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48장은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명령(48:20), 광야에서 물을 내셨던 구원의 회상(48:21), 악인에게 평강이 없다는 선언(48:22)으로 끝난다. 고레스를 통한 바벨론의 몰락과 포로 해방을 선포한 뒤, 49장에서는 여호와의 종이 직접 섬들과 먼 곳의 민족들을 불러 사명을 들려준다. NET는 그를 42장에서 소개된 특별한 종으로 본다.1 “먼 곳”(מֵרָחוֹק, 메라호크)은 12절의 귀환자들이 오는 곳과 같은 표현이다. 먼 민족들에게 향한 말씀이 먼 곳에서 돌아오는 행렬로 이어진다.
종은 태에서부터 여호와께 부름받았고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이름이 기억되었다고 증언한다.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הִזְכִּיר שְׁמִי, 히즈키르 셰미)는 이름을 마음에 떠올리셨다는 뜻보다는 불러 언급하셨다는 뜻이다.1 태와 복중을 병행한 표현은 종이 태어나 무엇을 하기 전부터 하나님이 그의 사명을 정하셨음을 강조한다.
2절에서 하나님은 종의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종을 갈고 닦은 화살처럼 만드신다. NET는 입을 그가 전할 말로 보고, 손 그늘에 숨기신 것은 알맞은 때에 쓰려고 아껴 두신 일로 설명한다.1 두 번 나오는 “숨기시며”와 “감추시고”의 목적어는 종 자신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무기이며, 그를 보호하고 쓰실 때를 정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4절에서는 이렇게 부름받은 종이 헛수고를 탄식한다. 사명과 실패의 경험 사이에서 종과 하나님의 대화가 이어진다.
3절에서 하나님은 종을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부르신다.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אֲשֶׁר־בְּךָ אֶתְפָּאָר, 아셰르-베카 에트파아르)은 하나님이 종을 통하여 자기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뜻이다. 재귀형 동사는 하나님이 종을 자랑스러워하신다는 뜻보다 하나님 자신이 영광을 얻으신다는 뜻을 나타낸다.2
종을 ‘이스라엘’이라 부르면서 야곱을 돌아오게 하는 일을 맡긴다는 점은 그의 정체에 관한 논의를 낳았다. 41:8-9, 44:21, 45:4에서 종은 백성 전체지만, 여기서는 개인처럼 말하며 이스라엘을 돌이킨다. 예언자 개인, 백성 전체, 백성 안에서 나머지를 책임지는 사람이나 무리라는 견해가 있다.2 NET는 포로 된 백성과 구별되는 ‘이상적인 이스라엘’로 본다. 종은 모세처럼 언약을 중보하고(8절) 속박에서 이끌어 내며(9절) 이스라엘이 맡았던 열방의 사명을 이룬다.1 그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지니고 이스라엘을 위해 일한다.
4절의 “그러나 나는”은 하나님의 영광 선언과 종의 경험을 맞세운다. 종은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고 탄식한다. “무익하게 공연히”(לְתֹהוּ וְהֶבֶל, 레토후 베헤벨)는 비슷한 뜻의 토후와 헤벨을 겹쳐 허무함을 강조한다.1 토후는 창세기 1:2에서 땅이 “혼돈하고”라고 할 때 쓰인 말이다. 종은 아무 성과 없이 힘마저 다 써 버렸다고 느낀다.
그러면서도 종은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고 고백한다. “나에 대한 판단”(מִשְׁפָּטִי, 미쉬파티)은 자신에 관한 바른 판단과 정당한 몫을, “나의 보응”(וּפְעֻלָּתִי, 우페울라티)은 일한 사람의 품삯을 가리킨다.1 종은 눈에 보이는 결과가 헛수고처럼 보여도 최종 판단과 수고의 값을 하나님께 맡긴다. 탄식과 신뢰가 같은 절에 놓인다.
5절에서 종을 태에서 지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לְשׁוֹבֵב יַעֲקֹב אֵלָיו, 레쇼베브 야아코브 엘라우)는 하나님이 종을 지으신 목적을 나타낸다. 개역개정은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라고 여호와를 설명하지만, 히브리어 구문에서는 종에게 맡긴 사명도 나타난다. 6절은 이 일을 종의 사명으로 명시한다. UBS는 회개와 자주 연결되는 이 동사가 포로에서 몸으로 돌아오는 일과 마음을 돌이키는 일을 함께 가리킨다고 본다.3
다음 구절에서 BHS 본문의 부정어 לֹא(로)를 따르면 ‘이스라엘이 모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개역개정의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는 소리가 같은 לוֹ(로, 그에게)로 읽는 뜻이다. 이 형태는 같은 절의 “그의 종으로”(לְעֶבֶד לוֹ, 레에베드 로)에도 나온다. 부정어로 읽으면 이스라엘이 아직 모이지 않는 현실이 4절의 탄식과 이어지고, ‘그에게’로 읽으면 사명의 목표가 드러난다. 이어 종은 여호와 앞에서 영화롭게 되었으며 하나님이 자기 힘이 되셨다고 고백한다. 힘을 다 써 버린 종에게 하나님 자신이 힘이 되신다.
6절에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보전된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는 일은 “매우 쉬운 일”이라고 하신다. 이 표현(נָקֵל מִהְיוֹתְךָ לִי עֶבֶד, 나켈 미흐요테카 리 에베드)은 ‘네가 내 종이 되는 것으로는 너무 가볍다’는 비교의 뜻이다.4 이스라엘의 회복에 더해 열방의 구원까지 맡기시기 때문이다. NET는 수사의문문으로 옮기면서도 회복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질문으로 읽지 않는다.1
하나님은 종을 “이방의 빛”(לְאוֹר גּוֹיִם, 레오르 고임)으로 삼아 자기 구원이 “땅 끝까지”(עַד־קְצֵה הָאָרֶץ, 아드-케체 하아레츠) 있게 하신다. 42:6에서도 주신 사명이다. 구원을 땅 끝에 흩어진 이스라엘 포로들의 해방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대부분의 번역은 모든 민족이 받는 구원으로 읽는다.4 48:20에서는 야곱을 구속하셨다는 소식을 땅 끝까지 반포해야 했다. 여기서는 그 구원 자체가 땅 끝에 이른다.
7절에서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자 거룩한 이께서 멸시받고 미움받으며 관원들의 종이 된 이에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לִבְזֹה־נֶפֶשׁ, 리브조-네페쉬)는 BHS에서 문자적으로 ‘생명을 멸시하는 이에게’로 읽히는 난점이 있다. NET는 사해사본의 다른 읽기에 따라 ‘멸시받는 이에게’라는 수동의 뜻을 택한다.1 하나님이 자기 종으로 지으신 사람이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의 종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신실하신 여호와께서 그를 택하셨기에 왕들과 고관들이 일어서며 경배할 것이다. 멸시받던 종의 높아짐은 52:13-15와 53:3으로 이어진다.
8절에서 하나님은 종에게 “은혜의 때에”(בְּעֵת רָצוֹן, 베에트 라촌) 응답하시고 “구원의 날에”(וּבְיוֹם יְשׁוּעָה, 우베욤 예슈아) 도우셨다고 하신다. UBS는 은혜의 때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때로 읽으며, 두 완료형 동사를 약속으로 보아 미래로 옮길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5 헛수고라고 느꼈던 종에게 하나님은 호의를 베풀고 도우실 때를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종을 “백성의 언약으로”(לִבְרִית עָם, 리브리트 암) 삼아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를 이루게 하신다. 42:6의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을 잇는 사명이다. 개역개정의 “나라를 일으켜”(לְהָקִים אֶרֶץ, 레하킴 에레츠)에서 ‘나라’에 해당하는 말은 기본적으로 ‘땅’이다. 6절에서 지파들을 일으키던 종은 그들이 살 땅도 일으킨다. UBS는 돌아온 포로들이 유다에 정착하고 바벨론의 파괴 뒤 황무해진 기업을 다시 나누어 받는 일로 풀이한다.5 모세가 언약을 중보하고 여호수아가 땅을 나누었던 일을 떠올리게 하는 이 사명은 백성이 다시 살아갈 터전을 회복한다.
9절의 “말하기를”(לֵאמֹר, 레모르)은 8절에서 종에게 맡긴 일들에 이어지며 말하는 주어를 따로 밝히지 않는다. 개역개정은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로 옮겨 여호와를 주어로 세운다. 문맥에서는 종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힌다. 갇힌 자에게 “나오라”(צֵאוּ, 체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הִגָּלוּ, 힉갈루)고 하신다. 42:7의 감옥과 흑암에서 이끌어 내는 사명이 여기서 귀환의 시작으로 나타난다.
귀환자들은 길과 헐벗은 산에서 풀을 뜯는 양 떼처럼 그려진다. 10절에서는 주림과 목마름, 더위와 볕에 상하지 않는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이가 이끌어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48:21이 사막에서 바위를 쪼개 물을 내신 일을 회상했다면, 49:10은 돌아오는 길에서도 같은 돌봄을 약속한다.
11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산들을 길로 삼고 대로를 돋우신다. 종을 무기로 만드신 하나님이 이제 장애물이던 산을 길로 만드신다. 40:3의 “우리 하나님의 대로”가 귀환자의 길이 된다. 12절의 사람들은 먼 곳과 북쪽과 서쪽, 시님 땅에서 온다. “서쪽에서”(וּמִיָּם, 우미얌)는 문자적으로 ‘바다에서’이며 지중해가 있는 서쪽을 가리킨다. UBS는 마소라 본문의 סִינִים(시님)과 사해사본의 ‘수에네 사람들’이라는 읽기를 비교하고 수에네를 오늘날 아스완이 있는 상이집트로 본다. 예레미야 44:1처럼 바벨론 침략 때 애굽으로 피한 유다 사람들도 있었으므로 남쪽 끝에서도 백성이 돌아온다고 풀이한다.6
13절에서 하늘과 땅과 산들은 여호와께서 백성을 위로하고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기에 노래한다. “위로하셨은즉”은 40:1의 “위로하라”와 같은 동사이며,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는 10절에서 귀환자를 이끄시는 분을 묘사한 동사와 어근이 같다. 길이 되었던 산들이 이제 노래한다. 40장에서 시작한 위로가 종의 사명을 통해 땅 끝까지 미치자 피조세계가 찬양으로 응답한다.
성경신학적 통찰
예레미야 1:4-10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모태에 짓기 전에 아셨고, 나오기 전에 구별하여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우셨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의 입에 말씀을 두셨다. 이사야 49:1-2의 종도 태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입을 칼처럼 받는다. 두 사람 모두 자기 계획보다 앞선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사명을 시작하며, 둘 다 사명이 이스라엘을 넘어 나라들에까지 미친다. 예레미야가 젊다며 망설였듯이(1:6) 이사야의 종도 헛수고였다며 탄식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1:8)고 하셨고, 이사야의 종에게는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49:8)라고 답하신다.
예레미야 1:9-10에서 입에 주어진 말씀은 나라와 왕국을 뽑고 파괴하며 다시 건설하고 심는다. 이사야 49:2의 날카로운 입도 역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다. 보냄받은 종의 권위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있다.
이사야 42:1-9는 49장의 사명을 먼저 소개한다. 하나님은 붙드시는 종에게 영을 주시고, 그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신다(42:6). 그 종은 눈먼 자의 눈을 밝히고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낸다(42:7). 49:6, 8-9는 이 표현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한다. 차이는 49장에서 종 자신이 말한다는 데 있다. 42장에서는 하나님이 종을 소개하셨는데, 49장에서는 종이 받은 부르심과 낙심과 새 사명을 1인칭으로 고백한다. 42:8에서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49:3에서는 이 종을 통해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
이사야 42:1-4의 종은 상한 갈대를 꺾거나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면서 이방에 정의를 세운다. 49장의 종도 멸시와 낙심을 겪는다. 하나님은 겉으로 강해 보이지 않는 종을 통해 약한 사람을 일으키고 열방에 자기 성품을 알리신다.
창세기 22:15-18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맹세하셨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열방을 향한 복의 통로로 부름을 받았다. NET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아 주변 나라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 주어야 했으나 실패했고, 이상적인 이스라엘인 종이 그 일을 이룬다고 설명한다.1 49:6의 “이방의 빛”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열방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일으키시고, 열방에도 구원의 빛을 비추신다.
출애굽기 19:3-6에서 하나님은 백성을 업어 자신에게 이끄신 은혜를 먼저 기억하게 하신 뒤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의 사명을 주신다. 이사야 49장의 종도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흩어진 백성을 일으키고 열방의 빛이 된다. 약한 백성을 회복하시는 은혜가 세계를 향한 사명의 근거다.
49:6의 ‘땅 끝’은 이사야 40-48장에서 이미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담아 온 표현이다. 45:22에서 하나님은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고 부르신다. 열방을 향한 초청이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선언과 함께 주어진다. 48:20에서는 바벨론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다는 소식을 땅 끝까지 반포해야 한다. 49:6은 이 두 흐름을 종의 사명 안에 모은다. 포로에서 돌아오는 이스라엘의 구속은 땅 끝에 들려줄 소식이 되고, 그 소식을 들은 민족들은 같은 하나님께 돌이켜 구원을 받도록 부름받는다. 45:23에서 하나님은 모든 무릎이 자기에게 꿇으리라고 맹세하셨는데, 49:7에서는 왕들과 고관들이 종을 보고 일어서며 경배한다. 그 경배의 이유도 종을 택하신 신실하신 여호와께 있다.
이사야 40:1-11은 위로의 말씀과 광야의 대로, 그리고 목자처럼 양 떼를 먹이시는 하나님으로 시작한다(40:11). 49:9-13은 이 장면을 다시 가져온다. 산이 길이 되고 대로가 돋우어지며(49:11), 긍휼히 여기시는 이가 양 떼를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신다(49:10). 출애굽기 17:1-7에서 목마른 백성에게 반석의 물을 주셨던 하나님이 이제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백성을 굶주림과 목마름에서 지키신다. 49장 바로 앞의 48:21도 하나님이 사막에서 바위를 쪼개 물을 내셨던 일을 회상하므로, 이사야는 출애굽 광야의 기억을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길 위에 겹쳐 놓는다. 40장의 약속은 종의 사명 안에서 구체적인 귀환의 길로 그려진다.
이사야 40:1-8은 죄와 형벌을 겪은 백성을 위로하며 풀 같은 사람과 영원히 서는 하나님 말씀을 대조한다. 49장의 종도 힘을 다했다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판단을 맡긴다. 종과 백성은 자신들의 힘이 충분해서가 아니라 말씀하신 하나님이 도우시기에 회복을 기다릴 수 있다.
40:3-5의 대로는 하나님이 오시는 길이며 49:11의 길은 백성이 돌아오는 길이다. 하나님은 광야와 산의 장벽을 바꾸어 먼 곳의 백성에게 오시고 그들을 이끄신다.
이사야 52:13-53:3은 멸시받은 종이 높아지고 왕들이 놀라 입을 봉하는 반전을 그린다. 49:7의 관원들 아래 있던 종도 왕들의 인정을 받는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신실하심이 현재의 멸시를 넘어 종의 장래를 결정한다.
호세아 11:1-4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부르고 걸음을 가르치며 먹이셨으나 백성은 우상을 따랐다. 야곱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이사야 49장의 사명은 이 관계의 회복을 향한다. 흩어진 백성의 귀환에는 마음을 돌이켜 구원자를 알고 받은 은혜를 증언하는 일이 따른다.
시편 85:9-13은 구원과 영광이 가까이 오고 땅이 산물을 내는 회복을 노래한다. 이사야 49장도 돌아온 백성에게 먹을 것과 물, 다시 살 땅을 약속한다. 고난당한 백성이 위로와 긍휼을 얻기에 하늘과 땅과 산이 찬양한다. 구원의 은혜는 공동체가 살아갈 세계를 회복한다.
기독론적 해석
누가복음 2:25-32에서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이다. 이 표현은 49:13과 40:1의 위로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안고 이 아기가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찬양한다(눅 2:32). NET는 이 절의 구문이 논쟁 중이라고 설명한다. ‘빛’과 ‘영광’을 나란히 놓아 예수가 이방에게는 빛,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라고 읽을 수도 있고, ‘빛’을 전체를 묶는 말로 보아 예수가 모두에게 빛이시되 이방에게는 계시,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7 어느 쪽이든 시므온은 이사야 49:6처럼 이스라엘과 열방을 함께 품는다.
49:4의 종은 헛되이 수고했다고 탄식하면서도 자기 공의와 품삯을 하나님께 맡겼다. 베드로전서 2:21-23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때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않으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고 말한다. 멸시를 받고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가 왕들의 경배를 받게 되는 49:7의 반전은 십자가에서 버림받고 부활로 높아지신 예수에게서 가장 깊이 드러난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는 부당한 고난을 실제로 당하시면서 보복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판단을 신뢰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
베드로전서 2:24-25에서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몸으로 담당하시고 길 잃은 양 같은 사람들을 영혼의 목자에게 돌아오게 하신다. 야곱을 돌아오게 하는 종의 사명은 이 구원의 주제와 연결된다. 포로의 땅과 공동체를 회복하는 이사야의 약속에 이어 신약은 그리스도가 죄를 담당하여 하나님께 돌아갈 길을 여셨다고 증언한다. 신자는 죄를 떠나 의에 대하여 살도록 부름받는다.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먼저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전했고(13:14-43), 다음 안식일에 거부를 당한 뒤 이방인에게로 향하면서 이사야 49:6을 인용한다(13:44-48).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NET는 바울과 바나바가 이사야서의 종이 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으며, ‘땅 끝’이라는 표현이 사도행전 1:8을 떠올리게 한다고 설명한다.8 그리스도가 이루신 종의 사명에 사도들이 참여하여 구원의 빛을 땅 끝까지 비춘다. 사도행전에서 이 일은 회당에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이 먼저 이 소식을 들었다.
사도행전 13:43에서는 많은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른다. 뒤이어 반대와 비방이 일어나 사도들은 이방인에게 향하지만, 말씀을 받아들인 유대인들도 있었다. 이 일은 유대인 전체에 대한 폐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약속대로 예수를 세우고 죽음에서 살리시며 믿는 이에게 죄 사함을 주신다는 복음이 이스라엘과 열방에 전파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1-2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하며 이사야 49:8을 인용한다.9 “내가 은혜 베풀 때에”(καιρῷ δεκτῷ, 카이로 데크토)를 인용한 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선언한다. ‘은혜 받을 만한’(εὐπρόσδεκτος, 유프로스데크토스)은 인용문의 δεκτῷ와 어근이 같으며 접두어로 뜻을 강조한다. 종에게 응답하신 은혜의 때가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열렸기에 하나님과의 화목을 미룰 수 없다. 이어지는 6:4-10에서 바울은 환난과 매 맞음, 갇힘 중에도 깨끗함과 인내와 자비와 거짓 없는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말한다. 은혜의 때에도 고난은 계속되며, 일꾼은 눈에 보이는 성과에 의지하지 않고 받은 은혜에 따라 봉사한다.
요한계시록 7:16-17은 이사야 49:10을 이어받아 큰 환난에서 나온 무리가 다시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고 어린 양의 인도로 생명수 샘에 이를 것이라고 약속한다. 여러 나라와 족속과 언어에서 온 이들은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었으며 구원이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다고 고백한다(7:9-17). 열방을 향한 빛과 목마르지 않을 귀환의 약속이 어린 양의 목자 사역에서 이루어진다. 자신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께서 백성을 끝까지 돌보시고 하나님은 그들의 눈물을 씻으신다. 현재의 고난을 지나 이 회복을 바라보는 소망이 고난 중의 봉사를 붙든다.
현대적 적용
종은 하나님께 부름받았으면서도 헛되이 힘을 다했다고 탄식한다(4절). 신앙은 이런 탄식을 숨기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종은 자기 수고가 무의미하다는 결론 대신 하나님께 바른 판단과 품삯을 맡긴다. 성도도 보이는 결과만으로 부르심과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으면서, 낙심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다.
2절에서 종을 감추고 보호하며 쓰실 때를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이 약속으로 오늘의 모든 지연이 더 큰 성공을 예고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종 자신도 헛수고를 겪었다. 하나님께 맡겨진 사명의 가치는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크기로 결정되지 않는다.
종의 날카로운 입은 사람을 모욕할 권한을 뜻하지 않는다. 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야곱을 돌이키고 갇힌 이를 해방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말씀을 맡은 사람도 자기 분노나 명성을 앞세우는 대신 구원자께서 주신 말과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종을 높이시는 약속은 멸시받은 사람의 복수욕을 채우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실제로 부당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께 자신을 맡기셨다(벧전 2:21-23). 보복을 내려놓는 믿음을 피해의 은폐나 가해자의 책임을 덮는 요구로 사용할 수 없다. 종의 판단을 맡으시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일으키는 사명을 거두지 않고 열방을 향한 빛을 더하신다(6절). 교회는 자기 민족과 익숙한 관계 안에 구원의 소망을 가둘 수 없다.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을 따라 이방인에게도 미친다. 이방인 신자는 자기 우월함을 자랑할 근거 없이 같은 구원자께 감사하며 복음을 증언한다.
귀환자들에게는 땅과 기업, 먹을 것과 물이 약속된다(8-10절). 구원의 기쁨을 말하면서 살아갈 터전과 몸의 필요를 외면하면 이 긍휼을 놓친다. 고난당하는 이를 돌보는 일은 위로를 받은 사람이 응답할 책임이다. 어린 양이 마침내 주림과 목마름을 없애시고 눈물을 씻으시리라는 소망도 현재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게 하지 않는다(계 7:16-17).
바울이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선언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여신 화목의 은혜에 응답하라는 초청이다(고후 6:1-2). 모든 문제가 끝날 때까지 회개를 미룰 이유가 없다. 그 초청을 다른 사람의 결정을 강제로 재촉하는 데 사용할 수도 없다. 바울이 말한 일꾼의 삶에는 진실함과 오래 참음, 자비와 거짓 없는 사랑이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