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이사야 43:1-13은 심판의 불길 속에서도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42:24-25)에 이어진다. “지금”으로 옮긴 첫말(וְעַתָּה, 베앗타)은 여기서 “그러나 이제”라는 전환을 이룬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핸드북은 앞의 포로 상황과 뒤의 밝은 미래가 대조된다고 설명한다.1 1-7절은 구원을 약속하고, 8-13절은 열방과 이스라엘을 법정에 세운다. 하나님이 지으신 백성이 그분의 증인으로 부름 받는다.
하나님은 야곱을 “창조하신” 분이며 이스라엘을 “지으신” 분이다(1절). 두 동사는 창세기 1-2장의 창조에 쓰였고,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한 백성으로 세우신 일을 가리킨다.1 야곱과 이스라엘은 같은 백성이다. 그들의 기원과 미래가 자신들을 지으신 하나님께 달렸다.
“두려워하지 말라”의 근거는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גְאַלְתִּיךָ, 게알티카)라는 선언이다. 구속은 가난해진 친족의 땅이나 몸을 되찾는 의무에 쓰인 말이다. UBS 해설은 출애굽기 15:13의 구속을 바벨론에서 돌아올 새 구원과 연결한다.1 귀환 이전의 백성에게 완료형으로 주어진 선언은 이미 행하신 출애굽을 기억하게 하며 앞날의 구원도 확신하게 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신다. 이름을 부르는 친밀한 관계는 탈취당한 야곱도 여전히 하나님께 속했음을 밝힌다.1
2절은 물과 강, 불과 불꽃으로 위험을 그린다. “지날 때에”의 접속사는 “할 때마다”나 “만일”로도 이해할 수 있다고 UBS는 설명한다. 약속은 위험 가운데 “내가 너와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출애굽기 3:12의 임재 약속과 홍해를 건넌 구원을 떠올리게 한다.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의 히브리어 주어는 강들이며, 같은 “휩쓸다” 동사가 이사야 8:8에서는 앗수르 군대의 침공을 묘사한다.2
불 가운데서 타지 않는다는 약속도 위험 속의 보존을 말한다. UBS는 다니엘의 친구들이 풀무불에서 보호받은 사건과 비교하고, “지나다”와 “사르다” 사이의 자음 순서가 바뀌는 소리 놀이를 짚는다.2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의 동사(תִבְעַר, 티브아르)는 42:25에서 이스라엘을 태운 진노의 불에도 쓰였다. 심판받은 백성에게 이제 같은 동사를 부정하여 보존을 약속한다.
“네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네 구원자”라는 칭호가 약속을 뒷받침한다(3절). UBS는 “대저”를 이유보다 “참으로”라는 강조로 읽을 가능성을 제시하며, 구원자가 이사야서에서 하나님 칭호로 처음 나오는 곳이라고 설명한다.3 백성이 업신여겼던 거룩하신 분(1:4)이 그들의 구속자이시다(41:14).
애굽은 “너의 속량물”(כָפְרְךָ, 코프레카), 구스와 스바는 “너를 대신하여” 내어 주신 나라들이다(3절). UBS는 포로의 귀환을 위해 애굽을 고레스에게 주시는 그림으로 읽되, 실제 애굽 정복자는 그의 아들 캄비세스였다고 밝힌다. “스바”(וּסְבָא, 우세바)의 철자는 열왕기상 10:1의 שְׁבָא(쉐바)와 다르다. UBS는 아라비아 남부나 홍해 연안 아프리카 북동부로 추정하며 두 지명이 같은 나라일 가능성도 소개한다.3 구스는 애굽 남쪽 나일 강 상류의 나라였다. 본문은 제국의 판도가 바뀌는 역사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해방하신다고 선언한다.
그 대가를 내어 주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사랑받기 때문이다(4절). “존귀”의 말에는 무겁게, 곧 귀중하게 여기신다는 뜻이 있다. “네 대신 사람들”의 “사람들”은 인류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낱말이다. UBS는 Revised English Bible의 본문 수정에 이를 지지할 증거가 없다며 마소라 본문을 유지하도록 권한다.4 이 사랑을 다른 민족의 생명이 하찮다는 뜻으로 확대할 수 없다. 42:6의 종은 이방의 빛이며, 45:14의 애굽과 구스와 스바도 마침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고백한다.
5-6절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라는 약속이 반복되고, 동서남북의 흩어진 백성을 모으신다. 하나님은 북쪽과 남쪽을 사람처럼 불러 “내놓으라”, “가두어 두지 말라”고 명하신다. 먼 곳과 땅 끝에서 돌아오는 이들은 “내 아들들”과 “내 딸들”이다. 7절의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는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밝힌다. “창조”, “짓다”, 이름을 부르는 말은 1절을 되받아 단락을 감싼다. 그들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5
8절에서 하나님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הוֹצִיא, 호치)고 명하신다. 이 형태는 완료형이나 부정사와도 같지만 Brown-Driver-Briggs는 여기서 히필 명령형으로 분류한다.12 UBS는 명령받는 대상은 불분명하나 이끌려 나오는 백성은 불순종한 이스라엘이라고 설명한다.6 이는 신체 장애를 죄로 규정하는 말이 아니다. 42:7에서 갇힌 자를 이끌어 내야 할 종이 42:19와 여기서는 자신부터 보지 못하는 백성으로 드러난다.
9절의 열방은 이미 법정에 모인 상태다. 그 신들 중 누가 지금의 일을 미리 알렸으며 이전 일을 설명할 수 있는가. UBS는 “이 일”을 고레스의 승리 등을 포함한 현재 사건으로 읽는다. 신들은 증인을 세워 자신이 옳음을 입증해야 하고, 청중은 듣고 참되다고 말해야 한다.7 이는 우상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알리라 요구한 41:21-26의 재판을 잇는다.
열방에게 증인을 요구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나의 증인”, “내가 택한 나의 종”이라고 하신다(10절). 눈먼 종을 버리지 않고 증인으로 세우시며, 자신을 알고 믿고 깨닫게 하신다. “내가 그인 줄”(כִּי־אֲנִי הוּא, 키-아니 후)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임을 밝힌다. UBS는 “나의 전”과 “나의 후”를 시간보다 “나 외에”라는 배타적 뜻으로 읽는다.8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지으셨지만, 하나님 곁에 지음을 받은 신은 없다. 이는 44장의 사람이 만들어 내는 우상에 대한 조롱으로 이어진다.
“나 곧 나는”이라는 강조 뒤에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가 따른다(11절). UBS는 여호와만이 포로를 건지실 수 있다는 선언으로 읽는다.9 고레스는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이지 구원의 주인이 아니다(45:1-4). 12절의 “알려 주었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는 예고, 구원, 다시 알림의 순서다. “보였고”의 원뜻은 “들려주었다”로, 9절에서 우상에게 요구한 동사와 같다. “다른 신”이 이 구원을 행하거나 예고한 적은 없다. UBS는 문자적으로 “낯선 자”인 말을 문맥상 이방 신으로 읽는다.10
13절의 “태초로부터”에 해당하는 말(מִיּוֹם, 미욤)은 문자적으로 “날부터” 또는 “오늘부터”이다. UBS는 칠십인역의 “처음부터”와 이를 따른 “영원부터” 번역을 소개하면서, 사해사본이 지지하는 마소라 본문을 권한다. “이날부터도 나는 그다”로 읽으면 앞으로의 역사에서도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강조한다. 이어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가 나온다. 마지막 동사(יְשִׁיבֶנָּה, 예시벤나)는 “그것을 되돌리다”라는 뜻이다.11 42:22에서는 이스라엘을 건지거나 되돌려 달라고 할 자가 없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하나님의 손에서 빼내거나 그분의 구원을 되돌리지 못한다.
성경신학적 통찰
이스라엘을 창조하고 지으신 하나님(43:1, 7)은 사람을 창조하고 흙으로 빚으신 창세기 1:27과 2:7의 하나님이시다. 이사야 44:2, 24는 모태에서부터 이스라엘을 지으신 분이 만물을 지으셨다고 밝힌다. 포로 된 백성을 다시 세우실 능력은 제국의 힘보다 먼저 계신 창조주께 있다.
레위기 25:25, 47-49의 가까운 친족은 가난으로 팔린 땅과 몸을 무른다. 룻기에서 보아스가 그 책임을 맡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때 그들의 처지를 자기 일로 맡으신다. 출애굽기 6:6의 속량 약속과 15:13의 찬송은 이사야 43:1의 구속을 뒷받침한다. 생명의 속전이 재앙이나 죽음을 대신하는 출애굽기 30:12와 21:30, 사람이 마련할 수 없는 생명의 값을 말하는 시편 49:7-8도 43:3의 몸값을 이해할 배경이다. 스스로 빠져나올 힘이 없는 포로를 위해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신다.
출애굽기 4:22-23에서 하나님은 바로에게 자기 장자를 내보내라고 명하셨다. 호세아 11:1도 애굽에서 부르신 아들을 기억한다. 이사야 43:5-6에서는 같은 해방 명령이 동서남북을 향하고, 아들들과 딸들이 땅 끝에서 돌아온다. 출애굽기 3:12의 임재 약속과 14:21-22의 바다 통과도 43:2에 되울린다. 다니엘 3:24-27과 시편 66:12처럼 백성은 불과 물 가운데서 보존된다. 이사야 48:10은 포로의 시련 자체를 고난의 풀무로 부른다.
선택은 이스라엘의 우월함에서 나오지 않았다. 출애굽기 19:4-6의 자기 소유인 백성과 신명기 7:6-8의 사랑과 맹세가 “너는 내 것”,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이라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신명기 28:64의 흩어짐과 30:1-4의 모으심도 귀환의 배경이다. 다만 이사야 43장은 먼저 회개를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22-24절에서 죄를 고발하신 뒤 25절에서는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허물을 도말하신다고 하신다.
선택받은 이스라엘의 구원은 열방을 향한다. 창세기 12:3의 모든 족속의 복, 이사야 19:24-25의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의 복, 45:14의 애굽과 구스와 스바의 고백, 49:6의 땅 끝까지 이르는 빛이 그 목적을 밝힌다. 43:3-4에서 몸값으로 언급된 나라들에 대해서도 이사야서는 하나님께 나아올 미래를 선포한다.
이사야 6:9-10과 42:18-20에서 백성은 보고도 깨닫지 못한다. 출애굽을 경험했으나 깨닫는 마음이 없다는 신명기 29:4의 진단과도 같다. 그러나 이사야 35:5와 42:7은 눈과 귀가 열릴 회복을 약속한다. 43장의 눈먼 증인은 그 회복을 기다리는 백성이다. 49:5-6에서 종은 야곱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열방을 비추며, 53:10에서는 자기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린다.
신명기 4:32-35는 출애굽을 통해 여호와 외에 신이 없음을 알게 하셨다고 말한다. 이사야 43:10-12에서도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이 증언의 근거다. 44:8과 45:21의 법정도 구원을 미리 알리고 이루시는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임을 선언한다. “내가 그”라는 자기 선언과 아무도 그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는 말은 신명기 32:39와 맞닿으며, 이사야 41:4와 44:6의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선언으로 이어진다. 그 백성의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증언하는 데 있다(43:7, 21).
기독론적 해석
눈먼 백성이 감당하지 못한 종의 사명을 예수께서 이루신다. 마태복음 12:17-21은 이사야 42:1-4를 인용해 예수의 사역을 설명한다. 누가복음 4:18에서 예수는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는 일을 선포하신다. 요한복음 9장의 치유받은 사람은 자신이 전에는 맹인이었으나 이제 본다는 사실을 증언한다(9:25).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경험한 증인이라는 이사야 43장의 주제와 통한다.
이름을 불러 자기 것으로 삼으신 하나님(43:1)은 요한복음의 선한 목자에게서 드러난다. 예수는 양들의 이름을 불러 인도하시며(요 10:3), 무덤 앞의 마리아도 이름을 부르실 때 그분을 알아본다(20:16). 예수는 제자들이 아버지께 속했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주셨으며 아버지와 아들의 소유가 하나라고 기도하신다(17:6, 10).
물 가운데 함께하신다는 약속은 임마누엘의 탄생과 부활하신 예수의 동행 약속에 이어진다(마 1:23; 28:20). 마가복음 6:45-52에서 예수는 바다 위로 제자들에게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베드로전서 1:5-7과 4:12-13은 시련 중의 보존을 약속하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길도 말한다. 죽음을 통해 종 된 자들을 놓아주신 예수(히 2:14-15)가 두려움 속의 백성을 붙드신다.
이사야 43:3-4의 몸값과 마가복음 10:45의 대속물은 사로잡힌 자를 값을 치러 풀어 주는 구원의 주제로 이어진다. 이사야에서는 나라들이 내어지지만 예수는 자기 목숨을 내놓으신다. 하나님은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주셨으며(롬 8:32), 성도는 은금이 아닌 그리스도의 피로 대속받았다(벧전 1:18-19). 요한계시록 5:9에서는 각 족속과 나라의 사람들이 어린 양의 피로 구속받는다. 열방도 구원의 대가로만 머무르지 않고 그 구원에 참여한다.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43:13)는 요한복음 10:27-30의 확신과 연결된다. 예수는 양들을 자기 손에서도 아버지 손에서도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시며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밝히신다. 듣던 이들은 이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하시는 주장으로 받아들였다(10:31-33). 백성을 붙드시는 그 손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목자의 손이며, 부활 후에도 못 자국이 남아 있다(20:25, 27).
하나님을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신다는 이사야 43:10은 요한복음 8:24, 28의 예수 말씀에서 되울린다. 예수는 인자가 들린 뒤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되리라고 하신다. 13:19에서는 배반을 미리 말씀하여 일이 일어날 때 믿게 하신다. 장차 올 일을 알리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예수의 고난과 부활에서 드러난다.
부활하신 예수는 눈이 가려졌던 제자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성경을 깨닫게 하신 뒤 증인으로 세우신다(눅 24:16, 31, 45-48). 이들은 성령을 받아 땅 끝까지 증언한다(행 1:8). 이사야 43장의 눈먼 증인과 땅 끝의 모으심이 그 사명을 이해할 배경이다. 사도행전 4:10-12은 예수의 이름 외에 구원이 없다고 선언한다. 이사야 43:11의 유일한 구원을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이루셨다는 증언이다. 빌립보서 2:10-11도 이사야 45:23을 사용하여 예수께 무릎 꿇는 예배가 아버지의 영광에 이르게 한다.
흩어진 아들들과 딸들을 모으는 약속은 예수께서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려고 죽으신 일과 통한다(요 11:51-52). 동서에서 사람들이 와서 족장들과 잔치에 앉으며(마 8:11), 고린도후서 6:18의 “자녀”는 “아들들과 딸들”을 함께 가리킨다. 만물을 지으신 그리스도(요 1:3; 골 1:16)는 자신을 내어 주어 백성을 되찾으셨다. 값으로 산 성도는 자신의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 속한다(고전 6:19-20).
현대적 적용
“너는 내 것이라”는 선언은 증인의 사명보다 먼저 주어진다. 그리스도인도 성과를 내어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구속받아 그분께 속한 사람으로 사명을 감당한다. 두려움을 이기는 근거도 형편이나 자기 가치의 증명이 아닌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이다.
물과 불 가운데 함께하신다는 약속은 고난을 면하거나 곧 회복된다는 보장이 아니다. 본문은 포로 된 백성을 끝까지 보존하여 자기 뜻을 이루실 하나님을 증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도 환난이나 박해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성도를 끊지 못한다(롬 8:35-39). 고난이 지속된다는 이유로 버림받았다고 판단하거나, 고난받는 이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책망할 근거가 없다.
이스라엘을 보배롭게 사랑하신 하나님은 그 백성을 열방의 빛으로 부르셨다. 선택받았다는 확신으로 다른 민족을 멸시하면 그 선택의 목적을 거스른다.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자기 백성을 살리지 않고 자신을 내어 주셨다. 유일한 구원자를 고백하는 증인도 이웃을 강압하거나 자신의 성공을 과장하지 않고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말해야 한다.
눈먼 백성을 증인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먼저 알고 믿고 깨닫게 하신다. 증언의 내용은 교회가 얼마나 완전했는지가 아닌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이다. 그러므로 잘못을 숨기거나 피해를 외면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은 자기 죄를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자기 손에서 아무도 빼앗지 못하게 하시는 구원자를 신뢰하며, 자신이 구원을 주관하는 듯 행동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