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하나님의 뜻으로 세워진 사도와 하나님의 교회 (1-2절)

바울은 형제 디모데와 함께 이 편지를 보내며,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소개한다(1절). “사도”(ἀπόστολος, 아포스톨로스)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며, 바울을 보내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이 편지 전체에 걸친 쟁점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정당한 사도인가 하는 문제다.1 바울은 첫 문장에서 자기 사도직의 근거를 하나님의 뜻으로 밝혀, 이 편지에서 하는 말의 권위가 어디에서 오는지 처음부터 알린다.

수신자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동체도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른다. 2절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빌며, 그 근원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른다. 편지를 보내는 사도와 받는 교회는 같은 근원에서 오는 은혜에 기대어 산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을 찬송함 (3-7절)

3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송축할 때 쓰던 형식인 “찬송하리로다”(Εὐλογητὸς, 율로게토스)로 시작한다(눅 1:68 참조). 원문에서 바울은 찬송받으실 분을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로 부른 뒤 “자비의 아버지”와 “모든 위로의 하나님”으로 부른다. 개역개정은 첫 호칭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로 옮겨 ‘아버지’가 드러나지 않는다. 바울이 자비와 위로의 근원으로 찬송하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4절에서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분”(ὁ παρακαλῶν, 호 파라칼론)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바울 일행을 위로하신다. 그 목적은 그들이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바울 일행이 위로할 사람은 그들과 같은 환난을 겪은 사람으로 한정되지 않고, 어떤 환난이든 그 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그들이 그런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는 그들 자신이 “하나님께 받는 위로”다. 위로하는 사람은 바울 일행이지만, 그 위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5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말하며 4절의 근거를 밝힌다. 바울 일행에게 고난이 넘치는 만큼 위로도 넘치므로, 그들은 받은 위로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 원문에서 두 번 쓰인 ‘넘치다’(περισσεύει, 페리세우에이)는 모두 현재형이다. 개역개정의 “넘친 것 같이”는 지난 일처럼 읽힐 수 있지만, 바울은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위로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그분과의 관계 때문에 겪는 고난을 가리킨다.2 고난이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오듯,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다.

6절에서 바울은 자신들이 환난을 당하는 경우와 위로를 받는 경우를 나란히 들고, 어느 쪽이든 고린도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 일행의 환난은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이어서 그 위로가 성도들 안에서 “역사하여” 바울 일행이 받는 것과 같은 고난을 견디게 한다고 말한다. 위로와 짝을 이룬 “구원”도 이 문맥에서는 고난 가운데 있는 고린도 성도들의 현재 영적 안녕에 초점이 있다.3 이 구원은 바울 일행이 죽음의 위험에서 건짐받은 10절의 일과 구별된다. 바울은 성도들이 견디는 고난을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이라고 부른다. 고린도 성도들도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서 5절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고난을 겪는다.4

7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자신의 소망이 견고하다고 말한다. 그 근거는 성도들이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처럼 위로에도 참여하리라는 앎이다. 5절에서 바울 일행에게 고난이 넘치는 만큼 위로도 넘치듯이, 교회에서도 고난에 참여하는 사람은 위로에도 참여하게 된다.

아시아의 환난과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8-10절)

8절에서 바울은 3-7절에서 말한 환난이 자신들에게 실제로 어떠했는지 알린다. 아시아는 로마의 아시아 속주를 가리킨다.5 바울은 그곳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는지 밝히지 않고, 그 일이 자신들을 얼마나 짓눌렀는지를 말한다.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는 바울 일행이 극심하게, 자기 힘을 넘어서까지 짓눌렸다는 뜻이다. 그 결과 그들은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한 절망이 살아남는 일 자체에까지 미쳤다.

9절에서 바울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고 말한다. 이는 실제 법정의 판결이라기보다 죽음이 확실해 보였던 그들의 판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6 바울은 이어서 이 경험의 목적을 밝힌다. 그들이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는 것이다. 살아날 힘이 자기 안에 남아 있지 않을 때 그들이 기댈 분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뿐이었다.

1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이같이 큰 사망에서” 자신들을 건지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망”은 그들을 거의 삼킬 뻔한 죽음의 위험이다. 바울은 “또 건지실 것이며”라고 장래의 건지심을 말한 뒤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 덧붙인다.7 “바라노라”로 옮긴 동사(ἠλπίκαμεν, 엘피카멘)는 바울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고 지금도 그 소망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이미 큰 사망에서 건지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에, 바울은 위험이 다시 닥쳐도 그 하나님이 건지시리라고 기대한다.

간구와 감사 (11절)

11절은 원문에서 10절과 한 문장으로 이어진다. 헬라어 본문은 명령형 동사 대신 분사 구문(συνυπουργούντων καὶ ὑμῶν, 쉬뉘푸르군톤 카이 휘몬)으로 시작하며, 그 뜻은 ‘너희도 간구로 우리를 위하여 함께 도우면서’에 가깝다. 이 구문은 ‘너희가 도우면’이라는 조건으로도, ‘너희가 돕는 가운데’라는 동반 상황으로도 읽을 수 있고, 문맥만으로는 어느 한쪽으로 정해지지 않는다.8 조건으로 읽으면 하나님이 다시 건지시는 일은 성도들의 간구를 전제로 한다. 동반 상황으로 읽으면 성도들은 하나님이 이루실 건지심에 간구로 동참한다. 바울은 10절에서 “또 건지실 것이며”라고 장래의 건지심을 단언한 뒤 이 구문을 잇는다. 이 흐름에는 동반 상황의 읽기가 더 잘 맞는다.9

이 구문에는 명령법이 없지만, 바울은 이 말로 성도들에게 기도를 청한다. 그는 성도들의 간구를 하나님이 이루실 건지심과 연결해 말하고, 이어지는 목적절에서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감사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 바람이 이루어지려면 성도들이 실제로 간구해야 한다. 바울은 성도들이 간구로 함께하리라는 신뢰를 드러내며 기도를 청한다.10 개역개정의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는 이 요청의 뜻을 바르게 옮긴다. 다만 원문은 이 요청을 10절에 이어지는 분사 구문에 담고, 개역개정은 독립된 명령문으로 옮긴다. 그래서 성도들의 간구가 10절의 소망에 이어진다는 점과 ‘함께’ 돕는다는 뜻이 번역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건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고린도 성도들은 간구로 바울 일행을 돕는다. 4-7절에서 바울 일행이 받은 위로가 교회를 위한 것이었다면, 11절에서는 교회의 간구가 바울 일행을 위한 것이다. 목적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은사”(χάρισμα, 카리스마)는 하나님이 죽음의 위험에서 건지시는 은혜의 선물이며, 많은 사람의 감사는 그 선물을 베푸신 하나님께 향한다. 3절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시작한 단락은 11절에서 많은 사람의 감사로 끝난다.

성경신학적 통찰

건짐받은 사람의 고백과 많은 사람의 감사

9-11절에서 하나님은 죽음이 확실해 보이던 바울 일행을 건지시고, 바울은 그 건지심이 많은 사람의 감사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건짐받은 사람이 공동체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은 시편 116편에도 나온다. 시인은 사망의 위협 가운데 여호와께 생명을 건져 달라고 기도했고(시 116:3-4), 여호와께서 자기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셨다고 고백하며(시 116:8),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서원을 갚고 감사제를 드리겠다고 말한다(시 116:14, 17-19). 바울은 4:13에서 이 시편의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를 인용한다(칠십인역 시 115:1. 개역개정 시 116:10은 번역이 다르다). 그리고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자신들도 예수와 함께 살리실 것을 말한 뒤(4:14),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한다고 덧붙인다(4:15).

바울이 4:13-15에서 이 시편을 부활의 소망과 많은 사람의 감사에 연결하므로, 9-11절의 건지심과 감사도 부활의 소망에 비추어 읽을 수 있다. 시편의 시인은 위기를 지난 뒤 성전 뜰에서 감사를 드리지만(시 116:18-19), 바울은 아시아에서 건짐받은 뒤에도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가운데 있다(4:11). 그래서 바울의 고백은 지나간 건지심을 돌아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께 장래의 건지심을 바라는 소망으로 이어진다(9-10절). 11절에서는 고린도 교회가 간구로 바울 일행을 돕고, 그 간구로 얻은 은사에 대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한다.

위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회복에 속한다

3-7절에서 바울은 위로라는 말을 거듭 쓴다. 이사야서에서 위로는 하나님이 포로기를 지나는 자기 백성을 다시 일으키시는 회복의 행동이다. 이사야 40장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사 40:1), 그 위로의 내용을 예루살렘의 노역이 끝나고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는 선포로 밝힌다(사 40:2). 이사야 49:13에서 선지자는 하늘과 땅에게 노래하라고 외치며 그 이유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시온은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탄식하고(사 49:14), 하나님은 여인이 젖 먹는 자식을 혹시 잊을지라도 자신은 시온을 잊지 않겠다고 응답하신다(사 49:15). 이사야서의 위로는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의 약속이다.

바울은 이사야 49장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회복의 약속으로 읽는다. 6:2에서 그는 이사야 49:8을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로 인용하고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선언한다. 이사야가 약속한 회복의 때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목 안에서 이미 이르렀다는 것이다(5:18-6:2). 3절의 “자비의 아버지”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이사야 49:13의 긍휼과 위로를 떠올리게 하고, 6절에서 바울은 위로와 구원을 나란히 말한다. 이 연결에 비추어 보면, 바울 일행과 교회가 환난 중에 받는 위로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회복하시는 일에 속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시온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살 소망까지 끊어졌던 바울 일행도 그들의 모든 환난 중에서 위로하셨다(4, 8절).

위로와 감사가 사람을 거쳐 퍼져 나간다

4절에서 위로는 하나님에게서 바울 일행에게로, 바울 일행에게서 다른 환난당한 사람에게로 이어진다. 7:5-7에는 이 흐름이 실제로 일어난 장면이 나온다. 마게도냐에서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던 바울을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위로하셨는데, 디도는 고린도 성도들에게서 받은 위로로 바울을 위로하였다. 위로는 하나님에게서 나와 고린도 교회와 디도를 거쳐 바울에게 이르렀다. 바울이 아시아의 환난과 건지심을 이 편지에 써서 알리는 일도 같은 흐름에 속한다. 그가 환난 중에 받은 위로는 그의 말을 통해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리고 이 편지를 읽는 후대의 교회에까지 이른다.11

11절의 목적절에 따르면 바울이 교회의 간구를 청하는 목적은 많은 사람의 감사다. 하나님은 건지심을 은혜의 선물로 베푸시고, 교회는 간구로 바울 일행을 도우며, 많은 사람이 그 선물을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9:11-14에서도 같은 관계가 보인다. 고린도 교회의 연보는 성도들의 부족을 채울 뿐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넘치고, 도움을 받은 성도들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한다. 두 경우 모두 성도들은 서로를 위해 간구하고, 한 사람이나 한 교회에 베푸신 은혜에 대해 여러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한다.

기독론적 해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내신 사도다(1절). 2절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고,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나란히 은혜와 평강의 근원으로 언급한다. 교회가 받는 은혜는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온다. 3절에서 바울은 “자비의 아버지”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신 분을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로 부르며 찬송한다. 그래서 3-11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위로와 건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일이며, 5절에 따르면 그 위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위로

5절에서 바울 일행에게 넘치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이고, 그들이 받는 위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 같은 편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라고 말한다(13:4). 부활하신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와 다른 분이 아니다. 그래서 그분께 속한 사람은 그분 때문에 고난을 겪고, 살아 계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는다.12 이 관계는 바울 일행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고린도 성도들도 같은 고난을 견디며(6절), 고난과 위로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이다(7절).

6절에서 바울은 자신들의 환난이 고린도 성도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편지에서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고(5:14-15),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5:21). 바울이 받은 것은 이 화목을 이루는 일이 아니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다(5:18). 바울 일행의 환난이 성도들을 위한 것은, 4절에 따르면 그들이 환난 중에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기 때문이다. 그 위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다(5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이 바울에게 넘친다는 말은 그가 그리스도의 대속에 무엇을 보탠다는 뜻이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께 속하여 그분의 복음을 맡은 사람에게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이 넘쳐 온다는 뜻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9절에서 바울 일행이 의지하게 된 분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다. 같은 편지에서 바울은 이 하나님을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라고 부른다(4:14). 바울이 아시아에서 의지한 하나님은 이미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다. 바울은 자신들이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는 것이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4:11). 아시아에서의 일도 그런 삶의 한 장면이다. 바울 일행은 자기 힘을 넘는 고난에 던져졌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짐받았다.13 이 건지심을 4:11에 비추어 읽으면, 죽음의 위험에 놓인 바울 일행의 삶에서 예수의 생명이 드러난 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실제로 죽으셨고 하나님이 그분을 살리셨다. 그래서 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소망은 죽음의 위험에서 건짐받는 데에만 묶이지 않는다. 10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앞으로도 건지시기를 바란다. 땅에서 받는 이런 건지심은 하나님이 마지막에 죽음 자체에서 건지실 일을 미리 보여 준다.14 그 마지막 건지심에서 하나님은 바울 일행을 예수와 함께 살리사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것이다(4:14).

함께 간구하고 감사하는 교회

11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은 간구로 바울 일행을 돕는다. 7절에서 바울은 그들을 고난과 위로에 “참여하는 자”라고 불렀다. 그들의 간구는 같은 그리스도께 속하여 고난과 위로를 나누는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하나님께 구하는 일이다. 그들이 간구하는 분은 9절에서 바울 일행이 의지한 하나님, 곧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이다. 이렇게 간구하고 감사하는 일은 사도가 전한 복음으로 열린 하나님과의 교제에 속한다.15 성도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신 하나님이시고(5:18-21), 간구와 감사는 그 은혜를 받은 공동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응답이다. 지금 바울과 교회는 간구와 감사로 서로를 위하고, 마지막에는 함께 하나님 앞에 선다(4:14).

현대적 적용

힘에 겹다는 고백

바울은 아시아에서 힘에 겹도록 짓눌려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고백한다(8절). 그는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며 이 일을 교회에 스스로 알렸다. 그가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 일(9절)은 절망을 부인한 데서가 아니라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던 바로 그때에 일어났다. 그러므로 힘에 겨워 더 견딜 수 없다고 말하는 신자를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이 본문과 맞지 않는다. 그런 고백을 하는 때가 자기를 의지하던 마음이 하나님께로 옮겨 가는 때일 수 있다.

9절의 목적절은 바울이 자기 일을 돌아보며 한 고백이다. 그는 아시아의 환난이 자신들을 무엇으로 이끌었는지 말한다. 이 고백을 다른 사람의 고난에 옮겨 “하나님이 너를 가르치시려고 이 일을 주셨다”고 말하면, 바울이 자기 경험에 대해 한 말을 남의 고난이 생긴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바꾸게 된다. 바울은 고난당하는 고린도 교회에도 그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가 그들에게 말한 것은 그들이 고난에 참여한 것처럼 위로에도 참여하리라는 견고한 소망이었다(7절).

위로하는 사람도 간구가 필요하다

4절에서 바울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11절에서는 고난과 위로에 함께 참여하는 고린도 성도들에게(7절) 간구로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청한다. 위로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을 맡은 사람도 바울처럼 자신의 한계를 알리고 기도를 구할 수 있다. 죽음의 위험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짐 아래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이 본문이 가장 직접 청하는 응답이다.

자기 경험을 요구하지 않는 위로

4절에 따르면 바울 일행이 위로할 대상은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위로하는 사람은 자신이 겪어 보지 않은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도 위로하게 된다. 자신이 고난을 이겨 낸 방식은 자기가 겪은 환난 가운데서 얻은 것이어서, 다른 환난을 겪는 사람의 회복 과정에 그대로 요구할 수는 없다. 4절에서 위로하는 사람이 건네는 것은 그 자신이 “하나님께 받는 위로”다. 위로하는 사람이 자기 경험보다 이 위로를 신뢰할 때, 상대의 고난을 자기 이야기로 덮지 않고 들을 수 있다.

은혜를 성과로 바꾸지 않음

11절에서 건지심은 “은사”, 곧 은혜의 선물이며 많은 사람의 감사는 하나님께 향한다. 어떤 사람이 위기를 지나 회복되었을 때 그 이야기가 당사자의 강한 믿음이나 기도 모임의 능력을 입증하는 이야기로 바뀌면, 은혜가 사람의 성과가 된다. 그것은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는 9절의 고백을 거꾸로 돌리는 일이다. 또 회복이 믿음과 기도의 성과가 되면, 같은 방식으로 건짐받지 못한 사람은 믿음이나 기도가 부족했던 사람이 된다.

바울은 앞으로도 건지시기를 바랐고, 그 소망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께 두었다(9-10절). 그래서 교회는 지금 베풀어진 건지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런 건지심을 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은 성도를 두고도 같은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4:14에서 바울은 주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이 자신들도 예수와 함께 살리사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그 앞에 세우시리라고 말한다. 먼저 죽은 성도들도 이 소망 안에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남은 성도들과 함께 그 앞에 세우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