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14절은 백성이 돌아올 길을 닦으라는 명령으로 시작한다. 도입의 “그가 말하기를”(וְאָמַר, 웨아마르)은 과거나 미래로 읽을 수 있으며, 개역개정은 절 끝의 “하리라”로 앞으로 들릴 말씀을 나타낸다. NET는 앞에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다는 이유로 “내가 말한다”로 고칠 가능성을 언급하되, 하나님의 직접 말씀을 여는 도입은 15절에 있다고 본다.1 BHS는 14절 끝에 단락 표시를 두어 13절의 기업 약속과 길을 닦으라는 명령을 앞 단락의 결말로 묶고, 15-21절을 별도 단락으로 구분한다.

“돋우고 돋우어”(סֹלּוּ־סֹלּוּ, 솔루 솔루)는 길을 쌓아 평탄하게 하라는 거듭된 명령이다. “길을 수축하여”(פַּנּוּ־דָרֶךְ, 판누 다레크)는 40:3의 “길을 예비하라”와 같은 말이다. 그곳에서는 여호와께서 오실 길, 여기서는 “내 백성의 길”을 준비한다. “거치는 것을 제하여 버리라”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을 치우라는 뜻으로, UBS는 앞 문맥에 비추어 우상 숭배를 중심적인 걸림돌로 읽는다.2 자기 마음의 길을 고집했던 백성도 하나님은 “내 백성”이라 부르시며 돌아올 길을 열라고 명하신다.

15절은 그 명령의 이유를 밝힌다. “지극히 존귀하며”(רָם וְנִשָּׂא, 람 웨니사)는 “높고 들린”이라는 뜻이며, 같은 두 어근이 6:1의 높이 들린 보좌와 52:13의 종의 높임에도 쓰인다. 7절에서 백성은 높은 산에 우상의 침상을 폈지만, 참으로 높으신 하나님은 낮은 사람과 함께 거하신다. “영원히 거하시며”(שֹׁכֵן עַד, 쇼켄 아드)에 대해 UBS는 영원히 사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설명한다.3 NET는 이 칭호를 주권적 통치의 문맥에서 “영원히 다스리시는 분”으로 옮긴다.1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신 하나님은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신다. “통회하는”(דַּכָּא, 닥카)은 짓눌려 부서진 상태를, “마음이 겸손한”(שְׁפַל־רוּחַ, 셰팔 루아흐)은 영이 낮은 상태를 뜻한다. UBS는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교만을 버린 사람으로 설명하고, NET는 회개자와 함께 낙심과 굴욕을 겪은 포로민까지 시야에 둔다.31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목적은 그 영과 마음을 소생시키는 데 있다. “통회-겸손”을 “겸손-통회”로 뒤집는 교차 대구도 그 대상과 살리심을 연결한다.3

하나님께서 “소생시키다”(לְהַחֲיוֹת, 레하하요트)라고 하신 말은 새 생명과 활력을 주신다는 뜻이다. 10절에서 백성은 우상을 찾아다니며 “네 힘이 살아났으므로” 지치지 않았다고 했다. NET는 그 표현을 새 힘을 얻는다는 뜻으로 이해한다.1 같은 생명의 어근이 1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낮아진 사람에게 주시는 생기를 가리킨다. 그분은 낮은 사람을 계속 짓눌러 두려고 가까이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게 하신다.

16절에서 하나님은 영원히 다투거나 끊임없이 노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자신이 지으신 생명이 그 앞에서 쇠약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피곤할까”(יַעֲטוֹף, 야아토프)는 기진하고 약해진다는 뜻으로, UBS는 “죽을 것이다”로 옮기면 지나치게 강하다고 설명한다. “내 앞에서”(מִלְּפָנַי, 밀레파나이)는 “나 때문에”로도 읽을 수 있다.4 개역개정의 “영과 혼”에서 영은 생명력을, “혼”(וּנְשָׁמוֹת, 우네샤모트)은 생명의 호흡들을 가리킨다. 생기를 불어넣으신 창세기 2:7의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진노를 끝없이 이어 가지 않으신다.

17절은 진노의 원인을 “그의 탐심”이라고 밝힌다. “탐심”(בִּצְעוֹ, 비츠오)은 자기 이익을 가리키며, 56:11에서 목자들이 저마다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는 고발과 연결된다. 하나님은 노하여 백성을 치고 얼굴을 가리셨지만, 백성은 여전히 자기 마음의 길을 걸었다. “내 얼굴을”은 목적어 없이 쓰인 “가리고”에 개역개정이 보충한 말이며 NET도 같은 생략으로 읽는다. NET는 “패역하여”(שׁוֹבָב, 쇼바브)를 배교자의 모습으로 이해한다.1 징벌을 받아도 돌아오지 않는 그 삶을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

18절의 약속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이다. 고집스러운 삶을 보신 하나님께서 친히 고치고 인도하며 위로를 회복시키겠다고 하신다. NET는 “인도하며”(וְאַנְחֵהוּ, 웨안헤후)를 “쉼을 주다”로 옮긴다. 또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을 같은 사람들로 읽어 슬퍼하는 백성에게 위로를 회복시키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개역개정은 백성과 그를 위해 슬퍼하는 사람들을 구별한다.1 “다시 얻게 하리라”(וַאֲשַׁלֵּם, 와아샬렘)는 갚거나 온전하게 한다는 뜻으로 19절의 평강과 같은 어근이다. 치료와 위로는 먼저 달라진 백성에게 주는 보상으로 소개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회복을 시작하시며 그들을 새 길로 인도하신다.

19절에서 하나님은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신다. NET는 “창조하는 자”(בּוֹרֵא, 보레) 뒤에 “나”가 필사 중 빠졌을 가능성을 제안하며, 입술의 열매를 찬양이나 슬퍼하던 사람들의 기쁜 외침으로 읽는다.1 뒤의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שָׁלוֹם שָׁלוֹם לָרָחוֹק וְלַקָּרוֹב, 샬롬 샬롬 라라호크 웰락카로브)는 평강을 두 번 앞세워 먼 사람과 가까운 사람에게 선언한다. NET는 이 반복을 평강의 충만함에 대한 강조로 읽는다.1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확증 뒤에는 “내가 그를 고치리라”가 이어져 치료가 그 평강의 내용임을 밝힌다.

“먼 데”와 “가까운 데”는 흩어진 사람들과 땅에 남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지만, 두 표현을 각각 한 민족으로 고정할 근거는 이 문맥에 없다. 바로 앞 56:3-8에서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과 고자도 하나님의 집으로 부름받았으므로 그 평강은 이스라엘 밖에도 열려 있다. 3절의 가까이 오라는 고발과 9절의 먼 곳에 사신을 보낸 우상 숭배에 쓰였던 말들이 이제 평강을 받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20절의 악인은 진흙을 밀어 올리는 요동하는 바다에 비유된다. 개역개정은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라고 옮기지만, 히브리어의 “잠잠할 수 없다”(כִּי הַשְׁקֵט לֹא יוּכָל, 키 하쉬케트 로 유칼)는 비유 속 바다를 가리킨다. UBS는 같은 어근으로 바다가 휘몰리고 바닥의 진흙을 밀어 올리는 모습을 묘사하며, 진흙과 더러운 것은 악인이 일으키는 문제의 비유라고 설명한다.5 이들은 앞에서 탐욕과 우상을 고집하던 자들로, 15절의 소생을 약속받은 낮아진 사람들과 구별된다.

21절은 48:22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라는 후렴을 되풀이한다. 그곳의 “여호와” 대신 여기서는 “내 하나님”(אֱלֹהַי, 엘로하이)이라 하여 화자가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의 경고를 말한다. 57:2의 의인이 들어간 “평안”, 19절에서 두 번 선언된 “평강”, 21절에서 악인에게 없다는 “평강”은 모두 같은 말(שָׁלוֹם, 샬롬)이다. 평강은 널리 선포되지만 우상과 탐욕의 길을 고집하는 악인은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상하고 불안한 마음 자체가 악함의 증거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낮아진 사람에게 소생을 약속하신다.

성경신학적 통찰

이사야 40:3-4의 길은 포로 된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찾아오시는 길이며, 57:14의 길은 그 백성이 돌아갈 길이다. 62:10에서는 길의 돌을 치우고 만민을 향해 기치를 들라고 한다. 하나님이 오시는 약속은 우상과 죄를 버리고 그분께 돌아오는 응답으로 이어진다. 길을 준비하라는 명령은 흩어진 백성이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며 다시 살아갈 회복을 향한다.

이사야 6:1-7에서 높이 들린 왕을 본 선지자는 부정한 입술을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는다. 66:1-2에서도 하늘을 보좌로 삼으신 창조주는 마음이 가난하고 통회하며 말씀 앞에 떠는 자를 돌보신다. 57:15의 높으신 하나님은 그런 낮은 사람과 함께 거하신다. 죄를 아시는 거룩한 분께서 자신을 의지하는 백성을 살리신다.

시편 51:16-17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멸시하지 않으신다고 기도한다. 시편 34:17-19도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신 여호와를 찬양하며, 의인에게도 고난이 많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상한 마음을 언제나 개인의 악행에 대한 벌로 설명할 수 없다. 이사야 57:15의 낮아진 사람 역시 회개자와 굴욕당한 포로민이라는 두 방향에서 읽혀 왔다. 그들은 자신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

52:13-15에서 높임받는 종은 먼저 심하게 상한 모습을 지닌다. 57:15의 높으신 하나님은 낮은 사람 곁에 거하시며 그 마음을 살리신다. 이사야서의 구원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상한 사람을 외면하는 힘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종의 사역을 이루시고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주신다.

창세기 2:7에서 흙으로 지어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생기로 산다. 이사야 57:16도 호흡을 지으신 분이 쇠약해지는 백성을 아신다는 사실을 자비의 이유로 든다. 그분의 책망은 죄를 드러내지만 백성의 생명을 끝없이 소진시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므로, 그분의 백성도 잘못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사람을 회복 불가능한 수치 속에 버려둘 수 없다.

이사야 54:7-10은 잠시 얼굴을 가리신 진노 뒤에 영원한 자비와 흔들리지 않는 화평의 언약을 약속한다. 57:17-19에서도 얼굴을 가리고 노하신 하나님께서 고치고 인도하며 평강을 주신다. 55:10-13에서는 그분의 말씀이 뜻을 이루어 백성이 기쁨으로 나가고 평안히 인도받는다. 회복과 찬양은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행하시는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48:20-22는 바벨론을 떠나 구원을 알리라는 명령 뒤에 악인에게 평강이 없다는 경고를 둔다. 57:19-21도 평강 선포 뒤에 같은 후렴으로 끝난다. 하나님께서 고치시는 은혜를 받으면서 그분을 외면하고 악을 계속 행할 수는 없다. 이 경고는 상한 사람의 절망을 더하기보다 굳어진 삶의 방향을 돌이켜 그분의 인도를 따르라고 부른다.

기독론적 해석

에베소서 2:17은 이사야 57:19을 사용하여 그리스도께서 먼 데 있는 사람과 가까운 데 있는 사람에게 평안을 선포하셨다고 말한다. 에베소서의 먼 사람은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이방인 신자이며, 가까운 사람은 유대인을 가리킨다. 이사야에서 두 대상을 각각 민족으로 고정하지 않았던 평강의 말씀을, 바울은 십자가로 두 집단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사역으로 읽는다(엡 2:13-18).

그 가까워짐은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한다. 그분께서 원수 된 관계를 십자가로 다루시고 두 집단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신다. 이방인도 같은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성도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간다(엡 2:19-22). 하나님과의 가까움을 받은 사람은 다른 성도가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을 자기 허락에 종속시킬 수 없다.

사도행전 2:38-39에서 베드로는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말한다. 그 약속은 듣는 이들과 자녀들, 주께서 부르시는 모든 먼 사람에게도 주어진다. 멀고 가까움은 구원의 은혜에 서로 다른 자격을 만들지 않는다.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죄 사함과 새 생명을 받는다.

빌립보서 2:6-11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면서 종의 형체를 취하고 사람이 되어 십자가의 죽음까지 복종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을 지극히 높이셨다. 높이 들리신 하나님께서 낮은 자와 거하신다는 이사야 57:15의 약속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신 요한복음 1:14의 사건과 연결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고통 속에 오셔서 자신을 내어 주시고 은혜와 진리로 아버지를 알리셨다.

마태복음 11:28-30에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자신에게 불러 쉼을 주신다. 그 쉼에는 주님께 배우고 그분의 멍에를 메라는 요청이 따른다. 낮아진 사람의 영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친 사람을 쉬게 하고 새 삶으로 인도하신다. 탐욕을 계속 붙든 채 평강을 요구하는 삶은 이 인도를 거스른다.

누가복음 3:4-6에서 세례 요한은 이사야 40장의 길 준비 말씀으로 주님의 오심을 예비한다. 그가 가르친 회개의 열매는 옷과 먹을 것을 나누고, 정해진 세금 이상을 거두지 않으며, 강탈과 거짓 고발을 버리는 행동이다(눅 3:10-14). 이사야 57:14의 길 준비와 17절의 탐욕 고발도 이런 응답과 연결된다. 주님을 맞는 사람은 이웃을 해치며 자기 몫을 늘리던 생활을 멈추어야 한다.

베드로전서 2:24는 이사야 53:5의 나음 약속을 사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죄를 담당하심으로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사야 53:5의 평화와 나음은 57:18-19의 치료와 평강이라는 주제와도 이어진다. 그리스도는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여 새로 살 근거를 주신다. 히브리서 9:24-28의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다시 오신다. 성도는 아직 상처와 어려움이 있어도 그 평강의 완성을 기다릴 수 있다.

현대적 적용

하나님께 돌아올 길을 가로막는 우상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예배의 열심이 있어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을 붙들고 이웃의 손해로 자기 이익을 늘린다면 여전히 자기 마음의 길을 걷는 것이다. 탐욕을 인정한 사람은 부당하게 취한 몫과 자신이 입힌 피해에 책임져야 한다.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통회하고 낮아진 사람을 살리려고 함께 거하신다. 회개를 이유로 사람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거나 실패를 끝없이 들추는 행위는 이 살리심을 거스른다. 죄를 바로잡을 때에도 생명을 지으시고 쇠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따라야 한다. 피해를 받은 사람에게 빨리 잊으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잘못을 고칠 수는 없다.

징벌에도 돌이키지 않던 백성을 보시고 하나님은 고치겠다고 하셨다. 되풀이되는 잘못에 지친 사람은 그분의 치료를 구할 수 있다. 그 은혜를 믿는 사람은 탐욕을 숨기지 않고 그분의 인도를 따른다. 회복은 사람이 충분히 자신을 무너뜨려 얻는 자격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베푸시는 고치심에 응답하는 삶이다.

입술의 열매는 고치고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다. 아직 슬퍼하는 사람에게 감사와 간증을 강요할 수 없다. 마음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악인에게 평강이 없다는 경고를 적용해서도 안 된다. 본문은 상한 사람에게 소생을 약속하며 우상과 탐욕을 고집하는 삶을 책망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먼 사람과 가까운 사람을 같은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어느 한쪽도 은혜를 독점하고 다른 사람을 계속 허락받아야 하는 손님으로 대할 수 없다. 평강을 구하는 공동체는 잘못을 덮어 고요함을 유지하거나 진실을 말한 사람을 탓하지 않고, 죄를 다루어 화목하게 하신 주님께 순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