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어리석은 자로서 시작하는 자랑 (16-18절)

16절에서 바울은 “내가 다시 말하노니”라며 누구든지 자기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고 요청한다. 곧바로 “만일 그러하더라도”라는 단서를 붙여, 성도들이 끝내 그를 어리석다고 여긴다면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라도 받아 달라고 한다. 이 요청은 11:1의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로 돌아간다. 바울은 11:2-15에서 다른 예수를 전하는 이들과 거짓 사도들을 고발한 뒤, 11:1에서 예고한 어리석은 말하기를 이제 시작한다. 그는 이미 자기를 칭찬하며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는 사람들을 비판했다(10:12). 그래서 그들처럼 자기를 내세우는 이 자랑을 사역의 바른 방식으로 제시하지 않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거듭 표시한다.

바울이 이 자랑을 시작하는 계기는 성도들의 태도다. 그들은 이미 다른 사람들의 자랑을 받아들였고, 바울은 자기 말도 그렇게 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17절에서 그는 지금 하는 말이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어리석은 자와 같이 하는 말이라고 밝힌다. 여기서 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자기를 남과 견주어 높이는 말이 주님께 받은 말이 아니라고 인정하고, 이 자랑에 주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1 그런데도 그는 자랑을 그치지 않는다. 바울은 성도들 때문에 경쟁자들의 비교 형식을 부득이 빌리지만(12:11), 그 형식에 무엇을 담을지는 스스로 정한다.

17절 끝의 “기탄 없이”로 옮긴 원문 구절에는 명사 ὑποστάσει(휘포스타세이)가 들어 있고, 이 명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진다. 이 단어를 ‘확신’으로 읽으면 ‘이렇게 확신하며 자랑하는 가운데’라는 뜻이 되며, 개역개정의 “기탄 없이”도 이 읽기를 따른다.2 이 단어에 ‘확신’이라는 뜻이 있는지 의심하여 ‘이 자랑하는 일에서’ 정도로 옮기자는 견해도 있다.3 같은 명사가 쓰인 9:4에서 개역개정은 “이 믿던 것”으로 옮겼고, 그 문맥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준비를 두고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자랑한 확신이 부끄러워질까 하는 염려다. 또 21절에서 바울은 이 자랑을 “담대하리라”는 말로 이어 간다. 이 두 문맥을 고려하면 확신의 뜻이 더 자연스럽다. 개역개정의 “기탄 없이”는 바울이 일부러 거리낌 없는 자랑의 말투를 취한다는 뜻을 살린 번역이다.

18절에서 “육신을 따라”(κατὰ σάρκα, 카타 사르카) 자랑한다는 말은 혈통이나 언변이나 외모처럼 사람의 눈에 보이는 기준으로 자기를 내세우는 방식을 가리킨다. 바울은 5:12에서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언급했고, 10:2-3에서는 자신이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런 그가 여기서 “나도 자랑하겠노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자랑에서 혈통의 자격은 22절에서 짧게 확인될 뿐이고, 목록의 대부분은 경쟁자들이 내세우지 않을 고난과 약함이다.

성도들이 용납한 지배와 모욕 (19-21절 전반부)

19절의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는 날카로운 반어다. 스스로 분별 있다고 여기는 성도들이 분별없는 자들을 기꺼이 견딘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4:10에서도 바울은 사도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다는 반어를 썼다. “용납하는구나”(ἀνέχεσθε, 아네케스테)는 11:1과 11:4에 이미 나온 동사다. 11:4에서 성도들은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잘 용납”했다. 19절의 용납은 성도들의 너그러움을 칭찬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묻는 고발이다.

20절은 성도들이 용납한 일을 ‘누가 그렇게 하면’ 형식의 다섯 조건절로 열거한다. “종으로 삼거나”는 사람을 예속시키는 행동이다. “잡아먹거나”(κατεσθίει, 카테스티에이)는 ‘먹어 치우다’라는 비유로, 성도들의 재물과 수고를 삼키는 착취를 가리킨다. “빼앗거나”로 옮긴 λαμβάνει(람바네이)는 본래 ‘취하다’라는 뜻이며, 12:16에서 바울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는 비난을 인용할 때도 같은 동사가 쓰인다. 여기서도 성도들을 이용해 자기 이익을 챙기는 행동을 가리킨다.4 “스스로 높이거나”는 자기를 들어 올려 남 위에 서는 태도다. 마지막 “뺨을 칠지라도”는 얼굴을 때리는 행동인데, 얼굴을 치는 일은 동방에서 예로부터 상대를 모욕하는 흔한 방식이었다.5 경쟁자들이 실제로 성도들을 때렸는지는 본문만으로 알 수 없다. 앞의 “잡아먹거나”가 비유이듯, 이 말도 성도들을 짓밟고 모욕하는 대우를 가장 강한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다.6 바울은 이 목록으로 사도의 이름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성도들을 실제로 어떻게 대하는지 드러내고, 그 대우를 받아들여 온 교회의 태도를 문제 삼는다.

21절 전반부의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도 반어를 이어 간다. 바울은 성도들을 종으로 삼고 모욕할 만큼 강하지 못했던 일을 부끄러운 부족처럼 고백하는 체한다. 이 반어는 착취와 모욕을 강함으로 여기는 성도들의 판단을 드러낸다. 성도들을 착취하지 않은 바울의 이 ‘약함’은 11:7-9에서 말한 값없는 복음 전파와 이어진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11:7의 질문을 보면 그 결정이 오히려 비판의 빌미가 되었다. 약하다는 말은 29-30절에서 다시 나오고, 12:10의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로 이어진다.

같은 혈통과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주장 (21절 후반부-23절)

21절 후반부에서 바울은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고 말한다. 그는 경쟁자들의 담대함에 맞서겠다고 하면서도 “어리석은 말이나마”를 끼워 넣어 이 경쟁이 어리석은 형식임을 다시 밝힌다. 22절은 그 담대함을 세 개의 짧은 질문과 대답으로 펼친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이스라엘인이냐, 아브라함의 후손이냐는 질문마다 바울은 “나도 그러하며”라고 답한다. 히브리인은 혈통을 드러내는 이름으로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쓰는 전통을 암시할 수도 있고, 이스라엘인은 하나님이 택하신 언약 백성에 속한 신분을 가리킨다.7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어받는 가문에 속했다는 주장이다. 바울은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지 않으며, 경쟁자들이 그 신분을 사역의 신뢰 근거로 내세울 때 자신도 같은 자격이 있다고 답한다.

23절의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는 질문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바울은 11:13-15에서 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한 거짓 사도, 의의 일꾼으로 가장한 사탄의 일꾼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이 질문의 “그리스도의 일꾼”(διάκονοι Χριστοῦ, 디아코노이 크리스투)은 경쟁자들이 내세우는 칭호를 인정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논증을 위해 그 칭호를 잠시 받아들이고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라고 답한다. 그 앞에 덧붙인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παραφρονῶν λαλῶ, 파라프로논 랄로)는 ‘제정신을 벗어나 말한다’는 뜻으로, 앞서 쓴 ‘어리석음’보다 강한 표현이다. 남보다 나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대목에서, 바울은 그 주장을 제정신이 아닌 말이라고 스스로 규정한다.

바울이 이어서 내놓는 증거는 수고와 위험의 목록이다. 그는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다. “넘치도록”과 “더 많이”는 경쟁자들과의 비교를 이어 가지만, 바울이 남보다 많다고 내세우는 것은 수고와 투옥과 매질이다. 마지막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는 거듭 죽음의 위험에 처했던 경험을 가리킨다. 1:8-9에서 바울은 아시아에서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고백했는데, 이 짧은 구가 말하는 것도 그와 같은 종류의 위기다.

매질과 위험과 결핍 (24-27절)

24절부터 바울은 포괄적인 목록을 구체적인 횟수로 풀어 간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 한 번에 서른아홉 대씩 다섯 차례 맞은 처벌이다. 신명기 25:1-3은 재판에서 죄인에게 때릴 수 있는 최대 수를 마흔 대로 정했고, 유대 전통은 셈을 잘못하여 그 한계를 넘지 않도록 서른아홉 대로 제한했다.8 바울은 22절에서 자기 민족과 언약의 정체성을 인정했고, 바로 그 동족의 재판에서 이 처벌을 받았다. 이어지는 목록에서 그는 동족과 이방인 양쪽에서 겪은 위험을 모두 말한다. 특정 사건에서 그를 해친 이들의 행동을 어느 민족 전체의 행동으로 확대할 수 없다.

25절은 처벌과 재난을 잇는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는 나무 막대기로 때리는 로마의 처벌을 가리킨다.9 사도행전 16:22-23은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가 상관들의 명령으로 매를 맞고 옥에 갇힌 일을 기록하며, 37절에서 바울은 로마 사람인 자신들이 정죄도 받지 않은 채 공개적으로 맞았다고 항의한다. “한 번 돌로 맞고”는 루스드라에서 무리가 바울을 돌로 치고 죽은 줄로 여겨 성 밖으로 끌어낸 일(사도행전 14:19)과 맞는다. 이어지는 “세 번 파선하고”는 바다에서 겪은 재난이다. 사도행전 27장의 로마행 파선은 이 편지보다 뒤의 일이므로, 여기서 말한 세 번의 파선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들이다.10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는 밤낮 하루를 바다에서 보냈다는 뜻이다. 바울은 아마도 부서진 배의 조각을 붙들고 물속에 있었을 것이다.11 어떤 배와 어느 항로에서 일어난 일인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

26절은 “여러 번 여행하면서”로 시작하여 여덟 가지 위험을 나열한다. 강과 강도는 길에서 만나는 위협이고, 동족과 이방인은 사람들의 적대이며, 시내와 광야와 바다는 사람이 모인 곳에서 빈 들과 바다에 이르기까지 어디에나 위험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개역개정의 “시내”는 냇물이 아니라 도시 안, 곧 “성읍에서”(ἐν πόλει, 엔 폴레이)를 뜻한다. 목록 끝의 “거짓 형제 중의 위험”(ἐν ψευδαδέλφοις, 엔 프세우다델포이스)은 형제라고 불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난 위험이다. 이 항목은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11:13)을 떠올리게 한다. 바울은 자연과 사회의 적대에 더하여, 형제로 믿어야 할 사람들에게서 받은 위협까지 꼽는다.

27절은 위험에서 생활의 결핍으로 옮겨 간다. “수고하며 애쓰고”는 비슷한 뜻의 두 명사를 묶어 고된 노동을 강조하며, 바울이 손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린 형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12 이어서 잠들지 못한 밤들, 먹고 마실 것이 없는 주림과 목마름이 나온다. “여러 번 굶고”로 옮긴 νηστείαις(네스테이아이스)는 다른 문맥에서 종교적 금식을 가리킬 수 있는 단어다. 여기서는 주림과 목마름 바로 뒤에 놓여 자발적 금식보다 음식을 얻지 못한 굶주림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으며, 개역개정의 “굶고”도 이 뜻을 살린다.13 마지막 “춥고 헐벗었노라”는 몸을 덮고 데울 것이 부족했던 형편이다. 6:5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이 겪은 일로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을 열거했다. 바울은 사역의 여정이 몸에 남긴 부담을 숨기지 않는다.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 (28-29절)

28절에서 바울은 열거한 일들 외에도 날마다 자신을 짓누르는 일이 있다고 밝힌다. 그것은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다. 첫머리의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는 말하지 않고 남겨 둔 일들을 제쳐 둔다는 뜻이며,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은 책임을 맡은 교회들이 매일 무거운 짐이 되는 형편이다.14 “모든 교회”는 바울이 세우고 특별히 마음을 쓴 신자들의 공동체를 가리킬 것이다.15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그가 감당한 수고에는 몸으로 겪은 위험뿐 아니라 이 지속적인 돌봄도 들어간다.

29절의 두 질문은 그 염려를 구체화한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에서 바울은 같은 동사를 되풀이하여 성도의 약함을 자신의 약함으로 받아들인다. 이 약함이 믿음의 연약함인지 몸의 연약함인지는 문맥이 정해 주지 않는다.16 “실족하게 되면”(σκανδαλίζεται, 스칸달리제타이)은 걸림돌에 걸려 믿음의 길에서 넘어지게 되는 일이므로, 넘어지게 만든 원인을 함께 떠올리게 한다. 이어지는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의 동사 πυροῦμαι(퓌루마이)는 ‘불타다’라는 뜻의 비유다. 이 표현은 성도를 넘어지게 한 자들을 향해 분노로 불탄다는 뜻으로도, 넘어진 성도 때문에 괴로움으로 속이 탄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으며, 해석자들은 대체로 분노의 읽기를 따른다.17 개역개정의 “애타지”는 괴로움의 읽기를 택한 번역이다. 그러나 11장이 성도들을 다른 복음으로 미혹하고(11:3-4) 착취하는 자들(20절)을 고발하는 흐름이므로, 넘어지게 한 자들을 향한 분노의 읽기가 문맥에 더 잘 맞는다. 그 분노는 넘어진 성도를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다. 바울에게 성도들의 흔들림은 남의 소식이 아니다.

약한 것의 자랑과 하나님 앞의 맹세 (30-31절)

30절에서 바울은 자랑의 내용을 밝힌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는 자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전제한다. 비교의 형식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바울이 자랑하겠다고 고른 것은 “내가 약한 것”이다. 앞의 고난 목록과 뒤의 다메섹 사건은 모두 그의 약함을 드러내는 일이다. 31절에서 바울은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을 부르며 그분이 자신이 거짓말하지 않는 것을 아신다고 말한다. 지금 하는 말의 진실성을 하나님 앞에 맡기는 맹세다. 1:23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했다.

다메섹 탈출과 자랑의 결말 (32-33절)

32절은 약함의 마지막 사례로 다메섹 탈출을 든다. “아레다 왕의 고관”의 “고관”(ἐθνάρχης, 에트나르케스)은 왕을 대신해 다스리는 관리다. 아레다는 주전 9년부터 주후 40년까지 다스린 나바테아 사람들의 왕 아레다 4세이며, 이 고관이 다메섹 전체를 다스렸는지 성 안의 한 민족 집단만 다스렸는지는 역사 자료로 확정되지 않는다.18 원문은 고관을 주어로 삼아 그가 성을 지켰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성을 지킨 사람들은 그의 명령을 받은 이들이었을 것이다.19 사도행전 9:23-24는 같은 탈출을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공모하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킨 일로 기록한다. 두 기록은 바울을 노리고 성을 지킨 일과 바울이 광주리에 담겨 성벽을 내려가 피한 일을 똑같이 말한다. 나바테아 고관과 다메섹의 유대인들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어느 기록도 말하지 않는다.

33절은 탈출 장면을 짧게 그린다. 개역개정은 이를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라고 옮겼다. 원문의 동사 ἐχαλάσθην(에칼라스텐)은 ‘내리다’의 수동형으로, 누군가 바울을 광주리에 담아 들창문을 거쳐 성벽 아래로 달아 내렸음을 드러낸다. 이 문장은 그를 내려 준 사람들을 밝히지 않으며, 사도행전 9:25은 그들을 “그의 제자들”이라고 한다. 바울은 그렇게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 말을 맺는다. 붙잡힐 위험에 처한 사도가 다른 사람들의 손에 들려 피한 일이 자랑의 마지막 사례다.

바울의 자랑은 비교의 형식을 끝까지 유지한다. 그는 자신이 “더욱”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말하고 남보다 많은 수고와 매질을 꼽는다. 그러나 그 비교의 마지막 사례는 광주리에 담겨 성벽을 내려온 사도의 모습이다. 성도들을 지배하고 모욕하는 이를 강하다고 여긴 20절의 판단은 이 결말로 뒤집힌다. 바울은 자랑을 어리석은 말이라고 표시한 채, 그 내용을 고난과 교회를 향한 염려와 남의 도움으로 피한 일로 채운다. 이 결말은 12:9에서 주께서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신 말씀으로 이어진다.

성경신학적 통찰

약함으로 채운 사도의 경력

16-33절에서 바울은 경쟁자들이 쓰는 비교의 형식을 빌려 자기 경력을 내놓는다. 그러나 그 경력은 매질과 위험과 결핍, 교회를 위한 염려, 다메섹에서의 도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경력은 사람을 종으로 삼고 자기를 높이는 힘을 사역의 증거로 여긴 고린도 교회의 기준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의 일꾼이 다른 교회들의 약함을 돌보는 책임을 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의 약함에 관한 목록을 이미 들었다. 고린도전서 4:9-13에서 바울은 사도들을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세상에 구경거리가 된 이들로 말하고, 그들이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를 맞으며 손수 일한다고 말한다. 같은 대목에서 그는 성도들은 스스로 지혜롭고 강하다고 여기지만 사도들은 어리석고 약하다는 반어를 썼다. 고린도후서 6:4-10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신을 추천하며 매 맞음과 갇힘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을 열거했다. 16-33절에서 ‘어리석게’ 자랑하는 내용은 바울이 이미 사도의 표지로 제시해 온 삶과 같다. 달라진 것은 말의 형식이다. 6장에서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신을 추천했고, 16-33절에서는 경쟁자들과의 비교에 답한다. 비교의 형식으로 말할 때에도 바울이 증거로 꺼내는 것은 같은 약함이다.

매와 모욕을 받는 하나님의 일꾼

24절의 서른아홉 대는 이스라엘의 법정 처벌을 배경으로 한다. 신명기 25:1-3은 재판에서 죄인에게 매를 때릴 때 죄에 합당한 수를 정하되 마흔 대를 넘기지 못하게 하고, 그 이상 때리면 형제를 경히 여기는 것이 될까 한다는 이유를 붙인다. 이 법은 벌을 받는 사람도 형제임을 잊지 않게 하려는 제한이다. 바울은 그 상한에 가까운 처벌을 다섯 번 받았다. 그는 자신이 히브리인이며 이스라엘인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밝혔고(22절), 바로 그 동족의 재판에서 이 매를 맞았다. 언약 백성에 속한 자격은 그에게 안전과 존중을 보장하지 않았다. 그래도 바울은 이 경력을 말하면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끊지 않는다.

이사야 50:4-9의 종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곤고한 자를 돕는 하나님의 일꾼이다. 주 여호와께서 그에게 학자들의 혀를 주사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울지 알게 하시고, 종은 거역하지도 뒤로 물러가지도 않는다. 그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면서도 자신을 도우시는 주 여호와를 신뢰한다. 바울의 목록은 이 종의 모습과 주제로 이어진다. 이사야의 종은 곤고한 자를 돕는 말을 받았고, 바울은 수고와 위험을 말한 뒤 모든 교회를 위한 매일의 염려를 밝힌다(28절). 20절의 경쟁자들은 성도들을 짓밟고 모욕하며 그들 위에 자기를 높였지만, 이사야의 종은 모욕을 당하는 쪽에 서서 곤고한 자를 돕는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종도 모욕을 당한다는 이사야의 증언은 사역의 진실성을 받는 대우의 높고 낮음으로 판단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교회를 주관하지 않고 돌보는 책임

28절의 염려는 교회를 소유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따라 살도록 돕는 책임이다. 바울은 1:24에서 성도들의 믿음을 주관하려 하지 않고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한다고 말했다. 고린도전서 4:14-17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그들을 낳은 사람으로서 그들을 사랑하는 자녀처럼 권하고, 디모데를 보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자기의 길을 생각나게 하려 했다. 이 염려는 20절의 지배와 정반대다. 경쟁자들은 성도들을 종으로 삼았고, 바울은 성도들이 약해지거나 넘어질 때 그 짐을 자기 짐으로 진다(29절). 바울은 그 돌봄을 혼자 감당하지 않고 디모데 같은 동역자를 보내 함께 감당했다.

도움을 받은 사도와 하나님께 있는 능력

다메섹 탈출은 바울이 사역 초기부터 위험에 처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사도행전 9장에서 주님을 만난 사울은 앞을 보지 못하여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고,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아 다시 보게 된다. 주님은 그를 자기 이름을 전할 그릇으로 택하시고, 그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지 보이시겠다고 말씀하신다(사도행전 9:15-16). 사도행전 9:23-25는 위협의 주체를 유대인들로, 32절은 아레다 왕의 고관으로 말한다. 그러나 두 기록 모두 사울이 광주리에 담겨 성벽에서 내려져 피했다고 한다. 훗날 모든 교회를 염려하게 될 사도는 사역의 처음에 다른 사람들의 손에 생명을 맡겨야 했다.

바울은 1:8-9에서 아시아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던 환난이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 일이었다고 고백했다. 이 고백은 아시아의 특정한 위기에 관한 것이지만, 23절에서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고 말하는 바울이 살아남은 일을 자기 능력의 증거로 내세우지 않는 이유를 보여 준다. 4:7에서 그는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것은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자신들에게 있지 않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23-33절의 매질과 주림과 도피는 그 질그릇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드러낸다. 바로 뒤 12:9-10에서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시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게 하려고 약한 것들을 자랑하겠다고 한다.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기준과 어리석은 자랑

10:17-18에서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하고,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라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라고 말했다. 16-33절의 자랑은 이 기준과 쉽게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바울 스스로 이 말이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라고 했고(17절), 남보다 더 수고했다는 비교도 그대로 남겨 두었다(23절). 고난의 목록도 얼마든지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경력이 될 수 있다. 바울의 목록이 경쟁자들의 자랑과 다른 이유는 그 내용과 결말에 있다. 목록은 모든 교회를 위한 염려와 약한 성도와 함께 약해지는 공감으로 이어지고(28-29절),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른 맹세로 진실성을 확인받으며(31절), 다른 사람들의 손에 들려 피한 일로 끝난다(32-33절). 바울은 어리석은 형식을 어리석다고 인정한 채, 그 형식으로 자기 힘이 아닌 약함 속에서 일하신 주님을 가리킨다.

기독론적 해석

섬기러 오신 주님과 그분의 일꾼

23절에서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는 질문에 고난 목록으로 답한다. 누가 그리스도의 일꾼인지는 그 일꾼이 섬기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에 비추어 판단된다. 마태복음 20:25-28에서 예수는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백성을 임의로 주관하는 방식과 제자들의 섬김을 구별하시고,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섬기려 하며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신다. 20절의 경쟁자들은 그리스도의 일꾼을 자처하면서 성도들을 종으로 삼고 그들 위에 자기를 높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금하신 주관의 방식이다. 주님이 섬기러 오셨다면 그분의 일꾼은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이다. 바울의 고난 목록은 이 기준으로 그리스도의 일꾼을 알아보게 한다.

그리스도의 대속과 자기를 내주는 사도의 수고

바울의 고난과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별된다. 5:14-21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고,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셔서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 구원은 이 대속으로 이루어졌으며, 사도의 매질과 굶주림이 거기에 무엇을 보태지 않는다. 바울이 1:5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자신들에게 넘친다고 말할 때,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하신 사람이 그 말씀을 섬기다가 겪는 일이다(5:19-20). 본문의 매질과 파선과 굶주림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섬기는 일꾼이 치른 대가이며, 바울을 그 길로 강권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5:14).

20절의 착취와 바울의 수고는 둘 다 누군가의 소모를 낳지만, 누가 누구를 위해 소모되는지가 다르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스스로 주셨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값없이 복음을 전했고(11:7-9), 12:15에서는 성도들의 영혼을 위하여 재물을 쓰고 자기 자신까지 내어 주겠다고 말한다. 바울은 자기 삶을 스스로 내주었다. 20절의 사람들은 반대로 성도들을 잡아먹고 그들에게서 취하며 그들을 모욕했다. 그들은 자기를 위해 성도들을 소모시켰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역은 자기를 내주는 수고로 이어질 수 있지만, 지도자가 다른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그 대가를 거두어 갈 권한을 주지 않는다. 바울의 고난 경력도 사람 위에 서는 명분이 될 수 없다.

성도의 약함을 자기 일로 여기는 일꾼

29절의 공감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사도행전 9:4-5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에게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셨다. 주님은 자기 사람들이 당하는 박해를 자신이 당하는 박해로 말씀하셨다. 그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누가 약하면 자신도 약하고 누가 실족하면 마음이 불탄다고 고백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약함과 넘어짐은 그리스도의 일꾼에게 남의 일이 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약함을 말하는 일꾼

바울은 자랑을 다메섹에서 광주리에 담겨 내려진 일로 끝낸다(30-33절). 그리스도의 일꾼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 들려 성벽을 내려온 모습은 13:4의 고백과 이어진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며, 바울과 동역자들도 그 안에서 약하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산다. 바울은 위험을 스스로 이기는 힘을 보여 주지 않고,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섬기는 사람답게 자신의 약함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며, 바울은 그 사실을 감추지 않고 자랑의 결말로 삼는다.

31절에서 바울은 “주 예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른다. 그의 고난 이야기는 주 예수의 아버지 앞에서 하는 말이다. 바울은 5:10에서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각각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 앞에 설 사역자는 고난을 부풀려 자기 영광을 구하거나 성도들을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을 수 없다. 바울의 맹세는 약함의 자랑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책임져야 할 말임을 드러낸다.

현대적 적용

지배와 모욕을 권위로 여기지 않는 교회

20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자신들을 종으로 삼고 잡아먹고 빼앗고 스스로 높이며 뺨을 치는 이들을 용납해 왔다고 고발한다. 이 말이 실제 구타를 포함하든 공개적인 모욕을 가리키든, 바울은 성도들을 짓밟는 대우를 사역자의 권위로 받아들인 교회를 꾸짖는다. 오늘의 교회도 사람을 압도하는 태도를 강한 지도력으로 오인하고 그런 행동을 용납할 수 있다. 사역자의 큰 성과나 오랜 헌신, 높은 지위가 사람을 착취하거나 모욕하는 행동을 정당하게 만들지 않으며, 몸에 가하는 폭력은 더욱 그렇다. 잘못의 책임은 먼저 착취하고 모욕한 사람에게 있다. 공동체는 그런 행동을 더는 용납하지 않을 책임을 지며, 사역자가 무엇을 가르치는지와 더불어 성도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살펴야 한다.

고난의 횟수로 사역자의 순위를 매기면 바울의 자랑을 거꾸로 읽게 된다. 바울은 비교의 형식이 어리석다고 인정하면서 그 형식을 썼고,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피한 일로 자랑을 마쳤다. 많이 견뎠다는 이유로 상대의 한계를 무시하거나 자신에게 반론하지 못하게 한다면, 고난의 증언은 20절의 경쟁자들처럼 사람을 지배하는 수단이 된다. 헌신한 경력은 다른 사람을 지배할 권한을 주지 않는다.

돌보는 사람의 필요와 약한 성도를 향한 돌봄

27절의 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헐벗음은 많은 교회를 돌본 사도에게도 음식과 옷과 쉼이 필요했음을 보여 준다. 28절의 매일의 염려를 모든 사역자가 모든 문제를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명령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마게도냐 형제들의 지원을 받았고(11:9), 디도가 왔을 때 하나님께 위로를 받았다(7:6). 그리스도의 일꾼을 존중하는 공동체는 돌보는 사람의 필요를 살피고 생활과 사역의 짐을 나누어 진다. 바울이 스스로 감당한 수고를 근거로 사역자에게 한계 없는 희생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29절에서 바울은 누가 약하면 함께 약해지고, 누가 실족하면 마음이 불탄다고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성도의 약함과 믿음의 흔들림을 자기 일로 받아들이고, 성도를 넘어지게 하는 가르침과 대우에는 맞선다. 넘어진 사람을 정죄하거나 붙잡아 두려고 지배하는 일은 이 돌봄과 정반대다.

위험을 피하고 도움을 받는 일

바울은 광주리에 담겨 성벽을 내려가 피한 일을 자랑의 결말로 남겼다. 위험을 피해 생명을 지키는 일이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일은 믿음의 실패가 아니다. 사역자는 자신이 받은 도움을 숨기지 않고 그 수고에 감사할 수 있다. 교회는 바울이 1:11에서 요청한 대로 위기에 처한 사람을 위해 간구하고, 다메섹의 제자들이 바울을 달아 내렸듯이 위험에 처한 사람을 실제로 도울 수 있다.

사건과 경험을 사실대로 말하기

24-26절에서 바울은 자기의 유대적 정체성을 인정하면서 동족과 이방인 모두에게서 위험을 겪었다고 말한다. 한 사건에 등장한 집단의 이름으로 오늘의 민족이나 종교 전체를 적대하는 태도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 본문을 가르치는 사람은 각 사건에서 누가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설명해야 한다. 바울이 섬긴 복음은 여러 민족을 향한 생명의 소식이었다.

3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르며 자기 말의 진실함을 밝힌다. 사역자도 힘들었던 일을 부풀려 존경을 얻으려 하지 말고 실제로 겪은 일을 말해야 한다. 바울이 약함을 밝히면서도 교회를 계속 섬겼듯이, 사역자는 몸의 한계와 도움이 필요한 형편을 숨길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