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성도를 섬기는 일과 일 년 전의 원함 (1-2절)
바울은 9장을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라는 말로 시작하고, 곧이어 연보의 준비를 구체적으로 권한다. 고린도 성도들이 이미 참여할 마음을 보였으므로 그 선의를 먼저 인정하며 말을 꺼내는 것이다. “성도를 섬기는 일”은 8:4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이 참여하기를 간청했다는 “성도 섬기는 일”과 원문에서 같은 구절이며, 바울은 돈을 모아 보내는 일을 ‘섬김’(τῆς διακονίας, 테스 디아코니아스)이라고 부른다. 로마서 15:25-26에 따르면 이 연보는 예루살렘 성도 가운데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갈라디아서 2:10에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바울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고, 바울은 그 일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다고 말한다. 고린도의 연보도 바울이 힘써 온 이 일, 곧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는 섬김에 속한다.
2절은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밝힌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원함”을 안다. 이 말(προθυμίαν, 프로튀미안)은 8:11-12에서 “마음에 원하던 것”, “할 마음”으로 옮긴 말과 같다.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아가야가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고 자랑했고, 원문의 현재형 동사(καυχῶμαι, 카우코마이)가 보여 주듯 이 편지를 쓰는 지금도 그렇게 자랑하고 있다. 고린도는 로마 속주 아가야의 중심 도시였고, 그 북쪽 속주 마게도냐에는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의 교회가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 회중을 두고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고 말한다. 8:1-5에서는 반대로 마게도냐 교회들이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자원하여 참여한 모습을 고린도에 알렸다. 바울은 두 지역 교회의 열심을 서로에게 알려 양쪽을 분발하게 한다.
헛되지 않을 자랑과 미리 준비할 연보 (3-5절)
그러나 자랑과 실제 준비 사이에는 아직 거리가 있었다. 3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을 보내는 목적을 밝힌다. 고린도 회중을 위한 자랑이 이 일에서 헛되지 않게 하고, 바울이 말한 대로 그들이 준비되어 있게 하려는 것이다. 4절은 마게도냐 사람들이 바울과 함께 가서 고린도 회중이 준비하지 않은 것을 보게 될 경우를 내다본다. 그렇게 되면 바울은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한다. “너희는 고사하고”라는 삽입구는 바울보다 고린도 회중이 더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리라는 점을 에둘러 드러낸다.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게 하여 일 년 전에 시작한 일을 끝내라고 재촉한다. 이 재촉은 회중에게 실제 부담이 되는 압박이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을 먼저 보내기로 한다. 이 파송은 8:16-24와 이어진다. 그곳에서 바울은 여러 교회가 택한 형제를 디도와 함께 보내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비방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밝혔다(8:19-20). 5절에 따르면 형제들은 “먼저 너희에게 가서” 고린도 회중이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마게도냐 사람들과 함께 도착한 뒤에야 급히 돈을 모으는 상황을 피하려 한다. 고린도전서 16:2에서도 그는 자신이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도록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미리 모아 두라고 했다. 8-9장에서 바울이 요청하는 것은 일 년 전에 시작했으나 아직 끝내지 못한 연보를 완성하는 일이며, 그 완성은 마음에서 우러난 기꺼운 선물이어야 한다.1
5절 끝의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는 원문에서 ‘복’(εὐλογίαν, 율로기안)과 ‘탐욕’(πλεονεξίαν, 플레오넥시안)을 대조한다. 바울은 앞에서 “전에 약속한 연보”를 말할 때에도 같은 ‘복’이라는 말을 썼다. 이 문맥에서 그 말은 받는 이에게 복이 되도록 넉넉히 베푸는 선물을 가리킨다. 대조되는 말은 본래 더 많이 차지하려는 탐욕을 뜻하며, 이 문장에서는 두 가지로 읽을 수 있다. 하나는 주는 사람이 아까워하며 내거나 강요에 못 이겨 낸 선물이라는 읽기이다.2 다른 하나는 거두는 쪽이 짜낸 돈이라는 읽기로, 바울이 강압이나 부적절한 방법으로 돈을 얻어 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게 한다는 해석이다.3 5절에서는 뒤의 읽기가 문맥에 더 잘 맞는다. 이 문장은 형제들을 미리 보내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고, 같은 계열의 동사가 7:2의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와 12:17-18의 “이득을 취하더냐”에 쓰였다. 두 곳 모두 바울과 그가 보낸 사람들이 고린도 성도들에게서 부당하게 취하지 않았다는 변론이다. 개역개정의 “억지”도 이 읽기에 가깝다. 주는 사람의 인색함은 바울이 6-7절에서 따로 다룬다.
넉넉히 심고 기꺼이 드리는 연보 (6-7절)
6절은 심고 거두는 농사의 경험으로 관대함을 권한다. “적게”(φειδομένως, 페이도메노스)는 아끼며 인색하게 심는 태도를 가리키고, “많이”로 옮긴 말(ἐπ’ εὐλογίαις, 에프 율로기아이스)에는 5절에서 선물을 가리킨 ‘복’이 다시 쓰였다. 넉넉하게 심는 일은 받는 이에게 복이 되는 선물을 베푸는 일이다. 무엇을 거두는지는 이어지는 8-12절이 풀어 준다. 하나님은 성도를 모든 일에 넉넉하게 하시고(8절),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며 그 씨를 풍성하게 하시고 의의 열매를 더하신다(10절). 그렇게 넉넉해진 성도는 계속 너그럽게 나누고(11절), 그 나눔으로 성도들의 부족이 채워지며 하나님께 감사가 넘친다(12절). 수확에는 먹을 양식과 다시 심을 씨라는 하나님의 실제 공급이 들어 있고, 그 공급은 다시 나눔으로 이어진다. 6절을 낸 만큼 재산이 불어난다는 약속으로 읽으면 이 흐름을 놓친다.
7절은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하라고 말한다. “정한 대로”(προῄρηται, 프로에레타이)는 미리 마음으로 결정해 두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회중 전체에 권하면서도 얼마를 낼지는 각 사람이 결정하게 한다. “인색함으로나”로 옮긴 말(ἐκ λύπης, 에크 뤼페스)은 직역하면 ‘슬픔에서’이며, 내면서 아까워하고 속상해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억지로”(ἐξ ἀνάγκης, 엑스 아낭케스)는 내면의 도덕적 의무감에 밀려서든 다른 사람들의 압박에 밀려서든 강제로 하는 것을 뜻한다.4 바울은 이 두 가지를 배제하고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는 이유를 덧붙인다. 이 문장은 칠십인역 잠언 22:8에 덧붙은 구절을 느슨하게 인용한 것이다.5
7절은 2-5절의 재촉에 한계를 정한다.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들 앞에서 당할 부끄러움을 언급하여 고린도 회중에게 실제 부담을 주었다. 그러나 그가 재촉한 것은 회중이 일 년 전에 스스로 원하고 시작한 일을 끝내는 것이었다(8:10-11). 얼마를 낼지는 각 사람의 마음에 맡겼고, 8:11-12에서는 “있는 대로” 완성하라고 하면서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것이라고 말했다. 약속을 지키라는 요청과 억지로 하지 말라는 요청 사이의 긴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바울은 형제들을 미리 보내고 7절의 원칙을 덧붙여, 부끄러움을 피하려고 억지로 내는 연보가 아니라 각자 정한 대로 기꺼이 드리는 연보가 준비되기를 바란다.
착한 일을 위해 공급하시는 하나님 (8-10절)
8절에서 바울은 각 사람의 결정에서 하나님의 공급으로 논의를 옮긴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실 수 있고, 그 목적은 성도들이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것이다. 개역개정에도 드러나듯 ‘모든’과 ‘항상’이 거듭 나오고, 하나님께 받은 넘침이 착한 일의 넘침으로 이어진다. 10-11절이 씨와 양식, “모든 일에 넉넉하여”를 말하므로 이 은혜에는 생활과 나눔에 필요한 물질적 공급도 들어 있다. “넉넉하여”로 옮긴 말(αὐτάρκειαν, 아우타르케이안)은 빌립보서 4:11의 “자족하기를”과 같은 계열이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궁핍하든 풍부하든 어떤 형편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8절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넉넉함이 “모든 착한 일”로 향하므로, 필요한 것을 갖추어 선한 일에 쓸 수 있는 충분함을 가리킨다.
9절은 “기록된 바”라는 말로 시편 112:9를 인용한다.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9절 안에는 “그”가 누구인지 나오지 않으므로 8절의 하나님을 주어로 읽을 여지도 있다. 그러나 시편 112편에서 재물을 흩어 주는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의인이고, 10절이 “너희 의의 열매”를 말하므로, 바울은 이 인용으로 고린도 성도들이 살아갈 관대한 삶을 그린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때 “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가난한 이에게 베푸는 의로운 행실이다. 시편 인용은 8절의 “착한 일”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고 10절의 “의의 열매”로 이어진다.
10절은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급을 말한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는 이사야 55:10의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겹치는 표현이다. 그 하나님이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신다. 양식은 지금 먹고 살 것을, 씨는 다시 심을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성도의 생활을 돌보시고, 그들이 계속 나눌 수 있도록 심을 것을 늘리신다. 바울이 약속하는 증가는 다시 나눌 수 있는 심을 것과 의의 열매의 증가이며, 그 공급이 나눔으로 이어질 때 이웃의 부족이 채워진다.
부족을 채우고 감사로 넘치는 봉사 (11-12절)
11절은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로 시작한다. 이 말(πλουτιζόμενοι, 플루티조메노이)은 ‘부하게 되다’라는 뜻의 수동형 분사로, 성도들을 부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전제한다. 8:9에서 그리스도의 가난으로 성도들이 부요하게 되었다고 할 때에도 같은 계열의 동사가 쓰였지만, 두 구절의 부요는 내용이 다르다. 8:9는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주신 구원의 부요를 말하고, 11절은 성도들이 너그럽게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이 “모든 일에” 넉넉하게 하시는 공급을 말한다. 그 넉넉함은 “너그럽게 연보를 함”(εἰς πᾶσαν ἁπλότητα, 에이스 파산 하플로테타)으로 향한다. 이 명사는 순전함이나 한마음을 뜻할 수도 있지만, 8:2에서 마게도냐 교회의 “풍성한 연보”로 옮긴 말과 같으므로 여기서는 아낌없이 나누는 관대함이 알맞다. 이 관대함은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낳는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연보를 전달하는 사람이고, 받는 이들이 감사를 드리는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12절은 그 감사가 어떻게 생기는지 설명한다. “이 봉사의 직무”에서 “직무”는 1절의 “섬기는 일”과 같은 말이고, “봉사”(λειτουργίας, 레이투르기아스)는 공동체를 위한 공적 봉사나 제사의 직무에도 쓰이던 말이다. 바울은 연보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봉사로 본다. 이 봉사는 먼저 성도들의 “부족한 것”(τὰ ὑστερήματα, 타 휘스테레마타), 곧 실제로 모자란 것들을 채운다. 8:14에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한다고 할 때에도 같은 명사가 쓰였다. 이 봉사는 또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넘친다. 감사가 강조되어도 물질의 필요를 채우는 목적은 사라지지 않으며, 필요가 채워진 일 자체가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된다. 개역개정의 “넘쳤느니라”는 이미 일어난 일처럼 읽히지만, 원문은 현재 분사(περισσεύουσα, 페리세우우사)로 이 봉사의 성격을 말한다. 연보는 아직 예루살렘에 전달되지 않았으므로 바울은 감사가 넘칠 것을 내다보며 말한다.
복음 고백의 순종과 받는 이들의 간구 (13-14절)
13절은 받는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를 말한다.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에서 ‘증거’(δοκιμῆς, 도키메스)는 시험을 거쳐 드러난 진실함을 뜻한다. 8:8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한다고 했는데, 13절에서는 연보라는 봉사가 그 증거가 된다. “영광을 돌리고”로 옮긴 복수 분사의 주체는 연보를 받을 예루살렘 성도들이다. 그들이 영광을 돌리는 이유는 둘이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너희 고백의 순종’이며, 개역개정은 ‘고백’(ὁμολογίας, 호몰로기아스)을 “진실히 믿고”로 풀었다. 고린도 성도들이 고백한 복음은 연보라는 순종의 행동으로 드러난다. 다른 하나는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이다. 여기서 ‘연보’(κοινωνίας, 코이노니아스)는 나눔과 참여, 교제를 뜻하고, “후한”은 11절에서 관대함으로 읽은 말과 같다. 바울은 이 교제가 예루살렘 성도들과 “모든 사람”을 향한다고 말한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이방 회중의 연보에서 그들에게도 같은 복음이 주어졌음을 알아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14절은 받는 이들의 응답을 이어 말한다. 그들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그들을 “사모”한다. 이 동사는 간절히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그들이 그렇게 응답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 때문이다. 받는 이들은 자신을 도운 사람들 안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재물을 받은 공동체가 준 공동체를 기억하며 간구하고, 두 공동체는 같은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가까워진다. 이 간구와 그리움은 연보가 전달된 뒤에 바울이 기대하는 응답이며, 그는 이 교제를 바라보며 연보를 권한다.
말할 수 없는 은사에 대한 감사 (15절)
15절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는 탄성으로 끝난다. 원문의 첫 단어(Χάρις, 카리스)는 14절에서 “지극한 은혜”로 옮긴 명사이며 여기서는 “감사”를 뜻한다. 8:16에서도 바울은 같은 표현으로 디도의 마음에 간절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감사의 이유는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이다. ‘은사’(δωρεᾷ, 도레아)는 값없이 주는 선물이고, “말할 수 없는”(ἀνεκδιηγήτῳ, 아넥디에게토)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울은 이 선물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이 선물을 두고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주신 은혜와 그 결과인 유대인과 이방인 교회의 연합으로 보는 해석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해석이 있다.6 15절에 가장 가까운 단서는 14절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이며, 바울은 8:1에서 이 연보 권면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로 시작했다. 8:9는 그 은혜의 근원을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일에서 찾는다. 따라서 15절의 선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것이 문맥에 가장 맞다. 9장에서 그 은혜는 이방 회중의 관대한 나눔과 예루살렘 성도들의 감사와 기도로 나타난다. 바울이 그리스도 자신을 선물로 지목하는지는 원문만으로 정할 수 없지만, “말할 수 없는”이라는 표현은 한 번의 연보가 낳은 결과보다 큰 하나님의 선물에 어울린다.
성경신학적 통찰
시편의 의인과 씨를 주시는 하나님
9장에서 바울이 연보를 권하는 논리는 하나님의 공급에서 시작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 끝난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넉넉하게 주시고, 성도는 그것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며, 부족이 채워진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한다. 바울은 이 흐름을 두 구약 본문으로 뒷받침한다. 9절은 시편 112:9를 인용하여 가난한 이에게 흩어 주는 의인을 보여 주고, 10절은 이사야 55:10의 표현을 빌려 씨와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묘사한다. 시편은 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사야는 그에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밝힌다.
시편 112편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사람의 복을 노래한다. 그 의인은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은혜를 베풀어 꾸어 주고,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을 굳게 하여 여호와를 의지한다. 시편은 그의 집에 부와 재물이 있다고 말하는 한편(시편 112:3),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다고도 말한다(112:9). 바울은 시편 112:9 가운데 흩어 준 행동과 영원히 있는 의를 인용하고, 의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라는 뒷부분은 인용하지 않는다. 고린도 성도들 앞에 제시된 모범은 재산을 늘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가진 것을 가난한 이에게 내어 주는 의인이다. 시편에서 그 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행실이고, 바울은 10절에서 그 “의의 열매”를 더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관대한 행실도 사람이 쌓는 공적이기보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열매다.
이사야 55장은 여호와께 돌아오는 사람에게 너그러운 용서를 약속하고(55:7),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이 되돌아오지 않고 그분의 뜻을 이룬다고 말한다(55:11). 이사야는 그 확신을 비와 눈에 빗대어 말한다. 비와 눈은 땅을 적셔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준다(55:10). 바울은 10절에서 이 표현을 빌려 하나님을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로 부른다. 이사야는 말씀의 성취를 말하고 바울은 나눔을 이어 가게 하시는 공급을 말하므로 두 본문의 주제는 다르다. 그러나 두 본문 모두 씨와 양식을 주시고 결실을 맺게 하시는 분을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성도가 나누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씨이며, 그 씨를 늘리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도는 나눈 뒤에도 생활과 다음 나눔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기대할 수 있다. 이 기대는 낸 액수에 따라 보상을 계산하는 태도와 다르며, 무엇을 얼마나 거두게 하실지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쌓아 두지 않고 흘려보내는 공급
9장의 공급 약속은 바로 앞 8:13-15의 균등 원리를 전제로 한다. 바울은 그곳에서 출애굽기 16:18을 인용하여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한다. 광야에서 각 사람은 먹을 만큼 만나를 거두었고, 아침까지 남겨 둔 만나에는 벌레가 생겼다(출애굽기 16:16-20). 바울은 이 이야기로 지금은 고린도의 넉넉한 것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부족을 채우고, 형편이 뒤바뀌면 그들의 넉넉한 것이 고린도의 부족을 채울 수 있는 관계를 설명한다(8:14). 이 문맥에서 8절의 넉넉함과 10절의 씨의 증가는 쌓아 두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곳으로 흘려보내라고 주시는 공급이다. 하나님이 공급하신다는 믿음은 이웃의 궁핍 앞에서 기적만 기다리게 하지 않고, 이미 받은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게 한다.
기대와 기도 속에 보낸 연보
9장의 연보는 이방 회중과 예루살렘 성도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로마서 15:26-27에서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연보하였다고 말하고,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니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명한다. 고린도가 속한 아가야도 결국 이 연보에 참여한 것이다. 그런데 15:31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대한 자신의 섬김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여기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다. 연보를 가지고 떠날 때에도 받는 이들의 반응은 바울의 기도 제목이었다. 사도행전 24:17에서 바울은 여러 해 만에 자기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왔다고 말한다. 이 진술은 바울이 구제할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갔음을 보여 주지만, 예루살렘 교회가 그것을 어떻게 받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13-14절의 영광과 감사, 간구와 그리움은 바울이 기대하고 기도한 결과로 읽어야 한다.
기독론적 해석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고백과 순종
13절은 연보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고백과 순종에 연결한다. 고린도 성도들의 연보는 그들이 고백한 복음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진 결과이며, 예루살렘 성도들은 그 순종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 서신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은 4:5에 짧게 나온다. 바울은 자기를 전파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예수를 위하여 자신이 고린도 성도들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그분을 위하여 다른 이를 섬기는 사람이 된다. 고린도 성도들이 멀리 있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재물을 나누는 일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이 그 주님께 순종하는 구체적인 방식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과 성도가 맺는 열매
바울은 연보를 권하는 중심에 8:9를 둔다. 부요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고, 그의 가난함으로 성도들이 부요하게 되었다. 이 은혜는 연보로 얻는 것이 아니라 연보보다 먼저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신 일은 그분만이 이루신 구원의 일이며, 고린도 성도들의 나눔이 그 일을 되풀이하거나 보탤 수는 없다. 성도들은 그 은혜로 부요하게 된 사람으로서 자기 형편에 맞게 가진 것을 나눈다. 그래서 바울은 8:8에서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려 한다고 말하고, 7절에서는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응답은 억지로 짜낼 수 없는 기꺼운 응답이어야 한다.
9-10절의 “의”와 5:21의 “하나님의 의”는 같은 명사를 쓰지만 같은 내용을 가리키지 않는다. 5:21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셔서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일을 말한다. 9-10절의 의는 시편 112편의 의인처럼 가난한 이에게 흩어 주는 행실이다. 두 의의 관계는 5:15가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다. 그분을 위하여 사는 삶에는 재물을 쓰는 일도 포함되며, 하나님은 그 사람의 관대한 행실을 “의의 열매”로 자라게 하신다(10절). 이 의로운 행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의의 근거가 아니라 그 의를 받은 사람의 삶에서 맺히는 열매다.
한 복음 안에서 서로 섬기는 교회들
13-14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방 회중과 예루살렘 성도들을 한 교제로 묶는다. 고린도 성도들은 같은 복음을 받은 형제로서 예루살렘 성도들의 부족을 채우고, 예루살렘 성도들은 이방 회중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그들을 위해 간구하며 그리워할 것이다. 8:14에서 바울은 지금은 고린도의 넉넉함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부족을 채우지만, 형편이 뒤바뀌면 그들의 넉넉함이 고린도의 부족을 채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주는 쪽과 받는 쪽은 같은 주님께 속하므로, 재물을 보낸 회중이 받은 회중보다 높아지지 않는다. 받는 이들은 기도로 주는 이들을 섬기고, 주는 이들은 그 기도가 필요한 사람으로 남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말할 수 없는 은사
15절에서 바울은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 14절의 “지극한 은혜”와 8:9의 그리스도의 은혜에 비추어 보면, 이 선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다.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신 은혜가 고린도 성도들을 관대하게 하고, 그 관대함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감사와 기도로 이어진다. 15절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직접 쓰지 않으므로 이 선물을 그리스도의 인격과 곧바로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바울의 마지막 감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 전체를 향한다. 고린도 성도들의 연보는 이 선물에 대한 응답이고, 감사는 끝까지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돌아간다.
현대적 적용
부족을 채우고 정직하게 전달하는 연보
12절에 따르면 이 봉사는 먼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채운다. 교회가 구제 연보를 모을 때 먼저 살필 것은 모금 액수보다 그 재물이 실제로 부족을 겪는 사람에게 제때 닿는지이다. 바울은 거액의 연보를 맡으면서 여러 교회가 택한 형제를 동행하게 하여 아무도 비방하지 못하게 했고,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했다(8:19-21). 연보를 모으고 전달하는 사람도 그 재물이 목적한 곳에 도착할 때까지 정직하고 투명하게 다루어야 한다.
약속의 이행과 강요 없는 권면
이미 약속한 연보가 있으면 그 약속을 이행할 계획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 바울은 일 년 전에 시작한 고린도 회중의 마음을 칭찬하면서도 그 일을 완성하라고 진지하게 요청했다. 동시에 그는 “있는 대로” 완성하라고 했고(8:11-12),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하라고 했다(7절). 사람마다 소득과 부양할 가족, 당장 감당할 필요가 다르므로 참여 액수도 같을 수 없다. 적게 드린 사람을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평가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를 약속하도록 재촉하거나, 생활에 필요한 돈을 빚으로 마련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 가르침에 어긋난다. 형편이 달라져 약속한 만큼 드릴 수 없게 된 사람도 할 마음에 따라 있는 대로 드리면 된다.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들 앞에서 당할 부끄러움을 언급하며 고린도 회중을 재촉했다. 그 재촉은 일 년 전에 스스로 원하고 약속한 회중에게, 그 회중을 자랑해 온 사도가 한 말이었다. 바울은 곧이어 형제들을 미리 보내 연보가 짜낸 돈이 되지 않게 하고,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덧붙였다(5, 7절). 그러므로 그의 부끄러움 언급을 오늘의 모금 기법으로 삼을 수는 없다. 이름과 액수를 공개해 순위를 매기거나, 아직 결정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약속을 받아 내는 방식은 5절과 7절이 막으려 한 일이다. 다른 회중의 관대함을 알리는 일은 2절에서처럼 서로를 격려할 수 있지만, 그 소식을 들은 사람도 자기 마음과 형편에 따라 응답해야 한다.
나눔을 위한 공급과 번영 약속의 구별
6절의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씀으로 헌금에 비례한 재산 증식을 약속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본문이 물질적 공급을 말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고, 심을 것을 풍성하게 하시며, 성도를 모든 일에 넉넉하게 하신다(8-11절). 그 공급은 성도가 계속 너그럽게 나누고 이웃의 부족을 채우게 하려는 것이며, 그 결과로 의의 열매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자란다. 성도는 나눈 뒤에 생길 자신의 필요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 그러나 헌금한 뒤 수입이 늘지 않거나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믿음이 부족했다고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된다. 그런 판단은 본문의 약속을 액수에 따른 보상으로 바꾸고, 이미 어려움을 겪는 이웃의 고통을 더한다.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교제
14절의 간구와 그리움은 바울이 받는 이들에게서 기대한 응답이지, 주는 이들이 요구할 대가가 아니다. 연보를 보낸 교회는 필요한 재물을 보내고, 받은 이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교제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바울도 예루살렘 성도들이 자신의 섬김을 받을 만하게 여기도록 기도를 부탁했다(로마서 15:31). 재물을 보내는 교회가 받는 교회의 결정을 좌우할 권리를 얻는 것도 아니다. 8:14가 말하듯 넉넉함과 부족함은 때에 따라 바뀌며, 재정이 넉넉한 교회도 다른 교회의 기도가 필요하다.
믿음의 가정과 모든 사람을 향한 선행
13절은 고린도 회중의 교제가 예루살렘 성도들과 “모든 사람”을 향한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다른 지역의 성도들을 가리키는지 교회 밖의 사람까지 포함하는지는 13절만으로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회중의 관대함이 이 한 번의 연보에서 멈추지 않기를 기대하고, 갈라디아서 6:10에서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권한다. 교회는 교인의 필요를 먼저 살피면서도 교회 밖 사람들의 실제 필요에 응답할 수 있다.
채워진 부족을 알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바울은 연보에 관한 권면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로 마친다(15절). 받는 이들의 감사도 주는 이들의 관대함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교회가 연보의 결과를 알릴 때에는 후원자의 이름과 액수를 앞세우기보다 어떤 부족이 채워졌는지를 알리고, 그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