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59장에서 백성은 빛을 바라지만 어둠 속에서 걷는다고 탄식했고(59:9),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리라는 약속을 들었다(59:20). 60장은 황폐한 예루살렘을 한 여인으로 불러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קוּמִי אוֹרִי, 쿠미 오리)고 명한다. 두 명령은 여성 단수형이며 성읍과 그 주민을 향한다. UBS는 첫 명령이 뒤의 행동을 이끌어 무게가 “빛을 발하라”에 실린다고 설명한다.1 시온 위에 먼저 임한 여호와의 영광이 이 명령의 근거다.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였음이니라”에 쓰인 동사(זָרָח, 자라흐)는 해가 떠오르는 모습에 자주 쓰인다. 같은 어근이 2절의 “임하실 것이며”와 3절의 “비치는 네 광명”으로 이어져 1-3절을 묶는다.1 어둠이 땅과 만민을 덮은 가운데 여호와께서 시온 위에 떠오르신다. 시온은 그분에게서 받은 빛을 비추며, 나라들과 왕들은 그 광명을 향해 걸어온다.
4절의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는 49:18과 같은 히브리어 문구로, 버림받았다고 탄식하던 시온에게 주신 약속을 다시 불러온다. 먼 곳에서 아들딸이 돌아오자 시온의 얼굴은 환해지고 마음은 놀라며 넓어진다. 개역개정의 “화창하리니”는 넓어지는 마음을 기쁨으로 옮긴 말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광경 앞에 두려움과 기쁨이 일어난다. 바다를 건너온 먼 땅의 부와 열방의 재물도 시온으로 들어온다.2
6-7절은 미디안과 에바의 낙타 떼, 금과 유향을 가져오는 스바 사람들, 게달과 느바욧의 양 떼를 그린다. 먼 땅의 사람들은 여호와의 찬송을 알리고 제물은 그분이 기뻐 받으실 제단에 오른다. 미디안, 에바, 스바는 그두라에게서 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게달과 느바욧은 이스마엘의 아들이다(창 25:2-4, 13). 아브라함 가문의 먼 갈래들이 시온으로 모인다. “네게 공급되고”는 “너를 섬길 것이다”(יְשָׁרְתוּנֶךְ, 예샤르투네크)라는 말로 10절의 왕들에게도 쓰인다. NET는 숫양들을 제물로 읽으며, 복종할 지도자들을 상징한다는 견해도 소개한다.2 하나님은 이 제물을 받으시며 자신의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신다. “영화롭게 하다”의 어근은 9절, 13절, 19절, 21절에 이어져 장 전체를 묶는다.
8-9절에서는 돛을 단 배들이 구름과 비둘기처럼 몰려온다. 비둘기의 “보금자리”는 비둘기장에 뚫린 창구멍을 가리킨다. 여호와를 기다리는 먼 땅들과 다시스의 큰 배들은 시온의 자녀와 은금을 싣고 와 여호와의 이름에 바친다.2 그 근거는 하나님이 시온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데 있다. 9절 끝의 히브리어(כִּי פֵאֲרָךְ, 키 페아라크)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셨기 때문이다”라는 삼인칭인데 개역개정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일인칭으로 옮겼다.
10절에서 이방인이 성벽을 쌓고 왕들이 시온을 섬기는 까닭은 하나님이 진노로 치셨던 성을 이제 은혜로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은혜”는 7절에서 제물을 “기꺼이” 받으심에 쓰인 말과 같은 명사다. 제물을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이 시온을 기뻐하시며 다시 세우신다. 11절의 성문은 재물이 끊임없이 들어와 밤낮 열려 있다.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에 쓰인 수동분사(נְהוּגִים, 네후김)는 NET가 제시하는 “행렬 가운데 인도되어”라는 번역도 가능하다. 포로인지 의례 행렬인지는 형태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2 12절은 시온을 섬기지 않는 나라들의 파멸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통치에 맞서는 열방의 심판이며, 시온이 칼을 들어 그들을 심판하는 장면은 없다.
13절에서 레바논의 나무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곳, “나의 발 둘 곳”을 꾸민다. 에스겔 43:7도 성전을 하나님의 보좌와 발의 처소, 이스라엘 가운데 영원히 거하실 곳이라고 부른다.2 14절에서는 시온을 괴롭히던 이들의 자손이 몸을 굽혀 오고 멸시하던 자들이 그 발 아래 엎드려 “여호와의 성읍”,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고 고백한다. 그들의 섬김은 시온이 누구의 성인지 인정하는 데 이른다.
15-17절은 “대신”이라는 말(תַּחַת, 타하트)로 버림받고 미움받던 성의 처지가 바뀜을 그린다. 시온은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며, 열방과 왕들의 젖을 먹는 아이처럼 그들의 조공으로 양육된다.2 시온은 여호와가 자신의 구원자,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이심을 안다. 이 세 칭호는 49:26과 같으며, 그곳에서 모든 육체가 알게 될 하나님을 이곳에서는 시온이 자기 삶에서 안다. NET는 “구속자”를 “보호자”로도 옮긴다.2 17절은 놋 대신 금, 철 대신 은, 나무 대신 놋, 돌 대신 철을 주시는 변화를 잇는다.
화평과 공의는 시온의 관원과 감독으로 세워진다. NET는 이를 번영과 신원이 옛 압제자들 대신 다스리는 역설로 읽는다.2 그 결과 강포와 황폐와 파멸이 그치고 성벽은 “구원”, 성문은 “찬송”이라 불린다. “황폐와 파멸”은 59:7에서 죄악의 길을 묘사하던 말이다. 16절의 “뭇 왕의 젖”과 18절의 “황폐”는 BHS에서 같은 글자와 모음의 말(שֹׁד, 쇼드)로 적혀 있다. 같은 소리가 한쪽에서는 시온을 기르는 젖을, 다른 쪽에서는 그칠 파괴를 가리킨다.
19-20절에서 여호와는 해와 달을 대신할 영원한 빛이 되신다. NET는 지지 않는 해와 물러가지 않는 달을 여호와의 빛과 회복된 복의 상징으로 설명하고 30:26과 비교한다.2 1절에서 떠오른 영광은 지지 않는 빛이 되며 시온의 슬픔은 끝난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의 동사는 17절의 “화평”과 같은 어근이다. 슬픔이 다하여 끝나는 성을 화평이 다스린다.
21절의 백성은 모두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심은 가지이며 그분의 손으로 만든 작품이다. “내가 심은”에 해당하는 BHS 자음 본문은 삼인칭 “그의 심은 것”이고 NET도 그 형태를 제시한다. 개역개정은 이어지는 “내가 손으로 만든 것”과 짝을 이루도록 일인칭으로 옮긴다.2 두 읽기 모두 여호와께서 백성을 심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심을 말한다. 22절에서 작은 자는 천 명을 이루고 약한 자는 강국이 된다. “때가 되면 … 속히 이루리라”(בְּעִתָּהּ אֲחִישֶׁנָּה, 베잇타흐 아히셴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지체 없이 이루시겠다는 약속이다.2 빛을 발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한 장은 하나님이 친히 이루실 선언으로 끝난다.
성경신학적 통찰
59장에서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백성은 스스로 길을 열지 못한다. 여호와께서 자기 팔로 구원을 베푸시고 구속자로 시온에 임하신 뒤 60장의 빛이 떠오른다. UBS는 이 빛을 백성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의 은유로 읽고 58:8, 10과 비교한다.1 58장에서는 결박을 풀고 주린 이에게 양식을 나누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는 삶에 빛의 약속이 주어진다. 60:17-18의 화평과 공의도 그 빛이 머무는 성을 다스린다.
64장의 기도에는 시온의 황폐함과 성전의 화재를 슬퍼하는 탄식이 여전히 나온다. 개역개정 64:10-11은 BHS 64:9-10에 해당한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에서 “아름다운”에 쓰인 명사는 60:7의 “내 영광의 집”에 쓰인 말과 같다. 불탄 집을 두고 백성이 탄식하는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집을 영화롭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회복의 약속을 들은 백성도 황폐함 속에서 기도한다.
열방이 시온으로 모이는 약속은 아브람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는 창세기 12:1-3과 이어진다. 아브람은 고향을 떠나지만 이사야의 열방은 시온을 향해 모인다. 두 본문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통해 복이 모든 족속에게 이른다. 아브람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복과 저주가 갈리듯 60:12은 하나님의 성을 대하는 열방의 운명을 말한다. 창세기 25장의 아브라함 후손인 미디안, 에바, 스바, 게달, 느바욧이 예물과 양 떼를 가지고 오는 장면도 언약의 먼 갈래들까지 부르시는 복을 그린다. 작은 자를 강국으로 만드시겠다는 60:22은 큰 민족의 약속을 떠올리게 한다.
이사야 2:2-5의 열방은 여호와의 산에서 그분의 길을 배우고 칼을 보습으로 만들며 전쟁을 그친다. 야곱 족속도 여호와의 빛 가운데 걸으라는 부름을 받는다. 60장의 열방을 부르는 빛과 강포가 그친 땅은 같은 소망이다. 2:7-8, 16에서는 우상과 교만의 재료였던 은금과 다시스의 배가 60:9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에 바칠 예물을 운반한다. 심판받을 교만의 상징이 예배의 도구로 바뀐다.
시편 72:10-12에서도 다시스와 섬, 스바의 왕들은 예물을 바치고 왕 앞에 엎드려 섬긴다. 그 왕은 가난한 이의 억울함을 풀고 궁핍한 이와 자녀를 구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는 통치를 기대받는다(72:4, 12). 이사야 60:17-18은 그 정의로운 통치를 여호와께서 친히 화평과 공의를 세우고 강포를 그치게 하시는 성으로 그린다.
에스겔 10장에서 떠났던 영광은 43장에서 돌아와 땅을 비추고 성전을 가득 채운다. 하나님은 그곳을 자신의 보좌와 발의 처소라고 부르신다. 이사야 60장의 영광과 “발 둘 곳”도 백성 가운데 돌아오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의 중심에 둔다. 학개 2:7-9 역시 열방의 보배와 은금, 성전의 영광과 평강을 약속하며 모든 은금이 본래 하나님의 것임을 밝힌다. 열방의 재물은 여호와의 이름을 향한다.
이사야 49:6의 종은 땅끝까지 구원이 이르는 이방의 빛이다. 이어 버림받았다고 탄식하는 시온에게 하나님은 어머니가 젖먹이를 잊지 않듯 기억하시며 자녀와 성벽을 회복하겠다고 하신다(49:14-26).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와 구원자,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라는 칭호가 60장에서 다시 나온다. 열방과 왕들이 자녀를 데려오고 시온을 양육하는 60장은 49장의 응답을 펼친다. 다만 60장에는 종이 직접 등장하지 않으며 빛의 근원은 여호와이시다.
52:1-12의 깨어 일어나라는 부름은 통치하시는 하나님과 땅끝까지 드러나는 구원으로 이어진다. 부정한 자가 다시 들어오지 못한다는 52:1의 거룩함과 밤낮 열려 있는 60:11의 문은 같은 성을 묘사한다. 열방은 여호와의 이름을 향해 오고 시온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성이다.
61:3은 슬픔을 화관과 기쁨으로 바꾸고 백성을 여호와께서 심으신 의의 나무라 부른다. “대신”, 슬픔, 영광을 나타냄이라는 낱말들이 60:15-21의 약속을 잇는다. 62:4은 버림받은 자라는 이름이 사라질 것을 약속한다. 66:12에서 열방의 젖을 먹던 시온은 자녀를 먹이고 안는 어머니가 되며, 66:18-21에서는 나라와 언어가 다른 민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다시스와 먼 섬들도 그 소식을 듣는다. 그 가운데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택할 이들이 나온다. 이스라엘은 황폐한 현실에서 하나님이 빛으로 오시고 열방을 부르시며 의로운 통치로 강포를 끝내실 날을 기다린다.
기독론적 해석
60장의 약속은 황폐한 예루살렘과 주민의 귀환과 재건을 향한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그 일부를 맛보았으나 해와 달이 필요 없는 빛과 모두 의롭게 된 백성은 한 번의 재건으로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59장은 죄를 고발하고 64:6(BHS 64:5)은 백성의 의가 더러운 옷 같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친히 의를 심고 빛이 되시는 소망을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읽는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고 만민 앞에 예비된 구원, 이방을 비추는 빛, 이스라엘의 영광을 보았다고 찬송한다(눅 2:25-32). 이사야 49:6의 이방의 빛과 60:1-3의 영광이 그리스도에게서 만난다. 동방의 박사들이 빛을 따라와 금과 유향을 드린 마태복음 2:1-11도 60:3, 6과 장면이 겹친다. 마태는 이사야를 직접 인용하지 않으며 박사들의 예물은 예루살렘을 지나 베들레헴의 아기에게 향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다(요 8:12). 고린도후서 4:6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영광을 아는 빛을 사람의 마음에 비추신다. 시온의 빛이 하나님에게서 왔듯 교회도 그리스도에게서 빛을 받는다. 바울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까닭이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고 밝힌다(4:7).
에베소서 5:14의 일어나라는 명령과 그리스도가 비추시리라는 약속은 이사야 60:1을 떠올리게 한다. 인용의 출처는 밝혀져 있지 않다. 주 안에서 빛이 된 성도는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는 부름을 받는다(5:8). 예수도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이라 하시며 산 위의 동네처럼 빛을 비추어 사람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명하신다(마 5:14-16). 여호와의 찬송으로 열방을 부르는 시온의 사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삶으로 이어진다.
에베소서 2:13-22은 멀리 있던 이방인이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고 그분이 화평이 되어 막힌 담을 허셨다고 말한다. 이방인은 동일한 시민이자 하나님의 권속이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으로 지어져 간다. 이사야에서 시온의 성벽을 쌓던 이방인은 에베소서에서 그 처소를 이루는 백성이다. 화평이 다스리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소망은 십자가로 원수 됨을 허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60:10의 진노에서 긍휼로 바뀌는 은혜는 이사야 52:13-53:12의 고난받는 종과 연결된다. 신약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백성의 죄를 담당하셨다고 증언한다. 로마서 11:26은 59:20의 구속자 약속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한다. 하나님이 심어 의롭게 만드시는 60:21의 백성을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받은 백성으로 읽는다.
요한계시록 21:11, 23-26은 이사야 60:3, 5, 11, 19-20의 장면과 표현을 이어 새 예루살렘을 그린다. 성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해와 달이 필요 없으며 어린 양이 등불이시다. 만국은 그 빛 가운데 다니고 왕들은 영광을 가지고 들어오며 성문은 닫히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영원한 빛이 되신다는 약속에서 요한은 하나님과 어린 양을 함께 성전과 빛으로 증언한다(계 21:22-23). 어린 양의 열두 사도라는 표현은 그분이 예수이심을 밝힌다(21:14).
요한계시록 22:5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비추시며 백성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한다. 이사야 60:21의 영원한 기업이 이 소망과 이어지고, 슬픔의 끝은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눈물을 닦고 애통을 없애시는 21:3-4에서 이루어진다. 그 성은 여전히 예루살렘이며 문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기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21:12-14). 열방은 시온에 주신 약속에 참여한다.
이사야 60:11-12에서는 왕들이 이끌려 오며 시온을 섬기지 않는 나라들이 망한다. 요한계시록 21:24-27에서는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성에 들어오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이 입성한다. 들어오지 못할 자는 민족에 따라 나뉘지 않고 속된 것, 가증한 일, 거짓말하는 자로 구별된다. 거룩함은 유지되며 입성의 자격은 어린 양에게서 주어진다. 생명나무의 잎사귀는 만국을 치료한다(22:2). 열방은 어린 양의 성에서 생명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빛은 이미 비쳤지만 모든 눈물이 닦이고 밤이 사라질 성은 아직 기다리는 미래다. 에베소서의 교회도 완성된 성전이 아니라 함께 지어져 가는 처소다. 성도는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정하신 때의 완성을 기다리고 그리스도에게 받은 빛을 비춘다.
현대적 적용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명령은 여호와의 영광이 먼저 임했다는 약속에 근거한다. 교회의 빛은 스스로 만든 능력과 성과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영광을 비추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빛의 자녀처럼 살아야 한다. 59장의 죄 고백과 64장의 황폐함에 대한 탄식이 이어지듯, 받은 빛을 믿는 성도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상실을 슬퍼할 수 있다.
열린 성문으로 열방이 들어오는 약속은 그리스도의 피로 멀리 있던 사람들이 가까워진 복음과 이어진다. 출신과 배경을 이유로 하나님 백성의 참여를 막을 수 없다. 새 예루살렘의 문은 열려 있고 거짓과 가증한 일은 들어가지 못한다. 사람을 맞아들이는 은혜와 공동체 안의 거짓과 착취를 바로잡는 거룩함을 실천해야 한다.
열방의 재물은 제단과 여호와의 이름을 향한다. 교회나 어느 민족이 다른 이의 자원을 차지할 권리가 이 약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나라들의 심판도 시온에게 폭력의 권한을 주는 명령이 아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에서는 강포가 그치고 화평과 공의가 다스린다. 권한을 가진 사람은 학대와 착취를 막고 약한 이의 억울함을 바로잡아야 한다. 교회의 성장이나 정치적 승리를 이 약속의 성취와 동일시할 수 없다.
지지 않는 빛과 슬픔의 끝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의 약속이다. 슬퍼하는 사람에게 지금 슬픔을 끝내라고 요구하거나 작은 공동체에 수적 성장을 보장하는 말로 사용할 수 없다. 작은 자를 강국으로 만드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 성도는 눈물을 닦으실 하나님과 어린 양을 기다리며 오늘 받은 빛을 정직과 자비의 행실로 비춘다. 그 행실의 목적은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