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개역개정 시편 22:22-31은 BHS의 22:23-32에 해당한다. BHS는 표제를 1절로 세므로 개역개정보다 절 번호가 하나씩 크다. 여기서는 개역개정 절 번호를 따른다. 탄식에서 찬송으로 바뀌는 계기는 21절 끝의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עֲנִיתָנִי, 아니타니)다. 2절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וְלֹא תַעֲנֶה, 벨로 타아네)라는 탄식이 응답을 고백하는 말로 바뀐다. UBS 번역 해설은 22-31절을 시편의 둘째 부분으로 보며, 22-24절의 공적 감사와 27-31절의 보편적 통치를 구분한다.14 찬송에 참여하는 이들은 형제와 회중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의 자손, 곤고한 자, 모든 민족과 죽을 인생,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으로 넓어진다.
22절에서 시인은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고”(אֲסַפְּרָה, 아사페라) 회중 가운데서 찬송하겠다고 약속한다. ‘선포하다’는 하나님의 행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17절에서 자기 뼈를 “셀 수 있나이다”(אֲסַפֵּר, 아사페르)라고 말할 때 쓴 동사가 이제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는 데 쓰인다. UBS 해설에 따르면 ‘이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는 행적을 가리키며, ‘형제’는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 ‘회중’은 성전에서 함께 예배하는 무리다.1 백성의 조롱거리였던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의 찬송에 참여한다.
23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 야곱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찬송과 영광과 경외를 요구한다. 세 명령은 하나님을 높이며 그분께 순종하는 예배를 가리킨다. UBS 해설이 설명하듯 여기의 경외에는 존경과 예배가 포함된다. GNT는 23-24절을 시인이 부를 찬송의 내용으로 묶고, New Jerusalem Bible은 23절만 직접 인용으로 처리한다.2 ‘자손’의 원뜻은 “씨”(זֶרַע, 제라)이며, 이 말은 30절의 ‘후손’과 이어진다.
24절은 찬송할 이유를 밝힌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의 곤고”(עֱנוּת עָנִי, 에누트 아니)를 멸시하지 않으셨고, 얼굴을 숨기지 않으셨으며, 울부짖음을 들으셨다. 시인을 조롱하던 사람들과 하나님이 다르게 대하셨다. UBS 해설에서 ‘얼굴을 숨기다’는 외면하고 응답하지 않는 행동을, ‘듣다’는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1-2절에서 버림받았다고 호소하던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를 외면하지 않으셨다고 찬송한다. RSV는 과거에 행하신 일로, GNT는 하나님께서 거듭 행하시는 일로 옮긴다.2
“곤고한 자의 곤고”에는 다른 해석도 있다. UBS 해설에 따르면 Dahood는 ‘곤고’를 뜻하는 명사를 ‘노래하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로 보아 “곤고한 자의 노래”로 옮겼고, Anderson도 이를 지지한다. New Jerusalem Bible은 “비천한 자의 간청”으로 옮긴다.2 개역개정과 RSV는 ‘곤고’라는 읽기를 따른다. 어느 번역을 택하든, 멸시받던 이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것이 찬송의 이유다.
25절에서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다(מֵאִתְּךָ תְהִלָּתִי בְּקָהָל רָב, 메이테카 테힐라티 베카할 라브). 히브리어 문장에는 별도의 서술 동사가 없으며, 개역개정은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로 풀어 쓴다. UBS가 인용하는 Anderson의 설명대로 하나님은 찬송의 근원이자 대상이다. GNT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송의 원인과 주제로 드러낸다.3 시편 35:18과 40:9-10처럼 구원받은 사람은 큰 회중 앞에서 감사한다.
이 찬송은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נְדָרַי אֲשַׁלֵּם, 네다라이 아샬렘)라는 약속으로 이어진다. 고난 중에 드리겠다고 약속한 제물을 이제 회중 앞에서 온전히 바친다는 뜻이다. UBS 해설은 25-26절을 감사 제사와 그에 따르는 공동 식사로 풀이한다.3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과 곤고한 이들의 배부름이 이어진다. 히브리어는 “주께로부터”라고 하나님을 부르다가 “그를 경외하는 자들 앞에서”라고 회중에게 말하지만, 개역개정과 GNT는 두 줄 모두 “주”로 맞추었다.3
26절의 “겸손한 자”(עֲנָוִים, 아나빔)는 성품이 온유한 사람에 한정되지 않는다. 24절의 곤고한 자처럼 가난하고 낮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그들은 감사의 식탁에서 먹고 배부르며, 여호와를 찾는 자들은 그분을 찬송한다. UBS 해설은 이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며 성전에서 예배하는 사람들로 설명한다.3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יְחִי לְבַבְכֶם לָעַד, 예히 레바브켐 라아드)는 식탁의 손님들에게 베푸는 축복으로 읽을 수 있다. UBS 해설은 이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비는 말로 설명하고, Traduction œcuménique de la Bible도 “길고 행복한 삶”으로 옮긴다. 반면 Bible de Jérusalem, New Jerusalem Bible, New American Bible은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 하는 찬송으로 읽는다.3 14절에서 자기 마음이 밀랍처럼 녹는다고 탄식하던 시인이 이제 다른 이들의 생명을 축복한다.
27절에서 땅의 모든 끝과 모든 민족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와 예배한다. UBS 해설은 ‘기억하다’를 하나님을 인정하며 고백하고 찬송하는 행동으로 풀이한다. New English Bible 등은 이 절을 민족들이 돌아오게 해 달라는 기도로 옮기지만, 개역개정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로 서술한다. “주의 앞에”(לְפָנֶיךָ, 레파네카)는 하나님을 직접 부르는 말이다. RSV는 고대 역본을 따라 “그 앞에”로 고쳤으나, UBS 해설은 히브리어에서 인칭이 자주 바뀌므로 이문을 상정하지 않고도 이런 전환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4
민족들이 예배할 근거는 28절의 여호와의 왕권이다.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에서 ‘나라’(הַמְּלוּכָה, 함멜루카)는 다스리는 권세를 뜻한다. 이어지는 “모든 나라”는 그분이 다스리시는 민족들이다. UBS 해설은 첫 문장을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 또는 “왕의 권세가 여호와께 있다”로 옮길 수 있다고 설명한다.4 곤고한 한 사람에게 응답하신 여호와께서 모든 민족의 왕이시므로, 모든 민족이 그분 앞에 나아온다.
29절의 본문과 번역은 크게 갈린다. 개역개정은 마소라 본문을 따라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하며, 진토로 내려가는 자도 그 앞에 절한다고 옮긴다. UBS가 소개하는 Briggs 등의 제안은 첫머리의 “먹었고”를 “참으로 그에게”로 고쳐 읽고 뒤의 접속사를 빼는 것으로, RSV와 GNT 등이 이를 따른다. Traduction œcuménique de la Bible과 Hebrew Old Testament Text Project는 마소라 본문을 따른다. ‘살진 자들’을 ‘잠든 자들’, 곧 스올의 죽은 자들로 고쳐 읽는 제안도 있다. 마지막의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וְנַפְשֹׁו לֹא חִיָּה, 베나프쇼 로 히야)는 New English Bible처럼 고대 역본을 따라 ‘아니’를 ‘그를 위하여’로 바꾸어 “나는 그를 위하여 살리라”로 옮기기도 한다.5 이런 읽기들은 마소라 본문과 구별되는 본문 수정이나 고대 역본의 해석이다.
UBS 해설은 마소라 본문을 따를 때 New International Version의 “땅의 모든 부유한 자가 잔치하며 경배하리라”라는 번역이 뜻을 잘 드러낸다고 본다. 첫 줄의 부유한 자들과 둘째 줄의 죽을 인생이 대조된다.5 개역개정의 ‘영혼’은 여기서 스스로 지킬 수 없는 목숨을 뜻한다. 15절의 ‘죽음의 진토’가 29절의 진토로 다시 나타나며, 시인이 누웠던 그 자리로 내려갈 사람도 여호와 앞에 엎드린다. 이들은 절한 결과로 죽는 사람들이 아니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부유한 이부터 죽어 가는 이까지 모두 여호와의 다스림 아래 있다.
30절은 후손의 섬김을 내다본다. ‘후손’은 히브리어로 “씨”이며, UBS 해설에 따르면 한 히브리어 사본과 칠십인역은 “나의 씨”로 읽는다. 마소라 본문의 “그 세대에게” 뒤에는 31절의 “그들이 오리라”가 이어지지만, 칠십인역은 이를 30절의 “오는 세대”로 읽으며 GNT가 이를 따른다.6 개역개정은 마소라 본문의 절 구분을 따른다.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יְסֻפַּר לַאדֹנָי לַדּוֹר, 예수파르 라도나이 라도르)는 직역하면 “주에 대하여 그 세대에게 이야기되리라”라는 수동문이다. 여기의 ‘주’는 여호와라는 고유 이름과 구별되는 칭호다. 17절에서 뼈를 세고 22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야기할 때 쓴 동사가 이제 다음 세대에게 주에 관해 이야기하는 데 쓰인다.
31절에서 후손들이 알릴 내용은 “그의 공의”다. UBS 해설은 Bible de Jérusalem, New Jerusalem Bible, New American Bible이 이를 ‘정의, 의’로 읽는다고 소개하면서, 문맥상 RSV처럼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해하는 편을 지지한다.6 그 소식을 받을 “태어날 백성”은 지금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장차 듣게 될 사람들이다. 마지막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כִּי עָשָׂה, 키 아사)는 직역하면 “그가 행하셨다는 것” 또는 “그가 행하셨기 때문에”다. 개역개정은 ‘주께서’와 ‘이를’을 보충했다. UBS 해설이 설명하듯 하나님이 개입하여 백성을 구원하셨다는 선언이다.6 하나님은 곤고한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다음 세대는 그 구원을 듣게 된다.
성경신학적 통찰
시편 22편은 고난 중에 서원한 사람이 응답을 받은 뒤 회중 앞에서 감사하는 이스라엘의 기도 형식을 따른다. 시편 35:18은 큰 회중에서 감사하고 찬송하겠다고 약속하며, 40:9-10은 회중 앞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숨기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개인에게 베푸신 구원이 회중의 찬송이 된다. 시편 22편은 여기에 땅 끝의 민족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백성까지 부른다.
25-26절의 서원과 식탁은 제사 규례를 배경으로 한다. UBS 해설은 감사 제물에 따르던 교제의 식사를 레위기 3:1-5와 연결한다.3 레위기 7:11-18은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와 서원이나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화목제의 고기를 언제까지 먹어야 하는지 정한다. 하나님께 드린 제물을 하나님 앞에서 나누어 먹는다. 신명기 16:9-15도 절기의 기쁨에 자녀와 종들뿐 아니라 레위인, 객, 고아와 과부를 참여시킨다. 시편의 곤고한 이들이 감사의 식탁에 앉는 일은 이 율법의 정신을 따른다. 자기 곤고를 멸시하지 않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다른 곤고한 이들과 음식을 나눈다.
창세기 12:1-3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신다. 시편 22편도 야곱과 이스라엘의 자손을 부른 뒤(23절) 모든 민족의 예배를 바라본다(27절). 한 사람과 그 자손에게 베푸신 은혜가 모든 족속에게 이른다. 시편에서는 멸시받던 사람이 응답받은 일을 증언하며 민족들을 예배로 부른다. 시편 67편도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셔서 주의 구원이 모든 나라에 알려지기를 구하고(1-2절), 모든 민족을 공평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송한다(4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라는 마지막 고백(7절)은 시편 22:27과 맞닿는다.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22:28)라는 고백은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라는 시편 24:1과 연결된다. 땅을 지으신 분이 민족들을 다스리신다. 시편 24편은 여호와를 찾는 족속을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로 묘사하고, 영광의 왕을 맞게 한다(3-10절). 시편 22편에서 여호와를 찾는 사람들은 곤고한 이들과 먹으며 찬송한다. 그들이 예배하는 분은 고난받는 이에게 응답하신 온 땅의 왕이시다.
이사야 49:1-13의 종도 모태에서부터 부름받고 사람에게 멸시받지만 하나님께 응답을 받는다(1, 5, 7-8절). 이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맡겨졌다고 고백하고 멸시 중에 부르짖는 시편 22편의 시인과 닮았다. 하나님은 종을 이방의 빛으로 삼아 구원이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신다(이사야 49:6). 구원받은 이들은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며, 하늘과 땅은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을 찬송한다(9-13절). 멸시받던 이의 구원, 곤고한 이들의 배부름, 땅 끝의 찬송이라는 흐름이 두 본문에 나타난다. 종은 이스라엘이라 불리면서도 야곱을 돌아오게 하는 사명을 받는다(3, 5절). 시편에서도 한 사람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찬송을 일으키고 민족들의 예배로 이어진다.
이사야 52:7-10은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땅 끝이 그 구원을 본다고 선언한다. 이어서 모습이 심하게 상했던 종이 높이 들리고, 왕들은 처음 듣는 일을 깨달으며 입을 봉한다(13-15절). 시편 22편에서도 죽음의 진토에 눕혀졌던 사람의 구원이 민족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백성에게 알려진다. 이사야 53장은 사람들이 종을 멸시하고 얼굴을 가렸다고 말한다(3절). 그러나 시편 22:24의 하나님은 곤고한 자에게서 얼굴을 숨기지 않으신다. 이사야의 종은 죽음의 고난 뒤에 ‘씨’를 보리라는 약속도 받는다(53:10). 시편의 ‘후손’(22:30)과 연결되는 표현이다. 다만 시편 22편은 시인의 고난을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지는 일로 설명하지 않으며, 이사야 53장은 종이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담당했다고 밝힌다(5, 11-12절). 신약은 이 두 본문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한다.
이사야 66:18-23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 먼 민족들에게 그 영광을 알리고, 흩어졌던 형제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온다.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제사장과 레위인을 택하시며 모든 혈육이 자기 앞에 예배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시편 22편도 동족인 형제들 가운데서 시작한 찬송이 모든 족속의 예배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구원을 들은 사람들이 그분을 알리면서 예배할 회중이 넓어진다.
시편의 표제는 이 노래를 다윗과 연결한다. 백성을 대표하는 왕의 고난과 구원은 백성의 운명과 이어진다. 사무엘하 7:12-16은 다윗의 자손과 나라를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시편 22편은 그 나라의 궁극적인 왕이 여호와이시며 민족과 후손이 그분을 섬길 것이라고 고백한다. 다윗 왕국이 나뉘고 성전이 무너진 뒤에도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이 여호와께 돌아올 날을 기다렸다. 신약은 고난을 지나 민족들을 하나님께 이끄시는 분을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한다.
기독론적 해석
시편 22:22-31의 시인은 구원받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고 서원을 갚겠다고 약속한다. 성전과 제물과 식탁이 있는 예배에서 부르던 감사의 노래다. 고난의 구체적인 사정은 밝혀지지 않아 고난받는 이스라엘 예배자들도 자기 기도로 부를 수 있었다. 찬송의 마지막은 한 사람의 생애보다 멀리 내다본다. 모든 민족이 돌아오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백성이 구원을 듣는다. 신약은 이 소망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읽는다.
마태복음은 십자가 사건을 시편 22편의 말로 묘사한다. 군인들은 예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27:35), 지나가는 이들은 머리를 흔들며 모욕하며(39절),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했으니 구원받아 보라고 조롱한다(41-43절). 시편 22:7-8, 18의 고난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예수는 첫 절로 부르짖으신다(마태복음 27:46). 시편은 그 부르짖음 뒤에 응답과 찬송으로 이어진다. 히브리서 5:7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이에게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고 들으심을 얻으셨다고 말한다. 예수께 주어진 응답은 죽음을 지나 이루어진 부활이었다.
히브리서 2장은 시편 22:22의 찬송을 예수의 입에 둔다.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으며, 하나님은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이끄시려고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 온전하게 하셨다(2:9-10).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 한 근원에서 났으므로, 예수는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11절).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12절)는 인용에서 시편의 ‘회중’은 ‘교회’가 된다. 개역개정 시편에서 생략된 ‘나의 형제’의 ‘내’도 이 인용에는 들어 있다. 고난을 통과하신 예수가 구원받는 형제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송하신다.
히브리서 2:13은 이사야 8:17-18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시는 예수와 하나님이 주신 자녀들을 말한다. 예수는 그들과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시고, 죽음으로 마귀를 멸하여 죽음의 공포에 종노릇하던 사람들을 놓아 주셨다(14-15절). 시편 22:29의 진토로 내려가는 사람처럼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없는 이들도 그 구원을 의지한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를 하나님이 높이셨고,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에 꿇는다(빌립보서 2:8-11). 시편에서 부유한 자와 죽어 가는 자가 드리던 경배를 신약은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 앞에서 바라본다.
예수는 형제들과 같이 되셔서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으로 그들의 죄를 속하신다. 자신이 시험과 고난을 겪으셨으므로 시험받는 이들을 도우실 수 있다(히브리서 2:17-18). 시편 22:24에서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멸시하지 않으셨고,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 곤고를 친히 겪으신다. 시인은 건짐받은 뒤 곤고한 이들을 식탁으로 불렀다. 그리스도는 형제들의 고난과 죽음을 겪고 죄를 담당하신 분으로서 그들을 아버지께 이끄신다.
시편 22:26의 감사 식탁은 예수의 식사와 주의 만찬에서도 이어진다. 예수는 갚을 능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과 몸이 불편한 이들을 잔치에 청하라고 가르치셨고(누가복음 14:12-14), 광야의 무리를 배불리 먹이셨다(마가복음 6:42). 잡히시던 밤에는 감사하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교회는 그 식사를 통해 주께서 오실 때까지 주의 죽음을 전한다(고린도전서 11:23-26). 구원에 감사하며 먹는 식탁에 가난한 성도가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부유한 사람들이 먼저 먹어 가난한 성도를 부끄럽게 한 일을 꾸짖었다(20-22절).
시편 22:27-28이 여호와의 왕권을 근거로 민족들의 예배를 바라보듯, 부활하신 예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시고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신다(마태복음 28:18-20). 히브리서 2:16은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드신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을 따라 민족들이 회중에 참여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사야 49:6의 이방의 빛과 땅 끝의 구원을 자기 사명으로 받았고, 이방인들은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찬송했다(사도행전 13:47-48). 요한계시록 7:9-10에서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무리가 하나님과 어린 양의 구원을 찬송한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그리스도로 읽으며,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약속의 상속자라고 말한다(갈라디아서 3:16, 29). 시편 22:30의 후손이 하나님을 섬기는 소망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과 민족들이 모이는 데서 읽을 수 있다. 로마서 15:8-12는 그리스도께서 조상들의 약속을 견고하게 하셨고 이방인들은 그 긍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한다. 시편 18:49의 열방 가운데 드리는 찬송을 인용하며, 이스라엘에게 지키신 약속이 민족들의 찬송으로 이어진다고 밝힌다.
시편 22:31의 후손들이 알리는 소식은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는 하나님의 구원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고 장사되셨으며 사흘 만에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받은 그대로 전했다(고린도전서 15:3-4). 교회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다음 세대에게 알린다. 십자가에서 시편의 부르짖음을 기도하신 분이 부활하여 형제들 가운데서 찬송하신다.
현대적 적용
시인은 회중 앞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야기하겠다고 약속한다. 자기 믿음의 크기나 기도의 양을 자랑할 자리가 아니다. 1-21절의 탄식을 지우지 않고 응답을 찬송하므로, 지금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도 그 증언에 참여할 수 있다. 응답받은 사람이 간증할 때에도 응답 전의 어두운 시간을 감추거나, 아직 탄식하는 이의 믿음을 자기 경험으로 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서원을 갚는 일은 응답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동이다. 시인은 하나님께 약속한 제물을 바치며 곤고한 이들과 먹는다.3 위기 때 한 약속을 잊지 않는 신실함과 받은 것을 나누는 감사가 여기에 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성급히 하거나, 지도자가 위기에 처한 사람의 약속을 이용하여 헌금과 봉사를 강요하는 태도는 이 감사의 기쁨을 해친다.
감사의 식탁에서는 곤고한 이들이 실제로 먹고 배부른다. 구원받은 사람의 감사는 가난한 이들의 배고픔을 외면할 수 없다. 그들을 감사의 자리에 참여시키고 재물을 나누어 필요를 채우어야 한다. 주의 만찬에서 가난한 성도를 부끄럽게 했던 일을 꾸짖은 바울의 책망도 같은 식탁의 책임을 묻는다(고린도전서 11:20-22).
하나님은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지 않으셨다. 가난과 병과 실패를 믿음 부족의 증거로 여기며 고통받는 이를 낮추는 태도는 이 고백과 어긋난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외치는 시인의 말도 성경의 기도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감사부터 요구하면 그가 하나님께 내놓아야 할 탄식을 막게 된다.
모든 민족은 여호와의 다스림 아래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세를 믿는 교회는 여러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며, 다른 언어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들을 같은 회중의 형제로 맞는다. 한 민족의 문화를 신앙의 척도로 삼거나 교회의 규모를 선교의 목적으로 삼으면, 모든 족속을 자기 앞에 부르시는 왕을 가리게 된다.
풍성한 자도 자기 목숨을 지킬 수 없는 자도 여호와 앞에 엎드린다. 재물과 건강으로 자기 생명을 확보할 수 없다는 고백은, 넉넉한 이에게 재물을 나누게 하고 죽음을 앞둔 이에게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의지하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겪고 부활하셨으므로 성도는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께 탄식하며 찬송할 수 있다.
다음 세대가 들어야 할 소식은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는 구원이다. 부모와 교회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성경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가르친다. 믿음의 증언에는 고난 중의 부르짖음과 응답의 기쁨이 모두 들어 있다. 지금 탄식하는 성도와 감사하는 성도가 같은 회중에 서는 것은 둘 다 고난을 지나신 그리스도의 형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