 나음은 57:18-19의 치료와 평강이라는 주제와도 이어진다. 그리스도는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여 새로 살 근거를 주신다. 히브리서 9:24-28의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다시 오신다. 성도는 아직 상처와 어려움이 있어도 그 평강의 완성을 기다릴 수 있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하나님께 돌아올 길을 가로막는 우상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예배의 열심이 있어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을 붙들고 이웃의 손해로 자기 이익을 늘린다면 여전히 자기 마음의 길을 걷는 것이다. 탐욕을 인정한 사람은 부당하게 취한 몫과 자신이 입힌 피해에 책임져야 한다.&lt;/p&gt;&lt;p&gt;높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통회하고 낮아진 사람을 살리려고 함께 거하신다. 회개를 이유로 사람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거나 실패를 끝없이 들추는 행위는 이 살리심을 거스른다. 죄를 바로잡을 때에도 생명을 지으시고 쇠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따라야 한다. 피해를 받은 사람에게 빨리 잊으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잘못을 고칠 수는 없다.&lt;/p&gt;&lt;p&gt;징벌에도 돌이키지 않던 백성을 보시고 하나님은 고치겠다고 하셨다. 되풀이되는 잘못에 지친 사람은 그분의 치료를 구할 수 있다. 그 은혜를 믿는 사람은 탐욕을 숨기지 않고 그분의 인도를 따른다. 회복은 사람이 충분히 자신을 무너뜨려 얻는 자격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베푸시는 고치심에 응답하는 삶이다.&lt;/p&gt;&lt;p&gt;입술의 열매는 고치고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다. 아직 슬퍼하는 사람에게 감사와 간증을 강요할 수 없다. 마음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악인에게 평강이 없다는 경고를 적용해서도 안 된다. 본문은 상한 사람에게 소생을 약속하며 우상과 탐욕을 고집하는 삶을 책망한다.&lt;/p&gt;&lt;p&gt;그리스도께서는 먼 사람과 가까운 사람을 같은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어느 한쪽도 은혜를 독점하고 다른 사람을 계속 허락받아야 하는 손님으로 대할 수 없다. 평강을 구하는 공동체는 잘못을 덮어 고요함을 유지하거나 진실을 말한 사람을 탓하지 않고, 죄를 다루어 화목하게 하신 주님께 순종해야 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Isa&amp;amp;chapter=57&amp;amp;mode=print"&gt;NET Bible, Isaiah 57 번역 노트&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714/"&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57:14,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715/"&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57:15,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716/"&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57:16,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5720/"&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57:20,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60:1-22 일어나 빛을 발하라: 시온 위에 떠오른 여호와의 영광</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60.1-22/</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60.1-22/</guid><description>폐허가 된 예루살렘 위에 여호와의 영광이 떠오르고, 흩어진 자녀와 열방이 그 빛을 향해 모여 오며, 화평과 공의가 다스리는 성이 세워지는 약속을 절의 흐름에 따라 풀이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59장에서 백성은 빛을 바라지만 어둠 속에서 걷는다고 탄식했고(59:9),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리라는 약속을 들었다(59:20). 60장은 황폐한 예루살렘을 한 여인으로 불러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קוּמִי אוֹרִי, 쿠미 오리)고 명한다. 두 명령은 여성 단수형이며 성읍과 그 주민을 향한다. UBS는 첫 명령이 뒤의 행동을 이끌어 무게가 “빛을 발하라”에 실린다고 설명한다. 시온 위에 먼저 임한 여호와의 영광이 이 명령의 근거다.&lt;/p&gt;&lt;p&gt;여호와의 영광이 “임하였음이니라”에 쓰인 동사(זָרָח, 자라흐)는 해가 떠오르는 모습에 자주 쓰인다. 같은 어근이 2절의 “임하실 것이며”와 3절의 “비치는 네 광명”으로 이어져 1-3절을 묶는다. 어둠이 땅과 만민을 덮은 가운데 여호와께서 시온 위에 떠오르신다. 시온은 그분에게서 받은 빛을 비추며, 나라들과 왕들은 그 광명을 향해 걸어온다.&lt;/p&gt;&lt;p&gt;4절의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는 49:18과 같은 히브리어 문구로, 버림받았다고 탄식하던 시온에게 주신 약속을 다시 불러온다. 먼 곳에서 아들딸이 돌아오자 시온의 얼굴은 환해지고 마음은 놀라며 넓어진다. 개역개정의 “화창하리니”는 넓어지는 마음을 기쁨으로 옮긴 말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광경 앞에 두려움과 기쁨이 일어난다. 바다를 건너온 먼 땅의 부와 열방의 재물도 시온으로 들어온다.&lt;/p&gt;&lt;p&gt;6-7절은 미디안과 에바의 낙타 떼, 금과 유향을 가져오는 스바 사람들, 게달과 느바욧의 양 떼를 그린다. 먼 땅의 사람들은 여호와의 찬송을 알리고 제물은 그분이 기뻐 받으실 제단에 오른다. 미디안, 에바, 스바는 그두라에게서 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게달과 느바욧은 이스마엘의 아들이다(창 25:2-4, 13). 아브라함 가문의 먼 갈래들이 시온으로 모인다. “네게 공급되고”는 “너를 섬길 것이다”(יְשָׁרְתוּנֶךְ, 예샤르투네크)라는 말로 10절의 왕들에게도 쓰인다. NET는 숫양들을 제물로 읽으며, 복종할 지도자들을 상징한다는 견해도 소개한다. 하나님은 이 제물을 받으시며 자신의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신다. “영화롭게 하다”의 어근은 9절, 13절, 19절, 21절에 이어져 장 전체를 묶는다.&lt;/p&gt;&lt;p&gt;8-9절에서는 돛을 단 배들이 구름과 비둘기처럼 몰려온다. 비둘기의 “보금자리”는 비둘기장에 뚫린 창구멍을 가리킨다. 여호와를 기다리는 먼 땅들과 다시스의 큰 배들은 시온의 자녀와 은금을 싣고 와 여호와의 이름에 바친다. 그 근거는 하나님이 시온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데 있다. 9절 끝의 히브리어(כִּי פֵאֲרָךְ, 키 페아라크)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이다”라는 삼인칭인데 개역개정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일인칭으로 옮겼다.&lt;/p&gt;&lt;p&gt;10절에서 이방인이 성벽을 쌓고 왕들이 시온을 섬기는 까닭은 하나님이 진노로 치셨던 성을 이제 은혜로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은혜”는 7절에서 제물을 “기꺼이” 받으심에 쓰인 말과 같은 명사다. 제물을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이 시온을 기뻐하시며 다시 세우신다. 11절의 성문은 재물이 끊임없이 들어와 밤낮 열려 있다.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에 쓰인 수동분사(נְהוּגִים, 네후김)는 NET가 제시하는 “행렬 가운데 인도되어”라는 번역도 가능하다. 포로인지 의례 행렬인지는 형태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12절은 시온을 섬기지 않는 나라들의 파멸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통치에 맞서는 열방의 심판이며, 시온이 칼을 들어 그들을 심판하는 장면은 없다.&lt;/p&gt;&lt;p&gt;13절에서 레바논의 나무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곳, “나의 발 둘 곳”을 꾸민다. 에스겔 43:7도 성전을 하나님의 보좌와 발의 처소, 이스라엘 가운데 영원히 거하실 곳이라고 부른다. 14절에서는 시온을 괴롭히던 이들의 자손이 몸을 굽혀 오고 멸시하던 자들이 그 발 아래 엎드려 “여호와의 성읍”,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고 고백한다. 그들의 섬김은 시온이 누구의 성인지 인정하는 데 이른다.&lt;/p&gt;&lt;p&gt;15-17절은 “대신”이라는 말(תַּחַת, 타하트)로 버림받고 미움받던 성의 처지가 바뀜을 그린다. 시온은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며, 열방과 왕들의 젖을 먹는 아이처럼 그들의 조공으로 양육된다. 시온은 여호와가 자신의 구원자,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이심을 안다. 이 세 칭호는 49:26과 같으며, 그곳에서 모든 육체가 알게 될 하나님을 이곳에서는 시온이 자기 삶에서 안다. NET는 “구속자”를 “보호자”로도 옮긴다. 17절은 놋 대신 금, 철 대신 은, 나무 대신 놋, 돌 대신 철을 주시는 변화를 잇는다.&lt;/p&gt;&lt;p&gt;화평과 공의는 시온의 관원과 감독으로 세워진다. NET는 이를 번영과 신원이 옛 압제자들 대신 다스리는 역설로 읽는다. 그 결과 강포와 황폐와 파멸이 그치고 성벽은 “구원”, 성문은 “찬송”이라 불린다. “황폐와 파멸”은 59:7에서 죄악의 길을 묘사하던 말이다. 16절의 “뭇 왕의 젖”과 18절의 “황폐”는 BHS에서 같은 글자와 모음의 말(שֹׁד, 쇼드)로 적혀 있다. 같은 소리가 한쪽에서는 시온을 기르는 젖을, 다른 쪽에서는 그칠 파괴를 가리킨다.&lt;/p&gt;&lt;p&gt;19-20절에서 여호와는 해와 달을 대신할 영원한 빛이 되신다. NET는 지지 않는 해와 물러가지 않는 달을 여호와의 빛과 회복된 복의 상징으로 설명하고 30:26과 비교한다. 1절에서 떠오른 영광은 지지 않는 빛이 되며 시온의 슬픔은 끝난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의 동사는 17절의 “화평”과 같은 어근이다. 슬픔이 다하여 끝나는 성을 화평이 다스린다.&lt;/p&gt;&lt;p&gt;21절의 백성은 모두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심은 가지이며 그분의 손으로 만든 작품이다. “내가 심은”에 해당하는 BHS 자음 본문은 삼인칭 “그의 심은 것”이고 NET도 그 형태를 제시한다. 개역개정은 이어지는 “내가 손으로 만든 것”과 짝을 이루도록 일인칭으로 옮긴다. 두 읽기 모두 여호와께서 백성을 심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심을 말한다. 22절에서 작은 자는 천 명을 이루고 약한 자는 강국이 된다. “때가 되면 … 속히 이루리라”(בְּעִתָּהּ אֲחִישֶׁנָּה, 베잇타흐 아히셴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지체 없이 이루시겠다는 약속이다. 빛을 발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한 장은 하나님이 친히 이루실 선언으로 끝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59장에서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백성은 스스로 길을 열지 못한다. 여호와께서 자기 팔로 구원을 베푸시고 구속자로 시온에 임하신 뒤 60장의 빛이 떠오른다. UBS는 이 빛을 백성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의 은유로 읽고 58:8, 10과 비교한다. 58장에서는 결박을 풀고 주린 이에게 양식을 나누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는 삶에 빛의 약속이 주어진다. 60:17-18의 화평과 공의도 그 빛이 머무는 성을 다스린다.&lt;/p&gt;&lt;p&gt;64장의 기도에는 시온의 황폐함과 성전의 화재를 슬퍼하는 탄식이 여전히 나온다. 개역개정 64:10-11은 BHS 64:9-10에 해당한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에서 “아름다운”에 쓰인 명사는 60:7의 “내 영광의 집”에 쓰인 말과 같다. 불탄 집을 두고 백성이 탄식하는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집을 영화롭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회복의 약속을 들은 백성도 황폐함 속에서 기도한다.&lt;/p&gt;&lt;p&gt;열방이 시온으로 모이는 약속은 아브람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는 창세기 12:1-3과 이어진다. 아브람은 고향을 떠나지만 이사야의 열방은 시온을 향해 모인다. 두 본문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통해 복이 모든 족속에게 이른다. 아브람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복과 저주가 갈리듯 60:12은 하나님의 성을 대하는 열방의 운명을 말한다. 창세기 25장의 아브라함 후손인 미디안, 에바, 스바, 게달, 느바욧이 예물과 양 떼를 가지고 오는 장면도 언약의 먼 갈래들까지 부르시는 복을 그린다. 작은 자를 강국으로 만드시겠다는 60:22은 큰 민족의 약속을 떠올리게 한다.&lt;/p&gt;&lt;p&gt;이사야 2:2-5의 열방은 여호와의 산에서 그분의 길을 배우고 칼을 보습으로 만들며 전쟁을 그친다. 야곱 족속도 여호와의 빛 가운데 걸으라는 부름을 받는다. 60장의 열방을 부르는 빛과 강포가 그친 땅은 같은 소망이다. 2:7-8, 16에서는 우상과 교만의 재료였던 은금과 다시스의 배가 60:9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에 바칠 예물을 운반한다. 심판받을 교만의 상징이 예배의 도구로 바뀐다.&lt;/p&gt;&lt;p&gt;시편 72:10-12에서도 다시스와 섬, 스바의 왕들은 예물을 바치고 왕 앞에 엎드려 섬긴다. 그 왕은 가난한 이의 억울함을 풀고 궁핍한 이와 자녀를 구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는 통치를 기대받는다(72:4, 12). 이사야 60:17-18은 그 정의로운 통치를 여호와께서 친히 화평과 공의를 세우고 강포를 그치게 하시는 성으로 그린다.&lt;/p&gt;&lt;p&gt;에스겔 10장에서 떠났던 영광은 43장에서 돌아와 땅을 비추고 성전을 가득 채운다. 하나님은 그곳을 자신의 보좌와 발의 처소라고 부르신다. 이사야 60장의 영광과 “발 둘 곳”도 백성 가운데 돌아오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의 중심에 둔다. 학개 2:7-9 역시 열방의 보배와 은금, 성전의 영광과 평강을 약속하며 모든 은금이 본래 하나님의 것임을 밝힌다. 열방의 재물은 여호와의 이름을 향한다.&lt;/p&gt;&lt;p&gt;이사야 49:6의 종은 땅끝까지 구원이 이르는 이방의 빛이다. 이어 버림받았다고 탄식하는 시온에게 하나님은 어머니가 젖먹이를 잊지 않듯 기억하시며 자녀와 성벽을 회복하겠다고 하신다(49:14-26).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와 구원자,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라는 칭호가 60장에서 다시 나온다. 열방과 왕들이 자녀를 데려오고 시온을 양육하는 60장은 49장의 응답을 펼친다. 다만 60장에는 종이 직접 등장하지 않으며 빛의 근원은 여호와이시다.&lt;/p&gt;&lt;p&gt;52:1-12의 깨어 일어나라는 부름은 통치하시는 하나님과 땅끝까지 드러나는 구원으로 이어진다. 부정한 자가 다시 들어오지 못한다는 52:1의 거룩함과 밤낮 열려 있는 60:11의 문은 같은 성을 묘사한다. 열방은 여호와의 이름을 향해 오고 시온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성이다.&lt;/p&gt;&lt;p&gt;61:3은 슬픔을 화관과 기쁨으로 바꾸고 백성을 여호와께서 심으신 의의 나무라 부른다. “대신”, 슬픔, 영광을 나타냄이라는 낱말들이 60:15-21의 약속을 잇는다. 62:4은 버림받은 자라는 이름이 사라질 것을 약속한다. 66:12에서 열방의 젖을 먹던 시온은 자녀를 먹이고 안는 어머니가 되며, 66:18-21에서는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다시스와 먼 섬들도 그 소식을 듣는다. 그 가운데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택할 이들이 나온다. 이스라엘은 황폐한 현실에서 하나님이 빛으로 오시고 열방을 부르시며 의로운 통치로 강포를 끝내실 날을 기다린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60장의 약속은 황폐한 예루살렘과 주민의 귀환과 재건을 향한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그 일부를 맛보았으나 해와 달이 필요 없는 빛과 모두 의롭게 된 백성은 한 번의 재건으로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59장은 죄를 고발하고 64:6(BHS 64:5)은 백성의 의가 더러운 옷 같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친히 의를 심고 빛이 되시는 소망을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읽는다.&lt;/p&gt;&lt;p&gt;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고 만민 앞에 예비된 구원, 이방을 비추는 빛, 이스라엘의 영광을 보았다고 찬송한다(눅 2:25-32). 이사야 49:6의 이방의 빛과 60:1-3의 영광이 그리스도에게서 만난다. 동방의 박사들이 빛을 따라와 금과 유향을 드린 마태복음 2:1-11도 60:3, 6과 장면이 겹친다. 마태는 이사야를 직접 인용하지 않으며 박사들의 예물은 예루살렘을 지나 베들레헴의 아기에게 향한다.&lt;/p&gt;&lt;p&gt;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다(요 8:12). 고린도후서 4:6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영광을 아는 빛을 사람의 마음에 비추신다. 시온의 빛이 하나님에게서 왔듯 교회도 그리스도에게서 빛을 받는다. 바울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까닭이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고 밝힌다(4:7).&lt;/p&gt;&lt;p&gt;에베소서 5:14의 일어나라는 명령과 그리스도가 비추시리라는 약속은 이사야 60:1을 떠올리게 한다. 인용의 출처는 밝혀져 있지 않다. 주 안에서 빛이 된 성도는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는 부름을 받는다(5:8). 예수도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이라 하시며 산 위의 동네처럼 빛을 비추어 사람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명하신다(마 5:14-16). 여호와의 찬송으로 열방을 부르는 시온의 사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삶으로 이어진다.&lt;/p&gt;&lt;p&gt;에베소서 2:13-22은 멀리 있던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고 그분이 화평이 되어 막힌 담을 허셨다고 말한다. 이방인은 동일한 시민이자 하나님의 권속이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 이사야에서 시온의 성벽을 쌓던 이방인은 에베소서에서 그 처소를 이루는 백성이다. 화평이 다스리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소망은 십자가로 원수 됨을 허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lt;/p&gt;&lt;p&gt;60:10의 진노에서 긍휼로 바뀌는 은혜는 이사야 52:13-53:12의 고난받는 종과 연결된다. 신약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백성의 죄를 담당하셨다고 증언한다. 로마서 11:26은 59:20의 구속자 약속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한다. 하나님이 심어 의롭게 만드시는 60:21의 백성을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받은 백성으로 읽는다.&lt;/p&gt;&lt;p&gt;요한계시록 21:11, 23-26은 이사야 60:3, 5, 11, 19-20의 장면과 표현을 이어 새 예루살렘을 그린다. 성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해와 달이 필요 없으며 어린 양이 등불이시다. 만국은 그 빛 가운데 다니고 왕들은 영광을 가지고 들어오며 성문은 닫히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영원한 빛이 되신다는 약속에서 요한은 하나님과 어린 양을 함께 성전과 빛으로 증언한다(계 21:22-23). 어린 양의 열두 사도라는 표현은 그분이 예수이심을 밝힌다(21:14).&lt;/p&gt;&lt;p&gt;요한계시록 22:5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비추시며 백성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한다. 이사야 60:21의 영원한 기업이 이 소망과 이어지고, 슬픔의 끝은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눈물을 닦고 애통을 없애시는 21:3-4에서 이루어진다. 그 성은 여전히 예루살렘이며 문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기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21:12-14). 열방은 시온에 주신 약속에 참여한다.&lt;/p&gt;&lt;p&gt;이사야 60:11-12에서는 왕들이 이끌려 오며 시온을 섬기지 않는 나라들이 망한다. 요한계시록 21:24-27에서는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성에 들어오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이 입성한다. 들어오지 못할 자는 민족에 따라 나뉘지 않고 속된 것, 가증한 일, 거짓말하는 자로 구별된다. 거룩함은 유지되며 입성의 자격은 어린 양에게서 주어진다. 생명나무의 잎사귀는 만국을 치료한다(22:2). 열방은 어린 양의 성에서 생명을 얻는다.&lt;/p&gt;&lt;p&gt;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빛은 이미 비쳤지만 모든 눈물이 닦이고 밤이 사라질 성은 아직 기다리는 미래다. 에베소서의 교회도 완성된 성전이 아니라 함께 지어져 가는 처소다. 성도는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정하신 때의 완성을 기다리고 그리스도에게 받은 빛을 비춘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명령은 여호와의 영광이 먼저 임했다는 약속에 근거한다. 교회의 빛은 스스로 만든 능력과 성과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영광을 비추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빛의 자녀처럼 살아야 한다. 59장의 죄 고백과 64장의 황폐함에 대한 탄식이 이어지듯, 받은 빛을 믿는 성도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상실을 슬퍼할 수 있다.&lt;/p&gt;&lt;p&gt;열린 성문으로 열방이 들어오는 약속은 그리스도의 피로 멀리 있던 사람들이 가까워진 복음과 이어진다. 출신과 배경을 이유로 하나님 백성의 참여를 막을 수 없다. 새 예루살렘의 문은 열려 있고 거짓과 가증한 일은 들어가지 못한다. 사람을 맞아들이는 은혜와 공동체 안의 거짓과 착취를 바로잡는 거룩함을 실천해야 한다.&lt;/p&gt;&lt;p&gt;열방의 재물은 제단과 여호와의 이름을 향한다. 교회나 어느 민족이 다른 이의 자원을 차지할 권리가 이 약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나라들의 심판도 시온에게 폭력의 권한을 주는 명령이 아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에서는 강포가 그치고 화평과 공의가 다스린다. 권한을 가진 사람은 학대와 착취를 막고 약한 이의 억울함을 바로잡아야 한다. 교회의 성장이나 정치적 승리를 이 약속의 성취와 동일시할 수 없다.&lt;/p&gt;&lt;p&gt;지지 않는 빛과 슬픔의 끝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의 약속이다. 슬퍼하는 사람에게 지금 슬픔을 끝내라고 요구하거나 작은 공동체에 수적 성장을 보장하는 말로 사용할 수 없다. 작은 자를 강국으로 만드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 성도는 눈물을 닦으실 하나님과 어린 양을 기다리며 오늘 받은 빛을 정직과 자비의 행실로 비춘다. 그 행실의 목적은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데 있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01/"&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60:1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Isa&amp;amp;chapter=60"&gt;NET Bible, 이사야 60장 본문과 번역 노트(tn)·연구 노트(sn).&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61:1-11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61.1-11/</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61.1-11/</guid><description>주 여호와의 영으로 기름부음 받은 이는 억눌린 이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시온의 슬픈 자들을 위로합니다. 희년의 자유와 제사장 나라의 부름은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선포하신 해방의 약속을 밝혀 줍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이사야 61장은 여호와의 영을 받아 보냄받은 사람이 자신의 사명을 밝히며 시작한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는 문자적으로 영이 “내 위에” 있다는 명사 문장이다. UBS는 이를 여호와의 능력과 함께하시는 임재가 화자에게 주어졌다는 뜻으로 읽으며, 화자를 소명을 받은 예언자이자 해방의 소식을 알리는 전령으로 본다. NET는 앞선 42, 49, 50장의 특별한 종과 연결한다. 이름은 나오지 않으나 화자는 여호와나 슬퍼하는 시온과 구별되는 보냄받은 사람이다.&lt;/p&gt;&lt;p&gt;여호와는 맡기신 일을 수행하도록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다. 왕과 제사장을 세우던 기름부음이 여기서는 부르심의 비유로 쓰인다. 그는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알리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친다. “가난한 자”(עֲנָוִים, 아나빔)는 힘센 자에게 억눌린 실제 사람들을 가리킨다. “고치며”(לַחֲבֹשׁ, 라하보쉬)는 상처를 싸맨다는 뜻으로, 큰 고통과 절망에 부서진 마음을 돌보는 사명이다. 40:9에서 시온에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던 동사가 이제 그가 받은 사명을 나타낸다.&lt;/p&gt;&lt;p&gt;그는 포로에게 자유(דְּרוֹר, 데로르)를 선포한다. UBS는 안식년에 종을 풀고 빚을 면제하는 규정을 배경으로 들며, 귀환 뒤에도 약속의 회복을 기다려 자신들을 포로처럼 여기는 백성에게 주어진 소식으로 읽는다. “갇힌 자”는 묶인 자를 뜻하며 원문에 감옥이라는 말은 없다. “놓임”(פְּקַח־קוֹחַ, 페카흐-코아흐)은 여기서만 나오는 표현으로 눈을 뜨는 일에 쓰이는 어근과 관련된다. UBS는 종살이에 묶인 이가 풀려나는 뜻으로 옮기도록 권한다. 칠십인역과 누가복음 4:18은 눈먼 자가 다시 보는 일로 옮긴다. 이 번역 차이에는 열림이라는 공통된 이미지가 있다.&lt;/p&gt;&lt;p&gt;2절의 선포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짝짓는다. “은혜”(רָצוֹן, 라촌)는 기꺼이 받아 주시는 호의로, 58:5의 “열납될 날”, 49:8의 “은혜의 때”에도 쓰인다. 58장은 백성의 금식이 열납될 수 있는지 물었으나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친히 은혜의 해를 선언하게 하신다. 보복은 억누르던 원수를 향한 판결이며, NET는 3절의 의를 그 판결로 백성이 신원받는 일과 연결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선포는 애곡하는 모든 이를 위로한다. 40:1의 “위로하라”가 보냄받은 이의 사명이 된다.&lt;/p&gt;&lt;p&gt;3절은 특히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재 대신 화관,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주겠다고 한다. “대신”이 세 번 반복되고 각 행은 새로 받을 것을 먼저 말한다. “화관”(פְּאֵר, 페에르)과 “재”(אֵפֶר, 에페르)는 자음 순서를 바꾼 말로, 머리에 얹은 애도의 재가 잔치의 장식으로 바뀜을 소리로도 그린다. 기름은 잔치와 환대의 기쁨을 나타낸다. “근심”은 문자적으로 “희미한 영”(רוּחַ כֵּהָה, 루아흐 케하)이다. 1절에서 여호와의 영을 받은 화자가 여기서는 꺼져 가던 백성의 영을 찬송으로 바꾸는 소식을 알린다.&lt;/p&gt;&lt;p&gt;위로받은 이들은 “의의 나무”, “여호와께서 심으신” 것으로 불려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다(3절). “영광을 나타낼”(לְהִתְפָּאֵר, 레히트파에르)은 앞의 화관과 같은 어근이다. 여호와가 주신 아름다움이 그분의 영광을 나타낸다. 60:21의 심은 가지, 49:3의 영광을 나타낼 종과도 이어진다. 4절에서 바로 이 백성이 오래 황폐하고 대대로 무너진 성읍을 다시 세운다. 58:12와 낱말까지 겹치는 약속이다. 여러 세대의 폐허를 회복하는 일을 위로받은 백성이 맡는다.&lt;/p&gt;&lt;p&gt;5-6절에서 외인은 양 떼와 밭과 포도원을 맡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제사장,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로 불린다. 열방 아래 수치당하던 백성이 출애굽기 19:6의 제사장 나라라는 소명을 회복한다. 열방의 재물을 먹고 그 영광을 누린다는 말은 제사장이 봉헌물로 살아가듯 열방의 풍부함을 누리는 그림이다. 60:5, 11의 “이방 나라들의 재물”과 같은 표현이다. NET는 7-8절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되 화자의 말이 어디서 바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설명한다.&lt;/p&gt;&lt;p&gt;7절은 수치 대신 갑절의 몫과 영원한 기쁨을 약속한다. 3절에서 슬픔의 표지가 바뀌었다면 여기서는 능욕과 상실이 바뀐다. 40:2의 갑절의 벌과 61:7의 갑절의 보상은 히브리어 낱말은 다르지만 회복의 대조를 이룬다. 같은 백성을 “너희”와 “그들”로 번갈아 가리키는 인칭 변화도 원문에 있다. 4절의 “오래”, 7절의 “영원한”, 8절의 “영원한”은 같은 말이어서 오래된 폐허를 영원한 기쁨과 언약으로 바꾸는 약속을 잇는다.&lt;/p&gt;&lt;p&gt;8절에서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의 강탈”(גָזֵל בְּעוֹלָה, 가젤 베올라)을 미워하신다고 밝히신다. BHS의 모음대로 읽으면 뒤의 말은 “번제에서”라는 뜻이지만, 개역개정은 다른 모음으로 읽어 “불의”로 옮긴다. UBS도 이방이 유다에게 행한 강탈이라는 문맥에서 후자를 선호한다. 여호와는 신실하게 백성의 보상을 갚고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다. 보상이라는 명사는 49:4의 종의 보응과 62:11의 여호와 앞에 있는 보응에도 쓰인다. 55:3의 영원한 언약이 다시 약속된다. 그 자손은 열방에 알려져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으로 인정받는다(9절).&lt;/p&gt;&lt;p&gt;10절의 일인칭 화자는 크게 기뻐한다. NET는 시온이나 민족이 의인화되어 응답하는 말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같은 동사를 겹친 “크게 기뻐하며”가 그 기쁨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구원의 옷과 신원을 뜻하는 공의의 겉옷을 입혀 주셨기 때문이다. 신랑의 “사모”는 3절의 화관과 같은 낱말이다. “쓰며”(יְכַהֵן, 예카헨)는 문자적으로 제사장처럼 행한다는 뜻으로 6절의 제사장 소명을 되새긴다. 시온은 신랑과 신부처럼 단장하며, 62:5에서는 하나님이 신랑처럼 시온을 기뻐하신다.&lt;/p&gt;&lt;p&gt;11절은 땅과 동산에서 싹이 돋듯 주 여호와가 모든 나라 앞에 공의와 찬송을 솟아나게 하실 것을 약속한다. 싹을 내고 움돋고 솟아나게 한다는 세 표현은 같은 어근이다. 3절에서 하나님이 심으신 나무가 된 백성은 이제 그분이 일으키시는 회복을 열방 앞에 드러낸다. 공의는 여기서도 구원과 회복을 강조하며, 찬송의 옷을 입은 백성의 찬송이 모든 나라 앞에 나타난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영과 사명이 백성의 회복과 열방 앞의 찬송으로 이어진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레위기 25:8-17의 희년에는 속죄일에 나팔을 불어 자유를 선포하고 각 사람이 가족과 기업으로 돌아간다. 토지의 값도 다음 희년까지 거둘 소출에 따라 매기며 형제를 속이지 말라고 명한다. 가난으로 팔린 사람도 가족에게 돌아온다(25:39-41). 이사야 61장의 자유와 은혜의 해는 이 해방법의 언어로 포로 이후의 백성에게 말한다. UBS는 안식년의 종 해방과 채무 면제를, NET의 누가복음 주석은 희년을 배경으로 든다. 이사야는 백성이 지켜야 할 법의 언어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해방을 선포한다.&lt;/p&gt;&lt;p&gt;출애굽기 19:4-6에서 애굽을 나온 백성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받는다. 이사야 61:6, 8과 62:12에서는 그 소명과 언약이 회복된다. 56:6-7은 여호와와 연합한 이방인의 예배를 받으실 것을 약속하고, 66:20-21은 열방에서 모여드는 장면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택하신다고 한다. “그 가운데”가 귀환하는 이스라엘인지 열방까지 포함하는지는 해석이 갈린다. 61:5-6의 외인과 제사장 구별은 열방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이 흐름과 연결된다.&lt;/p&gt;&lt;p&gt;40:1, 9에서 명하신 위로와 아름다운 소식이 61:1-2에서는 한 사람의 사명이 된다. 49:6-13의 종은 야곱을 일으키고 이방의 빛이 되며, 은혜의 때에 갇힌 이를 불러내고 고난받는 백성을 위로한다. 52:7-10은 구속의 소식을 듣는 폐허에게 노래하라 명한다. 61장에서는 그 폐허가 다시 세워지고 시온이 신부처럼 단장한다. 종의 사명과 시온의 회복이 이어진다.&lt;/p&gt;&lt;p&gt;53장의 종은 질고와 슬픔을 지고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그 고난으로 평화와 나음을 얻게 한다. 54:17은 복수인 “여호와의 종들”이 누릴 기업과 하나님께 받은 공의를 말한다. 61장도 한 사람의 선포를 받은 백성이 의의 나무와 제사장으로 서는 모습을 그린다. 61장의 화자가 53장의 종과 동일한지는 직접 밝혀지지 않지만 한 사람의 사명이 많은 이의 회복으로 이어진다.&lt;/p&gt;&lt;p&gt;58:6-12은 압제의 결박을 풀고 주린 자와 집 없는 자를 돌보라고 요구하며 오래 황폐한 곳의 재건을 약속한다. 61장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통해 해방을 선포하고 같은 낱말로 재건을 약속한다. 백성이 정의를 행하라는 요구와 하나님이 주시는 해방이 이어진다. 누가복음 4:18이 61장 인용에 58:6의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를 넣는 것도 두 장을 연결한다.&lt;/p&gt;&lt;p&gt;60-62장은 시온의 빛과 기쁨을 노래한다. 60:17의 귀한 것으로 대신함과 20절의 슬픔의 끝은 61:3의 교환과 위로를 준비한다. 62:3에서는 시온 자체가 하나님의 손에 들린 아름다운 관이 되고 5절에서는 그분이 신랑처럼 기뻐하신다. 백성에게 주신 아름다움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시온의 모습이 된다.&lt;/p&gt;&lt;p&gt;61:2의 보복의 날과 은혜의 해는 63:4의 원수 갚는 날과 구속할 해에 이어진다. 억압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판결이 억눌린 백성에게 구속이 된다. 63:1-6에서 홀로 일하시는 여호와가 그 심판의 주체이다. 백성은 그분께 신원받는다.&lt;/p&gt;&lt;p&gt;창세기 12:1-3의 아브라함의 복은 모든 족속을 향한다. 이사야 61:9에서 열방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을 알아보고, 11절에서는 모든 나라가 공의와 찬송을 본다. 60:3에서 시온의 빛으로 나아오는 열방처럼 이 회복은 민족들 앞에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낸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이사야 61장은 귀환 뒤에도 폐허와 수치 속에서 회복을 기다리던 시온에게 주어졌다. 58-59장은 백성의 불의와 중재자의 부재를 드러내고 여호와가 자기 팔로 구원하신다고 선언한다(59:16). 영과 말씀의 언약(59:21), 시온의 영광(60장) 뒤에 영을 받은 화자가 등장한다. 신약은 그 사명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밝힌다.&lt;/p&gt;&lt;p&gt;누가복음 4:16-21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오신 예수는 이사야의 글을 읽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선언하신다. NET는 기름부음이 예수의 세례 때 성령이 임하신 일(3:21-22)을 돌아보게 한다고 설명한다.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그리스도의 사명이 그분 안에서 성취된다.&lt;/p&gt;&lt;p&gt;누가복음 4:18-19는 이사야 61:1-2 앞부분에 58:6의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을 넣는다. NET는 이스라엘이 하지 못한 해방을 예수가 직접 이루시는 뜻으로 본다. “자유”(ἄφεσιν, 아페신)와 “자유롭게”(ἀφέσει, 아페세이)는 같은 명사이며 24:47에서는 죄 사함을 가리킨다. 예수의 해방은 몸과 삶의 속박에서 죄의 속박까지 이른다. 누가복음 18:35-43의 맹인은 눈을 뜨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른다.&lt;/p&gt;&lt;p&gt;NET는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를 실제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들로 풀이하며 1:52와 6:20을 함께 든다. 세상이 낮추던 이들을 예수는 돌아보신다. 개역개정 누가복음 4:18에는 이사야의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가 없다. NET는 중요한 여러 사본에 이 구가 없고 후대 필사자가 이사야에 맞추어 덧붙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한다.&lt;/p&gt;&lt;p&gt;예수는 은혜의 해에서 낭독을 멈추고 이사야의 보복의 날을 읽지 않으신다. NET는 그 은혜의 해를 희년의 구원 비유로 읽는다. 이는 나사렛에서 선포된 은혜의 “오늘”을 강조한다. 신약은 마지막 판결도 말한다. 요한계시록 21:4, 27의 새 예루살렘에는 애통과 속됨이 없으며, 고린도후서 6:2는 지금을 은혜와 구원의 때로 선포한다. 백성은 은혜의 초청에 응답하며 하나님의 판결을 기다린다.&lt;/p&gt;&lt;p&gt;고향 사람들은 요셉의 아들이 어떻게 이 약속을 말하느냐고 반문한다. NET는 “은혜의”(δεκτόν, 데크톤)와 선지자가 “환영을 받는”(δεκτός, 데크토스)의 낱말 놀이를 지적한다. 받으실 만한 해를 선포한 예수는 고향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에게 임한 은혜를 듣고 청중은 분노하여 예수를 내쫓는다. 자기 집단을 넘어가는 은혜를 거부한 것이다. 4:43에서 예수는 다른 동네에도 복음을 전하도록 보내심받았다고 밝히신다.&lt;/p&gt;&lt;p&gt;누가복음 7:18-23에서 예수는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요한에게 맹인이 보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들리는 사역을 알리라고 하신다. 사도행전 10:38도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 받은 예수가 눌린 이들을 고치셨다고 증언한다. 부활하신 예수는 자신의 고난과 부활, 모든 족속을 향한 회개와 죄 사함을 밝히신다(눅 24:46-47). 이사야 53장의 종처럼 그분이 슬픔과 죄를 담당하시어 자유를 주신다.&lt;/p&gt;&lt;p&gt;갈라디아서 3:27은 성도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한다. 이사야 61:10의 구원의 옷처럼 그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다. 누가복음 5:34-35에서 예수는 자신을 신랑으로 밝히며 잔치의 기쁨을 알리신다. 베드로전서 2:9의 왕 같은 제사장과 거룩한 나라는 출애굽기 19:6과 이사야 61:6의 소명을 잇는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방인도 제사장 백성에 참여하며 이는 이사야 56:6-7의 이방인 환대와 이어진다.&lt;/p&gt;&lt;p&gt;요한계시록 21장에서 새 예루살렘은 단장한 신부처럼 내려오고 하나님은 모든 눈물과 애통을 없애신다. 만국은 그 빛으로 다니고 왕들은 영광을 가져온다(21:2-4, 24-26). 이사야 61장의 신부 단장, 위로와 열방의 영광이 이 장면과 이어진다. 예수 안에서 선포된 은혜의 열매는 만물을 새롭게 하실 때 온전히 드러난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가난한 자와 포로, 마음이 부서진 자는 실제로 짓눌린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임하는 좋은 소식은 하나님이 그 고통을 돌아보시고 자유와 회복을 주신다는 약속이다. 죄 사함을 주시는 예수는 병든 몸을 고치고 눌린 이들을 자유롭게 하셨다. 그분의 복음을 듣는 사람은 이웃을 짓누르는 속박과 가난을 외면할 수 없다.&lt;/p&gt;&lt;p&gt;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고 강탈을 미워하신다. 레위기 25장의 형제를 속이지 말라는 명령과 61:8의 정당한 보상은 재산과 거래도 하나님의 뜻 아래 있음을 밝힌다. 해방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이익을 위해 이웃의 몫을 빼앗는 삶을 지속할 수 없다. 하나님께 속한 소유는 이웃을 종속시키는 도구가 될 수 없다.&lt;/p&gt;&lt;p&gt;화관과 기쁨의 기름, 찬송의 옷은 하나님이 슬퍼하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그 약속을 근거로 슬픈 사람에게 당장 기뻐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 본문은 그들이 애곡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 슬픔을 바꾸시는 분을 가리킨다. 위로받은 백성은 그 은혜로 다시 일어나 무너진 곳을 세운다.&lt;/p&gt;&lt;p&gt;외인과 이스라엘의 역할을 구별한 5-6절은 포로기의 수치가 뒤집히는 회복의 약속이다. 오늘의 민족과 계층 사이에 우열을 정하는 권리를 주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도 제사장 백성의 일원이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집단의 소유로 여겨 낯선 사람을 배척한다면 나사렛 청중에게 주어진 경고를 들어야 한다.&lt;/p&gt;&lt;p&gt;보복은 강탈당한 백성을 위해 하나님이 내리시는 판결이다. 억눌린 사람은 그분께 신원을 구할 수 있다. 이 약속을 개인의 복수나 집단의 증오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을 수 없다. 은혜의 해를 여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고 회개와 죄 사함의 초청에 응답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Isa&amp;amp;chapter=61"&gt;NET Bible, 이사야 61장 번역 및 해설 주석.&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11-2/"&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61:1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Luk&amp;amp;chapter=4"&gt;NET Bible, 누가복음 4장 번역 및 해설 주석, 특히 46, 59, 62-71, 80, 86, 91, 94, 150번.&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18/"&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61:8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62:1-12 너를 헵시바라 하리라: 쉬지 않는 파수꾼과 시온의 새 이름</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62.1-12/</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62.1-12/</guid><description>하나님은 버림받은 예루살렘에 새 이름을 주십니다. 성벽의 파수꾼들은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며, 흩어진 백성이 돌아올 길을 닦으라는 외침이 울립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이사야 60-61장은 시온의 빛과 슬픔을 대신할 기쁨을 약속했지만 성은 여전히 무너져 있었다. 62장은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이라는 결심으로 시작한다. 두 동사는 입을 다물지 않고 활동을 멈추지 않겠다는 뜻이다. UBS는 “시온을 위하여”를 시온에 대한 사랑과 그 유익을 위한 행동으로 풀이한다.&lt;/p&gt;&lt;p&gt;화자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UBS는 1절을 예언자의 말로 읽으며, 그가 2절부터 시온을 ‘너’라고 부른다고 설명한다. 6절에서 파수꾼을 세우는 ‘나’에 대해서도 NET는 예언자일 가능성을 높게 보지만, UBS는 하나님 또는 예언자로 열어 둔다. 1절의 결심과 6절의 명령은 잠잠하지 않는다는 동사와 회복이 이루어질 때까지라는 기한으로 이어진다.&lt;/p&gt;&lt;p&gt;1절의 화자는 시온의 의가 새벽빛처럼, 구원이 타오르는 횃불처럼 나타날 때까지 쉬지 않겠다고 한다. “나타나도록”에 해당하는 עַד(아드)는 그 결심의 기한을 나타낸다. “의”(צִדְקָהּ, 치드카흐)는 백성의 결백을 밝혀 주시는 일이나 그들을 건져 내시는 일로 읽을 수 있으며, 뒤의 경우 ‘구원’과 평행한다. 59:9에서 백성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라고 탄식했고 60:3은 왕들이 광명으로 나오리라고 약속했다. 화자는 그 빛이 모두에게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횃불 같이”(כְּלַפִּיד יִבְעָר, 켈라피드 이브아르)에는 개역개정에서 따로 옮기지 않은 ‘타오르다’라는 동사가 포함된다.&lt;/p&gt;&lt;p&gt;2절에서 열방과 왕들이 시온의 공의와 영광을 본다. 1절의 “의”와 2절의 “공의”는 같은 히브리어 명사다. 60:1-3에서 시온 위에 임한 여호와의 영광이 이제 왕들 앞에 드러난다. 시온은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을 받는다. 이름을 정한다는 יִקֳּבֶנּוּ(이코벤누)는 지정하거나 구별하여 부른다는 뜻으로, 이름을 주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다. 아브람과 야곱이 새 이름을 받은 것처럼(창 17:5; 32:28) 이 이름은 하나님이 시온과 맺으실 관계를 선언한다.&lt;/p&gt;&lt;p&gt;3절에서 시온은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עֲטֶרֶת תִּפְאֶרֶת, 아테레트 티프에레트)이 된다. 두 낱말은 소리가 비슷하며, ‘아름다운’은 60:7의 “영광”과 같은 명사다. 평행구의 “왕관”은 왕의 두건이나 머리 장식을 가리키며 3:23의 일반 장신구에도 쓰인다. 관이 머리 대신 손에 있다는 점에서 UBS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고 그분이 쓰신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49:16에서 시온을 새기셨던 손바닥에 이제 왕관이 들린다. 60:19에서 하나님이 시온의 영광이 되셨다면 여기서는 시온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lt;/p&gt;&lt;p&gt;4절은 “버림 받은 자”(עֲזוּבָה, 아주바)와 “황무지”(שְׁמָמָה, 셰마마)라는 이름을 물리친다. 첫 이름은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를 떠올리게 한다. UBS는 두 이름을 백성이 자신을 바라보던 부정적인 시각과 연결하고 49:14-23, 54:6-7의 탄식을 가리킨다. 주전 587년 바벨론의 파괴로 땅이 황폐해졌으며, 여성 명사인 황무지도 혼인 비유 안에서 ‘버림받은 아내’로 옮길 수 있다고 본다. 성의 함락과 황폐, 버림받았다는 경험을 담은 이 이름들이 다시는 불리지 않을 것이다.&lt;/p&gt;&lt;p&gt;새 이름 “헵시바”(חֶפְצִי־בָהּ, 헤프치-바흐)는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는 뜻이며 므낫세의 어머니 이름으로도 쓰인다(왕하 21:1). UBS는 ‘기쁨’이 44:28과 46:10처럼 뜻이나 목적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시온을 기뻐하시며 그를 향한 뜻을 정하신다. 땅의 이름 “쁄라”(בְּעוּלָה, 베울라)는 ‘결혼한 여자’다. 이어지는 “기뻐하실 것이며”는 현재의 상태로도 읽을 수 있지만 개역개정은 미래 약속으로 옮긴다. ‘결혼한 것처럼 된다’는 것은 땅이 다시 여호와의 은총 아래서 복과 보호를 누린다는 뜻이며, 혼인 비유는 보호와 공급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낸다.&lt;/p&gt;&lt;p&gt;5절의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יִבְעָלוּךְ בָּנָיִךְ, 이브알루크 바나이크)는 청년의 혼인에 비유된다. ‘결혼하다’와 ‘취하다’는 4절의 쁄라와 같은 어근이다. 아들들이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난점 때문에 자음은 그대로 두고 모음을 바꾸어 ‘너를 건축하신 이’로 읽자는 제안이 있다. UBS는 많은 현대 번역이 이 제안을 따르지만 Hebrew Old Testament Text Project는 마소라 본문 ‘네 아들들’을 강하게 권한다고 보고하며, 동사를 ‘소유하다’로 읽는다. NET도 고대 역본들의 지지와 동사의 기본 뜻, 시온의 자녀가 땅을 차지한다는 49:20과 54:3의 비유를 들어 수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읽기에서 흩어진 주민들이 돌아와 땅을 다시 차지한다.&lt;/p&gt;&lt;p&gt;둘째 줄에서는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듯 하나님이 시온을 기뻐하신다. “기뻐함”과 “기뻐하시리라”는 같은 어근이다. UBS는 이 줄의 초점을 회복된 관계와 이루어진 약속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61:10과 연결한다. 61:10에서는 구원의 옷을 입은 이가 신랑과 신부의 모습으로 하나님 때문에 기뻐했고 여기서는 하나님이 시온 때문에 기뻐하신다. 60:15의 “대대의 기쁨”도 같은 명사다. 5절의 첫 줄이 주민과 땅의 관계라면 둘째 줄은 하나님과 시온의 관계다.&lt;/p&gt;&lt;p&gt;6절에서 성벽 위의 파수꾼들은 주야로 잠잠하지 않는다. 고대 성읍의 파수꾼은 적이나 전령을 살피고 알렸지만(삼하 18:24-27) 이들은 하나님께 아뢴다. UBS는 예언자, 지도자 또는 천상의 존재에 대한 비유로 보며 그 역할을 중보로 설명한다. 1절의 “잠잠하지 아니하며”와 같은 동사가 파수꾼들의 직무로 이어진다. 49:16에서 하나님이 항상 보고 계신 성벽 위에 이제 항상 기도하는 이들이 선다.&lt;/p&gt;&lt;p&gt;“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הַמַּזְכִּרִים, 함마즈키림)은 하나님께 약속을 상기시키는 이들이거나 여호와를 계속 부르는 기도자들로 읽을 수 있다. UBS는 다음 절과의 연결 때문에 첫째 읽기를 선호하고 NET는 둘째 번역도 가능하다고 본다. “너희는 쉬지 말며”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에는 같은 ‘쉼’이라는 명사가 쓰인다. 기도자들은 자신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쉼을 드리지 말아야 한다. 1절처럼 기한을 나타내는 עַד(아드)가 뒤따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견고히 세우고 온 땅의 찬송과 자랑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도하게 한다.&lt;/p&gt;&lt;p&gt;8절에서 여호와는 오른손과 능력의 팔로 맹세하신다. UBS는 오른손을 맹세할 때 드는 손과 연결하며, 손과 팔이 모두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NET도 같은 상징을 읽는다. 맹세에서 אִם־אֶתֵּן(임-에텐)은 ‘결코 주지 않겠다’라는 강한 부정이다. 백성이 수고한 곡식과 새 포도주를 원수에게 넘겨주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이다. UBS는 외적의 점령과 강탈을 끝내겠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세금인지 군대의 징발인지는 밝혀지지 않으며 이방인이 마시는 일 자체가 아니라 힘으로 빼앗는 일이 문제다.&lt;/p&gt;&lt;p&gt;“네가 수고하여 얻은”에서 수고는 지치도록 일한다는 뜻이며, 40:28에서 하나님이 “곤비하지 않으시며”라고 할 때 쓰인 동사와 같다. 곤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지치도록 일한 백성의 소출을 지키신다. 9절의 거두는 이와 먹고 마시는 이에게는 같은 곡식과 포도주를 받는 접미어가 붙어 수고한 사람이 자기 소출을 누림을 나타낸다. 그들은 여호와를 찬송하며 성소 뜰에서 먹고 마신다. UBS는 이를 감사와 제물, 성전 뜰의 화목제 식사로 읽고 새 성전의 회복까지 내다본다. 수고의 열매를 누리는 식탁이 하나님 앞의 예배가 된다.&lt;/p&gt;&lt;p&gt;10절의 거듭된 명령은 돌아오는 이들을 맞으라고 재촉한다. UBS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성읍 문 밖으로 나가 포로나 예배하러 오는 이방인을 맞을 길을 닦는 장면으로 풀이한다. “길을 닦으라”(פַּנּוּ דֶּרֶךְ, 판누 데레크)는 40:3의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명령과 같다. 큰 길을 수축하는 것은 흙을 돋우어 쌓는 일이며 57:14를 반복한다. 돌을 골라내는 일은 5:2의 포도원 조성과도 연결된다. 끝으로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הָרִימוּ נֵס עַל־הָעַמִּים, 하리무 네스 알-하아밈)고 한다. 49:22에서 하나님이 드신 기치를 여기서는 주민들이 든다. UBS는 이를 열방에게 회복을 보이거나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이끄는 표지로 읽는다. 반복 명령은 40:1의 “위로하라 … 위로하라”처럼 다급함을 나타낸다.&lt;/p&gt;&lt;p&gt;11절에서 여호와는 땅 끝까지 소식을 알리시고 “딸 시온”, 곧 예루살렘 주민에게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고 말하게 하신다. “이르렀느니라”(בָּא, 바)는 완료형 또는 분사로 읽혀 ‘이르렀다’와 ‘오고 있다’가 모두 가능하다. NET는 ‘네 구원자가 오신다’고 옮기며 UBS도 구원하러 오시는 하나님으로 풀이한다. 뒤의 남성 대명사 ‘그에게’, ‘그 앞에’는 여호와를 가리킨다.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는 40:10과 같은 표현이다. NET는 되찾아 돌아오는 백성을 여호와의 상급으로 보며, UBS는 GNT가 ‘그분이 구하신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로 옮겼다고 소개한다.&lt;/p&gt;&lt;p&gt;12절에서 귀환자들은 “거룩한 백성”,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불리고, 성은 “찾은 바 된 자”,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불린다. 개역개정은 모두 ‘너’에게 붙이지만 히브리어는 앞의 두 이름을 ‘그들’에게, 뒤의 두 이름을 ‘너’에게 준다. UBS는 ‘그들’을 가까이는 귀환민으로, 넓게는 기존 주민을 포함한 유다 백성 전체로 읽는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구별되고 그분이 건져 내어 데려오신 백성이다. “찾은 바 된 자”(דְרוּשָׁה, 데루샤)는 열방이 찾아오는 성(2:2-3) 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으로 읽힌다. 마지막 이름의 ‘버리다’는 4절의 “버림 받은 자”와 같은 동사다. 옛 이름에 부정어가 붙어 포로 생활의 역전을 알리며, 2절에 약속한 새 이름을 완성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이사야 62장은 40장의 위로와 귀환, 49장과 54장의 버림받은 어머니와 아내, 60-61장의 빛과 화관을 잇는다. 그러나 59장의 백성은 여전히 빛을 바라면서 어둠 가운데 있다고 탄식하고 64:10(BHS 64:9)은 시온과 예루살렘의 황폐를 아뢴다. 파수꾼들은 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한다.&lt;/p&gt;&lt;p&gt;54:1의 ‘황폐한 여자’와 ‘남편 있는 여자’는 62:4의 황무지와 쁄라를 같은 어근으로 미리 제시한다. 54:5는 창조주를 남편과 구속자라 부르고, 54:6의 “버림을 받아 … 아내”는 62:4의 “버림 받은 자”와 같은 형태인 עֲזוּבָה(아주바)를 쓴다. 하나님은 “내가 … 너를 버렸으나”라고 실제 심판을 인정하시면서도 잠시의 진노 뒤에 큰 긍휼로 모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54:7-8). 산들이 떠나도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는다(54:10). 54장의 관계 회복이 62장에서는 열방 앞에 부르는 이름이 된다.&lt;/p&gt;&lt;p&gt;49:14-22에서 버림받고 잊혔다고 탄식한 시온에게 하나님은 어머니가 자식을 잊어도 자신은 잊지 않으며 그 성벽을 항상 보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62:6은 같은 ‘성벽’과 ‘항상’이라는 말로 파수꾼의 기도를 그린다. 49장에서 돌아오는 자녀는 시온이 신부처럼 두를 장식이며 황폐한 땅을 채울 주민이었다. NET는 이 약속을 들어 62:5의 ‘네 아들들’을 설명한다. 49:22에서는 하나님이 드신 기치를 보고 열방이 자녀를 데려왔다. 62:10에서는 주민들이 그 기치를 들고 하나님이 시작하신 귀환을 맞이한다.&lt;/p&gt;&lt;p&gt;40:3의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명령은 62:10에서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는 명령이 된다. 40:10의 상급을 가지고 오시는 하나님은 이어지는 11절에서 양 떼를 품는 목자이시다. 하나님이 오시며 그분이 이끄시는 백성도 돌아온다. 57:14의 “돋우고 돋우어 길을 수축하여”와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도 62:10과 같은 동사들을 쓴다. 57장에서는 걸림돌을 들어 치우고 62장에서는 기치를 높이 든다. 52:7-10의 파수꾼들은 여호와의 귀환과 열방 앞에 드러난 구원을 보고 노래했다. 62장에는 같은 하나님의 팔, 땅 끝, 열방이 보는 구원이 나오지만 파수꾼들은 성취를 기다리며 기도한다.&lt;/p&gt;&lt;p&gt;에스겔의 파수꾼은 하나님께 들은 말씀으로 백성에게 경고한다(겔 3:17; 33:7). 이사야 62장의 파수꾼은 백성의 형편과 하나님의 약속을 아뢴다. 하박국도 파수하는 곳에서 응답을 기다렸고 하나님은 묵시가 더뎌도 정한 때에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다(합 2:1-3). 시편 130:6의 기도자는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주를 기다린다. 이사야 62:1의 새벽빛 같은 구원도 이런 기다림의 대상이다.&lt;/p&gt;&lt;p&gt;60:15의 버림받은 시온과 대대의 기쁨, 61:10의 신랑과 신부는 62:4-5로 이어진다. 63:7에서 자비를 “말하며”에 쓰인 אַזְכִּיר(아즈키르)는 62:6의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과 같은 동사다. 기도자는 자비를 상기하며 시작해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라고 구하고(63:15), 아직도 잠잠하시겠느냐고 묻는다(64:12). 개역개정 64:1은 BHS 63:19 후반부이고 개역개정 64:12는 BHS 64:11이다. 마지막 질문의 “잠잠하시고”(תֶּחֱשֶׁה, 테헤셰)는 62:1, 6의 ‘잠잠하다’와 같은 동사다. 예언자와 파수꾼이 잠잠하지 않듯 공동체는 하나님께 침묵을 거두어 달라고 구한다.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읽을 수 있는 65장은 부르기 전의 응답(65:24), 새 하늘과 새 땅(65:17), 백성을 기뻐하시는 하나님(65:19)을 약속한다. 마지막 기쁨의 동사도 62:5와 같다.&lt;/p&gt;&lt;p&gt;출애굽기 19:4-6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신다. 62:12도 ‘거룩한 백성’을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와 짝지어 구원과 소속을 잇는다. 반면 신명기 28:30, 33은 언약을 어긴 백성의 포도와 소출을 다른 민족이 먹으리라고 경고했다. 느헤미야 9:36-37에서도 백성은 죄 때문에 그 땅의 소산이 이방 왕에게 돌아간다고 고백한다. 62:8-9의 맹세와 65:21-22의 약속은 이 저주를 뒤집어 일한 사람이 자기 열매를 누리게 한다. 신명기 14:22-23의 언약의 식탁처럼 62:9의 백성도 성소 뜰에서 소출을 먹고 마시며 여호와를 찬송한다.&lt;/p&gt;&lt;p&gt;이 회복은 열방에도 열려 있다. 56:6-7은 여호와와 연합한 이방인을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집에서 기쁘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회복을 이루시는 분은 친히 오시는 하나님이다. 59:20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리라고 약속하고 63:5에서는 돕는 이 없이 여호와의 팔이 구원한다고 말씀하신다. 파수꾼의 기도는 하나님이 친히 오시기를 구한다. 신약은 이 기다림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연결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이사야 62장은 폐허 속에서 회복을 기다리던 예루살렘에 새 이름과 끊이지 않는 기도, 수고의 열매를 누리는 식탁을 약속한다. 그러나 느헤미야 시대에도 소출은 이방 왕에게 돌아갔고(느 9:36-37), 64:7의 공동체는 주를 붙잡는 이조차 없다고 탄식한다. 새 이름과 구원, 기도의 힘도 하나님께 달려 있었다. 신약은 그 기다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응답하셨다고 증언한다.&lt;/p&gt;&lt;p&gt;62장 바로 앞의 61:1-2는 신약에서 예수의 사역을 여는 말씀으로 쓰였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 두루마리를 펴 읽으시고, 이 말씀이 오늘 듣는 이들 앞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다(눅 4:16-21). 61장에서 기름 부음 받은 이는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재 대신 화관을 주고, 그들이 “의의 나무”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고 보냄을 받았다(61:3). 62장은 그 시온이 새 이름으로 불리기까지 잠잠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진다. 61장의 기름 부음 받은 이와 62:1의 화자가 같은 인물인지 본문은 밝히지 않는다. 예수는 두 장이 약속하는 회복을 이루신다.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버림받았다는 이름을 짊어진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들과 함께 잡수셨고(눅 15:1-2),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은 여인을 “딸아”라고 부르셨다(눅 8:48). 62장에서 하나님이 시온의 옛 이름을 지우셨듯이, 예수는 사람들에게서 낙인이 된 이름을 거두고 하나님 앞에서의 새 이름을 주셨다.&lt;/p&gt;&lt;p&gt;마태복음 21:1-11에서 예수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 마태는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한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21:5). 개역개정에서 보듯 첫 구절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은 스가랴 9:9의 첫머리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보다 이사야 62:11의 “딸 시온에게 이르라”에 가깝고, 이어지는 겸손한 왕의 모습은 스가랴 9:9의 내용이다. 마태의 이 인용에서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는 소식은 나귀를 타고 성에 들어오시는 왕의 도착으로 들린다. 무리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그를 맞는다(21:9). 예수께서 들어가시자 온 성은 소동하며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21:10). 구원이 시온 딸에게 이르렀지만, 성은 그분을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누가의 입성 장면에서 예수는 성을 보고 우시며, 그들이 평화에 관한 일과 하나님이 돌보러 오신 때를 알지 못했다고 탄식하신다(눅 19:41-44). 62:1의 화자는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않겠다고 했다. 복음서의 예수는 그 시온을 위하여 우셨고, 며칠 뒤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히 13:12). 구원은 겸손한 왕의 고난을 지나 시온에 이르렀다.&lt;/p&gt;&lt;p&gt;파수꾼들은 하나님께 약속을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이었다. 신약은 그리스도를 그 일을 완전하게 하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므로 그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히 7:25). 로마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하고(롬 8:34), 성령께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한다(롬 8:26). 64장의 공동체가 주를 붙잡는 자가 없다고 고백했다면, 신약의 성도는 자신의 기도가 약해질 때에도 그치지 않는 그리스도의 간구 위에 서 있다. 이 사실은 파수꾼의 직무를 없애지 않고, 교회가 밤낮 기도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62:7의 대담한 명령, 곧 하나님께 쉼을 드리지 말라는 명령도 이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도가 하나님을 끈질기게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미 확증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라고 말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덧붙인다(고후 1:20).&lt;/p&gt;&lt;p&gt;예수는 열두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 산에 가서 기도하며 밤을 새우셨고(눅 6:12), 새벽 아직 어두울 때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다(막 1:35). 겟세마네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과 함께 깨어 있으라고 부탁하셨지만, 제자들은 잠들었다(마 26:38-41). 깨어 있어야 할 이들이 잠든 그 밤에 예수는 홀로 깨어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62장의 파수꾼들이 시온을 위하여 밤낮 잠잠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난의 밤에도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다. 예수는 또 제자들에게 한밤중에 친구의 집 문을 두드려 떡을 구하는 비유를 들려주시며, 그 간청 때문에 친구가 일어나 필요한 만큼 준다고 말씀하셨다(눅 11:5-8). 이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셨다(눅 11:9-10). 하나님께 쉼을 드리지 말라는 62:7의 명령은 예수의 가르침 안에서 하늘 아버지를 향한 자녀의 담대한 간청으로 이어진다. 제자들의 기도가 약할 때에도 예수의 기도가 그들을 붙들었다. 예수는 시몬에게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그를 위하여 기도하였다고 말씀하셨다(눅 22:32).&lt;/p&gt;&lt;p&gt;62:5에서 하나님은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듯 시온을 기뻐하신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신을 신랑으로 소개하신다. 금식에 관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예수는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 혼인 집 손님들이 금식할 수 없다고 대답하셨다(막 2:19-20). 세례 요한도 신부를 취하는 이는 신랑이고 자신은 신랑의 음성을 듣고 크게 기뻐하는 친구라고 말했다(요 3:29). 이사야가 여호와께 돌린 신랑의 기쁨을 복음서는 예수의 오심과 연결한다. 요한계시록 21장은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21:2)고 말하고, 그 성을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21:9)라 부른다. 그 성의 문들에는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쓰여 있다(21:12). 시온에게 주신 혼인의 약속은 지워지지 않고 어린 양 안에서 완성된다. 새 이름의 약속도 이어진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이기는 자에게 새 이름을 새긴 흰 돌을 주시고(계 2:17), 그 위에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그리스도 자신의 새 이름을 기록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계 3:12). 62:2에서 여호와의 입이 정하실 새 이름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이름으로 이어진다.&lt;/p&gt;&lt;p&gt;그리스도는 그 신부를 자기 생명으로 얻으신다. 에베소서 5:25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을 말하고, 이어서 그 교회를 거룩하게 하여 흠 없이 자기 앞에 세우신다고 말한다(엡 5:26-27). 62장에서 시온은 하나님의 결정으로 새 이름을 받았다. 신약은 그 결정이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62:12의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도 같은 빛 아래에서 읽힌다. 베드로전서는 성도가 금이나 은 같은 없어질 것으로 대속된 것이 아니라 흠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되었다고 말한다(벧전 1:18-19). 디도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속량하시고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고 자신을 주셨다고 말한다(딛 2:14). 그리스도는 자신을 내어 주어 백성을 구속하고 거룩하게 하신다. 베드로전서 2:9-10은 편지를 받는 성도들을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 부르며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거룩한 백성의 이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 신자들도 함께 불려 들어온다.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단언한다(롬 11:1-2). 62:12의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선언이다. 그 신실하심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거두어지지 않기에, 이방인 신자도 같은 신실하심을 믿고 기댈 수 있다.&lt;/p&gt;&lt;p&gt;“찾은 바 된 자”라는 이름은 누가 시온을 찾는가를 묻게 한다. UBS 해설이 소개하듯 이 이름은 열방이 예루살렘을 찾아오리라는 약속으로도, 하나님이 그 성을 원하신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복음서는 두 방향을 모두 보여 준다. 예수는 삭개오의 집에서 인자가 온 목적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데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9:10).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고, 찾음을 받은 이들이 하나님께 나아온다. 62:11의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는 소식도 신약에서 이름을 가진 한 분으로 다가온다. 천사는 요셉에게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며,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말했다(마 1:21).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안은 시므온은 자기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고백했다(눅 2:30). 요한계시록 22:12에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라고 말씀하시는 이는 22:16에서 “나 예수”라고 자신을 밝히신다. 이 말은 이사야 40:10과 62:11의 “상급이 그에게 있고”를 떠올리게 한다. 차이도 있다. NET는 이사야의 상급을 하나님이 되찾으신 백성 자신으로 해석한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시는 상이다. 그러나 두 본문 모두 오시는 분이 상을 손에 들고 오신다. 이사야가 여호와께 돌린 그 오심을 요한계시록은 예수의 오심으로 기다린다.&lt;/p&gt;&lt;p&gt;62:1-2에서 시온의 의와 구원은 새벽빛과 횃불처럼 열방과 왕들 앞에 드러났다. 요한계시록 21:22-27에서 새 예루살렘에는 해와 달의 비침이 필요 없고,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며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신다. 만국은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간다. 이사야 60:19가 약속한 영원한 빛이 어린 양에게서 비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 말한다(고전 1:30). 교회가 열방 앞에 보일 의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의다. 62:8-9의 맹세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들린다. 65:23은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라고 약속했고, 바울은 부활을 길게 설명한 뒤 성도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고 결론짓는다(고전 15:58).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이시며(고전 15:20), 수고가 빼앗기거나 사라지지 않는 세계가 그분 안에서 시작되었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파수꾼은 하나님이 이미 하신 약속을 붙들고 이루실 때까지 기도한다(6-7절). 하나님을 재촉하여 그 뜻을 바꾸는 기도가 아니라 그분이 하신 말씀에 의지하는 간구다. 예수도 항상 기도하며 낙심하지 말라고 하시고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이들을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치셨다(눅 18:1, 7). 응답이 더뎌 보일 때도 성도는 약속하신 하나님께 아뢸 수 있다.&lt;/p&gt;&lt;p&gt;이 기도에는 탄식이 있다. 64:11-12의 공동체는 성전이 불타고 황폐해진 현실을 아뢰며 하나님께 아직도 잠잠하시겠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64:8에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라고 고백한다. 고통을 숨기고 밝은 말만 해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탄식하는 사람은 아버지께서 여전히 자기 백성을 들으시기를 구한다.&lt;/p&gt;&lt;p&gt;“버림 받은 자”와 “황무지”라는 이름에는 백성이 겪은 역사와 자신을 바라보던 시각이 담겼다. 하나님은 그들을 헵시바와 쁄라로 부르시며 기쁨과 보호를 약속하신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실패와 수치로 자기와 이웃의 가치를 고정할 수 없다. 거룩한 백성이라는 새 이름은 하나님께 속하여 그분을 섬길 삶을 부른다. 혼인 비유도 지배와 소유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 없다. 에베소서 5:25에서 남편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이다.&lt;/p&gt;&lt;p&gt;8-9절에서 하나님은 일한 사람이 자기 수고의 열매를 누리게 하겠다고 맹세하신다. 이 약속은 임금을 떼거나 권력으로 타인의 소출을 빼앗는 일을 심판한다. 이방인의 포도주 음용 자체를 금하는 말로 읽어 외국인에 대한 적대를 정당화할 수 없다. 문제는 강탈이다. 여호와와 연합한 이방인도 하나님의 집에서 기쁨을 누린다(56:6-7). 타국에서 일하는 사람의 노동과 정당한 몫도 같은 존중을 받아야 한다.&lt;/p&gt;&lt;p&gt;9절의 백성은 자기 소출을 성소 뜰에서 먹고 마시며 하나님을 찬송한다. 정당한 수고의 열매를 누리는 삶과 예배가 이어진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 일을 기억하는 성찬에서도 가난한 사람을 부끄럽게 할 수 없다. 바울은 한 식탁에서 어떤 이는 굶주리고 어떤 이는 취한 고린도 교회를 책망했다(고전 11:20-22).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은 이웃의 몫을 빼앗는 행동과 양립할 수 없다.&lt;/p&gt;&lt;p&gt;11절의 구원 소식은 땅 끝까지 알려지고,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을 땅 끝까지 증인으로 보내신다(행 1:8). 약속을 받은 공동체는 구원의 소식을 자기 안에 가둘 수 없다. 그 증언을 지탱하는 것은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이라는 이름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21/"&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62:1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23/"&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62:3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24/"&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62:4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25/"&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62:5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26/"&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62:6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28/"&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62:8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29/"&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62:9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210/"&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62:10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211/"&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62:11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212/"&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62:12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Isa&amp;amp;chapter=62"&gt;NET Bible, Isaiah 62 번역 노트&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63:1-14 홀로 포도즙틀을 밟으신 이, 환난에 동참하신 이</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63.1-14/</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63.1-14/</guid><description>붉은 옷을 입고 에돔에서 오시는 여호와는 홀로 심판을 행하십니다. 공동체는 출애굽의 은혜와 자신들의 반역을 기억하며 환난에 동참하셨던 하나님을 다시 부릅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시온에 구원이 이르렀다는 62:10-12의 선포 뒤에, 성벽의 파수꾼이 부르는 듯한 질문이 들린다.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63:1).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이 세운 이웃 나라이고 보스라는 그 성읍이다. NET는 여기서 에돔을 여호와를 대적하는 세력의 전형으로 본다. “에돔에서”(מֵאֱדוֹם, 메에돔)와 2절의 “붉으며”(אָדֹם, 아돔)는 같은 어근 자음과 비슷한 소리로 이어진다. 옷을 붉게 물들인 것이 무엇인지는 3절에서 밝혀진다.&lt;/p&gt;&lt;p&gt;다가오는 이는 화려한 옷을 입고 큰 능력으로 나아온다. “걷는”으로 옮긴 צֹעֶה(초에)는 본래 “몸을 굽히다”라는 뜻이어서, NET는 마지막 자음 하나를 고쳐 “행진하다”로 읽는다. 그는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라고 자신을 밝힌다. 이사야 후반부에서 공의와 구원은 약속대로 백성을 건지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행동을 가리키며 자주 짝을 이룬다(46:13; 51:5). 이 용사는 자신의 진노와 원수 갚는 날과 구속할 해를 말씀하시는 여호와이시다.&lt;/p&gt;&lt;p&gt;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처럼 붉은 이유를 묻자(2절), 여호와는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라고 답하신다. 민족들 가운데 함께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선혈”(נִצְחָם, 니츠함)은 본래 “그들의 즙”이라는 뜻으로 포도즙틀 비유를 이어 가지만, 실제로 옷을 물들인 것은 짓밟힌 자들의 피다. NET는 에돔을 앞세운 민족들을 진노의 대상으로 보고, 이 장면을 전쟁의 살육에 관한 비유로 풀이한다.&lt;/p&gt;&lt;p&gt;3절의 “더럽혔음이니”(אֶגְאָלְתִּי, 에그알티)는 다음 절의 “구속”과 뜻은 다르지만 어근 자음이 같아 소리가 서로 울린다. 여호와는 “원수 갚는 날”과 “내가 구속할 해”가 왔다고 말씀하신다(4절). 하나님의 보복은 시온의 송사를 바로잡는 신원이다(34:8). “구속할 해”의 גְּאוּלַי(게울라이)는 복수 추상명사 “나의 구속”으로 보거나 수동분사 복수형 “내가 구속한 이들”로 읽을 수 있으며, 개역개정은 앞의 뜻을 따른다. 구속자는 친족의 땅을 되찾고 억울하게 흘린 피를 갚는 가까운 친척이었다(민 35:19-27; 신 19:6-12). NET는 원수 갚는 날과 짝을 이루는 이 문맥에서 피를 갚는 친족의 역할을 강조한다. 여호와는 백성을 되찾으시면서 그들을 짓밟은 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신다.&lt;/p&gt;&lt;p&gt;5절에서 여호와는 돕거나 붙들어 줄 자가 없어 놀라셨고, 자신의 팔로 구원하시며 자신의 분노를 의지하셨다고 말씀하신다. NET는 중재자가 없어 자기 팔로 구원하신 59:16과 연결한다. 6절의 “취하게 하고”는 진노의 잔을 마시게 하는 그림으로, 시온을 억압한 자들이 자기 피에 취하고 예루살렘의 분노의 잔을 넘겨받는 49:26과 51:22-23에 이어진다. 3절에서 옷에 튄 “선혈”이 6절에서는 땅에 쏟아진다. BHS는 6절 끝에 닫힌 단락 표시인 세투마를 두어 심판 장면을 닫는다.&lt;/p&gt;&lt;p&gt;7절부터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표하는 화자가 여호와의 옛 은혜를 회고한다. UBS 해설은 이 “나”를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예언자로 보고, 여기서 공동체의 탄식이 시작된다고 설명한다. “말하며”(אַזְכִּיר, 아즈키르)는 “기억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여호와의 자비들”(חַסְדֵי, 하스데)로 시작한 절은 “그의 많은 자비”(חֲסָדָיו, 하사다브)로 끝나고, 그 사이에 “우리에게 베푸신”,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이라는 말이 교차하여 언약의 신실한 사랑과 행적이 절 전체를 감싼다. “그의 사랑을 따라”는 그분의 긍휼을 뜻하며, 큰 은총은 백성의 공로가 아닌 그 긍휼과 자비에서 나온다.&lt;/p&gt;&lt;p&gt;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나의 백성”,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부르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셨다(8절). 여기서 “거짓을 행하다”는 언약의 신의를 저버림을 가리킨다. 자녀들이 신의를 지키리라는 하나님의 기대와 뒤의 반역이 맞선다. 에돔에서 오시는 구원의 용사는 옛적에 이스라엘을 건지신 구원자시다. 공동체는 그 은혜를 근거로 현재의 고통을 아뢴다.&lt;/p&gt;&lt;p&gt;9절의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에는 본문 판독의 차이가 있다. BHS 본문에 적힌 לֹא(로)는 “아니다”라는 부정어지만, 마소라 난외의 케레는 소리가 같은 לוֹ(로), 곧 “그에게”다. NET는 케레를 따라 “그들의 모든 환난에 그에게도 환난이 있었다”로 옮기며, 개역개정의 “동참하사”도 이 뜻을 따른다. “자기 앞의 사자”(וּמַלְאַךְ פָּנָיו, 우말아크 파나브)는 “그의 얼굴의 사자”로, NET는 출애굽기 14:19의 사자와 33:14-15의 하나님의 얼굴에 연결하고 10-11절의 성령, 14절의 여호와의 영과 같은 분을 가리킬 수 있다고 본다.&lt;/p&gt;&lt;p&gt;9절에서 개역개정이 두 번 “구원하다”로 옮긴 동사는 서로 다르다. 뒤의 “그들을 구원하시고”는 “그가 친히 그들을 구속하셨다”(הוּא גְאָלָם, 후 게알람)로, 4절의 “구속할 해”와 같은 어근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로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백성을 드시고 안으셨다. 이 동작은 먼 광야 길에서 백성을 들어 올려 짊어지고 가시는 모습이다.&lt;/p&gt;&lt;p&gt;그러나 백성은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했다(10절). “근심하게 하다”는 상처를 주어 마음 아프게 한다는 말이다. “그의 거룩한 영”이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이 장 10-11절과 시편 51:11(BHS 51:13)에만 나온다. 백성을 친히 구속하신 하나님이 이제 그들의 대적이 되어 친히 싸우셨다.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용사의 팔이 반역한 자기 백성도 향한다. 공동체는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자신들이 받은 심판도 고백한다.&lt;/p&gt;&lt;p&gt;11절의 “기억하다”(וַיִּזְכֹּר, 바이즈코르)는 3인칭 단수 “그가 기억하였다”로 시작하지만, 뒤의 “옛적 날들”, “모세”, “그의 백성”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읽기가 달라진다. 개역개정과 NET는 백성을 주어로 옮긴다. 백성은 모세 시대를 기억하며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 그들 가운데 성령을 두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두 번 묻는다. 개역개정의 “이제”는 히브리어에 따로 없지만 현재의 탄식을 살린다. “양 떼의 목자”는 히브리어에서 복수형으로, 모세와 아론처럼 백성을 이끈 지도자들을 가리킬 수 있다. 시편 77:20(BHS 77:21)도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양 떼처럼 인도하신 하나님을 노래한다.&lt;/p&gt;&lt;p&gt;12-13절은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시고 물을 가르시며 깊음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행동으로 11절의 물음을 이어 간다. 개역개정은 13절 끝에 “이제 어디 계시냐”를 보충해 이 연결을 살렸다. 바다를 가른 힘은 모세를 이끈 하나님의 영광의 팔에서 나왔고, 백성은 깊은 바다를 들판의 말처럼 넘어지지 않고 건넜다. 그 구원으로 하나님은 영원한 이름을 얻으셨다.&lt;/p&gt;&lt;p&gt;14절에서 여호와의 영은 가축이 골짜기의 풀밭으로 내려가듯 백성을 쉬게 하신다. 이는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는 출애굽기 33:14의 약속을 떠올리게 한다. 회고는 “주께서 이와 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라는 직접 고백으로 바뀌며, 12절의 “영원한 이름”과 14절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출애굽 회고를 감싼다. 이 고백에서 15절 이후 아버지와 구속자를 부르는 간구가 시작되어 64장 끝까지 이어진다. 개역개정 64:1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는 BHS 63:19 후반부이며, 개역개정 64:2-12는 BHS 64:1-11에 해당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이사야 63:1-14는 60-62장이 그리는 시온의 회복과, 그 회복을 아직 보지 못한 공동체의 탄식이 만나는 자리에 있다. 62장은 시온이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불릴 날을 약속하며 끝나고(62:12), 63:1-6은 그 구속을 가로막던 원수들을 여호와께서 홀로 심판하신 장면을 보여 준다. 이어지는 63:7-64:12는 옛 은혜와 반역을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다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기를 구하는 기도다. 원수가 성소를 유린했고(63:18) 거룩한 성읍들은 광야가 되었다(개역개정 64:10, BHS 64:9). 공동체는 약속과 현실 사이의 긴장을 덮지 않고,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호소한다.&lt;/p&gt;&lt;p&gt;59:15-21은 63:1-6을 미리 보여 준다.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신 여호와는 자기 팔로 구원을 베푸시고(59:16), 공의를 갑옷으로, 보복을 속옷으로, 열심을 겉옷으로 입으신다(59:17). 그 전투의 옷이 63장에서 피로 물든 의복으로 나타나고, 63:5는 59:16의 표현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한다. 59:20은 구속자가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고 말한다. 구속은 혈통만으로 정해지지 않으며, 63:10에서도 하나님은 반역한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셨다. 59:21은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대대로 떠나지 않을 언약을 약속한다. 63:11의 백성은 옛적 그들 가운데 두신 거룩한 영을 기억하고, 59:21은 그 영이 다시는 떠나지 않을 미래를 바라본다.&lt;/p&gt;&lt;p&gt;34:5-8은 이미 에돔과 보스라를 심판의 자리로 그리며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라”(34:8)고 말한다. 날과 해를 짝지은 이 표현은 61:2의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 63:4의 “원수 갚는 날”과 “구속할 해”로 이어진다. 세 본문 모두에서 하나님의 보복은 짓밟힌 시온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일과 묶여 있다. 62:11의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는 40:10을 되풀이한다. 위로의 소식과 함께 오시던 여호와가 63장에서는 에돔에서 오시는 모습으로 나타난다.&lt;/p&gt;&lt;p&gt;63장의 4절 ‘구속할 해’, 9절 ‘그들을 구원하시고’, 16절 ‘우리의 구속자’는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 이사야 후반부는 여호와를 자주 이스라엘의 구속자로 부른다(54:8; 60:16). 레위기 25장과 룻기에서 구속자는 가난해진 친족의 기업과 삶을 되찾아 주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하나님께서 이 칭호를 취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자기 가족으로 여기신다는 뜻이다. 54:8이 잠시의 진노와 영원한 자비를 대조하듯, 63장도 하나님께서 반역한 백성의 대적이 되신 일(63:10)을 숨기지 않으면서 그분을 ‘우리의 구속자’로 부른다(63:16). 하나님의 진노가 구속자와 백성의 관계를 끝내지 못한다는 믿음이 이 기도를 지탱한다.&lt;/p&gt;&lt;p&gt;51:9-10에서 백성은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라고 부르짖으며, 바다를 말리고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분을 기억한다. 출애굽 때 바다를 가르신 팔이 지금 다시 일어나기를 구하는 63:11-13의 기도와 닮았다. 만민을 심판하는 그 팔은 섬들이 의지할 피난처도 된다(51:5). 51:17에서 예루살렘이 마신 분노의 잔을 하나님은 51:22-23에서 거두어 압제자들의 손에 두신다. 49:26은 압제자들이 자기 피에 취하고, 그 결과 모든 육체가 여호와를 구원자와 구속자로 알리라고 말한다. 63:6에서 민족들을 ‘취하게’ 하신 일은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 장면이다.&lt;/p&gt;&lt;p&gt;63:9-14의 회고는 출애굽기를 따라간다.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는 뒤로 옮겨 가 백성을 지켰고, 백성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걸었다(출 14:19, 22). 하나님은 독수리 날개로 백성을 업어 인도하셨다고 상기시키시며(19:4) 그들을 ‘내 소유’로 부르셨다(19:5-6). 63:9의 “드시며 안으셨으나”와 63:8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가 이 기억과 부름을 담는다. 금송아지 사건 뒤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던 하나님은 모세의 간구에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33:14). 63:14의 “편히 쉬게 하셨도다”는 그 약속을 고백한다. 반역 이후에도 함께 가기로 하신 하나님이 계셨기에, 63:10에서 반역을 고백한 공동체가 다시 호소할 수 있다.&lt;/p&gt;&lt;p&gt;신명기 32장에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야곱을 호위하시고 독수리가 새끼를 업듯 인도하셨지만(32:10-12), 그 백성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렸고 노래는 그들을 진실하지 못한 자녀라 탄식한다(32:15-20). 63:8의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에 대한 기대가 이 탄식과 맞물린다. 시편 78:40도 광야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슬프시게 한 일을 묻는다. 63:10의 ‘반역하여’와 ‘근심하게 하였으므로’는 이 오래된 고백의 언어를 잇는다. 7절이 자비로 시작하고 자비로 끝나므로, 뒤따르는 반역의 기억은 하나님의 헤세드에 둘러싸여 고백된다. 그래서 공동체는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개역개정 64:9, BHS 64:8)라고 아뢸 수 있다.&lt;/p&gt;&lt;p&gt;이사야는 출애굽을 지나간 추억으로 두지 않는다. 43:16-19에서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신 하나님은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라고 하신다. 43장은 옛 일을 넘어서는 새 일을 바라보게 하고, 63장은 옛 일을 근거로 새 일을 구한다. 40:11에서 양 떼를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는 목자, 52:12에서 백성의 앞에서 행하고 뒤에서 호위하시는 하나님은 63:11-14가 기억하는 출애굽의 하나님과 같다. 공동체가 출애굽을 기억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다시 행하시기를 구하기 때문이다.&lt;/p&gt;&lt;p&gt;63:10-11은 반역 때문에 근심하시는 ‘그의 거룩한 영’을, 63:14는 백성을 쉬게 하신 ‘여호와의 영’을 말한다. 이사야는 앞에서 하나님의 영이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왕 위에 머물고(11:2), 택하신 종과 기름 부음 받은 이에게 임하며(42:1; 61:1), 자손에게 부어지리라고 약속했다(44:3). 출애굽 때 백성 가운데 계셨고 반역으로 근심하신 그 영이 장차 다시 부어져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59:21). 백성은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기를 구하며 기도를 맺고, 신약은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증언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원수가 성소를 유린하고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된 시대에(63:18; 개역개정 64:10-11, BHS 64:9-10) 이 본문은 두 가지를 말한다. 시온을 괴롭힌 세력을 하나님이 그냥 두지 않으신다는 약속과, 출애굽의 은혜와 자신들의 반역을 기억하며 “이제 어디 계시냐”고 묻는 기도다. 민족들 가운데 여호와와 함께할 사람은 없었고(63:3, 5), 구원받은 백성 자신이 반역하여 구원자를 대적으로 만들었다(63:10). 원수를 심판하는 것만으로는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반역한 백성도 심판 아래 놓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백성의 죄를 다루면서도 백성을 버리지 않는 구원을 기다리게 하고, 신약은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구원을 증언한다.&lt;/p&gt;&lt;p&gt;요한계시록 19:11-16은 63:1-6의 장면을 그리스도께 돌린다. 백마를 탄 이는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고,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린다(19:13).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고, 옷과 다리에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이름이 있다(19:15-16). 이사야에서 돕는 자 없이 홀로 포도즙틀을 밟으신 여호와의 자리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둔다. 그 옷은 전투가 묘사되기 전부터 피에 젖어 있고 그의 무기는 입에서 나오는 검이다(19:15, 21). 14:19-20도 땅의 포도를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져 “성 밖에서” 밟는 장면으로 같은 심상을 잇는다. 마지막 심판의 권한은 그리스도께 있으며, 그 심판은 공의와 진실을 따라 행해진다.&lt;/p&gt;&lt;p&gt;이사야 63:3, 6의 피는 여호와께 짓밟힌 민족들의 피다. 요한계시록 19:13의 피 뿌린 옷도 심판하러 오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에 속하며, 본문은 그 피가 누구의 피인지 밝히지 않는다. 진노의 잔은 이사야의 심판과 예수의 고난을 잇는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마시던 분노의 잔을 압제자들에게 넘기셨지만(51:17-23; 63:6), 겟세마네에서 예수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그 잔을 받으셨다(막 14:36). 마지막 날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실 분이 먼저 진노의 잔을 스스로 마시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은 그 심판의 날을 두려움만으로 기다리지 않는다.&lt;/p&gt;&lt;p&gt;59:16과 63:5에서 하나님은 중재자도, 붙들어 줄 자도 찾지 못하셨다. 신약은 그 빈자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채우셨다고 증언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는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한 분이다(딤전 2:5). 그분의 길도 홀로 가는 길이어서, 체포되시던 밤 제자들은 다 그를 버리고 도망했다(막 14:50).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는 53:1의 물음을 요한복음 12:38은 예수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 적용한다. 홀로 구원하시고 모세의 오른손을 이끄신 그 팔이(63:5, 12) 고난받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다.&lt;/p&gt;&lt;p&gt;예수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장을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 응하였다고 선언하셨다. 누가가 기록한 인용은 61:1-2 전반부에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58:6의 구절을 결합한 것이다. 낭독은 ‘주의 은혜의 해’에서 끝나고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은 그 자리에서 선포되지 않았다. 34:8, 61:2, 63:4가 짝지은 보복의 날과 구속의 해 가운데, 예수의 첫 오심은 은혜의 해를 여는 일이었다. 보복의 날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요한계시록 19장은 그 날을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둔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며 은혜를 선포하시는 때이므로, 교회는 심판의 칼을 들지 않고 은혜의 해를 전하며 심판을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 맡긴다.&lt;/p&gt;&lt;p&gt;63:9은 하나님이 백성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셨다고 고백한다. 애굽에서 하나님은 백성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들으며 그 근심을 아셨다(출 3:7). 하나님의 아들은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시고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며,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실 수 있다(히 2:14-18). 광야에서 얼굴의 사자와 거룩한 영으로 백성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 예수라는 이름은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을 알린다(마 1:21). 63:8의 구원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백성을 원수의 손에서뿐 아니라 그들 자신의 죄에서 구원하신다. 63:10이 드러낸 반역의 문제가 여기서 다루어진다.&lt;/p&gt;&lt;p&gt;바울은 조상들이 바다 가운데로 지나고 광야에서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다고 말하며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덧붙인다(고전 10:1-4).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대부분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그 일은 말세를 만난 교회를 깨우치려고 기록되었다(10:5, 11). 이사야 63장처럼 바울도 출애굽의 은혜와 반역을 한 이야기로 읽는다.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출 33:14)고 약속하시고 영으로 백성을 쉬게 하신 하나님은(63:14), 그리스도 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직접 쉼을 주신다(마 11:28).&lt;/p&gt;&lt;p&gt;백성은 양 떼의 목자들을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어디 계시냐고 물었다(63:11). 그 목자들은 연약했고 모세조차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신 34:4). 예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이시다(요 10:11). 히브리서 13:20은 영원한 언약의 피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을 말한다. 목자들을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하나님이 큰 목자를 죽음에서 이끌어 내셨으므로, 홍해의 기억은 부활의 소망으로 이어진다.&lt;/p&gt;&lt;p&gt;“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63:10)는 에베소서 4:30에서 교회를 향한 경고로 다시 들린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그 영은 높아지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받아 부어 주신 영이다(행 2:33). 바울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로 더러운 말과 악독과 노함과 비방을 들고(엡 4:29, 31),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신 것같이 서로 용서하라고 권한다(4:32). 이사야의 공동체가 반역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했듯이, 교회도 성령을 근심하게 한 죄를 고백하고 받은 용서에 기대어 서로를 용서한다.&lt;/p&gt;&lt;p&gt;홀로 포도즙틀을 밟으신 여호와의 모습은 마지막 날 공의로 심판하실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고, 백성의 환난에 동참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사람이 되어 고난받으시고 진노의 잔을 마신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다. 반역한 백성의 대적이 되셨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백성의 죄를 짊어지셨으므로,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은 마지막 심판을 그분의 공의가 완성되는 날로 기다린다. 63:16의 ‘우리의 구속자’라는 고백은 피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신 어린양을 향한 찬송으로 이어진다(계 5:9).&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하나님은 짓밟힌 이들의 억울함을 잊지 않으시며 정하신 날에 바로잡으신다. 그 심판은 하나님 “홀로” 행하시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고, 원수가 주리면 먹이며 선으로 악을 이긴다(롬 12:17-21). 하나님이 악을 심판하신다는 약속은 개인의 보복을 허용하지 않는다.&lt;/p&gt;&lt;p&gt;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59:15-16)께 보복을 맡기는 사람은 불의를 외면할 수 없다. 피해자에게 서둘러 용서를 요구하며 가해를 덮는 일은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 악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는다는 사실은 피해를 가볍게 여기거나 가해자의 책임을 없애는 근거가 될 수 없다.&lt;/p&gt;&lt;p&gt;에돔을 오늘의 특정 민족이나 정치적 반대자와 동일시하여 미움을 정당화할 수 없다. 10절에서 하나님은 반역한 자기 백성의 대적도 되셨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고백한 반역은 교회도 돌아보아야 할 죄다. 바울은 같은 경고를 교회에 적용하며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권한다(엡 4:30; 고전 10:11). 교회는 원수를 향한 심판만 구할 수 없고 자기 죄도 고백해야 한다.&lt;/p&gt;&lt;p&gt;공동체는 옛 출애굽을 기억하며 “이제 어디 계시냐”고 묻는다. 15절 이후에는 자비와 사랑이 그쳤다고 호소하면서도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우리의 구속자”라 부른다(63:16). 탄식은 그 관계 안에서 드리는 기도다.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사람도 현재의 고통과 응답의 부재를 숨김없이 아뢸 수 있다.&lt;/p&gt;&lt;p&gt;그리스도는 먼저 진노의 잔을 받으시고 구원의 길을 여셨으며, 다시 오셔서 공의로 심판하신다. 교회는 그분의 은혜를 선포하며 죄에서 돌이키라는 부름을 듣고 전한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이들도 성령을 근심하게 할 수 있으므로, 악독과 비방을 버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신 대로 서로 용서해야 한다(엡 4:30-32). 구원의 은혜는 반역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Isa&amp;amp;chapter=63"&gt;NET Bible, 이사야 63장 번역문과 주 1-26.&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37/"&gt;Graham S. Ogden,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2011), 이사야 63:7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Luk&amp;amp;chapter=4"&gt;NET Bible, 누가복음 4장 주 71.&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biblehub.com/hebrew/1350.htm"&gt;Brown-Driver-Briggs, גָּאַל 항목의 이사야 63:4 גְּאוּלַי 논의. Bible Hub 수록 원문.&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63:15-64:12 원하건대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소서: 폐허에서 드리는 공동체의 탄원</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63.15-64.12/</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63.15-64.12/</guid><description>성전이 불탄 폐허 속에서 백성이 하나님을 아버지와 구속자로 부르며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고,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기를 간구하는 이사야 63:15-64:12를 절의 흐름에 따라 풀이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63:7-14에서 출애굽 때의 자비와 인도를 회상하던 공동체는 15절에서 간구로 들어선다.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UBS 번역 핸드북을 쓴 Graham S. Ogden과 Jan Sterk는 이 첫 호소를 탄식 기도의 시작으로 보고 시편 80:14의 같은 간구와 견주며, “처소”가 하늘과 나란히 놓여 하나님의 높은 거처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영화로운”은 12절의 “영광의 팔”과 14절의 “이름을 영화롭게”에 쓰인 말이다. 백성을 인도하며 드러내신 영광이 이제는 먼 하늘에만 머무는 듯하다.&lt;/p&gt;&lt;p&gt;“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어디’는 11절에서 모세 시대의 하나님을 두고 두 번 물었던 말인데, 15절에서는 하나님께 직접 묻는다. 열성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전적인 헌신을, 능하신 행동은 그 헌신을 이루는 힘을 가리킨다. 개역개정의 “간곡한 자비와 사랑”(הֲמוֹן מֵעֶיךָ וְרַחֲמֶיךָ, 하몬 메에카 베라하메카)은 문자대로 ‘주의 속이 끓어오르는 소리와 주의 긍휼’로, 감정이 배 속에서 일어난다고 여긴 표현에서 나온 깊은 연민의 관용구다. 7절에서 찬송의 근거였던 그 긍휼이 이제 “내게 그쳤나이다”(הִתְאַפָּקוּ, 히트아파쿠). 이 동사는 감정이나 행동을 억누르고 참는다는 뜻이며, 기도의 마지막 64:12에서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תִתְאַפַּק, 티트아파크)로 다시 나온다. UBS 해설은 이 반복이 63:15-64:12 전체를 감싼다고 보고 번역에서도 두 곳에 같은 동사를 쓰라고 권한다. 개역개정은 두 곳을 달리 옮겨 이 연결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단수 “내게” 뒤에 16절부터 ‘우리’가 이어져, 한 사람의 탄식과 공동체의 탄식이 겹친다.&lt;/p&gt;&lt;p&gt;16절은 그 물음의 근거를 밝힌다. 공동체는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고 이 절에서 두 번, 64:8에서 한 번 더 고백한다. 그 사이에서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곧 조상 야곱이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51:2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생각하라고 하셨지만, 폐허 속의 후손은 조상의 이름에서 도움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공동체는 혈통보다 오래된 관계에 기댄다. 절 끝(גֹּאֲלֵנוּ מֵעוֹלָם שְׁמֶךָ, 고알레누 메올람 셰메카)은 글자대로 ‘우리의 구속자, 옛적부터 주의 이름’이며, 개역개정은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로 옮겼다. 구속자는 가난해져 땅을 판 친족을 위해 그 땅을 무르는 가까운 친족이다(레 25:25). 62:12는 회복된 백성을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부를 날을 약속했고, 그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자리에서 그들은 이 이름을 부른다.&lt;/p&gt;&lt;p&gt;17절의 질문은 대담하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떠나게 하시며”는 문자적으로 ‘헤매게 하십니까’이고, “완고하게 하사”는 출애굽기에서 바로의 마음이 굳어진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UBS 해설은 구약이 하나님을 재난까지 포함한 모든 일의 근원으로 보면서도 사람의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굳게 하시고 바로도 스스로 마음을 굳게 한 출애굽기와 견준다. 또 이 긴장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고 인정하며 번역에서 질문의 힘을 약화시키지 말라고 권한다. 같은 공동체가 64:5-7에서 자기 죄를 자백하므로, 이 질문을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교리 진술로 읽을 수는 없다.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면 돌아설 힘조차 없다는 절박한 탄식이다.&lt;/p&gt;&lt;p&gt;그래서 질문은 곧 간구로 바뀐다.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주의 길에서 떠났다고 고백한 백성은 자신들이 돌아오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먼저 돌아오시기를 구한다. 그 근거로 공로가 아니라 ‘주의 종들’, ‘주의 기업’이라는 소속을 내세운다. 18절은 약속의 땅을 누린 시간이 ‘잠깐’이었다고 탄식하며, 62:12에서 약속된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름과 원수가 성소를 “유린한” 현실을 맞세운다. “유린하였사오니”는 63:6에서 여호와께서 만민을 “밟았으며”라고 하실 때와 어근이 같다. 원수를 밟으시는 환상을 들은 백성이 지금은 원수에게 밟힌 성소를 본다. 19절 전반부는 히브리어로 ‘우리는 옛적부터 주께서 다스리지 않으신 자들, 주의 이름이 그들 위에 불리지 않은 자들이 되었다’이다. 개역개정은 히브리어에 없는 ‘같이’를 두 번 넣었는데, 문맥상 그런 자들과 다름없이 되었다는 탄식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주의 이름이 그들 위에 불리지 않았다’(לֹא־נִקְרָא שִׁמְךָ עֲלֵיהֶם, 로 니크라 시므카 알레헴)는 소유 관계를 부정하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주인의 이름을 잃은 사람들처럼 되었다고 고백한다.&lt;/p&gt;&lt;p&gt;이 대목에서 장절 구분이 달라진다. 개역개정 64:1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63:19의 후반부이고, 개역개정 64:2-12는 히브리어 64:1-11에 해당한다. 아래 장절은 개역개정을 따른다. 64:1의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לוּא־קָרַעְתָּ שָׁמַיִם יָרַדְתָּ, 루 카라타 샤마임 야라드타)는 간절한 소원을 나타내는 말로 시작한다. “가르고”는 르우벤이 요셉을 잃고 옷을 찢을 때처럼(창 37:29) 세게 찢는 동작이다. UBS 해설은 이 간구를 하늘이라는 휘장 뒤에 계신 하나님께 그 휘장을 찢고 나오시라고 구하는 시적 표현으로 설명하고, 하나님께서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는 시편 18:9와 144:5보다 훨씬 격렬하다고 지적한다. “강림하시고”는 출애굽기 3:8에서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라고 하실 때의 동사다. 백성은 출애굽 때처럼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건지시기를 구한다.&lt;/p&gt;&lt;p&gt;“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מִפָּנֶיךָ הָרִים נָזֹלּוּ, 미파네카 하림 나졸루)에 대해 NET 노트는 마지막 동사를 ‘진동하다’로 보고, 이 동사가 쓰인 다른 곳은 사사기 5:5뿐이라고 설명한다. 드보라의 노래에서도 여호와께서 싸우러 나오실 때 산들이 진동한다. 같은 자음을 ‘흐르다’로 읽어 산들이 녹아 흘러내린다고 옮기는 영어 번역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견고한 산조차 버티지 못한다. 백성은 불이 섶을 사르고 물을 끓이듯 하나님의 강림이 세상을 뒤흔들어,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고 나라들이 주 앞에서 떨기를 구한다(64:2). 63:12, 14에서 출애굽으로 이름을 영화롭게 하신 일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lt;/p&gt;&lt;p&gt;64:3-4는 간구의 근거를 과거에서 찾는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לֹא נְקַוֶּה, 로 네카웨)은 기본 뜻이 ‘기다리다, 바라다’인 동사여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두려운 일은 백성이 기대하고 계산한 범위를 넘어섰다. 이어서 64:1의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이 회상의 문장으로 되풀이되어, 전에 하신 일을 다시 하시기를 구하는 후렴이 된다. 64:4는 귀와 눈을 차례로 들어,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해 이처럼 일하시는 신은 주 외에 아무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고백한다. 개역개정은 40:31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וְקוֹיֵ, 베코예)에도 ‘앙망하다’를 썼는데, 그곳의 동사는 64:3에서 “생각하지 못한”으로 옮긴 동사와 어근이 같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일이 헛되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만이 기다리는 이를 위해 일하시기 때문이다.&lt;/p&gt;&lt;p&gt;64:5에서 하나님은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אֶת־שָׂשׂ וְעֹשֵׂה צֶדֶק, 에트 사스 베오세 체데크)를 맞아 주신다. “선대하시거늘”의 기본 뜻은 ‘만나다’이며 여기서는 호의로 맞아 주는 뜻이다. 히브리어는 ‘기뻐하는 자와 의를 행하는 자’라는 두 분사이고 개역개정은 이를 하나로 묶었다. UBS 해설은 칠십인역에 첫 분사가 없다고 설명하면서도 히브리어 본문을 유지하기를 권한다. 그런데 다음 구절(הֵן־אַתָּה קָצַפְתָּ וַנֶּחֱטָא, 헨 아타 카차프타 와네헤타)은 히브리어로 ‘보소서, 주께서 진노하셨고 우리는 죄를 지었습니다’이다. 개역개정은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로 순서를 바꾸어 인과를 분명히 했다. UBS 해설은 이 강조 구문을 ‘주께서 진노하셨는데도 우리는 계속 죄를 지었다’로 읽고 ‘그런데도’로 옮기기를 권한다. 이렇게 읽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죄를 낳았다는 뜻이 되지 않는다. 백성은 진노 아래에서도 돌이키지 않았다고 고백한다.&lt;/p&gt;&lt;p&gt;64:5의 마지막 구절(בָּהֶם עוֹלָם וְנִוָּשֵׁעַ, 바헴 올람 베니와셰아)은 이 기도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으로, 글자대로는 ‘그것들 안에 오래(또는 영원히),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받으리라’이다. NET는 이대로는 뜻이 잘 통하지 않는다고 보고 ‘우리가 악하였다’로 고치는 읽기를 소개한 뒤, 히브리어 본문을 유지하면서 마지막 말을 질문으로 옮긴다. 개역개정도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는 질문을 택했다. UBS 해설은 히브리어에 의문 표지가 없고 ‘그것들’이 앞의 ‘주의 길’을 가리킬 수 있으므로 ‘우리가 주의 길에 머물면 구원을 받으리라’로 읽을 수 있다고 제시하며, 본문이 불분명하다는 사실을 각주로 밝히라고 권한다. 질문으로 읽으면 다음 절의 자백으로 이어지는 절망의 탄식이고, 진술로 읽으면 주의 길로 돌아가면 구원이 있다는 희망의 고백이다. 어느 쪽이든 공의를 행하는 자를 맞으시는 하나님과 죄를 지어 온 백성 사이의 거리를 드러낸다.&lt;/p&gt;&lt;p&gt;64:6은 그 거리를 네 그림으로 그린다.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의 ‘부정하다’는 본래 성소에 나아갈 수 없는 제의적 상태를 가리키며, 이사야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6:5)처럼 이 말을 죄의 고백에 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의 “더러운 옷”(וּכְבֶגֶד עִדִּים, 우케베게드 잇딤)을 NET는 문자적으로 ‘월경의 옷’이라고 설명한다. 레위기 15:19, 31의 규정은 성소에 가까이 나아가는 질서를 다루며 몸의 자연스러운 일을 죄로 정하지 않는다. 이사야는 그 정결 규정의 그림을 빌려, 백성이 내세울 만하다고 여긴 의로운 행위들조차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이 비유가 겨누는 대상은 공동체의 죄와 자기 의다. 이어서 백성은 잎사귀처럼 시들고 그 죄악이 바람처럼 그들을 몰아간다. 40:7에서는 여호와의 기운이 풀을 시들게 했고, 여기서는 백성의 죄악이 바람이 되어 마른 잎을 쓸어 간다.&lt;/p&gt;&lt;p&gt;64:7은 기도할 사람조차 없다고 말한다. UBS 해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를 기도와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이 없다는 과장법으로 보고, 63:19의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와 연결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백성 위에 불리지 않고, 백성도 그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스스로 분발하여”는 51:17에서 하나님이 예루살렘에게 “깰지어다 깰지어다”라고 부르신 동사와 어간이 같다. 지금은 그 부름에 응답해 일어나는 사람이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셨기 때문이다. 마지막 동사(וַתְּמוּגֵנוּ, 와테무게누)는 ‘녹이다’라는 뜻이며, 개역개정의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는 히브리어로 ‘우리 죄악의 손에’이다. NET는 이 동사를 ‘주께서 우리를 넘기셨다’로 고쳐 읽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죄에 버려두셨다는 뜻으로 설명한다. UBS 해설은 히브리어 동사가 ‘넘기다’보다 ‘녹다, 쇠약해지다’에 가깝다고 밝히며 ‘우리 죄악의 손아귀에 버려두셨다’는 번역을 제안한다.&lt;/p&gt;&lt;p&gt;64:8은 “그러나 … 이제”로 방향을 바꾼다. 자백 끝에 공동체는 세 번째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라고 말한다. “토기장이”는 문자대로 ‘우리를 빚으시는 이’로, 창세기 2:7에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고 할 때의 동사다. 45:9에서 이 비유는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따지지 말라는 경고였지만, 64:8의 진흙은 따지지 않고 호소한다.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는 손수 만드신 것을 버리지 말아 달라는 간구다. 진흙은 스스로 모양을 바꾸지 못하지만 토기장이는 망가진 그릇을 다시 빚을 수 있다. 공동체는 이 관계를 근거로 다음 절에서 구체적으로 구한다.&lt;/p&gt;&lt;p&gt;64:9의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는 64:5의 “진노하셨사오며”와 같은 동사다. 백성은 하나님의 진노가 정당했음을 인정하면서 그 진노가 지나치지 않기를 구한다.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의 ‘영원히’를 NET는 ‘계속해서’로 옮긴다. 하나님께서 죄를 기억하신다는 말은 죄를 계속 문제 삼아 벌하신다는 뜻이며,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43:25)는 약속이 그 반대편에 있다. “구하오니 보시옵소서”는 63:15의 첫 간구 “굽어 살피시며”와 같은 동사여서, 기도는 처음처럼 다시 보아 달라고 구한다. 그 이유는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이다. 6절에서 “다” 부정하고 “다” 시든다고 고백한 공동체가 8절에서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 9절에서는 “다” 주의 백성이라고 말한다. 같은 ‘우리 다’가 죄의 고백과 소속의 고백을 하나로 묶는다.&lt;/p&gt;&lt;p&gt;64:10-11은 눈앞의 폐허를 하나님께 보여 드린다. 주의 거룩한 성읍들과 시온은 광야가 되었고 예루살렘은 황폐해졌다. 62:4에서 다시는 시온을 “황무지”라 부르지 않겠다고 하신 그 말이 지금 예루살렘을 묘사한다. 10절은 성읍들을 “주의” 거룩한 성읍이라 부르고, 11절은 성전을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라 부른다. 하나님의 것도, 백성이 사랑한 것도 무너졌다. UBS 해설은 이 집을 열왕기하 25:9가 기록한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으로 보고, “아름다운”이 63:12, 14-15의 “영광”, “영화로운”과 같은 말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은 ‘아끼는 것들’이라는 복수 명사로, 성전을 포함한 유다의 소중한 장소 전체를 가리킨다. 63장에서 하나님께 돌린 영광의 말이 불탄 성전을 묘사한다. 백성은 조상들이 찬송하던 자리를 상기시키며 하나님과 맺은 오랜 관계를 근거로 폐허를 돌아보시기를 구한다.&lt;/p&gt;&lt;p&gt;64:12는 “일이 이러하거늘”, 곧 ‘이런 일들을 두고도’ 하나님께서 아직 가만히 계시려 하시느냐는 질문으로 기도를 끝낸다. “가만히 계시려”는 63:15의 “그쳤나이다”와 같은 동사로 기도의 시작과 끝을 잇는다. “잠잠하시고”는 62:1에서 예언자가 시온을 위해 잠잠하지 않겠다고 하고, 62:6에서 성벽 위의 파수꾼들이 주야로 잠잠하지 않게 세워질 때 쓰인 동사다. 62:6-7은 파수꾼들에게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기까지 그분도 쉬지 못하시게 하라고 명했다. 이 기도는 그 명령에 응답하여, 잠잠하지 않던 이들이 하나님께 더 이상 잠잠하지 마시라고 아뢰는 기도다. 마지막 “심한 괴로움”의 ‘심한’은 9절에서 “너무” 분노하지 마시라고 할 때의 말이다. 기도는 답을 듣지 못한 채 질문으로 끝나고, 하나님의 응답은 65장에서 시작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63:7-64:12는 구약의 공동체 탄식 전통 안에 있다. 공동체는 하나님의 과거 행적을 회상하고(63:7-14), 현재의 고통을 호소하며(63:15-19), 하나님의 개입을 구하고(64:1-4), 죄를 자백한 뒤(64:5-7), 관계를 근거로 간구하며 답을 기다린다(64:8-12). 시편 44편은 옛 구원을 회상한 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라고 부르짖고(44:23-24), UBS 해설이 63:15와 견주는 시편 80편도 하늘에서 굽어보시기를 구한다. 이 전통에서 하나님께 “어찌하여”라고 묻는 일은 불신앙이 아니다. 백성은 언약의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리라 믿기에 약속과 현실 사이의 틈을 그분 앞에 내놓는다. 이사야서는 이 기도를 회복 약속(60-62장)과 하나님의 응답(65-66장) 사이에 두어,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때에 백성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 준다.&lt;/p&gt;&lt;p&gt;“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이라는 간구는 이스라엘이 기억하는 하나님의 강림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받는 백성을 건지려고 내려가셨고(출 3:8), 시내산에 불 가운데 강림하실 때 온 산이 크게 진동했다(출 19:18). 드보라의 노래도 여호와 앞에서 산들이 진동했다고 노래하고(삿 5:4-5), 시편 18:9와 144:5는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구한다. 64:3의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두려운 일”은 출애굽과 시내산의 일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성전이 무너진 지금 백성은 가로막힌 하늘을 찢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구한다.&lt;/p&gt;&lt;p&gt;하나님의 이름이 백성 위에 불린다는 표현은 언약의 소속을 가리킨다(신 28:10). 예레미야 14:9의 공동체는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구하고, 다니엘은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아 달라고 기도하며 그 간구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라고 고백한다(단 9:18). 이사야 64:6의 더러운 옷 같은 의와 64:9의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는 다니엘의 기도와 같은 논리를 따른다.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과 긍휼에 기대어 간구한다.&lt;/p&gt;&lt;p&gt;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부르는 일은 구약에서 드물지만 그 뿌리는 출애굽에 있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선언하셨다(출 4:22). 모세는 배은망덕한 백성을 꾸짖으며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고 묻는다(신 32:6). 이 노래에서 나란히 나온 아버지와 지으신 이라는 칭호를 이사야 64:8은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와 “주는 토기장이시니”로 다시 나란히 놓는다. 모세의 책망에 쓰인 칭호가 회개하는 공동체의 간구가 된 것이다. 예레미야 31:9에서도 하나님은 돌아오는 백성의 아버지이시다. 토기장이 비유는 이사야서에서 먼저 교만을 꾸짖는 데 쓰였고(29:16; 45:9), 예레미야 18:4-6에서는 터진 그릇을 다시 빚는 토기장이를 통해 심판의 경고와 다시 빚으실 가능성을 함께 담는다. 64:8의 진흙은 그 토기장이를 탓하지 않고, 자신이 그분의 손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근거로 버리지 말아 달라고 구한다.&lt;/p&gt;&lt;p&gt;64:7의 숨겨진 얼굴은 언약의 경고(신 31:17-18)와 죄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렸다는 59:2의 진단을 받아들인다. 동시에 공동체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54:8)는 약속을 안다. 그래서 64:9에서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라고 구할 수 있다. 하나님은 허물을 도말하고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셨고(43:25), 새 언약도 같은 약속을 담는다(렘 31:34). 레위기 26:40-42는 백성이 자기와 조상의 죄악을 자복하면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시리라고 말한다. 64:9의 공동체는 죄는 기억하지 마시고 언약은 기억해 주시기를 구한다. 솔로몬의 기도(왕상 8:46-50), 느헤미야 9장, 다니엘 9장처럼 이 공동체도 ‘우리’와 조상의 죄를 한데 묶어 고백한다. 다만 솔로몬이 향하라고 했던 성전은 이제 서 있지 않고, 백성은 폐허에서 성전이 없어도 들으시는 하나님께 직접 아뢴다.&lt;/p&gt;&lt;p&gt;64:11의 불탄 성전은 바벨론의 예루살렘 파괴를 떠올리게 한다(왕하 25:9). 시편 74편은 원수들이 주의 성소를 불살랐다고 탄식하고, 예레미야애가는 이방인이 성전의 보물에 손을 댄 일을 슬퍼하며(애 1:10)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5:20)라고 물은 뒤 응답을 기록하지 않은 채 끝난다. 이사야 64:12도 질문으로 끝난다. 이사야서는 이 기도가 드려진 정확한 때를 밝히지 않지만 기도는 성전 파괴의 기억을 안고 있다. 성경은 그런 질문을 지우지 않으며, 이사야서에서는 그 질문 바로 뒤에 하나님의 응답이 이어진다.&lt;/p&gt;&lt;p&gt;65장에서 하나님은 이 탄원에 답하신다.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65:1)는 63:19와 64:7의 이름 탄식을 되받는다. 백성은 하나님이 숨으셨다고 탄식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줄곧 부르셨다고 대답하신다.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65:6)는 64:12의 질문에 대한 답이지만 먼저 패역한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향한다. 63:17에서 백성이 “주의 종들을 위하사”라고 구한 말을 하나님은 65:8에서 “내 종들을 위하여”로 받으신다. 하나님의 응답은 그분을 버린 자들과 그분을 찾는 종들을 구별한다.&lt;/p&gt;&lt;p&gt;하늘을 가르고 오시라는 간구에 하나님은 무너진 것을 옛 모습대로 되돌리는 일보다 큰 응답을 약속하신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전 환난이 기억되지 않고(65:16-17), 황폐한 예루살렘은 우는 소리가 없는 즐거운 성이 되며(65:18-19), 하나님은 부르기 전에 응답하신다(65:24). 하나님은 자신이 사람이 지은 집에 갇히지 않으시며 통회하는 사람을 돌보신다고 하시고(66:1-2), 아버지를 부른 백성을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하듯 위로하신다(66:13). 이 흐름에서 백성 가운데 그 일을 이룰 사람은 없었다. 하나님은 중재자가 없어 자기 팔로 구원하시고(59:16; 63:5),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리라고 약속하신다(59:20). 이사야서는 그 구속자가 어떻게 오실지 다 밝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백성의 죄와 폐허를 해결하시리라는 기대를 남긴다. 신약은 그 기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증언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이 탄원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한계를 정직하게 드러낸다. 조상은 후손을 알아보지 못하고(63:16), 백성의 의로운 행위는 더러운 옷 같으며(64:6), 주의 이름을 부르고 일어나 주를 붙잡는 사람이 없고(64:7), 성전은 불탔다(64:11). 하나님 편에서도 중재자가 없어 자기 팔로 구원하신다(59:16; 63:5). 백성 가운데 중재할 사람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오셔야 한다.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소서”라는 간구는 이 필요를 가장 날카롭게 표현한다.&lt;/p&gt;&lt;p&gt;마가복음 1:10에서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신다. 마태와 누가는 “하늘이 열리고”라고 쓰지만 마가는 찢어지고 갈라지는 동작의 동사를 쓴다. 마가가 이사야 64:1을 인용한다고 밝히지 않으므로 인용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하늘이 갈라지고 하나님의 영이 내려오는 장면은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라는 간구와, 백성 가운데 성령을 두신 63:11, 14의 회상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는 소리가 난다. 백성이 아버지를 불렀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보내심으로 답하신다. 예수는 곧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다(1:15).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다고 탄식한 백성(63:19)에게 그 다스림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이다. 차이도 분명하다. 이사야의 공동체는 불과 진동 속의 강림을 구했지만, 마가복음에서 하늘은 회개의 세례를 받으러 나온 무리 가운데 선 한 사람 위로 열린다. 마가는 같은 동사를 십자가 장면에서 한 번 더 쓴다. 예수께서 숨지실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지고(15:38), 이방인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5:39)라고 고백한다. 원수들과 나라들이 주의 이름을 알기를 구한 64:2에 비추어 보면, 한 이방인이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는 일은 불과 진동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일어난다.&lt;/p&gt;&lt;p&gt;64:6은 사람의 의로운 행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율법에서 난 자기 의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얻고자 하며(빌 3:9),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고 말한다(고후 5:21). 바울이 이사야 64:6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두 본문은 같은 문제를 다룬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죄인의 더러움을 대신 짊어지신 아들을 통해 공동체의 호소에 답하신다. 이 은혜는 공의를 행하라는 부름을 없애지 않는다.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맞아 주시는 사람, 곧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는다(64:5).&lt;/p&gt;&lt;p&gt;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르며 그 이름과 나라와 죄 사함을 구하라고 가르치셨다(마 6:9-12). 그 기도의 뼈대는 63:15-64:9의 탄원과 겹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은 신자들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시고(롬 8:15), 반역으로 근심하셨던 성령(63:10)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부름도 이어진다(엡 4:30). 교회는 이스라엘의 기도를 대신 차지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 기도에 참여하여 같은 아버지를 부른다. 깨어 주를 붙잡는 사람이 없다는 64:7의 자리에는, 제자들이 잠든 겟세마네에서 “아빠 아버지여”라고 기도하신 예수가 서 계신다(막 14:36-37). 얼굴을 숨기셨다는 백성의 탄식처럼 예수는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15:34).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탄식은 십자가에서 탄식하신 아들의 기도 안에서 아버지께 올라간다.&lt;/p&gt;&lt;p&gt;죄를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라는 64:9의 간구는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는 새 언약(렘 31:34)과 맞닿는다. 히브리서 10:17-18은 이 약속을 인용하여 죄를 사하셨으므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다고 결론짓고,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리신 몸의 제사가 그 약속을 이루었다고 설명한다(10:10-14). 불탄 성전 앞에서 제사의 자리를 잃은 이사야의 공동체가 드린 기도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제사로 응답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면서도 정죄의 두려움에 갇히지 않는다(롬 8:1).&lt;/p&gt;&lt;p&gt;불탄 성전 앞의 탄식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예수의 말씀과 이어지며, 요한은 그것이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킨 말씀이라고 설명한다(요 2:19-21).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시는 자리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새로 세워지고, 히브리서는 그의 육체인 휘장 가운데로 열린 새로운 살 길을 말한다(히 10:19-20). 사람이 지은 집에 갇히지 않으시는 하나님은(사 66:1) 성령으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며,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 이 연결이 불탄 성전을 두고 흘린 이스라엘의 눈물을 가볍게 만들지는 않는다. 예수께서도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다(눅 19:41).&lt;/p&gt;&lt;p&gt;바울은 고린도전서 2:9에서 “기록된 바”라는 말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사야 64:4와 가깝지만 글자 그대로의 인용은 아니다. 이사야는 ‘자기를 기다리는 자’를, 바울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말한다. 바울에게 그 감추어졌던 일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나고 성령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지혜다(2:2, 7-10). 진흙과 토기장이의 고백도 신약에서 이어진다.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신자는 깨지기 쉬우나 그 안에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담기고(고후 4:6-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5:17). 이사야 65:17의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고, 토기장이께서는 진흙을 버리지 않으시고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로 지으신다(엡 2:10).&lt;/p&gt;&lt;p&gt;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이 탄원이 끝나지는 않았다. 교회는 여전히 폐허와 불의와 고난 속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고, 하늘로부터 친히 강림하실 주를 기다린다(살전 4:16). 요한계시록 21:1-4는 이사야 65:17을 이어 새 하늘과 새 땅, 사람들과 함께 있는 하나님의 장막,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며, 성경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로 끝난다.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소서”라는 이사야의 부르짖음은 한 번 오셨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기도로 이어진다. 교회는 이미 오신 아들 때문에 소망을 품고, 아직 오지 않은 완성을 기다리며 탄식한다(롬 8:22-23).&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이 본문은 “어디 있나이까”, “어찌하여”,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라고 묻는 기도를 성경 안에 담았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정직하게 묻는 것도 기도다. 이 공동체는 질문만 쏟아 놓지 않았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구속자이시며 토기장이이심을 기억하고, 과거의 일을 회상하며, 죄를 자백한 뒤 구할 것을 분명히 말했다. 정직한 탄식과 신뢰의 고백이 한 기도 안에 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고난당한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데 쓰일 수 없다. 폭력이나 부당한 대우를 겪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토기장이시니 그냥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64:8을 거꾸로 쓰는 일이다. 토기장이를 고백한 공동체는 바로 다음 절에서 보아 달라고 외쳤고 마지막에는 아직도 잠잠하시냐고 항의했다. 교회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욥의 친구들처럼 성급히 이유를 설명하기보다 함께 탄식하며 그 형편을 하나님 앞에 아뢴다.&lt;/p&gt;&lt;p&gt;64:5-7의 자백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말한다. 교회 안의 부패나 상처를 두고 지도자 한 사람만 문제 삼고 침묵하거나 방조한 공동체의 책임은 묻지 않는다면 이 자백에 미치지 못한다. 고백은 말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고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는 일이다(58:6-7). 교회의 잘못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공동체는 피해자의 말을 먼저 듣고 사실을 밝히며 회복과 재발 방지의 책임을 져야 한다. 피해자에게 서둘러 용서를 요구하는 일은 이 본문의 자백과 거리가 멀다.&lt;/p&gt;&lt;p&gt;“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는 출석 인원과 헌금과 봉사 시간, 오랜 신앙 경력과 직분을 하나님 앞에 내세우려는 자기 의를 경계하게 한다. 그렇다고 선한 일을 그만두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를 맞아 주시며(64:5), 신자는 선한 일을 자랑의 근거가 아니라 받은 은혜의 응답으로 행한다. 이 구절을 가르칠 때 ‘월경의 옷’이라는 원문의 그림을 여성의 몸이나 월경을 부끄러운 것으로 만드는 데 쓰면 본문이 겨누지 않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비유의 대상은 공동체의 죄와 자기 의다.&lt;/p&gt;&lt;p&gt;“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라는 고백은 오래 끊지 못한 중독이나 반복되는 분노, 깊은 우울 앞에서 스스로를 고칠 힘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출발점이 된다. 64:7은 그런 상태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64:8은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다는 데서 다시 시작한다. 이 고백은 체념이 아니다. 진흙은 토기장이를 부르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며, 그 호소는 정직한 기도와 믿을 만한 공동체 앞의 고백, 필요한 상담과 치료로 이어질 수 있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는 고백이 아버지에게 상처 입은 사람에게는 쉽게 들리지 않을 수 있다. 이 본문의 아버지는 속이 끓어오르는 긍휼을 지니시고(63:15), 조상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자녀를 알아보시며(63:16), 손수 지은 것을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고(64:8), 같은 하나님이 어머니처럼 위로하신다(66:13). 교회는 사람의 아버지 경험을 그대로 하나님께 옮기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lt;/p&gt;&lt;p&gt;64:2에서 백성은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기를 구하며 원수를 다루는 일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특정 집단이나 민족을 향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쓸 수 없다. 이방인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본 자리는 십자가였다(막 15:39). 교회도 자기를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말과 섬김으로 증언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한다(마 5:44). 하나님은 자기를 기다리는 자를 위해 일하신다(64:4). 응답이 오기 전에도 하나님을 부르기를 멈추지 않은 이 공동체처럼, 교회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억눌린 자를 풀어 주며 무너진 곳을 보수하는 일(58:6-12)로 그 기다림을 산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Isa&amp;amp;chapter=64"&gt;NET Bible, Isaiah 64 번역 노트&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315/"&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andbook Series), 63:15&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317/"&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andbook Series), 63:17&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4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andbook Series), 64:1&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45/"&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andbook Series), 64:5&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47/"&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andbook Series), 64:7&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41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andbook Series), 64:11&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이사야 65:1-16 내가 여기 있노라: 손을 펴신 하나님과 갈라지는 두 길</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65.1-16/</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isa/65.1-16/</guid><description>64장의 탄원에 하나님이 ‘내가 여기 있노라’로 답하시며, 우상 제의에 빠진 패역한 백성과 하나님을 찾는 종들의 운명을 갈라 말씀하시는 이사야 65:1-16을 절의 흐름에 따라 풀이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이사야 65장은 63:7-64:12의 탄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백성은 주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하나님이 잠잠하시다고 호소했다. BHS는 개역개정 64:1을 63:19 후반에 두므로 개역개정 64:7, 12는 BHS 64:6, 11에 해당한다. 65장부터 절 번호가 다시 같다. 1절의 “물음을 받았으며”, “찾아냄이 되었으며”는 수동형이다. NET는 하나님이 구하지 않던 이들에게 자신을 구하고 찾을 수 있게 하셨다는 뜻으로 풀이한다.&lt;/p&gt;&lt;p&gt;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핸드북도 하나님이 언제든 찾음을 받으실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읽는다.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일은 그분께 헌신하는 삶을 뜻한다(51:1; 58:2). 그들은 구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내가 여기 있노라”(הִנֵּנִי, 힌네니)를 두 번 말씀하셨다. 58:9에서 부르짖는 자에게 하실 응답을, 여기서는 부르지 않는 자에게 먼저 하신다.&lt;/p&gt;&lt;p&gt;“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는 흔히 이방인을 뜻하는 “나라”라는 말 때문에 이방으로 읽을 수 있지만, UBS는 문맥상 패역한 유다 백성을 가리킨다고 본다. BHS의 “부르다”(קֹרָא, 코라)는 수동 푸알 모음이므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않은 나라”로도 옮길 수 있다. 개역개정과 UBS의 능동 번역은 64:7의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고백을 되받고, 수동 번역은 63:19의 주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다는 탄식과 통한다. 탄원의 말을 돌려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점은 같다.&lt;/p&gt;&lt;p&gt;하나님은 “종일 손을 펴서” 패역한 백성을 부르셨다(2절). 사람이 하나님께 간구할 때 쓰는 몸짓이 여기서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몸짓이 된다(왕상 8:22 비교). 그러나 그들은 자기 생각을 따라 좋지 않은 길을 걷는다. 55:7의 길과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라는 부름에 응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64:8) 내미신 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lt;/p&gt;&lt;p&gt;3-4절은 그 거역을 구체적으로 고발한다. 동산에서 제사하고 벽돌 위에서 분향하며, 무덤과 은밀한 곳에서 밤을 지낸다. NET는 무덤의 행위를 지하의 신이나 죽은 영을 섬기는 제의로 추정하며, “은밀한 처소”를 동굴이나 밤새 경계하는 행위로 읽는 견해, 자음을 고쳐 바위 절벽으로 읽는 제안도 소개한다. 돼지고기와 가증한 음식도 금지된 제의의 일부다. “국”에 대해 NET는 본문의 적힌 형태(וּפְרַק, 우페라크)가 조각을 뜻하고 여백의 읽기인 케레가 국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개역개정은 케레를 따른다. 이 행위들은 57:5-7의 우상 제의를 잇는다.&lt;/p&gt;&lt;p&gt;그런데 이들은 다른 사람을 밀어내며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라”고 한다(5절). 해당 표현(כִּי קְדַשְׁתִּיךָ, 키 케다슈티카)의 접미사를 개역개정은 비교로 풀었다. UBS는 자신의 거룩함이 다가오는 이에게 옮아 위험하게 한다는 읽기도 소개한다. 금지된 제의에 참여하면서 특별한 거룩을 내세우는 이들은 하나님께 코를 자극하는 연기와 같다. 하나님이 “종일” 손을 펴는 동안 이들도 “종일” 그분의 진노를 일으킨다.&lt;/p&gt;&lt;p&gt;“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לֹא אֶחֱשֶׂה, 로 에헤세)는 64:12의 침묵에 대한 질문에 답한다(6절). BHS 65:6은 신 점, 64:11은 쉰 점을 쓰지만 같은 “잠잠하다” 동사다. 하나님 앞에 기록된 죄에 반드시 보응하신다. 옷자락의 “품”에 갚는 그림은 그들의 행위에 맞는 몫을 돌려준다는 뜻이다. 7절의 조상과 자손의 죄는 함께 헤아려진다. “먼저”는 “이전의”로 읽어 조상 때부터의 행위를 가리킬 수도 있다. 침묵을 깨신 하나님은 공동체 내부의 우상 숭배부터 심판하신다.&lt;/p&gt;&lt;p&gt;8절에서 포도송이에 즙이 있으면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비유로 보존을 약속하신다. “상하지 말라”와 “다 멸하지 아니하고”는 같은 동사다. “주의 종들을 위하사” 돌아오시라는 탄원(63:17)에 하나님은 “내 종들을 위하여” 남겨 두겠다고 응답하신다. 이들은 백성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다.&lt;/p&gt;&lt;p&gt;하나님은 야곱에게 후손을 내고 그 종들에게 산들을 기업으로 주신다(9절). 이는 의뢰하는 자가 땅과 거룩한 산을 얻는다는 57:13의 약속이다. 10절의 사론은 서쪽 연안 평야, 아골 골짜기는 동쪽 여리고 근처로 온 땅의 회복을 나타낸다. 아간의 심판이 기억된 아골, 곧 괴로움의 골짜기도 목축지가 된다.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찾다”는 1절에서 “물음을 받았으며”로 옮긴 동사와 같다. 먼저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께 이들은 응답했다.&lt;/p&gt;&lt;p&gt;반대편에는 여호와와 성산을 버리고 갓과 므니에게 상과 술을 바치는 자들이 있다(11절). NET는 두 신을 행운과 운명으로 옮긴다. 12절의 “칼에 붙일” 동사는 므니와 비슷한 소리여서, 운명을 보장받으려던 자들의 운명을 실제로 정하시는 분이 여호와라는 역설을 이룬다. 하나님이 부르고 말씀하셔도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택한” 종들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택한” 자들이 같은 어근으로 대조된다.&lt;/p&gt;&lt;p&gt;13-14절은 종들과 거역한 자들의 결말을 네 번 대비한다. 종들은 먹고 마시고 기뻐 노래하지만 대적은 주리고 목마르고 수치를 당하며 통곡한다. 신들에게 차린 상이 그들을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 55:2의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한 수고가 생각나는 장면이다. 이는 유다와 이방 전체의 대립이 아니라 같은 공동체 안에서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과 거절한 사람의 갈림이다.&lt;/p&gt;&lt;p&gt;15절의 “저줏거리”는 본래 맹세라는 말로, 저주할 때 패역한 자의 이름을 넣어 “저들처럼 되라”고 말하는 뜻이다. NET는 예레미야 29:22를 예로 든다. “너희”에서 단수 “너”로 바뀌는 말도 그 저주 문구의 형태일 수 있다. 개역개정은 원문의 “주 여호와께서 너를 죽이시리라”, “그의 종들”을 말씀의 화자에 맞추어 “내가 너를 죽이고”, “내 종들”로 옮긴다. 종들에게는 62:2를 잇는 다른 이름이 주어진다.&lt;/p&gt;&lt;p&gt;종들은 “진리의 하나님”으로 복을 빌고 맹세한다(16절). “아멘의 하나님”(בֵּאלֹהֵי אָמֵן, 벨로헤 아멘)은 말씀을 확실히 이루시는 신실한 하나님이다. 48:1의 거짓된 맹세와 대조된다. 성산을 잊은 자들과 달리 종들의 환난은 잊힌다. 64:7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이 숨겨졌으나 이제는 환난이 그 눈앞에서 숨겨진다. 이 회복은 17절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진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63:7-64:12의 탄원에 하나님은 백성이 사용한 말로 응답하신다.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고백에는 65:1, 침묵에 대한 질문에는 6절, 종들을 위해 돌아오시라는 간구에는 8절, 얼굴을 숨기셨다는 탄식에는 16절이 답한다. 그러나 탄원자들의 “우리”를 한꺼번에 구원하겠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 종들과 버린 자들을 구별하신다.&lt;/p&gt;&lt;p&gt;이사야 1장의 거역한 자녀와 남겨 두신 생존자, 여호와를 버린 자와 동산의 제의(1:2, 9, 27-29)가 65장에서 다시 나타난다. 신명기 32:15-21도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에게 제사한 여수룬을 고발하며 백성이 아닌 자로 시기하게 하겠다고 한다. 바울은 로마서 10:19-21에서 이 노래와 이사야 65:1-2를 이어 인용한다.&lt;/p&gt;&lt;p&gt;엘리야가 홀로 남았다고 여길 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기셨다(왕상 19:18). 말라기 3:14-18도 섬김을 헛되게 여기는 자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구별하고 그들을 기억하는 책을 말한다. 이사야 65:6에는 죄의 기록이, 말라기에는 경외하는 자의 기록이 있다. 하나님은 집단의 이름 아래 개인의 응답을 묻지 않고 지나가지 않으신다.&lt;/p&gt;&lt;p&gt;이사야 50:2와 59:1-2은 구원이 더딘 원인이 하나님의 무능이 아닌 백성의 죄에 있다고 밝힌다. 58:9에서는 부르짖음에 “내가 여기 있다”고 답하시고, 65:24에서는 부르기 전에도 응답하신다. 불러도 듣지 않았다는 65:12의 고발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끊어진 응답을 드러낸다. 이어질 새 창조에서는 그 대화가 온전히 회복된다.&lt;/p&gt;&lt;p&gt;52:13-53:12의 종은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고 씨를 본다. 그 뒤 54:17의 “종들”이 기업을 받으며, 65:8-9도 종들과 씨를 말한다. 이들은 고난받는 종의 열매로 읽을 수 있다. 이사야 56:6은 이방인도 하나님께 연합하여 종이 된다고 한다. 6:13과 10:20-22의 남은 자, 59:20의 죄과를 떠나는 야곱의 자손도 이 보존의 배경이다.&lt;/p&gt;&lt;p&gt;아골은 아간의 죄와 심판이 기억되는 곳이다(수 7:26). 호세아 2:15은 이를 소망의 문으로 바꾸며 백성 아니었던 자를 자기 백성으로 부르겠다고 한다(2:23). 이사야 65:10은 그 골짜기를 하나님을 찾은 백성의 평안한 목축지로 그린다. 심판의 땅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lt;/p&gt;&lt;p&gt;아브라함의 창대해질 이름과 모든 족속의 복(창 12:2-3), 진실하게 여호와로 맹세할 때 나라들이 복을 빈다는 예레미야 4:2은 65:15-16의 이름과 복을 이해할 배경이다. 반대로 거짓 선지자의 이름은 저주의 예가 된다(렘 29:22). 66:2-5, 14, 17은 말씀에 떠는 자들과 동산의 제의를 행하는 자들을 다시 구별하고, 66:18-20은 열방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성산으로 모일 것을 약속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종들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내가 여기 있노라” 하셨다. 그들의 의로움은 스스로 마련한 자격보다 많은 이의 죄를 담당하고 의롭게 하는 종의 사역에 근거한다(53:11-12). 신약은 그 종을 예수로 증언한다(행 8:32-35; 벧전 2:22-25). 임마누엘과 육신이 된 말씀(마 1:23; 요 1:14)은 하나님이 사람 가운데 오셨음을 밝힌다. 예수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고 삭개오를 먼저 이름으로 부르셨다(눅 19:5, 10).&lt;/p&gt;&lt;p&gt;종일 손을 펴신 하나님은 자녀들을 모으려 했으나 그들이 원하지 않았다며 우시는 예수의 모습과 통한다(마 23:37; 눅 19:41-42). 예수는 십자가에서도 범죄자들을 위해 기도하신다(눅 23:34). 이는 이사야 53:12의 종의 중보와 이어지는 사랑이다.&lt;/p&gt;&lt;p&gt;로마서 10:20-21에서 바울은 이사야 65:1을 하나님을 찾지 않던 이방인에게, 2절을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적용한다. UBS가 읽는 이사야 1절의 원래 대상은 패역한 백성이지만, 바울은 먼저 자신을 알리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미친 사건을 이 말씀에서 읽는다. 그는 누구든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선포한다(롬 10:12-13). 곧이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았고 은혜로 택한 남은 자가 있다고 한다(11:1, 5). 이방 신자에게는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본다(11:17-26). 이 인용을 유대 민족 전체의 배제로 사용할 수 없다.&lt;/p&gt;&lt;p&gt;“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는 거짓 거룩과 달리, 참으로 거룩하신 대제사장(히 7:26)은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어 깨끗하게 하신다(막 1:40-42). 죄인들이 가까이 와도 물리치지 않으신다(눅 15:1-2).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남을 멸시하는 태도를 책망하신 비유(눅 18:9-14)는 이사야 65:5의 위선을 비춘다.&lt;/p&gt;&lt;p&gt;갓과 므니에게 차린 식탁과 종들의 식탁은 고린도전서 10:20-22의 경고와 연결된다.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할 수 없다. 이사야 55:1의 값없는 초청처럼 예수는 생명의 떡으로 오셔서 믿는 자를 채우신다(요 6:35). 지금 주린 자의 복과 배부른 자의 화(눅 6:21, 25)는 65:13-14의 뒤바뀜과 통한다. 그 잔치는 동서에서 오는 이들에게도 열린다(마 8:11).&lt;/p&gt;&lt;p&gt;하나님의 종들과 거역한 자들의 갈림은 아들에게 맡기신 마지막 심판에 이른다(요 5:22). 마태복음 25:31-40에서는 주린 이와 목마른 이, 나그네에게 한 행위가 그리스도께 대한 응답을 드러낸다. 교회는 그 심판권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고 복음을 증언한다.&lt;/p&gt;&lt;p&gt;저주와 다른 이름 사이에 그리스도의 속량이 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저주를 담당하셨다(갈 3:13).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행 11:26)과 이기는 자가 받을 새 이름(계 2:17; 3:12)은 그에게 속한 삶을 가리킨다. 이사야의 “다른 이름”은 이러한 새 소속을 이해할 배경이다.&lt;/p&gt;&lt;p&gt;“아멘의 하나님”(65:16)은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그리스도(계 3:14)를 떠올리게 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어 교회는 아멘으로 응답한다(고후 1:19-20). 그리스도 안의 새 피조물(5:17)은 새 창조를 기다리며, 요한계시록 21:4의 눈물 없는 세상에서 이전 환난이 끝난다는 약속이 완성된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하나님이 잠잠하시다는 탄원에 본문은 오랫동안 부르고 기다리신 하나님을 밝힌다. 그분의 부재만 호소하면서 이미 들은 말씀을 거절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구하지 않던 자에게도 먼저 다가오신 은혜가 있기에, 하나님을 찾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도 그 부름에 응답할 수 있다.&lt;/p&gt;&lt;p&gt;동산과 무덤의 제의, 갓과 므니의 식탁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에게 안전과 미래를 맡긴 행위다. 신명기 18:10-12도 점술과 초혼을 금한다. 주의 식탁에 참여하면서 다른 영적 권능에게 삶을 맡기는 이중 충성을 이 본문은 고발한다. 미래를 지배하려는 욕망보다 부르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 기울여야 한다.&lt;/p&gt;&lt;p&gt;금지된 제의를 행하며 남보다 거룩하다고 하는 자들의 위선은 신앙 공동체에도 경고가 된다. 하나님의 이름과 종교적 열심이 이웃을 멸시할 자격을 주지 않는다. 앞선 세대가 했다는 이유로 죄를 정당화할 수도 없다. 7절은 대를 이어 같은 죄에 참여하는 책임을 묻는다. 물려받은 잘못을 반복하며 조상에게 책임을 돌리는 대신, 자신의 거역을 인정하고 돌이켜야 한다.&lt;/p&gt;&lt;p&gt;하나님은 종들을 남기시지만 종들과 패역한 자들을 가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포도송이의 비유를 특정 교단이나 민족 전체를 정죄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 없고, 심판의 칼을 사람이 휘두를 권한으로 바꿀 수 없다. 교회는 추수까지 곡식과 가라지를 기다리라는 예수의 말씀(마 13:24-30)을 기억하며 자기 응답을 살핀다.&lt;/p&gt;&lt;p&gt;진리의 하나님으로 복을 빌고 맹세하는 사람은 말과 약속에서도 진실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진실과 공의가 없었던 48:1의 삶을 되풀이하면 그 이름을 욕되게 한다. “옳다” 할 것은 옳다 하라는 예수의 가르침(마 5:37)은 그 신실하심에 어울리는 응답이다. 이전 환난이 잊힌다는 약속도 피해자에게 기억을 지우라는 명령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 환난을 끝내실 때까지 성도는 탄원하며 우는 자와 함께 운다(롬 12:15).&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51/"&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2011), 65:1&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Isa&amp;amp;chapter=65"&gt;NET Bible, Isaiah 65 번역 노트&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biblehub.com/hebrew/7121.htm"&gt;BDB, קרא 항목, 푸알 용례 (Bible Hub 전재)&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biblehub.com/hebrew/2814.htm"&gt;BDB, חשה 항목, 이사야 64:11과 65:6 (Bible Hub 전재)&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isaiah-655/"&gt;Graham S. Ogden and Jan Sterk, A Handbook on Isaiah (UBS Helps for Translators, 2011), 65:5&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아모스 1:1-2:3 나라들의 폭력을 물으시는 여호와</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1.1-2.3/</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1.1-2.3/</guid><description>아모스 1:1-2:3의 열국 심판을 따라 전쟁의 잔혹함, 포로 인도와 관계의 배반, 모든 민족의 책임을 해설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1:1은 이어질 말씀이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라고 먼저 밝힌다. 청중은 여섯 나라의 심판을 듣기 전에 그 말씀의 최종 수신자를 알게 된다. 표제는 이 말씀을 ‘아모스의 말들’이라 부르면서, 그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보았다’고 하여 계시로 받은 말씀임을 밝힌다. 개역개정은 이를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로 옮긴다. 아모스는 유다 드고아의 목자였고, 유다 왕 웃시야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의 시대에 북왕국을 향한 말씀을 받았다. 남쪽의 목자에게 주어진 말씀이 왕과 나라의 행위를 심판한다. “지진 전 이년”은 정확히 두 해를 가리키고, 정관사가 붙은 ‘그 지진’은 청중이 알던 특정한 지진이다. 스가랴 14:5도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해 도망한 일을 회상한다. 이 연대 표지는 예언을 공동체가 오래 기억한 실제 사건에 묶는다.&lt;/p&gt;&lt;p&gt;1:2에서 여호와는 시온에서 “부르짖으시며”(יִשְׁאָג, 이쉬아그) 예루살렘에서 “소리를 내시리니”(יִתֵּן קוֹלוֹ, 이텐 콜로). 같은 동사와 표현이 3:4에서 먹이를 앞둔 사자에게 쓰이고, 3:8은 사자가 부르짖으면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느냐고 물은 뒤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면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고 잇는다. 1:2는 여호와의 말씀을 위협과 임박한 행동을 알리는 사자의 소리로 들려준다. 개역개정이 두 번 ‘마르다’로 옮긴 동사도 히브리어에서는 다르다. 앞의 말(וְאָבְלוּ, 웨아벨루)은 다른 본문에서 흔히 ‘슬퍼하다’로 쓰이고, 뒤의 말(וְיָבֵשׁ, 웨야베쉬)은 물기가 말라 버리는 상태다. 목자의 초장이 애도하듯 시들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는 그림은 목축과 경작을 지탱하는 자연도 그 목소리 앞에서 안전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남쪽 시온에서 나오는 말씀은 북이스라엘과 주변 나라들을 향하며, 어느 나라의 경계도 하나님의 권위를 제한하지 못한다.&lt;/p&gt;&lt;p&gt;1:3부터 반복되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는 각 선언을 하나님의 판결로 제시한다. 이어지는 “서너 가지 죄”는 히브리어로 ‘다메섹의 세 범죄 때문에, 그리고 넷 때문에’(עַל־שְׁלֹשָׁה פִּשְׁעֵי דַמֶּשֶׂק וְעַל־אַרְבָּעָה, 알 셸로샤 피쉬에 다메세크 웨알 아르바아)이며, 개역개정은 두 수를 우리말 관용어로 묶었다. Jan de Waard와 William A. Smalley의 UBS 해설은 셋에서 넷으로 나아가는 표현을 죄가 쌓이고 정도가 더해지는 것으로 설명한다. 실제 고발도 죄를 네 항목씩 세지 않고 대표적인 잔혹 행위 하나를 든다. 셋에 넷이 더해지는 수사는 오래 쌓인 폭력에 여호와께서 이제 책임을 물으신다는 뜻을 전한다.&lt;/p&gt;&lt;p&gt;“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לֹא אֲשִׁיבֶנּוּ, 로 아쉬벤누)는 문자적으로 ‘내가 그것을 돌이키지 않겠다’이며, 히브리어에는 ‘벌’이라는 명사가 없다. 개역개정은 ‘그것’을 “그 벌”로 풀었다. UBS 해설은 이 목적어를 이어질 징벌로 읽는 풀이와 심판의 말씀으로 읽는 풀이를 함께 소개한다. 어느 쪽이든 곧 나오는 불과 파괴의 선언이 그 내용을 채운다. 같은 동사는 1:8의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에서 다시 쓰인다. 여호와는 판결을 되돌리지 않으시고 자기 손을 범죄한 성읍으로 돌리신다.&lt;/p&gt;&lt;p&gt;다메섹의 범죄는 철 타작기로 길르앗을 타작한 일이다(1:3). 개역개정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로 비유임을 밝혔지만, 원문은 비교의 말 없이 ‘그들이 철 타작기들로 길르앗을 타작했다’고 직접 말한다. 타작기는 바닥에 날카로운 것을 박아 곡식 위로 끌던 썰매이며, 곡식을 으깨는 도구의 그림이 사람과 땅을 짓밟은 전쟁의 잔혹함을 드러낸다. 열왕기하 10:32-33도 아람 왕 하사엘이 요단 동쪽 길르앗을 공격했다고 기록한다. 여호와는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겠다고 하신다(1:4). 여호와를 주어로 하는 “불을 보내리니”는 암몬 선언을 제외한 이후의 선언마다 되풀이된다. 여호와는 주민에게 가한 폭력과 왕실이 누리는 안전을 별개의 문제로 두지 않으신다.&lt;/p&gt;&lt;p&gt;1:5의 심판은 성문 빗장의 파괴, 주민과 통치자의 제거, 백성의 추방으로 이어진다. 아웬 골짜기의 주민과 벧에덴의 “규를 잡은 자”가 끊어지므로 백성의 삶과 왕권의 기반이 한 판결 아래 흔들린다. 아람 백성은 “기르에”(קִירָה, 키라) 사로잡혀 간다. 9:7에서 여호와는 아람 사람을 “기르에서”(מִקִּיר, 미키르) 올라오게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같은 지명이 1:5에서는 도착점으로, 9:7에서는 출발점으로 쓰인다. 아람이 기르로 끌려가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자리로 되돌려 보내시는 심판이다.&lt;/p&gt;&lt;p&gt;가사는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다”(1:6). 동사와 어근이 같은 명사가 목적어로 뒤따르며, “모든 사로잡은 자”(גָּלוּת שְׁלֵמָה, 갈루트 셸레마)는 포로 집단을 가리키는 명사와 ‘온전한’이라는 형용사의 결합이다. UBS 해설은 이를 한 민족 전원이 붙잡혔다는 뜻으로 좁히지 않고 포로 무리나 마을 주민이 통째로 끌려간 일로 설명하며, 강조점을 포로에게 가해진 비인간적인 처우에 둔다. 붙잡은 사람들을 다른 이의 처분에 넘기는 것이 포획의 목적이었다. 본문은 거래의 값이나 조건을 말하지 않고, 사람들의 삶과 자유를 집단으로 빼앗아 타인의 손에 넘긴 행동 자체를 고발한다. 심판은 가사에서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과 블레셋의 남은 자들로 넓어진다(1:7-8). 다메섹에 쓰인 ‘주민을 끊고 규를 잡은 자를 끊는다’는 문장이 아스돗과 아스글론에도 다시 쓰여, 서로 다른 나라에 같은 판결이 적용된다. 피해자들은 ‘포로 집단’이라는 말 속에 이름 없이 묶였지만, 심판에서는 가해 공동체의 중심들이 하나씩 이름으로 불린다.&lt;/p&gt;&lt;p&gt;두로도 포로 집단을 에돔에 넘겼고, 여기에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라는 이유가 더해진다(1:9-10). “형제의 계약”(בְּרִית אַחִים, 베리트 아힘)은 지켜야 할 관계에 대한 책임을 나타낸다. 구약에서 기억은 과거의 사실을 아는 데 머물지 않고 약속에 맞게 행동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노아와 방주의 생물을 기억하사 물을 줄이셨고, 모든 생물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여 다시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다(창 8:1; 9:15). 두로의 계약 상대와 체결 시점은 본문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두로가 보호해야 할 관계를 외면하고 사람들을 넘겼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성벽과 궁궐을 삼키는 불은 그 배반으로 유지하던 번영과 안전을 겨냥한다.&lt;/p&gt;&lt;p&gt;에돔은 칼로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고 분을 끝없이 품었다(1:11-12). 한때의 충돌을 넘어 적대를 보존하고 되풀이한 모습이다. 두로 선언에서 지켜야 할 계약의 이름이던 형제가 에돔 선언에서는 칼에 쫓기는 대상이 된다. “긍휼”(רַחֲמָיו, 라하마브)은 ‘태’를 뜻하는 말과 어근이 같아, 에돔이 버린 것은 자기 안에 있어야 할 깊은 연민이었다. 본문은 그 형제의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에서와 야곱이 한 태에서 난 쌍둥이였으므로(창 25:21-26) 청중은 에돔과 이스라엘의 혈연을 떠올리게 된다. 관계가 가깝다는 사실은 가해의 책임을 줄이지 않고 배반의 깊이를 드러낸다. 데만과 보스라의 궁궐을 삼키는 불은 그 분노를 지탱한 권력에도 끝이 있음을 선언한다.&lt;/p&gt;&lt;p&gt;암몬 자손은 자기 지경을 넓히려고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다(1:13). “배를 갈랐음이니라”(בִּקְעָם, 비크암)는 ‘찢어 열다’라는 동사로, 그 목적어는 길르앗의 임신한 여성들이다. “넓히고자 하여”가 그 목적을 밝혀, 희생자의 몸에 가한 폭력과 국가의 팽창이 한 문장 안에서 행위와 목적으로 묶인다. 길르앗은 1:3에서 다메섹에게 짓밟힌 땅이기도 하여, 국경 지대 주민이 거듭 겪은 폭력이 드러난다. 암몬의 심판에서는 되풀이되던 ‘불을 보내다’가 “불을 놓아”(וְהִצַּתִּי, 웨힛차티)로 바뀌어, 여호와께서 랍바 성에 직접 불을 붙이신다(1:14). 전쟁의 외침과 회오리바람의 폭풍이 짝을 이루어 군대의 공격과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재앙이 함께 몰려온다. 백성을 동원하고 영토를 넓히던 왕과 지도자들은 함께 사로잡혀 간다(1:15). 남을 끌어가던 자들이 끌려가는 자리에 선다.&lt;/p&gt;&lt;p&gt;모압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다”(2:1). 이 말(לַשִּׂיד, 라시드)은 ‘석회가 되도록’이라는 뜻이어서, 우리말 ‘재’보다 뼈가 석회처럼 될 만큼 철저하게 태운 정도를 드러낸다. UBS 해설은 이를 유해의 철저한 소각과 모독으로 설명하면서 구체적인 역사 상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고 밝힌다. 피해자가 에돔 왕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앞에서 형제를 해친 가해자로 고발된 나라가 여기서는 모압의 폭력을 당한 피해자로 나온다. 이 고발에는 이스라엘이 피해자로 등장하지 않으므로 여호와의 판결은 이스라엘의 이익을 지키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여호와는 나라들을 고정된 편으로 나누어 한쪽의 피해만 인정하지 않으시며, 자기 유해를 지킬 힘이 없는 죽은 이에게 행해진 모독도 물으신다.&lt;/p&gt;&lt;p&gt;2:2-3에서 모압은 요란함과 외침과 나팔 소리 가운데 죽는다. 세 소리가 겹겹이 쌓여 모압의 죽음을 귀로 듣게 한다. “재판장”(שׁוֹפֵט, 쇼페트)에 대해 UBS 해설은 여기서 나라를 다스리는 인물을 가리키며 정확한 지위는 특정하기 어렵다고 풀이한다. 여호와께서 그와 지도자들을 직접 죽이신다. 여섯 선언을 잇는 불과 궁궐의 파괴는 백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권력의 중심을 친다. 모압 선언 뒤에는 같은 형식이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이어지고(2:4-16), 이스라엘의 죄는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판 일이다(2:6).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이라고 밝힌 표제가 이 전개를 준비했다. 이웃 나라들의 죄를 듣던 청중이 자기 행위의 책임을 묻게 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아모스가 선포하는 여호와의 권위는 이스라엘의 국경에서 멈추지 않는다. 열국의 고발에는 이스라엘의 예배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보다 사람을 짓밟고 넘기며 배반한 일이 제시된다. 이 말씀은 전쟁의 승리나 영토의 크기가 나라의 정당함을 결정한다는 생각을 무너뜨린다. 하나님은 강한 자의 성공에 가려진 피해를 불러내시고 국가가 사람에게 한 일을 물으신다.&lt;/p&gt;&lt;p&gt;창세기 9:5-6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므로 생명을 해친 책임을 묻겠다고 노아와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세워지기 전 인류에게 주어진 이 책임은 특정 나라의 이익에서 생기지 않는다. 모압이 에돔에 저지른 범죄가 고발되는 것도 이 보편적인 책임과 이어진다. 같은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땅에 생명이 번성하도록 복을 주시고 다시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는 언약을 세우신다(9:1-17). 땅을 더 차지하려고 그 땅에서 살아갈 사람을 없앤 암몬의 행위(암 1:13)는 생명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근거는 인간의 가치를 승자와 패자, 동맹과 적대 관계에 따라 바꾸지 못하게 한다.&lt;/p&gt;&lt;p&gt;이스라엘의 구원 이야기도 생명을 해치는 국가의 힘 앞에서 시작한다. 애굽 왕은 이스라엘의 번성을 위협으로 여겨 무거운 노동을 강요하고 남자 아기들을 죽이려 했다(출 1:8-22). 국가가 자기 미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다른 이들의 미래를 빼앗는 일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한 산파들은 생명을 살렸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백성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그들을 건지셨다(3:7-10). 사람을 붙잡아 타인의 처분에 넘기는 세력과 달리, 출애굽의 하나님은 노역 아래 있는 사람을 해방하신다. 아모스 2:10이 출애굽의 은혜를 회상한 뒤 이스라엘의 죄를 묻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구원받은 기억은 힘없는 이를 팔고 억누르는 현재의 행동을 더욱 엄중하게 드러낸다.&lt;/p&gt;&lt;p&gt;율법은 힘을 잃은 사람을 보호하는 규정으로 그 구원을 공동체의 생활에 이어 간다. 신명기 23:15-16은 도망온 종을 돌려주지 말고 그가 선택한 곳에서 살게 하며 압제하지 말라고 한다. 사람들의 무리를 에돔에 넘긴 가사와 두로(암 1:6, 9)와 반대로, 이 규정은 힘을 잃은 사람에게 거주의 자리와 선택을 돌려준다. 레위기 19:33-34는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거류민이었으므로 거류민을 학대하지 말고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하며, 같은 장은 품꾼의 임금과 공정한 재판도 요구한다(19:13-18).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품꾼과 거류민을 대하는 행동도 요구하신다.&lt;/p&gt;&lt;p&gt;신명기 23:7은 에돔 사람을 형제라 부르며 미워하지 말라고 명한다. 친족이라는 기억은 관계를 지킬 책임을 낳는다. 두로의 형제 계약 배반과 에돔의 형제 추격은 각각 약속과 혈연을 배반한 일이며, 아모스는 관계의 이름만 남은 곳에서 실제 행위를 묻는다. 오바댜 1:10-14는 에돔이 예루살렘의 재난을 멀리서 구경하고 기뻐하며 재물에 손을 대고 도망자들을 원수에게 넘긴 일을 고발한다. 두 본문이 같은 사건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형제의 고통을 자기 유익의 기회로 삼은 책임은 이어진다. 폭력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는 생각만으로 방관과 약탈의 책임을 지울 수 없다.&lt;/p&gt;&lt;p&gt;잠언 22:22-23은 약하다는 이유로 탈취하지 말고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고 하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송사를 맡으신다고 말한다. 같은 장 2절은 가난한 자와 부자를 지으신 분이 모두 여호와이시라고 한다. 지혜의 가르침은 일상의 재판과 경제적 탈취를, 예언은 국제 전쟁과 강제 이주를 다루지만, 약함을 이용해 빼앗는 죄는 규모가 달라도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피하지 못한다.&lt;/p&gt;&lt;p&gt;이사야 2:1-4는 아모스 1:2처럼 시온에서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을 말하지만, 여러 민족이 그 말씀을 배우러 모여들고 하나님이 나라들 사이를 판단하신 뒤 무기가 농기구로 바뀌는 미래를 바라본다. 아모스에서 타작 도구는 사람을 짓밟는 전쟁을 묘사했지만, 이사야에서는 칼이 보습이 되어 사람을 먹이는 경작을 돕는다. 이 평화에는 여호와의 가르침과 판결이 있으며,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의 목소리를 지운 상태를 평화로 부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폭력을 심판하시는 목적은 나라들이 그분의 길을 배우고 더는 서로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데 있다.&lt;/p&gt;&lt;p&gt;열국 심판 뒤에 유다와 이스라엘의 고발이 나오는 구성은 이 모든 연결을 청중에게 되돌린다. 출애굽으로 구원받고 율법을 받은 백성도 가난한 사람을 팔고 약자의 길을 굽게 할 수 있다(암 2:4-12). 창조주께 속한 모든 사람의 존엄과 언약 백성에게 주어진 책임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의 잔혹함을 미워하신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자기 공동체의 거래와 관계와 권한 행사도 그분 앞에 내놓아야 한다. 다른 나라를 판단하는 말씀을 듣고 기뻐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돌아보는 일이 언약의 응답이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아모스에서 나라들의 죄를 물으시는 분은 시온에서 말씀하시는 여호와다. 히브리서 1:1-4는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이 마지막 날들에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고 선포한다. 만유의 상속자인 아들을 통해 세계가 지어졌고 그분의 능력의 말씀이 만물을 붙든다. 그리스도의 권위는 한 지역이나 민족의 이해에 묶이지 않는다. 같은 장은 아들의 보좌와 공평한 규를 말하며 그분이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셨다고 밝힌다(1:8-9). 아모스의 ‘규를 잡은 자’들은 자기 나라의 힘을 행사하다 심판받지만, 아들의 통치는 의와 공평에 기초한다. 그 아들은 죄를 정결하게 하신 뒤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죄를 물으시는 하나님의 의와 죄인을 깨끗하게 하시는 사역이 아들의 왕권 안에서 만난다.&lt;/p&gt;&lt;p&gt;예수는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로 이웃 사랑을 가르치신다(눅 10:25-37).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나갔고, 사마리아인은 불쌍히 여겨 상처를 싸매고 돌볼 곳으로 데려가 비용을 부담했다. 사람을 통째로 끌고 가 타인의 처분에 넘긴 아모스의 나라들과 반대되는 돌봄이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웃의 범위를 묻던 율법교사는 누가 피해자의 이웃이 되었는지 답해야 한다. 민족적 경계가 자비를 중단할 이유가 되지 않으며, 종교적 신분이 돌봄을 대신하지 못한다.&lt;/p&gt;&lt;p&gt;같은 장에서 예수는 고라신과 벳새다를 책망하시며, 그곳에서 행한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다면 그들이 벌써 회개했으리라고 하신다(눅 10:13-16). 아모스에서 포로 인도로 고발된 두로가 여기서는 많은 은혜를 접하고도 돌이키지 않는 도시들의 책임을 드러내는 비교 대상이 된다. 말씀과 권능을 가까이 경험한 특권은 더 깊은 회개의 책임을 낳는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다른 나라를 향한 평가보다 말씀을 가까이 들은 공동체에 먼저 다가온다.&lt;/p&gt;&lt;p&gt;마태복음 25:31-46에서 인자는 영광의 보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심판하신다. 아모스가 선포한 열국의 책임은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심판과 이어진다. 굶주리고 나그네 되고 병들고 갇힌 이들을 어떻게 대했는지가 그 앞에서 드러나며, 왕은 지극히 작은 자기 형제에게 한 행동을 자신에게 한 것으로 받으신다. NET 번역 주석은 이 ‘형제’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로 설명한다. 제자를 영접하는 것이 자신을 영접하는 일이라는 마태복음 10:40-42도 복음 때문에 취약해진 제자들과 왕의 연대를 밝힌다. 동시에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고통당하는 이웃에게 자비를 행할 넓은 책임을 가르친다. 교회는 고난받는 제자를 돌보며 다른 이웃의 고통에도 가까이 다가간다.&lt;/p&gt;&lt;p&gt;예수는 집권자들이 사람들을 임의로 지배하는 모습과 달리, 제자들 가운데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그 근거는 인자가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는 데 있다(막 10:42-45). 바로 앞에서 예수는 자신이 넘겨져 능욕과 죽음을 겪고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예고하셨다(10:32-34). 아모스에서 포로가 다른 이의 손에 넘겨지는 고발은 사람의 무력함을 드러냈다. 예수는 폭력의 손에 넘겨지는 고난을 알고도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시며, 그 죽음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으로 설명하신다. 십자가는 죄인의 행위를 폭로하면서 죄인을 구원하는 자기 봉헌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모하는 길을 버린다.&lt;/p&gt;&lt;p&gt;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모두 죄 아래 있어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롬 3:9-20). 이웃 나라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에 이르는 아모스의 흐름처럼, 자기 소속을 근거로 하나님의 판결에서 빠져나갈 길이 사라진다.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의 속량이 선포되고, 하나님은 그분의 피를 통해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며 예수를 믿는 사람을 의롭다 하신다(3:21-26).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면서 이방인의 하나님이시므로 누구도 자기 자랑을 구원의 근거로 세울 수 없다(3:27-30). 모압이 에돔에 행한 범죄까지 다루신 여호와의 보편적인 권위는 그리스도 안에서 민족을 넘어 죄인을 구원하시는 복음과 이어진다.&lt;/p&gt;&lt;p&gt;바울은 아덴에서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신 창조주께서 어디에 있는 사람이든 회개하라고 명하시며, 정하신 사람을 통해 세상을 공의로 심판할 날을 정하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선포한다(행 17:24-31). 예수의 부활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을 증언한다. 제국과 전쟁의 힘 앞에서 잊힌 피해도 그분 앞에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가 심판하시는 분이므로 폭력을 행사한 사람도 회개하라는 부름을 듣는다.&lt;/p&gt;&lt;p&gt;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기다리는 성도에게 로마서 12:17-21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며, 원수가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마시게 하라고 권한다. 아모스에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심판은 신자가 원수에게 같은 폭력을 가해도 된다는 명령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악을 바로잡으신다는 약속에 의지하여 보복을 멈추고, 가해의 책임을 묻고 피해자를 보호하면서도 상대의 인간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은 그리스도께 속한 백성이 심판과 긍휼을 함께 믿는 방식이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다른 나라나 집단의 잔혹한 일을 들을 때 생기는 분노를 자기편이 옳다는 증거로 바꾸기 전에 실제 피해를 살펴야 한다. 여호와는 여러 나라의 행위를 물은 뒤 유다와 이스라엘도 책망하신다. 교회가 전쟁과 억압의 피해자를 위해 기도한다면, 가까운 나라나 같은 신앙의 집단이 가해자로 드러날 때도 같은 태도로 사실을 듣는다. 아모스는 각 나라에 구체적인 행위와 책임을 물었다. 한 사건을 민족 전체의 본성으로 확대하거나 같은 국적과 혈통의 이웃에게 적대감을 옮기는 일은 이 말씀과 어긋난다.&lt;/p&gt;&lt;p&gt;포로 집단을 에돔에 넘긴 죄는 사람을 물품처럼 다루는 거래에 책임을 묻는다. 신분증을 빼앗거나 빚을 이유로 이동을 막고 부당한 노동을 강요하는 일이 오늘의 모습이다. 거래의 중간에 있다는 사실이 사람에게 가해지는 고통과 무관함을 뜻하지 않는다. 값이 싸고 결과가 빠르다는 이유로 누가 그 부담을 떠안았는지 묻지 않는다면, 사람을 타인의 손에 넘긴 나라들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있다. 낯선 땅에 온 사람을 도울 때에도 신명기의 피신한 종처럼 그가 자기 삶의 선택을 되찾도록 돕고, 도움의 대가로 종교 활동을 강요하지 않는다.&lt;/p&gt;&lt;p&gt;암몬을 향한 고발에서 영토 확장이라는 목적은 여성의 몸에 가한 폭력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교회와 가정도 더 큰 목표를 내세워 한 사람의 몸과 안전을 희생시키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피해를 호소한 사람에게 기관의 명예나 가족의 체면을 위해 침묵하라고 요구할 수 없고, 그의 이야기를 모임의 감동을 위한 자료로 써서도 안 된다.&lt;/p&gt;&lt;p&gt;두로가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않았다는 고발은 가까운 관계의 신뢰와 약점을 이용하는 행위를 돌아보게 한다. 에돔이 분노를 끝없이 품었다는 말씀은 과거의 피해를 대대로 물려주며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조상이나 집단 전체의 죄를 떠넘기는 일을 경계하게 한다. 실제 잘못은 기억하고 책임을 묻되 긍휼을 버린 분노가 새로운 피해를 만들지 않게 해야 한다. 모압을 향한 말씀은 적대하던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존엄을 지키라고 한다. 상대의 과거 범죄가 그의 유해와 유가족을 모욕할 권리가 되지 않는다.&lt;/p&gt;&lt;p&gt;불이 궁궐을 삼킨다는 반복은 큰 권한을 가진 사람의 책임을 드러낸다. 조직의 성과 뒤에서 누가 손해를 떠안는지 듣지 않고 높은 자리의 편안함이 다른 이들의 침묵으로 유지된다면,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지도력이 아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공동체는 빨리 용서하라고 요구하기보다 먼저 그의 말을 듣고 보호를 지속하며, 회복이 더디다는 이유로 믿음을 평가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한 피해를 알게 된 사람은 그리스도께 사함을 구하면서 잘못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돌려줄 것을 돌려주며, 상대에게 용서를 재촉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사람은 보복을 멈추고 원수가 주리면 먹이며, 폭력이 멈추고 피해자가 보호받으며 가해자가 돌이키기를 구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13/"&gt;Jan de Waard, 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1:3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16/"&gt;Jan de Waard, 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1:6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21/"&gt;Jan de Waard, 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2:1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23/"&gt;Jan de Waard, 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2:3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Mat&amp;amp;chapter=25&amp;amp;verse=40"&gt;NET Bible, 마태복음 25:40 번역 주석 3, 예수의 형제와 제자들의 관계.&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Amo&amp;amp;chapter=1&amp;amp;verse=13"&gt;NET Bible, 아모스 1:13 연결 형태 분석(칼 부정사) 및 번역 주석 4, 영토 확장과 여성 공격의 문맥.&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아모스 2:4-16 구원받은 백성이 짓밟은 이웃</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2.4-16/</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2.4-16/</guid><description>아모스 2:4-16의 유다와 이스라엘 고발을 따라 율법의 거절, 가난한 이의 착취, 예배와 불의, 은혜를 저버린 책임을 해설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열국을 향하던 고발이 이제 유다와 이스라엘에 이른다. 다메섹부터 모압까지 선언된 형식, 곧 ‘서너 가지 죄’와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가 두 왕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유다는 율법을 받은 백성이고 예루살렘을 가진 나라지만 이웃 나라들을 불사르던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4-5절). 이스라엘을 향한 선언은 훨씬 길어져 경제적 착취와 성적인 잘못, 예배의 타락,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거부한 일을 구체적으로 열거한다(6-12절). 다른 나라에 관한 판결을 듣던 청중이 이제 자기 책임을 묻는 말씀 앞에 선다. 하나님과 특별한 역사를 가졌다는 사실이 지금의 불의를 가리지 못한다.&lt;/p&gt;&lt;p&gt;유다가 심판받는 이유는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이다(4절). ‘멸시하다’는 문자적으로 ‘거절하다’이며, ‘율법’은 하나님이 이 백성에게 주신 가르침 전체를 가리킬 수 있다. 유다의 문제는 가르침을 접하지 못한 데 있지 않았다. 받은 말씀을 배척했다. 앞의 여섯 나라가 학살과 포로 매매, 시신 훼손 같은 잔혹 행위로 고발되었다면, 유다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절한 일로 고발된다. 말씀을 더 분명하게 받은 백성은 그 말씀 앞에서 책임을 진다. 4절 후반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וַיַּתְעוּם כִּזְבֵיהֶם, 바야트움 키즈베헴)는 히브리어로 ‘그들의 거짓들이 그들을 헤매게 했다’이며, 개역개정은 같은 내용을 유다가 미혹되었다는 수동 표현으로 옮겼다. 이 ‘거짓’은 우상을 가리키는 다른 단어들과 구별되어, 대상의 정체보다 하나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거짓이라는 성격을 드러낸다. 조상들이 그 거짓을 따라갔다는 관계절은 이어받은 관행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떠나게 하는 힘으로 작용했음을 보여 준다. 거짓을 전통으로 받았다는 사실이 그 책임을 없애지는 않는다.&lt;/p&gt;&lt;p&gt;이스라엘 고발의 첫 항목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이다(6절). 유다의 고발이 말씀을 거절한 일로 시작했다면 이스라엘의 고발은 사람을 판 일로 시작한다. ‘의인’은 돈 때문에 처분되어서는 안 될 정당한 사람을, ‘가난한 자’는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가리킨다. 은과 신 한 켤레가 두 사람의 처지와 맞대어져 사람의 권리가 재물 때문에 짓밟히는 상황이 드러난다. Jan de Waard와 William A. Smalley의 UBS 해설은 누가 사람을 파는지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이 매매를 뇌물을 받은 재판관의 부패로 읽는 해석과 채권자가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을 종으로 파는 일로 읽는 해석을 검토하여, ‘팔다’를 평범한 뜻으로 유지하며 7절과도 이어지는 후자를 선호한다. 또 의인을 법정의 무죄 판결 대상에만 한정할 필요가 없으며, 사람에게 저지른 이 죄가 하나님께 저지른 죄이기도 하다는 점을 번역에서 드러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 독법에서 신 한 켤레는 사람을 종속시키는 채무가 얼마나 하찮았는지를 부각한다.&lt;/p&gt;&lt;p&gt;7절의 “발로 밟고”(הַשֹּׁאֲפִים, 하쇼아핌)에 대해 NET 해설은 이 동사를 ‘헐떡이다, 갈망하다’라는 어근에서 온 것으로 읽던 전통과 ‘짓밟다’라는 어근에서 온 것으로 읽는 해석을 구별하고, 오늘날 대다수 학자를 따라 후자를 택한다. 같은 해설은 가난한 이를 땅의 흙 속에 밟아 넣는 철저한 멸시의 그림으로 이 줄을 옮길 수 있다고 하며, 이 분사가 6절에서 사람을 판 ‘그들’을 다시 설명한다고 분석한다. 사람을 팔던 이들이 가난한 이를 짓밟는 자들로 다시 묘사되는 셈이다. 이어지는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וְדֶרֶךְ עֲנָוִים יַטּוּ, 베데레크 아나빔 야투)는 정당한 대우를 구하는 사람의 길을 힘 있는 이들이 옆으로 밀어내는 그림이다. 매매로 사람을 종속시키는 경제적 힘과 자기 권리를 주장할 길을 막는 행동이 이어진다. 가난한 사람은 이익을 빼앗길 뿐 아니라 이의를 제기할 자리도 잃는다.&lt;/p&gt;&lt;p&gt;7절 후반은 성적인 잘못을 고발한다. 히브리어는 ‘한 남자와 그의 아버지’가 “한 젊은 여인”(הַנַּעֲרָה, 한나아라)에게 다닌다고 말하며, 이 명사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다. NET는 이를 살려 ‘같은 소녀’로 옮기고 두 남자가 같은 여성에게 간다는 점을 드러낸다. NET 해설은 대다수 해석자가 이 행동을 성적인 잘못으로 읽는다고 설명하면서, 그 여성의 정확한 신분은 불명확하며 이 명사가 창기를 뜻하는 전문어도 아니라고 밝힌다. 그러므로 성전 창기나 여종이라는 특정 신분을 본문에서 확정할 수 없으며, 고발은 남성들의 행동에 집중한다.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를 이끄는 말은 보통 목적을 나타내지만, 개역개정과 NET는 이를 그 행동이 낳는 결과로 옮긴다. 그러면 남성들의 의도보다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이름에 끼친 결과가 강조된다. NET는 여기의 이름이 하나님의 성품과 명예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lt;/p&gt;&lt;p&gt;8절에서는 이웃에게서 취한 물건이 예배의 향락을 떠받친다. 그들은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눕고,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신다. ‘전당 잡은 옷’은 누군가의 곤궁 때문에 맡겨진 물건이며,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는 문자적으로 ‘벌금을 물게 된 사람들의 포도주’다. 7절에서 연약한 이의 길을 ‘굽게 한다’고 할 때 쓴 동사(יַטּוּ, 야투)가 여기서는 몸을 펴 “누우며”에 다시 쓰인다. 다른 사람의 길을 틀어 막은 사람들이 자기 몸은 편히 펼친다. “그들의 신전”(בֵּית אֱלֹהֵיהֶם, 베트 엘로헤헴)은 ‘그들의 하나님의 집’으로도 ‘그들의 신들의 집’으로도 읽을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예배 장소와 옷과 포도주가 함께 등장하여 신앙 고백 뒤에 숨겨진 착취를 생활의 장면으로 보여 준다.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마련한 즐거움은 어디에서 예배하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지지 않는다.&lt;/p&gt;&lt;p&gt;9절에서 말씀은 ‘그들’의 행동을 열거하다가 하나님 자신의 행동으로 방향을 바꾼다. 원문은 ‘내가’를 따로 앞세워 그 일을 행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백향목처럼 크고 상수리나무처럼 강한 아모리 사람을 위의 열매와 아래의 뿌리까지 멸하셨다. 이스라엘이 자기보다 강한 세력 앞에서 땅을 얻은 까닭은 하나님이 행하셨기 때문이다. 10절은 ‘내가’를 다시 앞세워 애굽에서의 구원과 사십 년의 광야 인도를 회고한다. 땅의 정복을 먼저 말하고 출애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순서는 지금 누리는 땅이 누구의 손에서 왔는지를 먼저 상기시킨다. 여기서 말씀은 ‘그들’ 대신 ‘너희를’이라고 이스라엘을 직접 부른다. UBS 해설은 이 전환을 지적하며 번역에서 6절부터 드러낼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 큰 힘 앞에서 구원받은 백성이 이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생존을 위협하며, 은혜의 역사가 현재 행위의 책임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lt;/p&gt;&lt;p&gt;11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들들 가운데 선지자를, 청년들 가운데 나실인을 일으키셨다고 하신다. 땅을 주는 데서 그치지 않으시고 그 땅에서 말씀을 들으며 구별되어 살도록 사람들을 주셨다.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는 수사 질문은 백성 자신을 그 은혜의 증인으로 세운다. 12절은 백성의 응답을 드러낸다. 그들은 나실인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 8절에서 스스로 ‘마시던’ 동사와 달리 여기서는 다른 사람에게 마시게 하는 동사가 쓰여, 스스로 마시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에게도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 선지자에게는 “예언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금지했다. 나실인의 구별된 삶을 훼손하도록 압박한 사람들이 예언자의 말도 통제한다. 그들은 불의를 행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것을 듣고 바로잡을 통로도 막았다.&lt;/p&gt;&lt;p&gt;13절은 하나님의 응답을 “보라”로 시작한다. 개역개정은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 같이 내가 너희를 누르리니”로 옮기지만, ‘누르다’(מֵעִיק, 메이크; תָּעִיק, 타이크)의 뜻에는 논쟁이 있다. NET는 이 절의 정확한 뜻이 불분명하다고 밝히고 ‘누르다’를 택하면서도, 너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다, 수레가 땅을 가르듯 너희를 갈라 놓다, 너희 아래의 땅이 신음하게 하다 등의 제안을 함께 소개한다. 히브리어는 “너희를” 자리에 ‘너희 아래에서’(תַּחְתֵּיכֶם, 타흐테켐)라는 전치사구를 쓰는데, 땅이 신음한다는 제안도 이와 맞닿아 있다. 이 구문은 곧 닥칠 일을 나타내며, 개역개정의 그림에서는 다른 사람을 짓누르던 백성이 이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눌린다.&lt;/p&gt;&lt;p&gt;14-16절은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와 강한 자, 용사와 활을 가진 자, 발이 빠른 자와 말 타는 자, 마음이 굳센 자를 차례로 부른다. 속도와 체력, 무기와 말, 용기가 모두 무력해진다. 14절 첫 줄(וְאָבַד מָנוֹס מִקָּל, 베아바드 마노스 믹칼)은 문자적으로 ‘빠른 자에게서 피할 곳이 사라진다’여서, 사라지는 것은 사람의 다리보다 도망할 자리 자체다.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으며’가 거듭 나와 생존의 길이 막혔음을 강조한다. 가장 용감하던 사람도 그 날에는 벌거벗고 도망한다. 8절에서 남의 옷 위에 눕던 공동체의 용사가 자기 옷도 없이 달아나고, 가난한 사람을 팔고 그 길을 막았던 공동체가 자신을 구할 길마저 잃는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시는지 묻는다. 율법을 멸시한 유다와 가난한 사람을 팔며 선지자의 입을 막은 이스라엘은 서로 다른 죄 목록을 받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만난다. 9-11절의 출애굽과 광야, 땅과 사람의 선물이 그 요구의 출발점이다. 하나님은 종살이에서 건져 자유와 기업을 주시고 그 은혜에 맞게 살도록 가르치셨다. 아모스는 이 은혜의 회고를 이웃을 종속시키는 현재의 고발 바로 뒤에 둔다.&lt;/p&gt;&lt;p&gt;그 요구는 율법의 담보 규정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출애굽기 22:25-27은 가난한 이의 곤궁을 이용하지 말고 전당 잡은 옷을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명한다. 그 옷은 밤에 몸을 가릴 유일한 옷이며, 그가 부르짖으면 자비로운 하나님이 들으시겠다고 하신다. 신명기 24:10-18은 채권자가 채무자의 집에 들어가지 말고 밖에서 전당물을 기다리라 하고, 품꾼의 임금을 제때 주며 과부의 옷을 담보로 잡지 말라고 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이었고 하나님께서 속량하셨기 때문이다. 아모스 2:8에서 그 옷 위에 누운 사람은 채무자가 돌려받아야 할 덮개를 자신의 안락에 쓴다. 제단 곁의 편안함과 가난한 사람의 추위가 같은 옷에 연결되며, 하나님은 두 자리를 모두 보신다.&lt;/p&gt;&lt;p&gt;레위기 19:9-18은 이삭과 남은 열매를 가난한 이에게 남기고, 품꾼의 삯을 미루지 않으며,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하면서 단락마다 ‘나는 여호와이니라’를 되풀이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도 그 가운데 있다. 아모스 2:7은 성적인 잘못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고 선언하고 곧바로 제단 옆의 옷과 포도주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이름을 공경한다는 고백은 몸과 재물과 권한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같은 장 15절은 가난한 자라고 편들지도,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도 말라고 한다. 약한 사람의 약함을 불리한 증거로 삼는 공동체에서는 정의가 작동하지 못한다.&lt;/p&gt;&lt;p&gt;신명기 8:2-18은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시며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우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하고, 땅에서 재물이 늘어날 때 자기 능력으로 얻었다고 말할 위험을 경고한다. 8:19-20은 여호와를 잊으면 이스라엘도 앞서 멸망한 민족들처럼 멸망하리라고 한다. 아모스가 아모리 사람의 큰 힘을 제거하신 하나님을 회고한 뒤 이스라엘 군대의 무너짐을 예고하는 순서와 맞닿는다. 재산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것을 얻고 쓰는 방식도 그분 앞에 내놓아야 한다.&lt;/p&gt;&lt;p&gt;민수기 6:1-8에서 나실인은 서원하여 자신을 여호와께 구별한 기간에 포도주를 멀리하고 머리를 자르지 않으며 시체의 부정을 피한다. 서원 기간이 끝나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6:13-20). 그러므로 아모스의 고발에서 핵심은 하나님께 드린 그 구별을 다른 사람들이 강제로 무너뜨렸다는 데 있다. 나실인은 공동체가 어떤 분께 속했는지를 몸으로 증언했고, 선지자는 들은 말씀을 전했다. 이스라엘은 그 둘을 자기 요구에 맞추게 하여, 불의를 행하면서 그 불의를 비추는 삶과 말씀을 함께 밀어냈다. 감사의 제사와 구원 역사의 암송도 지금 말씀하시고 사람을 세우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일을 대신할 수 없다.&lt;/p&gt;&lt;p&gt;예배 장소를 믿는 거짓 안전은 남왕국 유다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예레미야 7:1-15에서 하나님은 도둑질과 간음과 거짓 맹세를 하면서 성전에 들어와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길과 행위를 바로잡으라고 하신다.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말을 되뇌며 안심하지 말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실로의 심판을 기억하게 하며 유다도 에브라임처럼 쫓겨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아모스가 유다와 이스라엘을 연속하여 고발한 구조처럼, 한 공동체의 실패를 다른 공동체가 관찰하며 자신은 안전하다고 여길 수 없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누가복음 4:16-21에서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를 읽으시고, 성령의 기름부음과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진 복음, 포로와 눌린 사람의 자유를 선포하신 뒤 그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하신다. 아모스의 고발과 이 선포는 억눌린 사람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뜻에서 이어진다. 그 앞에서 예수는 광야의 시험을 받으시며, 사람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신명기 8:3을 붙드시고 세상의 권세를 얻으려 다른 이를 경배하라는 요구를 거절하신다(눅 4:1-13). 구원의 역사를 받고도 재물과 권한을 따라 하나님의 가르침을 버린 아모스의 백성과 달리, 아들은 광야의 이스라엘이 배워야 했던 순종을 몸소 행하신다.&lt;/p&gt;&lt;p&gt;나사렛 사람들은 예수가 시돈의 과부와 수리아의 나아만을 들어 고향의 기대를 넘는 하나님의 긍휼을 말씀하시자 그를 쫓아내려 한다(눅 4:22-30). 선지자를 침묵시키려 한 아모스의 백성처럼, 말씀이 자기 기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말씀하시는 분을 배척한다. 은혜를 듣는 사람에게는 그 은혜를 베푸시는 분의 뜻도 받아들일 책임이 있다.&lt;/p&gt;&lt;p&gt;예수는 세리장이며 부자인 삭개오를 찾아가 그 집에 머무르겠다고 하신다(눅 19:1-10). 사람들은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고 수군거리지만, 예수의 방문은 평판을 보상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고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오시는 데서 시작한다. 삭개오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하며, 예수는 그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언하신다. 이웃에게서 취한 재물로 편히 눕던 아모스의 장면과 달리, 구원이 이른 집에서는 재물을 돌려주는 응답이 나온다. 회개가 종교적 말에 머물지 않고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실제 변화를 가져온다.&lt;/p&gt;&lt;p&gt;선지자의 입을 막은 2:12의 죄 앞에서 교회는 하나님이 지금 누구를 통해 말씀하시는지 묻는다.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고, 그 아들은 죄를 정결하게 하신 뒤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히 1:1-3). 죄를 드러내는 말씀이 공동체의 평판을 해친다는 이유로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주님이 그 죄를 드러내신다.&lt;/p&gt;&lt;p&gt;베드로전서 1:18-21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이 은이나 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아모스에서는 은 때문에 사람이 팔리고 전통의 이름으로 거짓을 따랐다. 복음은 그 헛된 길에서 사람을 건져내는 값비싼 구원을 선포하며, 구원받은 사람의 가치는 그를 위해 피 흘리신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데서 나온다. 같은 문맥은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에게 모든 행실에 거룩하라고 권하고(1:13-17),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신 목적이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는 데 있다고 말한다(2:24). 아모스가 고발한 착취와 성적인 잘못은 그 속죄가 다루는 실제 죄의 영역이다. 자기 힘으로 깨끗한 과거를 만들 수 없는 사람은 죄를 담당하신 주님을 의지하여 진실하게 죄를 인정하고, 사람을 팔고 침묵시키던 삶에서 이웃을 살리는 삶으로 돌아선다.&lt;/p&gt;&lt;p&gt;에베소서 2:1-10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한다. 구원은 은혜의 선물이어서 자랑할 근거가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받은 목적은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는 데 있다. 아모스도 먼저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비추어 백성의 현재 삶을 묻는다. 교회는 도덕적 성과로 구원을 사지 않지만,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하며 이웃을 계속 짓밟는 모순을 방치할 수도 없다.&lt;/p&gt;&lt;p&gt;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고후 8:9). 아모스의 제단 곁에서는 타인의 곤궁이 자기 안락을 위한 자원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따르는 공동체에서는 자기의 넉넉함이 다른 사람의 부족을 채우는 자원이 된다. 바울은 다른 이들은 평안하게 하고 주는 사람은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가진 것에 따라 자원하여 참여하도록 권한다(8:12-15). 그리스도의 자기 내어 주심은 가난한 사람에게 더 큰 부담을 강요하는 말로 쓰일 수 없다.&lt;/p&gt;&lt;p&gt;히브리서 12:22-29는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께 나아온 신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이를 거역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은혜와 경고는 같은 주님의 백성을 향한다. 같은 장은 자신에게 거역한 죄인들의 적대를 참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신 예수를 바라보라고 권한다(12:1-3). 선지자의 목소리를 막고 자기 행위를 보호하려는 인간의 죄는 그리스도의 고난에서도 드러나지만 그분의 순종과 부활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은 사람은 군사력이나 재산이 아니라 중보자께서 여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안전을 두고, 그 관계 안에서 듣고 돌이킨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이웃을 신 한 켤레 때문에 판다는 말씀은 돈과 사람의 삶을 어떻게 비교하고 있는지 묻는다. 돈을 빌려주거나 지원할 때 상대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붙이고, 작은 빚을 이유로 생계와 존엄을 빼앗는다면 이 고발과 같은 자리에 선다. 계약서에 서명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조건이 공정해지지는 않는다. 담보로 잡은 옷을 제단 옆에서 쓰는 장면은 타인의 절박함을 자기 편의에 쓰는 행동이다. 일한 사람의 임금을 미룬 채 기관의 예배와 행사를 먼저 유지하는 공동체도 이 말씀 앞에 선다.&lt;/p&gt;&lt;p&gt;가난한 이의 길을 굽게 한다는 말씀은 약한 사람이 도움과 공정한 판단에 이르는 길을 막는 일을 고발한다. 공동체가 영향력 있는 기부자나 오래된 지인의 말만 먼저 믿고 약한 사람의 말을 충분히 듣지 않는다면, 또 이의를 제기한 사람에게 믿음이나 감사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붙인다면, 그의 길을 굽게 하는 것이다. 레위기 19:15처럼 약한 자라고 편들지도,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도 않고 사실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lt;/p&gt;&lt;p&gt;헌금과 예배로 공동체의 건강을 평가할 때에는 그 재원이 어디서 왔는지도 물어야 한다. 임금을 미루거나 거래 상대를 속여 얻은 이익을 바치면서 하나님을 높였다고 말할 수 없다. 기부금이 크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사업과 행동에 관한 질문을 막지 않는다. 제단 곁의 즐거움이 채무자의 옷과 벌금으로 마련되었다는 장면은 좋은 목적이 수입의 불의를 감추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lt;/p&gt;&lt;p&gt;아버지와 아들을 향한 고발에서 문제로 제시되는 것은 남성들의 행동이다. 본문이 밝히지 않은 여성의 신분을 마음대로 붙여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오늘 성적인 피해를 다룰 때에도 피해자의 옷차림이나 과거를 먼저 문제 삼거나 영향력 있는 남성의 명예를 앞세워서는 안 된다. 아모스는 죄를 드러내는 말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다고 하지 않았다. 남성들의 행위와 이웃을 억누르는 삶이 그 이름을 더럽힌다고 선언했다. 교회의 이름과 지도자의 명성을 지키려고 당사자에게 침묵을 요구하면 고쳐야 할 행동이 그대로 남는다.&lt;/p&gt;&lt;p&gt;나실인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하고 선지자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한 행동은 공동체가 다른 사람의 양심과 불편한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 묻는다. 관행이라는 이유로 거짓 보고를 요구하거나, 재정과 권한과 성적인 잘못을 다루는 말씀을 반복해 피하거나,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동기를 공격하는 일이 그런 모습이다. 조상들이 따르던 거짓을 이어받은 유다처럼, 처음부터 그렇게 해 왔다는 이유로 부당한 관행을 유지할 수도 없다. 출애굽과 광야를 기억하라는 말씀은 교회가 받은 도움을 기억하며 지금 누구의 짐을 덜어 줄지 묻게 하고, 재산과 숫자와 영향력을 잘못을 바로잡지 않아도 버틸 힘으로 여기지 않게 한다. 동시에 이 본문은 북왕국의 심판을 경고하므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그의 죄에 대한 판결을 대신 선고할 근거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 구원받은 사람은 삭개오처럼 자신이 취한 이익과 상대의 손해를 구체적으로 살피고, 돌려줄 것을 돌려주며, 피해자에게 용서를 재촉하지 않는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Amo&amp;amp;chapter=2&amp;amp;verse=7"&gt;NET Bible, 아모스 2:7 번역·해설 주 1-6.&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Amo&amp;amp;chapter=2&amp;amp;verse=13"&gt;NET Bible, 아모스 2:13 번역 주 1.&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26/"&gt;Jan de Waard and 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Helps for Translator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79), 아모스 2:6 해설. TIPs 공개 본문.&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아모스 3:1-15 알아 주신 백성에게 물으시는 책임</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3.1-15/</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3.1-15/</guid><description>아모스 3:1-15의 선택과 책임, 선지자가 말하는 이유, 사마리아의 폭력과 벧엘 제단의 심판을 해설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3장은 “들으라”고 이스라엘 전체를 부른다. 2:12에서 선지자에게 예언하지 말라던 백성이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청중은 애굽에서 이끌어 올리신 “모든 족속”, 곧 출애굽의 은혜를 받은 공동체다. 개역개정은 “인도하여 올리신”이라고 여호와를 3인칭으로 말하지만, 히브리어는 1절 중간부터 “내가 올린”(הֶעֱלֵיתִי, 헤엘레티)이라며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 2:10에서도 쓰인 이 동사는 백성의 현재를 구원의 역사 안에 둔다. 사마리아의 부와 벧엘의 제단을 논하기 전에, 그들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신 분과의 관계를 밝힌다.&lt;/p&gt;&lt;p&gt;2절의 “너희만을 알았나니”(רַק אֶתְכֶם יָדַעְתִּי, 락 에트켐 야다티)는 ‘오직’과 ‘너희를’을 앞세워 강조한다. 하나님이 다른 족속의 존재를 모르셨다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알아주시고 관계를 맺으셨다는 뜻이다. 이어 “그러므로”가 그 관계와 죄의 보응을 잇는다. 선택하셨으므로 죄를 물으신다. 아모스는 은혜를 부정하지 않으며 그 은혜를 배반한 책임을 밝힌다.&lt;/p&gt;&lt;p&gt;“보응하리라”(אֶפְקֹד, 에프코드)는 돌보고 살피며 책임을 묻는 동사다. 여기서는 “너희 모든 죄악”이 목적어이므로 징벌을 뜻한다. 같은 동사가 14절에서 이스라엘의 죄와 벧엘 제단을 향해 다시 나온다. 장의 처음과 끝이 죄를 물으시는 행동으로 연결되고, 그 사이의 질문과 사마리아 고발은 그 판결을 설명한다.&lt;/p&gt;&lt;p&gt;3절의 두 사람이 함께 걷는 질문은 동행에 앞선 조건을 묻는다. “뜻이 같지 않은데”의 נוֹעָדוּ(노아두)는 서로 만나거나 만나기로 정했다는 뜻이다. Jan de Waard와 William A. Smalley의 UBS 해설은 약속과 실제 만남의 요소가 모두 있으며 만남에 더 무게가 있다고 설명한다. 개역개정은 마음의 일치를 드러내지만 원문은 만남이라는 구체적 조건을 묻는다. 뒤의 사자와 덫도 어떤 결과를 일으킨 조건을 따라가게 한다.&lt;/p&gt;&lt;p&gt;4-5절은 먹이가 없는데 사자가 부르짖고, 잡힌 것이 없는데 덫이 튀겠느냐고 묻는다. 3-5절의 다섯 질문은 같은 의문 접두사로 시작한다. 만남에서 사자와 새잡이로 장면이 옮겨가며 위험이 커진다. 4절의 ‘부르짖다’는 8절의 사자 울음에 반복된다. 질문에 답한 청중은 예언의 경고도 까닭 없이 나오는 소리가 아님을 듣게 된다.&lt;/p&gt;&lt;p&gt;6절은 성읍의 경보를 묻는다. “나팔”(שׁוֹפָר, 쇼파르)은 뿔나팔로, 2:2의 모압 전쟁에도 나온다. 나팔이 울리면 백성이 두려워하듯, 여호와가 행하시지 않는데 성읍에 재앙이 임하겠느냐고 묻는다. “재앙”(רָעָה, 라아)은 악한 행위도 나쁜 일도 뜻하지만 여기서는 재난이다. 이 말씀은 2절의 죄를 물으시겠다는 선언에 속한다. 청중이 들을 것은 여호와께서 사마리아의 죄를 다루신다는 경고다.&lt;/p&gt;&lt;p&gt;7절은 여호와께서 “자기의 비밀”(סוֹדוֹ, 소도)을 종 선지자들에게 알리지 않고는 행하지 않으신다고 밝힌다. 이 비밀은 은밀한 의논과 계획, 여기서는 심판의 뜻이다. 8절은 사자가 부르짖으면 누가 두려워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예언하다”는 2:12에서 금지되었던 것과 같은 동사다. 사자의 울음에 두려움이 따르듯 하나님의 말씀에 예언이 따른다. 아모스가 말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셨기 때문이다.&lt;/p&gt;&lt;p&gt;9절에서는 이방 궁궐들에게 사마리아의 억압을 보게 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선포하여”는 1절의 ‘듣다’와 같은 어근으로 ‘듣게 하라’는 뜻이다. 아스돗과 애굽의 궁궐들은 사마리아 산에 모여 성 안의 요란함과 학대를 보아야 한다. 아스돗은 1:8에서 심판을 들었던 블레셋 성읍이다. 1-2장에서 불살라지리라던 열방의 “궁궐”이라는 말이 이제 사마리아의 궁궐에 반복된다. 다른 나라의 죄를 듣던 이스라엘이 그 나라들 앞에서 자기 죄를 드러낸다.&lt;/p&gt;&lt;p&gt;10절의 궁궐에는 “포학과 겁탈”(חָמָס וָשֹׁד, 하마스 바쇼드)이 쌓인다. 저장한 재물과 그것을 얻은 폭력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 재산은 빼앗긴 사람의 고통을 증언한다. 그들은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른다”. 2절에서 하나님이 백성을 “알았다”는 것과 같은 동사가 부정으로 되풀이된다. 하나님께 알려진 백성이 그분이 원하시는 바른 행위를 모른다. 11절의 “그러므로”는 판결을 이끈다. 여성 단수로 불린 사마리아는 힘을 잃고 궁궐은 약탈당한다. 개역개정은 대적을 주어로 삼지만 히브리어는 궁궐이 약탈당하는 수동문이다. 겁탈을 쌓던 궁궐에 같은 일이 닥친다.&lt;/p&gt;&lt;p&gt;12절의 목자는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진다. 목자의 ‘건져냄’과 이스라엘의 ‘건짐받음’은 같은 동사의 능동과 수동으로 짝을 이룬다. 그러나 살아 있는 양이 아니라 찢긴 흔적만 남았다. UBS는 목자가 파괴의 증거를 가져오는 관행과 연결하고, 구원을 기대하던 청중에게 주는 반어로 읽는다. 침상 구문도 번역이 갈린다. בִּפְאַת מִטָּה וּבִדְמֶשֶׁק עָרֶשׂ(비페아트 밋타 우비드메셰크 아레스)를 개역개정은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주민의 모습으로 옮긴다. UBS는 가구와 침대의 일부만 건져진 그림을 선호한다. 한 읽기는 사치스럽게 앉은 사람을, 다른 읽기는 파괴 뒤 남은 소유의 조각을 부각하지만 모두 큰 손실을 경고한다.&lt;/p&gt;&lt;p&gt;13절은 “듣고”를 되풀이하며 야곱의 집에 증언하라고 명한다. 14절의 “보응하는 날에”와 “벌하여”도 2절의 동사를 되풀이한다. “모든 죄”는 1-2장의 “서너 가지 죄”와 같은 낱말이다. 벧엘 제단의 뿔은 꺾여 땅에 떨어진다. UBS는 제단의 파괴와 함께 마지막 피할 곳의 상실을 읽는다. 종교적 장소가 죄를 계속할 보호 장치가 될 수 없다. 15절에서 겨울 궁과 여름 궁, 상아 궁과 큰 궁도 무너진다. 히브리어는 모두 ‘집’이라 하지만 개역개정은 호화로움을 따라 ‘궁’으로 옮긴다. “내가 치리니”라는 말씀은 대적의 침입으로 묘사된 파괴가 하나님의 심판임을 밝힌다. 사마리아의 물질적 안전과 벧엘의 종교적 안전이 같은 판결 아래 놓인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출애굽기 19:4-6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자기에게로 인도하셨다고 말씀하시며, 말씀을 듣고 언약을 지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부르신다. 온 세계가 그분께 속한 가운데 이스라엘은 특별한 소유가 된다. 아모스 3:1-2도 그 관계를 심판의 이유로 든다. 이스라엘만 그분의 판단 밖에 있을 수 없다. 애굽의 압제에서 구출된 백성이 이제 애굽 궁궐들 앞에 자기 학대를 드러낸다. 과거의 피해가 현재의 가해를 정당화하지 못한다.&lt;/p&gt;&lt;p&gt;신명기 7:6-11은 선택의 근거를 백성의 수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에 둔다. 종살이에서 속량하신 분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며, 백성은 그 계명을 지켜야 한다. 아모스의 “너희만을 알았나니”도 이 사랑을 상기시킨다. 풍요와 선택의 고백은 실제 행위가 옳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신실하심을 받은 백성에게 신실한 행위가 요구된다.&lt;/p&gt;&lt;p&gt;창세기 18:17-25에서 하나님은 소돔에 하실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고 물으신다. 그를 “택하였나니”라는 동사는 아모스 3:2의 “알았나니”와 같다. 그 앎에는 가족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듣고 의인을 위해 간구하며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의 정의를 붙든다. 특별히 아브라함을 아시는 하나님은 소돔의 큰 부르짖음도 들으신다. 아모스에서도 선지자가 들은 계획은 열방과 이스라엘의 폭력을 드러낸다. 계시를 받은 이는 타인의 멸망을 즐기기보다 그분의 정의를 따라야 한다.&lt;/p&gt;&lt;p&gt;출애굽기 22:10-13은 맡아 돌보던 가축이 맹수에게 찢기면 흔적을 가져와 증언하는 규정을 둔다. 아모스 3:12에서 목자의 손에 남은 다리와 귀도 살아 있는 양의 구출이 아니라 파괴의 증거가 된다. 양이나 소유를 맡았다는 말에는 보호와 설명의 책임이 따른다. 폭력을 쌓은 궁궐의 주인들이 기대한 안전은 이런 파괴 앞에서 무너진다.&lt;/p&gt;&lt;p&gt;예레미야 7:1-15는 성전에 들어와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을 계속하는 이들에게 길과 행위를 고치라고 요구한다. 성전의 이름으로 약자 압제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아모스의 벧엘과 예레미야의 예루살렘은 시대와 제도가 다르지만 예배하는 사람의 실제 행위를 물으시는 요구가 이어진다. 실로와 에브라임의 심판을 본 유다도 자기 성전만은 안전하다고 여길 수 없었다. 오늘의 교회도 이스라엘의 실패로 자기 지위를 높일 수 없으며 같은 경고를 들어야 한다.&lt;/p&gt;&lt;p&gt;열왕기상 2:28-34에서 요압은 제단의 뿔을 잡아도 무고한 피를 흘린 책임을 피하지 못한다. 아모스 3:14에서는 뿔 자체가 잘려 떨어진다. 거룩한 장소는 폭력을 지워주는 곳이 아니다. 출애굽의 은혜와 말씀을 받은 백성은 자신을 지키려 더 큰 재산과 종교적 권한을 쌓는 대신, 하나님 앞에서 행위를 바르게 하고 이웃에게 행한 억압에서 돌이켜야 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마태복음 7:21-23에서 예수는 자기 이름으로 예언과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아버지 뜻을 행하라고 요구하신다. 불법을 행한 자들에게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선언하신다. 아모스 3:2의 “알았나니”와 맞닿는 말로, 종교적 성과보다 주님과의 관계와 행위를 묻는다. “그 날” 판단하실 권위를 지닌 예수는 회개하여 불법을 멈추고 자기 말씀을 따르게 하신다.&lt;/p&gt;&lt;p&gt;예수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을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사람에 비유하신다(마 7:24-27). 두 사람 모두 들었으나 행했는지가 달랐다. 아모스에서 궁궐은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다. 예수의 비유도 소유한 지식과 예배 경험보다 말씀에 응답하는 삶을 요구한다. 앞의 거짓 선지자 경고는 양의 옷을 입은 이리도 열매로 분별하라고 한다(7:15-20).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주장으로 실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lt;/p&gt;&lt;p&gt;마가복음 11:15-19에서 예수는 성전의 매매를 뒤엎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꾸짖으신다. 예레미야 7장을 인용한 책망은 벧엘 제단 심판처럼 성소에 기대어 책임을 피하는 태도를 겨눈다. 그 말씀을 들은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일 방도를 찾는다. 요한복음 2:13-22에서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신 예수는 헐린 성전을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신다. 요한은 그 성전이 예수의 몸이며 제자들이 부활 뒤 그 말씀을 믿었다고 밝힌다. 하나님께 나아갈 중심은 죽고 살아나신 아들이다.&lt;/p&gt;&lt;p&gt;히브리서 13:12-16에서 예수는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받으신다. 신자는 그 치욕을 지고 주께 나아가 찬송의 제사를 드리고 선을 행하며 나누어야 한다. 아모스에서 폭력의 책임을 성소로 가릴 수 없었듯,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은 사람의 예배도 이웃에게 나누는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lt;/p&gt;&lt;p&gt;요한복음 10:14-18의 예수는 자기 양을 아시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다. 아버지와 아들의 앎에 비추어 설명된 이 관계는 자기 이익을 위해 양을 소모하는 대신 그들을 살리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분은 다른 양들도 모아 한 목자 아래 한 무리가 되게 하시며, 목숨을 버리고 다시 얻을 권세를 아버지께 받으셨다. 아모스 3:12의 찢긴 양은 참화를 경고하지만, 복음은 죄와 죽음에서 자신을 구할 수 없는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 목자를 증언한다. 그분의 양은 그 음성을 듣고 따른다.&lt;/p&gt;&lt;p&gt;히브리서 13:20-21은 영원한 언약의 피로 큰 목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께서 신자를 선한 일에 온전하게 하시기를 구한다. 아모스에서 백성은 바른 행위를 몰랐으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새로워진다. 순종은 자기 의를 자랑할 성과보다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은혜의 열매다.&lt;/p&gt;&lt;p&gt;사도행전 4:18-20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명령에도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답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는 아모스의 질문과 닮았다. 그들이 선포하는 것은 예수의 부활과 그 이름의 치유다. 풀려난 뒤에도 공동체는 말씀을 담대히 말할 힘을 구한다(4:23-31). 이어 각 사람의 필요대로 재물을 나누는 모습이 나온다(4:32-35). 사마리아 궁궐의 겁탈과 달리, 부활의 증언은 가난한 사람을 살리는 나눔으로 이어진다.&lt;/p&gt;&lt;p&gt;고린도전서 9:16-19에서 바울은 맡겨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으리라고 하며,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자기 권리를 다 쓰지 않고 사람들을 섬긴다. 하나님께서 맡기셨으므로 말해야 한다는 책임은 청중을 소유하여 이익을 얻을 권한이 아니다. 심판하시는 주님과 생명을 주시는 목자는 같은 그리스도시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는 죄를 인정하고 그 은혜에 기대어 소유와 권한으로 이웃을 섬겨야 한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하나님께 사랑받고 알려진 백성이라는 고백은 잘못을 덮는 공로가 될 수 없다. 아모스의 “그러므로”는 받은 은혜와 행위의 책임을 잇는다. 신앙의 연륜과 공동체의 성장도 사람을 억압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 은혜를 받았기에 그분이 원하시는 정의를 따라야 한다.&lt;/p&gt;&lt;p&gt;3절의 동행 질문은 모든 사람이 지도자와 같은 의견을 가져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다. 만남과 동행의 관계에서 시작한 질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예언이 나오는 까닭을 설명한다. 7절도 오늘 지도자의 예측과 판단을 모두 하나님의 계획으로 보증하지 않는다. 누구도 자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고 몰아세울 수 없다.&lt;/p&gt;&lt;p&gt;6절의 재앙은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특정한 죄를 두고 받은 심판 말씀이다. 사고와 자연재해를 만난 이웃의 숨은 죄를 이 절로 판정할 수 없다. 이 경고를 듣는 공동체는 고통받는 이의 죄를 추측하기보다 자기 안의 불의를 인정하고 멈추어야 한다.&lt;/p&gt;&lt;p&gt;궁궐에 폭력을 쌓았다는 고발은 재산을 얻은 행위를 묻는다. 정당한 수입으로 불려도 누군가의 품삯을 빼앗고 손해를 강요했다면 그 돈은 피해의 흔적을 지닌다. 후원과 헌금의 크기가 그 책임을 없애지 못한다. 잘못으로 얻은 것을 돌려주고 피해를 회복하는 일이 필요하다.&lt;/p&gt;&lt;p&gt;찢긴 양의 조각은 사마리아가 기대한 건짐과 달랐다. 회복을 낙관하며 진행 중인 피해를 그대로 둘 수 없다. 제단의 뿔도 죄를 피할 마지막 안전이 되지 못했다. 교회의 이름과 직분, 같은 예배에 참여한다는 친밀함을 약한 이의 침묵을 요구하는 근거로 삼을 수 없다.&lt;/p&gt;&lt;p&gt;그리스도는 양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시고 부활하여 선한 일을 행할 힘을 주신다. 그 은혜에 의지하는 사람은 평판과 소유를 지키려고 죄를 감추기보다 인정하고 배상하며 돌이킬 수 있다. 회개하는 이를 돌보는 일에도 피해자의 안전과 회복이 빠질 수 없다. 주님께 알려진 관계는 이웃의 생명을 지키고 필요한 것을 나누는 삶을 요구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33/"&gt;Jan de Waard, 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3:3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312/"&gt;Jan de Waard, 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3:12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314/"&gt;Jan de Waard, 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3:14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아모스 4:1-13 돌아오지 않는 백성과 하나님을 만날 날</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4.1-13/</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4.1-13/</guid><description>아모스 4:1-13의 가난한 자에 대한 압제, 열심 있는 제사와 반복된 거절, 하나님 앞에 설 이스라엘을 해설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아모스 4장은 사마리아 산의 “바산의 암소들”(פָּרוֹת הַבָּשָׁן, 파로트 합바샨)에게 말씀을 들으라고 명한다. 목초지에서 살지게 자란 가축의 비유는 가난한 사람을 짓밟으며 안락을 누리는 이들을 겨냥한다. 여성 복수형으로 이어지는 고발과 “그들의 주인들”에게 마실 것을 요구하는 말에 근거하여, NET는 이들을 남편에게 욕구를 채우라고 요구하는 부유한 여성들로 읽는다. 심판의 이유는 성별이나 외모가 아니라 약자를 학대하며 누린 풍요이다. 시편 22:12(BHS 22:13)도 바산의 힘센 소를 고난받는 이를 위협하는 세력에 비유한다.&lt;/p&gt;&lt;p&gt;“가장에게”(לַאֲדֹנֵיהֶם, 라아도네헴)는 “그들의 주인들에게”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남편들을 가리킨다.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는 짧은 요구에서 “술을”은 마신다는 문맥에 따라 개역개정이 보충한 말이다. 그 요구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압제가 같은 문장에 놓인다. 부를 직접 관리하는 사람뿐 아니라 그 풍요를 권리처럼 요구하는 사람도 책임을 진다. 3장에서 궁궐에 쌓인 폭력은 여기서 그 안에서 마시고 즐기는 생활로 드러난다.&lt;/p&gt;&lt;p&gt;2절에서 주 여호와는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신다. 가난한 사람을 짓밟는 삶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그 거룩함이 심판의 확실한 근거이다. 6:8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다.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는 심판의 날들이 이미 다가온다는 긴박함을 담는다. 물건을 가져오라고 명령하던 이들이 이제 붙들려 끌려갈 대상이 된다.&lt;/p&gt;&lt;p&gt;2-3절의 추방 도구와 목적지는 불분명하다. 개역개정의 “갈고리”(בְּצִנּוֹת, 베친노트)와 “낚시”(בְּסִירוֹת דּוּגָה, 베시로트 두가)를 NET는 바구니와 어부의 통으로 옮기며, 어휘의 정확한 뜻과 하르몬의 위치가 불확실하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강제 추방의 장면은 분명해도 도구의 사용법과 이동 경로는 알기 어렵다. 이들은 무너진 성벽 틈으로 각기 곧장 나가게 된다. 3절의 “각기”는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고 동사들도 여성 복수형이어서 처음 불린 여성들을 다시 지목한다. “던져지리라”(וְהִשְׁלַכְתֶּנָה, 베히쉴라크테나)는 BHS 모음대로는 “너희가 던지리라”라는 능동형이며 목적어가 없다. 개역개정은 끌려가는 이들을 주어로 수동 번역한다.&lt;/p&gt;&lt;p&gt;4절은 벧엘과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라는 반어적 명령으로 예배를 고발한다. “범죄하며”는 1-2장에서 각 나라의 죄를 고발한 말과 같은 어근이다. “가서”는 2절에서 심판의 날이 온다는 동사와 같아, 백성이 성소로 가는 동안 심판도 다가옴을 들려준다. 아침마다 희생을,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리는 부지런함도 그들을 구하지 못한다. “드리며”는 1절에서 마실 것을 “가져오라”고 했던 동사와 같아 향락과 제사의 열심을 연결한다. NET는 정의 없는 형식적 예배가 위선을 더한다고 풀이한다. 성소를 향하는 발걸음은 이웃을 억누르는 삶을 바꾸지 않았다.&lt;/p&gt;&lt;p&gt;5절의 “수은제”는 감사의 제사이고 “낙헌제”는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이다. NET는 누룩 든 제물을 레위기 7:13의 감사제물 규정과 연결한다. 유교병을 감사제물과 함께 드리는 것과 누룩을 제단에서 화제로 사르는 것은 구별된다. 레위기 2:11은 후자를 금한다. 백성은 이런 예물을 소리 내어 알리지만, 하나님은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라고 하신다. “기뻐하는”의 동사는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종교 활동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압제와 병행하고 있었다.&lt;/p&gt;&lt;p&gt;6절의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며”(נִקְיוֹן שִׁנַּיִם, 니크욘 쉰나임)는 뒤의 양식 부족이 뜻을 밝힌다. 먹을 것이 없어 이에 남을 음식도 없는 기근의 모습이다. NET도 이를 기근의 생생한 비유로 풀이한다. “또 내가”라는 강조는 백성이 좋아하는 예물과 하나님께서 실제로 보내신 징벌을 맞세운다. 풍성한 제사를 자랑하던 백성에게 하나님은 빈 입을 주셨다고 하신다.&lt;/p&gt;&lt;p&gt;“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וְלֹא־שַׁבְתֶּם עָדַי, 벨로 샤브템 아다이)는 6, 8, 9, 10, 11절에 다섯 번 반복된다. 돌아올 대상은 벧엘이나 길갈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재앙의 종류는 달라도 백성의 응답은 같았다. 고통의 경험만으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1절의 여성 집단을 향한 고발은 4절부터 남성 복수 명령과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호칭으로 넓어져 공동체 전체를 향한다. 처음 지목된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lt;/p&gt;&lt;p&gt;7-8절에서 하나님은 추수 석 달 전에 비를 막으셨고, 어떤 성읍에는 비를 주고 다른 성읍에는 주지 않으셨다. 여러 성읍의 사람들은 물을 찾아 비틀거리며 다녀도 충분히 마시지 못했다. “비틀거리며”(וְנָעוּ, 베나우)는 8:12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찾지만 얻지 못하는 방황에도 쓰인다. 1절에서 마실 것을 요구하던 향락과 8절에서 생존을 위해 물을 찾는 모습이 같은 “마시다”라는 동사로 연결된다. 그러나 물을 찾아 이동하던 백성도 하나님께는 돌아오지 않았다.&lt;/p&gt;&lt;p&gt;9절의 마름병과 깜부기,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먹는 팥중이는 곡식과 과실의 기반을 넓게 무너뜨린다. 10절의 전염병은 “애굽에서 한 것처럼” 임한다. 애굽의 재앙에서 구출받은 백성이 이제 같은 타격을 겪는다. 칼에 죽은 청년과 빼앗긴 말, 진영의 악취는 나라의 미래와 군사력도 그들을 지키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그 뒤에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는 후렴이 이어진다.&lt;/p&gt;&lt;p&gt;11절은 성읍들의 붕괴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견준다. “무너뜨리기를”과 “무너뜨림”은 같은 어근으로 두 사건을 묶는다. 살아남은 백성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כְּאוּד מֻצָּל מִשְּׂרֵפָה, 케우드 무찰 밋세레파)과 같았다. 이미 불에 탄 것이 밖으로 꺼내지듯 그들의 생명은 위태롭게 보존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후렴도 그들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고발한다. 보존된 생명에 합당한 응답은 없었다.&lt;/p&gt;&lt;p&gt;12절의 “그러므로”는 고발과 다섯 후렴의 결론을 이끈다. “이와 같이” 행하겠다는 말씀은 다가올 일을 상세히 밝히지 않은 채 앞의 재앙과 추방을 떠올리게 한다. 이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복수로 불리던 백성을 이제 단수로 불러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 앞의 예배 비판과 심판 선언에 비추면 더 많은 제물을 준비하라는 초청이 아니다. 그분은 여전히 “네 하나님”이시지만, 백성은 그 관계를 거스른 삶에 답해야 한다.&lt;/p&gt;&lt;p&gt;13절은 그 하나님을 산을 빚고 바람을 창조하며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וּמַגִּיד לְאָדָם מַה־שֵּׂחוֹ, 우막기드 레아담 마 세호)는 “사람에게 그의 생각을 알리는”이라는 뜻이다. “그의”는 문법상 하나님과 사람을 모두 가리킬 수 있지만 개역개정은 하나님의 뜻으로 읽는다. 하나님은 아침을 어둠으로 바꾸고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신다. 5:8의 송영도 빛과 어둠을 다스리는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라고 밝힌다. 7:9에서 제의 장소를 가리키기도 하는 “높은 데”까지 밟으시는 창조주를 백성은 성소의 의례 안에 가둘 수 없다. 그분의 이름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이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아모스 5:4-6은 벧엘과 길갈을 찾지 말고 여호와를 찾으면 살리라고 명한다. 4장의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가 가리키는 것은 성소로 다니는 발걸음과 구별되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응답이다. 예배하는 이스라엘은 가난한 이웃을 압제하는 삶을 버리고 자기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lt;/p&gt;&lt;p&gt;레위기 26:14-26은 언약을 배반할 때 질병과 패전, 메마른 땅과 양식 부족이 임하리라 경고하며, 그런 일을 겪어도 청종하지 않는 백성의 완고함을 반복한다. 아모스의 다섯 후렴도 이 경고와 이어진다. 레위기 26:13에서 종의 멍에를 벗겨 주신 하나님께 해방을 받은 백성이 이제 이웃을 압제한다. 재앙 회고의 배경에는 받은 자유를 잊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한 삶이 있다.&lt;/p&gt;&lt;p&gt;신명기 30:1-10은 복과 저주를 겪고 흩어진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와 말씀을 청종할 미래를 말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모으고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자신을 사랑하며 살게 하신다. 돌아옴은 땅과 풍요만 되찾는 일이 아니라 생명이신 여호와께 마음과 뜻을 다해 응답하는 일이다. 그 소망은 백성의 강한 의지보다 흩어진 이들을 모으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다.&lt;/p&gt;&lt;p&gt;아모스 4:11이 직접 불러오는 창세기 19:15-29에서는 롯이 지체할 때 천사들이 그를 이끌어 내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여 멸망 가운데서 그를 건지신다. 생존은 자기 의를 자랑할 근거가 아니라 자비에 대한 응답을 요구한다. 아모스는 소돔 같은 붕괴를 겪고 건져지고도 돌아오지 않은 이스라엘을 고발한다.&lt;/p&gt;&lt;p&gt;스가랴 3:1-7의 대제사장 여호수아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 불린다. 하나님은 그를 고발하는 사탄을 책망하고 더러운 옷을 벗겨 죄를 제거하신 뒤, 자신의 길과 규례를 지키라고 명하신다. 아모스에서 같은 불의 비유는 건져지고도 완고한 백성을 드러내며, 스가랴에서는 남겨진 사람을 정결하게 하여 다시 섬기게 하는 은혜를 드러낸다.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은 자신을 정결하게 하시는 분께 돌아가야 한다.&lt;/p&gt;&lt;p&gt;이사야 1:10-20은 많은 제물과 기도가 피 묻은 손을 가려 주지 못한다고 경고하며, 악을 버리고 정의를 배워 학대받는 이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라고 요구한다. 죄를 희게 하시는 은혜에는 순종의 응답이 따른다. 아모스의 반어도 같은 모순을 지적한다. 레위기 7:11-14에 맞는 감사제물을 드리는 일조차 예배자의 신실한 삶을 보증하지 않는다. 이웃을 해치는 행동을 계속하며 예물만 늘릴 수는 없다.&lt;/p&gt;&lt;p&gt;호세아 6:1-6에서 백성은 여호와께 돌아가 고침받자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인애가 아침 구름과 이슬처럼 사라진다고 책망하신다. 제사보다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시는 그분은 지속적인 신실함을 요구하신다. 호세아에서 새벽과 비처럼 오시리라 기대된 하나님은 아모스에서 비를 막고 아침을 어둡게 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백성은 풍요에 대한 자기 기대에 하나님을 가두지 말고 그분의 거룩한 책망을 들어야 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아모스 4장에서 반복된 경고와 제사에도 백성은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듣는다. 신약에서 그리스도는 회개를 부르시고 자기 피로 죄인을 정결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신다. 마가복음 1:14-15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긴박한 요청으로 선포된다.&lt;/p&gt;&lt;p&gt;누가복음 13:1-5에서 예수께서는 살해당한 갈릴리 사람들과 망대 붕괴로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았다는 생각을 거절하고, 듣는 이들에게 회개를 요구하신다. 타인의 고통으로 자기 무죄를 확인하려는 시선이 자신의 삶을 향하게 된다. 6-9절의 무화과나무 비유에서도 더 주어진 시간은 열매를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이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삶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는 보증이 될 수 없다.&lt;/p&gt;&lt;p&gt;누가복음 13:10-17에서 예수께서는 오랫동안 몸을 펴지 못한 여성을 안식일에 고치시고 아브라함의 딸이라 부르신다. 소와 나귀를 풀어 물을 먹이듯 이 딸을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신다. 아모스의 부유한 여성들이 약자의 생존을 짓밟으며 편의를 요구했던 데 비해, 예수는 약한 여성을 일으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예배는 주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사람의 삶과 연결된다.&lt;/p&gt;&lt;p&gt;마태복음 9:9-13에서 예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시며 호세아 6:6을 인용하여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배우라고 하신다. 누가복음 19:1-10의 삭개오에게도 먼저 찾아오신다. 삭개오는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고 부당하게 빼앗은 것을 갚겠다고 응답한다. 이 행동은 구원을 사는 대가가 아니라 자신을 찾아온 은혜의 열매이다. 아모스에서 예물이 늘어도 멈추지 않았던 압제는 구원자의 방문을 반기는 삶에서 중단된다.&lt;/p&gt;&lt;p&gt;누가복음 15:17-32에서 돌아온 아들은 죄를 고백하고, 아버지는 달려가 그를 아들로 맞아들인다. 큰아들은 자기 봉사의 실적을 내세우며 동생의 귀환을 기뻐하지 않지만 아버지는 그에게도 권한다. 죄인들과 함께 먹는다는 비판에 답하신 예수께서는 돌아온 죄인을 반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참여하도록 사람들을 부르신다.&lt;/p&gt;&lt;p&gt;히브리서 9:11-15의 그리스도는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고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다. 죄인은 경건의 실적을 쌓아 하나님과의 만남을 확보하지 않고 새 언약의 중보자를 의지하여 나아간다. 24-28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기다리는 이들을 구원하려고 다시 오신다. 심판 앞의 소망은 죄를 담당하신 그분께 있다.&lt;/p&gt;&lt;p&gt;고린도후서 7:8-11에서 바울이 기뻐한 것은 근심의 크기보다 그 근심이 회개에 이르러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열심을 낳았기 때문이다. 아모스의 고통받고도 돌아오지 않은 백성과 달리, 복음의 책망을 들은 사람은 은혜에 의지하여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눈물과 큰 약속은 실제 책임의 이행으로 이어져야 한다.&lt;/p&gt;&lt;p&gt;베드로후서 3:8-13은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뜻으로 설명하며,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거룩한 행실을 요구한다. 아모스에서 산과 바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고 들은 백성처럼,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도 오늘의 불의를 미룰 수 없다. 받은 시간은 회개하고 이웃에게 정의와 자비를 행할 은혜의 시간이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가난한 사람의 생계를 해치며 누리는 안락에는 책임이 따른다. 직접 돈을 관리하지 않아도 자신의 요구가 다른 사람을 짓누른다는 사실을 알면 그 요구를 바꾸어야 한다. 고발할 것은 성별과 외모가 아니라 착취의 행위이다. 예배와 헌금에 많이 기여한 사람도 자신이 입힌 피해에 같은 책임을 진다.&lt;/p&gt;&lt;p&gt;성소에 자주 가는 것과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다를 수 있다. 불의를 계속하면서 봉사와 예물을 늘려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은 빼앗은 것을 돌려주고, 거짓을 바로잡으며, 타인에게 떠넘긴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사과를 받는 사람에게 즉시 용서와 관계 회복을 요구하는 것으로 그 책임을 대신할 수 없다.&lt;/p&gt;&lt;p&gt;아모스는 하나님께서 지목하신 이스라엘의 압제와 그 역사를 해석한다. 오늘의 재난이나 질병 피해자에게 숨은 죄가 있다고 이 목록을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피해자가 더 큰 죄인이냐는 시선을 듣는 사람 자신의 회개로 돌리셨다. 살아남은 사람도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 없고, 상처 입은 사람의 슬픔을 완고함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lt;/p&gt;&lt;p&gt;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여셨으므로 죄인은 불리한 사실도 고백하며 은혜를 구할 수 있다. 회개의 눈물은 이웃을 대하는 행동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하나님을 만날 날을 기다리는 교회는 평판을 지키려고 약자를 침묵시키거나, 아직 일이 잘 풀린다는 이유로 드러난 잘못을 미루지 말아야 한다. 오늘 주어진 시간을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며 살아야 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Amo&amp;amp;chapter=4"&gt;NET Bible, 아모스 4장 해설 주 1, 번역 주 8·10·13, 해설 주 14·19, 번역 주 21·22.&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아모스 5:1-17 여호와를 찾아 살며 성문에 정의를 세우라</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5.1-17/</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5.1-17/</guid><description>아모스 5:1-17의 애가와 생명의 부르심, 성문에서 벌어진 불의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응답을 해설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아모스는 아직 살아서 듣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 장례의 노래인 애가(קִינָה, 키나)를 부른다. 2절의 “처녀 이스라엘”은 자기 땅에 쓰러져 일으킬 사람도 없다. “엎드러졌음이여”는 완료형으로 아직 오지 않은 몰락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애도한다. 3절에서 천 명이 나간 성읍에 백 명, 백 명이 나간 성읍에 열 명이 남는다는 급격한 감소는 군대의 참담한 손실을 그린다. 나라가 의지하던 군사적 역량과 자기 땅도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lt;/p&gt;&lt;p&gt;그 애가 안에서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요청이 들린다. 찾아야 할 대상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리하면 살리라”(וִחְיוּ, 비흐유)는 앞 명령에 이어지는 명령형이며, 개역개정의 “그리하면”은 앞의 요청에 응답할 때 생명이 따른다는 연결을 풀어 옮긴 말이다. 몰락의 애도 속에서도 청중은 들으며 응답할 길을 받는다.&lt;/p&gt;&lt;p&gt;5절은 벧엘을 찾지 말고 길갈에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 나아가지 말라고 명한다. 하나님을 찾는 일과 성소를 방문하는 여행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הַגִּלְגָּל גָּלֹה יִגְלֶה, 학길갈 갈로 이글레), 벧엘은 비참하게 된다. 길갈의 지명과 사로잡힌다는 동사는 비슷한 소리로 맞물리며, 같은 동사를 거듭 써 심판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이름의 벧엘은 헛됨이나 재난을 뜻할 수 있는 말(לְאָוֶן, 레아벤)로 끝난다. 6절은 여호와를 찾아 살라고 다시 요청하며 요셉의 집, 곧 북이스라엘에 닥칠 불을 경고한다. 벧엘조차 그 불을 끄지 못한다.&lt;/p&gt;&lt;p&gt;7절은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고 공의를 땅에 던지는 사람들을 고발한다. 정의는 재판의 바른 판단과 그 판단이 세우는 질서이며, 공의는 관계 안에서 옳게 행하는 일이다. 이를 뒤집으면 도움을 구하는 이에게 쓰디쓴 결과가 돌아온다. 8절에서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וְהֹפֵךְ, 베호페크)는 7절의 “바꾸며 … 자들아”(הַהֹפְכִים, 하호프킴)와 같은 동사다. 사람들이 정의를 뒤집는 곳에서 창조주는 어둠을 아침으로 바꾸신다. 별과 시간과 바다를 다스리시는 분이 재판의 무질서도 심판하신다.&lt;/p&gt;&lt;p&gt;개역개정은 8절에 “이를 찾으라”를 보충해 앞의 요청을 잇는다. BHS에는 별도의 “찾으라” 명령형이 없고 창조자의 행동을 분사로 나열한 뒤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고 선언한다. 이 번역은 백성이 찾아야 할 분이 바로 창조주임을 밝힌다. 그분은 강한 자와 산성에도 패망을 이르게 하신다(9절).&lt;/p&gt;&lt;p&gt;10절은 성문에서 책망하고 정직히 말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현실로 돌아온다. 성문은 장로들이 법적 분쟁을 다루던 자리다. 판단에 필요한 진실이 거절되면 가난한 사람이 권리를 주장할 길도 막힌다. 11절의 고발은 힘없는 사람을 밟고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밟고”(בּוֹשַׁסְכֶם, 보샤스켐)는 드문 형태로, NET는 곡물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뜻으로 읽는다. 짓밟음과 농업세 징수 중 어느 해석에서도 약자의 생계를 압박해 얻은 이익이 부유한 자의 돌집과 포도원으로 바뀐다.&lt;/p&gt;&lt;p&gt;그들은 집을 지어도 거주하지 못하고 포도원을 가꾸어도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한다. 하나님은 많은 허물과 무거운 죄를 아신다. 의인을 학대하고 뇌물을 받으며 가난한 사람을 성문에서 억울하게 한 일도 드러난다. “억울하게 하는”은 정당한 판단에서 옆으로 밀어낸 행동을 그린다. 사람들의 재판에서 지워진 진실이 하나님의 판결 앞에 드러난다.&lt;/p&gt;&lt;p&gt;13절의 지혜자가 악한 때에 잠잠한다는 말은 정직한 증언이 미움받는 위험한 현실과 연결된다. NET는 “지혜자”(הַמַּשְׂכִּיל, 함마스킬)를 성공한 부유층으로 읽는 대안과 “잠잠하나니”(יִדֹּם, 잇돔)를 침묵 또는 애곡으로 읽는 대안을 소개한다. 애곡은 같은 표기의 다른 어근으로 이해하는 풀이이며, 이 경우 부유층에게 닥칠 심판을 가리킨다. 어느 경우든 곧이어 15절이 정의를 세우라고 명하므로 이 문장을 불의 앞에서 침묵하라는 일반 명령으로 읽을 수 없다.&lt;/p&gt;&lt;p&gt;14절은 “찾으라”는 동사의 목적어를 하나님에서 “선”으로 바꾼다. 하나님을 찾아 사는 길은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않는 삶이다. “너희의 말과 같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리라는 말씀은 그들이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주장해 왔음을 드러낸다. 그 고백은 선을 구하는 삶으로 응답해야 한다. 15절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우라고 요청한다.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행동은 재판을 바로잡는 데 이른다.&lt;/p&gt;&lt;p&gt;“혹시”(אוּלַי, 울라이)는 여호와께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기를 구하는 기대다. 회개는 필요한 응답이지만 선행의 실적으로 하나님의 판결을 청구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 남은 자의 미래는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 16절은 “그러므로”로 판결을 잇는다. NET는 이 연결을 10-13절의 고발에 대한 결과로 읽는다. 14-15절의 회개 요청은 고발과 판결 사이에서 생명으로 부르는 말씀이다.&lt;/p&gt;&lt;p&gt;통곡은 광장과 거리에서 농부와 울음꾼에게, 모든 포도원으로 퍼진다. 소유자들이 즐기려던 포도원도 애도의 장소가 된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가운데로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동사(אֶעֱבֹר, 에에보르)는 5절에서 백성에게 브엘세바로 “나아가지 말라”고 하신 동사와 같다. 성소로 건너가는 백성의 걸음은 금지되고 하나님은 직접 그들 가운데 지나가신다. 14절에서 주장한 임재는 불의를 그대로 보호하지 않는다. 창조주를 찾고 선을 사랑하며 가난한 이의 말을 들을 정의를 세우라는 부름에 백성은 응답해야 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아모스 5장의 생명 요청은 선을 구하고 성문에서 정의를 세우라는 명령으로 구체화된다. 신명기 30:15-20도 생명과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들으며 의지하라고 한다. 하나님 자신이 백성의 생명이시다. 땅에 들어갈 백성에게 주신 신명기의 말씀과 그 땅에서 불의를 행하며 몰락을 앞둔 백성에게 주신 아모스의 말씀은 하나님께 향하며 그 길을 행하라는 요구로 이어진다. 다음 세대가 함께 살아갈 땅에서도 정의를 지켜야 한다.&lt;/p&gt;&lt;p&gt;신명기 16:18-20은 각 성읍에 재판장과 지도자를 세워 공의로 판단하고 외모를 따라 판단하거나 뇌물을 받지 말라고 명한다.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한다. 아모스의 성문은 그 책임을 저버려 가난한 사람을 밀어내고 정직한 증언을 미워하는 자리다. 공의를 따라야 산다는 신명기의 명령처럼 아모스도 백성의 생명과 재판의 공정함을 연결한다.&lt;/p&gt;&lt;p&gt;이사야 1:10-20은 제물과 기도를 드리면서 피 묻은 손을 버리지 않는 백성에게 정의를 구하고 고아와 과부의 억울함을 풀라고 명한다. “정의를 구하며”는 아모스의 “선을 구하고”와 같은 동사로 된 명령이다. 성소를 방문하면서 약한 이의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는 삶은 두 예언서에서 모두 책망받는다. 예레미야 7:1-15도 성전의 이름을 안전의 근거로 삼는 유다에게 이웃 사이의 정의와 객, 고아, 과부의 보호를 요구한다. 북왕국의 성소와 남왕국의 성전은 같은 주님의 판단 아래 있다.&lt;/p&gt;&lt;p&gt;신명기 28:30, 39는 집을 짓고도 살지 못하고 포도원을 가꾸고도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는 언약 위반의 결과를 경고한다. 아모스 5:11은 약자에게서 얻은 소산으로 만든 돌집과 포도원에 같은 판결을 선언한다. 재산을 얼마나 얻었는지가 아니라 그 땅에서 어떻게 행했는지가 심판의 이유다.&lt;/p&gt;&lt;p&gt;열왕기상 21:1-19에서 이세벨은 왕의 이름으로 금식과 거짓 증언을 조직하여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다. 장로와 귀족이 실행한 공적 판단과 종교 형식이 재산 탈취에 동원된다. 엘리야는 포도원을 차지하러 간 아합에게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준다. 아모스의 성문과 포도원 고발도 소유물 안에 남은 약자의 수탈을 드러낸다. 아합이 겸비하자 재앙의 때가 미루어진 일(21:27-29)은 아모스의 “혹시”처럼 죄를 듣고 낮아져 은혜를 구할 길을 나타낸다. 미래를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lt;/p&gt;&lt;p&gt;아모스 5:17의 “지나갈 것임이라”는 출애굽기 12:12에서 하나님이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심판하시는 밤을 떠올리게 한다. 두 곳은 같은 동사지만, 12:13에서 피를 보고 이스라엘의 집을 “넘어가리니”라고 하신 보호의 말씀에는 다른 동사가 쓰인다. 아모스에서는 조상의 구출을 기억하는 이스라엘 자신이 심판하며 지나가시는 하나님 앞에 선다. 과거 구원의 기억은 현재의 불의를 가리는 방패가 될 수 없다.&lt;/p&gt;&lt;p&gt;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응답하는 백성은 선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 성문에 정의를 세우라는 명령은 좋은 의도를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정당한 증언을 듣고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으라고 요구한다. 백성은 심판을 부른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며 긍휼을 구한다. 그들의 회개도 자신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요한복음 5:39-40에서 예수는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생명을 얻으려고 자신에게 오지 않는 청중을 책망하신다. 성경이 증언하는 분을 거부하는 종교적 열심은 벧엘을 찾으면서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과 주제적으로 연결된다. 5:19-24에서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행하며 생명과 심판의 권한을 받으신다. 아들을 공경하는 것은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이다. 그 말씀을 듣고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lt;/p&gt;&lt;p&gt;아들의 음성은 무덤 속의 사람들까지 불러 생명과 심판의 부활로 이끈다(요 5:25-29). 그분의 판단은 보내신 분의 뜻을 따르기에 의롭다(5:30). 예수는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이들을 책망하신다(5:41-44). 돈과 권한 때문에 판단이 굽어졌던 아모스의 성문과 달리 아들의 권위는 아버지의 뜻에 선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사람도 그분의 말씀과 심판 앞에 행위를 드러낸다.&lt;/p&gt;&lt;p&gt;누가복음 19:41-44에서 예수는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며 평화의 일을 알지 못한 성읍의 몰락을 예고하신다. 자기 백성의 죽음을 애가로 부른 아모스의 슬픔과 같은 방향이다. 이어 예수는 성전의 행위를 책망하고 가르치시지만 지도자들은 그분을 죽일 길을 찾는다(19:45-48). 아모스의 성문에서 정직한 말을 미워했듯 종교적 권한을 지닌 이들이 주님의 책망을 거절한다.&lt;/p&gt;&lt;p&gt;같은 장의 삭개오는 먼저 찾아오신 예수를 맞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며 속여 빼앗은 것을 갚겠다고 말한다(눅 19:1-10). 구원에 대한 응답은 돈과 권한으로 억울하게 한 이웃을 대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아모스의 정의 요청처럼 은혜를 받은 삶은 이웃의 정당한 몫을 돌려준다.&lt;/p&gt;&lt;p&gt;고린도전서 5:6-8은 그리스도를 희생되신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부른다. 아모스 5:17이 떠올리게 한 출애굽의 밤은 그리스도의 자기 봉헌을 통해 죄인을 살리시는 복음과 이어진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은 생명을 내어 주신 주님을 의지한다. 바울은 심각한 죄에도 자랑하던 교회에게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살라고 요청한다. 구원의 은혜는 잘못을 숨기는 근거가 아니라 죄를 바로잡을 책임의 근거다.&lt;/p&gt;&lt;p&gt;로마서 6:1-14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에 연합한 사람은 새 생명 가운데 행한다. 죄의 종이던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판단받았으며 신자는 하나님께 살아 있는 자로 자신을 여긴다. 그 은혜 아래서 몸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않고 하나님께 의의 무기로 드려야 한다. 선을 구하고 악을 미워하라는 요청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의 말과 행동, 권한의 사용에 이른다.&lt;/p&gt;&lt;p&gt;고린도후서 5:14-21은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목적을 산 사람들이 이제 죽고 살아나신 분을 위해 살게 하는 데 둔다. 새로운 피조물은 자기 이익을 위해 관계와 재산을 사용하는 방향에서 돌이킨다. 죄를 알지 못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죄인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고 교회에 화목의 말씀을 맡기신다. 아모스의 “혹시”가 드러내는 겸손한 은혜의 요청은 자기 의를 의지하지 않고 이미 베푸신 구원을 믿는 태도와 만난다. 화목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우는 형식적 평화가 될 수 없다.&lt;/p&gt;&lt;p&gt;고린도후서 5:10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몸으로 행한 일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한다. 생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현재의 행동에 책임을 진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믿음은 가난한 이의 정당한 요구를 듣고 바른 판단을 세우는 삶으로 응답한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여호와를 찾아 살라는 요청은 선을 구하고 악을 미워하며 정의를 세우라는 명령이다. 예배하고 말씀을 읽으면서 임금을 미루고 불리한 진술을 숨기거나 가난한 이의 정당한 요구를 밀어낸다면 그 행동을 고쳐야 한다. 성소의 이름이나 많은 신앙 활동이 불의를 보호하지 못한다.&lt;/p&gt;&lt;p&gt;성문에서 정직한 말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진실을 거절했다. 교회도 문제를 제기한 이의 지위와 친분, 말투로 사실의 무게를 정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의인을 학대하고 뇌물을 받으며 가난한 이를 억울하게 한 일을 아신다. 옳은 말을 했다가 위험해져 침묵하는 사람에게 혼자 모든 위험을 감수하라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 정의를 세워야 할 책임은 그를 침묵하게 만든 불의에도 미친다.&lt;/p&gt;&lt;p&gt;돌집과 포도원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얻는 데 동원한 수탈을 지우지 못한다. 공동체의 성과가 약한 사람의 미지급 대금과 부당한 희생으로 마련되었다면 그 몫을 돌려주어야 한다. 원래 받아야 할 돈을 지급하는 일은 시혜나 기부가 아니라 빚진 책임의 이행이다. 다른 자리에서 베푼 선행도 지금의 피해를 상쇄하지 않는다.&lt;/p&gt;&lt;p&gt;“혹시”라는 말 앞에서 회개한 사람은 자비를 구한다. 사과와 배상을 했다는 이유로 피해자에게 즉각적인 신뢰나 직분의 회복을 요구할 수 없다. 끼친 손해를 줄이고 필요한 책임을 감당하며 피해자의 안전과 거리를 존중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화목도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우는 평화가 아니다.&lt;/p&gt;&lt;p&gt;아모스의 애가와 예루살렘을 보며 우신 예수의 눈물은 불의의 결과를 슬퍼하게 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고백은 성공과 힘으로 자기 결정을 정당화하는 말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은 자기 죄를 인정하고 빼앗은 것을 돌려주며 부당한 판단을 바로잡는다. 생명의 주님을 찾는 믿음은 가난한 이의 권리를 지키는 선을 구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Amo&amp;amp;chapter=5"&gt;NET Bible, 아모스 5장 번역 주 14·30·37·39-41·47, 해설 주 29·38.&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아모스 5:18-27 여호와의 날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5.18-27/</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5.18-27/</guid><description>아모스 5:18-27의 어둠의 날, 하나님이 거절하시는 예배, 정의와 공의의 흐름, 우상과 포로의 경고를 해설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아모스 5:18-27은 5:1의 애가와 16-17절의 애곡을 이어받는다. 18절의 “화 있을진저”(הוֹי, 호이)는 16절의 울음소리와 닮아 살아 있는 청중을 미리 애도하는 듯 들린다. 같은 감탄사는 6:1의 안일한 지도층을 향한다. 여로보암 시대의 영토 확장(왕하 14:25)과 상아 침상, 겨울 집과 여름 집, 포도주 잔치(암 3:15; 6:4-6) 가운데서 이들은 여호와의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6:14는 회복한 경계를 따라 학대받으리라고 경고한다.&lt;/p&gt;&lt;p&gt;18절의 청중은 여호와가 원수를 치고 이스라엘을 높이실 날을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1-2장의 열방 심판이 마침내 이스라엘을 향하듯 그날도 그들에게 닥친다. 그들이 빛으로 기다린 날은 어둠이다. 5:8에서 빛과 어둠을 다스리시는 창조주가 그날의 주인이시므로 백성이 그 의미를 미리 정할 수 없다. 8:9-10도 대낮의 어둠과 절기와 노래가 애곡으로 바뀌는 일을 연결한다.&lt;/p&gt;&lt;p&gt;19절은 사자를 피하다 곰을 만나고 집 안에서 벽을 짚다가 뱀에게 물리는 사람을 그린다. 개역개정은 “혹은”으로 장면을 나누지만 히브리어의 접속을 따라 하나의 연속 사건으로 읽을 수도 있다. 밖의 위험을 피해 들어간 집조차 안전하지 않다. 9:3에서도 바다 밑에 숨은 이를 뱀이 문다. 20절은 어둠과 캄캄함을 거듭 말하여 이 장면을 감싼다. 그날에는 피난처도 한 줄기 빛도 없다.&lt;/p&gt;&lt;p&gt;21-23절은 그 확신을 떠받치던 예배를 무너뜨린다. “미워하여 멸시하며”라는 두 동사를 접속사 없이 붙여 단호한 거절을 선언한다. 10절에서 백성은 바른말 하는 이를 미워했고 15절에서는 악을 미워하라고 요구받았다. 그들이 미워해야 할 대상을 뒤바꾸자 하나님이 그 절기를 미워하신다. “너희 절기들”은 4:4-5에서 백성이 스스로 기뻐하던 벧엘과 길갈의 예배를 떠올리게 한다.&lt;/p&gt;&lt;p&gt;“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는 문자적으로 그 향기를 맡지 않겠다는 말이다. “냄새를 맡다”(אָרִיחַ, 아리아흐)는 레위기 26:31의 “흠향하지 아니하고”와 같은 동사이며, 칠십인역도 후각의 이미지를 보존한다. 21절의 코, 22절의 눈, 23절의 귀가 차례로 닫힌다. 하나님이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거절이 감각의 언어로 펼쳐진다.&lt;/p&gt;&lt;p&gt;22절의 번제, 소제, 화목제는 레위기 1-3장의 순서를 따른다. 하나님은 그 제물을 받거나 돌아보지 않으신다. 살진 짐승의 화목제는 예배자가 함께 먹는 넉넉한 잔치이다. 4:1에서 가난한 자를 억누르며 술을 요구하던 부유층의 예배는 착취한 풍요를 제물로 내놓는 일이 된다. 23절에서는 찬양이 소란처럼 취급되어 치우라는 명령을 받는다. 비파는 6:5의 부유층 연회에도 등장한다. 성소의 음악과 불의한 일상은 분리되지 않는다.&lt;/p&gt;&lt;p&gt;24절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밝힌다. “정의”(מִשְׁפָּט, 미쉬파트)는 재판과 판결에서 억울한 사람의 권리를 바로 세우는 일이며, “공의”(וּצְדָקָה, 우체다카)는 언약 관계에서 마땅히 행할 바른 행동이다. 원문은 정의를 주어로 물처럼 흐르라는 요구를 표현하고 개역개정은 이를 청중이 해야 할 일로 옮긴다. 5:7과 6:12에서 백성은 이 정의와 공의를 쓴 쑥과 독초로 바꾸었다. 성문에서 뇌물을 받고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한 재판(5:10-12), 곡식에 부과한 세금(5:11), 거짓 저울의 거래(8:5-6)가 바로잡혀야 한다.&lt;/p&gt;&lt;p&gt;“마르지 않는 강 같이”(כְּנַחַל אֵיתָן, 케나할 에이탄)는 건기에 마르기 쉬운 골짜기 물길과 달리 끊임없이 흐르는 물을 그린다. 첫 행의 물은 넘치는 양을, 둘째 행은 지속을 강조한다. 칠십인역은 “건널 수 없는 급류같이”(ὡς χειμάρρους ἄβατος, 호스 케이마루스 아바토스)라고 옮겨 물줄기의 세기를 부각한다. 정의는 절기 때 잠시 나타났다 성문으로 돌아가면 마르는 흐름일 수 없다. 제사는 그곳의 불의를 덮지 못한다.&lt;/p&gt;&lt;p&gt;25절은 광야 사십 년 동안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고 묻는다. 제물을 문장 앞에 놓아 질문의 초점으로 삼는다. 칠십인역과 사도행전 7:42는 부정적인 답을 기대하는 물음으로 옮긴다. NET도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규정한 핵심이 제사에 있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는다. 출애굽기와 민수기는 광야의 제사를 기록하지만 구원받은 백성의 관계는 제물에 앞선 하나님의 인도와 부르심에서 시작되었다(암 2:10; 3:2). 제물을 바친다는 사실로 안심한 청중은 그 순서를 뒤집고 있었다.&lt;/p&gt;&lt;p&gt;26절의 “지고 가리라”(וּנְשָׂאתֶם, 우네사템)는 문맥에 따라 과거나 미래로 읽을 수 있다. 25절을 이으면 광야에서 형상을 메고 다녔다는 고발이고, 27절을 이으면 포로로 가며 형상을 짊어질 것이라는 선고이다. 개역개정은 미래로, 칠십인역은 과거형 “메고 다녔다”(ἀνελάβετε, 아넬라베테)로 옮긴다. 식굿과 기윤의 신원은 설명되지 않으나 “신들의 별 형상”이라는 말은 천체 숭배와 연결한다. 사도행전 7:42도 하늘의 군대를 섬긴 죄로 이 인용을 도입한다.&lt;/p&gt;&lt;p&gt;백성은 자신을 위해 만든 형상을 짊어진다. 지켜 주리라 기대한 신이 포로의 길에서 짐이 되는 것이다. 이사야 46:1-4에서도 벨과 느보의 형상은 짐승에게 실려 함께 포로가 되지만 여호와는 백성을 태에서부터 업고 구원하신다. 27절에서 이스라엘을 다메섹 너머로 끌어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다. 길갈과 지도층의 포로 선고(5:5; 6:7)가 여기서 온 백성을 향한다. 열왕기하 17:6의 앗수르 포로로 그 경고가 실현된다. 스스로 별 형상을 만든 백성 앞에 묘성과 삼성을 지으신 만군의 하나님이 심판자로 서신다.&lt;/p&gt;&lt;p&gt;칠십인역 아모스 5:26은 식굿과 기윤을 “몰록의 장막”과 “너희 신 라이판의 별”로 옮긴다. 장막은 식굿의 자음을 초막으로, 몰록은 “너희 왕”의 왕을 신명으로 읽은 결과로 보인다. 사도행전 7:43의 개역개정은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이라 한다. NA28은 “너희”(ὑμῶν, 휘몬)를 대괄호에 넣어 본문에 속하는지 확정하기 어렵다는 편집 판단을 표시한다. 사도행전은 형상을 만들었다는 말에 절하려는 목적도 덧붙인다.&lt;/p&gt;&lt;p&gt;포로의 목적지는 히브리어와 칠십인역에서 “다메섹 너머”(ἐπέκεινα Δαμασκοῦ, 에페케이나 다마스쿠)이지만, 사도행전에서는 “바벨론 밖으로”(ἐπέκεινα Βαβυλῶνος, 에페케이나 바빌로노스)이다. 스데반의 인용은 북이스라엘의 앗수르 포로를 넘어 유다의 바벨론 포로까지 불순종의 역사를 포괄한다. 과거형으로 광야의 우상숭배를 고발하는 인용과 포로의 미래로 읽는 개역개정 아모스는 구별된다. 두 문맥에서 백성은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의지한 죄로 심판받는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아모스 3:2에서 하나님은 모든 족속 가운데 이스라엘만 알아 주셨으므로 그 죄를 보응하겠다고 하신다. 선택은 죄를 면제하지 않는다. 5:25의 광야 사십 년도 2:10의 구원을 떠올리게 하여 그 은혜를 받은 백성이 어떻게 응답했는지 묻는다.&lt;/p&gt;&lt;p&gt;레위기 26:27-33은 끝까지 거스르는 백성의 제사 향기를 흠향하지 않고 성소를 황폐하게 하며 민족들 가운데 흩으리라고 경고한다. 아모스 5:21의 향기 거절과 27절의 포로 선고도 이 순서를 따른다. 하나님이 주신 예배 제도와 성소를 그분의 뜻을 거스르는 삶의 안전장치로 삼을 수 없다.&lt;/p&gt;&lt;p&gt;출애굽기 32:1-8에서 백성은 금송아지 앞에서도 여호와의 절기를 선포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열왕기상 12:28-32의 여로보암도 같은 구원의 말을 하며 두 송아지를 만들고 벧엘에 절기를 세웠다. 아모스가 벧엘을 찾지 말고 너희 절기들이 거절되었다고 말할 때 이 역사가 배경이 된다. 여호와의 이름과 제사의 형식이 우상숭배를 정당화하지 못한다.&lt;/p&gt;&lt;p&gt;열왕기하 17:6, 16은 사마리아의 함락과 포로를 명령을 버리고 스스로 형상을 만들며 천체와 바알을 섬긴 죄에 연결한다. 아모스 5:26-27의 경고와 같은 역사 이해이다. 사도행전 7:42도 하늘의 군대를 섬기는 죄로 아모스를 인용한다. 포로는 언약을 버린 백성에게 경고된 심판이다.&lt;/p&gt;&lt;p&gt;예레미야 7:21-26은 출애굽 때 하나님이 먼저 명하신 것이 목소리를 듣고 그 백성으로 사는 일이었다고 밝힌다. 아모스 5:25와 마찬가지로 제물의 실적을 관계의 근원으로 삼은 태도를 책망한다. 북이스라엘을 향했던 경고가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반복된다.&lt;/p&gt;&lt;p&gt;이사야 1:10-17에서도 하나님은 악을 행하면서 성회로 모이는 일을 견디지 않으시고, 피 묻은 손을 펼치는 기도를 보거나 듣지 않으신다. 이어 정의를 구하고 학대받는 자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변호하라고 명한다. 미가 6:6-8도 제물을 끝없이 늘리려는 사람에게 정의와 인자, 하나님과의 겸손한 동행을 요구한다. 이웃을 해치는 삶이 거절의 이유이다.&lt;/p&gt;&lt;p&gt;이사야 58장은 일꾼을 억압하고 다투는 금식을 책망하며 결박을 풀고 양식을 나누라고 명한다. 그렇게 할 때 어둠이 낮이 되고 물이 끊이지 않는 샘처럼 되리라고 약속한다(58:10-11). 아모스의 어둠과 마르지 않는 강이라는 이미지가 회복의 약속과도 이어진다.&lt;/p&gt;&lt;p&gt;스바냐 1:14-15에서 어둠의 날은 예루살렘과 유다를 향한다. 이방 민족의 패배만 기대하는 백성의 확신이 다시 무너진다. 아모스서도 심판에서 끝나지는 않는다. 9:11-14은 다윗의 장막과 포로 백성의 회복을 약속한다. 5:11의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심판은 9:14의 포도원을 가꾸어 마시는 복으로 바뀐다. 사도행전 15:16-17은 이 장막의 약속을 이방인이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일과 연결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아모스의 백성은 절기와 제사와 성소, 출애굽의 기억을 지니고도 성문의 불의를 버리지 않았다. 예레미야와 이사야, 미가도 같은 불순종을 책망한다.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드리고 새 백성을 세우신다고 밝힌다.&lt;/p&gt;&lt;p&gt;마태복음 27:45-46의 대낮의 어둠과 버림받은 외침은 아모스 8:9-10의 캄캄한 낮과 애통을 떠올리게 한다. 마태가 아모스의 직접 인용으로 표시한 것은 아니며, 두 본문을 잇는 신학적 독법이다. 그리스도는 죄 없는 분으로서 죄인이 받을 심판의 어둠을 대신 겪으셨다.&lt;/p&gt;&lt;p&gt;데살로니가전서 5:1-11은 주의 날이 도둑처럼 온다고 경고하면서 성도를 빛과 낮의 자녀라 부른다. 그 근거는 그들을 위해 죽어 함께 살게 하신 예수이다. 바울은 이 구원 때문에 깨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지키며 서로 세우라고 권한다. 그날을 자기 집단의 당연한 승리로 여기는 확신은 아모스의 경고를 들어야 한다.&lt;/p&gt;&lt;p&gt;히브리서 10:5-10에서 그리스도는 제사와 예물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온 몸을 드리신다. 그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백성이 거룩함을 얻는다. 아모스의 청중은 불순종하면서 제물을 바쳤으나 그리스도는 온전한 순종으로 자신을 드리셨다. 성도의 예배는 그분의 제사에 근거한다. 히브리서 9:11-15은 그 피가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고 밝힌다.&lt;/p&gt;&lt;p&gt;마가복음 11:15-17에서 예수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일을 책망하신다. 예레미야 7:11의 말을 인용하여 불순종을 성전으로 덮으려는 태도를 고발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2:19-21에서는 죽고 부활할 자기 몸을 성전으로 밝히신다. 거절당할 예배를 책망하시는 분이 몸을 내어 주어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여신다.&lt;/p&gt;&lt;p&gt;마태복음 23:23-28에서 예수는 세밀한 십일조를 지키면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린 삶을 책망하신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명령은 경건과 이웃에 대한 책임을 잇는다. 잔의 겉과 회칠한 무덤의 아름다움은 안의 탐욕과 불법을 감추지 못한다. 아모스의 화려한 예배와 성문의 억울함 사이의 모순이 반복된다.&lt;/p&gt;&lt;p&gt;사도행전 7:42-52에서 스데반은 아모스의 우상숭배와 포로 선고를 인용한 뒤 성령을 거스르고 의인이신 예수를 거절한 청중을 책망한다. 손으로 만든 것에 의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죄가 이어진다.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은 그들에게 죄를 돌리지 말라고 기도한다(7:55-60). 그 자리에 있던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일도 이 심판의 경고를 들은 이에게 회개와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나타낸다.&lt;/p&gt;&lt;p&gt;사도행전 15:16-17에서 야고보는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시겠다는 아모스 9:11-12의 약속을 이방인의 회심에 연결한다. 죽고 부활하신 다윗의 자손 예수 안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인다. 구원받은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의 요구는 계속된다. 교회는 다시 오실 주님이 정의를 완성하실 것을 기다리면서 아모스의 경고를 자신에게 듣고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여호와의 날을 바라는 사람도 그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악을 바로잡으시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 불의도 그 말씀 앞에 드러내야 한다. 언약 백성이라는 이름과 예배의 열심으로 이웃의 권리를 짓밟은 일을 덮을 수 없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믿음에는 회개가 따른다.&lt;/p&gt;&lt;p&gt;하나님은 절기와 제물과 음악을 거절하시며 정의와 공의를 요구하신다. 성소의 예배와 성문의 재판, 시장의 거래를 따로 보지 않으신다. 뇌물과 거짓 거래, 가난한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행동을 지속하면서 더 많은 헌금과 찬양으로 그분의 호의를 얻으려는 시도는 거절된다.&lt;/p&gt;&lt;p&gt;마르지 않는 강이라는 비유는 정의의 지속을 요구한다. 절기를 지킬 때만 선을 보이고 일상으로 돌아가 불의를 반복하는 삶은 그 요구와 어긋난다. 사람의 몫과 권리를 정직하게 지키는 행동이 재판과 거래, 이웃과의 관계에서 계속되어야 한다. 예수도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리지 말라고 명하셨다.&lt;/p&gt;&lt;p&gt;백성이 자신을 위해 만든 형상은 위기의 날에 짊어질 짐이 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실제로는 사람이 만든 힘과 성과에 생존을 맡길 수 있다. 그 대상을 지키려고 진실을 숨기고 이웃을 해친다면 우상에 대한 충성이 드러난다. 백성을 업고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lt;/p&gt;&lt;p&gt;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드리셨고 그 피로 백성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다. 성도의 소망은 제물의 양이나 종교적 실적에 있지 않다.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주의 날을 기다리며 깨어 사랑을 행하고 서로를 세운다. 정의를 요구하시는 말씀과 그리스도의 구원을 의지하는 믿음이 이 삶을 이끈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Amo&amp;amp;chapter=5"&gt;NET Bible, Amos 5, 5:25의 번역 및 해설 주 64와 5:26의 번역 및 본문 주 67-69.&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아모스 6:1-14 안락한 지도자들과 외면당한 백성의 환난</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6.1-14/</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6.1-14/</guid><description>아모스 6:1-14에서 지도자들의 안일함과 호사, 정의의 왜곡, 자기 힘을 자랑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을 살핍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아모스 6장은 5:18과 같은 “화 있을진저”(הוֹי, 호이)로 시작한다.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던 사람들에게 향했던 탄식과 심판이 이제 시온과 사마리아의 지도자들에게 향한다. “교만한 자”(הַשַּׁאֲנַנִּים, 핫샤아난님)는 위험을 느끼지 않고 안일하게 지내는 사람들이다. “마음이 든든한 자”도 무엇인가에 기대어 안심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두 표현은 이사야 32:9-18에서도 짝을 이룬다. 1절은 종교적 중심과 견고한 수도에 안주하는 태도를 고발한다. 4:1이 이미 사마리아 산의 가난한 자에 대한 학대를 고발했듯, 이들의 안락 뒤에는 백성의 억압이 있다.&lt;/p&gt;&lt;p&gt;“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은 으뜸 민족의 이름난 유력자를 가리킨다. 이스라엘을 “민족들의 첫째”(רֵאשִׁית הַגּוֹיִם, 레쉬트 학고임)로 여기는 자의식이다.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는 문자적으로 ‘그들에게 온다’이며 누구에게 왜 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전통적으로 백성이 도움을 구하려고 지도자들을 거듭 찾는 장면으로 읽는다. 이 읽기에서 지도자들은 도움을 구하는 백성의 형편을 외면하고 자기 안락에 머문다.&lt;/p&gt;&lt;p&gt;2절은 갈레와 하맛과 가드를 둘러보게 하며 이스라엘과 영토를 비교한다. 개역개정처럼 예언자의 질문으로 읽으면 이스라엘이 이웃 왕국보다 낫다는 생각에 대한 도전이다. NET는 지도자들이 백성에게 이웃 나라가 이스라엘보다 나으냐고 물으며 자기 우월함을 자랑하는 말로 읽는다. NET에 따르면 예언자가 지도자들에게 묻는 독법은 절 끝의 본문 수정을 필요로 한다. 화자와 비교 대상을 달리 정하는 두 읽기는 모두 ‘민족들의 첫째’라는 자의식을 다룬다.&lt;/p&gt;&lt;p&gt;3절에서 지도자들은 재앙의 날을 생각 밖으로 밀어내면서 “포악한 자리”(שֶׁבֶת חָמָס, 셰베트 하마스)를 가까이 오게 한다. ‘자리’의 난점 때문에 본문 수정도 제안되었지만 이를 지지하는 고대 역본은 없다. UBS는 통치자의 보좌, 곧 ‘폭력의 통치’로 읽는 해석을 자연스럽게 본다. 흉한 날을 멀리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자기 폭력으로 재앙을 앞당긴다. 여호와의 날을 편의대로 기대하거나 미루는 태도는 5:18-20의 경고와 이어진다.&lt;/p&gt;&lt;p&gt;4절의 “상아 상”(מִטּוֹת שֵׁן, 밋토트 셴)은 상아로 꾸민 침상이다. 3:15의 “상아 궁”과 열왕기상 22:39의 아합의 상아궁처럼 왕실의 부를 드러낸다. 지도자들은 몸을 늘어뜨리고 누워 양 떼의 어린 양과 우리에서 기른 송아지를 골라 먹는다. “우리”는 짐승을 매어 기르는 곳이며 가장 좋은 고기를 얻는 식탁을 나타낸다. “기지개 켜며”라는 표현은 7절에서 잔치의 끝을 말할 때 다시 나온다.&lt;/p&gt;&lt;p&gt;5절의 “노래를 지절거리며”(הַפֹּרְטִים, 합포르팀)는 이곳에만 나오는 동사여서 정확한 뜻이 불확실하나 비파에 맞춘 노래나 연주를 가리킨다.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도 문맥상 난점 때문에 일부 학자가 조금 수정하여 ‘다윗처럼 노래를 짓는다’로 읽는다. 역대상 23:5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찬송하려고 악기를 만들었다. 이 연회에서는 다윗의 이름을 빌려 자기 즐거움을 위한 음악을 만든다.&lt;/p&gt;&lt;p&gt;6절에서 그들은 잔보다 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신다. “귀한 기름”(וְרֵאשִׁית שְׁמָנִים, 베레쉬트 셰마님)은 ‘기름들의 첫째’다. ‘첫째’는 1절의 으뜸 민족과 같은 낱말이다. 으뜸을 자처하는 이들이 자기 몸에도 가장 좋은 것을 쓴다.&lt;/p&gt;&lt;p&gt;그러나 “요셉의 환난”에는 근심하지 않는다. “근심하지”(נֶחְלוּ, 네흘루)는 병들거나 아프다는 뜻과 연결되어 남의 파멸 때문에 몸이 아플 만큼 괴로워하는 마음을 그릴 수 있다. 요셉은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며 5:6, 15에서도 백성의 이름으로 쓰인다. Jan de Waard와 William A. Smalley는 ‘부서짐, 파멸’을 뜻하는 환난을 앞으로 닥칠 사건으로 보고 아픔의 이미지를 살려 번역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자기 몸에는 좋은 것을 쓰는 지도자들이 가난한 자의 고통 속에 이미 시작된 부서짐과 나라 전체에 닥칠 파멸을 외면한다.&lt;/p&gt;&lt;p&gt;7절에서 이들은 포로 행렬의 맨 앞에 선다. “앞서”(בְּרֹאשׁ, 베로쉬)는 행렬의 머리를 뜻하여 지위나 품질의 으뜸을 뜻한 앞의 ‘첫째’와 의미가 같지는 않다. 그러나 비슷한 소리는 으뜸 민족을 자처하며 첫째가는 기름을 바른 사람들이 이제 포로의 첫째가 되는 역전을 만든다. “떠드는 소리”(מִרְזַח, 미르자흐)는 정확한 뜻이 불분명하지만 문맥상 잔치로 읽힌다. 4절에서 몸을 늘어뜨렸던 이들의 잔치가 여기서 끝난다.&lt;/p&gt;&lt;p&gt;8절에서 여호와는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다. 4:2의 거룩함, 8:7의 야곱의 영광을 두고 하신 맹세와 이어지는 엄숙한 심판이다. “야곱의 영광”(גְּאוֹן יַעֲקֹב, 게온 야아코브)은 궁궐들과 병행되어 이스라엘의 오만과 그 부를 가리킨다. 3:10의 궁궐에도 6:3과 같은 포학이 쌓여 있었다. 하나님은 그 성읍과 가득한 것을 넘기신다. ‘원수에게’는 개역개정이 보충한 대상이며 본문에는 없다. “넘기리라”는 1:6, 9에서 가사와 두로가 사로잡은 백성을 넘겼다는 고발에 쓰인 동사다. 이방의 죄를 심판한 말이 이스라엘의 운명에 적용된다.&lt;/p&gt;&lt;p&gt;9-10절에서는 한 집에 남은 열 사람마저 죽는다. 백 명 가운데 열 명이 남는다는 5:3보다 철저한 파멸이다. “죽은 사람의 친척”은 ‘그의 삼촌’이라는 말이며 가까운 친족이 시신을 거둔다. “그 시체를 불사를 자”(וּמְסָרְפוֹ, 우메사레포)는 이곳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화장하는 이, 향료를 태우거나 장례를 치르는 이, 일반 친족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스라엘에서 화장은 보통의 관습이 아니었으므로 장례를 위해 시신을 수습하는 사람으로도 읽는다. 집에 더 남은 이가 없다는 대답 뒤에 “잠잠하라”고 한다. 8:3의 시체 장면에도 같은 외침이 있다. 여호와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한다는 말이 대화인지 예언자의 해설인지, 그 동기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나님의 주목을 끌어 재앙을 다시 부를까 두려워한다는 해석이 대표적이다. 연회의 노래는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는 침묵으로 바뀐다.&lt;/p&gt;&lt;p&gt;11절에서 집이 무너지는 이유는 여호와의 명령이다. “갈라지고”와 “터지리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명사는 부서진 조각과 갈라진 틈을 뜻한다. 큰 집과 작은 집 모두 조각나고 갈라져 부유한 이도 평범한 이도 피하지 못한다. 3:15의 상아궁 파괴가 다시 울리며 4절의 상아 침상을 둔 집도 무너진다.&lt;/p&gt;&lt;p&gt;12절은 말이 바위 위를 달리며 소가 그곳에서 밭을 갈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개역개정은 ‘거기서’를 보충하여 소도 바위에서 밭을 가는 것으로 읽는다. BHS의 בַּבְּקָרִים(밥베카림)은 ‘소들로’라는 한 낱말이어서 단독으로 읽으면 소로 밭을 가느냐는 질문에 긍정할 수도 있다. 많은 학자는 마지막 두 자음을 ‘바다’로 떼어 같은 자음을 ‘소로 바다를’로 재분절한다. NET도 이 제안을 따른다. 이는 BHS의 모음점이 붙은 읽기와 구별되는 제안이다. 두 독법 모두 정의를 독으로 바꾼다는 고발로 이어진다. “쓸개”(לְרֹאשׁ, 레로쉬)는 쓴맛뿐 아니라 사람을 해치는 독성을 가리킨다. ‘독’과 7절의 ‘머리’는 철자가 같고 뜻은 다르다. “쓴 쑥”(לְלַעֲנָה, 렐라아나)은 5:7에서도 정의를 왜곡한 결과다. 사람을 살릴 정의와 공의를 독과 쓴 쑥으로 바꾸는 행동은 세상의 이치를 거스른다.&lt;/p&gt;&lt;p&gt;13절의 “허무한 것”(לְלֹא דָבָר, 렐로 다바르)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면서 로드발 성읍과 소리가 같다. “뿔들”(קַרְנָיִם, 카르나임)은 힘의 상징이며 가르나임 성읍의 이름이기도 하다. 개역개정은 허무함과 힘을, NET는 지명을 살려 같은 말놀이의 다른 면을 드러낸다. 자랑하던 영토가 예언자의 입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우리의 힘으로” 얻었다는 자랑은 신명기 8:17이 경고한 망각을 되풀이한다.&lt;/p&gt;&lt;p&gt;14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칠 한 나라를 일으키신다. 그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민족들의 첫째’가 이제 다른 한 민족에게 학대받는다. ‘이스라엘 집’이라는 같은 표현이 1절과 14절을 감싼다. 지도자에게 찾아오던 백성이 압제받는 공동체가 된다. 하맛 어귀는 북쪽의 산맥 사이 길목으로, 아라바 시내는 사해 부근으로 추정되며 왕국의 양 끝을 나타낸다. 열왕기하 14:25에서 하맛 어귀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회복한 영토가 이제 압제의 무대가 된다. 8, 14절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는 군사적 승리를 자랑하는 이들을 심판하실 모든 군대의 주인이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신명기 8:11-20은 좋은 집과 늘어나는 가축, 은금 때문에 애굽과 광야에서 돌보신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경고한다.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얻었다고 여길 때 재물 얻을 능력과 언약을 주신 분을 기억해야 한다. 아모스 6:13의 “우리의 힘으로”라는 군사적 자랑은 이 망각이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의 경고가 풍요에 안주한 지도자들을 향한 심판이 된다.&lt;/p&gt;&lt;p&gt;열왕기하 14:23-27은 아모스 시대의 여로보암이 영토를 회복했지만 여호와 앞에서 악했다고 평가한다. 회복의 이유는 왕의 의로움이 아니라 도울 이 없이 고난받던 백성을 보신 하나님의 긍휼이었다. 아모스 6:14는 남쪽 지점의 명칭은 다르지만 그 확장된 영역을 다시 압제의 무대로 선언한다. 백성의 고난을 보신 하나님이 그 고난을 외면한 지도자들을 심판하신다. 구원의 유익을 누린 나라에도 불의의 책임을 물으신다.&lt;/p&gt;&lt;p&gt;이사야 5:7-13도 정의 대신 포학과 부르짖음이 있는 나라를 고발한다. 집과 땅을 늘리고 밤낮 술을 마시는 이들은 음악과 포도주가 있는 잔치에서도 여호와의 일에 관심이 없다. 이사야가 선언한 포로와 굶주림은 아모스 6:7의 결말과 같다. 두 예언자는 풍요에 가려진 이웃의 부르짖음을 듣게 하고 그 고통을 외면한 이들에게 심판을 선언한다.&lt;/p&gt;&lt;p&gt;이사야 32:9-18은 아모스 6:1과 같은 안일함과 안전감의 표현으로 시작한다. 거짓 평온을 깨뜨린 뒤 영을 부어 광야를 아름다운 밭으로 바꾸고 정의와 공의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한다. 공의의 열매가 화평이며 그 결과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 아모스 6:12의 지도자들은 바로 그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었다. 평안 자체가 아니라 공의를 버린 안전감이 문제다.&lt;/p&gt;&lt;p&gt;예레미야 22:13-17은 품삯을 주지 않고 큰 궁전을 세우는 여호야김을 책망한다. 그의 아버지 요시야도 먹고 마셨지만 정의를 행하고 가난한 이의 송사를 변호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일이다. 아모스의 지도자들에게도 백성이 도움을 구하러 오지만 그 집과 식탁은 백성의 환난과 단절되어 있다. 지도자는 자신의 안락을 위해 타인의 몫을 빼앗지 않고 정의를 구하는 이를 보호해야 한다.&lt;/p&gt;&lt;p&gt;아모스 4:2, 6:8, 8:7의 맹세는 안락과 자랑에 취한 지배층을 겨냥한다. 4:1은 가난한 이를 학대하며 술을 찾는 사마리아를, 8:4-6은 가난한 사람을 돈과 신 한 켤레에 사들이는 상인을 고발한다. 5:18은 여호와의 날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기대하는 이들을, 6:3은 그날을 멀리 미루는 이들을 경고한다. 8:10의 노래가 애곡이 되는 심판은 6장의 연회도 끝낸다. 그중에도 5:14-15는 선을 구하고 악을 미워하며 성문에 정의를 세우면 하나님이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며 회개의 길을 연다.&lt;/p&gt;&lt;p&gt;9:11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신다. 6:14에서 심판할 민족을 일으키신 것과 같은 동사다. 지도자들이 다윗의 이름으로 자기 즐거움을 구할 때 하나님은 그 집을 다시 세우신다. 9:14에서는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고 자기 포도주와 과일을 먹는다. 소수가 대접으로 마시고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던 연회에 이어 백성이 자기 수고의 열매를 누리는 회복이 약속된다.&lt;/p&gt;&lt;p&gt;사도행전 15:16-17에서 야고보는 아모스 9:11-12를 인용하여 다윗의 장막 회복과 이방인이 주를 찾는 일을 연결한다. 백성의 파멸을 막지 못한 지도자들에 이어 하나님이 친히 다윗의 나라를 세우신다. 구약이 약속하는 왕에게는 복 주신 분에 대한 기억과 공의의 열매, 가난한 자를 변호하는 통치가 요구된다. 신약은 이 왕을 예수 그리스도로 증언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아모스 6장의 지도자들은 시온과 사마리아, 넓어진 영토와 다윗의 이름을 자랑했지만 백성의 파멸을 아파하지 않았다. 이 실패는 백성의 고통을 짊어지고 다스릴 왕을 기다리게 한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왕으로 증언한다.&lt;/p&gt;&lt;p&gt;누가복음 6:20-26에서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에게 복을 선언하신 뒤, 부요한 자, 지금 배부른 자, 지금 웃는 자에게 화를 선언하신다. 이 화 선언은 아모스 6:1의 ‘화 있을진저’와 같은 예언자의 형식을 따른다. 부요한 자는 이미 위로를 받았고, 지금 배부른 자는 주릴 것이며, 지금 웃는 자는 애통하며 울 것이다. 아모스가 연회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고 선언했듯이, 예수께서도 지금의 웃음이 애통으로 바뀌는 역전을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부유함이나 웃음 자체를 정죄하지 않는다. 같은 설교에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구하는 사람에게 주며,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명하신다. 위로를 이미 받았다는 말은 자기 위로에 갇혀 이웃의 고통을 보지 못하는 상태를 드러낸다. 아모스의 지도자들이 상아 침상과 대접의 포도주에서 위로를 얻는 동안 요셉의 파멸을 보지 못했듯이, 예수께서 화를 선언하신 사람들도 지금의 배부름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역전을 보지 못한다.&lt;/p&gt;&lt;p&gt;누가복음 12:13-21에서 예수는 유산 분배 문제를 들고 온 사람에게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시며,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가르치신다. 이어서 소출이 풍성한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부자는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고, 자기 영혼에게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한다. 이 독백은 아모스 6장의 지도자들이 가졌던 안일함과 안전감을 그대로 닮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밤에 그의 영혼을 도로 찾으신다. 아모스 6:3의 지도자들이 흉한 날을 멀리 밀어냈듯이 비유의 부자도 여러 해를 내다보았지만, 그 시간은 그의 손에 있지 않았다. 예수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사람이 이와 같다고 결론지으신다. 이어지는 12:31-34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시며,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하늘에 다함이 없는 보물을 두라고 명하신다. 예수 안에서 안전은 쌓아 둔 재물에서 오지 않는다. 자기 백성에게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께서 그 안전을 주신다.&lt;/p&gt;&lt;p&gt;누가복음 12:35-48은 아모스 6:3의 착각을 다른 각도에서 비춘다. 예수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하시며,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말씀하신다. 이어지는 비유에서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며 남녀 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고 취하는 종은, 생각하지 않은 날에 주인을 맞는다. 맡은 사람들을 학대하면서 먹고 마시는 이 종은 흉한 날을 멀리 밀어낸 아모스 6장의 지도자들과 놀랍도록 닮았다. 반면 주인이 맡긴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종은 복을 받는다. 예수는 많이 받은 사람에게 많이 요구하신다는 말로 비유를 맺으신다. 으뜸의 자리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누리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포로가 되는 아모스의 논리가 여기서도 이어진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는 그날을 두려움 속에 미루지 않고, 맡겨진 사람들을 먹이고 돌보는 신실함으로 준비한다.&lt;/p&gt;&lt;p&gt;누가복음 16:19-31의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긴다. 그 대문 앞에는 헌데투성이의 나사로가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려 한다. 부자의 식탁과 나사로 사이에는 대문 하나의 거리밖에 없지만, 부자는 그 거리를 건너지 않는다. 아모스 6장의 지도자들이 요셉의 파멸을 아파하지 않았듯이, 부자도 문 앞의 고통에 아파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이 단절을 죽음 이후의 역전으로 드러내신다. 나사로는 위로를 받고 부자는 고통을 받으며, 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구렁텅이가 놓인다. 살아 있을 때 부자가 건너지 않은 대문의 거리가 죽은 뒤에는 누구도 건널 수 없는 구렁이 된 것이다. 부자가 형제들에게 경고해 달라고 청하자,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서 들으라고 답한다. 아모스도 그 선지자들 가운데 하나다. 더 놀라운 징조를 기다리는 동안 이미 주어진 말씀과 이웃의 필요를 외면할 수 없다. 비유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사람이 있어도 권함을 받지 않으리라는 말로 끝나고, 이 말씀을 하신 예수께서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lt;/p&gt;&lt;p&gt;아모스가 고발한 지도자들과 가장 선명하게 대조되는 장면은 누가복음 19:41-44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오셔서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 성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여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사면으로 에워싸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을 날이 오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의 말씀도 아모스처럼 성읍의 파멸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 선언은 눈물과 함께 나온다. 사마리아의 지도자들은 요셉의 파멸 앞에서 아파하지 않았지만, 예수는 다가오는 예루살렘의 파멸 앞에서 우신다. 예수는 심판을 선언하시면서도 그 백성의 고통을 아파하신다. 히브리서 4:15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제사장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이 마음과 이어진다. 그리스도는 백성의 파멸을 근심하신 참된 머리이시다.&lt;/p&gt;&lt;p&gt;마가복음 10:42-45에서 예수는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백성을 임의로 주관하고 고관들이 권세를 부리는 모습을 말씀하신 뒤, 제자들 가운데서는 그러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아모스 6장의 ‘첫째’ 주제와 맞닿는다. 아모스 6장에서 민족들의 첫째를 자처하며 첫째가는 기름을 바르던 지도자들은 포로의 첫째가 된다. 예수께서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길을 가르치신다. 그 근거는 인자 자신이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섬기려 하며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려고 오셨다는 데 있다. 그분을 따르는 지도자는 공동체의 상처와 거리를 둔 채 자신에게 돌아올 몫만 키울 수 없다.&lt;/p&gt;&lt;p&gt;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은 아모스 6:13의 자랑과도 반대 방향이다. 지도자들은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했다고 말했다. 빌립보서 2:6-8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증언한다. 고린도후서 8:9는 부요하신 이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것이 그의 가난함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아모스의 지도자들이 받은 심판과 그리스도의 고난은 죄의 책임에서 구별된다. 아모스 6:8에서 하나님은 성읍과 거기 가득한 것을 넘기시겠다고 하셨고, 지도자들은 자기 죄 때문에 포로 행렬의 맨 앞에서 끌려갈 것이었다. 히브리서 13:12는 예수께서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한다. 아모스의 지도자들이 자기 죄 때문에 심판의 선두에 섰다면,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심판의 자리에 먼저 서셨다. 지도자들의 ‘첫째’는 특권을 먼저 누리는 자리였고, 그리스도께서 먼저 서신 자리는 고난을 먼저 짊어지는 자리였다.&lt;/p&gt;&lt;p&gt;예수의 부활은 아모스서 끝의 회복 약속을 이룬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이방인 가운데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신 일을 아모스 9:11-12의 약속과 연결한다. 다윗처럼 악기를 만든다고 자랑하던 지도자들은 다윗의 집을 지키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그분을 중심으로 무너진 장막을 다시 세우신다. 그 장막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백성으로 모인다. 6:14에서는 이스라엘을 치는 민족이 일어났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여러 민족이 주를 찾는 백성으로 모여든다. 지도자들의 실패로 무너진 집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세우신다.&lt;/p&gt;&lt;p&gt;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복음은 풍족한 성도가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삶의 근거가 된다. 자신을 위해 생명을 주신 주께 속했기에 이제 가진 시간과 재물과 권한을 이웃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1:20-22에서 바울은 주의 만찬 자리에서 각자 자기 음식을 먼저 먹어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하는 모습을 책망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식탁에서도 아모스 6장의 연회가 다시 벌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야고보서 5:1-6은 일꾼의 삯을 주지 않고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며 살륙의 날에 마음을 살찌운 부자들에게, 추수한 사람들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다고 경고한다. 아모스 6장에서 맹세하시고 한 나라를 일으키시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도 같은 공의로 일하신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이 공의를 따라 섬길 힘을 준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아모스가 고발한 안락은 백성의 환난을 외면하는 지도자의 생활이다. 요시야도 먹고 마셨지만 정의와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이를 변호했다(렘 22:15-16). 편안히 산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을 정죄할 수 없다. 자신의 편의를 위해 이웃의 정당한 품삯과 몫을 빼앗으면서 그 고통을 외면하는 태도가 심판의 대상이다.&lt;/p&gt;&lt;p&gt;6절에서 지도자들은 가장 좋은 기름을 자기 몸에 바르면서 백성의 파멸에는 아파하지 않는다. 성도는 다른 사람의 고통과 거리를 두기 위해 풍요를 사용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로마서 12:15는 우는 이들과 함께 울라고 권한다. 이사야 58장에서도 금식은 주린 사람에게 양식을 나누는 일과 이어진다. 절제와 나눔은 자기 즐거움에 갇힌 삶을 돌이키는 응답이다.&lt;/p&gt;&lt;p&gt;지도자의 책임은 누리는 지위와 자원이 클수록 무거워진다. 아모스의 유력자들은 가장 좋은 것을 먼저 차지했기에 포로의 맨 앞에 선다(7절). 교회와 사회에서 권한을 맡은 사람도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키우면서 맡겨진 사람들의 상처를 외면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으뜸이 되려는 사람에게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고 하셨고 친히 자기 목숨을 주셨다(막 10:42-45).&lt;/p&gt;&lt;p&gt;정의를 찾는 사람이 오히려 더 쓰라린 피해를 겪는다면 정의가 독과 쓴 쑥으로 바뀐 것이다(12절). 공동체의 평판과 평온을 지키려고 폭력과 피해를 감추는 행위도 이 고발 앞에 선다. 즐거운 분위기와 종교적인 음악은 불의를 덮을 수 없다. 하나님을 안다는 고백에는 억울한 이의 송사를 변호할 책임이 따른다(렘 22:16).&lt;/p&gt;&lt;p&gt;3절의 지도자들은 흉한 날을 밀어내면서 폭력을 가까이 불러들였다. 회개를 미루는 동안 계속되는 불의는 피해를 키운다. 말씀의 경고를 듣는 사람은 잘못을 멈추고 자기 행동으로 생긴 피해를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의 힘으로” 얻었다는 자랑 대신 능력과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여로보암 시대의 회복도 고난받는 백성을 보신 하나님의 긍휼에서 나왔다(왕하 14:23-27).&lt;/p&gt;&lt;p&gt;아모스는 특정한 지도자들의 폭력과 정의의 왜곡을 지적한다. 다른 사람이 재난이나 손실을 겪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이 심판의 죄목을 붙일 수 없다. 이 말씀은 권한과 자원을 가진 독자에게 자기 안전과 책임을 먼저 묻는다. 어려움을 겪는 이웃의 고통은 심판의 증거를 찾을 재료가 될 수 없다.&lt;/p&gt;&lt;p&gt;아모스 9:14의 회복된 백성은 자기 손으로 가꾼 포도주와 열매를 누린다. 그리스도의 식탁에서도 누군가는 굶주리고 누군가는 취하는 불의가 책망받는다(고전 11:20-22). 주께 생명을 받은 공동체는 이웃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아파하며 자기 몫을 나누고, 일한 사람이 정당한 열매를 누리도록 해야 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Amo&amp;amp;chapter=6&amp;amp;verse=1"&gt;NET Bible, 아모스 6:1 번역 주석, 안일함과 지도자들.&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61/"&gt;Jan de Waard·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6:1 번역 해설, 안일함과 안전감의 짝, 으뜸의 뜻, 백성이 지도자에게 오는 장면.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Amo&amp;amp;chapter=6&amp;amp;verse=2"&gt;NET Bible, 아모스 6:2 번역 주석 1-4, 비교 질문의 화자와 해석.&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63/"&gt;Jan de Waard·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6:3 번역 해설, 포악한 자리의 해석.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64/"&gt;Jan de Waard·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6:4 번역 해설, 상아 침상과 우리의 송아지.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65/"&gt;Jan de Waard·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6:5 번역 해설, 한 번만 나오는 동사와 다윗 구절의 읽기.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66/"&gt;Jan de Waard·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6:6 번역 해설, 대접과 요셉의 파멸.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67/"&gt;Jan de Waard·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6:7 번역 해설, 잔치와 늘어진 자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68/"&gt;Jan de Waard·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6:8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610/"&gt;Jan de Waard·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6:10 번역 해설, 시신을 거두는 사람과 침묵의 동기.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Amo&amp;amp;chapter=6&amp;amp;verse=10"&gt;NET Bible, 아모스 6:10 번역 주석 1-2, 시신 수습과 침묵의 해석.&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612/"&gt;Jan de Waard·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6:12 번역 해설, 소와 바다의 분절과 독의 뜻.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passage.php?passage=Amo+6%3A12"&gt;NET Bible, 아모스 6:12 본문 주석 1과 해설 주석 2, 소와 바다의 분절 제안.&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Amo&amp;amp;chapter=6&amp;amp;verse=13"&gt;NET Bible, 아모스 6:13 번역·해설 주석 1-2, 로드발과 가르나임의 언어유희.&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614/"&gt;Jan de Waard·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6:14 번역 해설, 하맛 어귀와 아라바 시내의 위치.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아모스 7:1-17 미약한 백성을 위한 중보와 막을 수 없는 말씀</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7.1-17/</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7.1-17/</guid><description>아모스 7:1-17의 세 환상과 중보기도, 다림줄의 뜻, 벧엘 제사장 아마샤와 아모스의 대결을 살핍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아모스는 유다 왕 웃시야와 요아스의 아들인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시대에 활동한 드고아의 목자였다(1:1). 지도자들이 사치하며 “우리의 힘으로” 강해졌다고 자랑할 때(6:4-6, 13), 하나님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한다고 맹세하셨다(6:8). 7장에서 아모스는 같은 야곱을 스스로 설 수 없는 미약한 백성으로 부른다. 지도자들의 강함에 관한 자랑과 예언자의 생존을 위한 기도가 충돌한다.&lt;/p&gt;&lt;p&gt;첫 환상에서 하나님은 메뚜기 떼를 빚고 계신다(1절). 하나님이 “내게 보이신” 환상이라는 말은 4절과 7절에서도 되풀이된다. 메뚜기는 “왕이 풀을 벤 후” 다시 풀이 움돋기 시작할 때 만들어진다. “다시 움돋는 풀”(לֶקֶשׁ, 레케쉬)은 이 절에만 두 번 나오는 명사로, 첫 수확 뒤 다시 자라는 늦은 풀이나 작물로 풀이된다. 왕의 풀베기가 어떤 제도였는지는 설명되지 않지만, 왕의 몫을 거둔 뒤 다시 자라는 풀까지 먹히면 백성의 가축과 생업이 위협받는다.&lt;/p&gt;&lt;p&gt;메뚜기가 풀을 다 먹자 아모스는 “청하건대 사하소서”(סְלַח־נָא, 셀라흐 나)라고 부르짖는다(2절). 재앙의 중단을 구하면서 용서를 청하는 것은 그 재앙이 이스라엘의 죄와 관련됨을 드러낸다. 그러나 기도의 근거는 백성의 의로움이 아닌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이다. 히브리어는 질문을 먼저 하고 “그가 작기 때문입니다”라는 이유를 뒤에 둔다. 개역개정은 본래 “누구”를 묻는 의문사를 문맥에 맞게 “어떻게”로 옮긴다. 위엄을 자랑하던 야곱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살아남을 힘이 없다.&lt;/p&gt;&lt;p&gt;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셔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답하신다(3절). 재앙을 보이신 분이 예언자의 간구를 듣고 시행을 거두신다. 아모스는 말씀을 받는 종이면서 백성을 위해 생명을 구하는 중보자다. 3:7에서 종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보이신다는 약속은 첫 두 환상에서 이러한 기도로 이어진다. 6절의 두 번째 철회 뒤에는 세 번째 환상의 다른 결말이 기다린다.&lt;/p&gt;&lt;p&gt;두 번째 환상에서 주 여호와는 “명령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신다(4절). 히브리어 “불로 송사하도록 부르다”(קֹרֵא לָרִב בָּאֵשׁ, 코레 라리브 바에쉬)는 하나님이 불로 이스라엘과 다투시는 그림이다. 불은 “큰 바다”, 곧 거대한 심연을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한다. “육지”(הַחֵלֶק, 하헬레크)는 본래 “몫, 분깃”으로, 여기서는 심연과 대비되는 이스라엘의 분배받은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아모스는 “청하건대 그치소서”(חֲדַל־נָא, 하달 나)라고 기도한다. 사죄에서 중단으로 요청의 동사는 바뀌어도 야곱의 미약함이라는 이유는 같고, 하나님은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답하신다(5-6절).&lt;/p&gt;&lt;p&gt;세 번째 환상에서 주는 담 곁에 서서 אֲנָךְ(아나크)를 들고 계신다(7절). 개역개정은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과 손에 든 “다림줄”로 옮기지만, 이 명사는 구약에서 7-8절에만 네 번 나와 뜻을 두고 논쟁이 있다. NET는 아카드어 annaku에 근거해 금속 “주석”을 택하고 상징의 자세한 뜻에 여러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UBS 번역자 지침서를 쓴 Jan de Waard와 William A. Smalley는 확실하지 않다고 인정하면서도 담의 수직을 재는 “다림줄”보다 나은 제안은 없다고 본다. 개역개정의 독법에서는 하나님이 백성의 상태를 판정하시는 그림이 뚜렷하다. 어휘 논쟁과 별개로 8-9절은 심판을 분명히 선언한다.&lt;/p&gt;&lt;p&gt;하나님은 아모스가 본 것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겠다고 하신다(8절). 이어지는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는 “내가 다시는 그를 지나쳐 가기를 계속하지 않겠다”(לֹא־אוֹסִיף עוֹד עֲבוֹר לוֹ, 로 오시프 오드 아보르 로)이다. 죄를 보고도 지나쳐 두던 일을 이제 그치겠다는 뜻이다. UBS 해설은 이스라엘을 바르게 서지 못한 담에 비유하고, 앞의 두 철회와 달리 이번에는 반드시 벌하시겠다는 결론으로 풀이한다. 이 장면 뒤에는 아모스의 중보도 재앙의 철회도 없다.&lt;/p&gt;&lt;p&gt;심판은 “이삭의 산당들”, “이스라엘의 성소들”, “여로보암의 집”을 겨눈다(9절). 조상의 이름을 지닌 제의 장소도 파괴되고 여로보암의 왕조도 칼을 피하지 못한다. “내가 일어나”는 2절과 5절의 “서리이까”와 같은 동사다. 야곱은 재앙 앞에서 설 수 없는데 여호와는 왕조를 치려고 일어서신다. 하나님은 그들을 여전히 “내 백성”이라 부르시지만, 언약의 이름과 왕실의 보호가 행위를 정당하게 만들지는 않는다.&lt;/p&gt;&lt;p&gt;벧엘 제사장 아마샤는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여 이 땅이 그의 말을 견딜 수 없다고 고발한다(10-11절).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심판의 기준을 두시는 일을 제사장은 반역으로 보고한다. 고발 내용도 원래 말씀과 다르다. 9절은 “여로보암의 집”을 칼로 치리라고 했으나, 아마샤는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로 바꾸어 왕 개인을 향한 위협으로 만든다. “여호와” 대신 “아모스가 말하기를”이라 하여 발언도 한 사람의 정치적 주장으로 돌린다. 끝의 “반드시 사로잡혀”는 같은 동사를 겹친 גָּלֹה יִגְלֶה(갈로 이글레)로 추방의 확실성을 강조하며, 17절에서 그대로 반복된다.&lt;/p&gt;&lt;p&gt;아마샤는 “선견자” 아모스에게 유다로 가서 떡을 먹으며 예언하고 벧엘에서는 더 예언하지 말라고 명한다(12-13절). “선견자” 자체는 예언자를 부르는 호칭이며, 적대감은 뒤의 명령에서 드러난다. 벧엘이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이라는 이유로 왕실이 예언의 장소와 생계를 통제하려 한다. “다시는 … 예언하지 말라”는 8절의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와 같은 동사와 부사를 쓴다. 하나님은 심판을 더 넘겨두지 않겠다고 하시는데 제사장은 그 심판을 알리는 말씀을 멈추려 한다. 이는 선지자들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했다는 2:12의 고발을 그대로 실행한 행동이다.&lt;/p&gt;&lt;p&gt;아모스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לֹא־נָבִיא אָנֹכִי וְלֹא בֶן־נָבִיא אָנֹכִי, 로 나비 아노키 벨로 벤 나비 아노키)는 시제를 정하는 동사가 없는 명사문이다. 현재로 읽으면 직업적 예언자 신분을 부인하고, 과거로 읽으면 부르심 이전의 생업을 밝힌다. UBS 해설은 학자들의 견해가 거의 반반이라고 소개하면서도 문법과 문맥상 현재형을 택하며, 개역개정도 현재형이다. NET는 과거형으로 옮기되 현재형도 가능하다고 주석한다. “선지자의 아들”은 예언자 집단의 구성원일 수 있다. 아모스는 가축을 돌보고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였다고 밝힌다. 여기의 뽕나무는 돌무화과나무이고, 손질은 열매에 칼집을 내거나 찔러 익게 하는 일이다. 그는 이미 생업이 있었으며 떡을 먹으려고 예언한다는 아마샤의 전제를 거부한다.&lt;/p&gt;&lt;p&gt;여호와는 양 떼를 따르던 아모스를 데려다가 “가서 예언하라”(לֵךְ הִנָּבֵא, 레크 힌나베)고 명하셨다(15절). 아마샤의 “가라”는 유다를, 하나님의 “가라”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다. 3:8의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라는 물음처럼 아모스는 보내신 분 때문에 말한다. 그는 아마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고 요구하며 금지 명령을 되짚는다(16절). “경고하지”로 옮긴 תַטִּיף(탓티프)는 방울져 떨어짐을 뜻하는 동사로 예언자의 발언에 쓰인다. 미가 2:6에서도 같은 동사로 예언을 금지한다.&lt;/p&gt;&lt;p&gt;17절의 “그러므로”는 예언 금지와 아마샤에게 닥칠 심판을 잇는다. 개역개정은 16절 끝의 “하므로”로 그 관계를 옮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은 아마샤의 고발에서 빠진 발언의 주체를 되살린다. 아내는 성읍에서 창녀가 되고 자녀는 칼에 쓰러지며 땅은 정복자의 손에서 새 주인들에게 나뉜다. UBS 해설은 이 분할을 정복과 이주에 따른 결과로 풀이하고, 아마샤가 죽을 “더러운 땅”은 여러 언어에서 “외국”으로 옮기는 편이 낫다고 제안한다. 그의 땅, 그가 죽을 땅, 이스라엘이 떠날 땅이 잇달아 언급된다. 예언자를 내쫓으려 한 사람도 자기 땅에 남지 못한다.&lt;/p&gt;&lt;p&gt;아내와 자녀에 관한 선언은 제사장의 가족도 전쟁의 참화를 피하지 못함을 말한다. 본문은 아내가 그 처지에 이르는 개별 과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더러운 땅”은 제사장이 이방 땅에서 죽을 처지이며 다른 민족의 열등함을 뜻하지 않는다. 7절의 아나크와 17절의 “측량하여”(בַּחֶבֶל, 바헤벨, 직역 ‘줄로’)는 다른 낱말이지만, 개역개정의 독법에서 앞의 줄은 백성을 판정하고 뒤의 줄은 그 판정에 따라 땅을 타인에게 나누는 결과를 그린다. 아마샤가 지키려던 성소와 왕국은 그의 가정과 토지도 지켜 주지 못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아모스 7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 부르시면서 그 성소와 왕조를 심판하겠다고 하신다. 백성을 택하신 하나님의 소유권은 그들을 불의 가운데 내버려 두는 면허가 아니다. 아모스는 그 관계를 붙들고 백성의 생존을 구하고, 아마샤는 성소가 왕에게 속했다는 이유로 예언을 금지한다. 말씀 앞에서 죄를 인정하고 긍휼을 구할 것인지, 거룩한 이름과 제도를 자기 권한을 지키는 데 쓸 것인지가 여기서 갈린다. 메뚜기와 불의 철회, 성소와 왕조의 심판, 땅에서의 추방은 모두 이 언약 관계 안에서 이해된다.&lt;/p&gt;&lt;p&gt;아모스 2:11-12에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일으키셨는데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고발하신다. 7장의 아마샤는 그 고발을 벧엘에서 실행한다. 3:2에서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이스라엘만 알았으므로 그 죄악을 보응하겠다고 하시고, 3:8은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로 끝난다. 아모스가 자신의 생업보다 여호와의 파송을 예언의 이유로 드는 것도 이 질문의 연장선에 있다. 3:14-15에 이미 벧엘의 제단과 사치스러운 궁들의 심판이 선포되었으므로, 아마샤의 발언 금지는 그 경고를 무시한 채 왕실의 안전을 지키려는 행동이다.&lt;/p&gt;&lt;p&gt;금송아지 사건에서 하나님이 진멸을 말씀하시자, 모세는 애굽에서 구원하신 능력과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약속을 들어 간구했고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출 32:7-14). 모세가 조상의 이름으로 약속을 붙들었다면, 아모스는 그 이름을 가진 후손이 재앙 앞에 설 수 없다고 호소한다. 두 예언자 모두 죄를 지은 백성에게서 호소할 근거를 찾지 않는다. 재앙이 철회된 뒤에도 모세는 산에서 내려와 송아지를 없애고 백성의 죄를 물었다(32:15-20). 아모스가 중보하면서 산당과 성소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도 같은 순서다. 백성의 생존을 구하는 사람은 그들을 파괴하는 예배와 불의를 하나님 앞에 드러낸다.&lt;/p&gt;&lt;p&gt;민수기 14:13-25에서 모세가 출애굽 이후 베푸신 인자와 사죄를 기억하며 용서를 구하자, 하나님은 사하겠다고 하시면서도 거역한 세대는 약속의 땅을 보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신다. 즉각적인 진멸을 면하는 일과 그 세대가 자기 선택의 결과를 겪는 일이 한 사건에 함께 있다. 아모스 7장의 두 차례 철회도 이스라엘이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하든 성소와 왕조를 지켜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다. 백성은 그 긍휼을 받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야 한다.&lt;/p&gt;&lt;p&gt;신명기 28장은 언약을 거역하면 메뚜기가 들의 소산을 먹고(28:38) 자녀가 포로가 되어 부모와 함께 있지 못하리라고(28:41) 경고한다. 아모스의 첫 환상과 아마샤에게 내린 마지막 선언이 바로 그 생업과 가족과 땅의 영역을 건드린다. 땅을 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할 때 그 땅에서 누리던 생업과 거주가 무너진다. 지배자와 제사장의 선택은 그들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의 삶에도 결과를 낳으며, 약한 이들의 생존을 가볍게 여긴 공동체는 결국 자기 생존도 지키지 못한다.&lt;/p&gt;&lt;p&gt;북왕국을 세운 첫 여로보암은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가면 자기에게서 돌아설까 두려워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두고 제사장과 절기를 정했다(왕상 12:25-33). 아모스 시대의 여로보암은 뒤의 다른 왕이지만, 아마샤가 벧엘을 왕의 성소라 부르는 말은 그 정치적 예배가 이어져 왔음을 드러낸다. 7:9가 성소의 파괴와 여로보암의 집을 치는 칼을 한 선언에 묶는 까닭이 여기 있다. 왕을 지키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을 추방하는 데 이르렀다.&lt;/p&gt;&lt;p&gt;열왕기상 22:13-28에서 미가야는 다른 예언자들처럼 왕에게 길한 말을 하라는 요구를 받고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말하겠다고 답하며, 패전의 환상을 밝힌 뒤 감옥에 갇힌다. 아모스는 예언할 장소와 생계를, 미가야는 예언의 내용을 통제받았다. 두 이야기에서 여호와의 말씀은 왕이 듣는 여러 조언 가운데 하나로 흡수되지 않고 왕의 결정을 심판한다. 왕권을 향한 책망을 정치적 음모로만 취급하면 왕과 백성은 회개를 요구하는 말씀을 듣지 못한다.&lt;/p&gt;&lt;p&gt;예레미야 26:1-19에서는 예루살렘 성전도 같은 시험을 받는다. 순종하지 않으면 성전이 실로처럼 되리라고 선포한 예레미야는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여호와께서 자신을 보내셨다며 길과 행위를 고치라고 권한다. 장로들은 미가의 성전 심판 예언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간구한 히스기야를 기억한다. 북왕국 벧엘의 말씀 거부가 남왕국 성전에서도 되풀이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어느 성소도 자신의 말씀 위에 두지 않으시며, 성전의 미래를 지키려는 사람은 예언자를 없애는 대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lt;/p&gt;&lt;p&gt;신명기 30:1-10은 땅에서 쫓겨난 뒤에도 백성이 여호와께 돌아오고 하나님이 그들을 모으시며 마음에 할례를 베푸실 미래를 말한다. 그러므로 아모스 7장의 확정된 추방은 북왕국의 거짓 안전을 무너뜨리는 말씀이지, 언약의 역사 전체에서 긍휼이 끝났다는 선언이 아니다. 심판 뒤의 소망은 성소나 왕조의 존속에 있지 않고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다. 백성은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생명이신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청종하도록 새로워진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아모스는 백성의 생명을 구하면서 그들의 성소와 왕조를 책망했고, 아마샤는 그 말씀을 왕을 위협하는 말로 듣고 예언자를 자기 권한 밖으로 내보내려 했다. 신약은 보내신 분의 말씀을 거부하는 이 역사를 예수께서 겪으신 배척과 연결한다. 아모스는 심판을 알리고 철회를 구하는 종이지만,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로서 자기 생명을 드려 죄인을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신다.&lt;/p&gt;&lt;p&gt;마가복음 12:1-12의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거듭 때리고 죽이다가, 마지막에 보내진 사랑하는 아들까지 죽인다. 상속자를 죽이면 유산을 차지하리라는 생각에서다. 맡아 관리하는 이가 주인의 권한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씀하라고 보냄받은 아모스를 왕의 성소에서 내보내려 한 아마샤와 이어진다. 예수는 자신을 향한 배척을 예언자들의 역사 속에 두시면서 아버지와 자신의 독특한 관계를 밝히신다. 이어 인용하신 버린 돌과 모퉁이의 머릿돌 말씀은 그 배척이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키지 못한다고 선언한다. 비유의 경고는 당시 예수를 대적한 지도자들을 겨누며, 예수와 제자들도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맡겨진 공동체를 자기 소유처럼 다루는 지도자와 교회도 이 경고를 듣는다.&lt;/p&gt;&lt;p&gt;이 비유에 앞서 예수는 성전에서 매매하던 사람들을 내쫓고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부르셨으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를 죽일 방도를 찾았다(막 11:15-18). 아마샤가 벧엘의 왕실 지위를 내세웠다면, 예수는 하나님의 집이 무엇을 위해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밝히신다. 성소를 지킨다는 명목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행동과 결합하는 일이 반복된다.&lt;/p&gt;&lt;p&gt;목자라는 아모스의 생업은 예언을 돈벌이로 보는 아마샤에게 답하는 실제 경력이었다. 예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로 자신을 밝히신다(요 10:11-18). 위험이 닥치면 양을 버리는 삯꾼과 달리, 그는 아버지께 받은 명령을 따라 목숨을 내어 주고 다시 얻으신다. 맡기신 양을 아시는 그분은 그들의 연약함을 이용해 자신의 안전과 권한을 지키지 않으신다.&lt;/p&gt;&lt;p&gt;미약한 야곱을 위해 기도한 아모스는 중보하시는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한다. 예수는 영원히 살아 계셔서 자신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간구하신다(히 7:23-28). 아모스의 간구는 특정 재앙의 철회를 구했고 그 뒤의 심판을 없애지는 못했지만, 그리스도의 중보는 죽음을 이기신 생명과 단번에 자신을 드리신 제사에 근거한다. 아마샤는 백성의 예배를 맡은 제사장이면서 자신도 심판의 말씀을 들어야 했으나, 그리스도는 자기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는 거룩하고 악이 없는 대제사장이시다. 그를 의지하는 사람은 자기 무력함을 숨겨 구원의 자격을 만들 필요 없이 죄를 인정하고 나아간다.&lt;/p&gt;&lt;p&gt;그리스도의 자기 봉헌은 7:8이 남긴 물음에도 답한다.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는 직역하면 다시는 그를 지나쳐 가지 않겠다는 말이다. 앞의 두 환상에서 하나님은 죄를 당장 심판하지 않으셨으나 그 넘겨둠은 끝없이 이어지지 않았다. 로마서 3:25-26은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워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고 말한다. 오래 참으며 죄를 지나쳐 두신 일이 죄를 가볍게 여기신 일이 아니었음이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드러난다. 아모스의 세 번째 환상에서는 더는 넘겨두지 않는 심판이 북왕국을 향했고, 복음에서는 그 공의가 아들의 십자가에서 시행되어 예수 믿는 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죄를 대충 넘기신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더는 긍휼이 없다는 절망에도 머물지 않는다.&lt;/p&gt;&lt;p&gt;그리스도의 피는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히 9:11-15), 그는 하늘에 들어가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으며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다시 나타나실 것이다(9:24-28). 아모스 7장에서 재앙을 넘기신 긍휼은 말씀을 듣고 살아야 할 시간을 주었다. 그리스도의 속죄도 죄인을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부른다. 벧엘에서는 왕권의 이해에 묶인 성소가 말씀을 막았으므로, 새 언약 백성은 자기 예배가 그런 이해관계에 묶여 있지 않은지 살핀다. 세상의 성소와 왕조가 무너질 때도 그리스도께서 여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남는다.&lt;/p&gt;&lt;p&gt;죽고 다시 살아나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롬 8:34). 바울은 곧이어 환난과 기근과 위험과 칼을 열거하며,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신자를 끊을 수 없다고 말한다(8:35-39). 그리스도의 중보는 모든 재난을 피하게 한다는 약속이 아니며, 고난 속에서 신자를 붙들고 최종적인 정죄에서 구원한다. 성령도 기도할 바를 모르는 성도의 연약함을 도우신다(8:26-27). 자기 말이 부족해도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다 설명하지 못해도 그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할 수 있다.&lt;/p&gt;&lt;p&gt;히브리서 4:12-16은 모든 것을 드러내는 말씀을 말한 뒤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큰 대제사장에게 나아가라고 권한다. 아마샤는 책망을 막아 안전을 지키려 했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드러내시는 하나님께 긍휼을 구한다. 죄 없이 시험받으신 예수께서 연약함을 아시므로, 회개하는 사람은 정직하게 고백하고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lt;/p&gt;&lt;p&gt;베드로전서 2:4-10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나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와 공동체가 거룩한 집으로 세워진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은 어떤 기관이든 비판에서 보호하는 소유권 증서가 되지 않는다. 백성은 긍휼을 얻었기에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며, 그리스도께서 죄를 담당하신 목적대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다(2:24).&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아모스는 심판을 선포한 백성을 위해 사죄를 구했다. 그들의 생존을 구하는 기도와 죄를 책망하는 말씀은 서로를 약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도 잘못한 사람이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며 돌이키기를 기도한다. 상대의 파멸을 바라거나 긍휼을 이유로 죄를 감출 수 없다.&lt;/p&gt;&lt;p&gt;중보기도는 계속되는 가해를 덮거나 피해자에게 화해를 강요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아모스가 호소한 야곱의 미약함은 기도가 누구의 생존을 향해야 하는지 드러낸다. 잘못한 사람을 위한 기도에도 행위의 중단과 책임이 따른다. 지도자의 평판을 피해자의 안전보다 앞세우면 미약한 야곱을 위한 기도와 멀어진다.&lt;/p&gt;&lt;p&gt;아마샤는 하나님의 책망을 반역으로 바꾸어 보고하고 왕의 성소라는 이유로 예언을 금지했다. 거룩한 기관의 이름과 권력자의 후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막을 권한을 주지 않는다. 교회는 불의와 권한 남용을 책망하는 말씀을 듣고 그 행위를 고쳐야 한다. 아모스를 보내신 하나님의 권위를 고백하면서 오늘 지도자의 모든 판단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높일 수도 없다. 지도자의 가르침과 행동 역시 성경의 판단을 받는다.&lt;/p&gt;&lt;p&gt;재앙이 두 번 거두어졌어도 하나님은 성소와 왕조를 심판하겠다고 선언하셨다. 위기를 넘겼다는 사실이 과거의 모든 행위를 승인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주어진 긍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에서 돌이킬 시간이다. 반대로 아마샤의 가족과 땅을 향한 특정한 심판을 오늘의 전쟁 피해자나 난민에게 적용하여 그들의 죄를 추정할 수도 없다. 전쟁 속 성적 착취를 겪은 이들을 정죄하거나 수치의 표지로 삼아서는 안 된다.&lt;/p&gt;&lt;p&gt;그리스도는 죄를 담당하고 부활하여 지금도 자기 백성을 위해 간구하신다. 신자는 자기 의로움을 증명하며 말씀의 책망을 피하는 대신 연약함을 아시는 대제사장께 긍휼을 구한다. 죄를 인정하고 피해를 바로잡는 동안 손실과 부끄러움을 겪어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 그 확신은 책임을 피하는 구실이 아니라 진실하게 고백하고 돌이킬 힘이 된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biblehub.com/hebrew/3954.htm"&gt;Brown-Driver-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 לֶקֶשׁ 항목(Strong 3954). Bible Hub 공개본.&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biblehub.com/hebrew/2506.htm"&gt;Brown-Driver-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 חֵלֶק 항목 I.2e, 아모스 7:4의 땅 용례(Strong 2506). Bible Hub 공개본.&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Amo&amp;amp;chapter=7&amp;amp;verse=7"&gt;NET Bible, 아모스 7:7 번역자 주석, אֲנָךְ의 ‘주석’ 번역과 전통적 다림줄 해석.&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77/"&gt;Jan de Waard·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Helps for Translators, United Bible Societies, 1979), 아모스 7:7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78/"&gt;Jan de Waard·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Helps for Translators, United Bible Societies, 1979), 아모스 7:8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714/"&gt;Jan de Waard·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Helps for Translators, United Bible Societies, 1979), 아모스 7:14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Amo&amp;amp;chapter=7&amp;amp;verse=14"&gt;NET Bible, 아모스 7:14 번역자 주석, 명사문의 시제와 돌무화과 손질.&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biblehub.com/hebrew/5197.htm"&gt;Brown-Driver-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 נָטַף 항목 히필형, 예언의 발언(Strong 5197). Bible Hub 공개본.&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717/"&gt;Jan de Waard·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Helps for Translators, United Bible Societies, 1979), 아모스 7:17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아모스 8:1-14 가난한 이를 삼킨 시장과 말씀의 기근</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8.1-14/</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8.1-14/</guid><description>아모스 8:1-14의 여름 과일 환상, 속이는 저울과 사람을 사고파는 거래, 애통과 말씀의 기근을 살핍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주 여호와께서 아모스에게 여름 과일 한 광주리를 보이신다(1절). “내게 이와 같이 보이셨느니라”는 메뚜기(7:1), 불(7:4), 다림줄(7:7) 환상을 연 문구와 같아, 이 넷째 환상은 앞의 셋과 이어서 읽어야 한다. 처음 두 환상에서 아모스는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라고 간구했고 여호와는 뜻을 돌이키셨다(7:2-3, 5-6). 셋째 환상에는 그런 간구가 없다. 그 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를 고발하고 쫓아내는 사건(7:10-17)이 기록되고 곧바로 이 환상이 이어진다. 이 배열 때문에 8장은 예언의 말씀을 거절한 공동체에 어떤 결말이 닥치는지를 보여 주는 장으로 읽힌다.&lt;/p&gt;&lt;p&gt;광주리에 담긴 것은 “여름 과일”(כְּלוּב קָיִץ, 켈루브 카이츠), 곧 여름철에 거두는 열매다. 아모스가 그 이름을 답하자 곧바로 “끝”(הַקֵּץ, 하케츠)이 이르렀다는 말씀이 이어진다(2절). 두 단어는 첫 자음과 끝 자음이 같고 소리도 거의 같아, 아모스가 입에 올린 과일 이름이 하나님의 입에서 이스라엘의 끝으로 바뀌어 돌아온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이 소리 연결이 사라진다. UBS 번역 핸드북의 Jan de Waard와 William A. Smalley는 이 말놀이를 다른 언어로 살리기 어렵다고 보고, “끝이 왔다”를 충실히 옮긴 뒤 두 단어의 소리가 비슷하다는 사실을 각주로 알리기를 권한다. 수확의 풍성함을 떠올리게 하는 광주리가 그 이름의 소리 때문에 끝을 알리는 표지가 된다.&lt;/p&gt;&lt;p&gt;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여전히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부르신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부르신 바로 그 공동체에 끝이 임한다.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לֹא־אוֹסִיף עוֹד עֲבוֹר לוֹ, 로-오시프 오드 아보르 로)는 직역하면 ‘내가 다시는 그를 지나가지 않겠다’로, 죄를 보고도 벌하지 않고 지나쳐 주던 관용을 거두신다는 말이다. 이 문장은 다림줄 환상의 7:8과 글자 그대로 같다. 메뚜기와 불의 환상 때에는 아모스의 간구 뒤에 재앙을 거두셨지만, 셋째와 넷째 환상에서는 같은 유예가 주어지지 않는다.&lt;/p&gt;&lt;p&gt;3절은 끝이 닥치는 날을 보여 준다.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의 히브리어(שִׁירוֹת הֵיכָל, 시로트 헤칼)는 ‘헤칼의 노래들이 울부짖을 것이다’라는 대담한 표현이며, 개역개정은 이를 노래가 애곡으로 변한다고 풀었다. ‘헤칼’은 궁전과 성전을 모두 가리킬 수 있어 NET는 “성전”으로 옮기고 “궁전”을 대안으로 둔다. UBS 핸드북은 본문을 조금 고쳐 ‘궁전에서 노래하던 여인들이 울부짖을 것’으로 읽는 많은 학자의 제안을 소개하고 그 이해를 따르기를 권하지만, BHS와 개역개정은 ‘노래들’로 읽는다. 어느 읽기든 노래가 울리던 곳이 통곡의 장소로 바뀐다. 시체가 많아 한 덩어리처럼 쌓이고, 절은 ‘쉿, 조용히 하라’는 감탄사(הָס, 하스)로 끝난다. 개역개정은 이를 시체를 내어버리는 행동을 꾸미는 “잠잠히”로 옮겼다. UBS 핸드북은 이 외침을 누가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고 하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을 전달하라고 권한다. 같은 감탄사가 6:10에서는 시신을 수습하던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며 입을 막는 말로 쓰였으므로, 노래가 끊긴 자리를 채운 침묵은 하나님의 이름조차 꺼내기 두려운 정적이다.&lt;/p&gt;&lt;p&gt;4절의 “이 말을 들으라”에서 본문은 그 끝이 누구의 어떤 행동 때문에 오는지 밝힌다. 고발 대상은 “가난한 자를 삼키며”(הַשֹּׁאֲפִים אֶבְיוֹן, 하쇼아핌 에브욘)라고 불리는 이들이며, 같은 분사가 2:7에서도 힘없는 자를 짓밟는 자들을 불렀다. “망하게 하려는”(וְלַשְׁבִּית, 벨라쉬비트)은 ‘그치게 하다’라는 사역형으로, 5절의 안식일과 어근이 같다. 안식일은 일을 그치는 날인데 이들은 가난한 사람을 땅에서 그치게 하려 한다. 안식일을 지키는 듯하면서 가난한 이웃의 삶을 끝내려는 위선이 단어 선택에서부터 드러난다.&lt;/p&gt;&lt;p&gt;5절은 그들의 속말을 인용한다. “월삭이 언제 지나서”의 ‘지나다’는 2절에서 하나님이 더는 ‘지나가지’ 않겠다고 하신 동사와 같다. 상인들은 거룩한 날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지나쳐 주지 않으신다. NET는 월삭에도 안식일처럼 노동이 금지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수넴 여인의 남편이 새 달도 안식일도 아닌데 왜 선지자에게 가느냐고 묻는 장면(왕하 4:23)도 두 날이 짝을 이루어 지켜졌음을 보여 준다. 상인들은 그 날을 어기지 않지만 마음은 다시 곡식을 팔 시간에 가 있다. 그들은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팔려 한다. 곡식을 담아 주는 에바는 작게, 값으로 받을 은을 다는 세겔은 무겁게 하면 덜 주고 더 받는다. UBS 핸드북은 저울 한쪽을 무겁게 하거나 저울대를 비트는 수법을 예로 들면서, 중요한 것은 특정 도량형보다 속임수의 실례라고 설명한다. 목적을 나타내는 부정사 셋이 이어지며,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속마음이 구체적인 사기 계획으로 펼쳐진다.&lt;/p&gt;&lt;p&gt;6절은 그 계획이 사람에게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들은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고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려 한다. NET는 이를 가난한 사람을 종으로 사들이는 거래로 이해한다. 2:6에서 은과 신 한 켤레를 받고 사람을 파는 쪽이 고발되었다면, 8:6에서는 사는 쪽의 속말이 인용되어 그 거래의 양쪽이 모두 드러난다. 상인들은 타작할 때 떨어지는 부스러기인 “찌꺼기 밀”까지 팔겠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은 장에 나왔다가 양과 질에서 손해를 보고, 빚을 갚지 못하면 끝내 자신이 팔리는 처지로 내몰린다. 7절에서 하나님이 잊지 않겠다고 맹세하시는 행위가 바로 이 착취다.&lt;/p&gt;&lt;p&gt;7절에서 여호와는 “야곱의 영광”(בִּגְאוֹן יַעֲקֹב, 비그온 야아코브)을 두고 맹세하신다. ‘영광’은 높음과 위엄도, 교만도 뜻할 수 있다. 6:8에서 여호와는 자기를 두고 맹세하시며 ‘야곱의 영광’(גְּאוֹן יַעֲקֹב, 게온 야아코브)을 싫어한다고 하셨으므로, 같은 표현이 맹세의 근거로 나오는 여기서 해석이 갈린다. UBS 핸드북은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다른 대상을 두고 맹세하시는 일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이를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칭호로 읽는다. NET는 이스라엘의 변하지 않는 교만을 두고 맹세하시는 반어로 이해하며, 히브리어 맹세 형식에 자기 저주가 생략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맹세의 내용은 분명하다. 개역개정의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는 직역하면 ‘내가 영원히 잊는다면’으로, 생략된 저주 때문에 강한 부정이 된다. 거래를 마치고 장부를 덮어도 그 행위는 하나님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lt;/p&gt;&lt;p&gt;8절은 땅이 떨고 주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앞에서 고발한 죄의 당연한 결과라는 말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BHS는 ‘빛처럼’(כָאֹר, 카오르)이라 적지만, 거의 같은 문장이 반복되는 9:5에는 ‘나일강처럼’(כַיְאֹר, 카예오르)이 있고 8:8 끝에도 ‘애굽의 나일강처럼’이 나온다. NET는 8:8의 형태를 필사 과정의 오류로 보고 ‘나일강’으로 읽으며, 개역개정도 “강의 넘침 같이”로 같은 이해를 따른다. 해마다 불어났다 빠지는 나일강처럼 땅 전체가 솟았다 가라앉는 모습은 사람들이 딛고 선 터전이 흔들리는 심판을 그린다. 시장의 부정은 몇몇 상인의 사사로운 일로 끝나지 않고 그 사회가 기대어 사는 땅을 뒤흔든다.&lt;/p&gt;&lt;p&gt;9절은 하나님이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실 날을 말한다. 해가 가장 높이 뜬 시각에 해가 지고 빛이 가장 밝은 날에 땅이 어두워진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는 5:18-20의 경고와 이어진다. 10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절기를 애통으로, 노래를 애곡으로 바꾸신다. ‘바꾸다’는 6:12에서 이스라엘이 정의를 쓸개로 바꾸었다고 고발할 때의 동사이며, ‘절기’는 5:21에서 하나님이 미워하신다고 하신 말과 같다. 백성이 정의를 뒤집었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절기를 뒤집으신다. ‘애곡’은 5:1에서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위해 부른 장례의 애가와 같은 명사다. 굵은 베와 대머리는 죽은 이를 애도하는 몸짓이며, “독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애통하듯”은 가문의 이름과 미래가 함께 끊기는 상실을 그린다. 그 끝은 쓴 날과 같다. 1-2절의 광주리가 알린 끝이 쓰라린 결말로 구체화된다.&lt;/p&gt;&lt;p&gt;11절은 “보라 날이 이를지라”로 하나님이 보내실 기근을 알리고 곧바로 그 기근을 다시 정의한다. 양식이 없어 주림도, 물이 없어 갈함도 아닌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다. 히브리어는 ‘여호와의 말씀들을 듣는 것에 대한 기근’이며, 개역개정은 부정어를 넣어 결핍의 뜻을 살렸다. 모자라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백성이 그 음성을 듣는 관계다. UBS 핸드북은 이를 하나님에게서 오는 메시지가 없는 상태로 설명하고, 양식과 물의 부족을 그 결핍을 그리는 그림으로 다룬다. 12절에서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여호와의 말씀을 찾아 헤매지만 얻지 못한다. NET는 두 바다를 지중해와 사해로 이해한다. ‘비틀거리다’는 4:8에서 물을 찾아 비틀거리며 다니고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던 장면의 동사다. 선지자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명한 백성(2:12), 아모스의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다고 한 아마샤(7:10-13)처럼 말씀을 밀어낸 공동체가 위기 때에는 그 말씀을 찾아다니지만 응답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불러낼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다.&lt;/p&gt;&lt;p&gt;13절은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갈하여 쓰러진다고 말한다. 아모스는 5:2에서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고 애가를 불렀다. 다음 세대를 이어 갈 젊은이들이 쓰러진다는 것은 공동체의 내일이 끊긴다는 뜻이다. ‘갈하여’는 11절의 ‘물이 없어 갈함’과 같은 명사여서, 말씀 기갈 바로 뒤에 놓인 이 목마름은 육신의 갈증과 말씀의 결핍을 함께 담은 심판의 그림으로 읽을 수 있다.&lt;/p&gt;&lt;p&gt;14절은 쓰러지는 이들이 무엇을 의지했는지 밝힌다.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הַנִּשְׁבָּעִים בְּאַשְׁמַת שֹׁמְרוֹן, 한니쉬바임 베아쉬마트 쇼므론)의 ‘맹세하다’는 7절에서 여호와께서 맹세하실 때의 동사와 같다. 여호와의 맹세는 끝내 서고, 우상을 두고 맹세한 이들은 쓰러진다. ‘죄된 우상’으로 옮긴 말은 문자적으로 ‘죄책, 허물’이다. NET는 이것이 아세라 형상이나 벧엘의 금송아지를 가리킬 가능성을 언급하고 일부 번역이 하맛 사람들의 신 아시마(왕하 17:30)로 읽는다고 소개하며, UBS 핸드북은 벧엘의 송아지 형상을 선지자가 비꼬아 부른 말로 본다. 단의 신들은 여로보암 1세가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를 떠올리게 한다(왕상 12:28-30). 브엘세바에 관한 구절은 BHS에서 ‘브엘세바의 길’(דֶּרֶךְ בְּאֵר־שָׁבַע, 데레크 베에르-샤바)이다. UBS 핸드북은 브엘세바로 가는 순례길을 두고 맹세했다는 이해와 자음을 고쳐 ‘브엘세바의 신’으로 읽자는 제안을 다루며 이를 개연성이 낮은 읽기와 불확실한 읽기 사이의 선택이라고 평가하고, NET는 본문을 고쳐 ‘너의 사랑하는 이’로 옮긴다. 개역개정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은 그곳 사람들이 받들던 대상을 드러낸다. 북쪽 끝의 단과 남쪽 끝의 브엘세바가 함께 나와 온 땅의 종교 생활이 고발된다. 그들은 엎드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이 ‘일어나다’는 첫 환상에서 아모스가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7:2)라고 물을 때의 동사다. 아모스의 중보로 한때 설 수 있었던 야곱이 말씀을 거절하고 다른 대상을 두고 맹세한 끝에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아모스 8장의 배경은 여로보암 2세가 영토를 회복하던 북이스라엘의 번영기다(암 1:1; 왕하 14:23-29). 시장에 곡식이 돌고 궁전에서 노래가 울리던 시대에 하나님은 번영의 한가운데서 끝을 선언하셨고, 그 끝은 수십 년 뒤 앗수르의 사마리아 함락으로 현실이 되었다. 열왕기하 17:13-14는 그 원인을 여호와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경고하셨으나 백성이 듣지 않고 목을 곧게 한 데서 찾는다. 아모스 8장의 말씀 기갈과 열왕기하의 평가는 같은 결말을 서로 다른 자리에서 보여 준다.&lt;/p&gt;&lt;p&gt;작은 에바와 큰 세겔은 율법이 구체적으로 금한 행위였다. 레위기 19:35-37은 공평한 저울과 추와 에바를 쓰라고 명하며, 그 끝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로 소개하신다. 같은 장은 품꾼의 삯을 밤새 두지 말고(19:13)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19:18) 한다. 도량형의 정직은 시장에서 이웃 사랑이 취하는 형태다. 신명기 25:13-16은 크고 작은 두 종류의 추와 되를 두지 말라고 하며 그런 일을 행하는 자가 여호와께 가증하다고 한다. 아모스의 상인들은 곡식을 줄 때는 작은 에바를, 은을 받을 때는 큰 세겔을 쓴 바로 그 사람들이다. 신명기가 그 땅에서의 장수를 이 금령과 연결했다면, 아모스 8:8은 그 땅이 요동하는 장면을 그린다. 잠언 11:1도 속이는 저울을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말한다.&lt;/p&gt;&lt;p&gt;신명기 5:12-15의 안식일은 남종과 여종도 쉬게 하라고 명하며 그 이유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이었던 기억에 둔다. 안식일은 노동에 묶인 사람에게 쉼을 돌려주는 날이었다. 그러나 아모스의 상인들은 그 날을 지키면서도 가난한 사람을 다시 사고팔 날을 기다린다. 신명기 15:7-15는 가난한 형제에게 손을 펴라 하고, 도움을 거절하려는 속생각까지 다루며, 일곱째 해에 놓아 주는 종을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타작마당에서 넉넉히 주라고 한다. 신명기는 타작마당에서 종에게 넉넉히 주라고 하는데, 아모스의 상인들은 타작마당의 부스러기까지 팔아 이익을 남긴다. 두 본문 모두 사람의 마음속 계산을 하나님 앞으로 끌어낸다.&lt;/p&gt;&lt;p&gt;이사야 58장도 예배와 착취가 한 사람의 삶에 함께 있는 문제를 다룬다. 백성은 금식하는데 왜 보지 않으시느냐고 불평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킨다고 답하신다(58: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결박을 풀고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는 일이다(58:6-7). 이사야 58:10은 주린 자를 만족하게 하면 어둠이 낮과 같이 되리라고 약속하는데, 아모스 8:9에서는 대낮이 어둠으로 바뀐다. 이웃에게 손을 펴는 삶에는 어둠이 낮이 되는 약속이, 이웃을 삼키는 삶에는 낮이 어둠이 되는 심판이 선포된다. 안식일을 즐거운 날로 존귀하게 여기라는 58:13은 쉼의 날을 이익 계산의 휴지기로 여기는 태도와 정반대에 선다.&lt;/p&gt;&lt;p&gt;아모스 8장에는 애굽의 강(8절), 대낮의 흑암(9절), 외아들을 잃은 애통(10절)이 한 장에 모여 있다. 하나님은 애굽 온 땅에 흑암을 내리셨고(출 10:21-23), 열째 재앙의 밤에는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다(12:29-30). 아모스가 출애굽기를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이 이미지들은 출애굽의 심판을 떠올리게 한다. 9:7에서 하나님은 출애굽이 이스라엘의 특권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출애굽의 은혜를 입은 백성이 애굽처럼 사람을 부리면 그들이 듣는 심판의 언어도 애굽이 들었던 언어를 닮는다. 외아들을 잃은 애도는 예레미야 6:26에서도 멸망 앞의 통곡을 그리고, 스가랴 12:10에서는 하나님이 부으시는 영으로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 독자를 위해 애통하듯 하는 회개의 슬픔이 된다. 신약은 이 스가랴 본문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에게 적용한다(요 19:37).&lt;/p&gt;&lt;p&gt;11절의 기근은 신명기 8:3을 배경으로 들을 때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백성을 주리게 하시고 만나를 먹이시며,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아모스 8장에서는 양식과 물이 있어도 말씀이 없는 기근이 닥친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일으키셨지만 백성은 예언하지 말라고 명했고(2:11-12), 아마샤는 아모스를 쫓아냈다(7:10-17). 말씀을 거부한 백성에게 내려지는 심판은 말씀이 거두어지는 것이다. 사무엘상 3장은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던 시대에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셨고, 그가 처음 받은 말씀이 엘리 집에 대한 심판이었다고 기록한다. 죄를 드러내는 말씀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실제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표지이며,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때가 오면 책망하던 말씀조차 은혜였음이 드러난다.&lt;/p&gt;&lt;p&gt;신명기 6:13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명한다. 맹세는 그 사람이 자기 말의 진실성을 무엇에 걸고 있는지 드러낸다. 아모스 8장의 사람들은 사마리아의 죄와 단의 신과 브엘세바의 길을 걸고 맹세했다. 여로보암 1세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며 시작된 예배 체계(왕상 12:28-30)가 아모스 시대에도 백성의 맹세 속에 살아 있었다. 7절에서 여호와께서 맹세하신 말씀은 끝내 서고, 14절에서 우상을 두고 맹세한 이들은 엎드러진다. 누구의 이름을 걸고 사는지가 공동체의 운명을 가른다.&lt;/p&gt;&lt;p&gt;아모스서는 8장의 끝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은 범죄한 나라를 멸하시되 야곱의 집을 온전히 멸하지는 않겠다고 하시고(9:8), “그 날에”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신다(9:11). 8장에서 노래가 애곡이 되고 대낮이 어두워지던 “그 날”이 9장에서는 회복의 날을 연다. 8:14의 ‘엎드러지다’와 ‘일어나다’가 9:11에서 ‘무너진’ 장막과 ‘일으키다’로 다시 나온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무너진 장막을 직접 일으키신다. 사도행전 15:16-17에서 야고보는 이 약속을 이방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과 연결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아모스 8장은 이스라엘의 한계를 정면으로 드러낸다. 공평한 저울을 명하는 율법이 있었고 월삭과 안식일도 지켜졌으며, 선지자는 경고하고 중보했다. 그런데도 백성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고, 하나님은 다시는 그들을 지나쳐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율법과 예배와 예언이 모두 있었는데도 끝에 이른 백성의 모습은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언약에 신실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신약은 이 한계 앞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을 증언한다.&lt;/p&gt;&lt;p&gt;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주리신 예수께 마귀는 돌로 떡이 되게 하라고 유혹하고,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신명기 8:3으로 답하신다(눅 4:1-4).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배우도록 부름받았다가 아모스 시대에 잃어버린 진리를 예수는 굶주림 속에서 지키신다. 곡식과 은을 늘리는 데 마음을 쏟다가 떡이 있어도 말씀이 없는 기근을 맞은 백성의 역사 속에서, 떡이 없는 자리에서 말씀으로 사신 한 분이 나타나신다.&lt;/p&gt;&lt;p&gt;이어서 예수는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에게 해방과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셨다는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고 그 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신다(눅 4:16-21). 아모스의 상인들이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가난한 이를 이용할 궁리를 했다면, 예수는 바로 안식일에 가난한 이에게 은혜의 소식을 선포하신다. 빚 때문에 신 한 켤레 값에 팔리던 사람에게 이 선포는 해방의 소식이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하늘이 닫혀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밖으로 보내졌다는 말씀을 듣고 예수를 동네 밖으로 쫓아내려 한다(4:25-30). 아마샤가 아모스를 쫓아낸 것처럼 회당이 예수를 쫓아낸다. 말씀이신 분이 회당 한가운데 서셨는데도 그 말씀을 밀어내는 장면은, 아모스 8장의 기갈이 말씀을 거절한 자리에 내리는 심판임을 다시 보여 준다.&lt;/p&gt;&lt;p&gt;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히 1:1-2). 아모스는 하나님의 말씀이 끊기는 날을 경고했지만, 신약은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침묵하지 않으시고 아들 안에서 결정적으로 말씀하셨다고 증언한다.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헤매도 얻지 못하던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왔고,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다고 고백한다(요 6:68). 경고도 사라지지 않는다. 들은 것에 유념하지 않으면 흘러 떠내려갈 수 있고,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피할 길이 없다(히 2:1-3).&lt;/p&gt;&lt;p&gt;부자와 나사로 비유(눅 16:19-31)는 아모스 8장의 주제를 한 장면에 모은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며 대문 앞의 나사로를 외면했다. 죽음 뒤에 그는 형제들에게 경고해 달라고 구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들으라고 답하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도 권함을 받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가난한 이를 외면하는 삶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삶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아모스의 진단이 되풀이된다. 말씀을 듣는 일은 가난한 이웃을 보는 눈과 분리되지 않는다.&lt;/p&gt;&lt;p&gt;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제육시쯤부터 제구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해가 빛을 잃는다(눅 23:44-45). 정오 무렵의 어둠은 해를 대낮에 지게 하겠다는 아모스 8:9의 심판 언어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아모스가 경고한 대상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이었고, 누가가 묘사하는 십자가의 예수는 백부장이 의인이라고 고백한 분이다(23:47). 죄인에게 내려질 심판의 언어가 죄 없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묘사한다. 외아들을 잃은 애통(8:10)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내어 주신 십자가에서 가장 깊은 의미에 이르며(요 3:16), 요한복음 19:37은 그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리라는 스가랴 12:10을 십자가에 적용한다.&lt;/p&gt;&lt;p&gt;8:7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맹세하셨지만, 예레미야 31:34의 새 언약은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히브리서는 이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언약에 적용한다(히 8:12; 10:17). 두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신 제사에서 만난다(10:10-14). 하나님은 죄를 못 본 척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에게 담당시켜 심판하셨기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신다. 십자가 곁의 한 행악자는 자기 행위에 합당한 보응을 받는다고 인정하고 예수께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구했으며, 예수는 오늘 그가 자신과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눅 23:39-43). 그리스도인이 받은 용서는 불의를 가볍게 여기는 면죄부가 될 수 없으며, 십자가는 하나님이 불의를 얼마나 무겁게 보시는지 드러낸다.&lt;/p&gt;&lt;p&gt;세리장 삭개오는 예수께서 먼저 그의 집에 머무시겠다고 하시자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속여 빼앗은 것을 네 갑절로 갚겠다고 했고, 예수는 그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언하셨다(눅 19:1-10). 배상은 구원을 사는 값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사람이 속인 거래를 되돌리는 응답이다. 작은 에바와 큰 세겔로 쌓은 이익은 그리스도께 돌이키는 사람에게 되돌려야 할 목록이 된다. 오순절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고, 믿는 무리가 소유를 나누어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행 4:32-35). 말씀을 듣지 않던 백성이 가난한 이를 삼켰다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말씀을 듣고 이웃에게 손을 펴는 새 공동체를 세우신다.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시겠다는 9:11의 약속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이 공동체에서 성취되기 시작한다(행 15:16-17).&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작은 에바와 큰 세겔은 오늘 상품의 실제 양과 가격, 계약 조건, 정산 방식에 관한 질문으로 다가온다. 용량을 줄이고 가격은 그대로 두면서 포장으로 차이를 가리는 일, 눈에 잘 띄지 않는 수수료와 일부러 모호하게 쓴 조건이 그 예다. 가난 때문에 선택할 여지가 적은 사람의 급한 형편을 이용하는 고리의 대출이나 돌려주어야 할 보증금을 미루며 버티는 일은, 빚 때문에 사람이 신 한 켤레 값에 팔리던 아모스의 시장과 멀지 않다. 약속한 임금을 제때 지급하라는 명령(레 19:13)도 그대로 적용된다. 업계에서 오래 반복했다는 이유로 부정한 거래가 정당해지지 않으며, 하나님은 장부를 덮은 뒤에도 그 행위를 기억하신다.&lt;/p&gt;&lt;p&gt;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리던 상인들은 예배 시간에도 다음 주 매출을 계산하는 마음을 비춘다. 안식일 계명은 종에게도 쉼을 주라고 명했으므로, 사람을 고용하고 관리하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쉼을 빼앗지 않는다. 교회도 봉사라는 이름으로 특정한 사람에게 과도한 노동을 반복해 요구하거나, 낮은 비용을 찾다가 일하는 사람의 수고를 무상으로 떠넘기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거짓 저울을 그대로 둔 채 헌금의 크기만 기뻐한다면 월삭과 안식일을 기다리던 상인들의 문제를 되풀이한다.&lt;/p&gt;&lt;p&gt;14절의 사람들은 사마리아와 단과 브엘세바의 성소를 두고 맹세했다. 그리스도인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실제로는 자산의 증가와 직장의 안정, 소속 교회의 규모와 명성에 미래를 걸 수 있다. 그 보증이 흔들릴 때 드러나는 불안과 분노는 무엇을 의지했는지 알려 준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미래를 그분께 걸고, 그 신뢰 안에서 이웃에게 손을 펴는 삶이다.&lt;/p&gt;&lt;p&gt;말씀이 들릴 때 듣는 것이 은혜다. 위로가 되는 말씀만 골라 듣거나 마음에 맞는 해설만 찾아다니기보다, 자신의 생활을 겨냥하는 책망에도 응답해야 한다. 교회가 다음 세대에게 개인의 성공과 위로에 관한 말씀만 들려준다면, 그들은 일터와 시장에서 부딪히는 문제 앞에서 붙들 말씀을 찾지 못한다. 아마샤가 벧엘이 왕의 성소라는 이유로 아모스를 쫓아냈듯, 교회와 기관도 불편한 말을 하는 사람을 평판과 질서를 이유로 밀어낼 수 있다. 공동체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이 성경과 사실에 맞는지 살피지 않고 막기만 하는 공동체는 결국 들어야 할 말씀을 잃는다.&lt;/p&gt;&lt;p&gt;절기가 애통으로 바뀌는 10절은 공동체 안에서 착취나 부정이 드러났을 때 교회가 먼저 할 일이 평판을 지키는 해명보다 애통과 회개임을 가르친다. 그 애통은 피해자의 동의 없이 그의 이름과 사연을 드러내지 않고, 피해 회복과 재발 방지로 이어져야 한다. 착취당한 일을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막지 않는다. 그리스도께 돌이킨 사람은 삭개오처럼 속여 빼앗은 것을 되돌리며, 이 배상은 용서를 얻으려는 값이 아니라 이미 받은 용서가 장부를 바꾸는 열매다. 아모스 8장은 끝을 선언하지만 하나님은 그 너머에서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셨다. 정직한 저울과 제때의 삯, 나누는 쉼과 불편한 말씀에 여는 귀는 구원을 얻는 공로가 아니라 말씀으로 사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응답이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82/"&gt;Jan de Waard and 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8:2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83/"&gt;Jan de Waard and 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8:3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85/"&gt;Jan de Waard and 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8:5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87/"&gt;Jan de Waard and 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8:7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Amos+8&amp;amp;version=NET"&gt;NET Bible, 아모스 8장 번역 및 번역자 각주, 특히 3, 5, 6, 7, 8, 12, 14절 각주.&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811/"&gt;Jan de Waard and 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8:11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814/"&gt;Jan de Waard and 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8:14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아모스 9:1-15 피할 수 없는 심판과 다시 심으시는 하나님</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9.1-15/</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amos/9.1-15/</guid><description>아모스 9:1-15의 제단 환상과 만국을 다스리는 하나님, 다윗의 장막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살피고 사도행전 15장의 인용을 연결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아모스서의 다섯째 환상은 시작부터 앞의 네 환상과 다르다. 앞에서는 주께서 아모스에게 무엇인가를 보이셨고(7:1, 4, 7; 8:1) 셋째와 넷째 환상에서는 “네가 무엇을 보느냐”는 질문이 이어졌지만, 9:1은 “내가 보니”로 바로 시작하며 대화도 설명도 없이 명령이 떨어진다. 주께서 서 계신 모습은 7:7에서 담 곁에 서 계실 때와 같은 분사로 그려지고, “제단 곁에”의 전치사는 ‘곁에’와 ‘위에’를 모두 뜻할 수 있어 주께서 제물을 바치는 자리를 차지하고 서 계신 모습을 그린다. 본문은 성소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며, NET 해설은 벧엘의 제단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아마샤가 벧엘을 왕의 성소라 부른 일(7:13)을 생각하면 자연스럽지만, 9:1이 강조하는 것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도망할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lt;/p&gt;&lt;p&gt;주께서는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라고 명하신다. 꼭대기의 장식과 바닥의 문턱이 함께 흔들리니 건물 전체가 무너진다. ‘움직이다’는 1:1의 “지진”과 같은 어근이어서, 책의 표제가 기억하는 지진이 마지막 환상에서 성소를 흔드는 심판의 언어로 다시 들린다. 주께서는 무너지는 건물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사람들까지 칼로 죽이겠다고 하신다. 절 끝은 같은 어근의 동사와 명사를 짝지어 ‘도망하는 자가 도망하지 못하고 피하는 자가 피하지 못한다’고 두 번 길을 닫는다. 빠른 자와 강한 자와 용사가 제 목숨을 건지지 못하리라던 2:14-16의 선언이 예배 현장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2:14의 ‘도망’과 2:15의 ‘건지다’도 같은 어근이다.&lt;/p&gt;&lt;p&gt;2-4절은 피할 곳을 차례로 가정한다. 히브리어는 ‘만일’을 다섯 번 되풀이하고 그때마다 ‘거기에서’로 하나님의 응답을 시작한다. 스올과 하늘, 갈멜 산꼭대기와 바다 밑이 이어지고,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구석구석 뒤져 찾아내신다. 1:2에서 여호와의 소리에 마르리라 했던 갈멜 산꼭대기가 여기서는 숨을 곳으로 다시 나온다. 바다 밑에서는 하나님이 뱀을 명하여 그들을 물게 하신다. 이 뱀은 5:19에서 집 안의 벽에 손을 댄 사람을 무는 뱀과 같은 낱말이며, NET 해설은 이를 혼돈 세력을 상징하는 바다 괴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욥기 26:13과 이사야 27:1을 참조한다. 마지막 가정은 원수 앞에서 포로로 끌려가는 역사의 상황이다. 거기서도 하나님은 칼을 명하신다. 3-4절과 9절의 ‘명령하다’가 같은 동사여서 뱀과 칼과 체질이 모두 같은 분의 명령으로 움직인다. 단락은 ‘내가 내 눈을 그들 위에 두되 악을 위해서이고 선을 위해서가 아니다’라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끝난다. 시편 139:7-10이 하늘과 스올과 바다 끝의 임재를 위로로 고백했다면, 아모스 9:2-4는 같은 공간들을 피할 수 없는 심판으로 바꾼다.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는 5:14-15의 부름을 외면한 백성 위에 하나님의 눈이 화를 위해 머문다.&lt;/p&gt;&lt;p&gt;5-6절은 심판을 선언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찬양의 언어로 밝힌다. 4:13, 5:8과 함께 창조주를 노래하는 이 찬양은 여호와의 이름 선포로 끝나며, 9:6의 마지막 구절은 5:8의 마지막 구절과 히브리어 철자 하나를 빼면 같다. 주 만군의 여호와가 땅을 만지시자 땅이 녹고 주민이 애통한다. 온 땅이 나일강처럼 솟았다 가라앉는 모습은 8:8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며, 8:8은 가난한 자를 삼키고 저울을 속이는 죄(8:4-6)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러므로 이 찬양도 사회적 불의에 대한 심판과 떨어져 있지 않다. 6절의 “궁전”(מַעֲלוֹתָו, 마알로타브)은 문자적으로 ‘그의 계단들’이다. NET 해설은 마소라 본문대로 읽으면 하늘 성전이나 보좌로 올라가는 계단일 수 있다고 설명하고, NET 번역은 본문을 고쳐 ‘그의 윗방들’로 옮기며, “궁창”으로 옮긴 낱말의 뜻도 이 문맥에서 불분명하다고 밝힌다. 1절에서 땅의 성소가 무너졌다면 6절은 하늘에 거처를 지으신 분을 보여 준다. 사람이 세운 성소는 무너져도 하늘과 땅과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의 통치는 흔들리지 않는다.&lt;/p&gt;&lt;p&gt;7절은 두 수사 의문문으로 이스라엘이 의지하던 역사를 묻는다.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에서 ‘내게’는 이 비교가 하나님이 보시는 관계 안에서 이루어짐을 밝힌다. 구스는 이스라엘이 알던 세계의 먼 남쪽 끝이다. 하나님께 가장 가깝다고 여긴 백성을 하나님은 먼 땅의 백성과 같은 자리에 두신다. 둘째 질문은 출애굽을 2:10과 3:1에서와 같은 ‘올라오게 하다’로 말하면서, 블레셋을 갑돌에서, 아람을 기르에서 올라오게 하신 일과 나란히 둔다. ‘갑돌에서’(מִכַּפְתּוֹר, 믹카프토르)와 1절의 ‘기둥 머리’(הַכַּפְתּוֹר, 학카프토르)는 전치사와 관사를 빼면 같은 말이어서, 성소를 무너뜨리는 명령의 소리가 이방 민족의 기원지 이름으로 다시 들린다. NET 해설은 갑돌을 그레데 섬과 연결할 가능성을 언급한다. 1:5는 아람 백성이 기르로 사로잡혀 가리라고 선언했다. 하나님이 올라오게 하신 곳으로 다시 돌려보내실 수 있다면 출애굽도 자동으로 작동하는 보호막이 될 수 없다. 이 말씀은 출애굽을 부인하지 않는다. 3:2처럼 선택은 책임을 더 무겁게 만들며, 출애굽의 은혜를 민족적 우월감이나 심판 면제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lt;/p&gt;&lt;p&gt;8절은 그 결론을 끌어낸다.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 곧 죄를 지은 왕국을 주목한다. 이 ‘왕국’은 7:13에서 아마샤가 벧엘을 “나라의 궁궐”이라 부를 때와 같은 말이어서, 왕실의 성소를 지키려 했던 왕국이 하나님의 눈 아래 놓인다. “멸하리라”는 2:9에서 이스라엘 앞에서 아모리 사람을 멸하셨다고 회고할 때의 동사다. 그러나 곧바로 제한이 따른다.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לֹא הַשְׁמֵיד אַשְׁמִיד, 로 하쉬메드 아쉬미드)는 같은 동사를 겹친 강조 구문에 부정어가 붙은 형태이며, 개역개정의 “온전히”가 이 강조를 옮긴 말이다. 범죄한 왕국과 야곱의 집이 이렇게 구별된다. 왕국은 멸망해도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lt;/p&gt;&lt;p&gt;9절은 그 구별을 체질 비유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국 중에서 체로 체질하듯 흔드신다. ‘흔들다’는 8:12에서 말씀을 찾아 헤매던 백성의 동작과 같은 동사여서, 말씀을 듣지 않던 백성이 이제 열방 가운데서 흔들린다. 개역개정은 절 끝을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로 옮기지만, ‘알갱이’(צְרוֹר, 체로르)는 사무엘하 17:13에서 돌멩이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낱말이다. NET 해설은 돌멩이로 읽으면 체가 돌과 부스러기를 붙잡고 곡식을 떨어뜨리는 그림이, 곡식 알갱이로 읽으면 체가 곡식을 붙잡고 쓰레기를 떨어뜨리는 그림이 된다고 설명한다. 알갱이 독법은 참된 백성을 하나도 잃지 않으시는 보존을, 돌멩이 독법은 죄인이 체질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심판을 강조한다. 두 독법 모두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신다는 결론에 이르며, 8절의 야곱 보존과 10절의 죄인 심판이 그 결론을 감싼다.&lt;/p&gt;&lt;p&gt;10절은 심판의 대상을 밝힌다. 내 백성 중 모든 죄인, 곧 범죄한 왕국의 죄에 가담한 사람들이 칼에 죽는다. 그들의 특징은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이르지 아니하리라”는 말이다. ‘미치지 아니하며’는 ‘가까이 오게 하다’라는 동사로, 6:3에서 흉한 날을 멀리하면서 포악한 자리를 ‘가까워지게’ 하는 자들을 책망할 때와 같다. 재앙의 날을 멀리 밀어 두는 사람이 실제로는 폭력을 가까이 끌어온다. 그들이 오지 않으리라 장담한 바로 그 ‘화’를 하나님은 4절에서 그들 위에 두셨다. 야곱의 집에 미래가 있다는 약속은 이런 자신감을 보증하지 않는다.&lt;/p&gt;&lt;p&gt;11절에서 하나님의 행동은 회복을 향한다. “그 날에”는 8:9와 8:13에서 해가 대낮에 지고 젊은이들이 쓰러지는 심판의 날이었는데, 같은 표현이 이제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날을 연다. 하나님은 “다윗의 무너진 장막”(סֻכַּת דָּוִיד הַנֹּפֶלֶת, 숙카트 다비드 한노페레트)을 일으키신다. ‘장막’은 초막이나 임시 거처를 뜻하며, NET 해설은 이를 약해진 다윗 왕조로 이해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보거나 모음을 달리 읽어 요단 동편의 숙곳으로 보는 견해도 소개한다. 왕궁이나 성전 대신 초막이라는 말이 쓰여, 다윗의 집이 무너져 가는 초막처럼 약해져 있음을 보여 준다. ‘무너진’과 ‘일으키다’는 아모스서 안에서 이미 맞물려 있다. 5:2의 애가는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져 일으킬 자가 없다고 탄식했고, 8:14도 거짓 맹세하는 자들이 엎드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고 했다. 일으킬 자가 없다는 애가에 하나님이 직접 대답하신다. 이어 하나님은 성벽의 틈을 막고 폐허를 일으켜 옛적과 같이 세우신다. 4:3에서 사마리아 여인들이 끌려 나가던 ‘성 무너진 데’가 같은 낱말이다. 세 동작에 붙은 대명 접미어는 서로 다르며, NET 해설은 여성 복수가 이스라엘과 유다 또는 성벽의 틈을, 남성 단수가 다윗을 가리킬 수 있다고 설명한다. 접미어가 무엇을 가리키든 장막과 벽과 다윗의 집 전체를 하나님이 다시 세우신다.&lt;/p&gt;&lt;p&gt;12절은 그 회복의 목적을 밝힌다. 개역개정은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로 옮긴다. ‘기업으로 얻다’는 땅이나 재산을 차지하여 소유한다는 동사이고, 주어 ‘그들’은 밝혀져 있지 않다. UBS 핸드북은 이를 다윗 계열의 왕들로 볼 수도 있으나 이스라엘 백성 전체로 보는 편이 낫다고 설명하고, “에돔의 남은 자”(שְׁאֵרִית אֱדוֹם, 셰에리트 에돔)를 에돔 땅에 남은 부분까지 이스라엘의 통치가 다시 미치는 모습으로 풀며 이 결과가 다윗 왕국의 회복에서 나온다고 본다. 칼로 형제를 쫓던 에돔(1:11-12)과, 하나님이 혹시 불쌍히 여기실지 모른다던 ‘요셉의 남은 자’(5:15)를 생각하면, 겨우 살아남을 처지였던 이스라엘의 회복이 형제 민족 에돔의 남은 자까지 다윗의 통치 아래로 이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אֲשֶׁר־נִקְרָא שְׁמִי עֲלֵיהֶם, 아셰르-니크라 셰미 알레헴)은 직역하면 ‘내 이름이 그들 위에 불린’이다. NET 해설은 이를 소유를 나타내는 관용어로 보고 사무엘하 12:28을 참조하며, UBS 핸드북은 정복된 나라들이 여호와께 속했다는 뜻으로 설명하면서 번역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것을 빼앗는 것처럼 보이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절은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끝난다.&lt;/p&gt;&lt;p&gt;히브리어 12절과 사도행전 15장의 인용은 표현이 다르다. 칠십인역 아모스 9:12는 ‘사람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찾게 하려고’(ὅπως ἐκζητήσωσιν οἱ κατάλοιποι τῶν ἀνθρώπων, 호포스 엑제테소신 호이 카탈로이포이 톤 안트로폰)라고 읽어, 히브리어의 ‘에돔’ 자리에 ‘사람들’이, ‘기업으로 얻다’ 자리에 ‘찾다’가 있다. 사도행전 15:17은 칠십인역과 가깝게 인용하면서 찾는 대상을 ‘주’로 밝힌다(ὅπως ἂν ἐκζητήσωσιν οἱ κατάλοιποι τῶν ἀνθρώπων τὸν κύριον, 호포스 안 엑제테소신 호이 카탈로이포이 톤 안트로폰 톤 퀴리온). 사도행전 15:16은 “그 날에” 대신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로 인용을 시작한다. 아모스의 히브리어는 회복되는 다윗의 통치가 열방에 미치는 모습을 말하고, 야고보는 그 약속을 이방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건과 연결한다. 두 본문을 가장 긴밀하게 잇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 위에 불린 만국이라는 표현으로, 히브리어 본문과 칠십인역과 사도행전에 모두 남아 있다.&lt;/p&gt;&lt;p&gt;13절은 “보라 날이 이를지라”로 시작한다. 이 표지는 4:2에서 사마리아 여인들이 끌려갈 날을, 8:11에서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의 날을 알렸는데, 이제 풍성함의 날을 연다. 개역개정의 “파종하는 자”(חוֹרֵשׁ, 호레쉬)는 히브리어로 밭 가는 사람이다. ‘밭 가는 자가 추수하는 자에게 다가서고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잇는다’는 그림은 추수할 것이 너무 많아 거두기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밭갈이가 시작되는 모습이다. ‘다가서다’는 10절에서 화가 ‘가까이 오지’ 않으리라던 동사의 다른 형태다. 죄인들은 화가 가까이 오지 않으리라 장담했지만, 회복의 날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다음 수확을 준비하는 농부다. 언약에 순종하는 백성에게 타작이 포도 딸 때까지 이어지리라는 레위기 26:5의 복을 아모스는 더 과감한 시적 언어로 그린다.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고 작은 산들은 녹는다. ‘녹다’는 5절에서 하나님이 땅을 만지시자 땅이 녹을 때의 어근이어서, 같은 동사가 심판의 공포에서 풍요의 그림으로 뒤집힌다. 요엘 3:18(BHS 4:18)도 같은 그림을 쓴다.&lt;/p&gt;&lt;p&gt;14절의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는 ‘돌이키다’와 소리가 비슷한 명사를 겹친 표현이다. 개역개정은 그 명사를 “사로잡힌 것”으로 옮겼고, NET 해설은 같은 표현을 ‘운명을 회복하다’라는 관용어로 옮길 수 있다고 하며 신명기 30:3을 참조한다. 4:6-11에서 하나님은 다섯 번이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탄식하셨는데, 그 후렴의 동사가 여기의 ‘돌이키다’와 같다. 백성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같은 동사로 그들의 처지를 돌이키신다. 이어지는 세 쌍의 동사는 앞의 저주를 하나씩 뒤집는다. 백성은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고, 포도원을 가꾸어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을 만들어 그 열매를 먹는다. 5:11은 힘없는 자를 밟은 자들에게 다듬은 돌로 집을 지어도 거기 살지 못하고 포도원을 가꾸어도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고 선언했다. 9:14는 같은 목적어를 쓰면서 그 부정어를 거두어 낸다. 거주와 노동과 식탁이 함께 회복된다.&lt;/p&gt;&lt;p&gt;15절은 하나님 자신의 심으심을 말한다. 14절에서 백성이 포도원을 ‘가꾸는’ 동작은 원래 포도나무를 심는 동작이며, 15절의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와 같은 동사다. 백성이 포도나무를 심듯 하나님은 백성을 땅에 심으신다. 7:11, 17은 이스라엘이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리라고 선언했는데, 9:15는 같은 ‘그 땅에서’라는 표현으로 그들이 다시 뽑히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5:2에서 자기 땅에 던져져 일으킬 자가 없던 처녀 이스라엘이 이제 그 땅에 심긴다. 책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로 끝난다. 4:12에서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는 심판의 소환이던 ‘네 하나님’이 땅을 주시고 다시 뽑히지 않게 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NET 해설은 5절의 “주 만군의 여호와”에서 군사적 함의가 있는 호칭이 책의 끝에서 빠지고 평화와 풍요로 마무리된다는 점에 주목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아모스 9장은 언약의 저주와 회복이 한 장 안에서 만나는 자리다. 1-10절은 이스라엘 왕국이 받을 심판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선언하고, 11-15절은 같은 하나님이 다윗의 집과 백성과 땅을 다시 세우시는 미래를 약속한다. 구약 전체에서 하나님은 언약을 어긴 백성을 징계하시면서도 언약 자체를 폐기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나타나며, 아모스 9장은 이 흐름을 다윗 언약, 레위기와 신명기의 복과 저주, 예언서의 메시아 기대, 열방에 대한 소망과 연결한다.&lt;/p&gt;&lt;p&gt;사무엘하 7:10-16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 집, 곧 왕조를 세우시겠다고 하시며 백성을 한 곳에 심어 다시 옮겨 다니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7:10). 후손이 죄를 지으면 징계하시되 인자를 거두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7:14-15). 아모스 9:15의 ‘심다’는 사무엘하 7:10과 같은 동사이며, 9:11-15는 왕조의 회복과 백성의 안정된 거주를 묶은 다윗 언약의 언어를 이어 간다. 이 약속을 들은 청중은 다윗의 집에서 갈라져 나온 북왕국이었다(왕상 12:16-20). 범죄한 왕국의 멸망과 다윗 장막의 회복이 차례로 선포된 것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여로보암의 왕실이나 벧엘의 성소가 보장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이 그 미래를 붙든다는 뜻이다. 같은 시대 북왕국의 호세아도 이스라엘이 마지막 날에 돌아와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으리라고 말한다(호 3:5).&lt;/p&gt;&lt;p&gt;레위기 26장은 순종하는 백성에게 타작이 포도 딸 때까지, 포도 따는 일이 파종할 때까지 이어지리라고 약속하고(26:5), 불순종하는 백성은 여러 민족 가운데 흩으시고 칼을 빼어 그 뒤를 따르게 하겠다고 경고한다(26:33). 아모스 9:13의 맞닿는 농사철과 9:4, 9의 포로지까지 따라가는 칼과 만국 중의 체질은 이 언약의 복과 저주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레위기 26:44-45는 원수의 땅에 있을 때에도 백성을 아주 멸하지 않고 언약을 기억하시겠다고 약속하며, 야곱의 집을 온전히 멸하지 않겠다는 9:8과 맞닿는다. 집을 지어도 살지 못하고 포도원을 심어도 마시지 못한다는 신명기 28:30, 39의 저주는 아모스 5:11에서 착취한 자들에게 선언되었고, 9:14에서 뒤집힌다. 아모스의 회복 약속은 모세 언약이 처음부터 내다본 결말을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이다.&lt;/p&gt;&lt;p&gt;신명기 30:1-10은 복과 저주가 모두 임한 뒤 흩어진 백성이 돌아오면 하나님이 그들의 포로 상태를 돌이키고 다시 모으시며(30:3),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리라고 말한다(30:6). 30:3은 9:14와 같은 관용 표현을 쓴다. 회복은 땅으로 돌아가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을 포함한다. 재앙이 이르지 않으리라 장담하며 회개 없는 안전을 주장한 9:10의 죄인들과 달리, 회복을 기다리는 백성은 하나님께 돌아오고 그 말씀에 순종한다.&lt;/p&gt;&lt;p&gt;이사야 11장은 다윗 왕조의 회복을 메시아 기대로 발전시킨다.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싹(11:1)은 무너진 초막처럼 약해진 다윗 왕조에서 하나님이 새 시작을 일으키신다는 그림이며, 그 통치자는 여호와의 영으로 가난한 자를 공의로 재판한다(11:2-4). 가난한 자를 팔고 짓밟는 일을 가장 날카롭게 고발한 아모스(2:6-7; 8:4-6)의 회복 약속이 지향하는 내용을 이 통치가 채운다. 이사야 11:10-14는 열방이 이새의 뿌리에게로 돌아오고, 흩어진 이스라엘과 유다가 모이며, 에브라임과 유다의 적대가 사라지고, 그들이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리라고 말한다. 다윗 계열 왕의 회복, 남북의 재통합, 에돔을 포함한 이웃 민족, 열방의 귀환이라는 아모스 9:11-12의 요소가 이사야 11장에서 한데 모인다.&lt;/p&gt;&lt;p&gt;백성을 땅에 심으신다는 그림은 다른 예언서에서도 회복의 핵심이다. 호세아 2:23(BHS 2:25)에서 하나님은 백성을 이 땅에 심고 내 백성이 아니던 자를 내 백성이라 하시며, 예레미야 24:6은 포로 된 유다를 심고 뽑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사람의 힘으로 붙든 땅은 다시 빼앗길 수 있지만 하나님이 심으신 백성은 뽑히지 않는다.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린다는 요엘 3:18(BHS 4:18), 백성이 지은 집에 살고 심은 것을 먹으리라는 이사야 65:21-22는 아모스 9:13-14와 같은 그림을 쓰며, 이사야는 그 약속을 새 하늘과 새 땅 안에 둔다(65:17). 구약의 회복 소망은 영혼만의 구원으로 줄어들지 않고 땅과 노동과 식탁과 공동체의 회복을 바라본다.&lt;/p&gt;&lt;p&gt;아모스서는 열국 심판으로 시작했고(1:3-2:3), 9:7은 블레셋과 아람의 이주 역사도 하나님이 이끄셨다고 말하며, 9:12는 하나님의 이름이 불리는 민족들을 바라본다.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는 창세기 12:3, 애굽을 ‘내 백성’, 앗수르를 ‘내 손으로 지은 것’이라 부르는 이사야 19:24-25와 같은 방향이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다른 민족을 배제하는 특권으로 주어지지 않았고,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일하시는 통로였다. 남은 자 주제도 넓어진다. 사자 입에서 건진 양의 조각(3:12), 천 명 중 백 명(5:3), 요셉의 남은 자(5:15)는 우선 심판의 크기를 보여 주었지만, 9:8-9에서 남은 자는 야곱의 집을 온전히 멸하지 않으시는 증거가 되고 9:12에서는 에돔의 남은 자까지 하나님의 이름 아래 들어오는 소망이 된다. 바울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이 주제를 잇는다(롬 11:5).&lt;/p&gt;&lt;p&gt;아모스 이후 이 약속은 곧바로 성취되지 않았다. 북왕국은 앗수르에게, 유다는 바벨론에게 무너졌고, 포로에서 돌아온 공동체는 성전을 다시 지었지만 다윗 계열의 왕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다윗의 장막을 누가 어떻게 일으킬 것인가 하는 질문은 구약의 끝에서 열린 채로 남는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아모스 9장의 회복 약속은 이스라엘 안에서 스스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유다도 율법을 멸시한 죄로 심판을 선고받았고(2:4-5), 다윗의 집에 속한 왕들도 공의를 잃어 예루살렘이 무너지면서 다윗의 장막은 더 깊이 쓰러졌다. 11절의 회복 동사는 모두 1인칭이다. 하나님이 일으키시고 틈을 막으시며 세우신다. 신약은 이 한계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일으키신 다윗의 자손으로 증언한다.&lt;/p&gt;&lt;p&gt;천사는 마리아에게 주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고 그가 야곱의 집을 영원히 다스리리라고 말한다(눅 1:31-33). 9:8의 ‘야곱의 집’과 9:11의 ‘다윗’이 한 인물 안에서 만난다. 사가랴도 하나님이 그 종 다윗의 집에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다고 찬양한다(1:69). 하나님이 다윗의 집에 무엇인가를 일으키신다는 고백은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겠다는 약속과 같은 방향에 있으며,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출발점에 있다.&lt;/p&gt;&lt;p&gt;그러나 예수께서 다윗의 왕위에 오르시는 길은 9:1-4의 심판을 지나간다. 아모스의 환상에서 하나님은 성소에 모인 죄인들에게 피할 길을 남기지 않으셨다. 복음서의 예수는 그 심판의 자리에서 도망하지 않으시고,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기시며 칼로 저항하지 않으셨다(마 26:39, 52-54). 십자가에서 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막 15:34).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고(고후 5:21),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아 우리를 속량하셨다(갈 3:13). 기독론적으로 읽으면 9:4에서 화를 위해 죄인들 위에 머물던 하나님의 눈은 십자가에서 죄인을 대신하신 그리스도 위에 머물며, 그 결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정죄함이 없다(롬 8:1).&lt;/p&gt;&lt;p&gt;9:1에서 무너진 것은 성소였다. 예배의 자리가 죄를 덮는 방패가 되자 하나님은 그 기둥과 문지방을 치셨다. 예수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고, 요한은 그것이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킨 말씀이라고 설명한다(요 2:19-21). 죄 때문에 무너진 예배의 자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새로 세워지며,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된다.&lt;/p&gt;&lt;p&gt;베드로는 다윗의 무덤이 아직 남아 있음을 상기시키며, 하나님이 다윗의 자손 중 한 사람을 그 왕위에 앉게 하리라 맹세하신 약속을 다윗이 미리 보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했다고 선포한다(행 2:29-31). 하나님은 이 예수를 살리시고 오른편에 높여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2:32-36). 바울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일을 다윗에게 약속된 거룩하고 미쁜 은사와 연결한다(13:34).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신다는 약속은 다윗 자손의 부활과 즉위에서 결정적으로 성취되기 시작한다.&lt;/p&gt;&lt;p&gt;세례 요한은 오실 이가 키를 들고 알곡은 곳간에 모으고 쭉정이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말했다(마 3:12). 아모스에서 백성을 체질하신 하나님처럼 그리스도는 의인과 악인을 가르시는 심판자로 오신다. 동시에 예수는 사탄이 제자들을 밀 까부르듯 하려 하였으나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고 말씀하신다(눅 22:31-32).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했으나 돌이켜 형제들을 굳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체질하시는 심판자이시면서 체질 가운데 자기 백성을 붙드시는 중보자이시다.&lt;/p&gt;&lt;p&gt;사도행전 15장은 부활하신 다윗의 자손 아래 누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지를 묻는다.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주장 앞에서(15:1, 5),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사 차별하지 않으셨으며 유대인도 이방인과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고백한다(15:8-11). 야고보는 하나님이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셨다고 하며 아모스 9:11-12로 이를 확인한다(15:14-17). 구약에서 주로 이스라엘을 가리키던 ‘백성’이 이방인 가운데서 부름받은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야고보의 논리에서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시는 일과 이방인이 주께 돌아오는 일은 같은 사건의 두 면이다. 사도와 장로들은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으면서,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요긴한 것 외에는 짐을 지우지 않기로 한다(15:19-20, 28).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아모스의 약속이 이방인 신자들의 공동체적 자리를 설명한다.&lt;/p&gt;&lt;p&gt;이방인의 참여는 이스라엘을 지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수는 야곱의 집을 다스리시고, 야고보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이방인의 참여를 설명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으며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하고(롬 11:1-5), 이방인 신자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진 가지에 비유하며 뿌리가 가지를 보전한다고 경고한다(11:17-18). 백성을 땅에 심으신다는 9:15처럼 바울도 심고 접붙이는 언어로 하나님 백성의 연속성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새 사람으로 지으시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함께 지어 가신다(엡 2:11-22). 아모스의 회복은 성읍과 농사, 음식과 안전한 거주로 그려지며, 신약은 이를 영적 비유로만 다루지 않는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기를 고대하고(롬 8:19-21), 그리스도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다(고전 15:20). 생명나무가 열매를 맺고 다시 저주가 없는 새 예루살렘(계 21:3; 22:2-3)에서 아모스 9:13-15의 소망은 완성된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9:1에서 심판은 성소에서 시작된다. 정의를 버린 채 드리는 예배가 계속되자 하나님은 그 기둥을 치셨다. 오늘의 교회도 오래된 역사와 좋은 평판, 활발한 예배를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지 않을 보장으로 삼을 수 없다. 교회 안에서 재정 문제나 권력 남용, 성적 비행이 제기되면 기관의 명예를 먼저 내세우기보다 어떤 일이 있었고 누가 손해를 입었는지 확인하고, 피해자가 계속 같은 환경에 노출되지 않게 해야 한다. 10절의 죄인들은 화가 자기들에게 미치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괜찮으리라는 태도나 신앙의 연수와 봉사 경력을 들어 회개를 미루는 태도는 그 말과 닮았다.&lt;/p&gt;&lt;p&gt;2-4절에서 하나님은 스올과 하늘, 산꼭대기와 바다 밑까지 살피신다. 장부 조작이나 익명의 비방, 가족 안에서만 감추어진 폭력도 하나님의 눈을 피하지 못한다. 같은 말씀은 숨겨진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다르게 들린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착취당하고 무시당한 사람의 처지도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 교회는 그 고백을 따라 눈에 잘 띄지 않고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이웃을 찾아간다.&lt;/p&gt;&lt;p&gt;하나님이 다른 민족의 역사도 이끄신다는 7절은 한 민족의 역사에서 섭리를 고백하는 일이 다른 민족을 낮추거나 자기 민족의 잘못을 덮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가르친다. 사도행전 15장처럼 교회는 복음에 꼭 필요한 요구와 익숙한 집단의 관습을 구별하여, 같은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불필요한 문턱을 덧붙이지 않는다. 12절에서 오랜 원한의 형제 민족 에돔의 남은 자까지 하나님의 이름 아래 들어온다는 약속은 교회가 원한을 대하는 방식도 바꾼다. 불의는 불의라 부르고 책임을 묻되,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화해의 길이 열릴 때 막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셨다는 고백은 원한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않을 근거가 된다.&lt;/p&gt;&lt;p&gt;죄가 드러난 공동체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체념과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장담을 모두 경계한다. 8절은 범죄한 왕국의 멸망과 야곱의 집의 보존을 함께 말하고, 9절의 체질은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을 너무 쉽게 정죄하지도 죄를 너무 쉽게 덮지도 않는다. 잘못한 사람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묻고, 회복을 바라는 일을 과거의 불의를 지우는 일로 바꾸지 않는다. 하나님이 무너진 장막의 틈을 막으신다는 약속은 교회가 분열과 상처로 생긴 틈을 방치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다. 무엇이 무너졌는지 정직하게 이름 붙이고, 상처를 준 쪽은 구체적으로 사과하며, 회복에 필요한 시간을 서두르지 않는다.&lt;/p&gt;&lt;p&gt;14절의 백성은 자신이 지은 성읍에 살고 가꾼 포도원의 포도주를 마신다. 5:11의 저주가 힘없는 자를 밟은 자들의 착취에서 나왔다면, 회복된 삶은 정당한 노동과 정당한 몫이 이어진 삶이다. 무너진 이웃을 도울 때 한 번의 지원으로 끝내지 않고 그가 다시 자기 일을 하고 그 결실을 누리도록 돕는 일, 자신이 고용한 사람에게 정당한 대가와 쉼을 보장하는 일이 이 소망에 어울린다. 다른 사람의 수고를 헐값에 사는 구조는 그 회복과 반대 방향에 있다. 9:13-15는 공동체 전체의 회복이며 개인의 부를 늘리는 공식으로 바꿀 수 없다. 일으킬 자가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5:2) 하나님이 직접 일으키신다는 9:11의 약속을 붙드는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으며, 자신이 감당할 책임과 화해의 걸음을 묻는다. 하나님의 이름이 열방 위에 불리는 미래(9:12; 행 15:17)를 믿는 교회는 우리 곁에 온 다른 언어의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고, 복음을 듣지 못한 민족을 향해 그 이름을 전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Amo&amp;amp;chapter=9"&gt;NET Bible, 아모스 9장 번역 및 해설 주석(9:1, 3, 6-7, 9, 11-14절 주석과 9:12 주석의 책 결말 설명).&lt;/a&gt;&lt;/li&gt;&lt;li&gt;&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amos-912/"&gt;Jan de Waard and William A. Smalley, A Handbook on Amos (UBS, 1979), 아모스 9:12 번역 해설. TIPs 공개 발췌.&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1:1-11 환난 중에 위로하시고 사망에서 건지시는 하나님</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1.1-11/</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1.1-11/</guid><description>바울은 아시아에서 살 소망까지 끊어질 만큼 짓눌렸던 일을 숨기지 않고, 그 절망 속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바울 일행에게 주신 위로는 고린도 교회에 이르고, 교회는 간구로 바울 일행을 돕는다. 하나님이 베푸신 건지심은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 이어진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진 사도와 하나님의 교회 (1-2절)&lt;/h3&gt;&lt;p&gt;바울은 형제 디모데와 함께 이 편지를 보내며,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소개한다(1절). “사도”(ἀπόστολος, 아포스톨로스)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며, 바울을 보내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이 편지 전체에 걸친 쟁점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정당한 사도인가 하는 문제다.&lt;sup&gt;1&lt;/sup&gt; 바울은 첫 문장에서 자기 사도직의 근거를 하나님의 뜻으로 밝혀, 이 편지에서 하는 말의 권위가 어디에서 오는지 처음부터 알린다.&lt;/p&gt;&lt;p&gt;수신자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동체도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른다. 2절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빌며, 그 근원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른다. 편지를 보내는 사도와 받는 교회는 같은 근원에서 오는 은혜에 기대어 산다.&lt;/p&gt;&lt;h3&gt;모든 위로의 하나님을 찬송함 (3-7절)&lt;/h3&gt;&lt;p&gt;3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송축할 때 쓰던 형식인 “찬송하리로다”(Εὐλογητὸς, 율로게토스)로 시작한다(눅 1:68 참조). 원문에서 바울은 찬송받으실 분을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로 부른 뒤 “자비의 아버지”와 “모든 위로의 하나님”으로 부른다. 개역개정은 첫 호칭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로 옮겨 ‘아버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바울이 자비와 위로의 근원으로 찬송하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lt;/p&gt;&lt;p&gt;4절에서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분”(ὁ παρακαλῶν, 호 파라칼론)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바울 일행을 위로하신다. 그 목적은 그들이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바울 일행이 위로할 사람은 그들과 같은 환난을 겪은 사람으로 한정되지 않고, 어떤 환난이든 그 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그들이 그런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는 그들 자신이 “하나님께 받는 위로”다. 위로하는 사람은 바울 일행이지만, 그 위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lt;/p&gt;&lt;p&gt;5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말하며 4절의 근거를 밝힌다. 바울 일행에게 고난이 넘치는 만큼 위로도 넘치므로, 그들은 받은 위로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 원문에서 두 번 쓰인 ‘넘치다’(περισσεύει, 페리세우에이)는 모두 현재형이다. 개역개정의 “넘친 것 같이”는 지난 일처럼 읽힐 수 있지만, 바울은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위로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그분과의 관계 때문에 겪는 고난을 가리킨다.&lt;sup&gt;2&lt;/sup&gt; 고난이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오듯,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다.&lt;/p&gt;&lt;p&gt;6절에서 바울은 자신들이 환난을 당하는 경우와 위로를 받는 경우를 나란히 들고, 어느 쪽이든 고린도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 일행의 환난은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이어서 그 위로가 성도들 안에서 “역사하여” 바울 일행이 받는 것과 같은 고난을 견디게 한다고 말한다. 위로와 짝을 이룬 “구원”도 이 문맥에서는 고난 가운데 있는 고린도 성도들의 현재 영적 안녕에 초점이 있다.&lt;sup&gt;3&lt;/sup&gt; 이 구원은 바울 일행이 죽음의 위험에서 건짐받은 10절의 일과 구별된다. 바울은 성도들이 견디는 고난을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이라고 부른다. 고린도 성도들도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서 5절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고난을 겪는다.&lt;sup&gt;4&lt;/sup&gt;&lt;/p&gt;&lt;p&gt;7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자신의 소망이 견고하다고 말한다. 그 근거는 성도들이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처럼 위로에도 참여하리라는 앎이다. 5절에서 바울 일행에게 고난이 넘치는 만큼 위로도 넘치듯이, 교회에서도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은 위로에도 참여하게 된다.&lt;/p&gt;&lt;h3&gt;아시아의 환난과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8-10절)&lt;/h3&gt;&lt;p&gt;8절에서 바울은 3-7절에서 말한 환난이 자신들에게 실제로 어떠했는지 알린다. 아시아는 로마의 아시아 속주를 가리킨다.&lt;sup&gt;5&lt;/sup&gt; 바울은 그곳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는지 밝히지 않고, 그 일이 자신들을 얼마나 짓눌렀는지를 말한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는 바울 일행이 극심하게, 자기 힘을 넘어서까지 짓눌렸다는 뜻이다. 그 결과 그들은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한 절망이 살아남는 일 자체에까지 미쳤다.&lt;/p&gt;&lt;p&gt;9절에서 바울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고 말한다. 이는 실제 법정의 판결이라기보다 죽음이 확실해 보였던 그들의 판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lt;sup&gt;6&lt;/sup&gt; 바울은 이어서 이 경험의 목적을 밝힌다. 그들이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는 것이다. 살아날 힘이 자기 안에 남아 있지 않을 때 그들이 기댈 분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뿐이었다.&lt;/p&gt;&lt;p&gt;1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이같이 큰 사망에서” 자신들을 건지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망”은 그들을 거의 삼킬 뻔한 죽음의 위험이다. 바울은 “또 건지실 것이며”라고 장래의 건지심을 말한 뒤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 덧붙인다.&lt;sup&gt;7&lt;/sup&gt; “바라노라”로 옮긴 동사(ἠλπίκαμεν, 엘피카멘)는 바울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고 지금도 그 소망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이미 큰 사망에서 건지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에, 바울은 위험이 다시 닥쳐도 그 하나님이 건지시리라고 기대한다.&lt;/p&gt;&lt;h3&gt;간구와 감사 (11절)&lt;/h3&gt;&lt;p&gt;11절은 원문에서 10절과 한 문장으로 이어진다. 헬라어 본문은 명령형 동사 대신 분사 구문(συνυπουργούντων καὶ ὑμῶν, 쉬뉘푸르군톤 카이 휘몬)으로 시작하며, 그 뜻은 ‘너희도 간구로 우리를 위하여 함께 도우면서’에 가깝다. 이 구문은 ‘너희가 도우면’이라는 조건으로도, ‘너희가 돕는 가운데’라는 동반 상황으로도 읽을 수 있고, 문맥만으로는 어느 한쪽으로 정해지지 않는다.&lt;sup&gt;8&lt;/sup&gt; 조건으로 읽으면 하나님이 다시 건지시는 일은 성도들의 간구를 전제로 한다. 동반 상황으로 읽으면 성도들은 하나님이 이루실 건지심에 간구로 동참한다. 바울은 10절에서 “또 건지실 것이며”라고 장래의 건지심을 단언한 뒤 이 구문을 잇는다. 이 흐름에는 동반 상황의 읽기가 더 잘 맞는다.&lt;sup&gt;9&lt;/sup&gt;&lt;/p&gt;&lt;p&gt;이 구문에는 명령법이 없지만, 바울은 이 말로 성도들에게 기도를 청한다. 그는 성도들의 간구를 하나님이 이루실 건지심과 연결해 말하고, 이어지는 목적절에서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감사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 바람이 이루어지려면 성도들이 실제로 간구해야 한다. 바울은 성도들이 간구로 함께하리라는 신뢰를 드러내며 기도를 청한다.&lt;sup&gt;10&lt;/sup&gt; 개역개정의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는 이 요청의 뜻을 바르게 옮긴다. 다만 원문은 이 요청을 10절에 이어지는 분사 구문에 담고, 개역개정은 독립된 명령문으로 옮긴다. 그래서 성도들의 간구가 10절의 소망에 이어진다는 점과 ‘함께’ 돕는다는 뜻이 번역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lt;/p&gt;&lt;p&gt;건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고린도 성도들은 간구로 바울 일행을 돕는다. 4-7절에서 바울 일행이 받은 위로가 교회를 위한 것이었다면, 11절에서는 교회의 간구가 바울 일행을 위한 것이다. 목적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은사”(χάρισμα, 카리스마)는 하나님이 죽음의 위험에서 건지시는 은혜의 선물이며, 많은 사람의 감사는 그 선물을 베푸신 하나님께 향한다. 3절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시작한 단락은 11절에서 많은 사람의 감사로 끝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건짐받은 사람의 고백과 많은 사람의 감사&lt;/h3&gt;&lt;p&gt;9-11절에서 하나님은 죽음이 확실해 보이던 바울 일행을 건지시고, 바울은 그 건지심이 많은 사람의 감사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건짐받은 사람이 공동체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은 시편 116편에도 나온다. 시인은 사망의 위협 가운데 여호와께 생명을 건져 달라고 기도했고(시 116:3-4), 여호와께서 자기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셨다고 고백하며(시 116:8),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서원을 갚고 감사제를 드리겠다고 말한다(시 116:14, 17-19). 바울은 4:13에서 이 시편의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를 인용한다(칠십인역 시 115:1. 개역개정 시 116:10은 번역이 다르다). 그리고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자신들도 예수와 함께 살리실 것을 말한 뒤(4:14),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한다고 덧붙인다(4:15).&lt;/p&gt;&lt;p&gt;바울이 4:13-15에서 이 시편을 부활의 소망과 많은 사람의 감사에 연결하므로, 9-11절의 건지심과 감사도 부활의 소망에 비추어 읽을 수 있다. 시편의 시인은 위기를 지난 뒤 성전 뜰에서 감사를 드리지만(시 116:18-19), 바울은 아시아에서 건짐받은 뒤에도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가운데 있다(4:11). 그래서 바울의 고백은 지나간 건지심을 돌아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께 장래의 건지심을 바라는 소망으로 이어진다(9-10절). 11절에서는 고린도 교회가 간구로 바울 일행을 돕고, 그 간구로 얻은 은사에 대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한다.&lt;/p&gt;&lt;h3&gt;위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회복에 속한다&lt;/h3&gt;&lt;p&gt;3-7절에서 바울은 위로라는 말을 거듭 쓴다. 이사야서에서 위로는 하나님이 포로기를 지나는 자기 백성을 다시 일으키시는 회복의 행동이다. 이사야 40장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사 40:1), 그 위로의 내용을 예루살렘의 노역이 끝나고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는 선포로 밝힌다(사 40:2). 이사야 49:13에서 선지자는 하늘과 땅에게 노래하라고 외치며 그 이유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온은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탄식하고(사 49:14), 하나님은 여인이 젖 먹는 자식을 혹시 잊을지라도 자신은 시온을 잊지 않겠다고 응답하신다(사 49:15). 이사야서의 위로는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의 약속이다.&lt;/p&gt;&lt;p&gt;바울은 이사야 49장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회복의 약속으로 읽는다. 6:2에서 그는 이사야 49:8을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로 인용하고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선언한다. 이사야가 약속한 회복의 때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목 안에서 이미 이르렀다는 것이다(5:18-6:2). 3절의 “자비의 아버지”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이사야 49:13의 긍휼과 위로를 떠올리게 하고, 6절에서 바울은 위로와 구원을 나란히 말한다. 이 연결에 비추어 보면, 바울 일행과 교회가 환난 중에 받는 위로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회복하시는 일에 속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시온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살 소망까지 끊어졌던 바울 일행도 그들의 모든 환난 중에서 위로하셨다(4, 8절).&lt;/p&gt;&lt;h3&gt;위로와 감사가 사람을 거쳐 퍼져 나간다&lt;/h3&gt;&lt;p&gt;4절에서 위로는 하나님에게서 바울 일행에게로, 바울 일행에게서 다른 환난당한 사람에게로 이어진다. 7:5-7에는 이 흐름이 실제로 일어난 장면이 나온다. 마게도냐에서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던 바울을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위로하셨는데, 디도는 고린도 성도들에게서 받은 위로로 바울을 위로하였다. 위로는 하나님에게서 나와 고린도 교회와 디도를 거쳐 바울에게 이르렀다. 바울이 아시아의 환난과 건지심을 이 편지에 써서 알리는 일도 같은 흐름에 속한다. 그가 환난 중에 받은 위로는 그의 말을 통해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리고 이 편지를 읽는 후대의 교회에까지 이른다.&lt;sup&gt;11&lt;/sup&gt;&lt;/p&gt;&lt;p&gt;11절의 목적절에 따르면 바울이 교회의 간구를 청하는 목적은 많은 사람의 감사다. 하나님은 건지심을 은혜의 선물로 베푸시고, 교회는 간구로 바울 일행을 도우며, 많은 사람이 그 선물을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9:11-14에서도 같은 관계가 보인다. 고린도 교회의 연보는 성도들의 부족을 채울 뿐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넘치고, 도움을 받은 성도들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한다. 두 경우 모두 성도들은 서로를 위해 간구하고, 한 사람이나 한 교회에 베푸신 은혜에 대해 여러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lt;/h3&gt;&lt;p&gt;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내신 사도다(1절). 2절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고,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나란히 은혜와 평강의 근원으로 언급한다. 교회가 받는 은혜는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온다. 3절에서 바울은 “자비의 아버지”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신 분을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로 부르며 찬송한다. 그래서 3-11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위로와 건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일이며, 5절에 따르면 그 위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다.&lt;/p&gt;&lt;h3&gt;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위로&lt;/h3&gt;&lt;p&gt;5절에서 바울 일행에게 넘치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이고, 그들이 받는 위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 같은 편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라고 말한다(13:4). 부활하신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와 다른 분이 아니다. 그래서 그분께 속한 사람은 그분 때문에 고난을 겪고, 살아 계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는다.&lt;sup&gt;12&lt;/sup&gt; 이 관계는 바울 일행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고린도 성도들도 같은 고난을 견디며(6절), 고난과 위로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이다(7절).&lt;/p&gt;&lt;p&gt;6절에서 바울은 자신들의 환난이 고린도 성도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편지에서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고(5:14-15),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5:21). 바울이 받은 것은 이 화목을 이루는 일이 아니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다(5:18). 바울 일행의 환난이 성도들을 위한 것은, 4절에 따르면 그들이 환난 중에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기 때문이다. 그 위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다(5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이 바울에게 넘친다는 말은 그가 그리스도의 대속에 무엇을 보탠다는 뜻이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께 속하여 그분의 복음을 맡은 사람에게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이 넘쳐 온다는 뜻이다.&lt;/p&gt;&lt;h3&gt;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lt;/h3&gt;&lt;p&gt;9절에서 바울 일행이 의지하게 된 분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다. 같은 편지에서 바울은 이 하나님을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라고 부른다(4:14). 바울이 아시아에서 의지한 하나님은 이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다. 바울은 자신들이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것이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4:11). 아시아에서의 일도 그런 삶의 한 장면이다. 바울 일행은 자기 힘을 넘는 고난에 던져졌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짐받았다.&lt;sup&gt;13&lt;/sup&gt; 이 건지심을 4:11에 비추어 읽으면, 죽음의 위험에 놓인 바울 일행의 삶에서 예수의 생명이 드러난 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lt;/p&gt;&lt;p&gt;예수께서는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실제로 죽으셨고 하나님이 그분을 살리셨다. 그래서 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소망은 죽음의 위험에서 건짐받는 데에만 묶이지 않는다. 1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앞으로도 건지시기를 바란다. 땅에서 받는 이런 건지심은 하나님이 마지막에 죽음 자체에서 건지실 일을 미리 보여 준다.&lt;sup&gt;14&lt;/sup&gt; 그 마지막 건지심에서 하나님은 바울 일행을 예수와 함께 살리사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것이다(4:14).&lt;/p&gt;&lt;h3&gt;함께 간구하고 감사하는 교회&lt;/h3&gt;&lt;p&gt;11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은 간구로 바울 일행을 돕는다. 7절에서 바울은 그들을 고난과 위로에 “참여하는 자”라고 불렀다. 그들의 간구는 같은 그리스도께 속하여 고난과 위로를 나누는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하나님께 구하는 일이다. 그들이 간구하는 분은 9절에서 바울 일행이 의지한 하나님, 곧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이다. 이렇게 간구하고 감사하는 일은 사도가 전한 복음으로 열린 하나님과의 교제에 속한다.&lt;sup&gt;15&lt;/sup&gt; 성도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신 하나님이시고(5:18-21), 간구와 감사는 그 은혜를 받은 공동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응답이다. 지금 바울과 교회는 간구와 감사로 서로를 위하고, 마지막에는 함께 하나님 앞에 선다(4:14).&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힘에 겹다는 고백&lt;/h3&gt;&lt;p&gt;바울은 아시아에서 힘에 겹도록 짓눌려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고백한다(8절). 그는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며 이 일을 교회에 스스로 알렸다. 그가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 일(9절)은 절망을 부인한 데서가 아니라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던 바로 그때에 일어났다. 그러므로 힘에 겨워 더 견딜 수 없다고 말하는 신자를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이 본문과 맞지 않는다. 그런 고백을 하는 때가 자기를 의지하던 마음이 하나님께로 옮겨 가는 때일 수 있다.&lt;/p&gt;&lt;p&gt;9절의 목적절은 바울이 자기 일을 돌아보며 한 고백이다. 그는 아시아의 환난이 자신들을 무엇으로 이끌었는지 말한다. 이 고백을 다른 사람의 고난에 옮겨 “하나님이 너를 가르치시려고 이 일을 주셨다”고 말하면, 바울이 자기 경험에 대해 한 말을 남의 고난이 생긴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바꾸게 된다. 바울은 고난당하는 고린도 교회에도 그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가 그들에게 말한 것은 그들이 고난에 참여한 것처럼 위로에도 참여하리라는 견고한 소망이었다(7절).&lt;/p&gt;&lt;h3&gt;위로하는 사람도 간구가 필요하다&lt;/h3&gt;&lt;p&gt;4절에서 바울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11절에서는 고난과 위로에 함께 참여하는 고린도 성도들에게(7절) 간구로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청한다. 위로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을 맡은 사람도 바울처럼 자신의 한계를 알리고 기도를 구할 수 있다. 죽음의 위험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짐 아래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이 본문이 가장 직접 청하는 응답이다.&lt;/p&gt;&lt;h3&gt;자기 경험을 요구하지 않는 위로&lt;/h3&gt;&lt;p&gt;4절에 따르면 바울 일행이 위로할 대상은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위로하는 사람은 자신이 겪어 보지 않은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도 위로하게 된다. 자신이 고난을 이겨 낸 방식은 자기가 겪은 환난 가운데서 얻은 것이어서, 다른 환난을 겪는 사람의 회복 과정에 그대로 요구할 수는 없다. 4절에서 위로하는 사람이 건네는 것은 그 자신이 “하나님께 받는 위로”다. 위로하는 사람이 자기 경험보다 이 위로를 신뢰할 때, 상대의 고난을 자기 이야기로 덮지 않고 들을 수 있다.&lt;/p&gt;&lt;h3&gt;은혜를 성과로 바꾸지 않음&lt;/h3&gt;&lt;p&gt;11절에서 건지심은 “은사”, 곧 은혜의 선물이며 많은 사람의 감사는 하나님께 향한다. 어떤 사람이 위기를 지나 회복되었을 때 그 이야기가 당사자의 강한 믿음이나 기도 모임의 능력을 입증하는 이야기로 바뀌면, 은혜가 사람의 성과가 된다. 그것은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는 9절의 고백을 거꾸로 돌리는 일이다. 또 회복이 믿음과 기도의 성과가 되면, 같은 방식으로 건짐받지 못한 사람은 믿음이나 기도가 부족했던 사람이 된다.&lt;/p&gt;&lt;p&gt;바울은 앞으로도 건지시기를 바랐고, 그 소망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께 두었다(9-10절). 그래서 교회는 지금 베풀어진 건지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런 건지심을 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은 성도를 두고도 같은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4:14에서 바울은 주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이 자신들도 예수와 함께 살리사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그 앞에 세우시리라고 말한다. 먼저 죽은 성도들도 이 소망 안에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남은 성도들과 함께 그 앞에 세우실 것이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Mark Seifrid, “The Message of Second Corinthians: 2 Corinthians as the Legitimation of the Apostle,” &lt;em&gt;Southern Baptist Journal of Theology&lt;/em&gt; 19, no. 3 (2015): 9,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lt;/a&gt;.&lt;/li&gt;&lt;li&gt;“2 Corinthians 1,” NET Bible, 1:5, tn 9, accessed October 27, 2026, &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2Co&amp;amp;chapter=1" rel="noopener"&gt;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2Co&amp;amp;chapter=1&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이 문맥의 초점이 영원한 구원보다 고린도 성도들의 현재 영적 안녕에 있다고 풀이한다. 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1:6,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6,”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6/"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6/&lt;/a&gt;.&lt;/li&gt;&lt;li&gt;Seifrid, “Message of Second Corinthians,” 17,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lt;/a&gt;.&lt;/li&gt;&lt;li&gt;“2 Corinthians 1,” NET Bible, 1:8, tn 16, &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2Co&amp;amp;chapter=1" rel="noopener"&gt;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2Co&amp;amp;chapter=1&lt;/a&gt;.&lt;/li&gt;&lt;li&gt;“2 Corinthians 1,” NET Bible, 1:9, tn 17, &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2Co&amp;amp;chapter=1" rel="noopener"&gt;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2Co&amp;amp;chapter=1&lt;/a&gt;.&lt;/li&gt;&lt;li&gt;NA28은 &lt;span lang="grc"&gt;ἠλπίκαμεν&lt;/span&gt;(엘피카멘) 뒤의 접속사 &lt;span lang="grc"&gt;ὅτι&lt;/span&gt;(호티)를 대괄호 안에 둔다. 이 접속사가 있으면 ‘이 후에도 건지시리라’가 바울이 바라는 내용이 되고, 없으면 소망을 두었다는 진술 뒤에 ‘또 건지실 것이다’라는 독립 진술이 이어진다. NET 본문비평주는 대부분의 사본을 근거로 &lt;span lang="grc"&gt;ὅτι&lt;/span&gt;를 포함한 읽기를 택하며, 개역개정의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도 이 읽기와 맞는다. &lt;em&gt;Novum Testamentum Graece&lt;/em&gt;, ed. Barbara Aland et al., 28th rev. ed.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2012), 2 Cor 1:10, accessed October 25, 2026, &lt;a href="https://www.die-bibel.de/bibel/NA28/2CO.1" rel="noopener"&gt;https://www.die-bibel.de/bibel/NA28/2CO.1&lt;/a&gt;; “2 Corinthians 1,” NET Bible, 1:10, tc 21, &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2Co&amp;amp;chapter=1" rel="noopener"&gt;https://classic.net.bible.org/bible.php?book=2Co&amp;amp;chapter=1&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이 분사를 명령, 수단이나 상황, 조건으로 읽는 세 가능성을 들고, 문맥이 어느 하나를 지지하지 않지만 최근 해석자들 사이에서는 조건 해석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다고 설명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1,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1,”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1/&lt;/a&gt;.&lt;/li&gt;&lt;li&gt;Plummer는 이 구문을 “provided you help” 또는 “while you help”로 읽을 수 있다고 보고, 바울이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는 만큼 고린도 성도들의 간구도 확신한다는 이유로 뒤의 읽기를 택한다. Alfred Plummer, &lt;em&gt;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Second Epistle of St Paul to the Corinthians&lt;/em&gt;,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Edinburgh: T. &amp;amp; T. Clark;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15; repr., 1956), 20, &lt;a href="https://archive.org/details/criticalexegetic34plumuoft" rel="noopener"&gt;https://archive.org/details/criticalexegetic34plumuoft&lt;/a&gt;. Meyer도 Erasmus, Rosenmüller, Rückert 등의 조건 해석보다, 성도들의 간구가 ‘이 후에도 건지시리라’(&lt;span lang="grc"&gt;καὶ ἔτι ῥύσεται&lt;/span&gt;, &lt;span class="translit"&gt;카이 에티 뤼세타이&lt;/span&gt;)는 일을 돕는다는 읽기를 택한다. Heinrich August Wilhelm Meyer, &lt;em&gt;Critical and Exegetical Handbook to the Epistles to the Corinthians&lt;/em&gt;, vol. 2, trans. D. Douglas Bannerman and David Hunter, rev. and ed. William P. Dickson (Edinburgh: T. &amp;amp; T. Clark, 1879), 144, &lt;a href="https://archive.org/details/criticalexegetic72meye" rel="noopener"&gt;https://archive.org/details/criticalexegetic72meye&lt;/a&gt;.&lt;/li&gt;&lt;li&gt;E. H. Plumptre는 바울이 성도들이 이미 기도하고 있고 그 기도가 도움이 된다고 전제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기도를 청한다고 설명한다(“Indirectly he asks their prayers for him”). E. H. Plumptre, “2 Corinthians 1,” in &lt;em&gt;Ellicott’s Commentary for English Readers&lt;/em&gt;, on 2 Cor 1:11, Bible Hub,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llicott/2_corinthians/1.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llicott/2_corinthians/1.htm&lt;/a&gt;. Meyer는 이 구절을 “a trustful and conciliatory mention of the intercessions of the readers”라고 부른다. Meyer, &lt;em&gt;Epistles to the Corinthians&lt;/em&gt;, 2:143-144, &lt;a href="https://archive.org/details/criticalexegetic72meye" rel="noopener"&gt;https://archive.org/details/criticalexegetic72meye&lt;/a&gt;. UBS 핸드북도 이 절의 기도를 “the prayers that Paul is urging in this verse”라고 부른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1,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1,”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1/&lt;/a&gt;.&lt;/li&gt;&lt;li&gt;Seifrid, “Message of Second Corinthians,” 14,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lt;/a&gt;.&lt;/li&gt;&lt;li&gt;Seifrid, “Message of Second Corinthians,” 16,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lt;/a&gt;.&lt;/li&gt;&lt;li&gt;Seifrid, “Message of Second Corinthians,” 17,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lt;/a&gt;.&lt;/li&gt;&lt;li&gt;Seifrid, “Message of Second Corinthians,” 17,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lt;/a&gt;.&lt;/li&gt;&lt;li&gt;Seifrid, “Message of Second Corinthians,” 18,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1:12-22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1.12-22/</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1.12-22/</guid><description>고린도후서 1:12-22의 방문 계획 변경과 사도의 진실성,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약속과 성령의 보증을 해설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양심의 증언과 하나님의 은혜로 행한 처신 (12절)&lt;/h3&gt;&lt;p&gt;바울은 1:8-11에서 아시아에서 당한 죽음의 위험과 하나님의 건지심을 말한 뒤, 고린도 성도들에게 간구로 자신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12절의 원문은 이유를 밝히는 접속사로 시작하여 그 부탁의 근거를 제시한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성도들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를 근거로 삼고, 그것을 “우리의 자랑”이라고 부른다. 자랑의 내용은 양심이 증언하는 바, 곧 바울 일행이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이 증언을 길게 이어 가는 까닭은 15-17절에서 드러난다. 그가 알린 방문 계획이 바뀌면서 그의 말을 믿을 수 있느냐는 의심이 생겼다.&lt;/p&gt;&lt;p&gt;“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에서 양심은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행동을 돌아보며 내리는 판단이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전서 4:4에서 스스로 자책할 것을 깨닫지 못해도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고 말했다. 12절에서도 그는 양심의 증언을 자기 말만으로 세우지 않고, 고린도 성도들이 직접 본 처신에 연결한다. 바울 일행은 “세상에서”, 곧 사람들 가운데 살아가는 일상에서 이렇게 행했고,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더욱 그렇게 행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이 그들 가운데 머물며 보여 준 삶을 기억하여 이 증언이 참인지 판단할 수 있다.&lt;/p&gt;&lt;p&gt;개역개정은 그 처신의 방식을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라고 옮긴다. “거룩함”은 ἁγιότητι(하기오테티)라는 사본 읽기를 따른 번역이고, NA28은 철자가 비슷한 ἁπλότητι(하플로테티), 곧 ‘순전함’을 본문으로 택했다. 두 읽기가 모두 사본으로 전해지므로 개역개정의 “거룩함”은 번역 실수가 아니다.&lt;sup&gt;1&lt;/sup&gt; 그러나 문맥에는 순전함이 더 잘 맞는다.&lt;sup&gt;2&lt;/sup&gt; 바울은 13절에서 편지에 숨긴 뜻이 없다고 말하고, 17절에서는 “예”와 “아니라”를 동시에 말한다는 의심을 부정한다. 바울이 변호하는 것은 말과 계획에서 계산을 숨기지 않고 한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이다.&lt;sup&gt;3&lt;/sup&gt;&lt;/p&gt;&lt;p&gt;“진실함”(εἰλικρινείᾳ, 에일리크리네이아)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진정성을 뜻하며 순전함과 짝을 이룬다. 바울은 이 두 성품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행할 수 있었던 근원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밝힌다. 그 반대편에 “육체의 지혜”(σοφίᾳ σαρκικῇ, 소피아 사르키케)가 있다. 여기서 ‘육체의’는 몸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채 자기 이익을 계산하는 사람의 방식을 가리킨다. 바울은 자신의 영리함으로 고린도 성도들의 신뢰를 얻었다고 말하지 않는다.&lt;/p&gt;&lt;h3&gt;읽고 아는 편지와 주의 날의 자랑 (13-14절)&lt;/h3&gt;&lt;p&gt;13절에서 바울은 편지를 읽는 일로 화제를 옮긴다. “읽고”(ἀναγινώσκετε, 아나기노스케테)와 “아는”(ἐπιγινώσκετε, 에피기노스케테)은 소리가 비슷한 두 동사이다. 바울은 두 동사를 이어 써서, 성도들이 읽는 글과 그들이 알아듣는 뜻 사이에 다른 것이 끼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편지에서 숨은 의도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어서 바울은 성도들이 “완전히” 알기를 바란다. ἕως τέλους(헤오스 텔루스)는 ‘완전히’로도, 주님의 날까지 ‘끝까지’로도 옮길 수 있다. 14절의 “부분적으로”와 대조되므로 이해의 정도를 말하는 ‘완전히’가 더 자연스럽고, 개역개정도 이 뜻을 따른다.&lt;sup&gt;4&lt;/sup&gt;&lt;/p&gt;&lt;p&gt;14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이미 자신을 “부분적으로” 알았다고 인정한다. ἀπὸ μέρους(아포 메루스)는 성도들이 바울을 어느 정도만 이해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회중 가운데 일부만 그를 인정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lt;sup&gt;5&lt;/sup&gt; 13절의 “완전히”와 짝을 이루는 점에서 앞의 읽기가 더 자연스럽다. 어느 쪽이든 바울은 성도들이 자신을 전혀 모른다고 몰아붙이지 않는다. 바울은 성도들이 무엇을 온전히 알기를 바라는지도 밝힌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의 날에” 사도와 회중이 서로의 자랑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날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믿음에 서 있는 것을 자랑하고, 성도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바울 일행을 자랑하게 된다. 12절에서 시작한 바울의 자랑은 이렇게 주님 앞에서 서로를 기뻐할 소망으로 이어진다.&lt;/p&gt;&lt;h3&gt;바뀐 방문 계획과 경솔하다는 의심 (15-17절)&lt;/h3&gt;&lt;p&gt;15-16절에서 바울은 “이 확신”, 곧 서로의 자랑이 되리라는 신뢰를 가지고 세웠던 방문 계획을 밝힌다. 그는 먼저 고린도에 들렀다가 마게도냐로 가고, 마게도냐에서 다시 고린도로 돌아온 뒤 유대로 갈 생각이었다. 고린도전서 16:5-7에서는 마게도냐를 거친 뒤 고린도에 가서 겨울을 지낼 수도 있다고 했으므로, 두 편지에 나타난 동선은 서로 다르다. 개역개정이 “두 번 은혜”로 옮긴 δευτέραν χάριν(데우테란 카린)은 직역하면 ‘두 번째 은혜’이다. 16절의 동선과 함께 읽으면, 이 표현은 바울이 고린도를 두 번 들러 성도들이 두 차례 은혜를 얻게 하려던 계획을 가리킨다.&lt;sup&gt;6&lt;/sup&gt; 개역개정의 “두 번”도 이 읽기를 반영한다. 바울은 자신의 방문을, 사도가 찾아가 그리스도의 구원과 가르침을 나누며 성도들이 은혜를 누리는 기회로 여겼다.&lt;sup&gt;7&lt;/sup&gt; 그래서 계획이 바뀌자 고린도 성도들은 기대하던 은혜의 기회를 잃었다고 느낄 수 있었다.&lt;/p&gt;&lt;p&gt;16절의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에서 개역개정이 ‘도움’으로 표현한 동사 προπεμφθῆναι(프로펨프테나이)는 여행자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다음 목적지로 보내는 일을 가리킨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6:6, 11에서도 같은 동사로 고린도 교회가 자신과 디모데를 보내 주기를 부탁하고, 디도서 3:13에서는 세나와 아볼로를 보내며 그들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라고 당부한다. 바울의 계획에는 고린도 교회가 그의 여정을 실제로 돕는 일이 들어 있었다. 유대라는 목적지는 고린도후서 8-9장에서 다루는 성도들을 위한 연보와도 어울린다. 방문 계획이 바뀌면서, 처음 계획대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유대로 보내 주는 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lt;/p&gt;&lt;p&gt;17절에서 바울은 두 질문으로 의심에 답한다. 첫 질문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는 ‘아니다’라는 답을 기대하는 형식이다. 방문 계획이 바뀌자 고린도에서는 바울이 경솔하다는 비난이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lt;sup&gt;8&lt;/sup&gt; 둘째 질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육체를 따라”(κατὰ σάρκα, 카타 사르카)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예”는 고린도에 가겠다는 약속에, “아니라”는 가지 않기로 한 결정에 해당한다.&lt;sup&gt;9&lt;/sup&gt; 바울이 부정하는 것은 일정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한 입으로 “예”와 “아니라”를 동시에 말하는 사람이라는 혐의이다. “육체를 따라” 계획한다는 말은 12절의 “육체의 지혜”로 행한다는 말과 짝을 이룬다. 둘 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편의에 따라 판단하는 사람의 방식을 가리킨다.&lt;/p&gt;&lt;h3&gt;신실하신 하나님과 바울 일행이 전파한 아들 (18-19절)&lt;/h3&gt;&lt;p&gt;1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미쁘시니라”로 답을 시작한다. 원문은 ‘신실하다’(πιστὸς, 피스토스)를 문장 맨 앞에 두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한다. 바울 자신만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말이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아니었음을 보증하신다는 뜻이다.&lt;sup&gt;10&lt;/sup&gt;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ὁ λόγος ἡμῶν, 호 로고스 헤몬)은 일차로 방문 약속을 가리키지만, 19-20절이 곧바로 바울 일행이 전파한 그리스도를 말하므로 고린도에서 선포한 복음도 포함한다.&lt;sup&gt;11&lt;/sup&gt; 바울이 이 둘을 한 문장에 묶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을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한 사람으로 알았다. 그의 말이 상황에 따라 예와 아니라를 오간다면 그가 전한 복음도 같은 의심을 받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말이 믿을 만하다고 변호하면서, 그가 전한 복음이 믿을 만하다는 사실도 밝힌다.&lt;sup&gt;12&lt;/sup&gt; 그러나 바울은 바뀐 계획까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는 1:23에서 고린도에 가지 않은 이유를 따로 밝힌다. 18절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근거로 부정하는 것은 일정의 변경이 아니라 이중적인 말이다.&lt;/p&gt;&lt;p&gt;19절의 주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아들은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전파한 분이다.&lt;sup&gt;13&lt;/sup&gt; 고린도 교회가 믿은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사사로운 주장으로 전해지지 않았고, 세 사람이 같은 내용으로 증언한 분이다. 바울은 이 그리스도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라고 말한다. “되었느니라”에 쓰인 완료형(γέγονεν, 게고넨)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예”가 지금도 유효함을 나타낸다. 19절은 이렇게 18절의 근거가 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에 번복이 없었으므로, 그리스도를 전한 자신들의 말도 예와 아니라를 오가지 않았다고 말한다.&lt;/p&gt;&lt;h3&gt;그리스도 안의 예와 그로 말미암은 아멘 (20절)&lt;/h3&gt;&lt;p&gt;20절은 19절의 “예”를 하나님의 약속 전체로 넓힌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는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 몇이든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는 뜻이다. 이어서 바울은 그 성취에 대한 응답으로 “아멘”을 말한다. 회당의 회중은 찬양의 말을 참되다고 인정할 때 아멘으로 응답했고, 초기 교회도 이 관습을 이어받았다.&lt;sup&gt;14&lt;/sup&gt; 원문은 이 아멘이 “그로 말미암아”(δι’ αὐτοῦ, 디 아우투),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려진다고 말한다. 문장 끝의 δι’ ἡμῶν(디 헤몬)은 ‘우리를 통하여’라는 뜻인데, 개역개정은 이를 “우리가 아멘 하여”로 옮겼다. 19절에서 같은 표현이 그리스도를 전파한 바울 일행을 가리켰으므로, 고린도 성도들의 아멘이 사도들의 선포를 통해 나왔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우리’에는 바울 일행과 함께 아멘으로 응답하는 고린도 성도들도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lt;sup&gt;15&lt;/sup&gt; 21절이 곧바로 “우리를 너희와 함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사도와 회중은 같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lt;/p&gt;&lt;h3&gt;사도와 회중을 함께 굳건하게 하시고 성령을 주신 하나님 (21-22절)&lt;/h3&gt;&lt;p&gt;21절에서 바울은 이 모든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고 밝힌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신다. “굳건하게 하시고”(βεβαιῶν, 베바이온)는 현재분사로, 하나님께서 사도와 회중을 그리스도와 굳게 결합시키는 일을 지금도 계속하신다는 뜻이다.&lt;sup&gt;16&lt;/sup&gt; 개역개정이 “그리스도 안에서”로 옮긴 εἰς Χριστὸν(에이스 크리스톤)도 이 결합을 가리킨다. 이어지는 “기름을 부으신”(χρίσας, 크리사스)은 ‘기름 부음 받은 이’를 뜻하는 “그리스도”와 소리와 뜻이 겹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기름 부음 받은 분께 굳게 연결하시고, 그들에게도 기름을 부으신다.&lt;sup&gt;17&lt;/sup&gt; 기름 부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별하여 세우시는 일을 가리킨다. 이를 사도의 사명 위임으로 보아 ‘사명을 맡기다’로 옮긴 번역도 있고, 기름 부음과 인치심을 받은 ‘우리’를 사도들로 한정하는 해석도 있다.&lt;sup&gt;18&lt;/sup&gt; 그러나 이 문장에서 처음 “우리를 너희와 함께”라고 밝힌 대상이 뒤의 기름 부음과 인치심에서 바뀐다는 표시는 없다. 그러므로 사도는 회중 위에서 은혜를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 서지 않고, 그들과 같은 은혜를 받는다.&lt;/p&gt;&lt;p&gt;22절은 하나님의 행동을 두 가지 더 말한다. “인치시고”(σφραγισάμενος, 스프라기사메노스)는 물건에 인을 찍어 소유를 표시하던 상거래의 관행에서 온 말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자기 소유로 표시하셨다는 뜻이다.&lt;sup&gt;19&lt;/sup&gt; “보증”(ἀρραβών, 아라본)도 상거래 용어로, 나머지를 반드시 치르겠다는 표로 먼저 지불하는 계약금을 가리킨다. 원문 τὸν ἀρραβῶνα τοῦ πνεύματος(톤 아라보나 투 프뉴마토스)는 ‘성령의 보증’이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다른 보증이 아니라 성령 자신이 보증이시라는 뜻이다. 개역개정의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도 이 뜻을 살렸다.&lt;sup&gt;20&lt;/sup&gt; 하나님은 성령을 주셔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구속하시리라는 약속을 미리 확증하신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5에서도 같은 표현을 쓰는데, 거기서 성령은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질 미래(5:4)의 보증이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곧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주어졌다. 방문 계획을 둘러싼 의심 때문에 사도와 회중 사이가 멀어졌어도, 하나님께서 두 편 모두에게 주신 성령은 그들이 같은 하나님께 속했음을 확증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lt;/h3&gt;&lt;p&gt;18-22절의 논증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출발한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셨고, 그 약속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어 구원의 완성을 보증하신다. 그러므로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은 사도의 일정이 지켜지리라는 기대 위에 서 있지 않다.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그 믿음을 지탱하신다. 이 확신은 이스라엘이 언약 안에서 알았던 하나님의 성품에 뿌리를 둔다.&lt;/p&gt;&lt;p&gt;신명기 7:9는 여호와를 “신실하신 하나님”이라 부르며, 그분이 자기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천 대까지 언약을 지키시고 인애를 베푸신다고 말한다. 같은 단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까닭을 그들의 수나 힘에서 찾지 않고,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찾는다(신명기 7:7-8). 민수기 23:19에서 발람도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고 선언한다. 18절의 “하나님은 미쁘시니라”는 이렇게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른다. 17-18절에서도 바울은 “육체를 따라” 말을 바꾸는 사람의 방식과 신실하신 하나님을 대조한다. 바울의 계획은 바뀌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약속은 번복되지 않는다. 바울이 자기 말의 진실성을 주장하는 근거도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그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께 있다.&lt;/p&gt;&lt;h3&gt;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에게 이른 약속과 성령&lt;/h3&gt;&lt;p&gt;20절의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는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하신 약속들을 모두 아우른다. 로마서 15:8-9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받은 사람들을 섬기시며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 목적은 이방인들도 긍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20절에서도 약속의 성취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으로 이어진다. 이방 도시 고린도의 회중이 아멘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에게까지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갈라디아서 3:14는 그 약속에 성령이 포함된다고 밝힌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목적은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20절의 약속과 22절의 성령은 하나로 이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이 이루어졌기에 이방 성도들도 약속된 성령을 받았다.&lt;/p&gt;&lt;h3&gt;새 언약의 성령과 완성의 보증&lt;/h3&gt;&lt;p&gt;22절은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다고 말한다. 예레미야 31:33에서 하나님은 새 언약을 맺을 때 자기 법을 백성의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에스겔 36:26-27에서는 새 마음과 새 영을 주고, 자기 영을 그들 속에 두어 율례를 따라 행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3에서 고린도 성도들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육의 마음판에” 쓴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부르고, 3:6에서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말한다. 바울 자신이 마음과 성령과 새 언약을 이렇게 연결하므로, 22절에서 마음에 주신 성령도 예언자들이 약속한 새 언약의 성취로 읽을 수 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과 갈등을 겪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마음에 약속하신 영을 주셨다.&lt;/p&gt;&lt;p&gt;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는 말은 약속의 성취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에베소서 1:13-14에서도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들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고, 그 성령은 하나님께서 얻으신 백성을 속량하실 때까지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 그 사이를 사는 성도의 현실은 로마서 8:23이 보여 준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도 속으로 탄식하며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 고린도 성도들이 성령을 받았으면서도 사도와의 오해와 불안을 겪는 일도 이 기다림의 시간에 일어난다. 보증은 그런 어려움을 없애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을 완성하시리라는 확신을 준다.&lt;/p&gt;&lt;h3&gt;알아듣고 드리는 아멘&lt;/h3&gt;&lt;p&gt;20절의 아멘은 이해를 전제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6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감사하면 듣는 사람이 그 감사에 어떻게 아멘 하겠느냐고 묻는다. 아멘은 들은 내용을 참되다고 인정하는 응답이므로, 내용을 알아야 드릴 수 있다. 13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읽고 알 수 있는 말만 쓴다고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약속을 전하는 사람은 이렇게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야 하고, 듣는 사람은 그 내용을 이해하고 아멘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신실하신 하나님의 아들&lt;/h3&gt;&lt;p&gt;18-19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말이 믿을 만하다는 근거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바울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는 경우는 많지 않다.&lt;sup&gt;21&lt;/sup&gt; 19절의 원문은 “하나님의”를 맨 앞에 두어 이 칭호를 강조하고, 18절의 신실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을 잇는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분이 보내신 아들 안에서 드러났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 아들을 바울 일행의 선포로 듣고 믿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말을 변호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일관성보다 그들이 함께 믿는 그리스도를 최종 근거로 삼는다.&lt;/p&gt;&lt;h3&gt;그리스도 안의 예, 그로 말미암은 아멘&lt;/h3&gt;&lt;p&gt;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예”가 이루어졌다는 말은 예수께서 늘 긍정적인 말만 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선언이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한 복음은 고린도전서 15:3-4에 요약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으며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성경대로”라는 말이 보여 주듯, 이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하신 말씀을 이루신 일이다. 19절의 “예만 되었느니라”는 이 성취가 지금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사도와 갈등을 겪는 고린도 성도들도 이 성취된 약속을 붙들 수 있다.&lt;/p&gt;&lt;p&gt;20절은 하나님의 “예”와 교회의 “아멘”을 모두 그리스도와 연결한다.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고, 아멘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려진다. 이 두 표현은 그리스도의 일과 성도의 일을 구별한다. 약속을 이루시는 일은 그리스도께만 속하고, 사도와 회중은 그 성취를 받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멘으로 응답한다. 바울도 응답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lt;/p&gt;&lt;h3&gt;기름 부음 받은 이께 결합된 사도와 회중&lt;/h3&gt;&lt;p&gt;17절에서 바울의 말을 믿을 수 있느냐는 의심으로 시작한 논증은 21절에서 사도와 회중이 누구에게 속했느냐는 사실에 이른다. 하나님은 사도와 회중을 함께 그리스도께 굳게 결합시키신다. “기름을 부으신”이라는 말은 ‘기름 부음 받은 이’라는 “그리스도”의 뜻과 이어진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분이고, 성도는 그분께 결합되어 기름 부음을 받는다. 성도의 기름 부음은 그리스도와 나란히 서는 별도의 지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받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사도와 회중은 모두 그리스도께 의존하며, 사도가 회중보다 그리스도께 더 가까운 자리에 서지 않는다.&lt;/p&gt;&lt;h3&gt;주 예수의 날까지 붙드시는 하나님&lt;/h3&gt;&lt;p&gt;14절의 “우리 주 예수의 날”은 사도와 회중의 관계가 마지막에는 그리스도 앞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날에 서로의 자랑이 되리라는 소망이 있기에, 지금의 관계는 사도의 방문 일정이나 회중의 평가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날까지 하나님은 성령을 보증으로 주셔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을 붙드신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지 못한 동안에도 성도들은 하나님의 소유였고, 그의 편지를 읽고 복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울은 자신의 방문을 그들의 믿음의 조건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성령을 기억하게 한다. 사도의 방문은 성도들에게 은혜가 될 수 있지만, 그들을 그리스도께 붙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확인할 수 있는 처신과 알아들을 수 있는 말&lt;/h3&gt;&lt;p&gt;12절에서 바울은 양심의 증언을 말하면서도 고린도 성도들이 직접 본 처신에 호소한다. 신뢰가 흔들린 관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선한 의도만 내세울 수 없다. 상대가 함께 겪은 실제 행동을 근거로 제시하고, 상대가 그것을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는 말은 그 확인을 대신하지 못한다.&lt;/p&gt;&lt;p&gt;13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읽는 내용 밖에 다른 뜻을 숨기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들이 완전히 알기를 바란다. 교회에서 말하고 글을 쓰는 사람은 상대가 오해 없이 알아들을 수 있게 표현해야 한다. 듣는 사람도 숨은 의도를 추측하기보다 실제로 한 말과 그 사람이 살아온 모습을 살펴야 한다. 14절은 이 수고의 목적을 밝힌다. 주 예수의 날에 서로의 자랑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상대를 이겨야 할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가 그리스도 앞에 믿음으로 서도록 돕는다. 필요한 책망도 이 목적을 향한다.&lt;/p&gt;&lt;h3&gt;바뀐 계획을 설명하는 책임&lt;/h3&gt;&lt;p&gt;바울의 계획은 바뀌었고, 그는 그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계획이 바뀌는 일 자체를 불신앙으로 볼 수는 없지만, 약속한 일을 바꾸었다면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바울도 1:23에서 고린도에 가지 않은 이유를 밝힌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아멘과 기름 부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일을 가리킨다. 교회의 계획이나 지도자의 결정에 이 말들을 붙여 질문을 막거나 아멘을 요구하면, 하나님의 약속과 사람의 계획을 구별한 본문의 논증을 거스르게 된다. 지도자도 성도와 같은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자기 결정을 설명하고 질문을 받아야 한다.&lt;/p&gt;&lt;h3&gt;그리스도 안의 약속과 성령에 둔 확신&lt;/h3&gt;&lt;p&gt;20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선언은 기도의 확신이 어디에 근거하는지도 보여 준다. 성도는 삶의 구체적인 필요를 하나님께 솔직하게 구할 수 있다. 그러나 특정한 결과를 하나님이 이미 보장하셨다고 말하려면 그 약속이 실제로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이 본문이 확증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과, 그 완성을 보증하는 성령이다.&lt;/p&gt;&lt;p&gt;21-22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기름 부으시고 인치시고 성령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도가 확신을 얻는 근거는 자기 감정의 강도나 다른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이다. 확신의 근거가 하나님의 선물에 있으므로, 불안하고 낙심한 순간에도 보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로마서 8:23의 성도들도 성령을 받았으면서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탄식한다. 그러므로 고통을 말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받았다면 그런 감정이 없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없다. 사도와 회중을 함께 굳건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연약한 사람도 붙드신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NET 본문비평주는 ‘거룩함’ 읽기와 ‘순전함’ 읽기를 모두 유력한 이문으로 다룬다. 외적 증거는 ‘거룩함’ 쪽이 강하지만, 이 주는 문맥과 내적 근거를 들어 ‘순전함’ 읽기를 약간 선호한다. NET Bible, 2 Cor 1:12, tc 2,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2Co&amp;amp;chapter=1&amp;amp;verse=12" rel="noopener"&gt;https://classic.net.bible.org/verse.php?book=2Co&amp;amp;chapter=1&amp;amp;verse=12&lt;/a&gt;.&lt;/li&gt;&lt;li&gt;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1:12,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2,”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lt;/a&gt;.&lt;/li&gt;&lt;li&gt;고린도후서 8:2에서도 같은 낱말이 &lt;span lang="grc"&gt;τὸ πλοῦτος τῆς ἁπλότητος αὐτῶν&lt;/span&gt;(토 플루토스 테스 하플로테토스 아우톤)이라는 구에 쓰였다. 개역개정은 이 구를 “그들의 풍성한 연보”로 옮겼고, 이 낱말은 가난 속에서도 아낌없이 내어 준 마게도냐 교회들의 마음을 가리킨다. &lt;em&gt;Novum Testamentum Graece&lt;/em&gt;, ed. Barbara Aland et al., 28th rev. ed.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2012), 2 Cor 8:2, accessed October 25, 2026, &lt;a href="https://www.die-bibel.de/bibel/NA28/2CO.8" rel="noopener"&gt;https://www.die-bibel.de/bibel/NA28/2CO.8&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끝까지’도 문맥에 맞는다고 보면서, 대부분의 해석자는 14절의 ‘부분적으로’와 짝을 이루는 ‘완전히’의 뜻을 택한다고 설명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3-14,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3-1:14,”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3-11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3-114/&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성도들이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바울은 그들이 온전히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풀이하여, 이 구를 이해의 정도로 읽는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3-14,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3-11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3-114/&lt;/a&gt;. 회중 일부라는 읽기는 &lt;em&gt;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가 택한다. 이 주석은 ‘부분적으로’를 고린도 성도 가운데 일부는 바울을 인정했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읽는다(“some of them made this acknowledgment, but not all”). W. Robertson Nicoll, ed., &lt;em&gt;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1:14, Bible Hub,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htm&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5,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5,”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5/&lt;/a&gt;.&lt;/li&gt;&lt;li&gt;Peter Balla, “2 Corinthians,” TGC Bible Commentary, The Gospel Coalition, on 2 Cor 1:15-22, under “Paul’s Change of Plans and the Christians’ Triumph in Christ (1:12-2:17),”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www.thegospelcoalition.org/commentary/2-corinthians/" rel="noopener"&gt;https://www.thegospelcoalition.org/commentary/2-corinthians/&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7,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7,”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7/&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7,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7/&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8,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8,”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8/"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8/&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8,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8/"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8/&lt;/a&gt;.&lt;/li&gt;&lt;li&gt;Balla, “2 Corinthians,” on 2 Cor 1:15-22, The Gospel Coalition, &lt;a href="https://www.thegospelcoalition.org/commentary/2-corinthians/" rel="noopener"&gt;https://www.thegospelcoalition.org/commentary/2-corinthians/&lt;/a&gt;.&lt;/li&gt;&lt;li&gt;바울은 늘 ‘실루아노’라는 이름을, 사도행전은 ‘실라’라는 이름을 쓴다. 두 이름이 같은 사람을 가리킨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9,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9,”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9/&lt;/a&gt;. 사도행전 18:5에 따르면 실라와 디모데는 마게도냐에서 내려와 고린도에서 바울의 사역에 합류했다.&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0,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20,”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0/"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0/&lt;/a&gt;.&lt;/li&gt;&lt;li&gt;&lt;em&gt;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1:20, Bible Hub,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htm&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1,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21,”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1,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이 대목에서 다루는 영어 번역어 ‘commissioned’의 원어가 직역하면 ‘anointing’이라고 밝히고,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은 구별된다는 뜻에서 Good News Translation의 ‘set apart’를 소개한다. 핸드북에 따르면 21절의 첫 ‘우리’는 독자와 구별되지만, 대부분의 해석자는 21절 뒷부분과 22절의 복수 대명사가 독자를 포함한다고 이해한다. 일부는 앞 절들처럼 이 대명사가 사도들만 가리킨다고 보며, Moffatt은 21-22절의 복수 대명사를 ‘me’로 옮긴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1,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2,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22,”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2,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9,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9/&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1:23-2:17 기쁨을 돕고 용서를 확증하는 사역</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1.23-2.17/</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1.23-2.17/</guid><description>고린도후서 1:23-2:17의 방문 연기와 눈물의 편지, 공동체의 용서와 회복, 그리스도의 향기로 사는 사역을 해설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방문을 미룬 까닭과 기쁨을 돕는 동역자 (1:23-24)&lt;/h3&gt;&lt;p&gt;1:23에서 바울은 고린도 방문 계획을 바꾼 일을 해명하며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른다. 그는 1:15-16에서 고린도를 거쳐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고린도로 돌아와 성도들이 두 번 은혜를 얻게 하려던 계획을 밝혔다. 1:17의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라는 질문은 계획을 바꾼 일 때문에 바울이 말을 쉽게 바꾸는 사람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제 바울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증언을 청하며,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너희를 아끼려”(φειδόμενος, 페이도메노스) 함이었다고 말한다. 방문하지 않은 결정은 성도들을 봐주려는 배려에서 나왔다. 무엇을 아끼려 했는지는 2:1에서 밝혀진다.&lt;/p&gt;&lt;p&gt;그런데 “너희를 아끼려”라는 말은 바울이 성도들을 엄하게 다룰 수도 있고 봐줄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바울은 1:24에서 곧바로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라고 덧붙여 그런 인상을 바로잡는다. ‘주관하다’(κυριεύομεν, 퀴리유오멘)는 주인처럼 다스린다는 뜻이다. 사도들은 성도들의 믿음을 다스리는 주인이 아니며, 그들의 기쁨을 위해 일하는 동역자(συνεργοί, 쉰에르고이)다. 바울은 그 까닭을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τῇ γὰρ πίστει ἑστήκατε, 테 가르 피스테이 헤스테카테)고 밝힌다. 성도들은 바울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서 있다.&lt;sup&gt;1&lt;/sup&gt; 그렇다고 기쁨을 돕는 사람이 듣기 좋은 말만 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그 기쁨을 회복하려고 많은 눈물로 엄한 편지를 썼다(2:4).&lt;/p&gt;&lt;h3&gt;근심 중의 방문 대신 눈물로 쓴 편지 (2:1-4)&lt;/h3&gt;&lt;p&gt;2:1은 1:23의 “아끼려 함”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한다. 바울은 다시는 근심 중에 고린도에 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심했다. “다시”와 “근심 중에”(πάλιν ἐν λύπῃ, 팔린 엔 뤼페)가 한데 묶여 있어, 근심 가운데 이루어진 방문이 이미 한 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방문에서 일어난 일은 여기 적혀 있지 않다. 2:2는 바울과 교회의 처지를 질문으로 표현한다. 바울이 성도들을 근심하게 하면, 그를 기쁘게 해 줄 사람은 바로 그가 근심하게 한 성도들밖에 없다. 이 질문은 성도들에게 지도자의 기분을 책임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1:24에서 말한 기쁨의 동역 관계가 깨지면 바울과 성도들이 모두 고통받는다는 호소다. 바울은 2:1-7에서 ‘근심’과 ‘근심하게 하다’를 거듭 쓰며 사도와 교회가 겪은 근심에서 징계받은 한 사람이 겪는 근심으로 논의를 옮겨 간다.&lt;/p&gt;&lt;p&gt;2:3-4에서 바울은 방문 대신 편지를 쓴 까닭을 밝힌다. “내가 이같이 쓴 것은”은 지금의 고린도후서가 아니라 그보다 앞서 보낸 편지를 가리키며, 그 편지는 지금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7:8-12에서 이 편지를 다시 언급한다.&lt;sup&gt;2&lt;/sup&gt; 직접 가면 마땅히 자신을 기쁘게 해야 할 사람들에게서 도리어 근심을 얻을 수 있었기에, 바울은 가지 않고 글을 썼다. 그는 성도들 모두가 자신의 기쁨을 자기 기쁨으로 여기리라고 확신했다. 2:4에서 바울은 그 편지를 마음의 큰 눌림과 걱정 가운데 많은 눈물로 썼다고 말한다. 편지의 목적은 성도들을 근심하게 하는 데 있지 않고, 바울이 그들을 향해 품은 넘치는 사랑을 알게 하는 데 있었다. 원문은 ‘사랑’(τὴν ἀγάπην, 텐 아가펜)을 ‘알게 하려’는 목적절 앞에 두어 이 말을 강조한다.&lt;/p&gt;&lt;h3&gt;공동체를 근심하게 한 사람과 충분한 징계 (2:5-6)&lt;/h3&gt;&lt;p&gt;2:5에서 바울은 공동체를 근심하게 한 사람에게로 화제를 옮긴다. 바울은 그를 “근심하게 한 자”라고만 부르고 이름이나 행위를 밝히지 않으며, 7:12에서도 “그 불의를 행한 자”라고만 말한다. 바울은 그 사람이 자신만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고린도 성도 모두를 근심하게 했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ἀπὸ μέρους, 아포 메루스)는 바로 뒤의 “너희 모두”와 이어지므로, 근심한 사람의 범위를 좁히는 말보다 근심의 정도를 줄여 말하는 표현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다. 이어지는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ἵνα μὴ ἐπιβαρῶ, 히나 메 에피바로)도 사건의 무게를 과장하지 않으려는 말로 보인다.&lt;sup&gt;3&lt;/sup&gt; 바울은 그 사람이 한 일보다 그가 받은 징계와 지나친 근심에 빠질 위험에 관심을 둔다.&lt;/p&gt;&lt;p&gt;2:6의 원문은 ‘충분하다’(ἱκανὸν, 히카논)로 시작하며, ‘이러한 사람에게는 많은 사람에게서 받은 이 징계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개역개정의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는 그 벌이 정당했다는 판단이나 앞으로 벌을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원문은 이미 받은 징계로 충분하다고 판단한다. 2:7이 “그런즉”(ὥστε, 호스테)으로 시작하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요청하는 것도 이 판단에서 나온다. “마땅하도다”를 더 벌하라는 뜻으로 읽으면 2:7의 요청과 방향이 어긋난다. 이 충분함은 징계의 강도보다 기간을 가리킬 수 있으며, 징계를 그치라는 2:7의 요청이 그 읽기를 뒷받침한다.&lt;sup&gt;4&lt;/sup&gt; “벌”(ἐπιτιμία, 에피티미아)은 육체적 형벌보다 책망이나 징계를 넓게 가리키는 말이고, “많은 사람”은 교회의 다수를 가리킨다.&lt;sup&gt;5&lt;/sup&gt; 징계의 구체적 형식과 절차는 본문에 나오지 않는다.&lt;/p&gt;&lt;h3&gt;용서하고 위로하며 사랑을 확증하라는 요청 (2:7-9)&lt;/h3&gt;&lt;p&gt;2:7에서 바울은 징계를 그치고 방향을 바꾸라고 요청한다. 개역개정이 “차라리”로 옮긴 τοὐναντίον μᾶλλον(투난티온 말론)은 ‘오히려 반대로’라는 뜻이다. 성도들은 징계를 이어 가는 대신 그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해야 한다. 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하는 것이다. ‘잠기다’로 옮긴 καταποθῇ(카타포테)는 ‘삼켜지다’라는 뜻으로, 지나친 근심이 한 사람을 집어삼켜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을 표현한다. 2:1-5에서 바울은 사도와 교회가 겪은 근심을 말했는데, 이제는 징계받은 사람이 겪는 근심을 염려한다. 1:4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환난 중에 있는 이들을 위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동체를 아프게 한 사람도 그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이다.&lt;/p&gt;&lt;p&gt;2:8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고 권한다. “나타내라”로 옮긴 κυρῶσαι(퀴로사이)는 어떤 것을 유효하다고 확인하거나 공적으로 확정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마음속의 호의에 그치지 말고 공동체가 분명한 결정으로 사랑을 확증하라고 요청한다. 개역개정의 “그들에게”와 달리 NA28의 εἰς αὐτὸν(에이스 아우톤)은 단수 ‘그에게’이며, 2:6-7의 ‘이러한 사람’을 가리킨다. 공동체가 사랑을 확증할 대상은 징계받은 바로 그 사람이다. 그가 징계가 끝났다는 사실만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공동체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9에서 바울은 앞서 편지를 쓴 목적이 성도들이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δοκιμὴν, 도키멘)를 알려는 데 있었다고 말한다. 이 문맥에서 순종은 잘못을 다루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제 그 사람을 용서하라는 요청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이른다.&lt;/p&gt;&lt;h3&gt;그리스도 앞에서 한 용서와 사탄의 계책 (2:10-11)&lt;/h3&gt;&lt;p&gt;2:10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누군가를 용서하면 자신도 용서한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εἴ τι κεχάρισμαι, 에이 티 케카리스마이)은 바울이 용서했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이 조건 표현은 ‘용서할 것이 있었다면’이라는 뜻에 가깝다. 바울은 그 일을 반드시 용서가 필요한 큰 잘못으로 내세우지 않아 비난의 무게를 덜고 화해를 돕는다.&lt;sup&gt;6&lt;/sup&gt; 바울은 그 용서를 “너희를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서” 했다. 그리스도 앞에서 했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일을 의식하며 행했다는 뜻으로 보인다.&lt;sup&gt;7&lt;/sup&gt; 바울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앞세워 교회의 용서를 막지 않고, 교회가 용서한 그 사람을 자신도 받아들인다.&lt;/p&gt;&lt;p&gt;2:11은 이 용서의 목적을 밝힌다. “사탄에게 속지 않게”에서 “속지”로 옮긴 πλεονεκτηθῶμεν(플레오넥테토멘)은 남에게 이용당해 자기 몫을 빼앗긴다는 뜻이다. 7:2에서 개역개정이 ‘속여 빼앗다’로 옮긴 말도 이 동사다. 개역개정의 “속지 않게”는 속임수에 초점을 두지만, 원문은 빼앗기는 손해를 강조한다. 일인칭 복수 ‘우리’는 바울과 고린도 교회가 모두 손해를 입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공동체가 징계한 사람을 지나친 근심 속에 내버려 두면, 사탄은 그 틈을 이용해 교회에서 한 사람을 빼앗아 갈 수 있다. 바울이 사탄의 계책에 맞서 요청하는 행동은 용서와 위로다.&lt;/p&gt;&lt;h3&gt;드로아의 불안과 하나님의 개선 행렬 (2:12-14)&lt;/h3&gt;&lt;p&gt;2:12-13에서 바울은 여정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갔고, 주님 안에서 복음을 전할 문이 열렸다. 그러나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자 마음이 편하지 못했고, 드로아 사람들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다. 복음을 전할 기회가 열렸는데도 바울은 디도가 가져올 고린도 소식을 기다리며 불안해했다. 이 여정 이야기는 7:5에서 같은 표현(“편하지 못하였고”)으로 다시 이어지고, 7:6-7에서 디도가 와서 고린도 성도들의 소식을 전하는 데서 끝난다. 그 사이에 바울은 2:14부터 자신의 사역을 길게 변론한다. 불안한 여정을 숨기지 않은 이야기 바로 뒤에 2:14의 감사가 나온다.&lt;/p&gt;&lt;p&gt;2:14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한다. 개역개정이 “이기게 하시고”로 옮긴 θριαμβεύοντι(트리암뷰온티)는 전쟁에서 이긴 로마 장군이 개선 행렬을 이끈다는 뜻이다. 원문에서 행렬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고, “우리를”(ἡμᾶς, 헤마스)은 그 행렬에 이끌려 가는 사람들이다. 개선 행렬에는 승리한 군인들과 사로잡힌 포로들이 있었다. 원문은 바울이 자신을 어느 쪽으로 그렸는지 밝히지 않으며, 대부분의 번역은 포로로 이해한다.&lt;sup&gt;8&lt;/sup&gt; 이 동사가 쓰인 골로새서 2:15에서도 목적어는 하나님이 무력하게 하여 드러내신 통치자들과 권세들이다. 또 바로 앞 2:12-13에서 바울은 디도를 만나지 못해 불안했던 여정을 털어놓았다. 이 두 가지를 보면 사도들을 승리한 군인보다 하나님께 사로잡혀 행렬에 이끌려 가는 사람들로 읽는 편이 문맥에 더 잘 맞는다. Seifrid는 이 장면을 하나님이 사도를 로마 개선 행렬 가운데 죽음으로 이끄시는 그림으로 읽는다.&lt;sup&gt;9&lt;/sup&gt; 하나님은 약함 속에 있는 사도를 이렇게 이끄시며, 사도의 수고를 넘어 그를 통해 친히 일하신다.&lt;sup&gt;10&lt;/sup&gt;&lt;/p&gt;&lt;p&gt;개역개정의 “이기게 하시고”는 승리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지만, 사도들을 승리한 사람들로 보이게 하여 하나님께 이끌려 가는 사도의 모습을 가린다. 원문에서 승리는 하나님의 것이고, 사도들은 그 승리를 드러내는 행렬 속에 있다. “항상”이라는 말은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로 불안하게 옮겨 간 여정도 이 이끄심 밖에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바울의 감사는 염려와 약함이 사라진 뒤에 나오지 않는다. 불안한 사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끄시고 그를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각처에 나타내시는 하나님 때문에 바울은 감사한다.&lt;/p&gt;&lt;h3&gt;하나님께 드려지는 그리스도의 향기 (2:14-16)&lt;/h3&gt;&lt;p&gt;2:14 후반에서 하나님은 사도들을 통하여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냄새처럼 퍼지게 하신다. 2:15는 이 비유를 이어 사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한다. 개역개정의 “하나님 앞에서”는 원문에서 ‘하나님께’(τῷ θεῷ, 토 테오)이므로, 이 향기는 먼저 하나님께 드려진다. “향기”(εὐωδία, 유오디아)는 번제의 냄새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제사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lt;sup&gt;11&lt;/sup&gt; 이 향기는 “구원 받는 자들” 가운데서도, “망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퍼진다. 2:16에 따르면 같은 냄새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고,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 같은 명사를 출발점과 도착점에 되풀이한 표현(ἐκ θανάτου εἰς θάνατον, 에크 타나투 에이스 타나톤; ἐκ ζωῆς εἰς ζωήν, 에크 조에스 에이스 조엔)은 같은 복음을 만난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결말로 나아감을 강조한다.&lt;/p&gt;&lt;h3&gt;사역을 감당할 능력과 순전한 말씀 (2:16-17)&lt;/h3&gt;&lt;p&gt;생명과 사망이 걸린 일 앞에서 바울은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라고 묻는다. “감당하리요”에 해당하는 ἱκανός(히카노스)는 어떤 일을 해낼 자격과 능력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3:5-6에서 이 질문에 답한다. 그곳에서 개역개정이 “만족”과 “만족하게 하셨으니”로 옮긴 말은 2:16의 ἱκανός와 같은 어근의 명사(ἱκανότης, 히카노테스)와 동사(ἱκάνωσεν, 히카노센)로, 스스로 흡족해하는 마음보다 사역을 감당할 능력을 가리킨다. 그 능력은 사도에게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2:17은 이 질문 바로 뒤에서 사도들이 어떤 태도로 말하는지 설명한다.&lt;/p&gt;&lt;p&gt;2:17에서 바울은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혼잡하게”로 옮긴 καπηλεύοντες(카펠류온테스)는 장사하여 이익을 남기는 일을 가리킨다. 개역개정의 “혼잡하게”는 물건에 다른 것을 섞는 행위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 구절에서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이익을 얻으려고 말씀을 전하는 동기다. 바울이 여기서 그들을 복음 내용을 바꾼 사람들로 고발하는 것 같지는 않다.&lt;sup&gt;12&lt;/sup&gt; 바울은 그들과 달리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한다. “순전함”(εἰλικρινείας, 에일리크리네이아스)은 1:12에서 바울이 세상에서 행한 방식을 말할 때 “진실함”으로 옮긴 말이기도 하다. 바울은 자신의 처신과 말씀 선포를 같은 기준으로 변호한다. 2:17의 “하나님 앞에서”(κατέναντι θεοῦ, 카테난티 테우)는 2:15의 ‘하나님께’와 달리, 하나님을 마주하고 그분의 판단 아래 말한다는 뜻이다. 성도들의 믿음을 지배하지 않는 사도는 말씀도 자기 이익을 위해 쓰지 않는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원망 없는 견책과 형제를 되찾는 징계&lt;/h3&gt;&lt;p&gt;1:23-2:11에서 바울은 사도의 권위와 공동체의 징계가 모두 성도들의 기쁨과 한 사람의 회복을 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레위기 19:17-18은 하나님의 백성이 서로의 잘못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보여 준다. 하나님은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고 이웃을 견책하라고 하시며, 원수를 갚거나 원망하지 말고 이웃을 자기 자신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잘못을 지적하는 일과 원한을 품지 않는 일이 모두 이웃 사랑에 속한다. 바울은 눈물로 엄한 편지를 써서 잘못을 다루었고(2:4), 고린도 교회의 다수는 그 사람을 징계했다(2:6). 이제 바울은 징계가 충분하니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한다(2:7). 징계가 충분해진 뒤에도 공동체가 그 사람을 계속 밀어내며 원망을 이어 가면, 견책은 레위기가 금한 원망에 가까워진다.&lt;/p&gt;&lt;p&gt;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는 죄를 범한 형제를 권고하는 순서를 가르치신다. 형제가 권고를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며(18:15), 끝까지 듣지 않으면 교회가 판단한다(18:17-18). 권고의 목적은 형제를 되찾는 데 있다. 고린도 교회는 이미 판단을 내리고 징계를 시행했다. 바울은 그 판단 뒤에 이른 새 상황에서, 징계를 결정한 교회가 이제 용서하고 사랑을 확증하는 결정도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2:6-8). 마태복음 18:21-22에서 베드로가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느냐고 묻자, 예수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대답하신다. 교회의 판단은 한 번 내린 처분을 끝없이 유지하려고 내리는 것이 아니다.&lt;/p&gt;&lt;h3&gt;회개로 이끄는 근심과 회복의 위로&lt;/h3&gt;&lt;p&gt;갈라디아서 6:1에서 바울은 범죄한 사람이 드러나면 신령한 사람들이 온유한 마음으로 그를 바로잡고, 자신도 시험받지 않도록 스스로 살피라고 권한다. 바로잡는 목적은 그 사람을 회복시키는 데 있다. 2:7-8의 용서와 위로, 사랑의 확증은 그 회복이 징계 뒤에 어떤 모습을 띠는지 보여 준다. 공동체는 그 사람이 지나친 근심에 삼켜지지 않도록 그에게 다가가야 한다. 이 위로는 잘못의 심각성을 지우지 않는다. 바울은 2:5에서 그가 공동체 모두를 근심하게 했다고 분명히 말한 뒤에 위로를 요청한다.&lt;/p&gt;&lt;p&gt;바울은 7:8-11에서 앞서 보낸 편지가 일으킨 근심을 돌아본다. 그는 편지가 성도들을 잠시 근심하게 했지만 그 근심이 회개에 이르렀기에 기뻐한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고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고 구별한다(7:10). 이 구별은 고린도 성도들이 겪은 근심에 대한 말이지만, 2:7에서 바울이 한 사람이 지나친 근심에 삼켜질까 염려한 까닭을 이해하게 해 준다. 근심이 회개와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 자체로 계속되면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 교회의 책망과 용서는 근심이 사람을 삼키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도록 섬겨야 한다.&lt;/p&gt;&lt;h3&gt;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와 복음 앞의 갈림&lt;/h3&gt;&lt;p&gt;2:14-16에서 바울은 향기라는 제사의 그림으로 사역 전체를 설명한다. 출애굽기 29:18은 제사장 위임식에서 숫양 전체를 단 위에서 불사르는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라고 말한다. 제물의 향기는 먼저 하나님께 올라간다. 2:15에서 사도들이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도의 사역을 판단하는 첫 기준은 하나님이 그 사역을 받으시는가이다. 같은 향기가 어떤 이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므로(2:16),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그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2:17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한다고 고백한다.&lt;/p&gt;&lt;p&gt;2:15-16의 “구원 받는 자들”과 “망하는 자들”은 고린도전서 1:18에서도 십자가의 말씀 앞에서 나뉘는 두 무리로 나온다.&lt;sup&gt;13&lt;/sup&gt; 그곳에서 십자가의 말씀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구원을 받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같은 말씀이 사람에 따라 생명의 냄새가 되기도 하고 사망의 냄새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반응이 복음의 가치를 정하지 않으므로, 사도는 거절하는 사람 앞에서도 말씀을 자기 유익에 맞추어 바꾸지 않아야 한다. 이 갈림은 반대하는 사람을 조롱할 구실도 되지 않는다. 생명과 사망이 걸린 일이기에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라고 묻는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믿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섬기는 사도&lt;/h3&gt;&lt;p&gt;바울이 성도들의 믿음을 지배하지 않는 까닭은 교회가 이미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1:19-22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고, 하나님이 사도들을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며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고 말했다. 성도들의 믿음을 세우고 붙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했지만 그들의 주인이 되지 않는다. 사도가 방문을 미루는 동안에도 성도들은 믿음으로 서 있다(1:24). 바울이 구하는 것은 성도들이 자신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다.&lt;/p&gt;&lt;p&gt;마가복음 10:42-45에서 예수는 이방 통치자들이 백성을 주관하는 방식과 제자들이 따라야 할 길을 구별하신다. 크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 근거는 섬기러 오셔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인자 자신이다. 바울이 믿음을 주관하지 않고 기쁨을 돕는 자로 서는 것은 이 주님을 따르는 길이다. 그러나 바울의 눈물과 고통은 고린도 성도들의 죄를 속하지 않는다. 대속은 그리스도께서 홀로 이루신 일이고, 사도는 그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성도들을 섬긴다. 이 구별 때문에 사역자는 자신이 치른 희생을 근거로 성도들의 양심을 지배할 수 없다.&lt;/p&gt;&lt;h3&gt;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의 용서에 근거한 용서&lt;/h3&gt;&lt;p&gt;2:10에서 바울은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라고 말한다. 교회가 그 사람을 용서하면 바울도 그 용서에 함께하며, 바울 자신이 용서한 것도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일이다. 바울의 용서는 공동체의 용서와 따로 가지 않고 공동체의 유익을 향한다. “그리스도 앞에서”라는 말은 용서를 베푸는 사람도 주님의 판단 아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 앞에서 성도들을 위하여 베푸는 용서는 자신의 너그러움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징계받은 사람만이 아니라 근심을 겪은 공동체 전체의 주님이시다. 그래서 그분 앞에서 이루는 화해는 어느 한쪽의 명예만 회복하는 일이 될 수 없다.&lt;/p&gt;&lt;p&gt;골로새서 2:13-15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용서와 승리를 한 문맥에서 말한다. 하나님은 죽었던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모든 죄를 용서하셨으며, 그들에게 불리한 빚 문서를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셨다. 그리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하게 하여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 겉으로 예수의 패배처럼 보인 처형이 하나님의 승리가 되었다. 골로새서 3:13은 주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성도들도 서로 용서하라고 권한다. 고린도 교회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근거도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용서에 있다. 교회의 용서는 죄를 속하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용서에 근거하여 징계를 그치고 그 사람을 다시 받아들인다.&lt;/p&gt;&lt;h3&gt;십자가의 승리와 그 행렬에 이끌려 가는 사도&lt;/h3&gt;&lt;p&gt;2:14에서 하나님은 사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개선 행렬로 이끄신다. 골로새서 2:15가 보여 주듯,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승리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2:14를 포로의 행렬로 읽으면, 예수께서 로마의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사도는 로마의 개선 행렬 가운데 죽음으로 이끌려 간다.&lt;sup&gt;14&lt;/sup&gt; 그러나 그리스도와 사도의 자리는 같지 않다. 그리스도는 죽음으로 승리를 이루셨고, 사도는 그 승리 안에서 약함과 불안을 지닌 채 이끌려 간다. 하나님은 그런 사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빌려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정복자로 행동할 수 없다. 디도를 찾지 못해 드로아를 떠난 바울의 불안한 여정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승리 밖에 있지 않았다. 그 승리를 확신하는 바울은 교회의 문제를 가볍게 넘기지 않고, 근심에 빠진 한 사람과 상처 입은 공동체를 세심하게 돌본다.&lt;/p&gt;&lt;h3&gt;자신을 드리신 그리스도의 향기&lt;/h3&gt;&lt;p&gt;에베소서 5:2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 2:15에서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은 사도 자신을 구원의 제물로 높이지 않는다. 자신을 제물로 드린 분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은 사도들을 통해 그분을 아는 지식을 퍼뜨리신다(2:14). 에베소서 5:2와 함께 읽으면, 그리스도의 향기는 먼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그리스도의 자기 드림을 가리키며 사역자의 매력이나 사람들의 호감으로 좁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2:17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한다고 고백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사람은 말씀으로 이익을 얻으려 하지 않고, 듣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도록 섬긴다. 성도들의 믿음을 지배하지 않는 태도가 말씀을 다루는 태도에서도 이어진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믿음을 주관하지 않고 기쁨을 돕는 지도&lt;/h3&gt;&lt;p&gt;바울은 방문을 미룬 결정을 성도들을 아끼려는 마음으로 설명하면서도, 자신의 권한을 믿음을 지배하는 권리로 내세우지 않는다. 성도들은 이미 믿음으로 서 있다(1:24). 그러므로 지도자는 성도들의 믿음을 자기 감정과 뜻을 얼마나 따르는지로 평가할 수 없다. 교회 안에서 다른 의견을 말하거나 설명을 요구하는 일을 곧바로 불순종으로 취급하면, 1:24가 경계한 믿음의 주관이 자라기 쉽다. 엄한 권면이 필요할 때에도 지도자는 바울처럼 성도들의 기쁨을 회복하려는 목적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2:4).&lt;/p&gt;&lt;h3&gt;징계를 그치고 사랑을 확증하는 교회&lt;/h3&gt;&lt;p&gt;고린도의 징계에는 많은 사람이 관여했다. 바울은 그 징계가 잘못이었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이제 충분하니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한다(2:6-7). 바울이 든 근거는 이미 받은 징계로 충분하다는 판단과, 그 사람이 지나친 근심에 삼켜질 위험이다. 오늘의 교회도 징계를 결정했다면 그 징계가 언제 충분해지는지 다시 판단할 책임이 있다. 처음 결정을 내린 뒤 아무도 그 조치를 다시 살피지 않으면, 징계받은 사람은 근심 속에 홀로 남는다. 바울이 경고한 대로 사탄은 그 틈을 타 교회에서 한 사람을 빼앗아 갈 수 있다(2:11).&lt;/p&gt;&lt;p&gt;2:8에서 바울은 공동체가 징계받은 그 사람에게 사랑을 확증하라고 요청한다. 징계가 끝났다는 사실만 알려서는 이 요청을 이루지 못한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징계를 끝낸 뒤에도 공동체가 이미 다룬 잘못을 거듭 들추어 그에게 낙인을 찍거나 그를 교제에서 계속 밀어내면, 그 사람에게 징계는 끝나지 않은 것과 같다. 사랑을 확증하라는 요청은 교회가 내리는 결정에도, 공동체가 그 사람을 대하는 평소의 말과 태도에도 적용된다. 피해를 겪은 사람이나 다른 개인이 스스로 필요한 거리를 두는 선택은 공동체의 이런 배척과 다르다.&lt;/p&gt;&lt;h3&gt;용서와 피해를 겪은 사람의 자리&lt;/h3&gt;&lt;p&gt;바울은 용서를 요청하기 전에 그 사람이 공동체 모두를 근심하게 했다고 분명히 말한다(2:5). 용서는 실제로 생긴 근심과 피해를 없던 일로 만들지 않는다. 2:6-8은 공동체가 징계를 그치고 그 사람에게 사랑을 확증하라고 요청하지만, 7:12가 말하는 “그 불의를 당한 자”가 그와 어떤 관계를 언제 회복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징계를 끝내는 결정을 피해를 겪은 사람에게 곧바로 예전 관계로 돌아가라는 요구로 바꾸지 말아야 한다. 피해를 겪은 사람이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할 기회도 줄여서는 안 된다. 바울도 자신의 눈물과 교회의 근심을 숨기지 않았다(2:4-5).&lt;/p&gt;&lt;h3&gt;불안 속에서도 드리는 감사&lt;/h3&gt;&lt;p&gt;바울은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할 문이 열렸는데도 디도를 만나지 못해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그 불안을 숨기지 않은 채 하나님께 감사한다(2:12-14). 2:14의 감사는 계획이 이루어진 성공에서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불안한 사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행렬처럼 이끄시고, 그를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나타내신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는 구절을 모든 계획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약속으로 쓰면, 실패하거나 아픈 사람은 자신이 그 승리 밖에 있다고 느끼기 쉽다. 사역 기회가 열렸는데도 동역자를 염려하는 마음을 믿음이 약한 탓으로 돌릴 필요도 없다. 신자는 약함과 불안 속에서도 자신을 이끄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lt;/p&gt;&lt;h3&gt;말씀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지 않음&lt;/h3&gt;&lt;p&gt;말씀을 장사하지 않는다는 2:17의 고백은 설교와 교육, 상담에서 누구의 이익을 구하는지 묻게 한다.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헌금이나 충성을 얻어 내거나, 후원자가 불편해할 사실을 일부러 감추면 말씀을 자기 목적에 이용하게 된다. 그렇다고 사역자를 후원하는 일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갈라디아서 6:6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고 한다. 2:17이 경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말해야 할 말씀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일이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1:24,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24,”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4/&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2:3,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2:3,”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3/&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어느 정도”를 그 사람이 끼친 근심의 정도를 줄여 말하는 표현으로 읽는 해석과, 근심하게 된 사람의 수를 한정하는 표현으로 읽는 해석을 함께 소개한다. 또 대부분의 주석가를 따라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를 문제를 과장하지 않으려는 삽입구로 보고, 고린도 성도들이나 그 사람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려 한다는 읽기는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2:5,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2:5,”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5/&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대부분의 번역이 이 말을 징계의 강도로 이해한다고 밝히면서도, 2:7이 징계를 더 이어 가지 말라고 하므로 징계의 기간을 가리킬 수 있다고 설명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2:6,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2:6,”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6/"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6/&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이 징계가 육체적 형벌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징계였을 것으로 보고, “많은 사람”을 고린도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다수로 풀이한다. 또 그 징계나 책망이 교회 모임에서 민주적 절차를 거쳐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2:6,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6/"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6/&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2:10,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2:10,”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10/"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10/&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2:10,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10/"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10/&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2:14,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2:14,”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1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14/&lt;/a&gt;.&lt;/li&gt;&lt;li&gt;Mark Seifrid, “The Message of Second Corinthians: 2 Corinthians as the Legitimation of the Apostle,” &lt;em&gt;Southern Baptist Journal of Theology&lt;/em&gt; 19, no. 3 (2015): 17,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page=9"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page=9&lt;/a&gt;.&lt;/li&gt;&lt;li&gt;Seifrid, “Message of Second Corinthians,” 19,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page=11"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page=11&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2:15,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2:15,”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1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15/&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이 말을 많은 사람이 오직 이익을 얻으려고 설교했다는 뜻으로 보고, 바울이 그들을 복음을 변조한 사람들로 고발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설명한다. 다만 4:2가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면 변조의 문제도 있었을 수 있다고 덧붙인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2:17,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2:17,”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1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17/&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2:15,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1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15/&lt;/a&gt;.&lt;/li&gt;&lt;li&gt;Seifrid, “Message of Second Corinthians,” 17,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page=9"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Seifried-from-ST-516-2015-SBJT-19.31.pdf#page=9&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3:1-18 마음에 쓰인 편지와 성령이 주시는 자유</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3.1-18/</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3.1-18/</guid><description>고린도후서 3장의 그리스도의 편지, 문자와 성령, 모세의 수건과 새 언약의 영광을 문맥에 따라 해설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추천서와 그리스도의 편지 (1-3절)&lt;/h3&gt;&lt;p&gt;바울은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라는 질문으로 3장을 연다(1절). 바로 앞에서 그는 누가 이 일을 감당하겠느냐고 묻고,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한다고 했다(2:16-17). 이 말이 자기를 내세우는 말로 들릴 수 있었기에, 바울은 다시 자신을 추천하려는 것이냐고 먼저 묻는다. 이어서 그는 어떤 사람들처럼 추천서를 주고받을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데, 독자들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리라 기대하는 질문이다. 추천서는 낯선 방문자를 공동체에 소개하고 그의 사역을 믿을 수 있게 하는 편지였다. 바울도 다른 사람을 위해 추천의 글을 썼으므로(롬 16:1-2) 추천서 자체를 그르다고 여기지 않았다. 다만 고린도 교회를 세운 그에게는 그 교회가 어떤 추천서보다 나은 증거였다.&lt;sup&gt;1&lt;/sup&gt; 그런데도 추천서 문제를 꺼내야 했다는 사실은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 사이에 거리가 생겼음을 보여 준다. 4:2에서 바울은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스스로 추천한다고 말한다. 그는 추천을 거부하지 않고, 진리를 드러내는 사역과 그 사역으로 생겨난 공동체를 추천의 근거로 삼는다.&lt;/p&gt;&lt;p&gt;2절에서 바울은 추천서 이야기를 비유로 바꾼다. 고린도 성도들 자신이 바울과 동역자들의 편지이며, 그 편지는 사도들의 마음에 쓰여 있다. “썼고”(ἐγγεγραμμένη, 엥게그람메네)는 이미 새겨져 지금도 남아 있는 기록을 가리킨다. 이 편지는 뭇 사람이 알고 읽는다. 바울은 성도들을 마음에 품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 공동체를 보며 바울의 사역을 알아본다. 아직 갈등이 남아 있는 고린도 교회도 바울의 마음에 새겨진 사람들이므로 그가 버릴 수 없다.&lt;/p&gt;&lt;p&gt;3절은 이 편지를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부른다. 2절에서 “우리의 편지”였던 공동체가 여기서는 그리스도께 속한 편지로 소개된다. 개역개정이 “우리로 말미암아”로 옮긴 구절(διακονηθεῖσα ὑφ’ ἡμῶν, 디아코네테이사 휘프 헤몬)은 직역하면 ‘우리에게 섬김을 받은’이며, 이 편지가 바울과 동역자들의 사역으로 생겨났다는 뜻이다.&lt;sup&gt;2&lt;/sup&gt; 편지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고, 바울과 동역자들은 그 편지가 생겨나도록 섬긴 사람들이다. 먹은 파피루스나 양피지 위에 글자를 남기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은 사람의 마음에 기록하신다.&lt;/p&gt;&lt;p&gt;이어서 바울은 기록되는 자리를 비교한다. 2절에서 편지가 쓰인 곳은 사도들의 마음이었다. 3절의 마음판은 누구의 마음인지 밝히지 않지만, 성령으로 쓰인 편지가 성도들 자신이므로 성도들의 마음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원문은 ‘판들’ 바로 뒤에 ‘마음들’을 붙여 마음이 곧 그 판이라고 말한다. “육의 마음판”의 ‘육의’(σαρκίναις, 사르키나이스)는 살로 이루어졌다는 재질을 가리키며 “돌판”의 ‘돌’과 짝을 이룬다. 한국어 독자는 “육”에서 죄를 좇는 육신을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이 절의 대조는 생명 없는 돌과 살아 있는 살 사이에 있다. 돌판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의 돌판을 떠올리게 하고, 살로 된 마음판은 에스겔 36:26에서 하나님께서 굳은 마음 대신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마음을 떠올리게 한다. 성령은 사람이 실제로 생각하고 원하며 응답하는 자리에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신다.&lt;/p&gt;&lt;h3&gt;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새 언약의 일꾼 (4-6절)&lt;/h3&gt;&lt;p&gt;4-5절에서 바울은 이런 확신의 근거를 밝힌다. 그의 확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다. 2:17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한다고 했듯이, 바울은 이 확신도 고린도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는 데 쓰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가진다. 5절은 그 확신이 자기 능력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개역개정이 “만족”으로 옮긴 말(ἱκανότης, 히카노테스)은 흡족한 기분이 아니라 맡은 일을 감당할 능력을 뜻한다.&lt;sup&gt;3&lt;/sup&gt; 5절은 2:16의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라는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다.&lt;sup&gt;4&lt;/sup&gt; 바울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감당할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확신을 말하는 것과 자기에게서 난 능력을 부정하는 것은 충돌하지 않는다.&lt;/p&gt;&lt;p&gt;6절에서 하나님은 사도들을 새 언약의 일꾼으로 “만족하게 하셨다.” 곧 그 일을 감당할 능력을 주셨다. “일꾼”은 섬기는 사람을 뜻하며 현대 교회의 특정 직분 명칭과 같지 않다. 새 언약은 이 장에서 처음 나오는 언약 용어로, 14절의 ‘옛 언약’과 짝을 이룬다. 바울은 이 언약의 성격을 조문과 영의 대조로 설명한다. 개역개정의 “율법 조문”에 해당하는 말(γράμμα, 그람마)은 기록된 글자를 뜻하며, 원문에는 ‘율법’이라는 단어가 따로 없다. 개역개정은 “율법”을 덧붙여 이 글자가 돌판에 새긴 모세의 율법을 가리킨다는 해석을 번역에 담았고, 7절이 돌에 새긴 글자를 말하므로 이 해석은 문맥에 맞는다. “영”은 사람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다.&lt;sup&gt;5&lt;/sup&gt; 그러므로 조문은 죽이고 영은 살린다는 말은 성경을 읽는 두 방법을 비교하는 말이 아니라, 돌에 기록된 율법과 마음에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비교하는 말이다.&lt;/p&gt;&lt;h3&gt;죽게 하는 직분과 영의 직분의 영광 (7-11절)&lt;/h3&gt;&lt;p&gt;7-9절은 이 대조를 두 사역의 비교로 풀어 간다. 개역개정이 “직분”으로 옮긴 말(διακονία, 디아코니아)은 섬기는 일을 가리킨다. 바울은 모세와 자신이 차지한 지위를 비교하지 않고, 두 사람이 맡은 섬김을 비교한다. 7절은 돌에 새긴 글자의 직분을 죽게 하는 직분이라 하고, 9절은 그것을 정죄의 직분이라 부른다. 율법이 죄인을 정죄하므로 그 섬김의 결과는 죽음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직분에 영광이 있었다고 말하며 논증을 시작한다. 이에 비해 영의 직분은 생명을 주고, 의의 직분은 정죄 대신 의를 베푼다. 의의 직분은 사람에게 더 높은 성취를 요구하는 직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살리시고 의롭다 하시는 새 관계를 섬기는 사역이다.&lt;/p&gt;&lt;p&gt;7-11절은 모세의 직분과 영의 직분이 지닌 영광을 같은 방식으로 세 번 비교한다. 죽게 하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고(7-8절), 정죄의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며(9절),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다면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다(11절). 그 사이에서 10절은 영광스러웠던 것도 더 큰 영광 앞에서는 영광이라 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옛 직분의 영광은 거짓이 아니었다. 더 큰 영광이 나타나자 그 영광이 더는 견줄 대상이 되지 못했을 뿐이다. 7-11절이 두 사역의 영광을 비교한다면, 12절부터는 모세의 수건 장면을 사용해 바울 자신의 담대함과 모세의 글을 듣는 사람들의 상태를 설명한다.&lt;/p&gt;&lt;p&gt;이 단락에서 바울은 ‘없어지다’(καταργέω, 카타르게오)라는 동사를 거듭 쓴다. 개역개정은 7, 11, 13, 14절을 모두 “없어질”로 옮기지만, 무엇이 없어지는지는 각 문맥이 정한다. 7절에서 이 동사의 분사는 여성 명사인 ‘영광’에 맞춘 형태로 모세 얼굴의 영광을 꾸민다. 출애굽기 34장은 그 광채가 점차 약해졌다고 서술하지 않으므로, 7절의 말은 출애굽기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기보다 그 영광이 끝나게 되어 있는 직분에 속했다는 바울의 평가다. 11절의 “없어질 것”은 중성 형태로, “길이 있을 것”(τὸ μένον, 토 메논)과 대조되는 옛 언약의 직분 전체를 가리킨다.&lt;sup&gt;6&lt;/sup&gt; 이 동사를 ‘점점 희미해지다’로 옮길지 ‘효력을 잃다, 폐하여지다’로 옮길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lt;sup&gt;7&lt;/sup&gt; 11절이 이 동사를 “길이 있을 것”과 맞세우므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빛이 서서히 약해지는 모습보다 옛 직분이 끝나도록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lt;/p&gt;&lt;h3&gt;모세의 수건과 바울의 담대함 (12-13절)&lt;/h3&gt;&lt;p&gt;12절에서 바울은 길이 남는 사역의 영광에 대한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한다고 한다. 이 담대함(παρρησία, 파레시아)은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 말하는 태도이며 13절의 수건과 대조된다. 출애굽기 34:29-35에서 모세의 얼굴은 하나님과 말한 결과로 빛나고, 모세는 받은 명령을 백성에게 모두 알린 뒤 얼굴을 가리며, 하나님 앞에 들어갈 때는 수건을 벗는다. 출애굽기는 수건을 쓴 목적을 밝히지 않는다. 바울은 그 목적을 이스라엘 자손이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여기서 “없어질 것”은 11절과 같은 중성 형태로 옛 언약을 가리킨다.&lt;sup&gt;8&lt;/sup&gt; “결국”(τὸ τέλος, 토 텔로스)은 끝을 뜻할 수도 있고 목표를 뜻할 수도 있다. 옛 언약은 끝나도록 정해진 것이므로, 여기서는 “결국”을 그 언약과 직분의 끝으로 읽는 편이 문맥에 맞다.&lt;sup&gt;9&lt;/sup&gt; 바울은 출애굽기의 기록을 그대로 다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 언약의 직분에 비추어 모세의 직분을 읽는다.&lt;/p&gt;&lt;h3&gt;완고해진 마음과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지는 수건 (14-15절)&lt;/h3&gt;&lt;p&gt;14절은 문제를 모세의 얼굴에서 듣는 사람들의 생각으로 옮긴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의 “마음”(τὰ νοήματα, 타 노에마타)은 생각이나 이해를 가리키며, 15절에서 “마음”으로 옮긴 말(καρδία, 카르디아)과 다르다. 4:4도 같은 말을 써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수건은 말씀을 들어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게 가로막는 상태를 가리킨다. 개역개정이 “구약을 읽을 때에”로 옮긴 구절은 직역하면 ‘옛 언약(τῆς παλαιᾶς διαθήκης, 테스 팔라이아스 디아테케스)의 낭독 때에’이다. 15절이 이것을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로 바꾸어 말하므로, 이 표현은 신약과 짝을 이루는 후대의 정경 이름보다 회당에서 낭독되던 모세의 책을 가리킨다.&lt;sup&gt;10&lt;/sup&gt; 사도행전 15:21도 모세의 글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읽힌다고 말한다. 14절과 15절이 되풀이하는 “오늘”은 바울이 편지를 쓰던 당시다. 바울은 동시대 회당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할 뿐 이를 유대인의 변하지 않는 성품으로 규정하지 않으며, 16절에서 주께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진다고 말한다.&lt;/p&gt;&lt;p&gt;14절 끝의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에서 동사(καταργεῖται, 카타르게이타이)는 주어를 따로 밝히지 않는다. 개역개정은 바로 앞의 수건을 주어로 보았고, 일부 해석자는 11절과 13절의 용례를 따라 옛 언약을 주어로 보아 옛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폐하여졌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드러나지 않았다고 읽는다.&lt;sup&gt;11&lt;/sup&gt; 14절 앞부분이 수건이 벗겨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고 말하고 16절이 그 수건이 벗겨지는 때를 말하므로, 수건을 주어로 읽는 개역개정의 판단이 14-16절의 흐름에 더 잘 맞는다. 그 수건은 모세의 글을 더 부지런히 읽는다고 걷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진다.&lt;/p&gt;&lt;h3&gt;주께 돌아갈 때 벗겨지는 수건과 주의 영 (16-17절)&lt;/h3&gt;&lt;p&gt;16절은 출애굽기 34:34를 바꾸어 쓴다. 출애굽기에서는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 말할 때마다 수건을 벗었다. 바울은 ‘들어가다’ 대신 “돌아가다”를 쓰고 돌아서는 사람을 밝히지 않아, 모세에게 있던 일을 주께 돌아서는 사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말한다.&lt;sup&gt;12&lt;/sup&gt; 15절과 이어 읽으면 돌아서는 사람은 마음에 수건이 덮인 사람이다. 개역개정은 “벗겨지리라”라고 미래로 옮겼지만, 원문은 현재형으로 주께 돌아서는 그때 수건이 벗겨진다고 말한다. 이 절이 출애굽기 34:34의 장면을 가져오므로, 여기서 “주”는 모세가 만난 여호와, 곧 하나님으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lt;sup&gt;13&lt;/sup&gt; 그러나 14절은 그 수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진다고 했으므로, 주께 돌아서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수건이 벗겨지는 일을 경험한다.&lt;/p&gt;&lt;p&gt;17절은 16절의 “주”를 설명한다. “주는 영이시니”(ὁ δὲ κύριος τὸ πνεῦμά ἐστιν, 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에서 바울은 방금 가져온 출애굽기 구절의 “주”를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만나는지 해설한다.&lt;sup&gt;14&lt;/sup&gt; 모세는 주 앞에 들어가 수건을 벗었지만, 이제 주께 돌아서는 사람은 성령 안에서 그 주를 만난다. 같은 절 후반부가 곧바로 “주의 영”이라고 말하므로 바울은 주와 영을 구별한다. 따라서 이 문장을 주와 성령이 같은 위격이라는 등식으로 읽을 수 없다. 그렇다고 주와 성령이 비슷한 일을 한다는 비교에 그치지도 않는다. 주께 돌아서는 사람이 경험하는 주의 임재와 행하심이 곧 성령의 일이라는 말이다.&lt;sup&gt;15&lt;/sup&gt; 3절에서 마음에 기록하시고 6절에서 살리시는 성령께서, 이제 수건을 벗기고 사람을 주 앞에 서게 하신다. 그래서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의 자유는 이 문맥에서 수건에서 벗어나 가로막힘 없이 주의 영광을 보는 자유다.&lt;sup&gt;16&lt;/sup&gt; 12절에서 바울이 숨김없이 담대히 말하는 것도 이 자유에서 나온다. 18절은 이 자유가 가져오는 결과를 변화로 설명한다.&lt;/p&gt;&lt;h3&gt;주의 영광을 보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함 (18절)&lt;/h3&gt;&lt;p&gt;18절은 “우리가 다”라고 하여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는 사람을 공동체 전체로 넓힌다. 출애굽기에서 수건을 벗고 주 앞에 선 사람은 모세 한 사람이었다. “거울을 보는 것 같이 ... 보매”로 옮긴 분사(κατοπτριζόμενοι, 카톱트리조메노이)는 드물게 쓰이는 말이어서 ‘거울로 보듯 바라보다’와 ‘거울처럼 비추다’로 해석이 갈린다. 7절과 13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주목하지 못했다는 말과 대조되므로, 개역개정처럼 바라봄으로 읽는 편이 문맥에 맞다.&lt;sup&gt;17&lt;/sup&gt; 비추다로 읽으면 성도가 모세처럼 영광을 비추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 되지만, 이 단락의 대조는 보지 못하던 사람들과 이제 보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 동사는 현재 수동형이어서, 변화가 지금 진행되고 있으며 그 변화를 이루시는 분이 따로 계심을 보여 준다. 그 변화는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도록 계속된다. 마지막 구절(ἀπὸ κυρίου πνεύματος, 아포 퀴리우 프뉴마토스)은 ‘영이신 주에게서’로도, 개역개정처럼 ‘주의 영으로’로도 옮길 수 있다.&lt;sup&gt;18&lt;/sup&gt; 17절의 “주는 영이시니”를 되받는 말로 보면 앞의 번역이 문맥에 더 가깝다. 그렇게 읽으면 변화의 근원은 16절에서 사람들이 돌아간 그 주이시며, 그 주께서 성령으로 일하신다. 개역개정의 번역은 변화를 이루시는 분이 성령이심을 분명히 하지만, 17절과의 연결은 덜 드러난다. “형상”(εἰκών, 에이콘)은 4:4에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다시 나온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출애굽기 34장의 언약 갱신과 옛 직분의 영광&lt;/h3&gt;&lt;p&gt;고린도후서 3장의 돌판과 수건은 출애굽기 34장의 언약 갱신 장면에서 나온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섬겨 언약을 깨뜨린 뒤, 하나님은 모세에게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시 다듬게 하시고 자비와 은혜가 풍성하신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신다(출 34:1-7). 모세는 목이 뻣뻣한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과 동행해 주시기를 구하고, 하나님은 언약을 다시 세우신다(출 34:8-10). 돌판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미 애굽에서 건지신 백성과 맺으신 관계였고, 그 백성이 언약을 깨뜨린 뒤에도 하나님은 관계를 회복하셨다. 모세의 얼굴이 빛난 것도 이 회복된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말했기 때문이다(출 34:29). 바울이 7-11절에서 옛 직분의 영광을 실제 영광으로 인정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옛 직분의 영광과 새 직분의 더 큰 영광은 모두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다.&lt;/p&gt;&lt;h3&gt;마음에 기록하시는 새 언약과 성령&lt;/h3&gt;&lt;p&gt;6절의 새 언약과 3절의 마음판은 예언서의 약속을 떠올리게 한다. 바울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새 언약”이라는 이름과 마음에 기록한다는 약속은 예레미야 31:31-34에, 돌 같은 마음을 살로 된 마음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영을 주신다는 약속은 에스겔 36:26-27에 나온다.&lt;sup&gt;19&lt;/sup&gt;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 맺은 언약을 깨뜨렸다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을 그들 속에 두어 마음에 기록하시며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시리라고 약속한다. 에스겔 36:26에서 개역개정이 “굳은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으로 옮긴 말은 난외주가 밝히듯 원어로 ‘돌’과 ‘고기(살)’이다. 그래서 3절에서 바울이 돌판과 “육의 마음판”을 대조할 때 이 약속과의 연결이 원문에서는 더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 마음에 자신의 영을 두어 백성이 규례를 따라 행하게 하신다(겔 36:27). 두 예언 모두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의 법에서 찾지 않고 그 법을 지키지 못하는 백성의 마음에서 찾으며, 해결도 하나님께서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데서 찾는다. 모세의 글에도 하나님께서 백성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살게 하시리라는 약속이 있다(신 30:6). 따라서 6절의 조문과 영의 대조는 모세의 글과 성령의 대립이 아니다. 돌에 새긴 율법은 마음을 바꾸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마음에 기록하셔야 했다는 것이 이 대조의 뜻이다.&lt;/p&gt;&lt;h3&gt;뭇 사람이 읽고 모두가 주를 아는 백성&lt;/h3&gt;&lt;p&gt;새 언약의 약속은 새롭게 된 백성의 삶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도 말한다. 에스겔 36:20-23에서 흩어진 이스라엘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 나라 가운데서 더럽혀졌고,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백성을 모으고 새롭게 하신다. 새롭게 된 백성의 삶이 여러 나라 앞에서 하나님을 알리듯,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쓰인 그리스도의 편지인 고린도 교회도 뭇 사람이 알고 읽는다(2-3절). 예레미야 31:34는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모두가 여호와를 알게 되어 서로 가르칠 필요가 없게 되리라고 약속한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 앞에 수건을 벗고 나아간 사람은 모세 한 사람이었지만, 바울은 18절에서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본다고 말한다.&lt;sup&gt;20&lt;/sup&gt; 주의 영광을 보는 일은 지도자나 특별한 체험을 한 소수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르침이 필요 없어지지는 않는다. 바울 자신이 이 편지에서 새 언약을 가르친다. 새 언약의 사역자는 성도가 자기에게 계속 기대게 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 직접 주님을 알고 응답하도록 섬긴다.&lt;/p&gt;&lt;h3&gt;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새 언약&lt;/h3&gt;&lt;p&gt;14-15절의 수건과 완고함을 민족 전체를 낮추는 말로 쓸 수 없는 근거는 언약의 이야기 자체에 있다. 새 언약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약속되었고(렘 31:31), 예레미야는 해와 달과 별의 규례가 폐하지 않는 한 이스라엘 자손도 나라가 되기를 그치지 않으리라고 덧붙인다(렘 31:35-37). 새 언약은 언약을 깨뜨린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주신 약속이다. 바울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이며(11:22), 이방인 성도들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의 은혜에 참여한다.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것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는다고 하고, 이방인 신자들에게 원가지를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고 한다(롬 11:18, 25-29). 3장의 수건도 바울 당시의 상태를 말하며, 주께 돌아가면 벗겨진다. 새 언약의 특권은 교회에 우월감을 주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을 증언하며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도록 복음을 전할 책임을 준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과 사도의 섬김&lt;/h3&gt;&lt;p&gt;3장에서 그리스도는 먼저 편지의 주인으로 나타난다. 고린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편지”이며, 문맥상 이 표현은 그리스도에 관한 편지보다 그리스도께서 쓰시고 보내신 편지를 뜻한다.&lt;sup&gt;21&lt;/sup&gt;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하셔서 공동체를 이루시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로 그 일을 섬긴다. 그러므로 고린도 성도들의 신앙은 바울 개인의 능력에 근거하지 않고 그들을 부르신 그리스도께 근거하며, 공동체의 주인도 바울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4절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 확신을 가진다고 말할 때에도, 그는 자기 사역의 정당성을 자기 자격에서 찾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해 이루신 일에서 찾는다. 4:5에서 그가 자신을 전파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파하며 자신은 성도들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관계를 보여 준다.&lt;/p&gt;&lt;p&gt;6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부른다. 바울이 섬기는 이 새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세우신 언약이다. 고린도 교회는 이미 바울에게서 주의 만찬의 말씀, 곧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는 말씀을 받았다(고전 11:23-25). 언약을 세우신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사도는 그 언약의 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을 그 관계로 부른다. 바울이 새 언약의 일꾼으로 감당할 능력을 자기에게서 찾지 않고 하나님께 돌리는 것도(5-6절) 이 구별과 맞는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 무엇을 보태지 않고 그 구원을 섬긴다.&lt;/p&gt;&lt;h3&gt;그리스도 안에서 벗겨지는 수건&lt;/h3&gt;&lt;p&gt;14절은 옛 언약을 읽을 때 벗겨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수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진다고 말한다. 모세의 글은 여전히 읽히지만, 그 글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이해된다. 16절의 “주”가 하나님을 가리키는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는 논쟁이 있다.&lt;sup&gt;22&lt;/sup&gt; 이 절이 출애굽기 34:34를 가져오므로 여호와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지만, 바울이 같은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전파한다는 점(4:5)은 그리스도로 읽는 해석의 근거가 된다. 주를 여호와로 읽으면, 바울은 모세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누리던 일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주께 돌아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렸다고 말하는 셈이다. 17절은 그 주를 지금 만나는 방식이 성령이라고 밝힌다. 그러므로 주께 돌아서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수건을 벗고, 성령 안에서 주의 영광 앞에 선다.&lt;/p&gt;&lt;h3&gt;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닮아 감&lt;/h3&gt;&lt;p&gt;18절의 주의 영광과 형상은 4:4-6에서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 부르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마음에 비추셨다고 말한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빛은 그가 하나님과 말한 결과였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고, 성도들은 그 영광을 바라보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된다.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 그분을 닮아 간다. 그러므로 닮아 갈 모습은 특정 지도자의 성품이나 공동체의 취향이 정하지 않으며, 4:5가 말하는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신다. 이 변화는 지금 진행 중이며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바울은 이어지는 4:7-12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도의 약한 몸과 고난 가운데 드러난다고 말한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섬긴 사람들의 삶으로 읽히는 사역&lt;/h3&gt;&lt;p&gt;3장은 사역을 평가할 때 사역자가 섬긴 공동체의 삶을 보게 한다. 바울에게 가장 분명한 추천서는 다른 교회의 소개가 아니라 그의 사역으로 그리스도께 돌아온 고린도 성도들이었다. 오늘 교회가 사역자를 세우거나 평가할 때도 경력과 추천은 필요한 정보를 주지만, 그가 섬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서로를 돌보는 법을 배웠는지 물어야 한다. 교회의 규모나 유명세는 그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동시에 그 편지는 그리스도의 편지이므로, 사역자는 성도들의 삶을 자기 업적으로 내세울 수 없다. 또 이 편지는 뭇 사람이 알고 읽는 편지다. 교회가 갈등을 다루고 약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교회 안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 이웃은 그 모습에서 성령께서 마음에 기록하신 편지를 읽는다.&lt;/p&gt;&lt;h3&gt;하나님께 받은 능력과 정직한 섬김&lt;/h3&gt;&lt;p&gt;바울은 사역을 감당할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고백했다(5-6절). “만족”을 마음의 흡족함으로 읽으면 자기 확신이 충분하다는 태도로 흐를 수 있지만, 바울의 고백은 사역자가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의지하여 맡은 일을 감당하게 한다. 바울이 숨김없이 담대히 말하는 근거도 자기 자격이 아니라 길이 남는 영광에 대한 소망이다(12절). 그래서 그는 속임을 버리고 진리를 드러냄으로 자신을 추천한다(4:2). 새 언약의 일꾼에게 담대함은 사역의 문제와 한계를 감추지 않고 설명하는 정직함으로 나타난다. 또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는 말씀을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보다 자기 느낌을 앞세우는 근거로 쓸 수 없다. 이 말씀은 죽음과 정죄 아래 있던 사람을 성령께서 살리시고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기록하신다는 뜻이다. 성령의 일하심을 말하는 공동체는 말씀을 가볍게 다루지 않고 그 말씀에 마음으로 응답한다.&lt;/p&gt;&lt;h3&gt;모두에게 열린 자유와 더딘 변화&lt;/h3&gt;&lt;p&gt;17절의 자유는 수건에서 벗어나 가로막힘 없이 주 앞에 나아가는 자유이며,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자율과 다르다. 이 자유를 말하는 공동체는 성도들이 주님께 직접 응답하도록 도와야 한다. 지도자의 허락을 받아야만 신앙이 안전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관계는 이 자유를 가린다. 18절의 “우리가 다”는 직분과 재산과 학력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은혜로 주의 영광을 본다는 뜻이다.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과 똑같이 그 영광을 바라보며 변화되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 변화는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도록 계속되므로, 변화가 더딘 사람이나 고난이 오래가는 사람을 지금의 활력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바울도 이 영광을 말한 뒤 4장에서 자신의 약한 몸과 환난을 이야기한다. 교회는 서로의 더딘 변화를 참고 기다리며, 변화를 이루시는 분이 성령이심을 신뢰한다.&lt;/p&gt;&lt;h3&gt;이스라엘의 언약 이야기를 정확히 전함&lt;/h3&gt;&lt;p&gt;이 본문을 유대인과 유대교에 관한 설교와 교육에 쓸 때는 언약의 이야기를 정확히 전해야 한다. 모세는 하나님께 받은 명령을 백성에게 모두 알렸고, 새 언약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약속되었으며, 바울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방인 성도들을 섬겼다. 14-15절의 수건은 바울 당시 회당 낭독에서 일어나던 일을 말하며, 바울은 주께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진다고 말한다. 유대인을 본래 완고하거나 열등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예화는 이 본문의 은혜를 흐린다. 이방인 신자에게서 수건이 벗겨진 것도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다. 교회는 그 긍휼을 기억하며 이웃의 종교와 민족을 조롱하는 말을 고치고, 모든 사람이 주께 돌아오도록 복음을 전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Matthew Barrett, “What is So New About the New Covenant? Exploring the Contours of Paul’s New Covenant Theology in 2 Corinthians 3,” &lt;em&gt;Southern Baptist Journal of Theology&lt;/em&gt; 19, no. 3 (2015): 63, 85 n. 11,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Barrett-from-ST-516-2015-SBJT-19.3-final-5.pdf#page=3"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Barrett-from-ST-516-2015-SBJT-19.3-final-5.pdf#page=3&lt;/a&gt;.&lt;/li&gt;&lt;li&gt;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3:3,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3:3,”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3/&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3:5,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3:5,”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5/&lt;/a&gt;.&lt;/li&gt;&lt;li&gt;2:16의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에 쓰인 형용사 &lt;span lang="grc"&gt;ἱκανός&lt;/span&gt;(히카노스)는 5절의 “만족할”(&lt;span lang="grc"&gt;ἱκανοί&lt;/span&gt;, &lt;span class="translit"&gt;히카노이&lt;/span&gt;)과 같은 말이고, 5절의 “만족”(&lt;span lang="grc"&gt;ἱκανότης&lt;/span&gt;)도 같은 계열의 명사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3:5,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5/&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3:6,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3:6,”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6/"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6/&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3:11,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3:11,”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1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11/&lt;/a&gt;.&lt;/li&gt;&lt;li&gt;Barrett는 이 동사를 ‘희미해지다’, ‘절정에 이르다’, ‘폐지되다’, ‘무효가 되다’, ‘효력을 잃다’ 등으로 옮기는 견해들을 소개하고, Hafemann과 Garrett가 다른 신약 용례를 근거로 ‘무력하게 하다’ 또는 ‘효력을 잃게 하다’라는 번역을 주장한다고 밝힌다. Barrett 자신은 어느 번역을 택하든 모세 얼굴의 영광과 옛 언약의 영광이 일시적이었고 이제 끝났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본다. Barrett, “What is So New About the New Covenant?” 72,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Barrett-from-ST-516-2015-SBJT-19.3-final-5.pdf#page=12"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Barrett-from-ST-516-2015-SBJT-19.3-final-5.pdf#page=1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3:13,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3:13,”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1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13/&lt;/a&gt;.&lt;/li&gt;&lt;li&gt;학자들은 “결국”을 시간적 끝, 목표, 또는 둘을 아우르는 완성으로 읽는다. Barrett는 이 견해들과 함께 ‘결과’로 읽는 Hafemann의 해석을 소개하고, 13절의 “없어질 것”을 옛 언약 전체로 보며 7-11절이 옛 언약의 일시성을 거듭 강조한다는 이유로 시간적 끝을 택하는 Meyer의 논증을 인용한다. Barrett, “What is So New About the New Covenant?” 93 n. 106,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Barrett-from-ST-516-2015-SBJT-19.3-final-5.pdf#page=33"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Barrett-from-ST-516-2015-SBJT-19.3-final-5.pdf#page=33&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3:14,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3:14,”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1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14/&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3:14,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1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14/&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3:16,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3:16,”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16/"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16/&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3:16,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16/"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16/&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3:17,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3:17,”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1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17/&lt;/a&gt;.&lt;/li&gt;&lt;li&gt;Barrett는 Kruse를 인용하여 “주는 영이시니”가 일대일 동일시가 아니라 새 언약 아래에서 주를 성령으로 경험한다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Garland를 따라 굳은 마음의 수건을 벗기시는 분을 주의 영이신 성령으로 본다. Barrett, “What is So New About the New Covenant?” 94 n. 120,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Barrett-from-ST-516-2015-SBJT-19.3-final-5.pdf#page=34"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Barrett-from-ST-516-2015-SBJT-19.3-final-5.pdf#page=34&lt;/a&gt;.&lt;/li&gt;&lt;li&gt;Barrett, “What is So New About the New Covenant?” 94 n. 120,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Barrett-from-ST-516-2015-SBJT-19.3-final-5.pdf#page=34"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Barrett-from-ST-516-2015-SBJT-19.3-final-5.pdf#page=34&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3:18,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3:18,”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18/"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18/&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3:18,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18/"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318/&lt;/a&gt;.&lt;/li&gt;&lt;li&gt;Barrett, “What is So New About the New Covenant?” 66-67,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Barrett-from-ST-516-2015-SBJT-19.3-final-5.pdf#page=6"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Barrett-from-ST-516-2015-SBJT-19.3-final-5.pdf#page=6&lt;/a&gt;.&lt;/li&gt;&lt;li&gt;Barrett, “What is So New About the New Covenant?” 79,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Barrett-from-ST-516-2015-SBJT-19.3-final-5.pdf#page=19"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Barrett-from-ST-516-2015-SBJT-19.3-final-5.pdf#page=19&lt;/a&gt;.&lt;/li&gt;&lt;li&gt;Barrett, “What is So New About the New Covenant?” 64, 86 n. 22,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Barrett-from-ST-516-2015-SBJT-19.3-final-5.pdf#page=4"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Barrett-from-ST-516-2015-SBJT-19.3-final-5.pdf#page=4&lt;/a&gt;.&lt;/li&gt;&lt;li&gt;Barrett, “What is So New About the New Covenant?” 93 n. 118,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Barrett-from-ST-516-2015-SBJT-19.3-final-5.pdf#page=33"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Barrett-from-ST-516-2015-SBJT-19.3-final-5.pdf#page=33&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4:1-6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친 하나님의 영광</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4.1-6/</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4.1-6/</guid><description>고린도후서 4:1-6의 낙심하지 않는 사역, 진리의 공개와 복음의 빛,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는 삶을 해설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긍휼로 받은 직분과 낙심하지 않음 (1절)&lt;/h3&gt;&lt;p&gt;1절의 “그러므로”로 바울은 3장에서 말한 새 언약의 직분에서 결론을 끌어낸다. 하나님은 사도들을 새 언약의 일꾼이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고, 그 직분은 죽이는 율법 조문이 아니라 살리는 영의 직분이다(3:5-8). 바울은 이 직분을 자기 자격으로 얻지 않았다.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라는 말처럼 하나님의 긍휼로 맡았다. 그래서 그는 “낙심하지 아니하고”(οὐκ ἐγκακοῦμεν, 욱 엥카쿠멘) 직분을 계속한다. 같은 말이 4:16에 다시 나오고, 그 사이에 질그릇 같은 몸과 환난이 이어진다.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서도 직분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고백이다.&lt;/p&gt;&lt;h3&gt;숨은 일을 버리고 진리를 나타내는 사역 (2절)&lt;/h3&gt;&lt;p&gt;2절에서 바울은 그 직분을 어떤 방식으로 수행하는지 밝힌다. 그는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렸다. ‘버리고’로 옮긴 동사(ἀπειπάμεθα, 아페이파메타)는 그런 방식을 거부했다는 뜻이며, 바울이 전에 그런 일을 했다는 고백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lt;sup&gt;1&lt;/sup&gt; 이어서 바울은 두 가지를 부정한다. 하나는 “속임으로”(ἐν πανουργίᾳ, 엔 파누르기아) 행하는 일이다. 이 명사는 꾀를 써서 사람을 다루는 간교함을 가리킨다. 12:16에서 바울은 자신이 “교활한 자가 되어” 고린도 사람들을 속임수로 취했다는 어떤 이의 말을 옮긴다. 이 비난을 생각하면, 2절의 부정은 바울의 정직을 의심하는 말에 대한 대답으로 읽을 수 있다.&lt;sup&gt;2&lt;/sup&gt;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일이다. 이 동사(δολοῦντες, 돌룬테스)는 말씀에 다른 것을 섞거나 말씀을 왜곡하여 변질시킨다는 뜻이다.&lt;sup&gt;3&lt;/sup&gt; 개역개정은 2:17도 같은 한국어로 옮겼지만, 그곳의 동사(καπηλεύοντες, 카펠류온테스)는 돈을 벌려고 말씀을 파는 일을 가리킨다.&lt;sup&gt;4&lt;/sup&gt; 바울은 두 구절에서 말씀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일과 말씀의 내용을 바꾸는 일을 모두 거절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관해 주신 소식, 곧 복음을 가리킨다.&lt;sup&gt;5&lt;/sup&gt;&lt;/p&gt;&lt;p&gt;2절 후반에서 바울은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자신을 추천한다. 3:1에서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고 물었던 바울은 추천서에 기대지 않고 진리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사역으로 자신을 보인다. 그 추천을 받는 쪽은 “각 사람의 양심”이다. 여기서 양심은 자기 잘못을 깨닫는 마음보다 다른 사람의 행위가 옳은지 판단하는 능력을 가리킨다.&lt;sup&gt;6&lt;/sup&gt; 바울은 누구든 자기 사역을 살펴 판단할 수 있도록 사역의 방식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이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한다. 2:17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한다고 했던 것처럼, 바울은 사람들의 판단에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자기 사역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분을 하나님으로 여긴다.&lt;/p&gt;&lt;h3&gt;가려진 복음과 눈멀게 된 생각 (3-4절)&lt;/h3&gt;&lt;p&gt;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공개한 복음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려져 있음을 인정한다. “가리었으면”이라는 말은 3:13-16에서 모세의 얼굴과 모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덮은 “수건”(κάλυμμα, 칼륌마)을 떠올리게 한다.&lt;sup&gt;7&lt;/sup&gt; “우리의 복음”은 바울 일행에게 다른 복음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몸담고 있음을 나타낸다.&lt;sup&gt;8&lt;/sup&gt; 2절의 숨은 부끄러움의 일은 사역자가 감추는 일이고, 3절의 가려짐은 진리가 공개된 뒤에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바울은 그들을 2:15에서처럼 “망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lt;/p&gt;&lt;p&gt;4절은 복음이 그들에게 가려진 원인을 밝힌다. “이 세상의 신”(ὁ θεὸς τοῦ αἰῶνος τούτου, 호 테오스 투 아이오노스 투투)에서 “세상”으로 옮긴 명사는 직역하면 ‘시대’이므로 이 표현은 ‘이 시대의 신’에 가깝고, 이 신은 사탄을 가리킨다.&lt;sup&gt;9&lt;/sup&gt; 바울이 그를 ‘신’이라고 부르지만 그가 창조주와 같은 지위를 가진다는 뜻은 아니다. 이 호칭은 지금 시대에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을 가리는 그의 실제 영향력을 드러낸다. 6절이 하나님을 어둠에서 빛을 내신 창조주로 소개하므로, 어둠의 세력은 실제로 활동하지만 빛을 주시는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 개역개정이 “혼미하게 하여”로 옮긴 동사(ἐτύφλωσεν, 에튀플로센)는 ‘눈멀게 하였다’는 뜻이다. “혼미하게”는 정신이 흐려진 상태를 떠올리게 하지만, 원문은 눈멂이라는 시각의 비유를 써서 바로 뒤의 빛과 광채로 이어 간다. 눈멀게 된 “마음”(τὰ νοήματα, 타 노에마타)은 생각이나 이해를 가리킨다. 3:14에서 모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수건이 벗겨지지 않는다고 할 때도 바울은 같은 명사를 썼다.&lt;/p&gt;&lt;p&gt;이어지는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εἰς τὸ μὴ αὐγάσαι, 에이스 토 메 아우가사이)의 동사는 ‘분명히 보다’라는 뜻과 ‘비추다, 밝히다’라는 뜻으로 모두 쓰인다.&lt;sup&gt;10&lt;/sup&gt; 그래서 원문은 두 방향으로 읽힌다. 부정사 뒤의 “광채”(τὸν φωτισμὸν, 톤 포티스몬)를 목적어로 보면 믿지 않는 자들이 그 광채를 보지 못한다는 뜻이 되고, 부정사의 주어로 보면 광채가 그들에게 비치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바로 앞의 눈멂 비유는 ‘보지 못하게’라는 읽기에 잘 어울리고, 6절에서 하나님이 마음에 빛을 ‘비추셨다’는 말은 ‘비치지 못하게’라는 읽기와 짝을 이룬다. 문법과 문맥이 두 읽기를 모두 허용하므로, 개역개정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는 원문의 뜻을 바르게 옮긴 번역 가운데 하나다. 어느 읽기에서도 사람들이 복음을 알아보지 못하는 원인은 빛이 약해서가 아니라 이 시대의 신이 생각을 눈멀게 했기 때문이다.&lt;/p&gt;&lt;h3&gt;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 (4절)&lt;/h3&gt;&lt;p&gt;가려진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리고, 그 복음이 비추는 빛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가려져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εἰκὼν τοῦ θεοῦ, 에이콘 투 테우)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된다. 바로 앞 3:18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주의 영광을 보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는 성도들이 닮아 갈 형상이시다. 복음의 빛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비추므로, 그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의 역할도 그리스도를 알리는 데 있다.&lt;/p&gt;&lt;h3&gt;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너희의 종 (5절)&lt;/h3&gt;&lt;p&gt;5절은 앞의 말을 뒷받침한다. 바울은 자신들을 전파하지 않고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분이 주권자이시며 모든 이의 주님이시라고 선언하는 일이다.&lt;sup&gt;11&lt;/sup&gt; 3절에서 “우리의 복음”이라고 부른 소식도 그 내용은 바울 일행이 아니라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복음을 맡은 사람이 누구이든 선포의 중심과 청중이 믿을 분은 그리스도이시므로, 바울 자신의 특별함은 이 선포를 대신할 수 없다.&lt;/p&gt;&lt;p&gt;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말한 뒤 바울은 자신들을 “너희의 종”이라고 부른다. 원문에서 “주”와 “종”은 나란히 서서, 그리스도는 주님이시고 사도들은 고린도 성도들의 종이라는 대조를 만든다. 섬김의 이유는 “예수를 위하여”(διὰ Ἰησοῦν, 디아 이에순)가 밝힌다. 이 전치사가 목적격과 함께 쓰이면 이유를 나타내므로, 원문은 ‘예수 때문에’에 가깝다. 개역개정의 “위하여”는 목적처럼 들릴 수 있으나, 여기서 이 구는 섬김의 근거를 말한다. 바울이 성도들의 종이 된 이유는 성도들의 요구가 아니라 예수께 있다. 그러므로 사도의 섬김은 성도들이 원하는 모든 일을 무조건 따르는 일이 아니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도는 자신을 성도들 위의 주인으로 세우지도 않는다.&lt;/p&gt;&lt;h3&gt;마음에 빛을 비추신 창조주 하나님 (6절)&lt;/h3&gt;&lt;p&gt;6절은 바울이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이유를 밝힌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문장의 주어는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이다. 바울은 창세기 1:3의 창조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자유롭게 불러와 이 하나님을 소개한다.&lt;sup&gt;12&lt;/sup&gt; 이 하나님께서 사도들의 마음에 빛을 비추셨다. 바울은 문장의 주어를 창조의 말씀으로 소개하여, 창조 때 어둠에서 빛이 비치게 하신 분과 사도들의 마음을 밝히신 분이 같은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lt;/p&gt;&lt;p&gt;“우리 마음에”의 “우리”는 5절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우리”와 이어지므로, 일차로 복음을 전하며 고린도 사람들을 섬기는 바울과 동역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말은 고린도 신자들의 마음에 복음의 빛이 비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lt;sup&gt;13&lt;/sup&gt;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데 있다. 4절에서 “광채”로 옮긴 명사(φωτισμός, 포티스모스)가 6절에서 “빛”으로 다시 나오고 두 절의 끝부분도 비슷하게 짜여 있어, 6절의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앎은 4절의 복음과 사실상 같은 내용을 가리킨다.&lt;sup&gt;14&lt;/sup&gt;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가려진 빛과 사도들의 마음에 비친 빛은 같은 복음의 빛이다. 빛을 받았다는 경험도 사역자의 특별한 체험으로 따로 떼어 말할 수 없고,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앎이라는 내용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영광은 그리스도의 “얼굴”(πρόσωπον, 프로소폰)에 있다. 3:7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의 얼굴에 있던 없어질 영광을 주목하지 못했고, 3:13에서 모세는 그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알려진다고 말한다. 사도들은 그분에게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에 자신을 전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파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어둠에서 빛을 내신 창조주와 새 창조&lt;/h3&gt;&lt;p&gt;6절의 하나님은 창세기 1:1-5에서 어둠 가운데 말씀으로 빛을 있게 하신 창조주다. 창세기는 세계의 시작을 말하고 6절은 사람의 마음에 일어난 일을 말하지만, 두 장면에서 어둠을 밝히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창조의 말씀을 불러와,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된 일이 스스로 이룬 깨달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내신 일임을 밝힌다. 같은 편지 5:17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른다. 마음에 빛을 비추신 일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새롭게 지으시는 일과 이어진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은 자기 안에서 밝음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앎을 받은 사람들이다.&lt;/p&gt;&lt;h3&gt;모세의 얼굴에 비친 영광과 벗겨진 수건&lt;/h3&gt;&lt;p&gt;출애굽기 33-34장은 1절의 긍휼과 6절의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보여 준다. 금송아지 사건 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구하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며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분으로 자신을 알리신다(출애굽기 33:18-19).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자신의 얼굴을 보고 살 사람이 없다고 하신다(33:20). 언약이 다시 세워진 뒤 하나님과 말씀한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고, 모세는 백성에게 말하기를 마친 뒤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34:29-35). 바울은 3장에서 이 얼굴과 수건으로 두 언약의 직분을 견주었고, 6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다고 말한다. 모세의 얼굴에서는 하나님을 만난 중보자에게 비친 영광이 보였지만, 그리스도의 얼굴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알려진다. 두 본문 모두에서 하나님을 아는 일은 사람이 얻어 내는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로 자신을 알리시는 선물이다.&lt;/p&gt;&lt;p&gt;바로 앞의 3:16-18은 이 빛이 누구에게 열려 있는지 보여 준다.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겨지고, “우리가 다” 주의 영광을 보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6절에서 사도들의 마음에 비친 빛은 그들만 누리는 특권이 아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알게 된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성도들도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형상을 닮도록 섬긴다. 3:3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이 마음판에 쓰신 일과 6절에서 창조주가 마음에 비추시는 빛은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서로 다른 비유로 설명한다.&lt;/p&gt;&lt;h3&gt;눈먼 자의 눈을 여시는 하나님과 이방의 빛&lt;/h3&gt;&lt;p&gt;이사야는 눈먼 자의 눈을 여시고 어둠을 빛으로 바꾸시는 일을 여호와의 구원으로 말한다. 여호와는 그의 종을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시고, 그 종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한다(이사야 42:6-7). 여호와께서는 맹인들 앞에서 “암흑이 … 광명이 되게” 하신다(42:16). 60:1-3에서는 어둠이 땅을 덮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그 백성 위에 나타나고 나라들이 그 빛으로 나아온다. 4-6절도 눈먼 생각, 가려진 빛, 하나님의 영광을 차례로 말한다. 이사야에서 어둠을 빛으로 바꾸시는 분이 여호와이시듯, 바울에게도 가려진 마음에 빛을 비추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사도행전 26:16-18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바울을 이방인에게 보내어,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맡기신다. 이 사명의 말은 이사야 42장의 표현과 가깝고, 4절에서 이 시대의 신이 생각을 눈멀게 한다는 말과도 맞닿는다. 바울의 사역은 나라들에게 빛을 비추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섬기는 일이다.&lt;/p&gt;&lt;h3&gt;창조의 빛과 하나님을 나타내신 말씀&lt;/h3&gt;&lt;p&gt;요한복음 1:1-18은 창조의 빛과 하나님을 아는 계시를 한 분 안에서 연결한다. 만물이 말씀으로 지어졌고 그 안에 생명이 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1:3-4).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고 사람들은 그의 영광을 보았다(1:14).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으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그분을 나타내셨다(1:18). 이는 6절에서 바울이 창조주와 그리스도의 얼굴을 잇는 것과 같은 방향의 고백이다. 요한복음 1:6-8은 세례 요한을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사람으로 소개한다. 이 구별은 5절에서 바울이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말한 것과 주제상 통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얼굴&lt;/h3&gt;&lt;p&gt;4절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 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아보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된다. 골로새서 1:15-16은 같은 고백을 창조와 연결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아들 안에서 하늘과 땅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왕권과 권세들이 다 창조되었다. 이 고백에 비추어 보면 4절의 “이 세상의 신”은 그리스도와 대등하게 맞서는 신이 아니다. 그는 지금 믿지 않는 자들의 생각을 눈멀게 하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권세를 지으신 분이시며 하나님은 그분 안에서 자신을 알리신다. 그러므로 복음이 어떤 사람들에게 가려져 있어도 사도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리는 일을 그치지 않는다.&lt;/p&gt;&lt;p&gt;6절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다고 말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출애굽기 33:20),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알게 된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14:9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방향의 고백이다. 얼굴은 사람과 대면하는 인격을 떠올리게 한다. 5절에서 바울이 주님으로 전파하는 분도, 섬김의 이유로 삼는 분도 “예수”다. 바울이 말하는 영광의 주님은 역사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신 그 예수이시다. 이어지는 4:10-11에서 바울은 곧바로 “예수의 죽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영광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영광이므로, 그 영광을 세상의 성공과 힘에 맞추어 이해하면 복음의 내용을 잃는다.&lt;/p&gt;&lt;h3&gt;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종이 된 사도&lt;/h3&gt;&lt;p&gt;5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전파한다. 이 주님은 죽음에서 살아나신 분이다. 4:14에서 바울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사도들도 예수와 함께 살리실 것을 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므로 사도는 자신을 전파하지 않는다.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셨고, 사도는 그 일을 알리며 화목하라고 간청한다(5:18-20). 사도의 경험은 그 소식을 들려주는 데 쓰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하는 믿음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교회라면 지도자의 생애나 능력을 신앙의 마지막 기초로 여길 이유가 없다.&lt;/p&gt;&lt;p&gt;5절의 “주”와 “종”의 대조는 마가복음 10:42-45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주제상 이어진다. 야고보와 요한이 영광 가운데 높은 자리를 구했을 때, 예수는 집권자들처럼 사람을 지배하는 길을 거부하시고 자신은 섬기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바울이 “예수 때문에” 성도들의 종이 된 것은 이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그분의 길을 따르는 일이다. 그러나 두 섬김은 같지 않다. 예수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이었고, 사도의 섬김은 그 구원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다. 사도는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알리려고 자신을 내어 줄 뿐이다. 그러므로 종이라는 호칭은 사도의 권위를 지우지 않고, 그 권위가 그리스도에게서 나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쓰여야 함을 밝힌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알기보다 사도를 의지하게 된다면 이 관계는 무너진다.&lt;/p&gt;&lt;h3&gt;마음에 비추신 빛과 그리스도의 형상&lt;/h3&gt;&lt;p&gt;6절에서 하나님은 사도들의 마음에 빛을 비추셔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다. 하나님의 행동이 먼저 있고, 그 결과로 사도의 증언이 생긴다. 이 앎은 4절의 복음과 같은 내용이다.&lt;sup&gt;15&lt;/sup&gt; 그러므로 사도의 선포는 그가 자기 안에서 강한 확신을 느꼈다는 사실에 기대지 않고 자신에게 알려진 그리스도를 말한다. 3:18에서 바울은 주의 영광을 보는 사람들이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고 말했다. 마음에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일은 성령께서 사람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바꾸시는 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는 알아야 할 소식의 중심이시고 성도가 닮아 갈 형상이시다.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 사도의 삶을 바꾸고, 바뀐 사도를 통해 그 소식이 다시 사람들에게 들린다. 1절에서 바울이 직분의 근거로 삼은 긍휼도 지난 한 사건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이 관계 안에서 그가 직분을 계속하게 한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낙심하지 않는 근거인 긍휼&lt;/h3&gt;&lt;p&gt;복음을 전했는데 상대가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공동체의 변화가 더딜 때, 사역자는 자신의 수고가 헛되다고 느낄 수 있다. 바울은 복음이 어떤 사람들에게 가려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낙심하지 않았고, 그 근거를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긍휼에서 찾았다. 오늘 말씀을 가르치거나 이웃에게 복음을 말하는 사람도 즉각적인 반응으로 자기 사역의 가치를 재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지친 사람에게 더 많은 일을 요구하는 근거로 써서는 안 된다. 바울은 곧이어 4:7에서 자신을 질그릇에 비유하며 약함을 숨기지 않는다. 긍휼로 직분을 받은 사람은 피로와 도움의 필요를 감추지 않고 말할 수 있다.&lt;/p&gt;&lt;h3&gt;진리를 드러내는 가르침과 비판에 대한 응답&lt;/h3&gt;&lt;p&gt;2절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일해야 하는지 보여 준다. 바울은 숨은 방식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목적에 맞추어 바꾸지 않았다. 오늘 가르치는 사람도 자신의 영향력이나 사역의 성과를 위해 본문의 뜻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본문의 흐름과 해석의 근거를 밝혀, 듣는 사람이 그 설명을 스스로 살펴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원어나 전문 지식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청중이 교사의 말을 무조건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도 각 사람의 양심이 판단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사역을 드러냈다. 공동체 안에서 잘못이 드러났을 때 평판을 지키려고 덮는 일도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린다는 고백과 맞지 않는다. 진리를 드러낸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사정을 무분별하게 공개한다는 뜻이 아니라, 잘못을 감춘 채 계속하지 않고 멈추어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lt;/p&gt;&lt;p&gt;복음이 가려져 있다는 3-4절의 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이나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을 낮추는 말로 쓰이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직분을 맡은 근거를 긍휼에서 찾았고, 그의 마음에 빛을 비추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빛을 받은 사람은 자기 믿음을 타고난 우월함처럼 내세울 수 없다. 그 은혜를 기억하는 신자는 상대의 신앙이나 생활을 조롱하지 않고, 상대가 실제로 한 말을 들은 뒤 자신이 믿는 그리스도를 정확히 설명한다. 복음에 대한 비판을 모두 이 시대의 신의 일로 돌려서도 안 된다. 성경을 잘못 설명했거나, 교회의 잘못된 행동이 신뢰를 잃게 했거나, 설명이 분명하지 못했을 수 있다. 이런 비판을 악한 권세의 일이라는 한마디로 묶으면 바울이 말한 진리를 드러내는 책임에서 멀어진다. 틀린 설명은 고치고, 교회에서 상처받은 경험을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lt;/p&gt;&lt;h3&gt;그리스도를 주로 전파하고 예수 때문에 섬김&lt;/h3&gt;&lt;p&gt;그리스도를 주로 전파한다는 5절은 설교와 간증의 중심을 정한다. 사역자의 특별한 경험과 헌신을 길게 들려준 뒤 그 사람을 따르는 것이 신앙의 중심처럼 남으면,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역자가 전파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도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어떤 말씀과 은혜를 알게 되었는지 드러나야 하며, 듣는 사람에게 같은 경험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성도들의 종이라는 바울의 말은 지도자가 맡은 권한을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쓰게 한다. 그러나 이 호칭을 근거로 사역자에게 무제한의 요구를 하거나 모욕을 견디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바울은 성도들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예수 때문에 섬겼고, 그 섬김에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분명히 말하는 책임이 들어 있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지도자와 성도 모두 그분 앞에서 책임을 진다.&lt;/p&gt;&lt;h3&gt;마음을 밝히시는 하나님을 신뢰함&lt;/h3&gt;&lt;p&gt;6절에서 마음에 빛을 비추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모든 수단을 손에 쥐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다. 복음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실제 질문에 답하는 일은 듣는 사람을 섬긴다. 그러나 불안을 지나치게 자극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응답하도록 압박하면, 듣는 사람은 무엇을 믿는지 충분히 생각할 기회를 잃는다. 그런 방법은 2절에서 바울이 버린 속임의 방식에 가깝다. 사역자는 진리를 성실하게 말하고, 마음을 밝히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이웃의 응답을 기다린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4:2,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4:2,”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2/&lt;/a&gt;.&lt;/li&gt;&lt;li&gt;12:16의 “교활한 자”(&lt;span lang="grc"&gt;πανοῦργος&lt;/span&gt;, &lt;span class="translit"&gt;파누르고스&lt;/span&gt;)는 2절의 &lt;span lang="grc"&gt;πανουργίᾳ&lt;/span&gt;(파누르기아)와 같은 어근의 형용사다. 바울은 11:3에서 2절과 같은 명사로 뱀이 “그 간계로”(&lt;span lang="grc"&gt;ἐν τῇ πανουργίᾳ αὐτοῦ&lt;/span&gt;, &lt;span class="translit"&gt;엔 테 파누르기아 아우투&lt;/span&gt;) 하와를 미혹한 일을 말한다. &lt;em&gt;Novum Testamentum Graece&lt;/em&gt;, ed. Barbara Aland et al., 28th rev. ed.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2012), 2 Cor 11:3; 12:16, accessed October 25, 2026, &lt;a href="https://www.die-bibel.de/bibel/NA28/2CO.11" rel="noopener"&gt;https://www.die-bibel.de/bibel/NA28/2CO.11&lt;/a&gt;; &lt;a href="https://www.die-bibel.de/bibel/NA28/2CO.12" rel="noopener"&gt;https://www.die-bibel.de/bibel/NA28/2CO.1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4:2,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2:17,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2:17,”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1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217/&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4:2,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4:2,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4:3,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4:3,”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3/&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4:3,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3/&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4:4,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4:4,”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4/&lt;/a&gt;.&lt;/li&gt;&lt;li&gt;LSJ는 &lt;span lang="grc"&gt;αὐγάζω&lt;/span&gt;(아우가조)의 첫째 의미를 “view in the clearest light, see distinctly, discern”(I)로 제시하고, 해가 무엇을 비춘다는 둘째 의미 “illumine”(II) 아래의 비유적 용례 “enlighten”(II.2)에 고린도후서 4:4를 분류한다. Henry George Liddell, Robert Scott, and Henry Stuart Jones, &lt;em&gt;A Greek-English Lexicon&lt;/em&gt;, s.v. “&lt;span lang="grc"&gt;αὐγάζω&lt;/span&gt;,” I, II.2, Logeion, University of Chicago,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logeion.uchicago.edu/%CE%B1%E1%BD%90%CE%B3%CE%AC%CE%B6%CF%89" rel="noopener"&gt;https://logeion.uchicago.edu/%CE%B1%E1%BD%90%CE%B3%CE%AC%CE%B6%CF%89&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4:5,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4:5,”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5/&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4:6,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4:6,”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6/"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6/&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이 대명사가 바울과 동역자들만 가리킬 수도 있고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킬 수도 있다고 보면서, 번역이 고린도 신자들의 마음에는 복음의 빛이 비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4:6,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6/"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6/&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4:6,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6/"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6/&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4:6,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6/"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6/&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4:7-18 질그릇에 담긴 보배와 부활의 소망</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4.7-18/</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4.7-18/</guid><description>고린도후서 4:7-18의 질그릇과 보배, 예수의 죽음과 생명, 겉사람과 속사람을 사도의 고난과 부활 소망 안에서 읽습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질그릇에 담긴 보배와 하나님의 능력 (7절)&lt;/h3&gt;&lt;p&gt;7절의 “이 보배”는 바로 앞 4:5-6에서 말한 복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사도들의 마음에 비추셨고,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며 자신들은 예수를 위하여 고린도 성도들의 종이라고 전파한다. 그 보배를 가진 “우리”는 일차로 바울과 그와 함께 복음을 섬기는 동역자들이다. 질그릇은 흙을 구워 만든 그릇으로, 고대 가정에서 흔히 쓰였고 쉽게 깨졌다. 바울은 누구나 아는 이 물건으로 복음을 맡은 사람들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복음은 그처럼 손상되기 쉬운 인간의 몸과 삶을 거쳐 사람들에게 전해진다.&lt;/p&gt;&lt;p&gt;7절 후반은 보배를 질그릇에 두신 목적을 밝힌다. 헬라어 원문을 따르면 “능력의 탁월함이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게 하려고”라는 뜻이다. 개역개정의 “알게”에 해당하는 동사는 원문에 없다. 원문은 능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말하고, 개역개정은 그 사실이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결과까지 풀어 옮겼다. 8절부터 이어지는 고난의 목록이 그 출처를 보여 준다. 사도들이 무너질 듯한 형편에서도 복음을 섬기며 계속 서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질그릇과 보배의 대비는 자기 능력과 외적 조건을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응답이기도 하다.&lt;sup&gt;1&lt;/sup&gt; 같은 편지에서 바울은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언급하고(5:12),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다는 비판을 직접 옮겨 적는다(10:10).&lt;/p&gt;&lt;h3&gt;눌려도 무너지지 않게 붙드시는 하나님 (8-9절)&lt;/h3&gt;&lt;p&gt;8-9절은 고난과 그 한계를 짝지은 네 쌍의 표현으로 그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 준다. 각 쌍은 실제로 닥친 고난을 말한 뒤 “그러나 … 아니하다”를 덧붙여 그 고난이 사도들을 끝까지 무너뜨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개역개정의 “사방으로”는 원문에서 “모든 일에서”라는 뜻에 가깝다. 첫째 쌍에서 사도들은 눌리고 압박당하지만(“욱여쌈을 당하여도”) 꼼짝할 수 없는 곳에 갇히지는 않는다(“싸이지 아니하며”). 둘째 쌍에서 원문은 소리가 비슷한 두 분사 ἀπορούμενοι(아포루메노이)와 ἐξαπορούμενοι(엑사포루메노이)로 “어찌할 바를 몰라도 아주 길을 잃지는 않는다”는 대조를 만든다. 개역개정은 이 대조를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로 옮겼다.&lt;/p&gt;&lt;p&gt;ἐξαπορούμενοι(엑사포루메노이)와 같은 동사는 1:8에서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회고할 때에도 쓰였다(ἐξαπορηθῆναι, 엑사포레테나이). 그곳에서 원문은 절망의 대상을 “사는 것”(τοῦ ζῆν, 투 젠)으로 밝히고, 개역개정은 이를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로 옮겼다. 바울은 살아남을 길이 끊어진 상황을 실제로 겪었다. 1:9에서 바울은 그 일로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1:10에서는 하나님이 그 큰 사망에서 사도들을 건지셨다고 고백한다. 8절에서 사도들이 아주 길을 잃지 않는다는 고백도 7절이 말한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한다. 자기 목숨을 두고는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에도 바울의 길이 완전히 막히지 않은 것은 그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14절의 부활 소망이 이 고백의 마지막 근거다.&lt;/p&gt;&lt;p&gt;9절의 두 쌍도 같은 구조를 따른다. 셋째 쌍에서 사도들은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는다(“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ἐγκαταλειπόμενοι, 엥카탈레이포메노이). 원문은 버리지 않는 주체를 밝히지 않지만, 7절이 능력을 하나님께 돌리므로 박해 가운데 사도들을 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넷째 쌍에서 사도들은 땅에 내던져지듯 쓰러져도(“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멸망하지 않는다(“망하지 아니하고”, ἀπολλύμενοι, 아폴뤼메노이). 이 멸망이 실제 죽음을 가리키는지, 적대자들이 사도의 사역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뜻인지는 이 문맥에서 확정하기 어렵다.&lt;sup&gt;2&lt;/sup&gt; 바울은 자신이 상처 없이 지냈다고 말하지 않는다. 위협과 손상은 실제로 있었으나 복음을 섬기는 삶은 그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고난이 닥칠 때마다 사도들을 붙드신 일이 7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능력이다.&lt;/p&gt;&lt;h3&gt;예수를 위한 죽음과 교회에 이르는 생명 (10-12절)&lt;/h3&gt;&lt;p&gt;10절은 이 경험을 예수의 죽음과 생명으로 설명한다. 사도들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 “예수의 죽음”(τὴν νέκρωσιν τοῦ Ἰησοῦ, 텐 네크로신 투 이에수)에 쓰인 명사는 죽어 가는 과정이나 죽임당함을 가리킬 수 있다. 11절이 그 뜻을 풀어, 사도들이 예수를 위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10절의 “예수의 죽음”은 예수께서 당하신 죽임을 닮은 위험이 사역 내내 사도들의 몸에 따라다니는 현실을 가리킨다. 목적절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같은 절에서 “몸에”가 두 번 나오므로, 죽음의 위협을 받는 몸과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몸은 같은 몸이다. 예수의 생명은 8-9절의 고난 가운데 사도들이 무너지지 않고 사역을 이어 가는 데서 이미 드러난다.&lt;/p&gt;&lt;p&gt;11절은 10절을 풀어 설명한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죽음에 넘겨진다는 말은 살아 있는 사도들이 거듭 죽음의 위험에 내맡겨지는 현실을 가리킨다. 그 고난은 “예수를 위하여”(διὰ Ἰησοῦν, 디아 이에순) 생긴다. 4:5에서 사도들이 자신을 “예수를 위하여” 고린도 성도들의 종이라고 부를 때에도 원문은 같은 표현을 쓴다. 사도들은 예수 때문에 성도들을 섬기고, 같은 이유로 죽음의 위험에 넘겨진다. 8-9절의 고난은 이렇게 복음 사역에서 생긴 고난이다. 목적절은 10절을 되풀이하면서 몸을 “우리 죽을 육체”라고 부른다. 예수의 생명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바로 이 육체에 나타난다.&lt;/p&gt;&lt;p&gt;12절은 “그런즉”으로 10-11절의 결과를 말한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한다. 바울과 동역자들이 죽음의 위험을 감당하며 복음을 전하는 동안, 고린도 성도들은 그 복음으로 예수의 생명을 누린다. 사도들의 위험이 성도들의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은 사도들이 그 위험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1:6에서도 자신들이 환난을 당하는 것이 고린도 성도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lt;/p&gt;&lt;h3&gt;믿음으로 말하게 하는 부활의 소망 (13-14절)&lt;/h3&gt;&lt;p&gt;13절에서 바울은 시편을 인용하여 고난 중에도 계속 말하는 이유를 밝힌다.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ἐπίστευσα, διὸ ἐλάλησα, 에피스튜사, 디오 엘랄레사)는 칠십인역 시편 115:1의 문구이며, 개역개정 시편으로는 116:10에 해당한다. 바울은 그 시인과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한다. 개역개정이 “마음”으로 옮긴 πνεῦμα(프뉴마)는 ‘영’으로도 옮기는 단어다. 이 말이 사람의 믿음의 태도를 가리키면 바울은 시인과 같은 태도로 믿고 말한다는 뜻이 되고, 믿음을 일으키시는 성령을 가리키면 시인 안에서 믿음을 일으키신 성령께서 바울 안에서도 같은 믿음을 일으키신다는 뜻이 된다. 13절의 표현만으로는 두 읽기 가운데 하나로 정하기 어렵다.&lt;sup&gt;3&lt;/sup&gt; 인용문의 두 동사는 과거의 일을 말하지만, 바울 자신의 말(πιστεύομεν, διὸ καὶ λαλοῦμεν, 피스튜오멘, 디오 카이 랄루멘)은 현재형이다.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로 옮겼지만, 원문은 지금 믿고 있으므로 지금 말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고통 중에 믿음을 고백한 시인의 말을, 지금 죽음에 노출된 채 복음을 말하는 근거로 삼는다. 고린도 성도들이 읽는 이 편지도 그 말하기에 속한다.&lt;/p&gt;&lt;p&gt;14절은 바울이 무엇을 알기에 믿고 말하는지 밝힌다. 바울은 하나님을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로 부르며, 그분이 “예수와 함께” 사도들도 다시 살리시고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서게 하실 것을 안다고 말한다. 1:9에서 바울이 의지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 여기서는 이미 예수를 살리신 분으로 불린다. 바울의 소망은 이미 일어난 예수의 부활에 근거한다. “서게 하실”(παραστήσει, 파라스테세이)은 누군가를 다른 이 앞에 세운다는 뜻이며, 개역개정은 “그 앞에”를 보충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장면으로 옮겼다. 두 번 나오는 “함께”는 사도의 부활을 예수의 부활에, 사도의 미래를 그가 섬긴 성도들의 미래에 묶는다. 죽음에 넘겨지는 사역자를 죽음이 최종적으로 삼키지 못하는 근거가 이 약속이다.&lt;/p&gt;&lt;h3&gt;더 많은 사람에게 퍼지는 은혜와 감사 (15절)&lt;/h3&gt;&lt;p&gt;15절의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는 8절부터 말한 고난과 13-14절의 믿음과 말함이 모두 고린도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어지는 목적절에서 원문의 주어는 “은혜”(ἡ χάρις, 헤 카리스)다. 은혜는 “더 많은 사람들을 통하여”(διὰ τῶν πλειόνων, 디아 톤 플레이오논) 더해지고, 대격 “감사”(τὴν εὐχαριστίαν, 텐 유카리스티안)는 동사 περισσεύσῃ(페리세우세)의 목적어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15절의 목적절은 은혜가 더 많은 사람에게 퍼지면서 감사를 넘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는 뜻이다.&lt;sup&gt;4&lt;/sup&gt; 개역개정의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는 감사를 은혜가 넘치는 수단으로 옮겼다. 원문의 문장에서는 은혜가 사람들에게 미치고, 그 은혜가 감사를 낳는다. 1:11에서 바울은 사도들이 받는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감사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사가 감사의 근거다. 바울의 사역은 교회의 유익을 향하고, 그 유익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영광으로 이어진다.&lt;sup&gt;5&lt;/sup&gt;&lt;/p&gt;&lt;h3&gt;낡아지는 겉사람과 새로워지는 속사람 (16절)&lt;/h3&gt;&lt;p&gt;16절의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는 4:1의 “낙심하지 아니하고”와 같은 원어 표현(οὐκ ἐγκακοῦμεν, 우크 엥카쿠멘)을 되풀이한다. 8절의 “낙심하지 아니하며”와는 우리말이 같지만 원어가 다르다. 4:1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로 직분을 받았기에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16절에서는 14-15절의 부활 소망과 은혜의 목적을 근거로 같은 고백을 다시 한다. 바울은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말한다. 두 동사가 모두 현재형이므로, 쇠약함과 갱신은 지금 동시에 진행된다. 겉사람은 앞에서 말한 고난과 죽음에 노출된 몸의 삶을 포함하고, 속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새롭게 하시는 삶을 가리킨다. 이 구분을 몸은 버려지고 내면만 남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는 없다. 14절은 하나님이 사도들을 다시 살리신다고 말하며, 바울에게 부활은 죽을 몸의 미래를 포함한다.&lt;/p&gt;&lt;h3&gt;잠시의 환난과 영원한 영광 (17-18절)&lt;/h3&gt;&lt;p&gt;17절은 낙심하지 않는 이유를 더 설명한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은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과 짝을 이룬다. 잠시와 영원, 가벼움과 무게가 서로 대응한다. “지극히 크고”(καθ’ ὑπερβολὴν εἰς ὑπερβολὴν, 카트 휘페르볼렌 에이스 휘페르볼렌)는 7절에서 능력의 탁월함을 말한 명사를 두 번 겹쳐 비교할 수 없는 크기를 표현한다. 1:8에서 바울은 아시아에서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라고 말했는데, 원문에서 “심한”에 해당하는 말도 같은 καθ’ ὑπερβολὴν(카트 휘페르볼렌)이다. 그렇게 짓눌렸던 사람이 이제 자기 환난을 가볍고 잠시라고 부르는 것은, 그 환난을 장차 받을 영광의 무게와 기간에 견주기 때문이다.&lt;sup&gt;6&lt;/sup&gt; 앞에서 낱낱이 말한 고난의 현실은 이 비교 안에서도 지워지지 않는다. 바울은 환난이 영광을 “이루게”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환난은 예수를 위하여 사역하다 겪는 고난이고(11절), 그 영광을 주시는 분은 사도들을 다시 살리실 하나님이다(14절).&lt;/p&gt;&lt;p&gt;18절은 17절에 이어지는 분사구(μὴ σκοπούντων ἡμῶν, 메 스코푼톤 헤몬)로, 환난이 영광을 이루는 동안 사도들이 무엇을 주목하는지 밝힌다.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라는 독립된 문장으로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이 주목이 17절과 한 문장을 이룬다. 바울이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는 까닭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에는 사도의 쇠약한 몸과 8-9절의 환난이 포함되고, 보이지 않는 것은 14절의 부활과 성도들과 함께 서게 될 일, 17절의 영광이다. 사도는 그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의 환난 속에서도 복음을 말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고통 중에 믿고 말한 시편 116편의 시인&lt;/h3&gt;&lt;p&gt;13절이 인용한 시편 116편은 죽음의 위협에서 건짐받은 사람이 드리는 감사의 시다. 시인은 사망의 위협 가운데 여호와께 생명을 건져 달라고 기도했고(시 116:3-4), 하나님이 그를 사망과 눈물과 넘어짐에서 건지셨다고 고백한다(시 116:8).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는 이 구출의 고백 안에 있다. 개역개정 시편 116:10에서 시인은 크게 고통을 당했다고 말할 때에도 믿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믿음은 고통을 감추지 않고 고통 중에 하나님께 말한다. 시인이 죽음의 위협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했듯이, 사도들은 예수를 위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지면서 믿고 말한다(11, 13절).&lt;/p&gt;&lt;h3&gt;예수를 살리신 하나님께 두는 신뢰&lt;/h3&gt;&lt;p&gt;시인은 구출을 받은 뒤 살아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겠다고 말한다(시 116:9). 바울의 신뢰는 그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바울이 믿는 하나님은 이미 주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14절). 그래서 바울은 죽음의 위험에서 다시 건져지는 일만 기대하지 않고, 죽음에 이르더라도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자신을 다시 살리실 것을 안다. 1:9-10에서 바울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큰 사망에서 건지신 일을 고백했다. 14절은 그 하나님을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분으로 부르고, 소망을 부활과 하나님 앞에 서는 일까지 넓힌다. 시인은 죽음에서 건져 주실 하나님을 신뢰했고, 바울은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죽음 너머에서도 자신을 일으키실 것을 신뢰한다.&lt;/p&gt;&lt;h3&gt;은혜에 응답하는 공동체의 감사&lt;/h3&gt;&lt;p&gt;시편 116편의 감사는 공동체 앞에서 드려진다. 시인은 모든 백성 앞에서 서원을 갚고 감사제를 드리겠다고 말하며(시 116:14, 17-18), 성전 뜰과 예루살렘을 언급한다(시 116:19). 15절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한 사람의 구출에서 끝나지 않고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감사를 넘치게 한다. 14절은 사도와 고린도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 앞에 서는 미래를 말하고, 15절은 그 은혜를 받은 여러 사람이 지금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말한다.&lt;/p&gt;&lt;p&gt;감사가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는 관계는 같은 편지의 다른 대목에서도 나타난다. 1:10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큰 사망에서 사도들을 건지셨다고 고백하고, 앞으로도 건지시기를 바란다. 이어 1:11에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간구로 함께 돕기를 청하면서, 사도들이 받는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감사하게 하려는 목적을 밝힌다. 그 감사는 바울이 앞으로 기대하는 일이지만, 감사의 근거는 하나님이 사도들에게 베푸시는 은사다. 9:8-15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고, 그 은혜를 받은 고린도 성도들의 너그러운 연보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와 영광으로 이어진다. 연보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간구한다(9:14). 세 대목 모두에서 감사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에 근거하고,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드려진다. 시편 116편의 감사제가 구출을 경험한 사람의 응답이었듯, 고린도후서의 감사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lt;/p&gt;&lt;h3&gt;부활의 영광에 비추어 본 현재의 고난&lt;/h3&gt;&lt;p&gt;17절의 환난과 영광의 비교도 이 부활 신앙에서 나온다. 시인의 고통은 구출로 끝났지만, 바울은 겉사람이 계속 낡아 가는 현실을 인정한다(16절). 로마서 8:18에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을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하고, 8:23에서는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은 신자들도 탄식하며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17절과 로마서 8:18에서 바울은 고난을 부정하지 않고, 고난이 끝나지 않은 현재를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평가한다. 그 영광은 몸의 회복을 포함한다. 고린도전서 15:43에서 바울은 부활의 몸이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다. 17절의 영원한 영광도 14절의 부활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낡아 가는 몸을 지닌 채로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본다(18절).&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질그릇에 담긴 그리스도의 영광&lt;/h3&gt;&lt;p&gt;7절의 보배는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다. 4:4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르고, 4:6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한다. 사도의 몸은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지만, 그가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 연약함 때문에 줄어들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운 주님이시기에, 바울은 자기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돌린다.&lt;/p&gt;&lt;h3&gt;그리스도의 대속과 구별되는 사도의 고난&lt;/h3&gt;&lt;p&gt;10-11절은 “예수”라는 이름을 네 번 되풀이한다. 사도가 몸에 짊어지는 죽음도, 몸에 나타나는 생명도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께 속한다. 사도들은 예수를 위하여 복음을 섬기다가 죽음의 위험을 겪고, 부활하신 예수의 생명이 그 위험 속에서 그들을 붙든다. 그러나 사도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는 일이 다르다. 5:14-15에서 바울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고, 그 목적은 살아 있는 자들이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대신 죽음이고, 사도의 고난은 그 죽음으로 살게 된 사람이 그분을 위하여 사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다.&lt;/p&gt;&lt;p&gt;이 구별은 12절의 생명을 이해하는 데에도 필요하다. 고린도 성도들 안에 역사하는 생명은 예수의 생명이며,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통해 그들에게 이르렀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전파하고(4:5), 믿기에 말하며(13절),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11절). 그래서 교회는 사도의 희생에 매이지 않고, 사도를 통하여 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응답한다. 15절은 그 응답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 설명한다.&lt;/p&gt;&lt;h3&gt;예수와 함께 일으키시고 교회와 함께 세우심&lt;/h3&gt;&lt;p&gt;14절은 예수의 부활과 사도들의 미래를 묶는다. 하나님은 주 예수를 이미 다시 살리셨고, “예수와 함께” 사도들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미 살아나셨으므로 이 “함께”는 같은 때를 가리키지 않는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20-23에서 그리스도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부르고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그분이 오실 때 살아난다고 말하듯이, 사도들의 부활은 예수의 부활에 속하여 그 뒤를 따른다. 지금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사람이(10절) 장차 예수의 부활에 참여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세우신다. 부활의 미래에서도 사도는 자신이 섬긴 교회와 함께 하나님 앞에 선다. 사역의 목적이 교회의 생명이었듯이(12절), 그 사역의 마지막에도 교회가 사도와 함께 있다.&lt;/p&gt;&lt;h3&gt;그리스도께 속한 갱신과 영광&lt;/h3&gt;&lt;p&gt;16-17절의 갱신과 영광도 그리스도께 속한 미래에서 의미를 얻는다. 3:18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주의 영광을 보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고, 그 변화가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했다. 4:4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른다. 그러므로 겉사람이 낡아 가는 동안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일은, 주의 영께서 성도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는 일과 이어진다. 17절의 영원한 영광도 14절이 말하는 예수와 함께 일으킴받는 미래를 떠나 설명할 수 없다. 바울이 자기 환난을 가볍고 잠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살아나신 예수께서 그 미래의 근거가 되시기 때문이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복음 사역&lt;/h3&gt;&lt;p&gt;교회가 맡은 보배는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복음이다. 바울은 자신을 전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전파하며, 자신들은 예수를 위하여 교회의 종이라고 말한다(4:5). 오늘의 설교와 가르침에서도 먼저 들려야 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죽음과 부활이다. 복음을 맡은 사람에게 사람들의 주목이 쏠릴 때에도 그가 가리킬 분은 그리스도다.&lt;/p&gt;&lt;h3&gt;고난을 숨기지 않는 믿음의 고백&lt;/h3&gt;&lt;p&gt;8-9절은 눌림과 답답함, 박해와 넘어짐을 숨기지 않는다. 13절에서 바울이 인용한 시인도 크게 고통을 당했다고 말하면서 믿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나누는 믿음의 고백에는 고난을 이겨 낸 이야기뿐 아니라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는 말도 들어간다. 17절에서 환난을 가볍고 잠깐이라고 부르기 전에 바울은 자기 몸에 닥친 압박과 박해와 죽음의 위협을 자세히 말했다. 그 비교는 바울이 자기 환난을 두고 한 고백이다. 아직 일어난 일을 말하기도 어려운 사람에게 고난을 빨리 가볍게 여기라고 재촉하면 상처를 더할 수 있다.&lt;/p&gt;&lt;h3&gt;섬기는 사람의 소모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교회&lt;/h3&gt;&lt;p&gt;12절의 사망과 생명의 대비를 교회가 사역자의 소모를 당연하게 여기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교회가 받은 생명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이다. 바울은 1:11에서 성도들이 간구로 자신들을 돕기를 바라고, 15절에서는 은혜가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감사가 넘치기를 바란다. 교회는 복음을 섬기다 지친 사람을 위해 간구하고, 그를 붙드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lt;/p&gt;&lt;h3&gt;부활의 약속으로 보는 오늘의 쇠약과 손실&lt;/h3&gt;&lt;p&gt;바울의 고난은 예수를 위하여 복음을 섬기다 받은 고난이다(11절). 오늘 성도가 겪는 질병이나 노화, 상실을 모두 이 고난과 같은 것으로 부를 수는 없고, 모든 손상과 소모가 영광을 얻는 조건이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11절에서 “죽을 육체”라고 부른 몸의 조건은 모든 신자에게 해당하고, 14절의 부활 약속은 “너희와 함께”라는 말로 고린도 성도들을 포함한다. 몸이 약해져 이전처럼 활동하지 못하는 성도도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일으키실 사람이다. 16절에서 속사람의 갱신은 바울이 몸의 쇠약함을 인정하는 중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려고 먼저 활기 있는 모습을 회복할 필요는 없다.&lt;/p&gt;&lt;p&gt;18절에서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말한다. 어려운 일을 겪는 사람은 지금 눈에 보이는 손실이 자기 삶 전체를 결정한다고 느끼기 쉽다. 교회는 그 사람에게 고통을 부정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그를 예수와 함께 일으키시고 교회와 함께 세우실 약속을 함께 붙든다. 그 약속을 붙드는 사람은 지금의 손실을 자기 삶에 대한 마지막 판단으로 여기지 않는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Matthew Y. Emerson and Christopher W. Morgan, “The Glory of God in 2 Corinthians,” &lt;em&gt;Southern Baptist Journal of Theology&lt;/em&gt; 19, no. 3 (2015): 34,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Emerson-and-Morgan-from-ST-516-2015-SBJT-19.3.pdf"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Emerson-and-Morgan-from-ST-516-2015-SBJT-19.3.pdf&lt;/a&gt;.&lt;/li&gt;&lt;li&gt;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4:9,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4:9,”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9/&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에 따르면 대부분의 번역은 이 말을 소문자 spirit으로 옮겨 성령이 아니라 사람의 태도나 성향으로 이해한다. 핸드북은 Barrett과 Anchor Bible의 번역 “the same Spirit of faith”를 들어, 바울이 믿음을 일으키시는 성령을 가리킬 가능성도 제시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4:13,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4:13,”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1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13/&lt;/a&gt;.&lt;/li&gt;&lt;li&gt;바울은 9:8에서도 같은 동사를 목적어와 함께 써서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고린도 성도들에게 넘치게 하신다고 말한다. UBS 핸드북도 감사를 ‘더하다’에 해당하는 동사 표현의 목적어로 보고, RSV에서 이 동사의 주어는 하나님의 은혜가 넓어지는 일을 가리킨다고 설명하며, Anchor Bible의 번역 “grace … may cause thanksgiving to overflow to the glory of God”를 소개한다. 핸드북은 “더 많은 사람들을 통하여”도 기존 교인들 사이에서 은혜가 깊어지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은혜가 퍼지는 것으로 읽는 편이 문맥에 더 맞는다고 본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4:15,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4:15,”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1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415/&lt;/a&gt;.&lt;/li&gt;&lt;li&gt;Emerson and Morgan, “Glory of God in 2 Corinthians,” 35.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Emerson-and-Morgan-from-ST-516-2015-SBJT-19.3.pdf#page=15"&gt;원문&lt;/a&gt;&lt;/li&gt;&lt;li&gt;Emerson and Morgan, “Glory of God in 2 Corinthians,” 34-35.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Emerson-and-Morgan-from-ST-516-2015-SBJT-19.3.pdf#page=14"&gt;원문&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5:1-10 죽을 몸을 삼키는 생명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5.1-10/</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5.1-10/</guid><description>고린도후서 5:1-10의 장막과 하늘의 집, 성령의 보증과 부활 소망,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사는 책임을 해설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무너질 장막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집 (1절)&lt;/h3&gt;&lt;p&gt;바울은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를 죽음 너머의 소망으로 설명한다. 바로 앞의 4:14에서 그는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자신들도 예수와 함께 다시 살리시고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것이라고 했고, 4:16에서는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했다. 1절은 이 확신을 장막과 집의 비유로 다시 설명한다. 사도의 고난은 실제로 몸을 쇠하게 하고 죽음을 가까이 가져온다. 그 현실 속에서 바울이 “아느니라”라고 말하는 내용은 지금 보이는 쇠약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되지 못한다는 부활의 확신이다.&lt;/p&gt;&lt;p&gt;1절의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지금 몸으로 사는 삶을 가리킨다.&lt;sup&gt;1&lt;/sup&gt; 장막은 사람이 머물 수 있지만 오래 견디도록 지은 건물이 아니어서, 이 비유는 현재 삶의 연약함과 임시성을 드러낸다. 이와 달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집은 손으로 짓지 않았고 영원하며 하늘에 있다. 장막을 현재의 몸으로 읽는 근거는 앞뒤 문맥이 거듭 말하는 몸의 쇠약과 부활이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장막 만드는 일을 했다는 사도행전 18:3의 기록은 이 이미지가 그에게 익숙했음을 짐작하게 하지만, 비유의 뜻을 정하지는 않는다.&lt;/p&gt;&lt;p&gt;“무너지면”은 장막이 해체되는 모습으로 몸의 죽음을 말한다. 그런데 바울은 장막이 무너질 때 받을 집을 현재형으로 “우리에게 있는”(ἔχομεν, 에코멘)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2절에서는 그 처소를 아직 사모한다고 하면서도 여기서 이미 가진 것처럼 말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 집을 보장하셨기 때문이다. 미래의 일을 확신하기에 현재형으로 표현한 것이다.&lt;sup&gt;2&lt;/sup&gt; 손으로 짓지 않은 이 집은 사람이 마련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lt;/p&gt;&lt;h3&gt;덧입음과 벌거벗음 (2-3절)&lt;/h3&gt;&lt;p&gt;2절은 집의 비유에 옷의 비유를 겹친다. 바울은 “여기”, 곧 1절의 장막 안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사모하며 탄식한다. 그의 탄식은 절망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이 주실 것을 향한 갈망이다. “덧입기를”(ἐπενδύσασθαι, 에펜뒤사스타이)은 입은 옷 위에 다른 옷을 입는다는 말이다. 바울이 이 집을 옷처럼 입는다고 말하므로, 그가 바라는 것은 장차 옮겨 갈 막연한 하늘의 건물보다 하나님이 주실 새로운 몸의 생명이다.&lt;/p&gt;&lt;p&gt;3절은 사본에 따라 동사가 다르다. 개역개정의 “이렇게 입음은”은 ‘입다’라는 뜻의 ἐνδυσάμενοι(엔뒤사메노이)를 반영하고, NA28은 ‘벗다’라는 뜻의 ἐκδυσάμενοι(에크뒤사메노이)를 본문으로 택한다. 두 낱말은 한 글자만 다르지만, 같은 원문을 다르게 옮긴 결과가 아니고 사본들이 서로 다른 동사를 전하기 때문에 생긴 차이이다. 사본의 지지만 보면 ‘입다’가 훨씬 우세하다.&lt;sup&gt;3&lt;/sup&gt; 반면 UBS 그리스어 신약의 편집자들은 ‘벗다’를 택하면서도 이 선택이 매우 불확실하다고 밝혔다.&lt;sup&gt;4&lt;/sup&gt;&lt;/p&gt;&lt;p&gt;개역개정의 “벗은 자들로”는 앞의 분사가 아니라 뒤의 γυμνοὶ(귐노이)를 옮긴 말로, 옷을 입지 않은 벌거벗은 상태를 뜻한다. 1-4절에서 이 상태는 하늘의 처소를 덧입는 일과 반대되며, 4절에서 바울이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벗음과 이어진다. 따라서 벌거벗음은 하나님이 주실 처소를 입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본문은 이 상태를 더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3절만으로 벌거벗음을 10절의 심판 때 드러날 수치로 보거나 죽은 뒤 영혼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다.&lt;/p&gt;&lt;p&gt;3절은 “만일 참으로”라는 뜻의 εἴ γε καὶ(에이 게 카이)로 시작하는 조건문이다. NA28을 따르면 “참으로 우리가 벗은 뒤에도 벌거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는다면”이라는 뜻이 되어, 죽음으로 장막을 벗더라도 벌거벗은 자로 남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2절의 사모함에 덧붙인다. ‘입다’로 읽으면 3절은 하늘의 처소를 입으면 벌거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는다는 2절의 내용을 다시 확인한다. 개역개정은 이 조건문을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는 목적문으로 옮겨, 덧입음이 벌거벗음을 막는다는 뜻을 앞세운다. 이 번역은 2-4절의 흐름과 어긋나지 않지만 원문의 조건 형태를 드러내지 않는다. 3절은 읽기에 따라 뜻이 이처럼 달라지므로, 죽음 이후에 관한 바울의 소망은 3절보다 뜻이 분명한 4절과 8절에서 확인하는 것이 적절하다.&lt;/p&gt;&lt;h3&gt;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기를 바람 (4절)&lt;/h3&gt;&lt;p&gt;4절의 “이 장막에 있는 우리”는 1절의 장막을 다시 가리킨다. 개역개정은 “짐진 것 같이”라고 옮겼지만, 원문의 βαρούμενοι(바루메노이)에는 ‘같이’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바울은 실제로 짐에 눌려 탄식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벗기(ἐκδύσασθαι, 에크뒤사스타이)를 원하지 않고 덧입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고통스러운 몸에서 벗어나는 일 자체는 그의 소망이 아니다. 바울은 고통을 겪는 몸을 악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이 몸이 죽음의 지배에서 풀려 온전히 생명으로 살기를 바란다.&lt;/p&gt;&lt;p&gt;4절 끝에서 바울은 덧입음의 목적을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는 일로 밝힌다. 삼키는 쪽은 생명이고 삼켜지는 쪽은 죽을 것이다. 이 표현은 생명이 죽을 것을 압도하여 죽음이 더는 지배하지 못하는 완성을 말한다. 삼켜지는 것이 지금의 죽을 몸이므로, 바울이 바라는 미래는 몸을 떠난 무형의 상태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미래는 하나님께서 죽을 것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구원에서 완성된다.&lt;/p&gt;&lt;h3&gt;우리를 준비하시고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하나님 (5절)&lt;/h3&gt;&lt;p&gt;5절은 이 미래를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밝힌다. 개역개정의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는 ‘이것’을 이루어지는 대상처럼 읽게 한다. 원문에서 “이루게 하시고”(κατεργασάμενος, 카테르가사메노스)의 목적어는 “우리”(ἡμᾶς, 헤마스)이고, εἰς αὐτὸ τοῦτο(에이스 아우토 투토)는 “바로 이 일을 위하여”라는 목적을 나타낸다. ‘바로 이 일’은 4절에서 말한 변화, 곧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는 일이다.&lt;sup&gt;5&lt;/sup&gt;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하여 우리를 준비하셨다. 개역개정도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신다는 뜻은 전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 완성에 맞게 준비하신다는 원문의 초점은 잘 드러내지 않는다. 탄식하는 사도는 자기 안의 가능성을 키워 미래를 이루려 하지 않고, 생명을 주실 하나님께 의지한다.&lt;/p&gt;&lt;p&gt;같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 ‘보증’(ἀρραβῶνα, 아라보나)은 거래가 끝까지 이루어질 것을 보장하는 첫 지불을 가리킨다.&lt;sup&gt;6&lt;/sup&gt; 바울은 이미 1:22에서 하나님이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다고 말했고, 여기서는 그 선물을 죽음과 부활의 문맥에서 다시 말한다. 지금 받은 성령 자신이 장차 받을 생명의 첫 몫이므로, 성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완성을 확신할 수 있다.&lt;/p&gt;&lt;h3&gt;믿음으로 걷는 담대함 (6-8절)&lt;/h3&gt;&lt;p&gt;6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로 시작한다. ‘그러므로’가 보여 주듯, 이 담대함은 5절에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바울은 이 문장을 잠시 멈추고 7절의 설명을 넣은 뒤,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로 다시 잇는다. “몸으로 있을 때에는”(ἐνδημοῦντες, 엔데문테스)과 “주와 따로 있는”(ἐκδημοῦμεν, 에크데무멘)은 집에 머무는 것과 집을 떠나 있는 것을 뜻하는 짝말이다. 몸에 머무는 동안 성도는 아직 주님 곁에서 그분을 뵙는 완성에 이르지 못했다. 그래도 바울은 담대하다. 7절에서 말하듯 지금도 주님을 믿으며 걷기 때문이다.&lt;/p&gt;&lt;p&gt;7절의 “행하고”는 걷는다는 말로 삶의 걸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믿음’과 ‘보는 것’은 믿고 보는 행위보다 믿는 대상과 눈에 보이는 대상을 가리키며, 4:18에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한 대조와 이어진다.&lt;sup&gt;7&lt;/sup&gt; 바울은 눈앞의 현실을 보지 말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몸의 쇠약으로 자기 미래를 판단하지 않고,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걷는다.&lt;/p&gt;&lt;p&gt;8절에서 바울은 다시 담대함을 말하고,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한다. 6절의 두 동사가 자리를 바꾸어, 이제는 몸을 떠나는 일과 주님 곁에 머무는 일이 짝을 이룬다. 바울은 몸의 죽음이 주님께 속한 사람을 그분에게서 떼어 놓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그렇다고 8절의 소망이 1-5절의 부활 소망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1-5절이 기다리는 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는 몸의 완성이다. 이 단락은 죽음 뒤 주님 곁에 머무는 일과 마지막 부활 사이의 시간 순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lt;/p&gt;&lt;h3&gt;주를 기쁘시게 하려는 포부와 그리스도의 심판대 (9-10절)&lt;/h3&gt;&lt;p&gt;9절에서 바울은 “그런즉”으로 앞의 담대함과 소망에서 현재의 목표를 이끌어 낸다. “힘쓰노라”(φιλοτιμούμεθα, 필로티무메타)는 어떤 일을 이루려고 힘써 추구한다는 뜻으로, 바울이 품은 포부를 나타낸다. 그 포부는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는 6절과 8절의 두 동사를 다시 쓴 표현이다. 죽음은 몸에 머무는 때와 몸을 떠난 때를 나누지만, 어느 때든 바울의 목표는 같다. 주님 곁에 머물기를 바라는 사람은 지금 그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산다.&lt;/p&gt;&lt;p&gt;10절에서 바울은 “이는”으로 그 포부의 이유를 밝히며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말한다. “심판대”(βήματος, 베마토스)는 관리가 판결을 내리거나 공적으로 말하던 높은 단으로, 그리스·로마 도시의 공공 광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lt;sup&gt;8&lt;/sup&gt; 사도행전 18:12-17에서 바울 자신도 고린도에서 아가야 총독 갈리오의 재판 자리 앞에 끌려갔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익숙한 이 재판의 단으로 그리스도 앞에서 최종 책임을 질 자리를 설명한다. 그 자리에서 판단하시는 분은 로마의 관리가 아니고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바울의 포부는 사람들의 평판보다 장차 그 앞에 설 주님의 판단을 향한다.&lt;/p&gt;&lt;p&gt;개역개정의 “나타나게 되어”는 그 앞에 나선다는 뜻으로도 읽히지만, 원문의 φανερωθῆναι δεῖ(파네로테나이 데이)는 반드시 드러나 밝혀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앞에서는 각 사람의 삶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우리가 다”는 사도 자신도 포함하고, “각각”은 각 사람의 책임을 밝힌다. 각 사람은 선하든 악하든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 몸으로 사는 현재가 이처럼 무겁기에, 장막이 무너질 날을 기다리는 사람도 그날까지 그 몸으로 주님을 섬긴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흙으로 지은 몸과 죽음의 지배&lt;/h3&gt;&lt;p&gt;1-10절에서 바울이 기다리는 것은 죽음에 지배되는 몸을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바꾸시는 일이다. 이 소망은 하나님이 몸을 지으신 창조를 전제한다.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몸으로 사는 인간의 생명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은 창세기 3:19에서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선고를 듣는다. 고린도후서 4:16의 낡아지는 겉사람과 1절의 무너지는 장막은 이 죽을 운명 아래 있는 몸이다. 바울이 장막에서 탄식하는 이유는 몸이 악해서가 아니고 죽음이 몸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몸을 벗기보다 덧입기를 원하며,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이 죽음에서 풀려 온전히 살게 되기를 기다린다.&lt;/p&gt;&lt;h3&gt;죽음을 삼키는 생명과 부활의 변화&lt;/h3&gt;&lt;p&gt;죽음을 없애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사야 25:6-9에서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시고,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며,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신다. 히브리어 본문은 사망을 멸하시는 일을 죽음을 삼키시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4에서 이 말씀을 직접 인용하여,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 그 말씀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본문의 4절은 이사야를 인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같은 교회에 먼저 보낸 편지에서 입음과 삼킴을 몸의 부활에 사용했고, 4절에서도 덧입음과 “생명에 삼킨 바 되게”라는 표현으로 죽음이 패배하는 완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4절의 소망도 이사야의 약속이 부활 때 이루어지리라는 고린도전서 15장의 소망과 이어진다.&lt;/p&gt;&lt;p&gt;고린도전서 15장은 그 완성을 변화로 설명한다. 고린도전서 15:42-44에서 썩을 것으로 심은 몸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 약한 것으로 심은 몸은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 부활은 지금의 연약함을 연장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살리시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고린도전서 15:53은 ‘이’ 썩을 것과 ‘이’ 죽을 것이 썩지 아니함과 죽지 아니함을 입는다고 말한다. 생명을 입는 사람은 지금 몸으로 탄식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본문의 장막과 영원한 집, 벗음과 덧입음도 이 변화와 연속성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장막에 살던 사람을 버리고 다른 존재를 만드시지 않고, 그 사람의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게 하신다.&lt;/p&gt;&lt;h3&gt;탄식하는 성도에게 주신 성령&lt;/h3&gt;&lt;p&gt;로마서 8:18-25는 이 변화를 기다리는 현재를 설명한다.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고,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도 속으로 탄식하며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 본문 2-5절에서도 장막 안의 탄식 뒤에 성령의 보증이 나온다. 로마서는 성령을 처음 익은 열매로, 고린도후서는 보증으로 부르지만, 두 표현 모두 지금 받은 성령이 장차 받을 몫의 시작이라는 뜻을 담는다. 성령은 고통이 끝난 사람에게 주시는 상급이 아니고, 아직 탄식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미리 주신 미래의 첫 몫이다. 그래서 바울은 탄식하면서도 담대할 수 있다. 두 본문에서 성도가 기다리는 구원은 마음의 위로에 머물지 않고 몸의 속량에 이른다.&lt;/p&gt;&lt;h3&gt;주와 함께 있을 소망과 심판대 앞의 책임&lt;/h3&gt;&lt;p&gt;8절의 소망은 바울의 다른 편지에도 나온다. 빌립보서 1:21-24에서 바울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말하면서도, 성도들을 위하여 육신으로 머무는 일이 더 유익하다고 판단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17은 주님이 강림하실 때 성도들이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한다. 빌립보서는 죽음 뒤를, 데살로니가전서는 주님의 강림을 바라보지만, 두 본문 모두 소망의 내용을 주님과 함께 있는 것으로 말한다. 본문의 8절도 같은 소망을 말하며, 두 시점 사이의 순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려는 소망이 바울의 남은 삶을 성도를 섬기는 일로 이끌었듯이, 9절에서도 그 소망은 지금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표로 이어진다.&lt;/p&gt;&lt;p&gt;살든지 죽든지 주님께 속한다는 고백은 심판대 앞의 책임으로 이어진다. 로마서 14:7-12에서 바울은 성도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으며, 그리스도께서 죽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시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말라고 한다. 모든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서서 각자 자기 일을 하나님께 아뢸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9-10절도 몸에 있든 떠나든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표를 그리스도의 심판대와 연결한다. 그 심판대 앞에는 바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서므로, 그것은 남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지 못하고 각자 몸으로 행한 일을 돌아보게 한다. 고린도전서 15:58도 부활의 가르침을 주의 일에 힘쓰라는 권면으로 마무리한다. 부활의 소망은 몸으로 사는 오늘의 책임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도의 몸의 변화&lt;/h3&gt;&lt;p&gt;1-10절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리신 사건에 근거한다. 바로 앞의 고린도후서 4:14에서 바울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실 줄을 안다고 말했다. 장막이 무너져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집이 있다는 1절의 확신은 예수에게 일어난 부활이 그분께 속한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리라는 소망이다. 고린도전서 15:20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부른다. 첫 열매가 이미 거두어졌으므로 뒤따를 수확도 확실하다. 그러나 성도는 아직 죽음의 위협과 몸의 쇠약을 겪는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미 일어났지만 성도의 부활은 아직 기다려야 한다. 1절의 확신은 이 기다림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댄다.&lt;/p&gt;&lt;p&gt;5절에서 4절의 변화를 위하여 우리를 준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빌립보서 3:20-21에서 그 변화를 이루실 분을 그리스도로 말한다. 성도는 하늘로부터 오실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그분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시는 능력으로 성도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과 같은 형체로 변하게 하실 것이다. 이 본문에서도 하늘의 소망은 몸의 변화로 이어진다. 빌립보서에 비추어 보면, 2절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사모하는 바울이 기다리는 생명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같은 생명이다. 그 생명을 입히는 능력은 탄식하는 성도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 있다.&lt;/p&gt;&lt;h3&gt;곁에 머물기를 바라는 주님과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lt;/h3&gt;&lt;p&gt;6-8절의 주님은 10절에서 심판대의 주인으로 나오는 그리스도이시다. 9절에서 바울이 기쁘시게 하려는 주님도 같은 분이다. 6절에서 바울은 몸에 머무는 동안 주와 따로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5절의 성령과 7절의 믿음은 성도가 지금도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성도에게 아직 없는 것은 주님을 눈앞에서 뵙고 그분 곁에 머무는 완성이다. 8절에서 바울이 원하는 것도 고통의 끝보다 그리스도 곁에 머무는 일이다. 바울이 기다리는 구원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가 있다.&lt;/p&gt;&lt;p&gt;9절의 “그런즉”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표가 앞의 확신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이미 성도를 생명의 완성을 위하여 준비하시고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5절). 바울은 그 생명을 얻어 내려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서 그분 곁에 머물 날을 바라보며, 몸에 있든 떠나든 그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추구한다.&lt;/p&gt;&lt;h3&gt;그리스도의 심판대와 은혜 안의 책임&lt;/h3&gt;&lt;p&gt;10절은 바울이 기쁘시게 하려는 주님을 심판하시는 그리스도로 소개한다. 로마서 14:10이 하나님의 심판대라고 부르는 자리를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부른다. 두 표현을 견주어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최종 판단을 그리스도께서 행하신다고 이해한다. 성도가 그 앞에서 만나는 분은 낯선 재판관이 아니고, 그가 곁에 머물기를 바라는 주님이시다. 그렇다고 심판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다” 그 앞에 드러나고, 각 사람은 선하든 악하든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 5절에서 생명을 위하여 성도를 준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10절의 책임을 없애지 않으며, 10절의 책임도 5절의 은혜를 지우지 않는다. 무엇을 받는지 본문은 자세히 말하지 않지만, 몸으로 행한 일이 그리스도 앞에서 의미를 잃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탄식하면서 부활을 기다림&lt;/h3&gt;&lt;p&gt;바울은 성령을 보증으로 받은 사람이면서도 장막 안에서 짐에 눌려 탄식한다. 그러므로 몸이 약해질 때 터져 나오는 탄식을 신앙의 실패로 여겨 숨길 필요가 없다. 만성 질환이나 노화로 몸이 쇠하는 사람은 그 어려움을 하나님께 솔직히 아뢰면서 부활을 기다릴 수 있다. 같은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에게 부활을 믿으니 울지 말라고 요구할 수 없다. 본문의 소망은 탄식을 그치게 하는 명령으로 주어지지 않고, 탄식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기다릴지 알려 준다. 교회는 두려움이나 슬픔을 고백하는 사람의 믿음을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그 곁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살리실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lt;/p&gt;&lt;h3&gt;생명을 입을 몸을 귀히 여김&lt;/h3&gt;&lt;p&gt;현재의 몸을 장막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몸을 하찮게 여길 수는 없다. 바울은 몸을 벗기를 원하지 않고 생명을 덧입기를 원했으며, 10절에서는 몸으로 행한 일이 그리스도 앞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몸은 언젠가 버릴 껍데기이기보다 지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집을 기다린다는 이유로 자기 몸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몸이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믿음의 이름으로 요구할 수 없다. 죽을 것을 생명에 삼키게 하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몸과 이웃의 몸을 하나님이 생명을 입히실 몸으로 대한다.&lt;/p&gt;&lt;h3&gt;눈앞의 평가보다 그리스도 앞의 판단&lt;/h3&gt;&lt;p&gt;몸의 쇠약, 사역의 성과, 사람들의 평가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고, 믿음으로 걷는 사람도 그것을 본다. 다만 바울은 그것으로 자기 미래와 가치를 판단하지 않았다. 그는 장차 그리스도 앞에서 드러날 판단을 바라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힘썼다. 그 앞에서는 숨긴 잘못뿐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선한 수고도 드러난다. 그래서 성도는 인정받으려고 자기 일을 부풀리거나 남의 수고를 가로챌 필요 없이 맡은 일을 진실하게 감당할 수 있다. 또 “우리가 다” 그 앞에 서므로, 이 심판대는 지도자가 회중을 두렵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도 먼저 자신이 몸으로 행한 일을 주님께 답해야 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2 Corinthians 5,” NET Bible, Biblia, 5:1, note 1,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biblia.com/bible/gs-netbible/2-corinthians/5?ssi=0" rel="noopener"&gt;https://biblia.com/bible/gs-netbible/2-corinthians/5?ssi=0&lt;/a&gt;.&lt;/li&gt;&lt;li&gt;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5:1,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1,”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lt;/a&gt;.&lt;/li&gt;&lt;li&gt;NET 본문비평 주에 따르면 ‘입다’는 알렉산드리아 계열과 비잔틴 계열 사본, 여러 고대 역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지지하고, ‘벗다’는 서방 계열 사본에만 나타난다. 이 주는 ‘입다’로 읽으면 3절이 당연한 말처럼 보여 필사자가 동사를 고쳤을 수 있다고 보고, ‘벗다’를 겉보기의 동어반복을 피하려는 이른 수정으로 본 B. M. Metzger와 A. Plummer의 판단을 소개한다. 또 덧입기를 원한다는 생각이 2절과 4절에도 나온다는 점을 들어 ‘입다’를 원래 읽기로 판단한다. “2 Corinthians 5,” NET Bible, 5:3, note 5, &lt;a href="https://biblia.com/bible/gs-netbible/2-corinthians/5?ssi=0" rel="noopener"&gt;https://biblia.com/bible/gs-netbible/2-corinthians/5?ssi=0&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5:3,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3,”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3/&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5:5,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5,”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5/&lt;/a&gt;.&lt;/li&gt;&lt;li&gt;“2 Corinthians 1,” NET Bible, Biblia, 1:22, note 41,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biblia.com/bible/gs-netbible/2-corinthians/1?ssi=0" rel="noopener"&gt;https://biblia.com/bible/gs-netbible/2-corinthians/1?ssi=0&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5:7,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7,”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7/&lt;/a&gt;.&lt;/li&gt;&lt;li&gt;“2 Corinthians 5,” NET Bible, 5:10, note 16, &lt;a href="https://biblia.com/bible/gs-netbible/2-corinthians/5?ssi=0" rel="noopener"&gt;https://biblia.com/bible/gs-netbible/2-corinthians/5?ssi=0&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5:11-21 새로운 피조물과 화목하게 하는 말씀</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5.11-21/</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5.11-21/</guid><description>고린도후서 5:11-21의 그리스도의 사랑, 새로운 피조물과 새 창조,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화목과 맡기신 직분을 살핍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주를 두려워하여 사람을 설득함 (11절)&lt;/h3&gt;&lt;p&gt;11절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한다는 5:10에서 결론을 끌어낸다. 바울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이유는 주를 두려워하는 경외에 있다. “주의 두려우심”을 안다는 말은 그분 앞에서 자기 삶이 드러나 판단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그 책임을 의식한다는 뜻이다. “권면하거니와”로 옮긴 동사(πείθομεν, 페이도멘)는 상대가 납득하도록 말로 설득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무엇을 설득하는지는 이 문장에 나오지 않으며, 이어지는 사역 변호와 20절의 호소가 그 내용을 보여 준다.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πεφανερώμεθα, 페파네로메타)는 5:10에서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로 옮긴 동사의 완료형으로, 이미 드러나 지금도 드러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장차 모든 사람이 드러날 심판대를 말한 직후, 바울은 자신이 이미 하나님께 드러나 있다고 고백하고 같은 동사로 고린도 성도들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란다고 덧붙인다. 심판을 말하는 사도가 먼저 그 판단 아래 서 있으며, 감출 것이 없는 사람으로 교회 앞에 선다.&lt;/p&gt;&lt;h3&gt;외모의 자랑과 하나님 앞에 드러난 삶 (12-13절)&lt;/h3&gt;&lt;p&gt;12절에서 바울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한다. 이 말은 3:1의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를 떠올리게 한다. 4:2에서도 바울은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스스로 추천한다고 말했다. 11절의 양심과 12절의 자천은 앞선 장들의 논쟁에서 이어진 주제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사도들을 자랑할 근거를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한다. “외모로”는 얼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가리킨다. 고린도에서는 누구를 믿을 만한 일꾼으로 인정할지가 쟁점이었다. 바울은 눈에 띄는 자랑거리로 답하지 않고, 하나님과 성도들을 위하여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밝혀 교회가 사역의 진실함을 알아보게 한다.&lt;/p&gt;&lt;p&gt;13절의 “미쳤어도”와 “정신이 온전하여도”는 서로 반대되는 두 평가다. 앞부분은 바울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반대자들의 비난을 받아 말한 것으로 보이며, “만일”은 바울이 자기 정신 상태를 스스로 의심한다는 뜻이 아니다.&lt;sup&gt;1&lt;/sup&gt; 본문은 그런 평가를 낳은 사건을 설명하지 않는다. 바울은 자신에게 붙은 평판을 하나하나 해명하지 않고, 어떤 모습이든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고 답한다. 그의 삶을 판단할 기준은 사람들의 인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관계에 있다.&lt;/p&gt;&lt;h3&gt;그리스도의 사랑과 한 사람의 죽음 (14절)&lt;/h3&gt;&lt;p&gt;14절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사랑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문법상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바울은 곧바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은 사건을 말한다.&lt;sup&gt;2&lt;/sup&gt; “강권하시는도다”(συνέχει, 쉬네케이)는 붙들어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사도의 삶을 붙들어 이끈다는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건대”는 사도들이 이미 내린 판단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분의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은 사람을 붙든다.&lt;/p&gt;&lt;p&gt;그 판단의 내용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ὑπὲρ πάντων, 휘페르 판톤)의 전치사는 ‘누구를 위하여’와 ‘누구를 대신하여’를 모두 나타낼 수 있고, 어느 쪽으로 옮길지는 해석자들 사이에 논의된다.&lt;sup&gt;3&lt;/sup&gt; 이 전치사 하나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닌 성격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바울의 추론이 방향을 보여 준다. 원문은 결론의 접속사(ἄρα, 아라)로 한 사람의 죽음에서 모든 사람의 죽음을 끌어내며, 개역개정은 이를 “죽었은즉”으로 옮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들에게 유익을 주는 데 그친다면 이런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한 분이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죽으셨기에 그분의 죽음이 그들의 죽음으로 여겨진다. 21절은 같은 전치사로 죄를 알지 못하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아지셨다고 말하므로, 이 죽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이 받아야 할 자리를 받으셨다는 의미도 담긴다. 개역개정의 “대신하여”는 이 의미를 살린다. “모든 사람”에는 편지를 받는 고린도 성도들도 포함된다.&lt;sup&gt;4&lt;/sup&gt;&lt;/p&gt;&lt;h3&gt;모든 사람의 죽음과 그리스도를 위한 새 삶 (14-15절)&lt;/h3&gt;&lt;p&gt;15절은 같은 죽음을 다시 말하며 그 목적을 밝힌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다. 원문은 목적의 접속사(ἵνα, 히나)로 이 삶을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루려는 목적으로 제시하며, 개역개정은 이를 “살게 하려 함이라”로 옮긴다.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 삶은 14절의 죽음으로 이미 완료된 상태가 아니라 그 죽음이 겨냥하는 삶이다. 바울도 5:9에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쓴다고 말하며, 그 삶을 계속 추구할 일로 다룬다. 14절에서 모든 사람이 어떤 의미로 죽었는지는 해석자들 사이에서 정리되지 않은 문제다.&lt;sup&gt;5&lt;/sup&gt; 한 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이 이미 죄 가운데 죽어 있었음을 드러낸다고 보는 해석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대표이신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었다는 해석이 더 낫다.&lt;sup&gt;6&lt;/sup&gt; 15절의 “살아 있는 자들”은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선언 뒤에 나오므로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새 삶을 얻은 이들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고, 바울은 갈라디아서 2:19-20에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일을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삶의 시작으로 말한다. 14절의 죽음은 육체적 사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분이 그들을 대표하여 죽으셨으므로, 살아 있는 자들의 삶은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분께 속한다. 15절이 말하는 목적은 이 새 소속에 근거를 두며, 16-17절은 여기서 새로운 앎과 새 창조라는 결과를 끌어낸다.&lt;/p&gt;&lt;h3&gt;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 새로운 앎 (16절)&lt;/h3&gt;&lt;p&gt;16절의 “그러므로”는 14-15절에서 결과를 끌어낸다. “이제부터는”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깨달은 때를 전환점으로 삼으며, 그때부터 바울은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다. “육신을 따라”(κατὰ σάρκα, 카타 사르카)는 아는 대상이 아니라 아는 방식을 수식하며, 인간의 외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방식을 가리킨다.&lt;sup&gt;7&lt;/sup&gt; 이 구별이 뒤 문장의 뜻을 정한다.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는 바울이 지상의 예수를 직접 만났다는 증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깨닫기 전에는 그분을 외적 기준으로 평가했으나 이제는 그렇게 알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평가가 바뀌자 사람에 대한 평가도 바뀐다. 12절에서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의 기준이 문제였으므로, 바울은 이 원리로 고린도 교회가 사도를 평가하는 방식도 바로잡으려 한다.&lt;/p&gt;&lt;h3&gt;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 (17절)&lt;/h3&gt;&lt;p&gt;17절의 “그런즉”도 같은 결과를 잇는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뒤에 오는 “새로운 피조물”(καινὴ κτίσις, 카이네 크티시스)은 주어와 동사가 없는 짧은 명사구다. 개역개정처럼 ‘그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다’로 읽으면 개인의 변화가 앞서고, ‘새 창조가 있다’로 읽으면 하나님이 시작하신 새 창조에 그 사람이 속한다는 데 무게가 실린다. 바울 서신에서 이 명사는 개별 피조물보다 대개 ‘창조’를 뜻한다.&lt;sup&gt;8&lt;/sup&gt; 이어지는 “이전 것”과 “새 것”도 복수형이어서 한 사람의 내면보다 넓은 범위를 담을 수 있고, 18절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변화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신 새 창조의 일부로 말한다고 보는 것이 문맥에 맞는다. 개역개정의 “새로운 피조물”은 그 사람이 새로 지음 받았다는 뜻을 바르게 옮기며, 그 변화가 속한 더 큰 현실은 뒤따르는 문장들이 밝혀 준다.&lt;/p&gt;&lt;p&gt;“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그 새 창조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선언한다. “되었도다”(γέγονεν, 게고넨)는 이미 일어나 지금도 이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지나간 것과 새로 된 것이 무엇인지는 앞뒤 문맥이 보여 준다. 자신을 위하여 살던 삶(15절), 육신을 따라 사람을 알던 방식(16절), 하나님과 맞서던 관계(18-19절)가 지나가고, 그리스도를 위한 삶과 새로운 앎과 하나님과의 화목이 왔다. 이 새로움은 모든 기억과 성향이 한순간에 사라진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5:1-5에서 바울은 아직 장막 같은 몸에서 탄식하며, 성령을 보증으로 받은 채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질 날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이미 받은 것은 새 소속과 삶의 방향이며, 그 새로움의 완성은 아직 기다린다.&lt;/p&gt;&lt;h3&gt;하나님이 이루신 화목과 맡기신 직분 (18-19절)&lt;/h3&gt;&lt;p&gt;18절은 이 모든 새로움이 하나님께로서 났다고 밝히고, 그 하나님이 하신 두 일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고,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 “화목”(καταλλαγῆς, 카탈라게스)은 원수였던 이들이 다시 우호 관계를 회복하는 일을 가리킨다.&lt;sup&gt;9&lt;/sup&gt; 관계를 회복하려고 먼저 움직이신 분은 하나님이다. 두 번 나오는 “우리”는 범위가 같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우리”에서 편지를 읽는 성도들을 빼기는 어렵지만, 20절에서 사신인 “우리”와 화목하라는 명령을 듣는 이들이 구별되므로 직분을 받은 “우리”는 바울과 동역자들로 보는 편이 낫다.&lt;sup&gt;10&lt;/sup&gt; 하나님은 화목을 먼저 주시고, 그 화목을 받은 일꾼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신다.&lt;sup&gt;11&lt;/sup&gt; 사도들은 화목의 근원이 아니며,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화목을 맡아 섬기는 일꾼이다.&lt;/p&gt;&lt;p&gt;19절은 “곧”으로 시작하여 18절을 풀어 말한다. 개역개정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로 옮겨 “그리스도 안에”를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읽는다. 원문의 ‘있었다’(ἦν, 엔)를 ‘화목하게 하는’(καταλλάσσων, 카탈랏손)과 하나로 묶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고 계셨다’는 뜻이 된다. 두 읽기 모두 바울의 신학에 맞지만, 뒤의 읽기가 더 개연성이 높다.&lt;sup&gt;12&lt;/sup&gt; 19절이 풀어 말하는 18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라고 했으므로, 19절의 초점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진술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화목을 이루셨다는 행동에 있다. “세상”은 뒤의 “그들의 죄”로 이어지므로 사람들을 가리킨다. “돌리지 아니하시고”(μὴ λογιζόμενος, 메 로기조메노스)는 장부에 셈하여 올리는 말에서 온 표현으로, 하나님이 사람들의 잘못을 그들의 몫으로 계산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신다는 뜻이다.&lt;sup&gt;13&lt;/sup&gt; 이어 하나님은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 18절의 직분이 맡은 일이라면, 19절의 말씀은 그 일로 알릴 소식이다.&lt;/p&gt;&lt;h3&gt;하나님과 화목하라는 사신의 간청 (20절)&lt;/h3&gt;&lt;p&gt;20절의 “그러므로”는 하나님이 화목의 말씀을 맡기셨다는 19절에서 사도의 일을 이끌어 낸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πρεσβεύομεν, 프레스뷰오멘) 일한다. 사신은 보낸 이를 대표하여 그의 말을 가져가는 사람이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권면하신다. 여기서 “권면하시는”(παρακαλοῦντος, 파라칼룬토스)은 하나님이 사신의 입으로 호소하신다는 뜻이다. 11절에서 사람들을 설득하던 사도의 말은 이제 하나님의 호소를 담은 말로 소개된다. 바울은 이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라고 말한다. 간청의 내용은 “하나님과 화목하라”(καταλλάγητε, 카탈라게테)다. 이 명령은 수동형이어서, 스스로 화목을 이루라는 요구보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화목을 받아들이라는 요청에 가깝다.&lt;sup&gt;14&lt;/sup&gt;&lt;/p&gt;&lt;p&gt;“권면하시는”과 “간청하노니”에는 원문에 목적어가 없다. “화목하라”는 2인칭 복수 명령이지만, 그 대상이 편지를 받는 고린도 성도들인지 사신이 복음을 들려주는 사람들 일반인지는 이 문장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문장을 하나님이 사신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하시는 호소로 읽을 수 있다.&lt;sup&gt;15&lt;/sup&gt; 그러나 편지에서 이 간청을 직접 듣는 이들은 고린도 성도들이며, 문맥은 개역개정처럼 “너희”를 대상으로 보충하는 번역을 뒷받침한다.&lt;sup&gt;16&lt;/sup&gt; 바울은 6:1에서 같은 동사(παρακαλοῦμεν, 파라칼루멘)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이어 말한다. 이미 은혜를 받은 교회가 이 호소를 다시 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다. 화목은 하나님이 먼저 이루신 일이지만,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계속 그 은혜에 응답하며 살아야 한다. 교회는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 앞에서 사도를 변호할 근거가 필요했고(12절), 성도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신을 육신을 따라 평가한다면 그를 통해 들리는 하나님의 호소도 바르게 듣기 어렵다. 화목하라는 호소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향하며, 사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그 호소에 응답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또 19절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행동을 말한 뒤 20절이 응답을 요청하므로, 하나님이 이루신 화목은 듣는 사람의 응답과 무관하게 완결된 상태로 제시되지 않는다.&lt;/p&gt;&lt;h3&gt;죄를 알지 못하신 분과 하나님의 의 (21절)&lt;/h3&gt;&lt;p&gt;21절은 이 호소의 근거를 밝힌다. 원문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τὸν μὴ γνόντα ἁμαρτίαν, 톤 메 그논타 하마르티안)로 시작하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은 적이 없으시다는 뜻이다. 원문에는 주어가 따로 없지만 18-20절의 흐름에서 주어는 하나님이며, 개역개정도 “하나님이”를 보충한다. 하나님은 이 죄 없으신 분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 “죄로 삼으신”(ἁμαρτίαν ἐποίησεν, 하마르티안 에포이에센)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두 자리를 맞바꾸듯 대응시킨다. 죄를 알지 못하신 분이 죄로 삼아지시고, 죄 가운데 있던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다.&lt;/p&gt;&lt;p&gt;“죄로 삼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셨다는 뜻일 수 없다. 같은 문장이 그분은 죄를 알지 못하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표현을 레위기 4장의 속죄제처럼 ‘죄를 위한 제물’로 읽는 해석도 있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죄인인 인류와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뜻으로 읽는 해석이 더 개연성이 높다.&lt;sup&gt;17&lt;/sup&gt; 문장 안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앞의 “죄”는 분명히 죄 자체를 뜻하고, 뒤의 “죄”는 “하나님의 의”와 짝을 이룬다. 같은 문장에서 두 번째 “죄”만 제물로 바꾸어 읽으면 이 대응이 흐려진다. 14-15절과 19절에 비추어 보면, 그리스도께서 죄인들과 하나가 되신 일은 그들을 대신한 죽음에서 이루어졌다. 19절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신다고 한 말은 여기서 근거를 얻는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자리에서 죽으셨다.&lt;/p&gt;&lt;p&gt;“하나님의 의가 되게”(γενώμεθα 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 게노메타 디카이오쉬네 테우)도 같은 대응 안에서 읽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지 않고 죄의 자리에 서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속성을 물질처럼 넘겨받아 하나님의 의 자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자기 의로 사람들을 의롭게 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lt;sup&gt;18&lt;/sup&gt; 의는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이 주시며, 그 의를 받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안에서”는 이 의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관계 안에서 주어진다는 뜻이다.&lt;sup&gt;19&lt;/sup&gt; 17절의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듯, 21절의 의도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다. 이 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새 자리에서 시작하여 그 사람의 삶을 바꾼다. 15절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을 그분을 위하여 사는 삶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목의 사신이 간청하며 내미는 것은 자기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이 일이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이사야가 약속한 새 일과 새 창조&lt;/h3&gt;&lt;p&gt;17절의 새로움을 밝히는 가장 직접적인 구약 배경은 이사야 43:18-19다. 개역개정은 이 대목을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로 옮긴다. 칠십인역에서 “옛날 일”은 τὰ ἀρχαῖα(타 아르카이아),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는 ἰδοὺ ποιῶ καινὰ(이두 포이오 카이나)이며, 17절 원문의 “이전 것”(τὰ ἀρχαῖα, 타 아르카이아), “보라”(ἰδοὺ, 이두), “새 것”(καινά, 카이나)이 같은 순서로 나온다. 바울은 인용 표시를 붙이지 않으므로 이 관계는 직접 인용보다 어휘를 통한 암시로 보아야 한다. 이사야에서 하나님은 바다에 길을 내셨던 출애굽보다 더 새로운 구원을 약속하신다. 바벨론에 있는 백성을 위하여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어 택한 백성에게 마시게 하시며, 그 백성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이사야 43:14-21). 바울은 그 새 일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17절의 새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백성에 속한다(18-20절). 바울은 이미 4:6에서 창세기 1:3을 떠올리게 하는 말로,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하신 하나님이 신자의 마음에 빛을 비추셨다고 말했다. 17절의 새로움도 창조주 하나님의 일이며, 18절은 그 사실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라는 말로 고백한다.&lt;/p&gt;&lt;p&gt;이사야 65:17은 이 새 일을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로 넓혀 말하며,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어지는 65:18-25는 우는 소리가 그치고, 사람이 지은 집에 자신이 살며, 수고가 헛되지 않는 세상을 그린다. 이 약속은 17절의 새 창조가 한 사람의 내면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이 회복하실 세상과 이어진다는 읽기를 뒷받침한다. 이사야는 또한 이전 것이 다시 기억되지 않을 때를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과 결부시킨다. 17절의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도 모든 기억과 상처가 지금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새 창조에 속했지만, 여전히 몸으로 탄식하며 완성을 기다린다(5:2-5).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근거한 구원은 성령을 통해 지금 신자를 변화시키고 있으며, 그 변화는 장래에 완성된다.&lt;sup&gt;20&lt;/sup&gt; 그래서 새 창조에 속한 사람은 받은 은혜를 믿으면서도 남아 있는 고통과 약함을 정직하게 말할 수 있고, 몸과 일상과 노동의 회복을 하나님의 약속 밖의 일로 여기지 않는다.&lt;/p&gt;&lt;h3&gt;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는 새 언약&lt;/h3&gt;&lt;p&gt;19절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시는 일은 예레미야 31:31-34의 새 언약 약속과 주제가 이어진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어 자기 법을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하시고, 그들의 죄악을 사하며 다시 기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바울은 19절에서 예레미야를 인용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3:6에서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διακόνους, 디아코누스)이라 불렀고, 18절에서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διακονίαν, 디아코니안)을 받았다고 말한다. 같은 사도의 사역을 3장에서는 새 언약으로, 여기서는 화목으로 설명하는 셈이다. 그 사역이 알리는 소식의 중심에 죄를 셈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용서가 있다.&lt;/p&gt;&lt;h3&gt;고난받는 종과 그리스도의 죽음&lt;/h3&gt;&lt;p&gt;이사야 53:4에서 말하는 이들은 고난받는 종이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는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진 것이 자신들의 질고와 슬픔이었음을 고백한다. 겉으로 드러난 고난만 보고 하나님의 평가를 추론하던 판단이 뒤집힌 것이다. 16절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더는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다고 할 때도 같은 전환이 일어난다. 그는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보이던 십자가를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으로 다시 이해한다.&lt;/p&gt;&lt;p&gt;이사야 53:9-12는 강포를 행하지 않고 입에 거짓이 없던 종이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한다고 말하며,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라고 약속한다. 무죄한 이가 다른 이들의 죄를 지고 그들을 의롭게 한다는 점에서 이 본문은 21절과 가깝다. 53:10이 종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이라고 말하므로, 21절의 “죄로 삼으신”에도 제사의 배경이 있을 수 있다. 다만 바울은 이사야를 인용하지 않으며, 21절을 해석하는 직접 근거는 14-15절의 대신 죽음과 19절의 용서다. 갈라디아서 3:13-14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셔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셨다는 말도 같은 교환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자리를 받으시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다.&lt;/p&gt;&lt;h3&gt;원수 되었을 때 이루신 화목&lt;/h3&gt;&lt;p&gt;바울이 화목을 자세히 설명하는 또 다른 본문은 로마서 5:6-11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경건하지 않은 죄인이었을 때 죽으셨고, 하나님은 그 죽음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였을 때 아들의 죽음으로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 적대는 사람 쪽에 있었고, 먼저 움직이신 분은 하나님이다. 이 본문은 14절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분의 죽음에서 내용을 얻는 이유와 18절이 화목의 주어를 하나님으로 두는 이유를 밝혀 준다. 로마서 5:10-11은 화목하게 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으로 구원받을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고 덧붙인다. 화목은 과거의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어지는 관계이므로, 이미 화목하게 된 고린도 교회도 20절의 호소를 다시 들을 이유가 있다.&lt;/p&gt;&lt;h3&gt;하나님과의 화목과 새 공동체&lt;/h3&gt;&lt;p&gt;에베소서 2:14-16은 하나님과의 화목이 사람들 사이에 낳는 결과를 보여 준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새 사람으로 지으시고,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20절의 직접적인 호소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16절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깨달은 사람이 더 이상 아무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다고 말하므로, 출신과 지위와 겉으로 드러난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던 방식도 그리스도 안에서 끝난다. 에베소서가 말하는 새 공동체는 이 변화가 교회 안의 관계로 나타난 모습이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심판하실 주와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lt;/h3&gt;&lt;p&gt;11-14절에서 바울의 사역을 움직이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5:10의 심판대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이므로, 11절에서 바울이 두려워하는 “주”도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바울은 장차 자기 삶을 드러내실 그 주님을 경외하여 사람들을 설득한다. 14절에서 그를 강권하는 사랑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심판하실 주님과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이 한 분이시므로, 바울은 심판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사랑에 붙들려 살고, 그 사랑을 알기에 주 앞에서 질 책임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사도의 헌신은 자기 열정에서 시작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먼저 자신을 내주신 일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교회를 섬기는 사람은 자기 마음에서 새로운 열정을 끊임없이 짜내기보다 이미 드러난 그 사랑을 다시 알고 그 사랑에 삶을 맡길 수 있다.&lt;/p&gt;&lt;h3&gt;죽고 살아나신 그리스도께 속한 삶과 새로운 앎&lt;/h3&gt;&lt;p&gt;14-15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죽으신 한 분이다. 그분의 죽음이 그들의 죽음으로 여겨지므로, 그분께 속한 사람의 삶은 더 이상 자기를 목적으로 삼을 근거를 갖지 않는다. 바울은 죽음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이시며, 15절은 살아 있는 자들이 살아 계신 그분을 위하여 사는 것을 그 죽음의 목적으로 말한다. 로마서 6:4-11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들이 그분의 부활을 따라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는 목적을 말하고, 그들에게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 여기라고 명령한다. 이어 6:12-13에서 바울은 죄가 그들의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권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에게도 죄와 자기를 위한 삶에 맞서는 싸움이 남아 있으며, 그 싸움의 근거는 그가 이미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사실이다. 14-15절은 같은 관계를 삶의 목적과 소속으로 설명한다. 그분께 속한 사람은 이제 자기를 위하여 죽고 살아나신 분의 것이다. 자기 의로 살 수 있다고 여긴 사람도, 죄 때문에 돌아갈 길이 없다고 여긴 사람도 이 한 분의 죽음 앞에서 같은 자리에 서며, 그분께 속할 때 새 삶을 얻는다.&lt;/p&gt;&lt;p&gt;16절은 이 죽음과 부활이 그리스도에 대한 평가를 바꾸었다고 말한다. 외적 권세와 성공으로 메시아를 판단하면 십자가는 실패로 보인다. 바울은 그 죽음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사랑을 보았고, 죽임당한 이를 살아나신 주님으로 안다. 이 앎은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지상의 삶을 낮추지 않으며, 그 삶과 죽음을 바르게 평가하게 한다. 17절이 새로움의 자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밝히는 것도 같은 앎에서 나온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죽고 살아나셨기에 그 사람은 하나님의 새 창조에 속하며, 아직 남은 약함 때문에 그 소속이 취소되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린 분을 주로 아는 사람은 약함과 낮은 지위만으로 다른 사람의 가치를 정할 수 없다.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의 기준으로 사도를 재는 일(12절)도 이 앎과 맞지 않는다.&lt;/p&gt;&lt;h3&gt;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하나님 앞의 자리&lt;/h3&gt;&lt;p&gt;18-21절에서 화목의 주어는 하나님이고, 화목을 이루는 길은 그리스도다. 하나님은 원수였던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오셨고, 그 길은 죄를 알지 못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아지신 데서 열렸다. 그리스도께는 갚아야 할 자기 죄가 없었으므로, 그분이 감당하신 것은 다른 이들의 죄였다. 신자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일도 “그 안에서” 일어난다. 의는 그리스도와 떨어져 개인이 소유하는 자격이 아니라, 그분과 연합한 관계 안에서 받는 하나님 앞의 자리다. 17절의 새 창조와 21절의 의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새 삶은 스스로 달라져야 한다는 부담이 되지 않고 의는 자기 옳음을 입증하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 신자는 과거의 업적을 내세워 자격을 증명할 필요도, 죄를 숨겨야 받아들여질 이유도 없다. 그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으며, 실패했을 때에도 같은 그리스도께 다시 나아갈 수 있다.&lt;/p&gt;&lt;h3&gt;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목과 사신의 사역&lt;/h3&gt;&lt;p&gt;2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한다. 그러나 사신은 그리스도의 일을 대신 이루는 사람이 아니다. 화목은 21절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루어졌고, 사신은 그 일을 알리며 응답을 청한다. 그리스도께서 홀로 이루신 구원과 그 구원을 알리는 사도의 사역은 이렇게 구별된다. 하나님이 사신을 “통하여” 호소하시므로 사신의 말에는 권위가 있지만, 그 권위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바르게 알릴 때에만 선다. 사도적 선포의 중심은 사역자의 특별함이 아니라 죄 없으신 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죄를 셈하지 않고 사람을 자기에게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외모가 아닌 드러난 삶으로 판단하기&lt;/h3&gt;&lt;p&gt;12절에서 바울은 외모로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답할 근거를 성도들에게 주려 했다. 외모와 마음을 가르는 이 구별은 직업과 학력, 눈에 띄는 경력으로 사람의 신앙과 신뢰할 만함을 판단하는 습관을 문제 삼는다. 그렇다고 마음을 본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숨은 동기를 마음대로 규정할 수는 없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드러나 있다고 말한 뒤, 성도들의 양심에도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했다(11절). 그는 자기 동기를 교회에 강요하지 않고, 교회가 직접 보고 들은 그의 삶에 판단을 맡겼다.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에도 확인한 말과 행동에 근거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 드러나 있다는 고백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lt;/p&gt;&lt;h3&gt;그리스도의 사랑과 교회의 헌신 요청&lt;/h3&gt;&lt;p&gt;14절에서 사람을 붙드는 주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이 말을 봉사자에게 쉬지 말라고 압박하는 구호로 쓰면, 사람을 움직이는 주체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지도자의 요구로 바뀐다. 바울을 움직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깨달음이었다. 15절에 따르면 그 죽음의 목적은 사람들이 더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며, 바울에게 그 삶은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13절)이라는 말처럼 교회를 위한 섬김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사람은 시간과 재능을 쓸 때 자기 평판보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사람들의 유익을 묻는다. 교회가 헌신을 요청할 때에도 해야 할 일의 양을 채우게 하기보다, 이 사랑을 아는 사람이 자기를 위한 삶에서 벗어나 이웃을 섬기도록 도와야 한다.&lt;/p&gt;&lt;h3&gt;새로운 피조물과 과거의 책임&lt;/h3&gt;&lt;p&gt;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선언은 과거의 잘못으로 자신을 영원히 규정하던 사람에게 소망을 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소속을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라는 말을 다른 사람이 입은 손해까지 지우는 선언으로 써서는 안 된다. 17절에서 지나간 것은 자신을 위하여 살던 삶과 육신을 따라 사람을 알던 방식이며, 19절에서 죄를 셈하지 않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근거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잊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은 잘못을 숨길 이유가 없으므로, 자신이 한 일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손상된 관계를 바로잡을 힘을 구할 수 있다. 은혜는 과거의 책임을 피하게 하지 않고, 그 책임을 지며 새롭게 살아갈 근거가 된다.&lt;/p&gt;&lt;h3&gt;사신의 권위와 화목의 호소에 대한 응답&lt;/h3&gt;&lt;p&gt;화목하게 하는 직분은 하나님께 받은 봉사이며, 바울과 동역자들은 자신들을 화목의 근원으로 말하지 않는다(18절). 사신의 권위는 맡은 소식에서 나오므로, 그리스도의 사신이라는 이름을 개인의 의견이나 교회 운영의 결정에 붙여 반대를 막는 일은 그 권위를 남용하는 것이다. 설교자와 교회 지도자는 자기가 하는 말이 화목의 말씀인지 자기 판단인지 구별해야 한다. 이 단락에서 바울이 말하는 방식도 이 권위의 성격을 보여 준다. 11절에서 그는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이 납득하도록 설득하고, 자신이 하나님께 드러나 있듯 성도들의 양심에도 드러나 그들이 직접 판단하기를 바란다. 20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를 통하여 권면하신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는 말로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곧 하나님이 이루신 화목을 받아들이라고 호소한다. 복음을 거절하거나 비판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에도 사신의 목적은 논쟁에서 이기는 데 있지 않고, 상대가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청하는 데 있다. 주 앞에서 책임을 진다는 사실은 말을 정확하게 하도록 이끌고, 자신도 먼저 은혜를 입었다는 기억은 진실하게 말하고 기다리는 인내를 가르친다.&lt;/p&gt;&lt;p&gt;“하나님과 화목하라”는 호소는 처음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미 은혜를 받은 고린도 교회에 이 호소를 들려주고, 6:1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이어 권한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도 하나님이 이루신 화목을 자기 노력의 결과처럼 여기거나, 사신을 외모로 평가하며 그를 통해 들리는 하나님의 호소를 흘려들을 수 있다. 화목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므로, 응답은 그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자기 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의로운 자리를 받으며, 그분을 위하여 다시 사는 일이 그 응답이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5:13,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13,”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3/&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5:14,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14,”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4/&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5:14,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14,”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4/&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5:14,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14,”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4/&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5:14,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14,”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4/&lt;/a&gt;.&lt;/li&gt;&lt;li&gt;다른 해석은 한 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이 이미 죄 가운데 죽어 있었음을 드러낸다고 본다. Plummer는 크리소스토무스가 뜻한 것으로 보이는 이 해석보다 아타나시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와 많은 근대 해석자가 받아들인 해석, 곧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해석을 낫게 여긴다. 그는 15절의 살아 있는 자들도 대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로 풀이한다. A. Plummer, ed., &lt;em&gt;The Second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lt;/em&gt;, Cambridge Greek Testament for Schools and Colleg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03; repr., 1912), 92-93, &lt;a href="https://biblicalstudies.gospelstudies.org.uk/pdf/e-books/plummer/2-corinthians-cgtsc_plummer.pdf#page=136" rel="noopener"&gt;https://biblicalstudies.gospelstudies.org.uk/pdf/e-books/plummer/2-corinthians-cgtsc_plummer.pdf#page=136&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5:16,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16,”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6/"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6/&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5:17,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17,”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7/&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5:18,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18,”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8/"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8/&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5:18,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18,”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8/"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8/&lt;/a&gt;.&lt;/li&gt;&lt;li&gt;Matthew Y. Emerson and Christopher W. Morgan, “The Glory of God in 2 Corinthians,” &lt;em&gt;Southern Baptist Journal of Theology&lt;/em&gt; 19, no. 3 (2015): 36,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Emerson-and-Morgan-from-ST-516-2015-SBJT-19.3.pdf#page=16"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Emerson-and-Morgan-from-ST-516-2015-SBJT-19.3.pdf#page=16&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5:19,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19,”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9/&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5:19,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19,”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19/&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5:20,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20,”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20/"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20/&lt;/a&gt;.&lt;/li&gt;&lt;li&gt;Emerson and Morgan, “Glory of God in 2 Corinthians,” 36,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Emerson-and-Morgan-from-ST-516-2015-SBJT-19.3.pdf#page=16"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Emerson-and-Morgan-from-ST-516-2015-SBJT-19.3.pdf#page=16&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5:20,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20,”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20/"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20/&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5:21,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21,”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2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21/&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5:21,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21,”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2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21/&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5:21,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5:21,”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2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521/&lt;/a&gt;.&lt;/li&gt;&lt;li&gt;Emerson and Morgan, “Glory of God in 2 Corinthians,” 31,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Emerson-and-Morgan-from-ST-516-2015-SBJT-19.3.pdf#page=11"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Emerson-and-Morgan-from-ST-516-2015-SBJT-19.3.pdf#page=11&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6:1-7:1 은혜에 응답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다</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6.1-7.1/</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6.1-7.1/</guid><description>고린도후서 6:1-7:1의 구원의 때, 사도의 인내, 마음을 넓히라는 호소와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갈 부르심을 해설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권면 (6:1-2)&lt;/h3&gt;&lt;p&gt;바울은 5:20에서 하나님이 사도들을 통하여 권면하신다고 말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했다. 6:1의 “권하노니”는 이 간청을 이어 간다. 개역개정의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에서 “하나님과”는 원문에 없는 말이다. 원문의 Συνεργοῦντες(쉬네르군테스, ‘함께 일하면서’)는 누구와 함께 일하는지 밝히지 않지만, 바로 앞에서 하나님이 사도들을 통해 권면하신다고 했으므로 그 대상을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lt;sup&gt;1&lt;/sup&gt; 바울이 권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이다.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는 것은 받은 은혜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으로 이어지지 않아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lt;sup&gt;2&lt;/sup&gt; 고린도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화목의 복음을 이미 받았으므로, 이제 회개와 순종으로 그 은혜에 응답해야 한다.&lt;sup&gt;3&lt;/sup&gt;&lt;/p&gt;&lt;p&gt;6:2는 칠십인역 이사야 49:8을 그대로 인용한다. 이사야에서 하나님은 자기 종에게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인용 뒤에 “보라 지금은”을 두 번 덧붙여, 하나님이 종에게 약속하신 은혜의 때가 지금 고린도 회중에게 와 있다고 선언한다. 바울이 덧붙인 “은혜 받을 만한 때”는 인용 속의 “은혜 베풀 때”와 같은 때, 곧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기에 합당하게 여기시는 때를 가리킨다.&lt;sup&gt;4&lt;/sup&gt; 이 표현은 6:1의 “받지 말라”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lt;sup&gt;5&lt;/sup&gt;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때가 이미 왔으므로, 회중은 그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고 지금 응답해야 한다.&lt;/p&gt;&lt;h3&gt;하나님의 일꾼임을 보여 주는 인내와 사역 (6:3-8)&lt;/h3&gt;&lt;p&gt;6:3에서 바울은 사도들이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5:18의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이렇게 처신한다. 그는 모든 사람의 호감을 얻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그가 지키려는 것은 자기 평판보다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이며, 자신의 처신 때문에 사람들이 화목의 복음을 거부하는 일이 없도록 책임을 진다.&lt;/p&gt;&lt;p&gt;6:4에서 바울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한다고 말한다. 그는 3:1과 5:12에서 다시 자천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으므로, 여기의 자천은 자기 자랑과 다르다. 4:2에서처럼 바울은 진리를 나타냄으로 사람들의 양심 앞에 자신을 내보인다. 그가 내세우는 추천은 이어지는 목록, 곧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온 실제 모습이다.&lt;/p&gt;&lt;p&gt;바울이 가장 먼저 꼽는 것은 “많이 견디는 것”이다. 이어지는 아홉 가지 고난은 세 가지씩 묶어 읽을 수 있다. “환난과 궁핍과 고난”은 사역자를 짓누르는 압박 전반이고,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당한 폭력과 소요이며,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은 사역을 위해 감당한 노동과 결핍이다. 바울은 이런 처지에서도 사역을 그만두지 않았고, 그 인내가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드러낸다.&lt;/p&gt;&lt;p&gt;6:6에서 목록은 바울이 겪은 고난에서 그가 사역한 방식으로 넘어간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 다음의 “성령의 감화”는 원문에서 “성령 안에서”(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엔 프뉴마티 하기오)라는 짧은 표현이며, “감화”에 해당하는 단어는 따로 없다. 개역개정은 성령께서 사도 안에서 일하신다는 뜻을 풀어 옮겼다. 이 표현 앞에는 오래 참음과 자비함이 있고, 뒤에는 “거짓이 없는 사랑”이 이어진다. 바울에게 성령 안에서 사역하는 삶은 고난 중에도 사람을 참고 친절하게 대하며 꾸밈없이 사랑하는 삶이다. 6:7 전반부의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바울이 전한 말씀의 내용과 그 사역을 가능하게 한 힘을 밝힌다.&lt;/p&gt;&lt;p&gt;이어 바울은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사역했다고 말한다. 양손에 무기를 든 모습은 어느 쪽에서 공격이 오든 의로운 방식으로 맞서는 사역을 그린다. 바울은 거짓과 폭력을 사역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이 “의”는 6:14에서 “불법”과 대조되는 “의”로 다시 나온다. 6:8 전반부의 “영광과 욕됨”,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은 사역자가 칭찬과 비방을 모두 겪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어떤 평가를 받든 복음을 바꾸지 않았다.&lt;/p&gt;&lt;h3&gt;오해와 약함 속의 참된 생명 (6:8-10)&lt;/h3&gt;&lt;p&gt;6:8 후반부부터 “같으나”로 이어지는 일곱 짝이 나온다. 첫 짝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는 사람들이 사도를 속이는 자로 여겨도 그가 실제로 진실하다는 뜻이다. 6:9의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는 원문에서 두 수동 분사(ἀγνοούμενοι καὶ ἐπιγινωσκόμενοι, 아그노우메노이 카이 에피기노스코메노이)로 ‘알려지지 않은 자’와 ‘잘 알려진 자’를 대조한다. 따라서 “유명한”은 세상에 이름을 떨친다는 뜻보다 참으로 알려지고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원문은 누가 사도를 알아보는지 밝히지 않는다. 하나님께 알려졌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일부 신자들이 사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도 그 권위가 여러 교회에 알려져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lt;sup&gt;6&lt;/sup&gt;&lt;/p&gt;&lt;p&gt;“죽은 자 같으나”의 원문은 현재 분사(ἀποθνῄσκοντες, 아포트네스콘테스)로 ‘죽어 가는 자’를 뜻한다. 바울은 늘 죽음의 위험 속에 있었지만(4:11)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라고 말한다. 다음 짝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는 시편 118:17-18과 표현이 닮았다. 그 시편에서 시인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겠다고 말하고, 여호와께서 자신을 심히 징계하셨어도 죽음에 넘기지 않으셨다고 고백한다. 이 평행은 6:9에서도 징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암시한다.&lt;sup&gt;7&lt;/sup&gt; 그렇다면 바울이 사람들에게 당한 매질과 박해(6:5)도 하나님의 징계 아래 있고, 그 징계는 사도를 죽음에 넘기지 않는다.&lt;/p&gt;&lt;p&gt;6:10의 세 짝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이다. 이 짝들의 앞쪽을 모두 남의 오해로 돌릴 수는 없다. “속이는 자”는 사람들의 그릇된 평가이지만, 바울은 실제로 근심하고 가난했으며 죽음의 위험을 겪었다. 그런 형편에서 그는 기뻐했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했다. 바울의 삶에서는 실제 약함과 하나님이 주시는 실제 생명이 둘 다 현실이다. 가난한 사도가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한다는 말은 그가 전하는 화목의 복음(5:18-20)으로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lt;/p&gt;&lt;h3&gt;마음을 넓히라는 호소 (6:11-13)&lt;/h3&gt;&lt;p&gt;6:11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이여”라고 회중을 직접 부르며 어조를 바꾼다. “우리의 입이 열리고”는 그가 속마음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는 뜻이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는 그의 마음에 고린도 성도들을 품을 자리가 넉넉하다는 뜻이다. 6:12에서 바울은 그들이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너희 심정에서” 좁아졌다고 말한다. “심정”은 깊은 애정이 자리한 속마음이다. 6:13에서 바울은 부모가 자녀에게 말하듯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요청한다. 바울이 마음을 연 것처럼 그들도 같은 애정으로 응답하라는 뜻이다.&lt;/p&gt;&lt;h3&gt;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멜 수 없는 멍에 (6:14-16)&lt;/h3&gt;&lt;p&gt;6:14에서 바울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명령한다. “멍에를 함께 메다”(ἑτεροζυγοῦντες, 헤테로쥐군테스)는 서로 다른 종류의 짐승이 한 멍에에 매인 모습을 그린다. 바울은 소와 나귀를 한 멍에에 매어 밭을 갈지 말라는 신명기 22:10을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lt;sup&gt;8&lt;/sup&gt; 개역개정의 “함께”는 한 멍에를 진다는 뜻을 살리지만, 서로 다른 종류라는 뜻은 드러내지 않는다. 본문은 이 명령이 어떤 관계를 가리키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혼인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이 문맥에서 혼인으로 한정하기는 어렵다.&lt;sup&gt;9&lt;/sup&gt; “믿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며, 바울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자기의 사도적 권위를 거부한 반대자들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lt;sup&gt;10&lt;/sup&gt;&lt;/p&gt;&lt;p&gt;이어 다섯 수사 의문문이 나온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겠느냐고 묻는다. 다섯 질문은 모두 ‘그럴 수 없다’는 답을 기대한다. 6:15의 “벨리알”(Βελιάρ, 벨리아르)은 사탄을 가리킨다.&lt;sup&gt;11&lt;/sup&gt; 질문들은 함께할 수 없는 짝을 차례로 세우고 성전과 우상의 대조에서 끝난다. 그러므로 바울이 금하는 결합은 그리스도께 속한 회중이 그리스도와 맞서는 편에 예배와 충성을 나누어 주고 불법과 어둠에 참여하는 일이다.&lt;/p&gt;&lt;h3&gt;하나님의 성전에 주신 약속들 (6:16-18)&lt;/h3&gt;&lt;p&gt;6:16 중간에서 바울은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언한다. 개역개정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원문은 이 선언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γάρ(가르)를 넣어 앞의 질문들에 근거를 댄다. 주어 “우리”는 복수이고 “성전”(ναός, 나오스)은 단수이다. 바울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부른다.&lt;sup&gt;12&lt;/sup&gt; 회중이 이미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우상과 일치할 수 없다. 이어 바울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로 하나님의 약속을 인용한다. 이 인용은 레위기 26:12와 에스겔 37:27을 결합한 것이다.&lt;sup&gt;13&lt;/sup&gt;&lt;/p&gt;&lt;p&gt;6:17은 “그러므로”로 시작하여 이 약속에서 나오는 명령을 제시한다.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칠십인역 이사야 52:11의 명령을 순서를 바꾸어 인용한 것이다. 이사야에서 이 명령은 포로로 잡혀 있던 바벨론을 떠나는 백성에게 주어졌고, “부정한 것”은 예배에 쓸 수 없는 제의적 부정을 가리켰다. 바울은 이 명령을 죄로 더러워진 것에서 떠나라는 윤리적 요청으로 적용한다.&lt;sup&gt;14&lt;/sup&gt; 이사야의 “그 가운데에서”는 바벨론을 가리키지만, 바울의 “그들 중에서”는 6:14-16의 믿지 않는 자와 우상 숭배의 자리를 가리킨다. 명령 뒤에 오는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는 이사야 52:11에 없는 약속으로, 칠십인역 에스겔 20:34, 41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lt;sup&gt;15&lt;/sup&gt; 에스겔의 두 절은 하나님께서 흩어진 백성을 여러 나라에서 모아 받아들이시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우상에게서 떠나는 백성을 받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lt;/p&gt;&lt;p&gt;6:18에서 하나님은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 약속하신다. 이 약속의 바탕은 사무엘하 7:14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뒤를 이을 아들에 관하여 자신이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아들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바울은 3인칭 단수 “그”를 2인칭 복수 “너희”로 바꾸고 “딸들”을 더하여 이 약속을 신자 공동체 전체에게 적용한다.&lt;sup&gt;16&lt;/sup&gt; 개역개정이 “자녀”로 옮긴 말은 원문에서 “아들들과 딸들”(υἱοὺς καὶ θυγατέρας, 휘우스 카이 튀가테라스)이다. 이사야 43:6에서 하나님은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라고 말씀하시므로, 바울이 이 본문의 표현도 함께 가져왔다고 보는 해석이 있다.&lt;sup&gt;17&lt;/sup&gt; 이사야 43장의 이 장면은 6:17에 인용된 이사야 52장과 에스겔 20장처럼 하나님이 흩어지고 잡혀간 백성을 돌아오게 하시는 문맥이므로, 이 해석은 개연성이 있다. 바울은 아들과 딸을 각각 명시하여 하나님께서 남녀 신자를 모두 자기 자녀로 받아 주신다고 밝힌다. 인용을 맺는 “전능하신 주”는 이 약속을 하시는 분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이심을 드러낸다.&lt;/p&gt;&lt;h3&gt;약속을 받은 사람의 정결 (7:1)&lt;/h3&gt;&lt;p&gt;7:1은 “그런즉”으로 앞의 인용에서 결론을 이끌어 낸다. 개역개정의 “이 약속”은 원문에서 복수형(τὰς ἐπαγγελίας, 타스 에팡겔리아스)이며 6:16-18에 인용된 약속들을 가리킨다.&lt;sup&gt;18&lt;/sup&gt;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을 받아 주시며,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겠다는 약속들이다. 바울은 회중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고 “깨끗하게 하자”고 말하여 자신도 이 권면에 포함한다. 깨끗하게 해야 할 것은 “육과 영”(σαρκὸς καὶ πνεύματος, 사르코스 카이 프뉴마토스)의 온갖 더러운 것이다. 여기의 “영”은 6:6의 성령이 아니라 사람의 영이며, 육과 영은 겉과 속을 아우르는 사람 전체를 가리킨다.&lt;sup&gt;19&lt;/sup&gt; 그러므로 몸 자체를 악하다고 하거나 내면만 깨끗하면 된다고 말할 수 없다.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는 하나님께 구별된 삶을 온전히 이루어 가라는 뜻이고, 그 삶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이어진다. 이 두려움은 공포에 질린 상태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약속을 이미 받은 사람들이 그 약속에 합당하게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lt;/p&gt;&lt;h3&gt;마음을 여는 일과 멍에를 거절하는 일 (6:11-7:2)&lt;/h3&gt;&lt;p&gt;7:2에서 바울은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다시 요청하고, 자신들은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거나 해롭게 하거나 속여 빼앗은 일이 없다고 말한다. 마음을 넓히라는 요청이 6:11-13과 7:2에 나오고, 그 사이에 6:14-7:1의 명령이 있다. 마음을 넓히라는 요청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명령은 모두 6:1의 권면, 곧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권면에 대한 응답으로 읽을 수 있다. 고린도 성도들이 이 은혜에 응답하려면 그 은혜를 전한 사도를 향해 마음을 열고, 그 은혜와 맞서는 우상과 불법에 참여하는 결합에서 떠나야 한다. 6:14의 믿지 않는 자에 사도를 거부하는 반대자들이 포함된다면, 사도에게 마음을 닫는 일과 그들과 한 멍에를 메는 일은 같은 문제의 두 면이 된다. 바울이 넓히라고 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받은 사도와 성도를 향하고, 거절하라고 하는 결합은 하나님께 드릴 예배와 충성을 나누게 하는 관계이다. 바울은 자신의 처신이 정직했다고 밝힌 뒤 마음을 열라고 요청하므로, 이 요청에는 신뢰할 수 있는 처신이 전제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은혜의 때가 응답보다 먼저 온다&lt;/h3&gt;&lt;p&gt;6:1-7:1에서 바울은 구약의 약속을 여러 차례 인용하고, 회중이 해야 할 응답을 하나님이 이미 베푸신 은혜에서 이끌어 낸다. 단락은 이사야 49:8의 구원의 날로 시작하고, 6:16-18에서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을 받아 주시며 아버지가 되신다는 약속들에 이른다. 7:1의 정결 권면은 이 약속들 뒤에 온다. 회중이 먼저 깨끗해져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백성이 그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lt;/p&gt;&lt;p&gt;이사야 49장에서 하나님은 종을 통해 야곱을 자기에게 돌아오게 하시고, 그 종을 이방의 빛으로 삼아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신다(49:6). 49:8의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은 하나님이 종에게 응답하시고 잡혀 있는 백성을 풀어 회복시키시는 때이다. 바울은 이 때가 “지금” 왔다고 말한다. 고린도후서 5:18-21에서 말한 하나님의 화목 안에서 이사야가 약속한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 회복이 땅 끝까지 미치므로 이방 도시 고린도의 회중도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구원에 참여하며, 그 은혜를 미룰 수 없는 현재의 부르심으로 받는다.&lt;/p&gt;&lt;h3&gt;회복된 백성에게 주신 약속과 거룩함&lt;/h3&gt;&lt;p&gt;고린도후서 6:16의 약속은 레위기 26장과 에스겔 37장에서 왔다. 레위기 26:11-12에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백성 가운데 거하며 그들 가운데 행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에스겔 37:26-28에서 하나님은 포로와 분열을 겪은 이스라엘과 평화의 언약을 맺고 성소를 그들 가운데 영원히 두겠다고 약속하시며, 그때 민족들이 여호와를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분으로 알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출애굽 뒤에 주신 약속과 포로 귀환 뒤의 회복을 바라보는 약속이 바울의 인용 안에서 하나가 된다. 바울은 이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에서 이루어졌다고 보고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한다. 에스겔에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고린도의 회중도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에 거룩한 백성이며, 그 거룩함에 맞지 않는 우상 숭배와 불법을 버려야 한다.&lt;/p&gt;&lt;p&gt;고린도후서 6:17에 인용된 두 본문도 하나님이 백성을 돌아오게 하시는 장면에서 왔다. 이사야 52:11-12에서 바벨론을 떠나는 백성은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야 하고,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은 스스로 정결하게 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행하시고 뒤에서 호위하시므로 그들은 도망하듯 나오지 않는다. 에스겔 20:33-41에서 하나님은 흩어진 백성을 여러 나라에서 모으시되 반역하는 자들을 제하시고, 남은 백성을 향기로운 제물처럼 받으시며 그들 가운데서 자기의 거룩함을 나타내신다. 두 본문에서 백성이 부정한 것을 떠나는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어 내고 받아 주시는 구원 안에서 일어난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떠남은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우상 숭배와 불법에 참여하던 삶에서 떠나는 일이다. 인용의 순서는 떠남과 받아 주심을 긴밀히 묶는다. 그러나 바울은 회중이 이미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한 뒤 이 인용을 쓰므로(6:16), 이 떠남은 이미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그 약속을 붙들고 하는 응답이다.&lt;/p&gt;&lt;p&gt;고린도후서 6:18의 아버지와 자녀 약속은 다윗의 집에 주신 약속(사무엘하 7:14)을 하나님의 백성 전체로 넓힌다. 바울이 이사야 43:6을 함께 염두에 두었다면, 이 확장은 이사야 43:5-7의 장면과 이어진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동서남북에서 자기 아들들과 딸들, 곧 자기 이름으로 불리며 자기 영광을 위해 창조하신 사람들을 모으신다. 왕의 후계자에게 주신 아버지의 약속이 하나님이 모으시는 가족의 아들과 딸 모두에게 이른다. 7:1에서 바울이 회중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를 때, 그는 이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가족에게 말한다. 자녀로 받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아버지를 경외하는 자녀의 거룩함이 뒤따른다.&lt;/p&gt;&lt;h3&gt;우상 숭배의 거절과 비신자와의 관계&lt;/h3&gt;&lt;p&gt;이 거룩함은 비신자와의 모든 관계를 끊는 일과 다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 경계를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고린도전서 5:9-13에서 그는 세상의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는 뜻이라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엄하게 다룰 대상은 형제라 불리면서 그런 죄를 고집하는 교회 안의 사람이라고 밝힌다. 고린도전서 7:12-16에서는 믿지 않는 배우자가 함께 살기를 원하면 혼인을 유지하라고 권한다. 새로 혼인하려는 과부에게는 “주 안에서만” 하라고 말한다(고린도전서 7:39). 고린도전서 10:14-22에서는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함께 마실 수 없다고 하면서도, 10:27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의 초대를 받아 식사하러 가는 일을 허락한다. 바울은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일과 다른 신을 섬기는 예배에 참여하는 일을 구별했다. 고린도후서 6:14-16의 질문들도 성전과 우상의 대조에서 끝나므로, 이 명령은 하나님께 드릴 예배와 충성을 나누게 하는 결합을 거절하라고 요구한다. 이 멍에를 기존 혼인의 해소나 비신자 가족과의 단절을 명하는 말로 읽으면 바울의 권면들과 충돌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그리스도와 벨리알 사이의 충성&lt;/h3&gt;&lt;p&gt;6:15의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는 이 단락의 거룩함이 회중이 누구에게 속했느냐의 문제임을 보여 준다. 바울은 의와 불법, 빛과 어둠을 대조한 뒤 셋째 질문에서 그리스도와 사탄을 직접 맞세운다. 바로 이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대조하므로, 믿는 자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6:14-7:1의 거룩함은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이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그분과 맞서는 편에 예배와 삶을 나누어 줄 수 없다.&lt;/p&gt;&lt;h3&gt;그리스도의 화목 사역과 사도의 참여&lt;/h3&gt;&lt;p&gt;회중이 그리스도께 속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 때문이다. 5:18-21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셔서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 이 화목은 그리스도께서 홀로 이루셨다. 6:1의 “하나님의 은혜”는 이 화목의 은혜이고, 6:2의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죽고 다시 살아나신 뒤 이 은혜가 선포되는 현재이다(5:15). 사도는 화목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이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7:1의 정결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화목하게 된 사람의 응답이며, 자기 의로 다른 사람 위에 서는 근거가 될 수 없다.&lt;/p&gt;&lt;p&gt;6:4-10에 그려진 사도의 삶도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이해된다. 4:10-11에서 바울은 예수의 생명이 자기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고 말했다. 6:9의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는 이 고백이 실제 사역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 준다. 6:10의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는 8:9과 나란히 읽을 수 있다. 그곳에서 바울은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셔서 그의 가난함으로 성도들을 부요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가난은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는 구원 자체이고, 사도의 가난은 그 구원을 전하는 사역에서 겪는 고난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대신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서 그분의 죽음과 생명에 참여한다.&lt;/p&gt;&lt;h3&gt;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약속과 정결&lt;/h3&gt;&lt;p&gt;회중이 하나님의 성전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선언도 그리스도께 근거한다. 6:16-18의 인용들은 그리스도를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바울은 1:19-20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든지 “예”가 된다고 말했고, 7:1에서 6:16-18의 약속들을 “이 약속”으로 받는다. 교회가 다윗의 아들에게 주신 아버지의 약속과 백성 가운데 거하시겠다는 약속을 받는 것은 그 약속들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5:17에서 말하듯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고, 그들의 공동체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11, 16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닦아 둔 터로 말한 뒤 회중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른다.&lt;/p&gt;&lt;p&gt;7:1의 정결도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의 정결이다. 바울은 “우리”로 말하며 자신도 이 권면 아래 둔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은 그분과 맞서는 예배와 행위에 참여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구별해 드린다. 이 정결은 사람을 멀리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6:6-7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도는 오래 참음과 자비함, 거짓 없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했고, 7:2에서 그는 아무도 해치거나 속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사람은 우상과의 결합을 거절하고,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한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지금 은혜에 응답함&lt;/h3&gt;&lt;p&gt;“지금은 구원의 날”이라는 선언은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을 미루지 말라고 요청한다. 복음을 들었으나 응답을 미루어 온 사람은 지금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이미 믿는 사람도 받은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그 은혜가 실제 삶을 바꾸게 해야 한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은 거짓과 착취를 멈추고, 자신이 해를 끼친 사람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일도 미루지 않는다.&lt;/p&gt;&lt;h3&gt;하나님의 일꾼을 알아보는 기준&lt;/h3&gt;&lt;p&gt;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임을 직함이나 성과로 증명하지 않고 고난 중의 인내와 깨끗함, 오래 참음과 자비함, 거짓 없는 사랑으로 보여 주었다. 교회가 섬기는 사람을 평가할 때도 이 모습이 기준이 된다. 섬기는 사람은 칭찬을 받든 비방을 받든 진리의 말씀을 바꾸지 않고, 자신의 처신 때문에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힘든 사역을 감당했다는 이유로 폭언이나 거짓을 덮을 수는 없다.&lt;/p&gt;&lt;h3&gt;넓은 마음과 나뉘지 않은 충성&lt;/h3&gt;&lt;p&gt;마음을 넓히라는 호소는 멀어진 관계에 다시 자리를 내어 주라는 요청이다. 바울은 먼저 자기 마음을 열어 보였고, 아무도 해치거나 속이지 않았다고 밝힌 뒤 응답을 요청했다. 교회 안에서 오해와 서운함 때문에 마음을 닫은 성도들도 진실하게 섬겨 온 사람의 사랑을 의심만 하지 말고 같은 애정으로 응답해야 한다. 이 요청은 신뢰할 수 있는 처신을 전제로 하므로, 피해를 겪은 사람에게 해침과 착취가 반복되는 관계로 돌아가라고 재촉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lt;/p&gt;&lt;p&gt;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명령은 그리스도께 드릴 충성을 나누지 말라는 요청이다. 본문이 관계의 종류를 정하지 않으므로, 성도는 어떤 결합이 자신에게 다른 신을 섬기는 예배에 참여하거나 불법과 어둠에 가담하도록 요구하는지 분별해야 한다. 성도는 믿지 않는 가족과 이웃, 동료와 일상을 나누면서도 그런 참여는 거절할 수 있다. 이 명령을 근거로 기존 배우자나 믿지 않는 가족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lt;/p&gt;&lt;h3&gt;겉과 속을 아우르는 정결&lt;/h3&gt;&lt;p&gt;7:1은 거룩함을 겉과 속 모두에 적용한다. 몸으로 하는 행실과 마음에 품은 욕심이 모두 깨끗해져야 한다. 이 정결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고 애쓰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거하시고 자녀로 받아 주신 사람이 그 아버지를 경외하며 사는 방식이다. 바울이 자신을 “우리”에 포함했듯 교회의 지도자도 이 부르심에서 예외가 아니다. 같은 약속을 받은 성도들은 자신도 깨끗해져야 할 사람임을 기억하며 서로 권면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6:1,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6:1,”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6:1,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lt;/a&gt;.&lt;/li&gt;&lt;li&gt;Peter Balla, “2 Corinthians,” TGC Bible Commentary, The Gospel Coalition, on 2 Cor 6:1-10,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www.thegospelcoalition.org/commentary/2-corinthians/" rel="noopener"&gt;https://www.thegospelcoalition.org/commentary/2-corinthians/&lt;/a&gt;.&lt;/li&gt;&lt;li&gt;개역개정은 인용 속의 &lt;span lang="grc"&gt;καιρῷ δεκτῷ&lt;/span&gt;(카이로 데크토)를 “은혜 베풀 때”로, 바울이 덧붙인 &lt;span lang="grc"&gt;καιρὸς εὐπρόσδεκτος&lt;/span&gt;(카이로스 유프로스데크토스)를 “은혜 받을 만한 때”로 달리 옮겼다. UBS 핸드북은 두 형용사 사이에 뜻의 차이가 없다고 본다. 또 이 때를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때로 읽는 해석도 있지만, 대부분의 해석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기에 합당하게 여기시는 때로 읽는다고 설명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6:2,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6:2,”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6:2,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2/&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이 대조를 일부 그리스도인이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지만 다른 곳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그 권위가 잘 알려져 있다는 뜻으로 읽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하나님이 알아보신다는 읽기와 사람과 하나님을 함께 가리킨다는 읽기도 소개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6:9,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6:9,”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9/&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시편 118:17-18과의 평행이 ‘징계를 받는’ 일의 행위자가 하나님이심을 암시한다고 보고, 바울이 자기 고난을 하나님의 바로잡으시는 징계로 여겼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에 기록된 바울의 삶에 비추어 사람들에게서 받은 박해로 읽는 해석도 함께 소개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6:9,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9/&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6:14,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6:14,”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4/&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6:14,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4/&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6:14,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4/&lt;/a&gt;.&lt;/li&gt;&lt;li&gt;“2 Corinthians 6,” NET Bible, 6:15, sn on “Beliar,” Bible.com,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www.bible.com/bible/107/2CO.6.net" rel="noopener"&gt;https://www.bible.com/bible/107/2CO.6.net&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6:16,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6:16,”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6/"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6/&lt;/a&gt;.&lt;/li&gt;&lt;li&gt;바울의 “두루 행하여”는 칠십인역 레위기 26:12에 있는 표현이다. 레위기는 이 약속을 2인칭으로 말하지만, 바울은 칠십인역 에스겔 37:27처럼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3인칭으로 말한다. UBS 핸드북은 이 인용을 두 절의 결합으로 본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6:16,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6/"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6/&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6:17,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6:17,”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7/&lt;/a&gt;.&lt;/li&gt;&lt;li&gt;6:17의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lt;span lang="grc"&gt;κἀγὼ εἰσδέξομαι ὑμᾶς&lt;/span&gt;, &lt;span class="translit"&gt;카고 에이스덱소마이 휘마스&lt;/span&gt;)에서 &lt;span lang="grc"&gt;εἰσδέξομαι ὑμᾶς&lt;/span&gt;는 칠십인역 에스겔 20:34에 같은 형태로 나오고, 20:41에는 같은 동사가 부정사로 쓰였다. UBS 핸드북은 이 약속이 두 절에서 왔다고 본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6:17,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7/&lt;/a&gt;. NET은 바울의 말을 에스겔 20:41을 고쳐 쓴 인용으로 본다. “2 Corinthians 6,” NET Bible, 6:17, sn on “you,” Bible.com, &lt;a href="https://www.bible.com/bible/107/2CO.6.net" rel="noopener"&gt;https://www.bible.com/bible/107/2CO.6.net&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6:18,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6:18,”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8/"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618/&lt;/a&gt;.&lt;/li&gt;&lt;li&gt;“2 Corinthians 6,” NET Bible, 6:18, sn on “daughters,” Bible.com, &lt;a href="https://www.bible.com/bible/107/2CO.6.net" rel="noopener"&gt;https://www.bible.com/bible/107/2CO.6.net&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7:1,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7:1,”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1/&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7:1,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1/&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7:2-16 회개가 낳은 열심과 다시 얻은 기쁨</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7.2-16/</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7.2-16/</guid><description>고린도후서 7:2-16에서 디도의 방문, 고린도 성도들의 회개와 변화가 바울의 위로와 관계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해설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우리를 받아들이라는 호소와 넘치는 기쁨 (2-4절)&lt;/h3&gt;&lt;p&gt;2절은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Χωρήσατε ἡμᾶς, 코레사테 헤마스)는 명령으로 시작한다. 이 동사는 본래 자리를 내어 준다는 뜻이며, 원문에는 “마음”이라는 명사가 없다. 개역개정이 보충한 “마음으로”는 6:11-13의 문맥에 맞는다. 그곳에서 바울은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라고 말한 뒤,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성도들에게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청했다. 6:14-7:1의 거룩한 삶에 관한 권면을 마친 바울은 그 호소로 돌아온다. 받아들여야 할 “우리”에는 바울과 함께 사역한 사람들이 포함된다.&lt;/p&gt;&lt;p&gt;이어 바울은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고 항변한다. 원문은 세 문장 첫머리에 “아무에게도”를 되풀이하여 자신들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강조한다. 세 동사는 차례로 불의를 행함, 손상시키거나 무너뜨림, 남을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취함을 가리킨다. 셋째 동사는 편지 뒷부분에서 디도와 관련해 다시 나온다. 12:16-18에서 바울은 자신이 속임수로 교회를 취했다는 말에 답하면서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라고 묻는다. 2절의 항변도 이러한 의심을 염두에 둔 말로 읽을 수 있다. 바울은 성도들의 회개를 말하기 전에 자기 행동부터 밝힌다.&lt;/p&gt;&lt;p&gt;3절에서 바울은 이 항변이 교회를 고발하는 말로 들리지 않도록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들이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말하면 교회가 사도들을 부당하게 의심했다는 결론이 따라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라고 하며 6:11-13에서 넓어진 마음을 고백한 말을 다시 꺼내고, 그 목적을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고 밝힌다. 많은 학자는 이 표현을 변치 않는 우정을 나타내는 잘 알려진 문구로 보며, 이 문맥에도 그 뜻이 잘 맞는다.&lt;sup&gt;1&lt;/sup&gt; 바울은 죽든지 살든지 어떤 형편에서도 성도들과 갈라서지 않겠다고 말한다. 2절의 항변도 이 애정에서 나온 말이다.&lt;/p&gt;&lt;p&gt;4절은 짧은 네 문장으로 바울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는 성도들을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그들을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숨김없이 말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들을 자랑한다. 이 자랑은 14절에서 디도에게 했던 자랑으로 다시 나온다. 이어 그는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친다고 고백한다. 이 기쁨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생겼다. 1:4에서 바울은 원문에서 같은 표현인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했는데, 이제 그 위로를 자기 경험으로 말한다. 4절이 결과를 먼저 말하고, 5절부터는 그 위로와 기쁨이 어떻게 찾아왔는지를 풀어 간다.&lt;/p&gt;&lt;h3&gt;마게도냐의 환난과 디도를 통한 위로 (5-7절)&lt;/h3&gt;&lt;p&gt;5절은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라는 말로 4절의 기쁨이 어디에서 왔는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2:12-13에서 바울은 드로아에서 복음의 문이 열렸는데도 디도를 만나지 못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마게도냐로 갔다고 말했다. 그 여행 이야기는 2:14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 넘어갔다가 여기서 다시 이어진다. 2:13의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와 5절의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는 원문에서도 쉼을 얻지 못했다는 같은 표현이다. 다만 2:13에서는 바울의 영이, 5절에서는 육체가 쉼을 얻지 못했다. 여기서 “육체”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본성이 아니라 지치고 쉼이 필요한 인간의 몸과 존재를 가리킨다. 두 구절을 이어 읽으면 바울은 영으로도 육체로도 쉬지 못했다. 그는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고 말한다. 원문에서 다툼과 두려움(ἔξωθεν μάχαι, ἔσωθεν φόβοι, 엑소텐 마카이, 에소텐 포보이)은 모두 복수형이어서 여러 차례의 다툼과 여러 겹의 두려움을 떠올리게 한다. 바울은 어디에서 누구와 다투었는지 밝히지 않는다. 4절의 기쁨은 이 환난 한가운데서 생겼다.&lt;/p&gt;&lt;p&gt;6절은 그 형편 한가운데로 찾아온 하나님의 위로를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을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분(ὁ παρακαλῶν τοὺς ταπεινοὺς, 호 파라칼론 투스 타페이누스)으로 부른다. 1:4에서도 하나님은 환난 중에 위로하시는 분으로 찬송을 받았다. 개역개정이 “낙심한 자들”로 옮긴 말은 본래 낮은 자들을 뜻한다. 여기서는 사회적 지위보다 마음이 꺾이고 기운이 떨어진 상태가 초점이며, 5절에서 바울이 묘사한 자기 형편이 바로 그러했다. 하나님은 “디도가 옴으로”, 곧 동역자가 도착해 곁에 있게 된 일로 바울을 위로하셨다.&lt;/p&gt;&lt;p&gt;7절에서 바울은 위로가 디도의 도착에서 그치지 않았다고 말한다. 디도의 도착도 위로였지만,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가 바울에게 더 큰 위로가 되었다. 하나님이 바울을 위로하시고, 고린도 성도들이 디도를 위로하며, 디도의 보고가 다시 바울을 위로한다. 1:4에서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게 된다고 했던 말이 이 방문과 보고에서 실제로 일어난다. 디도가 보고한 내용은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이었다. 곧 바울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그리움, 탄식하며 슬퍼하는 깊은 애통, 바울을 위한 열렬한 관심이다. 이 감정들은 깨어진 관계를 그대로 두려 하지 않는 교회의 응답이었다. 디도에게서 교회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들은 바울은 더욱 기뻐했다.&lt;/p&gt;&lt;h3&gt;회개에 이른 근심 (8-10절)&lt;/h3&gt;&lt;p&gt;8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근심하게 했던 편지를 돌아본다. 2:3-4에서 그는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편지를 썼으며, 성도들을 근심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8절의 ‘근심하게 하다’와 9-11절의 ‘근심’(λύπη, 뤼페)은 원문에서도 같은 어근의 말이며, 개역개정은 이 말들을 한결같이 “근심”으로 옮긴다. 바울은 그 편지를 보낸 뒤 한동안 후회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 편지가 성도들을 “잠시만” 근심하게 했음을 알기에 더는 후회하지 않는다.&lt;sup&gt;2&lt;/sup&gt; “그 편지”의 지시어(ἐκείνη, 에케이네)는 지금 쓰는 편지와 구별되는 이전 편지를 가리킨다. 8절의 ‘후회하다’(μεταμέλομαι, 메타멜로마이)는 9-10절에서 “회개”로 옮긴 말(μετάνοια, 메타노이아)과 다른 낱말이다. 이 문맥에서 후회는 자기가 쓴 편지 때문에 성도들이 괴로워한 일을 두고 바울이 느낀 마음의 짐이고, 회개는 성도들이 잘못에서 돌아선 일이다. 바울은 편지가 성도들에게 슬픔을 가져왔음을 알았고 그 영향에 무관심하지 않았다.&lt;/p&gt;&lt;p&gt;9절은 “지금”을 앞세워 디도의 소식을 들은 뒤의 기쁨을 말한다. 바울이 기뻐하는 까닭은 성도들이 근심했다는 사실보다 그 근심이 회개에 이르렀다는 데 있다. 회개는 생각과 삶의 방향을 바꾸는 돌이킴이며,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일과 행동을 바꾸려는 결심을 모두 포함한다.&lt;sup&gt;3&lt;/sup&gt; 이어지는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에서 ‘하나님의 뜻대로’(κατὰ θεόν, 카타 테온)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을 따라’라는 말로, 그 근심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방식으로 일어났음을 나타낸다. 9절 끝의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그 근심에 담긴 목적을 밝힌다. 사도들이 한 일 때문에 성도들이 어떤 손해도 입지 않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lt;sup&gt;4&lt;/sup&gt; 디도의 보고(7절)는 그 근심이 실제로 회개로 이어졌음을 알려 주었고, 바울은 11절에서 그 열매를 하나씩 든다.&lt;/p&gt;&lt;p&gt;10절은 9절의 말을 일반 원리로 설명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고,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 두 표현은 같은 명사 ‘근심’을 쓰고 수식어만 달리한다. 따라서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가 결과를 정하지 않는다. 그 근심이 하나님께 돌아서는 회개로 이어지는지가 결과를 가른다. ‘세상 근심’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 머무는 근심이다.&lt;sup&gt;5&lt;/sup&gt; 바울은 이 대조로 잘못을 지적받은 성도들의 근심이 어디로 향했는지를 설명한다.&lt;/p&gt;&lt;p&gt;“후회할 것이 없는”(ἀμεταμέλητον, 아메타멜레톤)은 8절의 ‘후회하다’와 같은 어근에 부정 접두어가 붙은 형용사다. 이 형용사는 형태상 ‘회개’와 ‘구원’ 어느 쪽과도 일치하고, 원문의 어순에서는 ‘구원’ 바로 뒤에 온다. 개역개정은 이 어순을 따라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바울은 8절에서 성도들을 근심하게 한 편지를 두고 한동안 후회했다고 말했다. 이 흐름에서는 후회할 것이 없는 대상을 근심 끝에 이른 회개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lt;sup&gt;6&lt;/sup&gt; 그 회개를 두고 후회하지 않을 사람은 우선 근심하고 돌이킨 고린도 성도들이며, 8절에 비추어 바울 자신으로 볼 수도 있다.&lt;sup&gt;7&lt;/sup&gt; 개역개정의 번역도 구원이 후회할 일이 아님을 바르게 전한다. 다만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고통스러웠던 근심과 회개의 과정이 후회로 남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구원과 대조되는 사망은 육체의 죽음보다 영적인 죽음을 가리킨다.&lt;sup&gt;8&lt;/sup&gt;&lt;/p&gt;&lt;h3&gt;근심이 맺은 열매와 깨끗함 (11절)&lt;/h3&gt;&lt;p&gt;11절은 “보라”로 시작하여 성도들이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을 직접 보게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은 10절의 원리가 고린도 교회에서 실제로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보여 준다. “얼마나”는 뒤따르는 열거 전체에 걸린다. 개역개정은 일곱 항목마다 “얼마나”를 되풀이하여, 원문이 항목을 하나씩 더해 가며 강조하는 효과를 살렸다. 첫 항목인 “간절하게”는 문제를 미루지 않고 서둘러 대응한 열심을 가리킨다. 이어 “변증하게”, “분하게”, “두렵게”, “사모하게”, “열심 있게”, “벌하게”가 차례로 나온다.&lt;/p&gt;&lt;p&gt;일곱 항목에는 감정과 행동이 모두 담겨 있다. ‘변증’은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는 해명이고, ‘분함’은 일어난 잘못에 대한 분개다. ‘두려움’은 성도들이 이 사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lt;sup&gt;9&lt;/sup&gt; 7절에서 디도가 전한 ‘사모함’과 ‘열심’이 여기서 다시 나온다. 디도가 보고한 교회의 마음은 바로 이 회개에서 나온 것이었다. 마지막의 ‘벌함’(ἐκδίκησιν, 엑디케신)은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대응을 나타내며, 개역개정의 “벌하게”는 이 명사를 동사처럼 풀어 옮긴 것이다. 이 명사에는 누가 누구를 벌했는지가 드러나 있지 않다. 바울이 2:1-11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면 벌의 대상은 잘못한 사람이었을 수 있다.&lt;sup&gt;10&lt;/sup&gt; 2:1-11과 11절은 같은 사건을 가리킬 수 있으나, 사건의 내용과 당사자는 본문에 밝혀져 있지 않다.&lt;sup&gt;11&lt;/sup&gt; 성도들은 근심한 뒤 문제를 방치하지 않고 자신들의 태도를 밝히며 사건에 대응했다.&lt;/p&gt;&lt;p&gt;11절 끝에서 바울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 평가한다. “나타내었느니라”로 옮긴 동사(συνεστήσατε, 쉬네스테사테)는 자신을 입증하거나 추천했다는 뜻이다. 6:4에서 바울은 같은 동사로 사도들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살았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교회도 이 일에서 자신들을 입증했다고 인정한다. “그 일에 대하여”는 이 평가를 특정한 사건에 대한 성도들의 대응으로 한정한다. “일체”는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면을 가리킨다.&lt;/p&gt;&lt;h3&gt;편지를 쓴 목적 (12절)&lt;/h3&gt;&lt;p&gt;12절은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으로 편지의 목적을 정리한다. 바울은 먼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라고 두 목적을 부정한다. 두 표현에는 2절에서 “불의를 행하지 않고”로 옮긴 동사가 쓰인다. 2절에서 바울은 자신들이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고린도에서는 실제로 불의를 행한 사람과 당한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이 누구이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본문은 밝히지 않는다. 불의를 당한 사람이 바울 자신인지 교회의 다른 구성원인지도 이 절만으로는 정할 수 없다.&lt;sup&gt;12&lt;/sup&gt; 바울이 밝힌 목적은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이다. 11절 열거의 첫머리에 나온 ‘간절함’(σπουδή, 스푸데)이 여기서 편지의 목적으로 다시 나온다. 바울은 개인 사이의 잘잘못을 가리는 일보다 교회 전체의 응답에 관심을 둔다. 그 간절함이 드러나야 할 곳은 “너희에게”, 곧 성도들 자신이다. 바울은 성도들이 이 사건을 거치며 자신들이 사도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스스로 알게 되기를 바랐다.&lt;sup&gt;13&lt;/sup&gt; 이 모든 일은 “하나님 앞에서” 일어났다.&lt;/p&gt;&lt;h3&gt;디도의 기쁨과 회복된 신뢰 (13-16절)&lt;/h3&gt;&lt;p&gt;13절 첫머리에서 바울은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라고 말하며 6절부터 이어 온 위로 이야기를 맺는다. 이어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까지 더해져 바울은 “더욱 많이” 기뻐했다. 디도는 고린도 성도들 모두로 말미암아 마음이 안심함을 얻었다. 개역개정이 여기서 “마음”으로 옮긴 말은 2:13에서 “심령”으로 옮긴 영(πνεῦμα, 프뉴마)이다. 2:13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한 바울의 영은 쉼을 얻지 못했는데, 이제 디도의 영이 고린도 성도들에게서 쉼을 얻었다는 소식이 바울을 기쁘게 한다.&lt;/p&gt;&lt;p&gt;14절에서 바울은 디도에게 미리 했던 자랑을 두고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그는 디도를 고린도로 보내면서 교회에 관해 좋은 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회가 엄한 편지에 바르게 응답하지 않았다면 그 자랑은 부끄러움으로 끝났을 것이다. 바울은 이어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한 자랑도 “참되게 되었도다”라고 말한다. 1:17-18에서 바울은 계획을 바꾼 일을 두고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 변호해야 했다. 이제 그는 교회에 한 말과 교회에 관해 한 말이 모두 참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한다. 4절에서 고백한 자랑도 근거 있는 말이었음이 여기서 확인된다.&lt;/p&gt;&lt;p&gt;15절에서 디도는 성도들을 더욱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에서 “심정”(σπλάγχνα, 스플랑크나)은 본래 몸의 내장을 가리키며, 깊은 애정이 자리한 곳을 나타낸다. 6:12에서 바울이 성도들이 “너희 심정에서” 좁아졌다고 말할 때도 같은 낱말을 썼다. 디도는 성도들 모두의 순종을 지금도 되새기고 있다. 바울은 2:9에서 성도들이 “범사에 순종하는지” 알고자 편지를 썼다고 했는데, 디도의 보고로 그 답을 얻었다. 성도들은 디도를 “두려움과 떪으로” 영접했다. 그들은 디도를 사도가 보낸 사람으로 맞았고, 그가 전한 권면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15절의 “영접하여”(ἐδέξασθε, 에덱사스테)는 2절의 “영접하라”와 원문에서 다른 동사다. 그래도 성도들이 디도를 맞아들인 일은 2절에서 바울이 구한 받아들임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 준다.&lt;/p&gt;&lt;p&gt;16절의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에서 “신뢰하게 된”으로 옮긴 동사는 마음을 놓고 담대할 수 있다는 현재의 확신을 나타낸다. “범사에”(ἐν παντί, 엔 판티)는 5절의 “사방으로”, 11절의 “일체”와 원문에서 같은 표현이다.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던 바울이 이제 모든 일에 교회를 신뢰한다. 16절의 “기뻐하노라”는 7절과 9절, 13절에서 말한 기쁨을 이어 단락을 맺는다. 바울은 이렇게 회복된 신뢰 위에서 8장의 연보 문제를 꺼낸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죄를 직면한 근심에서 돌이킴과 생명으로&lt;/h3&gt;&lt;p&gt;바울은 9-10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회개를 낳고, 그 회개가 구원에 이른다고 말한다. 죄를 깨닫는 슬픔이 하나님께 돌아서는 길이 되고 그 끝에 다시 기쁨이 온다는 고백은 시편 51편의 기도에서도 볼 수 있다. 시편의 표제는 다윗에게 나단이 찾아온 때를 배경으로 제시하고, 기도자는 자기 죄를 알고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다고 고백한다(시편 51:1-6). 그는 하나님의 인자와 풍성한 긍휼을 의지하여 죄를 씻어 달라고 구한다. 이어 깨끗한 마음과 새롭게 된 영, 다시 누리는 구원의 즐거움을 구하고, 회복된 뒤에는 다른 죄인들에게 주의 길을 가르치겠다고 말한다(시편 51:10-13). 시편은 한 사람의 기도이고 본문은 한 교회의 응답이지만, 두 본문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인정한 슬픔이 새로운 삶과 기쁨으로 이어진다고 증언한다. 고린도 성도들의 근심도 회개로 이어졌고, 그 회개는 바울과 디도에게 기쁨을 주었다.&lt;/p&gt;&lt;p&gt;이스라엘의 성경은 회개가 행동의 변화로 나타난다는 점도 분명히 한다. 잠언 28:13은 죄를 숨기는 사람과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사람을 대조하며, 뒤의 사람이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한다. 에스겔 18:5-9에서 의로운 사람은 이웃을 학대하거나 강탈하지 않고 저당물을 돌려주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악인이 돌이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살기를 원하시고, 죽는 자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에스겔 18:21-32). 본문 10절의 구원과 사망의 대조, 11절에 열거된 성도들의 구체적인 대응은 이 증언과 주제상 이어진다. 고린도 성도들은 문제를 덮어 두지 않고 해명하며, 잘못에 분개하고, 사건에 대응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사람이 근심 속에 머물기보다 돌이켜 생명에 이르기를 원하시며, 바울도 성도들의 근심이 그 방향으로 이어진 것을 기뻐한다.&lt;/p&gt;&lt;h3&gt;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lt;/h3&gt;&lt;p&gt;본문에서 교회의 회개 소식은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다. 6절이 하나님을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분으로 부르는 고백은 이사야서의 위로 약속과 주제상 이어진다. 이사야 40:1-2에서 하나님은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명령하시며, 예루살렘의 노역의 때가 끝나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고 외치게 하신다. 포로의 고통 속에 있던 백성에게 주어진 위로는 죄 사함의 소식과 묶여 있고, 하나님은 그 위로를 전할 사람들에게 명령하신다. 이사야 49:13-15에서도 여호와는 고난 당한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며, 자신이 버림받고 잊혔다고 탄식하는 시온에게 결코 잊지 않겠다고 대답하신다. 바울이 경험한 위로도 같은 모습을 지닌다. 하나님은 디도를 보내 낙심한 바울을 찾아오셨고, 교회가 잘못을 바로잡았다는 소식으로 그의 근심을 위로하셨다(6-7절). 위로는 하나님에게서 시작해 디도와 교회를 거쳐 바울에게 이르렀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위로&lt;/h3&gt;&lt;p&gt;바울이 낙심한 자신을 위로하셨다고 고백하는 하나님은 편지 첫머리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찬송한 분이다(1:3-5). 그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사도들에게 넘친 것같이 그들이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고 말하고,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한다고 말한다. 6-7절에서 그 위로는 구체적인 사람들을 거쳐 온다. 성도들의 애통과 열심은 디도에게 쉼을 주고, 디도는 그 소식을 바울에게 알려 기쁨을 준다. 바울은 동역자의 방문에 감사하면서 그 위로의 근원을 하나님께 돌린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위로는 성도들과 동역자가 서로를 찾아가고 소식을 알리는 일 속에서 바울에게 이르렀다.&lt;/p&gt;&lt;h3&gt;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화목과 회개&lt;/h3&gt;&lt;p&gt;이 관계의 토대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화목이다. 5:18-20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고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시며, 바울은 화목의 말씀을 맡은 사도로서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한다. 이 화목은 십자가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고, 그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5:21).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기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누가복음 24:46-47), 회개의 요청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나온다. 10절의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하나님이 열어 주신 이 길에 응답하는 일이다. 성도들이 후회하며 괴로워한 사실이 십자가의 은혜를 대신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선포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기에 잘못을 고백하고 돌이킬 수 있었고, 그들의 회개에는 자기 죄를 아는 괴로움과 함께 하나님께 다시 의탁하는 믿음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진 공동체는 서로에게 어떤 말을 했고 어떤 손해를 주었는지도 정직하게 다룬다.&lt;/p&gt;&lt;h3&gt;회개한 사람의 회복과 그리스도 앞의 용서&lt;/h3&gt;&lt;p&gt;회개한 사람을 버려두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베드로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예수는 베드로가 부인하기 전에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시고, 돌이킨 뒤 형제들을 굳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누가복음 22:31-32).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한 뒤 심히 통곡했지만(누가복음 22:61-62), 부활하신 주님은 그에게 다시 자신의 양을 먹이라고 맡기셨다(요한복음 21:15-17). 그리스도는 실패를 직면한 제자를 다시 섬김의 자리로 부르셨다. 본문에서도 회개한 교회는 정죄 속에 남겨지지 않는다. 바울은 그들의 응답을 받아들여 다시 신뢰하고(16절), 교회는 사도와 동역자에게 다시 기쁨과 쉼을 준다(13절).&lt;/p&gt;&lt;p&gt;바울은 그리스도 앞에서 이루어지는 용서도 강조한다. 2:6-10에서 그는 충분한 벌을 받은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하며 사랑을 나타내라고 말하고,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며, 자신도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용서했다고 밝힌다. 11절은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대응을 회개의 열매로 꼽는다. 두 단락의 사건이 같은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지만, 편지 안에서 잘못에 대한 교회의 대응은 다시 사랑하는 관계로 회복하는 방향을 가진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교회는 죄를 바로잡고, 회개한 사람이 지나친 근심에 잠기지 않도록 위로해야 한다.&lt;/p&gt;&lt;h3&gt;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 안에서 함께하는 사도와 교회&lt;/h3&gt;&lt;p&gt;그리스도의 사랑은 권면하는 사도의 태도도 정한다. 5:14-15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강권한다고 말한다. 한 분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므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산다. 3절의 “함께 죽고 함께 살게”는 그 자체로는 어떤 형편에서도 성도들과 갈라서지 않겠다는 애정의 표현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편지에서 자기 사역을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삶으로 설명했고, 그 사역을 통해 성도들 안에 생명이 역사한다고 말했다(4:10-12). 이 정경 문맥에서 보면, 성도들과 생사를 함께하겠다는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에 참여하는 사역자의 애정으로 읽을 수 있다. 바울은 예수를 위하여 교회의 종이 된 사람으로서(4:5) 교회를 정죄하려 하지 않았고(3절), 성도들이 사도들 때문에 손해를 입지 않기를 바랐다(9절). 그래서 성도들의 근심은 바울에게도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편지를 보내고 결과를 기다리며 동역자의 소식으로 위로받았고, 성도들이 돌이켰을 때 다시 기뻐했다.&lt;/p&gt;&lt;p&gt;10절에서 회개가 이르는 구원은 지금 관계가 회복되는 일보다 넓다. 4:14에서 바울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사도들도 예수와 함께 다시 살리사 성도들과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지금 돌이키며 관계를 새롭게 하는 삶은 그 공동의 미래를 향한다. 사도와 교회가 서로를 다시 신뢰하게 된 기쁨은 함께 하나님 앞에 설 사람들의 기쁨이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실제 잘못을 인정하는 공동의 응답&lt;/h3&gt;&lt;p&gt;본문의 회개는 교회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잘못에 대한 응답이다. 바울은 관계 회복을 호소하면서 먼저 자신과 동역자들이 성도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밝혔고(2절), 고린도 성도들의 회개는 사건에 간절히 대응하는 행동으로 나타났다(11절). 오늘의 회개도 막연히 부끄럽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이 실제로 한 말과 행동을 분명히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11절의 해명과 분함과 대응은 교회 전체가 보인 응답이었고, 12절에서 바울이 드러나기를 바란 것도 교회 전체의 간절함이었다. 공동체 전체가 관여한 문제라면 한 사람의 사과로 책임이 끝나지 않는다. 공동체는 그 일에 대해 자신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밝히고 함께 바로잡아야 한다.&lt;/p&gt;&lt;h3&gt;돌이킴을 목적으로 하는 권면과 회복&lt;/h3&gt;&lt;p&gt;권면하는 사람은 상대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를 성과로 삼지 않아야 한다. 바울은 정죄할 목적이 없음을 먼저 밝혔고(3절), 성도들이 근심한 사실보다 그 근심이 회개로 이어진 일을 기뻐했다(9절). 그는 편지가 준 슬픔을 무겁게 받아들여 한동안 후회했고, 디도의 보고를 듣고서야 기뻐했다(7-8절). 엄한 말이 좋은 열매를 맺었는지는 말한 사람의 확신보다 상대에게 실제로 일어난 돌이킴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권면은 큰 울음이나 오래 이어지는 자책을 요구하기보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는 편이 본문의 방향에 맞는다.&lt;/p&gt;&lt;p&gt;잘못을 바로잡는 일에는 목적과 끝이 있다. 바울은 잘못에 대한 성도들의 분함과 대응을 회개의 열매로 인정하면서도(11절), 2:6-8에서는 충분한 벌을 받은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하며 사랑을 나타내라고 권한다. 그 사람이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염려했기 때문이다(2:7). 회개한 사람을 계속 수치 속에 세워 두면 그가 새롭게 살아갈 길을 찾기 어렵다. 동시에 12절은 불의를 행한 사람과 불의를 당한 사람을 따로 언급한다. 본문에서 불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고, 교회는 그 일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회복을 바라는 교회는 불의를 행한 사람의 책임과 불의를 당한 사람의 고통을 하나로 섞지 않아야 한다.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피해를 입은 사람의 고통을 지우지 않으므로, 용서와 회복을 말하는 자리에서도 그 고통은 따로 헤아려야 한다.&lt;/p&gt;&lt;h3&gt;회개를 요청할 일과 함께 슬퍼할 일의 구별&lt;/h3&gt;&lt;p&gt;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의 대조는 본문의 사건 안에서 읽어야 한다. 바울은 잘못을 직면한 교회가 어떻게 돌이켰는지를 설명한다. 질병이나 사별이나 관계의 상실 때문에 오래 슬퍼하는 사람에게 이 대조를 끌어와 회개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리거나 죄를 고백하라고 재촉하면 그의 실제 고통과 필요가 가려진다. 공동체는 회개를 요청해야 할 일과 함께 슬퍼하며 돌보아야 할 형편을 신중하게 구별해야 한다.&lt;/p&gt;&lt;h3&gt;확인된 변화와 회복된 신뢰&lt;/h3&gt;&lt;p&gt;회복된 신뢰는 확인된 행동 위에서 자란다. 바울은 2절에서 자신과 동역자들이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거나 이득을 취하지 않았다고 밝혔고, 14절에서는 교회에 한 말과 교회에 관해 한 말이 모두 참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교회 쪽에서도 디도가 직접 본 순종과 열심이 있었다(15절). 바울은 성도들의 과거 잘못만 되풀이하지 않고 디도가 확인한 변화를 인정하며, 이제 “범사에” 그들을 신뢰한다고 말한다(16절). 오늘의 공동체에서도 신뢰는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것을 서로 확인할 때 회복된다. 지도자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공동체가 알 수 있게 밝히고, 공동체는 사람이 책임을 다하고 달라진 행동을 보일 때 그 변화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인정할 수 있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7:3,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7:3,”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3/&lt;/a&gt;.&lt;/li&gt;&lt;li&gt;NA28은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 뒤에서 문장을 끊고, &lt;span lang="grc"&gt;βλέπω&lt;/span&gt; [&lt;span lang="grc"&gt;γὰρ&lt;/span&gt;] &lt;span lang="grc"&gt;ὅτι&lt;/span&gt;(블레포 [가르] 호티)의 &lt;span lang="grc"&gt;γάρ&lt;/span&gt;(가르)를 원문에 속하는지 확실하지 않은 낱말로 대괄호에 넣으며, 8절 끝을 쉼표로 맺어 9절의 &lt;span lang="grc"&gt;νῦν χαίρω&lt;/span&gt;(뉜 카이로, ‘지금 기뻐함’)로 잇는다. 이 구두점을 따르면 ‘후회하였으나’는 9절의 기쁨과 이어지고, ‘앎이라’에 해당하는 구절은 사이에 끼어든 설명이 된다. &lt;em&gt;Novum Testamentum Graece&lt;/em&gt;, ed. Barbara Aland et al., 28th rev. ed.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2012), 2 Cor 7:8-9, accessed October 25, 2026, &lt;a href="https://www.die-bibel.de/bibel/NA28/2CO.7" rel="noopener"&gt;https://www.die-bibel.de/bibel/NA28/2CO.7&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7:9,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7:9,”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9/&lt;/a&gt;.&lt;/li&gt;&lt;li&gt;9절 끝의 구문은 목적으로도 결과로도 읽을 수 있다. UBS 핸드북은 목적으로 읽는 편이 낫다고 보고, ‘우리에게서’를 ‘우리가 한 일 때문에’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7:9,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9/&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7:10,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7:10,”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10/"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10/&lt;/a&gt;.&lt;/li&gt;&lt;li&gt;&lt;em&gt;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도 이 형용사를 ‘회개’에 붙여 읽는다. 이 주석은 ‘구원’과 연결할 수도 있다고 인정하지만, 구원에 이런 형용사를 붙일 까닭이 없고 회개에 붙일 때 잘 들어맞는다고 본다. W. Robertson Nicoll, ed., &lt;em&gt;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7:10, Bible Hub,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7.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7.htm&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7:10,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10/"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10/&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7:10,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10/"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10/&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7:11,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7:11,”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1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11/&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바울이 2:1-11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보고, 그렇다면 벌을 받는 사람은 12절의 “그 불의를 행한 자”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7:11,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1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11/&lt;/a&gt;.&lt;/li&gt;&lt;li&gt;2:6에서 개역개정이 “벌 받는 것”으로 옮긴 말(&lt;span lang="grc"&gt;ἐπιτιμία&lt;/span&gt;, &lt;span class="translit"&gt;에피티미아&lt;/span&gt;)은 11절의 ‘벌함’(&lt;span lang="grc"&gt;ἐκδίκησιν&lt;/span&gt;)과 다른 낱말이므로, 벌을 가리키는 낱말만으로 두 단락을 같은 사건으로 잇지는 못한다. &lt;em&gt;Novum Testamentum Graece&lt;/em&gt;, 2 Cor 2:6, accessed October 25, 2026, &lt;a href="https://www.die-bibel.de/bibel/NA28/2CO.2" rel="noopener"&gt;https://www.die-bibel.de/bibel/NA28/2CO.2&lt;/a&gt;; 2 Cor 7:11, &lt;a href="https://www.die-bibel.de/bibel/NA28/2CO.7" rel="noopener"&gt;https://www.die-bibel.de/bibel/NA28/2CO.7&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2:5에 비추어 바울이 자신을 간접적으로 가리켰을 수 있다고 보면서도, 원문처럼 특정하지 않은 채 옮기라고 권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7:12,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7:12,”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1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1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7:12,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1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712/&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8:1-15 기꺼이 나누어 서로의 부족을 채우다</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8.1-15/</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8.1-15/</guid><description>고린도후서 8:1-15의 마게도냐 교회들, 그리스도의 가난, 형편에 맞는 자발적 나눔과 서로의 부족을 채우는 연보의 뜻을 해설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환난과 가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1-2절)&lt;/h3&gt;&lt;p&gt;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알린다(1절). 로마서 15:25-27과 고린도전서 16:1-4를 보면 이 연보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이었고, 여러 지역의 교회가 그 한 섬김에 참여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이 낸 돈을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이루신 일을 말한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환난과 가난 속에서도 기뻐하며 너그럽게 나누는 삶으로 나타났다. 이 단락에서 “은혜”(τὴν χάριν, 텐 카린)는 1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가리키고, 4절과 6-7절에서는 성도들이 참여하여 마쳐야 할 나눔의 일을 가리킨다. 바울은 하나님의 베푸심과 성도들의 나눔을 같은 말로 부르며, 연보를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서 나오는 일로 설명한다.&lt;/p&gt;&lt;p&gt;2절은 그 은혜가 마게도냐 교회들 가운데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설명한다. 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는데, 이 시련은 마게도냐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박해를 가리킨다.&lt;sup&gt;1&lt;/sup&gt; 그런 형편에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로 넘쳐 났다. 가난에서 풍성함이 나왔다는 말은 논리로 풀리지 않는 역설이며, 바울은 이 표현으로 예루살렘 연보에 드러난 그들의 비상한 너그러움을 그린다.&lt;sup&gt;2&lt;/sup&gt; 개역개정이 “연보”로 옮긴 명사(τῆς ἁπλότητος, 테스 하플로테토스)는 11:3에서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으로 옮겨진 말이지만, 이곳과 9:11에서는 연보의 문맥에 따라 계산하지 않고 아낌없이 내놓는 너그러움을 뜻한다.&lt;/p&gt;&lt;h3&gt;자원하여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림 (3-5절)&lt;/h3&gt;&lt;p&gt;3-4절에서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나누었다고 증언한다. 그들은 “자원하여”(αὐθαίρετοι, 아우타이레토이), 곧 스스로 선택하여 그렇게 했다. 그들은 바울 일행에게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을 간절히 구했다(4절). “참여함”(τὴν κοινωνίαν, 텐 코이노니안)은 함께 나누는 교제를 뜻하며, 그 내용은 성도를 위한 섬김이다. 가진 것이 적은 교회들이 먼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는 일을 은혜로 여기고 그 일에 참여하게 해 달라고 청한 것이다.&lt;/p&gt;&lt;p&gt;5절에서 그들의 응답은 바울 일행이 바란 것을 넘어선다. 그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울 일행에게 자신을 주었다. 그들의 헌신은 먼저 주님을 향했고, 돈을 보내는 일은 주께 속한 사람으로 사는 데서 나왔다. 바울 일행에게 자신을 준 일도 하나님의 뜻 아래 있었으며, 사도들은 주님께 자신을 드린 사람들의 협력을 받아 이 섬김을 감당한다. 이 순서를 따라 읽으면 사도에게 자신을 준다는 말을 지도자 개인의 뜻에 대한 무제한 복종으로 확대하기 어렵다.&lt;/p&gt;&lt;h3&gt;시작한 은혜의 일을 완성하라는 권면 (6-7절)&lt;/h3&gt;&lt;p&gt;6절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의 일은 바울이 디도에게 고린도의 연보를 마무리하도록 권한 일로 이어진다. 디도는 이미 고린도에서 이 일을 시작했고(“시작하였은즉”, προενήρξατο, 프로에네르크사토), 바울은 그가 이 은혜를 “성취하게”(ἐπιτελέσῃ, 에피텔레세) 하려 한다. 10-11절에서 바울은 같은 두 동사로 고린도 성도들이 일 년 전에 시작한 일을 이제 마치라고 요청한다. 고린도 교회가 할 일은 이미 시작한 연보를 완성하는 것이다. 7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사랑에 풍성하다고 인정하고, 마게도냐 교회들의 너그러움이 넘쳤듯이(2절) 이 은혜에도 풍성하라고 권한다.&lt;/p&gt;&lt;p&gt;7절의 “우리를 사랑하는”에서 NA28과 개역개정은 사랑의 방향을 다르게 읽는다. NA28의 본문은 “우리에게서 나와 너희 안에 있는 사랑”(τῇ ἐξ ἡμῶν ἐν ὑμῖν ἀγάπῃ, 테 엑스 헤몬 엔 휘민 아가페)이다. 이 사랑은 바울 일행에게서 시작되어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 자리 잡은 사랑, 곧 고린도 성도들이 사도들에게서 받은 사랑이다. 이 읽기에서 그 사랑이 바울을 향한다고까지 특정하기는 어렵다.&lt;sup&gt;3&lt;/sup&gt; 개역개정의 “우리를 사랑하는”은 “우리를 향한 너희의 사랑”이라는 다른 사본 읽기에 가깝다. 그 읽기가 이 절의 문맥에 더 어울려 보이기 때문에, 더 어려운 읽기를 본문으로 택한 NA28의 판단도 확실하지는 않다.&lt;sup&gt;4&lt;/sup&gt; NA28 본문을 따르면 7절의 목록은 고린도 성도들이 사도들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끝나고, 바울은 그 받은 사랑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나눔으로 넘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나눔으로 나타난 마게도냐 교회들의 경우(1-2절)와 같은 흐름이다. 개역개정처럼 읽으면 7절의 사랑은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에게 품은 애정이 되고, 받은 사랑이 나눔으로 이어진다는 연결은 이 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lt;/p&gt;&lt;h3&gt;명령이 아닌 권면과 그리스도의 은혜 (8-9절)&lt;/h3&gt;&lt;p&gt;8절에서 바울은 이 권면이 명령이 아니라고 밝힌다. 그는 다른 이들, 곧 마게도냐 성도들의 간절함을 들어 고린도 성도들의 사랑이 참된지 시험하여 확인하려 한다(“증명하고자”, δοκιμάζων, 도키마존). 바울은 금액을 정해 거두지 않고, 고린도 성도들이 다른 성도를 실제로 돕는 행동으로 사랑의 진실함을 드러내기를 바란다.&lt;/p&gt;&lt;p&gt;9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이미 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권면의 근거로 삼는다. “부요하신 이로서”(πλούσιος ὤν, 플루시오스 온)는 문맥상 “부요하신데도”라는 양보의 뜻으로 읽힌다. 그리스도는 부요하신데도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 이 부요하심과 가난하게 되심은 지상 생활의 형편보다 성육신을 가리킨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며,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것은 고린도 성도들이 영적으로 부요하게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lt;sup&gt;5&lt;/sup&gt;&lt;/p&gt;&lt;h3&gt;원하는 마음과 가진 것에 따른 실행 (10-12절)&lt;/h3&gt;&lt;p&gt;10-11절에서 바울은 지난해의 시작과 지금의 완성을 연결한다. 개역개정의 “나의 뜻을 알리노니”에서 “뜻”(γνώμην, 그노멘)은 명령하는 의지보다 판단이나 조언을 가리키며, 8절의 “명령”과 대조된다. 바울은 명령 대신 조언을 주고, 그 조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유익하다고 말한다. 고린도 교회는 일 년 전에 이 일을 행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원하기도 했다. 11절의 “이제는”은 그 지난해와 현재를 대조한다. 바울은 6절에서 디도에게 맡긴 일을 이제 고린도 성도들에게 “성취할지니”(ἐπιτελέσατε, 에피텔레사테)라고 요청한다. 이 명령형도 스스로 원하여 시작한 일을 마치라는 요청이며, 바울은 금액을 정하지 않는다. 그는 “마음에 원하던 것”(προθυμία, 프로튀미아), 곧 기꺼이 하려던 마음에 걸맞게 실행하되 “있는 대로”(ἐκ τοῦ ἔχειν, 에크 투 에케인), 곧 가진 것에서 하라고 한다. 고린도 성도들이 따져야 할 것은 마게도냐 교회들이 얼마를 냈는지가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자원으로 얼마를 감당할 수 있는지다.&lt;sup&gt;6&lt;/sup&gt;&lt;/p&gt;&lt;p&gt;12절은 11절의 “있는 대로”에 이유를 댄다. “할 마음만 있으면”은 기꺼이 하려는 마음이 이미 있는 경우를 가정한다. 그 경우 선물은 가진 것에 따라(καθὸ ἐὰν ἔχῃ, 카토 에안 에케) 받아들일 만하며, 가지지 않은 것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οὐ καθὸ οὐκ ἔχει, 우 카토 우크 에케이). 원문은 “받아들일 만하다”는 형용사(εὐπρόσδεκτος, 에우프로스데크토스)만 쓰고 받는 분을 밝히지 않는다. 문맥상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옳고, 예루살렘 성도들이 받는다고 보는 해석은 가능성이 낮다.&lt;sup&gt;7&lt;/sup&gt; 개역개정의 “받으실”도 이 이해를 반영한다. 다만 뒷부분의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는 원문에 없는 동사를 보충한 번역이다. 원문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거절하신다고 말하지 않고, 선물을 받아들이는 기준이 가지지 않은 것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따라서 3절의 “힘에 지나도록”은 마게도냐 성도들이 스스로 택한 일에 대한 바울의 증언이고, 11-12절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가진 것에 따라 실행하라고 요청한다. 본문 자체가 자발적인 희생의 사례와 모든 사람에게 요구할 금액을 구별한다.&lt;/p&gt;&lt;h3&gt;균등과 서로의 부족을 채움 (13-14절)&lt;/h3&gt;&lt;p&gt;13-14절은 나눔의 목적을 균등으로 설명한다. 13절 앞부분은 원문에서 동사 없이 짧게 쓰였고, 개역개정은 동사를 보충하여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라고 옮겼다. “곤고하게”에 해당하는 θλῖψις(틀립시스)는 2절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이 겪은 “환난”과 같은 명사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환난 속에서 나누었지만,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런 환난을 새로 지우려고 연보를 권하지 않는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균등”(ἰσότης, 이소테스)이다. 14절의 “이제”는 지금의 형편을 가리킨다. 지금은 고린도의 “넉넉한 것”(περίσσευμα, 페리세우마)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부족한 것”(ὑστέρημα, 휘스테레마)을 채운다. 넉넉한 것은 통상적인 필요를 채우고 남는 몫이고, 부족한 것은 단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데 모자란 것이다.&lt;sup&gt;8&lt;/sup&gt;&lt;/p&gt;&lt;p&gt;14절 뒷부분의 목적절은 방향을 바꾸어, 그들의 넉넉함이 고린도의 부족을 채울 수 있다고 말한다. 바울이 편지를 쓸 때 예루살렘 교회에는 넉넉함이 없었으므로, 이 목적절은 장래에 형편이 뒤바뀔 가능성을 말한다.&lt;sup&gt;9&lt;/sup&gt; 개역개정의 “후에”도 원문에 따로 없는 말을 보충하여 이 뜻을 드러낸다. 이 목적절을 예루살렘 교회가 영적 유익으로 보답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14절에서 “넉넉한 것”과 “부족한 것”이라는 같은 말을 양쪽 방향에 쓰고, 15절에서는 먹을 양식에 관한 결과를 인용한다. 그러므로 이 상호성은 고린도 교회가 언젠가 가난해지면 예루살렘 교회가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물질적 도움의 가능성으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lt;sup&gt;10&lt;/sup&gt; 바울이 말하는 균등은 각 교회의 형편에 따라 실제 결핍을 채우는 데 목적이 있다.&lt;/p&gt;&lt;h3&gt;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만나 (15절)&lt;/h3&gt;&lt;p&gt;15절에서 바울은 “기록된 것 같이”라는 말로 출애굽기 16:18의 만나 이야기를 끌어온다. 출애굽기는 오멜로 되어 보니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으며, 각 사람이 먹을 만큼 거두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오멜로 재었다는 앞부분과 각 사람이 먹을 만큼 거두었다는 뒷부분을 빼고, 남음도 모자람도 없었다는 결과를 인용한다. 출애굽기에서 그 균등은 사람들이 자원을 자발적으로 나누어서 생긴 것이 아니었다.&lt;sup&gt;11&lt;/sup&gt; 바울은 광야 백성이 저마다 필요한 만큼 공급받은 결과를 들어, 교회들이 자원하여 나눔으로써 서로의 결핍을 채우도록 권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광야의 만나와 가난한 형제를 위한 율법&lt;/h3&gt;&lt;p&gt;1-15절은 하나님께 공급받은 백성이 서로의 결핍을 채운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교회들의 연보에 적용한다. 15절이 인용하는 출애굽기 16장에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했고, 하나님은 아침마다 만나를 주셨다. 하나님은 장막에 있는 사람 수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라고 하셨고, 많이 거둔 사람도 적게 거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니 남거나 모자라지 않았다(16:16-18). 하나님께서 장막마다 먹을 사람의 필요를 채우신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이 결과는 사람들이 서로 나누어 준 행동으로 생기지 않았다.&lt;sup&gt;12&lt;/sup&gt;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공급하셨고, 바울은 교회들이 받은 것을 자원하여 나눔으로써 같은 결과에 이르기를 바란다. 나누는 사람도 하나님께 공급받아 사는 사람이므로, 자신이 다른 성도의 생명을 지탱하는 근원인 것처럼 행동할 수 없다.&lt;/p&gt;&lt;p&gt;이 가르침은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백성에게 율법으로 주어졌다. 신명기 15:1-11은 빚을 면제하고 가난한 형제에게 손을 펴라고 명한다. 15:4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으리라고 말하고, 15:11은 땅에 가난한 사람이 그치지 않을 것이므로 곤란하고 궁핍한 형제에게 손을 펴라고 명한다. 이 율법은 돕는 사람의 마음도 다룬다. 가난한 형제에게 필요한 대로 넉넉히 꾸어 주고(15:8), 면제년이 가까워 돌려받지 못할까 계산하여 그를 외면하지 말며(15:9), 줄 때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한다(15:10). 하나님께 받은 복은 가난한 형제의 필요를 채우는 데 쓰여야 하고, 그 나눔은 기꺼운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의 기꺼이 하려는 마음(11-12절)을 인정하고, 그 마음이 예루살렘의 실제 결핍을 채우는 행동(14절)으로 이어지기를 요청한다.&lt;/p&gt;&lt;h3&gt;복음의 교제를 물질로 나타내는 연보&lt;/h3&gt;&lt;p&gt;예루살렘 교회는 처음에 이 가르침을 자기 공동체 안에서 실천했다. 사도행전 4:32-35에서 부활을 증언하는 공동체는 큰 은혜를 받았고, 밭과 집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으며, 사도들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4:34). 바울이 모으는 연보는 그 예루살렘 교회가 결핍에 처했을 때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 그 필요를 채우는 일이다. 로마서 15:26-27에서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도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쁘게 연보했다고 말하고,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누어 가졌으므로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명한다. 복음을 함께 받은 관계가 서로의 생계를 돌보는 책임으로 이어진 것이다.&lt;/p&gt;&lt;p&gt;로마서 15:27은 이미 받은 영적 유익에 물질로 응답하는 관계를 말하며, 주는 교회들을 오히려 빚진 자라고 부른다. 14절은 형편이 바뀌면 물질의 도움이 반대 방향으로도 흐를 수 있다고 말한다. 어느 본문에서도 주는 교회가 받는 교회보다 높은 자리에 서지 않는다. 바울은 로마서 15:31에서 자신이 예루살렘을 위해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한다. 이 기도는 선물을 받을지 여부가 받는 성도들에게 달려 있음을 보여 준다. 이방 교회들의 선물은 예루살렘 교회를 지배할 권리를 사는 대가가 아니라 같은 복음 안의 교제를 물질로 나타내는 일이다.&lt;/p&gt;&lt;h3&gt;하나님께 받은 몫 안에서 나눔&lt;/h3&gt;&lt;p&gt;바울은 이 연보를 처음 지시할 때도 각 사람이 매주 “수입에 따라” 모아 두게 했다(고린도전서 16:2). 11-12절에서 “있는 대로” 하라는 기준도 이 지시와 같다. 이어지는 9:8-10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고, 성도들이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도록 모든 것을 넉넉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성도들이 나누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므로, 각자 받은 몫 안에서 나누어 다른 성도의 결핍을 채운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부요하신 분이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lt;/h3&gt;&lt;p&gt;9절은 연보를 권하는 논의의 중심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둔다.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의 너그러움을 들려준 뒤, 고린도 성도들이 이미 아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한다(“너희가 알거니와”). 그리스도는 부요하신데도 그들을 위해 가난하게 되셨고, 고린도 성도들은 그분을 본받기 전에 먼저 그분께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 성도들의 나눔에 근거와 방향을 준다.&lt;/p&gt;&lt;p&gt;9절의 부요하심은 재산이 아니라 사람으로 오시기 전 그리스도의 신적 존재를 가리키고, 가난하게 되심은 사람으로 태어나신 일을 가리킨다.&lt;sup&gt;13&lt;/sup&gt; 빌립보서 2:6-8도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한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이 낮아지심을 근거로 성도들에게 자기 일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보라고 권한다(2:4-5). 9절에서도 부요하신 분이 가난하게 되셨다는 대조는 그 낮아지심이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택하신 일임을 보여 주고,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은 그 낮아지심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밝힌다.&lt;/p&gt;&lt;h3&gt;그리스도 안의 부요함과 새 삶&lt;/h3&gt;&lt;p&gt;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성도들이 얻는 부요함은 재산의 증가가 아니다. 5:21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이 문장도 9절처럼 그리스도께 일어난 일과 그 결과 성도들이 얻는 것을 목적의 관계로 잇는다. 5:18-19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이 본문들에 비추어 보면 9절의 부요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의가 된 삶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부요함은 돈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던 마게도냐 교회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고(1절), 바울은 그들이 낸 것을 “풍성한 연보”라고 부른다(2절).&lt;/p&gt;&lt;p&gt;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의 나눔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혜로 소개하고(1절), 고린도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근거로 나눔을 권한다(9절). 마게도냐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생각하며 헌신했는지는 본문에 나오지 않지만, 바울은 두 교회의 나눔을 모두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서 나오는 일로 본다. 5:15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기 소유를 누구를 위해 쓸지도 새롭게 결정할 수 있다. 연보는 그 새 삶이 재물의 사용으로 나타나는 한 방식이다.&lt;/p&gt;&lt;h3&gt;구원하시는 주님과 응답하는 성도&lt;/h3&gt;&lt;p&gt;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위해 가난하게 되신 일과 성도들이 연보하는 일은 역할이 다르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새 삶을 여신다. 성도들은 그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성도의 부족을 채운다. 연보는 구원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에 응답하는 행동이다. 9절은 가난하게 되신 분을 “우리 주”라고 부르고, 5절은 마게도냐 성도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다고 말한다. 성도들이 속한 분은 주님이시므로, 연보를 맡은 지도자나 돕는 교회가 그분의 자리를 차지하여 다른 성도에게 무리한 희생을 요구할 수 없다.&lt;/p&gt;&lt;p&gt;그리스도께 받은 부요함은 드린 금액으로 얻거나 늘리는 것이 아니다. 적게 드린 사람과 많이 드린 사람은 같은 주님께 같은 은혜를 받았다. 가난한 성도도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한 사람이므로 도움만 받는 사람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던 마게도냐 교회들이 기쁨과 너그러움을 나누었듯이, 가난한 성도도 가진 작은 몫을 주께 드리고 다른 성도를 섬길 수 있다.&lt;/p&gt;&lt;h3&gt;배고픔을 채우시고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lt;/h3&gt;&lt;p&gt;요한복음 6장에서 만나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결된다. 예수께서는 굶주린 무리를 먹이시고(6:1-15), 만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다(6:31-35).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배고픔을 채우시고 죽음을 이기는 생명도 주신다. 바울이 15절에서 만나를 인용하여 다루는 것은 예루살렘 성도들의 먹을 것과 생계다.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께서 무리의 배고픔도 채우셨으므로, 교회는 영적인 은혜를 말한다는 이유로 지금 배고픈 성도의 사정을 외면할 수 없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형편에 맞게 자원하여 드림&lt;/h3&gt;&lt;p&gt;11-12절은 가진 것에 따라 완성하라고 하고, 13절은 주는 사람에게 곤고함을 떠넘기는 것을 나눔의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인은 헌금할 몫을 정할 때 현재 가진 것과 책임져야 할 생활을 정직하게 살필 수 있다. 기본적인 주거와 식사, 돌봐야 할 가족의 필요를 무시하면 주는 사람 자신이 곤경에 빠질 수 있다. 교회가 대출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지출을 요구하여 헌금을 늘리는 방식은 이 요청과 어긋난다. 가진 몫이 작아 많이 낼 수 없는 사람은 그 사실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하려는 마음과 실제로 가진 것에 따른 선물을 받으신다.&lt;/p&gt;&lt;p&gt;마게도냐 성도들이 힘에 지나도록 드린 일은 그들이 스스로 택한 희생이다. 교회가 그 사례를 들어 모든 성도에게 같은 정도의 부담을 요구하면 본문이 강조한 자발성을 잃는다. 바울도 그들의 간절함을 알렸지만 명령으로 말하지 않았다(8절). 사람들 앞에서 금액을 약속하게 하거나 서로 비교하여 더 내도록 몰아붙이는 일도 이 자발성과 어긋난다.&lt;/p&gt;&lt;h3&gt;약속한 연보를 마무리함&lt;/h3&gt;&lt;p&gt;자발성은 약속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고린도 교회는 일 년 전에 스스로 원하여 시작한 일을 이제 마쳐야 했다(10-11절). 이미 하겠다고 약속한 사람과 교회는 실제로 준비하고 마무리할 책임이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6:2에서 매주 수입에 따라 모아 두게 한 것처럼, 그 실행도 지금 가진 형편에 맞게 계획할 수 있다.&lt;/p&gt;&lt;h3&gt;실제 결핍을 채우고 받는 쪽을 존중함&lt;/h3&gt;&lt;p&gt;14절에서 나눔은 넉넉한 것으로 실제 부족을 채우는 일이다. 돕는 교회는 받는 교회에 실제로 무엇이 부족한지 살피고 그 필요를 채워야 한다. 14절의 상호성은 필요에 따라 도움이 오가는 관계이므로, 이전의 지원을 같은 금액으로 갚으라고 요구할 근거가 되지 않는다. 돈을 보낸 교회가 상대의 결정을 대신하거나 자기 계획을 그대로 따르라고 요구하면, 부족을 채우는 선물이 지배의 수단으로 바뀐다. 바울도 예루살렘 성도들이 연보를 받아 줄지를 두고 기도를 부탁했다(로마서 15:31). 주는 쪽은 받는 쪽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lt;/p&gt;&lt;h3&gt;가난한 성도를 존중하고 넉넉함을 돌아봄&lt;/h3&gt;&lt;p&gt;마게도냐 교회들은 기뻐하며 헌신했지만 환난과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2절). 그러므로 가난을 믿음이 부족한 증거로 삼거나, 더 많이 내면 형편이 나아질 것이라고 약속할 수 없다. 가난한 성도도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누리는 형제자매이며, 교회는 그의 헌신을 존중하면서 실제 결핍을 돌보아야 한다.&lt;/p&gt;&lt;p&gt;넉넉한 사람은 자신이 여유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다. 15절의 만나 이야기는 저마다 먹을 만큼 공급받은 결과를 기억하게 한다. 그 기억 앞에서 넉넉한 사람은 계속 늘려 가는 몫 가운데 다른 성도의 식사와 거처를 돕는 데 쓸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살필 수 있다. 교회의 재정도 기본 생활이 어려운 성도들의 부족을 실제로 채우는지 돌아볼 수 있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8:2,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8:2,”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2,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7,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8:7,”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7/&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우리를 향한 너희의 사랑’이라는 읽기가 이 절의 문맥에 더 적절해 보인다고 하면서도, UBS 헬라어 신약 편집자들이 NA28과 같은 더 어려운 읽기를 본문으로 따랐고 그 읽기에 ‘C’ 등급을 매겼다고 설명한다. 이 등급은 번역자가 두 읽기 가운데 어느 쪽이든 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7,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7/&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9,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8:9,”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9/&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11,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8:11,”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1/&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12,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8:12,”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13-14,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8:13-8:14,”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3-81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3-814/&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13-14,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3-81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3-814/&lt;/a&gt;.&lt;/li&gt;&lt;li&gt;&lt;em&gt;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는 이 목적절에 예루살렘이 고린도에게서 받은 물질적 도움에 영적 유익으로 보답한다는 생각은 없다고 보고, 고린도가 가난해질 차례가 오면 예루살렘이 도울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W. Robertson Nicoll, ed., &lt;em&gt;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8:13-14, Bible Hub,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8.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8.htm&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15,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8:15,”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5/&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15,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5/&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9,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9/&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8:16-24 신뢰받는 동역자들과 정직하게 섬기다</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8.16-24/</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8.16-24/</guid><description>고린도후서 8:16-24의 디도와 교회의 대표자들, 연보를 정직하게 맡아 전달할 책임, 사랑을 행동으로 나타내라는 요청을 해설합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디도의 간절함과 자원함 (16-17절)&lt;/h3&gt;&lt;p&gt;16절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 시작한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간절함(σπουδὴν, 스푸덴)은 성도들을 돕는 일에 기울이는 열심이며, “같은”과 “디도의 마음에도”는 디도가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고린도 성도들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8:1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의 나눔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불렀던 바울은 이제 그 일을 도울 사람의 마음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고백한다. 8:6에 따르면 디도는 이미 고린도 교회 가운데서 이 일을 시작한 사람이다. 바울은 대표단을 소개하면서 먼저 디도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 마음을 쓰는 사람임을 밝힌다.&lt;/p&gt;&lt;p&gt;17절은 디도의 간절함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졌음을 보여 준다. 그는 바울의 권함을 받았고,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자원하여 고린도로 나아갔다. 바울이 권했는데도 디도가 자원하여 나아갔다는 말은, 디도가 바울이 권하기 전부터 고린도에 가기를 원하고 있었다는 뜻이다.&lt;sup&gt;1&lt;/sup&gt; ‘자원하여’(αὐθαίρετος, 아우타이레토스)는 8:3에서 마게도냐 성도들이 힘에 지나도록 연보에 참여한 모습을 묘사한 말이기도 하다. 자원하여 낸 선물을 자원하여 나선 일꾼이 맡는다. ‘나아갔고’(ἐξῆλθεν, 엑셀텐)는 과거형이지만, 편지를 받아 읽는 고린도 성도들의 시점에서 쓴 서신적 부정과거로 보면 ‘지금 너희에게 가고 있다’는 뜻이 된다. 24절의 요청으로 보아 이 편지는 디도와 두 형제와 함께 고린도에 도착했을 것이다.&lt;sup&gt;2&lt;/sup&gt; 그렇다면 16-24절은 고린도 성도들 앞에 와 있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추천의 글이다.&lt;/p&gt;&lt;h3&gt;여러 교회가 칭찬하고 택한 형제 (18-19절)&lt;/h3&gt;&lt;p&gt;18절은 디도와 함께 보내는 형제를 소개한다. 그는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다. 원문은 그가 복음과 관련된 어떤 일로 칭찬받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해석자는 그가 복음을 전하는 일로 알려졌다고 본다.&lt;sup&gt;3&lt;/sup&gt; ‘모든 교회’의 범위도 분명하지 않다. 8:1의 마게도냐 교회들만 가리킨다면 고린도 성도들은 이 형제를 잘 몰랐을 것이고, 고린도 교회까지 포함한다면 그를 알았을 것이다.&lt;sup&gt;4&lt;/sup&gt; 바울은 그의 이름 대신 여러 교회가 알고 인정하는 복음 사역을 신뢰의 근거로 제시한다.&lt;/p&gt;&lt;p&gt;19절은 “이뿐 아니라”로 시작하여 더 공적인 근거를 덧붙인다. 이 형제는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아” 바울 일행과 동행한다. 본문은 어느 교회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를 택했는지 밝히지 않는다. 그가 함께하는 길은 이 연보를 전달하는 여정이며, 아마 예루살렘까지 이어질 것이다.&lt;sup&gt;5&lt;/sup&gt; 바울은 이 연보를 “우리가 맡은 은혜의 일”이라고 부른다. ‘은혜’(χάριτι, 카리티)는 8:6에서 디도가 고린도 교회 가운데서 성취하게 할 “이 은혜”와 같은 말이며, 여기서는 바울 일행이 맡아 전달하는 구체적인 선물을 가리킨다. 목적구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는 연보를 맡아 섬기는 일에 걸릴 수도 있고, 교회들이 형제를 택한 일에 걸릴 수도 있다.&lt;sup&gt;6&lt;/sup&gt; 원문에서 이 구는 ‘우리가 맡은’ 바로 뒤에 오므로 앞의 읽기가 자연스럽고, 동행자를 둔 이유는 20절이 따로 밝힌다. 바울은 연보를 맡아 전달하는 일로 주의 영광을 드러내고, 기꺼이 도우려는 자기 일행의 마음(προθυμίαν, 프로튀미안)을 보이려 한다.&lt;/p&gt;&lt;h3&gt;주 앞과 사람 앞에서 정직하게 다루는 연보 (20-21절)&lt;/h3&gt;&lt;p&gt;20절은 여러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이유를 밝힌다. ‘이것을 조심함은’(στελλόμενοι τοῦτο, 스텔로메노이 투토)은 바라지 않는 일을 경계하여 피한다는 뜻이고, 목적은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거액의 연보’(τῇ ἁδρότητι ταύτῃ, 테 하드로테티 타우테)는 문자적으로 ‘이 풍성함’이며, 개역개정은 그것이 가리키는 많은 액수의 연보를 풀어 옮겼다. 19절에서 ‘은혜’라고 부른 선물을 20절은 ‘거액’이라고 부르고, 두 절 모두 그것을 “우리가 맡은” 일로 설명한다. 은혜의 선물은 실제로 큰돈이었고, 그 돈을 맡은 사람은 의심을 받을 수 있었다. 바울은 자신이 연보를 자기 이익을 위해 쓴다는 의심, 그리고 남의 돈을 다루면서 부정직하거나 서툴다는 인상을 피하려 했다.&lt;sup&gt;7&lt;/sup&gt; 그래서 그는 교회들이 택한 사람과 함께 연보를 옮겨, 다른 사람들도 자기 일행의 정직함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lt;/p&gt;&lt;p&gt;21절은 바울이 이렇게 조심하는 이유를 밝힌다. ‘조심하려 함이라’로 옮긴 동사(προνοοῦμεν, 프로노우멘)는 미리 생각하여 마음에 둔다는 뜻이며, 20절이 부정적이고 구체적으로 말한 내용을 긍정적이고 일반적인 말로 다시 표현한다.&lt;sup&gt;8&lt;/sup&gt; 개역개정은 두 절의 동사를 모두 ‘조심’으로 옮겼지만, 20절은 비방을 피하는 경계를, 21절은 선한 일을 미리 헤아리는 준비를 말한다. 바울 일행은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καλὰ, 칼라)을 헤아린다. 이 문장은 칠십인역 잠언 3:4의 “주와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미리 헤아리라”(προνοοῦ καλὰ ἐνώπιον κυρίου καὶ ἀνθρώπων, 프로노우 칼라 에노피온 퀴리우 카이 안트로폰)의 어휘와 생각을 반영한다.&lt;sup&gt;9&lt;/sup&gt; 히브리어 본문을 따른 개역개정 잠언 3:4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는 약속이므로, 두 본문의 표현이 겹치는 곳은 칠십인역이다.&lt;/p&gt;&lt;p&gt;21절의 ‘주 앞’은 하나님 앞을, ‘사람 앞’은 지켜보는 사람들의 판단 앞을 가리킨다.&lt;sup&gt;10&lt;/sup&gt; 바울은 4:2에서도 속임으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자신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21절은 이 태도를 연보를 다루는 일에 적용한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할 뿐 아니라, 사람들도 그 정직을 확인할 수 있게 일을 처리한다. 연보를 낸 교회와 받을 성도들은 맡은 사람들이 정직하게 일하는지 알 수 있어야 하며, 사도인 바울도 이 책임에서 빠지지 않는다.&lt;/p&gt;&lt;h3&gt;여러 번 확인된 형제 (22절)&lt;/h3&gt;&lt;p&gt;22절은 세 번째 사람을 소개한다. 바울은 “우리는 그가 여러 가지 일에 간절한 것을 여러 번 확인하였거니와”라고 말한다. ‘확인하였거니와’(ἐδοκιμάσαμεν, 에도키마사멘)는 시험하고 살펴 인정했다는 뜻이다. 첫 형제가 여러 교회의 칭찬과 선택으로 인정받았다면, 이 형제는 바울 일행이 여러 일에서 거듭 지켜본 성실함으로 인정받는다. 그는 지금 고린도 성도들을 크게 믿기 때문에 더욱 간절하다.&lt;/p&gt;&lt;h3&gt;바울의 동역자 디도와 교회들의 사자인 형제들 (23절)&lt;/h3&gt;&lt;p&gt;23절은 세 사람을 두 무리로 나누어 추천을 정리한다. 개역개정의 “디도로 말하면”과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은 원문의 εἴτε ... εἴτε(에이테 ... 에이테) 구문을 옮긴 말이다. 디도는 바울의 ‘동료’(κοινωνὸς, 코이노노스)이자 고린도 성도들을 위한 ‘동역자’(συνεργός, 쉬네르고스)다. 앞말은 가까이 함께하는 동반자를, 뒷말은 함께 일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디도는 고린도 성도들을 돕는 바울의 동역자로 소개된다.&lt;sup&gt;11&lt;/sup&gt; 두 형제는 ‘여러 교회의 사자들’(ἀπόστολοι ἐκκλησιῶν, 아포스톨로이 에클레시온)이다. 여기서 ἀπόστολοι는 열두 사도를 가리키지 않고 교회들이 보낸 사람들을 뜻한다.&lt;sup&gt;12&lt;/sup&gt; 디도는 바울과의 관계로, 두 형제는 그들을 보낸 교회들로 신뢰의 근거를 얻는다.&lt;/p&gt;&lt;h3&gt;그리스도의 영광이라 불린 두 형제 (23절)&lt;/h3&gt;&lt;p&gt;바울은 두 형제를 ‘그리스도의 영광’(δόξα Χριστοῦ, 독사 크리스투)이라고도 부른다. 원문에서 이 말은 두 번째 εἴτε 절 안에서 “우리 형제들”, “여러 교회의 사자들”에 이어 같은 사람들을 설명한다. 이 칭호가 디도까지 포함한 세 사람 모두를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lt;sup&gt;13&lt;/sup&gt; 그러나 23절은 εἴτε로 디도와 형제들을 나누고, 디도에 관한 절은 ‘동역자’에서 끝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광’은 두 형제에게 붙은 칭호다.&lt;/p&gt;&lt;p&gt;사람을 누군가의 ‘영광’이라고 부르는 말은 그 사람이 그분을 존귀하게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여러 번역이 이 구를 ‘그리스도께 영예가 되는 사람들’,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옮긴다.&lt;sup&gt;14&lt;/sup&gt; 이 칭호를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신실하게 전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읽는 해석도 있다.&lt;sup&gt;15&lt;/sup&gt; 그러나 16-23절에서 복음으로 칭찬받는 사람은 18절의 첫 형제이고, 22절의 형제는 여러 일에서 거듭 확인된 간절함으로 추천받는다. 두 형제 모두에게 붙은 이 칭호는 18절의 복음 사역, 19절의 교회들의 선택, 22절의 확인된 성실함으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19절에서 연보를 섬기는 목적이 주의 영광이었다면, 23절은 그 일을 맡은 사람들 자신을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부른다.&lt;/p&gt;&lt;h3&gt;사랑의 증거를 보이라는 요청 (24절)&lt;/h3&gt;&lt;p&gt;24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하여 앞의 추천을 근거로 고린도 교회에 응답을 요청한다. 원문에는 정동사가 없고 분사 ἐνδεικνύμενοι(엔데이크뉘메노이)가 문장의 중심 동작을 나타낸다. 이 문장은 앞의 추천에서 결론을 끌어내며 고린도 성도들에게 직접 말하므로, 이 분사는 요청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개역개정의 명령형 “보이라”는 이 요청을 적절하게 옮긴다. 보여야 할 것은 “너희의 사랑과 너희에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다. 원문은 사랑의 대상을 밝히지 않아, 디도와 두 형제를 향한 사랑일 수도 있고 바울을 향한 사랑일 수도 있다.&lt;sup&gt;16&lt;/sup&gt; 그 증거를 받을 사람이 대표단(εἰς αὐτοὺς, 에이스 아우투스)이므로, 고린도 성도들의 사랑은 대표단을 맞이하는 태도로 드러난다. 바울의 자랑도 이 일에 걸려 있다. 9:2-3에서 바울은 마게도냐인들에게 고린도 교회의 준비를 자랑했고, 그 자랑이 헛되지 않게 하려고 형제들을 보낸다고 말한다. “여러 교회 앞에서”는 대표단을 보낸 교회들, 또는 더 넓은 교회들이 고린도 성도들의 사랑을 보게 된다는 뜻이다.&lt;sup&gt;17&lt;/sup&gt; 고린도 교회가 대표단을 어떻게 맞이하고 연보를 어떻게 준비하는지가 그 교회들에게 알려진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헤아림&lt;/h3&gt;&lt;p&gt;16-2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모인 선물을 맡아, 하나님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신뢰받을 수 있게 다룬다. 21절에서 바울은 인용 표시 없이 칠십인역 잠언 3:4의 “주와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미리 헤아리라”는 표현을 자기 문장에 담아 이 원칙을 말한다. 잠언 3:3-4는 인자와 진리를 마음판에 새기라고 권한 뒤, 그렇게 사는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받을 평가를 말한다. 잠언에서 하나님 앞의 신실함이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는 삶으로 이어지듯,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지키는 정직을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낸다.&lt;/p&gt;&lt;h3&gt;공동체가 인정한 사람과 확인할 수 있는 전달&lt;/h3&gt;&lt;p&gt;이 원칙은 고린도 교회가 이 연보에 관해 처음 지침을 받을 때부터 나타난다. 고린도전서 16:1-4에서 바울은 매주 첫날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 자신이 갈 때 연보를 거두지 않게 하라고 말한다. 또 고린도 교회가 인정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주어 선물을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게 하고, 자신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과 함께 가겠다고 한다. 바울은 처음부터 연보를 혼자 맡지 않고 교회가 인정한 사람들이 선물을 옮기게 했다. 18-23절에서 여러 교회가 택한 형제가 바울 일행과 동행하는 것도 같은 원칙을 따른다.&lt;/p&gt;&lt;p&gt;에스라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져갈 은과 금과 기물을 달아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맡기고, 그들과 기물이 여호와께 거룩하다고 말하며, 예루살렘에서 다시 달아 넘길 때까지 지키라고 한다(에스라 8:24-29). 일행은 길에서 하나님의 손이 자신들을 도와 대적에게서 건지셨다고 고백하고(에스라 8:31), 도착한 뒤에는 모든 것을 세고 달아 그 무게를 기록한다(에스라 8:33-34). 에스라 일행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길을 떠났고, 도착해서는 사람들 앞에서 예물의 무게를 확인했다. 에스라의 예물은 성전을 위한 것이고 바울의 연보는 가난한 성도를 위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속한 선물을 맡은 사람은 그것을 자기 소유와 구별하고 목적지에 실제로 이르렀음을 다른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두 본문은 이어진다.&lt;/p&gt;&lt;p&gt;사도행전 6:1-6은 나눔을 맡을 사람을 세우는 방식에서 주제적 유사성을 보여 준다. 매일의 구제에서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빠진다는 불평이 일어나자, 사도들은 공동체에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게 하여 이 일을 맡긴다. 공동체가 아는 평판과 공동체의 선택은 18-19절에서 첫 형제를 추천하는 근거와 닮았다. 나눔을 맡을 사람을 신중하게 세우는 일은 나눔을 받는 약한 이들을 돌보는 일이다.&lt;/p&gt;&lt;h3&gt;정직한 전달로 이루어지는 교회들의 교제&lt;/h3&gt;&lt;p&gt;신뢰를 지키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연보의 목적에 있다. 로마서 15:25-27에서 바울은 이 연보를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섬기는 일로 설명하고, 이방인 신자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받았으므로 육적인 것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15:31에서는 예루살렘에 대한 자신의 섬김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여기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다. 연보는 이방인 교회들과 예루살렘 성도들 사이의 교제였고, 이 교제는 선물이 정직하게 전달되고 기꺼이 받아들여질 때 이루어진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그리스도의 은혜와 주의 영광을 위한 섬김&lt;/h3&gt;&lt;p&gt;대표단의 섬김은 8:9에서 바울이 밝힌 그리스도의 은혜에 뿌리를 둔다. 바울은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는 사실을 근거로 고린도 성도들에게 나눔을 권했다. 그 은혜에 응답하여 모은 선물은 디도와 두 형제의 손을 거쳐 필요한 성도들에게 이른다. 맡은 사람이 그 선물을 다른 목적에 쓰면 선물을 낸 사랑도, 도움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필요도 손상된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응답하는 나눔은 그 선물을 정직하게 옮기는 일꾼들의 수고를 거쳐 완성된다.&lt;/p&gt;&lt;p&gt;19절에서 바울은 연보를 맡아 섬기는 목적을 주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9:12-13은 이 영광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여 준다. 연보는 성도들의 부족을 채우고, 받는 이들은 고린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여 후하게 나눈 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 감사는 선물이 맡긴 목적대로 도착할 때 일어난다. 대표단이 연보를 정직하게 맡아 전달하는 일은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lt;/p&gt;&lt;h3&gt;그리스도의 영광이라 불리는 일꾼&lt;/h3&gt;&lt;p&gt;23절에서 바울은 교회들이 보낸 두 형제를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부른다. 이 칭호는 두 형제가 자기 노력이나 자기 칭찬으로 얻은 명예가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능력으로 세우신 사람들이다.&lt;sup&gt;18&lt;/sup&gt; 영광은 그리스도께 속하고, 두 형제는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사람으로서 존중받는다. 바울은 먼저 16절에서 디도의 간절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19절에서 섬김의 목적을 주의 영광으로 밝힌 뒤, 24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이라고 요청한다. 일꾼을 존중하는 일은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심을 인정하는 일이다.&lt;/p&gt;&lt;p&gt;빌립보서 2:25-30의 에바브로디도는 교회가 보낸 일꾼을 어떻게 맞아야 하는지 보여 준다. 바울은 그를 빌립보 교회의 사자이자 자신의 쓸 것을 돕는 사람으로 소개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렀고,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그를 주 안에서 기쁨으로 영접하고 이런 사람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권한다. 교회가 보낸 사람이 물질을 전달하는 일을 맡았어도 그 수고는 그리스도의 일에 속한다. 24절에서 바울이 대표단에게 사랑을 보이라고 요청하는 것도 이들이 그리스도의 일을 맡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lt;/p&gt;&lt;h3&gt;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종의 정직&lt;/h3&gt;&lt;p&gt;고린도후서 4:5에서 바울은 자신을 전파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예수를 위하여 자신들이 성도들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고 말한다. 23절에서 디도를 ‘너희를 위한 동역자’로 소개하는 말도 이 관계를 따른다.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사람은 성도들을 위해 일하며, 공동체가 맡긴 돈을 다룰 때에도 성도들이 뜻한 섬김이 이루어지도록 책임을 진다. 그 돈은 맡은 사람의 영향력이나 기호를 위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질문에 답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확인하는 일은 이 종의 자리에 어울린다.&lt;/p&gt;&lt;p&gt;맡은 선물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는 동기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나온다. 고린도후서 5:14-15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사람은 맡은 선물을 자기 몫으로 돌리지 않는다. 20-21절에서 바울이 비방받지 않도록 조심하고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을 헤아리는 모습은 그리스도와 성도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의 태도와 맞는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알린 목적대로 헌금을 다룰 책임&lt;/h3&gt;&lt;p&gt;바울은 연보를 ‘은혜’라고 부르면서도 그것을 맡아 옮길 사람들을 자세히 소개했다. 다른 교회나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금을 모으는 오늘의 교회도 선한 목적을 알릴 때 그 목적을 실제로 지킬 책임을 진다. 모인 헌금은 맡은 사람이 처음 알린 목적과 다르게 임의로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다.&lt;/p&gt;&lt;h3&gt;공동체가 확인하는 재정 책임&lt;/h3&gt;&lt;p&gt;바울이 대표단을 추천한 근거는 구체적이다. 첫 형제는 복음 사역으로 여러 교회에서 칭찬받고 교회들의 선택을 받았으며, 둘째 형제는 여러 일에서 여러 번 성실함이 확인되었다. 오늘 교회가 재정을 맡길 사람을 세울 때도 공동체가 아는 행적과 확인된 성실함을 묻는다. 신뢰할 만한 사람을 세우는 일은 그 선물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기도 하다.&lt;/p&gt;&lt;p&gt;바울은 디도를 신뢰하면서도 여러 교회가 택한 형제를 동행하게 했고, 21절에서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을 헤아린다고 말했다. 선물을 낸 공동체는 그 선물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 정당한 관심을 가진다. 그러므로 교회는 재정에 관한 질문을 곧바로 믿음이나 충성의 부족으로 여기지 않는다. 질문하는 사람은 선물을 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묻고, 맡은 사람은 개인적으로 신뢰받는다는 이유로 설명을 생략하지 않고 선물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공동체가 알 수 있게 한다. 이 정직함은 교회 밖에서 공동의 돈이나 후원금을 맡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요구된다.&lt;/p&gt;&lt;h3&gt;강요 없는 사랑의 증거와 일꾼에 대한 존중&lt;/h3&gt;&lt;p&gt;24절은 고린도 교회에 여러 교회 앞에서 사랑의 증거를 보이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8:12-14에서 바울은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신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고린도 성도들은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다른 교회들 앞에서 보이라는 이 요청을 근거로 사람들을 서로 비교하며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를 내게 하면, 바울이 앞에서 밝힌 원칙과 어긋난다. 사랑의 증거는 각자의 형편 안에서 기꺼이 준비한 선물과 대표단을 맞이하는 태도로 드러난다.&lt;/p&gt;&lt;p&gt;바울은 교회들이 보낸 형제들을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부르고, 고린도 성도들에게 대표단 모두에게 사랑을 보이라고 권한다. 오늘의 공동체도 헌금을 맡아 처리하고 전달하는 사람들의 수고를 그리스도의 일로 알아보고 존중한다. 맡은 사람은 그 존중에 정직함으로 응답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8:17,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8:17,”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7/&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17,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7/&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18,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8:18,”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8/"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8/&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18,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8/"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8/&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19,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8:19,”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9/&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대부분의 번역이 이 목적구를 ‘우리가 맡은’ 섬김과 연결하고, Anchor Bible은 교회들이 형제를 택한 일과 연결한다고 소개한다. 핸드북은 뒤의 연결을 따르면 바울이 형제의 동행으로 자신이 연보를 무책임하거나 부정직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선의를 보이는 셈이 된다고 설명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19,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19/&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20,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8:20,”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0/"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0/&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21,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8:21,”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1/&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21,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1/&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21,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1/&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23,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8:23,”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3/&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23,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3/&lt;/a&gt;.&lt;/li&gt;&lt;li&gt;Emerson과 Morgan은 Murray Harris의 해석을 따라 이 구가 디도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 사자를 가리킨다고 보고, 이 칭호의 내용을 그들의 복음 사역으로 설명한다. Matthew Y. Emerson and Christopher W. Morgan, “The Glory of God in 2 Corinthians,” &lt;em&gt;Southern Baptist Journal of Theology&lt;/em&gt; 19, no. 3 (2015): 24,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Emerson-and-Morgan-from-ST-516-2015-SBJT-19.3.pdf"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Emerson-and-Morgan-from-ST-516-2015-SBJT-19.3.pdf&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23,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3/&lt;/a&gt;.&lt;/li&gt;&lt;li&gt;Emerson과 Morgan은 이 표현의 뜻이 모호하다고 보고, 그리스도의 임재를 지니고 온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한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을 신실하게 선포한다는 뜻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한다. Emerson and Morgan, “Glory of God in 2 Corinthians,” 27,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Emerson-and-Morgan-from-ST-516-2015-SBJT-19.3.pdf"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Emerson-and-Morgan-from-ST-516-2015-SBJT-19.3.pdf&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24,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8:24,”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4/&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8:24,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824/&lt;/a&gt;.&lt;/li&gt;&lt;li&gt;Emerson and Morgan, “Glory of God in 2 Corinthians,” 30, &lt;a href="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Emerson-and-Morgan-from-ST-516-2015-SBJT-19.3.pdf" rel="noopener"&gt;https://equip.sbts.edu/wp-content/uploads/sites/5/2015/11/Emerson-and-Morgan-from-ST-516-2015-SBJT-19.3.pdf&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9:1-15 기꺼운 나눔이 감사와 교제를 낳다</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9.1-15/</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9.1-15/</guid><description>고린도후서 9:1-15에서 연보의 준비, 기꺼이 드리는 마음, 의의 열매와 성도들의 감사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살핍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성도를 섬기는 일과 일 년 전의 원함 (1-2절)&lt;/h3&gt;&lt;p&gt;바울은 9장을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라는 말로 시작하고, 곧이어 연보의 준비를 구체적으로 권한다. 고린도 성도들이 이미 참여할 마음을 보였으므로 그 선의를 먼저 인정하며 말을 꺼내는 것이다. “성도를 섬기는 일”은 8:4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이 참여하기를 간청했다는 “성도 섬기는 일”과 원문에서 같은 구절이며, 바울은 돈을 모아 보내는 일을 ‘섬김’(τῆς διακονίας, 테스 디아코니아스)이라고 부른다. 로마서 15:25-26에 따르면 이 연보는 예루살렘 성도 가운데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갈라디아서 2:10에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바울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고, 바울은 그 일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다고 말한다. 고린도의 연보도 바울이 힘써 온 이 일, 곧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는 섬김에 속한다.&lt;/p&gt;&lt;p&gt;2절은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밝힌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원함”을 안다. 이 말(προθυμίαν, 프로튀미안)은 8:11-12에서 “마음에 원하던 것”, “할 마음”으로 옮긴 말과 같다.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아가야가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고 자랑했고, 원문의 현재형 동사(καυχῶμαι, 카우코마이)가 보여 주듯 이 편지를 쓰는 지금도 그렇게 자랑하고 있다. 고린도는 로마 속주 아가야의 중심 도시였고, 그 북쪽 속주 마게도냐에는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의 교회가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 회중을 두고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고 말한다. 8:1-5에서는 반대로 마게도냐 교회들이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자원하여 참여한 모습을 고린도에 알렸다. 바울은 두 지역 교회의 열심을 서로에게 알려 양쪽을 분발하게 한다.&lt;/p&gt;&lt;h3&gt;헛되지 않을 자랑과 미리 준비할 연보 (3-5절)&lt;/h3&gt;&lt;p&gt;그러나 자랑과 실제 준비 사이에는 아직 거리가 있었다. 3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을 보내는 목적을 밝힌다. 고린도 회중을 위한 자랑이 이 일에서 헛되지 않게 하고, 바울이 말한 대로 그들이 준비되어 있게 하려는 것이다. 4절은 마게도냐 사람들이 바울과 함께 가서 고린도 회중이 준비하지 않은 것을 보게 될 경우를 내다본다. 그렇게 되면 바울은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한다. “너희는 고사하고”라는 삽입구는 바울보다 고린도 회중이 더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리라는 점을 에둘러 드러낸다.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게 하여 일 년 전에 시작한 일을 끝내라고 재촉한다. 이 재촉은 회중에게 실제 부담이 되는 압박이다.&lt;/p&gt;&lt;p&gt;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을 먼저 보내기로 한다. 이 파송은 8:16-24와 이어진다. 그곳에서 바울은 여러 교회가 택한 형제를 디도와 함께 보내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비방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밝혔다(8:19-20). 5절에 따르면 형제들은 “먼저 너희에게 가서” 고린도 회중이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마게도냐 사람들과 함께 도착한 뒤에야 급히 돈을 모으는 상황을 피하려 한다. 고린도전서 16:2에서도 그는 자신이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도록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미리 모아 두라고 했다. 8-9장에서 바울이 요청하는 것은 일 년 전에 시작했으나 아직 끝내지 못한 연보를 완성하는 일이며, 그 완성은 마음에서 우러난 기꺼운 선물이어야 한다.&lt;sup&gt;1&lt;/sup&gt;&lt;/p&gt;&lt;p&gt;5절 끝의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는 원문에서 ‘복’(εὐλογίαν, 율로기안)과 ‘탐욕’(πλεονεξίαν, 플레오넥시안)을 대조한다. 바울은 앞에서 “전에 약속한 연보”를 말할 때에도 같은 ‘복’이라는 말을 썼다. 이 문맥에서 그 말은 받는 이에게 복이 되도록 넉넉히 베푸는 선물을 가리킨다. 대조되는 말은 본래 더 많이 차지하려는 탐욕을 뜻하며, 이 문장에서는 두 가지로 읽을 수 있다. 하나는 주는 사람이 아까워하며 내거나 강요에 못 이겨 낸 선물이라는 읽기이다.&lt;sup&gt;2&lt;/sup&gt; 다른 하나는 거두는 쪽이 짜낸 돈이라는 읽기로, 바울이 강압이나 부적절한 방법으로 돈을 얻어 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게 한다는 해석이다.&lt;sup&gt;3&lt;/sup&gt; 5절에서는 뒤의 읽기가 문맥에 더 잘 맞는다. 이 문장은 형제들을 미리 보내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고, 같은 계열의 동사가 7:2의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와 12:17-18의 “이득을 취하더냐”에 쓰였다. 두 곳 모두 바울과 그가 보낸 사람들이 고린도 성도들에게서 부당하게 취하지 않았다는 변론이다. 개역개정의 “억지”도 이 읽기에 가깝다. 주는 사람의 인색함은 바울이 6-7절에서 따로 다룬다.&lt;/p&gt;&lt;h3&gt;넉넉히 심고 기꺼이 드리는 연보 (6-7절)&lt;/h3&gt;&lt;p&gt;6절은 심고 거두는 농사의 경험으로 관대함을 권한다. “적게”(φειδομένως, 페이도메노스)는 아끼며 인색하게 심는 태도를 가리키고, “많이”로 옮긴 말(ἐπ’ εὐλογίαις, 에프 율로기아이스)에는 5절에서 선물을 가리킨 ‘복’이 다시 쓰였다. 넉넉하게 심는 일은 받는 이에게 복이 되는 선물을 베푸는 일이다. 무엇을 거두는지는 이어지는 8-12절이 풀어 준다. 하나님은 성도를 모든 일에 넉넉하게 하시고(8절),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며 그 씨를 풍성하게 하시고 의의 열매를 더하신다(10절). 그렇게 넉넉해진 성도는 계속 너그럽게 나누고(11절), 그 나눔으로 성도들의 부족이 채워지며 하나님께 감사가 넘친다(12절). 수확에는 먹을 양식과 다시 심을 씨라는 하나님의 실제 공급이 들어 있고, 그 공급은 다시 나눔으로 이어진다. 6절을 낸 만큼 재산이 불어난다는 약속으로 읽으면 이 흐름을 놓친다.&lt;/p&gt;&lt;p&gt;7절은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하라고 말한다. “정한 대로”(προῄρηται, 프로에레타이)는 미리 마음으로 결정해 두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회중 전체에 권하면서도 얼마를 낼지는 각 사람이 결정하게 한다. “인색함으로나”로 옮긴 말(ἐκ λύπης, 에크 뤼페스)은 직역하면 ‘슬픔에서’이며, 내면서 아까워하고 속상해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억지로”(ἐξ ἀνάγκης, 엑스 아낭케스)는 내면의 도덕적 의무감에 밀려서든 다른 사람들의 압박에 밀려서든 강제로 하는 것을 뜻한다.&lt;sup&gt;4&lt;/sup&gt; 바울은 이 두 가지를 배제하고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는 이유를 덧붙인다. 이 문장은 칠십인역 잠언 22:8에 덧붙은 구절을 느슨하게 인용한 것이다.&lt;sup&gt;5&lt;/sup&gt;&lt;/p&gt;&lt;p&gt;7절은 2-5절의 재촉에 한계를 정한다.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들 앞에서 당할 부끄러움을 언급하여 고린도 회중에게 실제 부담을 주었다. 그러나 그가 재촉한 것은 회중이 일 년 전에 스스로 원하고 시작한 일을 끝내는 것이었다(8:10-11). 얼마를 낼지는 각 사람의 마음에 맡겼고, 8:11-12에서는 “있는 대로” 완성하라고 하면서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것이라고 말했다. 약속을 지키라는 요청과 억지로 하지 말라는 요청 사이의 긴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바울은 형제들을 미리 보내고 7절의 원칙을 덧붙여, 부끄러움을 피하려고 억지로 내는 연보가 아니라 각자 정한 대로 기꺼이 드리는 연보가 준비되기를 바란다.&lt;/p&gt;&lt;h3&gt;착한 일을 위해 공급하시는 하나님 (8-10절)&lt;/h3&gt;&lt;p&gt;8절에서 바울은 각 사람의 결정에서 하나님의 공급으로 논의를 옮긴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실 수 있고, 그 목적은 성도들이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것이다. 개역개정에도 드러나듯 ‘모든’과 ‘항상’이 거듭 나오고, 하나님께 받은 넘침이 착한 일의 넘침으로 이어진다. 10-11절이 씨와 양식, “모든 일에 넉넉하여”를 말하므로 이 은혜에는 생활과 나눔에 필요한 물질적 공급도 들어 있다. “넉넉하여”로 옮긴 말(αὐτάρκειαν, 아우타르케이안)은 빌립보서 4:11의 “자족하기를”과 같은 계열이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궁핍하든 풍부하든 어떤 형편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8절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넉넉함이 “모든 착한 일”로 향하므로, 필요한 것을 갖추어 선한 일에 쓸 수 있는 충분함을 가리킨다.&lt;/p&gt;&lt;p&gt;9절은 “기록된 바”라는 말로 시편 112:9를 인용한다.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9절 안에는 “그”가 누구인지 나오지 않으므로 8절의 하나님을 주어로 읽을 여지도 있다. 그러나 시편 112편에서 재물을 흩어 주는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의인이고, 10절이 “너희 의의 열매”를 말하므로, 바울은 이 인용으로 고린도 성도들이 살아갈 관대한 삶을 그린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때 “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가난한 이에게 베푸는 의로운 행실이다. 시편 인용은 8절의 “착한 일”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고 10절의 “의의 열매”로 이어진다.&lt;/p&gt;&lt;p&gt;10절은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급을 말한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는 이사야 55:10의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겹치는 표현이다. 그 하나님이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신다. 양식은 지금 먹고 살 것을, 씨는 다시 심을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성도의 생활을 돌보시고, 그들이 계속 나눌 수 있도록 심을 것을 늘리신다. 바울이 약속하는 증가는 다시 나눌 수 있는 심을 것과 의의 열매의 증가이며, 그 공급이 나눔으로 이어질 때 이웃의 부족이 채워진다.&lt;/p&gt;&lt;h3&gt;부족을 채우고 감사로 넘치는 봉사 (11-12절)&lt;/h3&gt;&lt;p&gt;11절은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로 시작한다. 이 말(πλουτιζόμενοι, 플루티조메노이)은 ‘부하게 되다’라는 뜻의 수동형 분사로, 성도들을 부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전제한다. 8:9에서 그리스도의 가난으로 성도들이 부요하게 되었다고 할 때에도 같은 계열의 동사가 쓰였지만, 두 구절의 부요는 내용이 다르다. 8:9는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주신 구원의 부요를 말하고, 11절은 성도들이 너그럽게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이 “모든 일에” 넉넉하게 하시는 공급을 말한다. 그 넉넉함은 “너그럽게 연보를 함”(εἰς πᾶσαν ἁπλότητα, 에이스 파산 하플로테타)으로 향한다. 이 명사는 순전함이나 한마음을 뜻할 수도 있지만, 8:2에서 마게도냐 교회의 “풍성한 연보”로 옮긴 말과 같으므로 여기서는 아낌없이 나누는 관대함이 알맞다. 이 관대함은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낳는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연보를 전달하는 사람이고, 받는 이들이 감사를 드리는 대상은 하나님이시다.&lt;/p&gt;&lt;p&gt;12절은 그 감사가 어떻게 생기는지 설명한다. “이 봉사의 직무”에서 “직무”는 1절의 “섬기는 일”과 같은 말이고, “봉사”(λειτουργίας, 레이투르기아스)는 공동체를 위한 공적 봉사나 제사의 직무에도 쓰이던 말이다. 바울은 연보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봉사로 본다. 이 봉사는 먼저 성도들의 “부족한 것”(τὰ ὑστερήματα, 타 휘스테레마타), 곧 실제로 모자란 것들을 채운다. 8:14에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한다고 할 때에도 같은 명사가 쓰였다. 이 봉사는 또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넘친다. 감사가 강조되어도 물질의 필요를 채우는 목적은 사라지지 않으며, 필요가 채워진 일 자체가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된다. 개역개정의 “넘쳤느니라”는 이미 일어난 일처럼 읽히지만, 원문은 현재 분사(περισσεύουσα, 페리세우우사)로 이 봉사의 성격을 말한다. 연보는 아직 예루살렘에 전달되지 않았으므로 바울은 감사가 넘칠 것을 내다보며 말한다.&lt;/p&gt;&lt;h3&gt;복음 고백의 순종과 받는 이들의 간구 (13-14절)&lt;/h3&gt;&lt;p&gt;13절은 받는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를 말한다.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에서 ‘증거’(δοκιμῆς, 도키메스)는 시험을 거쳐 드러난 진실함을 뜻한다. 8:8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한다고 했는데, 13절에서는 연보라는 봉사가 그 증거가 된다. “영광을 돌리고”로 옮긴 복수 분사의 주체는 연보를 받을 예루살렘 성도들이다. 그들이 영광을 돌리는 이유는 둘이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너희 고백의 순종’이며, 개역개정은 ‘고백’(ὁμολογίας, 호몰로기아스)을 “진실히 믿고”로 풀었다. 고린도 성도들이 고백한 복음은 연보라는 순종의 행동으로 드러난다. 다른 하나는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이다. 여기서 ‘연보’(κοινωνίας, 코이노니아스)는 나눔과 참여, 교제를 뜻하고, “후한”은 11절에서 관대함으로 읽은 말과 같다. 바울은 이 교제가 예루살렘 성도들과 “모든 사람”을 향한다고 말한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이방 회중의 연보에서 그들에게도 같은 복음이 주어졌음을 알아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lt;/p&gt;&lt;p&gt;14절은 받는 이들의 응답을 이어 말한다. 그들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그들을 “사모”한다. 이 동사는 간절히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그들이 그렇게 응답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 때문이다. 받는 이들은 자신을 도운 사람들 안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재물을 받은 공동체가 준 공동체를 기억하며 간구하고, 두 공동체는 같은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가까워진다. 이 간구와 그리움은 연보가 전달된 뒤에 바울이 기대하는 응답이며, 그는 이 교제를 바라보며 연보를 권한다.&lt;/p&gt;&lt;h3&gt;말할 수 없는 은사에 대한 감사 (15절)&lt;/h3&gt;&lt;p&gt;15절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는 탄성으로 끝난다. 원문의 첫 단어(Χάρις, 카리스)는 14절에서 “지극한 은혜”로 옮긴 명사이며 여기서는 “감사”를 뜻한다. 8:16에서도 바울은 같은 표현으로 디도의 마음에 간절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감사의 이유는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이다. ‘은사’(δωρεᾷ, 도레아)는 값없이 주는 선물이고, “말할 수 없는”(ἀνεκδιηγήτῳ, 아넥디에게토)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울은 이 선물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이 선물을 두고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주신 은혜와 그 결과인 유대인과 이방인 교회의 연합으로 보는 해석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해석이 있다.&lt;sup&gt;6&lt;/sup&gt; 15절에 가장 가까운 단서는 14절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이며, 바울은 8:1에서 이 연보 권면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로 시작했다. 8:9는 그 은혜의 근원을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일에서 찾는다. 따라서 15절의 선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것이 문맥에 가장 맞다. 9장에서 그 은혜는 이방 회중의 관대한 나눔과 예루살렘 성도들의 감사와 기도로 나타난다. 바울이 그리스도 자신을 선물로 지목하는지는 원문만으로 정할 수 없지만, “말할 수 없는”이라는 표현은 한 번의 연보가 낳은 결과보다 큰 하나님의 선물에 어울린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시편의 의인과 씨를 주시는 하나님&lt;/h3&gt;&lt;p&gt;9장에서 바울이 연보를 권하는 논리는 하나님의 공급에서 시작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 끝난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넉넉하게 주시고, 성도는 그것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며, 부족이 채워진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한다. 바울은 이 흐름을 두 구약 본문으로 뒷받침한다. 9절은 시편 112:9를 인용하여 가난한 이에게 흩어 주는 의인을 보여 주고, 10절은 이사야 55:10의 표현을 빌려 씨와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묘사한다. 시편은 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사야는 그에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밝힌다.&lt;/p&gt;&lt;p&gt;시편 112편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사람의 복을 노래한다. 그 의인은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은혜를 베풀어 꾸어 주고,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을 굳게 하여 여호와를 의지한다. 시편은 그의 집에 부와 재물이 있다고 말하는 한편(시편 112:3),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다고도 말한다(112:9). 바울은 시편 112:9 가운데 흩어 준 행동과 영원히 있는 의를 인용하고, 의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라는 뒷부분은 인용하지 않는다. 고린도 성도들 앞에 제시된 모범은 재산을 늘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가진 것을 가난한 이에게 내어 주는 의인이다. 시편에서 그 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행실이고, 바울은 10절에서 그 “의의 열매”를 더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관대한 행실도 사람이 쌓는 공적이기보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열매다.&lt;/p&gt;&lt;p&gt;이사야 55장은 여호와께 돌아오는 사람에게 너그러운 용서를 약속하고(55:7),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이 되돌아오지 않고 그분의 뜻을 이룬다고 말한다(55:11). 이사야는 그 확신을 비와 눈에 빗대어 말한다. 비와 눈은 땅을 적셔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준다(55:10). 바울은 10절에서 이 표현을 빌려 하나님을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로 부른다. 이사야는 말씀의 성취를 말하고 바울은 나눔을 이어 가게 하시는 공급을 말하므로 두 본문의 주제는 다르다. 그러나 두 본문 모두 씨와 양식을 주시고 결실을 맺게 하시는 분을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성도가 나누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씨이며, 그 씨를 늘리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도는 나눈 뒤에도 생활과 다음 나눔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기대할 수 있다. 이 기대는 낸 액수에 따라 보상을 계산하는 태도와 다르며, 무엇을 얼마나 거두게 하실지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lt;/p&gt;&lt;h3&gt;쌓아 두지 않고 흘려보내는 공급&lt;/h3&gt;&lt;p&gt;9장의 공급 약속은 바로 앞 8:13-15의 균등 원리를 전제로 한다. 바울은 그곳에서 출애굽기 16:18을 인용하여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한다. 광야에서 각 사람은 먹을 만큼 만나를 거두었고, 아침까지 남겨 둔 만나에는 벌레가 생겼다(출애굽기 16:16-20). 바울은 이 이야기로 지금은 고린도의 넉넉한 것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부족을 채우고, 형편이 뒤바뀌면 그들의 넉넉한 것이 고린도의 부족을 채울 수 있는 관계를 설명한다(8:14). 이 문맥에서 8절의 넉넉함과 10절의 씨의 증가는 쌓아 두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곳으로 흘려보내라고 주시는 공급이다. 하나님이 공급하신다는 믿음은 이웃의 궁핍 앞에서 기적만 기다리게 하지 않고, 이미 받은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게 한다.&lt;/p&gt;&lt;h3&gt;기대와 기도 속에 보낸 연보&lt;/h3&gt;&lt;p&gt;9장의 연보는 이방 회중과 예루살렘 성도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로마서 15:26-27에서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연보하였다고 말하고,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니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명한다. 고린도가 속한 아가야도 결국 이 연보에 참여한 것이다. 그런데 15:31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대한 자신의 섬김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여기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다. 연보를 가지고 떠날 때에도 받는 이들의 반응은 바울의 기도 제목이었다. 사도행전 24:17에서 바울은 여러 해 만에 자기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왔다고 말한다. 이 진술은 바울이 구제할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갔음을 보여 주지만, 예루살렘 교회가 그것을 어떻게 받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13-14절의 영광과 감사, 간구와 그리움은 바울이 기대하고 기도한 결과로 읽어야 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고백과 순종&lt;/h3&gt;&lt;p&gt;13절은 연보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고백과 순종에 연결한다. 고린도 성도들의 연보는 그들이 고백한 복음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진 결과이며, 예루살렘 성도들은 그 순종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 서신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은 4:5에 짧게 나온다. 바울은 자기를 전파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예수를 위하여 자신이 고린도 성도들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그분을 위하여 다른 이를 섬기는 사람이 된다. 고린도 성도들이 멀리 있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재물을 나누는 일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이 그 주님께 순종하는 구체적인 방식이다.&lt;/p&gt;&lt;h3&gt;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과 성도가 맺는 열매&lt;/h3&gt;&lt;p&gt;바울은 연보를 권하는 중심에 8:9를 둔다. 부요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고, 그의 가난함으로 성도들이 부요하게 되었다. 이 은혜는 연보로 얻는 것이 아니라 연보보다 먼저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신 일은 그분만이 이루신 구원의 일이며, 고린도 성도들의 나눔이 그 일을 되풀이하거나 보탤 수는 없다. 성도들은 그 은혜로 부요하게 된 사람으로서 자기 형편에 맞게 가진 것을 나눈다. 그래서 바울은 8:8에서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려 한다고 말하고, 7절에서는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응답은 억지로 짜낼 수 없는 기꺼운 응답이어야 한다.&lt;/p&gt;&lt;p&gt;9-10절의 “의”와 5:21의 “하나님의 의”는 같은 명사를 쓰지만 같은 내용을 가리키지 않는다. 5:21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셔서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일을 말한다. 9-10절의 의는 시편 112편의 의인처럼 가난한 이에게 흩어 주는 행실이다. 두 의의 관계는 5:15가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다. 그분을 위하여 사는 삶에는 재물을 쓰는 일도 포함되며, 하나님은 그 사람의 관대한 행실을 “의의 열매”로 자라게 하신다(10절). 이 의로운 행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의의 근거가 아니라 그 의를 받은 사람의 삶에서 맺히는 열매다.&lt;/p&gt;&lt;h3&gt;한 복음 안에서 서로 섬기는 교회들&lt;/h3&gt;&lt;p&gt;13-14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방 회중과 예루살렘 성도들을 한 교제로 묶는다. 고린도 성도들은 같은 복음을 받은 형제로서 예루살렘 성도들의 부족을 채우고, 예루살렘 성도들은 이방 회중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그들을 위해 간구하며 그리워할 것이다. 8:14에서 바울은 지금은 고린도의 넉넉함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부족을 채우지만, 형편이 뒤바뀌면 그들의 넉넉함이 고린도의 부족을 채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주는 쪽과 받는 쪽은 같은 주님께 속하므로, 재물을 보낸 회중이 받은 회중보다 높아지지 않는다. 받는 이들은 기도로 주는 이들을 섬기고, 주는 이들은 그 기도가 필요한 사람으로 남는다.&lt;/p&gt;&lt;h3&gt;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말할 수 없는 은사&lt;/h3&gt;&lt;p&gt;15절에서 바울은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 14절의 “지극한 은혜”와 8:9의 그리스도의 은혜에 비추어 보면, 이 선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다.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신 은혜가 고린도 성도들을 관대하게 하고, 그 관대함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감사와 기도로 이어진다. 15절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직접 쓰지 않으므로 이 선물을 그리스도의 인격과 곧바로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바울의 마지막 감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 전체를 향한다. 고린도 성도들의 연보는 이 선물에 대한 응답이고, 감사는 끝까지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돌아간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부족을 채우고 정직하게 전달하는 연보&lt;/h3&gt;&lt;p&gt;12절에 따르면 이 봉사는 먼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채운다. 교회가 구제 연보를 모을 때 먼저 살필 것은 모금 액수보다 그 재물이 실제로 부족을 겪는 사람에게 제때 닿는지이다. 바울은 거액의 연보를 맡으면서 여러 교회가 택한 형제를 동행하게 하여 아무도 비방하지 못하게 했고,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했다(8:19-21). 연보를 모으고 전달하는 사람도 그 재물이 목적한 곳에 도착할 때까지 정직하고 투명하게 다루어야 한다.&lt;/p&gt;&lt;h3&gt;약속의 이행과 강요 없는 권면&lt;/h3&gt;&lt;p&gt;이미 약속한 연보가 있으면 그 약속을 이행할 계획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 바울은 일 년 전에 시작한 고린도 회중의 마음을 칭찬하면서도 그 일을 완성하라고 진지하게 요청했다. 동시에 그는 “있는 대로” 완성하라고 했고(8:11-12),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하라고 했다(7절). 사람마다 소득과 부양할 가족, 당장 감당할 필요가 다르므로 참여 액수도 같을 수 없다. 적게 드린 사람을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평가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를 약속하도록 재촉하거나, 생활에 필요한 돈을 빚으로 마련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 가르침에 어긋난다. 형편이 달라져 약속한 만큼 드릴 수 없게 된 사람도 할 마음에 따라 있는 대로 드리면 된다.&lt;/p&gt;&lt;p&gt;바울은 마게도냐 사람들 앞에서 당할 부끄러움을 언급하며 고린도 회중을 재촉했다. 그 재촉은 일 년 전에 스스로 원하고 약속한 회중에게, 그 회중을 자랑해 온 사도가 한 말이었다. 바울은 곧이어 형제들을 미리 보내 연보가 짜낸 돈이 되지 않게 하고,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덧붙였다(5, 7절). 그러므로 그의 부끄러움 언급을 오늘의 모금 기법으로 삼을 수는 없다. 이름과 액수를 공개해 순위를 매기거나, 아직 결정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약속을 받아 내는 방식은 5절과 7절이 막으려 한 일이다. 다른 회중의 관대함을 알리는 일은 2절에서처럼 서로를 격려할 수 있지만, 그 소식을 들은 사람도 자기 마음과 형편에 따라 응답해야 한다.&lt;/p&gt;&lt;h3&gt;나눔을 위한 공급과 번영 약속의 구별&lt;/h3&gt;&lt;p&gt;6절의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씀으로 헌금에 비례한 재산 증식을 약속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본문이 물질적 공급을 말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고, 심을 것을 풍성하게 하시며, 성도를 모든 일에 넉넉하게 하신다(8-11절). 그 공급은 성도가 계속 너그럽게 나누고 이웃의 부족을 채우게 하려는 것이며, 그 결과로 의의 열매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자란다. 성도는 나눈 뒤에 생길 자신의 필요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 그러나 헌금한 뒤 수입이 늘지 않거나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믿음이 부족했다고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된다. 그런 판단은 본문의 약속을 액수에 따른 보상으로 바꾸고, 이미 어려움을 겪는 이웃의 고통을 더한다.&lt;/p&gt;&lt;h3&gt;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교제&lt;/h3&gt;&lt;p&gt;14절의 간구와 그리움은 바울이 받는 이들에게서 기대한 응답이지, 주는 이들이 요구할 대가가 아니다. 연보를 보낸 교회는 필요한 재물을 보내고, 받은 이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교제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바울도 예루살렘 성도들이 자신의 섬김을 받을 만하게 여기도록 기도를 부탁했다(로마서 15:31). 재물을 보내는 교회가 받는 교회의 결정을 좌우할 권리를 얻는 것도 아니다. 8:14가 말하듯 넉넉함과 부족함은 때에 따라 바뀌며, 재정이 넉넉한 교회도 다른 교회의 기도가 필요하다.&lt;/p&gt;&lt;h3&gt;믿음의 가정과 모든 사람을 향한 선행&lt;/h3&gt;&lt;p&gt;13절은 고린도 회중의 교제가 예루살렘 성도들과 “모든 사람”을 향한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다른 지역의 성도들을 가리키는지 교회 밖의 사람까지 포함하는지는 13절만으로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회중의 관대함이 이 한 번의 연보에서 멈추지 않기를 기대하고, 갈라디아서 6:10에서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권한다. 교회는 교인의 필요를 먼저 살피면서도 교회 밖 사람들의 실제 필요에 응답할 수 있다.&lt;/p&gt;&lt;h3&gt;채워진 부족을 알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lt;/h3&gt;&lt;p&gt;바울은 연보에 관한 권면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로 마친다(15절). 받는 이들의 감사도 주는 이들의 관대함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교회가 연보의 결과를 알릴 때에는 후원자의 이름과 액수를 앞세우기보다 어떤 부족이 채워졌는지를 알리고, 그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Peter Balla, “2 Corinthians,” TGC Bible Commentary, The Gospel Coalition, on 2 Cor 9:1-5,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www.thegospelcoalition.org/commentary/2-corinthians/" rel="noopener"&gt;https://www.thegospelcoalition.org/commentary/2-corinthians/&lt;/a&gt;.&lt;/li&gt;&lt;li&gt;“2 Corinthians 9,” NET Bible, Bible.com, 9:5, third note (“something you feel forced to do”),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www.bible.com/bible/107/2CO.9.NET" rel="noopener"&gt;https://www.bible.com/bible/107/2CO.9.NET&lt;/a&gt;.&lt;/li&gt;&lt;li&gt;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9:5,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9:5,”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9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95/&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9:7,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9:7,”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9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97/&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9:7,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9:7,”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9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97/&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9:15,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9:15,”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91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915/&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10:1-18 성도를 세우고 주 안에서 자랑하는 권위</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10.1-18/</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10.1-18/</guid><description>고린도후서 10:1-18에서 그리스도의 온유함, 복음을 위한 싸움, 성도를 세우는 권위와 사역의 범위를 살핍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하는 호소 (1-2절)&lt;/h3&gt;&lt;p&gt;고린도후서 8-9장에서 연보를 권면한 편지는 10장에 들어서며 어조를 바꾸어 바울의 사도직을 둘러싼 비판을 직접 다룬다. 1절의 “나 바울은 ... 친히”는 바울 자신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디모데와 함께 보낸 편지에서(1:1) 바울이 자기 이름으로 직접 나서서 권면한다. 권면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이다. “온유”(πραΰτητος, 프라위테토스)는 힘을 앞세우지 않는 부드러운 태도를, “관용”(ἐπιεικείας, 에피에이케이아스)은 자기 권리를 엄격하게 따지지 않고 상대를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에게 그리스도의 성품을 근거로 말한다.&lt;/p&gt;&lt;p&gt;1절 후반부에서 바울은 자신을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유순하고”로 옮긴 ταπεινὸς(타페이노스)는 낮은 처지와 비천함, 겸손을 두루 가리킬 수 있어서, 개역개정의 “유순하고”보다 초라하고 낮아 보인다는 인상을 더 강하게 담을 수 있다. 대면과 부재, 낮음과 담대함의 대조는 10절에 인용된 비판, 곧 편지는 강하나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다는 말에 대응한다. 그래서 1절은 비판자들이 바울을 두고 하던 말을 바울이 받아서 쓴 표현으로 읽을 수 있다. 바울은 그 표현으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호소의 근거로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앞세운다.&lt;/p&gt;&lt;p&gt;2절에서 바울은 고린도에 가서 함께 있을 때 강경하게 대하지 않아도 되기를 간청한다. “이 담대한 태도로”에는 확신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바울이 이 확신으로 맞서려는 대상은 “몇몇 사람”(ἐπί τινας, 에피 티나스)이다. 개역개정은 τινας를 따로 옮기지 않고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라고 했지만, 원문은 바울을 비판하는 이들을 일부로 한정한다. 그들의 평가를 고린도 교회 전체의 판단으로 볼 근거는 없다. 바울도 교회 전체에게 호소하는 일과 자신에게 맞서는 몇몇 사람을 다루는 일을 구별한다. 방문 때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성도들의 응답에 달려 있으므로, 지금 쓰는 편지는 방문 전에 문제를 바로잡을 기회가 된다.&lt;/p&gt;&lt;p&gt;2절에는 ‘여기다, 헤아리다’라는 뜻의 동사가 두 번 나온다. 바울은 몇몇 사람에게 담대히 맞서기로 ‘여기고’(λογίζομαι, 로기조마이), 그 사람들은 바울을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τοὺς λογιζομένους, 투스 로기조메누스)이다. 이 논쟁은 바울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다. 바울은 7절과 11절에서 같은 동사의 명령형(λογιζέσθω, 로기제스토)으로 그들에게 다시 생각하라고 요구한다. 바울을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긴다는 말은 그의 사역이 인간적 동기와 수단에 매여 있다는 비난이다. 바울은 3절에서 ‘육신’이라는 명사에 다른 전치사를 붙여 이 평가에 답한다.&lt;/p&gt;&lt;h3&gt;육신에 따르지 않는 싸움과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 (3-6절)&lt;/h3&gt;&lt;p&gt;3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라고 답한다. “육신으로”(Ἐν σαρκὶ, 엔 사르키)는 몸을 지닌 사람으로 살아가는 조건을, “육신에 따라”(κατὰ σάρκα, 카타 사르카)는 육신의 기준과 방식을 따른다는 뜻이다. 바울은 연약한 몸으로 살고 일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싸움은 인간적 능력과 계산에 의존하지 않는다. 여기서 “싸우다”는 군사로 복무하며 싸우는 행동을 가리키며, 4-6절은 무기와 요새, 포로와 처벌의 그림으로 이 비유를 이어 간다.&lt;/p&gt;&lt;p&gt;4절은 이 싸움의 무기를 설명한다.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고, 원문의 표현으로는 ‘하나님께 강한’ 것이다(δυνατὰ τῷ θεῷ, 뒤나타 토 테오). 하나님을 가리키는 여격 때문에 이 표현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능력으로 강하다는 뜻으로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강하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다.&lt;sup&gt;1&lt;/sup&gt; 4절에서 이 표현은 “육신에 속한” 무기와 대조를 이루므로, 무기의 쓰임새보다 무기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말한다고 보는 편이 대조에 더 잘 맞는다.&lt;sup&gt;2&lt;/sup&gt; 개역개정의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형용사 ‘강한’을 명사 ‘능력’으로, 여격을 소유격으로 바꾸어 무기의 힘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뜻을 살렸다. 다만 원문은 무기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하다고 말하며, 무기 자체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 무기는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이론”(λογισμοὺς, 로기스무스)을 무너뜨린다. 요새의 그림이 실제로 가리키는 대상은 사람들이 따져서 세운 주장과 논리다.&lt;/p&gt;&lt;p&gt;5절은 무너뜨릴 대상을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으로 넓힌다. 이 표현은 성벽 위로 솟은 망대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막아서는 장애물을 그린다. 이어지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αἰχμαλωτίζοντες πᾶν νόημα, 아이크말로티존테스 판 노에마)는 전쟁에서 포로를 붙잡아 끌고 가는 장면이다. 개역개정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로 옮긴 원문(εἰς τὴν ὑπακοὴν τοῦ Χριστοῦ, 에이스 텐 휘파코엔 투 크리스투)은 사로잡힌 생각이 이르러야 할 곳을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이라는 명사구로 표현한다. 사람들이 생각에서부터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되는 것이 이 군사 비유의 목적이다.&lt;/p&gt;&lt;p&gt;4-5절에서 무너뜨리고 사로잡는 분사들의 주어는 3절의 ‘우리’다. 6절 끝의 “너희의”와 대조되므로, 이 ‘우리’는 독자들을 포함하지 않고 바울과 그 동역자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누구의 생각을 사로잡는지 밝히지 않지만, 그 생각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다.&lt;sup&gt;3&lt;/sup&gt;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싸우는 쪽은 바울 일행이고, 무너뜨릴 대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주장과 생각이며, 그 목적은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이다.&lt;/p&gt;&lt;p&gt;6절에서 바울은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 말한다. 군사 비유가 여기서 실제 조치로 이어진다.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기를 기다린다. 이 문장에서 강조된 “너희의”는 독자들이 이미 복종하고 있거나 곧 복종하리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lt;sup&gt;4&lt;/sup&gt; 그 뒤에 벌을 받는 것은 불복종이라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뒤에도 계속 불복종하는 고린도의 사람들이다.&lt;sup&gt;5&lt;/sup&gt; 13:2에서도 바울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미리 경고한다. 지금 편지로 호소하는 일과 방문 때 징계하는 일은 모두 교회를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려는 사도의 책임에 속한다.&lt;/p&gt;&lt;h3&gt;그리스도께 속함과 세우려고 주신 권세 (7-8절)&lt;/h3&gt;&lt;p&gt;7절은 바울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다시 돌아간다. 첫 문장 Τὰ κατὰ πρόσωπον βλέπετε(타 카타 프로소폰 블레페테)의 동사는 형태상 직설법으로도 명령법으로도 읽을 수 있다. 명령법이면 ‘눈앞에 있는 것을 보라’는 요청이 되고, 직설법이면 ‘너희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본다’는 지적이 된다. 문맥이 어느 한쪽을 결정적으로 지지하지는 않는다.&lt;sup&gt;6&lt;/sup&gt; 다만 명령이었다면 동사가 문장 앞에 왔을 가능성이 크므로, 어순은 직설법 읽기에 더 잘 맞는다.&lt;sup&gt;7&lt;/sup&gt; 앞뒤 문맥도 이 읽기에 기운다. “외모”로 옮긴 κατὰ πρόσωπον(카타 프로소폰)은 1절에서 “대면하면”으로 옮긴 표현과 같고, 10절은 바울을 대면했을 때의 인상으로 그를 낮추어 본 평가를 인용한다. 그러므로 7절 첫 문장은 바울을 눈앞의 인상으로 판단하는 태도를 지적하는 말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다. 개역개정의 “외모만 보는도다”에서 “만”은 원문에 없는 말로, 이 직설법 읽기를 전제하고 지적의 뜻을 드러낸다. 명령법 읽기도 배제되지 않으므로, 비판자들이 바울을 겉모습으로 평가한 내용은 이 문장보다 10절의 인용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lt;/p&gt;&lt;p&gt;이어서 바울은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 말한다. 2절에서 바울을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던’ 사람에게 이제 다시 ‘여기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바울은 상대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주장을 반박하지 않고, 그 기준을 바울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라고 요구한다. 자기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확신만으로는 바울을 배제할 수 없다. 누가 그리스도께 속했는지를 판단할 때 대면한 인상은 결정적인 기준이 되지 못한다.&lt;/p&gt;&lt;p&gt;8절은 7절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바울은 주께서 주신 “권세”(ἐξουσίας, 엑수시아스)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그 자랑이 헛된 주장으로 드러나지 않으리라는 뜻이다.&lt;sup&gt;8&lt;/sup&gt; 주께서 이 권세를 주신 목적은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다. “무너뜨리려고”에 해당하는 καθαίρεσιν(카타이레신)은 4절에서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일을 말할 때 쓴 명사다. 바울의 권세로 무너뜨릴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막는 요새이고, 고린도 교회는 그 권세로 세워야 할 공동체다.&lt;/p&gt;&lt;p&gt;편지 끝의 13:10은 8절의 표현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한다. 바울은 대면할 때 주께 받은 권한을 엄하게 쓰지 않아도 되도록 떠나 있을 때 이렇게 쓴다고 말하며, 그 권한도 주께서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고 주신 것이라고 밝힌다. 세움이라는 목적이 엄한 조치를 없애지는 않는다. 바울은 엄하게 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고, 6절에서 실제 징계를 예고한다. 이 목적은 바울이 권한을 쓰는 방향을 정한다. 경고와 징계도 교회를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공동체로 세우기 위해 써야 하며, 교회를 해치는 데 써서는 안 된다.&lt;/p&gt;&lt;h3&gt;편지의 말과 함께 있을 때의 행동 (9-11절)&lt;/h3&gt;&lt;p&gt;9-11절은 편지와 대면의 일치를 다룬다. 9절의 “놀라게 하려는”(ἐκφοβεῖν, 엑포베인)은 겁을 주어 위협한다는 강한 말이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가 성도들을 겁주는 수단으로 보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10절은 그렇게 보일 만한 까닭, 곧 바울에 대한 평가를 인용한다. 개역개정은 “그들의 말이”라고 복수로 옮겼지만, 원문의 φησίν(페신)은 ‘그가 말한다’는 3인칭 단수다. 이 단수는 특정한 한 사람의 말일 수도 있고 ‘누군가 말하기를’과 같은 일반적 표현일 수도 있다. 11절의 “이런 사람은”도 단수다. 평가의 내용은 바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시원하지 않다”로 옮긴 ἐξουθενημένος(엑수테네메노스)는 하찮게 여겨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뜻이므로, 개역개정의 표현보다 경멸의 뜻이 훨씬 강하다.&lt;/p&gt;&lt;p&gt;11절에서 바울은 이 평가에 답한다. 떠나 있을 때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 행하는 일이 같다는 것이다. “떠나 있을 때에”(ἀπόντες, 아폰테스)와 “함께 있을 때에”(παρόντες, 파론테스)는 1절의 “떠나 있으면”과 2절의 “함께 있을 때에”를 다시 가져온다. “알지라”는 7절의 “생각할 것이라”와 같은 명령(λογιζέσθω)이다. 11절은 바울의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다는 일반적 진술이지만, 문맥에서는 2절과 6절에서 예고한 방문 때의 대응을 포함한다. 편지로 경고한 것은 바울이 방문하여 실제로 행할 일이다. 바울은 자기 몸이나 말솜씨를 길게 변호하지 않고, 편지의 말과 방문 때의 행동이 일치한다는 사실로 답한다.&lt;/p&gt;&lt;h3&gt;자기를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과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범위 (12-14절)&lt;/h3&gt;&lt;p&gt;12절은 바울과 비교되는 사람들의 방식을 비판한다. 바울은 “자기를 칭찬하는”(συνιστανόντων, 쉬니스타논톤) 어떤 사람들과 감히 짝하며 비교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 동사는 ‘추천하다’라는 뜻이며 18절에서 다시 나온다. 그들은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μετροῦντες, 메트룬테스)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한다. 그들의 평가 기준은 자기 자신이다. 바울은 이런 평가를 두고 “지혜가 없도다”, 곧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lt;/p&gt;&lt;p&gt;13절에서 바울은 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그는 “분수 이상의”, 곧 ‘측량을 벗어난 데까지’(ἄμετρα, 아메트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자랑한다. “범위”로 옮긴 κανόνος(카노노스)는 재는 자나 기준을 뜻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측량하여 정해 준 활동 구역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lt;sup&gt;9&lt;/sup&gt; 12절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자로 삼았다면, 바울은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한계”(μέτρον, 메트론)를 따른다. 그 범위는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다. 바울은 자기 자랑의 분량과 권위가 미치는 지역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며, 하나님이 그에게 일하도록 맡기신 지역에는 그가 교회를 세운 고린도가 포함된다.&lt;sup&gt;10&lt;/sup&gt;&lt;/p&gt;&lt;p&gt;14절은 그 사실을 과거의 사건으로 확인한다.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은 닿지 않는 곳까지 몸을 지나치게 뻗는 모습을 그린다. 바울은 자기에게 맡겨지지 않은 곳에 억지로 손을 뻗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고린도 성도들에게까지 “이른” 사람이다. 바울과 동역자들이 실제로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로 고린도 교회가 생겼다. 이 사실이 고린도가 바울이 맡은 범위 안에 있다는 근거다.&lt;/p&gt;&lt;h3&gt;남의 수고로 자랑하지 않고 너희 지역을 넘어 나아감 (15-16절)&lt;/h3&gt;&lt;p&gt;15절은 같은 원칙을 앞으로의 사역에 적용한다. 바울은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수고하여 이룬 일을 자기 성과로 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이 자랄수록 자신의 사역이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란다. 개역개정은 13절에서 “범위”로 옮긴 명사를 15절(κανόνα, 카노나)과 16절(κανόνι, 카노니)에서는 “규범”으로 옮겼다. 원문은 세 절에서 같은 명사를 쓰므로, 15-16절의 “규범”도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사역의 범위로 읽을 때 13절과 논리가 이어진다.&lt;/p&gt;&lt;p&gt;16절은 그 확대의 방향을 밝힌다.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면 바울은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한다. 로마서 15:20-24에서 바울은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으려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리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기를 힘썼다고 말하고, 서바나로 가려는 계획을 밝힌다. 16절의 ‘너희 지역을 넘어’는 서바나에 이르는 서쪽 지역을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lt;sup&gt;11&lt;/sup&gt; 바울은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τὰ ἕτοιμα, 타 헤토이마), 곧 다른 사람에게 맡겨진 곳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로 자랑하지 않겠다고 덧붙인다. 그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교회의 믿음을 세우면서,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아가려 한다.&lt;/p&gt;&lt;h3&gt;주 안에서 자랑함과 주의 인정 (17-18절)&lt;/h3&gt;&lt;p&gt;17절은 이 자랑의 기준을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는 한 문장으로 밝힌다. 이 말은 예레미야 9:23-24를 줄여서 인용한 것이며, 바울은 고린도전서 1:31에서도 같은 말을 인용했다. 예레미야에서 자랑의 근거가 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 17-18절의 “주”는 그리스도를 가리킬 가능성이 크지만 하나님을 가리킬 가능성도 남아 있다.&lt;sup&gt;12&lt;/sup&gt; 17절은 8절과 13-16절에서 바울이 말한 자랑의 근거를 정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맡기신 범위 안에서 주께서 복음으로 이루신 일을 자랑한다.&lt;/p&gt;&lt;p&gt;18절은 17절의 이유를 밝힌다. 12절에서 자기를 추천하던 사람들에게 쓴 동사가 다시 나와, “자기를 칭찬하는 자”(συνιστάνων, 쉬니스타논)와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를 맞세운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δόκιμος, 도키모스)는 시험을 거쳐 참되다고 인정받은 사람을 뜻한다. 바울이 맡은 범위, 그가 복음으로 고린도에 이른 일, 성도들을 세우는 권세는 모두 주님의 판단을 받는다.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면서도 사역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분을 주님으로 둔다. 이 논쟁에서 물어야 할 것은 누가 더 인상적인 사람이냐가 아니라 주께서 누구를 인정하시느냐이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여호와를 아는 자랑과 바울의 인용&lt;/h3&gt;&lt;p&gt;17절이 인용하는 예레미야 9:23-24에서 여호와는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를, 용사는 용맹을, 부자는 부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신다. 자랑하려는 사람은 여호와를 깨닫고 아는 것, 곧 여호와께서 땅에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며 그 일을 기뻐하시는 분임을 아는 것을 자랑해야 한다. 앞선 9:3-6에서 백성은 이웃을 속이고 진실을 말하지 않으며 여호와를 알기를 거절한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말하는 여호와를 아는 일은 종교적 지식을 내세우는 일이 아니라, 여호와의 성품을 인정하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진실과 정의를 따라 사는 일이다.&lt;/p&gt;&lt;p&gt;바울은 이 말씀으로 고린도의 자랑 논쟁을 판단한다. 12절의 사람들은 자기를 자로 삼아 서로 견주고 스스로를 추천했다. 예레미야가 금한 지혜와 용맹과 부의 자랑처럼, 그들은 사람이 내세울 수 있는 자질과 사람들끼리의 평가를 자랑의 근거로 삼았다. 바울은 자랑의 근거를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범위와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룬 일에 둔다(13-16절). 또한 예레미야가 여호와를 아는 일을 자랑의 근거로 삼았다는 점에서, 17절의 인용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무너뜨린다는 5절과 주제상 이어진다. 높아진 주장이 무너진 뒤에 남는 자랑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이 하신 일을 인정하는 자랑이다.&lt;/p&gt;&lt;p&gt;고린도전서 1:26-31에서 바울은 같은 교회에 이 예레미야 말씀을 이미 인용했다. 하나님은 세상이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택하셔서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하나님에게서 나와 그들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 그곳에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은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했다. 17절에서 바울은 같은 말씀을 사역자를 평가하는 문제에 적용한다. 고린도 성도들이 세상의 기준으로 약했어도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듯이, 바울의 몸과 말이 약해 보인다고 해서 그의 사역에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할 수 없다.&lt;/p&gt;&lt;h3&gt;주께 받은 권세와 주께서 하시는 인정&lt;/h3&gt;&lt;p&gt;8절에서 바울은 주께서 주신 권세를 자랑한다.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으로 무너뜨리고 세운다는 생각은 예레미야 1:9-10과 주제상 가깝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에 말씀을 두시고, 그를 여러 나라와 왕국 위에 세워 뽑고 허물며 세우고 심게 하신다. 예레미야의 권위는 그가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에서 나왔다. 바울의 권세도 주께서 주신 것이므로, 바울이 그 권세를 자랑하는 일은 권세를 맡기신 주님을 자랑하는 일과 떨어질 수 없다. 4-8절은 그 권세로 무너뜨릴 대상과 세울 대상을 구별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주장은 무너뜨리고, 교회는 세운다.&lt;/p&gt;&lt;p&gt;18절은 자기 추천과 주의 인정을 맞세운다. 이 편지는 앞에서도 추천의 문제를 다루었다. 3:1에서 바울은 다시 자기를 추천하기 시작하느냐고, 어떤 사람들처럼 추천서를 주고받을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고린도 성도들 자신이 사도들의 섬김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육의 마음판에 쓴 편지라고 답한다(3:2-3). 이어서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 말한다(3:5). 이 단락에서 바울은 비슷한 답을 범위와 자랑의 말로 다시 준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고린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말하지만(14절), 최종 인정은 주께 돌린다(18절).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이루신 일은 사역을 증언하고, 바울은 그 일을 사역의 증거로 제시한다. 그가 거부하는 것은 12절의 사람들처럼 자기를 자로 삼아 스스로 평가하고 그 평가로 인정을 얻으려는 자기 추천이다. 바울은 사역의 증거를 말하면서도, 자신을 인정하시는 일은 그 일을 이루신 주께 맡긴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온유하신 그리스도와 약함 가운데 나타나는 능력&lt;/h3&gt;&lt;p&gt;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성도들에게 권한다(1절). 그리스도의 성품은 이 호소의 근거이며, 바울이 권위를 쓰는 방식을 정한다. 바울은 담대하게 대할 수 있지만 먼저 간청하고(2절), 교회가 응답할 때를 기다린 뒤에 남은 불복종을 다루겠다고 말한다(6절). 이 온유는 문제를 덮어 두는 태도가 아니다. 바울은 바로잡을 것을 분명히 말하면서도, 엄하게 대해야 할 상황이 오기 전에 성도들이 돌이킬 기회를 준다.&lt;/p&gt;&lt;p&gt;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신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신 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부르시며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다(마태복음 11:27-29). 아버지께 모든 것을 받으신 분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사람들을 부르신다. 예수에게서 온유와 겸손은 권위가 없다는 표시가 아니었다. 고린도의 비판자들은 바울이 대면할 때 낮아 보인다는 이유로 그를 약하게 여겼다. 그리스도의 성품에 비추어 보면, 1절에서 바울이 보이는 낮은 태도와 8절에서 말하는 주께 받은 권세는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lt;/p&gt;&lt;p&gt;바울은 편지 끝에서 약함과 능력의 관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고, 바울도 그 안에서 약하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아 고린도 성도들을 대할 것이다(13:4). 4절에서 바울의 무기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하다고 말할 때도, 그 힘은 바울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10절의 비판처럼 바울이 몸으로 대할 때 약해 보인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하여 일하시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lt;/p&gt;&lt;h3&gt;그리스도께 대한 복종과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세&lt;/h3&gt;&lt;p&gt;5절에서 사로잡힌 생각이 이르러야 할 곳은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이다. 싸우는 쪽은 바울 일행이지만, 생각이 복종해야 할 주는 바울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5절의 “하나님 아는 것”도 그리스도와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바울은 앞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마음에 비추셨다고 말했다(4:6).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주장을 무너뜨리는 일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복종하게 하는 일이다. 사도의 싸움은 바울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로 이끄는 일이다.&lt;/p&gt;&lt;p&gt;7-8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함과 주께 받은 권세를 이어서 말한다. 바울과 그를 비판하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주장하므로, 자기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확신만으로 상대를 배제할 수 없다(7절). 8절은 바울이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주장을 주께서 주신 권세로 뒷받침한다. 8절의 “주”도 그리스도를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lt;sup&gt;13&lt;/sup&gt;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권세를 주시고 그 목적을 세움으로 정하셨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소유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었다(5:15). 구원을 이루신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바울은 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세우도록 권세를 받은 일꾼이다.&lt;/p&gt;&lt;h3&gt;그리스도의 복음과 주 안에서의 자랑&lt;/h3&gt;&lt;p&gt;13-16절에서 바울이 고린도에 이른 수단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14절). 바울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범위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끈 일이다. 17-18절의 “주”도 그리스도를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lt;sup&gt;14&lt;/sup&gt; 그렇게 읽으면 바울은 예레미야에서 여호와를 아는 일에 두었던 자랑을 그리스도 안의 자랑으로 적용한다. 고린도전서 1:30-31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도들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 말한 뒤 같은 말씀을 인용한다. 18절에서 사역자를 인정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바울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리라고 말했다(5:10). 사도도 자기 추천이나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판단 앞에서 자기 사역을 책임진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인상과 자기 확신에 기대지 않는 평가&lt;/h3&gt;&lt;p&gt;10절의 비판자들은 바울을 몸으로 대할 때의 인상과 말솜씨로 평가했다. 바울이 자기 사역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주께서 세우라고 주신 권세(8절)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고린도에 이른 사실(14절)이며, 최종 판단은 주께서 인정하시느냐에 달려 있다(18절). 오늘 교회가 지도자를 평가할 때도 외적인 인상과 말재주보다 그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주장을 바로잡는지, 성도들의 믿음을 세우는지를 살펴야 한다.&lt;/p&gt;&lt;p&gt;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확신하는 사람에게 같은 기준을 바울에게도 적용하라고 요구한다. 교회 안의 갈등이 깊어지면 각 편이 자신만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여기고 상대를 공동체 밖의 사람처럼 대하기 쉽다. 이 본문은 그런 갈등에서 자기 확신을 상대를 배제하는 근거로 삼지 말라고 요구한다. 바울도 11:4, 13에서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거짓 사도라고 부르므로, 이 요구는 모든 판단을 보류하라는 뜻이 아니다. 상대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났다고 판단하려면, 자기 확신이나 인상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전하는 복음의 내용에 근거해야 한다.&lt;/p&gt;&lt;h3&gt;권위를 쓰는 목적과 방식&lt;/h3&gt;&lt;p&gt;바울이 쓰는 권세는 주께서 사도인 그에게 주신 것이고, 고린도 교회는 그가 복음으로 세운 교회였다(8, 14절). 오늘의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는 바울과 같은 사도의 자리에서 말하지 않으므로, 이 본문을 근거로 자기 권위를 바울의 권위와 같게 여길 수 없다. 오늘의 지도자가 이 본문에서 배울 것은 권위의 목적과 방식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먼저 간청하고, 편지로 호소하여 성도들이 응답할 시간을 주며, 그 뒤에도 남는 불복종은 방문 때 다루겠다고 말한다(1-2, 6절). 필요한 책망을 계속 미루는 것도, 응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곧바로 엄하게 대하는 것도 이 방식에 맞지 않는다. 책망과 징계가 필요할 때에도 그 목적은 잘못한 사람과 교회를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길로 세우는 데 있다.&lt;/p&gt;&lt;p&gt;5절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는 바울과 그 동역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주장에 맞서는 일을 설명한다. 이 구절을 성도들에게 사생활을 모두 보고하게 하거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까지 지도자에게 검열받게 하는 근거로 쓸 수 없다. 바울의 군사 비유가 무너뜨리는 대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는 주장이고, 사로잡힌 생각이 이르러야 할 곳은 지도자의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이다. 교회는 어떤 주장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충돌하는지 성경을 펴서 설명하고, 성도들이 그 설명을 듣고 스스로 판단하여 그리스도께 복종하도록 도와야 한다.&lt;/p&gt;&lt;p&gt;9-11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편지가 성도들을 겁주는 수단으로 보이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편지로 경고한 것은 방문할 때 실제로 행하겠다고 말한다. 오늘의 지도자도 글이나 메시지로 강하게 경고해 놓고 얼굴을 마주해서는 그 말을 책임지지 않거나, 멀리서 위협하는 말로 사람들을 움직이려 해서는 안 된다. 멀리서 한 경고는 직접 만났을 때 실행하고 책임질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lt;/p&gt;&lt;h3&gt;맡기신 범위 안의 사역과 주 안에서의 자랑&lt;/h3&gt;&lt;p&gt;12절의 비판은 자기를 자로 삼아 서로 견주고 스스로를 추천하는 태도를 향한다. 교회도 자기와 비슷한 공동체만 골라 견주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기준을 만들어 사역을 평가할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범위와 그 안에서 자라는 성도들의 믿음을 기준으로 삼는다(13, 15절). 사역을 평가할 때 물을 것은 다른 공동체보다 앞서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사람들 가운데서 믿음이 자라느냐이다.&lt;/p&gt;&lt;p&gt;바울은 다른 사람이 수고하여 이룬 일을 자기 자랑으로 삼지 않는다(15-16절). 오늘의 사역자도 여러 사람이 감당한 일을 자기 한 사람의 비전이나 능력으로 설명하지 말고, 자신의 수고와 다른 사람의 수고를 정직하게 구별하여 말해야 한다. 바울이 말한 범위는 하나님이 사도인 그에게 맡기신 선교 지역이므로, 이 본문에서 오늘 교회들 사이의 지역 경계를 정하는 규칙을 끌어낼 수는 없다. 오늘 교회가 이 본문에서 이어받을 것은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는 일을 고린도 너머의 복음 전파와 연결했다는 점이다. 교회가 받은 은혜와 성장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사명으로 나아가야 한다.&lt;/p&gt;&lt;p&gt;17절의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은 사역의 열매를 주께 돌리는 감사로 이어진다. 맡은 일이 잘되었을 때 실제 수고를 숨길 필요는 없지만, 그 열매를 가능하게 하신 주님의 일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원하는 만큼 인정받지 못할 때에도 사람들의 칭찬이 사역자의 가치와 사명을 결정하지 않는다. 18절이 말하듯 사역자를 인정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므로, 사역자는 자기 자랑과 비교를 그분 앞에서 살피고 맡은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Plummer는 이 여격을 ‘하나님 앞에서’로 읽을 가능성도 인정하지만, ‘하나님을 위하여’,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강하다는 이익의 여격으로 보는 편이 더 개연성 있다고 판단한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라는 뜻이었다면 바울이 다르게 표현했으리라는 것이 그의 견해다. A. Plummer, ed., &lt;em&gt;The Second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lt;/em&gt;, Cambridge Greek Testament for Schools and Colleg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03; repr., 1912), 147, on 2 Cor 10:4, &lt;a href="https://biblicalstudies.org.uk/pdf/e-books/plummer/2-corinthians-cgtsc_plummer.pdf" rel="noopener"&gt;https://biblicalstudies.org.uk/pdf/e-books/plummer/2-corinthians-cgtsc_plummer.pdf&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이 표현을 하나님에게서 오는 능력(“power from God”)으로 풀이한다. 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10:4,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0:4,”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0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04/&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0:5,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0:5,”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0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05/&lt;/a&gt;.&lt;/li&gt;&lt;li&gt;Plummer, &lt;em&gt;Second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lt;/em&gt;, 149, on 2 Cor 10:6, &lt;a href="https://biblicalstudies.org.uk/pdf/e-books/plummer/2-corinthians-cgtsc_plummer.pdf" rel="noopener"&gt;https://biblicalstudies.org.uk/pdf/e-books/plummer/2-corinthians-cgtsc_plummer.pdf&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0:6,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0:6,”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06/"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06/&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이 문장을 명령, 사실 진술, 질문으로 옮기는 번역들을 소개하고, 문맥이 어느 해석도 결정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고 본다. 질문으로 옮길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0:7,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0:7,”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0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07/&lt;/a&gt;.&lt;/li&gt;&lt;li&gt;Plummer는 직설법, 명령법, 의문문의 가능성을 모두 검토한 뒤, 명령이었다면 동사가 문장 앞에 왔으리라는 이유로 명령법을 가장 개연성이 낮은 읽기로 본다. 그는 Chrysostom과 Calvin을 따라 이 문장을 책망으로 읽고, ‘외모’로 옮긴 표현을 1절과 같은 뜻으로 본다. Plummer, &lt;em&gt;Second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lt;/em&gt;, 149-150, on 2 Cor 10:7, &lt;a href="https://biblicalstudies.org.uk/pdf/e-books/plummer/2-corinthians-cgtsc_plummer.pdf" rel="noopener"&gt;https://biblicalstudies.org.uk/pdf/e-books/plummer/2-corinthians-cgtsc_plummer.pdf&lt;/a&gt;.&lt;/li&gt;&lt;li&gt;Plummer, &lt;em&gt;Second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lt;/em&gt;, 150, on 2 Cor 10:8, &lt;a href="https://biblicalstudies.org.uk/pdf/e-books/plummer/2-corinthians-cgtsc_plummer.pdf" rel="noopener"&gt;https://biblicalstudies.org.uk/pdf/e-books/plummer/2-corinthians-cgtsc_plummer.pdf&lt;/a&gt;.&lt;/li&gt;&lt;li&gt;Plummer, &lt;em&gt;Second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lt;/em&gt;, 154, on 2 Cor 10:13, &lt;a href="https://biblicalstudies.org.uk/pdf/e-books/plummer/2-corinthians-cgtsc_plummer.pdf" rel="noopener"&gt;https://biblicalstudies.org.uk/pdf/e-books/plummer/2-corinthians-cgtsc_plummer.pdf&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0:13,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0:13,”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01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013/&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0:16,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0:16,”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016/"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016/&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0:17,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0:17,”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01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017/&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말한다고 주장하는 12:19와 13:3을 근거로, 10:8과 13:10의 ‘주’를 하나님보다 그리스도로 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0:8,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0:8,”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08/"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08/&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0:17,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01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017/&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11:1-15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을 지키는 사도의 열심</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11.1-15/</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11.1-15/</guid><description>고린도후서 11:1-15의 혼인 비유, 다른 복음에 대한 경고와 바울의 재정 선택을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서 살핍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어리석은 자랑을 용납해 달라는 요청 (1절)&lt;/h3&gt;&lt;p&gt;바울은 자신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해 달라는 소원으로 말을 시작한다(1절). “어리석은 것”(ἀφροσύνης, 아프로쉬네스)은 분별을 잃은 상태를 가리키며, 바울은 11:17과 11:21에서도 같은 말로 자신의 자랑을 어리석다고 부른다. 1절 후반의 동사(ἀνέχεσθέ, 아네케스테)는 형태로는 “너희가 이미 나를 용납하고 있다”는 서술로도 읽을 수 있고, 이 읽기도 문맥에 어울린다. 그러나 앞의 소원에 이어지는 흐름에는 개역개정처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는 요청으로 읽는 편이 조금 더 잘 맞는다.&lt;sup&gt;1&lt;/sup&gt; 10장에서 바울은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비교하며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10:12). 이제 그는 그들이 즐겨 쓰는 자랑의 방식을 빌려 자기 사역을 설명해야 하므로 먼저 양해를 구한다.&lt;/p&gt;&lt;h3&gt;한 남편께 정혼시킨 사도의 열심 (2절)&lt;/h3&gt;&lt;p&gt;2절은 이 요청의 이유를 밝힌다. 바울은 성도들을 위하여 열심을 내며(ζηλῶ, 젤로), 그 열심을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부른다. 혼인 비유와 함께 쓰인 이 열심은 정혼한 상대가 다른 이에게 마음을 주지 않기를 바라는 질투의 성격을 띤다. 바울은 성도들을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ἑνὶ ἀνδρὶ, 헤니 안드리)이신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하였다. “중매함이로다”(ἡρμοσάμην, 헤르모사멘)는 신부를 신랑과 짝지어 준 일을 가리키며, 바울은 고린도에 복음을 전해 교회를 세운 일을 이 정혼으로 그린다. 그의 자리는 정혼한 딸이 혼인 날까지 신랑에게 신실하도록 지켜보는 아버지와 비슷하다.&lt;sup&gt;2&lt;/sup&gt;&lt;/p&gt;&lt;p&gt;바울이 신부를 “드리려고”(παραστῆσαι, 파라스테사이) 하는 때는 정혼 뒤에 올 혼인 날이며, 그날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lt;sup&gt;3&lt;/sup&gt; 정혼과 혼인 사이에는 기다리는 기간이 있고, 3절의 두려움은 그 기간에 신부가 마음을 빼앗길 위험에 관한 것이다. “정결한 처녀”(παρθένον ἁγνὴν, 파르테논 하그넨)는 단수이지만 바울이 드리려는 “너희”는 복수다. 바울은 여러 성도로 이루어진 공동체 전체를 한 신부로 그리스도께 드린다. 사도는 신랑의 자리에 서지 않으며, 성도들이 자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신실하도록 지킨다.&lt;/p&gt;&lt;h3&gt;하와의 미혹과 다른 복음을 용납하는 교회 (3-4절)&lt;/h3&gt;&lt;p&gt;그러나 바울은 두려워한다. 뱀이 그 “간계”(πανουργίᾳ, 파누르기아)로 하와를 미혹한 것처럼 성도들의 “마음”(νοήματα, 노에마타)이 부패할까 염려한다. 여기서 “마음”은 감정보다 생각과 판단을 가리킨다. 뱀의 말이 하와의 판단을 흔들었듯이, 그럴듯한 가르침이 교회의 판단을 흐려 그리스도께 대한 신실함에서 떠나게 할 수 있다. 성도들의 생각이 떠나지 말아야 할 “진실함”(ἁπλότητος, 하플로테토스)은 둘로 나뉘지 않고 한 대상을 향하는 온전한 헌신이다.&lt;sup&gt;4&lt;/sup&gt; 바울은 이 진실함과 “깨끗함”(ἁγνότητος, 하그노테토스)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lt;sup&gt;5&lt;/sup&gt; 이 헌신은 2절의 “한 남편”과 어울려, 교회가 그리스도 한 분께 마음을 드려야 함을 밝힌다.&lt;/p&gt;&lt;p&gt;4절은 그 위험이 무엇인지 밝힌다. “누가 가서”로 옮긴 말(ὁ ἐρχόμενος, 호 에르코메노스)은 ‘오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고린도 바깥에서 교회로 들어온 사람을 가리킨다. 추천서를 주고받는 어떤 사람들에 관한 언급(3:1)과 남의 수고로 자랑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말(10:15-16)에 비추어 보면, 문제의 가르침은 외부에서 온 교사들과 관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사람이 가져오는 것은 “다른 예수”(ἄλλον Ἰησοῦν, 알론 이에순)와 “다른 영”(πνεῦμα ἕτερον, 프뉴마 헤테론)과 “다른 복음”(εὐαγγέλιον ἕτερον, 유앙겔리온 헤테론)이다. 바울은 각 표현에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너희가 받지 아니한”을 붙여, 고린도 교회가 처음 받은 복음을 다름을 재는 기준으로 삼는다. 그 복음의 중심은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전파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1:19). 본문은 새 가르침의 조항을 밝히지 않지만, 그것이 예수와 영과 복음에 관하여 이미 받은 내용을 바꾸는 가르침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성도들은 그것을 “잘 용납하는구나”(καλῶς ἀνέχεσθε, 칼로스 아네케스테). 칭찬처럼 들리는 이 “잘”은 반어다. 성도들은 자기들을 세운 사도에게는 양해를 구하게 하면서 다른 복음은 너그럽게 받아들였다.&lt;/p&gt;&lt;h3&gt;지극히 크다는 사도들과 바울의 지식 (5-6절)&lt;/h3&gt;&lt;p&gt;5절에서 바울은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τῶν ὑπερλίαν ἀποστόλων, 톤 휘페를리안 아포스톨론)보다 자신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극도로’를 뜻하는 부사가 붙은 이 호칭은 반어이며, 이들이 누구인지는 논쟁이 많지만 4절에서 다른 복음을 가져온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이 가장 개연성이 높다.&lt;sup&gt;6&lt;/sup&gt; 이 호칭을 열두 사도에게 돌리는 해석도 있으나, 그렇게 읽으면 다른 복음을 다루는 4절과 경쟁자들을 다루는 12-15절 사이의 논증이 끊긴다. 13절은 바로 이 사람들을 “거짓 사도”라고 부른다.&lt;sup&gt;7&lt;/sup&gt; 바울은 그들의 이름이나 출신, 가르침의 세부 내용을 밝히지 않는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그들의 높은 평판 때문에 자신이 전한 복음이 열등하게 여겨지는 일이다.&lt;/p&gt;&lt;p&gt;6절에서 바울은 “말에는 부족하나”(ἰδιώτης τῷ λόγῳ, 이디오테스 토 로고)라고 인정한다. ἰδιώτης(이디오테스)는 어떤 분야의 전문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며, 여기서는 수사학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연설가가 아니라는 뜻이다.&lt;sup&gt;8&lt;/sup&gt; 10:10에서 어떤 이들은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바울은 그 평가를 일단 받아들이지만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답한다. 이 지식은 그가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앎이며, 그는 그것을 모든 일로 성도들에게 나타내었다. 성도들이 바울을 판단할 근거는 그들이 이미 받은 가르침과 그들 가운데서 이루어진 바울의 사역에 있다.&lt;/p&gt;&lt;h3&gt;값없이 전한 복음과 다른 교회들의 지원 (7-11절)&lt;/h3&gt;&lt;p&gt;7절의 반문은 재정 문제를 꺼낸다. 바울은 성도들을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ἐμαυτὸν ταπεινῶν, 에마우톤 타페이논)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전한 것이 죄였느냐고 묻는다. 이 낮춤은 생계를 위해 손으로 일하기까지 한 일을 가리킨다.&lt;sup&gt;9&lt;/sup&gt; 바울은 사례를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한 것을 성도들을 위한 선택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런 반문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그 선택이 오히려 그의 사역을 낮게 보는 이유가 되었음을 보여 준다.&lt;/p&gt;&lt;p&gt;8절에서 바울은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일을 “탈취한 것”(ἐσύλησα, 에쉴레사)이라고 부른다. 약탈한다는 뜻의 강한 동사지만, 바울이 실제로 다른 교회를 강탈했다는 뜻은 아니다. 고린도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 다른 교회들의 지원을 받은 일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다.&lt;sup&gt;10&lt;/sup&gt; “비용”(ὀψώνιον, 옵소니온)은 삯이나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가리킨다.&lt;sup&gt;11&lt;/sup&gt; 고린도에서 값없이 이루어진 사역 뒤에는 다른 교회들의 나눔이 있었다.&lt;/p&gt;&lt;p&gt;9절은 그 지원의 경위를 밝힌다.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며 비용이 부족하였을 때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κατενάρκησα, 카테나르케사) 않은 것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그 부족을 보충했기 때문이다. 이 생활 지원은 8-9장에서 바울이 권하는 연보와 구별된다. 그 연보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해 여러 교회가 모으는 것이고(롬 15:25-26), 9절의 지원은 고린도에서 사역하던 바울의 생계를 위한 것이었다. 9절 끝에서 바울은 모든 일에 폐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고 말하며, 이 방침을 앞으로도 지키겠다고 밝힌다.&lt;/p&gt;&lt;p&gt;1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라고 엄숙하게 확언하며, 값없이 복음을 전하는 “나의 이 자랑”이 아가야 지방에서 막히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아가야는 고린도가 속한 지역이다(1:1). 11절에서 그는 그 까닭이 성도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냐고 되물은 뒤 “하나님이 아시느니라”라고 답하며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른다. 이 반문은 사례를 받지 않는 선택이 사랑의 부족으로 오해받았음을 보여 준다. 12:14에서도 바울은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라고 말한다.&lt;/p&gt;&lt;h3&gt;기회를 찾는 자들의 구실을 끊음 (12절)&lt;/h3&gt;&lt;p&gt;12절은 이 방침을 앞으로도 지키려는 또 다른 이유를 밝힌다. 바울은 “기회를 찾는 자들”의 “기회”(ἀφορμήν, 아포르멘)를 끊으려 한다. 이 말은 어떤 일을 시작할 발판이나 구실을 뜻한다. 경쟁자들은 자기들이 자랑하는 일에서 바울과 같은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lt;sup&gt;12&lt;/sup&gt; 그들은 고린도 교회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1:20 참조).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례를 받기 시작하면 그들은 바울도 자기들과 같은 방식으로 사역한다고 내세울 수 있다. 바울이 계속 값없이 섬기면 그 주장은 근거를 잃는다.&lt;sup&gt;13&lt;/sup&gt;&lt;/p&gt;&lt;h3&gt;자기를 가장하는 거짓 사도들과 그 마지막 (13-15절)&lt;/h3&gt;&lt;p&gt;13절은 그 경쟁자들을 “거짓 사도”(ψευδαπόστολοι, 프세우다포스톨로이)이며 “속이는 일꾼”(ἐργάται δόλιοι, 에르가타이 돌리오이)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μετασχηματιζόμενοι, 메타스케마티조메노이) 사람들이다. 이 동사는 겉모습을 바꾸어 실제와 다른 존재로 보이게 하는 행동을 가리키며, 14-15절에서 두 번 더 쓰인다. 14절에서 바울은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라고 말하고, 15절에서 사탄의 일꾼들이 자기를 “의의 일꾼”(διάκονοι δικαιοσύνης, 디아코노이 디카이오쉬네스)으로 가장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라고 결론짓는다. 사탄조차 하나님께 속한 빛의 사자처럼 보일 수 있다면, 그의 일꾼들이 의로운 사역자처럼 보이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빛나 보이는 모습이나 의로워 보이는 태도만으로는 그 사람이 하나님께 속했는지 판단할 수 없다. “의의 일꾼”이라는 말은 바울이 3:9에서 자기가 맡은 새 언약의 사역을 “의의 직분”이라고 부른 것을 떠올리게 한다. 거짓 일꾼들은 그런 직분의 모습을 빌려 입는다.&lt;/p&gt;&lt;p&gt;15절 끝에서 바울은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 선언한다. 그들의 “마지막”(τὸ τέλος, 토 텔로스)은 지금 내세우는 이름이나 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행한 일에 따라 정해진다. 사도라는 칭호와 의로워 보이는 외양은 그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없애지 못한다.&lt;/p&gt;&lt;h3&gt;교회가 용납하는 사람들 (1, 4절과 11:19-20)&lt;/h3&gt;&lt;p&gt;1절에서 바울은 자기를 용납해 달라고 청했고, 4절에서는 다른 복음을 잘 용납하는 교회를 꼬집었다. 바로 뒤의 11:19-20에서도 그는 성도들이 자신들을 종으로 삼고 잡아먹고 빼앗고 스스로 높이고 뺨을 치는 사람까지 용납한다고 말한다. 같은 동사가 되풀이되면서, 교회가 누구를 용납하고 누구를 거절하는가 하는 문제가 이 대목 전체를 꿴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뱀의 미혹과 교회 전체를 향한 경고&lt;/h3&gt;&lt;p&gt;창세기 3:1-13은 바울이 3절에서 직접 불러오는 미혹의 이야기다. 뱀은 먼저 질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고, 이어서 하나님이 경고하신 죽음을 부정하며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말한다(창 3:1, 4). 하나님이 물으시자 하와는 뱀이 자신을 꾀었다고 대답한다(창 3:13). 뱀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틀어 다른 말을 믿게 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해 두려워하는 일도 이와 닮았다.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은 예수와 복음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면서 처음 받은 내용을 바꾼다. 하와가 비틀린 말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듯이, 교회도 바뀐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에서 떠날 수 있다(3절).&lt;/p&gt;&lt;p&gt;바울은 3절에서 하와만 언급하지만, 창세기에서 하와와 아담은 모두 열매를 먹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행동에 대답한다. 하와의 예는 2절의 신부 비유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며, 바울은 이 예로 여성의 결함을 말하지 않는다. 경고는 남녀를 포함한 교회 전체를 향한다. 한 신부 안에 모든 성도가 들어 있고, 부패할 위험에 처한 것도 그 공동체 전체의 생각이다.&lt;/p&gt;&lt;h3&gt;여호와를 남편으로 그린 선지서의 언약&lt;/h3&gt;&lt;p&gt;선지서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혼인에 빗대어 신실함을 요구한다. 호세아 2장에서 이스라엘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준 이가 여호와이심을 알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더하여 주신 은과 금을 바알을 위하여 썼다(호 2:8).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백성을 광야로 이끌어 다시 말씀하시고, 그들이 자신을 다시는 ‘바알’이 아니라 ‘남편’이라 부르게 하시며,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과 진실함으로 그들에게 영원히 장가들겠다고 약속하신다(호 2:14-20). 이사야 54:5-8에서도 선지자는 버림받은 아내 같은 백성에게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고 말하며, 여호와께서 큰 긍휼로 그들을 다시 모으시겠다고 약속한다. 두 본문에서 백성의 신실함은 먼저 은혜를 베풀고 회복하시는 남편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이 본문들에서 남편의 자리에 계신 분은 여호와이시다. 고린도후서 11:2에서 바울은 그 자리에 그리스도를 두고,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한 언약적 충성을 이방 도시의 교회에도 요구한다.&lt;/p&gt;&lt;h3&gt;이미 전하고 받은 복음이라는 기준&lt;/h3&gt;&lt;p&gt;갈라디아서 1:6-9는 다른 복음을 직접 다룬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를 떠나 다른 복음으로 옮겨 가는 교회를 책망하고, 자기나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이미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한다(갈 1:8-9). 고린도후서 11:4에서도 바울은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너희가 받지 아니한”이라는 말로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가려낸다. 두 편지에서 판단의 기준은 전하는 사람의 권위가 아니라 이미 전하고 받은 복음이다. 고린도후서 11:14의 광명의 천사도 같은 점을 보여 준다. 천사처럼 빛나 보이는 모습도, 사도라는 칭호도 메시지의 참됨을 보증하지 못한다. 사도인 바울 자신도 그 복음에 매여 있다.&lt;/p&gt;&lt;h3&gt;복음으로 살 권리와 그 권리를 쓰지 않은 바울&lt;/h3&gt;&lt;p&gt;재정 문제(7-12절)는 바울이 같은 교회에 먼저 보낸 고린도전서 9장을 배경으로 한다. 고린도전서 9:7-14에서 바울은 군인과 농부와 목자의 예, 율법과 성전 봉사의 예를 들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으로 살 권리가 있으며 주께서도 그렇게 명하셨다고 말한다. 이어 9:12과 9:15-18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려고 그 권리를 쓰지 않고 값없이 복음을 전한다고 밝힌다. 고린도후서 11:7-12는 이 방침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어떻게 오해받았는지 보여 준다. 바울은 사역자가 지원을 받을 권리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고린도에서 그 권리를 쓰지 않았고, 그동안 다른 교회들의 도움으로 생활했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한 남편이신 그리스도와 중매하는 사도&lt;/h3&gt;&lt;p&gt;교회가 신실해야 할 분은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다(2절). 교회가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친히 이루시는 그리스도이시다. 1:19-20에서 바울은 자신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전파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모두 “예”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다른 예수를 전하는 가르침은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시는 바로 그분에게서 교회를 떼어 놓는다. 바울은 복음을 전해 성도들을 그분께 정혼시키고 그 관계를 돌보지만, 신랑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lt;/p&gt;&lt;p&gt;에베소서 5:25-27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자기 내어 주심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셨고, 말씀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시며,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려 하신다. 교회의 정결은 신랑이 먼저 베푸신 이 사랑에서 시작된다.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자기 앞에 세우시는 분은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고린도후서 11:2에서 바울은 그 일을 섬기는 중매자의 자리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신다면, 그분을 섬기는 사람은 그분에 관한 참된 복음을 교회에 들려주어야 한다.&lt;/p&gt;&lt;h3&gt;다른 예수와 다른 영을 분별하는 기준&lt;/h3&gt;&lt;p&gt;“다른 예수”라는 경고(4절)는 교회가 선포하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묻는다. 바울이 전한 예수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이며, 그분의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한다(5:14-15). 예수라는 이름을 쓰더라도 그분의 죽음과 부활, 그분이 부르시는 삶의 내용이 바뀌면 성도들이 받은 복음과 어긋난다. 4:5에서 바울은 자신을 전파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심을 전파하며, 자신은 예수를 위하여 성도들의 종이 되었다고 말한다. 참된 예수를 전하는 사람은 주인의 자리에 서지 않고 성도들을 섬긴다.&lt;/p&gt;&lt;p&gt;4절은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 사이에서 “다른 영”도 경고한다. 1:21-22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사도와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고 말하며, 3:18은 성도들이 주의 영광을 보며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고 말한다. 성령은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세우시고 그분을 닮게 하신다. 그러므로 영적인 체험이나 능력을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다른 길로 이끄는 가르침은 성령께 속한 것이 아니다.&lt;/p&gt;&lt;h3&gt;그리스도 안에서 밝혀진 빛과 의&lt;/h3&gt;&lt;p&gt;14-15절의 광명의 천사와 의의 일꾼은 겉모습이 사람을 속일 수 있음을 경고한다. 고린도후서는 참된 빛과 의를 그리스도 안에서 밝힌다. 4:6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 말한다. 5:21에서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셔서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고 말한다. 바울이 맡은 “의의 직분”(3:9)은 이 의를 전하는 직분이다. 그러므로 빛나 보이는 모습이나 의로워 보이는 태도는 그 자체로 증거가 되지 못한다. 교회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영광과 의를 바르게 전하는지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의로움을 내세우면서 성도들을 속이거나 이용하는 사역은 죄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복음과 충돌한다.&lt;/p&gt;&lt;h3&gt;부활의 소망과 혼인 날&lt;/h3&gt;&lt;p&gt;2절에서 바울이 바라보는 혼인 날은 부활의 소망과 이어진다. 4:14에서 바울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παραστήσει, 파라스테세이) 줄을 안다고 말한다. “서게 하실”은 2절의 “드리려고”와 같은 동사다. 성도들을 그 앞에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이 이미 예수를 살리셨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 소망을 품고 교회가 그날 정결한 신부로 서도록 지금 수고한다. 성도들도 새 가르침이 약속하는 유익 앞에서 이미 받은 소망을 붙들 수 있다.&lt;/p&gt;&lt;h3&gt;그리스도의 은혜를 따른 재정 선택&lt;/h3&gt;&lt;p&gt;10절의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라는 확언은 바울의 재정 선택을 그리스도 앞에 세운다. 바울은 다른 교회들의 지원을 받은 사실과 자신의 부족도 감추지 않는다(8-9절). 그리스도의 진리는 무엇을 전하느냐뿐 아니라 돈을 다루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도 미친다. 자기를 낮추어 성도들을 높이려 한 바울의 선택(7절)은, 부요하신 이로서 성도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셔서 그들을 부요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8:9)와 같은 방향을 향한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고, 사도는 그 복음이 값없이 사람들에게 이르도록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는다. 사역자가 지원을 받는 일 자체는 정당하다(고전 9:14). 그러나 11:20에서 바울이 말하듯 성도들을 종으로 삼고 빼앗고 스스로 높이는 사역은 이 은혜와 반대 방향으로 간다.&lt;/p&gt;&lt;h3&gt;행위대로 받는 그리스도의 심판&lt;/h3&gt;&lt;p&gt;15절의 마지막 선언은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자처하는 사람도 결국 주님 앞에 서야 함을 밝힌다. 바울은 5:10에서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했다. 이 심판에는 바울 자신도 성도들도 포함된다. 거짓 일꾼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는 경고도 이 심판을 바라본다. 사역의 지위와 종교적인 명성은 그 책임을 없애지 못한다. 바울의 열심은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가 그분 앞에 신실하게 서는 날을 향한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받은 복음으로 새 가르침을 살핌&lt;/h3&gt;&lt;p&gt;새로운 가르침을 들을 때 교회는 누가 말하는지보다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바울이 다름을 재는 기준으로 삼은 것은 성도들이 처음 받은 복음이었다(4절). 이름이 알려졌거나 말솜씨가 뛰어나거나 모임의 규모가 크다는 사실은 메시지의 참됨을 보증하지 못한다. 예수라는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교회는 그 가르침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 죄와 은혜, 주님께 대한 순종을 어떻게 말하는지 성경에 비추어 확인해야 한다. 영적인 체험이나 특별한 깨달음을 내세우는 말도 마찬가지다. 4절이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한 문장에서 경고하므로, 그 체험이 그리스도를 더 알게 하고 그분을 따라 살게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lt;/p&gt;&lt;h3&gt;그리스도께만 드리는 교회 전체의 충성&lt;/h3&gt;&lt;p&gt;혼인 비유는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성별과 나이와 역할이 달라도 모든 성도가 한 신부로서 주님께 신실해야 한다. 하와의 예를 여성이 더 쉽게 속는다는 근거로 쓰거나, “정결한 처녀”라는 그림을 특정한 사람의 성적 과거를 들추어 수치심을 주는 데 써서는 안 된다. 이 비유가 말하는 정결은 그리스도께 대한 한결같은 신실함이며, 그 정결은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시작된다.&lt;/p&gt;&lt;p&gt;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은 특정 지도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의와 다르다. 바울은 교회를 자기에게 묶지 않고 그리스도께 드리려 했으며, 1:24에서는 성도들의 믿음을 주관하지 않고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한다고 말했다. 지도자의 가르침이나 재정 사용이나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묻는 성도에게 그리스도를 떠났다고 말하면, 사역자가 신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사역자는 교회를 그리스도께 이어 주는 사람이며, 교회가 충성을 바칠 대상은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lt;/p&gt;&lt;h3&gt;값없는 사역과 그 비용을 감당한 섬김&lt;/h3&gt;&lt;p&gt;바울은 고린도에서 사례를 받지 않았지만 다른 교회들에게서 생활에 필요한 지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사례를 받는 사역을 낮게 평가할 수 없다. 사역자가 복음을 위해 스스로 권리를 내려놓는 선택과 공동체가 사역자의 생활을 책임지는 일은 둘 다 정당하며, 서로 구별된다. 값없이 이루어지는 사역에도 누군가의 비용과 수고가 들어간다. 바울은 자신의 부족을 마게도냐의 형제들이 채웠다고 밝혔다. 무료라는 말이 뒤에서 비용을 감당한 사람들의 섬김을 가려서는 안 된다. 또 바울은 경쟁자들이 바울과 같은 자격을 내세울 구실을 막으려고 재정 방침을 지켰다(12절). 사역자는 돈을 받고 쓰는 방식이 복음의 신뢰를 지키는지 살펴야 한다.&lt;/p&gt;&lt;h3&gt;복음의 내용과 실제 행위에 따른 판단&lt;/h3&gt;&lt;p&gt;이 본문의 강한 경고를 이용해 의견이 다른 사람을 곧바로 사탄의 일꾼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바울이 거짓 사도라고 부른 사람들은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전하고, 사도의 이름을 내세우며 성도들을 이용한 이들이었다. 교회는 그런 판단을 사람에 대한 호불호나 사소한 이견에 쓰지 말고, 전하는 복음의 내용과 실제 행위에 근거해 내려야 한다.&lt;/p&gt;&lt;p&gt;15절은 거짓 일꾼들의 마지막이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 말한다. 사도라는 이름과 의로워 보이는 모습은 그들의 실제 행위에 대한 책임을 없애지 못한다. 오늘의 사역자도 직분과 평판과 영적 경력으로, 자기가 가르친 내용과 사람과 돈을 다룬 방식에 대한 책임을 덮을 수 없다. 바울은 사랑을 의심받을 때 하나님을 증인으로 불렀고(11절), 자신의 재정 방침과 다른 교회들에게서 받은 지원을 숨기지 않고 설명했다(8-9절). 그리스도 앞에 설 사역자는 자기 말과 행동이 검토받는 일을 피하지 않는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11:1,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1,”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1-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1-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2,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2,”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2/&lt;/a&gt;.&lt;/li&gt;&lt;li&gt;W. Robertson Nicoll, ed., &lt;em&gt;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11:2, Bible Hub,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1.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1.htm&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3,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3,”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3/&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에 따르면 “깨끗함”에 해당하는 어구(&lt;span lang="grc"&gt;καὶ τῆς ἁγνότητος&lt;/span&gt;, &lt;span class="translit"&gt;카이 테스 하그노테토스&lt;/span&gt;)는 일부 사본에 없고, 이 문맥에서 “진실함”과 “깨끗함”은 뜻이 매우 가까워 번역에서 한 낱말로 옮길 수도 있다. NA28은 이 어구를 대괄호에 넣는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3,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3/&lt;/a&gt;; &lt;em&gt;Novum Testamentum Graece&lt;/em&gt;, ed. Barbara Aland et al., 28th rev. ed.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2012), 2 Cor 11:3, accessed October 25, 2026, &lt;a href="https://www.die-bibel.de/bibel/NA28/2CO.11" rel="noopener"&gt;https://www.die-bibel.de/bibel/NA28/2CO.11&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5,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5,”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5-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5-2/&lt;/a&gt;.&lt;/li&gt;&lt;li&gt;EGT는 A.V.와 R.V.의 번역 “the very chiefest Apostles”가 그리스도께 직접 사명을 받은 열두 사도, 특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가리킨다고 소개한 뒤, 여기서 그들을 언급하면 논증과 무관할 뿐 아니라 논증을 끊는다고 본다. 또 &lt;span lang="grc"&gt;ὑπερλίαν&lt;/span&gt;(휘페를리안)이 그리스어 문헌에서 늘 반어로 쓰이는 듯하다는 점을 들어, 이 표현을 거짓 사도들(&lt;span lang="grc"&gt;ψευδαπόστολοι&lt;/span&gt;, &lt;span class="translit"&gt;프세우다포스톨로이&lt;/span&gt;)을 반어로 묘사한 말로 읽는다. Nicoll, &lt;em&gt;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11:5,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1.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1.htm&lt;/a&gt;.&lt;/li&gt;&lt;li&gt;“2 Corinthians 11:1-15,” NET Bible, Bible Gateway, 11:6, sn (footnote n),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2+Corinthians+11%3A1-15&amp;amp;version=NET" rel="noopener"&gt;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2+Corinthians+11%3A1-15&amp;amp;version=NET&lt;/a&gt;.&lt;/li&gt;&lt;li&gt;“2 Corinthians 11:1-15,” NET Bible, 11:7, sn (footnote o), &lt;a href="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2+Corinthians+11%3A1-15&amp;amp;version=NET" rel="noopener"&gt;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2+Corinthians+11%3A1-15&amp;amp;version=NET&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8,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8,”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8-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8-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8,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8-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8-2/&lt;/a&gt;.&lt;/li&gt;&lt;li&gt;Nicoll, &lt;em&gt;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11:12,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1.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1.htm&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12,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12,”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1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12/&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11:16-33 약함을 자랑하며 교회를 돌보는 그리스도의 일꾼</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11.16-33/</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11.16-33/</guid><description>고린도후서 11:16-33에서 어리석은 자랑의 반어, 사도가 겪은 고난과 교회를 향한 염려, 다메섹 탈출의 의미를 살핍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어리석은 자로서 시작하는 자랑 (16-18절)&lt;/h3&gt;&lt;p&gt;16절에서 바울은 “내가 다시 말하노니”라며 누구든지 자기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고 요청한다. 곧바로 “만일 그러하더라도”라는 단서를 붙여, 성도들이 끝내 그를 어리석다고 여긴다면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라도 받아 달라고 한다. 이 요청은 11:1의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로 돌아간다. 바울은 11:2-15에서 다른 예수를 전하는 이들과 거짓 사도들을 고발한 뒤, 11:1에서 예고한 어리석은 말하기를 이제 시작한다. 그는 이미 자기를 칭찬하며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10:12). 그래서 그들처럼 자기를 내세우는 이 자랑을 사역의 바른 방식으로 제시하지 않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거듭 표시한다.&lt;/p&gt;&lt;p&gt;바울이 이 자랑을 시작하는 계기는 성도들의 태도다. 그들은 이미 다른 사람들의 자랑을 받아들였고, 바울은 자기 말도 그렇게 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17절에서 그는 지금 하는 말이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어리석은 자와 같이 하는 말이라고 밝힌다. 여기서 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자기를 남과 견주어 높이는 말이 주님께 받은 말이 아니라고 인정하고, 이 자랑에 주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lt;sup&gt;1&lt;/sup&gt; 그런데도 그는 자랑을 그치지 않는다. 바울은 성도들 때문에 경쟁자들의 비교 형식을 부득이 빌리지만(12:11), 그 형식에 무엇을 담을지는 스스로 정한다.&lt;/p&gt;&lt;p&gt;17절 끝의 “기탄 없이”로 옮긴 원문 구절에는 명사 ὑποστάσει(휘포스타세이)가 들어 있고, 이 명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진다. 이 단어를 ‘확신’으로 읽으면 ‘이렇게 확신하며 자랑하는 가운데’라는 뜻이 되며, 개역개정의 “기탄 없이”도 이 읽기를 따른다.&lt;sup&gt;2&lt;/sup&gt; 이 단어에 ‘확신’이라는 뜻이 있는지 의심하여 ‘이 자랑하는 일에서’ 정도로 옮기자는 견해도 있다.&lt;sup&gt;3&lt;/sup&gt; 같은 명사가 쓰인 9:4에서 개역개정은 “이 믿던 것”으로 옮겼고, 그 문맥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준비를 두고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자랑한 확신이 부끄러워질까 하는 염려다. 또 21절에서 바울은 이 자랑을 “담대하리라”는 말로 이어 간다. 이 두 문맥을 고려하면 확신의 뜻이 더 자연스럽다. 개역개정의 “기탄 없이”는 바울이 일부러 거리낌 없는 자랑의 말투를 취한다는 뜻을 살린 번역이다.&lt;/p&gt;&lt;p&gt;18절에서 “육신을 따라”(κατὰ σάρκα, 카타 사르카) 자랑한다는 말은 혈통이나 언변이나 외모처럼 사람의 눈에 보이는 기준으로 자기를 내세우는 방식을 가리킨다. 바울은 5:12에서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언급했고, 10:2-3에서는 자신이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런 그가 여기서 “나도 자랑하겠노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자랑에서 혈통의 자격은 22절에서 짧게 확인될 뿐이고, 목록의 대부분은 경쟁자들이 내세우지 않을 고난과 약함이다.&lt;/p&gt;&lt;h3&gt;성도들이 용납한 지배와 모욕 (19-21절 전반부)&lt;/h3&gt;&lt;p&gt;19절의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는 날카로운 반어다. 스스로 분별 있다고 여기는 성도들이 분별없는 자들을 기꺼이 견딘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4:10에서도 바울은 사도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다는 반어를 썼다. “용납하는구나”(ἀνέχεσθε, 아네케스테)는 11:1과 11:4에 이미 나온 동사다. 11:4에서 성도들은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잘 용납”했다. 19절의 용납은 성도들의 너그러움을 칭찬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묻는 고발이다.&lt;/p&gt;&lt;p&gt;20절은 성도들이 용납한 일을 ‘누가 그렇게 하면’ 형식의 다섯 조건절로 열거한다. “종으로 삼거나”는 사람을 예속시키는 행동이다. “잡아먹거나”(κατεσθίει, 카테스티에이)는 ‘먹어 치우다’라는 비유로, 성도들의 재물과 수고를 삼키는 착취를 가리킨다. “빼앗거나”로 옮긴 λαμβάνει(람바네이)는 본래 ‘취하다’라는 뜻이며, 12:16에서 바울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는 비난을 인용할 때도 같은 동사가 쓰인다. 여기서도 성도들을 이용해 자기 이익을 챙기는 행동을 가리킨다.&lt;sup&gt;4&lt;/sup&gt; “스스로 높이거나”는 자기를 들어 올려 남 위에 서는 태도다. 마지막 “뺨을 칠지라도”는 얼굴을 때리는 행동인데, 얼굴을 치는 일은 동방에서 예로부터 상대를 모욕하는 흔한 방식이었다.&lt;sup&gt;5&lt;/sup&gt; 경쟁자들이 실제로 성도들을 때렸는지는 본문만으로 알 수 없다. 앞의 “잡아먹거나”가 비유이듯, 이 말도 성도들을 짓밟고 모욕하는 대우를 가장 강한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다.&lt;sup&gt;6&lt;/sup&gt; 바울은 이 목록으로 사도의 이름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성도들을 실제로 어떻게 대하는지 드러내고, 그 대우를 받아들여 온 교회의 태도를 문제 삼는다.&lt;/p&gt;&lt;p&gt;21절 전반부의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도 반어를 이어 간다. 바울은 성도들을 종으로 삼고 모욕할 만큼 강하지 못했던 일을 부끄러운 부족처럼 고백하는 체한다. 이 반어는 착취와 모욕을 강함으로 여기는 성도들의 판단을 드러낸다. 성도들을 착취하지 않은 바울의 이 ‘약함’은 11:7-9에서 말한 값없는 복음 전파와 이어진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11:7의 질문을 보면 그 결정이 오히려 비판의 빌미가 되었다. 약하다는 말은 29-30절에서 다시 나오고, 12:10의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로 이어진다.&lt;/p&gt;&lt;h3&gt;같은 혈통과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주장 (21절 후반부-23절)&lt;/h3&gt;&lt;p&gt;21절 후반부에서 바울은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고 말한다. 그는 경쟁자들의 담대함에 맞서겠다고 하면서도 “어리석은 말이나마”를 끼워 넣어 이 경쟁이 어리석은 형식임을 다시 밝힌다. 22절은 그 담대함을 세 개의 짧은 질문과 대답으로 펼친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이스라엘인이냐, 아브라함의 후손이냐는 질문마다 바울은 “나도 그러하며”라고 답한다. 히브리인은 혈통을 드러내는 이름으로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쓰는 전통을 암시할 수도 있고, 이스라엘인은 하나님이 택하신 언약 백성에 속한 신분을 가리킨다.&lt;sup&gt;7&lt;/sup&gt;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어받는 가문에 속했다는 주장이다. 바울은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지 않으며, 경쟁자들이 그 신분을 사역의 신뢰 근거로 내세울 때 자신도 같은 자격이 있다고 답한다.&lt;/p&gt;&lt;p&gt;23절의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는 질문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바울은 11:13-15에서 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한 거짓 사도,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 사탄의 일꾼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이 질문의 “그리스도의 일꾼”(διάκονοι Χριστοῦ, 디아코노이 크리스투)은 경쟁자들이 내세우는 칭호를 인정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논증을 위해 그 칭호를 잠시 받아들이고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라고 답한다. 그 앞에 덧붙인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παραφρονῶν λαλῶ, 파라프로논 랄로)는 ‘제정신을 벗어나 말한다’는 뜻으로, 앞서 쓴 ‘어리석음’보다 강한 표현이다. 남보다 나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대목에서, 바울은 그 주장을 제정신이 아닌 말이라고 스스로 규정한다.&lt;/p&gt;&lt;p&gt;바울이 이어서 내놓는 증거는 수고와 위험의 목록이다. 그는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다. “넘치도록”과 “더 많이”는 경쟁자들과의 비교를 이어 가지만, 바울이 남보다 많다고 내세우는 것은 수고와 투옥과 매질이다. 마지막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는 거듭 죽음의 위험에 처했던 경험을 가리킨다. 1:8-9에서 바울은 아시아에서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고백했는데, 이 짧은 구가 말하는 것도 그와 같은 종류의 위기다.&lt;/p&gt;&lt;h3&gt;매질과 위험과 결핍 (24-27절)&lt;/h3&gt;&lt;p&gt;24절부터 바울은 포괄적인 목록을 구체적인 횟수로 풀어 간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 한 번에 서른아홉 대씩 다섯 차례 맞은 처벌이다. 신명기 25:1-3은 재판에서 죄인에게 때릴 수 있는 최대 수를 마흔 대로 정했고, 유대 전통은 셈을 잘못하여 그 한계를 넘지 않도록 서른아홉 대로 제한했다.&lt;sup&gt;8&lt;/sup&gt; 바울은 22절에서 자기 민족과 언약의 정체성을 인정했고, 바로 그 동족의 재판에서 이 처벌을 받았다. 이어지는 목록에서 그는 동족과 이방인 양쪽에서 겪은 위험을 모두 말한다. 특정 사건에서 그를 해친 이들의 행동을 어느 민족 전체의 행동으로 확대할 수 없다.&lt;/p&gt;&lt;p&gt;25절은 처벌과 재난을 잇는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는 나무 막대기로 때리는 로마의 처벌을 가리킨다.&lt;sup&gt;9&lt;/sup&gt; 사도행전 16:22-23은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가 상관들의 명령으로 매를 맞고 옥에 갇힌 일을 기록하며, 37절에서 바울은 로마 사람인 자신들이 정죄도 받지 않은 채 공개적으로 맞았다고 항의한다. “한 번 돌로 맞고”는 루스드라에서 무리가 바울을 돌로 치고 죽은 줄로 여겨 성 밖으로 끌어낸 일(사도행전 14:19)과 맞는다. 이어지는 “세 번 파선하고”는 바다에서 겪은 재난이다. 사도행전 27장의 로마행 파선은 이 편지보다 뒤의 일이므로, 여기서 말한 세 번의 파선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들이다.&lt;sup&gt;10&lt;/sup&gt;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는 밤낮 하루를 바다에서 보냈다는 뜻이다. 바울은 아마도 부서진 배의 조각을 붙들고 물속에 있었을 것이다.&lt;sup&gt;11&lt;/sup&gt; 어떤 배와 어느 항로에서 일어난 일인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lt;/p&gt;&lt;p&gt;26절은 “여러 번 여행하면서”로 시작하여 여덟 가지 위험을 나열한다. 강과 강도는 길에서 만나는 위협이고, 동족과 이방인은 사람들의 적대이며, 시내와 광야와 바다는 사람이 모인 곳에서 빈 들과 바다에 이르기까지 어디에나 위험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개역개정의 “시내”는 냇물이 아니라 도시 안, 곧 “성읍에서”(ἐν πόλει, 엔 폴레이)를 뜻한다. 목록 끝의 “거짓 형제 중의 위험”(ἐν ψευδαδέλφοις, 엔 프세우다델포이스)은 형제라고 불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난 위험이다. 이 항목은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11:13)을 떠올리게 한다. 바울은 자연과 사회의 적대에 더하여, 형제로 믿어야 할 사람들에게서 받은 위협까지 꼽는다.&lt;/p&gt;&lt;p&gt;27절은 위험에서 생활의 결핍으로 옮겨 간다. “수고하며 애쓰고”는 비슷한 뜻의 두 명사를 묶어 고된 노동을 강조하며, 바울이 손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린 형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lt;sup&gt;12&lt;/sup&gt; 이어서 잠들지 못한 밤들, 먹고 마실 것이 없는 주림과 목마름이 나온다. “여러 번 굶고”로 옮긴 νηστείαις(네스테이아이스)는 다른 문맥에서 종교적 금식을 가리킬 수 있는 단어다. 여기서는 주림과 목마름 바로 뒤에 놓여 자발적 금식보다 음식을 얻지 못한 굶주림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으며, 개역개정의 “굶고”도 이 뜻을 살린다.&lt;sup&gt;13&lt;/sup&gt; 마지막 “춥고 헐벗었노라”는 몸을 덮고 데울 것이 부족했던 형편이다. 6:5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이 겪은 일로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을 열거했다. 바울은 사역의 여정이 몸에 남긴 부담을 숨기지 않는다.&lt;/p&gt;&lt;h3&gt;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 (28-29절)&lt;/h3&gt;&lt;p&gt;28절에서 바울은 열거한 일들 외에도 날마다 자신을 짓누르는 일이 있다고 밝힌다. 그것은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다. 첫머리의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는 말하지 않고 남겨 둔 일들을 제쳐 둔다는 뜻이며,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은 책임을 맡은 교회들이 매일 무거운 짐이 되는 형편이다.&lt;sup&gt;14&lt;/sup&gt; “모든 교회”는 바울이 세우고 특별히 마음을 쓴 신자들의 공동체를 가리킬 것이다.&lt;sup&gt;15&lt;/sup&gt;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그가 감당한 수고에는 몸으로 겪은 위험뿐 아니라 이 지속적인 돌봄도 들어간다.&lt;/p&gt;&lt;p&gt;29절의 두 질문은 그 염려를 구체화한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에서 바울은 같은 동사를 되풀이하여 성도의 약함을 자신의 약함으로 받아들인다. 이 약함이 믿음의 연약함인지 몸의 연약함인지는 문맥이 정해 주지 않는다.&lt;sup&gt;16&lt;/sup&gt; “실족하게 되면”(σκανδαλίζεται, 스칸달리제타이)은 걸림돌에 걸려 믿음의 길에서 넘어지게 되는 일이므로, 넘어지게 만든 원인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이어지는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의 동사 πυροῦμαι(퓌루마이)는 ‘불타다’라는 뜻의 비유다. 이 표현은 성도를 넘어지게 한 자들을 향해 분노로 불탄다는 뜻으로도, 넘어진 성도 때문에 괴로움으로 속이 탄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으며, 해석자들은 대체로 분노의 읽기를 따른다.&lt;sup&gt;17&lt;/sup&gt; 개역개정의 “애타지”는 괴로움의 읽기를 택한 번역이다. 그러나 11장이 성도들을 다른 복음으로 미혹하고(11:3-4) 착취하는 자들(20절)을 고발하는 흐름이므로, 넘어지게 한 자들을 향한 분노의 읽기가 문맥에 더 잘 맞는다. 그 분노는 넘어진 성도를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다. 바울에게 성도들의 흔들림은 남의 소식이 아니다.&lt;/p&gt;&lt;h3&gt;약한 것의 자랑과 하나님 앞의 맹세 (30-31절)&lt;/h3&gt;&lt;p&gt;30절에서 바울은 자랑의 내용을 밝힌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는 자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전제한다. 비교의 형식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바울이 자랑하겠다고 고른 것은 “내가 약한 것”이다. 앞의 고난 목록과 뒤의 다메섹 사건은 모두 그의 약함을 드러내는 일이다. 31절에서 바울은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을 부르며 그분이 자신이 거짓말하지 않는 것을 아신다고 말한다. 지금 하는 말의 진실성을 하나님 앞에 맡기는 맹세다. 1:23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했다.&lt;/p&gt;&lt;h3&gt;다메섹 탈출과 자랑의 결말 (32-33절)&lt;/h3&gt;&lt;p&gt;32절은 약함의 마지막 사례로 다메섹 탈출을 든다. “아레다 왕의 고관”의 “고관”(ἐθνάρχης, 에트나르케스)은 왕을 대신해 다스리는 관리다. 아레다는 주전 9년부터 주후 40년까지 다스린 나바테아 사람들의 왕 아레다 4세이며, 이 고관이 다메섹 전체를 다스렸는지 성 안의 한 민족 집단만 다스렸는지는 역사 자료로 확정되지 않는다.&lt;sup&gt;18&lt;/sup&gt; 원문은 고관을 주어로 삼아 그가 성을 지켰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성을 지킨 사람들은 그의 명령을 받은 이들이었을 것이다.&lt;sup&gt;19&lt;/sup&gt; 사도행전 9:23-24는 같은 탈출을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공모하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킨 일로 기록한다. 두 기록은 바울을 노리고 성을 지킨 일과 바울이 광주리에 담겨 성벽을 내려가 피한 일을 똑같이 말한다. 나바테아 고관과 다메섹의 유대인들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어느 기록도 말하지 않는다.&lt;/p&gt;&lt;p&gt;33절은 탈출 장면을 짧게 그린다. 개역개정은 이를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라고 옮겼다. 원문의 동사 ἐχαλάσθην(에칼라스텐)은 ‘내리다’의 수동형으로, 누군가 바울을 광주리에 담아 들창문을 거쳐 성벽 아래로 달아 내렸음을 드러낸다. 이 문장은 그를 내려 준 사람들을 밝히지 않으며, 사도행전 9:25은 그들을 “그의 제자들”이라고 한다. 바울은 그렇게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 말을 맺는다. 붙잡힐 위험에 처한 사도가 다른 사람들의 손에 들려 피한 일이 자랑의 마지막 사례다.&lt;/p&gt;&lt;p&gt;바울의 자랑은 비교의 형식을 끝까지 유지한다. 그는 자신이 “더욱”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말하고 남보다 많은 수고와 매질을 꼽는다. 그러나 그 비교의 마지막 사례는 광주리에 담겨 성벽을 내려온 사도의 모습이다. 성도들을 지배하고 모욕하는 이를 강하다고 여긴 20절의 판단은 이 결말로 뒤집힌다. 바울은 자랑을 어리석은 말이라고 표시한 채, 그 내용을 고난과 교회를 향한 염려와 남의 도움으로 피한 일로 채운다. 이 결말은 12:9에서 주께서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신 말씀으로 이어진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약함으로 채운 사도의 경력&lt;/h3&gt;&lt;p&gt;16-33절에서 바울은 경쟁자들이 쓰는 비교의 형식을 빌려 자기 경력을 내놓는다. 그러나 그 경력은 매질과 위험과 결핍, 교회를 위한 염려, 다메섹에서의 도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경력은 사람을 종으로 삼고 자기를 높이는 힘을 사역의 증거로 여긴 고린도 교회의 기준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의 일꾼이 다른 교회들의 약함을 돌보는 책임을 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lt;/p&gt;&lt;p&gt;고린도 교회는 사도의 약함에 관한 목록을 이미 들었다. 고린도전서 4:9-13에서 바울은 사도들을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세상에 구경거리가 된 이들로 말하고, 그들이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를 맞으며 손수 일한다고 말한다. 같은 대목에서 그는 성도들은 스스로 지혜롭고 강하다고 여기지만 사도들은 어리석고 약하다는 반어를 썼다. 고린도후서 6:4-10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신을 추천하며 매 맞음과 갇힘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을 열거했다. 16-33절에서 ‘어리석게’ 자랑하는 내용은 바울이 이미 사도의 표지로 제시해 온 삶과 같다. 달라진 것은 말의 형식이다. 6장에서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신을 추천했고, 16-33절에서는 경쟁자들과의 비교에 답한다. 비교의 형식으로 말할 때에도 바울이 증거로 꺼내는 것은 같은 약함이다.&lt;/p&gt;&lt;h3&gt;매와 모욕을 받는 하나님의 일꾼&lt;/h3&gt;&lt;p&gt;24절의 서른아홉 대는 이스라엘의 법정 처벌을 배경으로 한다. 신명기 25:1-3은 재판에서 죄인에게 매를 때릴 때 죄에 합당한 수를 정하되 마흔 대를 넘기지 못하게 하고, 그 이상 때리면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한다는 이유를 붙인다. 이 법은 벌을 받는 사람도 형제임을 잊지 않게 하려는 제한이다. 바울은 그 상한에 가까운 처벌을 다섯 번 받았다. 그는 자신이 히브리인이며 이스라엘인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밝혔고(22절), 바로 그 동족의 재판에서 이 매를 맞았다. 언약 백성에 속한 자격은 그에게 안전과 존중을 보장하지 않았다. 그래도 바울은 이 경력을 말하면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끊지 않는다.&lt;/p&gt;&lt;p&gt;이사야 50:4-9의 종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곤고한 자를 돕는 하나님의 일꾼이다. 주 여호와께서 그에게 학자들의 혀를 주사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울지 알게 하시고, 종은 거역하지도 뒤로 물러가지도 않는다. 그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면서도 자신을 도우시는 주 여호와를 신뢰한다. 바울의 목록은 이 종의 모습과 주제로 이어진다. 이사야의 종은 곤고한 자를 돕는 말을 받았고, 바울은 수고와 위험을 말한 뒤 모든 교회를 위한 매일의 염려를 밝힌다(28절). 20절의 경쟁자들은 성도들을 짓밟고 모욕하며 그들 위에 자기를 높였지만, 이사야의 종은 모욕을 당하는 쪽에 서서 곤고한 자를 돕는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종도 모욕을 당한다는 이사야의 증언은 사역의 진실성을 받는 대우의 높고 낮음으로 판단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lt;/p&gt;&lt;h3&gt;교회를 주관하지 않고 돌보는 책임&lt;/h3&gt;&lt;p&gt;28절의 염려는 교회를 소유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따라 살도록 돕는 책임이다. 바울은 1:24에서 성도들의 믿음을 주관하려 하지 않고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한다고 말했다. 고린도전서 4:14-17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그들을 낳은 사람으로서 그들을 사랑하는 자녀처럼 권하고, 디모데를 보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자기의 길을 생각나게 하려 했다. 이 염려는 20절의 지배와 정반대다. 경쟁자들은 성도들을 종으로 삼았고, 바울은 성도들이 약해지거나 넘어질 때 그 짐을 자기 짐으로 진다(29절). 바울은 그 돌봄을 혼자 감당하지 않고 디모데 같은 동역자를 보내 함께 감당했다.&lt;/p&gt;&lt;h3&gt;도움을 받은 사도와 하나님께 있는 능력&lt;/h3&gt;&lt;p&gt;다메섹 탈출은 바울이 사역 초기부터 위험에 처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사도행전 9장에서 주님을 만난 사울은 앞을 보지 못하여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고,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아 다시 보게 된다. 주님은 그를 자기 이름을 전할 그릇으로 택하시고, 그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지 보이시겠다고 말씀하신다(사도행전 9:15-16). 사도행전 9:23-25는 위협의 주체를 유대인들로, 32절은 아레다 왕의 고관으로 말한다. 그러나 두 기록 모두 사울이 광주리에 담겨 성벽에서 내려져 피했다고 한다. 훗날 모든 교회를 염려하게 될 사도는 사역의 처음에 다른 사람들의 손에 생명을 맡겨야 했다.&lt;/p&gt;&lt;p&gt;바울은 1:8-9에서 아시아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던 환난이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 일이었다고 고백했다. 이 고백은 아시아의 특정한 위기에 관한 것이지만, 23절에서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고 말하는 바울이 살아남은 일을 자기 능력의 증거로 내세우지 않는 이유를 보여 준다. 4:7에서 그는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것은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자신들에게 있지 않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23-33절의 매질과 주림과 도피는 그 질그릇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드러낸다. 바로 뒤 12:9-10에서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시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게 하려고 약한 것들을 자랑하겠다고 한다.&lt;/p&gt;&lt;h3&gt;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기준과 어리석은 자랑&lt;/h3&gt;&lt;p&gt;10:17-18에서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하고,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라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라고 말했다. 16-33절의 자랑은 이 기준과 쉽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바울 스스로 이 말이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라고 했고(17절), 남보다 더 수고했다는 비교도 그대로 남겨 두었다(23절). 고난의 목록도 얼마든지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경력이 될 수 있다. 바울의 목록이 경쟁자들의 자랑과 다른 이유는 그 내용과 결말에 있다. 목록은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와 약한 성도와 함께 약해지는 공감으로 이어지고(28-29절),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른 맹세로 진실성을 확인받으며(31절), 다른 사람들의 손에 들려 피한 일로 끝난다(32-33절). 바울은 어리석은 형식을 어리석다고 인정한 채, 그 형식으로 자기 힘이 아닌 약함 속에서 일하신 주님을 가리킨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섬기러 오신 주님과 그분의 일꾼&lt;/h3&gt;&lt;p&gt;23절에서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는 질문에 고난 목록으로 답한다. 누가 그리스도의 일꾼인지는 그 일꾼이 섬기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에 비추어 판단된다. 마태복음 20:25-28에서 예수는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백성을 임의로 주관하는 방식과 제자들의 섬김을 구별하시고,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섬기려 하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신다. 20절의 경쟁자들은 그리스도의 일꾼을 자처하면서 성도들을 종으로 삼고 그들 위에 자기를 높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금하신 주관의 방식이다. 주님이 섬기러 오셨다면 그분의 일꾼은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이다. 바울의 고난 목록은 이 기준으로 그리스도의 일꾼을 알아보게 한다.&lt;/p&gt;&lt;h3&gt;그리스도의 대속과 자기를 내주는 사도의 수고&lt;/h3&gt;&lt;p&gt;바울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별된다. 5:14-21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고,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셔서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 구원은 이 대속으로 이루어졌으며, 사도의 매질과 굶주림이 거기에 무엇을 보태지 않는다. 바울이 1:5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자신들에게 넘친다고 말할 때,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하신 사람이 그 말씀을 섬기다가 겪는 일이다(5:19-20). 본문의 매질과 파선과 굶주림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섬기는 일꾼이 치른 대가이며, 바울을 그 길로 강권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5:14).&lt;/p&gt;&lt;p&gt;20절의 착취와 바울의 수고는 둘 다 누군가의 소모를 낳지만, 누가 누구를 위해 소모되는지가 다르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스스로 주셨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값없이 복음을 전했고(11:7-9), 12:15에서는 성도들의 영혼을 위하여 재물을 쓰고 자기 자신까지 내어 주겠다고 말한다. 바울은 자기 삶을 스스로 내주었다. 20절의 사람들은 반대로 성도들을 잡아먹고 그들에게서 취하며 그들을 모욕했다. 그들은 자기를 위해 성도들을 소모시켰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역은 자기를 내주는 수고로 이어질 수 있지만, 지도자가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그 대가를 거두어 갈 권한을 주지 않는다. 바울의 고난 경력도 사람 위에 서는 명분이 될 수 없다.&lt;/p&gt;&lt;h3&gt;성도의 약함을 자기 일로 여기는 일꾼&lt;/h3&gt;&lt;p&gt;29절의 공감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사도행전 9:4-5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에게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셨다. 주님은 자기 사람들이 당하는 박해를 자신이 당하는 박해로 말씀하셨다. 그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누가 약하면 자신도 약하고 누가 실족하면 마음이 불탄다고 고백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약함과 넘어짐은 그리스도의 일꾼에게 남의 일이 될 수 없다.&lt;/p&gt;&lt;h3&gt;하나님 앞에서 약함을 말하는 일꾼&lt;/h3&gt;&lt;p&gt;바울은 자랑을 다메섹에서 광주리에 담겨 내려진 일로 끝낸다(30-33절). 그리스도의 일꾼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 들려 성벽을 내려온 모습은 13:4의 고백과 이어진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며, 바울과 동역자들도 그 안에서 약하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산다. 바울은 위험을 스스로 이기는 힘을 보여 주지 않고,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섬기는 사람답게 자신의 약함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며, 바울은 그 사실을 감추지 않고 자랑의 결말로 삼는다.&lt;/p&gt;&lt;p&gt;31절에서 바울은 “주 예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른다. 그의 고난 이야기는 주 예수의 아버지 앞에서 하는 말이다. 바울은 5:10에서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각각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 앞에 설 사역자는 고난을 부풀려 자기 영광을 구하거나 성도들을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을 수 없다. 바울의 맹세는 약함의 자랑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 할 말임을 드러낸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지배와 모욕을 권위로 여기지 않는 교회&lt;/h3&gt;&lt;p&gt;20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자신들을 종으로 삼고 잡아먹고 빼앗고 스스로 높이며 뺨을 치는 이들을 용납해 왔다고 고발한다. 이 말이 실제 구타를 포함하든 공개적인 모욕을 가리키든, 바울은 성도들을 짓밟는 대우를 사역자의 권위로 받아들인 교회를 꾸짖는다. 오늘의 교회도 사람을 압도하는 태도를 강한 지도력으로 오인하고 그런 행동을 용납할 수 있다. 사역자의 큰 성과나 오랜 헌신, 높은 지위가 사람을 착취하거나 모욕하는 행동을 정당하게 만들지 않으며, 몸에 가하는 폭력은 더욱 그렇다. 잘못의 책임은 먼저 착취하고 모욕한 사람에게 있다. 공동체는 그런 행동을 더는 용납하지 않을 책임을 지며, 사역자가 무엇을 가르치는지와 더불어 성도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살펴야 한다.&lt;/p&gt;&lt;p&gt;고난의 횟수로 사역자의 순위를 매기면 바울의 자랑을 거꾸로 읽게 된다. 바울은 비교의 형식이 어리석다고 인정하면서 그 형식을 썼고,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피한 일로 자랑을 마쳤다. 많이 견뎠다는 이유로 상대의 한계를 무시하거나 자신에게 반론하지 못하게 한다면, 고난의 증언은 20절의 경쟁자들처럼 사람을 지배하는 수단이 된다. 헌신한 경력은 다른 사람을 지배할 권한을 주지 않는다.&lt;/p&gt;&lt;h3&gt;돌보는 사람의 필요와 약한 성도를 향한 돌봄&lt;/h3&gt;&lt;p&gt;27절의 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헐벗음은 많은 교회를 돌본 사도에게도 음식과 옷과 쉼이 필요했음을 보여 준다. 28절의 매일의 염려를 모든 사역자가 모든 문제를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명령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마게도냐 형제들의 지원을 받았고(11:9), 디도가 왔을 때 하나님께 위로를 받았다(7:6). 그리스도의 일꾼을 존중하는 공동체는 돌보는 사람의 필요를 살피고 생활과 사역의 짐을 나누어 진다. 바울이 스스로 감당한 수고를 근거로 사역자에게 한계 없는 희생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lt;/p&gt;&lt;p&gt;29절에서 바울은 누가 약하면 함께 약해지고, 누가 실족하면 마음이 불탄다고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성도의 약함과 믿음의 흔들림을 자기 일로 받아들이고, 성도를 넘어지게 하는 가르침과 대우에는 맞선다. 넘어진 사람을 정죄하거나 붙잡아 두려고 지배하는 일은 이 돌봄과 정반대다.&lt;/p&gt;&lt;h3&gt;위험을 피하고 도움을 받는 일&lt;/h3&gt;&lt;p&gt;바울은 광주리에 담겨 성벽을 내려가 피한 일을 자랑의 결말로 남겼다. 위험을 피해 생명을 지키는 일이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일은 믿음의 실패가 아니다. 사역자는 자신이 받은 도움을 숨기지 않고 그 수고에 감사할 수 있다. 교회는 바울이 1:11에서 요청한 대로 위기에 처한 사람을 위해 간구하고, 다메섹의 제자들이 바울을 달아 내렸듯이 위험에 처한 사람을 실제로 도울 수 있다.&lt;/p&gt;&lt;h3&gt;사건과 경험을 사실대로 말하기&lt;/h3&gt;&lt;p&gt;24-26절에서 바울은 자기의 유대적 정체성을 인정하면서 동족과 이방인 모두에게서 위험을 겪었다고 말한다. 한 사건에 등장한 집단의 이름으로 오늘의 민족이나 종교 전체를 적대하는 태도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 본문을 가르치는 사람은 각 사건에서 누가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설명해야 한다. 바울이 섬긴 복음은 여러 민족을 향한 생명의 소식이었다.&lt;/p&gt;&lt;p&gt;3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르며 자기 말의 진실함을 밝힌다. 사역자도 힘들었던 일을 부풀려 존경을 얻으려 하지 말고 실제로 겪은 일을 말해야 한다. 바울이 약함을 밝히면서도 교회를 계속 섬겼듯이, 사역자는 몸의 한계와 도움이 필요한 형편을 숨길 필요가 없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W. Robertson Nicoll, ed., &lt;em&gt;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11:17, Bible Hub,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1.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1.htm&lt;/a&gt;.&lt;/li&gt;&lt;li&gt;&lt;em&gt;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의 9:4 주석은 이 명사가 칠십인역에서 ‘소망의 근거’라는 뜻으로도 쓰였고 그로부터 ‘확신’이라는 뜻이 나왔다고 설명하며, 9:4의 용례를 그 뜻으로 읽는다. 11:17 주석은 이 명사에 관해 9:4 주석을 참조하게 한다. Nicoll, &lt;em&gt;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9:4, Bible Hub,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9.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9.htm&lt;/a&gt;; Nicoll, &lt;em&gt;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11:17,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1.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1.htm&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이 그리스어 단어에 ‘확신’이라는 뜻이 성립하는지 의심스럽다고 보고, Good News Translation의 ‘matter’나 Anchor Bible의 ‘business’ 같은 번역을 더 나은 선택으로 제시한다. 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11:17,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17,”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1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17/&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20,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20,”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0/"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0/&lt;/a&gt;.&lt;/li&gt;&lt;li&gt;Nicoll, &lt;em&gt;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11:20,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1.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1.htm&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거의 모든 번역이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옮긴다고 지적하면서도, 이 표현은 아마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며 경쟁자들이 성도들을 대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모욕했다는 뜻이라고 본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20,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0/"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0/&lt;/a&gt;. 반면 &lt;em&gt;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는 고린도 성도들이 용납한, 횡포를 부리는 교사들이 실제로 이런 모욕을 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Nicoll, &lt;em&gt;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11:20,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1.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1.htm&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22,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22,”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24,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24,”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4/&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25,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25,”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5/&lt;/a&gt;.&lt;/li&gt;&lt;li&gt;Nicoll, &lt;em&gt;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11:25,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1.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1.htm&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25,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5/&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27,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27,”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7/&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27,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7/&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28,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28,”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8/"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8/&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28,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8/"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8/&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29,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29,”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9/&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이 말을 ‘분노로 불타다’로 읽는 해석과 ‘공감이나 괴로움으로 속이 타다’로 읽는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고 하면서, 대다수 해석자가 앞의 해석을 따른다고 설명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29,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29/&lt;/a&gt;. &lt;em&gt;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도 이 말을 의로운 분노의 불로 타오르는 반응으로 풀이한다. Nicoll, &lt;em&gt;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11:29,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1.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1.htm&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32,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1:32,”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3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3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1:32,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3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132/&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12:1-13 약한 바울에게 머무는 그리스도의 능력</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12.1-13/</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12.1-13/</guid><description>고린도후서 12:1-13의 환상과 계시, 육체의 가시와 세 번의 간구, 충분한 은혜와 사도의 표적을 본문의 흐름에 따라 살핍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사람 (1-4절)&lt;/h3&gt;&lt;p&gt;1절에서 바울은 11장부터 이어 온 어리석은 자의 자랑을 계속한다. “부득불 자랑하노니”는 11:30의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를 다시 잇는 말이고, 바울은 그 자랑에 “무익하나마”라는 단서를 붙인다. 고린도 교회에는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전하며 자기 자랑으로 바울과 같이 인정받으려는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11:4, 12-13). 바울은 그들의 방식으로 자랑해야 하는 처지를 어리석은 일로 여기면서도 “주의 환상과 계시”로 이야기를 이어 간다. 이 표현은 주께서 주신 환상과 계시를 가리키며, 여기의 ‘주’는 8절의 ‘주’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lt;sup&gt;1&lt;/sup&gt;&lt;/p&gt;&lt;p&gt;2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 곧 그리스도께 속한 한 사람을 안다고 말한다. 7절에서 이 계시가 바울 자신의 것으로 이어지므로 이 사람은 바울 자신이다. 바울은 그 일이 십사 년 전에 있었다고 시점을 밝히지만 당시 형편은 설명하지 않는다. 2절의 “이끌려 간”(ἁρπαγέντα, 하르파겐타)과 4절의 “이끌려 가서”(ἡρπάγη, 헤르파게)는 수동형이며, 그를 옮기신 분은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lt;sup&gt;2&lt;/sup&gt; 바울은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라고 두 번 말한다. 자기 경험을 삼인칭으로 말하고 세부를 모른다고 하는 이 서술은 자신을 실제보다 작게 말하는 반어적 어조에 속한다. 바울은 반대자들이 중시한 황홀한 하늘 체험을 이렇게 풍자하듯 말하여, 그런 체험이 사도직을 입증하지 못함을 드러낸다.&lt;sup&gt;3&lt;/sup&gt;&lt;/p&gt;&lt;p&gt;2절의 셋째 하늘과 4절의 낙원은 같은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유대 문헌은 흔히 일곱 하늘을 말하지만 세 하늘을 말하기도 했고, 바울은 셋째 하늘을 낙원과 같은 곳으로 말하므로 세 하늘을 생각했을 것이다.&lt;sup&gt;4&lt;/sup&gt; 4절에서 바울은 그곳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ἄρρητα ῥήματα, 아르레타 레마타)을 들었다고 하고, 그것을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덧붙인다. 뒤의 표현(οὐκ ἐξὸν ... λαλῆσαι, 우크 엑손 ... 랄레사이)은 사람이 그 말을 하도록 허락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바울은 들은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다.&lt;/p&gt;&lt;h3&gt;자랑을 그치는 이유 (5-6절)&lt;/h3&gt;&lt;p&gt;5절에서 바울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지만 자기를 위해서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6절에서 그는 자랑하더라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을 것은 “참말을 함이라”고 하면서도 자랑을 “그만두노라”라고 한다.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2-4절의 삼인칭 서술에서는 바울의 의도가 어조로만 드러나지만, 6절에서 그는 자랑을 그치는 이유를 직접 밝힌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이 공개할 수 없는 계시의 크기로 자기를 평가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서 직접 보고 들은 그의 말과 행동으로 평가하기를 바란다.&lt;/p&gt;&lt;h3&gt;계시의 탁월함과 육체의 가시 (7절)&lt;/h3&gt;&lt;p&gt;7절 첫 구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τῇ ὑπερβολῇ τῶν ἀποκαλύψεων, 테 휘페르볼레 톤 아포칼륍세온)는 구문이 매우 어렵다. 문장을 어디서 나누느냐에 따라 이 구절은 다른 사람들이 바울을 높이 평가할 이유가 되기도 하고, 바울이 교만해질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lt;sup&gt;5&lt;/sup&gt; 개역개정은 이 구절을 가시가 주어진 이유로 옮겨 바울 자신의 자만과 바로 연결한다. NA28은 이 구절 뒤에 마침표를 찍고 “그러므로”(διὸ, 디오)로 새 문장을 시작한다. 그러면 이 구절은 6절에 붙어, 누가 바울을 보고 들은 것 이상으로 생각할 까닭을 밝힌다. 개역개정에는 ‘그러므로’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이 접속사는 다수 사본에 없지만, 이를 포함한 사본들의 분포와 질, 그리고 문법상 거친 표현이라는 점을 보면 원문일 가능성이 높다.&lt;sup&gt;6&lt;/sup&gt; ‘그러므로’가 원문에 있으면 앞 구절을 뒤 문장에 넣어 가시가 주어진 이유로 읽기 어려우므로, NA28의 구분을 따르는 편이 낫다. 그렇게 읽으면 6절과 7절 첫 구절은 다른 사람들이 바울을 지나치게 높일 위험을 말하고,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문장은 바울 자신이 지나치게 높아질 위험을 말한다. ‘그러므로’가 앞의 계시 이야기를 받으므로 두 위험은 모두 계시의 탁월함과 관련되지만, 앞의 것은 바울이 자랑을 그친 이유이고 뒤의 것은 가시가 주어진 목적이다.&lt;/p&gt;&lt;p&gt;‘그러므로’로 시작하는 문장의 처음과 끝에 같은 목적절 “너무 자만하지 않게”(ἵνα μὴ ὑπεραίρωμαι, 히나 메 휘페라이로마이)가 두 번 나와 가시가 주어진 목적을 강조한다. 그 사이에서 바울은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라고 말한다. ‘주셨으니’(ἐδόθη, 에도테)는 ‘주어졌다’는 수동형으로 주신 분을 밝히지 않는다. 대부분의 해석자는 그 행위자를 하나님으로 보며, 사탄으로 보더라도 바울은 욥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로 이해한다.&lt;sup&gt;7&lt;/sup&gt; 가시(σκόλοψ, 스콜롭스)는 살을 찌르는 뾰족한 것을 가리키는 비유다. 이것을 특정한 질병으로 보는 여러 제안은 성경의 근거가 약하다. ‘육체’를 몸으로 사는 삶 전체로 보아 가시가 바울의 대적자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lt;sup&gt;8&lt;/sup&gt; 11:13-15에서 바울이 거짓 사도들을 사탄의 일꾼이라고 부른 점은 이 해석과 어울리지만, 본문은 가시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바울은 그 사자가 자기를 “쳐서” 괴롭힌다고 말한다. 이 동사(κολαφίζῃ, 콜라피제)는 주먹으로 때린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가시가 주는 고통을 비유한다. 바울은 이 고통을 자기 자만을 막는 목적과 연결하여 이해했다.&lt;/p&gt;&lt;h3&gt;세 번의 간구와 족한 은혜 (8-9절)&lt;/h3&gt;&lt;p&gt;8절에서 바울은 이것이 자기에게서 떠나가게 해 달라고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가리킨다. 바울은 고통을 잠잠히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떠나기를 거듭 구했다. 9절의 “나에게 이르시기를”은 8절의 간구에 대한 대답이며, 바울이 9절 끝에서 이 대답에 나오는 능력을 “그리스도의 능력”이라고 부르므로 대답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lt;sup&gt;9&lt;/sup&gt; 대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였다. 원문은 ‘족하다, 네게’(ἀρκεῖ σοι, 아르케이 소이)를 문장 맨 앞에 두어 은혜의 충분함을 강조한다.&lt;sup&gt;10&lt;/sup&gt; 주님은 가시를 없애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은혜가 바울에게 충분하다고 대답하셨다. 바울은 이 대답을 들은 뒤 자기 약함을 자랑하겠다고 하므로, 가시는 그가 계속 감당해야 할 약함으로 남은 것으로 보인다.&lt;/p&gt;&lt;p&gt;이어지는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은혜가 족한 이유를 밝힌다. NA28의 이 구절에는 ‘내’에 해당하는 대명사가 없다. 그러나 9절 끝이 이 능력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밝히므로, 개역개정의 ‘내 능력’은 뜻을 바르게 전한다.&lt;sup&gt;11&lt;/sup&gt; ‘온전하여짐’(τελεῖται, 텔레이타이)은 도덕적 완전함보다 이룸과 완성을 뜻한다. 사람이 약하여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그분의 능력이 제 일을 다 이룬다는 말이다.&lt;sup&gt;12&lt;/sup&gt;&lt;/p&gt;&lt;h3&gt;약함을 자랑하는 이유 (9-10절)&lt;/h3&gt;&lt;p&gt;9절 후반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라고 말하고, 그 목적을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밝힌다. ‘머물게’로 옮긴 동사(ἐπισκηνώσῃ, 에피스케노세)는 장막을 치듯 거처를 삼는다는 뜻으로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온다.&lt;sup&gt;13&lt;/sup&gt; 바울이 자랑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때부터 그에게 머물기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약함을 자랑할 때 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 계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난다.&lt;sup&gt;14&lt;/sup&gt;&lt;/p&gt;&lt;p&gt;1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라고 말한다. ‘기뻐하노니’(εὐδοκῶ, 유도코)는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 목록은 11:23-29에서 바울이 열거한 매 맞음과 파선과 굶주림과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를 떠올리게 한다. 바울이 기꺼이 받아들이는 약함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겪는 것이다. 그는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하여, 약함이 사라진 뒤가 아니라 약한 바로 그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강하다고 고백한다.&lt;/p&gt;&lt;h3&gt;마땅히 받아야 했던 인정과 사도의 표 (11-12절)&lt;/h3&gt;&lt;p&gt;11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다시 직접 말한다. 6절에서는 자랑하더라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여기서는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라고 하여 11장부터 해 온 자랑을 어리석은 자의 말로 돌아본다. 그렇게 된 것은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다. 성도들이 마땅히 바울을 인정하고 추천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칭찬을 받아야’로 옮긴 동사(συνίστασθαι, 쉬니스타스타이)는 추천받고 인정받는다는 뜻으로, 10:12, 18에서 자기를 칭찬하는 자와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를 대비할 때 쓴 동사와 같다. 바울은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라고 말하면서도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고 말한다(11:5).&lt;/p&gt;&lt;p&gt;12절에서 바울은 “사도의 표”가 성도들 가운데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동사 κατειργάσθη(카테이르가스테)는 ‘이루어졌다’는 수동형이지만, 문맥상 그 일을 행한 사람은 바울 자신이며 개역개정의 “내가 ... 행한 것이라”도 그렇게 옮긴다.&lt;sup&gt;15&lt;/sup&gt; ‘표’와 ‘표적’은 원문에서 같은 명사(σημεῖα, 세메이아; σημείοις, 세메이오이스)다. 앞의 것은 참 사도를 알아보게 하는 표지라는 넓은 뜻이고, 뒤의 것은 기적이라는 좁은 뜻이다.&lt;sup&gt;16&lt;/sup&gt; 개역개정은 “모든 참음”(ἐν πάσῃ ὑπομονῇ, 엔 파세 휘포모네)을 표적과 기사와 능력과 한 목록으로 옮긴다. 이렇게 읽는 것도 문법상 가능하지만, 원문에서 참음만 전치사 ἐν(엔, ‘가운데’)과 함께 나오므로 사도의 표가 모든 참음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뜻으로 읽는 편이 낫다.&lt;sup&gt;17&lt;/sup&gt; 바울은 6:4에서도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신을 추천했다. 고린도 교회에서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나타났지만, 그 사역은 고난을 견디며 계속된 참음 가운데 이루어졌다. 기적을 참 사도의 표 자체로 삼는 번역은 11-13장에서 바울이 하는 말과 어긋나 보인다.&lt;sup&gt;18&lt;/sup&gt; 바울은 자신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성도들이 직접 본 자신의 인내하는 사역을 상기시킨다.&lt;/p&gt;&lt;h3&gt;폐를 끼치지 않은 일에 대한 풍자 (13절)&lt;/h3&gt;&lt;p&gt;13절에서 바울은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묻고, 유일한 예외로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을 든다. ‘폐를 끼치다’로 옮긴 동사(κατενάρκησα, 카테나르케사)는 남에게 짐이 된다는 뜻이다. 11:9에서 바울은 같은 동사로,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자기 부족을 채웠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는 실제로 용서를 구하는 말이 아니라 풍자다.&lt;sup&gt;19&lt;/sup&gt; 11:7-11에서 바울은 사례를 받지 않은 일이 그들을 사랑하지 않아서냐고 묻고 하나님이 아신다고 답했다. 13절의 풍자도 그 선택을 사랑이 부족하다는 증거로 여기는 태도를 되받는다. 14절부터 바울은 같은 재정 방침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을 이어서 설명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풍성한 선물과 계속되는 의존&lt;/h3&gt;&lt;p&gt;1-10절에서 바울은 넘치는 계시를 받은 사람이면서, 가시 때문에 주님께 간구하고 그분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받은 선물이 크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 되지는 않는다. 신명기 8장은 이스라엘의 역사로 같은 관계를 가르친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구출하신 백성을 광야에서 낮추시고 만나로 먹이셔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8:2-3). 모세는 그들이 약속의 땅에서 풍요로워진 뒤 자기 능력과 손의 힘으로 재물을 얻었다고 말할 위험을 경고하고,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한다(8:17-18). 두 본문의 상황은 다르다. 신명기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언약 백성에게 광야의 훈련과 앞으로의 풍요를 말하고, 바울은 사도직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자기 계시와 고통을 말한다. 그러나 두 본문 모두 받은 선물을 자기 충족의 근거로 삼는 교만을 경계하고,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계속 의지하게 한다.&lt;/p&gt;&lt;h3&gt;사탄의 사자와 하나님의 다스리심&lt;/h3&gt;&lt;p&gt;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부르면서도 그것이 자기에게 주어졌다고 말하는 바울의 고백은 욥기 1-2장을 떠올리게 한다. 욥기에서 사탄은 욥을 치지만 여호와께서 정하신 한계 안에서만 움직인다(욥기 1:12; 2:6). 두 본문은 고통을 주는 적대 세력이 실제로 있으나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이해한다. 다만 욥은 하늘에서 오간 대화를 알지 못한 채 고통의 이유를 하나님께 묻고, 바울은 자기 가시를 자만을 막는 목적과 연결하여 고백한다. 욥의 친구들은 긴 논쟁에서 욥의 고난을 그의 잘못과 연결했다. 욥기 42:7에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에 관하여 한 말이 욥의 말처럼 옳지 못하다고 하신다. 바울이 깨달은 가시의 목적은 자기 경험에 대한 고백이며, 다른 사람의 고통을 설명하는 일반 원리가 되지 않는다. 욥과 바울은 모두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께 자기 사정을 아뢰었다.&lt;/p&gt;&lt;h3&gt;주 안에서 하는 자랑&lt;/h3&gt;&lt;p&gt;바울이 계시보다 약함을 자랑하는 이유는 이 편지가 앞에서 밝힌 원칙과 이어진다. 10:17에서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 말하고, 10:18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는 사람은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라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라고 한다. 고린도전서 1:26-31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이 세상의 약하고 천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가르치고, 같은 말씀으로 결론을 맺는다. 12장에서 바울은 이 원칙을 자기 경험에 적용한다. 그는 계시의 크기를 자기 자격으로 내세우지 않고, 약한 자신에게 머무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자랑한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사도의 진실성을 계시의 크기로 재지 않고, 주께서 그를 통해 하신 일로 알아보기를 바란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간구에 대답하시는 그리스도&lt;/h3&gt;&lt;p&gt;9절에서 바울의 간구에 대답하신 분은 “내 은혜”를 말씀하시고, 바울은 그 은혜가 족한 이유로 말씀하신 능력을 곧이어 “그리스도의 능력”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8절에서 바울이 세 번 간구한 “주”는 그리스도이시다.&lt;sup&gt;20&lt;/sup&gt; 바울은 고통을 두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직접 기도했고, 그리스도께서는 일인칭으로 대답하셨다. 그 대답은 가시를 없애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자신의 은혜가 족하다는 말씀이었다. 이 단락에서 그리스도는 지금 기도를 들으시고 말씀으로 대답하시며, 약한 종에게 자신의 능력이 머물게 하시는 살아 계신 주님이시다.&lt;/p&gt;&lt;p&gt;그리스도께서 “내 은혜”라고 하신 은혜는 이 편지가 말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다. 8:9에서 바울은 그 은혜를 부요하신 분이 성도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일로 설명하고, 편지 끝 13:13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도들과 함께 있기를 빈다. 바울에게 족하다고 하신 은혜는 자기를 내어 주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베푸시는 호의와 도움이다. 바울이 의지하는 것은 남은 힘이나 과거의 계시가 아니라 이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이시다.&lt;/p&gt;&lt;h3&gt;약함 가운데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능력&lt;/h3&gt;&lt;p&gt;13:4는 9절의 약함과 능력이 그리스도 자신의 길과 이어져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신다. 바울은 이어서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 말한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일은 그리스도만이 이루신 구원 사역이며, 바울의 가시나 고난이 그 사역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약한 사람으로서,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는 능력을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경험한다.&lt;/p&gt;&lt;p&gt;10절의 “그리스도를 위하여”는 바울이 기뻐하는 약함이 그리스도를 섬기다가 겪은 것임을 밝힌다. 그는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 가운데서 사역을 그치지 않았고, 12절의 사도의 표도 모든 참음 가운데 이루어졌다. 바울이 약할 때 강한 것은 고난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이 약한 그에게 머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11절에서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라고 말하면서도 사도직을 내려놓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높이지 않고, 자기에게 머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고린도 교회를 섬긴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체험을 말하고 듣는 정직함&lt;/h3&gt;&lt;p&gt;6절에서 바울은 참말을 할 수 있었지만, 성도들이 자기를 보고 들은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자랑을 그쳤다. 교회가 특별한 체험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그 이야기로 한 사람의 권위를 세우지 않고, 그가 전하는 복음과 공동체 안에서 보여 온 삶으로 그를 알아보아야 한다. 체험을 말하는 사람도 바울처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별하여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 바울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두 번 말했다. 경험한 일과 그 경험에 대한 자기 해석을 나누어 말하고, 확실히 알지 못하는 일을 하나님의 직접 명령처럼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는 데서 이 정직함이 드러난다.&lt;/p&gt;&lt;h3&gt;고통 가운데 함께 구하는 교회&lt;/h3&gt;&lt;p&gt;바울은 가시가 떠나가기를 세 번 간구했다. 해결되지 않는 고통을 지닌 사람도 그것이 떠나기를 주님께 구할 수 있고, 교회는 그 기도를 믿음이 부족한 증거로 보지 않고 함께 기도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그리스도께서 간구하는 바울에게 직접 하신 대답이었다. 그 은혜를 의지한 바울도 고린도에서 쓸 것이 부족할 때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의 도움을 받았다(11:9). 교회는 은혜가 족하다는 말을 고통받는 사람의 실제 필요를 외면하는 말로 쓰지 않고, 기도와 함께 그 필요를 나누어 진다.&lt;/p&gt;&lt;p&gt;바울이 가시를 자만을 막는 목적과 연결한 것은 자기 계시와 고통과 주님의 대답을 돌아본 고백이다. 이 해석을 다른 사람의 고통에 같은 원인으로 대입하면 욥의 친구들과 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상대의 형편을 알지 못하면서 교만 때문에 아프다거나 특정한 죄 때문에 문제가 계속된다고 말하면, 도움을 구한 사람은 더 고립된다. 교회는 고통의 이유를 서둘러 설명하기보다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주님께 구한다.&lt;/p&gt;&lt;h3&gt;약함의 자랑과 해로운 행동의 구별&lt;/h3&gt;&lt;p&gt;약함을 자랑한다는 말씀은 해로운 행동을 덮는 명분이 될 수 없다. 바울이 자랑한 약함은 그리스도를 섬기며 겪은 능욕과 궁핍과 박해였다. 11:20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종으로 삼고 빼앗고 스스로 높이며 뺨을 치는 사람들을 고린도 교회가 용납한다고 꾸짖었다. 교회는 그런 행동으로 생긴 피해를 약함의 은혜로 덮지 않고, 그 행동을 멈추게 하고 피해를 바로잡는다. 사역자도 자기 약함을 책임을 피하는 이유로 삼지 않는다.&lt;/p&gt;&lt;h3&gt;사역자를 분별하는 기준&lt;/h3&gt;&lt;p&gt;12절에서 바울은 사도의 표가 모든 참음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교회가 사역을 분별할 때도 능력의 역사가 있었는지만 보지 않고, 그 사역이 고난을 견디며 성도들을 세웠는지를 살핀다. 바울의 삶에는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나타났지만, 그는 떠나기를 구한 가시 대신 은혜가 족하다는 대답을 받았다.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고통이 계속되는 성도도 그 때문에 그리스도의 능력에서 멀어졌다고 여길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약한 바울에게 자기 능력이 머물게 하셨다.&lt;/p&gt;&lt;p&gt;13절의 풍자는 사역자의 재정 선택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바울이 생활비를 받지 않은 것은 사랑이 적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교회의 도움을 받아 고린도를 섬겼고 그 선택의 이유를 설명했다(11:7-11). 교회는 사역자가 지원을 받는지 받지 않는지로 신앙의 우열을 재지 않고, 그 이유를 직접 듣고 판단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12:1,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2:1,”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2,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2:2,”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2,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2,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7,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2:7,”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7/&lt;/a&gt;.&lt;/li&gt;&lt;li&gt;NET 본문비평주에 따르면 P46을 비롯한 다수 사본에는 ‘그러므로’가 없지만, 시내 사본과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바티칸 사본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 널리 퍼진 좋은 사본들에는 이 접속사가 있다. NET는 이 외적 증거와 함께, 바로 뒤에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가 이어지므로 ‘그러므로’가 문법상 거칠고 불필요해 보인다는 점도 원문으로 볼 내적 근거로 든다. “2 Corinthians 12,” NET Bible, 12:7, tc note g, Bible Gateway,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2%20Corinthians%2012&amp;amp;version=NET" rel="noopener"&gt;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2%20Corinthians%2012&amp;amp;version=NET&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7,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7/&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눈병, 말라리아, 간질, 심한 두통, 언어 장애처럼 가시를 몸의 질병으로 보는 제안들이 빈약한 성경 근거에 기대고 있다고 평가한다. 대적자 해석은 ‘육체’가 여기서 반드시 몸을 가리키지 않고 몸으로 사는 삶 전체를 뜻할 수 있다고 보며, 칠십인역 민수기 33:55가 이스라엘의 대적을 눈의 가시에 비유한 용례를 근거로 든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7,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7/&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9,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2:9,”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9/&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9,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9/&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에 따르면 많은 사본이 ‘나의 능력’으로 읽지만, UBS 그리스어 신약의 편집자들은 이 소유대명사를 필사자가 더한 말로 본다. 핸드북은 이 능력이 9절 끝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밝혀진다고 설명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9,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9/&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9,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9/&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9,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9/&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9,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9/&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12,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2:12,”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12,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2/&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참음을 표적과 기사와 능력과 함께 목록의 한 항목으로 읽는 번역도 문법상 가능하다고 보지만, 대부분의 해석자는 이 말을 바울이 사도의 표를 행한 방식으로 이해한다고 설명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12,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12,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13,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2:13,”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3/&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1,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2/&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12:14-21 여러분의 소유보다 여러분을 구합니다</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12.14-21/</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12.14-21/</guid><description>고린도후서 12:14-21에서 바울이 밝히는 사랑과 재정의 책임, 교회를 세우는 말, 회개하지 않은 죄를 향한 근심을 살핍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세 번째 방문과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약속 (14절)&lt;/h3&gt;&lt;p&gt;고린도후서 12:14-21은 10-13장의 변론 가운데 바울이 세 번째 방문을 앞두고 쓴 단락이다. 바로 앞 12:13에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은 일 외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대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은 뒤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고 반어적으로 말했다. 14절은 이 반어에 이어 앞으로의 계획을 밝힌다.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는 이 문장만 보면 세 번째로 준비했다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지만, 13:1의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는 이번 길이 세 번째 방문임을 분명히 한다. 첫 방문은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며 교회를 세운 때였다(행 18:1-11). 두 번째 방문은 13:2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가 가리키는 방문이다. 2:1에서 바울이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 방문은 근심 가운데 이루어졌다.&lt;/p&gt;&lt;p&gt;세 번째 방문에서도 바울은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한다. 이 동사는 남에게 무거운 짐이 된다는 뜻이며, 여기서는 생활비를 교회에 의존하는 일을 가리킨다. 바울은 11:9에서 같은 동사로 고린도에 있을 때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을 말하며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자신의 부족을 채웠다고 설명했고, 12:13에서도 이 동사를 썼다. 14절의 약속은 고린도에서 생활비를 받지 않던 방침을 이번 방문에도 지키겠다는 뜻이다. 11:12에 따르면 이 방침에는 바울과 같은 자격으로 인정받으려는 이들의 “기회를 끊으려” 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11:7의 “죄를 지었느냐”라는 물음과 12:13의 “용서하라”는 반어를 보면, 바울이 돈을 받지 않은 일은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 일부에게 서운함이나 의심을 산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은 이 방침의 이유를 다시 밝힌다.&lt;/p&gt;&lt;h3&gt;재물이 아니라 성도들 자신을 구함 (14절)&lt;/h3&gt;&lt;p&gt;그 이유는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라는 짧은 대구에 담겨 있다. 원문은 “너희의 것들”과 “너희”를 맞세우고(τὰ ὑμῶν ἀλλ’ ὑμᾶς, 타 휘몬 알 휘마스), 개역개정은 앞의 말을 문맥에 맞추어 “너희의 재물”로 풀었다. 바울이 얻으려는 것은 성도들의 소유가 아니라 성도들 자신이다. 이 말은 생활비를 받지 않는 방침의 이유이며, 뒤에서 바울이 성도들의 죄를 근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20-21절).&lt;/p&gt;&lt;p&gt;14절 후반의 비유는 가정에서 가져온 것이다. 개역개정의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는 흔히 있는 일을 묘사하는 문장처럼 읽힌다. 그러나 원문에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동사(ὀφείλει, 오페일레이)가 있어서, 바울은 누가 누구를 위하여 재물을 모아 둘 책임이 있는지를 말한다. 비유가 그리는 관계는 아직 자라는 자녀의 생계를 부모가 맡는 관계이며, 그 관계에서는 부모가 먼저 내어 준다. 고린도전서 4:15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고린도 성도들을 낳았다고 말했다. 그들의 부모로서 바울은 그들에게서 받기보다 그들을 위하여 내어 주려 한다.&lt;/p&gt;&lt;h3&gt;성도들을 위하여 다 쓰이겠다는 결심과 사랑의 물음 (15절)&lt;/h3&gt;&lt;p&gt;15절에서 바울은 이 책임을 자신의 결심으로 밝힌다. “크게 기뻐하므로”(ἥδιστα, 헤디스타)는 12:9에서 바울이 약한 것들을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자랑하겠다고 할 때 쓴 부사와 같다. 이어서 바울은 “재물을 사용하고”(δαπανήσω, 다파네소)에서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ἐκδαπανηθήσομαι, 에크다파네테소마이)로 나아간다. 뒤의 동사는 앞의 동사를 강화한 수동형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쓰인다는 뜻이다.&lt;sup&gt;1&lt;/sup&gt; 바울은 가진 재물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하여 다 쓰이겠다고 말한다. 이 말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기쁨으로 밝힌 자발적인 결심이다.&lt;/p&gt;&lt;p&gt;바울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자신을 쓰겠다고 말한다. 한국어 “영혼”은 몸과 구별되는 내면을 떠올리게 할 수 있지만, 여기서 “영혼”(ψυχῶν, 프쉬콘)은 사람 전체를 가리키므로 “너희를 위하여”나 “너희 삶을 위하여”에 가깝다.&lt;sup&gt;2&lt;/sup&gt; 바울이 자신을 쓰는 대상은 14절에서 구한다고 말한 성도들 자신이다. 15절 끝의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에서 바울을 덜 사랑하는 쪽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문맥상 고린도 성도들이며, 이 질문은 바울이 그들을 넘치도록 사랑하는 것과 그들이 바울을 그보다 적게 사랑하는 것을 견준다.&lt;sup&gt;3&lt;/sup&gt; 이 질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랑에 못 미치는 응답에 대한 아픔을 드러내고, 성도들에게 그들의 응답이 그 사랑에 걸맞은지 묻는다. 그런 점에서 이 질문은 책망이기도 하다. 바울은 그 아픔과 책망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쓰겠다는 결심을 거두지 않는다.&lt;/p&gt;&lt;h3&gt;교활하다는 비난 (16절)&lt;/h3&gt;&lt;p&gt;16절에서 바울은 먼저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라는, 고린도 성도들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내세운다. 개역개정이 “하여간”으로 옮긴 첫마디(Ἔστω δέ, 에스토 데)는 “그렇다고 하자”는 양보의 말이다. 이어지는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는 원문에서 인용 표지 없이 1인칭으로 서술된다. 개역개정은 “어떤 이의 말이”와 문장 끝의 “하니”를 보충하여 이 말이 바울을 향한 비난임을 분명히 했다. 이런 표지가 없으면 바울이 스스로 속임수를 인정하는 것처럼 읽힐 수 있다. 비난한 쪽이 고린도 성도들인지 이른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인지는 본문에서 분명하지 않으며, 이 비난은 이미 교회 안에서 나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lt;sup&gt;4&lt;/sup&gt;&lt;/p&gt;&lt;p&gt;비난의 핵심은 “교활한 자”(πανοῦργος, 파누르고스)와 “속임수로”(δόλῳ, 돌로)라는 두 말이다. 두 말은 뜻이 가까우며, 드러나지 않는 수단으로 남을 속여 이익을 챙기는 모습을 그린다. 같은 어근의 말이 이 서신에 이미 나온다. 바울은 4:2에서 자신이 “속임으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11:3에서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했다고, 11:13에서는 거짓 사도들을 “속이는 일꾼”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이 비난은 바울이 자신에게 없다고 밝히고 뱀과 거짓 사도들의 특징으로 묘사한 모습을 바울에게 돌리는 셈이다. “취하였다”도 11:20에서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서 “빼앗는” 사람들을 그들이 용납한다고 꼬집을 때 쓴 동사다. 바울의 말대로라면 성도들에게서 실제로 가져간 쪽은 그 사람들이었는데, 의심은 아무것도 받지 않은 바울을 향했다.&lt;/p&gt;&lt;h3&gt;보낸 사람들과 디도에 관한 질문 (17-18절)&lt;/h3&gt;&lt;p&gt;바울은 이 비난에 원칙을 내세워 답하지 않고, 고린도 성도들이 직접 겪은 일을 묻는다. 17-18절의 질문은 바울이 보낸 사람들과 디도를 거론한다. 그러므로 비난은 바울이 직접 돈을 받지 않으면서 보낸 사람들을 통해 이득을 챙겼다는 의심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디도가 고린도에서 연보를 맡았던 점을 생각하면(8:6), 그 의심은 디도 일행이 고린도에서 모은 연보를 바울이 차지했다는 것이었을 수 있다.&lt;sup&gt;5&lt;/sup&gt; 8:20-21에서 바울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조심하며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한다고 말했다. 다만 16절은 비난의 구체적 내용을 밝히지 않으므로, 연보와의 관련은 17-18절과 8장에서 끌어낸 추론이다.&lt;/p&gt;&lt;p&gt;17절은 “아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μή, 메)이다. 개역개정은 이를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로 옮겼다. “이득을 취하다”(ἐπλεονέκτησα, 에플레오넥테사)는 남보다 더 가지려고 상대를 이용한다는 뜻이며, 7:2에서 바울은 같은 동사로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고 말했다.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사람으로는 디모데(고전 4:17; 16:10)와 디도가 있다. 바울은 보낸 사람 가운데 누구를 통해서든 자신이 성도들을 이용한 일이 있었는지 묻는다.&lt;/p&gt;&lt;p&gt;18절에서 바울은 디도를 이름으로 든다.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의 “권하고”는 8:6에서 바울이 디도를 “권하여”, 그가 고린도에서 이미 시작한 연보를 성취하게 했다는 말과 같은 동사다. 함께 보낸 형제는 이름이 없으며 8:16-19에서 말한 형제일 수 있다.&lt;sup&gt;6&lt;/sup&gt; 다만 이 파송이 이미 이루어진 방문인지, 8장에서 디도와 형제들을 보내는 일을 편지 받는 이의 시점에서 과거로 표현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lt;sup&gt;7&lt;/sup&gt; 또 18절은 형제 한 사람만 언급하므로, 17-18절의 질문이 8장에서 디도와 함께 보내는 두 형제까지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어지는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도 부정의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μήτι, 메티)이다. 바울의 논거는 고린도 성도들이 디도를 직접 겪었다는 사실이다. 7:7과 7:13-15에 따르면 고린도 성도들은 두려움과 떪으로 디도를 영접했으며 디도는 그들에게서 위로를 받고 그들을 향한 심정이 더욱 깊어졌다. 성도들이 기억하는 디도의 행적이 곧 의혹에 대한 대답이다.&lt;/p&gt;&lt;h3&gt;같은 마음가짐과 같은 발자국 (18절)&lt;/h3&gt;&lt;p&gt;18절 끝의 두 질문은 “그렇다”는 대답을 기대한다(οὐ, 우). 개역개정은 이를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로 옮겨 πνεύματι(프뉴마티)를 성령으로 해석했다. 이 번역도 가능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바울과 디도가 같은 마음가짐으로 행했다는 뜻으로 읽는 편이 더 낫다.&lt;sup&gt;8&lt;/sup&gt; 이어지는 “보조”(ἴχνεσιν, 이크네신)는 발자국을 뜻하며, 두 질문은 같은 구조로 병행한다. 같은 발자국이 두 사람의 행동 방식을 말하므로, 앞의 πνεύματι도 두 사람의 태도와 동기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바울은 7:13에서 같은 낱말로 디도의 내면을 가리켰고, 개역개정도 그곳에서는 “그의 마음”으로 옮겼다. 17-18절의 물음 자체가 바울과 디도가 성도들을 이용했는지에 관한 것이므로, 바울이 내세우는 것은 디도와 자신이 같은 동기로 같은 방식으로 일했다는 사실이다. “행하지”(περιεπατήσαμεν, 페리에파테사멘)는 본래 걷는다는 뜻의 동사로, 4:2의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에도 쓰였다. 바울과 디도는 속임수의 길을 걷지 않았고 같은 발자국을 따라 일했다.&lt;/p&gt;&lt;h3&gt;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세우려는 말 (19절)&lt;/h3&gt;&lt;p&gt;19절에서 바울은 지금까지의 변론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짚는다. “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의 “이 때까지”(Πάλαι, 팔라이)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다는 뜻이다. “자기 변명을 하는”(ἀπολογούμεθα, 아폴로구메타)은 법정에서 피고가 자신을 변호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원문은 바울이 “너희에게”(ὑμῖν, 휘민) 변명한다고 말하므로, 성도들은 자신들이 바울의 변호를 듣고 판결하는 자리에 있다고 여긴 셈이다. 바울은 그 구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바울의 말을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며,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서 말한다.&lt;/p&gt;&lt;p&gt;이어서 바울은 그 말의 목적을 밝힌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여기서 “이 모든 것”은 바울의 말뿐 아니라 그의 행동까지 아우를 수 있다.&lt;sup&gt;9&lt;/sup&gt; 그렇다면 생활비를 받지 않은 일과 디도를 보낸 일도 성도들을 세우기 위한 일에 포함된다. “사랑하는 자들아”는 15절에서 사랑을 덜 받는다고 말한 바울이 성도들을 부르는 말이다. 한국어 “덕”은 개인의 도덕적 품성을 떠올리게 하지만, “덕을 세우기”로 옮긴 명사(οἰκοδομῆς, 오이코도메스)는 집을 짓는 일에서 나온 말로 공동체를 세워 가는 일을 가리킨다. 10:8과 13:10에서 바울은 주께서 주신 권세가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며 같은 명사를 썼다. 20절은 바로 이 세움을 무너뜨리는 행동들을 열거한다.&lt;/p&gt;&lt;h3&gt;서로 실망할 만남과 세움을 무너뜨리는 죄 (20절)&lt;/h3&gt;&lt;p&gt;20절은 이유를 밝히는 접속사(γάρ, 가르)로 시작한다. 바울이 모든 것을 성도들을 세우기 위하여 말하는 까닭은 고린도에 갔을 때 마주할 일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는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자신도 “너희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한다. 원문은 ‘찾다’라는 같은 동사를 능동과 수동으로 맞세워(εὕρω ... εὑρεθῶ, 휴로 ... 휴레토) 양쪽이 서로에게 실망하는 만남을 그린다. 성도들이 원하지 않는 바울의 모습은 13:2의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는 경고가 실행되는 모습이다. 10:2에서 바울은 함께 있을 때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고 말했고, 13:10에서는 떠나 있을 때 편지를 쓰는 이유가 대면할 때 “엄하지 않게” 하려는 데 있다고 밝혔다. 바울은 성도들이 미리 돌이켜 그런 만남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lt;/p&gt;&lt;p&gt;두려움의 두 번째 대상은 동사 없이 이어지는 여덟 개의 명사, 곧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다. 처음 네 단어는 갈라디아서 5:20의 육체의 일 목록에도 같은 순서로 나온다. 그 가운데 “당 짓는 것”(ἐριθεῖαι, 에리테이아이)은 자기 이익을 좇는 태도와 그로 인한 편 가르기를 가리킨다.&lt;sup&gt;10&lt;/sup&gt; “비방”은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말이고, “수군거림”은 뒤에서 소문을 퍼뜨리는 귓속말이다. “거만함”은 부풀어 오른다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명사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4:18-19와 8:1에서 교만을 말할 때 쓴 동사와 같은 어근이다. “혼란”은 고린도전서 14:33에서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할 때 쓴 말과 같다. 고린도전서 1:11과 3:3에서 바울은 이미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시기를 다루었고, 이제 그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을까 두려워한다. 이 행동들은 모두 성도들 사이의 관계를 해치며, 19절의 세움과 정면으로 부딪친다.&lt;/p&gt;&lt;h3&gt;하나님께서 낮추실까 하는 두려움 (21절)&lt;/h3&gt;&lt;p&gt;21절에서 바울의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실 일로 이어진다. 개역개정은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로 옮겼다. 원문의 “다시”(πάλιν, 팔린)는 “갈 때에”를 꾸밀 수도 있고 “낮추실까”를 꾸밀 수도 있으며, 개역개정은 앞의 연결을 택했다. 그러나 바울이 20절에서 이미 자신의 방문을 말했으므로 “다시”는 “낮추실까”에 걸린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lt;sup&gt;11&lt;/sup&gt; 이 읽기를 따르면 바울은 2:1이 말하는 근심 중의 방문 때 겪은 낮아짐이 되풀이될까 두려워한다.&lt;/p&gt;&lt;p&gt;“낮추실까”(ταπεινώσῃ, 타페이노세)와 같은 어근의 말이 10:1과 11:7에도 나온다. 10:1에서 바울은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하다는 평을 받는다고 말했고, 10:10은 그것이 반대자들의 말이었음을 보여 준다. 11:7에서는 성도들을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복음을 값없이 전했다고 말했다. 21절의 낮아짐은 반대자들이 조롱한 약함과도, 바울이 스스로 택한 낮아짐과도 다르다. 바울을 낮추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바울은 그 일을 두려워한다. 21절 후반이 보여 주듯 이 낮아짐은 바울이 세운 교회에서 회개하지 않은 많은 사람을 마주하는 일과 이어져 있다. 바울은 자신을 낮추실 분을 “내 하나님”, 곧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lt;sup&gt;12&lt;/sup&gt;&lt;/p&gt;&lt;h3&gt;회개하지 않은 죄 때문에 슬퍼할까 하는 두려움 (21절)&lt;/h3&gt;&lt;p&gt;바울은 또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한다. “슬퍼할까”(πενθήσω, 펜테소)는 죽은 이를 두고 곡하는 일에도 쓰이는 말로, 여기서는 밖으로 드러나는 애통을 가리킨다.&lt;sup&gt;13&lt;/sup&gt; 고린도전서 5:2에서도 바울은 같은 동사로, 음행 사건 앞에서 교만해진 교회가 오히려 슬퍼했어야 한다고 책망했다. “전에 죄를 지은”(προημαρτηκότων, 프로에마르테코톤)은 13:2의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같은 말로, 같은 무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지은 죄는 믿기 전의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 뒤의 죄다.&lt;sup&gt;14&lt;/sup&gt; 그 죄가 바울의 두 번째 방문 이후에도 이어졌는지는 확정하기 어렵다. 본문이 분명히 밝히는 것은 그들이 “회개하지 아니함”(μὴ μετανοησάντων, 메 메타노에산톤), 곧 마음과 삶의 방향을 돌이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7:9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근심이 “회개함에” 이른 일을 기뻐했다. 그런 바울이 이제 아직 돌이키지 않은 많은 사람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한다.&lt;/p&gt;&lt;p&gt;그 죄는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이다. 같은 세 단어가 갈라디아서 5:19에도 순서를 달리하여 나온다. “더러움”(ἀκαθαρσίᾳ, 아카타르시아)은 넓게 부정함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성적 부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고, “음란함”(πορνείᾳ, 포르네이아)은 여러 형태의 성적 부도덕을, “호색함”(ἀσελγείᾳ, 아셀게이아)은 드러내 놓고 행하는 방종을 가리킨다. 바울은 세 말을 뜻이 가까운 성적 죄로 묶어 쓴 것으로 보인다.&lt;sup&gt;15&lt;/sup&gt; 고린도전서 5-6장에서 이미 음행 문제를 다룬 바울에게 이 죄는 새로운 주제가 아니었다. 20절의 다툼과 비방, 21절의 성적 죄는 모두 19절이 말한 교회의 세움을 가로막는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성도를 이용하지 않고 돌보는 지도자&lt;/h3&gt;&lt;p&gt;14절에서 바울이 성도들의 소유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구한다고 한 말은 14-21절 전체를 이끈다. 바울은 성도들 자신을 구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고(14절), 의혹에는 그들이 직접 겪은 사실로 답하며(17-18절), 그들이 회개하지 않은 채 남아 있을까 두려워한다(20-21절). 재정의 정직과 죄에 대한 근심은 서로 다른 주제처럼 보이지만, 바울에게는 둘 다 성도들을 세우려는 목적에서 나온다(19절).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맡은 사람은 백성을 이용하지 않아야 했고, 백성이 바르게 서도록 돌보아야 했다.&lt;/p&gt;&lt;p&gt;사무엘상 12:1-5에서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뒤 온 백성 앞에서 자신이 누구의 소나 나귀를 빼앗았는지, 누구를 속이거나 압제했는지, 누구에게서 뇌물을 받았는지 묻고, 그런 일이 있으면 갚겠다고 말한다. 백성이 그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하자 사무엘은 여호와와 그분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그 증인으로 세운다. 17-18절에서 바울도 자신과 자신이 보낸 사람이 성도들을 이용했는지 묻고 그 대답을 성도들의 기억에 맡긴 뒤, 19절에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말한다고 밝힌다. 두 장면에서 지도자의 재정적 정직은 백성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일이면서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는 일이다.&lt;/p&gt;&lt;p&gt;에스겔 34장은 이 책임을 저버린 목자들을 고발한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살진 양을 잡아 기름을 먹고 털을 입으면서도 양 떼를 먹이지 않았고, 약한 양을 강하게 하거나 병든 양을 고치거나 잃어버린 양을 찾지 않았다(겔 34:2-4). 하나님은 자기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지시고 친히 찾아 돌보겠다고 약속하신다(겔 34:10-11). 에스겔의 목자들은 양에게서 얻을 것을 구했고, 바울은 양 자신을 구한다. 에스겔이 꾸짖은 목자들의 잘못에는 양을 이용한 일과 약한 양을 돌보지 않은 일이 모두 들어 있다. 바울도 성도들의 재물을 거절할 뿐 아니라, 그들의 죄를 근심하며 그들이 돌이키기를 바란다(20-21절).&lt;/p&gt;&lt;h3&gt;짐이 되지 않고 바르게 이끄는 부모&lt;/h3&gt;&lt;p&gt;14절의 부모 비유는 바울이 다른 편지에서도 쓰는 그림이다. 고린도전서 4:14-17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녀라 부르며,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어도 아버지는 많지 않고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다고 말한다. 같은 대목에서 바울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권하려고 이 말을 쓴다고 밝힌다. 데살로니가전서 2:7-12에서는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르듯 성도들을 대했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며 복음을 전했으며,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각 사람을 권면했다고 회고한다. 그곳에서도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행했는지 성도들과 하나님이 증인이시라고 말한다(살전 2:10). 바울에게 부모의 그림은 자녀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태도와 자녀를 바르게 이끄는 권면을 모두 담는다. 14-21절에서도 바울은 부모로서 성도들의 짐이 되지 않으려 하고, 부모로서 그들의 죄를 근심한다.&lt;/p&gt;&lt;h3&gt;생활비를 받지 않은 선택과 정당한 부양&lt;/h3&gt;&lt;p&gt;바울이 고린도에서 생활비를 받지 않은 일은 모든 사역자를 위한 규정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군인과 포도원을 만든 사람과 양 떼를 기르는 사람의 예, 그리고 신명기 25:4의 인용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그 사역으로 생활할 권리를 논증하고, 주께서 복음 전하는 이들이 복음으로 살도록 명하셨다고 말한다(고전 9:7-14). 그런데도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고린도에서는 그 권리를 쓰지 않았다(고전 9:12, 15, 18). 반면 빌립보 교회가 보낸 선물은 받았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불렀다(빌 4:15-18). 그 대목에서 바울은 자신이 구하는 것은 선물 자체가 아니라 성도들에게 쌓일 열매라고 말한다(빌 4:17). 선물을 받을 때도 거절할 때도 바울이 구한 것은 성도들 자신의 유익이었다. 교회가 사역자를 정당하게 부양할 책임과 사역자가 성도들을 이용하지 않을 책임은 둘 다 유효하다.&lt;/p&gt;&lt;h3&gt;다른 지체의 유익이라는 세움의 기준&lt;/h3&gt;&lt;p&gt;19절의 세움은 고린도 교회가 이미 들은 가르침이었다. 고린도전서 8:1에서 바울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말했고,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예언과 방언 같은 은사를 교회의 덕을 세우는지에 따라 판단하며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권했다(고전 14:3-5, 12, 26). 덕을 세우는 기준은 다른 지체가 얻는 유익이었다. 20절의 다툼과 시기, 비방과 수군거림은 이 기준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20-21절의 죄들과 상당 부분 겹치는 갈라디아서 5:19-21의 목록 끝에서 바울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바울은 공동체를 해치는 말과 태도를 가벼운 허물로 여기지 않는다.&lt;/p&gt;&lt;h3&gt;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와 성적 죄&lt;/h3&gt;&lt;p&gt;21절의 성적 죄는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이 편지의 가르침과 이어진다. 6:16에서 바울은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6:17에서 이사야 52:11의 말로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권한다. 이 “부정한 것”(ἀκαθάρτου, 아카타르투)은 21절의 “더러움”과 같은 어근이다. 7:1에서는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 권했다. 고린도전서 6:15-20에서도 바울은 성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고 성령의 전이므로 음행을 피하라고 명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교회에 회개하지 않은 성적 죄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당사자 개인의 문제를 넘어 공동체 전체의 거룩함에 관한 문제가 된다.&lt;/p&gt;&lt;h3&gt;회개를 바라는 근심과 경고&lt;/h3&gt;&lt;p&gt;바울은 회개가 무엇을 낳는지 이미 보았다. 7:8-11에서 그는 편지 때문에 성도들이 근심한 일보다 그 근심이 회개에 이른 일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회개는 간절함과 변증과 분함과 두려움과 사모함과 열심과 벌하는 일로 나타났다. 21절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 반대, 곧 죄를 지은 채 돌이키지 않는 상태다. 고린도전서 5:2에서 바울은 음행 앞에서 교만해진 교회가 오히려 슬퍼했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회개하지 않은 이들 때문에 바울 자신이 슬퍼하게 될까 두려워한다. 13:1-2에서 바울은 세 번째 방문 때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을 확정하겠다고 하고,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경고한다. 13:10이 밝히듯 바울이 떠나 있을 때 이렇게 쓰는 목적은 대면할 때 엄하게 대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 바울의 근심과 경고는 성도들이 그 전에 돌이키기를 바라는 데서 나온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는 사도&lt;/h3&gt;&lt;p&gt;14-21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은 19절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에 나온다. 바울은 2:17에서도 같은 말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한다는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서 말한다는 뜻이고, 하나님 앞에서 말한다는 것은 그 말을 판단하실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5:10에서 바울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된다고 말했다. 바울의 마지막 재판관은 고린도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므로, 그는 성도들의 판결을 얻으려고 변명하지 않는다. 그만큼 바울의 말과 행동은 더 무거운 책임 아래 있다. 생활비를 받지 않은 일, 디도를 보낸 일,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말은 모두 그리스도 앞에서 셈해야 할 일이며, 바울은 그 모든 것이 성도들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19절).&lt;/p&gt;&lt;h3&gt;가난해지신 그리스도와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사도&lt;/h3&gt;&lt;p&gt;바울이 성도들의 소유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구하는 이유는 그가 전한 복음에서 드러난다. 8:9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상기시켰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서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가난해지셨다. 이 은혜를 전하는 사도가 성도들의 소유를 노린다면 자신이 전하는 복음과 반대로 사는 셈이 된다. 5:14-15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을 강권하며,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자들이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신다. 15절에서 바울이 사랑을 덜 받는 아픔을 말하면서도 자신을 쓰겠다는 결심을 거두지 않는 것도, 그의 사랑이 성도들의 반응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근거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lt;/p&gt;&lt;p&gt;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 일과 바울이 자신을 쓰는 일은 구별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고(5:14-15), 그 죽음은 그리스도께서 홀로 이루신 구원이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을 위하여 재물과 자신을 쓰는 일은 누구의 죄도 대속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응답하여 자신을 쓴다. 15절의 결심은 그리스도께 사랑받은 사도가 그 사랑을 따라 성도들을 섬기겠다는 응답이다.&lt;/p&gt;&lt;h3&gt;그리스도의 지체를 위한 회개 요구&lt;/h3&gt;&lt;p&gt;21절의 회개하지 않은 성적 죄도 그리스도의 구속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셔서 성도들이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고(5:2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다(5:17). 고린도전서 6:15-20에서 바울은 성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값으로 산 것이므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했다. 회개하지 않은 음행은 그리스도의 지체를 음행에 내어 주는 일이다(고전 6:15). 바울이 그런 죄를 슬퍼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도들의 삶을 실제로 바꾸기를 바라기 때문이다.&lt;/p&gt;&lt;h3&gt;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바울이 두려워하는 낮아짐&lt;/h3&gt;&lt;p&gt;“낮추다”(ταπεινόω, 타페이노오)라는 동사는 그리스도와 바울에 대해 서로 다른 일을 가리킨다. 빌립보서 2:8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11:7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높이려고 스스로 낮아져 복음을 값없이 전했다. 이 자발적 낮아짐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사도의 섬김이다. 21절의 낮아짐은 성격이 다르다. 바울이 택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성도들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는 일이며, 회개하지 않은 이들 때문에 겪을 슬픔과 맞닿아 있다. 이 방문을 앞둔 바울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13:3-4에 나온다. 고린도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구했고,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듯 자신도 그 안에서 약하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아 성도들을 대하겠다고 말한다. 바울이 엄하게 대하게 되더라도 그는 주께서 무너뜨리지 않고 세우려고 주신 권한을 따라 행한다(13:10). 바울이 바라는 것은 그 권한을 엄하게 쓰지 않아도 되도록 성도들이 미리 돌이키는 것이다.&lt;/p&gt;&lt;h3&gt;그리스도께 드릴 정결한 교회&lt;/h3&gt;&lt;p&gt;11:2-3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말한 뒤, 뱀이 하와를 미혹한 것처럼 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20절에서도 바울은 같은 말로 두려움을 표현한다(φοβοῦμαι ... μή πως, 포부마이 ... 메 포스). 14절의 “오직 너희니라”는 이 중매자의 목적과 이어진다. 바울이 구하는 성도들은 바울 자신에게 속할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드려질 사람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툼과 음란이 남은 교회를 만날까 두려워하고, 그 전에 성도들이 돌이키기를 바란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성도들의 것보다 성도들 자신&lt;/h3&gt;&lt;p&gt;“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라는 바울의 말 앞에서 교회는 성도들에게 무엇을 구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등록 교인 수와 헌금 액수와 봉사 인력은 교회 운영에 필요한 정보지만, 그것이 사람을 바라보는 첫 기준이 되면 교회는 성도들 자신보다 성도들의 것을 구하게 된다. 바울은 8:8에서 연보를 권하면서도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라고 말했다. 헌신을 요청할 때에도 교회는 성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lt;/p&gt;&lt;h3&gt;사역자의 사례와 희생을 대하는 태도&lt;/h3&gt;&lt;p&gt;사역자의 사례 문제는 이 본문과 고린도전서 9장을 함께 읽어야 균형을 잡을 수 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복음으로 살도록 하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사역자의 생활을 책임 있게 돌보아야 한다. 사역자는 받을 권리를 복음보다 앞세우지 않는다. 사례를 줄이거나 받지 않기로 한 사역자도 그 선택을 다른 사역자를 판단하는 잣대로 삼거나, 자신의 희생을 내세워 교인들에게 부채감을 지워서는 안 된다. 바울도 자신의 선택을 고린도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 설명했다(19절).&lt;/p&gt;&lt;p&gt;바울은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라고 물으며 자신의 아픔을 숨기지 않았고, 그 물음으로 성도들이 자신들의 응답을 돌아보게 했다. 사역자도 자신의 상처를 하나님과 공동체 앞에 정직하게 말할 수 있고, 필요하면 성도들의 잘못된 응답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쓰겠다는 결심을 성도들의 사랑을 조건으로 삼지 않았다. 또 15절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밝힌 결심이므로, 이를 근거로 사역자에게 한계 없는 소진을 요구하거나 사역자가 자신의 소진을 교인들이 갚아야 할 빚처럼 내세워서는 안 된다.&lt;/p&gt;&lt;h3&gt;의혹에 사실로 답하는 재정 책임&lt;/h3&gt;&lt;p&gt;재정을 맡은 사람은 선한 의도를 말하는 데 머물지 말고, 다른 사람이 실제 지출과 전달을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바울은 연보를 다룰 때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했다(8:20-21). 16절의 비난 앞에서도 그는 의혹을 무시하거나 의혹을 품은 이들을 몰아세우지 않고, 자신과 디도가 성도들을 이용했는지 성도들이 직접 겪은 일을 떠올리게 했다. 바울과 디도가 같은 발자국을 따라 행했다는 18절의 물음은 동역자들의 행실도 지도자의 정직을 증언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지도자 한 사람이 정직해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다른 기준으로 일하면 공동체의 신뢰는 무너진다. 그러나 바울은 19절에서 자신의 말이 고린도 교회의 판결을 얻기 위한 변명이 아니라고 밝혔다. 지도자는 의혹에 사실로 답하되,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일을 사역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공동체를 세우는 일로 돌아가야 한다.&lt;/p&gt;&lt;h3&gt;하나님 앞에서 공동체를 세우는 말&lt;/h3&gt;&lt;p&gt;19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며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바울은 자신을 향한 비난에 성도들이 겪은 사실로 답한 뒤에(17-18절) 이 말을 했다. 교회의 설교와 공적인 말도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말이다. 설교자도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의혹에 사실로 답하고 필요한 책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거나 개인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면, 그 말은 듣는 사람을 세우지 못한다.&lt;/p&gt;&lt;p&gt;20절에서 바울은 비방과 수군거림이 있는 교회를 만나게 될까 두려워한다.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퍼뜨려 사람을 고립시키거나 당사자의 의도를 추측하며 편을 갈라서는 안 된다. 교회를 세우는 말은 잘못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깎아내리는 말을 삼간다.&lt;/p&gt;&lt;h3&gt;회개 요구와 피해자 보호&lt;/h3&gt;&lt;p&gt;바울이 슬퍼할까 두려워한 이유는 과거의 죄 자체에만 있지 않았다. 죄를 지은 이들이 아직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괴로워한다는 말과 실제로 돌아서는 행동은 같지 않다. 성적 부도덕이나 다른 심각한 죄가 드러났다면 공동체는 잘못을 행한 사람에게 무엇을 중단하고 바로잡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묻고, 아직 잘못을 계속하는 사람에게는 그 행동을 멈추도록 요구해야 한다.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그를 먼저 돌보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서두르라고 요구하거나 가해자와의 화해를 강요하지 않는다.&lt;/p&gt;&lt;h3&gt;공동체의 죄를 슬퍼하는 지도자&lt;/h3&gt;&lt;p&gt;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실까 두려워했다. 공동체의 죄가 드러났을 때 지도자는 자신을 심판자의 자리에만 세우지 않는다.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거나 교회의 체면부터 지키려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공동체의 죄를 자기 일로 슬퍼한다. 죄를 알고도 방치했다면 그 책임을 정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그 슬픔은 피해를 회복하고 같은 죄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는 실제 조치로 이어져야 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12:15,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2:15,”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5/&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15,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5/&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15,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5/&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16,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2:16,”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6/"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6/&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1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6/"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6/&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18,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2:18,”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8/"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8/&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18절의 ‘보내었으니’를 세 가지로 읽을 수 있다고 본다. 8:17처럼 편지를 받는 이의 시점에 맞춘 과거형이라면 디도와 두 형제가 곧 고린도로 떠날 8장의 여행을 가리키고, 8:17에서 말한 것보다 앞선 방문을 가리킨다면 과거형이 그대로 맞으며, 10-13장이 나중에 쓴 별도의 편지에 속한다면 바울은 이미 이루어진 일을 말하는 것이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18,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8/"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8/&lt;/a&gt;.&lt;/li&gt;&lt;li&gt;개역개정처럼 성령으로 읽으면 바울이 갈라디아서 5:16에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한 말과 이어진다. UBS 핸드북은 이 말이 성령을 가리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같은 낱말이 ‘마음’으로 번역된 7:13을 들어 두 사람의 생각하는 방식으로 풀이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18,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8/"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8/&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19,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2:19,”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19/&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20,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2:20,”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0/"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0/&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21,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2:21,” TIPS, accessed October 29,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1/&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21,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1/&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21,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1/&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전에 죄를 지은’의 시제가 이들이 계속 죄를 지어 왔음을 시사한다고 보고, 바울이 두 번째 방문과 눈물의 편지(2:1-4) 이후에도 이어진 죄를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본다. 같은 해설은 이 죄가 회심 전의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은 죄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완료 분사라는 형태만으로 죄가 지금도 계속된다고 확정할 수는 없고, 그 판단은 21절의 ‘회개하지 아니함’과 함께 읽을 때 개연성을 얻는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21,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1/&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2:21,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221/&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고린도후서 13:1-13 자신을 살피고 서로를 세우는 교회</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13.1-13/</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2cor/13.1-13/</guid><description>고린도후서 13:1-13의 마지막 경고와 믿음의 점검,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 공동체의 회복과 모든 성도를 향한 축복을 살핍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h3&gt;세 번째 방문과 두세 증인 (1-2절)&lt;/h3&gt;&lt;p&gt;고린도후서 13:1-13은 10장부터 이어진 바울의 변론과 경고를 마무리하고 편지 전체를 축복으로 닫는다. 12:14에서 바울은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라고 말했고, 12:20-21에서는 그 방문 때 다툼과 시기와 비방이 남아 있을까,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이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않았을까 두려워했다. 1절의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는 이 두려움에 곧바로 이어진다. 바울은 첫 방문에서 고린도 교회를 세웠고, 두 번째 방문은 2:1에서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결심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이제 세 번째 방문을 앞두고 그는 교회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밝힌다.&lt;/p&gt;&lt;p&gt;1절 후반의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는 신명기 19:15의 증언 규정을 인용 표지 없이 옮긴 말이다. 그 규정은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고발을 한 증인의 말만으로 확정하지 못하게 한다. “말마다”로 옮긴 ‘레마’(ῥῆμα)는 보통 입으로 한 말을 뜻하지만, 법정 규정을 옮긴 이 문장에서는 판단을 받아야 할 사안이나 고발 내용을 가리킨다.&lt;/p&gt;&lt;p&gt;바울이 이 규정을 고린도 교회에 어떻게 적용하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나뉜다. 한 해석은 바울이 세 번째 방문에서 정식 절차에 따라 증언을 듣고 죄의 사실을 가리겠다는 뜻으로 읽는다.&lt;sup&gt;1&lt;/sup&gt; 다른 해석은 1절의 “세 번째”와 2절의 “두 번째”를 연결하여, 바울의 거듭된 방문과 경고를 율법이 요구하는 증인의 수에 견준 말로 읽는다. 이 해석에 따르면 바울은 법정 절차를 계획하기보다, 고린도 교회가 성경이 요구하는 경고를 이미 충분히 받았다고 말한다.&lt;sup&gt;2&lt;/sup&gt; 1-2절의 흐름은 두 번째 해석을 더 뒷받침한다. 바울은 증언 규정을 인용한 뒤 증인이 누구인지나 증언을 듣는 절차를 말하지 않고, 곧바로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지금 떠나 있으나”를 들어 자신이 경고한 때를 헤아린다. 그러나 “확정하리라”는 결정이 다가오는 방문에서 내려진다는 뜻이므로, 바울이 도착한 뒤 사실을 확인할 가능성까지 본문이 배제하지는 않는다. 바울이 이 인용으로 분명히 밝히는 것은 경고가 충분히 주어졌으므로 다음 방문에서는 판단을 미루지 않겠다는 것이다.&lt;/p&gt;&lt;p&gt;2절은 이 경고를 구체적인 대상에게 돌린다.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는 두 번째 방문 때 한 경고를, “미리 말하노니”는 지금 편지로 되풀이하는 경고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 두 시점을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와 “지금 떠나 있으나”로 구분한다. 함께 있을 때와 떠나 있을 때의 대조는 10:10에 인용된 비판을 떠올리게 한다. 반대자들은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다고 말했고, 바울은 10:11에서 떠나 있을 때 편지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 행하는 일이 같다고 답했다. 2절의 경고는 그 일치를 실제 방문에서 보이겠다는 선언이다.&lt;/p&gt;&lt;p&gt;경고를 받는 사람은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이다. 앞의 사람들은 두 번째 방문 전에 죄를 짓고 그때 바울의 경고를 들은 이들이다. 12:21에서 바울은 이들이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않아 슬퍼하게 될까 두려워했다. “그 남은 모든 사람”은 그 뒤에 죄를 지은 다른 사람들로 보이며, 그 죄에는 부도덕한 행위뿐 아니라 거짓 사도들을 지지한 일도 포함될 수 있다.&lt;sup&gt;3&lt;/sup&gt; 경고의 내용인 “용서하지 아니하리라”(οὐ φείσομαι, 우 페이소마이)의 동사는 “아끼다”, “봐주다”라는 뜻이다. 1:23에서 바울은 같은 동사로 자신이 고린도에 다시 가지 않은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고 말했다. 그때는 그들을 아껴 방문을 미루었지만, 이번에는 잘못한 사람을 징계하기를 삼가지 않겠다는 것이다.&lt;sup&gt;4&lt;/sup&gt; 한국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는 회개한 사람의 용서까지 거절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회개하지 않은 죄를 더 이상 그대로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편지는 그 방문 전에 돌이킬 기회를 준다.&lt;/p&gt;&lt;h3&gt;십자가의 약함과 하나님의 능력 (3-4절)&lt;/h3&gt;&lt;p&gt;3절은 바울이 엄중하게 대하겠다고 말하는 이유를 밝힌다. 고린도 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구하기 때문이다. “증거”(δοκιμὴν, 도키멘)는 시험을 거쳐 참됨이 드러난 증거를 뜻한다. 그들은 바울의 말이 정말 그리스도의 말씀인지 확인하려 한다. 이 명사와 같은 계열의 말이 5-7절의 “확증하라”, “버림 받은 자”, “옳은 자”로 이어지면서, 바울을 검증하려던 성도들에게 같은 검증이 돌아간다.&lt;/p&gt;&lt;p&gt;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고 답한다. ‘너희 안에서’는 각 사람의 내면보다 공동체 가운데서 일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lt;sup&gt;5&lt;/sup&gt;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복음 전파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12:12에서 바울이 말했듯 그들 가운데서 사도의 표가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3절은 2절의 경고에 이어지는 말이다. 사도를 무시하면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증거로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그 능력은 죄를 다루는 엄중한 행동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바울이 지금까지 강하게 대하지 않은 것도 1:23에서 말한 대로 그들을 아꼈기 때문이다.&lt;/p&gt;&lt;p&gt;4절은 그 능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설명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라고 말한다. 원문은 “약하심으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에 같은 전치사 ‘에크’(ἐκ)를 써서 약함과 능력을 맞세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지나간 사건이고, “살아 계시니”는 지금도 이어지는 부활의 생명을 말한다. 로마 세계에서 십자가형은 노예와 반역자에게 내리던 수치스러운 처형이었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약함이 실제였다고 인정한다. 그 약함 뒤에 하나님께서 그분을 살리셨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고 교회 가운데서 일하신다.&lt;/p&gt;&lt;p&gt;바울은 같은 대조를 자신과 동역자들에게 적용한다.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다음에 “그와 함께 살리라”가 이어진다. “그 안에서”는 바울의 약함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에 속한다는 뜻이고, “그와 함께”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미래형 “살리라”는 문장 끝의 “너희에게 대하여”(εἰς ὑμᾶς, 에이스 휘마스)와 이어진다. 이 말은 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으시다고 한 표현을 되풀이하므로, “살리라”는 마지막 날의 부활보다 다가오는 고린도 방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생명을 가리킨다.&lt;sup&gt;6&lt;/sup&gt; 바울은 그 생명과 하나님의 능력이 고린도 교회를 대하는 사역, 특히 하나님께서 사도의 징계를 능력 있게 확증하시는 일에서 드러나리라고 말한다.&lt;sup&gt;7&lt;/sup&gt;&lt;/p&gt;&lt;h3&gt;너희 자신을 시험하라 (5-6절)&lt;/h3&gt;&lt;p&gt;5절에서는 검증의 방향이 성도들 자신에게로 바뀐다. 바울에게 증거를 요구하던 사람들이 이제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확증하라”로 옮긴 ‘도키마제테’(δοκιμάζετε)는 3절의 “증거”와 같은 계열의 동사로, 시험하여 참됨을 가려내라는 뜻이다. 개역개정의 “확증하라”는 이미 내린 결론을 굳힌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나, 바울이 요구하는 것은 참된지 가려내는 검증이다. 검증할 내용은 “믿음 안에 있는가”이다. 1:24에서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말한 바울은 이제 그 믿음이 그들의 삶에서 실제로 유지되고 있는지 살피라고 한다.&lt;/p&gt;&lt;p&gt;바울은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이 물음은 “알고 있다”는 대답을 기대한다. 원문의 ‘너희’는 복수이고 ‘안에’는 ‘가운데’로도 읽힌다. 그러나 5절은 각자 자신을 검증하라는 명령에 이어지므로 각 사람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뜻이 조금 더 앞선다.&lt;sup&gt;8&lt;/sup&gt;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이라는 기대를 놓지 않는다.&lt;/p&gt;&lt;p&gt;그러나 바울은 곧바로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를 덧붙인다. “버림 받은 자”로 옮긴 ‘아도키모이’(ἀδόκιμοί)는 3절의 “증거”와 같은 계열의 말에 부정 접두사가 붙은 형용사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을 뜻한다.&lt;sup&gt;9&lt;/sup&gt; 개역개정의 “버림 받은 자”는 하나님께 최종적으로 거부당한 사람을 먼저 떠올리게 하지만, 원문의 초점은 검증의 결과 참되다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이 경고가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바울이 검증하라고 한 것은 그들이 믿음 안에 있는지,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신지이므로, 이 검증에서 떨어진다면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그들의 고백이 참되지 않다는 뜻이 된다. 10:18에서 바울은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라고 말했는데, 이 표현이 ‘아도키모이’의 긍정형인 ‘도키모스’(δόκιμος)다. 고린도 성도들은 자기를 칭찬하는 다른 교사들의 기준으로 바울을 판단했지만, 사람을 참되다고 인정하시는 분은 주님이다. 죄를 붙든 채 사도만 판단하던 성도들은 자신이 고백하는 믿음이 주님 앞에서 참된지 물어야 한다.&lt;/p&gt;&lt;p&gt;6절에서 바울은 같은 말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고린도 성도들이 알기를 바란다. 그들의 믿음은 바울의 복음 전파로 생겼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자신들 안에서 일하고 있음을 안다면, 그 사실이 바울의 복음 전파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보여 주는 가장 좋은 증거가 된다.&lt;sup&gt;10&lt;/sup&gt;&lt;/p&gt;&lt;h3&gt;자기 인정보다 성도의 선을 구하는 기도 (7-9절)&lt;/h3&gt;&lt;p&gt;7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어떤 악도 행하지 않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기도의 목적을 부정과 긍정으로 밝힌다. 그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기도하지 않는다. “옳은 자”(δόκιμοι, 도키모이)는 검증을 통과한 사람이다. 바울이 구하는 것은 성도들이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들이 회개하여 엄중한 조치가 필요 없어지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징계로 보여 줄 기회가 없고 사람들의 눈에 “버림 받은 자 같을” 수 있다. 바울은 그 결과를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경고가 옳았다고 인정받기보다 성도들이 죄를 짓지 않기를 바란다.&lt;sup&gt;11&lt;/sup&gt;&lt;/p&gt;&lt;p&gt;8절은 그 이유를 밝힌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진리를 위할 뿐”이다. 여기서 진리는 복음과 복음의 진전을 가리킨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어떻게 행할지는 성도들이 악을 행했는지 선을 행했는지에 달려 있다.&lt;sup&gt;12&lt;/sup&gt; 그들이 이미 회개하여 선을 행한다면 바울은 자기 권위를 보이려고 그들을 벌할 수 없다. 반대로 복음을 거스르는 죄가 남아 있다면 바울은 그 죄를 다루어야 한다. 사도의 권한은 진리에 매여 있으므로, 8절은 권한의 남용을 막으면서 필요한 권한의 행사를 요구한다.&lt;/p&gt;&lt;p&gt;9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한다고 말한다. 약함과 강함은 3-4절과 같은 낱말이지만, 여기서 그 뜻은 7절의 문맥을 따른다. 바울이 약하다는 말은 징계의 능력을 보일 필요가 없어 실패한 사도처럼 보이는 상태를, 성도들이 강하다는 말은 그들이 믿음 안에서 선을 행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바울은 자신이 틀린 사람처럼 보이더라도 성도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면 그것을 기뻐한다.&lt;sup&gt;13&lt;/sup&gt; 그가 기도하는 내용은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κατάρτισιν, 카타르티신)이다. 이 명사는 흠 없는 완성보다 손상된 것을 고치고 잃은 것을 되찾는 회복을 가리킨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1에서 같은 계열의 동사로 범죄한 성도를 바로잡는 일을 말한다.&lt;sup&gt;14&lt;/sup&gt; 바울이 구하는 것은 다툼과 회개하지 않은 죄로 상한 고린도 교회가 바로잡히는 일이다.&lt;/p&gt;&lt;h3&gt;세우려고 주신 권한 (10절)&lt;/h3&gt;&lt;p&gt;10절에서 바울은 떠나 있을 때 이렇게 편지를 쓰는 까닭이 대면할 때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그 권한은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그에게 주신 것이며, 이 표현은 10:8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한다.&lt;sup&gt;15&lt;/sup&gt; 바울은 ‘세움’(οἰκοδομὴν, 오이코도멘)과 ‘무너뜨림’(καθαίρεσιν, 카타이레신)을 대조한다. 10:4에서는 같은 ‘무너뜨림’이라는 명사가 견고한 진을 허무는 일에 쓰였고, 10:5에서 바울이 무너뜨리는 대상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다. 바울의 권한이 무너뜨리는 것은 그런 교만이며, 교회는 세움의 대상이다. 엄중한 행동을 예고하는 까닭도 죄가 지속되는 상황을 끝내고 그들을 주님께 속한 공동체로 세우려는 데 있다.&lt;/p&gt;&lt;h3&gt;바로잡고 화평하라는 마지막 권면 (11-12절)&lt;/h3&gt;&lt;p&gt;11절에서 바울은 엄중한 경고 뒤에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라고 성도들을 다시 형제로 부르며 권면을 이어 간다. 첫 표현 “기뻐하라”(χαίρετε, 카이레테)를 편지 끝의 작별 인사로 옮기는 번역도 있지만, 이 말은 기뻐하라는 권면으로 읽는 편이 낫다.&lt;sup&gt;16&lt;/sup&gt; 9절에서 성도들의 강함을 기뻐한다고 한 바울이 이제 성도들에게도 기뻐하라고 권한다. “온전하게 되며”(καταρτίζεσθε, 카타르티제스테)는 9절의 “온전하게 되는 것”과 같은 계열의 동사다. 개역개정처럼 수동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성도들이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명령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라’는 뜻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다.&lt;sup&gt;17&lt;/sup&gt; 바울이 9절에서 기도한 회복을 성도들이 직접 실행하라는 명령이다. “위로를 받으며”로 옮긴 ‘파라칼레이스테’(παρακαλεῖσθε)는 위로를 받는다는 뜻과 권면을 받는다는 뜻을 모두 지닌다. 경고와 호소로 이어진 10-13장의 끝에서는 ‘내 권면에 귀를 기울이라’는 뜻이 더 잘 어울린다.&lt;sup&gt;18&lt;/sup&gt;&lt;/p&gt;&lt;p&gt;“마음을 같이하며” 다음의 “평안할지어다”(εἰρηνεύετε, 에이레뉴에테)는 개인의 평안한 감정보다 성도들끼리 화평하게 지내라는 명령이다.&lt;sup&gt;19&lt;/sup&gt; 이 명령들은 12:20에서 바울이 두려워한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에 맞선다. 명령 뒤에는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는 약속이 이어진다.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은 사랑과 평강을 성품으로 지니시고 성도들 가운데 사랑과 평강을 이루시는 분이다.&lt;sup&gt;20&lt;/sup&gt; 바울은 갈등하는 성도들에게 서로 화평하라고 명령하고, 곧이어 그 화평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고 약속한다.&lt;/p&gt;&lt;p&gt;바울은 성도들에게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명령한다.&lt;sup&gt;21&lt;/sup&gt; ‘거룩한’이라는 수식어는 이 입맞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성도들의 인사로 구별한다. 다투던 사람들이 서로 문안하려면 실제로 서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바울은 이어서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전한다. 문안하는 “모든 성도”는 바울이 편지를 쓰는 곳에서 그와 함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lt;sup&gt;22&lt;/sup&gt; 그들의 문안은 다툼을 겪는 고린도 교회가 더 넓은 성도의 교제에 속해 있음을 일깨운다.&lt;/p&gt;&lt;h3&gt;너희 무리에게 비는 축복 (13절)&lt;/h3&gt;&lt;p&gt;13절은 편지를 축복으로 마친다. 바울의 편지는 대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비는 짧은 축복으로 끝나는데, 이 편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를 더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은 원문에서 같은 형태의 세 구절로 이어진다. “성령의 교통하심”(ἡ κοινωνία τοῦ ἁγίου πνεύματος, 헤 코이노니아 투 하기우 프뉴마토스)에서 ‘코이노니아’는 참여와 나눔과 교제를 뜻한다. 앞의 두 구절이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을 말하므로, 셋째 구절도 성령께서 이루시는 교제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다. 성도들이 성령께 함께 참여한다는 읽기도 가능하지만 이 병행 구조에서는 덜 자연스럽다.&lt;sup&gt;23&lt;/sup&gt; 성령께서 이루시는 교제는 파당과 다툼과 시기로 흔들린 고린도 교회에 꼭 맞는 축복이다.&lt;sup&gt;24&lt;/sup&gt;&lt;/p&gt;&lt;p&gt;마지막 구절 “너희 무리와 함께”(μετὰ πάντων ὑμῶν, 메타 판톤 휘몬)는 축복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밝힌다. 2절의 경고가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을 향했다면, 13절의 축복은 “너희 모두”를 향한다. 바울은 일부 사람들의 잘못을 엄하게 다루면서도 마지막 축복에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는다. 경고를 받은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 안으로 부름받는다. 바울이 경고하고 자기 검증을 명령한 것은 이 공동체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h3&gt;공정한 증언과 돌이킴을 위한 권징&lt;/h3&gt;&lt;p&gt;1절이 인용하는 신명기 19:15는 어떤 악이나 죄든 한 증인의 말만으로 사람을 정죄하지 못하게 한다. 같은 원칙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다루는 신명기 17:6에도 나온다. 신명기 19:16-21은 거짓 증인이 나타났을 때의 절차를 덧붙인다. 다투는 두 사람은 여호와 앞, 곧 그때의 제사장들과 재판장들 앞에 서고, 재판장들은 자세히 조사한다. 증언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거짓 증인은 그가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대로 벌을 받는다. 이 법은 고발당한 사람을 근거 없는 공격과 거짓 증언에서 보호하고, 죄가 확인되면 그 악을 공동체 가운데서 제거하라고 명령한다. 바울은 이 규정을 인용하여 자신의 경고가 충분히 반복되었고 다음 방문의 판단이 자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밝힌다. 바울이 실제 증인 절차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해석이 나뉘지만, 그가 인용한 신명기 규정 자체는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다룰 때 지켜야 할 공정함을 분명히 요구한다.&lt;/p&gt;&lt;p&gt;신약에서 이 규정은 사람을 돌이키려는 권징의 절차에도 쓰인다. 마태복음 18:15-17에서 예수께서는 죄를 지은 형제를 먼저 혼자 찾아가 권고하라고 하신다. 형제가 들으면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고 하시는데, 이 말씀도 신명기 19:15를 가져온 것이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신다. 이 절차는 돌아설 사람을 얻는 데서 시작하면서도, 끝까지 거부하는 죄를 공동체가 외면하지 않게 한다. 바울도 고린도후서 2:6-8에서 많은 사람에게서 벌을 받은 한 사람을 이제 용서하고 위로하며 사랑을 나타내라고 권했다. 바울이 1-2절에서 방문 전에 거듭 경고하는 것도 징계의 목적이 사람을 돌이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lt;/p&gt;&lt;h3&gt;세움을 향한 경고와 자기 검증&lt;/h3&gt;&lt;p&gt;10절의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는 예레미야의 소명과 비슷한 표현이다. 예레미야 1:10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여러 나라와 왕국 위에 세워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신다. 예레미야 24:6에서 하나님은 포로로 끌려간 백성을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예언자가 받은 말씀은 심판도 선포하고 회복도 약속했지만, 심판을 거친 백성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마지막 목적은 다시 세움이었다. 바울의 권한에도 무너뜨리는 힘이 있으나, 그 힘은 10:4-5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향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권한의 목적은 세움이며, 1-10절의 경고도 고린도 교회의 회복을 겨냥한다.&lt;/p&gt;&lt;p&gt;자기 검증은 구약과 바울의 다른 편지에서도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로 나타난다. 예레미야애가 3:40은 무너진 예루살렘에서 우리의 행위를 살펴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부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8-32에서 같은 고린도 교회에게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각 사람이 자기를 살피라고 하면서, 주께 판단을 받는 것은 세상과 함께 정죄를 받지 않게 하려는 징계라고 설명했다. 갈라디아서 6:1-4에서는 범죄한 사람을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라고 하면서, 바로잡는 사람도 자신을 살펴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각자 자기 일을 살피라고 한다. 이 본문들에서 자기 검증은 정죄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백성을 돌이키시고 공동체를 바로잡으시는 길이 된다. 바울은 5절에서 성도들에게 자신을 검증하라고 명령하고, 9절에서 그들이 바로잡히기를 구한다.&lt;/p&gt;&lt;h3&gt;약함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lt;/h3&gt;&lt;p&gt;4절의 약함과 능력의 역설은 고린도 교회가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중심에 있다. 고린도전서 1:18-25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말했다. 고린도 성도들은 눈에 보이는 강함으로 사도를 판단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약함 가운데 능력을 나타내셨다. 고린도후서 12:9-10에서 바울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 것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이 방식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3-4절에서 바울은 같은 복음에 근거하여, 자신의 약해 보이는 모습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없다는 증거가 아님을 밝힌다.&lt;/p&gt;&lt;h3&gt;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lt;/h3&gt;&lt;p&gt;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안에 계시다는 5절의 말씀과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는 11절의 약속은 언약의 약속과 이어진다. 레위기 26:11-12에서 하나님은 자기 성막을 백성 가운데 세우시고 그들 가운데 행하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16에서 이 약속을 가져와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했고, 7:1에서는 이 약속을 가진 사람들에게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 권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약속은 거룩한 삶을 요구한다. 12:21에서 바울이 회개하지 않은 더러움과 음란함을 슬퍼하고 5절에서 자기 검증을 명령하는 것도,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이다.&lt;/p&gt;&lt;h3&gt;하나님의 복을 비는 마지막 축복&lt;/h3&gt;&lt;p&gt;13절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복을 선언하게 하신 구약의 예배를 떠올리게 한다. 민수기 6:22-27에서 하나님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는 말을 주셨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고 지키시며, 얼굴을 비추사 은혜를 베푸시고, 얼굴을 들어 평강 주시기를 원한다는 축복이다. 13절은 민수기를 인용하지 않지만, 같은 하나님의 복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로 빈다. 경고와 갈등으로 가득했던 편지도 이 축복으로 끝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회복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에 맡기며 편지를 마친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h3&gt;사도를 통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lt;/h3&gt;&lt;p&gt;3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요구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요 사신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확신한다.&lt;sup&gt;25&lt;/sup&gt; 5:20에서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으로 소개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했다. 사도의 말에는 그리스도의 권위가 실리지만, 그 권위는 진리에 매여 있다. 8절이 말하듯 바울은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분별할 기준은 그의 말재주나 외모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이 물어야 할 것은 그의 말과 삶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일치하는가였다.&lt;/p&gt;&lt;h3&gt;십자가의 약함과 부활의 생명&lt;/h3&gt;&lt;p&gt;4절은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밝힌다. 그리스도께서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이 약함은 겉모습에 그치지 않았다. 8:9가 말하듯 부요하신 이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고, 빌립보서 2:8이 말하듯 자기를 낮추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연약함과 수치와 죽음을 실제로 짊어지셨다. 그러나 그분은 지금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신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바로 그분이 살아 계시므로, 사도의 낮아진 모습만 보고 그가 전하는 그리스도까지 무능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 3절이 말하듯 그리스도는 고린도 교회를 대하여 약하지 않으시고 그들 가운데서 강하시다.&lt;/p&gt;&lt;p&gt;4절 후반에서 바울은 자신과 동역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하나”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말한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신 일은 그리스도께만 속한 구원 사역이다. 바울은 그 일을 되풀이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분의 약함과 생명에 참여한다. 10: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성도들을 권했고, 지금까지 그들을 아끼며 기다렸다. 다가오는 방문에서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가 고린도 교회를 대하는 일에서 드러날 것이다. 4절의 “살리라”가 직접 가리키는 것은 이 방문이다. 그러나 그 생명을 주시는 분은 4:14에서 예수와 함께 바울도 다시 살려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이다. 바울이 지금 사역에서 의지하는 능력과 마지막 날에 기대하는 부활은 같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lt;/p&gt;&lt;h3&gt;성도 안에 계신 그리스도&lt;/h3&gt;&lt;p&gt;5절에서 자기 검증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사실이다. 로마서 8:9-10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며,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살아 있다고 말한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성도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확신의 근거이며, 그 확신이 참된지 묻는 기준이다. 그러므로 5절의 자기 검증은 자기 힘으로 합격선을 넘으려는 노력이 될 수 없다. 성도들은 3절에서 공동체 가운데 강하게 일하신다고 한 그리스도께서 자신들 안에 계신지, 그분께 의지하여 사는지를 살핀다. 그리스도께서 안에 계신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은 죄와 다툼을 그대로 둘 수 없다.&lt;/p&gt;&lt;h3&gt;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라고 주신 권한&lt;/h3&gt;&lt;p&gt;7절과 9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버림 받은 자 같고 약해 보이더라도 성도들이 선을 행하고 강하면 기뻐한다고 말한다. 이 약함은 4절의 십자가 참여와 같은 뜻이 아니라, 징계의 능력을 보일 필요가 없어 실패한 사도처럼 보이는 상태다. 바울의 권한은 주께서 교회를 세우라고 주신 것이므로(10절), 그는 자기 명예를 지키는 데 그 권한을 쓰지 않는다. 이 권한을 주신 “주”는 바울이 대신하여 말하는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lt;sup&gt;26&lt;/sup&gt; 고린도전서 3:10-11에서 바울은 자신을 터를 닦은 건축자로 소개하면서도, 그 터는 이미 닦아 둔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말했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한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일꾼이다.&lt;/p&gt;&lt;h3&gt;갈등한 공동체를 세우는 그리스도의 은혜&lt;/h3&gt;&lt;p&gt;13절의 축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시작한다. 이 은혜는 8:9에서 말한 대로 부요하신 이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은혜다. 바울은 이 은혜에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시는 교제를 더하여 빈다. 11절의 “마음을 같이하며”와 같은 권면은 빌립보서 2:2에도 나온다.&lt;sup&gt;27&lt;/sup&gt; 빌립보서 2:1-5에서 바울은 성령의 교제를 근거로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라고 권하고, 곧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이어 간다. 고린도 성도들이 같은 마음을 품는 길도 자기를 낮추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함께 따르는 것이다. 바울은 경고를 받은 사람들까지 포함한 “너희 무리”에게 이 은혜를 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갈등한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근거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h3&gt;공정한 확인과 피해 호소의 보호&lt;/h3&gt;&lt;p&gt;신명기 19장의 증언 규정은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못하게 하고, 재판장에게 자세히 조사하라고 요구한다. 교회가 누군가의 잘못을 다룰 때에도 지도자의 확신이나 떠도는 소문으로 결론을 내리지 말고, 당사자의 말을 듣고 실제로 일어난 일을 확인해야 한다. 이 원칙은 권한을 가진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바울도 12:16-18에서 자신이 고린도 성도들을 속여 이득을 취했다는 말에 대해 디도와 다른 형제를 보낸 일을 들어 답했다. 지도자에 대한 근거 없는 공격도, 확인된 잘못도 같은 공정한 절차로 다루어야 한다.&lt;/p&gt;&lt;p&gt;두세 증인의 규정을 피해 호소를 묵살하는 근거로 써서는 안 된다. 신명기 19:16-18의 재판장들은 한 사람이 고발했다는 이유로 사건을 덮지 않고 자세히 조사해야 했다. 교회도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그 호소를 살펴야 한다. 증언 규정은 거짓 고발에서 사람을 보호하면서 진실을 밝히려고 주어졌다. 그 규정을 약한 사람을 침묵하게 만드는 데 쓰면 율법의 목적을 거스르게 된다.&lt;/p&gt;&lt;h3&gt;돌이킬 길을 보여 주는 경고&lt;/h3&gt;&lt;p&gt;바울은 방문하기 전에 거듭 경고하여,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바뀌어야 하며 바뀌지 않으면 어떤 일이 뒤따를지 미리 알렸다. 1-2절에서 그는 이 반복된 경고를 근거로 다음 방문의 판단을 예고한다. 공동체가 잘못을 다룰 때에도 상대가 돌아설 길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경고가 먼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가면 그대로 두지 않겠다고도 말했다. 회개를 기다린다는 이유로 잘못을 바로잡는 일을 끝없이 미루어서는 안 된다.&lt;/p&gt;&lt;h3&gt;남보다 자신을 먼저 살피는 검증&lt;/h3&gt;&lt;p&gt;“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명령은 바울만 검증하려던 성도들을 향한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는 데 익숙한 사람일수록 이 명령 앞에서 자신을 예외로 두어서는 안 된다. 그 검증이 다룰 구체적인 죄는 바울이 12:20-21에서 두려워한 다툼과 시기와 비방과 수군거림, 그리고 회개하지 않은 성적 죄다. 이 검증은 가볍지 않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신지를 묻고,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믿음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고 경고한다.&lt;/p&gt;&lt;p&gt;그러나 자기 검증이 끝없는 불안으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 5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 묻고, 바울은 성도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기를 기대한다. 자신을 살필수록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성취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약속을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 검증의 목적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께 돌아가 그분 안에서 사는 데 있다.&lt;/p&gt;&lt;h3&gt;세우기 위해 쓰는 권한&lt;/h3&gt;&lt;p&gt;사람들이 경고를 듣고 잘못을 고쳤다면 지도자는 그 변화를 기뻐해야 한다. 바울은 성도들이 선을 행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약해 보이더라도 성도들이 강하면 기뻐한다고 했다(7-9절). 2:6-8에서도 바울은 충분히 벌을 받은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권했다. 회개한 사람에게 지도자의 권위를 입증하려고 추가로 벌을 주거나, 이미 바로잡은 실패를 거듭 꺼낼 이유가 없다.&lt;/p&gt;&lt;p&gt;바울은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8절). 교회의 평판을 지키려고 사실을 축소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을 불리하게 보이도록 일부 사실만 골라 말해서는 안 된다. 진리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도 감추지 않는다. 지도자의 잘못이 확인되면 그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를 회복할 길을 찾아야 한다.&lt;/p&gt;&lt;p&gt;주께서 주신 권한이 세우기 위한 것이라면, 교회 안의 지적과 비판도 같은 기준으로 살펴야 한다. 잘못을 지적하는 말이 상대를 바로잡아 세우는지, 상대를 무너뜨려 자신을 높이는지를 물어야 한다. 바울은 경고하면서 성도들이 악을 행하지 않기를, 그리고 그들이 온전하게 회복되기를 하나님께 구했다(7, 9절). 누군가를 권면하거나 징계해야 하는 사람이 먼저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바울의 본을 따르는 일이다.&lt;/p&gt;&lt;h3&gt;화평하고 서로를 맞이하는 교회&lt;/h3&gt;&lt;p&gt;11절의 “마음을 같이하며”를 모든 의견 차이를 숨기라는 요구로 쓰면 갈등의 원인이 그대로 남는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 권면을 받아들이라고 한 다음 서로 화평하라고 명령했다. 화평하려면 바울이 12:20에서 지적한 다툼과 시기와 비방을 버려야 한다. 성도들은 사실을 말하되 상대를 비방하지 않고, 잘못을 바로잡되 상대가 돌이킬 길을 열어 두어야 한다. 그 화평을 이루시는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lt;/p&gt;&lt;p&gt;인사의 방식은 문화와 세대에 따라 다르지만, 바울이 거룩한 입맞춤으로 요구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사람들이 서로를 맞이하는 일이다. 경고를 보낸 바울은 마지막 축복에서 “너희 무리”, 곧 모든 성도에게 은혜를 빈다. 오늘 예배를 마치며 이 축복을 들을 때에도 그 “모두”에는 갈등 때문에 멀어진 성도가 들어 있다. 같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서로를 맞이해야 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ol&gt;&lt;li&gt;W. Robertson Nicoll, ed., &lt;em&gt;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13:1, Bible Hub,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3.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3.htm&lt;/a&gt;.&lt;/li&gt;&lt;li&gt;John E. Ellington and Roger L. Omanson, &lt;em&gt;A 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on 2 Cor 13:1,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3:1,”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2,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3:2,”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2,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2/"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2/&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3,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3:3,”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3/&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4,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3:4,”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4/&lt;/a&gt;.&lt;/li&gt;&lt;li&gt;Nicoll, &lt;em&gt;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13:4, Bible Hub,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3.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3.htm&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5,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3:5,”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5/"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5/&lt;/a&gt;.&lt;/li&gt;&lt;li&gt;Nicoll, &lt;em&gt;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13:5, Bible Hub,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3.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3.htm&lt;/a&gt;.&lt;/li&gt;&lt;li&gt;Nicoll, &lt;em&gt;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13:5, Bible Hub,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3.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3.htm&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7,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3:7,”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7/"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7/&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8,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3:8,”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8/"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8/&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9,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3:9,”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9/&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9,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9/"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9/&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10,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3:10,”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0/"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0/&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에 따르면 RSV, GNT, REB, NIV 등은 이 말을 작별 인사로 옮긴다. 핸드북은 이 말이 편지 첫머리의 인사로는 흔히 쓰이지만 편지 끝에서 작별의 뜻으로 쓰였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기뻐하라’를 택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11,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3:11,”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1/&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11,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1/&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이 동사를 ‘권면을 받으라’와 ‘서로 권면하라’로 읽을 수 있다고 보고, RSV와 GNT처럼 바울의 권면을 받으라는 뜻으로 옮기기를 권한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11,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1/&lt;/a&gt;.&lt;/li&gt;&lt;li&gt;UBS 핸드북은 이 화평이 바깥 사람들과의 화평인지 신자들 사이의 화평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문맥은 신자들 사이의 화평을 지지한다고 본다. 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11,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1/&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11,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1/&lt;/a&gt;.&lt;/li&gt;&lt;li&gt;본문의 절 번호는 개역개정을 따른다. NA28은 입맞춤 문안과 모든 성도의 문안을 모두 12절에 두고, 개역개정은 입맞춤 문안을 11절 끝에, 모든 성도의 문안을 12절에 둔다. 축복은 두 본문 모두 13절이다. ESV는 입맞춤 문안을 12절, 모든 성도의 문안을 13절, 축복을 14절로 매긴다. &lt;em&gt;Novum Testamentum Graece&lt;/em&gt;, ed. Barbara Aland et al., 28th rev. ed.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2012), 2 Cor 13:11-13, accessed October 25, 2026, &lt;a href="https://www.die-bibel.de/bibel/NA28/2CO.13" rel="noopener"&gt;https://www.die-bibel.de/bibel/NA28/2CO.13&lt;/a&gt;; &lt;em&gt;개역개정판&lt;/em&gt; (대한성서공회, 1998), 고린도후서 13:11-13,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bible.bskorea.or.kr/bible/NKRV/2CO.13" rel="noopener"&gt;https://bible.bskorea.or.kr/bible/NKRV/2CO.13&lt;/a&gt;; &lt;em&gt;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lt;/em&gt;, 2 Cor 13:11-14, Bible Gateway,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2+Corinthians+13%3A11-14&amp;amp;version=ESV" rel="noopener"&gt;https://www.biblegateway.com/passage/?search=2+Corinthians+13%3A11-14&amp;amp;version=ESV&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12-13 (개역개정 13:11 끝과 13:12),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3:12-12:13 [sic],”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2-121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tip_term/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2-1213/&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14 (개역개정 13:13), excerpted in “Translation Commentary on 2 Corinthians 13:14,” TIPS, accessed October 28, 2026,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4/"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4/&lt;/a&gt;.&lt;/li&gt;&lt;li&gt;Nicoll, &lt;em&gt;Expositor’s Greek Testament&lt;/em&gt;, on 2 Cor 13:13, Bible Hub, &lt;a href="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3.htm" rel="noopener"&gt;https://biblehub.com/commentaries/egt/2_corinthians/13.htm&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3,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3/"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3/&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10,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0/"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0/&lt;/a&gt;.&lt;/li&gt;&lt;li&gt;Ellington and Omanson, &lt;em&gt;Handbook on Paul’s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lt;/em&gt;, on 2 Cor 13:11, TIPS, &lt;a href="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1/" rel="noopener"&gt;https://tips.translation.bible/story/translation-commentary-on-2-corinthians-1311/&lt;/a&gt;.&lt;/li&gt;&lt;/ol&gt;</content:encoded></item><item><title>빌레몬서 1:1-25 사랑받는 형제로 맞아들이라는 부탁</title><link>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phlm/1.1-25/</link><guid>https://faithful.missionalbible.org/phlm/1.1-25/</guid><description>빌레몬서의 공동체 수신자, 오네시모를 위한 바울의 부탁, 형제의 관계와 비용을 감당하는 화해를 원문과 문맥에서 살핍니다.</description><content:encoded>&lt;h2&gt;본문 분석&lt;/h2&gt;&lt;p&gt;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δέσμιος, 데스미오스)라고 소개한다(1절). 다른 서신 첫머리에 자주 나오는 사도라는 직함은 이 편지에 없고, 그 대신 그리스도를 섬기다가 실제로 구금된 처지를 먼저 밝힌다. 10절과 13절의 “갇힌 중에서”, 그리고 풀려나 방문하기를 바라는 22절의 소망이 그 처지를 뒷받침한다. 헬라어는 “그리스도 예수의 갇힌 자”라는 소유격 표현이고, 개역개정의 “위하여”는 그 관계를 풀어 쓴 말이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서 갇힌 자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어느 쪽이든 바울의 구금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생겼다. 몸은 매여 있어도 그리스도와 맺은 이 관계가 편지 속 부탁의 근거가 된다. 바울은 디모데를 “형제”라 부르고, 빌레몬을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συνεργῷ, 쉬네르고), 곧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부탁을 꺼내기 전에 같은 주님을 섬기며 이미 맺은 관계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다.&lt;/p&gt;&lt;p&gt;2절의 수신자에는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 그리고 “네 집에 있는 교회”가 들어 있다. “함께 병사 된”은 같은 군대에서 복무하는 동료를 가리키는 말로, 복음을 위해 함께 수고해 온 관계를 군사 비유로 표현한다. 이들이 빌레몬과 어떤 가족 관계였는지는 편지가 설명하지 않는다. “네 집”의 “네”는 단수이므로, 1절에서 이름을 부르고 4절 이후 계속 단수로 말을 거는 빌레몬의 집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바울은 한 집안의 사정에 관한 요청을 그 집에 모이는 교회도 듣게 한다. 4절부터는 주로 빌레몬 한 사람에게 말하지만, 3절의 은혜와 평강은 복수인 “너희에게” 주어지고 25절의 “너희 심령”도 복수다. 편지가 복수의 인사로 시작해 복수의 축복으로 끝나므로, 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결정은 그 집의 성도들이 함께 고백하는 은혜와 이어진다. 3절은 그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고 말하여, 이 공동체가 같은 아버지를 부르는 가족임을 첫머리에서 확인한다.&lt;/p&gt;&lt;p&gt;4-5절에서 바울은 들려온 소식을 근거로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빌레몬을 기억하며 감사하는데, 그 이유를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을 “들음이니”라고 밝힌다(5절). 헬라어는 “네 사랑과 믿음”을 먼저 말한 뒤 서로 다른 전치사로 두 대상을 잇는다. “주 예수를 향한”에는 ‘프로스’(πρὸς), “모든 성도에게로”에는 ‘에이스’(εἰς)가 쓰였다. 이 배열은 사랑이 성도를, 믿음이 주 예수를 향하는 교차 배열로 읽을 수 있다. 개역개정은 두 전치사를 모두 “에 대한”으로 옮기고 두 대상을 앞에 모아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라고 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은 주님과 성도 모두에게 관련된다. 바울은 이미 성도들 사이에 알려진 빌레몬의 사랑을 상기시킨다. “모든 성도”라는 말은 뒤에 “사랑 받는 형제”로 불릴 오네시모를 미리 생각하게 한다. 공동체의 일부만 사랑해서는 이 칭찬에 맞게 살 수 없다. 감사와 기도로 시작한 이 칭찬은 뒤의 부탁을 준비한다.&lt;/p&gt;&lt;p&gt;6절은 바울이 빌레몬을 위해 무엇을 기도하는지 밝힌다. “네 믿음의 교제”에서 “교제”(κοινωνία, 코이노니아)는 어떤 것에 함께 참여하고 서로 나누는 관계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빌레몬이 지닌 믿음을 다른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관계, 곧 같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 믿음으로 서로 묶여 있는 관계로 읽을 수 있다. 이 교제를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활동 하나로 좁히면 편지에 거듭 나오는 동반자의 관계를 놓치기 쉽다. Alistair I. Wilson은 이 구절을 전도 활동으로만 읽는 풀이를 경계한다. 개역개정은 “이로써 … 역사하느니라”라고 이미 일어나는 결과처럼 옮겼지만, 헬라어 문장은 4절의 기도가 구하는 내용을 밝힌다. 바울은 성도들이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깨닫는 가운데 믿음의 교제가 실제로 힘 있게 작용하기를 구한다. 헬라어에는 개역개정에 드러나지 않은 “모든”(παντὸς, 판토스)이 있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받은 선한 것 전체를 깨닫고 인정하는 일을 가리킨다. 이 앎과 교제는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곧 그리스도를 향한다. 17절에서 개역개정이 “동역자”로 옮긴 낱말은 κοινωνία와 같은 어근이고, 그 관계가 영접하라는 요청의 근거가 된다. 믿음을 함께 나눈다는 고백은 한 형제를 어떻게 대할지 정하는 자리에서 실제 힘을 드러낸다.&lt;/p&gt;&lt;p&gt;7절에서 바울은 빌레몬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 사랑으로 성도들의 마음이 실제로 쉼을 얻었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옮긴 σπλάγχνα(스플랑크나)는 본래 몸의 내장을 가리키는 말로, 사람의 가장 깊은 애정과 정서를 나타낼 때 쓰인다. “평안함을 얻었으니”(ἀναπέπαυται, 아나페파우타이)는 쉼을 얻었다는 뜻의 완료형으로, 빌레몬이 베푼 쉼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두 낱말은 편지 뒤에서 다시 나온다. 12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기 마음이라고 부르고, 20절에서는 같은 동사의 명령형(ἀνάπαυσόν, 아나파우손)으로 “내 마음이 … 평안하게 하라”고 요청한다. 빌레몬에게 쉼을 얻은 성도들과 바울이 자기 마음처럼 여기는 오네시모가 같은 낱말로 묶인다. 그래서 바울은 이미 여러 성도를 쉬게 한 빌레몬에게 이제 자기 마음도 쉬게 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7절 끝의 “형제여”도 20절에서 반복된다. 바울은 빌레몬을 형제로 부르면서, 그가 곧 오네시모를 형제로 맞아들일 사람임을 일깨운다.&lt;/p&gt;&lt;p&gt;8-9절에서 편지는 감사에서 부탁으로 넘어간다. 8절의 “이러므로”는 7절에서 확인한 빌레몬의 사랑을 부탁의 근거로 삼는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곧 거리낌 없이 말할 자유와 확신을 가지고 “마땅한 일”을 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명령할 권한과 해야 할 일을 알면서도 9절에서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라고 말한다. “간구하노라”(παρακαλῶ, 파라칼로)는 곁에서 권하고 호소하는 말이며, 10절에서 다시 나와 부탁의 대상인 오네시모를 소개한다. “사랑으로써”(διὰ τὴν ἀγάπην, 디아 텐 아가펜)는 직역하면 “사랑 때문에”이므로, 5절과 7절에서 칭찬한 빌레몬의 사랑이 이 호소의 근거가 된다. 바울은 자신을 “나이가 많은” 사람이며 노년에 더해 “지금 또” 갇힌 사람이라고 소개하는데, 여기서 1절의 “갇힌 자”라는 말이 다시 나온다. 이런 자기소개는 듣는 사람에게 도덕적 무게를 지니므로, 부드러운 말투가 부탁의 권위를 없애지는 않는다. 바울은 강제하는 대신 빌레몬과의 신뢰에 호소하여 자발적인 선한 응답을 구한다.&lt;/p&gt;&lt;p&gt;10절에서 바울은 부탁할 사람의 이름을 밝힌다. 헬라어 문장은 “내 자녀”를 먼저 말하고 “갇힌 중에서 낳은”이라는 설명을 덧붙인 뒤, 맨 끝에 “오네시모”라는 이름을 둔다. 빌레몬은 이름보다 그가 바울의 자녀라는 사실을 먼저 듣는다. 개역개정이 “아들”로 옮긴 τέκνου(테크누)는 성별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드러내는 “자녀”라는 말이다. “낳은”은 바울이 갇혀 있는 동안 오네시모가 믿음에 이른 일을 출생에 빗댄 표현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15에서도 복음으로 고린도 성도들을 낳았다고 말한다. 11절의 “무익하였으나”(ἄχρηστον, 아크레스톤)와 “유익하므로”(εὔχρηστον, 유크레스톤)는 “쓸모 있는”이라는 같은 어근에 부정의 접두사와 “좋은”을 뜻하는 접두사를 붙여 전과 지금을 대조한다. 오네시모라는 이름이 “유익한” 또는 “쓸모 있는”이라는 뜻을 지니므로, 이 대조는 그의 이름과 어울리는 말놀이가 된다. NA28은 “이제는” 뒤의 ‘카이’를 [καὶ]처럼 대괄호로 묶어, 이 낱말이 원래 본문에 속하는지 확정하기 어렵다고 표시한다. 이 낱말이 있으면 “이제는 너에게도 나에게도”라는 강조가 생기지만, 없어도 문장의 뜻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헬라어는 “너에게와 나에게”의 순서이고, 개역개정은 “나와 네게”로 순서를 바꾸었다. 전에는 빌레몬에게 무익했던 사람이 이제는 빌레몬과 바울 모두에게 유익하다. 바울은 “나에게”를 더해 오네시모가 자신과도 관계를 맺고 있음을 빌레몬에게 알린다. 뒤이어 그를 형제로 맞아들이라고 요청한다.&lt;/p&gt;&lt;p&gt;12절의 “네게 … 돌려 보내노니”(ἀνέπεμψά σοι, 아네펨프사 소이)는 형태로는 과거 시제다. 편지를 받는 사람이 읽을 때에는 이미 보낸 일이 되므로, 쓰는 사람이 읽는 사람의 시점에 맞추어 쓰는 편지의 과거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개역개정의 현재형 “보내노니”는 편지를 쓰는 바울의 시점에서 옮긴 것이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내 심복”이라고 부른다. 7절에서 “마음”으로 옮긴 낱말이 여기서는 사람을 가리키므로, 오네시모는 바울의 가장 깊은 애정이 머무는 사람이다. 한국어 “심복”은 본래 가슴과 배를 뜻하는 말에서 나와 마음 놓고 믿는 사람을 뜻하지만, 오늘의 독자에게는 은밀한 일을 맡기는 부하라는 인상을 주기 쉽다. 그 인상만으로는 바울의 애정을 충분히 읽기 어렵다. 오네시모를 받는 일은 바울의 마음을 받는 일과 같다. 13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곁에 “머물러 있게 하여” 자신을 섬기게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개역개정의 “하고자 하나”처럼, 바라기는 했지만 실행하지 않은 소원이다. “네 대신”이라는 말로 바울은 오네시모의 섬김을 빌레몬이 자신에게 드릴 섬김을 대신하는 일로 본다. 개역개정의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는 헬라어로 “복음의 결박 가운데서”다. 원문에는 “내”에 해당하는 말이 없고, 바울이 복음 때문에 매여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곁에서 섬기는 관계를 바랐지만, 실제 결정은 빌레몬의 뜻에 맡긴다.&lt;/p&gt;&lt;p&gt;14절은 13절의 소원에 “다만”이라는 제한을 붙인다. “네 승낙”(γνώμης, 그노메스)은 이 문맥에서 상대의 의사와 판단을 가리킨다. 바울은 빌레몬의 판단 없이는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하고 그 목적을 밝힌다. 빌레몬의 선한 일이 “억지”로 되지 않고 “자의로” 되게 하려는 것이다. “억지 같이”의 “같이”(ὡς, 호스)는 실제로 강요하지 않았더라도 강요받은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상황까지 피하려는 뜻을 담는다. “너의 선한 일”의 “선”은 6절의 “선”과 같은 낱말이다. 바울이 6절에서 기도한 선이 빌레몬의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뜻이다. 그 선은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관계에 맞는 응답이며, 그것을 선택할 책임은 빌레몬에게 남는다. 바울은 편지 전체에서 거듭 설득하고, 자신이 바라는 영접과 필요한 비용까지 구체적으로 말한다. 그가 구하는 자발성은 관계와 행위를 분명히 밝히는 설득 안에서 나온다.&lt;/p&gt;&lt;p&gt;15절은 14절에 이유를 덧붙이며, 문장 앞의 “아마”(Τάχα, 타카)는 가능성을 나타낸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잠시 떨어졌던 일이 그를 영원히 얻는 관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해석을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떠나게 된 것은”으로 옮긴 ἐχωρίσθη(에코리스테)는 “떨어지게 되었다”는 수동형이다. 문장은 행위자를 밝히지 않고, 그가 떠난 구체적인 경위나 책임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 수동형을 그 이별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암시로 읽을 수도 있다. 다만 바울의 “아마”는 그 해석이 하나의 가능성임을 나타낸다. “잠시”와 “영원히”의 대조는 헤어져 있던 시간보다 앞으로 맺을 관계로 눈을 돌리게 한다. “두게”로 옮긴 ἀπέχῃς(아페케스)는 무엇을 온전히 돌려받는다는 뜻으로 쓰이는 동사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다시 얻는 일은 잠시 잃었던 사람을 되찾는 일이면서 영원한 관계로 이어진다.&lt;/p&gt;&lt;p&gt;16절은 그 미래를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라고 설명한다. “이 후로는”은 이전과 달라진 관계를 표시하고, “종과 같이”의 “같이”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어떤 사람으로 여기고 대하는지 묻는다. 개역개정의 “대하지 아니하고”는 이 비교의 뜻을 동사로 풀어 쓴 말이다. “종”(δοῦλον, 둘론)은 자유가 제한된 실제 신분을 가리킨다. 이 문장은 법적 해방을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지만, 그를 대하는 기준을 “사랑 받는 형제”로 바꾼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이라는 호칭을 얻었다고 해서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의 힘의 차이가 곧바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바로 그 차이 속에서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대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바울은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 네게랴”라는 논법으로, 오네시모가 바울에게 사랑 받는 형제라면 빌레몬에게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가 “육신과 주 안에서”(ἐν σαρκὶ καὶ ἐν κυρίῳ, 엔 사르키 카이 엔 퀴리오)이며, 개역개정은 여기에 “상관된”을 더해 풀어 썼다. “육신”은 함께 생활하고 일하며 몸으로 겪는 집안의 관계를, “주 안에서”는 같은 주님께 속한 관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랑 받는 형제라는 고백은 일상의 대우에까지 적용된다.&lt;/p&gt;&lt;p&gt;17절의 “그러므로”는 앞에서 펼친 감사와 설명을 실제 요청으로 모은다. 조건절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에서 “동역자”(κοινωνόν, 코이노논)는 6절 κοινωνία와 같은 어근의 낱말로, 무엇인가를 함께 나누는 동반자를 뜻한다. 개역개정은 1절에서 빌레몬을 부른 συνεργῷ와 24절의 συνεργοί(쉬네르고이), 그리고 17절의 κοινωνόν을 모두 “동역자”로 옮겼다. 앞의 두 낱말은 함께 일하는 사람에, 17절의 낱말은 믿음과 삶을 같이 나누는 관계에 초점이 있다.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을 그런 동반자로 여긴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그 관계를 요청의 근거로 삼는다. “영접하기를”(προσλαβοῦ, 프로스라부)은 사람을 자기 곁으로, 자기 집과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라는 명령형이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공동체의 생활 안으로 맞아들이라고 요청한다. “내게 하듯”이라는 말은 그 영접의 기준을 바울 자신에게 둔다. 빌레몬이 존중하는 사도와 낮은 신분의 사람이 같은 환대의 기준으로 대우받는 것이다.&lt;/p&gt;&lt;p&gt;18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만일” 손해를 끼쳤거나 빚진 것이 있다면 자기에게 계산하라고 말한다. Wilson은 이 조건문의 형식 자체가 사건의 사실성을 보증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불의를 하였거나”(ἠδίκησέν σε, 에디케센 세)는 과거에 끼친 손해를, “빚진 것이 있으면”(ὀφείλει, 오페일레이)은 현재형으로 남아 있는 채무를 가리킨다. “내 앞으로 계산하라”(ἐλλόγα, 엘로가)는 장부에 셈을 올린다는 상업 용어다. 바울은 오네시모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셈을 자기 이름으로 옮겨 적으라고 하여, 영접을 가로막을 수 있는 비용 문제를 직접 떠맡는다. 19절에서 그는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라고 써서 그 약속을 직접 보증한다. 이어서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덧붙이는데, 말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빚진 것”(προσοφείλεις, 프로소페일레이스)은 18절의 ὀφείλει와 같은 동사에 접두사가 붙은 말로, 빌레몬이 자기 자신을 바울에게 빚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 표현에서 빌레몬이 바울을 통해 믿음에 이르렀다고 추론할 수 있지만, 편지는 그 경위를 설명하지 않는다. 돈을 계산하는 자리에서 바울은 빌레몬이 받은 은혜의 무게도 함께 떠올리게 한다.&lt;/p&gt;&lt;p&gt;20절의 “오”는 앞의 부탁에 다시 힘을 싣는 말이고, 바울은 7절처럼 빌레몬을 “형제여”라고 부른다. “기쁨을 얻게 하고”로 옮긴 ὀναίμην(오나이멘)은 소원을 나타내는 희구법으로, “내가 너에게서 유익을 얻기를”이라는 뜻이다. 이 동사는 오네시모라는 이름과 같은 어근에서 나와 11절의 말놀이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이어지는 “내 마음이 … 평안하게 하라”는 7절에서 빌레몬이 성도들에게 베푼 쉼을 이제 바울에게도 베풀라는 요청이다. 12절에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자기 마음이라고 불렀으므로, 바울의 마음을 쉬게 하는 일은 오네시모를 맞아들이는 일과 떨어질 수 없다. 21절에서 바울은 빌레몬의 “순종”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9절에서 명령 대신 간구를 택한 바울이 여기서 순종이라는 말을 쓰므로, 빌레몬이 따를 대상은 바울 개인의 권위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땅한 일로 읽을 수 있다. 바울은 빌레몬이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 안다고 덧붙이지만, 그 “더”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는다. 22절에서 바울은 단수 명령형으로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고 말한다. “숙소”(ξενίαν, 크세니안)는 손님을 맞는 환대와 그 거처를 뜻한다. 이어지는 “너희 기도”와 “너희에게”는 다시 복수로 바뀌어 공동체를 향한다. “나아갈 수 있기를”(χαρισθήσομαι, 카리스테소마이)은 “선물로 주어지리라”는 뜻의 미래 수동형이며, 3절과 25절의 “은혜”(χάρις, 카리스)와 같은 어근이다. 바울은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선물처럼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란다.&lt;/p&gt;&lt;p&gt;23-24절의 문안은 바울 곁의 사람들을 빌레몬의 집과 연결한다. 에바브라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ὁ συναιχμάλωτός μου, 호 쉬나이크말로토스 무)로 불린다. 이 낱말은 본래 전쟁 포로를 가리키는 말에 “함께”를 뜻하는 접두사를 붙인 것으로, 2절의 “함께 병사 된”과 더불어 군사 비유를 이룬다. 1절과 9절의 “갇힌 자”와는 다른 낱말이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매인 처지를 나눈다는 뜻은 이어진다. 에바브라가 문자 그대로 바울과 함께 구금되었는지, 그리스도를 섬기다 같은 처지에 놓인 동료를 비유로 부른 것인지는 이 절만으로 확정하기 어렵다.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는 “나의 동역자”(οἱ συνεργοί μου, 호이 쉬네르고이 무)로 소개된다. 1절에서 빌레몬을 부른 말의 복수형이므로, 빌레몬은 바울 곁에서 일하는 동역자들 가운데 자신도 들어 있음을 듣는다. 골로새서 4:10-14의 문안에도 같은 이름들이 나오므로, 두 편지는 같은 동역자들의 관계 안에서 함께 읽을 수 있다. 25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기를 비는 축도다. 개역개정은 “우리 주”라고 옮겼지만, NA28 본문에는 “우리”에 해당하는 낱말이 없다. “너희”(ὑμῶν, 휘몬)는 복수이므로, 3절처럼 마지막 축도도 공동체 전체를 향한다. 바울은 편지의 처음과 끝에서 공동체 전체에 은혜를 빈다. 오네시모를 맞아들이라는 부탁은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자기 집과 관계에서 실행할 응답이다.&lt;/p&gt;&lt;h2&gt;성경신학적 통찰&lt;/h2&gt;&lt;p&gt;빌레몬서의 “형제”라는 호칭은 누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며 그 소속이 생활을 어떻게 바꾸는지 다루는 성경 전체의 흐름과 이어진다. 편지에는 “사랑을 받는 자”, “동역자”, “자매”, “아들”, “형제” 같은 관계의 말이 이어지고, 17절에서는 믿음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의 관계가 요청의 근거가 된다. 바울은 이 요청을 빌레몬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도 들려준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는 공동체라면, 같은 주님을 믿게 된 오네시모를 대하는 일도 그들의 고백에 속한다. 성경에서 누군가를 형제라 부르는 일은 그가 어떤 보호와 환대를 받을지에 대한 책임으로 이어진다. 구약의 율법과 예언은 이 책임을 종의 처지에 놓인 동족에게 적용한다.&lt;/p&gt;&lt;p&gt;레위기 25:39-43은 가난 때문에 자신을 팔게 된 이스라엘 형제를 종처럼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동거인처럼 대하라고 명한다. 그는 희년에 자기 가족과 조상의 기업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42절). 하나님이 구원하신 사람을 다른 이스라엘 사람이 자기 뜻대로 영구히 소유할 수 없으므로, 가난해 남에게 의존하게 된 상황에서도 형제라는 관계가 경제적 권한의 한계를 정한다. 43절은 그를 엄하게 부리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명하여, 권한을 가진 사람의 태도까지 하나님 앞에 세운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사랑 받는 형제”라고 부를 때에도, 그를 대할 권한을 가진 빌레몬은 오네시모가 먼저 주님께 속한 사람임을 기억해야 한다. 오네시모는 더 이상 빌레몬이 자기 이익으로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lt;/p&gt;&lt;p&gt;같은 장은 주위 이방 나라에서 사들인 종을 이스라엘 동족과 다르게 다루며, 그들을 자손에게 기업으로 물려줄 수 있다고 규정한다(25:44-46). 이 구별은 그 법이 고대 이스라엘의 언약 공동체와 당시의 사회 질서 안에서 주어졌음을 보여 준다. 레위기에서 엄하게 부리지 말아야 할 “형제”는 출애굽으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빌레몬서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맺어진 관계가 형제의 범위를 정한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가문이나 출신, 법적 지위를 형제 호칭의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고, 갇힌 중에 맺은 믿음의 관계를 근거로 그를 맞아들이라고 요청한다. 빌레몬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오네시모를 가혹하게 대하지 말아야 한다.&lt;/p&gt;&lt;p&gt;신명기 15:12-18은 히브리 남종이나 여종이 여섯 해를 섬긴 뒤 일곱째 해에 놓아줄 때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양 무리와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에서 얻은 것을 넉넉하게 주라고 명한다. 떠날 수 있다는 허락만으로 그 사람의 이후 생계가 마련되지는 않는다. 신명기는 주인에게 하나님께 받은 복을 나누어 풀려나는 사람이 새 삶을 시작하도록 도우라고 명한다. 15절은 그 이유로 이스라엘도 애굽 땅에서 종이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받은 구원의 기억이 다른 사람의 짐을 덜어 주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빌레몬서에서도 바울의 편지는 오네시모를 실제로 영접하는 데 드는 비용과 그를 대하는 방식까지 다룬다.&lt;/p&gt;&lt;p&gt;신명기는 종을 놓아주기 아까워하는 주인의 마음도 다룬다. 18절은 그 종이 여섯 해 동안 품꾼의 삯의 배나 되는 섬김을 했으니 놓아주는 일을 어렵게 여기지 말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주인의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 말씀은 소유자의 손실 계산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그가 이미 얻은 유익과 앞으로 받을 복을 기억하게 한다. 빌레몬에게도 바울의 요청은 자기 권한과 이익을 다시 따져 보아야 하는 부담이다. 바울은 그 부담을 모른 체하지 않고, 손해나 빚이 있다면 자신에게 계산하라고 말한다(빌레몬서 18절).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사회와 상황에 속하지만, 받은 은혜 때문에 이웃의 삶을 위해 재물을 어떻게 쓸지 묻는다는 점에서 이어진다. 선한 일을 억지가 아닌 자의로 하라는 빌레몬서 14절의 권면도 이 기억과 어울린다.&lt;/p&gt;&lt;p&gt;신명기 23:15-16(BHS 23:16-17)은 주인에게서 도망하여 온 종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 그가 원하는 곳에서 함께 살게 하며 압제하지 말라고 명한다. 힘을 잃고 피신한 사람의 안전을 주인의 소유 주장보다 앞세우는 말씀이다. 이 본문을 기억하면, 오네시모를 돌려보낸다는 빌레몬서 12절은 쉽게 넘길 수 없는 문장이 된다. 편지는 오네시모가 도망한 종이었는지 밝히지 않지만, 그를 보내는 일은 형제로 대하라는 16절과 함께 들어야 한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보내면서 자신을 받아들이듯 그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오네시모를 맞을 빌레몬과 그 집의 교회는 그를 종으로만 보지 않고 형제로 대해야 한다.&lt;/p&gt;&lt;p&gt;예레미야 34:8-22에서 시드기야 왕 때의 예루살렘 백성은 히브리 남녀 종들을 놓아주겠다고 언약하고도 뒤에 다시 그들을 데려다가 복종시킨다. 하나님은 그 행동을 자신의 이름을 더럽힌 일로 책망하신다(16절).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하나님 앞에 맺은 약속을, 사람의 자유를 다시 빼앗는 행동으로 뒤집은 것이다. 예언은 출애굽 때 맺은 언약과, 정해진 해가 되면 팔려 온 히브리 형제를 놓아주라는 명령을 상기시킨다(13-14절). 예레미야의 경고는 좋은 선언을 해 놓고도 생활 속에서 예전의 권한을 그대로 행사하여 그 선언을 뒤집을 수 있음을 드러낸다. 빌레몬서에서도 교회가 함께 듣는 은혜와 사랑의 고백은 한 형제를 대하는 행동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편지가 공동체 앞에서 읽히므로 빌레몬의 선택은 그 공동체의 믿음과 연결된다.&lt;/p&gt;&lt;p&gt;누가복음 4:16-21에서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사명을 말씀하신 뒤, 이 글이 오늘 그들의 귀에 응하였다고 선언하신다. 빌레몬서의 상황은 나사렛 회당의 장면과 다르지만, 두 본문 모두에서 주님의 은혜는 사람이 겪는 억압과 수치, 몸의 삶에 관련된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로서 주 안에서 형제가 된 오네시모를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부탁한다. 이 편지에서 주님께 속했다는 고백은 힘없는 사람이 어떤 대우를 받을지와 함께 말해진다. 믿음을 개인의 내면에만 가두면 편지가 내리는 영접의 명령을 설명하기 어렵다.&lt;/p&gt;&lt;p&gt;갈라디아서 3:26-29는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말한다. 그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가 다 하나다. 이 선언은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을 이어받을 상속자인가에 관한 논증의 결론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에 참여하는 자격을 사회적 신분이 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 원칙을 선언하고, 빌레몬서에서는 한 사람의 구체적인 처지에 적용한다. 빌레몬서의 “사랑 받는 형제”라는 말은 오네시모가 그 새 소속에 들어 있음을 밝힌다. 오네시모를 귀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는 바울과 빌레몬이 믿는 주님께 그도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11절에서 유익함의 말놀이를 한 뒤 16절에서 형제라는 요청을 부탁의 중심에 둔다.&lt;/p&gt;&lt;p&gt;골로새서 3:9-15는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하심을 입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한다. 11절은 그 안에서 헬라인과 유대인, 할례파와 무할례파, 야만인과 스구디아인, 종과 자유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그리스도가 만유이시며 만유 안에 계신다고 고백한다. 이어지는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는 삶은 새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를 설명한다. 빌레몬서에서 호칭이 바뀌어야 한다는 요청도 이처럼 실제 행동의 변화와 연결된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 되신다는 고백은 상대의 과거와 지위를 기억하는 방식을 새롭게 하고, 형제의 유익을 자기 불편보다 앞세워 그를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하게 한다.&lt;/p&gt;&lt;p&gt;골로새서 3:22-25는 종들에게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육신의 상전에게 순종하라고 권하면서,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불의의 보응을 받으며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고 덧붙인다(25절). 신앙의 고백은 사회적 권한을 가진 사람에게 아무 책임도 묻지 않는 방패가 될 수 없다. 빌레몬서의 구체적인 요청은 오네시모를 대우할 권한을 가진 빌레몬을 향하며, 그에게 오네시모를 영접하고 사랑 받는 형제로 대하라고 요구한다. 주님께 충성한다는 말은 자기가 남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lt;/p&gt;&lt;p&gt;에베소서 2:11-22는 전에 멀리 있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둘로 하나를 만드시고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으며,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간다. 그래서 이방인 신자들도 더 이상 외인과 나그네가 아니고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권속이다(19절). 에베소서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하나님의 가족이 된 일을 선포한다면, 빌레몬서는 그 가족에 속한 한 형제를 실제로 받아들이라고 요청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평은 이처럼 관계와 환대의 요구로 이어진다. 같은 아버지께 나아가는 사람은 믿음의 교제를 자기 식탁과 생활에서 형제를 맞아들이는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lt;/p&gt;&lt;p&gt;갈라디아서 4:1-7은 상속자도 어릴 때에는 종과 다름이 없다는 비유로 시작하여,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셔서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녀가 된 이들의 마음에 그 아들의 영을 보내셔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 바울은 믿는 사람이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아들이며,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상속자라고 결론짓는다(7절). 하나님이 구원사에서 이루신 변화를 종에서 아들로 바뀐 신분으로 표현한 것이다. 빌레몬서 16절은 오네시모를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대하라고 요청한다. 두 본문의 상황과 표현은 같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새 신분이 사람 사이의 대우를 바꾸어야 한다는 점에서 맞닿는다. 빌레몬서 3절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인사도 이 소속을 드러내며,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는 빌레몬은 자신도 은혜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된 자녀임을 기억하게 된다.&lt;/p&gt;&lt;p&gt;율법은 하나님께서 먼저 베푸신 구원을 근거로 가난한 형제를 돌보라고 명했고, 예언자는 그 명령을 뒤집은 백성을 책망했으며, 신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고 선포한다. 받은 은혜는 이웃을 도울 책임을 낳고, 그 책임은 재물과 권한을 쓰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데 생길 부담을 빌레몬에게만 넘기지 않고 자신도 감당하겠다고 하면서, 빌레몬 역시 그 자신을 바울에게 빚졌음을 상기시킨다. 서로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형제라고 부르는 이가 실제로 받아들여지고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을 자기 문제로 삼는다. 그 중심에는 자기를 내어 주어 사람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신 그리스도가 계신다.&lt;/p&gt;&lt;h2&gt;기독론적 해석&lt;/h2&gt;&lt;p&gt;빌레몬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이고, 빌레몬은 주 예수를 향한 믿음으로 칭찬받으며, 오네시모는 “주 안에서” 사랑 받는 형제가 된다. 바울이 명할 수 있는 담대함도 “그리스도 안에서” 나오고(8절), 편지의 처음과 끝에서 비는 은혜도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다. 편지의 실제 요청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맺어 주신 소속에 맞게 사람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어떻게 대할지 결정할 권한이 있어도, 그 사람이 가장 깊이 누구에게 속하는지 정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빌레몬과 바울과 오네시모 사이의 관계도 각자가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에 비추어 다시 보아야 한다.&lt;/p&gt;&lt;p&gt;갈라디아서 4:4-5는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이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 아래에 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과 율법 아래의 조건을 직접 입으신 목적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고 그들이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는 데 있었다. 아들이 사람의 자리로 오셨기에 사람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들어갈 길이 열렸고, 빌레몬서 첫머리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는 고백도 이 선물에 속한다. 오네시모를 형제로 부르는 일은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받아 주신 사람을 같은 가족으로 대하는 믿음의 응답이다. 바울 자신도 그 은혜를 받았기에 갇힌 중에 오네시모를 믿음 안에서 낳은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lt;/p&gt;&lt;p&gt;빌립보서 2:5-11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한다. 빌립보서의 “종”과 빌레몬서 16절의 “종”은 같은 헬라어 낱말이다. 이 낮아지심은 권한을 자기 유익을 위해 붙드는 태도와 반대되는 길이다. 오네시모는 종의 처지에 있던 사람이었고, 그를 구원하신 주님은 스스로 종의 형체를 입고 낮아지셔서 사람을 살리신 아들이시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믿는 사람의 권한은 다른 사람의 삶을 세우는 데 쓰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무릎이 그 이름 앞에 꿇게 하셨다는 9-11절은, 그 높아지심이 자기를 내어 주는 순종을 거쳐 왔음을 보여 준다. 빌레몬은 “종 이상으로” 형제를 얻으라는 부탁을 들으면서, 자신을 위해 낮아지신 주님이 어떤 길로 영광을 받으셨는지도 기억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낮은 처지를 이용해 존중받으려는 삶은 그 주님의 길과 어울리지 않는다.&lt;/p&gt;&lt;p&gt;마가복음 10:42-45에서 예수는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백성을 임의로 주관하고 고관들이 권세를 부리는 방식을 지적하신다. 그리고 제자들 가운데 크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인자가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섬기려 하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기 때문이다. 그분의 섬김은 다른 사람이 생명을 얻도록 자신을 내어 주는 행동이다. 빌레몬서에서 부탁하는 바울도 그리스도를 위해 갇힌 가운데 자기 부담을 감수하고, 부탁을 받는 빌레몬 역시 사랑 받는 형제를 섬기면서 주님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주님께 충성한다는 고백은 사람 위에 설 자격을 얻는 말로 쓰일 수 없으며, 그분께 받은 권한으로 누구의 유익을 구하는지를 드러낸다.&lt;/p&gt;&lt;p&gt;18-19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손해를 끼쳤거나 빚진 것이 있다면 “내 앞으로 계산하라”고 하고, 친필로 갚겠다고 약속한다. 오네시모를 맞아들이는 데 생길 수 있는 실제 비용을 자신이 부담하겠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죄인을 하나님께 회복시키는 구원의 사역이며, 다른 누구도 그 일을 반복하거나 보충할 수 없다. 바울이 맡는 사람 사이의 빚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는 범위가 다르다. 바울의 부담은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관계를 위해 자기 것을 내어놓는 응답이다. “내 앞으로 계산하라”는 문장을 읽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먼저 자신을 주신 주님을 기억할 수 있다.&lt;/p&gt;&lt;p&gt;고린도후서 5:18-21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셨고(19절),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셔서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21절). 고린도후서는 죄를 사람에게 “돌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빌레몬서는 오네시모의 빚을 바울 “앞으로 계산하라”고 말한다. 두 본문의 셈은 무게와 범위가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셈을 처리하신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이제 다른 사람의 셈을 대신 지려 한다는 점에서 두 본문은 이어진다. 같은 장 16절은 이제부터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육신을 따라”는 세상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을 가리키며, 함께 생활하는 집안의 관계를 가리키는 빌레몬서 16절의 “육신”과는 쓰임이 다르다. 빌레몬은 그 일상의 관계 안에서 오네시모를 예전의 신분과 쓸모가 아닌 그리스도 안의 기준으로 알아야 한다.&lt;/p&gt;&lt;p&gt;로마서 15:7은 그리스도께서 받아 주신 것처럼 서로 받으라고 권한다. 개역개정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와 “너희도 서로 받으라”에 쓰인 “받아”와 “받으라”는 빌레몬서 17절의 “영접하기를”과 같은 헬라어 동사를 옮긴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받아 주신 대상은 NA28에서 “너희”이고, 개역개정은 이를 “우리”로 옮겼다. 로마서 15장에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사람에게 약한 사람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고 하며,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다고 말한다(1-3절). 빌레몬서에서는 바울을 동반자로 여기는 사람이 오네시모를 어떻게 받을지 묻는다. 두 상황 모두에서 그리스도의 영접은 사람을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새 기준이 된다. 믿는 사람은 상대의 지위가 자기와 같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형제로 받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이미 받아 주셨다는 사실에 응답하여 그가 머물 실제 자리를 마련한다.&lt;/p&gt;&lt;p&gt;로마서 14:7-12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으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목적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주가 되시려는 것이었다(9절). 그러므로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기는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해야 한다. 빌레몬은 오네시모에 대해 현실의 권한을 가진 사람이지만, 주 안에서 그를 형제로 얻으라는 요청을 듣는다. 부활하신 주님의 다스림은 낮은 신분의 사람에게 소망을 주고, 힘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힘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설명할 책임을 지운다. 빌레몬과 오네시모 모두 자기 일을 주님 앞에 설명해야 한다.&lt;/p&gt;&lt;p&gt;골로새서 4:1은 상전들에게 종을 의와 공평으로 대하라고 명하며, 그들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라고 말한다. 같은 장 9절은 오네시모를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이자 골로새 성도들에게서 온 사람으로 소개한다. 골로새서가 오네시모에게 주는 이 호칭은 빌레몬서가 요청하는 새 대우와 어울린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누구에게 순종하며 어떤 관계 안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경제적 지위만으로 정할 수 없다. 빌레몬이 주 예수와 모든 성도를 향한 자기 믿음과 사랑에 맞게 사는 길은, 바울이 돌려보낸 형제가 그 믿음에 어울리는 대우를 받게 하는 데 있다.&lt;/p&gt;&lt;p&gt;히브리서 9:24-28은 그리스도께서 손으로 만든 성소가 아니라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셔서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를 단번에 드려 죄를 없이 하셨고,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 구원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28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계시므로, 그분께 나아가는 사람은 자기 죄와 연약함을 인정하면서도 은혜를 구할 수 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권하고 오네시모를 돌보는 일도 이 은혜에 기대어 있다.&lt;/p&gt;&lt;p&gt;바울은 성도들의 기도로 그들에게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말한다(22절).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갇힌 사람과 자유로운 사람은 서로를 돌본다. 빌레몬이 바울을 위해 숙소를 준비하고 그를 기도 가운데 기억한다면, 바울이 자기 마음처럼 여기는 오네시모도 그 환대 안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7절과 20절의 표현처럼 다른 사람의 마음에 쉼을 주는 행위로 나타난다.&lt;/p&gt;&lt;p&gt;요한일서 3:16-18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이어 세상의 재물을 가진 사람이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 안에 거하겠느냐고 묻고,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고 권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고백이 실제로 도울 수 있는 사람의 선택을 바꾼다는 논증이다. 빌레몬서에서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사랑 받는 형제로 부른 뒤 그를 받아들이는 데 생길 부담을 다룬다. 바울은 그 책임에 자신을 포함하며, 상대에게 관계 회복을 요구하면서 자기는 아무 부담도 지지 않는 자리로 물러서지 않는다.&lt;/p&gt;&lt;p&gt;편지 마지막에 구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 관계를 계속 지탱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시고 종의 자리까지 낮아지신 일, 십자가와 부활, 승천 후의 다스림과 다시 오실 약속이 이 모든 사람의 삶의 근거다. 그분이 먼저 받아 주셨기에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분이 자신을 주셨기에 남의 회복을 위해 부담을 나눌 수 있다. 바울은 사랑 받는 형제로 맞아들이라는 구체적인 부탁을 이 은혜에 맡긴다.&lt;/p&gt;&lt;h2&gt;현대적 적용&lt;/h2&gt;&lt;p&gt;교회는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르면서도 직책과 재산, 나이와 사회적 영향력에 따라 말할 기회와 존중의 정도를 달리하기 쉽다. 빌레몬서는 종의 처지에 있던 오네시모를 사랑 받는 형제로 맞아들이라고 요청하며, 그를 형제라 부르는 사람이 실제로도 그에 맞게 대하도록 요구한다. 사람의 쓸모와 성과부터 묻는 시선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받은 가족의 관계를 가린다.&lt;/p&gt;&lt;p&gt;바울은 무익했던 오네시모가 이제 유익하다고 말하지만, 부탁의 중심에는 그를 “사랑 받는 형제”로 맞으라는 요청을 둔다(11, 16절).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를 교회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lt;/p&gt;&lt;p&gt;편지가 다루는 고대의 종 신분과 오늘의 노동 관계는 서로 다른 사회적 조건에 속한다. 그래도 형제자매라는 이유를 들어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약속한 보수와 휴식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면, 사랑의 언어가 책임을 흐린다. 함께 주님을 믿는 관계는 오히려 상대를 존중하며 약속을 성실하게 지킬 이유가 된다.&lt;/p&gt;&lt;p&gt;빌레몬서는 오네시모가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 밝히지 않는다. 그 빈자리를 범죄의 이야기로 채워 넣으면, 불확실한 과거가 한 사람의 삶 전체를 규정하게 된다. 공동체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 돌아올 때에도 소문이나 예전의 인상만으로 그를 계속 판단해서는 안 된다. 실제 잘못은 분명히 다루되, 확인되지 않은 동기와 행위를 덧붙이지 않는다.&lt;/p&gt;&lt;p&gt;힘의 차이가 큰 관계에서는 동의한다는 말의 무게도 다르다. 바울은 빌레몬의 자발적인 선한 응답을 구했지만, 사도의 부탁과 교회 앞에서 읽히는 편지, 예고된 방문은 빌레몬에게 압력이 될 수 있었다. 오늘 지도자가 사랑으로 권한다고 할 때도 상대는 거절하기 어렵다고 느낄 수 있다. 부드러운 표현을 썼다는 사실만으로 상대가 자유롭게 응답했다고 여길 수는 없다. 권하는 사람은 상대가 거절하거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할 자유를 실제로 존중해야 한다.&lt;/p&gt;&lt;p&gt;빌레몬서에서 요구를 받는 사람은 오네시모를 형제로 맞아들일 권한과 책임을 가진 빌레몬이다. 교회가 피해를 겪은 사람에게 먼저 돌아가 참으라고만 말하면, 힘을 가진 사람에게 요구되어야 할 책임은 사라지고 약한 사람의 안전은 뒤로 밀린다. 편지가 빌레몬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도 읽혔으므로, 그 변화의 책임은 공동체도 함께 진다. 함께 예배하고 기도한다는 고백은 상대의 몸과 생활이 안전하게 존중받도록 행동하는 데서 드러나야 한다.&lt;/p&gt;&lt;p&gt;바울은 오네시모가 빚진 것이 있다면 자기에게 계산하라고 하여, 화해에 드는 비용을 직접 맡았다. 화해를 돕는 사람도 당사자들에게 관계 회복을 요구하면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고와 비용을 맡을 수 있다. 손해나 빚이 실제로 있다면 좋은 감정이 생겼다는 이유로 덮을 수 없다. 바울은 형제로 영접하라는 부탁을 하면서 실제 손해를 갚을 책임도 맡겠다고 약속했다.&lt;/p&gt;&lt;p&gt;바울은 빌레몬 자신도 자기에게 빚졌다고 하며 부탁의 무게를 더한다(19절). 오늘 지도자가 이 구절을 끌어다 쓸 때에는 자신의 위치와 영향력을 함께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도왔으니 내 말을 따라야 한다는 요구가 반복되면, 감사는 자유로운 응답의 성격을 잃고 갚을 수 없는 부담으로 변한다. 지도자는 자신을 통해 좋은 일을 경험한 성도가 자기에게 매이지 않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책임 안에서 살아가도록 섬겨야 한다.&lt;/p&gt;&lt;h2&gt;출처&lt;/h2&gt;&lt;ul&gt;&lt;li&gt;&lt;a href="https://www.thegospelcoalition.org/commentary/philemon/"&gt;Alistair I. Wilson, “Philemon”, The Gospel Coalition Bible Commentary, ‘Thanksgiving and Prayer’, ‘Paul’s Narrative of the Circumstances’, ‘Paul’s Requests’.&lt;/a&gt;&lt;/li&gt;&lt;/ul&gt;</content:encoded></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