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긍휼로 받은 직분과 낙심하지 않음 (1절)

1절의 “그러므로”로 바울은 3장에서 말한 새 언약의 직분에서 결론을 끌어낸다. 하나님은 사도들을 새 언약의 일꾼이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고, 그 직분은 죽이는 율법 조문이 아니라 살리는 영의 직분이다(3:5-8). 바울은 이 직분을 자기 자격으로 얻지 않았다.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라는 말처럼 하나님의 긍휼로 맡았다. 그래서 그는 “낙심하지 아니하고”(οὐκ ἐγκακοῦμεν, 욱 엥카쿠멘) 직분을 계속한다. 같은 말이 4:16에 다시 나오고, 그 사이에 질그릇 같은 몸과 환난이 이어진다.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서도 직분을 그만두지 않는다는 고백이다.

숨은 일을 버리고 진리를 나타내는 사역 (2절)

2절에서 바울은 그 직분을 어떤 방식으로 수행하는지 밝힌다. 그는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렸다. ‘버리고’로 옮긴 동사(ἀπειπάμεθα, 아페이파메타)는 그런 방식을 거부했다는 뜻이며, 바울이 전에 그런 일을 했다는 고백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1 이어서 바울은 두 가지를 부정한다. 하나는 “속임으로”(ἐν πανουργίᾳ, 엔 파누르기아) 행하는 일이다. 이 명사는 꾀를 써서 사람을 다루는 간교함을 가리킨다. 12:16에서 바울은 자신이 “교활한 자가 되어” 고린도 사람들을 속임수로 취했다는 어떤 이의 말을 옮긴다. 이 비난을 생각하면, 2절의 부정은 바울의 정직을 의심하는 말에 대한 대답으로 읽을 수 있다.2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일이다. 이 동사(δολοῦντες, 돌룬테스)는 말씀에 다른 것을 섞거나 말씀을 왜곡하여 변질시킨다는 뜻이다.3 개역개정은 2:17도 같은 한국어로 옮겼지만, 그곳의 동사(καπηλεύοντες, 카펠류온테스)는 돈을 벌려고 말씀을 파는 일을 가리킨다.4 바울은 두 구절에서 말씀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일과 말씀의 내용을 바꾸는 일을 모두 거절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관해 주신 소식, 곧 복음을 가리킨다.5

2절 후반에서 바울은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자신을 추천한다. 3:1에서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고 물었던 바울은 추천서에 기대지 않고 진리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사역으로 자신을 보인다. 그 추천을 받는 쪽은 “각 사람의 양심”이다. 여기서 양심은 자기 잘못을 깨닫는 마음보다 다른 사람의 행위가 옳은지 판단하는 능력을 가리킨다.6 바울은 누구든 자기 사역을 살펴 판단할 수 있도록 사역의 방식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이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한다. 2:17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한다고 했던 것처럼, 바울은 사람들의 판단에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자기 사역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분을 하나님으로 여긴다.

가려진 복음과 눈멀게 된 생각 (3-4절)

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공개한 복음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려져 있음을 인정한다. “가리었으면”이라는 말은 3:13-16에서 모세의 얼굴과 모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덮은 “수건”(κάλυμμα, 칼륌마)을 떠올리게 한다.7 “우리의 복음”은 바울 일행에게 다른 복음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몸담고 있음을 나타낸다.8 2절의 숨은 부끄러움의 일은 사역자가 감추는 일이고, 3절의 가려짐은 진리가 공개된 뒤에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바울은 그들을 2:15에서처럼 “망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4절은 복음이 그들에게 가려진 원인을 밝힌다. “이 세상의 신”(ὁ θεὸς τοῦ αἰῶνος τούτου, 호 테오스 투 아이오노스 투투)에서 “세상”으로 옮긴 명사는 직역하면 ‘시대’이므로 이 표현은 ‘이 시대의 신’에 가깝고, 이 신은 사탄을 가리킨다.9 바울이 그를 ‘신’이라고 부르지만 그가 창조주와 같은 지위를 가진다는 뜻은 아니다. 이 호칭은 지금 시대에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을 가리는 그의 실제 영향력을 드러낸다. 6절이 하나님을 어둠에서 빛을 내신 창조주로 소개하므로, 어둠의 세력은 실제로 활동하지만 빛을 주시는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 개역개정이 “혼미하게 하여”로 옮긴 동사(ἐτύφλωσεν, 에튀플로센)는 ‘눈멀게 하였다’는 뜻이다. “혼미하게”는 정신이 흐려진 상태를 떠올리게 하지만, 원문은 눈멂이라는 시각의 비유를 써서 바로 뒤의 빛과 광채로 이어 간다. 눈멀게 된 “마음”(τὰ νοήματα, 타 노에마타)은 생각이나 이해를 가리킨다. 3:14에서 모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수건이 벗겨지지 않는다고 할 때도 바울은 같은 명사를 썼다.

이어지는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εἰς τὸ μὴ αὐγάσαι, 에이스 토 메 아우가사이)의 동사는 ‘분명히 보다’라는 뜻과 ‘비추다, 밝히다’라는 뜻으로 모두 쓰인다.10 그래서 원문은 두 방향으로 읽힌다. 부정사 뒤의 “광채”(τὸν φωτισμὸν, 톤 포티스몬)를 목적어로 보면 믿지 않는 자들이 그 광채를 보지 못한다는 뜻이 되고, 부정사의 주어로 보면 광채가 그들에게 비치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 바로 앞의 눈멂 비유는 ‘보지 못하게’라는 읽기에 잘 어울리고, 6절에서 하나님이 마음에 빛을 ‘비추셨다’는 말은 ‘비치지 못하게’라는 읽기와 짝을 이룬다. 문법과 문맥이 두 읽기를 모두 허용하므로, 개역개정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는 원문의 뜻을 바르게 옮긴 번역 가운데 하나다. 어느 읽기에서도 사람들이 복음을 알아보지 못하는 원인은 빛이 약해서가 아니라 이 시대의 신이 생각을 눈멀게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 (4절)

가려진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리고, 그 복음이 비추는 빛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가려져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εἰκὼν τοῦ θεοῦ, 에이콘 투 테우)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된다. 바로 앞 3:18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주의 영광을 보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는 성도들이 닮아 갈 형상이시다. 복음의 빛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비추므로, 그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의 역할도 그리스도를 알리는 데 있다.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너희의 종 (5절)

5절은 앞의 말을 뒷받침한다. 바울은 자신들을 전파하지 않고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분이 주권자이시며 모든 이의 주님이시라고 선언하는 일이다.11 3절에서 “우리의 복음”이라고 부른 소식도 그 내용은 바울 일행이 아니라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복음을 맡은 사람이 누구이든 선포의 중심과 청중이 믿을 분은 그리스도이시므로, 바울 자신의 특별함은 이 선포를 대신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말한 뒤 바울은 자신들을 “너희의 종”이라고 부른다. 원문에서 “주”와 “종”은 나란히 서서, 그리스도는 주님이시고 사도들은 고린도 성도들의 종이라는 대조를 만든다. 섬김의 이유는 “예수를 위하여”(διὰ Ἰησοῦν, 디아 이에순)가 밝힌다. 이 전치사가 목적격과 함께 쓰이면 이유를 나타내므로, 원문은 ‘예수 때문에’에 가깝다. 개역개정의 “위하여”는 목적처럼 들릴 수 있으나, 여기서 이 구는 섬김의 근거를 말한다. 바울이 성도들의 종이 된 이유는 성도들의 요구가 아니라 예수께 있다. 그러므로 사도의 섬김은 성도들이 원하는 모든 일을 무조건 따르는 일이 아니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도는 자신을 성도들 위의 주인으로 세우지도 않는다.

마음에 빛을 비추신 창조주 하나님 (6절)

6절은 바울이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이유를 밝힌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문장의 주어는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이다. 바울은 창세기 1:3의 창조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자유롭게 불러와 이 하나님을 소개한다.12 이 하나님께서 사도들의 마음에 빛을 비추셨다. 바울은 문장의 주어를 창조의 말씀으로 소개하여, 창조 때 어둠에서 빛이 비치게 하신 분과 사도들의 마음을 밝히신 분이 같은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

“우리 마음에”의 “우리”는 5절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우리”와 이어지므로, 일차로 복음을 전하며 고린도 사람들을 섬기는 바울과 동역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말은 고린도 신자들의 마음에 복음의 빛이 비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13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데 있다. 4절에서 “광채”로 옮긴 명사(φωτισμός, 포티스모스)가 6절에서 “빛”으로 다시 나오고 두 절의 끝부분도 비슷하게 짜여 있어, 6절의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앎은 4절의 복음과 사실상 같은 내용을 가리킨다.14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가려진 빛과 사도들의 마음에 비친 빛은 같은 복음의 빛이다. 빛을 받았다는 경험도 사역자의 특별한 체험으로 따로 떼어 말할 수 없고,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앎이라는 내용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영광은 그리스도의 “얼굴”(πρόσωπον, 프로소폰)에 있다. 3:7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의 얼굴에 있던 없어질 영광을 주목하지 못했고, 3:13에서 모세는 그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알려진다고 말한다. 사도들은 그분에게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에 자신을 전파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성경신학적 통찰

어둠에서 빛을 내신 창조주와 새 창조

6절의 하나님은 창세기 1:1-5에서 어둠 가운데 말씀으로 빛을 있게 하신 창조주다. 창세기는 세계의 시작을 말하고 6절은 사람의 마음에 일어난 일을 말하지만, 두 장면에서 어둠을 밝히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창조의 말씀을 불러와,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된 일이 스스로 이룬 깨달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둠에서 빛을 내신 일임을 밝힌다. 같은 편지 5:17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른다. 마음에 빛을 비추신 일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새롭게 지으시는 일과 이어진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은 자기 안에서 밝음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앎을 받은 사람들이다.

모세의 얼굴에 비친 영광과 벗겨진 수건

출애굽기 33-34장은 1절의 긍휼과 6절의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보여 준다. 금송아지 사건 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구하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며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분으로 자신을 알리신다(출애굽기 33:18-19).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자신의 얼굴을 보고 살 사람이 없다고 하신다(33:20). 언약이 다시 세워진 뒤 하나님과 말씀한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고, 모세는 백성에게 말하기를 마친 뒤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34:29-35). 바울은 3장에서 이 얼굴과 수건으로 두 언약의 직분을 견주었고, 6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다고 말한다. 모세의 얼굴에서는 하나님을 만난 중보자에게 비친 영광이 보였지만, 그리스도의 얼굴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알려진다. 두 본문 모두에서 하나님을 아는 일은 사람이 얻어 내는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로 자신을 알리시는 선물이다.

바로 앞의 3:16-18은 이 빛이 누구에게 열려 있는지 보여 준다.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겨지고, “우리가 다” 주의 영광을 보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6절에서 사도들의 마음에 비친 빛은 그들만 누리는 특권이 아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알게 된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성도들도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형상을 닮도록 섬긴다. 3:3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이 마음판에 쓰신 일과 6절에서 창조주가 마음에 비추시는 빛은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서로 다른 비유로 설명한다.

눈먼 자의 눈을 여시는 하나님과 이방의 빛

이사야는 눈먼 자의 눈을 여시고 어둠을 빛으로 바꾸시는 일을 여호와의 구원으로 말한다. 여호와는 그의 종을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시고, 그 종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한다(이사야 42:6-7). 여호와께서는 맹인들 앞에서 “암흑이 … 광명이 되게” 하신다(42:16). 60:1-3에서는 어둠이 땅을 덮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그 백성 위에 나타나고 나라들이 그 빛으로 나아온다. 4-6절도 눈먼 생각, 가려진 빛, 하나님의 영광을 차례로 말한다. 이사야에서 어둠을 빛으로 바꾸시는 분이 여호와이시듯, 바울에게도 가려진 마음에 빛을 비추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사도행전 26:16-18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바울을 이방인에게 보내어,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맡기신다. 이 사명의 말은 이사야 42장의 표현과 가깝고, 4절에서 이 시대의 신이 생각을 눈멀게 한다는 말과도 맞닿는다. 바울의 사역은 나라들에게 빛을 비추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섬기는 일이다.

창조의 빛과 하나님을 나타내신 말씀

요한복음 1:1-18은 창조의 빛과 하나님을 아는 계시를 한 분 안에서 연결한다. 만물이 말씀으로 지어졌고 그 안에 생명이 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1:3-4).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고 사람들은 그의 영광을 보았다(1:14).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으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그분을 나타내셨다(1:18). 이는 6절에서 바울이 창조주와 그리스도의 얼굴을 잇는 것과 같은 방향의 고백이다. 요한복음 1:6-8은 세례 요한을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사람으로 소개한다. 이 구별은 5절에서 바울이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파한다고 말한 것과 주제상 통한다.

기독론적 해석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얼굴

4절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 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아보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된다. 골로새서 1:15-16은 같은 고백을 창조와 연결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아들 안에서 하늘과 땅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왕권과 권세들이 다 창조되었다. 이 고백에 비추어 보면 4절의 “이 세상의 신”은 그리스도와 대등하게 맞서는 신이 아니다. 그는 지금 믿지 않는 자들의 생각을 눈멀게 하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권세를 지으신 분이시며 하나님은 그분 안에서 자신을 알리신다. 그러므로 복음이 어떤 사람들에게 가려져 있어도 사도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알리는 일을 그치지 않는다.

6절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다고 말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출애굽기 33:20),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알게 된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14:9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방향의 고백이다. 얼굴은 사람과 대면하는 인격을 떠올리게 한다. 5절에서 바울이 주님으로 전파하는 분도, 섬김의 이유로 삼는 분도 “예수”다. 바울이 말하는 영광의 주님은 역사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신 그 예수이시다. 이어지는 4:10-11에서 바울은 곧바로 “예수의 죽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영광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의 영광이므로, 그 영광을 세상의 성공과 힘에 맞추어 이해하면 복음의 내용을 잃는다.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종이 된 사도

5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전파한다. 이 주님은 죽음에서 살아나신 분이다. 4:14에서 바울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사도들도 예수와 함께 살리실 것을 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므로 사도는 자신을 전파하지 않는다.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셨고, 사도는 그 일을 알리며 화목하라고 간청한다(5:18-20). 사도의 경험은 그 소식을 들려주는 데 쓰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하는 믿음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교회라면 지도자의 생애나 능력을 신앙의 마지막 기초로 여길 이유가 없다.

5절의 “주”와 “종”의 대조는 마가복음 10:42-45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주제상 이어진다. 야고보와 요한이 영광 가운데 높은 자리를 구했을 때, 예수는 집권자들처럼 사람을 지배하는 길을 거부하시고 자신은 섬기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바울이 “예수 때문에” 성도들의 종이 된 것은 이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그분의 길을 따르는 일이다. 그러나 두 섬김은 같지 않다. 예수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이었고, 사도의 섬김은 그 구원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다. 사도는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알리려고 자신을 내어 줄 뿐이다. 그러므로 종이라는 호칭은 사도의 권위를 지우지 않고, 그 권위가 그리스도에게서 나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쓰여야 함을 밝힌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알기보다 사도를 의지하게 된다면 이 관계는 무너진다.

마음에 비추신 빛과 그리스도의 형상

6절에서 하나님은 사도들의 마음에 빛을 비추셔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다. 하나님의 행동이 먼저 있고, 그 결과로 사도의 증언이 생긴다. 이 앎은 4절의 복음과 같은 내용이다.15 그러므로 사도의 선포는 그가 자기 안에서 강한 확신을 느꼈다는 사실에 기대지 않고 자신에게 알려진 그리스도를 말한다. 3:18에서 바울은 주의 영광을 보는 사람들이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고 말했다. 마음에 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일은 성령께서 사람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바꾸시는 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는 알아야 할 소식의 중심이시고 성도가 닮아 갈 형상이시다.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 사도의 삶을 바꾸고, 바뀐 사도를 통해 그 소식이 다시 사람들에게 들린다. 1절에서 바울이 직분의 근거로 삼은 긍휼도 지난 한 사건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이 관계 안에서 그가 직분을 계속하게 한다.

현대적 적용

낙심하지 않는 근거인 긍휼

복음을 전했는데 상대가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공동체의 변화가 더딜 때, 사역자는 자신의 수고가 헛되다고 느낄 수 있다. 바울은 복음이 어떤 사람들에게 가려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낙심하지 않았고, 그 근거를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긍휼에서 찾았다. 오늘 말씀을 가르치거나 이웃에게 복음을 말하는 사람도 즉각적인 반응으로 자기 사역의 가치를 재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지친 사람에게 더 많은 일을 요구하는 근거로 써서는 안 된다. 바울은 곧이어 4:7에서 자신을 질그릇에 비유하며 약함을 숨기지 않는다. 긍휼로 직분을 받은 사람은 피로와 도움의 필요를 감추지 않고 말할 수 있다.

진리를 드러내는 가르침과 비판에 대한 응답

2절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일해야 하는지 보여 준다. 바울은 숨은 방식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목적에 맞추어 바꾸지 않았다. 오늘 가르치는 사람도 자신의 영향력이나 사역의 성과를 위해 본문의 뜻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본문의 흐름과 해석의 근거를 밝혀, 듣는 사람이 그 설명을 스스로 살펴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원어나 전문 지식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청중이 교사의 말을 무조건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도 각 사람의 양심이 판단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사역을 드러냈다. 공동체 안에서 잘못이 드러났을 때 평판을 지키려고 덮는 일도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린다는 고백과 맞지 않는다. 진리를 드러낸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사정을 무분별하게 공개한다는 뜻이 아니라, 잘못을 감춘 채 계속하지 않고 멈추어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복음이 가려져 있다는 3-4절의 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이나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을 낮추는 말로 쓰이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직분을 맡은 근거를 긍휼에서 찾았고, 그의 마음에 빛을 비추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빛을 받은 사람은 자기 믿음을 타고난 우월함처럼 내세울 수 없다. 그 은혜를 기억하는 신자는 상대의 신앙이나 생활을 조롱하지 않고, 상대가 실제로 한 말을 들은 뒤 자신이 믿는 그리스도를 정확히 설명한다. 복음에 대한 비판을 모두 이 시대의 신의 일로 돌려서도 안 된다. 성경을 잘못 설명했거나, 교회의 잘못된 행동이 신뢰를 잃게 했거나, 설명이 분명하지 못했을 수 있다. 이런 비판을 악한 권세의 일이라는 한마디로 묶으면 바울이 말한 진리를 드러내는 책임에서 멀어진다. 틀린 설명은 고치고, 교회에서 상처받은 경험을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주로 전파하고 예수 때문에 섬김

그리스도를 주로 전파한다는 5절은 설교와 간증의 중심을 정한다. 사역자의 특별한 경험과 헌신을 길게 들려준 뒤 그 사람을 따르는 것이 신앙의 중심처럼 남으면,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역자가 전파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도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어떤 말씀과 은혜를 알게 되었는지 드러나야 하며, 듣는 사람에게 같은 경험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성도들의 종이라는 바울의 말은 지도자가 맡은 권한을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쓰게 한다. 그러나 이 호칭을 근거로 사역자에게 무제한의 요구를 하거나 모욕을 견디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바울은 성도들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예수 때문에 섬겼고, 그 섬김에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분명히 말하는 책임이 들어 있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지도자와 성도 모두 그분 앞에서 책임을 진다.

마음을 밝히시는 하나님을 신뢰함

6절에서 마음에 빛을 비추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모든 수단을 손에 쥐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다. 복음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실제 질문에 답하는 일은 듣는 사람을 섬긴다. 그러나 불안을 지나치게 자극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응답하도록 압박하면, 듣는 사람은 무엇을 믿는지 충분히 생각할 기회를 잃는다. 그런 방법은 2절에서 바울이 버린 속임의 방식에 가깝다. 사역자는 진리를 성실하게 말하고, 마음을 밝히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이웃의 응답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