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1-2절은 바벨론의 신들이 무너지는 장면이다. 벨과 느보가 차례로 쓰러진 뒤 2절에서 두 동사가 순서를 바꾸어 “일제히” 쓰러졌다고 선언한다. 벨은 므로닥(마르둑)으로도 불린 바벨론의 주요 신이며 느보는 그의 아들로 알려졌다. 예레미야 50:2도 벨과 므로닥을 같은 신의 이름으로 부르고, 벨과 느보의 이름은 고레스 원통에도 나온다. 두 동사를 경배하는 몸짓으로 읽는 견해도 있으나 Graham S. Ogden과 Jan Sterk의 UBS 핸드북은 2절의 포로 행렬에 비추어 몰락으로 읽으며, 이 장면을 패한 바벨론 사람들의 피난으로 이해한다.1

사람들이 메고 다니던 신상은 이제 짐승과 가축의 등에 실린다. 히브리어의 “짐승과 가축의 것이 되었다”는 말을 대부분의 번역은 그 등에 실렸다는 뜻으로 읽는다. “떠메고 다니던 그것들”(נְשֻׂאֹתֵיכֶם, 네수오테켐)은 바벨론 사람들이 운반하던 신상이며, 그것들이 피곤한 짐승을 누르는 무거운 짐이 된다. UBS는 짐승이 그 짐 때문에 지쳐 간다고 풀이하고, 축제 행렬에서 신상을 운반하는 장면으로 볼 근거는 본문에 없다고 설명한다.1 메다, 싣다, 짐이라는 말이 모여 사람들이 섬기던 신의 무게와 무력함을 드러낸다.

신들은 “그 짐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자신들도 포로가 된다. “짐”은 1절에서 짐승 등에 실린 자기 신상을 가리킨다. “자기들도”에 해당하는 말(וְנַפְשָׁם, 베나프샴)은 문자적으로 “그들의 네페쉬”이며, UBS는 신상 뒤에 있다고 여겨진 신 자체를 가리킨다고 풀이한다.2 이스라엘을 포로로 잡아간 제국의 신들이 이제 포로의 길을 간다. 사람을 지켜 줄 것으로 기대된 신은 자기 형상도 지키지 못한다. 제국의 정치적 우세가 그 신들의 구원 능력을 보증하지 못한다.

3절부터는 여호와께서 야곱의 집과 포로지에 남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그들은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사람들이다. “안겼고”와 “업힌”에 쓰인 두 동사는 1절에서 신상이 짐승 등에 실리고 사람에게 메인다는 말에 쓰였다. 사람이 메어야 하는 바벨론의 신상과 백성을 메시는 여호와가 같은 동사로 대조된다. 개역개정의 “내게”는 히브리어에 따로 없고 문맥에서 그 행위자가 하나님임을 밝힌 말이다. UBS는 이스라엘을 출생부터 노년까지 돌봄받는 한 사람처럼 그린다고 보고, 출생을 출애굽 때 민족이 태어난 일과 연결한다.3

백성을 메는 말은 2절의 “짐”과도 같은 어근으로 이어진다. UBS는 이스라엘이 죄 때문에 하나님께 자주 짐이 되었음을 암시하는 말놀이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3 그들의 어려움에도 하나님은 짐을 내려놓지 않고 지탱해 오셨다. 포로 생활로 관계가 끝났다고 여기는 백성에게 하나님은 민족의 처음부터 이어진 돌봄을 기억하게 하신다.

4절의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는 문자적으로 “노년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이다”(וְעַד־זִקְנָה אֲנִי הוּא, 베아드-지크나 아니 후)이다. 백성이 늙어도 하나님이 같은 분이심을 선언한다. “품을 것이라”는 말(אֲנִי אֶסְבֹּל, 아니 에스볼)은 무거운 짐을 진다는 뜻이며, 7절에서 사람이 신상을 어깨에 멘다는 말로 다시 쓰인다. 따뜻하게 안는 모습과 함께 무거워진 백성을 짊어지는 수고를 그린다.

하나님은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고 약속하신다. UBS는 4절에 독립 대명사 “나”가 다섯 번 나와 하나님이 친히 하셨고 하실 일을 강조한다고 설명한다. 이스라엘을 민족으로 빚으신 분(43:7; 44:2)이 계속 메고 구하신다. “구하여 내리라”는 2절에서 우상이 하지 못한 행동이며, “백발”과 “포로”의 비슷한 소리도 포로 생활 중에 지속되는 돌봄을 암시한다.4 백성의 쇠약함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끝내지 못한다.

5-7절은 누구를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는지 묻고 신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따라간다. 사람은 금과 은을 모아 도금장이를 고용하고 신을 만들게 한 뒤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한다. 이어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고 자리에 둔다. UBS가 지적하듯 “들어”와 “메어다가”는 4절에서 하나님이 백성을 “업을 것이요”, “품고” 하실 때와 같은 동사다.5 값비싼 재료와 장인의 기술로 만든 신도 놓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부르짖음에 응답하거나 고난에서 구하지 못한다. 6절에서 장인이 만드는 “신”과 9절에서 “나는 하나님이라” 하실 때의 낱말은 같지만, 전자는 사람이 메고 다니며 후자는 백성을 메신다.

8절의 “장부가 되라”(וְהִתְאֹשָׁשׁוּ, 베히트오샤슈)는 구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동사다. “용감하다”는 어근에서 온 말로 보고 “굳게 서라”로 옮기기도 한다. UBS는 “기억하라”, “마음에 두라”와의 병행을 근거로 “생각하라”를 선호한다. “패역한 자들”은 고의로 거역하는 사람들이다.6 “장부”는 신체적 강함이나 남성다운 기질보다 하나님과 우상을 기억하며 분별하라는 문맥에 속한다. 9절에서는 옛적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라고 명한다. 히브리어는 “나는”을 한 번 쓰고 하나님을 가리키는 두 명사를 잇지만, 개역개정은 “나는 하나님이라”를 두 번 반복하여 그분 외에 다른 이도 같은 이도 없음을 각각 완결된 선언으로 옮긴다.

10-11절에서 하나님은 시초부터 종말을 미리 알리고 말씀하신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나의 뜻이 설 것이니”(עֲצָתִי תָקוּם, 아차티 타쿰)는 그분의 계획이 실현된다는 뜻이다. “기뻐하는 것”은 44:28에서 고레스가 성취할 하나님의 “기쁨”과 같은 말이다.7 동쪽의 “사나운 날짐승”(עַיִט, 아이트)과 먼 나라의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은 고레스를 가리킨다. UBS는 맹금의 비유를 적을 빠르게 덮쳐 이기는 모습으로 설명한다.8 하나님은 앞날을 알릴 뿐 아니라 계획을 수행할 사람을 부르신다.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는 네 마디는 반복되는 강조어를 “반드시”로 살린 번역이다. 말하고 계획한 일은 완료형으로, 이루고 시행할 일은 미완료형으로 표현되어 계획과 실행의 주체가 같은 하나님임을 드러낸다. “계획하였은즉”의 동사는 45:18에서 땅을 “지으시고”라고 할 때와 같다. 땅을 빚으신 하나님이 역사의 계획도 빚고 이루신다.8 고레스는 그 계획을 수행하도록 불린 사람이다.

12절은 3절처럼 “내게 들으라”는 부름으로 시작한다. “마음이 완악하여”(אַבִּירֵי לֵב, 압비레 레브)는 문자적으로 “마음이 강한 자들”이며 완고함을 가리킨다. UBS는 이들을 고레스를 통한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던 포로민으로 본다. 칠십인역은 “마음이 약한 자들”로 옮기지만 마소라 본문은 사해 사본의 지지를 받는다고 설명한다. “공의에서 멀리 떠난”은 하나님이 베푸실 승리와 구원을 멀다고 여기는 태도로 읽는다.9

13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를 가깝게 하신다.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קֵרַבְתִּי צִדְקָתִי, 케라브티 치드카티)은 완료형으로, UBS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확정한다고 설명한다. 백성이 멀다고 여긴 공의를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며, 우상이 주지 못한 구원은 지체하지 않는다. 시온에 구원을 베푼다는 말은 예루살렘 자체의 구원인지 시온을 통해 세상에 구원을 펴심인지 해석이 갈린다.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광을 비춘다는 뜻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영광을 주신다는 뜻으로 읽힌다.10 모든 읽기에서 시온과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의 약속은 확정되어 있다. 여기서 공의는 구원과 짝을 이루어 백성을 건져 바로잡으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가리킨다. 완고한 백성을 책망하시는 분이 그들을 메고 구원하신다.

성경신학적 통찰

하나님이 백성을 업으신다는 약속은 출애굽과 광야 전승에 뿌리를 둔다. 출애굽기 19:3-6에서 하나님은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자신에게 인도하신 일을 기억하게 하신 뒤 언약을 지키며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살라고 요청하신다. 업으신 은혜가 순종의 요청에 앞선다. 온 세계의 주인이신 그분의 돌봄은 이스라엘이 작고 약해져도 끊어지지 않는다. 이사야 46장도 백성을 처음부터 돌보셨다는 선언 뒤에 패역과 완고함을 책망한다. 은혜의 기억이 돌이킴과 순종의 근거가 된다.

신명기 1:29-33에서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들을 안듯 백성을 안고 길을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신명기 32:10-12는 황무지에서 백성을 보호하고 독수리처럼 날개에 업어 홀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노래한다. 다른 신은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호세아 11:1-4에서도 하나님은 어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고 걸음을 가르치며 안고 먹이셨으나 백성은 그 돌봄을 알지 못하고 우상에게로 갔다. 이사야 46장은 같은 돌봄을 태에서 백발까지 넓혀, 오랜 불신에도 백성을 붙드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한다.

이사야 40:10-11에서는 강한 팔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어린 양을 품고 젖먹이는 어미 양을 온순히 인도하신다. “품에 안으시며”(וּבְחֵיקוֹ יִשָּׂא, 우베헤코 잇사)의 동사는 46:3-4의 “업힌”, “업을 것이요”와 같다. 어린 양을 들어 올리는 목자와 백성을 태에서 노년까지 메시는 하나님은 같은 돌봄을 나타낸다. 창조주의 능력이 약한 이의 형편에 맞춘 인도로 드러난다.

시편 115:4-8의 우상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소리도 내지 못한다. 이사야 46:7의 움직이지도 응답하지도 못하는 신상과 같다.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물을 때 시인은 그분이 하늘에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신다고 답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살아 일하시고, 보이는 형상은 구원하지 못한다. 시편은 우상을 만들고 의지하는 사람도 그것과 같아진다고 경고한 뒤 여호와를 도움과 방패로 의지하라고 부른다. 이사야의 우상 풍자도 “내게 들으라”는 부름으로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께 돌이킨다.

예레미야 50:1-3에서 바벨론의 함락은 벨과 므로닥의 수치와 연결된다. 51:44에서는 하나님이 벨을 벌하고 그가 삼킨 것을 끌어내신다. 이사야 46:2에서 벨이 포로로 끌려가듯 제국의 신은 자신이 차지한 백성을 끝까지 붙잡아 둘 수 없다. 제국의 우세가 무너질 수 있다는 선포는 그 지배 아래 사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릴 근거가 된다.

이사야 44:6-8의 처음과 마지막이신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리시고 백성을 그 일의 증인으로 세우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46:9-11의 기억과 예고, 계획의 성취가 이 논쟁을 잇는다. 백성의 시작을 아시는 분이 미래의 구원도 알리신다. 믿음은 모든 정보를 가진 사람의 안전보다 말씀하신 분의 변함없음에 의존한다.

46:13의 가까운 구원은 51:4-8에서 만민의 빛으로 확장된다. 섬들도 하나님의 팔을 기다리고 하늘과 땅이 사라져도 그분의 구원과 공의는 폐하여지지 않는다. 고레스를 통한 귀환을 약속한 말씀은 백성의 삶과 더 넓은 세계를 향한다. 56:1-3은 구원이 가까우므로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고 요청하고, 이방인도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분리될 것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한다. 가까운 구원은 하나님의 돌봄에 응답하여 의롭게 살라는 부름으로 이어진다.

기독론적 해석

마태복음 11:25-30에서 아버지를 알리시는 아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자신에게 불러 쉬게 하신다. 이 초청은 이사야 46장의 직접 인용은 아니지만, 사람이 메고 다녀야 하는 신과 백성을 짊어지시는 하나님이라는 대조와 주제가 맞물린다. 지친 사람은 구원자를 떠받치기 위해 불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르시는 아들에게 나아가 그분께 배우며 쉼을 얻는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의 멍에를 메는 삶에는 순종의 수고가 있으나, 그 수고는 먼저 부름받고 사랑받은 사람의 응답이다.

이사야 53:4의 종이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였거늘”에 쓰인 두 동사는 46:4에서 하나님이 “업을 것이요”, “품고” 하실 때와 같다. 53:11의 “담당하리로다”와 53:12의 죄를 “담당하며”도 각각 그 동사로 이어진다. 46장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붙들어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53장은 다른 이의 고통과 죄를 감당하는 종의 고난을 말한다. 남의 짐을 실제로 짊어지는 구원이 두 본문을 잇는다.

베드로전서 2:21-25은 죄 없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고 나무에 달려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말한다. 그 목적은 우리가 죄에 죽고 의에 살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먼저 자신을 내어 주신 목자에게 돌아온다. 그리스도가 지친 사람에게 주시는 쉼에는 죄의 짐을 감당하신 십자가가 있다.

요한복음 10:27-30에서 예수는 자신의 양들을 아시고 영생을 주시며, 누구도 그들을 자신과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지 못한다고 하신다. 양은 그 음성을 듣고 따른다. 이사야의 태에서 노년까지 이어지는 돌봄을 읽는 성도에게 이 약속은 변화하는 형편 속에서도 자신을 붙드시는 목자를 신뢰하게 한다.

사도행전 17:16-31에서 바울은 우상이 가득한 아덴에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창조주를 선포한다. 그분은 부족한 것이 있어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아야 하는 분이 아니며 금과 은과 돌에 사람의 기술로 새긴 형상처럼 여겨질 수 없다. 사람이 메는 신과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차이를 이사야와 같은 방향으로 밝힌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고 그분을 힘입어 살아가게 하신다. 바울은 그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증거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에게 회개를 명하며 장래의 공의로운 심판을 선포한다. 돌보시는 하나님과 완악함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은 같은 분이다.

로마서 1:16-17은 복음을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부르고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이사야 46:13에서 백성에게 가까이 오는 공의와 구원이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주제로 이어진다. 구원은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는 순서로 선포된다. 시온과 이스라엘을 향한 약속의 역사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도 미친다.

히브리서 13:5-8은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돈 사랑을 버리고 담대히 살라고 권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말한다. 제국의 신들이 쓰러지는 가운데 백성을 계속 메시는 하나님처럼,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은 재물과 형편의 변화에도 지속된다.

요한계시록 22:12-17에서 예수는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이시며 다시 오실 분이시다. 그분은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수를 값없이 받으라고 초대하신다.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고 계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처음과 마지막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미래를 향한다. 신자는 그 약속을 기다리며 지금 들려오는 부름에 응답한다.

현대적 적용

사람이 만들고 지탱해야 하는 신은 위기에서 사람을 건지지 못한다. 일과 재산, 평판은 생활의 자원이지만 그 상실이 자신의 가치까지 없앤다고 여길 때 삶 전체가 그 대상을 보전하는 일에 매인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탱해야 하는 구원자가 아니라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을 섬긴다는 이유로 교회의 존속과 명성을 위해 성도를 소모시킬 수 없다.

바벨론 신들의 몰락은 제국의 번영이 구원의 능력을 보증하지 못함을 드러낸다. 교회는 정권이나 정당, 시장의 성장과 국가의 힘에 구원자의 자리를 맡길 수 없다. 공적인 책임을 감당하되 권력의 우세를 하나님의 승인과 동일시하지 않아야 한다. 고레스도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도록 불린 사람이다. 그를 쓰신다는 약속이 그의 모든 결정을 신적 권위로 높이지 않는다.

노년과 백발의 약속은 먼저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한 생애로 그린다. 그 안에 드러난 지속적인 돌봄은 사람의 생산성과 기여도로 가치를 매기는 태도를 고친다. 나이가 들고 도움이 필요해져도 하나님이 지으시고 사랑하시는 사람의 존엄은 줄어들지 않는다. 돌보는 사람도 하나님께 업혀 가는 피조물이며 모든 짐을 혼자 무한히 감당할 능력을 요구받지 않는다.

“장부가 되라”는 말은 기억하고 생각하며 마음에 두라는 부름 속에 있다. 두려움과 슬픔을 숨기라는 요구로 사용할 수 없다. 백성은 우상의 무력함과 하나님의 돌봄을 기억하며 완고한 불신에서 돌아서야 한다.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판단과 행동을 고친다.

하나님의 뜻이 선다는 약속은 고레스를 통한 포로 회복이라는 문맥에서 주어졌다. 자신의 계획이나 현재의 질병과 경제적 어려움이 원하는 때에 해결되리라는 보증으로 옮길 수 없다. 그리스도의 백성은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구원이 가까우므로 정의를 지키고 의를 행하라는 부름에 응답한다. 그리스도가 죄를 담당하신 목적도 우리가 죄에 죽고 의에 살게 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