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양심의 증언과 하나님의 은혜로 행한 처신 (12절)
바울은 1:8-11에서 아시아에서 당한 죽음의 위험과 하나님의 건지심을 말한 뒤, 고린도 성도들에게 간구로 자신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12절의 원문은 이유를 밝히는 접속사로 시작하여 그 부탁의 근거를 제시한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성도들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를 근거로 삼고, 그것을 “우리의 자랑”이라고 부른다. 자랑의 내용은 양심이 증언하는 바, 곧 바울 일행이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이 증언을 길게 이어 가는 까닭은 15-17절에서 드러난다. 그가 알린 방문 계획이 바뀌면서 그의 말을 믿을 수 있느냐는 의심이 생겼다.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에서 양심은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행동을 돌아보며 내리는 판단이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전서 4:4에서 스스로 자책할 것을 깨닫지 못해도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고 말했다. 12절에서도 그는 양심의 증언을 자기 말만으로 세우지 않고, 고린도 성도들이 직접 본 처신에 연결한다. 바울 일행은 “세상에서”, 곧 사람들 가운데 살아가는 일상에서 이렇게 행했고,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더욱 그렇게 행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이 그들 가운데 머물며 보여 준 삶을 기억하여 이 증언이 참인지 판단할 수 있다.
개역개정은 그 처신의 방식을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라고 옮긴다. “거룩함”은 ἁγιότητι(하기오테티)라는 사본 읽기를 따른 번역이고, NA28은 철자가 비슷한 ἁπλότητι(하플로테티), 곧 ‘순전함’을 본문으로 택했다. 두 읽기가 모두 사본으로 전해지므로 개역개정의 “거룩함”은 번역 실수가 아니다.1 그러나 문맥에는 순전함이 더 잘 맞는다.2 바울은 13절에서 편지에 숨긴 뜻이 없다고 말하고, 17절에서는 “예”와 “아니라”를 동시에 말한다는 의심을 부정한다. 바울이 변호하는 것은 말과 계획에서 계산을 숨기지 않고 한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이다.3
“진실함”(εἰλικρινείᾳ, 에일리크리네이아)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진정성을 뜻하며 순전함과 짝을 이룬다. 바울은 이 두 성품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부르고, 그렇게 행할 수 있었던 근원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밝힌다. 그 반대편에 “육체의 지혜”(σοφίᾳ σαρκικῇ, 소피아 사르키케)가 있다. 여기서 ‘육체의’는 몸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채 자기 이익을 계산하는 사람의 방식을 가리킨다. 바울은 자신의 영리함으로 고린도 성도들의 신뢰를 얻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읽고 아는 편지와 주의 날의 자랑 (13-14절)
13절에서 바울은 편지를 읽는 일로 화제를 옮긴다. “읽고”(ἀναγινώσκετε, 아나기노스케테)와 “아는”(ἐπιγινώσκετε, 에피기노스케테)은 소리가 비슷한 두 동사이다. 바울은 두 동사를 이어 써서, 성도들이 읽는 글과 그들이 알아듣는 뜻 사이에 다른 것이 끼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편지에서 숨은 의도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어서 바울은 성도들이 “완전히” 알기를 바란다. ἕως τέλους(헤오스 텔루스)는 ‘완전히’로도, 주님의 날까지 ‘끝까지’로도 옮길 수 있다. 14절의 “부분적으로”와 대조되므로 이해의 정도를 말하는 ‘완전히’가 더 자연스럽고, 개역개정도 이 뜻을 따른다.4
14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이미 자신을 “부분적으로” 알았다고 인정한다. ἀπὸ μέρους(아포 메루스)는 성도들이 바울을 어느 정도만 이해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회중 가운데 일부만 그를 인정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5 13절의 “완전히”와 짝을 이루는 점에서 앞의 읽기가 더 자연스럽다. 어느 쪽이든 바울은 성도들이 자신을 전혀 모른다고 몰아붙이지 않는다. 바울은 성도들이 무엇을 온전히 알기를 바라는지도 밝힌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의 날에” 사도와 회중이 서로의 자랑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날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믿음에 서 있는 것을 자랑하고, 성도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바울 일행을 자랑하게 된다. 12절에서 시작한 바울의 자랑은 이렇게 주님 앞에서 서로를 기뻐할 소망으로 이어진다.
바뀐 방문 계획과 경솔하다는 의심 (15-17절)
15-16절에서 바울은 “이 확신”, 곧 서로의 자랑이 되리라는 신뢰를 가지고 세웠던 방문 계획을 밝힌다. 그는 먼저 고린도에 들렀다가 마게도냐로 가고, 마게도냐에서 다시 고린도로 돌아온 뒤 유대로 갈 생각이었다. 고린도전서 16:5-7에서는 마게도냐를 거친 뒤 고린도에 가서 겨울을 지낼 수도 있다고 했으므로, 두 편지에 나타난 동선은 서로 다르다. 개역개정이 “두 번 은혜”로 옮긴 δευτέραν χάριν(데우테란 카린)은 직역하면 ‘두 번째 은혜’이다. 16절의 동선과 함께 읽으면, 이 표현은 바울이 고린도를 두 번 들러 성도들이 두 차례 은혜를 얻게 하려던 계획을 가리킨다.6 개역개정의 “두 번”도 이 읽기를 반영한다. 바울은 자신의 방문을, 사도가 찾아가 그리스도의 구원과 가르침을 나누며 성도들이 은혜를 누리는 기회로 여겼다.7 그래서 계획이 바뀌자 고린도 성도들은 기대하던 은혜의 기회를 잃었다고 느낄 수 있었다.
16절의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에서 개역개정이 ‘도움’으로 표현한 동사 προπεμφθῆναι(프로펨프테나이)는 여행자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다음 목적지로 보내는 일을 가리킨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6:6, 11에서도 같은 동사로 고린도 교회가 자신과 디모데를 보내 주기를 부탁하고, 디도서 3:13에서는 세나와 아볼로를 보내며 그들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라고 당부한다. 바울의 계획에는 고린도 교회가 그의 여정을 실제로 돕는 일이 들어 있었다. 유대라는 목적지는 고린도후서 8-9장에서 다루는 성도들을 위한 연보와도 어울린다. 방문 계획이 바뀌면서, 처음 계획대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유대로 보내 주는 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17절에서 바울은 두 질문으로 의심에 답한다. 첫 질문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는 ‘아니다’라는 답을 기대하는 형식이다. 방문 계획이 바뀌자 고린도에서는 바울이 경솔하다는 비난이 나왔던 것으로 보인다.8 둘째 질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육체를 따라”(κατὰ σάρκα, 카타 사르카)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예”는 고린도에 가겠다는 약속에, “아니라”는 가지 않기로 한 결정에 해당한다.9 바울이 부정하는 것은 일정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한 입으로 “예”와 “아니라”를 동시에 말하는 사람이라는 혐의이다. “육체를 따라” 계획한다는 말은 12절의 “육체의 지혜”로 행한다는 말과 짝을 이룬다. 둘 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편의에 따라 판단하는 사람의 방식을 가리킨다.
신실하신 하나님과 바울 일행이 전파한 아들 (18-19절)
18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미쁘시니라”로 답을 시작한다. 원문은 ‘신실하다’(πιστὸς, 피스토스)를 문장 맨 앞에 두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한다. 바울 자신만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말이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아니었음을 보증하신다는 뜻이다.10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ὁ λόγος ἡμῶν, 호 로고스 헤몬)은 일차로 방문 약속을 가리키지만, 19-20절이 곧바로 바울 일행이 전파한 그리스도를 말하므로 고린도에서 선포한 복음도 포함한다.11 바울이 이 둘을 한 문장에 묶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을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한 사람으로 알았다. 그의 말이 상황에 따라 예와 아니라를 오간다면 그가 전한 복음도 같은 의심을 받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말이 믿을 만하다고 변호하면서, 그가 전한 복음이 믿을 만하다는 사실도 밝힌다.12 그러나 바울은 바뀐 계획까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는 1:23에서 고린도에 가지 않은 이유를 따로 밝힌다. 18절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근거로 부정하는 것은 일정의 변경이 아니라 이중적인 말이다.
19절의 주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아들은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전파한 분이다.13 고린도 교회가 믿은 그리스도는 한 사람의 사사로운 주장으로 전해지지 않았고, 세 사람이 같은 내용으로 증언한 분이다. 바울은 이 그리스도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라고 말한다. “되었느니라”에 쓰인 완료형(γέγονεν, 게고넨)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예”가 지금도 유효함을 나타낸다. 19절은 이렇게 18절의 근거가 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에 번복이 없었으므로, 그리스도를 전한 자신들의 말도 예와 아니라를 오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의 예와 그로 말미암은 아멘 (20절)
20절은 19절의 “예”를 하나님의 약속 전체로 넓힌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는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 몇이든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는 뜻이다. 이어서 바울은 그 성취에 대한 응답으로 “아멘”을 말한다. 회당의 회중은 찬양의 말을 참되다고 인정할 때 아멘으로 응답했고, 초기 교회도 이 관습을 이어받았다.14 원문은 이 아멘이 “그로 말미암아”(δι’ αὐτοῦ, 디 아우투),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려진다고 말한다. 문장 끝의 δι’ ἡμῶν(디 헤몬)은 ‘우리를 통하여’라는 뜻인데, 개역개정은 이를 “우리가 아멘 하여”로 옮겼다. 19절에서 같은 표현이 그리스도를 전파한 바울 일행을 가리켰으므로, 고린도 성도들의 아멘이 사도들의 선포를 통해 나왔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우리’에는 바울 일행과 함께 아멘으로 응답하는 고린도 성도들도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15 21절이 곧바로 “우리를 너희와 함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사도와 회중은 같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사도와 회중을 함께 굳건하게 하시고 성령을 주신 하나님 (21-22절)
21절에서 바울은 이 모든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고 밝힌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신다. “굳건하게 하시고”(βεβαιῶν, 베바이온)는 현재분사로, 하나님께서 사도와 회중을 그리스도와 굳게 결합시키는 일을 지금도 계속하신다는 뜻이다.16 개역개정이 “그리스도 안에서”로 옮긴 εἰς Χριστὸν(에이스 크리스톤)도 이 결합을 가리킨다. 이어지는 “기름을 부으신”(χρίσας, 크리사스)은 ‘기름 부음 받은 이’를 뜻하는 “그리스도”와 소리와 뜻이 겹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기름 부음 받은 분께 굳게 연결하시고, 그들에게도 기름을 부으신다.17 기름 부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별하여 세우시는 일을 가리킨다. 이를 사도의 사명 위임으로 보아 ‘사명을 맡기다’로 옮긴 번역도 있고, 기름 부음과 인치심을 받은 ‘우리’를 사도들로 한정하는 해석도 있다.18 그러나 이 문장에서 처음 “우리를 너희와 함께”라고 밝힌 대상이 뒤의 기름 부음과 인치심에서 바뀐다는 표시는 없다. 그러므로 사도는 회중 위에서 은혜를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 서지 않고, 그들과 같은 은혜를 받는다.
22절은 하나님의 행동을 두 가지 더 말한다. “인치시고”(σφραγισάμενος, 스프라기사메노스)는 물건에 인을 찍어 소유를 표시하던 상거래의 관행에서 온 말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자기 소유로 표시하셨다는 뜻이다.19 “보증”(ἀρραβών, 아라본)도 상거래 용어로, 나머지를 반드시 치르겠다는 표로 먼저 지불하는 계약금을 가리킨다. 원문 τὸν ἀρραβῶνα τοῦ πνεύματος(톤 아라보나 투 프뉴마토스)는 ‘성령의 보증’이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다른 보증이 아니라 성령 자신이 보증이시라는 뜻이다. 개역개정의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도 이 뜻을 살렸다.20 하나님은 성령을 주셔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구속하시리라는 약속을 미리 확증하신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5에서도 같은 표현을 쓰는데, 거기서 성령은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질 미래(5:4)의 보증이다. 성령은 “우리 마음에”, 곧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주어졌다. 방문 계획을 둘러싼 의심 때문에 사도와 회중 사이가 멀어졌어도, 하나님께서 두 편 모두에게 주신 성령은 그들이 같은 하나님께 속했음을 확증한다.
성경신학적 통찰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18-22절의 논증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출발한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셨고, 그 약속을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어 구원의 완성을 보증하신다. 그러므로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은 사도의 일정이 지켜지리라는 기대 위에 서 있지 않다.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그 믿음을 지탱하신다. 이 확신은 이스라엘이 언약 안에서 알았던 하나님의 성품에 뿌리를 둔다.
신명기 7:9는 여호와를 “신실하신 하나님”이라 부르며, 그분이 자기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천 대까지 언약을 지키시고 인애를 베푸신다고 말한다. 같은 단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까닭을 그들의 수나 힘에서 찾지 않고,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찾는다(신명기 7:7-8). 민수기 23:19에서 발람도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고 선언한다. 18절의 “하나님은 미쁘시니라”는 이렇게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른다. 17-18절에서도 바울은 “육체를 따라” 말을 바꾸는 사람의 방식과 신실하신 하나님을 대조한다. 바울의 계획은 바뀌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약속은 번복되지 않는다. 바울이 자기 말의 진실성을 주장하는 근거도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그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에게 이른 약속과 성령
20절의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는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하신 약속들을 모두 아우른다. 로마서 15:8-9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받은 사람들을 섬기시며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 목적은 이방인들도 긍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20절에서도 약속의 성취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으로 이어진다. 이방 도시 고린도의 회중이 아멘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에게까지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갈라디아서 3:14는 그 약속에 성령이 포함된다고 밝힌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목적은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20절의 약속과 22절의 성령은 하나로 이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이 이루어졌기에 이방 성도들도 약속된 성령을 받았다.
새 언약의 성령과 완성의 보증
22절은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다고 말한다. 예레미야 31:33에서 하나님은 새 언약을 맺을 때 자기 법을 백성의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에스겔 36:26-27에서는 새 마음과 새 영을 주고, 자기 영을 그들 속에 두어 율례를 따라 행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3에서 고린도 성도들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육의 마음판에” 쓴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부르고, 3:6에서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말한다. 바울 자신이 마음과 성령과 새 언약을 이렇게 연결하므로, 22절에서 마음에 주신 성령도 예언자들이 약속한 새 언약의 성취로 읽을 수 있다.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과 갈등을 겪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마음에 약속하신 영을 주셨다.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는 말은 약속의 성취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에베소서 1:13-14에서도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들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고, 그 성령은 하나님께서 얻으신 백성을 속량하실 때까지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 그 사이를 사는 성도의 현실은 로마서 8:23이 보여 준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도 속으로 탄식하며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 고린도 성도들이 성령을 받았으면서도 사도와의 오해와 불안을 겪는 일도 이 기다림의 시간에 일어난다. 보증은 그런 어려움을 없애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을 완성하시리라는 확신을 준다.
알아듣고 드리는 아멘
20절의 아멘은 이해를 전제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6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감사하면 듣는 사람이 그 감사에 어떻게 아멘 하겠느냐고 묻는다. 아멘은 들은 내용을 참되다고 인정하는 응답이므로, 내용을 알아야 드릴 수 있다. 13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읽고 알 수 있는 말만 쓴다고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약속을 전하는 사람은 이렇게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야 하고, 듣는 사람은 그 내용을 이해하고 아멘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기독론적 해석
신실하신 하나님의 아들
18-19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말이 믿을 만하다는 근거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바울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는 경우는 많지 않다.21 19절의 원문은 “하나님의”를 맨 앞에 두어 이 칭호를 강조하고, 18절의 신실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을 잇는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분이 보내신 아들 안에서 드러났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 아들을 바울 일행의 선포로 듣고 믿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말을 변호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일관성보다 그들이 함께 믿는 그리스도를 최종 근거로 삼는다.
그리스도 안의 예, 그로 말미암은 아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예”가 이루어졌다는 말은 예수께서 늘 긍정적인 말만 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선언이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한 복음은 고린도전서 15:3-4에 요약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으며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성경대로”라는 말이 보여 주듯, 이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하신 말씀을 이루신 일이다. 19절의 “예만 되었느니라”는 이 성취가 지금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사도와 갈등을 겪는 고린도 성도들도 이 성취된 약속을 붙들 수 있다.
20절은 하나님의 “예”와 교회의 “아멘”을 모두 그리스도와 연결한다.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고, 아멘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려진다. 이 두 표현은 그리스도의 일과 성도의 일을 구별한다. 약속을 이루시는 일은 그리스도께만 속하고, 사도와 회중은 그 성취를 받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멘으로 응답한다. 바울도 응답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기름 부음 받은 이께 결합된 사도와 회중
17절에서 바울의 말을 믿을 수 있느냐는 의심으로 시작한 논증은 21절에서 사도와 회중이 누구에게 속했느냐는 사실에 이른다. 하나님은 사도와 회중을 함께 그리스도께 굳게 결합시키신다. “기름을 부으신”이라는 말은 ‘기름 부음 받은 이’라는 “그리스도”의 뜻과 이어진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분이고, 성도는 그분께 결합되어 기름 부음을 받는다. 성도의 기름 부음은 그리스도와 나란히 서는 별도의 지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받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사도와 회중은 모두 그리스도께 의존하며, 사도가 회중보다 그리스도께 더 가까운 자리에 서지 않는다.
주 예수의 날까지 붙드시는 하나님
14절의 “우리 주 예수의 날”은 사도와 회중의 관계가 마지막에는 그리스도 앞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날에 서로의 자랑이 되리라는 소망이 있기에, 지금의 관계는 사도의 방문 일정이나 회중의 평가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날까지 하나님은 성령을 보증으로 주셔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을 붙드신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지 못한 동안에도 성도들은 하나님의 소유였고, 그의 편지를 읽고 복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울은 자신의 방문을 그들의 믿음의 조건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성령을 기억하게 한다. 사도의 방문은 성도들에게 은혜가 될 수 있지만, 그들을 그리스도께 붙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현대적 적용
확인할 수 있는 처신과 알아들을 수 있는 말
12절에서 바울은 양심의 증언을 말하면서도 고린도 성도들이 직접 본 처신에 호소한다. 신뢰가 흔들린 관계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선한 의도만 내세울 수 없다. 상대가 함께 겪은 실제 행동을 근거로 제시하고, 상대가 그것을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는 말은 그 확인을 대신하지 못한다.
13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읽는 내용 밖에 다른 뜻을 숨기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들이 완전히 알기를 바란다. 교회에서 말하고 글을 쓰는 사람은 상대가 오해 없이 알아들을 수 있게 표현해야 한다. 듣는 사람도 숨은 의도를 추측하기보다 실제로 한 말과 그 사람이 살아온 모습을 살펴야 한다. 14절은 이 수고의 목적을 밝힌다. 주 예수의 날에 서로의 자랑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상대를 이겨야 할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가 그리스도 앞에 믿음으로 서도록 돕는다. 필요한 책망도 이 목적을 향한다.
바뀐 계획을 설명하는 책임
바울의 계획은 바뀌었고, 그는 그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계획이 바뀌는 일 자체를 불신앙으로 볼 수는 없지만, 약속한 일을 바꾸었다면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바울도 1:23에서 고린도에 가지 않은 이유를 밝힌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아멘과 기름 부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일을 가리킨다. 교회의 계획이나 지도자의 결정에 이 말들을 붙여 질문을 막거나 아멘을 요구하면, 하나님의 약속과 사람의 계획을 구별한 본문의 논증을 거스르게 된다. 지도자도 성도와 같은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자기 결정을 설명하고 질문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의 약속과 성령에 둔 확신
20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선언은 기도의 확신이 어디에 근거하는지도 보여 준다. 성도는 삶의 구체적인 필요를 하나님께 솔직하게 구할 수 있다. 그러나 특정한 결과를 하나님이 이미 보장하셨다고 말하려면 그 약속이 실제로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이 본문이 확증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과, 그 완성을 보증하는 성령이다.
21-22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기름 부으시고 인치시고 성령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도가 확신을 얻는 근거는 자기 감정의 강도나 다른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이다. 확신의 근거가 하나님의 선물에 있으므로, 불안하고 낙심한 순간에도 보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로마서 8:23의 성도들도 성령을 받았으면서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탄식한다. 그러므로 고통을 말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받았다면 그런 감정이 없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없다. 사도와 회중을 함께 굳건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연약한 사람도 붙드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