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49:13은 하늘과 땅과 산들을 불러 하나님이 고난당한 백성을 위로하셨다고 노래하게 한다. 그러나 시온은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탄식한다(14절). 개역개정의 “오직”은 이 말이 앞의 찬양과 맞서는 흐름을 드러낸다. 시온은 버림과 잊음을 이미 끝난 일처럼 말한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이사야 해설은 여기의 “잊다”가 기억이 흐려짐보다 일부러 돌아보지 않고 내버려 둠을 뜻한다고 설명한다.2
시온은 예루살렘 성과 그 백성을 한 인물로 그린 이름이다. 뒤에 성벽의 재건이 이어지므로 UBS 해설은 여기서 특히 도성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본다. 탄식의 배경은 주전 587년 바벨론이 예루살렘과 성전을 무너뜨린 일이다.2 앞서 49:1-13에서 하나님이 포로의 귀환을 약속하셨지만, 시온은 자신이 잊혔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기억과 돌아오는 자녀들(49:15-21), 나라들과 용사(22-26절), 이혼 증서와 채주에 관한 질문(50:1-3)으로 대답하신다.
하나님은 젖 먹는 자식을 잊고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어머니가 있겠느냐고 물으신다(15절). “긍휼히 여기다”는 10절에서 귀환하는 백성을 인도하시는 분과 13절에서 고난당한 백성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 쓰인 말이다.3 하나님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자신의 긍휼을 설명하신 뒤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한 여인으로 시작한 질문에서 “그들”이라는 복수형으로 바뀌는데, 칠십인역은 이 자리를 “여인”으로 옮긴다. 복수형은 세상의 어머니들을 묶어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3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וְאָנֹכִי לֹא אֶשְׁכָּחֵךְ, 베아노키 로 에쉬카헤크)는 독립 대명사를 앞세워 “나”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시온이 말한 “잊다”를 질문과 양보절과 약속에서 거듭 받으신다. 인간의 가장 강한 유대가 무너져도 하나님은 시온을 잊지 않으신다.3 그 기억은 시온의 성과 자녀들을 회복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16절에서 하나님은 시온을 손바닥에 이미 새기셨고 그 성벽이 항상 자기 앞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시온이 완료형으로 버림받았다고 말한 데 대해 하나님도 완료형 “새겼고”(חַקֹּתִיךְ, 하코티크)로 대답하신다. UBS 해설은 뒤의 성벽 언급과 칠십인역의 읽기를 따라 손바닥에 새긴 것을 시온의 이름보다 성의 그림으로 본다.4 하나님은 무너진 예루살렘을 늘 생각하시고 지켜보신다.
17절의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는 마소라 본문에서 “네 아들들이 서두른다”(מִהֲרוּ בָּנָיִךְ, 미하루 바나이크)이다. UBS 해설이 소개하는 사해사본은 “네 아들들” 대신 모양이 비슷한 “너를 세우는 자들”로 읽고, 둘째 행도 “너를 헐던 자들보다”라는 비교로 읽는다. 해설은 de Waard와 Hebrew Old Testament Text Project(HOTTP)의 판단을 따라 두 곳 모두 사해사본을 지지한다.5 이 읽기에서는 재건하는 자들이 허물던 자들보다 빨리 움직인다. 개역개정은 마소라 본문을 따라 자녀들의 귀환을 강조한다. 두 읽기 모두 시온을 무너뜨린 바벨론 세력이 떠나가리라는 회복의 약속을 전한다.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18절). 시온은 돌아오는 포로들, 곧 앞 절의 자녀들 또는 세우는 자들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라고 자신의 생명을 걸어 보증하시고, 시온이 그 무리를 장식처럼 두르고 신부처럼 단장하리라고 약속하신다. UBS 해설은 이 그림에서 귀환자의 수가 많고 그 귀환이 혼인날처럼 기쁘다는 뜻을 읽는다.6 버림받았다고 탄식한 시온이 자녀들로 단장한 신부가 된다.
19절의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 파멸을 당하였던 땅”은 이를 받는 동사가 없어 끊긴 듯한 문장이다. 대부분의 번역은 동사를 보충한다.7 그 폐허가 이제 주민 때문에 비좁아지고 시온을 삼켰던 정복자들은 멀리 떠난다. 20절의 “자식을 잃었을 때에 낳은 자녀”는 “네 자식 잃음의 아들들”(בְּנֵי שִׁכֻּלָיִךְ, 베네 쉬쿨라이크)이다. UBS 해설은 포로기 동안 태어난 이스라엘 자녀들로 보며, 자식을 잃은 모습은 주민을 잃고 애도하던 성을 그린 것으로 설명한다. 그 자녀들이 “이곳이 내게 좁으니 넓혀서 내가 거주하게 하라”고 요청한다. “넓혀서”는 문자적으로 “내게서 비켜 다오”, 곧 자리를 내 달라는 뜻이다.8
시온은 “누가 나를 위하여 이들을 낳았는고” 하고 놀란다(21절). “낳다”가 남성형이므로 “누가 이들의 아비가 되어 주었는가”로도 읽을 수 있다. 시온은 자녀를 잃고, 더 낳지 못하며, 포로로 끌려가 내쳐진 자기 처지를 네 낱말로 표현한다.9 개역개정은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워졌으며 사로잡혀 유리하였거늘”로, NET는 “bereaved and barren, dismissed and divorced”로 옮겨 불임과 이혼의 그림을 살린다.1 “이들을 누가 양육하였는고”도 “누가 이렇게 많아지게 했는가”로 읽을 수 있다. “나는 홀로 남았거늘”은 유다의 다른 성읍에 주민이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시적 과장이다.9 시온이 설명하지 못하는 자녀들의 귀환은 22절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22절에서 주 여호와는 나라들을 향해 손을 들고 기치를 세우신다. 이는 시온의 자녀들을 데려오라는 신호다. 5:26에서 같은 신호로 유다를 칠 나라들을 부르셨지만, 여기서는 흩어진 자녀들을 돌려보내게 하신다. 나라들은 아들들을 품에 안고 딸들을 어깨에 메어 안전하게 데려온다.10 시온이 자신을 잊으셨다고 원망했던 주께서 직접 자녀들을 모으신다.
왕들은 양부가 되고 왕실의 여인들은 유모가 된다(23절). 보통 종이 맡던 양육과 보호를 왕실이 맡으면서 시온과 나라들의 관계가 뒤집힌다.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발의 티끌을 핥는 모습은 패한 왕이 승리한 왕에게 완전히 복종함을 그린 시적 과장이다.11 목적은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에 있다. “나를 바라는 자”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의지하는 이들로, 그들이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약속은 그 기대가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뜻이다.11 시온이 칼을 드는 대신 하나님이 나라들을 부르셔서 이 일을 이루신다.
24절은 용사에게서 노획물과 포로를 되찾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질문자는 예언자일 수도 시온일 수도 있으나 본문은 밝히지 않는다. 둘째 행의 “승리자에게 사로잡힌 자”는 마소라 본문에서 “의인의 포로”(שְׁבִי צַדִּיק, 셰비 차디크)다. 사해사본과 다른 초기 본문은 25절처럼 “폭군”으로 읽는다. UBS 해설은 비슷한 글자 모양에서 생긴 필사상의 혼동 가능성을 설명하며, HOTTP가 “폭군”을, NJPS가 마소라 본문을 따라 “victor”를 택한다고 소개한다.12 개역개정의 “승리자”도 마소라 본문을 살린 번역으로 볼 수 있다. NET는 “conqueror”로 옮긴다.1 바벨론의 손에서 포로를 되찾는 일은 인간의 눈에 불가능해 보였다.
25절에서 하나님은 용사의 포로도, 폭군의 노획물도 건져내겠다고 답하신다. 앞 절의 “노획물-포로” 순서가 “포로-노획물”로 바뀌며 질문을 되받는다.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는 시온과 다투는 자와 하나님이 친히 다투시겠다는 뜻이다. “다투다”는 법정의 송사와 실제 싸움에 모두 쓰이며, UBS 해설은 여기서 하나님을 시온 편에 서서 싸우는 전사로 본다.13 “내가 … 대적하고”, “네 자녀를 내가 구원할 것임이라”는 두 행 모두 “내가 친히”를 강조한다. 시온에게 없는 구원의 힘을 하나님이 행사하신다.
26절에서 압제자들이 자기 살을 먹고 자기 피에 취하는 모습은 서로를 무너뜨리며 멸망하는 세력을 그린 과장된 은유다. UBS 해설도 문자적 식인으로 읽지 않는다.14 시온을 삼켰던 자들이 자기 자신을 삼킨다. 그 결과 “모든 육체”, 곧 모든 사람과 민족이 여호와를 알게 된다.14 하나님은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이시며, 이 세 칭호는 60:16에 같은 순서로 되풀이된다. “구속자”(וְגֹאֲלֵךְ, 베고알레크)는 팔린 친족을 되찾는 가까운 친척을 가리키는 말에서 왔다.
50:1에서 하나님은 시온의 자녀들에게 어머니를 내보낸 이혼 증서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 “이혼 증서”(סֵפֶר כְּרִיתוּת, 세페르 케리투트)는 신명기 24:1-4의 규정을 배경으로 한다. 증서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시온과 관계를 영구히 끊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이어 어느 채주에게 자녀들을 팔았느냐고 물으신다. 빚을 갚지 못한 아버지가 자녀를 종으로 팔던 관습(출 21:7)을 배경으로 하지만, 하나님께는 빚을 진 상대가 없다.15
포로가 된 원인은 백성의 죄악과 배역이다. 질문에서는 “내가 … 내보낸”, “내가 … 팔았느냐”라는 능동형이 쓰이지만, 대답에서는 “너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 “배역함으로 말미암아 내보냄을 받았느니라”라는 수동형과 원인의 표현이 앞선다. 대답은 둘째 질문의 “팔다”를 먼저, 첫째 질문의 “내보내다”를 뒤에 받아 자녀와 어머니 모두의 책임을 밝힌다.15 하나님은 관계를 끊거나 채무 때문에 백성을 내버리지 않으셨다. 백성의 죄가 포로를 불러왔다.
50:2는 하나님이 오시고 부르셔도 응답하지 않은 백성을 책망한다. 하나님은 구원의 소식을 가지고 오셨지만 백성은 믿지 않았다.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에서 “손이 짧다”는 힘이 없다는 관용 표현이다. 히브리어는 “짧다”를 거듭 써서 하나님이 구원할 능력을 잃으셨다는 생각을 강하게 반문한다.16 앞 절에서 팔린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속량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되찾을 능력이 있으시다.
하나님은 꾸짖음으로 바다를 말리고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신다(50:2). UBS 해설은 이 꾸짖음을 명령으로 보고, 2b-3절이 홍해 사건과 애굽에서 보이신 능력을 가리킬 수 있다고 설명한다.16 물고기가 죽어 악취를 내는 장면은 나일 강의 첫 재앙(출 7:18-21)을,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는 장면은 흑암 재앙(출 10:21-22)을 떠올리게 한다. “흑암”(קַדְרוּת, 카드루트)은 어둠과 애도를 겹쳐 놓고, 거친 상복인 “굵은 베”가 그 그림을 이어 간다.17 49:18에서 자녀들로 신부를 단장시키신 하나님은 50:3에서 하늘에 상복을 입히신다. 시온의 상실도, 바다와 하늘도 그분의 구원 능력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성경신학적 통찰
시온의 탄식은 성경의 탄식 전통에 서 있다. 시편 22:1(BHS 22:2)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이사야 49:14의 “나를 버리시며”와 같은 동사를 쓰고, 시편 13:1의 기도자도 하나님이 자기를 영원히 잊으시는지 묻는다. 예루살렘이 무너진 뒤의 애가 5:20에서도 버림과 잊음이 한 쌍으로 나온다. 이사야 40:27의 야곱도 자기 길이 여호와께 숨겨졌다고 말했다. 성경은 이런 탄식을 불신앙의 말로 지우지 않는다. 하나님은 시편 22편의 기도자에게 응답하시고, 40:28-31에서 피곤하지 않으신 창조주를 바라보게 하시며, 49:15-26에서 시온에게 긴 대답을 주신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억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출애굽기 2:24에서 하나님은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의 탄식을 들으시고 조상들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으며, 그 기억은 모세를 부르시는 일로 이어졌다. 이사야 44:21의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는 약속을 49:15는 어머니의 그림으로 다시 확인한다. 손바닥에 새긴 그림(49:16)은 지파들의 이름을 보석에 새겨 대제사장의 두 어깨와 흉패에 달아 여호와 앞에서 기념이 되게 한 출애굽기 28:9-12, 29를 떠올리게 한다. 거기서는 대제사장이 백성의 이름을 지고 하나님 앞에 섰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친히 시온을 자기 손에 새기신다. 62:6에서는 그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워 쉬지 않고 여호와께 기억하시게 하라고 하신다.
50:1의 이혼 증서는 언약을 혼인으로 그리는 성경의 흐름에 있다. 신명기 24:1-4는 남편이 아내를 내보낼 때 이혼 증서를 써 주라고 규정하고, 그 여인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가 다시 떠나면 처음 남편이 그를 다시 맞을 수 없다고 한다. UBS 해설은 이 규정을 50:1의 배경으로 제시한다.15 예레미야 3장은 이 규정을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에 적용한다. 하나님은 배역한 북이스라엘에게 이혼서를 주어 내쫓으셨고 유다도 같은 길을 갔다고 책망하시면서도(3:1, 8), 돌아오라고 부르시며 시온으로 데려오겠다고 약속하신다(3:12-14). 호세아 2장도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라는 선언(2:2) 뒤에 영원한 혼약을 약속한다(2:19-20). 이사야 50:1은 유다가 죄 때문에 포로가 되었어도 하나님이 관계를 끝내는 문서를 쓰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되 언약을 버리지 않으신다.
레위기 26장은 언약을 어긴 백성이 원수들의 땅으로 흩어지리라고 경고한 뒤, 그들이 죄악을 자복하면 하나님이 야곱과 이삭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겠다고 말한다(26:40-42). 원수들의 땅에 있을 때에도 그들을 내버리지 않으시고 언약을 폐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26:44). 신명기 30:1-5도 흩어진 백성이 마음으로 돌아오면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하늘 끝에서라도 모으시겠다고 한다. 시온은 포로를 언약의 끝으로 읽었으나, 모세의 언약은 포로를 심판과 회복 사이에 둔다. 50:1이 포로의 원인을 죄로 돌리는 것과 49:15-26이 회복을 약속하는 것은 이 언약 안에서 함께 선다.
50:1의 둘째 질문은 빚 때문에 자녀를 종으로 넘기던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출 21:7; 왕하 4:1; 느 5:5).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런 채주가 없다.15 레위기 25장은 가난하여 땅이나 몸을 판 사람을 가까운 친족이 무르게 하고 그를 “기업 무를 자”라 부른다(25:25, 47-49). 개역개정이 이사야에서 “구속자”로 옮긴 말이 같은 동사에서 나왔다. 하나님은 49:26과 54:5, 8에서 시온의 구속자로 자신을 밝히시고, 52:3에서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고 하신다. 빚 때문에 백성을 파신 적이 없으므로 되찾으실 때에도 바벨론에 값을 치를 의무가 없으시다.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50:2)는 팔린 자녀를 되찾을 권리와 능력을 함께 지니신 친족의 물음이다.
50:2-3은 출애굽의 기억에 기댄다. 하나님은 큰 동풍으로 바다를 물러가게 하여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셨고(출 14:21-31), 시편 106:9는 이를 하나님이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말랐다고 노래한다. UBS 해설도 50:2b-3이 홍해 사건과 출애굽 때 보이신 능력을 가리킬 수 있다고 본다.16 죽은 물고기의 악취와 하늘을 덮는 흑암은 나일 강의 재앙과 흑암 재앙(출 7:18-21; 10:21-23)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의 손에서 백성을 빼내신 하나님은 바벨론의 강한 손에서도 포로를 되찾으실 수 있다(49:24-25). 이사야 40-55장은 귀환을 광야의 길과 마른 땅의 물로 거듭 그려 새 출애굽으로 이해하게 한다.
민수기 11장에는 이 단락의 두 그림이 함께 나온다. 모세는 자신이 이 백성을 낳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고 가라 하시느냐고 항의했고(11:12), 고기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의심하자 하나님은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고 물으셨다(11:23). 광야의 모세는 양육자의 짐을 버거워했으나, 이사야 49:23에서는 이방의 왕들이 시온 자녀의 양부가 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처럼 포로기에도 질문으로 불신을 드러내시고 행동으로 답하신다. 59:1-2도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라고 말해, 구원이 늦어지는 원인을 하나님의 무력함이 아닌 백성의 죄에서 찾는다.
이사야 후반부는 버림받았다고 탄식한 시온을 차례로 일으킨다. 54:1은 잉태하지 못한 여인에게 노래하라 하며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으리라고 한다. 54:6-8은 시온을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로 부르면서 그 버림을 ‘잠시’로 한정하고 큰 긍휼과 영원한 자비를 약속한다. 60:4는 49:18의 첫 줄을 되풀이하고, 60:16은 49:26의 세 칭호를 같은 순서로 반복한다. 62:4는 시온을 더 이상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않겠다고 하며, 66:13은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이라고 말한다. 49:15의 어머니 그림이 하나님이 친히 위로하시는 약속으로 이어진다.
5:26에서 하나님은 기치를 세워 먼 나라를 불러 유다를 치게 하셨고, 11:12에서는 열방을 향해 기치를 세워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겠다고 하셨다. 49:22의 기치는 두 번째 방향을 잇는다. 심판의 도구였던 나라들이 시온의 자녀들을 안아 돌려보낸다. 왕들이 엎드리는 장면의 목적은 나라들의 굴욕에 있지 않고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49:23), 모든 육체가 여호와를 알게 되는 데(49:26) 있다. 종을 이방의 빛으로 삼으시는 49:6, 많은 백성이 여호와의 길을 배우는 2:2-4,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는 창세기 12:3이 이 그림의 바탕이다.
49:25에서 하나님은 시온과 다투는 자와 친히 다투겠다고 하신다. 시편 35:1의 기도자도 여호와께 자기와 다투는 자와 다투어 달라고 구하고, 예레미야 50:34는 이스라엘의 강한 구속자가 그들의 송사를 맡아 땅에는 평안을 주시고 바벨론 주민은 불안하게 하시리라고 말한다. 스스로를 변호할 힘도 포로를 되찾을 군대도 없는 시온의 송사가 하나님의 송사가 된다. 하나님은 백성의 죄를 심판하시면서도 압제하는 세력의 폭력을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 그러나 50:1이 말한 죄의 문제는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기독론적 해석
이 말씀은 먼저 무너진 예루살렘과 흩어진 유다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주전 539년 바벨론이 무너진 뒤 고레스의 칙령으로 포로들이 돌아오기 시작했지만, 귀환 공동체의 현실은 49:19-20의 그림에 미치지 못했다. 느헤미야 7:4의 성읍은 넓고 크지만 주민이 적었고, 느헤미야 9:36-37의 백성은 조상에게 주신 땅에서 오히려 이방 왕들의 종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왕들이 양부가 되는 일도 바사 왕들의 제한된 후원을 넘지 못했다. 포로의 원인인 죄악과 배역도 귀환으로 사라지지 않아, 느헤미야 13장과 말라기는 돌아온 백성이 다시 언약을 어긴 일을 보여 준다. 귀환은 약속의 성취를 시작했으며, 죄의 해결과 모든 민족이 여호와를 아는 구원은 기다려야 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고 묻고 그럴 수 없다고 답한다(롬 11:1-2).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악해졌어도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11:25-29). 이혼 증서가 없다고 하신 하나님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때에도 그들과 맺은 언약을 버리지 않으신다. 동시에 바울은 이방인이 믿음으로 그 나무에 접붙여졌다고 말한다(11:17). 49:21에서 시온이 놀라던 자녀들은 본래 돌아오는 이스라엘 포로였지만, 바울의 설명은 그 무리를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에 더해지는 이방인까지 품는 그림으로 넓혀 읽게 한다.
바울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우리 어머니”라 부르고, 잉태하지 못한 여인에게 즐거워하라는 이사야 54:1을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에 적용한다(갈 4:26-27). 54:1은 49:14-21의 자식 잃은 시온을 이어 받는 말씀이다. 시온이 자녀들의 출처를 설명하지 못했듯이(49:21), 교회도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낳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요 1:12-13).
예수는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예루살렘의 자녀를 모으려 하셨으나 그들이 원하지 않았다고 탄식하신다(마 23:37). 49:15에서 어머니의 사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처럼 자녀들을 모으려 하신 것이다. 그 거절은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50:2)을 떠올리게 한다. 요한복음 1:11도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예수는 그 성을 보며 우셨고(눅 19:41), 그들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라고 하시며 미래의 만남을 열어 두셨다(마 23:39).
예수는 십자가에서 시편 22:1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마 27:46). 시온은 죄 때문에 포로가 되고도 버림받았다고 느꼈으나 하나님은 이혼 증서를 쓰지 않으셨다. 죄가 없으신 예수는 죄인을 위하여 버림받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셨다. 그때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27:45). 하늘에 흑암과 굵은 베를 입히시는 50:3의 심판과 애도의 언어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예수는 그 자리를 지나 부활하셨고, 그를 믿는 이들은 하나님이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신다는 약속을 붙든다(히 13:5).
백성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다(50:1). 바울도 자신이 죄 아래에 팔렸다고 고백한다(롬 7:14). 값 없이 팔린 자들이 돈 없이 속량되리라는 52:3처럼, 신약은 그 속량의 값을 은이나 금이 아닌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한다(벧전 1:18-19). 예수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려고 오셨다(막 10:45). 하나님은 빚 때문에 자녀를 파신 적이 없지만, 죄에 팔린 자녀를 되찾으시려고 아들을 내어 주셨다. 시온을 내보낸 이혼 증서는 없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는 우리를 거스르던 증서가 지워졌다(골 2:14).
예수는 강한 자를 먼저 결박해야 그 집을 강탈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귀신을 쫓아내는 자신의 일을 설명하셨다(막 3:27; 눅 11:21-22). 이사야에서 용사와 폭군은 바벨론이었지만, 예수의 사역에서는 사람을 사로잡은 더 깊은 세력, 곧 사탄과 죄와 죽음이 드러난다. 예수는 죽음으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를 멸하고 평생 종노릇하던 이들을 놓아 주셨으며(히 2:14-15), 하나님은 십자가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이기셨다(골 2:13-15). 용사의 손에서 포로를 빼앗아 오시는 하나님은 되찾은 자녀를 다시 빼앗기지 않으신다(요 10:28-29).
예수는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셨고, 제자들은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느냐고 두려워했다(막 4:39-41). 구약에서 바다를 꾸짖는 일은 여호와께 속한 일이었으므로(50:2), 이 사건은 “내 손이 어찌 짧아”라는 물음에 새롭게 답한다. 손바닥에 새긴 그림(49:16)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도마에게 보이신 못 자국 난 손(요 20:27)을 떠올리게 한다. 이사야의 그림이 예루살렘을 늘 기억하신다는 약속이라면, 예수의 상처는 그분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실제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확인해 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 가운데서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했다고 말하고(살전 2:7),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한다(갈 4:19). 사도행전 2장에서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각자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듣는다. 49:22에서 하나님이 손을 들어 나라들을 부르셨듯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신다(마 28:19-20).
신부처럼 단장한 시온(49:18)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 같은 새 예루살렘(계 21:2)으로 이어진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사 자신을 주시고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신다(엡 5:25-27). 시온 앞에 엎드리던 왕들(49:23)은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 성으로 들어가는 땅의 왕들로 이어진다(계 21:24). 그 성에서 하나님은 백성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신다(21:4). 시온의 탄식으로 시작한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성에서 완성된다.
현대적 적용
시온은 버림받았다는 탄식을 하나님께 말하고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는 대답을 듣는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도 시편 13편과 22편의 기도자처럼 탄식할 수 있다. 상실의 고통이 곧바로 사라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백성을 기억하시며, 그 약속에 따라 구원하신다.
자녀를 잃고 더 낳지 못하는 시온의 모습은 무너진 도성과 흩어진 백성을 그린 비유다. 이 말씀은 난임과 유산, 자녀 상실을 개인의 죄에 대한 벌로 설명하지 않는다. 50:1의 이혼 증서도 하나님과 언약 백성의 관계를 다룬다. 이혼이나 사별을 겪은 사람을 정죄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여인처럼 탄식한 시온에게 자녀들의 귀환과 신부의 기쁨을 약속하셨다.
50:1은 오랜 배역 끝에 포로가 된 언약 공동체에 죄를 묻는다. 죄를 고백해야 할 사람은 하나님의 무능이나 변심을 탓하며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고난을 이 구절로 설명하는 데에는 욥기와 요한복음 9장의 경고가 따른다. 하나님은 욥의 고난을 죄의 벌로 몰아간 친구들을 책망하셨고(욥 42:7), 예수는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고난을 그나 부모의 죄로 돌리지 않으셨다(요 9:3). 회개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은 언약을 끝내는 증서를 쓰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신다.
용사에게서 포로를 되찾으시며 바다를 말리시는 하나님은 구원할 힘을 잃지 않으셨다. 이 약속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 포로들은 귀환까지 오래 기다렸고, 귀환 뒤에도 약속의 완성을 기다려야 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고통받는 이에게 즉각적인 회복이나 원하는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왕들이 엎드리고 압제자들이 자기 살을 먹는 장면은 권력의 역전과 멸망을 그린 시적 과장이다. 목적은 시온과 모든 육체가 여호와를 아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은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원수가 주리면 먹이며 악을 선으로 이기라는 말씀을 따른다(롬 12:19-21). 이방인 신자도 이스라엘을 향해 자랑할 수 없다(롬 11:18). 하나님은 시온을 잊지 않으시며, 그 신실하심 안에서 나라들을 구원으로 부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