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50:2에서 하나님은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고 물으셨다. 4절부터 1인칭으로 말하는 사람의 고백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처럼 들린다. 백성은 부르심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 사람은 날마다 귀를 열고 듣는다. 4-9절에서 그는 ‘주 여호와’를 네 번 부르며(4, 5, 7, 9절), UBS 해설은 7절이 4절과 5절처럼 ‘주 여호와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셨다’는 틀로 시작한다고 지적한다.3 그가 배우고 듣고 견디고 확신하는 일은 모두 주 여호와께서 먼저 하신 일에서 출발한다. 4-9절은 그를 ‘종’이라 부르지 않지만, 10절이 그의 말을 “그의 종의 목소리”라고 부르므로 이 화자가 여호와의 종임을 알 수 있다.
주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학자들의 혀”(לְשֹׁון לִמּוּדִים, 레숀 림무딤)를 주셨다(4절). 이 ‘학자’는 ‘배우다’와 어근이 같은 말로, 가르치는 사람보다 배우는 사람, 곧 제자를 가리킨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해설은 종이 남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배우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하고, ‘혀’를 말하는 능력과 전해야 할 말로 본다. 그 목적은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려는 데 있다. ‘도와 줄’(לָעוּת, 라우트)은 구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동사여서 뜻이 다소 불확실하다. UBS 해설에 따르면 BDB 사전은 이 말을 ‘돕다’로 풀고, 칠십인역은 ‘알맞은 때에’라는 말을 더해 읽는다. 해설은 ‘곤고한 자’를 몸의 피로보다 낙심으로 지친 사람, 곧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던 포로들로 보고 40:1의 “내 백성을 위로하라”와 연결한다.1 40:29에서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신다던 하나님이 이제 종의 말로 그 일을 하신다.
그 혀는 날마다 열리는 귀에서 나온다. 4절 후반은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라고 ‘깨우다’를 두 번 써서 되풀이되는 일을 그린다. UBS 해설은 같은 동사를 반복하며 둘째 동사에 ‘나의 귀’를 덧붙인 이 표현을 계단식 병행으로 보고, 날마다 이어지는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읽는다.1 그 목적인 “학자들 같이”도 앞의 ‘학자들의 혀’와 같은 말이어서 4절을 감싼다. 종은 배우는 자의 귀로 들은 만큼 배우는 자의 혀로 말한다. 같은 ‘깨우다’ 동사는 51:9에서 백성이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라고 부르짖을 때 다시 나온다. 아침마다 종의 귀를 깨우시는 하나님께 백성은 그 팔을 깨워 구원해 달라고 호소한다.
5절에서 배움은 순종으로 이어진다. 주 여호와께서 귀를 여셨고, 종은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라고 고백한다. 원문은 ‘나는’을 따로 앞세워 화자를 강조한다. 48:8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했고 그들이 모태에서부터 배역한 자라 불렸다고 하셨다. 귀가 닫혀 배역한 백성과 귀가 열려 거역하지 않는 종이 대조된다. 종은 이스라엘이 실패한 자리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순종을 보여 준다. 개역개정에서 5절은 6절과 한 문장으로 이어져, 6절의 고난을 들은 대로 걸어간 길의 연장으로 읽게 한다.
그 길에서 종은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고, 모욕과 침 뱉음 앞에서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6절). ‘맡기며’는 ‘내가 주었다’라는 말로, 4절에서 주 여호와께서 혀를 “주사”라고 할 때와 같은 동사다. 하나님이 종에게 혀를 주셨고, 종은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내준다. 원문에는 ‘수염’이 없지만 뺨에서 뽑는 것은 수염이므로 개역개정은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로 풀었다. UBS 해설은 ‘맡기다’가 종의 자발성을 보여 준다고 하고, 수염을 뽑는 일은 남자를 모욕하는 전통적인 방식이며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경멸의 표시라고 설명한다. 또 이 종이 고난을 받아들였지만 스스로 찾아 나서지는 않았다고 강조한다.2
7절은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로 시작하여 두 결론을 끌어낸다. 원문은 ‘그러므로’를 두 번 쓰고, 개역개정은 이를 “도우시므로”와 “굳게 하였으므로”라는 연결 어미로 옮겼다. 첫 결론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의 동사는 6절의 ‘모욕’과 어근이 같다. 사람들은 모욕을 퍼부었지만 종은 그 모욕에 무너지지 않았다. 둘째 결론은 문자적으로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두었다’이다. 6절에서 가리지 않은 얼굴을 7절에서는 부싯돌처럼 세운다. UBS 해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두 결론의 근거이며, 부싯돌은 무엇이 닥쳐도 맞서겠다는 결심을 뜻하고, 체면을 잃는 일이 중대한 문화에서 이 고백이 큰 무게를 지닌다고 설명한다.3 종은 사람들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자기 명예를 맡긴다.
8-9절에서 종의 말은 법정의 언어로 옮겨 간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קָרוֹב מַצְדִּיקִי, 카로브 마츠디키)는 ‘가깝다’를 맨 앞에 두어 판결자가 이미 가까이 계심을 강조한다. UBS 해설은 8절의 낱말들을 모두 재판정의 말로 본다. ‘의롭다 하다’는 재판에서 무죄를 선언한다는 뜻이고, ‘다투다’는 정식으로 고소한다는 뜻이며, “나의 대적”(בַעַל מִשְׁפָּטִי, 바알 미쉬파티)은 문자적으로 ‘내 재판의 주인’, 곧 나를 고소하는 자다.4 “나와 함께 설지어다”는 원문에서 ‘우리가 함께 서자’는 1인칭 복수 청유형이다. 개역개정은 상대에게 명령하는 말로 옮겼지만, 원문에서 종은 고발자에게 함께 재판정에 서 보자고 청한다. 판결하실 분이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9절은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로 7절의 고백을 되풀이한다. 원문은 7절과 같은 형태이며, 개역개정은 흐름에 맞추어 “도우시므로”와 “도우시리니”로 달리 옮겼다.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의 동사는 ‘악하다고 선언하다’라는 뜻으로 8절의 ‘의롭다 하다’와 정반대의 판결이다. 신명기 25:1도 재판장에게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하라고 명한다. 하나님이 종을 의롭다 하셨다면 누구도 그를 정죄할 수 없다. 고발자들은 옷처럼 해어지고 좀이 그들을 먹는다. 큰 소리로 모욕하던 그들의 힘은 낡은 옷처럼 소리 없이 사라진다.
10절에서 종은 3인칭으로 언급되고 말씀은 청중을 향한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그 종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도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처지에 있을 수 있다. 개역개정의 ‘라도’는 원문에 따로 없지만, 어둠 속을 걷는 일이 신뢰를 그만둘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문맥을 살린다. UBS 해설은 이 청중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킨 포로들로 볼 수 있다고 하고, 어둠 속을 걷는 이가 문법상 종일 수도 있으나 문맥상 청중을 가리킨다고 읽는 해석을 소개한다.5 그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이다. ‘의지하다’는 무엇에 몸을 기대는 모습을 그린다. 빛이 없을 때 신자는 하나님께 몸을 기댄다.
11절은 반대편 무리를 향한다. “횃불을 둘러 띤 자”(מְאַזְּרֵי זִיקוֹת, 메앗제레 지코트)에서 마소라 본문은 ‘두르다, 띠다’를 뜻하는 동사를 쓰며, UBS 해설은 사해 사본도 같고 히브리어 구약 본문 프로젝트(HOTTP)도 이 읽기를 지지한다고 소개한다. 해설은 이 무리를 종과 그 메시지를 반대하는 자들로 보고,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걸어가며”를 스스로 위험을 부르는 길에 대한 반어로 읽는다.6 이 ‘불꽃’(אוּר, 우르)은 51:4의 “만민의 빛”에 쓰인 ‘빛’(אוֹר, 오르)과 자음이 같고 모음만 달라, 사람이 피운 불꽃과 하나님이 비추시는 빛이 대조된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의 손은 50:2에서 구속하지 못할 만큼 짧지 않다고 하신 그 손이다. 자기 불을 의지하며 걷겠다던 이들은 결국 고통이 있는 곳에 눕는다.
51:1-8은 종의 목소리를 듣는 무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내게 들을지어다”(1절), “내게 주의하라”(4절), “내게 듣고”(7절)라는 세 부름으로 짜여 있다. 종의 목소리를 듣는 일과 하나님께 듣는 일이 하나로 이어진다. 1절의 청중은 “의를 따르며”(רֹדְפֵי צֶדֶק, 로드페 체데크)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자들이다. NET 노트는 이 ‘의’에 대해 ‘의’와 ‘정의’ 외에 NLT의 ‘구원을 바라는’이라는 번역도 소개한다.7 6절과 8절에서 공의와 구원이 짝을 이루므로, 이들은 바르게 살려고 애쓰면서 약속된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고 하신다. 두 동사는 수동형이어서 백성이 스스로 생겨나지 않고 어떤 근원에서 떠내어졌음을 강조한다.
그 근원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다(2절). NET 노트에 따르면 반석과 구덩이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가리키고, 이사야는 먼 조상인 두 사람을 듣는 이들을 직접 낳은 부모처럼 말한다.7 원문의 ‘너희 아버지 아브라함’,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너희를 낳은’ 사라가 그 표현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곧 그가 하나였을 때 그를 부르고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셨다. ‘창성하게 하다’는 창세기 1:28의 ‘번성하라’와 어근이 같으며, NET 노트도 여기의 복을 생육하는 힘을 주시는 일로 읽을 수 있다고 본다.7 아브라함은 혼자였고 사래는 자식이 없었다(창 11:30). 자신들이 너무 적고 약하다고 느꼈을 포로기의 남은 자들에게, 처음부터 민족을 만든 것은 사람의 숫자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복이었다.
3절은 그 하나님이 시온에 하실 일을 말한다. 원문은 ‘여호와께서 시온을 위로하셨다’는 3인칭 완료형으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회복을 이미 이룬 일처럼 말하여 그 확실함을 드러낸다. 개역개정은 이를 “나 여호와가 … 위로하여”라는 1인칭으로 옮기고 “같게 하였나니”라는 과거형으로 어감을 살렸다. 하나님은 사막을 에덴 같게,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신다. 롯이 눈에 보기 좋은 ‘여호와의 동산 같은’ 땅을 골랐다면(창 13:10), 여기서는 하나님이 사막이 된 시온을 직접 동산으로 만드신다. 황폐한 곳에 기뻐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다시 울린다. 2절의 아브라함과 3절의 에덴은 백성의 시작과 세상의 시작을 돌아보게 하여, 처음에 일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4절의 둘째 부름에서 하나님은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고 하신다. ‘귀를 기울이라’는 50:4-5의 ‘귀’와 어근이 같아, 종의 귀를 여신 하나님이 이제 백성 전체에게 귀를 기울이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율법, 곧 하나님의 가르침이 그에게서 나가고 그의 공의가 만민의 빛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의’는 50:8에서 ‘내 재판의 주인’이라 할 때 쓰인 말로, 종의 재판에 쓰인 말이 만민에게 세우시는 정의로 넓어진다. NET 노트는 토라를 ‘가르침’으로 옮길 수 있다고 보고, 개역개정이 “세우리라”로 옮긴 말(אַרְגִּיעַ, 아르기아)을 ‘쉬게 하리라’로 옮긴다.7 하나님의 정의가 만민 가운데 머물러 그들을 비춘다는 뜻이다.
5절의 “내 공의가 가깝고”(קָרוֹב צִדְקִי, 카로브 치드키)는 50:8의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와 첫 낱말이 같고, ‘공의’도 ‘의롭다 하다’와 어근이 같다. 종이 확신한 가까운 의롭다 하심이 백성과 민족들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공의로 넓어진다. 개역개정은 4절의 미쉬파트와 5절의 체데크를 모두 “내 공의”로 옮겼다. 이어지는 구절은 직역하면 ‘내 팔들이 민족들을 심판하리라’인데, NET 노트는 이를 민족들을 위하여 정의를 베푸는 일로도 읽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7 그래서 섬들은 그 팔을 두려워하기보다 바라고 의지한다. 42:4의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가 다시 울린다.
6절에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보게 하신다. 1-2절에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보라’고 할 때와 같은 동사다. 그러나 그들이 볼 것은 사라짐이다.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כֶּעָשָׁן נִמְלָחוּ, 케아샨 니믈라후)에 대해 NET 노트는 동사를 ‘찢기다’로 풀 수 있고 완료형이 그 확실함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7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의 동사는 50:9에서 고발자들이 해어진다고 할 때와 같다. 종의 고발자들에게 일어날 일이 온 땅에 일어나고, 그 땅에 사는 사람들도 함께 죽는다. 그러나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폐하여지다’는 ‘깨지다, 꺾이다’라는 동사다. 가장 견고해 보이는 하늘과 땅보다 하나님의 구원이 더 오래간다.
7절의 셋째 부름은 “의를 아는 자들”과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을 향한다. 1절에서 의를 ‘따르던’ 이들이 여기서는 의를 ‘아는’ 이들로 불리고, 4절에서 하나님에게서 나간다고 한 율법이 이제 그들의 마음에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첫 구절(אַל־תִּירְאוּ חֶרְפַּת אֱנוֹשׁ, 알 티르우 헤르파트 에노쉬)은 직역하면 ‘사람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이다. 개역개정은 ‘사람’을 “그들”로 옮겼지만, 원문은 비방하는 이들이 연약하고 죽을 인간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51:12의 “죽을 사람”도 같은 말이다. “놀라지 말라”는 6절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폐하여지지’ 않는다고 할 때와 같은 동사다. 하나님의 공의가 꺾이지 않으므로 그 공의를 마음에 품은 백성도 비방 앞에서 꺾일 필요가 없다.
8절의 “옷 같이 좀이 그들을 먹을 것이며”는 50:9의 ‘옷’, ‘좀’, ‘먹다’를 다시 쓴다. 종이 자기 고발자들을 두고 한 말을 하나님은 종의 목소리를 듣는 백성의 비방자들에게 적용하신다. 8절 후반은 6절의 약속을 순서를 바꾸어 “나의 공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라고 되풀이한다. 두 낱말이 자리를 바꾸며 6-8절을 감싸고, 그 사이의 7절 백성은 사라지지 않는 공의와 구원에 둘러싸인다. 50:4-9의 종이 개인으로 경험한 의롭다 하심과 보호가 51:1-8에서는 그 종의 목소리를 듣는 공동체의 소망이 된다.
성경신학적 통찰
이사야 40-55장에서 ‘종’은 두 방향으로 쓰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나의 종”이라 부르며 위로하시지만(41:8; 44:1), 같은 종을 두고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탄식하신다(42:19-20; 48:8). 50:4-9의 종은 아침마다 귀가 깨워지고 거역하지 않는다.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42:23)는 물음은 50:10에서 “너희 중에 …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로 다시 나타난다. 듣지 못하는 종 이스라엘의 문제는 듣는 한 종이 나타나고 백성이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 풀리기 시작한다.
다른 종의 본문과 이어 읽으면 이 길이 더 분명해진다. 42:1-4의 종은 쇠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며 이방에 정의를 세운다. 49:4의 종은 헛되이 수고하였다고 탄식하면서도 자기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다고 고백한다. 50장에서 그는 매와 침 뱉음을 당하면서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라고 선언한다. 52:13-53:12에서는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린다(53:3). 50:6에서 모욕 앞에 얼굴을 가리지 않은 종을 이제 사람들이 외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종(50:8)은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53:11)에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종이 된다.
UBS 해설은 50:6의 고난을 예레미야의 경험과 견준다.2 예레미야는 말씀 때문에 종일 조롱거리가 되었지만 말씀이 마음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참을 수 없었고, 여호와께서 두려운 용사같이 함께하시므로 박해자들이 넘어지리라고 고백했다(렘 20:7-11). 그러나 곧이어 자기 출생을 저주할 만큼 무너졌다(20:14-18). 50장의 종은 뒤로 물러가지 않고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한다. 48:4에서 쇠의 힘줄 같은 목과 놋 같은 이마는 하나님께 맞서는 완고함이었지만, 에스겔 3:8-9에서 하나님은 그 완고한 백성 앞에 보내신 예언자의 얼굴과 이마를 그들보다 더 굳게 하셨다. 50:7의 굳은 얼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사람들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굳셈이다.
50:8-9의 법정은 40-55장의 법정 논쟁과 이어진다. 하나님은 섬들과 민족들을 재판 자리로 부르시고(41:1), 이스라엘에게 함께 변론하자고 하신다(43:26). 50:8에서는 같은 법정의 말이 종의 입에서 나온다. 54:17은 이 확신이 공동체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모든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정죄를 당하리니’(תַּרְשִׁיעִי, 타르쉬이)는 50:9의 “나를 정죄할 자”(יַרְשִׁיעֵנִי, 야르쉬에니)와 같은 동사이며, 원문은 ‘네가 유죄로 선고하리라’는 능동문이다. 고발자의 무기인 ‘혀’도 50:4에서 종이 받은 ‘혀’와 같은 단어다. 하나님께 받은 혀는 지친 자를 살리고, 하나님의 종들을 거슬러 일어난 혀는 정죄를 당한다. 한 종이 누린 변호가 ‘여호와의 종들’이 물려받는 기업이 된다.
51:7의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는 신명기 6:4-6, 말씀이 입과 마음에 있다는 30:14,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는 의인의 걸음이 실족하지 않는다는 시편 37:31을 잇는다. 이스라엘이 말씀을 마음에 두지 못하자 하나님은 율법을 그 속에 두고 마음에 기록하는 새 언약을 약속하셨다(렘 31:31-34). 51:4에서 하나님에게서 나간 율법이 7절에서는 백성의 마음에 있다. 날마다 귀를 깨우치심을 받는 종이 그 첫 모습이며, 그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율법을 마음에 품는다. 실족하지 않는 의인의 걸음은 뒤로 물러가지 않는 종의 걸음과 만난다.
51:1-2는 구원 역사를 출발점에서 다시 읽게 한다. NET 노트는 아브람을 부르신 창세기 12:1-3을 하나님이 세상을 구속하시는 계획의 출발점으로 설명한다.8 약속을 받을 때 아브라함은 혼자였고 사래는 자식이 없었다. 에스겔 33:24에서 예루살렘이 무너진 뒤 남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은 한 사람이었는데도 땅을 얻었으니 수가 많은 자기들에게는 더욱 이 땅이 주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에스겔은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서 땅을 차지하려는 그들을 책망한다. 이사야 51장은 같은 아브라함을 다르게 기억한다. 아브라함이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사람의 권리를 내세우는 근거가 되지 않고, 한 사람을 불러 큰 민족을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한다.
사라의 기억은 시온의 운명과 겹친다. 자녀를 잃은 시온은 돌아오는 자녀들을 보고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라고 놀라고(49:21), 잉태하지 못한 여인에게 노래하라는 부름과 장막터를 넓히라는 명령을 받는다(54:1-3). 사라와 리브가와 라헬, 한나에게 그러셨듯 하나님은 불가능해 보이는 자리에서 생명을 일으키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람의 힘으로 이어진 혈통이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나는 공동체다.
51:3의 에덴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사람을 두어 경작하며 지키게 하신 동산(창 2:8-15)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은 그 동산에서 쫓겨났고 이스라엘도 땅에서 쫓겨나 포로가 되었다. 에스겔 36:35도 포로 후의 황폐한 땅이 에덴 동산같이 되리라고 말한다. 이사야 65:17-18은 새 하늘과 새 땅, 즐거운 예루살렘의 창조를 약속한다. 하늘과 땅은 옷같이 낡아 바뀌어도 하나님은 영원히 같으시다는 시편 102:25-27처럼, 51:6-8은 지금의 창조 세계가 영원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는 그 너머까지 이어진다고 말한다. 51:3의 에덴 회복은 하나님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구원사의 마지막을 미리 보여 준다.
51:4-5의 율법과 정의, 빛과 구원, 섬들의 앙망은 시온에서 율법이 나오리라는 2:2-4, 섬들이 종의 교훈을 앙망하리라는 42:1-4, 종을 이방의 빛으로 삼으시는 49:6을 잇는다. 42장과 49장에서 종에게 맡겨진 일이 51장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일로 선언된다. 하나님께 배운 혀로 말하는 종의 말이 하나님에게서 나가는 가르침이 된다.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창세기 12:3의 약속을 하나님은 종과 그의 목소리를 듣는 백성 가운데서 이루어 가신다.
기독론적 해석
UBS 해설은 이 화자를 종으로서 말하는 예언자로 소개한다.1 그는 포로기 공동체 안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매와 침 뱉음을 당했고, 하나님이 자신을 의롭다 하실 것을 믿었다. 그러나 귀가 열리지 않은 이스라엘과 박해 속에서 무너진 예언자들을 생각하면, 이 종은 한 예언자의 경험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한 순종을 이루고, 52:13-53:12에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사야서는 그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이사야 53장을 읽던 에디오피아 내시가 선지자가 말한 이가 누구인지 묻자 빌립은 그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전했다(행 8:34-35). 초대 교회는 종의 본문이 남긴 물음의 답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았다.
복음서는 예수를 날마다 아버지께 듣는 아들로 그린다. 많은 병자를 고치신 다음 날 새벽에도 예수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막 1:35). 그는 자신의 교훈이 보내신 이의 것이며 아버지께서 가르치시고 명령하신 대로 말한다고 하셨다(요 7:16; 8:28; 12:49-50).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배우는 자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신 것이다. 히브리서 5:7-9는 예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시고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으며, 온전하게 되신 뒤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말한다. 그 영원한 구원은 51:6, 8에서 하나님이 영원하다고 하신 구원과 이어진다.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라는 고백은 잔이 지나가기를 구하시면서도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기를 구한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가장 깊이 드러난다(마 26:39).
곤고한 자를 말로 돕는 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시는 예수의 말씀에서 들린다(마 11:28-30).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예수는 ‘딸’이라 부르시며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다(막 5:34). 그 한마디가 오랫동안 부정한 상태로 지내야 했던 여인을 일으켰다. 54:13의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에서 ‘교훈을 받을’(לִמּוּדֵי, 림무데)은 50:4에서 ‘학자들’로 옮긴 말과 같은 단어다. 예수는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자기에게 온다고 하신다(요 6:45). 한 종이 받았던 배우는 자의 귀가 그리스도께 오는 모든 사람에게 열린다.
누가복음 9:51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말하는데, 원문은 ‘얼굴을 굳게 하셨다’는 표현이어서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한 종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는 인자가 능욕과 침 뱉음과 채찍질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겠지만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미리 말씀하셨다(막 10:33-34; 눅 18:31-33).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얼굴을 가리고 주먹과 손바닥으로 쳤다(막 14:65; 15:19; 마 26:67). 예수는 자기를 잡으러 온 무리 앞에 스스로 나서시고 베드로에게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으며(요 18:4-11),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구하지 않으셨다(마 26:53-54). 등을 ‘맡긴’ 종의 자발성이 예수의 수난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베드로전서 2:21-24는 욕을 당하실 때 맞대어 욕하지 않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자신을 맡기신 그리스도를 신자의 본으로 제시한다. 판결을 하나님께 맡긴 50:7-9의 종과 닮았고, 예수도 십자가에서 자기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다(눅 23:46). 베드로는 그 고난을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다는 이사야 53장의 말로 풀이한다(53:5, 9). 베드로전서가 50장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독자는 모욕 앞에 물러서지 않은 종과 우리의 죄를 지고 매를 맞은 종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읽게 된다. 신자는 자기 죄를 대신 지신 분께 나음을 입은 사람으로 그분의 걸음을 따른다.
공회는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정죄했고(막 14:64), 로마 총독은 그를 범죄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게 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그 판결을 뒤집으셨고, 그리스도는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셨다(딤전 3:16).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50장의 종은 자신이 옳다는 확신으로 고발자들에게 맞섰지만,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데도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고 정죄를 받으셨다(사 53:5-6, 11).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종이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종이 된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롬 4:25).
그래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도 종의 법정 질문을 자기 질문으로 삼는다. 바울은 누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겠느냐고 묻고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답한다. 누가 정죄하겠느냐는 물음에는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킨다(롬 8:31-34).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사 50:8-9)가 거의 그대로 다시 울린다. 신자가 고발 앞에 설 수 있는 근거는 자기 결백이 아니라 의롭다 함을 받으신 종이 그들을 위해 대신 정죄를 받으셨다는 사실이다. 송사하는 혀를 이기는 것이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라는 54:17의 약속이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50:10은 빛이 없는 사람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라고 말한다. 십자가에서 온 땅에 어둠이 덮였을 때 예수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막 15:33-34). 버림받은 듯한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신 이 신뢰는, 빛이 없을 때에도 자기 하나님께 기대라는 요구를 종 자신이 먼저 걸어간 길로 읽게 한다. 그 어둠을 지나신 예수는 세상의 빛이시다(요 8:1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후 4:6). 침 뱉음을 당하신 그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비친다. 반대로 스스로 피운 불로 길을 밝히려는 사람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요 3:19).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다고 경고했다(마 3:9). 반석에서 떠내어진 백성이라는 이사야의 비유를 떠올리게 하는 이 말은 혈통이 아브라함의 자손 됨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된 씨는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라고 말한다(갈 3:7-9, 16, 29). 아브라함은 자기 몸과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롬 4:17-19; 히 11:12). 51:2의 “혼자 있을 때에”가 신약에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증언이 되고, 그 능력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가장 크게 나타났다.
히브리서 1:10-12는 하늘과 땅은 옷처럼 낡아도 주는 영원히 같으시다는 시편 102편의 말씀을 아들에게 돌린다. 51:6에서 하나님의 구원에 돌린 영원함을 아들 자신에게서 보는 것이다. 예수도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자신의 말은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하셨다(마 24:35). 사람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51:7-8은 자기 때문에 욕을 먹고 박해를 받는 사람에게 하늘의 상을 약속하신 팔복(마 5:11-12)과 이어지고,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해 능욕받는 일을 기뻐했다(행 5:41). 그들이 받는 비방은 옷처럼 해어지지만 그들을 의롭다 하신 그리스도의 구원은 대대로 이어진다.
현대적 적용
50:4의 종은 남을 돕는 혀를 받기 전에 아침마다 귀가 깨워지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위로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께 듣고 배우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 지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서둘러 내놓는 해답보다 하나님께 들은 데서 나오는 알맞은 한마디다. 하나님께 배운 혀는 지친 자를 살리지만,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혀는 54:17이 말하는 송사하는 혀가 된다.
6-7절의 종은 사명 때문에 모욕을 당했지만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말씀을 따라 불의를 거절하다 조롱과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은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라는 고백을 붙들 수 있다. 동시에 이 종은 고난을 스스로 찾아 나서지 않았다. 자기 고집과 거친 말로 생긴 반대를 신앙의 고난이라 부를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욕을 당하실 때 맞대어 욕하지 않으셨다(벧전 2:23). 부당한 대우 앞에서 사실을 밝히고 바른 절차를 밟는 일은 필요하지만, 같은 모욕으로 갚지 않고 판결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께 맡긴다.
8-9절의 법정은 신자가 듣는 고발의 목소리를 생각하게 한다. 지난 잘못 때문에 계속 손가락질을 받거나 이미 회개하고 용서받은 죄가 스스로를 정죄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라는 고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롬 8:33-34). 갚아야 할 잘못이 있다면 사과하고 바로잡되, 이미 용서받은 죄에 묶여 스스로를 정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사람을 공동체가 계속 정죄한다면, 그 공동체는 종을 정죄하려던 자들의 자리에 선다.
50:10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종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도 빛이 없는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오랜 질병이나 응답이 보이지 않는 시간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다. 그때 하나님이 금하신 방법이나 거짓으로 상황을 덮어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내려는 마음이 11절이 경고하는 불이다. 치료와 조언을 구하는 일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정직한 걸음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자기 힘으로 빛을 만들려는 마음이다. 교회는 어둠을 걷는 사람에게 섣부른 설명을 주기보다 그의 곁에 머물며 함께 기도한다.
51:1-2는 작아졌다고 느끼는 공동체에게 아브라함과 사라를 돌아보게 한다. 혼자였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자식 없던 사라에게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신다. 그러나 에스겔 33장의 사람들처럼 아브라함을 자기 권리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역사가 깊은 교회나 믿음의 가문이라는 자부심은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대신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시므로(51:4-5), 그 가르침을 마음에 품은 백성은 먼 곳에서 온 이웃이 공정한 대우를 받고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교회의 문을 연다. 사람의 비방은 옷처럼 해어지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대대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