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세 번째 방문과 두세 증인 (1-2절)

고린도후서 13:1-13은 10장부터 이어진 바울의 변론과 경고를 마무리하고 편지 전체를 축복으로 닫는다. 12:14에서 바울은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라고 말했고, 12:20-21에서는 그 방문 때 다툼과 시기와 비방이 남아 있을까,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이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않았을까 두려워했다. 1절의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는 이 두려움에 곧바로 이어진다. 바울은 첫 방문에서 고린도 교회를 세웠고, 두 번째 방문은 2:1에서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결심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이제 세 번째 방문을 앞두고 그는 교회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밝힌다.

1절 후반의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는 신명기 19:15의 증언 규정을 인용 표지 없이 옮긴 말이다. 그 규정은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고발을 한 증인의 말만으로 확정하지 못하게 한다. “말마다”로 옮긴 ‘레마’(ῥῆμα)는 보통 입으로 한 말을 뜻하지만, 법정 규정을 옮긴 이 문장에서는 판단을 받아야 할 사안이나 고발 내용을 가리킨다.

바울이 이 규정을 고린도 교회에 어떻게 적용하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나뉜다. 한 해석은 바울이 세 번째 방문에서 정식 절차에 따라 증언을 듣고 죄의 사실을 가리겠다는 뜻으로 읽는다.1 다른 해석은 1절의 “세 번째”와 2절의 “두 번째”를 연결하여, 바울의 거듭된 방문과 경고를 율법이 요구하는 증인의 수에 견준 말로 읽는다. 이 해석에 따르면 바울은 법정 절차를 계획하기보다, 고린도 교회가 성경이 요구하는 경고를 이미 충분히 받았다고 말한다.2 1-2절의 흐름은 두 번째 해석을 더 뒷받침한다. 바울은 증언 규정을 인용한 뒤 증인이 누구인지나 증언을 듣는 절차를 말하지 않고, 곧바로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지금 떠나 있으나”를 들어 자신이 경고한 때를 헤아린다. 그러나 “확정하리라”는 결정이 다가오는 방문에서 내려진다는 뜻이므로, 바울이 도착한 뒤 사실을 확인할 가능성까지 본문이 배제하지는 않는다. 바울이 이 인용으로 분명히 밝히는 것은 경고가 충분히 주어졌으므로 다음 방문에서는 판단을 미루지 않겠다는 것이다.

2절은 이 경고를 구체적인 대상에게 돌린다.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는 두 번째 방문 때 한 경고를, “미리 말하노니”는 지금 편지로 되풀이하는 경고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 두 시점을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와 “지금 떠나 있으나”로 구분한다. 함께 있을 때와 떠나 있을 때의 대조는 10:10에 인용된 비판을 떠올리게 한다. 반대자들은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다고 말했고, 바울은 10:11에서 떠나 있을 때 편지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 행하는 일이 같다고 답했다. 2절의 경고는 그 일치를 실제 방문에서 보이겠다는 선언이다.

경고를 받는 사람은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이다. 앞의 사람들은 두 번째 방문 전에 죄를 짓고 그때 바울의 경고를 들은 이들이다. 12:21에서 바울은 이들이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않아 슬퍼하게 될까 두려워했다. “그 남은 모든 사람”은 그 뒤에 죄를 지은 다른 사람들로 보이며, 그 죄에는 부도덕한 행위뿐 아니라 거짓 사도들을 지지한 일도 포함될 수 있다.3 경고의 내용인 “용서하지 아니하리라”(οὐ φείσομαι, 우 페이소마이)의 동사는 “아끼다”, “봐주다”라는 뜻이다. 1:23에서 바울은 같은 동사로 자신이 고린도에 다시 가지 않은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고 말했다. 그때는 그들을 아껴 방문을 미루었지만, 이번에는 잘못한 사람을 징계하기를 삼가지 않겠다는 것이다.4 한국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는 회개한 사람의 용서까지 거절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회개하지 않은 죄를 더 이상 그대로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편지는 그 방문 전에 돌이킬 기회를 준다.

십자가의 약함과 하나님의 능력 (3-4절)

3절은 바울이 엄중하게 대하겠다고 말하는 이유를 밝힌다. 고린도 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구하기 때문이다. “증거”(δοκιμὴν, 도키멘)는 시험을 거쳐 참됨이 드러난 증거를 뜻한다. 그들은 바울의 말이 정말 그리스도의 말씀인지 확인하려 한다. 이 명사와 같은 계열의 말이 5-7절의 “확증하라”, “버림 받은 자”, “옳은 자”로 이어지면서, 바울을 검증하려던 성도들에게 같은 검증이 돌아간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고 답한다. ‘너희 안에서’는 각 사람의 내면보다 공동체 가운데서 일하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5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복음 전파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12:12에서 바울이 말했듯 그들 가운데서 사도의 표가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3절은 2절의 경고에 이어지는 말이다. 사도를 무시하면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증거로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그 능력은 죄를 다루는 엄중한 행동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바울이 지금까지 강하게 대하지 않은 것도 1:23에서 말한 대로 그들을 아꼈기 때문이다.

4절은 그 능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설명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라고 말한다. 원문은 “약하심으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에 같은 전치사 ‘에크’(ἐκ)를 써서 약함과 능력을 맞세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지나간 사건이고, “살아 계시니”는 지금도 이어지는 부활의 생명을 말한다. 로마 세계에서 십자가형은 노예와 반역자에게 내리던 수치스러운 처형이었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약함이 실제였다고 인정한다. 그 약함 뒤에 하나님께서 그분을 살리셨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고 교회 가운데서 일하신다.

바울은 같은 대조를 자신과 동역자들에게 적용한다.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다음에 “그와 함께 살리라”가 이어진다. “그 안에서”는 바울의 약함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에 속한다는 뜻이고, “그와 함께”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미래형 “살리라”는 문장 끝의 “너희에게 대하여”(εἰς ὑμᾶς, 에이스 휘마스)와 이어진다. 이 말은 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으시다고 한 표현을 되풀이하므로, “살리라”는 마지막 날의 부활보다 다가오는 고린도 방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생명을 가리킨다.6 바울은 그 생명과 하나님의 능력이 고린도 교회를 대하는 사역, 특히 하나님께서 사도의 징계를 능력 있게 확증하시는 일에서 드러나리라고 말한다.7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 (5-6절)

5절에서는 검증의 방향이 성도들 자신에게로 바뀐다. 바울에게 증거를 요구하던 사람들이 이제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확증하라”로 옮긴 ‘도키마제테’(δοκιμάζετε)는 3절의 “증거”와 같은 계열의 동사로, 시험하여 참됨을 가려내라는 뜻이다. 개역개정의 “확증하라”는 이미 내린 결론을 굳힌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나, 바울이 요구하는 것은 참된지 가려내는 검증이다. 검증할 내용은 “믿음 안에 있는가”이다. 1:24에서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말한 바울은 이제 그 믿음이 그들의 삶에서 실제로 유지되고 있는지 살피라고 한다.

바울은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이 물음은 “알고 있다”는 대답을 기대한다. 원문의 ‘너희’는 복수이고 ‘안에’는 ‘가운데’로도 읽힌다. 그러나 5절은 각자 자신을 검증하라는 명령에 이어지므로 각 사람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뜻이 조금 더 앞선다.8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이라는 기대를 놓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곧바로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를 덧붙인다. “버림 받은 자”로 옮긴 ‘아도키모이’(ἀδόκιμοί)는 3절의 “증거”와 같은 계열의 말에 부정 접두사가 붙은 형용사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을 뜻한다.9 개역개정의 “버림 받은 자”는 하나님께 최종적으로 거부당한 사람을 먼저 떠올리게 하지만, 원문의 초점은 검증의 결과 참되다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고 이 경고가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바울이 검증하라고 한 것은 그들이 믿음 안에 있는지,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신지이므로, 이 검증에서 떨어진다면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그들의 고백이 참되지 않다는 뜻이 된다. 10:18에서 바울은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라고 말했는데, 이 표현이 ‘아도키모이’의 긍정형인 ‘도키모스’(δόκιμος)다. 고린도 성도들은 자기를 칭찬하는 다른 교사들의 기준으로 바울을 판단했지만, 사람을 참되다고 인정하시는 분은 주님이다. 죄를 붙든 채 사도만 판단하던 성도들은 자신이 고백하는 믿음이 주님 앞에서 참된지 물어야 한다.

6절에서 바울은 같은 말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고린도 성도들이 알기를 바란다. 그들의 믿음은 바울의 복음 전파로 생겼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자신들 안에서 일하고 있음을 안다면, 그 사실이 바울의 복음 전파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보여 주는 가장 좋은 증거가 된다.10

자기 인정보다 성도의 선을 구하는 기도 (7-9절)

7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어떤 악도 행하지 않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기도의 목적을 부정과 긍정으로 밝힌다. 그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기도하지 않는다. “옳은 자”(δόκιμοι, 도키모이)는 검증을 통과한 사람이다. 바울이 구하는 것은 성도들이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들이 회개하여 엄중한 조치가 필요 없어지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징계로 보여 줄 기회가 없고 사람들의 눈에 “버림 받은 자 같을” 수 있다. 바울은 그 결과를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경고가 옳았다고 인정받기보다 성도들이 죄를 짓지 않기를 바란다.11

8절은 그 이유를 밝힌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진리를 위할 뿐”이다. 여기서 진리는 복음과 복음의 진전을 가리킨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어떻게 행할지는 성도들이 악을 행했는지 선을 행했는지에 달려 있다.12 그들이 이미 회개하여 선을 행한다면 바울은 자기 권위를 보이려고 그들을 벌할 수 없다. 반대로 복음을 거스르는 죄가 남아 있다면 바울은 그 죄를 다루어야 한다. 사도의 권한은 진리에 매여 있으므로, 8절은 권한의 남용을 막으면서 필요한 권한의 행사를 요구한다.

9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한다고 말한다. 약함과 강함은 3-4절과 같은 낱말이지만, 여기서 그 뜻은 7절의 문맥을 따른다. 바울이 약하다는 말은 징계의 능력을 보일 필요가 없어 실패한 사도처럼 보이는 상태를, 성도들이 강하다는 말은 그들이 믿음 안에서 선을 행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바울은 자신이 틀린 사람처럼 보이더라도 성도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면 그것을 기뻐한다.13 그가 기도하는 내용은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κατάρτισιν, 카타르티신)이다. 이 명사는 흠 없는 완성보다 손상된 것을 고치고 잃은 것을 되찾는 회복을 가리킨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1에서 같은 계열의 동사로 범죄한 성도를 바로잡는 일을 말한다.14 바울이 구하는 것은 다툼과 회개하지 않은 죄로 상한 고린도 교회가 바로잡히는 일이다.

세우려고 주신 권한 (10절)

10절에서 바울은 떠나 있을 때 이렇게 편지를 쓰는 까닭이 대면할 때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그 권한은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그에게 주신 것이며, 이 표현은 10:8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한다.15 바울은 ‘세움’(οἰκοδομὴν, 오이코도멘)과 ‘무너뜨림’(καθαίρεσιν, 카타이레신)을 대조한다. 10:4에서는 같은 ‘무너뜨림’이라는 명사가 견고한 진을 허무는 일에 쓰였고, 10:5에서 바울이 무너뜨리는 대상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다. 바울의 권한이 무너뜨리는 것은 그런 교만이며, 교회는 세움의 대상이다. 엄중한 행동을 예고하는 까닭도 죄가 지속되는 상황을 끝내고 그들을 주님께 속한 공동체로 세우려는 데 있다.

바로잡고 화평하라는 마지막 권면 (11-12절)

11절에서 바울은 엄중한 경고 뒤에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라고 성도들을 다시 형제로 부르며 권면을 이어 간다. 첫 표현 “기뻐하라”(χαίρετε, 카이레테)를 편지 끝의 작별 인사로 옮기는 번역도 있지만, 이 말은 기뻐하라는 권면으로 읽는 편이 낫다.16 9절에서 성도들의 강함을 기뻐한다고 한 바울이 이제 성도들에게도 기뻐하라고 권한다. “온전하게 되며”(καταρτίζεσθε, 카타르티제스테)는 9절의 “온전하게 되는 것”과 같은 계열의 동사다. 개역개정처럼 수동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성도들이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명령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라’는 뜻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다.17 바울이 9절에서 기도한 회복을 성도들이 직접 실행하라는 명령이다. “위로를 받으며”로 옮긴 ‘파라칼레이스테’(παρακαλεῖσθε)는 위로를 받는다는 뜻과 권면을 받는다는 뜻을 모두 지닌다. 경고와 호소로 이어진 10-13장의 끝에서는 ‘내 권면에 귀를 기울이라’는 뜻이 더 잘 어울린다.18

“마음을 같이하며” 다음의 “평안할지어다”(εἰρηνεύετε, 에이레뉴에테)는 개인의 평안한 감정보다 성도들끼리 화평하게 지내라는 명령이다.19 이 명령들은 12:20에서 바울이 두려워한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에 맞선다. 명령 뒤에는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는 약속이 이어진다.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은 사랑과 평강을 성품으로 지니시고 성도들 가운데 사랑과 평강을 이루시는 분이다.20 바울은 갈등하는 성도들에게 서로 화평하라고 명령하고, 곧이어 그 화평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고 약속한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명령한다.21 ‘거룩한’이라는 수식어는 이 입맞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성도들의 인사로 구별한다. 다투던 사람들이 서로 문안하려면 실제로 서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바울은 이어서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전한다. 문안하는 “모든 성도”는 바울이 편지를 쓰는 곳에서 그와 함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22 그들의 문안은 다툼을 겪는 고린도 교회가 더 넓은 성도의 교제에 속해 있음을 일깨운다.

너희 무리에게 비는 축복 (13절)

13절은 편지를 축복으로 마친다. 바울의 편지는 대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비는 짧은 축복으로 끝나는데, 이 편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를 더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은 원문에서 같은 형태의 세 구절로 이어진다. “성령의 교통하심”(ἡ κοινωνία τοῦ ἁγίου πνεύματος, 헤 코이노니아 투 하기우 프뉴마토스)에서 ‘코이노니아’는 참여와 나눔과 교제를 뜻한다. 앞의 두 구절이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을 말하므로, 셋째 구절도 성령께서 이루시는 교제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다. 성도들이 성령께 함께 참여한다는 읽기도 가능하지만 이 병행 구조에서는 덜 자연스럽다.23 성령께서 이루시는 교제는 파당과 다툼과 시기로 흔들린 고린도 교회에 꼭 맞는 축복이다.24

마지막 구절 “너희 무리와 함께”(μετὰ πάντων ὑμῶν, 메타 판톤 휘몬)는 축복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밝힌다. 2절의 경고가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을 향했다면, 13절의 축복은 “너희 모두”를 향한다. 바울은 일부 사람들의 잘못을 엄하게 다루면서도 마지막 축복에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는다. 경고를 받은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 안으로 부름받는다. 바울이 경고하고 자기 검증을 명령한 것은 이 공동체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다.

성경신학적 통찰

공정한 증언과 돌이킴을 위한 권징

1절이 인용하는 신명기 19:15는 어떤 악이나 죄든 한 증인의 말만으로 사람을 정죄하지 못하게 한다. 같은 원칙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다루는 신명기 17:6에도 나온다. 신명기 19:16-21은 거짓 증인이 나타났을 때의 절차를 덧붙인다. 다투는 두 사람은 여호와 앞, 곧 그때의 제사장들과 재판장들 앞에 서고, 재판장들은 자세히 조사한다. 증언이 거짓으로 드러나면 거짓 증인은 그가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대로 벌을 받는다. 이 법은 고발당한 사람을 근거 없는 공격과 거짓 증언에서 보호하고, 죄가 확인되면 그 악을 공동체 가운데서 제거하라고 명령한다. 바울은 이 규정을 인용하여 자신의 경고가 충분히 반복되었고 다음 방문의 판단이 자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밝힌다. 바울이 실제 증인 절차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해석이 나뉘지만, 그가 인용한 신명기 규정 자체는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다룰 때 지켜야 할 공정함을 분명히 요구한다.

신약에서 이 규정은 사람을 돌이키려는 권징의 절차에도 쓰인다. 마태복음 18:15-17에서 예수께서는 죄를 지은 형제를 먼저 혼자 찾아가 권고하라고 하신다. 형제가 들으면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고 하시는데, 이 말씀도 신명기 19:15를 가져온 것이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신다. 이 절차는 돌아설 사람을 얻는 데서 시작하면서도, 끝까지 거부하는 죄를 공동체가 외면하지 않게 한다. 바울도 고린도후서 2:6-8에서 많은 사람에게서 벌을 받은 한 사람을 이제 용서하고 위로하며 사랑을 나타내라고 권했다. 바울이 1-2절에서 방문 전에 거듭 경고하는 것도 징계의 목적이 사람을 돌이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세움을 향한 경고와 자기 검증

10절의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는 예레미야의 소명과 비슷한 표현이다. 예레미야 1:10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여러 나라와 왕국 위에 세워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신다. 예레미야 24:6에서 하나님은 포로로 끌려간 백성을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예언자가 받은 말씀은 심판도 선포하고 회복도 약속했지만, 심판을 거친 백성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마지막 목적은 다시 세움이었다. 바울의 권한에도 무너뜨리는 힘이 있으나, 그 힘은 10:4-5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향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권한의 목적은 세움이며, 1-10절의 경고도 고린도 교회의 회복을 겨냥한다.

자기 검증은 구약과 바울의 다른 편지에서도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로 나타난다. 예레미야애가 3:40은 무너진 예루살렘에서 우리의 행위를 살펴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부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1:28-32에서 같은 고린도 교회에게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각 사람이 자기를 살피라고 하면서, 주께 판단을 받는 것은 세상과 함께 정죄를 받지 않게 하려는 징계라고 설명했다. 갈라디아서 6:1-4에서는 범죄한 사람을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라고 하면서, 바로잡는 사람도 자신을 살펴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각자 자기 일을 살피라고 한다. 이 본문들에서 자기 검증은 정죄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백성을 돌이키시고 공동체를 바로잡으시는 길이 된다. 바울은 5절에서 성도들에게 자신을 검증하라고 명령하고, 9절에서 그들이 바로잡히기를 구한다.

약함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

4절의 약함과 능력의 역설은 고린도 교회가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중심에 있다. 고린도전서 1:18-25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말했다. 고린도 성도들은 눈에 보이는 강함으로 사도를 판단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약함 가운데 능력을 나타내셨다. 고린도후서 12:9-10에서 바울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 것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이 방식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3-4절에서 바울은 같은 복음에 근거하여, 자신의 약해 보이는 모습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없다는 증거가 아님을 밝힌다.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 안에 계시다는 5절의 말씀과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는 11절의 약속은 언약의 약속과 이어진다. 레위기 26:11-12에서 하나님은 자기 성막을 백성 가운데 세우시고 그들 가운데 행하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16에서 이 약속을 가져와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했고, 7:1에서는 이 약속을 가진 사람들에게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 권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약속은 거룩한 삶을 요구한다. 12:21에서 바울이 회개하지 않은 더러움과 음란함을 슬퍼하고 5절에서 자기 검증을 명령하는 것도,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을 비는 마지막 축복

13절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복을 선언하게 하신 구약의 예배를 떠올리게 한다. 민수기 6:22-27에서 하나님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는 말을 주셨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고 지키시며, 얼굴을 비추사 은혜를 베푸시고, 얼굴을 들어 평강 주시기를 원한다는 축복이다. 13절은 민수기를 인용하지 않지만, 같은 하나님의 복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로 빈다. 경고와 갈등으로 가득했던 편지도 이 축복으로 끝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회복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에 맡기며 편지를 마친다.

기독론적 해석

사도를 통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

3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요구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요 사신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확신한다.25 5:20에서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으로 소개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했다. 사도의 말에는 그리스도의 권위가 실리지만, 그 권위는 진리에 매여 있다. 8절이 말하듯 바울은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분별할 기준은 그의 말재주나 외모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이 물어야 할 것은 그의 말과 삶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일치하는가였다.

십자가의 약함과 부활의 생명

4절은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밝힌다. 그리스도께서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이 약함은 겉모습에 그치지 않았다. 8:9가 말하듯 부요하신 이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고, 빌립보서 2:8이 말하듯 자기를 낮추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연약함과 수치와 죽음을 실제로 짊어지셨다. 그러나 그분은 지금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신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바로 그분이 살아 계시므로, 사도의 낮아진 모습만 보고 그가 전하는 그리스도까지 무능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 3절이 말하듯 그리스도는 고린도 교회를 대하여 약하지 않으시고 그들 가운데서 강하시다.

4절 후반에서 바울은 자신과 동역자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약하나”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말한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신 일은 그리스도께만 속한 구원 사역이다. 바울은 그 일을 되풀이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분의 약함과 생명에 참여한다. 10: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성도들을 권했고, 지금까지 그들을 아끼며 기다렸다. 다가오는 방문에서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가 고린도 교회를 대하는 일에서 드러날 것이다. 4절의 “살리라”가 직접 가리키는 것은 이 방문이다. 그러나 그 생명을 주시는 분은 4:14에서 예수와 함께 바울도 다시 살려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이다. 바울이 지금 사역에서 의지하는 능력과 마지막 날에 기대하는 부활은 같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성도 안에 계신 그리스도

5절에서 자기 검증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사실이다. 로마서 8:9-10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며,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살아 있다고 말한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성도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확신의 근거이며, 그 확신이 참된지 묻는 기준이다. 그러므로 5절의 자기 검증은 자기 힘으로 합격선을 넘으려는 노력이 될 수 없다. 성도들은 3절에서 공동체 가운데 강하게 일하신다고 한 그리스도께서 자신들 안에 계신지, 그분께 의지하여 사는지를 살핀다. 그리스도께서 안에 계신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은 죄와 다툼을 그대로 둘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라고 주신 권한

7절과 9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버림 받은 자 같고 약해 보이더라도 성도들이 선을 행하고 강하면 기뻐한다고 말한다. 이 약함은 4절의 십자가 참여와 같은 뜻이 아니라, 징계의 능력을 보일 필요가 없어 실패한 사도처럼 보이는 상태다. 바울의 권한은 주께서 교회를 세우라고 주신 것이므로(10절), 그는 자기 명예를 지키는 데 그 권한을 쓰지 않는다. 이 권한을 주신 “주”는 바울이 대신하여 말하는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26 고린도전서 3:10-11에서 바울은 자신을 터를 닦은 건축자로 소개하면서도, 그 터는 이미 닦아 둔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말했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한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일꾼이다.

갈등한 공동체를 세우는 그리스도의 은혜

13절의 축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시작한다. 이 은혜는 8:9에서 말한 대로 부요하신 이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은혜다. 바울은 이 은혜에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시는 교제를 더하여 빈다. 11절의 “마음을 같이하며”와 같은 권면은 빌립보서 2:2에도 나온다.27 빌립보서 2:1-5에서 바울은 성령의 교제를 근거로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라고 권하고, 곧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이어 간다. 고린도 성도들이 같은 마음을 품는 길도 자기를 낮추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함께 따르는 것이다. 바울은 경고를 받은 사람들까지 포함한 “너희 무리”에게 이 은혜를 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갈등한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근거다.

현대적 적용

공정한 확인과 피해 호소의 보호

신명기 19장의 증언 규정은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못하게 하고, 재판장에게 자세히 조사하라고 요구한다. 교회가 누군가의 잘못을 다룰 때에도 지도자의 확신이나 떠도는 소문으로 결론을 내리지 말고, 당사자의 말을 듣고 실제로 일어난 일을 확인해야 한다. 이 원칙은 권한을 가진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바울도 12:16-18에서 자신이 고린도 성도들을 속여 이득을 취했다는 말에 대해 디도와 다른 형제를 보낸 일을 들어 답했다. 지도자에 대한 근거 없는 공격도, 확인된 잘못도 같은 공정한 절차로 다루어야 한다.

두세 증인의 규정을 피해 호소를 묵살하는 근거로 써서는 안 된다. 신명기 19:16-18의 재판장들은 한 사람이 고발했다는 이유로 사건을 덮지 않고 자세히 조사해야 했다. 교회도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그 호소를 살펴야 한다. 증언 규정은 거짓 고발에서 사람을 보호하면서 진실을 밝히려고 주어졌다. 그 규정을 약한 사람을 침묵하게 만드는 데 쓰면 율법의 목적을 거스르게 된다.

돌이킬 길을 보여 주는 경고

바울은 방문하기 전에 거듭 경고하여,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바뀌어야 하며 바뀌지 않으면 어떤 일이 뒤따를지 미리 알렸다. 1-2절에서 그는 이 반복된 경고를 근거로 다음 방문의 판단을 예고한다. 공동체가 잘못을 다룰 때에도 상대가 돌아설 길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경고가 먼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가면 그대로 두지 않겠다고도 말했다. 회개를 기다린다는 이유로 잘못을 바로잡는 일을 끝없이 미루어서는 안 된다.

남보다 자신을 먼저 살피는 검증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명령은 바울만 검증하려던 성도들을 향한다. 다른 사람의 신앙을 평가하는 데 익숙한 사람일수록 이 명령 앞에서 자신을 예외로 두어서는 안 된다. 그 검증이 다룰 구체적인 죄는 바울이 12:20-21에서 두려워한 다툼과 시기와 비방과 수군거림, 그리고 회개하지 않은 성적 죄다. 이 검증은 가볍지 않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신지를 묻고,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믿음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자기 검증이 끝없는 불안으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 5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 묻고, 바울은 성도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기를 기대한다. 자신을 살필수록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성취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약속을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 검증의 목적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께 돌아가 그분 안에서 사는 데 있다.

세우기 위해 쓰는 권한

사람들이 경고를 듣고 잘못을 고쳤다면 지도자는 그 변화를 기뻐해야 한다. 바울은 성도들이 선을 행하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약해 보이더라도 성도들이 강하면 기뻐한다고 했다(7-9절). 2:6-8에서도 바울은 충분히 벌을 받은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권했다. 회개한 사람에게 지도자의 권위를 입증하려고 추가로 벌을 주거나, 이미 바로잡은 실패를 거듭 꺼낼 이유가 없다.

바울은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8절). 교회의 평판을 지키려고 사실을 축소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을 불리하게 보이도록 일부 사실만 골라 말해서는 안 된다. 진리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도 감추지 않는다. 지도자의 잘못이 확인되면 그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를 회복할 길을 찾아야 한다.

주께서 주신 권한이 세우기 위한 것이라면, 교회 안의 지적과 비판도 같은 기준으로 살펴야 한다. 잘못을 지적하는 말이 상대를 바로잡아 세우는지, 상대를 무너뜨려 자신을 높이는지를 물어야 한다. 바울은 경고하면서 성도들이 악을 행하지 않기를, 그리고 그들이 온전하게 회복되기를 하나님께 구했다(7, 9절). 누군가를 권면하거나 징계해야 하는 사람이 먼저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바울의 본을 따르는 일이다.

화평하고 서로를 맞이하는 교회

11절의 “마음을 같이하며”를 모든 의견 차이를 숨기라는 요구로 쓰면 갈등의 원인이 그대로 남는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 권면을 받아들이라고 한 다음 서로 화평하라고 명령했다. 화평하려면 바울이 12:20에서 지적한 다툼과 시기와 비방을 버려야 한다. 성도들은 사실을 말하되 상대를 비방하지 않고, 잘못을 바로잡되 상대가 돌이킬 길을 열어 두어야 한다. 그 화평을 이루시는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인사의 방식은 문화와 세대에 따라 다르지만, 바울이 거룩한 입맞춤으로 요구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사람들이 서로를 맞이하는 일이다. 경고를 보낸 바울은 마지막 축복에서 “너희 무리”, 곧 모든 성도에게 은혜를 빈다. 오늘 예배를 마치며 이 축복을 들을 때에도 그 “모두”에는 갈등 때문에 멀어진 성도가 들어 있다. 같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서로를 맞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