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어리석은 자랑을 용납해 달라는 요청 (1절)

바울은 자신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해 달라는 소원으로 말을 시작한다(1절). “어리석은 것”(ἀφροσύνης, 아프로쉬네스)은 분별을 잃은 상태를 가리키며, 바울은 11:17과 11:21에서도 같은 말로 자신의 자랑을 어리석다고 부른다. 1절 후반의 동사(ἀνέχεσθέ, 아네케스테)는 형태로는 “너희가 이미 나를 용납하고 있다”는 서술로도 읽을 수 있고, 이 읽기도 문맥에 어울린다. 그러나 앞의 소원에 이어지는 흐름에는 개역개정처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는 요청으로 읽는 편이 조금 더 잘 맞는다.1 10장에서 바울은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비교하며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10:12). 이제 그는 그들이 즐겨 쓰는 자랑의 방식을 빌려 자기 사역을 설명해야 하므로 먼저 양해를 구한다.

한 남편께 정혼시킨 사도의 열심 (2절)

2절은 이 요청의 이유를 밝힌다. 바울은 성도들을 위하여 열심을 내며(ζηλῶ, 젤로), 그 열심을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부른다. 혼인 비유와 함께 쓰인 이 열심은 정혼한 상대가 다른 이에게 마음을 주지 않기를 바라는 질투의 성격을 띤다. 바울은 성도들을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ἑνὶ ἀνδρὶ, 헤니 안드리)이신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하였다. “중매함이로다”(ἡρμοσάμην, 헤르모사멘)는 신부를 신랑과 짝지어 준 일을 가리키며, 바울은 고린도에 복음을 전해 교회를 세운 일을 이 정혼으로 그린다. 그의 자리는 정혼한 딸이 혼인 날까지 신랑에게 신실하도록 지켜보는 아버지와 비슷하다.2

바울이 신부를 “드리려고”(παραστῆσαι, 파라스테사이) 하는 때는 정혼 뒤에 올 혼인 날이며, 그날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3 정혼과 혼인 사이에는 기다리는 기간이 있고, 3절의 두려움은 그 기간에 신부가 마음을 빼앗길 위험에 관한 것이다. “정결한 처녀”(παρθένον ἁγνὴν, 파르테논 하그넨)는 단수이지만 바울이 드리려는 “너희”는 복수다. 바울은 여러 성도로 이루어진 공동체 전체를 한 신부로 그리스도께 드린다. 사도는 신랑의 자리에 서지 않으며, 성도들이 자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신실하도록 지킨다.

하와의 미혹과 다른 복음을 용납하는 교회 (3-4절)

그러나 바울은 두려워한다. 뱀이 그 “간계”(πανουργίᾳ, 파누르기아)로 하와를 미혹한 것처럼 성도들의 “마음”(νοήματα, 노에마타)이 부패할까 염려한다. 여기서 “마음”은 감정보다 생각과 판단을 가리킨다. 뱀의 말이 하와의 판단을 흔들었듯이, 그럴듯한 가르침이 교회의 판단을 흐려 그리스도께 대한 신실함에서 떠나게 할 수 있다. 성도들의 생각이 떠나지 말아야 할 “진실함”(ἁπλότητος, 하플로테토스)은 둘로 나뉘지 않고 한 대상을 향하는 온전한 헌신이다.4 바울은 이 진실함과 “깨끗함”(ἁγνότητος, 하그노테토스)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5 이 헌신은 2절의 “한 남편”과 어울려, 교회가 그리스도 한 분께 마음을 드려야 함을 밝힌다.

4절은 그 위험이 무엇인지 밝힌다. “누가 가서”로 옮긴 말(ὁ ἐρχόμενος, 호 에르코메노스)은 ‘오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고린도 바깥에서 교회로 들어온 사람을 가리킨다. 추천서를 주고받는 어떤 사람들에 관한 언급(3:1)과 남의 수고로 자랑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말(10:15-16)에 비추어 보면, 문제의 가르침은 외부에서 온 교사들과 관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사람이 가져오는 것은 “다른 예수”(ἄλλον Ἰησοῦν, 알론 이에순)와 “다른 영”(πνεῦμα ἕτερον, 프뉴마 헤테론)과 “다른 복음”(εὐαγγέλιον ἕτερον, 유앙겔리온 헤테론)이다. 바울은 각 표현에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너희가 받지 아니한”을 붙여, 고린도 교회가 처음 받은 복음을 다름을 재는 기준으로 삼는다. 그 복음의 중심은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전파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1:19). 본문은 새 가르침의 조항을 밝히지 않지만, 그것이 예수와 영과 복음에 관하여 이미 받은 내용을 바꾸는 가르침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성도들은 그것을 “잘 용납하는구나”(καλῶς ἀνέχεσθε, 칼로스 아네케스테). 칭찬처럼 들리는 이 “잘”은 반어다. 성도들은 자기들을 세운 사도에게는 양해를 구하게 하면서 다른 복음은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과 바울의 지식 (5-6절)

5절에서 바울은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τῶν ὑπερλίαν ἀποστόλων, 톤 휘페를리안 아포스톨론)보다 자신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극도로’를 뜻하는 부사가 붙은 이 호칭은 반어이며, 이들이 누구인지는 논쟁이 많지만 4절에서 다른 복음을 가져온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이 가장 개연성이 높다.6 이 호칭을 열두 사도에게 돌리는 해석도 있으나, 그렇게 읽으면 다른 복음을 다루는 4절과 경쟁자들을 다루는 12-15절 사이의 논증이 끊긴다. 13절은 바로 이 사람들을 “거짓 사도”라고 부른다.7 바울은 그들의 이름이나 출신, 가르침의 세부 내용을 밝히지 않는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그들의 높은 평판 때문에 자신이 전한 복음이 열등하게 여겨지는 일이다.

6절에서 바울은 “말에는 부족하나”(ἰδιώτης τῷ λόγῳ, 이디오테스 토 로고)라고 인정한다. ἰδιώτης(이디오테스)는 어떤 분야의 전문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며, 여기서는 수사학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연설가가 아니라는 뜻이다.8 10:10에서 어떤 이들은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바울은 그 평가를 일단 받아들이지만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답한다. 이 지식은 그가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앎이며, 그는 그것을 모든 일로 성도들에게 나타내었다. 성도들이 바울을 판단할 근거는 그들이 이미 받은 가르침과 그들 가운데서 이루어진 바울의 사역에 있다.

값없이 전한 복음과 다른 교회들의 지원 (7-11절)

7절의 반문은 재정 문제를 꺼낸다. 바울은 성도들을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ἐμαυτὸν ταπεινῶν, 에마우톤 타페이논)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전한 것이 죄였느냐고 묻는다. 이 낮춤은 생계를 위해 손으로 일하기까지 한 일을 가리킨다.9 바울은 사례를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한 것을 성도들을 위한 선택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런 반문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그 선택이 오히려 그의 사역을 낮게 보는 이유가 되었음을 보여 준다.

8절에서 바울은 다른 여러 교회에서 비용을 받은 일을 “탈취한 것”(ἐσύλησα, 에쉴레사)이라고 부른다. 약탈한다는 뜻의 강한 동사지만, 바울이 실제로 다른 교회를 강탈했다는 뜻은 아니다. 고린도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 다른 교회들의 지원을 받은 일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다.10 “비용”(ὀψώνιον, 옵소니온)은 삯이나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가리킨다.11 고린도에서 값없이 이루어진 사역 뒤에는 다른 교회들의 나눔이 있었다.

9절은 그 지원의 경위를 밝힌다.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며 비용이 부족하였을 때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κατενάρκησα, 카테나르케사) 않은 것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그 부족을 보충했기 때문이다. 이 생활 지원은 8-9장에서 바울이 권하는 연보와 구별된다. 그 연보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해 여러 교회가 모으는 것이고(롬 15:25-26), 9절의 지원은 고린도에서 사역하던 바울의 생계를 위한 것이었다. 9절 끝에서 바울은 모든 일에 폐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하였고 또 조심하리라”고 말하며, 이 방침을 앞으로도 지키겠다고 밝힌다.

10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라고 엄숙하게 확언하며, 값없이 복음을 전하는 “나의 이 자랑”이 아가야 지방에서 막히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아가야는 고린도가 속한 지역이다(1:1). 11절에서 그는 그 까닭이 성도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냐고 되물은 뒤 “하나님이 아시느니라”라고 답하며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른다. 이 반문은 사례를 받지 않는 선택이 사랑의 부족으로 오해받았음을 보여 준다. 12:14에서도 바울은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라고 말한다.

기회를 찾는 자들의 구실을 끊음 (12절)

12절은 이 방침을 앞으로도 지키려는 또 다른 이유를 밝힌다. 바울은 “기회를 찾는 자들”의 “기회”(ἀφορμήν, 아포르멘)를 끊으려 한다. 이 말은 어떤 일을 시작할 발판이나 구실을 뜻한다. 경쟁자들은 자기들이 자랑하는 일에서 바울과 같은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12 그들은 고린도 교회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1:20 참조).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례를 받기 시작하면 그들은 바울도 자기들과 같은 방식으로 사역한다고 내세울 수 있다. 바울이 계속 값없이 섬기면 그 주장은 근거를 잃는다.13

자기를 가장하는 거짓 사도들과 그 마지막 (13-15절)

13절은 그 경쟁자들을 “거짓 사도”(ψευδαπόστολοι, 프세우다포스톨로이)이며 “속이는 일꾼”(ἐργάται δόλιοι, 에르가타이 돌리오이)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μετασχηματιζόμενοι, 메타스케마티조메노이) 사람들이다. 이 동사는 겉모습을 바꾸어 실제와 다른 존재로 보이게 하는 행동을 가리키며, 14-15절에서 두 번 더 쓰인다. 14절에서 바울은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라고 말하고, 15절에서 사탄의 일꾼들이 자기를 “의의 일꾼”(διάκονοι δικαιοσύνης, 디아코노이 디카이오쉬네스)으로 가장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라고 결론짓는다. 사탄조차 하나님께 속한 빛의 사자처럼 보일 수 있다면, 그의 일꾼들이 의로운 사역자처럼 보이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빛나 보이는 모습이나 의로워 보이는 태도만으로는 그 사람이 하나님께 속했는지 판단할 수 없다. “의의 일꾼”이라는 말은 바울이 3:9에서 자기가 맡은 새 언약의 사역을 “의의 직분”이라고 부른 것을 떠올리게 한다. 거짓 일꾼들은 그런 직분의 모습을 빌려 입는다.

15절 끝에서 바울은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 선언한다. 그들의 “마지막”(τὸ τέλος, 토 텔로스)은 지금 내세우는 이름이나 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행한 일에 따라 정해진다. 사도라는 칭호와 의로워 보이는 외양은 그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없애지 못한다.

교회가 용납하는 사람들 (1, 4절과 11:19-20)

1절에서 바울은 자기를 용납해 달라고 청했고, 4절에서는 다른 복음을 잘 용납하는 교회를 꼬집었다. 바로 뒤의 11:19-20에서도 그는 성도들이 자신들을 종으로 삼고 잡아먹고 빼앗고 스스로 높이고 뺨을 치는 사람까지 용납한다고 말한다. 같은 동사가 되풀이되면서, 교회가 누구를 용납하고 누구를 거절하는가 하는 문제가 이 대목 전체를 꿴다.

성경신학적 통찰

뱀의 미혹과 교회 전체를 향한 경고

창세기 3:1-13은 바울이 3절에서 직접 불러오는 미혹의 이야기다. 뱀은 먼저 질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고, 이어서 하나님이 경고하신 죽음을 부정하며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말한다(창 3:1, 4). 하나님이 물으시자 하와는 뱀이 자신을 꾀었다고 대답한다(창 3:13). 뱀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틀어 다른 말을 믿게 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해 두려워하는 일도 이와 닮았다.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은 예수와 복음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면서 처음 받은 내용을 바꾼다. 하와가 비틀린 말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듯이, 교회도 바뀐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에서 떠날 수 있다(3절).

바울은 3절에서 하와만 언급하지만, 창세기에서 하와와 아담은 모두 열매를 먹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행동에 대답한다. 하와의 예는 2절의 신부 비유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며, 바울은 이 예로 여성의 결함을 말하지 않는다. 경고는 남녀를 포함한 교회 전체를 향한다. 한 신부 안에 모든 성도가 들어 있고, 부패할 위험에 처한 것도 그 공동체 전체의 생각이다.

여호와를 남편으로 그린 선지서의 언약

선지서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혼인에 빗대어 신실함을 요구한다. 호세아 2장에서 이스라엘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준 이가 여호와이심을 알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더하여 주신 은과 금을 바알을 위하여 썼다(호 2:8).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백성을 광야로 이끌어 다시 말씀하시고, 그들이 자신을 다시는 ‘바알’이 아니라 ‘남편’이라 부르게 하시며,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과 진실함으로 그들에게 영원히 장가들겠다고 약속하신다(호 2:14-20). 이사야 54:5-8에서도 선지자는 버림받은 아내 같은 백성에게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고 말하며, 여호와께서 큰 긍휼로 그들을 다시 모으시겠다고 약속한다. 두 본문에서 백성의 신실함은 먼저 은혜를 베풀고 회복하시는 남편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이 본문들에서 남편의 자리에 계신 분은 여호와이시다. 고린도후서 11:2에서 바울은 그 자리에 그리스도를 두고,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한 언약적 충성을 이방 도시의 교회에도 요구한다.

이미 전하고 받은 복음이라는 기준

갈라디아서 1:6-9는 다른 복음을 직접 다룬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를 떠나 다른 복음으로 옮겨 가는 교회를 책망하고, 자기나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이미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한다(갈 1:8-9). 고린도후서 11:4에서도 바울은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너희가 받지 아니한”이라는 말로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가려낸다. 두 편지에서 판단의 기준은 전하는 사람의 권위가 아니라 이미 전하고 받은 복음이다. 고린도후서 11:14의 광명의 천사도 같은 점을 보여 준다. 천사처럼 빛나 보이는 모습도, 사도라는 칭호도 메시지의 참됨을 보증하지 못한다. 사도인 바울 자신도 그 복음에 매여 있다.

복음으로 살 권리와 그 권리를 쓰지 않은 바울

재정 문제(7-12절)는 바울이 같은 교회에 먼저 보낸 고린도전서 9장을 배경으로 한다. 고린도전서 9:7-14에서 바울은 군인과 농부와 목자의 예, 율법과 성전 봉사의 예를 들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으로 살 권리가 있으며 주께서도 그렇게 명하셨다고 말한다. 이어 9:12과 9:15-18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려고 그 권리를 쓰지 않고 값없이 복음을 전한다고 밝힌다. 고린도후서 11:7-12는 이 방침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어떻게 오해받았는지 보여 준다. 바울은 사역자가 지원을 받을 권리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고린도에서 그 권리를 쓰지 않았고, 그동안 다른 교회들의 도움으로 생활했다.

기독론적 해석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와 중매하는 사도

교회가 신실해야 할 분은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다(2절). 교회가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친히 이루시는 그리스도이시다. 1:19-20에서 바울은 자신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전파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모두 “예”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다른 예수를 전하는 가르침은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시는 바로 그분에게서 교회를 떼어 놓는다. 바울은 복음을 전해 성도들을 그분께 정혼시키고 그 관계를 돌보지만, 신랑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에베소서 5:25-27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자기 내어 주심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셨고, 말씀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시며,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려 하신다. 교회의 정결은 신랑이 먼저 베푸신 이 사랑에서 시작된다. 에베소서에서 교회를 자기 앞에 세우시는 분은 그리스도 자신이시며, 고린도후서 11:2에서 바울은 그 일을 섬기는 중매자의 자리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신다면, 그분을 섬기는 사람은 그분에 관한 참된 복음을 교회에 들려주어야 한다.

다른 예수와 다른 영을 분별하는 기준

“다른 예수”라는 경고(4절)는 교회가 선포하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묻는다. 바울이 전한 예수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이며, 그분의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한다(5:14-15). 예수라는 이름을 쓰더라도 그분의 죽음과 부활, 그분이 부르시는 삶의 내용이 바뀌면 성도들이 받은 복음과 어긋난다. 4:5에서 바울은 자신을 전파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심을 전파하며, 자신은 예수를 위하여 성도들의 종이 되었다고 말한다. 참된 예수를 전하는 사람은 주인의 자리에 서지 않고 성도들을 섬긴다.

4절은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 사이에서 “다른 영”도 경고한다. 1:21-22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사도와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고 말하며, 3:18은 성도들이 주의 영광을 보며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고 말한다. 성령은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세우시고 그분을 닮게 하신다. 그러므로 영적인 체험이나 능력을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다른 길로 이끄는 가르침은 성령께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밝혀진 빛과 의

14-15절의 광명의 천사와 의의 일꾼은 겉모습이 사람을 속일 수 있음을 경고한다. 고린도후서는 참된 빛과 의를 그리스도 안에서 밝힌다. 4:6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 말한다. 5:21에서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셔서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고 말한다. 바울이 맡은 “의의 직분”(3:9)은 이 의를 전하는 직분이다. 그러므로 빛나 보이는 모습이나 의로워 보이는 태도는 그 자체로 증거가 되지 못한다. 교회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영광과 의를 바르게 전하는지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의로움을 내세우면서 성도들을 속이거나 이용하는 사역은 죄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복음과 충돌한다.

부활의 소망과 혼인 날

2절에서 바울이 바라보는 혼인 날은 부활의 소망과 이어진다. 4:14에서 바울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παραστήσει, 파라스테세이) 줄을 안다고 말한다. “서게 하실”은 2절의 “드리려고”와 같은 동사다. 성도들을 그 앞에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이 이미 예수를 살리셨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 소망을 품고 교회가 그날 정결한 신부로 서도록 지금 수고한다. 성도들도 새 가르침이 약속하는 유익 앞에서 이미 받은 소망을 붙들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따른 재정 선택

10절의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라는 확언은 바울의 재정 선택을 그리스도 앞에 세운다. 바울은 다른 교회들의 지원을 받은 사실과 자신의 부족도 감추지 않는다(8-9절). 그리스도의 진리는 무엇을 전하느냐뿐 아니라 돈을 다루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도 미친다. 자기를 낮추어 성도들을 높이려 한 바울의 선택(7절)은, 부요하신 이로서 성도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셔서 그들을 부요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8:9)와 같은 방향을 향한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고, 사도는 그 복음이 값없이 사람들에게 이르도록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는다. 사역자가 지원을 받는 일 자체는 정당하다(고전 9:14). 그러나 11:20에서 바울이 말하듯 성도들을 종으로 삼고 빼앗고 스스로 높이는 사역은 이 은혜와 반대 방향으로 간다.

행위대로 받는 그리스도의 심판

15절의 마지막 선언은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자처하는 사람도 결국 주님 앞에 서야 함을 밝힌다. 바울은 5:10에서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했다. 이 심판에는 바울 자신도 성도들도 포함된다. 거짓 일꾼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는 경고도 이 심판을 바라본다. 사역의 지위와 종교적인 명성은 그 책임을 없애지 못한다. 바울의 열심은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가 그분 앞에 신실하게 서는 날을 향한다.

현대적 적용

받은 복음으로 새 가르침을 살핌

새로운 가르침을 들을 때 교회는 누가 말하는지보다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바울이 다름을 재는 기준으로 삼은 것은 성도들이 처음 받은 복음이었다(4절). 이름이 알려졌거나 말솜씨가 뛰어나거나 모임의 규모가 크다는 사실은 메시지의 참됨을 보증하지 못한다. 예수라는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교회는 그 가르침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 죄와 은혜, 주님께 대한 순종을 어떻게 말하는지 성경에 비추어 확인해야 한다. 영적인 체험이나 특별한 깨달음을 내세우는 말도 마찬가지다. 4절이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한 문장에서 경고하므로, 그 체험이 그리스도를 더 알게 하고 그분을 따라 살게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스도께만 드리는 교회 전체의 충성

혼인 비유는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성별과 나이와 역할이 달라도 모든 성도가 한 신부로서 주님께 신실해야 한다. 하와의 예를 여성이 더 쉽게 속는다는 근거로 쓰거나, “정결한 처녀”라는 그림을 특정한 사람의 성적 과거를 들추어 수치심을 주는 데 써서는 안 된다. 이 비유가 말하는 정결은 그리스도께 대한 한결같은 신실함이며, 그 정결은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은 특정 지도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의와 다르다. 바울은 교회를 자기에게 묶지 않고 그리스도께 드리려 했으며, 1:24에서는 성도들의 믿음을 주관하지 않고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한다고 말했다. 지도자의 가르침이나 재정 사용이나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묻는 성도에게 그리스도를 떠났다고 말하면, 사역자가 신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사역자는 교회를 그리스도께 이어 주는 사람이며, 교회가 충성을 바칠 대상은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값없는 사역과 그 비용을 감당한 섬김

바울은 고린도에서 사례를 받지 않았지만 다른 교회들에게서 생활에 필요한 지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사례를 받는 사역을 낮게 평가할 수 없다. 사역자가 복음을 위해 스스로 권리를 내려놓는 선택과 공동체가 사역자의 생활을 책임지는 일은 둘 다 정당하며, 서로 구별된다. 값없이 이루어지는 사역에도 누군가의 비용과 수고가 들어간다. 바울은 자신의 부족을 마게도냐의 형제들이 채웠다고 밝혔다. 무료라는 말이 뒤에서 비용을 감당한 사람들의 섬김을 가려서는 안 된다. 또 바울은 경쟁자들이 바울과 같은 자격을 내세울 구실을 막으려고 재정 방침을 지켰다(12절). 사역자는 돈을 받고 쓰는 방식이 복음의 신뢰를 지키는지 살펴야 한다.

복음의 내용과 실제 행위에 따른 판단

이 본문의 강한 경고를 이용해 의견이 다른 사람을 곧바로 사탄의 일꾼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바울이 거짓 사도라고 부른 사람들은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전하고, 사도의 이름을 내세우며 성도들을 이용한 이들이었다. 교회는 그런 판단을 사람에 대한 호불호나 사소한 이견에 쓰지 말고, 전하는 복음의 내용과 실제 행위에 근거해 내려야 한다.

15절은 거짓 일꾼들의 마지막이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 말한다. 사도라는 이름과 의로워 보이는 모습은 그들의 실제 행위에 대한 책임을 없애지 못한다. 오늘의 사역자도 직분과 평판과 영적 경력으로, 자기가 가르친 내용과 사람과 돈을 다룬 방식에 대한 책임을 덮을 수 없다. 바울은 사랑을 의심받을 때 하나님을 증인으로 불렀고(11절), 자신의 재정 방침과 다른 교회들에게서 받은 지원을 숨기지 않고 설명했다(8-9절). 그리스도 앞에 설 사역자는 자기 말과 행동이 검토받는 일을 피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