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1-8절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9-20절은 우상을 만드는 사람들의 작업과 경배를 묘사한다. BHS는 5절 뒤에 열린 단락 표시를, 20절 뒤에 닫힌 단락 표시를 두어 1-5절과 6-20절을 구분한다. 이어지는 21-23절은 두 부분을 구속과 찬양으로 묶는다. 43:22-28의 책망과 심판 뒤에 나오는 “이제”는 이스라엘의 실패 뒤에도 새 말씀을 주시는 여호와의 부르심이다. 그는 여전히 야곱을 “나의 종”, 이스라엘을 “내가 택한” 백성이라 부르신다.

2절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모태에서부터 지으셨고 앞으로 도우실 분이다. ‘짓다’는 토기장이가 그릇을 빚을 때 쓰는 말로, 9-12절에서 사람이 우상을 만드는 행위와 21절에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지으신 행위에 반복된다. 백성을 지으신 하나님과 신을 지으려는 인간이 대조된다. “여수룬”은 신명기 32:15, 33:5, 26과 이곳에만 나오는 이스라엘의 이름이다. 여호와는 그 백성을 한 사람처럼 부르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3절에서 여호와는 마른 땅에 물을 붓듯 자손에게 영과 복을 부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개역개정은 같은 ‘붓다’ 동사를 “물을 주며”와 “나의 영을 … 부어 주리니”로 나누어 옮겼다. “목마른 자”(צָמֵא, 차메)는 다음 행의 “마른 땅”과 병행하므로 메마른 땅으로 읽을 수도 있다. NET은 그 뜻을 택하고 둘째 행에는 ‘흐르게 한다’는 말을 보충한다.1 물과 시내, 영과 복, 자손과 후손이 서로 병행한다. 41:17-18과 43:19-20의 광야 물 약속이 여기서는 다음 세대에게 부어지는 생명으로 펼쳐진다. 황폐한 성읍들을 회복하실 하나님은 백성도 새롭게 하신다.

4절의 자손들은 시냇가의 버들처럼 자란다. 40:6-8에서 하나님의 기운 앞에 마르는 풀은 인간의 연약함을 나타냈지만, 여기서는 영을 부으시는 은혜로 새 생명이 돋는다. 시편 137:2에서 포로들이 노래를 멈추고 수금을 걸었던 바벨론 강가의 버들과 달리, 이 버들은 생명과 성장을 가리킨다.

5절에서는 사람들이 저마다 여호와께 속하였다고 고백하고 야곱과 이스라엘의 이름을 취한다. 개역개정의 “그의 손으로 기록하고”(יִכְתֹּב יָדוֹ, 이크토브 야도)에 대해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해설은 대부분의 역본처럼 손에 ‘여호와의 것’이라고 쓰는 읽기를 선호한다.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라”의 동사(יְכַנֶּה, 예칸네)는 기존 이름에 새 이름을 더한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그러면 둘째 행의 야곱 이름과 넷째 행의 이스라엘 이름이 병행한다. 해설은 ‘한 사람은’의 반복을 여러 사람의 다양한 응답으로 읽고, 회복된 이스라엘에 합류하려는 이방인일 가능성을 더 높게 본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관계를 다시 고백하는 읽기도 가능하다.2 43:28에서 비방거리가 되었던 이름을 이제 사람들이 기꺼이 자기 이름으로 삼는다.

6절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왕이요 구원자,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구원자”는 친족이 잃은 땅과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속자’라는 뜻이며, 레위기 25장과 룻기의 무르는 일에 배경을 둔다. 같은 말이 22-23절의 구속 선언으로 이어진다. 처음과 마지막이신 여호와는 역사의 시작과 끝을 주장하시고, 그 외에 다른 신은 없다. 7절에서는 다른 신들에게 역사를 미리 알리고 이룬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신다. “영원한 백성을 세운 이후로”는 먼 옛날 백성을 세우신 때부터로도 이해된다. 이는 41:21-23과 43:9의 재판을 잇는 도전이다.

8절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말씀하고 이루신 일의 증인으로 불린다. 원문은 한 백성을 가리키는 ‘너’와 구성원들을 가리키는 ‘너희’를 번갈아 쓰지만 개역개정은 ‘너희’로 통일한다. 여호와는 다른 반석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신명기 32장에서 자신을 가리킨 ‘반석’의 이름을 다른 신이 가질 수 없다는 선언이다. 9절에서는 우상의 증인들이 보지도 알지도 못하여 수치를 당한다. 그들을 가리키는 대명사(הֵמָּה, 헴마) 위에는 BHS의 특별한 점들이 있다. 본문은 그 증인들이 내놓을 지식이 없음을 드러낸다.

9-11절의 우상 제작자들은 허망하고 그들이 아끼는 형상은 무익하다. “허망하도다”는 창세기 1:2의 ‘혼돈’에도 쓰인 말이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신을 만드는 일은 창조의 질서를 거꾸로 돌린다. 장인과 동료들이 법정처럼 모여 서지만, 그들은 사람이라는 한계 안에 있다. 여호와가 자기 백성에게 갖지 말라고 하신 두려움을 오히려 우상 제작자들이 겪는다.

12절의 철공은 힘센 팔로 망치를 두드리지만 배고프고 물을 마시지 못하면 지친다. 3절에서 물과 영을 부으시는 여호와와 달리 그는 자기 갈증도 이기지 못한다. 피곤하지 않으시며 지친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는 창조주(40:28-31)와 대조되는 모습이다. 13절의 목공은 줄과 표시 도구, 깎는 연장과 곡선자로 정교하게 신상을 만든다. 고대 연장의 정확한 모양에는 불확실성이 있지만, 사람이 자기 아름다움을 따라 만들고 정해 준 집에 신을 두는 모순은 선명하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신 창세기 1:26-27의 순서가 뒤집혔고, 호렙에서 형상을 보지 못했으므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신명기 4:15-18의 경고가 무시되었다.

14절은 신상의 재료인 나무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향목·디르사나무·상수리나무가 나오지만 디르사나무의 정확한 수종은 분명하지 않다. 사람이 심어도 나무를 자라게 하는 것은 비다. 개역개정의 “비를 맞고 자라게도 하느니라”에 해당하는 구절(וְגֶשֶׁם יְגַדֵּל, 베게셈 예갓델)은 비가 주어다. 신상의 재료조차 사람의 힘으로만 생겨나지 않는다. 15-17절에서는 한 나무의 절반으로 몸을 덥히고 음식을 만들며, 나머지로 신을 만들어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고 빈다. 불은 실제로 몸을 덥히지만 같은 나무로 만든 신은 구원하지 못한다. 사람이 만든 것을 ‘나의 신’이라 부르는 고백은 여호와께서 지으신 이스라엘을 ‘내 종’이라 부르시는 21절과 대조된다.

18절의 눈과 마음은 무엇을 덧발라 막은 듯 닫혀 있다. 개역개정은 한 동사(טַח, 타흐)를 눈에는 “가려서”, 마음에는 “어두워져서”로 나누어 옮겼다. 그 동사의 주어는 밝혀져 있지 않다. 9절의 우상 증인들처럼 숭배자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이사야 6:9-10과 43:8의 둔한 백성이 떠오른다. 19절은 그가 마땅히 했어야 할 생각을 적는다. 나무 절반으로 떡과 고기를 구워 먹었는데 남은 토막 앞에 어찌 엎드리겠는가. 히브리어에는 의문사가 없으나 개역개정은 “내가 어찌”를 보충하여 그 모순을 물음으로 드러냈다.

20절의 그는 “재를 먹는다”(רֹעֶה אֵפֶר, 로에 에페르). NET은 ‘잿더미 위에서 먹는다’는 가능성도 소개한다.3 풀을 뜯거나 먹인다는 이 말은 28절에서 고레스를 ‘내 목자’로 부르는 말과 연결된다. 여호와의 목자는 그분의 뜻을 이루지만 우상 숭배자는 재로 생명을 얻으려 한다. 그를 미혹하는 것은 속은 자기 마음이며, 자기 생명을 구원하지 못한다. 여기서 개역개정의 ‘영혼’은 목숨과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그는 오른손의 것이 거짓임을 묻지도 못한다. 손에 여호와께 속함을 쓰는 5절, 여호와가 백성의 오른손을 붙드시는 41:10, 13과 대조된다.

21-23절에서 여호와는 “내가 너를 지었으니”라며 종을 기억하시고, 허물을 구름같이 없이하셨으니 돌아오라고 부르신다. 구속과 용서의 선언이 돌아오라는 명령보다 앞선다. 신상의 재료로 베이던 숲과 나무들까지 이제 구속하신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장인이 신상에 새긴 ‘사람의 아름다움’과 같은 어근으로, 여호와는 이스라엘 가운데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라 하신다. 사람이 만든 형상이 집에 앉아 있는 동안 여호와는 백성을 구속하여 영광을 드러내신다.

성경신학적 통찰

출애굽기 20:2-6은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를 먼저 밝히고, 다른 신과 새긴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명한다. 이사야 44장도 지으시고 도우시며 영을 부으시는 여호와를 먼저 소개한 뒤 우상의 무익함을 폭로한다. 우상 금지는 구원받은 백성의 응답이다. 자손에게 이르는 복 역시 언약의 은혜를 잇는다. 포로가 된 백성에게 여호와는 그들의 실패를 아시면서도 택하신 관계를 다시 선언하신다.

신명기 32:15의 여수룬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구원의 반석을 업신여겼다. 18절은 자기를 낳으신 반석을 잊었다고 책망하고, 37-39절은 그들이 피한 신과 반석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며 여호와 외에는 신이 없다고 선언한다. 이사야 44장의 여수룬, 창조자, 반석, 도움, 유일하신 하나님은 그 배반의 노래를 되받는다. 심판을 겪은 여수룬을 하나님이 다시 부르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시편 115:4-8은 사람이 만든 우상이 말하지도 보지도 못하며 제작자와 의지하는 사람도 그와 같아진다고 말한다. 이사야 44:18의 가려진 눈과 마음이 그 진단을 구체화한다. 시편 115:9-14은 이스라엘에게 도움과 방패이신 여호와를 의지하라 하며 자손의 복을 빈다. 예레미야 10:1-16 역시 나무를 다듬고 꾸며 고정한 우상은 걷지도 복을 주지도 못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살아 계신 왕, 만물의 조성자이신 여호와와 사람이 만든 거짓 신이 대조된다.

이사야 40-48장은 이 논증을 거듭 펼친다. 40:18-20과 41:6-7의 우상은 장인들이 흔들리지 않게 붙들어 주어야 한다. 41:21-29와 43:8-13에서는 우상들에게 미래를 밝힐 증거를 요구하고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증인으로 세운다. 45:20의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기도는 44:17의 간청과 같다. 46:1-7의 벨과 느보는 짐승이나 사람이 메어야 하지만, 여호와는 모태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업고 구원하신다.

영을 부으시는 약속은 민수기 11:29에서 모든 백성이 영을 받기 바란 모세의 소망과 이어진다. 이사야 32:15는 영이 부어지면 광야가 밭이 된다고 하며, 에스겔 36:25-27은 물과 새 영으로 백성을 우상에서 정결하게 하여 순종하게 하신다고 약속한다. 요엘 2:28-29은 아들과 딸, 노인과 젊은이, 남종과 여종에게까지 영이 부어질 것을 말한다. 이사야 44:3-5에서는 그 생명이 다음 세대에 이르고 여호와께 속했다는 고백으로 나타난다.

창세기 1:26-27과 2:7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신다. 신명기 4:15-19은 아무 형상도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사람이나 동물의 모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한다. 시편 106:19-20은 금송아지 사건을 하나님의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꾼 일로 고발한다. 이사야의 목공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다는 창조의 관계를 뒤집어, 사람의 아름다움으로 신을 만든다.

5절의 응답을 이방인의 참여로 읽으면,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신 창세기 12:3의 약속과 연결된다. 이사야 45:14, 22-23은 열방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고백하고 그분께 돌아와 구원받을 것을 말한다. 56:3-7은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도 기도하는 집에서 기뻐하게 하며, 시편 87편은 여러 민족의 사람을 시온에서 난 이로 센다. 44:5의 출신은 명시되지 않았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재헌신이라는 읽기도 보존된다.

호세아 14:1-8에서도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구원과 손으로 만든 신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는다. 여호와는 반역을 고치시고 이슬처럼 생명을 주셔서 백성을 꽃과 나무처럼 자라게 하신다. 이사야 44:21-22의 용서와 귀환, 4절의 버들과 같은 성장이다. 우상을 버린 백성의 회복은 그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한다.

기독론적 해석

이사야 44장의 약속은 고레스를 통한 성읍과 성전의 회복을 기다리던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26-28절). 그러나 증인으로 부름받은 그 종도 눈이 있어 보지 못한다(42:19; 43:8). 이사야 42:1과 49:3-6의 종은 영을 받고 정의를 베풀며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이방의 빛이 된다. 53:10-11에서는 자기 생명을 속건제물로 드려 많은 이들의 죄를 담당하고 씨를 본다. 신약은 이 종을 예수로 밝힌다. 택한 종, 영, 자손의 약속이 그분의 사역에서 성취된다.

마태복음 12:17-21은 예수의 사역을 영을 받은 종에 관한 이사야 42:1-4의 성취로 인용한다. 요한복음 7:37-39에서는 예수께서 목마른 자를 자기에게 부르시고 생수의 강을 약속하신다. 요한은 이를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 믿는 이들이 받을 성령으로 설명한다. 인용한 구절이 특정되지는 않지만, 물과 영을 연결한 이사야 44:3은 그 약속의 중요한 배경이다. 마른 땅에 물과 영을 부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께 나아오는 이들에게 주어진다.

사도행전 2:33, 39에서 높임받은 예수는 아버지께 받은 성령을 부으시고 그 약속을 자녀와 먼 데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하신다. 오른손에 거짓을 쥐고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 우상 숭배자와 달리,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높임받은 예수는 생명을 주신다. 갈라디아서 3:13-14은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담당하여 우리를 속량하신 목적을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이르고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데 둔다. 이사야 44:3에서 병행한 영과 복이 그리스도의 속량 안에서 주어진다.

요한계시록 1:17-18에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인자는 요한에게 오른손을 얹고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하신다. 이사야 44:2, 6, 8의 부르심과 호칭이다. 계시록 2:8과 22:13도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과 마지막이라 부른다. 그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다. 이사야에서 사람이 만든 신은 손을 내밀어 구원할 수 없었지만, 살아 계신 주께서는 엎드린 요한을 붙드신다.

예수는 성령을 받은 제자들을 땅끝까지 자기 증인으로 보내신다(행 1:8). 영의 부으심과 증인의 부르심이 이어지는 이사야 44:3, 8과 연결된다. 우상의 증인들은 보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사도들은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신 일의 증인이다(행 2:32). 예수께서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미리 말씀하고 이루신 일은 역사를 미리 밝히고 이루는 신이 누구냐는 이사야의 질문에 응답한다.

목공은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신을 만들지만, 신약의 말씀은 친히 육신이 되어 사람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며(골 1:15; 고후 4:4), 하나님은 그분의 얼굴에 있는 영광을 아는 빛을 어두운 마음에 비추신다(고후 4:6). 로마서 1:21-25의 어두워진 마음, 피조물의 형상, 진리를 바꾼 거짓은 이사야의 우상 숭배 진단과 겹친다. 그 진단 뒤에 로마서는 그리스도 안의 속량으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길을 밝힌다(3:24).

데살로니가전서 1:9-10의 신자들은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장래의 진노에서 구원하실 예수를 기다린다. 사도행전 17:24-31에서 바울도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하나님을 사람의 손과 고안에 의존하는 형상과 구별하고, 부활하신 예수를 통한 심판을 선포한다. 요한일서 5:20-21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신 분을 안다는 고백에 우상을 멀리하라는 권면을 잇는다.

이사야 44:5의 소속 고백과 신약의 성령 인치심(고후 1:22; 엡 1:13)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14:1과 22:4의 백성도 어린 양과 아버지의 이름을 지닌다. 이는 직접 인용보다는 공유하는 소속의 그림이다. 빌립보서 2:10-11은 이사야 45:23을 받아 모든 무릎이 예수 앞에 꿇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리라 말한다. 그리스도는 자기 생명으로 구속을 이루어 우상에서 돌아오게 하신다. 재를 먹던 사람에게 생명의 떡이신 예수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생명을 주신다(요 6:35).

현대적 적용

본문의 사람은 나무로 생활에 필요한 불을 피우다가 같은 나무에게 구원을 청한다. 피조물을 사용하는 일이 숭배로 바뀌는 지점이다. 돈과 성과, 국가의 힘이나 기술도 실제 필요를 채울 수 있지만 생명을 구원할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자기가 만든 것에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을 지켜 줄 능력이 있는지조차 묻지 못한다. 우상 비판은 이방인을 비웃기 전에 하나님 백성이 자기 손으로 이룬 성과와 명성 앞에 무릎 꿇는지 묻게 한다.

두려워하지 않을 근거는 처음과 마지막이신 하나님께서 백성을 지으시고 구속하셨다는 사실이다. 포로의 땅에서도 그 관계는 지속되었다. 피곤한 철공이 만든 신과 달리 여호와는 지친 백성을 도우신다. 인간의 한계와 피로를 인정하고 그분께 생명을 의탁하는 것은 성과로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려는 신앙을 거두는 일이다.

여호와께 속했다는 고백은 영과 복을 먼저 부어 주신 은혜의 응답이다.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다른 이들도 그 이름을 취한다는 전망은 하나님 백성이 자기 혈통과 성취를 자랑할 근거를 없앤다. 교회는 성령을 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증언하며, 그 은혜로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을 같은 백성으로 받아들인다.

우상에서 돌아오는 길은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라는 부르심에서 열린다. 오른손의 거짓을 인정하는 회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향한다. 신상의 재료로 쓰였던 숲의 나무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피조물을 구원자로 높이거나 자기 뜻에 종속시키던 사람도 창조주를 예배하는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