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주 여호와께서 아모스에게 여름 과일 한 광주리를 보이신다(1절). “내게 이와 같이 보이셨느니라”는 메뚜기(7:1), 불(7:4), 다림줄(7:7) 환상을 연 문구와 같아, 이 넷째 환상은 앞의 셋과 이어서 읽어야 한다. 처음 두 환상에서 아모스는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라고 간구했고 여호와는 뜻을 돌이키셨다(7:2-3, 5-6). 셋째 환상에는 그런 간구가 없다. 그 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를 고발하고 쫓아내는 사건(7:10-17)이 기록되고 곧바로 이 환상이 이어진다. 이 배열 때문에 8장은 예언의 말씀을 거절한 공동체에 어떤 결말이 닥치는지를 보여 주는 장으로 읽힌다.

광주리에 담긴 것은 “여름 과일”(כְּלוּב קָיִץ, 켈루브 카이츠), 곧 여름철에 거두는 열매다. 아모스가 그 이름을 답하자 곧바로 “끝”(הַקֵּץ, 하케츠)이 이르렀다는 말씀이 이어진다(2절). 두 단어는 첫 자음과 끝 자음이 같고 소리도 거의 같아, 아모스가 입에 올린 과일 이름이 하나님의 입에서 이스라엘의 끝으로 바뀌어 돌아온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이 소리 연결이 사라진다. UBS 번역 핸드북의 Jan de Waard와 William A. Smalley는 이 말놀이를 다른 언어로 살리기 어렵다고 보고, “끝이 왔다”를 충실히 옮긴 뒤 두 단어의 소리가 비슷하다는 사실을 각주로 알리기를 권한다.1 수확의 풍성함을 떠올리게 하는 광주리가 그 이름의 소리 때문에 끝을 알리는 표지가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여전히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부르신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부르신 바로 그 공동체에 끝이 임한다.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לֹא־אוֹסִיף עוֹד עֲבוֹר לוֹ, 로-오시프 오드 아보르 로)는 직역하면 ‘내가 다시는 그를 지나가지 않겠다’로, 죄를 보고도 벌하지 않고 지나쳐 주던 관용을 거두신다는 말이다. 이 문장은 다림줄 환상의 7:8과 글자 그대로 같다. 메뚜기와 불의 환상 때에는 아모스의 간구 뒤에 재앙을 거두셨지만, 셋째와 넷째 환상에서는 같은 유예가 주어지지 않는다.

3절은 끝이 닥치는 날을 보여 준다.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의 히브리어(שִׁירוֹת הֵיכָל, 시로트 헤칼)는 ‘헤칼의 노래들이 울부짖을 것이다’라는 대담한 표현이며, 개역개정은 이를 노래가 애곡으로 변한다고 풀었다. ‘헤칼’은 궁전과 성전을 모두 가리킬 수 있어 NET는 “성전”으로 옮기고 “궁전”을 대안으로 둔다.5 UBS 핸드북은 본문을 조금 고쳐 ‘궁전에서 노래하던 여인들이 울부짖을 것’으로 읽는 많은 학자의 제안을 소개하고 그 이해를 따르기를 권하지만, BHS와 개역개정은 ‘노래들’로 읽는다.2 어느 읽기든 노래가 울리던 곳이 통곡의 장소로 바뀐다. 시체가 많아 한 덩어리처럼 쌓이고, 절은 ‘쉿, 조용히 하라’는 감탄사(הָס, 하스)로 끝난다. 개역개정은 이를 시체를 내어버리는 행동을 꾸미는 “잠잠히”로 옮겼다. UBS 핸드북은 이 외침을 누가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고 하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을 전달하라고 권한다.2 같은 감탄사가 6:10에서는 시신을 수습하던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며 입을 막는 말로 쓰였으므로, 노래가 끊긴 자리를 채운 침묵은 하나님의 이름조차 꺼내기 두려운 정적이다.

4절의 “이 말을 들으라”에서 본문은 그 끝이 누구의 어떤 행동 때문에 오는지 밝힌다. 고발 대상은 “가난한 자를 삼키며”(הַשֹּׁאֲפִים אֶבְיוֹן, 하쇼아핌 에브욘)라고 불리는 이들이며, 같은 분사가 2:7에서도 힘없는 자를 짓밟는 자들을 불렀다. “망하게 하려는”(וְלַשְׁבִּית, 벨라쉬비트)은 ‘그치게 하다’라는 사역형으로, 5절의 안식일과 어근이 같다. 안식일은 일을 그치는 날인데 이들은 가난한 사람을 땅에서 그치게 하려 한다. 안식일을 지키는 듯하면서 가난한 이웃의 삶을 끝내려는 위선이 단어 선택에서부터 드러난다.

5절은 그들의 속말을 인용한다. “월삭이 언제 지나서”의 ‘지나다’는 2절에서 하나님이 더는 ‘지나가지’ 않겠다고 하신 동사와 같다. 상인들은 거룩한 날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지나쳐 주지 않으신다. NET는 월삭에도 안식일처럼 노동이 금지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5 수넴 여인의 남편이 새 달도 안식일도 아닌데 왜 선지자에게 가느냐고 묻는 장면(왕하 4:23)도 두 날이 짝을 이루어 지켜졌음을 보여 준다. 상인들은 그 날을 어기지 않지만 마음은 다시 곡식을 팔 시간에 가 있다. 그들은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팔려 한다. 곡식을 담아 주는 에바는 작게, 값으로 받을 은을 다는 세겔은 무겁게 하면 덜 주고 더 받는다. UBS 핸드북은 저울 한쪽을 무겁게 하거나 저울대를 비트는 수법을 예로 들면서, 중요한 것은 특정 도량형보다 속임수의 실례라고 설명한다.3 목적을 나타내는 부정사 셋이 이어지며,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속마음이 구체적인 사기 계획으로 펼쳐진다.

6절은 그 계획이 사람에게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들은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고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려 한다. NET는 이를 가난한 사람을 종으로 사들이는 거래로 이해한다.5 2:6에서 은과 신 한 켤레를 받고 사람을 파는 쪽이 고발되었다면, 8:6에서는 사는 쪽의 속말이 인용되어 그 거래의 양쪽이 모두 드러난다. 상인들은 타작할 때 떨어지는 부스러기인 “찌꺼기 밀”까지 팔겠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은 장에 나왔다가 양과 질에서 손해를 보고, 빚을 갚지 못하면 끝내 자신이 팔리는 처지로 내몰린다. 7절에서 하나님이 잊지 않겠다고 맹세하시는 행위가 바로 이 착취다.

7절에서 여호와는 “야곱의 영광”(בִּגְאוֹן יַעֲקֹב, 비그온 야아코브)을 두고 맹세하신다. ‘영광’은 높음과 위엄도, 교만도 뜻할 수 있다. 6:8에서 여호와는 자기를 두고 맹세하시며 ‘야곱의 영광’(גְּאוֹן יַעֲקֹב, 게온 야아코브)을 싫어한다고 하셨으므로, 같은 표현이 맹세의 근거로 나오는 여기서 해석이 갈린다. UBS 핸드북은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다른 대상을 두고 맹세하시는 일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이를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칭호로 읽는다.4 NET는 이스라엘의 변하지 않는 교만을 두고 맹세하시는 반어로 이해하며, 히브리어 맹세 형식에 자기 저주가 생략되어 있다고 설명한다.5 맹세의 내용은 분명하다. 개역개정의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는 직역하면 ‘내가 영원히 잊는다면’으로, 생략된 저주 때문에 강한 부정이 된다. 거래를 마치고 장부를 덮어도 그 행위는 하나님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8절은 땅이 떨고 주민이 애통하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앞에서 고발한 죄의 당연한 결과라는 말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BHS는 ‘빛처럼’(כָאֹר, 카오르)이라 적지만, 거의 같은 문장이 반복되는 9:5에는 ‘나일강처럼’(כַיְאֹר, 카예오르)이 있고 8:8 끝에도 ‘애굽의 나일강처럼’이 나온다. NET는 8:8의 형태를 필사 과정의 오류로 보고 ‘나일강’으로 읽으며,5 개역개정도 “강의 넘침 같이”로 같은 이해를 따른다. 해마다 불어났다 빠지는 나일강처럼 땅 전체가 솟았다 가라앉는 모습은 사람들이 딛고 선 터전이 흔들리는 심판을 그린다. 시장의 부정은 몇몇 상인의 사사로운 일로 끝나지 않고 그 사회가 기대어 사는 땅을 뒤흔든다.

9절은 하나님이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실 날을 말한다. 해가 가장 높이 뜬 시각에 해가 지고 빛이 가장 밝은 날에 땅이 어두워진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는 5:18-20의 경고와 이어진다. 10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절기를 애통으로, 노래를 애곡으로 바꾸신다. ‘바꾸다’는 6:12에서 이스라엘이 정의를 쓸개로 바꾸었다고 고발할 때의 동사이며, ‘절기’는 5:21에서 하나님이 미워하신다고 하신 말과 같다. 백성이 정의를 뒤집었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절기를 뒤집으신다. ‘애곡’은 5:1에서 아모스가 이스라엘을 위해 부른 장례의 애가와 같은 명사다. 굵은 베와 대머리는 죽은 이를 애도하는 몸짓이며, “독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애통하듯”은 가문의 이름과 미래가 함께 끊기는 상실을 그린다. 그 끝은 쓴 날과 같다. 1-2절의 광주리가 알린 끝이 쓰라린 결말로 구체화된다.

11절은 “보라 날이 이를지라”로 하나님이 보내실 기근을 알리고 곧바로 그 기근을 다시 정의한다. 양식이 없어 주림도, 물이 없어 갈함도 아닌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다. 히브리어는 ‘여호와의 말씀들을 듣는 것에 대한 기근’이며, 개역개정은 부정어를 넣어 결핍의 뜻을 살렸다. 모자라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백성이 그 음성을 듣는 관계다. UBS 핸드북은 이를 하나님에게서 오는 메시지가 없는 상태로 설명하고, 양식과 물의 부족을 그 결핍을 그리는 그림으로 다룬다.6 12절에서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여호와의 말씀을 찾아 헤매지만 얻지 못한다. NET는 두 바다를 지중해와 사해로 이해한다.5 ‘비틀거리다’는 4:8에서 물을 찾아 비틀거리며 다니고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던 장면의 동사다. 선지자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명한 백성(2:12), 아모스의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다고 한 아마샤(7:10-13)처럼 말씀을 밀어낸 공동체가 위기 때에는 그 말씀을 찾아다니지만 응답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불러낼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다.

13절은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갈하여 쓰러진다고 말한다. 아모스는 5:2에서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고 애가를 불렀다. 다음 세대를 이어 갈 젊은이들이 쓰러진다는 것은 공동체의 내일이 끊긴다는 뜻이다. ‘갈하여’는 11절의 ‘물이 없어 갈함’과 같은 명사여서, 말씀 기갈 바로 뒤에 놓인 이 목마름은 육신의 갈증과 말씀의 결핍을 함께 담은 심판의 그림으로 읽을 수 있다.

14절은 쓰러지는 이들이 무엇을 의지했는지 밝힌다. “사마리아의 죄된 우상을 두고 맹세하여”(הַנִּשְׁבָּעִים בְּאַשְׁמַת שֹׁמְרוֹן, 한니쉬바임 베아쉬마트 쇼므론)의 ‘맹세하다’는 7절에서 여호와께서 맹세하실 때의 동사와 같다. 여호와의 맹세는 끝내 서고, 우상을 두고 맹세한 이들은 쓰러진다. ‘죄된 우상’으로 옮긴 말은 문자적으로 ‘죄책, 허물’이다. NET는 이것이 아세라 형상이나 벧엘의 금송아지를 가리킬 가능성을 언급하고 일부 번역이 하맛 사람들의 신 아시마(왕하 17:30)로 읽는다고 소개하며,5 UBS 핸드북은 벧엘의 송아지 형상을 선지자가 비꼬아 부른 말로 본다.7 단의 신들은 여로보암 1세가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를 떠올리게 한다(왕상 12:28-30). 브엘세바에 관한 구절은 BHS에서 ‘브엘세바의 길’(דֶּרֶךְ בְּאֵר־שָׁבַע, 데레크 베에르-샤바)이다. UBS 핸드북은 브엘세바로 가는 순례길을 두고 맹세했다는 이해와 자음을 고쳐 ‘브엘세바의 신’으로 읽자는 제안을 다루며 이를 개연성이 낮은 읽기와 불확실한 읽기 사이의 선택이라고 평가하고,7 NET는 본문을 고쳐 ‘너의 사랑하는 이’로 옮긴다.5 개역개정의 “브엘세바가 위하는 것”은 그곳 사람들이 받들던 대상을 드러낸다. 북쪽 끝의 단과 남쪽 끝의 브엘세바가 함께 나와 온 땅의 종교 생활이 고발된다. 그들은 엎드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이 ‘일어나다’는 첫 환상에서 아모스가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7:2)라고 물을 때의 동사다. 아모스의 중보로 한때 설 수 있었던 야곱이 말씀을 거절하고 다른 대상을 두고 맹세한 끝에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성경신학적 통찰

아모스 8장의 배경은 여로보암 2세가 영토를 회복하던 북이스라엘의 번영기다(암 1:1; 왕하 14:23-29). 시장에 곡식이 돌고 궁전에서 노래가 울리던 시대에 하나님은 번영의 한가운데서 끝을 선언하셨고, 그 끝은 수십 년 뒤 앗수르의 사마리아 함락으로 현실이 되었다. 열왕기하 17:13-14는 그 원인을 여호와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경고하셨으나 백성이 듣지 않고 목을 곧게 한 데서 찾는다. 아모스 8장의 말씀 기갈과 열왕기하의 평가는 같은 결말을 서로 다른 자리에서 보여 준다.

작은 에바와 큰 세겔은 율법이 구체적으로 금한 행위였다. 레위기 19:35-37은 공평한 저울과 추와 에바를 쓰라고 명하며, 그 끝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로 소개하신다. 같은 장은 품꾼의 삯을 밤새 두지 말고(19:13)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19:18) 한다. 도량형의 정직은 시장에서 이웃 사랑이 취하는 형태다. 신명기 25:13-16은 크고 작은 두 종류의 추와 되를 두지 말라고 하며 그런 일을 행하는 자가 여호와께 가증하다고 한다. 아모스의 상인들은 곡식을 줄 때는 작은 에바를, 은을 받을 때는 큰 세겔을 쓴 바로 그 사람들이다. 신명기가 그 땅에서의 장수를 이 금령과 연결했다면, 아모스 8:8은 그 땅이 요동하는 장면을 그린다. 잠언 11:1도 속이는 저울을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말한다.

신명기 5:12-15의 안식일은 남종과 여종도 쉬게 하라고 명하며 그 이유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이었던 기억에 둔다. 안식일은 노동에 묶인 사람에게 쉼을 돌려주는 날이었다. 그러나 아모스의 상인들은 그 날을 지키면서도 가난한 사람을 다시 사고팔 날을 기다린다. 신명기 15:7-15는 가난한 형제에게 손을 펴라 하고, 도움을 거절하려는 속생각까지 다루며, 일곱째 해에 놓아 주는 종을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타작마당에서 넉넉히 주라고 한다. 신명기는 타작마당에서 종에게 넉넉히 주라고 하는데, 아모스의 상인들은 타작마당의 부스러기까지 팔아 이익을 남긴다. 두 본문 모두 사람의 마음속 계산을 하나님 앞으로 끌어낸다.

이사야 58장도 예배와 착취가 한 사람의 삶에 함께 있는 문제를 다룬다. 백성은 금식하는데 왜 보지 않으시느냐고 불평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킨다고 답하신다(58: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결박을 풀고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는 일이다(58:6-7). 이사야 58:10은 주린 자를 만족하게 하면 어둠이 낮과 같이 되리라고 약속하는데, 아모스 8:9에서는 대낮이 어둠으로 바뀐다. 이웃에게 손을 펴는 삶에는 어둠이 낮이 되는 약속이, 이웃을 삼키는 삶에는 낮이 어둠이 되는 심판이 선포된다. 안식일을 즐거운 날로 존귀하게 여기라는 58:13은 쉼의 날을 이익 계산의 휴지기로 여기는 태도와 정반대에 선다.

아모스 8장에는 애굽의 강(8절), 대낮의 흑암(9절), 외아들을 잃은 애통(10절)이 한 장에 모여 있다. 하나님은 애굽 온 땅에 흑암을 내리셨고(출 10:21-23), 열째 재앙의 밤에는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다(12:29-30). 아모스가 출애굽기를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이 이미지들은 출애굽의 심판을 떠올리게 한다. 9:7에서 하나님은 출애굽이 이스라엘의 특권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출애굽의 은혜를 입은 백성이 애굽처럼 사람을 부리면 그들이 듣는 심판의 언어도 애굽이 들었던 언어를 닮는다. 외아들을 잃은 애도는 예레미야 6:26에서도 멸망 앞의 통곡을 그리고, 스가랴 12:10에서는 하나님이 부으시는 영으로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 독자를 위해 애통하듯 하는 회개의 슬픔이 된다. 신약은 이 스가랴 본문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에게 적용한다(요 19:37).

11절의 기근은 신명기 8:3을 배경으로 들을 때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백성을 주리게 하시고 만나를 먹이시며,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아모스 8장에서는 양식과 물이 있어도 말씀이 없는 기근이 닥친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일으키셨지만 백성은 예언하지 말라고 명했고(2:11-12), 아마샤는 아모스를 쫓아냈다(7:10-17). 말씀을 거부한 백성에게 내려지는 심판은 말씀이 거두어지는 것이다. 사무엘상 3장은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던 시대에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셨고, 그가 처음 받은 말씀이 엘리 집에 대한 심판이었다고 기록한다. 죄를 드러내는 말씀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실제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표지이며,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때가 오면 책망하던 말씀조차 은혜였음이 드러난다.

신명기 6:13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명한다. 맹세는 그 사람이 자기 말의 진실성을 무엇에 걸고 있는지 드러낸다. 아모스 8장의 사람들은 사마리아의 죄와 단의 신과 브엘세바의 길을 걸고 맹세했다. 여로보암 1세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며 시작된 예배 체계(왕상 12:28-30)가 아모스 시대에도 백성의 맹세 속에 살아 있었다. 7절에서 여호와께서 맹세하신 말씀은 끝내 서고, 14절에서 우상을 두고 맹세한 이들은 엎드러진다. 누구의 이름을 걸고 사는지가 공동체의 운명을 가른다.

아모스서는 8장의 끝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은 범죄한 나라를 멸하시되 야곱의 집을 온전히 멸하지는 않겠다고 하시고(9:8), “그 날에”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신다(9:11). 8장에서 노래가 애곡이 되고 대낮이 어두워지던 “그 날”이 9장에서는 회복의 날을 연다. 8:14의 ‘엎드러지다’와 ‘일어나다’가 9:11에서 ‘무너진’ 장막과 ‘일으키다’로 다시 나온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무너진 장막을 직접 일으키신다. 사도행전 15:16-17에서 야고보는 이 약속을 이방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과 연결한다.

기독론적 해석

아모스 8장은 이스라엘의 한계를 정면으로 드러낸다. 공평한 저울을 명하는 율법이 있었고 월삭과 안식일도 지켜졌으며, 선지자는 경고하고 중보했다. 그런데도 백성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고, 하나님은 다시는 그들을 지나쳐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율법과 예배와 예언이 모두 있었는데도 끝에 이른 백성의 모습은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언약에 신실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신약은 이 한계 앞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을 증언한다.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주리신 예수께 마귀는 돌로 떡이 되게 하라고 유혹하고,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신명기 8:3으로 답하신다(눅 4:1-4).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배우도록 부름받았다가 아모스 시대에 잃어버린 진리를 예수는 굶주림 속에서 지키신다. 곡식과 은을 늘리는 데 마음을 쏟다가 떡이 있어도 말씀이 없는 기근을 맞은 백성의 역사 속에서, 떡이 없는 자리에서 말씀으로 사신 한 분이 나타나신다.

이어서 예수는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에게 해방과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셨다는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고 그 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신다(눅 4:16-21). 아모스의 상인들이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가난한 이를 이용할 궁리를 했다면, 예수는 바로 안식일에 가난한 이에게 은혜의 소식을 선포하신다. 빚 때문에 신 한 켤레 값에 팔리던 사람에게 이 선포는 해방의 소식이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하늘이 닫혀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밖으로 보내졌다는 말씀을 듣고 예수를 동네 밖으로 쫓아내려 한다(4:25-30). 아마샤가 아모스를 쫓아낸 것처럼 회당이 예수를 쫓아낸다. 말씀이신 분이 회당 한가운데 서셨는데도 그 말씀을 밀어내는 장면은, 아모스 8장의 기갈이 말씀을 거절한 자리에 내리는 심판임을 다시 보여 준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히 1:1-2). 아모스는 하나님의 말씀이 끊기는 날을 경고했지만, 신약은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침묵하지 않으시고 아들 안에서 결정적으로 말씀하셨다고 증언한다.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헤매도 얻지 못하던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왔고,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다고 고백한다(요 6:68). 경고도 사라지지 않는다. 들은 것에 유념하지 않으면 흘러 떠내려갈 수 있고,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피할 길이 없다(히 2:1-3).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 16:19-31)는 아모스 8장의 주제를 한 장면에 모은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며 대문 앞의 나사로를 외면했다. 죽음 뒤에 그는 형제들에게 경고해 달라고 구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들으라고 답하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도 권함을 받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가난한 이를 외면하는 삶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삶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아모스의 진단이 되풀이된다. 말씀을 듣는 일은 가난한 이웃을 보는 눈과 분리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제육시쯤부터 제구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하고 해가 빛을 잃는다(눅 23:44-45). 정오 무렵의 어둠은 해를 대낮에 지게 하겠다는 아모스 8:9의 심판 언어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아모스가 경고한 대상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이었고, 누가가 묘사하는 십자가의 예수는 백부장이 의인이라고 고백한 분이다(23:47). 죄인에게 내려질 심판의 언어가 죄 없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묘사한다. 외아들을 잃은 애통(8:10)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내어 주신 십자가에서 가장 깊은 의미에 이르며(요 3:16), 요한복음 19:37은 그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리라는 스가랴 12:10을 십자가에 적용한다.

8:7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맹세하셨지만, 예레미야 31:34의 새 언약은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히브리서는 이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언약에 적용한다(히 8:12; 10:17). 두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신 제사에서 만난다(10:10-14). 하나님은 죄를 못 본 척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에게 담당시켜 심판하셨기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신다. 십자가 곁의 한 행악자는 자기 행위에 합당한 보응을 받는다고 인정하고 예수께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구했으며, 예수는 오늘 그가 자신과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눅 23:39-43). 그리스도인이 받은 용서는 불의를 가볍게 여기는 면죄부가 될 수 없으며, 십자가는 하나님이 불의를 얼마나 무겁게 보시는지 드러낸다.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께서 먼저 그의 집에 머무시겠다고 하시자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속여 빼앗은 것을 네 갑절로 갚겠다고 했고, 예수는 그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언하셨다(눅 19:1-10). 배상은 구원을 사는 값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사람이 속인 거래를 되돌리는 응답이다. 작은 에바와 큰 세겔로 쌓은 이익은 그리스도께 돌이키는 사람에게 되돌려야 할 목록이 된다. 오순절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고, 믿는 무리가 소유를 나누어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행 4:32-35). 말씀을 듣지 않던 백성이 가난한 이를 삼켰다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말씀을 듣고 이웃에게 손을 펴는 새 공동체를 세우신다.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시겠다는 9:11의 약속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이 공동체에서 성취되기 시작한다(행 15:16-17).

현대적 적용

작은 에바와 큰 세겔은 오늘 상품의 실제 양과 가격, 계약 조건, 정산 방식에 관한 질문으로 다가온다. 용량을 줄이고 가격은 그대로 두면서 포장으로 차이를 가리는 일, 눈에 잘 띄지 않는 수수료와 일부러 모호하게 쓴 조건이 그 예다. 가난 때문에 선택할 여지가 적은 사람의 급한 형편을 이용하는 고리의 대출이나 돌려주어야 할 보증금을 미루며 버티는 일은, 빚 때문에 사람이 신 한 켤레 값에 팔리던 아모스의 시장과 멀지 않다. 약속한 임금을 제때 지급하라는 명령(레 19:13)도 그대로 적용된다. 업계에서 오래 반복했다는 이유로 부정한 거래가 정당해지지 않으며, 하나님은 장부를 덮은 뒤에도 그 행위를 기억하신다.

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리던 상인들은 예배 시간에도 다음 주 매출을 계산하는 마음을 비춘다. 안식일 계명은 종에게도 쉼을 주라고 명했으므로, 사람을 고용하고 관리하는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쉼을 빼앗지 않는다. 교회도 봉사라는 이름으로 특정한 사람에게 과도한 노동을 반복해 요구하거나, 낮은 비용을 찾다가 일하는 사람의 수고를 무상으로 떠넘기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거짓 저울을 그대로 둔 채 헌금의 크기만 기뻐한다면 월삭과 안식일을 기다리던 상인들의 문제를 되풀이한다.

14절의 사람들은 사마리아와 단과 브엘세바의 성소를 두고 맹세했다. 그리스도인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실제로는 자산의 증가와 직장의 안정, 소속 교회의 규모와 명성에 미래를 걸 수 있다. 그 보증이 흔들릴 때 드러나는 불안과 분노는 무엇을 의지했는지 알려 준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미래를 그분께 걸고, 그 신뢰 안에서 이웃에게 손을 펴는 삶이다.

말씀이 들릴 때 듣는 것이 은혜다. 위로가 되는 말씀만 골라 듣거나 마음에 맞는 해설만 찾아다니기보다, 자신의 생활을 겨냥하는 책망에도 응답해야 한다. 교회가 다음 세대에게 개인의 성공과 위로에 관한 말씀만 들려준다면, 그들은 일터와 시장에서 부딪히는 문제 앞에서 붙들 말씀을 찾지 못한다. 아마샤가 벧엘이 왕의 성소라는 이유로 아모스를 쫓아냈듯, 교회와 기관도 불편한 말을 하는 사람을 평판과 질서를 이유로 밀어낼 수 있다. 공동체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이 성경과 사실에 맞는지 살피지 않고 막기만 하는 공동체는 결국 들어야 할 말씀을 잃는다.

절기가 애통으로 바뀌는 10절은 공동체 안에서 착취나 부정이 드러났을 때 교회가 먼저 할 일이 평판을 지키는 해명보다 애통과 회개임을 가르친다. 그 애통은 피해자의 동의 없이 그의 이름과 사연을 드러내지 않고, 피해 회복과 재발 방지로 이어져야 한다. 착취당한 일을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막지 않는다. 그리스도께 돌이킨 사람은 삭개오처럼 속여 빼앗은 것을 되돌리며, 이 배상은 용서를 얻으려는 값이 아니라 이미 받은 용서가 장부를 바꾸는 열매다. 아모스 8장은 끝을 선언하지만 하나님은 그 너머에서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셨다. 정직한 저울과 제때의 삯, 나누는 쉼과 불편한 말씀에 여는 귀는 구원을 얻는 공로가 아니라 말씀으로 사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응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