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질그릇에 담긴 보배와 하나님의 능력 (7절)

7절의 “이 보배”는 바로 앞 4:5-6에서 말한 복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사도들의 마음에 비추셨고,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며 자신들은 예수를 위하여 고린도 성도들의 종이라고 전파한다. 그 보배를 가진 “우리”는 일차로 바울과 그와 함께 복음을 섬기는 동역자들이다. 질그릇은 흙을 구워 만든 그릇으로, 고대 가정에서 흔히 쓰였고 쉽게 깨졌다. 바울은 누구나 아는 이 물건으로 복음을 맡은 사람들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복음은 그처럼 손상되기 쉬운 인간의 몸과 삶을 거쳐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7절 후반은 보배를 질그릇에 두신 목적을 밝힌다. 헬라어 원문을 따르면 “능력의 탁월함이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게 하려고”라는 뜻이다. 개역개정의 “알게”에 해당하는 동사는 원문에 없다. 원문은 능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말하고, 개역개정은 그 사실이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결과까지 풀어 옮겼다. 8절부터 이어지는 고난의 목록이 그 출처를 보여 준다. 사도들이 무너질 듯한 형편에서도 복음을 섬기며 계속 서 있는 것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질그릇과 보배의 대비는 자기 능력과 외적 조건을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응답이기도 하다.1 같은 편지에서 바울은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언급하고(5:12),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다는 비판을 직접 옮겨 적는다(10:10).

눌려도 무너지지 않게 붙드시는 하나님 (8-9절)

8-9절은 고난과 그 한계를 짝지은 네 쌍의 표현으로 그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여 준다. 각 쌍은 실제로 닥친 고난을 말한 뒤 “그러나 … 아니하다”를 덧붙여 그 고난이 사도들을 끝까지 무너뜨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개역개정의 “사방으로”는 원문에서 “모든 일에서”라는 뜻에 가깝다. 첫째 쌍에서 사도들은 눌리고 압박당하지만(“욱여쌈을 당하여도”) 꼼짝할 수 없는 곳에 갇히지는 않는다(“싸이지 아니하며”). 둘째 쌍에서 원문은 소리가 비슷한 두 분사 ἀπορούμενοι(아포루메노이)와 ἐξαπορούμενοι(엑사포루메노이)로 “어찌할 바를 몰라도 아주 길을 잃지는 않는다”는 대조를 만든다. 개역개정은 이 대조를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로 옮겼다.

ἐξαπορούμενοι(엑사포루메노이)와 같은 동사는 1:8에서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회고할 때에도 쓰였다(ἐξαπορηθῆναι, 엑사포레테나이). 그곳에서 원문은 절망의 대상을 “사는 것”(τοῦ ζῆν, 투 젠)으로 밝히고, 개역개정은 이를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로 옮겼다. 바울은 살아남을 길이 끊어진 상황을 실제로 겪었다. 1:9에서 바울은 그 일로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1:10에서는 하나님이 그 큰 사망에서 사도들을 건지셨다고 고백한다. 8절에서 사도들이 아주 길을 잃지 않는다는 고백도 7절이 말한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한다. 자기 목숨을 두고는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에도 바울의 길이 완전히 막히지 않은 것은 그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14절의 부활 소망이 이 고백의 마지막 근거다.

9절의 두 쌍도 같은 구조를 따른다. 셋째 쌍에서 사도들은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는다(“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ἐγκαταλειπόμενοι, 엥카탈레이포메노이). 원문은 버리지 않는 주체를 밝히지 않지만, 7절이 능력을 하나님께 돌리므로 박해 가운데 사도들을 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넷째 쌍에서 사도들은 땅에 내던져지듯 쓰러져도(“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멸망하지 않는다(“망하지 아니하고”, ἀπολλύμενοι, 아폴뤼메노이). 이 멸망이 실제 죽음을 가리키는지, 적대자들이 사도의 사역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뜻인지는 이 문맥에서 확정하기 어렵다.2 바울은 자신이 상처 없이 지냈다고 말하지 않는다. 위협과 손상은 실제로 있었으나 복음을 섬기는 삶은 그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고난이 닥칠 때마다 사도들을 붙드신 일이 7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를 위한 죽음과 교회에 이르는 생명 (10-12절)

10절은 이 경험을 예수의 죽음과 생명으로 설명한다. 사도들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 “예수의 죽음”(τὴν νέκρωσιν τοῦ Ἰησοῦ, 텐 네크로신 투 이에수)에 쓰인 명사는 죽어 가는 과정이나 죽임당함을 가리킬 수 있다. 11절이 그 뜻을 풀어, 사도들이 예수를 위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10절의 “예수의 죽음”은 예수께서 당하신 죽임을 닮은 위험이 사역 내내 사도들의 몸에 따라다니는 현실을 가리킨다. 목적절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같은 절에서 “몸에”가 두 번 나오므로, 죽음의 위협을 받는 몸과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몸은 같은 몸이다. 예수의 생명은 8-9절의 고난 가운데 사도들이 무너지지 않고 사역을 이어 가는 데서 이미 드러난다.

11절은 10절을 풀어 설명한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죽음에 넘겨진다는 말은 살아 있는 사도들이 거듭 죽음의 위험에 내맡겨지는 현실을 가리킨다. 그 고난은 “예수를 위하여”(διὰ Ἰησοῦν, 디아 이에순) 생긴다. 4:5에서 사도들이 자신을 “예수를 위하여” 고린도 성도들의 종이라고 부를 때에도 원문은 같은 표현을 쓴다. 사도들은 예수 때문에 성도들을 섬기고, 같은 이유로 죽음의 위험에 넘겨진다. 8-9절의 고난은 이렇게 복음 사역에서 생긴 고난이다. 목적절은 10절을 되풀이하면서 몸을 “우리 죽을 육체”라고 부른다. 예수의 생명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바로 이 육체에 나타난다.

12절은 “그런즉”으로 10-11절의 결과를 말한다. 사망은 “우리 안에서”,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한다. 바울과 동역자들이 죽음의 위험을 감당하며 복음을 전하는 동안, 고린도 성도들은 그 복음으로 예수의 생명을 누린다. 사도들의 위험이 성도들의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은 사도들이 그 위험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1:6에서도 자신들이 환난을 당하는 것이 고린도 성도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믿음으로 말하게 하는 부활의 소망 (13-14절)

13절에서 바울은 시편을 인용하여 고난 중에도 계속 말하는 이유를 밝힌다.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ἐπίστευσα, διὸ ἐλάλησα, 에피스튜사, 디오 엘랄레사)는 칠십인역 시편 115:1의 문구이며, 개역개정 시편으로는 116:10에 해당한다. 바울은 그 시인과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한다. 개역개정이 “마음”으로 옮긴 πνεῦμα(프뉴마)는 ‘영’으로도 옮기는 단어다. 이 말이 사람의 믿음의 태도를 가리키면 바울은 시인과 같은 태도로 믿고 말한다는 뜻이 되고, 믿음을 일으키시는 성령을 가리키면 시인 안에서 믿음을 일으키신 성령께서 바울 안에서도 같은 믿음을 일으키신다는 뜻이 된다. 13절의 표현만으로는 두 읽기 가운데 하나로 정하기 어렵다.3 인용문의 두 동사는 과거의 일을 말하지만, 바울 자신의 말(πιστεύομεν, διὸ καὶ λαλοῦμεν, 피스튜오멘, 디오 카이 랄루멘)은 현재형이다.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로 옮겼지만, 원문은 지금 믿고 있으므로 지금 말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고통 중에 믿음을 고백한 시인의 말을, 지금 죽음에 노출된 채 복음을 말하는 근거로 삼는다. 고린도 성도들이 읽는 이 편지도 그 말하기에 속한다.

14절은 바울이 무엇을 알기에 믿고 말하는지 밝힌다. 바울은 하나님을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로 부르며, 그분이 “예수와 함께” 사도들도 다시 살리시고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서게 하실 것을 안다고 말한다. 1:9에서 바울이 의지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 여기서는 이미 예수를 살리신 분으로 불린다. 바울의 소망은 이미 일어난 예수의 부활에 근거한다. “서게 하실”(παραστήσει, 파라스테세이)은 누군가를 다른 이 앞에 세운다는 뜻이며, 개역개정은 “그 앞에”를 보충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장면으로 옮겼다. 두 번 나오는 “함께”는 사도의 부활을 예수의 부활에, 사도의 미래를 그가 섬긴 성도들의 미래에 묶는다. 죽음에 넘겨지는 사역자를 죽음이 최종적으로 삼키지 못하는 근거가 이 약속이다.

더 많은 사람에게 퍼지는 은혜와 감사 (15절)

15절의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는 8절부터 말한 고난과 13-14절의 믿음과 말함이 모두 고린도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어지는 목적절에서 원문의 주어는 “은혜”(ἡ χάρις, 헤 카리스)다. 은혜는 “더 많은 사람들을 통하여”(διὰ τῶν πλειόνων, 디아 톤 플레이오논) 더해지고, 대격 “감사”(τὴν εὐχαριστίαν, 텐 유카리스티안)는 동사 περισσεύσῃ(페리세우세)의 목적어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15절의 목적절은 은혜가 더 많은 사람에게 퍼지면서 감사를 넘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는 뜻이다.4 개역개정의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는 감사를 은혜가 넘치는 수단으로 옮겼다. 원문의 문장에서는 은혜가 사람들에게 미치고, 그 은혜가 감사를 낳는다. 1:11에서 바울은 사도들이 받는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감사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사가 감사의 근거다. 바울의 사역은 교회의 유익을 향하고, 그 유익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영광으로 이어진다.5

낡아지는 겉사람과 새로워지는 속사람 (16절)

16절의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는 4:1의 “낙심하지 아니하고”와 같은 원어 표현(οὐκ ἐγκακοῦμεν, 우크 엥카쿠멘)을 되풀이한다. 8절의 “낙심하지 아니하며”와는 우리말이 같지만 원어가 다르다. 4:1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로 직분을 받았기에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16절에서는 14-15절의 부활 소망과 은혜의 목적을 근거로 같은 고백을 다시 한다. 바울은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말한다. 두 동사가 모두 현재형이므로, 쇠약함과 갱신은 지금 동시에 진행된다. 겉사람은 앞에서 말한 고난과 죽음에 노출된 몸의 삶을 포함하고, 속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새롭게 하시는 삶을 가리킨다. 이 구분을 몸은 버려지고 내면만 남는다는 뜻으로 읽을 수는 없다. 14절은 하나님이 사도들을 다시 살리신다고 말하며, 바울에게 부활은 죽을 몸의 미래를 포함한다.

잠시의 환난과 영원한 영광 (17-18절)

17절은 낙심하지 않는 이유를 더 설명한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은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과 짝을 이룬다. 잠시와 영원, 가벼움과 무게가 서로 대응한다. “지극히 크고”(καθ’ ὑπερβολὴν εἰς ὑπερβολὴν, 카트 휘페르볼렌 에이스 휘페르볼렌)는 7절에서 능력의 탁월함을 말한 명사를 두 번 겹쳐 비교할 수 없는 크기를 표현한다. 1:8에서 바울은 아시아에서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라고 말했는데, 원문에서 “심한”에 해당하는 말도 같은 καθ’ ὑπερβολὴν(카트 휘페르볼렌)이다. 그렇게 짓눌렸던 사람이 이제 자기 환난을 가볍고 잠시라고 부르는 것은, 그 환난을 장차 받을 영광의 무게와 기간에 견주기 때문이다.6 앞에서 낱낱이 말한 고난의 현실은 이 비교 안에서도 지워지지 않는다. 바울은 환난이 영광을 “이루게”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환난은 예수를 위하여 사역하다 겪는 고난이고(11절), 그 영광을 주시는 분은 사도들을 다시 살리실 하나님이다(14절).

18절은 17절에 이어지는 분사구(μὴ σκοπούντων ἡμῶν, 메 스코푼톤 헤몬)로, 환난이 영광을 이루는 동안 사도들이 무엇을 주목하는지 밝힌다.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라는 독립된 문장으로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이 주목이 17절과 한 문장을 이룬다. 바울이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는 까닭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에는 사도의 쇠약한 몸과 8-9절의 환난이 포함되고, 보이지 않는 것은 14절의 부활과 성도들과 함께 서게 될 일, 17절의 영광이다. 사도는 그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의 환난 속에서도 복음을 말한다.

성경신학적 통찰

고통 중에 믿고 말한 시편 116편의 시인

13절이 인용한 시편 116편은 죽음의 위협에서 건짐받은 사람이 드리는 감사의 시다. 시인은 사망의 위협 가운데 여호와께 생명을 건져 달라고 기도했고(시 116:3-4), 하나님이 그를 사망과 눈물과 넘어짐에서 건지셨다고 고백한다(시 116:8).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는 이 구출의 고백 안에 있다. 개역개정 시편 116:10에서 시인은 크게 고통을 당했다고 말할 때에도 믿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믿음은 고통을 감추지 않고 고통 중에 하나님께 말한다. 시인이 죽음의 위협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했듯이, 사도들은 예수를 위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지면서 믿고 말한다(11, 13절).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께 두는 신뢰

시인은 구출을 받은 뒤 살아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겠다고 말한다(시 116:9). 바울의 신뢰는 그보다 더 멀리 나아간다. 바울이 믿는 하나님은 이미 주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14절). 그래서 바울은 죽음의 위험에서 다시 건져지는 일만 기대하지 않고, 죽음에 이르더라도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자신을 다시 살리실 것을 안다. 1:9-10에서 바울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큰 사망에서 건지신 일을 고백했다. 14절은 그 하나님을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분으로 부르고, 소망을 부활과 하나님 앞에 서는 일까지 넓힌다. 시인은 죽음에서 건져 주실 하나님을 신뢰했고, 바울은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죽음 너머에서도 자신을 일으키실 것을 신뢰한다.

은혜에 응답하는 공동체의 감사

시편 116편의 감사는 공동체 앞에서 드려진다. 시인은 모든 백성 앞에서 서원을 갚고 감사제를 드리겠다고 말하며(시 116:14, 17-18), 성전 뜰과 예루살렘을 언급한다(시 116:19). 15절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한 사람의 구출에서 끝나지 않고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감사를 넘치게 한다. 14절은 사도와 고린도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 앞에 서는 미래를 말하고, 15절은 그 은혜를 받은 여러 사람이 지금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말한다.

감사가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는 관계는 같은 편지의 다른 대목에서도 나타난다. 1:10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큰 사망에서 사도들을 건지셨다고 고백하고, 앞으로도 건지시기를 바란다. 이어 1:11에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간구로 함께 돕기를 청하면서, 사도들이 받는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감사하게 하려는 목적을 밝힌다. 그 감사는 바울이 앞으로 기대하는 일이지만, 감사의 근거는 하나님이 사도들에게 베푸시는 은사다. 9:8-15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고, 그 은혜를 받은 고린도 성도들의 너그러운 연보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와 영광으로 이어진다. 연보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간구한다(9:14). 세 대목 모두에서 감사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에 근거하고,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드려진다. 시편 116편의 감사제가 구출을 경험한 사람의 응답이었듯, 고린도후서의 감사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부활의 영광에 비추어 본 현재의 고난

17절의 환난과 영광의 비교도 이 부활 신앙에서 나온다. 시인의 고통은 구출로 끝났지만, 바울은 겉사람이 계속 낡아 가는 현실을 인정한다(16절). 로마서 8:18에서 바울은 현재의 고난을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하고, 8:23에서는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은 신자들도 탄식하며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17절과 로마서 8:18에서 바울은 고난을 부정하지 않고, 고난이 끝나지 않은 현재를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평가한다. 그 영광은 몸의 회복을 포함한다. 고린도전서 15:43에서 바울은 부활의 몸이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다. 17절의 영원한 영광도 14절의 부활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낡아 가는 몸을 지닌 채로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본다(18절).

기독론적 해석

질그릇에 담긴 그리스도의 영광

7절의 보배는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다. 4:4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르고, 4:6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한다. 사도의 몸은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지만, 그가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은 그 연약함 때문에 줄어들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운 주님이시기에, 바울은 자기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사람들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돌린다.

그리스도의 대속과 구별되는 사도의 고난

10-11절은 “예수”라는 이름을 네 번 되풀이한다. 사도가 몸에 짊어지는 죽음도, 몸에 나타나는 생명도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께 속한다. 사도들은 예수를 위하여 복음을 섬기다가 죽음의 위험을 겪고, 부활하신 예수의 생명이 그 위험 속에서 그들을 붙든다. 그러나 사도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는 일이 다르다. 5:14-15에서 바울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고, 그 목적은 살아 있는 자들이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대신 죽음이고, 사도의 고난은 그 죽음으로 살게 된 사람이 그분을 위하여 사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다.

이 구별은 12절의 생명을 이해하는 데에도 필요하다. 고린도 성도들 안에 역사하는 생명은 예수의 생명이며,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통해 그들에게 이르렀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전파하고(4:5), 믿기에 말하며(13절),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11절). 그래서 교회는 사도의 희생에 매이지 않고, 사도를 통하여 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응답한다. 15절은 그 응답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 설명한다.

예수와 함께 일으키시고 교회와 함께 세우심

14절은 예수의 부활과 사도들의 미래를 묶는다. 하나님은 주 예수를 이미 다시 살리셨고, “예수와 함께” 사도들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미 살아나셨으므로 이 “함께”는 같은 때를 가리키지 않는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20-23에서 그리스도를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부르고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그분이 오실 때 살아난다고 말하듯이, 사도들의 부활은 예수의 부활에 속하여 그 뒤를 따른다. 지금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사람이(10절) 장차 예수의 부활에 참여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세우신다. 부활의 미래에서도 사도는 자신이 섬긴 교회와 함께 하나님 앞에 선다. 사역의 목적이 교회의 생명이었듯이(12절), 그 사역의 마지막에도 교회가 사도와 함께 있다.

그리스도께 속한 갱신과 영광

16-17절의 갱신과 영광도 그리스도께 속한 미래에서 의미를 얻는다. 3:18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주의 영광을 보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고, 그 변화가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했다. 4:4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른다. 그러므로 겉사람이 낡아 가는 동안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일은, 주의 영께서 성도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는 일과 이어진다. 17절의 영원한 영광도 14절이 말하는 예수와 함께 일으킴받는 미래를 떠나 설명할 수 없다. 바울이 자기 환난을 가볍고 잠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살아나신 예수께서 그 미래의 근거가 되시기 때문이다.

현대적 적용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복음 사역

교회가 맡은 보배는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는 복음이다. 바울은 자신을 전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전파하며, 자신들은 예수를 위하여 교회의 종이라고 말한다(4:5). 오늘의 설교와 가르침에서도 먼저 들려야 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죽음과 부활이다. 복음을 맡은 사람에게 사람들의 주목이 쏠릴 때에도 그가 가리킬 분은 그리스도다.

고난을 숨기지 않는 믿음의 고백

8-9절은 눌림과 답답함, 박해와 넘어짐을 숨기지 않는다. 13절에서 바울이 인용한 시인도 크게 고통을 당했다고 말하면서 믿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나누는 믿음의 고백에는 고난을 이겨 낸 이야기뿐 아니라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는 말도 들어간다. 17절에서 환난을 가볍고 잠깐이라고 부르기 전에 바울은 자기 몸에 닥친 압박과 박해와 죽음의 위협을 자세히 말했다. 그 비교는 바울이 자기 환난을 두고 한 고백이다. 아직 일어난 일을 말하기도 어려운 사람에게 고난을 빨리 가볍게 여기라고 재촉하면 상처를 더할 수 있다.

섬기는 사람의 소모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교회

12절의 사망과 생명의 대비를 교회가 사역자의 소모를 당연하게 여기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교회가 받은 생명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이다. 바울은 1:11에서 성도들이 간구로 자신들을 돕기를 바라고, 15절에서는 은혜가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감사가 넘치기를 바란다. 교회는 복음을 섬기다 지친 사람을 위해 간구하고, 그를 붙드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부활의 약속으로 보는 오늘의 쇠약과 손실

바울의 고난은 예수를 위하여 복음을 섬기다 받은 고난이다(11절). 오늘 성도가 겪는 질병이나 노화, 상실을 모두 이 고난과 같은 것으로 부를 수는 없고, 모든 손상과 소모가 영광을 얻는 조건이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11절에서 “죽을 육체”라고 부른 몸의 조건은 모든 신자에게 해당하고, 14절의 부활 약속은 “너희와 함께”라는 말로 고린도 성도들을 포함한다. 몸이 약해져 이전처럼 활동하지 못하는 성도도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일으키실 사람이다. 16절에서 속사람의 갱신은 바울이 몸의 쇠약함을 인정하는 중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려고 먼저 활기 있는 모습을 회복할 필요는 없다.

18절에서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말한다. 어려운 일을 겪는 사람은 지금 눈에 보이는 손실이 자기 삶 전체를 결정한다고 느끼기 쉽다. 교회는 그 사람에게 고통을 부정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그를 예수와 함께 일으키시고 교회와 함께 세우실 약속을 함께 붙든다. 그 약속을 붙드는 사람은 지금의 손실을 자기 삶에 대한 마지막 판단으로 여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