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아모스는 아직 살아서 듣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 장례의 노래인 애가(קִינָה, 키나)를 부른다. 2절의 “처녀 이스라엘”은 자기 땅에 쓰러져 일으킬 사람도 없다. “엎드러졌음이여”는 완료형으로 아직 오지 않은 몰락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애도한다. 3절에서 천 명이 나간 성읍에 백 명, 백 명이 나간 성읍에 열 명이 남는다는 급격한 감소는 군대의 참담한 손실을 그린다. 나라가 의지하던 군사적 역량과 자기 땅도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 애가 안에서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요청이 들린다. 찾아야 할 대상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리하면 살리라”(וִחְיוּ, 비흐유)는 앞 명령에 이어지는 명령형이며, 개역개정의 “그리하면”은 앞의 요청에 응답할 때 생명이 따른다는 연결을 풀어 옮긴 말이다. 몰락의 애도 속에서도 청중은 들으며 응답할 길을 받는다.

5절은 벧엘을 찾지 말고 길갈에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 나아가지 말라고 명한다. 하나님을 찾는 일과 성소를 방문하는 여행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הַגִּלְגָּל גָּלֹה יִגְלֶה, 학길갈 갈로 이글레), 벧엘은 비참하게 된다. 길갈의 지명과 사로잡힌다는 동사는 비슷한 소리로 맞물리며, 같은 동사를 거듭 써 심판을 강조한다.1 “하나님의 집”이라는 이름의 벧엘은 헛됨이나 재난을 뜻할 수 있는 말(לְאָוֶן, 레아벤)로 끝난다. 6절은 여호와를 찾아 살라고 다시 요청하며 요셉의 집, 곧 북이스라엘에 닥칠 불을 경고한다. 벧엘조차 그 불을 끄지 못한다.

7절은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고 공의를 땅에 던지는 사람들을 고발한다. 정의는 재판의 바른 판단과 그 판단이 세우는 질서이며, 공의는 관계 안에서 옳게 행하는 일이다. 이를 뒤집으면 도움을 구하는 이에게 쓰디쓴 결과가 돌아온다. 8절에서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וְהֹפֵךְ, 베호페크)는 7절의 “바꾸며 … 자들아”(הַהֹפְכִים, 하호프킴)와 같은 동사다. 사람들이 정의를 뒤집는 곳에서 창조주는 어둠을 아침으로 바꾸신다. 별과 시간과 바다를 다스리시는 분이 재판의 무질서도 심판하신다.

개역개정은 8절에 “이를 찾으라”를 보충해 앞의 요청을 잇는다. BHS에는 별도의 “찾으라” 명령형이 없고 창조자의 행동을 분사로 나열한 뒤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고 선언한다. 이 번역은 백성이 찾아야 할 분이 바로 창조주임을 밝힌다. 그분은 강한 자와 산성에도 패망을 이르게 하신다(9절).

10절은 성문에서 책망하고 정직히 말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현실로 돌아온다. 성문은 장로들이 법적 분쟁을 다루던 자리다.1 판단에 필요한 진실이 거절되면 가난한 사람이 권리를 주장할 길도 막힌다. 11절의 고발은 힘없는 사람을 밟고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밟고”(בּוֹשַׁסְכֶם, 보샤스켐)는 드문 형태로, NET는 곡물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뜻으로 읽는다.1 짓밟음과 농업세 징수 중 어느 해석에서도 약자의 생계를 압박해 얻은 이익이 부유한 자의 돌집과 포도원으로 바뀐다.

그들은 집을 지어도 거주하지 못하고 포도원을 가꾸어도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한다. 하나님은 많은 허물과 무거운 죄를 아신다. 의인을 학대하고 뇌물을 받으며 가난한 사람을 성문에서 억울하게 한 일도 드러난다. “억울하게 하는”은 정당한 판단에서 옆으로 밀어낸 행동을 그린다. 사람들의 재판에서 지워진 진실이 하나님의 판결 앞에 드러난다.

13절의 지혜자가 악한 때에 잠잠한다는 말은 정직한 증언이 미움받는 위험한 현실과 연결된다. NET는 “지혜자”(הַמַּשְׂכִּיל, 함마스킬)를 성공한 부유층으로 읽는 대안과 “잠잠하나니”(יִדֹּם, 잇돔)를 침묵 또는 애곡으로 읽는 대안을 소개한다. 애곡은 같은 표기의 다른 어근으로 이해하는 풀이이며, 이 경우 부유층에게 닥칠 심판을 가리킨다.1 어느 경우든 곧이어 15절이 정의를 세우라고 명하므로 이 문장을 불의 앞에서 침묵하라는 일반 명령으로 읽을 수 없다.

14절은 “찾으라”는 동사의 목적어를 하나님에서 “선”으로 바꾼다. 하나님을 찾아 사는 길은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않는 삶이다. “너희의 말과 같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리라는 말씀은 그들이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주장해 왔음을 드러낸다. 그 고백은 선을 구하는 삶으로 응답해야 한다. 15절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우라고 요청한다.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행동은 재판을 바로잡는 데 이른다.

“혹시”(אוּלַי, 울라이)는 여호와께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기를 구하는 기대다. 회개는 필요한 응답이지만 선행의 실적으로 하나님의 판결을 청구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 남은 자의 미래는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 16절은 “그러므로”로 판결을 잇는다. NET는 이 연결을 10-13절의 고발에 대한 결과로 읽는다.1 14-15절의 회개 요청은 고발과 판결 사이에서 생명으로 부르는 말씀이다.

통곡은 광장과 거리에서 농부와 울음꾼에게, 모든 포도원으로 퍼진다. 소유자들이 즐기려던 포도원도 애도의 장소가 된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가운데로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동사(אֶעֱבֹר, 에에보르)는 5절에서 백성에게 브엘세바로 “나아가지 말라”고 하신 동사와 같다. 성소로 건너가는 백성의 걸음은 금지되고 하나님은 직접 그들 가운데 지나가신다. 14절에서 주장한 임재는 불의를 그대로 보호하지 않는다. 창조주를 찾고 선을 사랑하며 가난한 이의 말을 들을 정의를 세우라는 부름에 백성은 응답해야 한다.

성경신학적 통찰

아모스 5장의 생명 요청은 선을 구하고 성문에서 정의를 세우라는 명령으로 구체화된다. 신명기 30:15-20도 생명과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들으며 의지하라고 한다. 하나님 자신이 백성의 생명이시다. 땅에 들어갈 백성에게 주신 신명기의 말씀과 그 땅에서 불의를 행하며 몰락을 앞둔 백성에게 주신 아모스의 말씀은 하나님께 향하며 그 길을 행하라는 요구로 이어진다. 다음 세대가 함께 살아갈 땅에서도 정의를 지켜야 한다.

신명기 16:18-20은 각 성읍에 재판장과 지도자를 세워 공의로 판단하고 외모를 따라 판단하거나 뇌물을 받지 말라고 명한다.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한다. 아모스의 성문은 그 책임을 저버려 가난한 사람을 밀어내고 정직한 증언을 미워하는 자리다. 공의를 따라야 산다는 신명기의 명령처럼 아모스도 백성의 생명과 재판의 공정함을 연결한다.

이사야 1:10-20은 제물과 기도를 드리면서 피 묻은 손을 버리지 않는 백성에게 정의를 구하고 고아와 과부의 억울함을 풀라고 명한다. “정의를 구하며”는 아모스의 “선을 구하고”와 같은 동사로 된 명령이다. 성소를 방문하면서 약한 이의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는 삶은 두 예언서에서 모두 책망받는다. 예레미야 7:1-15도 성전의 이름을 안전의 근거로 삼는 유다에게 이웃 사이의 정의와 객, 고아, 과부의 보호를 요구한다. 북왕국의 성소와 남왕국의 성전은 같은 주님의 판단 아래 있다.

신명기 28:30, 39는 집을 짓고도 살지 못하고 포도원을 가꾸고도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는 언약 위반의 결과를 경고한다. 아모스 5:11은 약자에게서 얻은 소산으로 만든 돌집과 포도원에 같은 판결을 선언한다. 재산을 얼마나 얻었는지가 아니라 그 땅에서 어떻게 행했는지가 심판의 이유다.

열왕기상 21:1-19에서 이세벨은 왕의 이름으로 금식과 거짓 증언을 조직하여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다. 장로와 귀족이 실행한 공적 판단과 종교 형식이 재산 탈취에 동원된다. 엘리야는 포도원을 차지하러 간 아합에게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준다. 아모스의 성문과 포도원 고발도 소유물 안에 남은 약자의 수탈을 드러낸다. 아합이 겸비하자 재앙의 때가 미루어진 일(21:27-29)은 아모스의 “혹시”처럼 죄를 듣고 낮아져 은혜를 구할 길을 나타낸다. 미래를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아모스 5:17의 “지나갈 것임이라”는 출애굽기 12:12에서 하나님이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심판하시는 밤을 떠올리게 한다. 두 곳은 같은 동사지만, 12:13에서 피를 보고 이스라엘의 집을 “넘어가리니”라고 하신 보호의 말씀에는 다른 동사가 쓰인다. 아모스에서는 조상의 구출을 기억하는 이스라엘 자신이 심판하며 지나가시는 하나님 앞에 선다. 과거 구원의 기억은 현재의 불의를 가리는 방패가 될 수 없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응답하는 백성은 선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 성문에 정의를 세우라는 명령은 좋은 의도를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정당한 증언을 듣고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으라고 요구한다. 백성은 심판을 부른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며 긍휼을 구한다. 그들의 회개도 자신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한다.

기독론적 해석

요한복음 5:39-40에서 예수는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생명을 얻으려고 자신에게 오지 않는 청중을 책망하신다. 성경이 증언하는 분을 거부하는 종교적 열심은 벧엘을 찾으면서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과 주제적으로 연결된다. 5:19-24에서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행하며 생명과 심판의 권한을 받으신다. 아들을 공경하는 것은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하는 일이다. 그 말씀을 듣고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

아들의 음성은 무덤 속의 사람들까지 불러 생명과 심판의 부활로 이끈다(요 5:25-29). 그분의 판단은 보내신 분의 뜻을 따르기에 의롭다(5:30). 예수는 서로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이들을 책망하신다(5:41-44). 돈과 권한 때문에 판단이 굽어졌던 아모스의 성문과 달리 아들의 권위는 아버지의 뜻에 선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사람도 그분의 말씀과 심판 앞에 행위를 드러낸다.

누가복음 19:41-44에서 예수는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며 평화의 일을 알지 못한 성읍의 몰락을 예고하신다. 자기 백성의 죽음을 애가로 부른 아모스의 슬픔과 같은 방향이다. 이어 예수는 성전의 행위를 책망하고 가르치시지만 지도자들은 그분을 죽일 길을 찾는다(19:45-48). 아모스의 성문에서 정직한 말을 미워했듯 종교적 권한을 지닌 이들이 주님의 책망을 거절한다.

같은 장의 삭개오는 먼저 찾아오신 예수를 맞고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며 속여 빼앗은 것을 갚겠다고 말한다(눅 19:1-10). 구원에 대한 응답은 돈과 권한으로 억울하게 한 이웃을 대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아모스의 정의 요청처럼 은혜를 받은 삶은 이웃의 정당한 몫을 돌려준다.

고린도전서 5:6-8은 그리스도를 희생되신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부른다. 아모스 5:17이 떠올리게 한 출애굽의 밤은 그리스도의 자기 봉헌을 통해 죄인을 살리시는 복음과 이어진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은 생명을 내어 주신 주님을 의지한다. 바울은 심각한 죄에도 자랑하던 교회에게 순전함과 진실함으로 살라고 요청한다. 구원의 은혜는 잘못을 숨기는 근거가 아니라 죄를 바로잡을 책임의 근거다.

로마서 6:1-14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에 연합한 사람은 새 생명 가운데 행한다. 죄의 종이던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판단받았으며 신자는 하나님께 살아 있는 자로 자신을 여긴다. 그 은혜 아래서 몸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않고 하나님께 의의 무기로 드려야 한다. 선을 구하고 악을 미워하라는 요청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의 말과 행동, 권한의 사용에 이른다.

고린도후서 5:14-21은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목적을 산 사람들이 이제 죽고 살아나신 분을 위해 살게 하는 데 둔다. 새로운 피조물은 자기 이익을 위해 관계와 재산을 사용하는 방향에서 돌이킨다. 죄를 알지 못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죄인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고 교회에 화목의 말씀을 맡기신다. 아모스의 “혹시”가 드러내는 겸손한 은혜의 요청은 자기 의를 의지하지 않고 이미 베푸신 구원을 믿는 태도와 만난다. 화목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우는 형식적 평화가 될 수 없다.

고린도후서 5:10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몸으로 행한 일을 드러낼 것이라고 말한다. 생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현재의 행동에 책임을 진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믿음은 가난한 이의 정당한 요구를 듣고 바른 판단을 세우는 삶으로 응답한다.

현대적 적용

여호와를 찾아 살라는 요청은 선을 구하고 악을 미워하며 정의를 세우라는 명령이다. 예배하고 말씀을 읽으면서 임금을 미루고 불리한 진술을 숨기거나 가난한 이의 정당한 요구를 밀어낸다면 그 행동을 고쳐야 한다. 성소의 이름이나 많은 신앙 활동이 불의를 보호하지 못한다.

성문에서 정직한 말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진실을 거절했다. 교회도 문제를 제기한 이의 지위와 친분, 말투로 사실의 무게를 정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의인을 학대하고 뇌물을 받으며 가난한 이를 억울하게 한 일을 아신다. 옳은 말을 했다가 위험해져 침묵하는 사람에게 혼자 모든 위험을 감수하라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 정의를 세워야 할 책임은 그를 침묵하게 만든 불의에도 미친다.

돌집과 포도원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얻는 데 동원한 수탈을 지우지 못한다. 공동체의 성과가 약한 사람의 미지급 대금과 부당한 희생으로 마련되었다면 그 몫을 돌려주어야 한다. 원래 받아야 할 돈을 지급하는 일은 시혜나 기부가 아니라 빚진 책임의 이행이다. 다른 자리에서 베푼 선행도 지금의 피해를 상쇄하지 않는다.

“혹시”라는 말 앞에서 회개한 사람은 자비를 구한다. 사과와 배상을 했다는 이유로 피해자에게 즉각적인 신뢰나 직분의 회복을 요구할 수 없다. 끼친 손해를 줄이고 필요한 책임을 감당하며 피해자의 안전과 거리를 존중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화목도 피해자의 목소리를 지우는 평화가 아니다.

아모스의 애가와 예루살렘을 보며 우신 예수의 눈물은 불의의 결과를 슬퍼하게 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고백은 성공과 힘으로 자기 결정을 정당화하는 말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 새 생명을 받은 사람은 자기 죄를 인정하고 빼앗은 것을 돌려주며 부당한 판단을 바로잡는다. 생명의 주님을 찾는 믿음은 가난한 이의 권리를 지키는 선을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