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추천서와 그리스도의 편지 (1-3절)

바울은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라는 질문으로 3장을 연다(1절). 바로 앞에서 그는 누가 이 일을 감당하겠느냐고 묻고,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한다고 했다(2:16-17). 이 말이 자기를 내세우는 말로 들릴 수 있었기에, 바울은 다시 자신을 추천하려는 것이냐고 먼저 묻는다. 이어서 그는 어떤 사람들처럼 추천서를 주고받을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데, 독자들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리라 기대하는 질문이다. 추천서는 낯선 방문자를 공동체에 소개하고 그의 사역을 믿을 수 있게 하는 편지였다. 바울도 다른 사람을 위해 추천의 글을 썼으므로(롬 16:1-2) 추천서 자체를 그르다고 여기지 않았다. 다만 고린도 교회를 세운 그에게는 그 교회가 어떤 추천서보다 나은 증거였다.1 그런데도 추천서 문제를 꺼내야 했다는 사실은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 사이에 거리가 생겼음을 보여 준다. 4:2에서 바울은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스스로 추천한다고 말한다. 그는 추천을 거부하지 않고, 진리를 드러내는 사역과 그 사역으로 생겨난 공동체를 추천의 근거로 삼는다.

2절에서 바울은 추천서 이야기를 비유로 바꾼다. 고린도 성도들 자신이 바울과 동역자들의 편지이며, 그 편지는 사도들의 마음에 쓰여 있다. “썼고”(ἐγγεγραμμένη, 엥게그람메네)는 이미 새겨져 지금도 남아 있는 기록을 가리킨다. 이 편지는 뭇 사람이 알고 읽는다. 바울은 성도들을 마음에 품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 공동체를 보며 바울의 사역을 알아본다. 아직 갈등이 남아 있는 고린도 교회도 바울의 마음에 새겨진 사람들이므로 그가 버릴 수 없다.

3절은 이 편지를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부른다. 2절에서 “우리의 편지”였던 공동체가 여기서는 그리스도께 속한 편지로 소개된다. 개역개정이 “우리로 말미암아”로 옮긴 구절(διακονηθεῖσα ὑφ’ ἡμῶν, 디아코네테이사 휘프 헤몬)은 직역하면 ‘우리에게 섬김을 받은’이며, 이 편지가 바울과 동역자들의 사역으로 생겨났다는 뜻이다.2 편지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고, 바울과 동역자들은 그 편지가 생겨나도록 섬긴 사람들이다. 먹은 파피루스나 양피지 위에 글자를 남기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은 사람의 마음에 기록하신다.

이어서 바울은 기록되는 자리를 비교한다. 2절에서 편지가 쓰인 곳은 사도들의 마음이었다. 3절의 마음판은 누구의 마음인지 밝히지 않지만, 성령으로 쓰인 편지가 성도들 자신이므로 성도들의 마음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원문은 ‘판들’ 바로 뒤에 ‘마음들’을 붙여 마음이 곧 그 판이라고 말한다. “육의 마음판”의 ‘육의’(σαρκίναις, 사르키나이스)는 살로 이루어졌다는 재질을 가리키며 “돌판”의 ‘돌’과 짝을 이룬다. 한국어 독자는 “육”에서 죄를 좇는 육신을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이 절의 대조는 생명 없는 돌과 살아 있는 살 사이에 있다. 돌판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의 돌판을 떠올리게 하고, 살로 된 마음판은 에스겔 36:26에서 하나님께서 굳은 마음 대신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마음을 떠올리게 한다. 성령은 사람이 실제로 생각하고 원하며 응답하는 자리에 하나님의 뜻을 기록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새 언약의 일꾼 (4-6절)

4-5절에서 바울은 이런 확신의 근거를 밝힌다. 그의 확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다. 2:17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한다고 했듯이, 바울은 이 확신도 고린도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는 데 쓰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가진다. 5절은 그 확신이 자기 능력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개역개정이 “만족”으로 옮긴 말(ἱκανότης, 히카노테스)은 흡족한 기분이 아니라 맡은 일을 감당할 능력을 뜻한다.3 5절은 2:16의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라는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다.4 바울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감당할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확신을 말하는 것과 자기에게서 난 능력을 부정하는 것은 충돌하지 않는다.

6절에서 하나님은 사도들을 새 언약의 일꾼으로 “만족하게 하셨다.” 곧 그 일을 감당할 능력을 주셨다. “일꾼”은 섬기는 사람을 뜻하며 현대 교회의 특정 직분 명칭과 같지 않다. 새 언약은 이 장에서 처음 나오는 언약 용어로, 14절의 ‘옛 언약’과 짝을 이룬다. 바울은 이 언약의 성격을 조문과 영의 대조로 설명한다. 개역개정의 “율법 조문”에 해당하는 말(γράμμα, 그람마)은 기록된 글자를 뜻하며, 원문에는 ‘율법’이라는 단어가 따로 없다. 개역개정은 “율법”을 덧붙여 이 글자가 돌판에 새긴 모세의 율법을 가리킨다는 해석을 번역에 담았고, 7절이 돌에 새긴 글자를 말하므로 이 해석은 문맥에 맞는다. “영”은 사람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다.5 그러므로 조문은 죽이고 영은 살린다는 말은 성경을 읽는 두 방법을 비교하는 말이 아니라, 돌에 기록된 율법과 마음에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비교하는 말이다.

죽게 하는 직분과 영의 직분의 영광 (7-11절)

7-9절은 이 대조를 두 사역의 비교로 풀어 간다. 개역개정이 “직분”으로 옮긴 말(διακονία, 디아코니아)은 섬기는 일을 가리킨다. 바울은 모세와 자신이 차지한 지위를 비교하지 않고, 두 사람이 맡은 섬김을 비교한다. 7절은 돌에 새긴 글자의 직분을 죽게 하는 직분이라 하고, 9절은 그것을 정죄의 직분이라 부른다. 율법이 죄인을 정죄하므로 그 섬김의 결과는 죽음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직분에 영광이 있었다고 말하며 논증을 시작한다. 이에 비해 영의 직분은 생명을 주고, 의의 직분은 정죄 대신 의를 베푼다. 의의 직분은 사람에게 더 높은 성취를 요구하는 직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살리시고 의롭다 하시는 새 관계를 섬기는 사역이다.

7-11절은 모세의 직분과 영의 직분이 지닌 영광을 같은 방식으로 세 번 비교한다. 죽게 하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고(7-8절), 정죄의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며(9절),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다면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다(11절). 그 사이에서 10절은 영광스러웠던 것도 더 큰 영광 앞에서는 영광이라 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옛 직분의 영광은 거짓이 아니었다. 더 큰 영광이 나타나자 그 영광이 더는 견줄 대상이 되지 못했을 뿐이다. 7-11절이 두 사역의 영광을 비교한다면, 12절부터는 모세의 수건 장면을 사용해 바울 자신의 담대함과 모세의 글을 듣는 사람들의 상태를 설명한다.

이 단락에서 바울은 ‘없어지다’(καταργέω, 카타르게오)라는 동사를 거듭 쓴다. 개역개정은 7, 11, 13, 14절을 모두 “없어질”로 옮기지만, 무엇이 없어지는지는 각 문맥이 정한다. 7절에서 이 동사의 분사는 여성 명사인 ‘영광’에 맞춘 형태로 모세 얼굴의 영광을 꾸민다. 출애굽기 34장은 그 광채가 점차 약해졌다고 서술하지 않으므로, 7절의 말은 출애굽기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기보다 그 영광이 끝나게 되어 있는 직분에 속했다는 바울의 평가다. 11절의 “없어질 것”은 중성 형태로, “길이 있을 것”(τὸ μένον, 토 메논)과 대조되는 옛 언약의 직분 전체를 가리킨다.6 이 동사를 ‘점점 희미해지다’로 옮길지 ‘효력을 잃다, 폐하여지다’로 옮길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7 11절이 이 동사를 “길이 있을 것”과 맞세우므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빛이 서서히 약해지는 모습보다 옛 직분이 끝나도록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모세의 수건과 바울의 담대함 (12-13절)

12절에서 바울은 길이 남는 사역의 영광에 대한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한다고 한다. 이 담대함(παρρησία, 파레시아)은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 말하는 태도이며 13절의 수건과 대조된다. 출애굽기 34:29-35에서 모세의 얼굴은 하나님과 말한 결과로 빛나고, 모세는 받은 명령을 백성에게 모두 알린 뒤 얼굴을 가리며, 하나님 앞에 들어갈 때는 수건을 벗는다. 출애굽기는 수건을 쓴 목적을 밝히지 않는다. 바울은 그 목적을 이스라엘 자손이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여기서 “없어질 것”은 11절과 같은 중성 형태로 옛 언약을 가리킨다.8 “결국”(τὸ τέλος, 토 텔로스)은 끝을 뜻할 수도 있고 목표를 뜻할 수도 있다. 옛 언약은 끝나도록 정해진 것이므로, 여기서는 “결국”을 그 언약과 직분의 끝으로 읽는 편이 문맥에 맞다.9 바울은 출애굽기의 기록을 그대로 다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 언약의 직분에 비추어 모세의 직분을 읽는다.

완고해진 마음과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지는 수건 (14-15절)

14절은 문제를 모세의 얼굴에서 듣는 사람들의 생각으로 옮긴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의 “마음”(τὰ νοήματα, 타 노에마타)은 생각이나 이해를 가리키며, 15절에서 “마음”으로 옮긴 말(καρδία, 카르디아)과 다르다. 4:4도 같은 말을 써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수건은 말씀을 들어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게 가로막는 상태를 가리킨다. 개역개정이 “구약을 읽을 때에”로 옮긴 구절은 직역하면 ‘옛 언약(τῆς παλαιᾶς διαθήκης, 테스 팔라이아스 디아테케스)의 낭독 때에’이다. 15절이 이것을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로 바꾸어 말하므로, 이 표현은 신약과 짝을 이루는 후대의 정경 이름보다 회당에서 낭독되던 모세의 책을 가리킨다.10 사도행전 15:21도 모세의 글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읽힌다고 말한다. 14절과 15절이 되풀이하는 “오늘”은 바울이 편지를 쓰던 당시다. 바울은 동시대 회당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할 뿐 이를 유대인의 변하지 않는 성품으로 규정하지 않으며, 16절에서 주께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진다고 말한다.

14절 끝의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에서 동사(καταργεῖται, 카타르게이타이)는 주어를 따로 밝히지 않는다. 개역개정은 바로 앞의 수건을 주어로 보았고, 일부 해석자는 11절과 13절의 용례를 따라 옛 언약을 주어로 보아 옛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폐하여졌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드러나지 않았다고 읽는다.11 14절 앞부분이 수건이 벗겨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고 말하고 16절이 그 수건이 벗겨지는 때를 말하므로, 수건을 주어로 읽는 개역개정의 판단이 14-16절의 흐름에 더 잘 맞는다. 그 수건은 모세의 글을 더 부지런히 읽는다고 걷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진다.

주께 돌아갈 때 벗겨지는 수건과 주의 영 (16-17절)

16절은 출애굽기 34:34를 바꾸어 쓴다. 출애굽기에서는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 말할 때마다 수건을 벗었다. 바울은 ‘들어가다’ 대신 “돌아가다”를 쓰고 돌아서는 사람을 밝히지 않아, 모세에게 있던 일을 주께 돌아서는 사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말한다.12 15절과 이어 읽으면 돌아서는 사람은 마음에 수건이 덮인 사람이다. 개역개정은 “벗겨지리라”라고 미래로 옮겼지만, 원문은 현재형으로 주께 돌아서는 그때 수건이 벗겨진다고 말한다. 이 절이 출애굽기 34:34의 장면을 가져오므로, 여기서 “주”는 모세가 만난 여호와, 곧 하나님으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13 그러나 14절은 그 수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진다고 했으므로, 주께 돌아서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수건이 벗겨지는 일을 경험한다.

17절은 16절의 “주”를 설명한다. “주는 영이시니”(ὁ δὲ κύριος τὸ πνεῦμά ἐστιν, 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에서 바울은 방금 가져온 출애굽기 구절의 “주”를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만나는지 해설한다.14 모세는 주 앞에 들어가 수건을 벗었지만, 이제 주께 돌아서는 사람은 성령 안에서 그 주를 만난다. 같은 절 후반부가 곧바로 “주의 영”이라고 말하므로 바울은 주와 영을 구별한다. 따라서 이 문장을 주와 성령이 같은 위격이라는 등식으로 읽을 수 없다. 그렇다고 주와 성령이 비슷한 일을 한다는 비교에 그치지도 않는다. 주께 돌아서는 사람이 경험하는 주의 임재와 행하심이 곧 성령의 일이라는 말이다.15 3절에서 마음에 기록하시고 6절에서 살리시는 성령께서, 이제 수건을 벗기고 사람을 주 앞에 서게 하신다. 그래서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의 자유는 이 문맥에서 수건에서 벗어나 가로막힘 없이 주의 영광을 보는 자유다.16 12절에서 바울이 숨김없이 담대히 말하는 것도 이 자유에서 나온다. 18절은 이 자유가 가져오는 결과를 변화로 설명한다.

주의 영광을 보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함 (18절)

18절은 “우리가 다”라고 하여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는 사람을 공동체 전체로 넓힌다. 출애굽기에서 수건을 벗고 주 앞에 선 사람은 모세 한 사람이었다. “거울을 보는 것 같이 ... 보매”로 옮긴 분사(κατοπτριζόμενοι, 카톱트리조메노이)는 드물게 쓰이는 말이어서 ‘거울로 보듯 바라보다’와 ‘거울처럼 비추다’로 해석이 갈린다. 7절과 13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주목하지 못했다는 말과 대조되므로, 개역개정처럼 바라봄으로 읽는 편이 문맥에 맞다.17 비추다로 읽으면 성도가 모세처럼 영광을 비추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 되지만, 이 단락의 대조는 보지 못하던 사람들과 이제 보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 동사는 현재 수동형이어서, 변화가 지금 진행되고 있으며 그 변화를 이루시는 분이 따로 계심을 보여 준다. 그 변화는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도록 계속된다. 마지막 구절(ἀπὸ κυρίου πνεύματος, 아포 퀴리우 프뉴마토스)은 ‘영이신 주에게서’로도, 개역개정처럼 ‘주의 영으로’로도 옮길 수 있다.18 17절의 “주는 영이시니”를 되받는 말로 보면 앞의 번역이 문맥에 더 가깝다. 그렇게 읽으면 변화의 근원은 16절에서 사람들이 돌아간 그 주이시며, 그 주께서 성령으로 일하신다. 개역개정의 번역은 변화를 이루시는 분이 성령이심을 분명히 하지만, 17절과의 연결은 덜 드러난다. “형상”(εἰκών, 에이콘)은 4:4에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다시 나온다.

성경신학적 통찰

출애굽기 34장의 언약 갱신과 옛 직분의 영광

고린도후서 3장의 돌판과 수건은 출애굽기 34장의 언약 갱신 장면에서 나온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섬겨 언약을 깨뜨린 뒤, 하나님은 모세에게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시 다듬게 하시고 자비와 은혜가 풍성하신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신다(출 34:1-7). 모세는 목이 뻣뻣한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과 동행해 주시기를 구하고, 하나님은 언약을 다시 세우신다(출 34:8-10). 돌판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미 애굽에서 건지신 백성과 맺으신 관계였고, 그 백성이 언약을 깨뜨린 뒤에도 하나님은 관계를 회복하셨다. 모세의 얼굴이 빛난 것도 이 회복된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말했기 때문이다(출 34:29). 바울이 7-11절에서 옛 직분의 영광을 실제 영광으로 인정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옛 직분의 영광과 새 직분의 더 큰 영광은 모두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다.

마음에 기록하시는 새 언약과 성령

6절의 새 언약과 3절의 마음판은 예언서의 약속을 떠올리게 한다. 바울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새 언약”이라는 이름과 마음에 기록한다는 약속은 예레미야 31:31-34에, 돌 같은 마음을 살로 된 마음으로 바꾸고 하나님의 영을 주신다는 약속은 에스겔 36:26-27에 나온다.19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 맺은 언약을 깨뜨렸다고 말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을 그들 속에 두어 마음에 기록하시며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시리라고 약속한다. 에스겔 36:26에서 개역개정이 “굳은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으로 옮긴 말은 난외주가 밝히듯 원어로 ‘돌’과 ‘고기(살)’이다. 그래서 3절에서 바울이 돌판과 “육의 마음판”을 대조할 때 이 약속과의 연결이 원문에서는 더 분명하다. 하나님은 그 마음에 자신의 영을 두어 백성이 규례를 따라 행하게 하신다(겔 36:27). 두 예언 모두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의 법에서 찾지 않고 그 법을 지키지 못하는 백성의 마음에서 찾으며, 해결도 하나님께서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데서 찾는다. 모세의 글에도 하나님께서 백성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살게 하시리라는 약속이 있다(신 30:6). 따라서 6절의 조문과 영의 대조는 모세의 글과 성령의 대립이 아니다. 돌에 새긴 율법은 마음을 바꾸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마음에 기록하셔야 했다는 것이 이 대조의 뜻이다.

뭇 사람이 읽고 모두가 주를 아는 백성

새 언약의 약속은 새롭게 된 백성의 삶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도 말한다. 에스겔 36:20-23에서 흩어진 이스라엘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 나라 가운데서 더럽혀졌고,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백성을 모으고 새롭게 하신다. 새롭게 된 백성의 삶이 여러 나라 앞에서 하나님을 알리듯,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쓰인 그리스도의 편지인 고린도 교회도 뭇 사람이 알고 읽는다(2-3절). 예레미야 31:34는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모두가 여호와를 알게 되어 서로 가르칠 필요가 없게 되리라고 약속한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 앞에 수건을 벗고 나아간 사람은 모세 한 사람이었지만, 바울은 18절에서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본다고 말한다.20 주의 영광을 보는 일은 지도자나 특별한 체험을 한 소수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르침이 필요 없어지지는 않는다. 바울 자신이 이 편지에서 새 언약을 가르친다. 새 언약의 사역자는 성도가 자기에게 계속 기대게 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 직접 주님을 알고 응답하도록 섬긴다.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새 언약

14-15절의 수건과 완고함을 민족 전체를 낮추는 말로 쓸 수 없는 근거는 언약의 이야기 자체에 있다. 새 언약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약속되었고(렘 31:31), 예레미야는 해와 달과 별의 규례가 폐하지 않는 한 이스라엘 자손도 나라가 되기를 그치지 않으리라고 덧붙인다(렘 31:35-37). 새 언약은 언약을 깨뜨린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주신 약속이다. 바울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이며(11:22), 이방인 성도들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의 은혜에 참여한다.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것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는다고 하고, 이방인 신자들에게 원가지를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고 한다(롬 11:18, 25-29). 3장의 수건도 바울 당시의 상태를 말하며, 주께 돌아가면 벗겨진다. 새 언약의 특권은 교회에 우월감을 주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을 증언하며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도록 복음을 전할 책임을 준다.

기독론적 해석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과 사도의 섬김

3장에서 그리스도는 먼저 편지의 주인으로 나타난다. 고린도 교회는 “그리스도의 편지”이며, 문맥상 이 표현은 그리스도에 관한 편지보다 그리스도께서 쓰시고 보내신 편지를 뜻한다.21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하셔서 공동체를 이루시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로 그 일을 섬긴다. 그러므로 고린도 성도들의 신앙은 바울 개인의 능력에 근거하지 않고 그들을 부르신 그리스도께 근거하며, 공동체의 주인도 바울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4절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 확신을 가진다고 말할 때에도, 그는 자기 사역의 정당성을 자기 자격에서 찾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해 이루신 일에서 찾는다. 4:5에서 그가 자신을 전파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파하며 자신은 성도들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관계를 보여 준다.

6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부른다. 바울이 섬기는 이 새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세우신 언약이다. 고린도 교회는 이미 바울에게서 주의 만찬의 말씀, 곧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는 말씀을 받았다(고전 11:23-25). 언약을 세우신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사도는 그 언약의 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을 그 관계로 부른다. 바울이 새 언약의 일꾼으로 감당할 능력을 자기에게서 찾지 않고 하나님께 돌리는 것도(5-6절) 이 구별과 맞는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에 무엇을 보태지 않고 그 구원을 섬긴다.

그리스도 안에서 벗겨지는 수건

14절은 옛 언약을 읽을 때 벗겨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수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진다고 말한다. 모세의 글은 여전히 읽히지만, 그 글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이해된다. 16절의 “주”가 하나님을 가리키는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는 논쟁이 있다.22 이 절이 출애굽기 34:34를 가져오므로 여호와로 읽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지만, 바울이 같은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전파한다는 점(4:5)은 그리스도로 읽는 해석의 근거가 된다. 주를 여호와로 읽으면, 바울은 모세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누리던 일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주께 돌아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렸다고 말하는 셈이다. 17절은 그 주를 지금 만나는 방식이 성령이라고 밝힌다. 그러므로 주께 돌아서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수건을 벗고, 성령 안에서 주의 영광 앞에 선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닮아 감

18절의 주의 영광과 형상은 4:4-6에서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 부르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마음에 비추셨다고 말한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빛은 그가 하나님과 말한 결과였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고, 성도들은 그 영광을 바라보며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된다.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 그분을 닮아 간다. 그러므로 닮아 갈 모습은 특정 지도자의 성품이나 공동체의 취향이 정하지 않으며, 4:5가 말하는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신다. 이 변화는 지금 진행 중이며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바울은 이어지는 4:7-12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도의 약한 몸과 고난 가운데 드러난다고 말한다.

현대적 적용

섬긴 사람들의 삶으로 읽히는 사역

3장은 사역을 평가할 때 사역자가 섬긴 공동체의 삶을 보게 한다. 바울에게 가장 분명한 추천서는 다른 교회의 소개가 아니라 그의 사역으로 그리스도께 돌아온 고린도 성도들이었다. 오늘 교회가 사역자를 세우거나 평가할 때도 경력과 추천은 필요한 정보를 주지만, 그가 섬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서로를 돌보는 법을 배웠는지 물어야 한다. 교회의 규모나 유명세는 그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동시에 그 편지는 그리스도의 편지이므로, 사역자는 성도들의 삶을 자기 업적으로 내세울 수 없다. 또 이 편지는 뭇 사람이 알고 읽는 편지다. 교회가 갈등을 다루고 약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교회 안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 이웃은 그 모습에서 성령께서 마음에 기록하신 편지를 읽는다.

하나님께 받은 능력과 정직한 섬김

바울은 사역을 감당할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고백했다(5-6절). “만족”을 마음의 흡족함으로 읽으면 자기 확신이 충분하다는 태도로 흐를 수 있지만, 바울의 고백은 사역자가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의지하여 맡은 일을 감당하게 한다. 바울이 숨김없이 담대히 말하는 근거도 자기 자격이 아니라 길이 남는 영광에 대한 소망이다(12절). 그래서 그는 속임을 버리고 진리를 드러냄으로 자신을 추천한다(4:2). 새 언약의 일꾼에게 담대함은 사역의 문제와 한계를 감추지 않고 설명하는 정직함으로 나타난다. 또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는 말씀을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보다 자기 느낌을 앞세우는 근거로 쓸 수 없다. 이 말씀은 죽음과 정죄 아래 있던 사람을 성령께서 살리시고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기록하신다는 뜻이다. 성령의 일하심을 말하는 공동체는 말씀을 가볍게 다루지 않고 그 말씀에 마음으로 응답한다.

모두에게 열린 자유와 더딘 변화

17절의 자유는 수건에서 벗어나 가로막힘 없이 주 앞에 나아가는 자유이며,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자율과 다르다. 이 자유를 말하는 공동체는 성도들이 주님께 직접 응답하도록 도와야 한다. 지도자의 허락을 받아야만 신앙이 안전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관계는 이 자유를 가린다. 18절의 “우리가 다”는 직분과 재산과 학력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은혜로 주의 영광을 본다는 뜻이다.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과 똑같이 그 영광을 바라보며 변화되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 변화는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도록 계속되므로, 변화가 더딘 사람이나 고난이 오래가는 사람을 지금의 활력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바울도 이 영광을 말한 뒤 4장에서 자신의 약한 몸과 환난을 이야기한다. 교회는 서로의 더딘 변화를 참고 기다리며, 변화를 이루시는 분이 성령이심을 신뢰한다.

이스라엘의 언약 이야기를 정확히 전함

이 본문을 유대인과 유대교에 관한 설교와 교육에 쓸 때는 언약의 이야기를 정확히 전해야 한다. 모세는 하나님께 받은 명령을 백성에게 모두 알렸고, 새 언약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약속되었으며, 바울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방인 성도들을 섬겼다. 14-15절의 수건은 바울 당시 회당 낭독에서 일어나던 일을 말하며, 바울은 주께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진다고 말한다. 유대인을 본래 완고하거나 열등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예화는 이 본문의 은혜를 흐린다. 이방인 신자에게서 수건이 벗겨진 것도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다. 교회는 그 긍휼을 기억하며 이웃의 종교와 민족을 조롱하는 말을 고치고, 모든 사람이 주께 돌아오도록 복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