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하는 호소 (1-2절)

고린도후서 8-9장에서 연보를 권면한 편지는 10장에 들어서며 어조를 바꾸어 바울의 사도직을 둘러싼 비판을 직접 다룬다. 1절의 “나 바울은 ... 친히”는 바울 자신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디모데와 함께 보낸 편지에서(1:1) 바울이 자기 이름으로 직접 나서서 권면한다. 권면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이다. “온유”(πραΰτητος, 프라위테토스)는 힘을 앞세우지 않는 부드러운 태도를, “관용”(ἐπιεικείας, 에피에이케이아스)은 자기 권리를 엄격하게 따지지 않고 상대를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에게 그리스도의 성품을 근거로 말한다.

1절 후반부에서 바울은 자신을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유순하고”로 옮긴 ταπεινὸς(타페이노스)는 낮은 처지와 비천함, 겸손을 두루 가리킬 수 있어서, 개역개정의 “유순하고”보다 초라하고 낮아 보인다는 인상을 더 강하게 담을 수 있다. 대면과 부재, 낮음과 담대함의 대조는 10절에 인용된 비판, 곧 편지는 강하나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다는 말에 대응한다. 그래서 1절은 비판자들이 바울을 두고 하던 말을 바울이 받아서 쓴 표현으로 읽을 수 있다. 바울은 그 표현으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호소의 근거로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앞세운다.

2절에서 바울은 고린도에 가서 함께 있을 때 강경하게 대하지 않아도 되기를 간청한다. “이 담대한 태도로”에는 확신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바울이 이 확신으로 맞서려는 대상은 “몇몇 사람”(ἐπί τινας, 에피 티나스)이다. 개역개정은 τινας를 따로 옮기지 않고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라고 했지만, 원문은 바울을 비판하는 이들을 일부로 한정한다. 그들의 평가를 고린도 교회 전체의 판단으로 볼 근거는 없다. 바울도 교회 전체에게 호소하는 일과 자신에게 맞서는 몇몇 사람을 다루는 일을 구별한다. 방문 때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성도들의 응답에 달려 있으므로, 지금 쓰는 편지는 방문 전에 문제를 바로잡을 기회가 된다.

2절에는 ‘여기다, 헤아리다’라는 뜻의 동사가 두 번 나온다. 바울은 몇몇 사람에게 담대히 맞서기로 ‘여기고’(λογίζομαι, 로기조마이), 그 사람들은 바울을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τοὺς λογιζομένους, 투스 로기조메누스)이다. 이 논쟁은 바울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다. 바울은 7절과 11절에서 같은 동사의 명령형(λογιζέσθω, 로기제스토)으로 그들에게 다시 생각하라고 요구한다. 바울을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긴다는 말은 그의 사역이 인간적 동기와 수단에 매여 있다는 비난이다. 바울은 3절에서 ‘육신’이라는 명사에 다른 전치사를 붙여 이 평가에 답한다.

육신에 따르지 않는 싸움과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 (3-6절)

3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라고 답한다. “육신으로”(Ἐν σαρκὶ, 엔 사르키)는 몸을 지닌 사람으로 살아가는 조건을, “육신에 따라”(κατὰ σάρκα, 카타 사르카)는 육신의 기준과 방식을 따른다는 뜻이다. 바울은 연약한 몸으로 살고 일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싸움은 인간적 능력과 계산에 의존하지 않는다. 여기서 “싸우다”는 군사로 복무하며 싸우는 행동을 가리키며, 4-6절은 무기와 요새, 포로와 처벌의 그림으로 이 비유를 이어 간다.

4절은 이 싸움의 무기를 설명한다.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고, 원문의 표현으로는 ‘하나님께 강한’ 것이다(δυνατὰ τῷ θεῷ, 뒤나타 토 테오). 하나님을 가리키는 여격 때문에 이 표현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능력으로 강하다는 뜻으로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강하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다.1 4절에서 이 표현은 “육신에 속한” 무기와 대조를 이루므로, 무기의 쓰임새보다 무기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말한다고 보는 편이 대조에 더 잘 맞는다.2 개역개정의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형용사 ‘강한’을 명사 ‘능력’으로, 여격을 소유격으로 바꾸어 무기의 힘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뜻을 살렸다. 다만 원문은 무기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하다고 말하며, 무기 자체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 무기는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이론”(λογισμοὺς, 로기스무스)을 무너뜨린다. 요새의 그림이 실제로 가리키는 대상은 사람들이 따져서 세운 주장과 논리다.

5절은 무너뜨릴 대상을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으로 넓힌다. 이 표현은 성벽 위로 솟은 망대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막아서는 장애물을 그린다. 이어지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αἰχμαλωτίζοντες πᾶν νόημα, 아이크말로티존테스 판 노에마)는 전쟁에서 포로를 붙잡아 끌고 가는 장면이다. 개역개정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로 옮긴 원문(εἰς τὴν ὑπακοὴν τοῦ Χριστοῦ, 에이스 텐 휘파코엔 투 크리스투)은 사로잡힌 생각이 이르러야 할 곳을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이라는 명사구로 표현한다. 사람들이 생각에서부터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되는 것이 이 군사 비유의 목적이다.

4-5절에서 무너뜨리고 사로잡는 분사들의 주어는 3절의 ‘우리’다. 6절 끝의 “너희의”와 대조되므로, 이 ‘우리’는 독자들을 포함하지 않고 바울과 그 동역자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누구의 생각을 사로잡는지 밝히지 않지만, 그 생각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다.3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싸우는 쪽은 바울 일행이고, 무너뜨릴 대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주장과 생각이며, 그 목적은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이다.

6절에서 바울은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 말한다. 군사 비유가 여기서 실제 조치로 이어진다.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기를 기다린다. 이 문장에서 강조된 “너희의”는 독자들이 이미 복종하고 있거나 곧 복종하리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4 그 뒤에 벌을 받는 것은 불복종이라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뒤에도 계속 불복종하는 고린도의 사람들이다.5 13:2에서도 바울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미리 경고한다. 지금 편지로 호소하는 일과 방문 때 징계하는 일은 모두 교회를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려는 사도의 책임에 속한다.

그리스도께 속함과 세우려고 주신 권세 (7-8절)

7절은 바울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다시 돌아간다. 첫 문장 Τὰ κατὰ πρόσωπον βλέπετε(타 카타 프로소폰 블레페테)의 동사는 형태상 직설법으로도 명령법으로도 읽을 수 있다. 명령법이면 ‘눈앞에 있는 것을 보라’는 요청이 되고, 직설법이면 ‘너희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본다’는 지적이 된다. 문맥이 어느 한쪽을 결정적으로 지지하지는 않는다.6 다만 명령이었다면 동사가 문장 앞에 왔을 가능성이 크므로, 어순은 직설법 읽기에 더 잘 맞는다.7 앞뒤 문맥도 이 읽기에 기운다. “외모”로 옮긴 κατὰ πρόσωπον(카타 프로소폰)은 1절에서 “대면하면”으로 옮긴 표현과 같고, 10절은 바울을 대면했을 때의 인상으로 그를 낮추어 본 평가를 인용한다. 그러므로 7절 첫 문장은 바울을 눈앞의 인상으로 판단하는 태도를 지적하는 말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다. 개역개정의 “외모만 보는도다”에서 “만”은 원문에 없는 말로, 이 직설법 읽기를 전제하고 지적의 뜻을 드러낸다. 명령법 읽기도 배제되지 않으므로, 비판자들이 바울을 겉모습으로 평가한 내용은 이 문장보다 10절의 인용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어서 바울은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 말한다. 2절에서 바울을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던’ 사람에게 이제 다시 ‘여기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바울은 상대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주장을 반박하지 않고, 그 기준을 바울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라고 요구한다. 자기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확신만으로는 바울을 배제할 수 없다. 누가 그리스도께 속했는지를 판단할 때 대면한 인상은 결정적인 기준이 되지 못한다.

8절은 7절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바울은 주께서 주신 “권세”(ἐξουσίας, 엑수시아스)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그 자랑이 헛된 주장으로 드러나지 않으리라는 뜻이다.8 주께서 이 권세를 주신 목적은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다. “무너뜨리려고”에 해당하는 καθαίρεσιν(카타이레신)은 4절에서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일을 말할 때 쓴 명사다. 바울의 권세로 무너뜨릴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막는 요새이고, 고린도 교회는 그 권세로 세워야 할 공동체다.

편지 끝의 13:10은 8절의 표현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한다. 바울은 대면할 때 주께 받은 권한을 엄하게 쓰지 않아도 되도록 떠나 있을 때 이렇게 쓴다고 말하며, 그 권한도 주께서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고 주신 것이라고 밝힌다. 세움이라는 목적이 엄한 조치를 없애지는 않는다. 바울은 엄하게 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고, 6절에서 실제 징계를 예고한다. 이 목적은 바울이 권한을 쓰는 방향을 정한다. 경고와 징계도 교회를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공동체로 세우기 위해 써야 하며, 교회를 해치는 데 써서는 안 된다.

편지의 말과 함께 있을 때의 행동 (9-11절)

9-11절은 편지와 대면의 일치를 다룬다. 9절의 “놀라게 하려는”(ἐκφοβεῖν, 엑포베인)은 겁을 주어 위협한다는 강한 말이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가 성도들을 겁주는 수단으로 보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10절은 그렇게 보일 만한 까닭, 곧 바울에 대한 평가를 인용한다. 개역개정은 “그들의 말이”라고 복수로 옮겼지만, 원문의 φησίν(페신)은 ‘그가 말한다’는 3인칭 단수다. 이 단수는 특정한 한 사람의 말일 수도 있고 ‘누군가 말하기를’과 같은 일반적 표현일 수도 있다. 11절의 “이런 사람은”도 단수다. 평가의 내용은 바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시원하지 않다”로 옮긴 ἐξουθενημένος(엑수테네메노스)는 하찮게 여겨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뜻이므로, 개역개정의 표현보다 경멸의 뜻이 훨씬 강하다.

11절에서 바울은 이 평가에 답한다. 떠나 있을 때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 행하는 일이 같다는 것이다. “떠나 있을 때에”(ἀπόντες, 아폰테스)와 “함께 있을 때에”(παρόντες, 파론테스)는 1절의 “떠나 있으면”과 2절의 “함께 있을 때에”를 다시 가져온다. “알지라”는 7절의 “생각할 것이라”와 같은 명령(λογιζέσθω)이다. 11절은 바울의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다는 일반적 진술이지만, 문맥에서는 2절과 6절에서 예고한 방문 때의 대응을 포함한다. 편지로 경고한 것은 바울이 방문하여 실제로 행할 일이다. 바울은 자기 몸이나 말솜씨를 길게 변호하지 않고, 편지의 말과 방문 때의 행동이 일치한다는 사실로 답한다.

자기를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과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범위 (12-14절)

12절은 바울과 비교되는 사람들의 방식을 비판한다. 바울은 “자기를 칭찬하는”(συνιστανόντων, 쉬니스타논톤) 어떤 사람들과 감히 짝하며 비교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 동사는 ‘추천하다’라는 뜻이며 18절에서 다시 나온다. 그들은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μετροῦντες, 메트룬테스)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한다. 그들의 평가 기준은 자기 자신이다. 바울은 이런 평가를 두고 “지혜가 없도다”, 곧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

13절에서 바울은 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그는 “분수 이상의”, 곧 ‘측량을 벗어난 데까지’(ἄμετρα, 아메트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자랑한다. “범위”로 옮긴 κανόνος(카노노스)는 재는 자나 기준을 뜻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측량하여 정해 준 활동 구역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9 12절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자로 삼았다면, 바울은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한계”(μέτρον, 메트론)를 따른다. 그 범위는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다. 바울은 자기 자랑의 분량과 권위가 미치는 지역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며, 하나님이 그에게 일하도록 맡기신 지역에는 그가 교회를 세운 고린도가 포함된다.10

14절은 그 사실을 과거의 사건으로 확인한다.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은 닿지 않는 곳까지 몸을 지나치게 뻗는 모습을 그린다. 바울은 자기에게 맡겨지지 않은 곳에 억지로 손을 뻗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고린도 성도들에게까지 “이른” 사람이다. 바울과 동역자들이 실제로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로 고린도 교회가 생겼다. 이 사실이 고린도가 바울이 맡은 범위 안에 있다는 근거다.

남의 수고로 자랑하지 않고 너희 지역을 넘어 나아감 (15-16절)

15절은 같은 원칙을 앞으로의 사역에 적용한다. 바울은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수고하여 이룬 일을 자기 성과로 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이 자랄수록 자신의 사역이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란다. 개역개정은 13절에서 “범위”로 옮긴 명사를 15절(κανόνα, 카노나)과 16절(κανόνι, 카노니)에서는 “규범”으로 옮겼다. 원문은 세 절에서 같은 명사를 쓰므로, 15-16절의 “규범”도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사역의 범위로 읽을 때 13절과 논리가 이어진다.

16절은 그 확대의 방향을 밝힌다.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면 바울은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한다. 로마서 15:20-24에서 바울은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않으려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리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기를 힘썼다고 말하고, 서바나로 가려는 계획을 밝힌다. 16절의 ‘너희 지역을 넘어’는 서바나에 이르는 서쪽 지역을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11 바울은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τὰ ἕτοιμα, 타 헤토이마), 곧 다른 사람에게 맡겨진 곳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로 자랑하지 않겠다고 덧붙인다. 그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교회의 믿음을 세우면서,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아가려 한다.

주 안에서 자랑함과 주의 인정 (17-18절)

17절은 이 자랑의 기준을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는 한 문장으로 밝힌다. 이 말은 예레미야 9:23-24를 줄여서 인용한 것이며, 바울은 고린도전서 1:31에서도 같은 말을 인용했다. 예레미야에서 자랑의 근거가 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 17-18절의 “주”는 그리스도를 가리킬 가능성이 크지만 하나님을 가리킬 가능성도 남아 있다.12 17절은 8절과 13-16절에서 바울이 말한 자랑의 근거를 정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맡기신 범위 안에서 주께서 복음으로 이루신 일을 자랑한다.

18절은 17절의 이유를 밝힌다. 12절에서 자기를 추천하던 사람들에게 쓴 동사가 다시 나와, “자기를 칭찬하는 자”(συνιστάνων, 쉬니스타논)와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를 맞세운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δόκιμος, 도키모스)는 시험을 거쳐 참되다고 인정받은 사람을 뜻한다. 바울이 맡은 범위, 그가 복음으로 고린도에 이른 일, 성도들을 세우는 권세는 모두 주님의 판단을 받는다.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면서도 사역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분을 주님으로 둔다. 이 논쟁에서 물어야 할 것은 누가 더 인상적인 사람이냐가 아니라 주께서 누구를 인정하시느냐이다.

성경신학적 통찰

여호와를 아는 자랑과 바울의 인용

17절이 인용하는 예레미야 9:23-24에서 여호와는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를, 용사는 용맹을, 부자는 부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신다. 자랑하려는 사람은 여호와를 깨닫고 아는 것, 곧 여호와께서 땅에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며 그 일을 기뻐하시는 분임을 아는 것을 자랑해야 한다. 앞선 9:3-6에서 백성은 이웃을 속이고 진실을 말하지 않으며 여호와를 알기를 거절한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말하는 여호와를 아는 일은 종교적 지식을 내세우는 일이 아니라, 여호와의 성품을 인정하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진실과 정의를 따라 사는 일이다.

바울은 이 말씀으로 고린도의 자랑 논쟁을 판단한다. 12절의 사람들은 자기를 자로 삼아 서로 견주고 스스로를 추천했다. 예레미야가 금한 지혜와 용맹과 부의 자랑처럼, 그들은 사람이 내세울 수 있는 자질과 사람들끼리의 평가를 자랑의 근거로 삼았다. 바울은 자랑의 근거를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범위와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룬 일에 둔다(13-16절). 또한 예레미야가 여호와를 아는 일을 자랑의 근거로 삼았다는 점에서, 17절의 인용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무너뜨린다는 5절과 주제상 이어진다. 높아진 주장이 무너진 뒤에 남는 자랑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이 하신 일을 인정하는 자랑이다.

고린도전서 1:26-31에서 바울은 같은 교회에 이 예레미야 말씀을 이미 인용했다. 하나님은 세상이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택하셔서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하나님에게서 나와 그들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 그곳에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은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했다. 17절에서 바울은 같은 말씀을 사역자를 평가하는 문제에 적용한다. 고린도 성도들이 세상의 기준으로 약했어도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듯이, 바울의 몸과 말이 약해 보인다고 해서 그의 사역에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할 수 없다.

주께 받은 권세와 주께서 하시는 인정

8절에서 바울은 주께서 주신 권세를 자랑한다.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으로 무너뜨리고 세운다는 생각은 예레미야 1:9-10과 주제상 가깝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에 말씀을 두시고, 그를 여러 나라와 왕국 위에 세워 뽑고 허물며 세우고 심게 하신다. 예레미야의 권위는 그가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에서 나왔다. 바울의 권세도 주께서 주신 것이므로, 바울이 그 권세를 자랑하는 일은 권세를 맡기신 주님을 자랑하는 일과 떨어질 수 없다. 4-8절은 그 권세로 무너뜨릴 대상과 세울 대상을 구별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주장은 무너뜨리고, 교회는 세운다.

18절은 자기 추천과 주의 인정을 맞세운다. 이 편지는 앞에서도 추천의 문제를 다루었다. 3:1에서 바울은 다시 자기를 추천하기 시작하느냐고, 어떤 사람들처럼 추천서를 주고받을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고린도 성도들 자신이 사도들의 섬김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육의 마음판에 쓴 편지라고 답한다(3:2-3). 이어서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 말한다(3:5). 이 단락에서 바울은 비슷한 답을 범위와 자랑의 말로 다시 준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고린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말하지만(14절), 최종 인정은 주께 돌린다(18절).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이루신 일은 사역을 증언하고, 바울은 그 일을 사역의 증거로 제시한다. 그가 거부하는 것은 12절의 사람들처럼 자기를 자로 삼아 스스로 평가하고 그 평가로 인정을 얻으려는 자기 추천이다. 바울은 사역의 증거를 말하면서도, 자신을 인정하시는 일은 그 일을 이루신 주께 맡긴다.

기독론적 해석

온유하신 그리스도와 약함 가운데 나타나는 능력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성도들에게 권한다(1절). 그리스도의 성품은 이 호소의 근거이며, 바울이 권위를 쓰는 방식을 정한다. 바울은 담대하게 대할 수 있지만 먼저 간청하고(2절), 교회가 응답할 때를 기다린 뒤에 남은 불복종을 다루겠다고 말한다(6절). 이 온유는 문제를 덮어 두는 태도가 아니다. 바울은 바로잡을 것을 분명히 말하면서도, 엄하게 대해야 할 상황이 오기 전에 성도들이 돌이킬 기회를 준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신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신 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부르시며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다(마태복음 11:27-29). 아버지께 모든 것을 받으신 분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사람들을 부르신다. 예수에게서 온유와 겸손은 권위가 없다는 표시가 아니었다. 고린도의 비판자들은 바울이 대면할 때 낮아 보인다는 이유로 그를 약하게 여겼다. 그리스도의 성품에 비추어 보면, 1절에서 바울이 보이는 낮은 태도와 8절에서 말하는 주께 받은 권세는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

바울은 편지 끝에서 약함과 능력의 관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고, 바울도 그 안에서 약하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아 고린도 성도들을 대할 것이다(13:4). 4절에서 바울의 무기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강하다고 말할 때도, 그 힘은 바울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10절의 비판처럼 바울이 몸으로 대할 때 약해 보인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통하여 일하시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과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세

5절에서 사로잡힌 생각이 이르러야 할 곳은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이다. 싸우는 쪽은 바울 일행이지만, 생각이 복종해야 할 주는 바울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5절의 “하나님 아는 것”도 그리스도와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바울은 앞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마음에 비추셨다고 말했다(4:6).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주장을 무너뜨리는 일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복종하게 하는 일이다. 사도의 싸움은 바울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로 이끄는 일이다.

7-8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함과 주께 받은 권세를 이어서 말한다. 바울과 그를 비판하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주장하므로, 자기가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확신만으로 상대를 배제할 수 없다(7절). 8절은 바울이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주장을 주께서 주신 권세로 뒷받침한다. 8절의 “주”도 그리스도를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13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권세를 주시고 그 목적을 세움으로 정하셨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소유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었다(5:15). 구원을 이루신 분은 그리스도이시고, 바울은 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세우도록 권세를 받은 일꾼이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주 안에서의 자랑

13-16절에서 바울이 고린도에 이른 수단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14절). 바울이 자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범위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끈 일이다. 17-18절의 “주”도 그리스도를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14 그렇게 읽으면 바울은 예레미야에서 여호와를 아는 일에 두었던 자랑을 그리스도 안의 자랑으로 적용한다. 고린도전서 1:30-31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도들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 말한 뒤 같은 말씀을 인용한다. 18절에서 사역자를 인정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바울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리라고 말했다(5:10). 사도도 자기 추천이나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판단 앞에서 자기 사역을 책임진다.

현대적 적용

인상과 자기 확신에 기대지 않는 평가

10절의 비판자들은 바울을 몸으로 대할 때의 인상과 말솜씨로 평가했다. 바울이 자기 사역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주께서 세우라고 주신 권세(8절)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고린도에 이른 사실(14절)이며, 최종 판단은 주께서 인정하시느냐에 달려 있다(18절). 오늘 교회가 지도자를 평가할 때도 외적인 인상과 말재주보다 그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주장을 바로잡는지, 성도들의 믿음을 세우는지를 살펴야 한다.

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확신하는 사람에게 같은 기준을 바울에게도 적용하라고 요구한다. 교회 안의 갈등이 깊어지면 각 편이 자신만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여기고 상대를 공동체 밖의 사람처럼 대하기 쉽다. 이 본문은 그런 갈등에서 자기 확신을 상대를 배제하는 근거로 삼지 말라고 요구한다. 바울도 11:4, 13에서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거짓 사도라고 부르므로, 이 요구는 모든 판단을 보류하라는 뜻이 아니다. 상대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났다고 판단하려면, 자기 확신이나 인상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전하는 복음의 내용에 근거해야 한다.

권위를 쓰는 목적과 방식

바울이 쓰는 권세는 주께서 사도인 그에게 주신 것이고, 고린도 교회는 그가 복음으로 세운 교회였다(8, 14절). 오늘의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는 바울과 같은 사도의 자리에서 말하지 않으므로, 이 본문을 근거로 자기 권위를 바울의 권위와 같게 여길 수 없다. 오늘의 지도자가 이 본문에서 배울 것은 권위의 목적과 방식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먼저 간청하고, 편지로 호소하여 성도들이 응답할 시간을 주며, 그 뒤에도 남는 불복종은 방문 때 다루겠다고 말한다(1-2, 6절). 필요한 책망을 계속 미루는 것도, 응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곧바로 엄하게 대하는 것도 이 방식에 맞지 않는다. 책망과 징계가 필요할 때에도 그 목적은 잘못한 사람과 교회를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길로 세우는 데 있다.

5절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는 바울과 그 동역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주장에 맞서는 일을 설명한다. 이 구절을 성도들에게 사생활을 모두 보고하게 하거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까지 지도자에게 검열받게 하는 근거로 쓸 수 없다. 바울의 군사 비유가 무너뜨리는 대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는 주장이고, 사로잡힌 생각이 이르러야 할 곳은 지도자의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이다. 교회는 어떤 주장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충돌하는지 성경을 펴서 설명하고, 성도들이 그 설명을 듣고 스스로 판단하여 그리스도께 복종하도록 도와야 한다.

9-11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편지가 성도들을 겁주는 수단으로 보이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편지로 경고한 것은 방문할 때 실제로 행하겠다고 말한다. 오늘의 지도자도 글이나 메시지로 강하게 경고해 놓고 얼굴을 마주해서는 그 말을 책임지지 않거나, 멀리서 위협하는 말로 사람들을 움직이려 해서는 안 된다. 멀리서 한 경고는 직접 만났을 때 실행하고 책임질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

맡기신 범위 안의 사역과 주 안에서의 자랑

12절의 비판은 자기를 자로 삼아 서로 견주고 스스로를 추천하는 태도를 향한다. 교회도 자기와 비슷한 공동체만 골라 견주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기준을 만들어 사역을 평가할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범위와 그 안에서 자라는 성도들의 믿음을 기준으로 삼는다(13, 15절). 사역을 평가할 때 물을 것은 다른 공동체보다 앞서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사람들 가운데서 믿음이 자라느냐이다.

바울은 다른 사람이 수고하여 이룬 일을 자기 자랑으로 삼지 않는다(15-16절). 오늘의 사역자도 여러 사람이 감당한 일을 자기 한 사람의 비전이나 능력으로 설명하지 말고, 자신의 수고와 다른 사람의 수고를 정직하게 구별하여 말해야 한다. 바울이 말한 범위는 하나님이 사도인 그에게 맡기신 선교 지역이므로, 이 본문에서 오늘 교회들 사이의 지역 경계를 정하는 규칙을 끌어낼 수는 없다. 오늘 교회가 이 본문에서 이어받을 것은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이 자라는 일을 고린도 너머의 복음 전파와 연결했다는 점이다. 교회가 받은 은혜와 성장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사명으로 나아가야 한다.

17절의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은 사역의 열매를 주께 돌리는 감사로 이어진다. 맡은 일이 잘되었을 때 실제 수고를 숨길 필요는 없지만, 그 열매를 가능하게 하신 주님의 일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원하는 만큼 인정받지 못할 때에도 사람들의 칭찬이 사역자의 가치와 사명을 결정하지 않는다. 18절이 말하듯 사역자를 인정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므로, 사역자는 자기 자랑과 비교를 그분 앞에서 살피고 맡은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