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권면 (6:1-2)

바울은 5:20에서 하나님이 사도들을 통하여 권면하신다고 말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했다. 6:1의 “권하노니”는 이 간청을 이어 간다. 개역개정의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에서 “하나님과”는 원문에 없는 말이다. 원문의 Συνεργοῦντες(쉬네르군테스, ‘함께 일하면서’)는 누구와 함께 일하는지 밝히지 않지만, 바로 앞에서 하나님이 사도들을 통해 권면하신다고 했으므로 그 대상을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1 바울이 권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이다.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는 것은 받은 은혜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으로 이어지지 않아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2 고린도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화목의 복음을 이미 받았으므로, 이제 회개와 순종으로 그 은혜에 응답해야 한다.3

6:2는 칠십인역 이사야 49:8을 그대로 인용한다. 이사야에서 하나님은 자기 종에게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인용 뒤에 “보라 지금은”을 두 번 덧붙여, 하나님이 종에게 약속하신 은혜의 때가 지금 고린도 회중에게 와 있다고 선언한다. 바울이 덧붙인 “은혜 받을 만한 때”는 인용 속의 “은혜 베풀 때”와 같은 때, 곧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기에 합당하게 여기시는 때를 가리킨다.4 이 표현은 6:1의 “받지 말라”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5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때가 이미 왔으므로, 회중은 그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고 지금 응답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꾼임을 보여 주는 인내와 사역 (6:3-8)

6:3에서 바울은 사도들이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5:18의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이렇게 처신한다. 그는 모든 사람의 호감을 얻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그가 지키려는 것은 자기 평판보다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이며, 자신의 처신 때문에 사람들이 화목의 복음을 거부하는 일이 없도록 책임을 진다.

6:4에서 바울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한다고 말한다. 그는 3:1과 5:12에서 다시 자천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으므로, 여기의 자천은 자기 자랑과 다르다. 4:2에서처럼 바울은 진리를 나타냄으로 사람들의 양심 앞에 자신을 내보인다. 그가 내세우는 추천은 이어지는 목록, 곧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온 실제 모습이다.

바울이 가장 먼저 꼽는 것은 “많이 견디는 것”이다. 이어지는 아홉 가지 고난은 세 가지씩 묶어 읽을 수 있다. “환난과 궁핍과 고난”은 사역자를 짓누르는 압박 전반이고,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당한 폭력과 소요이며,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은 사역을 위해 감당한 노동과 결핍이다. 바울은 이런 처지에서도 사역을 그만두지 않았고, 그 인내가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드러낸다.

6:6에서 목록은 바울이 겪은 고난에서 그가 사역한 방식으로 넘어간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 다음의 “성령의 감화”는 원문에서 “성령 안에서”(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엔 프뉴마티 하기오)라는 짧은 표현이며, “감화”에 해당하는 단어는 따로 없다. 개역개정은 성령께서 사도 안에서 일하신다는 뜻을 풀어 옮겼다. 이 표현 앞에는 오래 참음과 자비함이 있고, 뒤에는 “거짓이 없는 사랑”이 이어진다. 바울에게 성령 안에서 사역하는 삶은 고난 중에도 사람을 참고 친절하게 대하며 꾸밈없이 사랑하는 삶이다. 6:7 전반부의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바울이 전한 말씀의 내용과 그 사역을 가능하게 한 힘을 밝힌다.

이어 바울은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사역했다고 말한다. 양손에 무기를 든 모습은 어느 쪽에서 공격이 오든 의로운 방식으로 맞서는 사역을 그린다. 바울은 거짓과 폭력을 사역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이 “의”는 6:14에서 “불법”과 대조되는 “의”로 다시 나온다. 6:8 전반부의 “영광과 욕됨”,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은 사역자가 칭찬과 비방을 모두 겪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어떤 평가를 받든 복음을 바꾸지 않았다.

오해와 약함 속의 참된 생명 (6:8-10)

6:8 후반부부터 “같으나”로 이어지는 일곱 짝이 나온다. 첫 짝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는 사람들이 사도를 속이는 자로 여겨도 그가 실제로 진실하다는 뜻이다. 6:9의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는 원문에서 두 수동 분사(ἀγνοούμενοι καὶ ἐπιγινωσκόμενοι, 아그노우메노이 카이 에피기노스코메노이)로 ‘알려지지 않은 자’와 ‘잘 알려진 자’를 대조한다. 따라서 “유명한”은 세상에 이름을 떨친다는 뜻보다 참으로 알려지고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원문은 누가 사도를 알아보는지 밝히지 않는다. 하나님께 알려졌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일부 신자들이 사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도 그 권위가 여러 교회에 알려져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6

“죽은 자 같으나”의 원문은 현재 분사(ἀποθνῄσκοντες, 아포트네스콘테스)로 ‘죽어 가는 자’를 뜻한다. 바울은 늘 죽음의 위험 속에 있었지만(4:11)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라고 말한다. 다음 짝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는 시편 118:17-18과 표현이 닮았다. 그 시편에서 시인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겠다고 말하고, 여호와께서 자신을 심히 징계하셨어도 죽음에 넘기지 않으셨다고 고백한다. 이 평행은 6:9에서도 징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암시한다.7 그렇다면 바울이 사람들에게 당한 매질과 박해(6:5)도 하나님의 징계 아래 있고, 그 징계는 사도를 죽음에 넘기지 않는다.

6:10의 세 짝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이다. 이 짝들의 앞쪽을 모두 남의 오해로 돌릴 수는 없다. “속이는 자”는 사람들의 그릇된 평가이지만, 바울은 실제로 근심하고 가난했으며 죽음의 위험을 겪었다. 그런 형편에서 그는 기뻐했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했다. 바울의 삶에서는 실제 약함과 하나님이 주시는 실제 생명이 둘 다 현실이다. 가난한 사도가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한다는 말은 그가 전하는 화목의 복음(5:18-20)으로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마음을 넓히라는 호소 (6:11-13)

6:11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이여”라고 회중을 직접 부르며 어조를 바꾼다. “우리의 입이 열리고”는 그가 속마음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는 뜻이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는 그의 마음에 고린도 성도들을 품을 자리가 넉넉하다는 뜻이다. 6:12에서 바울은 그들이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너희 심정에서” 좁아졌다고 말한다. “심정”은 깊은 애정이 자리한 속마음이다. 6:13에서 바울은 부모가 자녀에게 말하듯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요청한다. 바울이 마음을 연 것처럼 그들도 같은 애정으로 응답하라는 뜻이다.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멜 수 없는 멍에 (6:14-16)

6:14에서 바울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명령한다. “멍에를 함께 메다”(ἑτεροζυγοῦντες, 헤테로쥐군테스)는 서로 다른 종류의 짐승이 한 멍에에 매인 모습을 그린다. 바울은 소와 나귀를 한 멍에에 매어 밭을 갈지 말라는 신명기 22:10을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8 개역개정의 “함께”는 한 멍에를 진다는 뜻을 살리지만, 서로 다른 종류라는 뜻은 드러내지 않는다. 본문은 이 명령이 어떤 관계를 가리키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혼인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이 문맥에서 혼인으로 한정하기는 어렵다.9 “믿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며, 바울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자기의 사도적 권위를 거부한 반대자들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있다.10

이어 다섯 수사 의문문이 나온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겠느냐고 묻는다. 다섯 질문은 모두 ‘그럴 수 없다’는 답을 기대한다. 6:15의 “벨리알”(Βελιάρ, 벨리아르)은 사탄을 가리킨다.11 질문들은 함께할 수 없는 짝을 차례로 세우고 성전과 우상의 대조에서 끝난다. 그러므로 바울이 금하는 결합은 그리스도께 속한 회중이 그리스도와 맞서는 편에 예배와 충성을 나누어 주고 불법과 어둠에 참여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성전에 주신 약속들 (6:16-18)

6:16 중간에서 바울은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언한다. 개역개정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원문은 이 선언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γάρ(가르)를 넣어 앞의 질문들에 근거를 댄다. 주어 “우리”는 복수이고 “성전”(ναός, 나오스)은 단수이다. 바울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부른다.12 회중이 이미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우상과 일치할 수 없다. 이어 바울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로 하나님의 약속을 인용한다. 이 인용은 레위기 26:12와 에스겔 37:27을 결합한 것이다.13

6:17은 “그러므로”로 시작하여 이 약속에서 나오는 명령을 제시한다.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칠십인역 이사야 52:11의 명령을 순서를 바꾸어 인용한 것이다. 이사야에서 이 명령은 포로로 잡혀 있던 바벨론을 떠나는 백성에게 주어졌고, “부정한 것”은 예배에 쓸 수 없는 제의적 부정을 가리켰다. 바울은 이 명령을 죄로 더러워진 것에서 떠나라는 윤리적 요청으로 적용한다.14 이사야의 “그 가운데에서”는 바벨론을 가리키지만, 바울의 “그들 중에서”는 6:14-16의 믿지 않는 자와 우상 숭배의 자리를 가리킨다. 명령 뒤에 오는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는 이사야 52:11에 없는 약속으로, 칠십인역 에스겔 20:34, 41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15 에스겔의 두 절은 하나님께서 흩어진 백성을 여러 나라에서 모아 받아들이시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우상에게서 떠나는 백성을 받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6:18에서 하나님은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 약속하신다. 이 약속의 바탕은 사무엘하 7:14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뒤를 이을 아들에 관하여 자신이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아들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다. 바울은 3인칭 단수 “그”를 2인칭 복수 “너희”로 바꾸고 “딸들”을 더하여 이 약속을 신자 공동체 전체에게 적용한다.16 개역개정이 “자녀”로 옮긴 말은 원문에서 “아들들과 딸들”(υἱοὺς καὶ θυγατέρας, 휘우스 카이 튀가테라스)이다. 이사야 43:6에서 하나님은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라고 말씀하시므로, 바울이 이 본문의 표현도 함께 가져왔다고 보는 해석이 있다.17 이사야 43장의 이 장면은 6:17에 인용된 이사야 52장과 에스겔 20장처럼 하나님이 흩어지고 잡혀간 백성을 돌아오게 하시는 문맥이므로, 이 해석은 개연성이 있다. 바울은 아들과 딸을 각각 명시하여 하나님께서 남녀 신자를 모두 자기 자녀로 받아 주신다고 밝힌다. 인용을 맺는 “전능하신 주”는 이 약속을 하시는 분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이심을 드러낸다.

약속을 받은 사람의 정결 (7:1)

7:1은 “그런즉”으로 앞의 인용에서 결론을 이끌어 낸다. 개역개정의 “이 약속”은 원문에서 복수형(τὰς ἐπαγγελίας, 타스 에팡겔리아스)이며 6:16-18에 인용된 약속들을 가리킨다.18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을 받아 주시며,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겠다는 약속들이다. 바울은 회중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고 “깨끗하게 하자”고 말하여 자신도 이 권면에 포함한다. 깨끗하게 해야 할 것은 “육과 영”(σαρκὸς καὶ πνεύματος, 사르코스 카이 프뉴마토스)의 온갖 더러운 것이다. 여기의 “영”은 6:6의 성령이 아니라 사람의 영이며, 육과 영은 겉과 속을 아우르는 사람 전체를 가리킨다.19 그러므로 몸 자체를 악하다고 하거나 내면만 깨끗하면 된다고 말할 수 없다.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는 하나님께 구별된 삶을 온전히 이루어 가라는 뜻이고, 그 삶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이어진다. 이 두려움은 공포에 질린 상태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약속을 이미 받은 사람들이 그 약속에 합당하게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

마음을 여는 일과 멍에를 거절하는 일 (6:11-7:2)

7:2에서 바울은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다시 요청하고, 자신들은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거나 해롭게 하거나 속여 빼앗은 일이 없다고 말한다. 마음을 넓히라는 요청이 6:11-13과 7:2에 나오고, 그 사이에 6:14-7:1의 명령이 있다. 마음을 넓히라는 요청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명령은 모두 6:1의 권면, 곧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권면에 대한 응답으로 읽을 수 있다. 고린도 성도들이 이 은혜에 응답하려면 그 은혜를 전한 사도를 향해 마음을 열고, 그 은혜와 맞서는 우상과 불법에 참여하는 결합에서 떠나야 한다. 6:14의 믿지 않는 자에 사도를 거부하는 반대자들이 포함된다면, 사도에게 마음을 닫는 일과 그들과 한 멍에를 메는 일은 같은 문제의 두 면이 된다. 바울이 넓히라고 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받은 사도와 성도를 향하고, 거절하라고 하는 결합은 하나님께 드릴 예배와 충성을 나누게 하는 관계이다. 바울은 자신의 처신이 정직했다고 밝힌 뒤 마음을 열라고 요청하므로, 이 요청에는 신뢰할 수 있는 처신이 전제된다.

성경신학적 통찰

은혜의 때가 응답보다 먼저 온다

6:1-7:1에서 바울은 구약의 약속을 여러 차례 인용하고, 회중이 해야 할 응답을 하나님이 이미 베푸신 은혜에서 이끌어 낸다. 단락은 이사야 49:8의 구원의 날로 시작하고, 6:16-18에서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을 받아 주시며 아버지가 되신다는 약속들에 이른다. 7:1의 정결 권면은 이 약속들 뒤에 온다. 회중이 먼저 깨끗해져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백성이 그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

이사야 49장에서 하나님은 종을 통해 야곱을 자기에게 돌아오게 하시고, 그 종을 이방의 빛으로 삼아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신다(49:6). 49:8의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은 하나님이 종에게 응답하시고 잡혀 있는 백성을 풀어 회복시키시는 때이다. 바울은 이 때가 “지금” 왔다고 말한다. 고린도후서 5:18-21에서 말한 하나님의 화목 안에서 이사야가 약속한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 회복이 땅 끝까지 미치므로 이방 도시 고린도의 회중도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구원에 참여하며, 그 은혜를 미룰 수 없는 현재의 부르심으로 받는다.

회복된 백성에게 주신 약속과 거룩함

고린도후서 6:16의 약속은 레위기 26장과 에스겔 37장에서 왔다. 레위기 26:11-12에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백성 가운데 거하며 그들 가운데 행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에스겔 37:26-28에서 하나님은 포로와 분열을 겪은 이스라엘과 평화의 언약을 맺고 성소를 그들 가운데 영원히 두겠다고 약속하시며, 그때 민족들이 여호와를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분으로 알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출애굽 뒤에 주신 약속과 포로 귀환 뒤의 회복을 바라보는 약속이 바울의 인용 안에서 하나가 된다. 바울은 이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에서 이루어졌다고 보고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한다. 에스겔에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고린도의 회중도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기에 거룩한 백성이며, 그 거룩함에 맞지 않는 우상 숭배와 불법을 버려야 한다.

고린도후서 6:17에 인용된 두 본문도 하나님이 백성을 돌아오게 하시는 장면에서 왔다. 이사야 52:11-12에서 바벨론을 떠나는 백성은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야 하고,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은 스스로 정결하게 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행하시고 뒤에서 호위하시므로 그들은 도망하듯 나오지 않는다. 에스겔 20:33-41에서 하나님은 흩어진 백성을 여러 나라에서 모으시되 반역하는 자들을 제하시고, 남은 백성을 향기로운 제물처럼 받으시며 그들 가운데서 자기의 거룩함을 나타내신다. 두 본문에서 백성이 부정한 것을 떠나는 일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어 내고 받아 주시는 구원 안에서 일어난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떠남은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우상 숭배와 불법에 참여하던 삶에서 떠나는 일이다. 인용의 순서는 떠남과 받아 주심을 긴밀히 묶는다. 그러나 바울은 회중이 이미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한 뒤 이 인용을 쓰므로(6:16), 이 떠남은 이미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그 약속을 붙들고 하는 응답이다.

고린도후서 6:18의 아버지와 자녀 약속은 다윗의 집에 주신 약속(사무엘하 7:14)을 하나님의 백성 전체로 넓힌다. 바울이 이사야 43:6을 함께 염두에 두었다면, 이 확장은 이사야 43:5-7의 장면과 이어진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동서남북에서 자기 아들들과 딸들, 곧 자기 이름으로 불리며 자기 영광을 위해 창조하신 사람들을 모으신다. 왕의 후계자에게 주신 아버지의 약속이 하나님이 모으시는 가족의 아들과 딸 모두에게 이른다. 7:1에서 바울이 회중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를 때, 그는 이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가족에게 말한다. 자녀로 받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아버지를 경외하는 자녀의 거룩함이 뒤따른다.

우상 숭배의 거절과 비신자와의 관계

이 거룩함은 비신자와의 모든 관계를 끊는 일과 다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 경계를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고린도전서 5:9-13에서 그는 세상의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전혀 사귀지 말라는 뜻이라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엄하게 다룰 대상은 형제라 불리면서 그런 죄를 고집하는 교회 안의 사람이라고 밝힌다. 고린도전서 7:12-16에서는 믿지 않는 배우자가 함께 살기를 원하면 혼인을 유지하라고 권한다. 새로 혼인하려는 과부에게는 “주 안에서만” 하라고 말한다(고린도전서 7:39). 고린도전서 10:14-22에서는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함께 마실 수 없다고 하면서도, 10:27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의 초대를 받아 식사하러 가는 일을 허락한다. 바울은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일과 다른 신을 섬기는 예배에 참여하는 일을 구별했다. 고린도후서 6:14-16의 질문들도 성전과 우상의 대조에서 끝나므로, 이 명령은 하나님께 드릴 예배와 충성을 나누게 하는 결합을 거절하라고 요구한다. 이 멍에를 기존 혼인의 해소나 비신자 가족과의 단절을 명하는 말로 읽으면 바울의 권면들과 충돌한다.

기독론적 해석

그리스도와 벨리알 사이의 충성

6:15의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는 이 단락의 거룩함이 회중이 누구에게 속했느냐의 문제임을 보여 준다. 바울은 의와 불법, 빛과 어둠을 대조한 뒤 셋째 질문에서 그리스도와 사탄을 직접 맞세운다. 바로 이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대조하므로, 믿는 자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6:14-7:1의 거룩함은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이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그분과 맞서는 편에 예배와 삶을 나누어 줄 수 없다.

그리스도의 화목 사역과 사도의 참여

회중이 그리스도께 속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 때문이다. 5:18-21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셔서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 이 화목은 그리스도께서 홀로 이루셨다. 6:1의 “하나님의 은혜”는 이 화목의 은혜이고, 6:2의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죽고 다시 살아나신 뒤 이 은혜가 선포되는 현재이다(5:15). 사도는 화목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이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7:1의 정결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화목하게 된 사람의 응답이며, 자기 의로 다른 사람 위에 서는 근거가 될 수 없다.

6:4-10에 그려진 사도의 삶도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이해된다. 4:10-11에서 바울은 예수의 생명이 자기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고 말했다. 6:9의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는 이 고백이 실제 사역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 준다. 6:10의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는 8:9과 나란히 읽을 수 있다. 그곳에서 바울은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셔서 그의 가난함으로 성도들을 부요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가난은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는 구원 자체이고, 사도의 가난은 그 구원을 전하는 사역에서 겪는 고난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대신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서 그분의 죽음과 생명에 참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약속과 정결

회중이 하나님의 성전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선언도 그리스도께 근거한다. 6:16-18의 인용들은 그리스도를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바울은 1:19-20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든지 “예”가 된다고 말했고, 7:1에서 6:16-18의 약속들을 “이 약속”으로 받는다. 교회가 다윗의 아들에게 주신 아버지의 약속과 백성 가운데 거하시겠다는 약속을 받는 것은 그 약속들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5:17에서 말하듯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고, 그들의 공동체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11, 16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닦아 둔 터로 말한 뒤 회중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른다.

7:1의 정결도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의 정결이다. 바울은 “우리”로 말하며 자신도 이 권면 아래 둔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은 그분과 맞서는 예배와 행위에 참여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구별해 드린다. 이 정결은 사람을 멀리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6:6-7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도는 오래 참음과 자비함, 거짓 없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했고, 7:2에서 그는 아무도 해치거나 속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사람은 우상과의 결합을 거절하고,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한다.

현대적 적용

지금 은혜에 응답함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는 선언은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을 미루지 말라고 요청한다. 복음을 들었으나 응답을 미루어 온 사람은 지금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이미 믿는 사람도 받은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그 은혜가 실제 삶을 바꾸게 해야 한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은 거짓과 착취를 멈추고, 자신이 해를 끼친 사람과의 관계를 바로잡는 일도 미루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꾼을 알아보는 기준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임을 직함이나 성과로 증명하지 않고 고난 중의 인내와 깨끗함, 오래 참음과 자비함, 거짓 없는 사랑으로 보여 주었다. 교회가 섬기는 사람을 평가할 때도 이 모습이 기준이 된다. 섬기는 사람은 칭찬을 받든 비방을 받든 진리의 말씀을 바꾸지 않고, 자신의 처신 때문에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힘든 사역을 감당했다는 이유로 폭언이나 거짓을 덮을 수는 없다.

넓은 마음과 나뉘지 않은 충성

마음을 넓히라는 호소는 멀어진 관계에 다시 자리를 내어 주라는 요청이다. 바울은 먼저 자기 마음을 열어 보였고, 아무도 해치거나 속이지 않았다고 밝힌 뒤 응답을 요청했다. 교회 안에서 오해와 서운함 때문에 마음을 닫은 성도들도 진실하게 섬겨 온 사람의 사랑을 의심만 하지 말고 같은 애정으로 응답해야 한다. 이 요청은 신뢰할 수 있는 처신을 전제로 하므로, 피해를 겪은 사람에게 해침과 착취가 반복되는 관계로 돌아가라고 재촉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명령은 그리스도께 드릴 충성을 나누지 말라는 요청이다. 본문이 관계의 종류를 정하지 않으므로, 성도는 어떤 결합이 자신에게 다른 신을 섬기는 예배에 참여하거나 불법과 어둠에 가담하도록 요구하는지 분별해야 한다. 성도는 믿지 않는 가족과 이웃, 동료와 일상을 나누면서도 그런 참여는 거절할 수 있다. 이 명령을 근거로 기존 배우자나 믿지 않는 가족과의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겉과 속을 아우르는 정결

7:1은 거룩함을 겉과 속 모두에 적용한다. 몸으로 하는 행실과 마음에 품은 욕심이 모두 깨끗해져야 한다. 이 정결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고 애쓰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거하시고 자녀로 받아 주신 사람이 그 아버지를 경외하며 사는 방식이다. 바울이 자신을 “우리”에 포함했듯 교회의 지도자도 이 부르심에서 예외가 아니다. 같은 약속을 받은 성도들은 자신도 깨끗해져야 할 사람임을 기억하며 서로 권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