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무너질 장막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집 (1절)

바울은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를 죽음 너머의 소망으로 설명한다. 바로 앞의 4:14에서 그는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자신들도 예수와 함께 다시 살리시고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것이라고 했고, 4:16에서는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했다. 1절은 이 확신을 장막과 집의 비유로 다시 설명한다. 사도의 고난은 실제로 몸을 쇠하게 하고 죽음을 가까이 가져온다. 그 현실 속에서 바울이 “아느니라”라고 말하는 내용은 지금 보이는 쇠약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 되지 못한다는 부활의 확신이다.

1절의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지금 몸으로 사는 삶을 가리킨다.1 장막은 사람이 머물 수 있지만 오래 견디도록 지은 건물이 아니어서, 이 비유는 현재 삶의 연약함과 임시성을 드러낸다. 이와 달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집은 손으로 짓지 않았고 영원하며 하늘에 있다. 장막을 현재의 몸으로 읽는 근거는 앞뒤 문맥이 거듭 말하는 몸의 쇠약과 부활이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장막 만드는 일을 했다는 사도행전 18:3의 기록은 이 이미지가 그에게 익숙했음을 짐작하게 하지만, 비유의 뜻을 정하지는 않는다.

“무너지면”은 장막이 해체되는 모습으로 몸의 죽음을 말한다. 그런데 바울은 장막이 무너질 때 받을 집을 현재형으로 “우리에게 있는”(ἔχομεν, 에코멘)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2절에서는 그 처소를 아직 사모한다고 하면서도 여기서 이미 가진 것처럼 말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 집을 보장하셨기 때문이다. 미래의 일을 확신하기에 현재형으로 표현한 것이다.2 손으로 짓지 않은 이 집은 사람이 마련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덧입음과 벌거벗음 (2-3절)

2절은 집의 비유에 옷의 비유를 겹친다. 바울은 “여기”, 곧 1절의 장막 안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사모하며 탄식한다. 그의 탄식은 절망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이 주실 것을 향한 갈망이다. “덧입기를”(ἐπενδύσασθαι, 에펜뒤사스타이)은 입은 옷 위에 다른 옷을 입는다는 말이다. 바울이 이 집을 옷처럼 입는다고 말하므로, 그가 바라는 것은 장차 옮겨 갈 막연한 하늘의 건물보다 하나님이 주실 새로운 몸의 생명이다.

3절은 사본에 따라 동사가 다르다. 개역개정의 “이렇게 입음은”은 ‘입다’라는 뜻의 ἐνδυσάμενοι(엔뒤사메노이)를 반영하고, NA28은 ‘벗다’라는 뜻의 ἐκδυσάμενοι(에크뒤사메노이)를 본문으로 택한다. 두 낱말은 한 글자만 다르지만, 같은 원문을 다르게 옮긴 결과가 아니고 사본들이 서로 다른 동사를 전하기 때문에 생긴 차이이다. 사본의 지지만 보면 ‘입다’가 훨씬 우세하다.3 반면 UBS 그리스어 신약의 편집자들은 ‘벗다’를 택하면서도 이 선택이 매우 불확실하다고 밝혔다.4

개역개정의 “벗은 자들로”는 앞의 분사가 아니라 뒤의 γυμνοὶ(귐노이)를 옮긴 말로, 옷을 입지 않은 벌거벗은 상태를 뜻한다. 1-4절에서 이 상태는 하늘의 처소를 덧입는 일과 반대되며, 4절에서 바울이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벗음과 이어진다. 따라서 벌거벗음은 하나님이 주실 처소를 입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본문은 이 상태를 더 자세히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3절만으로 벌거벗음을 10절의 심판 때 드러날 수치로 보거나 죽은 뒤 영혼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3절은 “만일 참으로”라는 뜻의 εἴ γε καὶ(에이 게 카이)로 시작하는 조건문이다. NA28을 따르면 “참으로 우리가 벗은 뒤에도 벌거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는다면”이라는 뜻이 되어, 죽음으로 장막을 벗더라도 벌거벗은 자로 남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2절의 사모함에 덧붙인다. ‘입다’로 읽으면 3절은 하늘의 처소를 입으면 벌거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는다는 2절의 내용을 다시 확인한다. 개역개정은 이 조건문을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는 목적문으로 옮겨, 덧입음이 벌거벗음을 막는다는 뜻을 앞세운다. 이 번역은 2-4절의 흐름과 어긋나지 않지만 원문의 조건 형태를 드러내지 않는다. 3절은 읽기에 따라 뜻이 이처럼 달라지므로, 죽음 이후에 관한 바울의 소망은 3절보다 뜻이 분명한 4절과 8절에서 확인하는 것이 적절하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기를 바람 (4절)

4절의 “이 장막에 있는 우리”는 1절의 장막을 다시 가리킨다. 개역개정은 “짐진 것 같이”라고 옮겼지만, 원문의 βαρούμενοι(바루메노이)에는 ‘같이’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바울은 실제로 짐에 눌려 탄식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벗기(ἐκδύσασθαι, 에크뒤사스타이)를 원하지 않고 덧입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고통스러운 몸에서 벗어나는 일 자체는 그의 소망이 아니다. 바울은 고통을 겪는 몸을 악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이 몸이 죽음의 지배에서 풀려 온전히 생명으로 살기를 바란다.

4절 끝에서 바울은 덧입음의 목적을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는 일로 밝힌다. 삼키는 쪽은 생명이고 삼켜지는 쪽은 죽을 것이다. 이 표현은 생명이 죽을 것을 압도하여 죽음이 더는 지배하지 못하는 완성을 말한다. 삼켜지는 것이 지금의 죽을 몸이므로, 바울이 바라는 미래는 몸을 떠난 무형의 상태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미래는 하나님께서 죽을 것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구원에서 완성된다.

우리를 준비하시고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하나님 (5절)

5절은 이 미래를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밝힌다. 개역개정의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는 ‘이것’을 이루어지는 대상처럼 읽게 한다. 원문에서 “이루게 하시고”(κατεργασάμενος, 카테르가사메노스)의 목적어는 “우리”(ἡμᾶς, 헤마스)이고, εἰς αὐτὸ τοῦτο(에이스 아우토 투토)는 “바로 이 일을 위하여”라는 목적을 나타낸다. ‘바로 이 일’은 4절에서 말한 변화, 곧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는 일이다.5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하여 우리를 준비하셨다. 개역개정도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신다는 뜻은 전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 완성에 맞게 준비하신다는 원문의 초점은 잘 드러내지 않는다. 탄식하는 사도는 자기 안의 가능성을 키워 미래를 이루려 하지 않고, 생명을 주실 하나님께 의지한다.

같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 ‘보증’(ἀρραβῶνα, 아라보나)은 거래가 끝까지 이루어질 것을 보장하는 첫 지불을 가리킨다.6 바울은 이미 1:22에서 하나님이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다고 말했고, 여기서는 그 선물을 죽음과 부활의 문맥에서 다시 말한다. 지금 받은 성령 자신이 장차 받을 생명의 첫 몫이므로, 성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완성을 확신할 수 있다.

믿음으로 걷는 담대함 (6-8절)

6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로 시작한다. ‘그러므로’가 보여 주듯, 이 담대함은 5절에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바울은 이 문장을 잠시 멈추고 7절의 설명을 넣은 뒤,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로 다시 잇는다. “몸으로 있을 때에는”(ἐνδημοῦντες, 엔데문테스)과 “주와 따로 있는”(ἐκδημοῦμεν, 에크데무멘)은 집에 머무는 것과 집을 떠나 있는 것을 뜻하는 짝말이다. 몸에 머무는 동안 성도는 아직 주님 곁에서 그분을 뵙는 완성에 이르지 못했다. 그래도 바울은 담대하다. 7절에서 말하듯 지금도 주님을 믿으며 걷기 때문이다.

7절의 “행하고”는 걷는다는 말로 삶의 걸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믿음’과 ‘보는 것’은 믿고 보는 행위보다 믿는 대상과 눈에 보이는 대상을 가리키며, 4:18에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한 대조와 이어진다.7 바울은 눈앞의 현실을 보지 말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몸의 쇠약으로 자기 미래를 판단하지 않고,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걷는다.

8절에서 바울은 다시 담대함을 말하고,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한다. 6절의 두 동사가 자리를 바꾸어, 이제는 몸을 떠나는 일과 주님 곁에 머무는 일이 짝을 이룬다. 바울은 몸의 죽음이 주님께 속한 사람을 그분에게서 떼어 놓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그렇다고 8절의 소망이 1-5절의 부활 소망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1-5절이 기다리는 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는 몸의 완성이다. 이 단락은 죽음 뒤 주님 곁에 머무는 일과 마지막 부활 사이의 시간 순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주를 기쁘시게 하려는 포부와 그리스도의 심판대 (9-10절)

9절에서 바울은 “그런즉”으로 앞의 담대함과 소망에서 현재의 목표를 이끌어 낸다. “힘쓰노라”(φιλοτιμούμεθα, 필로티무메타)는 어떤 일을 이루려고 힘써 추구한다는 뜻으로, 바울이 품은 포부를 나타낸다. 그 포부는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는 6절과 8절의 두 동사를 다시 쓴 표현이다. 죽음은 몸에 머무는 때와 몸을 떠난 때를 나누지만, 어느 때든 바울의 목표는 같다. 주님 곁에 머물기를 바라는 사람은 지금 그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산다.

10절에서 바울은 “이는”으로 그 포부의 이유를 밝히며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말한다. “심판대”(βήματος, 베마토스)는 관리가 판결을 내리거나 공적으로 말하던 높은 단으로, 그리스·로마 도시의 공공 광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8 사도행전 18:12-17에서 바울 자신도 고린도에서 아가야 총독 갈리오의 재판 자리 앞에 끌려갔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익숙한 이 재판의 단으로 그리스도 앞에서 최종 책임을 질 자리를 설명한다. 그 자리에서 판단하시는 분은 로마의 관리가 아니고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바울의 포부는 사람들의 평판보다 장차 그 앞에 설 주님의 판단을 향한다.

개역개정의 “나타나게 되어”는 그 앞에 나선다는 뜻으로도 읽히지만, 원문의 φανερωθῆναι δεῖ(파네로테나이 데이)는 반드시 드러나 밝혀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앞에서는 각 사람의 삶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우리가 다”는 사도 자신도 포함하고, “각각”은 각 사람의 책임을 밝힌다. 각 사람은 선하든 악하든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 몸으로 사는 현재가 이처럼 무겁기에, 장막이 무너질 날을 기다리는 사람도 그날까지 그 몸으로 주님을 섬긴다.

성경신학적 통찰

흙으로 지은 몸과 죽음의 지배

1-10절에서 바울이 기다리는 것은 죽음에 지배되는 몸을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바꾸시는 일이다. 이 소망은 하나님이 몸을 지으신 창조를 전제한다. 창세기 2:7에서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 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몸으로 사는 인간의 생명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은 창세기 3:19에서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선고를 듣는다. 고린도후서 4:16의 낡아지는 겉사람과 1절의 무너지는 장막은 이 죽을 운명 아래 있는 몸이다. 바울이 장막에서 탄식하는 이유는 몸이 악해서가 아니고 죽음이 몸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몸을 벗기보다 덧입기를 원하며,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이 죽음에서 풀려 온전히 살게 되기를 기다린다.

죽음을 삼키는 생명과 부활의 변화

죽음을 없애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사야 25:6-9에서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시고,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며,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신다. 히브리어 본문은 사망을 멸하시는 일을 죽음을 삼키시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4에서 이 말씀을 직접 인용하여,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 그 말씀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본문의 4절은 이사야를 인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같은 교회에 먼저 보낸 편지에서 입음과 삼킴을 몸의 부활에 사용했고, 4절에서도 덧입음과 “생명에 삼킨 바 되게”라는 표현으로 죽음이 패배하는 완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4절의 소망도 이사야의 약속이 부활 때 이루어지리라는 고린도전서 15장의 소망과 이어진다.

고린도전서 15장은 그 완성을 변화로 설명한다. 고린도전서 15:42-44에서 썩을 것으로 심은 몸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 약한 것으로 심은 몸은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 부활은 지금의 연약함을 연장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살리시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고린도전서 15:53은 ‘이’ 썩을 것과 ‘이’ 죽을 것이 썩지 아니함과 죽지 아니함을 입는다고 말한다. 생명을 입는 사람은 지금 몸으로 탄식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본문의 장막과 영원한 집, 벗음과 덧입음도 이 변화와 연속성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장막에 살던 사람을 버리고 다른 존재를 만드시지 않고, 그 사람의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게 하신다.

탄식하는 성도에게 주신 성령

로마서 8:18-25는 이 변화를 기다리는 현재를 설명한다.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고,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성도도 속으로 탄식하며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 본문 2-5절에서도 장막 안의 탄식 뒤에 성령의 보증이 나온다. 로마서는 성령을 처음 익은 열매로, 고린도후서는 보증으로 부르지만, 두 표현 모두 지금 받은 성령이 장차 받을 몫의 시작이라는 뜻을 담는다. 성령은 고통이 끝난 사람에게 주시는 상급이 아니고, 아직 탄식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미리 주신 미래의 첫 몫이다. 그래서 바울은 탄식하면서도 담대할 수 있다. 두 본문에서 성도가 기다리는 구원은 마음의 위로에 머물지 않고 몸의 속량에 이른다.

주와 함께 있을 소망과 심판대 앞의 책임

8절의 소망은 바울의 다른 편지에도 나온다. 빌립보서 1:21-24에서 바울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말하면서도, 성도들을 위하여 육신으로 머무는 일이 더 유익하다고 판단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17은 주님이 강림하실 때 성도들이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한다. 빌립보서는 죽음 뒤를, 데살로니가전서는 주님의 강림을 바라보지만, 두 본문 모두 소망의 내용을 주님과 함께 있는 것으로 말한다. 본문의 8절도 같은 소망을 말하며, 두 시점 사이의 순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려는 소망이 바울의 남은 삶을 성도를 섬기는 일로 이끌었듯이, 9절에서도 그 소망은 지금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표로 이어진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께 속한다는 고백은 심판대 앞의 책임으로 이어진다. 로마서 14:7-12에서 바울은 성도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으며, 그리스도께서 죽고 다시 살아나신 것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시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형제를 비판하거나 업신여기지 말라고 한다. 모든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서서 각자 자기 일을 하나님께 아뢸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9-10절도 몸에 있든 떠나든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표를 그리스도의 심판대와 연결한다. 그 심판대 앞에는 바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서므로, 그것은 남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지 못하고 각자 몸으로 행한 일을 돌아보게 한다. 고린도전서 15:58도 부활의 가르침을 주의 일에 힘쓰라는 권면으로 마무리한다. 부활의 소망은 몸으로 사는 오늘의 책임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기독론적 해석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도의 몸의 변화

1-10절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리신 사건에 근거한다. 바로 앞의 고린도후서 4:14에서 바울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실 줄을 안다고 말했다. 장막이 무너져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집이 있다는 1절의 확신은 예수에게 일어난 부활이 그분께 속한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리라는 소망이다. 고린도전서 15:20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부른다. 첫 열매가 이미 거두어졌으므로 뒤따를 수확도 확실하다. 그러나 성도는 아직 죽음의 위협과 몸의 쇠약을 겪는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미 일어났지만 성도의 부활은 아직 기다려야 한다. 1절의 확신은 이 기다림 속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댄다.

5절에서 4절의 변화를 위하여 우리를 준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빌립보서 3:20-21에서 그 변화를 이루실 분을 그리스도로 말한다. 성도는 하늘로부터 오실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그분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시는 능력으로 성도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과 같은 형체로 변하게 하실 것이다. 이 본문에서도 하늘의 소망은 몸의 변화로 이어진다. 빌립보서에 비추어 보면, 2절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사모하는 바울이 기다리는 생명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같은 생명이다. 그 생명을 입히는 능력은 탄식하는 성도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 있다.

곁에 머물기를 바라는 주님과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

6-8절의 주님은 10절에서 심판대의 주인으로 나오는 그리스도이시다. 9절에서 바울이 기쁘시게 하려는 주님도 같은 분이다. 6절에서 바울은 몸에 머무는 동안 주와 따로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5절의 성령과 7절의 믿음은 성도가 지금도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성도에게 아직 없는 것은 주님을 눈앞에서 뵙고 그분 곁에 머무는 완성이다. 8절에서 바울이 원하는 것도 고통의 끝보다 그리스도 곁에 머무는 일이다. 바울이 기다리는 구원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가 있다.

9절의 “그런즉”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표가 앞의 확신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이미 성도를 생명의 완성을 위하여 준비하시고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5절). 바울은 그 생명을 얻어 내려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서 그분 곁에 머물 날을 바라보며, 몸에 있든 떠나든 그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추구한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와 은혜 안의 책임

10절은 바울이 기쁘시게 하려는 주님을 심판하시는 그리스도로 소개한다. 로마서 14:10이 하나님의 심판대라고 부르는 자리를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부른다. 두 표현을 견주어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최종 판단을 그리스도께서 행하신다고 이해한다. 성도가 그 앞에서 만나는 분은 낯선 재판관이 아니고, 그가 곁에 머물기를 바라는 주님이시다. 그렇다고 심판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다” 그 앞에 드러나고, 각 사람은 선하든 악하든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 5절에서 생명을 위하여 성도를 준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10절의 책임을 없애지 않으며, 10절의 책임도 5절의 은혜를 지우지 않는다. 무엇을 받는지 본문은 자세히 말하지 않지만, 몸으로 행한 일이 그리스도 앞에서 의미를 잃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현대적 적용

탄식하면서 부활을 기다림

바울은 성령을 보증으로 받은 사람이면서도 장막 안에서 짐에 눌려 탄식한다. 그러므로 몸이 약해질 때 터져 나오는 탄식을 신앙의 실패로 여겨 숨길 필요가 없다. 만성 질환이나 노화로 몸이 쇠하는 사람은 그 어려움을 하나님께 솔직히 아뢰면서 부활을 기다릴 수 있다. 같은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에게 부활을 믿으니 울지 말라고 요구할 수 없다. 본문의 소망은 탄식을 그치게 하는 명령으로 주어지지 않고, 탄식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기다릴지 알려 준다. 교회는 두려움이나 슬픔을 고백하는 사람의 믿음을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그 곁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살리실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생명을 입을 몸을 귀히 여김

현재의 몸을 장막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몸을 하찮게 여길 수는 없다. 바울은 몸을 벗기를 원하지 않고 생명을 덧입기를 원했으며, 10절에서는 몸으로 행한 일이 그리스도 앞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몸은 언젠가 버릴 껍데기이기보다 지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집을 기다린다는 이유로 자기 몸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몸이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믿음의 이름으로 요구할 수 없다. 죽을 것을 생명에 삼키게 하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몸과 이웃의 몸을 하나님이 생명을 입히실 몸으로 대한다.

눈앞의 평가보다 그리스도 앞의 판단

몸의 쇠약, 사역의 성과, 사람들의 평가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고, 믿음으로 걷는 사람도 그것을 본다. 다만 바울은 그것으로 자기 미래와 가치를 판단하지 않았다. 그는 장차 그리스도 앞에서 드러날 판단을 바라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힘썼다. 그 앞에서는 숨긴 잘못뿐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선한 수고도 드러난다. 그래서 성도는 인정받으려고 자기 일을 부풀리거나 남의 수고를 가로챌 필요 없이 맡은 일을 진실하게 감당할 수 있다. 또 “우리가 다” 그 앞에 서므로, 이 심판대는 지도자가 회중을 두렵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도 먼저 자신이 몸으로 행한 일을 주님께 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