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이사야 65장은 63:7-64:12의 탄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백성은 주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하나님이 잠잠하시다고 호소했다. BHS는 개역개정 64:1을 63:19 후반에 두므로 개역개정 64:7, 12는 BHS 64:6, 11에 해당한다. 65장부터 절 번호가 다시 같다. 1절의 “물음을 받았으며”, “찾아냄이 되었으며”는 수동형이다. NET는 하나님이 구하지 않던 이들에게 자신을 구하고 찾을 수 있게 하셨다는 뜻으로 풀이한다.2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핸드북도 하나님이 언제든 찾음을 받으실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읽는다.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일은 그분께 헌신하는 삶을 뜻한다(51:1; 58:2). 그들은 구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내가 여기 있노라”(הִנֵּנִי, 힌네니)를 두 번 말씀하셨다.1 58:9에서 부르짖는 자에게 하실 응답을, 여기서는 부르지 않는 자에게 먼저 하신다.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는 흔히 이방인을 뜻하는 “나라”라는 말 때문에 이방으로 읽을 수 있지만, UBS는 문맥상 패역한 유다 백성을 가리킨다고 본다.1 BHS의 “부르다”(קֹרָא, 코라)는 수동 푸알 모음이므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않은 나라”로도 옮길 수 있다.3 개역개정과 UBS의 능동 번역은 64:7의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고백을 되받고, 수동 번역은 63:19의 주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한다는 탄식과 통한다. 탄원의 말을 돌려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점은 같다.

하나님은 “종일 손을 펴서” 패역한 백성을 부르셨다(2절). 사람이 하나님께 간구할 때 쓰는 몸짓이 여기서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몸짓이 된다(왕상 8:22 비교). 그러나 그들은 자기 생각을 따라 좋지 않은 길을 걷는다. 55:7의 길과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라는 부름에 응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64:8) 내미신 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3-4절은 그 거역을 구체적으로 고발한다. 동산에서 제사하고 벽돌 위에서 분향하며, 무덤과 은밀한 곳에서 밤을 지낸다. NET는 무덤의 행위를 지하의 신이나 죽은 영을 섬기는 제의로 추정하며, “은밀한 처소”를 동굴이나 밤새 경계하는 행위로 읽는 견해, 자음을 고쳐 바위 절벽으로 읽는 제안도 소개한다. 돼지고기와 가증한 음식도 금지된 제의의 일부다. “국”에 대해 NET는 본문의 적힌 형태(וּפְרַק, 우페라크)가 조각을 뜻하고 여백의 읽기인 케레가 국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개역개정은 케레를 따른다.2 이 행위들은 57:5-7의 우상 제의를 잇는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사람을 밀어내며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라”고 한다(5절). 해당 표현(כִּי קְדַשְׁתִּיךָ, 키 케다슈티카)의 접미사를 개역개정은 비교로 풀었다. UBS는 자신의 거룩함이 다가오는 이에게 옮아 위험하게 한다는 읽기도 소개한다.5 금지된 제의에 참여하면서 특별한 거룩을 내세우는 이들은 하나님께 코를 자극하는 연기와 같다. 하나님이 “종일” 손을 펴는 동안 이들도 “종일” 그분의 진노를 일으킨다.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לֹא אֶחֱשֶׂה, 로 에헤세)는 64:12의 침묵에 대한 질문에 답한다(6절). BHS 65:6은 신 점, 64:11은 쉰 점을 쓰지만 같은 “잠잠하다” 동사다.4 하나님 앞에 기록된 죄에 반드시 보응하신다. 옷자락의 “품”에 갚는 그림은 그들의 행위에 맞는 몫을 돌려준다는 뜻이다. 7절의 조상과 자손의 죄는 함께 헤아려진다. “먼저”는 “이전의”로 읽어 조상 때부터의 행위를 가리킬 수도 있다.2 침묵을 깨신 하나님은 공동체 내부의 우상 숭배부터 심판하신다.

8절에서 포도송이에 즙이 있으면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비유로 보존을 약속하신다. “상하지 말라”와 “다 멸하지 아니하고”는 같은 동사다. “주의 종들을 위하사” 돌아오시라는 탄원(63:17)에 하나님은 “내 종들을 위하여” 남겨 두겠다고 응답하신다. 이들은 백성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다.2

하나님은 야곱에게 후손을 내고 그 종들에게 산들을 기업으로 주신다(9절). 이는 의뢰하는 자가 땅과 거룩한 산을 얻는다는 57:13의 약속이다. 10절의 사론은 서쪽 연안 평야, 아골 골짜기는 동쪽 여리고 근처로 온 땅의 회복을 나타낸다. 아간의 심판이 기억된 아골, 곧 괴로움의 골짜기도 목축지가 된다.2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찾다”는 1절에서 “물음을 받았으며”로 옮긴 동사와 같다. 먼저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께 이들은 응답했다.

반대편에는 여호와와 성산을 버리고 갓과 므니에게 상과 술을 바치는 자들이 있다(11절). NET는 두 신을 행운과 운명으로 옮긴다. 12절의 “칼에 붙일” 동사는 므니와 비슷한 소리여서, 운명을 보장받으려던 자들의 운명을 실제로 정하시는 분이 여호와라는 역설을 이룬다.2 하나님이 부르고 말씀하셔도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택한” 종들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택한” 자들이 같은 어근으로 대조된다.

13-14절은 종들과 거역한 자들의 결말을 네 번 대비한다. 종들은 먹고 마시고 기뻐 노래하지만 대적은 주리고 목마르고 수치를 당하며 통곡한다. 신들에게 차린 상이 그들을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 55:2의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한 수고가 생각나는 장면이다. 이는 유다와 이방 전체의 대립이 아니라 같은 공동체 안에서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과 거절한 사람의 갈림이다.

15절의 “저줏거리”는 본래 맹세라는 말로, 저주할 때 패역한 자의 이름을 넣어 “저들처럼 되라”고 말하는 뜻이다. NET는 예레미야 29:22를 예로 든다.2 “너희”에서 단수 “너”로 바뀌는 말도 그 저주 문구의 형태일 수 있다. 개역개정은 원문의 “주 여호와께서 너를 죽이시리라”, “그의 종들”을 말씀의 화자에 맞추어 “내가 너를 죽이고”, “내 종들”로 옮긴다. 종들에게는 62:2를 잇는 다른 이름이 주어진다.

종들은 “진리의 하나님”으로 복을 빌고 맹세한다(16절). “아멘의 하나님”(בֵּאלֹהֵי אָמֵן, 벨로헤 아멘)은 말씀을 확실히 이루시는 신실한 하나님이다.2 48:1의 거짓된 맹세와 대조된다. 성산을 잊은 자들과 달리 종들의 환난은 잊힌다. 64:7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이 숨겨졌으나 이제는 환난이 그 눈앞에서 숨겨진다. 이 회복은 17절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어진다.

성경신학적 통찰

63:7-64:12의 탄원에 하나님은 백성이 사용한 말로 응답하신다.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고백에는 65:1, 침묵에 대한 질문에는 6절, 종들을 위해 돌아오시라는 간구에는 8절, 얼굴을 숨기셨다는 탄식에는 16절이 답한다. 그러나 탄원자들의 “우리”를 한꺼번에 구원하겠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 종들과 버린 자들을 구별하신다.

이사야 1장의 거역한 자녀와 남겨 두신 생존자, 여호와를 버린 자와 동산의 제의(1:2, 9, 27-29)가 65장에서 다시 나타난다. 신명기 32:15-21도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에게 제사한 여수룬을 고발하며 백성이 아닌 자로 시기하게 하겠다고 한다. 바울은 로마서 10:19-21에서 이 노래와 이사야 65:1-2를 이어 인용한다.

엘리야가 홀로 남았다고 여길 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기셨다(왕상 19:18). 말라기 3:14-18도 섬김을 헛되게 여기는 자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구별하고 그들을 기억하는 책을 말한다. 이사야 65:6에는 죄의 기록이, 말라기에는 경외하는 자의 기록이 있다. 하나님은 집단의 이름 아래 개인의 응답을 묻지 않고 지나가지 않으신다.

이사야 50:2와 59:1-2은 구원이 더딘 원인이 하나님의 무능이 아닌 백성의 죄에 있다고 밝힌다. 58:9에서는 부르짖음에 “내가 여기 있다”고 답하시고, 65:24에서는 부르기 전에도 응답하신다. 불러도 듣지 않았다는 65:12의 고발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끊어진 응답을 드러낸다. 이어질 새 창조에서는 그 대화가 온전히 회복된다.

52:13-53:12의 종은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고 씨를 본다. 그 뒤 54:17의 “종들”이 기업을 받으며, 65:8-9도 종들과 씨를 말한다. 이들은 고난받는 종의 열매로 읽을 수 있다. 이사야 56:6은 이방인도 하나님께 연합하여 종이 된다고 한다. 6:13과 10:20-22의 남은 자, 59:20의 죄과를 떠나는 야곱의 자손도 이 보존의 배경이다.

아골은 아간의 죄와 심판이 기억되는 곳이다(수 7:26). 호세아 2:15은 이를 소망의 문으로 바꾸며 백성 아니었던 자를 자기 백성으로 부르겠다고 한다(2:23). 이사야 65:10은 그 골짜기를 하나님을 찾은 백성의 평안한 목축지로 그린다. 심판의 땅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아브라함의 창대해질 이름과 모든 족속의 복(창 12:2-3), 진실하게 여호와로 맹세할 때 나라들이 복을 빈다는 예레미야 4:2은 65:15-16의 이름과 복을 이해할 배경이다. 반대로 거짓 선지자의 이름은 저주의 예가 된다(렘 29:22). 66:2-5, 14, 17은 말씀에 떠는 자들과 동산의 제의를 행하는 자들을 다시 구별하고, 66:18-20은 열방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성산으로 모일 것을 약속한다.

기독론적 해석

종들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내가 여기 있노라” 하셨다. 그들의 의로움은 스스로 마련한 자격보다 많은 이의 죄를 담당하고 의롭게 하는 종의 사역에 근거한다(53:11-12). 신약은 그 종을 예수로 증언한다(행 8:32-35; 벧전 2:22-25). 임마누엘과 육신이 된 말씀(마 1:23; 요 1:14)은 하나님이 사람 가운데 오셨음을 밝힌다. 예수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고 삭개오를 먼저 이름으로 부르셨다(눅 19:5, 10).

종일 손을 펴신 하나님은 자녀들을 모으려 했으나 그들이 원하지 않았다며 우시는 예수의 모습과 통한다(마 23:37; 눅 19:41-42). 예수는 십자가에서도 범죄자들을 위해 기도하신다(눅 23:34). 이는 이사야 53:12의 종의 중보와 이어지는 사랑이다.

로마서 10:20-21에서 바울은 이사야 65:1을 하나님을 찾지 않던 이방인에게, 2절을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적용한다. UBS가 읽는 이사야 1절의 원래 대상은 패역한 백성이지만, 바울은 먼저 자신을 알리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미친 사건을 이 말씀에서 읽는다. 그는 누구든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선포한다(롬 10:12-13). 곧이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았고 은혜로 택한 남은 자가 있다고 한다(11:1, 5). 이방 신자에게는 자랑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본다(11:17-26). 이 인용을 유대 민족 전체의 배제로 사용할 수 없다.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는 거짓 거룩과 달리, 참으로 거룩하신 대제사장(히 7:26)은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어 깨끗하게 하신다(막 1:40-42). 죄인들이 가까이 와도 물리치지 않으신다(눅 15:1-2).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남을 멸시하는 태도를 책망하신 비유(눅 18:9-14)는 이사야 65:5의 위선을 비춘다.

갓과 므니에게 차린 식탁과 종들의 식탁은 고린도전서 10:20-22의 경고와 연결된다.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할 수 없다. 이사야 55:1의 값없는 초청처럼 예수는 생명의 떡으로 오셔서 믿는 자를 채우신다(요 6:35). 지금 주린 자의 복과 배부른 자의 화(눅 6:21, 25)는 65:13-14의 뒤바뀜과 통한다. 그 잔치는 동서에서 오는 이들에게도 열린다(마 8:11).

하나님의 종들과 거역한 자들의 갈림은 아들에게 맡기신 마지막 심판에 이른다(요 5:22). 마태복음 25:31-40에서는 주린 이와 목마른 이, 나그네에게 한 행위가 그리스도께 대한 응답을 드러낸다. 교회는 그 심판권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고 복음을 증언한다.

저주와 다른 이름 사이에 그리스도의 속량이 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저주를 담당하셨다(갈 3:13).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행 11:26)과 이기는 자가 받을 새 이름(계 2:17; 3:12)은 그에게 속한 삶을 가리킨다. 이사야의 “다른 이름”은 이러한 새 소속을 이해할 배경이다.

“아멘의 하나님”(65:16)은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그리스도(계 3:14)를 떠올리게 한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어 교회는 아멘으로 응답한다(고후 1:19-20). 그리스도 안의 새 피조물(5:17)은 새 창조를 기다리며, 요한계시록 21:4의 눈물 없는 세상에서 이전 환난이 끝난다는 약속이 완성된다.

현대적 적용

하나님이 잠잠하시다는 탄원에 본문은 오랫동안 부르고 기다리신 하나님을 밝힌다. 그분의 부재만 호소하면서 이미 들은 말씀을 거절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구하지 않던 자에게도 먼저 다가오신 은혜가 있기에, 하나님을 찾을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도 그 부름에 응답할 수 있다.

동산과 무덤의 제의, 갓과 므니의 식탁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에게 안전과 미래를 맡긴 행위다. 신명기 18:10-12도 점술과 초혼을 금한다. 주의 식탁에 참여하면서 다른 영적 권능에게 삶을 맡기는 이중 충성을 이 본문은 고발한다. 미래를 지배하려는 욕망보다 부르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 기울여야 한다.

금지된 제의를 행하며 남보다 거룩하다고 하는 자들의 위선은 신앙 공동체에도 경고가 된다. 하나님의 이름과 종교적 열심이 이웃을 멸시할 자격을 주지 않는다. 앞선 세대가 했다는 이유로 죄를 정당화할 수도 없다. 7절은 대를 이어 같은 죄에 참여하는 책임을 묻는다. 물려받은 잘못을 반복하며 조상에게 책임을 돌리는 대신, 자신의 거역을 인정하고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은 종들을 남기시지만 종들과 패역한 자들을 가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포도송이의 비유를 특정 교단이나 민족 전체를 정죄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 없고, 심판의 칼을 사람이 휘두를 권한으로 바꿀 수 없다. 교회는 추수까지 곡식과 가라지를 기다리라는 예수의 말씀(마 13:24-30)을 기억하며 자기 응답을 살핀다.

진리의 하나님으로 복을 빌고 맹세하는 사람은 말과 약속에서도 진실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진실과 공의가 없었던 48:1의 삶을 되풀이하면 그 이름을 욕되게 한다. “옳다” 할 것은 옳다 하라는 예수의 가르침(마 5:37)은 그 신실하심에 어울리는 응답이다. 이전 환난이 잊힌다는 약속도 피해자에게 기억을 지우라는 명령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 환난을 끝내실 때까지 성도는 탄원하며 우는 자와 함께 운다(롬 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