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방문을 미룬 까닭과 기쁨을 돕는 동역자 (1:23-24)

1:23에서 바울은 고린도 방문 계획을 바꾼 일을 해명하며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른다. 그는 1:15-16에서 고린도를 거쳐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고린도로 돌아와 성도들이 두 번 은혜를 얻게 하려던 계획을 밝혔다. 1:17의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라는 질문은 계획을 바꾼 일 때문에 바울이 말을 쉽게 바꾸는 사람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제 바울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증언을 청하며,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너희를 아끼려”(φειδόμενος, 페이도메노스) 함이었다고 말한다. 방문하지 않은 결정은 성도들을 봐주려는 배려에서 나왔다. 무엇을 아끼려 했는지는 2:1에서 밝혀진다.

그런데 “너희를 아끼려”라는 말은 바울이 성도들을 엄하게 다룰 수도 있고 봐줄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바울은 1:24에서 곧바로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라고 덧붙여 그런 인상을 바로잡는다. ‘주관하다’(κυριεύομεν, 퀴리유오멘)는 주인처럼 다스린다는 뜻이다. 사도들은 성도들의 믿음을 다스리는 주인이 아니며, 그들의 기쁨을 위해 일하는 동역자(συνεργοί, 쉰에르고이)다. 바울은 그 까닭을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τῇ γὰρ πίστει ἑστήκατε, 테 가르 피스테이 헤스테카테)고 밝힌다. 성도들은 바울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서 있다.1 그렇다고 기쁨을 돕는 사람이 듣기 좋은 말만 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그 기쁨을 회복하려고 많은 눈물로 엄한 편지를 썼다(2:4).

근심 중의 방문 대신 눈물로 쓴 편지 (2:1-4)

2:1은 1:23의 “아끼려 함”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한다. 바울은 다시는 근심 중에 고린도에 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심했다. “다시”와 “근심 중에”(πάλιν ἐν λύπῃ, 팔린 엔 뤼페)가 한데 묶여 있어, 근심 가운데 이루어진 방문이 이미 한 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방문에서 일어난 일은 여기 적혀 있지 않다. 2:2는 바울과 교회의 처지를 질문으로 표현한다. 바울이 성도들을 근심하게 하면, 그를 기쁘게 해 줄 사람은 바로 그가 근심하게 한 성도들밖에 없다. 이 질문은 성도들에게 지도자의 기분을 책임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1:24에서 말한 기쁨의 동역 관계가 깨지면 바울과 성도들이 모두 고통받는다는 호소다. 바울은 2:1-7에서 ‘근심’과 ‘근심하게 하다’를 거듭 쓰며 사도와 교회가 겪은 근심에서 징계받은 한 사람이 겪는 근심으로 논의를 옮겨 간다.

2:3-4에서 바울은 방문 대신 편지를 쓴 까닭을 밝힌다. “내가 이같이 쓴 것은”은 지금의 고린도후서가 아니라 그보다 앞서 보낸 편지를 가리키며, 그 편지는 지금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7:8-12에서 이 편지를 다시 언급한다.2 직접 가면 마땅히 자신을 기쁘게 해야 할 사람들에게서 도리어 근심을 얻을 수 있었기에, 바울은 가지 않고 글을 썼다. 그는 성도들 모두가 자신의 기쁨을 자기 기쁨으로 여기리라고 확신했다. 2:4에서 바울은 그 편지를 마음의 큰 눌림과 걱정 가운데 많은 눈물로 썼다고 말한다. 편지의 목적은 성도들을 근심하게 하는 데 있지 않고, 바울이 그들을 향해 품은 넘치는 사랑을 알게 하는 데 있었다. 원문은 ‘사랑’(τὴν ἀγάπην, 텐 아가펜)을 ‘알게 하려’는 목적절 앞에 두어 이 말을 강조한다.

공동체를 근심하게 한 사람과 충분한 징계 (2:5-6)

2:5에서 바울은 공동체를 근심하게 한 사람에게로 화제를 옮긴다. 바울은 그를 “근심하게 한 자”라고만 부르고 이름이나 행위를 밝히지 않으며, 7:12에서도 “그 불의를 행한 자”라고만 말한다. 바울은 그 사람이 자신만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고린도 성도 모두를 근심하게 했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ἀπὸ μέρους, 아포 메루스)는 바로 뒤의 “너희 모두”와 이어지므로, 근심한 사람의 범위를 좁히는 말보다 근심의 정도를 줄여 말하는 표현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다. 이어지는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ἵνα μὴ ἐπιβαρῶ, 히나 메 에피바로)도 사건의 무게를 과장하지 않으려는 말로 보인다.3 바울은 그 사람이 한 일보다 그가 받은 징계와 지나친 근심에 빠질 위험에 관심을 둔다.

2:6의 원문은 ‘충분하다’(ἱκανὸν, 히카논)로 시작하며, ‘이러한 사람에게는 많은 사람에게서 받은 이 징계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개역개정의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는 그 벌이 정당했다는 판단이나 앞으로 벌을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원문은 이미 받은 징계로 충분하다고 판단한다. 2:7이 “그런즉”(ὥστε, 호스테)으로 시작하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요청하는 것도 이 판단에서 나온다. “마땅하도다”를 더 벌하라는 뜻으로 읽으면 2:7의 요청과 방향이 어긋난다. 이 충분함은 징계의 강도보다 기간을 가리킬 수 있으며, 징계를 그치라는 2:7의 요청이 그 읽기를 뒷받침한다.4 “벌”(ἐπιτιμία, 에피티미아)은 육체적 형벌보다 책망이나 징계를 넓게 가리키는 말이고, “많은 사람”은 교회의 다수를 가리킨다.5 징계의 구체적 형식과 절차는 본문에 나오지 않는다.

용서하고 위로하며 사랑을 확증하라는 요청 (2:7-9)

2:7에서 바울은 징계를 그치고 방향을 바꾸라고 요청한다. 개역개정이 “차라리”로 옮긴 τοὐναντίον μᾶλλον(투난티온 말론)은 ‘오히려 반대로’라는 뜻이다. 성도들은 징계를 이어 가는 대신 그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해야 한다. 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하는 것이다. ‘잠기다’로 옮긴 καταποθῇ(카타포테)는 ‘삼켜지다’라는 뜻으로, 지나친 근심이 한 사람을 집어삼켜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을 표현한다. 2:1-5에서 바울은 사도와 교회가 겪은 근심을 말했는데, 이제는 징계받은 사람이 겪는 근심을 염려한다. 1:4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환난 중에 있는 이들을 위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동체를 아프게 한 사람도 그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이다.

2:8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고 권한다. “나타내라”로 옮긴 κυρῶσαι(퀴로사이)는 어떤 것을 유효하다고 확인하거나 공적으로 확정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마음속의 호의에 그치지 말고 공동체가 분명한 결정으로 사랑을 확증하라고 요청한다. 개역개정의 “그들에게”와 달리 NA28의 εἰς αὐτὸν(에이스 아우톤)은 단수 ‘그에게’이며, 2:6-7의 ‘이러한 사람’을 가리킨다. 공동체가 사랑을 확증할 대상은 징계받은 바로 그 사람이다. 그가 징계가 끝났다는 사실만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공동체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9에서 바울은 앞서 편지를 쓴 목적이 성도들이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δοκιμὴν, 도키멘)를 알려는 데 있었다고 말한다. 이 문맥에서 순종은 잘못을 다루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제 그 사람을 용서하라는 요청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이른다.

그리스도 앞에서 한 용서와 사탄의 계책 (2:10-11)

2:10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누군가를 용서하면 자신도 용서한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εἴ τι κεχάρισμαι, 에이 티 케카리스마이)은 바울이 용서했는지 확실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이 조건 표현은 ‘용서할 것이 있었다면’이라는 뜻에 가깝다. 바울은 그 일을 반드시 용서가 필요한 큰 잘못으로 내세우지 않아 비난의 무게를 덜고 화해를 돕는다.6 바울은 그 용서를 “너희를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서” 했다. 그리스도 앞에서 했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일을 의식하며 행했다는 뜻으로 보인다.7 바울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앞세워 교회의 용서를 막지 않고, 교회가 용서한 그 사람을 자신도 받아들인다.

2:11은 이 용서의 목적을 밝힌다. “사탄에게 속지 않게”에서 “속지”로 옮긴 πλεονεκτηθῶμεν(플레오넥테토멘)은 남에게 이용당해 자기 몫을 빼앗긴다는 뜻이다. 7:2에서 개역개정이 ‘속여 빼앗다’로 옮긴 말도 이 동사다. 개역개정의 “속지 않게”는 속임수에 초점을 두지만, 원문은 빼앗기는 손해를 강조한다. 일인칭 복수 ‘우리’는 바울과 고린도 교회가 모두 손해를 입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공동체가 징계한 사람을 지나친 근심 속에 내버려 두면, 사탄은 그 틈을 이용해 교회에서 한 사람을 빼앗아 갈 수 있다. 바울이 사탄의 계책에 맞서 요청하는 행동은 용서와 위로다.

드로아의 불안과 하나님의 개선 행렬 (2:12-14)

2:12-13에서 바울은 여정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갔고, 주님 안에서 복음을 전할 문이 열렸다. 그러나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자 마음이 편하지 못했고, 드로아 사람들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다. 복음을 전할 기회가 열렸는데도 바울은 디도가 가져올 고린도 소식을 기다리며 불안해했다. 이 여정 이야기는 7:5에서 같은 표현(“편하지 못하였고”)으로 다시 이어지고, 7:6-7에서 디도가 와서 고린도 성도들의 소식을 전하는 데서 끝난다. 그 사이에 바울은 2:14부터 자신의 사역을 길게 변론한다. 불안한 여정을 숨기지 않은 이야기 바로 뒤에 2:14의 감사가 나온다.

2:14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한다. 개역개정이 “이기게 하시고”로 옮긴 θριαμβεύοντι(트리암뷰온티)는 전쟁에서 이긴 로마 장군이 개선 행렬을 이끈다는 뜻이다. 원문에서 행렬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고, “우리를”(ἡμᾶς, 헤마스)은 그 행렬에 이끌려 가는 사람들이다. 개선 행렬에는 승리한 군인들과 사로잡힌 포로들이 있었다. 원문은 바울이 자신을 어느 쪽으로 그렸는지 밝히지 않으며, 대부분의 번역은 포로로 이해한다.8 이 동사가 쓰인 골로새서 2:15에서도 목적어는 하나님이 무력하게 하여 드러내신 통치자들과 권세들이다. 또 바로 앞 2:12-13에서 바울은 디도를 만나지 못해 불안했던 여정을 털어놓았다. 이 두 가지를 보면 사도들을 승리한 군인보다 하나님께 사로잡혀 행렬에 이끌려 가는 사람들로 읽는 편이 문맥에 더 잘 맞는다. Seifrid는 이 장면을 하나님이 사도를 로마 개선 행렬 가운데 죽음으로 이끄시는 그림으로 읽는다.9 하나님은 약함 속에 있는 사도를 이렇게 이끄시며, 사도의 수고를 넘어 그를 통해 친히 일하신다.10

개역개정의 “이기게 하시고”는 승리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지만, 사도들을 승리한 사람들로 보이게 하여 하나님께 이끌려 가는 사도의 모습을 가린다. 원문에서 승리는 하나님의 것이고, 사도들은 그 승리를 드러내는 행렬 속에 있다. “항상”이라는 말은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로 불안하게 옮겨 간 여정도 이 이끄심 밖에 있지 않음을 보여 준다. 그래서 바울의 감사는 염려와 약함이 사라진 뒤에 나오지 않는다. 불안한 사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끄시고 그를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각처에 나타내시는 하나님 때문에 바울은 감사한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그리스도의 향기 (2:14-16)

2:14 후반에서 하나님은 사도들을 통하여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냄새처럼 퍼지게 하신다. 2:15는 이 비유를 이어 사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한다. 개역개정의 “하나님 앞에서”는 원문에서 ‘하나님께’(τῷ θεῷ, 토 테오)이므로, 이 향기는 먼저 하나님께 드려진다. “향기”(εὐωδία, 유오디아)는 번제의 냄새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제사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11 이 향기는 “구원 받는 자들” 가운데서도, “망하는 자들” 가운데서도 퍼진다. 2:16에 따르면 같은 냄새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고,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된다. 같은 명사를 출발점과 도착점에 되풀이한 표현(ἐκ θανάτου εἰς θάνατον, 에크 타나투 에이스 타나톤; ἐκ ζωῆς εἰς ζωήν, 에크 조에스 에이스 조엔)은 같은 복음을 만난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결말로 나아감을 강조한다.

사역을 감당할 능력과 순전한 말씀 (2:16-17)

생명과 사망이 걸린 일 앞에서 바울은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라고 묻는다. “감당하리요”에 해당하는 ἱκανός(히카노스)는 어떤 일을 해낼 자격과 능력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3:5-6에서 이 질문에 답한다. 그곳에서 개역개정이 “만족”과 “만족하게 하셨으니”로 옮긴 말은 2:16의 ἱκανός와 같은 어근의 명사(ἱκανότης, 히카노테스)와 동사(ἱκάνωσεν, 히카노센)로, 스스로 흡족해하는 마음보다 사역을 감당할 능력을 가리킨다. 그 능력은 사도에게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2:17은 이 질문 바로 뒤에서 사도들이 어떤 태도로 말하는지 설명한다.

2:17에서 바울은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혼잡하게”로 옮긴 καπηλεύοντες(카펠류온테스)는 장사하여 이익을 남기는 일을 가리킨다. 개역개정의 “혼잡하게”는 물건에 다른 것을 섞는 행위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 구절에서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이익을 얻으려고 말씀을 전하는 동기다. 바울이 여기서 그들을 복음 내용을 바꾼 사람들로 고발하는 것 같지는 않다.12 바울은 그들과 달리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한다. “순전함”(εἰλικρινείας, 에일리크리네이아스)은 1:12에서 바울이 세상에서 행한 방식을 말할 때 “진실함”으로 옮긴 말이기도 하다. 바울은 자신의 처신과 말씀 선포를 같은 기준으로 변호한다. 2:17의 “하나님 앞에서”(κατέναντι θεοῦ, 카테난티 테우)는 2:15의 ‘하나님께’와 달리, 하나님을 마주하고 그분의 판단 아래 말한다는 뜻이다. 성도들의 믿음을 지배하지 않는 사도는 말씀도 자기 이익을 위해 쓰지 않는다.

성경신학적 통찰

원망 없는 견책과 형제를 되찾는 징계

1:23-2:11에서 바울은 사도의 권위와 공동체의 징계가 모두 성도들의 기쁨과 한 사람의 회복을 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레위기 19:17-18은 하나님의 백성이 서로의 잘못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보여 준다. 하나님은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고 이웃을 견책하라고 하시며, 원수를 갚거나 원망하지 말고 이웃을 자기 자신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신다. 잘못을 지적하는 일과 원한을 품지 않는 일이 모두 이웃 사랑에 속한다. 바울은 눈물로 엄한 편지를 써서 잘못을 다루었고(2:4), 고린도 교회의 다수는 그 사람을 징계했다(2:6). 이제 바울은 징계가 충분하니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한다(2:7). 징계가 충분해진 뒤에도 공동체가 그 사람을 계속 밀어내며 원망을 이어 가면, 견책은 레위기가 금한 원망에 가까워진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는 죄를 범한 형제를 권고하는 순서를 가르치신다. 형제가 권고를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며(18:15), 끝까지 듣지 않으면 교회가 판단한다(18:17-18). 권고의 목적은 형제를 되찾는 데 있다. 고린도 교회는 이미 판단을 내리고 징계를 시행했다. 바울은 그 판단 뒤에 이른 새 상황에서, 징계를 결정한 교회가 이제 용서하고 사랑을 확증하는 결정도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2:6-8). 마태복음 18:21-22에서 베드로가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느냐고 묻자, 예수는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대답하신다. 교회의 판단은 한 번 내린 처분을 끝없이 유지하려고 내리는 것이 아니다.

회개로 이끄는 근심과 회복의 위로

갈라디아서 6:1에서 바울은 범죄한 사람이 드러나면 신령한 사람들이 온유한 마음으로 그를 바로잡고, 자신도 시험받지 않도록 스스로 살피라고 권한다. 바로잡는 목적은 그 사람을 회복시키는 데 있다. 2:7-8의 용서와 위로, 사랑의 확증은 그 회복이 징계 뒤에 어떤 모습을 띠는지 보여 준다. 공동체는 그 사람이 지나친 근심에 삼켜지지 않도록 그에게 다가가야 한다. 이 위로는 잘못의 심각성을 지우지 않는다. 바울은 2:5에서 그가 공동체 모두를 근심하게 했다고 분명히 말한 뒤에 위로를 요청한다.

바울은 7:8-11에서 앞서 보낸 편지가 일으킨 근심을 돌아본다. 그는 편지가 성도들을 잠시 근심하게 했지만 그 근심이 회개에 이르렀기에 기뻐한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고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고 구별한다(7:10). 이 구별은 고린도 성도들이 겪은 근심에 대한 말이지만, 2:7에서 바울이 한 사람이 지나친 근심에 삼켜질까 염려한 까닭을 이해하게 해 준다. 근심이 회개와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 자체로 계속되면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 교회의 책망과 용서는 근심이 사람을 삼키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도록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와 복음 앞의 갈림

2:14-16에서 바울은 향기라는 제사의 그림으로 사역 전체를 설명한다. 출애굽기 29:18은 제사장 위임식에서 숫양 전체를 단 위에서 불사르는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라고 말한다. 제물의 향기는 먼저 하나님께 올라간다. 2:15에서 사도들이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도의 사역을 판단하는 첫 기준은 하나님이 그 사역을 받으시는가이다. 같은 향기가 어떤 이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므로(2:16),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그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2:17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한다고 고백한다.

2:15-16의 “구원 받는 자들”과 “망하는 자들”은 고린도전서 1:18에서도 십자가의 말씀 앞에서 나뉘는 두 무리로 나온다.13 그곳에서 십자가의 말씀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구원을 받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같은 말씀이 사람에 따라 생명의 냄새가 되기도 하고 사망의 냄새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반응이 복음의 가치를 정하지 않으므로, 사도는 거절하는 사람 앞에서도 말씀을 자기 유익에 맞추어 바꾸지 않아야 한다. 이 갈림은 반대하는 사람을 조롱할 구실도 되지 않는다. 생명과 사망이 걸린 일이기에 바울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라고 묻는다.

기독론적 해석

믿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섬기는 사도

바울이 성도들의 믿음을 지배하지 않는 까닭은 교회가 이미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1:19-22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고, 하나님이 사도들을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며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고 말했다. 성도들의 믿음을 세우고 붙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했지만 그들의 주인이 되지 않는다. 사도가 방문을 미루는 동안에도 성도들은 믿음으로 서 있다(1:24). 바울이 구하는 것은 성도들이 자신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다.

마가복음 10:42-45에서 예수는 이방 통치자들이 백성을 주관하는 방식과 제자들이 따라야 할 길을 구별하신다. 크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 근거는 섬기러 오셔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인자 자신이다. 바울이 믿음을 주관하지 않고 기쁨을 돕는 자로 서는 것은 이 주님을 따르는 길이다. 그러나 바울의 눈물과 고통은 고린도 성도들의 죄를 속하지 않는다. 대속은 그리스도께서 홀로 이루신 일이고, 사도는 그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성도들을 섬긴다. 이 구별 때문에 사역자는 자신이 치른 희생을 근거로 성도들의 양심을 지배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의 용서에 근거한 용서

2:10에서 바울은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라고 말한다. 교회가 그 사람을 용서하면 바울도 그 용서에 함께하며, 바울 자신이 용서한 것도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일이다. 바울의 용서는 공동체의 용서와 따로 가지 않고 공동체의 유익을 향한다. “그리스도 앞에서”라는 말은 용서를 베푸는 사람도 주님의 판단 아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 앞에서 성도들을 위하여 베푸는 용서는 자신의 너그러움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징계받은 사람만이 아니라 근심을 겪은 공동체 전체의 주님이시다. 그래서 그분 앞에서 이루는 화해는 어느 한쪽의 명예만 회복하는 일이 될 수 없다.

골로새서 2:13-15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용서와 승리를 한 문맥에서 말한다. 하나님은 죽었던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모든 죄를 용서하셨으며, 그들에게 불리한 빚 문서를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셨다. 그리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하게 하여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 겉으로 예수의 패배처럼 보인 처형이 하나님의 승리가 되었다. 골로새서 3:13은 주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성도들도 서로 용서하라고 권한다. 고린도 교회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근거도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용서에 있다. 교회의 용서는 죄를 속하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용서에 근거하여 징계를 그치고 그 사람을 다시 받아들인다.

십자가의 승리와 그 행렬에 이끌려 가는 사도

2:14에서 하나님은 사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개선 행렬로 이끄신다. 골로새서 2:15가 보여 주듯,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승리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2:14를 포로의 행렬로 읽으면, 예수께서 로마의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사도는 로마의 개선 행렬 가운데 죽음으로 이끌려 간다.14 그러나 그리스도와 사도의 자리는 같지 않다. 그리스도는 죽음으로 승리를 이루셨고, 사도는 그 승리 안에서 약함과 불안을 지닌 채 이끌려 간다. 하나님은 그런 사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빌려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정복자로 행동할 수 없다. 디도를 찾지 못해 드로아를 떠난 바울의 불안한 여정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승리 밖에 있지 않았다. 그 승리를 확신하는 바울은 교회의 문제를 가볍게 넘기지 않고, 근심에 빠진 한 사람과 상처 입은 공동체를 세심하게 돌본다.

자신을 드리신 그리스도의 향기

에베소서 5:2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 2:15에서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은 사도 자신을 구원의 제물로 높이지 않는다. 자신을 제물로 드린 분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은 사도들을 통해 그분을 아는 지식을 퍼뜨리신다(2:14). 에베소서 5:2와 함께 읽으면, 그리스도의 향기는 먼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그리스도의 자기 드림을 가리키며 사역자의 매력이나 사람들의 호감으로 좁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2:17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한다고 고백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사람은 말씀으로 이익을 얻으려 하지 않고, 듣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도록 섬긴다. 성도들의 믿음을 지배하지 않는 태도가 말씀을 다루는 태도에서도 이어진다.

현대적 적용

믿음을 주관하지 않고 기쁨을 돕는 지도

바울은 방문을 미룬 결정을 성도들을 아끼려는 마음으로 설명하면서도, 자신의 권한을 믿음을 지배하는 권리로 내세우지 않는다. 성도들은 이미 믿음으로 서 있다(1:24). 그러므로 지도자는 성도들의 믿음을 자기 감정과 뜻을 얼마나 따르는지로 평가할 수 없다. 교회 안에서 다른 의견을 말하거나 설명을 요구하는 일을 곧바로 불순종으로 취급하면, 1:24가 경계한 믿음의 주관이 자라기 쉽다. 엄한 권면이 필요할 때에도 지도자는 바울처럼 성도들의 기쁨을 회복하려는 목적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2:4).

징계를 그치고 사랑을 확증하는 교회

고린도의 징계에는 많은 사람이 관여했다. 바울은 그 징계가 잘못이었다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이제 충분하니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한다(2:6-7). 바울이 든 근거는 이미 받은 징계로 충분하다는 판단과, 그 사람이 지나친 근심에 삼켜질 위험이다. 오늘의 교회도 징계를 결정했다면 그 징계가 언제 충분해지는지 다시 판단할 책임이 있다. 처음 결정을 내린 뒤 아무도 그 조치를 다시 살피지 않으면, 징계받은 사람은 근심 속에 홀로 남는다. 바울이 경고한 대로 사탄은 그 틈을 타 교회에서 한 사람을 빼앗아 갈 수 있다(2:11).

2:8에서 바울은 공동체가 징계받은 그 사람에게 사랑을 확증하라고 요청한다. 징계가 끝났다는 사실만 알려서는 이 요청을 이루지 못한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징계를 끝낸 뒤에도 공동체가 이미 다룬 잘못을 거듭 들추어 그에게 낙인을 찍거나 그를 교제에서 계속 밀어내면, 그 사람에게 징계는 끝나지 않은 것과 같다. 사랑을 확증하라는 요청은 교회가 내리는 결정에도, 공동체가 그 사람을 대하는 평소의 말과 태도에도 적용된다. 피해를 겪은 사람이나 다른 개인이 스스로 필요한 거리를 두는 선택은 공동체의 이런 배척과 다르다.

용서와 피해를 겪은 사람의 자리

바울은 용서를 요청하기 전에 그 사람이 공동체 모두를 근심하게 했다고 분명히 말한다(2:5). 용서는 실제로 생긴 근심과 피해를 없던 일로 만들지 않는다. 2:6-8은 공동체가 징계를 그치고 그 사람에게 사랑을 확증하라고 요청하지만, 7:12가 말하는 “그 불의를 당한 자”가 그와 어떤 관계를 언제 회복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징계를 끝내는 결정을 피해를 겪은 사람에게 곧바로 예전 관계로 돌아가라는 요구로 바꾸지 말아야 한다. 피해를 겪은 사람이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할 기회도 줄여서는 안 된다. 바울도 자신의 눈물과 교회의 근심을 숨기지 않았다(2:4-5).

불안 속에서도 드리는 감사

바울은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할 문이 열렸는데도 디도를 만나지 못해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그 불안을 숨기지 않은 채 하나님께 감사한다(2:12-14). 2:14의 감사는 계획이 이루어진 성공에서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불안한 사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행렬처럼 이끄시고, 그를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나타내신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는 구절을 모든 계획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약속으로 쓰면, 실패하거나 아픈 사람은 자신이 그 승리 밖에 있다고 느끼기 쉽다. 사역 기회가 열렸는데도 동역자를 염려하는 마음을 믿음이 약한 탓으로 돌릴 필요도 없다. 신자는 약함과 불안 속에서도 자신을 이끄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말씀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지 않음

말씀을 장사하지 않는다는 2:17의 고백은 설교와 교육, 상담에서 누구의 이익을 구하는지 묻게 한다.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헌금이나 충성을 얻어 내거나, 후원자가 불편해할 사실을 일부러 감추면 말씀을 자기 목적에 이용하게 된다. 그렇다고 사역자를 후원하는 일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갈라디아서 6:6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고 한다. 2:17이 경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말해야 할 말씀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