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주를 두려워하여 사람을 설득함 (11절)
11절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야 한다는 5:10에서 결론을 끌어낸다. 바울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이유는 주를 두려워하는 경외에 있다. “주의 두려우심”을 안다는 말은 그분 앞에서 자기 삶이 드러나 판단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그 책임을 의식한다는 뜻이다. “권면하거니와”로 옮긴 동사(πείθομεν, 페이도멘)는 상대가 납득하도록 말로 설득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무엇을 설득하는지는 이 문장에 나오지 않으며, 이어지는 사역 변호와 20절의 호소가 그 내용을 보여 준다.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πεφανερώμεθα, 페파네로메타)는 5:10에서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로 옮긴 동사의 완료형으로, 이미 드러나 지금도 드러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장차 모든 사람이 드러날 심판대를 말한 직후, 바울은 자신이 이미 하나님께 드러나 있다고 고백하고 같은 동사로 고린도 성도들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란다고 덧붙인다. 심판을 말하는 사도가 먼저 그 판단 아래 서 있으며, 감출 것이 없는 사람으로 교회 앞에 선다.
외모의 자랑과 하나님 앞에 드러난 삶 (12-13절)
12절에서 바울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한다. 이 말은 3:1의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를 떠올리게 한다. 4:2에서도 바울은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스스로 추천한다고 말했다. 11절의 양심과 12절의 자천은 앞선 장들의 논쟁에서 이어진 주제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사도들을 자랑할 근거를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한다. “외모로”는 얼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가리킨다. 고린도에서는 누구를 믿을 만한 일꾼으로 인정할지가 쟁점이었다. 바울은 눈에 띄는 자랑거리로 답하지 않고, 하나님과 성도들을 위하여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밝혀 교회가 사역의 진실함을 알아보게 한다.
13절의 “미쳤어도”와 “정신이 온전하여도”는 서로 반대되는 두 평가다. 앞부분은 바울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반대자들의 비난을 받아 말한 것으로 보이며, “만일”은 바울이 자기 정신 상태를 스스로 의심한다는 뜻이 아니다.1 본문은 그런 평가를 낳은 사건을 설명하지 않는다. 바울은 자신에게 붙은 평판을 하나하나 해명하지 않고, 어떤 모습이든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고 답한다. 그의 삶을 판단할 기준은 사람들의 인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관계에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한 사람의 죽음 (14절)
14절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사랑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문법상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바울은 곧바로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은 사건을 말한다.2 “강권하시는도다”(συνέχει, 쉬네케이)는 붙들어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사도의 삶을 붙들어 이끈다는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건대”는 사도들이 이미 내린 판단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분의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은 사람을 붙든다.
그 판단의 내용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ὑπὲρ πάντων, 휘페르 판톤)의 전치사는 ‘누구를 위하여’와 ‘누구를 대신하여’를 모두 나타낼 수 있고, 어느 쪽으로 옮길지는 해석자들 사이에 논의된다.3 이 전치사 하나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닌 성격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바울의 추론이 방향을 보여 준다. 원문은 결론의 접속사(ἄρα, 아라)로 한 사람의 죽음에서 모든 사람의 죽음을 끌어내며, 개역개정은 이를 “죽었은즉”으로 옮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들에게 유익을 주는 데 그친다면 이런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한 분이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죽으셨기에 그분의 죽음이 그들의 죽음으로 여겨진다. 21절은 같은 전치사로 죄를 알지 못하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아지셨다고 말하므로, 이 죽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이 받아야 할 자리를 받으셨다는 의미도 담긴다. 개역개정의 “대신하여”는 이 의미를 살린다. “모든 사람”에는 편지를 받는 고린도 성도들도 포함된다.4
모든 사람의 죽음과 그리스도를 위한 새 삶 (14-15절)
15절은 같은 죽음을 다시 말하며 그 목적을 밝힌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다. 원문은 목적의 접속사(ἵνα, 히나)로 이 삶을 그리스도의 죽음이 이루려는 목적으로 제시하며, 개역개정은 이를 “살게 하려 함이라”로 옮긴다.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 삶은 14절의 죽음으로 이미 완료된 상태가 아니라 그 죽음이 겨냥하는 삶이다. 바울도 5:9에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쓴다고 말하며, 그 삶을 계속 추구할 일로 다룬다. 14절에서 모든 사람이 어떤 의미로 죽었는지는 해석자들 사이에서 정리되지 않은 문제다.5 한 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이 이미 죄 가운데 죽어 있었음을 드러낸다고 보는 해석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대표이신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었다는 해석이 더 낫다.6 15절의 “살아 있는 자들”은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선언 뒤에 나오므로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새 삶을 얻은 이들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고, 바울은 갈라디아서 2:19-20에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일을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삶의 시작으로 말한다. 14절의 죽음은 육체적 사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분이 그들을 대표하여 죽으셨으므로, 살아 있는 자들의 삶은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분께 속한다. 15절이 말하는 목적은 이 새 소속에 근거를 두며, 16-17절은 여기서 새로운 앎과 새 창조라는 결과를 끌어낸다.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 새로운 앎 (16절)
16절의 “그러므로”는 14-15절에서 결과를 끌어낸다. “이제부터는”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깨달은 때를 전환점으로 삼으며, 그때부터 바울은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다. “육신을 따라”(κατὰ σάρκα, 카타 사르카)는 아는 대상이 아니라 아는 방식을 수식하며, 인간의 외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방식을 가리킨다.7 이 구별이 뒤 문장의 뜻을 정한다.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는 바울이 지상의 예수를 직접 만났다는 증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깨닫기 전에는 그분을 외적 기준으로 평가했으나 이제는 그렇게 알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평가가 바뀌자 사람에 대한 평가도 바뀐다. 12절에서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의 기준이 문제였으므로, 바울은 이 원리로 고린도 교회가 사도를 평가하는 방식도 바로잡으려 한다.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 (17절)
17절의 “그런즉”도 같은 결과를 잇는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뒤에 오는 “새로운 피조물”(καινὴ κτίσις, 카이네 크티시스)은 주어와 동사가 없는 짧은 명사구다. 개역개정처럼 ‘그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다’로 읽으면 개인의 변화가 앞서고, ‘새 창조가 있다’로 읽으면 하나님이 시작하신 새 창조에 그 사람이 속한다는 데 무게가 실린다. 바울 서신에서 이 명사는 개별 피조물보다 대개 ‘창조’를 뜻한다.8 이어지는 “이전 것”과 “새 것”도 복수형이어서 한 사람의 내면보다 넓은 범위를 담을 수 있고, 18절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변화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신 새 창조의 일부로 말한다고 보는 것이 문맥에 맞는다. 개역개정의 “새로운 피조물”은 그 사람이 새로 지음 받았다는 뜻을 바르게 옮기며, 그 변화가 속한 더 큰 현실은 뒤따르는 문장들이 밝혀 준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그 새 창조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선언한다. “되었도다”(γέγονεν, 게고넨)는 이미 일어나 지금도 이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지나간 것과 새로 된 것이 무엇인지는 앞뒤 문맥이 보여 준다. 자신을 위하여 살던 삶(15절), 육신을 따라 사람을 알던 방식(16절), 하나님과 맞서던 관계(18-19절)가 지나가고, 그리스도를 위한 삶과 새로운 앎과 하나님과의 화목이 왔다. 이 새로움은 모든 기억과 성향이 한순간에 사라진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5:1-5에서 바울은 아직 장막 같은 몸에서 탄식하며, 성령을 보증으로 받은 채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질 날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이미 받은 것은 새 소속과 삶의 방향이며, 그 새로움의 완성은 아직 기다린다.
하나님이 이루신 화목과 맡기신 직분 (18-19절)
18절은 이 모든 새로움이 하나님께로서 났다고 밝히고, 그 하나님이 하신 두 일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고,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 “화목”(καταλλαγῆς, 카탈라게스)은 원수였던 이들이 다시 우호 관계를 회복하는 일을 가리킨다.9 관계를 회복하려고 먼저 움직이신 분은 하나님이다. 두 번 나오는 “우리”는 범위가 같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우리”에서 편지를 읽는 성도들을 빼기는 어렵지만, 20절에서 사신인 “우리”와 화목하라는 명령을 듣는 이들이 구별되므로 직분을 받은 “우리”는 바울과 동역자들로 보는 편이 낫다.10 하나님은 화목을 먼저 주시고, 그 화목을 받은 일꾼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신다.11 사도들은 화목의 근원이 아니며,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화목을 맡아 섬기는 일꾼이다.
19절은 “곧”으로 시작하여 18절을 풀어 말한다. 개역개정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로 옮겨 “그리스도 안에”를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읽는다. 원문의 ‘있었다’(ἦν, 엔)를 ‘화목하게 하는’(καταλλάσσων, 카탈랏손)과 하나로 묶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고 계셨다’는 뜻이 된다. 두 읽기 모두 바울의 신학에 맞지만, 뒤의 읽기가 더 개연성이 높다.12 19절이 풀어 말하는 18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라고 했으므로, 19절의 초점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진술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화목을 이루셨다는 행동에 있다. “세상”은 뒤의 “그들의 죄”로 이어지므로 사람들을 가리킨다. “돌리지 아니하시고”(μὴ λογιζόμενος, 메 로기조메노스)는 장부에 셈하여 올리는 말에서 온 표현으로, 하나님이 사람들의 잘못을 그들의 몫으로 계산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신다는 뜻이다.13 이어 하나님은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 18절의 직분이 맡은 일이라면, 19절의 말씀은 그 일로 알릴 소식이다.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사신의 간청 (20절)
20절의 “그러므로”는 하나님이 화목의 말씀을 맡기셨다는 19절에서 사도의 일을 이끌어 낸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πρεσβεύομεν, 프레스뷰오멘) 일한다. 사신은 보낸 이를 대표하여 그의 말을 가져가는 사람이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권면하신다. 여기서 “권면하시는”(παρακαλοῦντος, 파라칼룬토스)은 하나님이 사신의 입으로 호소하신다는 뜻이다. 11절에서 사람들을 설득하던 사도의 말은 이제 하나님의 호소를 담은 말로 소개된다. 바울은 이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라고 말한다. 간청의 내용은 “하나님과 화목하라”(καταλλάγητε, 카탈라게테)다. 이 명령은 수동형이어서, 스스로 화목을 이루라는 요구보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화목을 받아들이라는 요청에 가깝다.14
“권면하시는”과 “간청하노니”에는 원문에 목적어가 없다. “화목하라”는 2인칭 복수 명령이지만, 그 대상이 편지를 받는 고린도 성도들인지 사신이 복음을 들려주는 사람들 일반인지는 이 문장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문장을 하나님이 사신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하시는 호소로 읽을 수 있다.15 그러나 편지에서 이 간청을 직접 듣는 이들은 고린도 성도들이며, 문맥은 개역개정처럼 “너희”를 대상으로 보충하는 번역을 뒷받침한다.16 바울은 6:1에서 같은 동사(παρακαλοῦμεν, 파라칼루멘)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이어 말한다. 이미 은혜를 받은 교회가 이 호소를 다시 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서 드러난다. 화목은 하나님이 먼저 이루신 일이지만,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계속 그 은혜에 응답하며 살아야 한다. 교회는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 앞에서 사도를 변호할 근거가 필요했고(12절), 성도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신을 육신을 따라 평가한다면 그를 통해 들리는 하나님의 호소도 바르게 듣기 어렵다. 화목하라는 호소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향하며, 사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그 호소에 응답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 또 19절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행동을 말한 뒤 20절이 응답을 요청하므로, 하나님이 이루신 화목은 듣는 사람의 응답과 무관하게 완결된 상태로 제시되지 않는다.
죄를 알지 못하신 분과 하나님의 의 (21절)
21절은 이 호소의 근거를 밝힌다. 원문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τὸν μὴ γνόντα ἁμαρτίαν, 톤 메 그논타 하마르티안)로 시작하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은 적이 없으시다는 뜻이다. 원문에는 주어가 따로 없지만 18-20절의 흐름에서 주어는 하나님이며, 개역개정도 “하나님이”를 보충한다. 하나님은 이 죄 없으신 분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 “죄로 삼으신”(ἁμαρτίαν ἐποίησεν, 하마르티안 에포이에센)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두 자리를 맞바꾸듯 대응시킨다. 죄를 알지 못하신 분이 죄로 삼아지시고, 죄 가운데 있던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다.
“죄로 삼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셨다는 뜻일 수 없다. 같은 문장이 그분은 죄를 알지 못하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표현을 레위기 4장의 속죄제처럼 ‘죄를 위한 제물’로 읽는 해석도 있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죄인인 인류와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뜻으로 읽는 해석이 더 개연성이 높다.17 문장 안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앞의 “죄”는 분명히 죄 자체를 뜻하고, 뒤의 “죄”는 “하나님의 의”와 짝을 이룬다. 같은 문장에서 두 번째 “죄”만 제물로 바꾸어 읽으면 이 대응이 흐려진다. 14-15절과 19절에 비추어 보면, 그리스도께서 죄인들과 하나가 되신 일은 그들을 대신한 죽음에서 이루어졌다. 19절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신다고 한 말은 여기서 근거를 얻는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자리에서 죽으셨다.
“하나님의 의가 되게”(γενώμεθα δικαιοσύνη θεοῦ, 게노메타 디카이오쉬네 테우)도 같은 대응 안에서 읽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지 않고 죄의 자리에 서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속성을 물질처럼 넘겨받아 하나님의 의 자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자기 의로 사람들을 의롭게 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18 의는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이 주시며, 그 의를 받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안에서”는 이 의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관계 안에서 주어진다는 뜻이다.19 17절의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듯, 21절의 의도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다. 이 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새 자리에서 시작하여 그 사람의 삶을 바꾼다. 15절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을 그분을 위하여 사는 삶으로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목의 사신이 간청하며 내미는 것은 자기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이 일이다.
성경신학적 통찰
이사야가 약속한 새 일과 새 창조
17절의 새로움을 밝히는 가장 직접적인 구약 배경은 이사야 43:18-19다. 개역개정은 이 대목을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로 옮긴다. 칠십인역에서 “옛날 일”은 τὰ ἀρχαῖα(타 아르카이아),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는 ἰδοὺ ποιῶ καινὰ(이두 포이오 카이나)이며, 17절 원문의 “이전 것”(τὰ ἀρχαῖα, 타 아르카이아), “보라”(ἰδοὺ, 이두), “새 것”(καινά, 카이나)이 같은 순서로 나온다. 바울은 인용 표시를 붙이지 않으므로 이 관계는 직접 인용보다 어휘를 통한 암시로 보아야 한다. 이사야에서 하나님은 바다에 길을 내셨던 출애굽보다 더 새로운 구원을 약속하신다. 바벨론에 있는 백성을 위하여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어 택한 백성에게 마시게 하시며, 그 백성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이사야 43:14-21). 바울은 그 새 일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17절의 새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백성에 속한다(18-20절). 바울은 이미 4:6에서 창세기 1:3을 떠올리게 하는 말로,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하신 하나님이 신자의 마음에 빛을 비추셨다고 말했다. 17절의 새로움도 창조주 하나님의 일이며, 18절은 그 사실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라는 말로 고백한다.
이사야 65:17은 이 새 일을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로 넓혀 말하며,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어지는 65:18-25는 우는 소리가 그치고, 사람이 지은 집에 자신이 살며, 수고가 헛되지 않는 세상을 그린다. 이 약속은 17절의 새 창조가 한 사람의 내면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이 회복하실 세상과 이어진다는 읽기를 뒷받침한다. 이사야는 또한 이전 것이 다시 기억되지 않을 때를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과 결부시킨다. 17절의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도 모든 기억과 상처가 지금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새 창조에 속했지만, 여전히 몸으로 탄식하며 완성을 기다린다(5:2-5).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근거한 구원은 성령을 통해 지금 신자를 변화시키고 있으며, 그 변화는 장래에 완성된다.20 그래서 새 창조에 속한 사람은 받은 은혜를 믿으면서도 남아 있는 고통과 약함을 정직하게 말할 수 있고, 몸과 일상과 노동의 회복을 하나님의 약속 밖의 일로 여기지 않는다.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는 새 언약
19절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시는 일은 예레미야 31:31-34의 새 언약 약속과 주제가 이어진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어 자기 법을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하시고, 그들의 죄악을 사하며 다시 기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바울은 19절에서 예레미야를 인용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3:6에서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διακόνους, 디아코누스)이라 불렀고, 18절에서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διακονίαν, 디아코니안)을 받았다고 말한다. 같은 사도의 사역을 3장에서는 새 언약으로, 여기서는 화목으로 설명하는 셈이다. 그 사역이 알리는 소식의 중심에 죄를 셈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용서가 있다.
고난받는 종과 그리스도의 죽음
이사야 53:4에서 말하는 이들은 고난받는 종이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는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진 것이 자신들의 질고와 슬픔이었음을 고백한다. 겉으로 드러난 고난만 보고 하나님의 평가를 추론하던 판단이 뒤집힌 것이다. 16절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더는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다고 할 때도 같은 전환이 일어난다. 그는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보이던 십자가를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으로 다시 이해한다.
이사야 53:9-12는 강포를 행하지 않고 입에 거짓이 없던 종이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한다고 말하며,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라고 약속한다. 무죄한 이가 다른 이들의 죄를 지고 그들을 의롭게 한다는 점에서 이 본문은 21절과 가깝다. 53:10이 종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이라고 말하므로, 21절의 “죄로 삼으신”에도 제사의 배경이 있을 수 있다. 다만 바울은 이사야를 인용하지 않으며, 21절을 해석하는 직접 근거는 14-15절의 대신 죽음과 19절의 용서다. 갈라디아서 3:13-14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셔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셨다는 말도 같은 교환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자리를 받으시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다.
원수 되었을 때 이루신 화목
바울이 화목을 자세히 설명하는 또 다른 본문은 로마서 5:6-11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경건하지 않은 죄인이었을 때 죽으셨고, 하나님은 그 죽음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였을 때 아들의 죽음으로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 적대는 사람 쪽에 있었고, 먼저 움직이신 분은 하나님이다. 이 본문은 14절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분의 죽음에서 내용을 얻는 이유와 18절이 화목의 주어를 하나님으로 두는 이유를 밝혀 준다. 로마서 5:10-11은 화목하게 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으로 구원받을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고 덧붙인다. 화목은 과거의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어지는 관계이므로, 이미 화목하게 된 고린도 교회도 20절의 호소를 다시 들을 이유가 있다.
하나님과의 화목과 새 공동체
에베소서 2:14-16은 하나님과의 화목이 사람들 사이에 낳는 결과를 보여 준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새 사람으로 지으시고,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20절의 직접적인 호소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16절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깨달은 사람이 더 이상 아무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않는다고 말하므로, 출신과 지위와 겉으로 드러난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던 방식도 그리스도 안에서 끝난다. 에베소서가 말하는 새 공동체는 이 변화가 교회 안의 관계로 나타난 모습이다.
기독론적 해석
심판하실 주와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
11-14절에서 바울의 사역을 움직이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5:10의 심판대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이므로, 11절에서 바울이 두려워하는 “주”도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바울은 장차 자기 삶을 드러내실 그 주님을 경외하여 사람들을 설득한다. 14절에서 그를 강권하는 사랑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심판하실 주님과 죽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이 한 분이시므로, 바울은 심판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사랑에 붙들려 살고, 그 사랑을 알기에 주 앞에서 질 책임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사도의 헌신은 자기 열정에서 시작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먼저 자신을 내주신 일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교회를 섬기는 사람은 자기 마음에서 새로운 열정을 끊임없이 짜내기보다 이미 드러난 그 사랑을 다시 알고 그 사랑에 삶을 맡길 수 있다.
죽고 살아나신 그리스도께 속한 삶과 새로운 앎
14-15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대표하여 죽으신 한 분이다. 그분의 죽음이 그들의 죽음으로 여겨지므로, 그분께 속한 사람의 삶은 더 이상 자기를 목적으로 삼을 근거를 갖지 않는다. 바울은 죽음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이시며, 15절은 살아 있는 자들이 살아 계신 그분을 위하여 사는 것을 그 죽음의 목적으로 말한다. 로마서 6:4-11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들이 그분의 부활을 따라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는 목적을 말하고, 그들에게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 여기라고 명령한다. 이어 6:12-13에서 바울은 죄가 그들의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권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에게도 죄와 자기를 위한 삶에 맞서는 싸움이 남아 있으며, 그 싸움의 근거는 그가 이미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사실이다. 14-15절은 같은 관계를 삶의 목적과 소속으로 설명한다. 그분께 속한 사람은 이제 자기를 위하여 죽고 살아나신 분의 것이다. 자기 의로 살 수 있다고 여긴 사람도, 죄 때문에 돌아갈 길이 없다고 여긴 사람도 이 한 분의 죽음 앞에서 같은 자리에 서며, 그분께 속할 때 새 삶을 얻는다.
16절은 이 죽음과 부활이 그리스도에 대한 평가를 바꾸었다고 말한다. 외적 권세와 성공으로 메시아를 판단하면 십자가는 실패로 보인다. 바울은 그 죽음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사랑을 보았고, 죽임당한 이를 살아나신 주님으로 안다. 이 앎은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지상의 삶을 낮추지 않으며, 그 삶과 죽음을 바르게 평가하게 한다. 17절이 새로움의 자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밝히는 것도 같은 앎에서 나온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죽고 살아나셨기에 그 사람은 하나님의 새 창조에 속하며, 아직 남은 약함 때문에 그 소속이 취소되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린 분을 주로 아는 사람은 약함과 낮은 지위만으로 다른 사람의 가치를 정할 수 없다.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의 기준으로 사도를 재는 일(12절)도 이 앎과 맞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하나님 앞의 자리
18-21절에서 화목의 주어는 하나님이고, 화목을 이루는 길은 그리스도다. 하나님은 원수였던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오셨고, 그 길은 죄를 알지 못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아지신 데서 열렸다. 그리스도께는 갚아야 할 자기 죄가 없었으므로, 그분이 감당하신 것은 다른 이들의 죄였다. 신자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일도 “그 안에서” 일어난다. 의는 그리스도와 떨어져 개인이 소유하는 자격이 아니라, 그분과 연합한 관계 안에서 받는 하나님 앞의 자리다. 17절의 새 창조와 21절의 의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새 삶은 스스로 달라져야 한다는 부담이 되지 않고 의는 자기 옳음을 입증하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 신자는 과거의 업적을 내세워 자격을 증명할 필요도, 죄를 숨겨야 받아들여질 이유도 없다. 그는 자기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으며, 실패했을 때에도 같은 그리스도께 다시 나아갈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목과 사신의 사역
2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한다. 그러나 사신은 그리스도의 일을 대신 이루는 사람이 아니다. 화목은 21절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루어졌고, 사신은 그 일을 알리며 응답을 청한다. 그리스도께서 홀로 이루신 구원과 그 구원을 알리는 사도의 사역은 이렇게 구별된다. 하나님이 사신을 “통하여” 호소하시므로 사신의 말에는 권위가 있지만, 그 권위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바르게 알릴 때에만 선다. 사도적 선포의 중심은 사역자의 특별함이 아니라 죄 없으신 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죄를 셈하지 않고 사람을 자기에게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현대적 적용
외모가 아닌 드러난 삶으로 판단하기
12절에서 바울은 외모로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답할 근거를 성도들에게 주려 했다. 외모와 마음을 가르는 이 구별은 직업과 학력, 눈에 띄는 경력으로 사람의 신앙과 신뢰할 만함을 판단하는 습관을 문제 삼는다. 그렇다고 마음을 본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숨은 동기를 마음대로 규정할 수는 없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드러나 있다고 말한 뒤, 성도들의 양심에도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했다(11절). 그는 자기 동기를 교회에 강요하지 않고, 교회가 직접 보고 들은 그의 삶에 판단을 맡겼다.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에도 확인한 말과 행동에 근거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 드러나 있다는 고백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교회의 헌신 요청
14절에서 사람을 붙드는 주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이 말을 봉사자에게 쉬지 말라고 압박하는 구호로 쓰면, 사람을 움직이는 주체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지도자의 요구로 바뀐다. 바울을 움직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깨달음이었다. 15절에 따르면 그 죽음의 목적은 사람들이 더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며, 바울에게 그 삶은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13절)이라는 말처럼 교회를 위한 섬김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사람은 시간과 재능을 쓸 때 자기 평판보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사람들의 유익을 묻는다. 교회가 헌신을 요청할 때에도 해야 할 일의 양을 채우게 하기보다, 이 사랑을 아는 사람이 자기를 위한 삶에서 벗어나 이웃을 섬기도록 도와야 한다.
새로운 피조물과 과거의 책임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선언은 과거의 잘못으로 자신을 영원히 규정하던 사람에게 소망을 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소속을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라는 말을 다른 사람이 입은 손해까지 지우는 선언으로 써서는 안 된다. 17절에서 지나간 것은 자신을 위하여 살던 삶과 육신을 따라 사람을 알던 방식이며, 19절에서 죄를 셈하지 않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근거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잊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은 잘못을 숨길 이유가 없으므로, 자신이 한 일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손상된 관계를 바로잡을 힘을 구할 수 있다. 은혜는 과거의 책임을 피하게 하지 않고, 그 책임을 지며 새롭게 살아갈 근거가 된다.
사신의 권위와 화목의 호소에 대한 응답
화목하게 하는 직분은 하나님께 받은 봉사이며, 바울과 동역자들은 자신들을 화목의 근원으로 말하지 않는다(18절). 사신의 권위는 맡은 소식에서 나오므로, 그리스도의 사신이라는 이름을 개인의 의견이나 교회 운영의 결정에 붙여 반대를 막는 일은 그 권위를 남용하는 것이다. 설교자와 교회 지도자는 자기가 하는 말이 화목의 말씀인지 자기 판단인지 구별해야 한다. 이 단락에서 바울이 말하는 방식도 이 권위의 성격을 보여 준다. 11절에서 그는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이 납득하도록 설득하고, 자신이 하나님께 드러나 있듯 성도들의 양심에도 드러나 그들이 직접 판단하기를 바란다. 20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를 통하여 권면하신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는 말로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곧 하나님이 이루신 화목을 받아들이라고 호소한다. 복음을 거절하거나 비판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에도 사신의 목적은 논쟁에서 이기는 데 있지 않고, 상대가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청하는 데 있다. 주 앞에서 책임을 진다는 사실은 말을 정확하게 하도록 이끌고, 자신도 먼저 은혜를 입었다는 기억은 진실하게 말하고 기다리는 인내를 가르친다.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호소는 처음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미 은혜를 받은 고린도 교회에 이 호소를 들려주고, 6:1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이어 권한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도 하나님이 이루신 화목을 자기 노력의 결과처럼 여기거나, 사신을 외모로 평가하며 그를 통해 들리는 하나님의 호소를 흘려들을 수 있다. 화목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이므로, 응답은 그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자기 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의로운 자리를 받으며, 그분을 위하여 다시 사는 일이 그 응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