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우리를 받아들이라는 호소와 넘치는 기쁨 (2-4절)

2절은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Χωρήσατε ἡμᾶς, 코레사테 헤마스)는 명령으로 시작한다. 이 동사는 본래 자리를 내어 준다는 뜻이며, 원문에는 “마음”이라는 명사가 없다. 개역개정이 보충한 “마음으로”는 6:11-13의 문맥에 맞는다. 그곳에서 바울은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라고 말한 뒤,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성도들에게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청했다. 6:14-7:1의 거룩한 삶에 관한 권면을 마친 바울은 그 호소로 돌아온다. 받아들여야 할 “우리”에는 바울과 함께 사역한 사람들이 포함된다.

이어 바울은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고 항변한다. 원문은 세 문장 첫머리에 “아무에게도”를 되풀이하여 자신들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강조한다. 세 동사는 차례로 불의를 행함, 손상시키거나 무너뜨림, 남을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취함을 가리킨다. 셋째 동사는 편지 뒷부분에서 디도와 관련해 다시 나온다. 12:16-18에서 바울은 자신이 속임수로 교회를 취했다는 말에 답하면서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라고 묻는다. 2절의 항변도 이러한 의심을 염두에 둔 말로 읽을 수 있다. 바울은 성도들의 회개를 말하기 전에 자기 행동부터 밝힌다.

3절에서 바울은 이 항변이 교회를 고발하는 말로 들리지 않도록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들이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말하면 교회가 사도들을 부당하게 의심했다는 결론이 따라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라고 하며 6:11-13에서 넓어진 마음을 고백한 말을 다시 꺼내고, 그 목적을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고 밝힌다. 많은 학자는 이 표현을 변치 않는 우정을 나타내는 잘 알려진 문구로 보며, 이 문맥에도 그 뜻이 잘 맞는다.1 바울은 죽든지 살든지 어떤 형편에서도 성도들과 갈라서지 않겠다고 말한다. 2절의 항변도 이 애정에서 나온 말이다.

4절은 짧은 네 문장으로 바울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는 성도들을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그들을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숨김없이 말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들을 자랑한다. 이 자랑은 14절에서 디도에게 했던 자랑으로 다시 나온다. 이어 그는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친다고 고백한다. 이 기쁨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생겼다. 1:4에서 바울은 원문에서 같은 표현인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했는데, 이제 그 위로를 자기 경험으로 말한다. 4절이 결과를 먼저 말하고, 5절부터는 그 위로와 기쁨이 어떻게 찾아왔는지를 풀어 간다.

마게도냐의 환난과 디도를 통한 위로 (5-7절)

5절은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라는 말로 4절의 기쁨이 어디에서 왔는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2:12-13에서 바울은 드로아에서 복음의 문이 열렸는데도 디도를 만나지 못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마게도냐로 갔다고 말했다. 그 여행 이야기는 2:14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 넘어갔다가 여기서 다시 이어진다. 2:13의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와 5절의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는 원문에서도 쉼을 얻지 못했다는 같은 표현이다. 다만 2:13에서는 바울의 영이, 5절에서는 육체가 쉼을 얻지 못했다. 여기서 “육체”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본성이 아니라 지치고 쉼이 필요한 인간의 몸과 존재를 가리킨다. 두 구절을 이어 읽으면 바울은 영으로도 육체로도 쉬지 못했다. 그는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고 말한다. 원문에서 다툼과 두려움(ἔξωθεν μάχαι, ἔσωθεν φόβοι, 엑소텐 마카이, 에소텐 포보이)은 모두 복수형이어서 여러 차례의 다툼과 여러 겹의 두려움을 떠올리게 한다. 바울은 어디에서 누구와 다투었는지 밝히지 않는다. 4절의 기쁨은 이 환난 한가운데서 생겼다.

6절은 그 형편 한가운데로 찾아온 하나님의 위로를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을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분(ὁ παρακαλῶν τοὺς ταπεινοὺς, 호 파라칼론 투스 타페이누스)으로 부른다. 1:4에서도 하나님은 환난 중에 위로하시는 분으로 찬송을 받았다. 개역개정이 “낙심한 자들”로 옮긴 말은 본래 낮은 자들을 뜻한다. 여기서는 사회적 지위보다 마음이 꺾이고 기운이 떨어진 상태가 초점이며, 5절에서 바울이 묘사한 자기 형편이 바로 그러했다. 하나님은 “디도가 옴으로”, 곧 동역자가 도착해 곁에 있게 된 일로 바울을 위로하셨다.

7절에서 바울은 위로가 디도의 도착에서 그치지 않았다고 말한다. 디도의 도착도 위로였지만,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가 바울에게 더 큰 위로가 되었다. 하나님이 바울을 위로하시고, 고린도 성도들이 디도를 위로하며, 디도의 보고가 다시 바울을 위로한다. 1:4에서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게 된다고 했던 말이 이 방문과 보고에서 실제로 일어난다. 디도가 보고한 내용은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이었다. 곧 바울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그리움, 탄식하며 슬퍼하는 깊은 애통, 바울을 위한 열렬한 관심이다. 이 감정들은 깨어진 관계를 그대로 두려 하지 않는 교회의 응답이었다. 디도에게서 교회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들은 바울은 더욱 기뻐했다.

회개에 이른 근심 (8-10절)

8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근심하게 했던 편지를 돌아본다. 2:3-4에서 그는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편지를 썼으며, 성도들을 근심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8절의 ‘근심하게 하다’와 9-11절의 ‘근심’(λύπη, 뤼페)은 원문에서도 같은 어근의 말이며, 개역개정은 이 말들을 한결같이 “근심”으로 옮긴다. 바울은 그 편지를 보낸 뒤 한동안 후회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 편지가 성도들을 “잠시만” 근심하게 했음을 알기에 더는 후회하지 않는다.2 “그 편지”의 지시어(ἐκείνη, 에케이네)는 지금 쓰는 편지와 구별되는 이전 편지를 가리킨다. 8절의 ‘후회하다’(μεταμέλομαι, 메타멜로마이)는 9-10절에서 “회개”로 옮긴 말(μετάνοια, 메타노이아)과 다른 낱말이다. 이 문맥에서 후회는 자기가 쓴 편지 때문에 성도들이 괴로워한 일을 두고 바울이 느낀 마음의 짐이고, 회개는 성도들이 잘못에서 돌아선 일이다. 바울은 편지가 성도들에게 슬픔을 가져왔음을 알았고 그 영향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9절은 “지금”을 앞세워 디도의 소식을 들은 뒤의 기쁨을 말한다. 바울이 기뻐하는 까닭은 성도들이 근심했다는 사실보다 그 근심이 회개에 이르렀다는 데 있다. 회개는 생각과 삶의 방향을 바꾸는 돌이킴이며,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일과 행동을 바꾸려는 결심을 모두 포함한다.3 이어지는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에서 ‘하나님의 뜻대로’(κατὰ θεόν, 카타 테온)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을 따라’라는 말로, 그 근심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방식으로 일어났음을 나타낸다. 9절 끝의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그 근심에 담긴 목적을 밝힌다. 사도들이 한 일 때문에 성도들이 어떤 손해도 입지 않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4 디도의 보고(7절)는 그 근심이 실제로 회개로 이어졌음을 알려 주었고, 바울은 11절에서 그 열매를 하나씩 든다.

10절은 9절의 말을 일반 원리로 설명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고,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 두 표현은 같은 명사 ‘근심’을 쓰고 수식어만 달리한다. 따라서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가 결과를 정하지 않는다. 그 근심이 하나님께 돌아서는 회개로 이어지는지가 결과를 가른다. ‘세상 근심’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 머무는 근심이다.5 바울은 이 대조로 잘못을 지적받은 성도들의 근심이 어디로 향했는지를 설명한다.

“후회할 것이 없는”(ἀμεταμέλητον, 아메타멜레톤)은 8절의 ‘후회하다’와 같은 어근에 부정 접두어가 붙은 형용사다. 이 형용사는 형태상 ‘회개’와 ‘구원’ 어느 쪽과도 일치하고, 원문의 어순에서는 ‘구원’ 바로 뒤에 온다. 개역개정은 이 어순을 따라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바울은 8절에서 성도들을 근심하게 한 편지를 두고 한동안 후회했다고 말했다. 이 흐름에서는 후회할 것이 없는 대상을 근심 끝에 이른 회개로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6 그 회개를 두고 후회하지 않을 사람은 우선 근심하고 돌이킨 고린도 성도들이며, 8절에 비추어 바울 자신으로 볼 수도 있다.7 개역개정의 번역도 구원이 후회할 일이 아님을 바르게 전한다. 다만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고통스러웠던 근심과 회개의 과정이 후회로 남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구원과 대조되는 사망은 육체의 죽음보다 영적인 죽음을 가리킨다.8

근심이 맺은 열매와 깨끗함 (11절)

11절은 “보라”로 시작하여 성도들이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을 직접 보게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은 10절의 원리가 고린도 교회에서 실제로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보여 준다. “얼마나”는 뒤따르는 열거 전체에 걸린다. 개역개정은 일곱 항목마다 “얼마나”를 되풀이하여, 원문이 항목을 하나씩 더해 가며 강조하는 효과를 살렸다. 첫 항목인 “간절하게”는 문제를 미루지 않고 서둘러 대응한 열심을 가리킨다. 이어 “변증하게”, “분하게”, “두렵게”, “사모하게”, “열심 있게”, “벌하게”가 차례로 나온다.

일곱 항목에는 감정과 행동이 모두 담겨 있다. ‘변증’은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는 해명이고, ‘분함’은 일어난 잘못에 대한 분개다. ‘두려움’은 성도들이 이 사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9 7절에서 디도가 전한 ‘사모함’과 ‘열심’이 여기서 다시 나온다. 디도가 보고한 교회의 마음은 바로 이 회개에서 나온 것이었다. 마지막의 ‘벌함’(ἐκδίκησιν, 엑디케신)은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대응을 나타내며, 개역개정의 “벌하게”는 이 명사를 동사처럼 풀어 옮긴 것이다. 이 명사에는 누가 누구를 벌했는지가 드러나 있지 않다. 바울이 2:1-11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면 벌의 대상은 잘못한 사람이었을 수 있다.10 2:1-11과 11절은 같은 사건을 가리킬 수 있으나, 사건의 내용과 당사자는 본문에 밝혀져 있지 않다.11 성도들은 근심한 뒤 문제를 방치하지 않고 자신들의 태도를 밝히며 사건에 대응했다.

11절 끝에서 바울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 평가한다. “나타내었느니라”로 옮긴 동사(συνεστήσατε, 쉬네스테사테)는 자신을 입증하거나 추천했다는 뜻이다. 6:4에서 바울은 같은 동사로 사도들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살았다고 말했다. 이제 그는 교회도 이 일에서 자신들을 입증했다고 인정한다. “그 일에 대하여”는 이 평가를 특정한 사건에 대한 성도들의 대응으로 한정한다. “일체”는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면을 가리킨다.

편지를 쓴 목적 (12절)

12절은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으로 편지의 목적을 정리한다. 바울은 먼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라고 두 목적을 부정한다. 두 표현에는 2절에서 “불의를 행하지 않고”로 옮긴 동사가 쓰인다. 2절에서 바울은 자신들이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고린도에서는 실제로 불의를 행한 사람과 당한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이 누구이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본문은 밝히지 않는다. 불의를 당한 사람이 바울 자신인지 교회의 다른 구성원인지도 이 절만으로는 정할 수 없다.12 바울이 밝힌 목적은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이다. 11절 열거의 첫머리에 나온 ‘간절함’(σπουδή, 스푸데)이 여기서 편지의 목적으로 다시 나온다. 바울은 개인 사이의 잘잘못을 가리는 일보다 교회 전체의 응답에 관심을 둔다. 그 간절함이 드러나야 할 곳은 “너희에게”, 곧 성도들 자신이다. 바울은 성도들이 이 사건을 거치며 자신들이 사도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스스로 알게 되기를 바랐다.13 이 모든 일은 “하나님 앞에서” 일어났다.

디도의 기쁨과 회복된 신뢰 (13-16절)

13절 첫머리에서 바울은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라고 말하며 6절부터 이어 온 위로 이야기를 맺는다. 이어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까지 더해져 바울은 “더욱 많이” 기뻐했다. 디도는 고린도 성도들 모두로 말미암아 마음이 안심함을 얻었다. 개역개정이 여기서 “마음”으로 옮긴 말은 2:13에서 “심령”으로 옮긴 영(πνεῦμα, 프뉴마)이다. 2:13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한 바울의 영은 쉼을 얻지 못했는데, 이제 디도의 영이 고린도 성도들에게서 쉼을 얻었다는 소식이 바울을 기쁘게 한다.

14절에서 바울은 디도에게 미리 했던 자랑을 두고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그는 디도를 고린도로 보내면서 교회에 관해 좋은 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회가 엄한 편지에 바르게 응답하지 않았다면 그 자랑은 부끄러움으로 끝났을 것이다. 바울은 이어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한 자랑도 “참되게 되었도다”라고 말한다. 1:17-18에서 바울은 계획을 바꾼 일을 두고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 변호해야 했다. 이제 그는 교회에 한 말과 교회에 관해 한 말이 모두 참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한다. 4절에서 고백한 자랑도 근거 있는 말이었음이 여기서 확인된다.

15절에서 디도는 성도들을 더욱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에서 “심정”(σπλάγχνα, 스플랑크나)은 본래 몸의 내장을 가리키며, 깊은 애정이 자리한 곳을 나타낸다. 6:12에서 바울이 성도들이 “너희 심정에서” 좁아졌다고 말할 때도 같은 낱말을 썼다. 디도는 성도들 모두의 순종을 지금도 되새기고 있다. 바울은 2:9에서 성도들이 “범사에 순종하는지” 알고자 편지를 썼다고 했는데, 디도의 보고로 그 답을 얻었다. 성도들은 디도를 “두려움과 떪으로” 영접했다. 그들은 디도를 사도가 보낸 사람으로 맞았고, 그가 전한 권면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15절의 “영접하여”(ἐδέξασθε, 에덱사스테)는 2절의 “영접하라”와 원문에서 다른 동사다. 그래도 성도들이 디도를 맞아들인 일은 2절에서 바울이 구한 받아들임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 준다.

16절의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에서 “신뢰하게 된”으로 옮긴 동사는 마음을 놓고 담대할 수 있다는 현재의 확신을 나타낸다. “범사에”(ἐν παντί, 엔 판티)는 5절의 “사방으로”, 11절의 “일체”와 원문에서 같은 표현이다.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던 바울이 이제 모든 일에 교회를 신뢰한다. 16절의 “기뻐하노라”는 7절과 9절, 13절에서 말한 기쁨을 이어 단락을 맺는다. 바울은 이렇게 회복된 신뢰 위에서 8장의 연보 문제를 꺼낸다.

성경신학적 통찰

죄를 직면한 근심에서 돌이킴과 생명으로

바울은 9-10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회개를 낳고, 그 회개가 구원에 이른다고 말한다. 죄를 깨닫는 슬픔이 하나님께 돌아서는 길이 되고 그 끝에 다시 기쁨이 온다는 고백은 시편 51편의 기도에서도 볼 수 있다. 시편의 표제는 다윗에게 나단이 찾아온 때를 배경으로 제시하고, 기도자는 자기 죄를 알고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다고 고백한다(시편 51:1-6). 그는 하나님의 인자와 풍성한 긍휼을 의지하여 죄를 씻어 달라고 구한다. 이어 깨끗한 마음과 새롭게 된 영, 다시 누리는 구원의 즐거움을 구하고, 회복된 뒤에는 다른 죄인들에게 주의 길을 가르치겠다고 말한다(시편 51:10-13). 시편은 한 사람의 기도이고 본문은 한 교회의 응답이지만, 두 본문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인정한 슬픔이 새로운 삶과 기쁨으로 이어진다고 증언한다. 고린도 성도들의 근심도 회개로 이어졌고, 그 회개는 바울과 디도에게 기쁨을 주었다.

이스라엘의 성경은 회개가 행동의 변화로 나타난다는 점도 분명히 한다. 잠언 28:13은 죄를 숨기는 사람과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사람을 대조하며, 뒤의 사람이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한다. 에스겔 18:5-9에서 의로운 사람은 이웃을 학대하거나 강탈하지 않고 저당물을 돌려주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악인이 돌이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살기를 원하시고, 죽는 자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에스겔 18:21-32). 본문 10절의 구원과 사망의 대조, 11절에 열거된 성도들의 구체적인 대응은 이 증언과 주제상 이어진다. 고린도 성도들은 문제를 덮어 두지 않고 해명하며, 잘못에 분개하고, 사건에 대응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사람이 근심 속에 머물기보다 돌이켜 생명에 이르기를 원하시며, 바울도 성도들의 근심이 그 방향으로 이어진 것을 기뻐한다.

낙심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본문에서 교회의 회개 소식은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다. 6절이 하나님을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분으로 부르는 고백은 이사야서의 위로 약속과 주제상 이어진다. 이사야 40:1-2에서 하나님은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명령하시며, 예루살렘의 노역의 때가 끝나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고 외치게 하신다. 포로의 고통 속에 있던 백성에게 주어진 위로는 죄 사함의 소식과 묶여 있고, 하나님은 그 위로를 전할 사람들에게 명령하신다. 이사야 49:13-15에서도 여호와는 고난 당한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며, 자신이 버림받고 잊혔다고 탄식하는 시온에게 결코 잊지 않겠다고 대답하신다. 바울이 경험한 위로도 같은 모습을 지닌다. 하나님은 디도를 보내 낙심한 바울을 찾아오셨고, 교회가 잘못을 바로잡았다는 소식으로 그의 근심을 위로하셨다(6-7절). 위로는 하나님에게서 시작해 디도와 교회를 거쳐 바울에게 이르렀다.

기독론적 해석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위로

바울이 낙심한 자신을 위로하셨다고 고백하는 하나님은 편지 첫머리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찬송한 분이다(1:3-5). 그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사도들에게 넘친 것같이 그들이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고 말하고,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한다고 말한다. 6-7절에서 그 위로는 구체적인 사람들을 거쳐 온다. 성도들의 애통과 열심은 디도에게 쉼을 주고, 디도는 그 소식을 바울에게 알려 기쁨을 준다. 바울은 동역자의 방문에 감사하면서 그 위로의 근원을 하나님께 돌린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위로는 성도들과 동역자가 서로를 찾아가고 소식을 알리는 일 속에서 바울에게 이르렀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화목과 회개

이 관계의 토대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화목이다. 5:18-20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고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시며, 바울은 화목의 말씀을 맡은 사도로서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한다. 이 화목은 십자가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고, 그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5:21).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기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누가복음 24:46-47), 회개의 요청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나온다. 10절의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하나님이 열어 주신 이 길에 응답하는 일이다. 성도들이 후회하며 괴로워한 사실이 십자가의 은혜를 대신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선포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기에 잘못을 고백하고 돌이킬 수 있었고, 그들의 회개에는 자기 죄를 아는 괴로움과 함께 하나님께 다시 의탁하는 믿음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진 공동체는 서로에게 어떤 말을 했고 어떤 손해를 주었는지도 정직하게 다룬다.

회개한 사람의 회복과 그리스도 앞의 용서

회개한 사람을 버려두지 않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베드로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예수는 베드로가 부인하기 전에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시고, 돌이킨 뒤 형제들을 굳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누가복음 22:31-32).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한 뒤 심히 통곡했지만(누가복음 22:61-62), 부활하신 주님은 그에게 다시 자신의 양을 먹이라고 맡기셨다(요한복음 21:15-17). 그리스도는 실패를 직면한 제자를 다시 섬김의 자리로 부르셨다. 본문에서도 회개한 교회는 정죄 속에 남겨지지 않는다. 바울은 그들의 응답을 받아들여 다시 신뢰하고(16절), 교회는 사도와 동역자에게 다시 기쁨과 쉼을 준다(13절).

바울은 그리스도 앞에서 이루어지는 용서도 강조한다. 2:6-10에서 그는 충분한 벌을 받은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하며 사랑을 나타내라고 말하고,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며, 자신도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용서했다고 밝힌다. 11절은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대응을 회개의 열매로 꼽는다. 두 단락의 사건이 같은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지만, 편지 안에서 잘못에 대한 교회의 대응은 다시 사랑하는 관계로 회복하는 방향을 가진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교회는 죄를 바로잡고, 회개한 사람이 지나친 근심에 잠기지 않도록 위로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 안에서 함께하는 사도와 교회

그리스도의 사랑은 권면하는 사도의 태도도 정한다. 5:14-15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강권한다고 말한다. 한 분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므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산다. 3절의 “함께 죽고 함께 살게”는 그 자체로는 어떤 형편에서도 성도들과 갈라서지 않겠다는 애정의 표현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편지에서 자기 사역을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삶으로 설명했고, 그 사역을 통해 성도들 안에 생명이 역사한다고 말했다(4:10-12). 이 정경 문맥에서 보면, 성도들과 생사를 함께하겠다는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에 참여하는 사역자의 애정으로 읽을 수 있다. 바울은 예수를 위하여 교회의 종이 된 사람으로서(4:5) 교회를 정죄하려 하지 않았고(3절), 성도들이 사도들 때문에 손해를 입지 않기를 바랐다(9절). 그래서 성도들의 근심은 바울에게도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편지를 보내고 결과를 기다리며 동역자의 소식으로 위로받았고, 성도들이 돌이켰을 때 다시 기뻐했다.

10절에서 회개가 이르는 구원은 지금 관계가 회복되는 일보다 넓다. 4:14에서 바울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사도들도 예수와 함께 다시 살리사 성도들과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지금 돌이키며 관계를 새롭게 하는 삶은 그 공동의 미래를 향한다. 사도와 교회가 서로를 다시 신뢰하게 된 기쁨은 함께 하나님 앞에 설 사람들의 기쁨이다.

현대적 적용

실제 잘못을 인정하는 공동의 응답

본문의 회개는 교회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잘못에 대한 응답이다. 바울은 관계 회복을 호소하면서 먼저 자신과 동역자들이 성도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밝혔고(2절), 고린도 성도들의 회개는 사건에 간절히 대응하는 행동으로 나타났다(11절). 오늘의 회개도 막연히 부끄럽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이 실제로 한 말과 행동을 분명히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11절의 해명과 분함과 대응은 교회 전체가 보인 응답이었고, 12절에서 바울이 드러나기를 바란 것도 교회 전체의 간절함이었다. 공동체 전체가 관여한 문제라면 한 사람의 사과로 책임이 끝나지 않는다. 공동체는 그 일에 대해 자신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밝히고 함께 바로잡아야 한다.

돌이킴을 목적으로 하는 권면과 회복

권면하는 사람은 상대가 얼마나 괴로워하는지를 성과로 삼지 않아야 한다. 바울은 정죄할 목적이 없음을 먼저 밝혔고(3절), 성도들이 근심한 사실보다 그 근심이 회개로 이어진 일을 기뻐했다(9절). 그는 편지가 준 슬픔을 무겁게 받아들여 한동안 후회했고, 디도의 보고를 듣고서야 기뻐했다(7-8절). 엄한 말이 좋은 열매를 맺었는지는 말한 사람의 확신보다 상대에게 실제로 일어난 돌이킴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권면은 큰 울음이나 오래 이어지는 자책을 요구하기보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는 편이 본문의 방향에 맞는다.

잘못을 바로잡는 일에는 목적과 끝이 있다. 바울은 잘못에 대한 성도들의 분함과 대응을 회개의 열매로 인정하면서도(11절), 2:6-8에서는 충분한 벌을 받은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하며 사랑을 나타내라고 권한다. 그 사람이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염려했기 때문이다(2:7). 회개한 사람을 계속 수치 속에 세워 두면 그가 새롭게 살아갈 길을 찾기 어렵다. 동시에 12절은 불의를 행한 사람과 불의를 당한 사람을 따로 언급한다. 본문에서 불의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고, 교회는 그 일을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회복을 바라는 교회는 불의를 행한 사람의 책임과 불의를 당한 사람의 고통을 하나로 섞지 않아야 한다.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피해를 입은 사람의 고통을 지우지 않으므로, 용서와 회복을 말하는 자리에서도 그 고통은 따로 헤아려야 한다.

회개를 요청할 일과 함께 슬퍼할 일의 구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의 대조는 본문의 사건 안에서 읽어야 한다. 바울은 잘못을 직면한 교회가 어떻게 돌이켰는지를 설명한다. 질병이나 사별이나 관계의 상실 때문에 오래 슬퍼하는 사람에게 이 대조를 끌어와 회개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리거나 죄를 고백하라고 재촉하면 그의 실제 고통과 필요가 가려진다. 공동체는 회개를 요청해야 할 일과 함께 슬퍼하며 돌보아야 할 형편을 신중하게 구별해야 한다.

확인된 변화와 회복된 신뢰

회복된 신뢰는 확인된 행동 위에서 자란다. 바울은 2절에서 자신과 동역자들이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거나 이득을 취하지 않았다고 밝혔고, 14절에서는 교회에 한 말과 교회에 관해 한 말이 모두 참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교회 쪽에서도 디도가 직접 본 순종과 열심이 있었다(15절). 바울은 성도들의 과거 잘못만 되풀이하지 않고 디도가 확인한 변화를 인정하며, 이제 “범사에” 그들을 신뢰한다고 말한다(16절). 오늘의 공동체에서도 신뢰는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것을 서로 확인할 때 회복된다. 지도자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공동체가 알 수 있게 밝히고, 공동체는 사람이 책임을 다하고 달라진 행동을 보일 때 그 변화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인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