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환난과 가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1-2절)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알린다(1절). 로마서 15:25-27과 고린도전서 16:1-4를 보면 이 연보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이었고, 여러 지역의 교회가 그 한 섬김에 참여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이 낸 돈을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이루신 일을 말한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환난과 가난 속에서도 기뻐하며 너그럽게 나누는 삶으로 나타났다. 이 단락에서 “은혜”(τὴν χάριν, 텐 카린)는 1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가리키고, 4절과 6-7절에서는 성도들이 참여하여 마쳐야 할 나눔의 일을 가리킨다. 바울은 하나님의 베푸심과 성도들의 나눔을 같은 말로 부르며, 연보를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서 나오는 일로 설명한다.
2절은 그 은혜가 마게도냐 교회들 가운데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설명한다. 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는데, 이 시련은 마게도냐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박해를 가리킨다.1 그런 형편에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로 넘쳐 났다. 가난에서 풍성함이 나왔다는 말은 논리로 풀리지 않는 역설이며, 바울은 이 표현으로 예루살렘 연보에 드러난 그들의 비상한 너그러움을 그린다.2 개역개정이 “연보”로 옮긴 명사(τῆς ἁπλότητος, 테스 하플로테토스)는 11:3에서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으로 옮겨진 말이지만, 이곳과 9:11에서는 연보의 문맥에 따라 계산하지 않고 아낌없이 내놓는 너그러움을 뜻한다.
자원하여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림 (3-5절)
3-4절에서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나누었다고 증언한다. 그들은 “자원하여”(αὐθαίρετοι, 아우타이레토이), 곧 스스로 선택하여 그렇게 했다. 그들은 바울 일행에게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을 간절히 구했다(4절). “참여함”(τὴν κοινωνίαν, 텐 코이노니안)은 함께 나누는 교제를 뜻하며, 그 내용은 성도를 위한 섬김이다. 가진 것이 적은 교회들이 먼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는 일을 은혜로 여기고 그 일에 참여하게 해 달라고 청한 것이다.
5절에서 그들의 응답은 바울 일행이 바란 것을 넘어선다. 그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울 일행에게 자신을 주었다. 그들의 헌신은 먼저 주님을 향했고, 돈을 보내는 일은 주께 속한 사람으로 사는 데서 나왔다. 바울 일행에게 자신을 준 일도 하나님의 뜻 아래 있었으며, 사도들은 주님께 자신을 드린 사람들의 협력을 받아 이 섬김을 감당한다. 이 순서를 따라 읽으면 사도에게 자신을 준다는 말을 지도자 개인의 뜻에 대한 무제한 복종으로 확대하기 어렵다.
시작한 은혜의 일을 완성하라는 권면 (6-7절)
6절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의 일은 바울이 디도에게 고린도의 연보를 마무리하도록 권한 일로 이어진다. 디도는 이미 고린도에서 이 일을 시작했고(“시작하였은즉”, προενήρξατο, 프로에네르크사토), 바울은 그가 이 은혜를 “성취하게”(ἐπιτελέσῃ, 에피텔레세) 하려 한다. 10-11절에서 바울은 같은 두 동사로 고린도 성도들이 일 년 전에 시작한 일을 이제 마치라고 요청한다. 고린도 교회가 할 일은 이미 시작한 연보를 완성하는 것이다. 7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사랑에 풍성하다고 인정하고, 마게도냐 교회들의 너그러움이 넘쳤듯이(2절) 이 은혜에도 풍성하라고 권한다.
7절의 “우리를 사랑하는”에서 NA28과 개역개정은 사랑의 방향을 다르게 읽는다. NA28의 본문은 “우리에게서 나와 너희 안에 있는 사랑”(τῇ ἐξ ἡμῶν ἐν ὑμῖν ἀγάπῃ, 테 엑스 헤몬 엔 휘민 아가페)이다. 이 사랑은 바울 일행에게서 시작되어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 자리 잡은 사랑, 곧 고린도 성도들이 사도들에게서 받은 사랑이다. 이 읽기에서 그 사랑이 바울을 향한다고까지 특정하기는 어렵다.3 개역개정의 “우리를 사랑하는”은 “우리를 향한 너희의 사랑”이라는 다른 사본 읽기에 가깝다. 그 읽기가 이 절의 문맥에 더 어울려 보이기 때문에, 더 어려운 읽기를 본문으로 택한 NA28의 판단도 확실하지는 않다.4 NA28 본문을 따르면 7절의 목록은 고린도 성도들이 사도들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끝나고, 바울은 그 받은 사랑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나눔으로 넘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나눔으로 나타난 마게도냐 교회들의 경우(1-2절)와 같은 흐름이다. 개역개정처럼 읽으면 7절의 사랑은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에게 품은 애정이 되고, 받은 사랑이 나눔으로 이어진다는 연결은 이 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명령이 아닌 권면과 그리스도의 은혜 (8-9절)
8절에서 바울은 이 권면이 명령이 아니라고 밝힌다. 그는 다른 이들, 곧 마게도냐 성도들의 간절함을 들어 고린도 성도들의 사랑이 참된지 시험하여 확인하려 한다(“증명하고자”, δοκιμάζων, 도키마존). 바울은 금액을 정해 거두지 않고, 고린도 성도들이 다른 성도를 실제로 돕는 행동으로 사랑의 진실함을 드러내기를 바란다.
9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이미 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권면의 근거로 삼는다. “부요하신 이로서”(πλούσιος ὤν, 플루시오스 온)는 문맥상 “부요하신데도”라는 양보의 뜻으로 읽힌다. 그리스도는 부요하신데도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 이 부요하심과 가난하게 되심은 지상 생활의 형편보다 성육신을 가리킨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며,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것은 고린도 성도들이 영적으로 부요하게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5
원하는 마음과 가진 것에 따른 실행 (10-12절)
10-11절에서 바울은 지난해의 시작과 지금의 완성을 연결한다. 개역개정의 “나의 뜻을 알리노니”에서 “뜻”(γνώμην, 그노멘)은 명령하는 의지보다 판단이나 조언을 가리키며, 8절의 “명령”과 대조된다. 바울은 명령 대신 조언을 주고, 그 조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유익하다고 말한다. 고린도 교회는 일 년 전에 이 일을 행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원하기도 했다. 11절의 “이제는”은 그 지난해와 현재를 대조한다. 바울은 6절에서 디도에게 맡긴 일을 이제 고린도 성도들에게 “성취할지니”(ἐπιτελέσατε, 에피텔레사테)라고 요청한다. 이 명령형도 스스로 원하여 시작한 일을 마치라는 요청이며, 바울은 금액을 정하지 않는다. 그는 “마음에 원하던 것”(προθυμία, 프로튀미아), 곧 기꺼이 하려던 마음에 걸맞게 실행하되 “있는 대로”(ἐκ τοῦ ἔχειν, 에크 투 에케인), 곧 가진 것에서 하라고 한다. 고린도 성도들이 따져야 할 것은 마게도냐 교회들이 얼마를 냈는지가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자원으로 얼마를 감당할 수 있는지다.6
12절은 11절의 “있는 대로”에 이유를 댄다. “할 마음만 있으면”은 기꺼이 하려는 마음이 이미 있는 경우를 가정한다. 그 경우 선물은 가진 것에 따라(καθὸ ἐὰν ἔχῃ, 카토 에안 에케) 받아들일 만하며, 가지지 않은 것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οὐ καθὸ οὐκ ἔχει, 우 카토 우크 에케이). 원문은 “받아들일 만하다”는 형용사(εὐπρόσδεκτος, 에우프로스데크토스)만 쓰고 받는 분을 밝히지 않는다. 문맥상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옳고, 예루살렘 성도들이 받는다고 보는 해석은 가능성이 낮다.7 개역개정의 “받으실”도 이 이해를 반영한다. 다만 뒷부분의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는 원문에 없는 동사를 보충한 번역이다. 원문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거절하신다고 말하지 않고, 선물을 받아들이는 기준이 가지지 않은 것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따라서 3절의 “힘에 지나도록”은 마게도냐 성도들이 스스로 택한 일에 대한 바울의 증언이고, 11-12절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가진 것에 따라 실행하라고 요청한다. 본문 자체가 자발적인 희생의 사례와 모든 사람에게 요구할 금액을 구별한다.
균등과 서로의 부족을 채움 (13-14절)
13-14절은 나눔의 목적을 균등으로 설명한다. 13절 앞부분은 원문에서 동사 없이 짧게 쓰였고, 개역개정은 동사를 보충하여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라고 옮겼다. “곤고하게”에 해당하는 θλῖψις(틀립시스)는 2절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이 겪은 “환난”과 같은 명사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환난 속에서 나누었지만,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런 환난을 새로 지우려고 연보를 권하지 않는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균등”(ἰσότης, 이소테스)이다. 14절의 “이제”는 지금의 형편을 가리킨다. 지금은 고린도의 “넉넉한 것”(περίσσευμα, 페리세우마)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부족한 것”(ὑστέρημα, 휘스테레마)을 채운다. 넉넉한 것은 통상적인 필요를 채우고 남는 몫이고, 부족한 것은 단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데 모자란 것이다.8
14절 뒷부분의 목적절은 방향을 바꾸어, 그들의 넉넉함이 고린도의 부족을 채울 수 있다고 말한다. 바울이 편지를 쓸 때 예루살렘 교회에는 넉넉함이 없었으므로, 이 목적절은 장래에 형편이 뒤바뀔 가능성을 말한다.9 개역개정의 “후에”도 원문에 따로 없는 말을 보충하여 이 뜻을 드러낸다. 이 목적절을 예루살렘 교회가 영적 유익으로 보답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14절에서 “넉넉한 것”과 “부족한 것”이라는 같은 말을 양쪽 방향에 쓰고, 15절에서는 먹을 양식에 관한 결과를 인용한다. 그러므로 이 상호성은 고린도 교회가 언젠가 가난해지면 예루살렘 교회가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물질적 도움의 가능성으로 읽는 것이 적절하다.10 바울이 말하는 균등은 각 교회의 형편에 따라 실제 결핍을 채우는 데 목적이 있다.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만나 (15절)
15절에서 바울은 “기록된 것 같이”라는 말로 출애굽기 16:18의 만나 이야기를 끌어온다. 출애굽기는 오멜로 되어 보니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으며, 각 사람이 먹을 만큼 거두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오멜로 재었다는 앞부분과 각 사람이 먹을 만큼 거두었다는 뒷부분을 빼고, 남음도 모자람도 없었다는 결과를 인용한다. 출애굽기에서 그 균등은 사람들이 자원을 자발적으로 나누어서 생긴 것이 아니었다.11 바울은 광야 백성이 저마다 필요한 만큼 공급받은 결과를 들어, 교회들이 자원하여 나눔으로써 서로의 결핍을 채우도록 권한다.
성경신학적 통찰
광야의 만나와 가난한 형제를 위한 율법
1-15절은 하나님께 공급받은 백성이 서로의 결핍을 채운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교회들의 연보에 적용한다. 15절이 인용하는 출애굽기 16장에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했고, 하나님은 아침마다 만나를 주셨다. 하나님은 장막에 있는 사람 수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라고 하셨고, 많이 거둔 사람도 적게 거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니 남거나 모자라지 않았다(16:16-18). 하나님께서 장막마다 먹을 사람의 필요를 채우신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이 결과는 사람들이 서로 나누어 준 행동으로 생기지 않았다.12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공급하셨고, 바울은 교회들이 받은 것을 자원하여 나눔으로써 같은 결과에 이르기를 바란다. 나누는 사람도 하나님께 공급받아 사는 사람이므로, 자신이 다른 성도의 생명을 지탱하는 근원인 것처럼 행동할 수 없다.
이 가르침은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백성에게 율법으로 주어졌다. 신명기 15:1-11은 빚을 면제하고 가난한 형제에게 손을 펴라고 명한다. 15:4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으리라고 말하고, 15:11은 땅에 가난한 사람이 그치지 않을 것이므로 곤란하고 궁핍한 형제에게 손을 펴라고 명한다. 이 율법은 돕는 사람의 마음도 다룬다. 가난한 형제에게 필요한 대로 넉넉히 꾸어 주고(15:8), 면제년이 가까워 돌려받지 못할까 계산하여 그를 외면하지 말며(15:9), 줄 때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한다(15:10). 하나님께 받은 복은 가난한 형제의 필요를 채우는 데 쓰여야 하고, 그 나눔은 기꺼운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의 기꺼이 하려는 마음(11-12절)을 인정하고, 그 마음이 예루살렘의 실제 결핍을 채우는 행동(14절)으로 이어지기를 요청한다.
복음의 교제를 물질로 나타내는 연보
예루살렘 교회는 처음에 이 가르침을 자기 공동체 안에서 실천했다. 사도행전 4:32-35에서 부활을 증언하는 공동체는 큰 은혜를 받았고, 밭과 집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으며, 사도들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4:34). 바울이 모으는 연보는 그 예루살렘 교회가 결핍에 처했을 때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 그 필요를 채우는 일이다. 로마서 15:26-27에서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도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쁘게 연보했다고 말하고,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누어 가졌으므로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명한다. 복음을 함께 받은 관계가 서로의 생계를 돌보는 책임으로 이어진 것이다.
로마서 15:27은 이미 받은 영적 유익에 물질로 응답하는 관계를 말하며, 주는 교회들을 오히려 빚진 자라고 부른다. 14절은 형편이 바뀌면 물질의 도움이 반대 방향으로도 흐를 수 있다고 말한다. 어느 본문에서도 주는 교회가 받는 교회보다 높은 자리에 서지 않는다. 바울은 로마서 15:31에서 자신이 예루살렘을 위해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한다. 이 기도는 선물을 받을지 여부가 받는 성도들에게 달려 있음을 보여 준다. 이방 교회들의 선물은 예루살렘 교회를 지배할 권리를 사는 대가가 아니라 같은 복음 안의 교제를 물질로 나타내는 일이다.
하나님께 받은 몫 안에서 나눔
바울은 이 연보를 처음 지시할 때도 각 사람이 매주 “수입에 따라” 모아 두게 했다(고린도전서 16:2). 11-12절에서 “있는 대로” 하라는 기준도 이 지시와 같다. 이어지는 9:8-10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고, 성도들이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도록 모든 것을 넉넉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성도들이 나누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므로, 각자 받은 몫 안에서 나누어 다른 성도의 결핍을 채운다.
기독론적 해석
부요하신 분이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
9절은 연보를 권하는 논의의 중심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둔다.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의 너그러움을 들려준 뒤, 고린도 성도들이 이미 아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한다(“너희가 알거니와”). 그리스도는 부요하신데도 그들을 위해 가난하게 되셨고, 고린도 성도들은 그분을 본받기 전에 먼저 그분께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 성도들의 나눔에 근거와 방향을 준다.
9절의 부요하심은 재산이 아니라 사람으로 오시기 전 그리스도의 신적 존재를 가리키고, 가난하게 되심은 사람으로 태어나신 일을 가리킨다.13 빌립보서 2:6-8도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한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이 낮아지심을 근거로 성도들에게 자기 일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보라고 권한다(2:4-5). 9절에서도 부요하신 분이 가난하게 되셨다는 대조는 그 낮아지심이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택하신 일임을 보여 주고,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은 그 낮아지심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밝힌다.
그리스도 안의 부요함과 새 삶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성도들이 얻는 부요함은 재산의 증가가 아니다. 5:21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이 문장도 9절처럼 그리스도께 일어난 일과 그 결과 성도들이 얻는 것을 목적의 관계로 잇는다. 5:18-19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 말한다. 이 본문들에 비추어 보면 9절의 부요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의가 된 삶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부요함은 돈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던 마게도냐 교회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고(1절), 바울은 그들이 낸 것을 “풍성한 연보”라고 부른다(2절).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의 나눔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혜로 소개하고(1절), 고린도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근거로 나눔을 권한다(9절). 마게도냐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생각하며 헌신했는지는 본문에 나오지 않지만, 바울은 두 교회의 나눔을 모두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서 나오는 일로 본다. 5:15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기 소유를 누구를 위해 쓸지도 새롭게 결정할 수 있다. 연보는 그 새 삶이 재물의 사용으로 나타나는 한 방식이다.
구원하시는 주님과 응답하는 성도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위해 가난하게 되신 일과 성도들이 연보하는 일은 역할이 다르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새 삶을 여신다. 성도들은 그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성도의 부족을 채운다. 연보는 구원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에 응답하는 행동이다. 9절은 가난하게 되신 분을 “우리 주”라고 부르고, 5절은 마게도냐 성도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다고 말한다. 성도들이 속한 분은 주님이시므로, 연보를 맡은 지도자나 돕는 교회가 그분의 자리를 차지하여 다른 성도에게 무리한 희생을 요구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 받은 부요함은 드린 금액으로 얻거나 늘리는 것이 아니다. 적게 드린 사람과 많이 드린 사람은 같은 주님께 같은 은혜를 받았다. 가난한 성도도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한 사람이므로 도움만 받는 사람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던 마게도냐 교회들이 기쁨과 너그러움을 나누었듯이, 가난한 성도도 가진 작은 몫을 주께 드리고 다른 성도를 섬길 수 있다.
배고픔을 채우시고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
요한복음 6장에서 만나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결된다. 예수께서는 굶주린 무리를 먹이시고(6:1-15), 만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다(6:31-35).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배고픔을 채우시고 죽음을 이기는 생명도 주신다. 바울이 15절에서 만나를 인용하여 다루는 것은 예루살렘 성도들의 먹을 것과 생계다. 영생을 주시는 그리스도께서 무리의 배고픔도 채우셨으므로, 교회는 영적인 은혜를 말한다는 이유로 지금 배고픈 성도의 사정을 외면할 수 없다.
현대적 적용
형편에 맞게 자원하여 드림
11-12절은 가진 것에 따라 완성하라고 하고, 13절은 주는 사람에게 곤고함을 떠넘기는 것을 나눔의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인은 헌금할 몫을 정할 때 현재 가진 것과 책임져야 할 생활을 정직하게 살필 수 있다. 기본적인 주거와 식사, 돌봐야 할 가족의 필요를 무시하면 주는 사람 자신이 곤경에 빠질 수 있다. 교회가 대출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지출을 요구하여 헌금을 늘리는 방식은 이 요청과 어긋난다. 가진 몫이 작아 많이 낼 수 없는 사람은 그 사실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하려는 마음과 실제로 가진 것에 따른 선물을 받으신다.
마게도냐 성도들이 힘에 지나도록 드린 일은 그들이 스스로 택한 희생이다. 교회가 그 사례를 들어 모든 성도에게 같은 정도의 부담을 요구하면 본문이 강조한 자발성을 잃는다. 바울도 그들의 간절함을 알렸지만 명령으로 말하지 않았다(8절). 사람들 앞에서 금액을 약속하게 하거나 서로 비교하여 더 내도록 몰아붙이는 일도 이 자발성과 어긋난다.
약속한 연보를 마무리함
자발성은 약속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고린도 교회는 일 년 전에 스스로 원하여 시작한 일을 이제 마쳐야 했다(10-11절). 이미 하겠다고 약속한 사람과 교회는 실제로 준비하고 마무리할 책임이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6:2에서 매주 수입에 따라 모아 두게 한 것처럼, 그 실행도 지금 가진 형편에 맞게 계획할 수 있다.
실제 결핍을 채우고 받는 쪽을 존중함
14절에서 나눔은 넉넉한 것으로 실제 부족을 채우는 일이다. 돕는 교회는 받는 교회에 실제로 무엇이 부족한지 살피고 그 필요를 채워야 한다. 14절의 상호성은 필요에 따라 도움이 오가는 관계이므로, 이전의 지원을 같은 금액으로 갚으라고 요구할 근거가 되지 않는다. 돈을 보낸 교회가 상대의 결정을 대신하거나 자기 계획을 그대로 따르라고 요구하면, 부족을 채우는 선물이 지배의 수단으로 바뀐다. 바울도 예루살렘 성도들이 연보를 받아 줄지를 두고 기도를 부탁했다(로마서 15:31). 주는 쪽은 받는 쪽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가난한 성도를 존중하고 넉넉함을 돌아봄
마게도냐 교회들은 기뻐하며 헌신했지만 환난과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2절). 그러므로 가난을 믿음이 부족한 증거로 삼거나, 더 많이 내면 형편이 나아질 것이라고 약속할 수 없다. 가난한 성도도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누리는 형제자매이며, 교회는 그의 헌신을 존중하면서 실제 결핍을 돌보아야 한다.
넉넉한 사람은 자신이 여유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다. 15절의 만나 이야기는 저마다 먹을 만큼 공급받은 결과를 기억하게 한다. 그 기억 앞에서 넉넉한 사람은 계속 늘려 가는 몫 가운데 다른 성도의 식사와 거처를 돕는 데 쓸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살필 수 있다. 교회의 재정도 기본 생활이 어려운 성도들의 부족을 실제로 채우는지 돌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