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이사야 48:1-11에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도 진실과 공의가 없는 야곱을 책망하셨다. 그들의 목은 쇠의 힘줄이요 이마는 놋이지만,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노하기를 더디 하고 멸절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12절은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고 그들을 다시 부른다. 앞서 자기 이름과 출신을 내세웠던 백성에게 “내가 부른”(מְקֹרָאִי, 메코라이)이라는 같은 부르다 동사를 써서 그 이름의 근원을 밝힌다. 복수로 시작한 1절과 달리 단수 명령으로 온 백성을 한 사람처럼 대하신다.
하나님은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고 선언하신다(12절). “나”를 세 번 앞세워 처음 일들을 알리고 이루신 바로 그분이 말씀하심을 강조한다. 41:4의 세대들을 부르시는 분, 44:6의 다른 신이 없는 처음과 마지막이신 분이 이제 야곱을 부르신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분의 부르심에서 비롯되었다.
13절에서 하나님의 손은 땅의 기초를 정하고 오른손은 하늘을 편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하늘과 땅이 일제히 일어선다. 이스라엘을 부르신 분이 피조 세계를 부르시고 15절에서는 고레스를 부르신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즉시 응답하는 것과 달리, 이스라엘은 “들으라”는 말을 거듭 들어야 한다. 8절의 열리지 않은 귀가 18절의 탄식을 준비한다. 평강을 놓친 까닭은 하나님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 백성의 듣지 않음에 있었다.
14절은 모두 모여 들으라고 한다. 청중은 이스라엘일 수도 열방일 수도 있다.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해설은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부름을 넓게 남겨 두도록 권한다. “그들 중에 누가 이 일들을 알게 하였느냐”에서 일부 히브리어 사본을 따라 “너희”로 옮기는 번역도 있으나, UBS는 마소라 본문의 “그들”을 따르고 이방 신들로 읽는 견해를 소개한다.3 백성이 우상에게 공을 돌리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미리 알리셨다는 5절의 논증이 이어진다.
“나 여호와가 사랑하는 자”는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고레스이다. “사랑하는 자”(אֲהֵבוֹ, 아헤보)는 문자적으로 “그를 사랑하셨다”라는 동사이다. UBS는 이런 관계에 사랑이라는 표현이 쓰인 곳은 여기뿐이라고 설명하며, 신명기 4:37의 조상 사랑과 견주어 이 표현을 보존한다. “택하다”로 고쳐 읽거나 “나의 친구”로 옮기는 데 반대한다.3 NET는 “동맹자”로 옮기며 친구나 언약의 상대도 가능한 번역으로 제시한다.1 45:1-4에서 고레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도 야곱을 위해 부름받았다. 친밀한 호칭은 그를 통해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관계를 나타낸다.
“나의 기뻐하는 뜻”(חֶפְצוֹ, 헤프초)은 문자적으로 “그의 기뻐하는 뜻”이다. 접미어는 여호와나 고레스를 가리킬 수 있지만, 44:28의 고레스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한다는 말씀은 개역개정처럼 하나님의 뜻으로 읽는 것을 뒷받침한다. “그의 팔”(וּזְרֹעוֹ, 우즈로오)에도 소유자가 명시되지 않아 고레스의 팔이나 여호와의 팔로 읽을 수 있다.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의 동사는 개역개정이 보충한 것이다. UBS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는 해석과 고레스의 힘으로 옮기는 번역, 사해 사본의 한 본문에 따라 “팔” 대신 “자손”으로 읽는 번역을 소개하면서 마소라 본문을 따르도록 권한다.3
15절은 “나 곧 내가”를 겹쳐 하나님이 말씀하고 고레스를 부르며 오게 하셨다고 선언한다. 그다음 그의 길이 형통하리라는 결과가 나온다. 45:13에서도 하나님이 고레스의 모든 길을 곧게 하신다. 우상은 아무것도 알리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사람을 부르고 뜻을 이루신다.
16절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것을 들으라”고 다시 부른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숨은 곳에서 말씀하지 않으셨고, 예고한 일이 일어날 때 거기 계셨다고 하신다. UBS는 이 부름이 14절의 모이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 고레스에 관한 말씀을 감싼다고 본다. “처음부터”는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은 처음이나 고레스 사명의 시작으로 읽을 수 있다. “거기에 있었노라”는 사건에 관여하셨다는 뜻으로 풀이한다.4
16절 끝에서는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느니라”고 화자가 바뀐다. 개역개정은 앞 문장에 “하셨느니라”를 넣어 경계를 표시한다. “나를 보내셨다”(שְׁלָחַנִי, 셸라하니)고 말하는 이는 여호와를 3인칭으로 부르는 보냄받은 사람이다. 고레스, 이스라엘, 예언자, 메시아 등이 제안되며, UBS는 예언자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보고 NET는 고레스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41
“그의 영”(וְרוּחוֹ, 베루호)은 “주 여호와와 그의 영이 나를 보내셨다”라는 주어로도, 개역개정처럼 “나와 그의 영을 보내셨다”라는 목적어로도 읽힌다. UBS는 하나님이 영을 보내시는 용례에 따라 목적어로 읽되, 영이 따로 파송된다기보다 보냄받은 이가 하나님의 영, 곧 능력을 지니고 간다는 뜻으로 푼다.4 “이제는”은 새로운 발화를 표시하고, 17절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도입한다. 화자의 신원과 구문에 차이가 있어도 파송과 하나님의 영이 연결된다.
17절의 “너희의 구속자”(גֹּאַלְךָ, 고알레카)는 문자적으로 단수인 “너의 구속자”이며 이후의 “네게”, “너를”, “네 하나님”과 이어진다. 레위기 25:25에서 가난해진 친족의 기업을 되찾아 주는 가까운 친척과 같은 계열의 말이다. 곤경에 빠진 백성을 건지시는 하나님과의 가까운 관계를 나타낸다. 43:14에서도 구속자는 백성을 위해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신다.
구속자는 백성을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걸어갈 길로 인도하신다. “유익하도록”(לְהוֹעִיל, 레호일)은 44:10에서 우상이 “무익하다”고 할 때 쓴 동사와 같다. 가르치고 인도한다는 분사형은 그분의 한결같은 모습을 그린다. 15절에서 고레스의 길을 형통하게 하신 분이 이제 이스라엘의 길을 가르치신다.
18절의 “주의하였더라면”(לוּא הִקְשַׁבְתָּ, 루 히크샤브타)은 이미 놓친 기회를 탄식한다. 그랬다면 평강이 강처럼 흐르고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다. NET는 “네 평강”을 언약에 순종하는 백성의 평안과 번영으로, “네 공의”(וְצִדְקָתְךָ, 베치드카테카)를 원수에게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푼다.1 이 해석에서 공의는 개인의 도덕성보다 백성을 위한 구원과 회복을 가리킨다. 끊이지 않는 물은 풍성함과 안정의 그림이다.
19절은 자손이 모래처럼 많고 이름이 하나님 앞에서 끊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탄식한다. 아브라함의 약속을 떠올리는 말이다. “끊어지다”는 9절의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와 같은 어근이다. 불순종은 이름이 끊어질 위험을 불렀지만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백성을 끊지 않겠다고 하셨다. 놓친 복을 탄식하신 뒤 바벨론을 떠날 길을 여신다.
20절은 바벨론에서 나와 갈대아인을 피하라고 명령한다. “피하고”(בִּרְחוּ, 비르후)는 도망하라는 긴급한 부름이며 그 떠남에는 즐거운 노랫소리가 따른다. “반포하여”(הוֹצִיאוּהָ, 호치우하)는 소식을 내보내라는 뜻으로, 백성이 “나와서”라는 말과 같은 어근이다. 백성이 바벨론에서 나오듯 구속의 소식도 땅 끝까지 나가야 한다. 하나님이 알리고 들려주셨던 일을 이제 백성이 알리고 들려준다.
그 소식은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이다. “구속하셨다”(גָּאַל, 가알)는 17절의 구속자와 같은 동사이며 완료형으로 여호와의 일을 선포한다. 44:23에서도 같은 선언이 하늘과 땅의 노래를 부른다. 바벨론을 떠나는 백성은 자기 힘으로 자유를 얻었다고 자랑하지 않고 여호와의 구속을 알린다.
21절은 사막에서 목마르지 않고 바위에서 물이 솟는 길을 노래한다. 개역개정은 히브리어 완료형과 연속 미완료형을 과거로 옮겨 출애굽을 돌아보게 한다. NET는 현재형으로 옮기며 바벨론 귀환을 출애굽기 17:6의 물 공급에 겹쳐 읽고 이사야 35:6, 49:10도 같은 그림을 쓴다고 설명한다.1 두 해석 모두 출애굽 때 물을 주신 하나님이 새 길에서도 백성을 돌보신다는 소망을 준다.
22절은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라는 경고로 끝난다. 거의 같은 선언이 57:21에 다시 나온다. 18절의 놓친 평강과 마지막의 평강 없음이 맞물린다.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부름과 광야의 물을 받았어도 말씀을 거부하는 삶에는 평강이 없다. 48장에서는 이스라엘이 먼저 책망받았으므로 이 경고도 우선 언약 백성을 향한다. 구속받은 백성은 이제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한다.
성경신학적 통찰
창세기 22:15-18은 말씀을 준행한 아브라함에게 모래 같은 자손과 천하 만민의 복을 약속한다. 이사야 48:18-19는 명령을 듣지 않은 후손이 그 풍성함을 놓쳤다고 탄식한다. 포로 생활은 땅과 성읍뿐 아니라 자손과 이름이 끊어질 위기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백성을 멸절하지 않으시고 다시 야곱과 이스라엘이라 부르신다. 땅 끝까지 알려야 할 구속의 소식은 열방의 복이라는 언약의 방향을 잇는다.
48:1-2의 백성은 이스라엘의 이름과 거룩한 성 출신임을 내세우면서 진실과 공의를 버렸다. 조상의 이름이 조상처럼 응답하는 일을 대신하지 못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다시 길을 여시기에 백성은 응답할 수 있으며, 그 말씀을 거부한 책임도 진다.
출애굽기 17:1-7에서 목마른 백성은 모세와 다투며 여호와가 함께 계신지를 시험했다. NET는 그 다툼을 소송하듯 맞서는 행동으로 설명한다.2 하나님은 모세가 반석을 치게 하여 물을 주셨다. 이사야 48:21은 그 공급을 바벨론 귀환의 길에 겹쳐 놓는다.1 완고한 백성에게 다시 물을 주시는 은혜이다. 맛사와 므리바라는 이름에는 시험과 다툼의 기억도 남는다. 구출과 공급을 받은 백성도 불순종의 경고를 들어야 한다.
신명기 30:1-20은 흩어진 백성이 돌아오면 하나님이 모으시고 마음에 할례를 주어 사랑하게 하신다고 약속한다. 순종과 번성, 배역과 멸망의 관계는 이사야 48:18-19의 탄식에도 나타난다. 다만 신명기 30장은 돌아옴을 먼저 말하고, 이사야 48장에서는 여전히 완고한 백성에게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길을 여신다. 귀환하는 몸과 함께 듣는 마음이 새로워져야 하며, 그 마음도 하나님께 받아야 한다.
신명기 30:11-14은 명령이 하늘이나 바다 건너에 있지 않고 입과 마음에 가까워 행할 수 있다고 한다. 이사야 48:16에서도 하나님은 숨은 곳에서 말씀하지 않으셨다. 백성은 공개적으로 주어진 말씀을 거부했다. 18절은 지난 실패를 탄식하고 20절은 지금 열린 길에 응답하라고 부른다.
이사야 52:11-12는 바벨론에서 나와 정결하라고 명한다. 48:20의 “도망하라”와 달리 52:12는 도망하듯 황급히 다니지 않으리라고 약속한다. “황급히”는 출애굽기 12:11의 급히 먹는 유월절을 떠올린다. 첫 출애굽의 서두름과 달리 여호와가 앞서 가고 뒤에서 호위하시므로 백성은 보호 아래 떠난다. 각 본문의 속도와 분위기는 달라도 구원자의 인도에 응답하여 길을 나선다는 흐름은 이어진다.
이사야 46장에서 바벨론의 신 벨과 느보는 짐승에게 실린 무거운 짐이다. 여호와는 처음부터 종말을 알리고 동쪽에서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르며 말씀하신 대로 이루신다(46:10-11). 48:12-15의 고레스 부르심도 그 약속을 잇는다. 45:1-7, 13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그 왕이 야곱을 위해 부름받아 값을 받지 않고 포로를 놓으리라고 밝힌다. 에스라 1:1-4에서 그 조서는 귀환과 성전 건축의 길을 연다. 하나님은 낯선 이방 왕에게 바벨론을 치고 귀환을 허락하는 과업을 맡기셨다.
이사야 57:19-21은 먼 자와 가까운 자에게 평강과 치유를 선언한 뒤 악인에게 평강이 없다고 경고한다. 48:18의 바다 물결은 끊이지 않는 공의를 그리지만 57:20의 요동하는 바다는 악인의 불안정을 그린다. 같은 이미지의 뜻은 문맥에 따라 달라진다. 하나님은 고치시는 은혜로 부르시며 악한 길에서 돌아설 것을 요구하신다.
기독론적 해석
이사야 48장의 바벨론 해방은 포로 유다인에게 잃었던 땅과 공동체로 돌아갈 길을 열었다. 그러나 귀환하는 백성 중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으며, 옛적부터 열리지 않은 귀가 저절로 열리지는 않는다. 고레스의 해방 뒤에도 완고한 마음의 회복이 필요하다.
48:20에서 야곱은 구속받은 종이다. 49:3-6에서는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종이 야곱을 돌아오게 하고 이방의 빛이 되어 구원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한다. 50:4-5에서 그 종은 하나님이 귀를 열어 주셔서 거역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듣지 않는 야곱과 순종하는 종이 대비된다. 누가복음 2:32는 예수를 이방의 빛으로 찬양하고 빌립보서 2:8은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밝힌다. 그리스도는 그 말씀을 끝까지 듣고 순종하셨다.
로마서 6:3-11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사람은 새 생명 가운데 걸으며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도록 부름받는다. 역사 속 바벨론을 떠나는 사건과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새 생명은 문맥이 다르지만, 하나님이 여신 자유에 백성이 응답하여 살아간다는 점에서 연결된다. 두 경우 모두 자유의 근원은 하나님의 구원이다.
이사야의 구속자는 곤경에 빠진 친족을 되찾는 가까운 친척을 떠올리게 한다. 45:13과 52:3은 백성이 돈 없이 놓이고 속량되리라고 한다. 베드로전서 1:18-19는 헛된 행실에서의 대속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이루어졌다고 밝힌다. 히브리서 2:14-15에서 그분은 자녀들과 같은 혈과 육을 지니고 죽음으로 죽음의 세력을 멸하여 종노릇하던 사람을 놓아주신다. 구속자의 가까운 관계와 대가는 성육신과 십자가에서 구체화된다.
요한계시록 1:9-18에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이사야 41:4, 44:6, 48:12의 여호와의 칭호를 사용하시며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지니셨다고 밝히신다. 요한에게 오른손을 얹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주님은 교회의 결말이 박해자의 손에 있지 않음을 알리신다. 이 연결은 48:12의 자기소개에 근거한다. 48:16의 보냄받은 화자는 여전히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이사야 48:16의 파송과 영은 42:1과 61:1의 사명과 이어진다. 하나님은 종에게 영을 주어 이방에 정의를 베풀게 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와 포로를 돌보게 하신다. 누가복음 4:16-21에서 예수는 61장의 말씀을 읽고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신다. 예수께서 직접 적용하신 본문은 이사야 61장이며, 48:16은 같은 선지서의 파송과 영이라는 주제를 나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종의 사명은 약한 자를 살리는 은혜로 나타난다.
누가복음 4:25-29에서 예수는 은혜가 사렙다 과부와 수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미친 일을 기억하게 하신다. 청중은 분노하여 그분을 쫓아낸다. 은혜를 들으면서도 자기 기대와 경계를 고집하여 거부할 수 있다는 긴장은 듣지 않던 이사야의 백성을 떠올리게 한다.
고린도전서 10:1-11에서 바울은 광야의 반석이 그리스도였다고 밝히고, 은혜의 공급을 받은 백성 대다수가 멸망했다고 경고한다. 이사야 48:21을 직접 해석하는 구절은 아니지만 두 본문 모두 광야의 물과 공급을 기억한다.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잔과 귀신의 잔에 대한 경고(고전 10:16-21)는 구속의 선물을 누리는 사람이 누구에게 충성해야 하는지 묻는다.
요한계시록 18:4은 바벨론에서 나와 죄에 참여하지 말라고 부른다. 사치와 권력, 사람의 영혼까지 거래하는 질서가 심판받는다(18:13). 이사야의 포로들은 실제 바벨론을 떠났고 계시록의 교회는 자신이 참여하는 죄와 결별하도록 부름받는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만으로 그 참여가 끊어지지는 않는다.
에베소서 2:14-18은 이사야 57:19의 먼 자와 가까운 자에게 주시는 평강을 그리스도께 연결한다. 그분은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십자가로 한 몸이 되게 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신다. 요한복음 20:19-23에서는 상처를 지닌 채 살아나신 예수께서 평강을 선언하고 성령을 주어 제자들을 보내신다. 구속자가 여시는 평강에는 그분께 돌아와 살며 보내심에 응답하는 새 삶이 따른다.
현대적 적용
“들으라”는 부름은 12, 14, 16절에 반복된다. 백성은 몰라서만 실패한 것이 아니다. 공개적으로 주어진 말씀을 거부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내세웠다. 하나님께 부름받았다는 정체성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삶의 방향을 바꾸라는 요구를 담는다. 직분과 경력이 진실과 공의를 대신하지 못한다.
18-19절에서 하나님은 백성이 놓친 평강과 자손의 복을 탄식하시고 곧바로 떠날 길을 여신다. 잘못으로 잃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면서 다시 응답하도록 부르신다. 이 탄식은 분명히 알려 주신 명령을 거부한 언약 백성의 역사에 주어졌다. 자녀가 없거나 형편이 어려운 개인에게 같은 불순종의 판결을 붙일 근거는 주어지지 않았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는 경고는 불안하거나 슬픈 감정에 대한 판결이 아니다. 말씀을 거부하고 악한 길을 고집하는 삶을 겨냥한다. 이 경고는 먼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던 백성을 향한다. 은혜를 경험하고 예배에 참여하면서도 거짓과 불의를 고집한다면 돌이켜야 한다.
바벨론을 떠나는 백성은 여호와가 야곱을 구속하셨다고 선포한다. 구원의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고백이다. 고레스도 하나님이 불러 사용하신 사람이지 구원자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백성은 낯선 사람을 통해 길을 여시는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
귀환하는 길에도 사막이 있으며 백성은 하나님이 주시는 물을 필요로 한다.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고 부족함과 어려움이 모두 끝나지는 않는다. 그 길을 돌보시는 구속자께 의지하면서 말씀을 들어야 한다. 계시록의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부름도 자신이 참여하는 착취와 죄를 버릴 것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평강을 받는 사람은 이익과 안전을 위해 다른 사람을 소비하는 삶에서 돌이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