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세 번째 방문과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약속 (14절)
고린도후서 12:14-21은 10-13장의 변론 가운데 바울이 세 번째 방문을 앞두고 쓴 단락이다. 바로 앞 12:13에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은 일 외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대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은 뒤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고 반어적으로 말했다. 14절은 이 반어에 이어 앞으로의 계획을 밝힌다.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는 이 문장만 보면 세 번째로 준비했다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지만, 13:1의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는 이번 길이 세 번째 방문임을 분명히 한다. 첫 방문은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며 교회를 세운 때였다(행 18:1-11). 두 번째 방문은 13:2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가 가리키는 방문이다. 2:1에서 바울이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 방문은 근심 가운데 이루어졌다.
세 번째 방문에서도 바울은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한다. 이 동사는 남에게 무거운 짐이 된다는 뜻이며, 여기서는 생활비를 교회에 의존하는 일을 가리킨다. 바울은 11:9에서 같은 동사로 고린도에 있을 때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였음”을 말하며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자신의 부족을 채웠다고 설명했고, 12:13에서도 이 동사를 썼다. 14절의 약속은 고린도에서 생활비를 받지 않던 방침을 이번 방문에도 지키겠다는 뜻이다. 11:12에 따르면 이 방침에는 바울과 같은 자격으로 인정받으려는 이들의 “기회를 끊으려” 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11:7의 “죄를 지었느냐”라는 물음과 12:13의 “용서하라”는 반어를 보면, 바울이 돈을 받지 않은 일은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 일부에게 서운함이나 의심을 산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은 이 방침의 이유를 다시 밝힌다.
재물이 아니라 성도들 자신을 구함 (14절)
그 이유는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라는 짧은 대구에 담겨 있다. 원문은 “너희의 것들”과 “너희”를 맞세우고(τὰ ὑμῶν ἀλλ’ ὑμᾶς, 타 휘몬 알 휘마스), 개역개정은 앞의 말을 문맥에 맞추어 “너희의 재물”로 풀었다. 바울이 얻으려는 것은 성도들의 소유가 아니라 성도들 자신이다. 이 말은 생활비를 받지 않는 방침의 이유이며, 뒤에서 바울이 성도들의 죄를 근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20-21절).
14절 후반의 비유는 가정에서 가져온 것이다. 개역개정의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는 흔히 있는 일을 묘사하는 문장처럼 읽힌다. 그러나 원문에는 “마땅히 해야 한다”는 동사(ὀφείλει, 오페일레이)가 있어서, 바울은 누가 누구를 위하여 재물을 모아 둘 책임이 있는지를 말한다. 비유가 그리는 관계는 아직 자라는 자녀의 생계를 부모가 맡는 관계이며, 그 관계에서는 부모가 먼저 내어 준다. 고린도전서 4:15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고린도 성도들을 낳았다고 말했다. 그들의 부모로서 바울은 그들에게서 받기보다 그들을 위하여 내어 주려 한다.
성도들을 위하여 다 쓰이겠다는 결심과 사랑의 물음 (15절)
15절에서 바울은 이 책임을 자신의 결심으로 밝힌다. “크게 기뻐하므로”(ἥδιστα, 헤디스타)는 12:9에서 바울이 약한 것들을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자랑하겠다고 할 때 쓴 부사와 같다. 이어서 바울은 “재물을 사용하고”(δαπανήσω, 다파네소)에서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ἐκδαπανηθήσομαι, 에크다파네테소마이)로 나아간다. 뒤의 동사는 앞의 동사를 강화한 수동형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쓰인다는 뜻이다.1 바울은 가진 재물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하여 다 쓰이겠다고 말한다. 이 말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기쁨으로 밝힌 자발적인 결심이다.
바울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자신을 쓰겠다고 말한다. 한국어 “영혼”은 몸과 구별되는 내면을 떠올리게 할 수 있지만, 여기서 “영혼”(ψυχῶν, 프쉬콘)은 사람 전체를 가리키므로 “너희를 위하여”나 “너희 삶을 위하여”에 가깝다.2 바울이 자신을 쓰는 대상은 14절에서 구한다고 말한 성도들 자신이다. 15절 끝의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에서 바울을 덜 사랑하는 쪽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문맥상 고린도 성도들이며, 이 질문은 바울이 그들을 넘치도록 사랑하는 것과 그들이 바울을 그보다 적게 사랑하는 것을 견준다.3 이 질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랑에 못 미치는 응답에 대한 아픔을 드러내고, 성도들에게 그들의 응답이 그 사랑에 걸맞은지 묻는다. 그런 점에서 이 질문은 책망이기도 하다. 바울은 그 아픔과 책망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쓰겠다는 결심을 거두지 않는다.
교활하다는 비난 (16절)
16절에서 바울은 먼저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라는, 고린도 성도들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내세운다. 개역개정이 “하여간”으로 옮긴 첫마디(Ἔστω δέ, 에스토 데)는 “그렇다고 하자”는 양보의 말이다. 이어지는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는 원문에서 인용 표지 없이 1인칭으로 서술된다. 개역개정은 “어떤 이의 말이”와 문장 끝의 “하니”를 보충하여 이 말이 바울을 향한 비난임을 분명히 했다. 이런 표지가 없으면 바울이 스스로 속임수를 인정하는 것처럼 읽힐 수 있다. 비난한 쪽이 고린도 성도들인지 이른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인지는 본문에서 분명하지 않으며, 이 비난은 이미 교회 안에서 나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
비난의 핵심은 “교활한 자”(πανοῦργος, 파누르고스)와 “속임수로”(δόλῳ, 돌로)라는 두 말이다. 두 말은 뜻이 가까우며, 드러나지 않는 수단으로 남을 속여 이익을 챙기는 모습을 그린다. 같은 어근의 말이 이 서신에 이미 나온다. 바울은 4:2에서 자신이 “속임으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11:3에서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했다고, 11:13에서는 거짓 사도들을 “속이는 일꾼”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이 비난은 바울이 자신에게 없다고 밝히고 뱀과 거짓 사도들의 특징으로 묘사한 모습을 바울에게 돌리는 셈이다. “취하였다”도 11:20에서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서 “빼앗는” 사람들을 그들이 용납한다고 꼬집을 때 쓴 동사다. 바울의 말대로라면 성도들에게서 실제로 가져간 쪽은 그 사람들이었는데, 의심은 아무것도 받지 않은 바울을 향했다.
보낸 사람들과 디도에 관한 질문 (17-18절)
바울은 이 비난에 원칙을 내세워 답하지 않고, 고린도 성도들이 직접 겪은 일을 묻는다. 17-18절의 질문은 바울이 보낸 사람들과 디도를 거론한다. 그러므로 비난은 바울이 직접 돈을 받지 않으면서 보낸 사람들을 통해 이득을 챙겼다는 의심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디도가 고린도에서 연보를 맡았던 점을 생각하면(8:6), 그 의심은 디도 일행이 고린도에서 모은 연보를 바울이 차지했다는 것이었을 수 있다.5 8:20-21에서 바울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조심하며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한다고 말했다. 다만 16절은 비난의 구체적 내용을 밝히지 않으므로, 연보와의 관련은 17-18절과 8장에서 끌어낸 추론이다.
17절은 “아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μή, 메)이다. 개역개정은 이를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로 옮겼다. “이득을 취하다”(ἐπλεονέκτησα, 에플레오넥테사)는 남보다 더 가지려고 상대를 이용한다는 뜻이며, 7:2에서 바울은 같은 동사로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고 말했다.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사람으로는 디모데(고전 4:17; 16:10)와 디도가 있다. 바울은 보낸 사람 가운데 누구를 통해서든 자신이 성도들을 이용한 일이 있었는지 묻는다.
18절에서 바울은 디도를 이름으로 든다.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의 “권하고”는 8:6에서 바울이 디도를 “권하여”, 그가 고린도에서 이미 시작한 연보를 성취하게 했다는 말과 같은 동사다. 함께 보낸 형제는 이름이 없으며 8:16-19에서 말한 형제일 수 있다.6 다만 이 파송이 이미 이루어진 방문인지, 8장에서 디도와 형제들을 보내는 일을 편지 받는 이의 시점에서 과거로 표현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7 또 18절은 형제 한 사람만 언급하므로, 17-18절의 질문이 8장에서 디도와 함께 보내는 두 형제까지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어지는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도 부정의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μήτι, 메티)이다. 바울의 논거는 고린도 성도들이 디도를 직접 겪었다는 사실이다. 7:7과 7:13-15에 따르면 고린도 성도들은 두려움과 떪으로 디도를 영접했으며 디도는 그들에게서 위로를 받고 그들을 향한 심정이 더욱 깊어졌다. 성도들이 기억하는 디도의 행적이 곧 의혹에 대한 대답이다.
같은 마음가짐과 같은 발자국 (18절)
18절 끝의 두 질문은 “그렇다”는 대답을 기대한다(οὐ, 우). 개역개정은 이를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로 옮겨 πνεύματι(프뉴마티)를 성령으로 해석했다. 이 번역도 가능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바울과 디도가 같은 마음가짐으로 행했다는 뜻으로 읽는 편이 더 낫다.8 이어지는 “보조”(ἴχνεσιν, 이크네신)는 발자국을 뜻하며, 두 질문은 같은 구조로 병행한다. 같은 발자국이 두 사람의 행동 방식을 말하므로, 앞의 πνεύματι도 두 사람의 태도와 동기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바울은 7:13에서 같은 낱말로 디도의 내면을 가리켰고, 개역개정도 그곳에서는 “그의 마음”으로 옮겼다. 17-18절의 물음 자체가 바울과 디도가 성도들을 이용했는지에 관한 것이므로, 바울이 내세우는 것은 디도와 자신이 같은 동기로 같은 방식으로 일했다는 사실이다. “행하지”(περιεπατήσαμεν, 페리에파테사멘)는 본래 걷는다는 뜻의 동사로, 4:2의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에도 쓰였다. 바울과 디도는 속임수의 길을 걷지 않았고 같은 발자국을 따라 일했다.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세우려는 말 (19절)
19절에서 바울은 지금까지의 변론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짚는다. “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의 “이 때까지”(Πάλαι, 팔라이)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다는 뜻이다. “자기 변명을 하는”(ἀπολογούμεθα, 아폴로구메타)은 법정에서 피고가 자신을 변호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원문은 바울이 “너희에게”(ὑμῖν, 휘민) 변명한다고 말하므로, 성도들은 자신들이 바울의 변호를 듣고 판결하는 자리에 있다고 여긴 셈이다. 바울은 그 구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바울의 말을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며,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서 말한다.
이어서 바울은 그 말의 목적을 밝힌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여기서 “이 모든 것”은 바울의 말뿐 아니라 그의 행동까지 아우를 수 있다.9 그렇다면 생활비를 받지 않은 일과 디도를 보낸 일도 성도들을 세우기 위한 일에 포함된다. “사랑하는 자들아”는 15절에서 사랑을 덜 받는다고 말한 바울이 성도들을 부르는 말이다. 한국어 “덕”은 개인의 도덕적 품성을 떠올리게 하지만, “덕을 세우기”로 옮긴 명사(οἰκοδομῆς, 오이코도메스)는 집을 짓는 일에서 나온 말로 공동체를 세워 가는 일을 가리킨다. 10:8과 13:10에서 바울은 주께서 주신 권세가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며 같은 명사를 썼다. 20절은 바로 이 세움을 무너뜨리는 행동들을 열거한다.
서로 실망할 만남과 세움을 무너뜨리는 죄 (20절)
20절은 이유를 밝히는 접속사(γάρ, 가르)로 시작한다. 바울이 모든 것을 성도들을 세우기 위하여 말하는 까닭은 고린도에 갔을 때 마주할 일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는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자신도 “너희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한다. 원문은 ‘찾다’라는 같은 동사를 능동과 수동으로 맞세워(εὕρω ... εὑρεθῶ, 휴로 ... 휴레토) 양쪽이 서로에게 실망하는 만남을 그린다. 성도들이 원하지 않는 바울의 모습은 13:2의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는 경고가 실행되는 모습이다. 10:2에서 바울은 함께 있을 때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고 말했고, 13:10에서는 떠나 있을 때 편지를 쓰는 이유가 대면할 때 “엄하지 않게” 하려는 데 있다고 밝혔다. 바울은 성도들이 미리 돌이켜 그런 만남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두려움의 두 번째 대상은 동사 없이 이어지는 여덟 개의 명사, 곧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다. 처음 네 단어는 갈라디아서 5:20의 육체의 일 목록에도 같은 순서로 나온다. 그 가운데 “당 짓는 것”(ἐριθεῖαι, 에리테이아이)은 자기 이익을 좇는 태도와 그로 인한 편 가르기를 가리킨다.10 “비방”은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말이고, “수군거림”은 뒤에서 소문을 퍼뜨리는 귓속말이다. “거만함”은 부풀어 오른다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명사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4:18-19와 8:1에서 교만을 말할 때 쓴 동사와 같은 어근이다. “혼란”은 고린도전서 14:33에서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할 때 쓴 말과 같다. 고린도전서 1:11과 3:3에서 바울은 이미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시기를 다루었고, 이제 그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을까 두려워한다. 이 행동들은 모두 성도들 사이의 관계를 해치며, 19절의 세움과 정면으로 부딪친다.
하나님께서 낮추실까 하는 두려움 (21절)
21절에서 바울의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실 일로 이어진다. 개역개정은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로 옮겼다. 원문의 “다시”(πάλιν, 팔린)는 “갈 때에”를 꾸밀 수도 있고 “낮추실까”를 꾸밀 수도 있으며, 개역개정은 앞의 연결을 택했다. 그러나 바울이 20절에서 이미 자신의 방문을 말했으므로 “다시”는 “낮추실까”에 걸린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11 이 읽기를 따르면 바울은 2:1이 말하는 근심 중의 방문 때 겪은 낮아짐이 되풀이될까 두려워한다.
“낮추실까”(ταπεινώσῃ, 타페이노세)와 같은 어근의 말이 10:1과 11:7에도 나온다. 10:1에서 바울은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하다는 평을 받는다고 말했고, 10:10은 그것이 반대자들의 말이었음을 보여 준다. 11:7에서는 성도들을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복음을 값없이 전했다고 말했다. 21절의 낮아짐은 반대자들이 조롱한 약함과도, 바울이 스스로 택한 낮아짐과도 다르다. 바울을 낮추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바울은 그 일을 두려워한다. 21절 후반이 보여 주듯 이 낮아짐은 바울이 세운 교회에서 회개하지 않은 많은 사람을 마주하는 일과 이어져 있다. 바울은 자신을 낮추실 분을 “내 하나님”, 곧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12
회개하지 않은 죄 때문에 슬퍼할까 하는 두려움 (21절)
바울은 또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한다. “슬퍼할까”(πενθήσω, 펜테소)는 죽은 이를 두고 곡하는 일에도 쓰이는 말로, 여기서는 밖으로 드러나는 애통을 가리킨다.13 고린도전서 5:2에서도 바울은 같은 동사로, 음행 사건 앞에서 교만해진 교회가 오히려 슬퍼했어야 한다고 책망했다. “전에 죄를 지은”(προημαρτηκότων, 프로에마르테코톤)은 13:2의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같은 말로, 같은 무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지은 죄는 믿기 전의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 뒤의 죄다.14 그 죄가 바울의 두 번째 방문 이후에도 이어졌는지는 확정하기 어렵다. 본문이 분명히 밝히는 것은 그들이 “회개하지 아니함”(μὴ μετανοησάντων, 메 메타노에산톤), 곧 마음과 삶의 방향을 돌이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7:9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근심이 “회개함에” 이른 일을 기뻐했다. 그런 바울이 이제 아직 돌이키지 않은 많은 사람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한다.
그 죄는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이다. 같은 세 단어가 갈라디아서 5:19에도 순서를 달리하여 나온다. “더러움”(ἀκαθαρσίᾳ, 아카타르시아)은 넓게 부정함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성적 부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고, “음란함”(πορνείᾳ, 포르네이아)은 여러 형태의 성적 부도덕을, “호색함”(ἀσελγείᾳ, 아셀게이아)은 드러내 놓고 행하는 방종을 가리킨다. 바울은 세 말을 뜻이 가까운 성적 죄로 묶어 쓴 것으로 보인다.15 고린도전서 5-6장에서 이미 음행 문제를 다룬 바울에게 이 죄는 새로운 주제가 아니었다. 20절의 다툼과 비방, 21절의 성적 죄는 모두 19절이 말한 교회의 세움을 가로막는다.
성경신학적 통찰
성도를 이용하지 않고 돌보는 지도자
14절에서 바울이 성도들의 소유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구한다고 한 말은 14-21절 전체를 이끈다. 바울은 성도들 자신을 구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고(14절), 의혹에는 그들이 직접 겪은 사실로 답하며(17-18절), 그들이 회개하지 않은 채 남아 있을까 두려워한다(20-21절). 재정의 정직과 죄에 대한 근심은 서로 다른 주제처럼 보이지만, 바울에게는 둘 다 성도들을 세우려는 목적에서 나온다(19절).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맡은 사람은 백성을 이용하지 않아야 했고, 백성이 바르게 서도록 돌보아야 했다.
사무엘상 12:1-5에서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뒤 온 백성 앞에서 자신이 누구의 소나 나귀를 빼앗았는지, 누구를 속이거나 압제했는지, 누구에게서 뇌물을 받았는지 묻고, 그런 일이 있으면 갚겠다고 말한다. 백성이 그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하자 사무엘은 여호와와 그분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그 증인으로 세운다. 17-18절에서 바울도 자신과 자신이 보낸 사람이 성도들을 이용했는지 묻고 그 대답을 성도들의 기억에 맡긴 뒤, 19절에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말한다고 밝힌다. 두 장면에서 지도자의 재정적 정직은 백성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일이면서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는 일이다.
에스겔 34장은 이 책임을 저버린 목자들을 고발한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살진 양을 잡아 기름을 먹고 털을 입으면서도 양 떼를 먹이지 않았고, 약한 양을 강하게 하거나 병든 양을 고치거나 잃어버린 양을 찾지 않았다(겔 34:2-4). 하나님은 자기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지시고 친히 찾아 돌보겠다고 약속하신다(겔 34:10-11). 에스겔의 목자들은 양에게서 얻을 것을 구했고, 바울은 양 자신을 구한다. 에스겔이 꾸짖은 목자들의 잘못에는 양을 이용한 일과 약한 양을 돌보지 않은 일이 모두 들어 있다. 바울도 성도들의 재물을 거절할 뿐 아니라, 그들의 죄를 근심하며 그들이 돌이키기를 바란다(20-21절).
짐이 되지 않고 바르게 이끄는 부모
14절의 부모 비유는 바울이 다른 편지에서도 쓰는 그림이다. 고린도전서 4:14-17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녀라 부르며,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어도 아버지는 많지 않고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다고 말한다. 같은 대목에서 바울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권하려고 이 말을 쓴다고 밝힌다. 데살로니가전서 2:7-12에서는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르듯 성도들을 대했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며 복음을 전했으며,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각 사람을 권면했다고 회고한다. 그곳에서도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행했는지 성도들과 하나님이 증인이시라고 말한다(살전 2:10). 바울에게 부모의 그림은 자녀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태도와 자녀를 바르게 이끄는 권면을 모두 담는다. 14-21절에서도 바울은 부모로서 성도들의 짐이 되지 않으려 하고, 부모로서 그들의 죄를 근심한다.
생활비를 받지 않은 선택과 정당한 부양
바울이 고린도에서 생활비를 받지 않은 일은 모든 사역자를 위한 규정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군인과 포도원을 만든 사람과 양 떼를 기르는 사람의 예, 그리고 신명기 25:4의 인용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그 사역으로 생활할 권리를 논증하고, 주께서 복음 전하는 이들이 복음으로 살도록 명하셨다고 말한다(고전 9:7-14). 그런데도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고린도에서는 그 권리를 쓰지 않았다(고전 9:12, 15, 18). 반면 빌립보 교회가 보낸 선물은 받았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불렀다(빌 4:15-18). 그 대목에서 바울은 자신이 구하는 것은 선물 자체가 아니라 성도들에게 쌓일 열매라고 말한다(빌 4:17). 선물을 받을 때도 거절할 때도 바울이 구한 것은 성도들 자신의 유익이었다. 교회가 사역자를 정당하게 부양할 책임과 사역자가 성도들을 이용하지 않을 책임은 둘 다 유효하다.
다른 지체의 유익이라는 세움의 기준
19절의 세움은 고린도 교회가 이미 들은 가르침이었다. 고린도전서 8:1에서 바울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말했고,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예언과 방언 같은 은사를 교회의 덕을 세우는지에 따라 판단하며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권했다(고전 14:3-5, 12, 26). 덕을 세우는 기준은 다른 지체가 얻는 유익이었다. 20절의 다툼과 시기, 비방과 수군거림은 이 기준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20-21절의 죄들과 상당 부분 겹치는 갈라디아서 5:19-21의 목록 끝에서 바울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바울은 공동체를 해치는 말과 태도를 가벼운 허물로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와 성적 죄
21절의 성적 죄는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이 편지의 가르침과 이어진다. 6:16에서 바울은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6:17에서 이사야 52:11의 말로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권한다. 이 “부정한 것”(ἀκαθάρτου, 아카타르투)은 21절의 “더러움”과 같은 어근이다. 7:1에서는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 권했다. 고린도전서 6:15-20에서도 바울은 성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고 성령의 전이므로 음행을 피하라고 명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교회에 회개하지 않은 성적 죄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당사자 개인의 문제를 넘어 공동체 전체의 거룩함에 관한 문제가 된다.
회개를 바라는 근심과 경고
바울은 회개가 무엇을 낳는지 이미 보았다. 7:8-11에서 그는 편지 때문에 성도들이 근심한 일보다 그 근심이 회개에 이른 일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회개는 간절함과 변증과 분함과 두려움과 사모함과 열심과 벌하는 일로 나타났다. 21절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 반대, 곧 죄를 지은 채 돌이키지 않는 상태다. 고린도전서 5:2에서 바울은 음행 앞에서 교만해진 교회가 오히려 슬퍼했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회개하지 않은 이들 때문에 바울 자신이 슬퍼하게 될까 두려워한다. 13:1-2에서 바울은 세 번째 방문 때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을 확정하겠다고 하고,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경고한다. 13:10이 밝히듯 바울이 떠나 있을 때 이렇게 쓰는 목적은 대면할 때 엄하게 대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 바울의 근심과 경고는 성도들이 그 전에 돌이키기를 바라는 데서 나온다.
기독론적 해석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는 사도
14-21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은 19절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에 나온다. 바울은 2:17에서도 같은 말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한다는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서 말한다는 뜻이고, 하나님 앞에서 말한다는 것은 그 말을 판단하실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5:10에서 바울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된다고 말했다. 바울의 마지막 재판관은 고린도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므로, 그는 성도들의 판결을 얻으려고 변명하지 않는다. 그만큼 바울의 말과 행동은 더 무거운 책임 아래 있다. 생활비를 받지 않은 일, 디도를 보낸 일,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말은 모두 그리스도 앞에서 셈해야 할 일이며, 바울은 그 모든 것이 성도들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19절).
가난해지신 그리스도와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사도
바울이 성도들의 소유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구하는 이유는 그가 전한 복음에서 드러난다. 8:9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상기시켰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서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가난해지셨다. 이 은혜를 전하는 사도가 성도들의 소유를 노린다면 자신이 전하는 복음과 반대로 사는 셈이 된다. 5:14-15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을 강권하며,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자들이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신다. 15절에서 바울이 사랑을 덜 받는 아픔을 말하면서도 자신을 쓰겠다는 결심을 거두지 않는 것도, 그의 사랑이 성도들의 반응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근거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 주신 일과 바울이 자신을 쓰는 일은 구별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고(5:14-15), 그 죽음은 그리스도께서 홀로 이루신 구원이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을 위하여 재물과 자신을 쓰는 일은 누구의 죄도 대속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응답하여 자신을 쓴다. 15절의 결심은 그리스도께 사랑받은 사도가 그 사랑을 따라 성도들을 섬기겠다는 응답이다.
그리스도의 지체를 위한 회개 요구
21절의 회개하지 않은 성적 죄도 그리스도의 구속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셔서 성도들이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고(5:2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다(5:17). 고린도전서 6:15-20에서 바울은 성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값으로 산 것이므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했다. 회개하지 않은 음행은 그리스도의 지체를 음행에 내어 주는 일이다(고전 6:15). 바울이 그런 죄를 슬퍼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도들의 삶을 실제로 바꾸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바울이 두려워하는 낮아짐
“낮추다”(ταπεινόω, 타페이노오)라는 동사는 그리스도와 바울에 대해 서로 다른 일을 가리킨다. 빌립보서 2:8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11:7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높이려고 스스로 낮아져 복음을 값없이 전했다. 이 자발적 낮아짐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사도의 섬김이다. 21절의 낮아짐은 성격이 다르다. 바울이 택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성도들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는 일이며, 회개하지 않은 이들 때문에 겪을 슬픔과 맞닿아 있다. 이 방문을 앞둔 바울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13:3-4에 나온다. 고린도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구했고,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듯 자신도 그 안에서 약하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아 성도들을 대하겠다고 말한다. 바울이 엄하게 대하게 되더라도 그는 주께서 무너뜨리지 않고 세우려고 주신 권한을 따라 행한다(13:10). 바울이 바라는 것은 그 권한을 엄하게 쓰지 않아도 되도록 성도들이 미리 돌이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드릴 정결한 교회
11:2-3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말한 뒤, 뱀이 하와를 미혹한 것처럼 그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20절에서도 바울은 같은 말로 두려움을 표현한다(φοβοῦμαι ... μή πως, 포부마이 ... 메 포스). 14절의 “오직 너희니라”는 이 중매자의 목적과 이어진다. 바울이 구하는 성도들은 바울 자신에게 속할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드려질 사람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툼과 음란이 남은 교회를 만날까 두려워하고, 그 전에 성도들이 돌이키기를 바란다.
현대적 적용
성도들의 것보다 성도들 자신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라는 바울의 말 앞에서 교회는 성도들에게 무엇을 구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등록 교인 수와 헌금 액수와 봉사 인력은 교회 운영에 필요한 정보지만, 그것이 사람을 바라보는 첫 기준이 되면 교회는 성도들 자신보다 성도들의 것을 구하게 된다. 바울은 8:8에서 연보를 권하면서도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라고 말했다. 헌신을 요청할 때에도 교회는 성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
사역자의 사례와 희생을 대하는 태도
사역자의 사례 문제는 이 본문과 고린도전서 9장을 함께 읽어야 균형을 잡을 수 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복음으로 살도록 하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사역자의 생활을 책임 있게 돌보아야 한다. 사역자는 받을 권리를 복음보다 앞세우지 않는다. 사례를 줄이거나 받지 않기로 한 사역자도 그 선택을 다른 사역자를 판단하는 잣대로 삼거나, 자신의 희생을 내세워 교인들에게 부채감을 지워서는 안 된다. 바울도 자신의 선택을 고린도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 설명했다(19절).
바울은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라고 물으며 자신의 아픔을 숨기지 않았고, 그 물음으로 성도들이 자신들의 응답을 돌아보게 했다. 사역자도 자신의 상처를 하나님과 공동체 앞에 정직하게 말할 수 있고, 필요하면 성도들의 잘못된 응답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쓰겠다는 결심을 성도들의 사랑을 조건으로 삼지 않았다. 또 15절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밝힌 결심이므로, 이를 근거로 사역자에게 한계 없는 소진을 요구하거나 사역자가 자신의 소진을 교인들이 갚아야 할 빚처럼 내세워서는 안 된다.
의혹에 사실로 답하는 재정 책임
재정을 맡은 사람은 선한 의도를 말하는 데 머물지 말고, 다른 사람이 실제 지출과 전달을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바울은 연보를 다룰 때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했다(8:20-21). 16절의 비난 앞에서도 그는 의혹을 무시하거나 의혹을 품은 이들을 몰아세우지 않고, 자신과 디도가 성도들을 이용했는지 성도들이 직접 겪은 일을 떠올리게 했다. 바울과 디도가 같은 발자국을 따라 행했다는 18절의 물음은 동역자들의 행실도 지도자의 정직을 증언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지도자 한 사람이 정직해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다른 기준으로 일하면 공동체의 신뢰는 무너진다. 그러나 바울은 19절에서 자신의 말이 고린도 교회의 판결을 얻기 위한 변명이 아니라고 밝혔다. 지도자는 의혹에 사실로 답하되,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일을 사역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공동체를 세우는 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공동체를 세우는 말
19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며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바울은 자신을 향한 비난에 성도들이 겪은 사실로 답한 뒤에(17-18절) 이 말을 했다. 교회의 설교와 공적인 말도 하나님 앞에서 하는 말이다. 설교자도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의혹에 사실로 답하고 필요한 책망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거나 개인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면, 그 말은 듣는 사람을 세우지 못한다.
20절에서 바울은 비방과 수군거림이 있는 교회를 만나게 될까 두려워한다.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를 퍼뜨려 사람을 고립시키거나 당사자의 의도를 추측하며 편을 갈라서는 안 된다. 교회를 세우는 말은 잘못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사람을 깎아내리는 말을 삼간다.
회개 요구와 피해자 보호
바울이 슬퍼할까 두려워한 이유는 과거의 죄 자체에만 있지 않았다. 죄를 지은 이들이 아직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괴로워한다는 말과 실제로 돌아서는 행동은 같지 않다. 성적 부도덕이나 다른 심각한 죄가 드러났다면 공동체는 잘못을 행한 사람에게 무엇을 중단하고 바로잡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묻고, 아직 잘못을 계속하는 사람에게는 그 행동을 멈추도록 요구해야 한다.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그를 먼저 돌보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서두르라고 요구하거나 가해자와의 화해를 강요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죄를 슬퍼하는 지도자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실까 두려워했다. 공동체의 죄가 드러났을 때 지도자는 자신을 심판자의 자리에만 세우지 않는다.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거나 교회의 체면부터 지키려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공동체의 죄를 자기 일로 슬퍼한다. 죄를 알고도 방치했다면 그 책임을 정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그 슬픔은 피해를 회복하고 같은 죄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는 실제 조치로 이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