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시편 23편은 개역개정과 BHS의 절 번호가 같다. BHS는 “다윗의 시”라는 표제(מִזְמוֹר לְדָוִד, 미즈모르 레다위드)를 1절 앞부분에 넣어 센다. 표제를 독립된 1절로 세어 개역개정보다 절 번호가 하나씩 큰 시편 20-22편과는 다르다. 1-4절에서 여호와는 양을 이끄는 목자이고, 5-6절에서는 손님에게 상을 차리는 주인이다. Robert G. Bratcher와 William D. Reyburn의 UBS 시편 번역 해설도 5절에서 비유가 목자에서 주인으로 바뀐다고 설명한다.5 시인은 1-3절에서 여호와에 대해 말하다가 4-5절에서는 “주께서”라고 직접 부르고, 6절에서 다시 “여호와의 집”을 말한다. 풀밭과 물가에서 먹고 마시던 양의 모습은 차려진 상과 가득 찬 잔을 받는 손님의 모습으로 바뀌며, 그 걸음은 여호와의 집에 이른다.
1절에서 시인은 이스라엘의 목자를 “나의 목자”(רֹעִי, 로이)라고 부른다. UBS 번역 해설은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목자로 묘사하는 본문으로 시편 28:9, 77:20, 78:52와 에스겔 34:11-16을 든다.1 공동체가 고백해 온 목자를 시인은 자기 삶의 목자로 신뢰한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앞의 고백에 기대어, 여호와께서 목자이시므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모자라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UBS도 두 줄의 인과관계를 드러내어 옮길 수 있다고 제안한다.1 원하는 것을 모두 얻으리라는 약속이 아니라, 양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는 목자를 향한 신뢰다.
2절에서 목자는 양이 먹고 쉴 자리를 마련한다. “푸른 풀밭”의 풀은 갓 돋은 풀(דֶּשֶׁא, 데셰)이며, “누이시며”(יַרְבִּיצֵנִי, 야르비체니)는 양이 눕게 한다는 사역형이다. UBS 번역 해설은 풀이 많아 먹고 쉬기 좋은 들판을 뜻하며, 이 동사에 억지로 눕힌다는 뜻은 없다고 설명한다.2 목자가 이끄는 “쉴 만한 물”은 “쉼의 물”(מֵי מְנֻחוֹת, 메 메누호트)로, 해설은 맑은 물이 잔잔히 흐르는 곳으로 이해한다.2 “인도하시는도다”(יְנַהֲלֵנִי, 예나할레니)는 이사야 40:11에서 어미 양들을 온순히 인도하고 49:10에서 백성을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는 동사와 같다. 목자는 양에게 풀과 물을 공급하고 편히 쉬게 한다.
3절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는 생기와 힘을 되찾게 하신다는 뜻이다. “내 영혼”(נַפְשִׁי, 나프쉬)은 목숨과 생기, 그 생명을 지닌 사람 자신을 가리킬 수 있고, “소생시키시고”(יְשׁוֹבֵב, 예쇼베브)는 ‘돌아오다’라는 동사의 사역적 표현이다. UBS는 2절의 돌보심으로 양이 활력을 되찾는 장면으로 이해한다.3 이어 목자는 양을 “의의 길”로 이끄신다. ‘바름, 의’를 뜻하는 צֶדֶק(체데크)을 포함한 이 표현에 대해 UBS는 Anderson의 “행복으로 이끄는 길”과 여러 번역의 “바른 길”, “곧은 길”을 소개한다. 목자의 비유에서는 위험한 곳을 피해 풍성한 풀밭으로 이어지는 바른 길이라는 것이 해설의 판단이다.3 여호와의 뜻에 맞는 삶으로 넓혀 읽는 해석은 이 낱말이 구약에서 지니는 윤리적 의미에 기댄다. 목자가 인도하시는 까닭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다. UBS는 이를 자기 명성에 걸맞게 행동한다는 뜻으로 설명하고, 약속을 지키시는 여호와의 명성과 연결한 번역 및 “선한 목자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되지 않는다”는 Taylor의 설명을 소개한다.3 시편 25:11에서 시인이 주의 이름을 근거로 용서를 구하듯, 여기서도 인도의 근거는 목자의 신실하심이다.
4절에서 시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안을 걸어간다. “사망의 음침한”에 해당하는 צַלְמָוֶת(찰마웨트)은 번역이 갈리는 낱말이다. UBS에 따르면 칠십인역은 ‘골짜기’를 ‘한가운데’로 옮겼으며, 이 낱말은 욥기 3:5와 시편 107:10 등에서 ‘어둠’을 뜻하지만 마소라 본문의 형태는 칠십인역처럼 ‘죽음의 어둠’이라는 합성어로 읽을 수 있다. 현대 번역도 ‘어두운 골짜기’와 ‘죽음처럼 어두운 골짜기’로 나뉜다.4 개역개정은 ‘죽음의 그늘’이라는 전통적 이해를 따른다. 시인이 두려워하지 않는 “해”(רָע, 라)는 이 문맥에서 위험과 해악을 뜻한다.4 골짜기는 여전히 위험하지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고백이 두려움을 이긴다. 시인은 여기서 처음으로 여호와를 “당신”이라 직접 부른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목자에 관한 고백이 목자에게 드리는 기도가 된다.
4절의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자의 보호를 눈앞에 드러낸다. UBS에 따르면 개역개정의 “지팡이”는 들짐승을 쫓는 곤봉이고, “막대기”는 몸을 기대는 긴 막대다. Kirkpatrick은 하나의 도구를 두 이름으로 부른 시적 표현으로 보았으나, 대부분의 번역은 둘을 구별한다. “안위하시나이다”는 안심시키고 안전하다고 느끼게 한다는 뜻이다.4 두 도구를 다시 가리키는 “그것들이”(הֵמָּה, 헴마)는 “바로 그것들이 나를 안심시킨다”고 강조한다. 양은 목자의 손에 든 도구를 보며 곁에 있는 목자를 신뢰한다.
5절에서 여호와는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리는 주인이다. UBS는 감사 제사 뒤의 교제 식사가 배경일 수 있다며 시편 22:26을 들고, 여호와가 주인이시므로 원수들이 곁에 있어도 손님은 그분의 보호 아래 있다고 설명한다. 원수들이 손님을 해칠 수 없다는 조롱의 어조가 담겼을 가능성도 소개한다.5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의 동사(דִּשַּׁנְתָּ, 딧샨타)는 머리를 기름으로 윤택하게 한다는 뜻이다. 같은 어근은 BHS 시편 20:4(개역개정 20:3)의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과 BHS 22:30(개역개정 22:29)의 “풍성한 자”에도 쓰인다. 해설은 손님의 머리에 올리브기름을 발라 주는 환대의 예법을 설명하며 누가복음 7:46을 든다.5 왕을 세우는 의식보다 손님을 귀하게 맞는 장면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주인이 포도주를 잔 가장자리까지 채우는 너그러움을 그린다. 이를 독한 술로 취하게 한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UBS는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5 목자에게서 필요한 것을 공급받던 사람이 이제 주인의 손님으로 풍성한 대접을 받는다.
6절의 “반드시”(אַךְ, 아크)는 뒤따르는 고백을 강조한다. UBS는 “나는 확신하노니”로 옮길 수 있으며, ‘오직’으로 읽어 선하심과 인자하심만이 따른다는 뜻으로 옮길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6 “인자하심”(חֶסֶד, 헤세드)은 언약 관계에서 지키는 신실한 사랑이다. “나를 따르리니”(יִרְדְּפוּנִי, 이르데푸니)의 동사는 흔히 ‘뒤쫓다’를 뜻하지만, UBS는 여기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여호와의 사자처럼 동행하는 모습을 그리므로 ‘함께 가다’로 이해한다.6 원수들이 앞에 있어도 시인의 뒤를 따라오는 것은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다. 그 동행은 “내 평생에” 계속된다.
6절의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에는 두 가지 번역 쟁점이 있다. UBS에 따르면 “살리로다”의 וְשַׁבְתִּי(웨샤브티)는 마소라 본문의 모음대로 읽으면 “내가 돌아오리라”다. 같은 자음을 칠십인역처럼 다른 모음으로 읽으면 “내가 거하리라”가 되며, 대부분의 주석과 번역은 이 읽기를 따른다. UBS는 Hebrew Old Testament Text Project를 인용하여 고대 역본과 유대 문법학자들이 모두 ‘앉다, 거하다’로 이해했다고 전한다.6 개역개정도 ‘거하리라’를 따른다. 마소라 모음을 따르면 3절의 יְשׁוֹבֵב와 같은 ‘돌아오다’ 동사가 되어, 여호와께서 회복시키신 사람이 여호와의 집으로 돌아오는 그림이 된다. 해설은 이 집을 성전으로 보고 평생 여호와를 예배하며 임재를 누리려는 소망으로 이해하지만, 하늘 처소로 보는 Anchor Bible의 견해도 소개한다. “영원히”로 옮긴 לְאֹרֶךְ יָמִים(레오레크 야밈)은 “날들의 길이 동안”으로, 대개 ‘평생토록’이나 ‘오랫동안’으로 이해한다.6 BHS 시편 21:5(개역개정 21:4)의 “장수”에도 같은 표현이 쓰이지만, 거기에는 “영원한”에 해당하는 עוֹלָם וָעֶד(올람 와에드)가 덧붙고 여기에는 없다. 개역개정의 “영원히”는 이 표현을 넓게 옮긴 것이다. 시인은 일생 내내 여호와의 집에서 그분의 임재 가운데 살기를 고백한다.
성경신학적 통찰
시편 78:52-53은 출애굽을 목자의 일로 기억한다. 하나님은 백성을 양 떼처럼 광야에서 인도하셨고, 그들은 안전히 인도받아 두려움이 없었다. 광야에서 먹을 것과 물을 공급받은 이스라엘의 경험이 시편 23편에서는 한 사람의 “나의 목자”라는 고백이 된다. 시편 78:53과 23:4는 두려움을 이기는 이유를 목자의 인도에서 찾는다.
이사야 63:11-14의 백성은 양 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하나님이 지금 어디 계시냐고 묻는다. 그들은 여호와의 영이 가축을 골짜기로 내려가듯 편히 쉬게 하시고, 백성을 인도하여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기억한다(63:14). “편히 쉬게 하셨도다”(תְּנִיחֶנּוּ, 테니헨누)는 시편 23:2의 “쉴 만한 물”(מֵי מְנֻחוֹת, 메 메누호트)과 ‘쉼’이라는 어근을 공유한다. 백성을 쉬게 하고 인도하여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은 시편 23편의 목자와 같은 분이다. 이사야 63장의 백성은 그 목자가 어디 계시냐고 묻고, 시편의 시인은 그분이 자기와 함께 계신다고 고백한다.
에스겔 34장에서 하나님은 양을 먹이지 않고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책망하신다. 흩어진 양을 친히 찾아 모아 “누워 있게” 하시겠다는 약속(34:15)은 시편 23:2의 풀밭과 겹친다. 하나님은 다윗 계열의 한 목자를 세워 양을 먹이겠다고 약속하신다(34:23). 이사야 56:11도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몰지각한 목자들”을 고발하는 한편, 44:28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에 쓰실 고레스를 “내 목자”라 부른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이름을 표제에 두면서도 그를 양의 자리에 세운다. 백성을 맡은 사람 목자는 먼저 여호와의 양으로 살아야 한다. 실패한 지도자들을 대신하여 여호와께서 친히 돌보시고 다윗 계열의 한 목자를 세우시리라는 에스겔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목자 왕에 대한 기대를 형성한다.
이사야 40:11의 목자는 어린 양을 품에 안고 젖먹이는 어미 양을 온순히 이끄신다. “목자”와 “먹이시며”는 같은 어근에서 나와, 여호와께서 양을 먹이시는 분임을 강조한다.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יְנַהֵל, 예나헬)는 시편 23:2의 “인도하시는도다”(יְנַהֲלֵנִי, 예나할레니)와 같은 동사다. 이사야 49:9-10에서는 포로에서 돌아오는 백성이 길에서 먹고, 헐벗은 산에서도 풀밭을 얻으며,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으리라는 약속으로 이어진다.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그들을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יְנַהֲלֵם, 예나할렘)는 말도 같은 동사를 쓴다. 시편의 풀밭과 물가가 이사야에서는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백성 전체의 길, 새 출애굽의 약속이 된다.
이사야 55:1-3은 돈 없는 목마른 자를 물과 음식으로 초대하고, “좋은 것”과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약속한다. “기름진 것”은 시편 23:5에서 머리에 기름을 부으시는 동사와 어근이 같고, “좋은 것”도 23:6의 “선하심”과 같은 낱말이다.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는 약속과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חַסְדֵי דָוִד, 하스데 다위드)는 시편의 소생과 “인자하심”(חֶסֶד, 헤세드)을 떠올리게 한다. 한 사람이 누리는 잔칫상은 모든 목마른 자에게 열리는 언약의 잔치와 연결된다. 이사야 65:11-13에서는 여호와를 버린 자들이 갓과 므니에게 상을 차리고 술을 가득 붓는다. “상을 베풀며”는 시편 23:5의 상 차림과 같은 동사와 명사를 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종들이 먹고 마실 때 그들은 주리고 목마르리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의 상에 앉는 사람과 다른 신에게 상을 차리는 사람의 운명이 갈린다.
시편 23:6의 인자하심은 이사야 54장에서 진노와 포로의 시간을 지난 백성에게 주시는 약속이 된다. 하나님은 잠시 얼굴을 가리셨으나 영원한 자비로 긍휼히 여기겠다고 말씀하시고(54:8), 산과 언덕이 옮겨져도 자기 자비와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신다(54:10). 여기서 “자비”는 시편의 헤세드와 같은 말이다. 이사야 54:10의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와 49:10의 “긍휼히 여기는 이”도 같은 어근의 분사로 표현된다. 샘물로 인도하시는 목자는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다. 시인이 평생 동행하리라고 신뢰한 사랑은 진노의 시간을 지난 백성에게도 떠나지 않는다.
시편 23편의 앞뒤에는 고난과 예배의 노래가 놓여 있다. 시편 22편은 버림받음의 부르짖음으로 시작하여, 구원받은 시인이 회중 가운데서 서원을 갚고 겸손한 자들이 먹고 배부르는 장면에 이른다(22:26). UBS는 이런 감사의 식사가 시편 23:5의 배경일 수 있다고 본다.5 시편 24편은 여호와의 거룩한 곳에 설 사람이 누구냐고 묻고, “여호와를 찾는 족속”을 말한다(24:3-6). 22:26(BHS 22:27)의 “여호와를 찾는 자”와 24:6의 “여호와를 찾는 족속”에는 같은 동사의 분사가 쓰인다. 그 사이에서 23편의 시인은 여호와의 집에 평생 거하기를 고백한다. 버림받음의 부르짖음에서 감사의 식탁을 지나 거룩한 곳에 서는 예배자로 나아가는 흐름이다. 시편 21:4(BHS 21:5)에서 왕에게 주어진 “장수”도 23:6의 “날들의 길이”와 연결된다. 개인의 신뢰는 출애굽과 왕정, 포로와 귀환, 성전 예배라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울린다.
기독론적 해석
시편 23편은 먼저 여호와를 자기 목자로 고백한 이스라엘 사람의 노래다. 이 시에서 목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이시며, 시인은 사람 왕이나 지도자를 목자로 부르지 않는다. 구약은 사람 목자들의 실패를 고발하면서, 여호와께서 친히 목자가 되시리라는 약속과 다윗 계열의 한 목자를 세우시리라는 약속을 함께 남겼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그 기대를 채우지 못했고, 백성은 이사야 63장처럼 그 목자가 어디 계시냐고 물어야 했다. 신약은 이 두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만난다고 증언한다. 요한복음 10:11에서 예수는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시고, 10:14에서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라고 덧붙이신다. 예수는 시편 23편에서 여호와께 드려진 목자의 자리에 자신을 두신다. 동시에 그분은 에스겔 34:23이 말한 다윗 계열의 목자로서 양 떼를 맡으신다. 시편 23편의 시인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한 관계가, 양을 아시는 예수와 예수를 아는 양 사이의 관계로 이어진다.
신약은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부터 그분을 목자 왕의 약속과 연결한다. 마태복음 2:6은 미가서의 예언을 인용하여, 베들레헴에서 나실 다스리는 이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고 말한다. 다윗의 고향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는 에스겔 34:23이 말한 “내 종 다윗”의 자리에 서신다. 그러나 시편 23편의 표제에 이름이 붙은 다윗 자신은 완전한 목자가 아니었다. 그는 들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였지만, 왕이 된 뒤에는 자기 욕심으로 한 사람의 생명과 가정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목자 왕들은 모두 먼저 여호와의 양으로 살아야 했고, 아무도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예수는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신 양이며, 동시에 양 떼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목자다. 그래서 시편 23편의 고백은 예수 안에서 두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는 아버지를 신뢰하며 죽음의 골짜기까지 걸으신 참된 이스라엘이시고, 그분의 백성이 “나의 목자”라고 부를 수 있는 목자이시다.
마가복음 6:34-44에서 예수는 큰 무리가 목자 없는 양 같은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먼저 여러 가지를 가르치시고, 이어 사람들을 푸른 잔디 위에 떼를 지어 앉게 하신 뒤 떡과 물고기로 먹이신다.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 시편 23:2의 목자가 양을 새 풀의 풀밭에 눕히시듯, 예수는 빈 들에서 무리를 푸른 잔디에 앉히시고 먹이신다. 시편 23:1의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가 빈 들의 무리에게 실제로 일어난다. 예수는 양에게 필요한 것을 말씀과 떡으로 채우신다. 시편 23:3의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가 목숨과 생기를 지닌 사람 전체의 회복을 말하듯, 예수의 돌보심도 사람 전체를 향한다.
요한복음 10장의 목자는 양을 앞에서 이끈다. 예수는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고, 양들보다 앞서 가며, 양들은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따라간다고 말씀하신다(요한복음 10:3-4). 시편 23:2-3에서 목자가 양을 물가로, 의의 길로 이끄셨듯, 예수는 양의 이름을 부르시며 앞서 가신다. 누가복음 15:4-6에서 예수는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잃은 양 하나를 찾아 나선 목자가, 찾은 양을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돌아오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사야 40:11의 목자가 어린 양을 팔로 모아 품에 안듯, 예수의 비유 속 목자는 지친 양을 직접 메고 온다. 시편 23편처럼, 양을 찾아 돌보고 이끄는 쪽은 목자다.
시편 23편의 목자는 양을 위해 맹수를 막아 섰다. 요한복음 10:11의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이 차이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이 드러난다. 이사야 53:6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한다. 시편 23:3에서 목자는 양을 “의의 길로” 이끄시지만, 이사야 53:6의 양들은 “제 길로” 갔다. 이어 53:7은 그 죄악을 짊어진 이를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에 비긴다. 양 떼를 이끌어야 할 목자가 양들의 죄를 지고 스스로 어린 양이 되어 죽음으로 끌려간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다(마태복음 27:46). 시편 22편의 첫 부르짖음이 예수의 기도가 되었다. 시편 23:4의 양은 목자와 함께 죽음의 그늘 같은 골짜기를 지났다. 예수는 그 골짜기의 가장 깊은 곳인 죽음과 버림받음을 홀로 지나가신 목자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지나는 어두운 골짜기에는 목자가 먼저 걸어간 자국이 있다. 히브리서 13:20은 하나님이 영원한 언약의 피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셨다고 말한다. 골짜기를 지나신 목자가 다시 살아나 양 떼 앞에 서신다.
베드로전서 2:25는 이사야 53장의 그림을 이어받아,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던 사람들이 이제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분에게 돌아왔다고 말한다. 시편 23:3에서 목자가 “내 영혼을” 돌아오게 하셨듯, 신약에서 그리스도는 길 잃은 양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목자다. 베드로 자신도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뒤 다시 돌아온 사람이었고, 부활하신 예수는 그에게 자기 양을 먹이라고 맡기셨다(요한복음 21:15-17). 시편 23:3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도 여기서 새로운 깊이를 얻는다. 여호와는 약속을 지키시는 자기 이름에 걸맞게 양을 이끄셨다. 그리스도는 그 이름에 걸맞게 양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양을 끝까지 책임지는 목자의 이름으로 드러난다.
시편 23:4에서 시인이 골짜기 한가운데서 드린 고백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계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마태복음은 예수의 탄생을 알리며 그분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임마누엘로 소개하고(마태복음 1:23), 복음서의 마지막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다(마태복음 28:20). 시편 23:4의 목자는 골짜기 밖에서 양을 기다리지 않고 양과 함께 골짜기 안을 걸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질병과 슬픔과 죽음이 있는 사람의 자리 한가운데로 들어오셨다. 시편 23편의 시인은 골짜기에서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보며 안심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와 부활을 지나신 목자의 약속을 붙들고 골짜기를 걷는다. 함께하심의 근거가 목자의 손에 들린 도구에서 목자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깊어졌다.
5절의 주인과 상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읽힌다. 누가복음 7:36-50에서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인 시몬은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는 예법을 지키지 않았다. 그때 그 집에 들어온 한 여인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었고, 예수는 그 여인의 많은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의 눈에 죄인이던 여인이 예수 앞에서 환대받는 사람이 되었다. 예수는 마지막 밤에 제자들과 식탁에 앉아 잔을 주시며 그 잔이 자기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누가복음 22:20). 그 식탁에는 자기를 팔 사람의 손도 함께 있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리시는 주인의 모습이 이 장면에서는 자기를 배반할 사람까지 상에 앉히시는 주인의 모습으로 읽힌다. 같은 밤 예수는 고난의 잔을 자기에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신 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누가복음 22:42). 예수께서 고난의 잔을 마시셨기에, 그분의 백성은 가득 찬 은혜의 잔을 받는다. 교회가 성찬의 식탁에 모일 때마다 시편 23:5의 상과 잔은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는 상과 잔이 된다.
요한복음 10:16에서 예수는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도 인도하여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에스겔 34:23의 “한 목자”가 여기서 이스라엘의 양과 다른 양을 모으는 목자로 나타난다. 시편 22:27이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라고 내다본 일이 이 목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사야 49장에서 샘물 근원으로 인도받던 백성의 귀환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민족들까지 한 목자 아래 모이는 일로 넓어진다. 교회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민족들의 목자도 되신다는 이 약속 위에 세워진다. 시편 23편에서 한 사람이 고백한 “나의 목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과 민족들이 함께 고백하는 목자가 된다.
요한계시록 7:17은 이 시편의 끝을 보여 준다.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바로 앞 7:16은 이사야 49:10처럼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으리라고 말한다. 이사야 53:7에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던 어린 양이 요한계시록에서는 보좌 가운데 계신 목자가 된다. 목자가 어린 양이 되어 죽으셨고,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이제 목자로서 양 떼를 이끄신다. 시편 23:2의 “쉴 만한 물 가”와 이사야 49:10의 “샘물 근원”은 어린 양이 이끄시는 생명수 샘으로 이어지고, 23:6의 “여호와의 집”은 하나님 앞의 영원한 거처로 이어진다. 시편 23:6의 히브리어는 “날들의 길이”, 곧 평생을 말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 평생은 죽음으로 끊기지 않는 생명으로 열린다. 시인이 평생토록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를 고백했다면, 그리스도 안의 백성은 그 고백이 마지막 날 눈물이 씻기는 자리에서 완성되기를 기다린다.
현대적 적용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필요한 것을 아시는 목자를 향한 신뢰다. 원하는 것이 계속 늘어날 때에도 이 고백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소유의 크기로 재지 않게 한다. 목자가 주시는 풀과 물과 쉼을 의지하는 사람은 가진 것을 움켜쥐어 자기 안전을 보장하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이웃의 필요에 응답할 수 있다.
목자는 지친 양을 쉬게 하고 소생시킨다. 쉼과 회복을 스스로 이루어 내야 할 성과로 여기는 사람에게 이 장면은 돌보심을 받는 양의 자리를 일깨운다. 목자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양을 이끄신다. 회복의 소망은 지친 사람의 결심보다 목자의 신실하심에 있다. 그분을 따라 사는 사람은 자기 욕심대로 길을 정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생명을 살리는 바른 인도를 신뢰한다.
시인은 골짜기 한가운데서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기도한다. 그리스도인의 고통을 믿음이 약한 탓으로 돌리거나 서둘러 밝은 결론으로 덮는 말은 이 고백과 맞지 않는다. 골짜기는 어둡고 목자는 그 안에서 함께 걷는다. 죽음과 부활을 지나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도 슬픔과 두려움을 하나님께 직접 아뢸 수 있다.
상은 원수가 사라진 뒤가 아니라 원수 앞에서 차려진다. 적대하는 사람의 평가가 하나님께 받은 존귀함을 빼앗을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인은 보복으로 자기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이 신뢰 때문에 부당한 일을 덮거나 위험한 관계에 머물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원수 앞에서 손님을 보호하시는 주인은 그의 안전도 돌보신다. 하나님의 환대를 받은 사람은 가난한 이웃을 낮추어 대하지 않고 같은 주인의 손님으로 받아들인다.
에스겔 34장과 이사야 56:11이 고발한 지도자들은 양을 먹이지 않고 자기만 먹였다. 사람을 맡은 이는 그들을 자기 이익을 위한 자원으로 삼을 수 없다. 시편의 목자는 양에게 필요한 먹이와 쉼을 마련하고 위험 속에서 지킨다. 여호와의 돌보심을 말하면서 맡은 사람을 소진시키는 지도력은 이 목자의 모습과 어긋난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따른다는 고백은 넘어지고 실패한 날에도 목자의 신실한 사랑을 의지하게 한다. 시인은 일생 동안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를 바랐다. 그리스도의 백성은 그 소망을 어린 양이 목자가 되어 생명수 샘으로 이끄시고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약속 안에서 붙든다(요한계시록 7:17).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도 목자의 돌보심을 신뢰할 근거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