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3장은 “들으라”고 이스라엘 전체를 부른다. 2:12에서 선지자에게 예언하지 말라던 백성이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청중은 애굽에서 이끌어 올리신 “모든 족속”, 곧 출애굽의 은혜를 받은 공동체다. 개역개정은 “인도하여 올리신”이라고 여호와를 3인칭으로 말하지만, 히브리어는 1절 중간부터 “내가 올린”(הֶעֱלֵיתִי, 헤엘레티)이라며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 2:10에서도 쓰인 이 동사는 백성의 현재를 구원의 역사 안에 둔다. 사마리아의 부와 벧엘의 제단을 논하기 전에, 그들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신 분과의 관계를 밝힌다.

2절의 “너희만을 알았나니”(רַק אֶתְכֶם יָדַעְתִּי, 락 에트켐 야다티)는 ‘오직’과 ‘너희를’을 앞세워 강조한다. 하나님이 다른 족속의 존재를 모르셨다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알아주시고 관계를 맺으셨다는 뜻이다. 이어 “그러므로”가 그 관계와 죄의 보응을 잇는다. 선택하셨으므로 죄를 물으신다. 아모스는 은혜를 부정하지 않으며 그 은혜를 배반한 책임을 밝힌다.

“보응하리라”(אֶפְקֹד, 에프코드)는 돌보고 살피며 책임을 묻는 동사다. 여기서는 “너희 모든 죄악”이 목적어이므로 징벌을 뜻한다. 같은 동사가 14절에서 이스라엘의 죄와 벧엘 제단을 향해 다시 나온다. 장의 처음과 끝이 죄를 물으시는 행동으로 연결되고, 그 사이의 질문과 사마리아 고발은 그 판결을 설명한다.

3절의 두 사람이 함께 걷는 질문은 동행에 앞선 조건을 묻는다. “뜻이 같지 않은데”의 נוֹעָדוּ(노아두)는 서로 만나거나 만나기로 정했다는 뜻이다. Jan de Waard와 William A. Smalley의 UBS 해설은 약속과 실제 만남의 요소가 모두 있으며 만남에 더 무게가 있다고 설명한다.1 개역개정은 마음의 일치를 드러내지만 원문은 만남이라는 구체적 조건을 묻는다. 뒤의 사자와 덫도 어떤 결과를 일으킨 조건을 따라가게 한다.

4-5절은 먹이가 없는데 사자가 부르짖고, 잡힌 것이 없는데 덫이 튀겠느냐고 묻는다. 3-5절의 다섯 질문은 같은 의문 접두사로 시작한다. 만남에서 사자와 새잡이로 장면이 옮겨가며 위험이 커진다. 4절의 ‘부르짖다’는 8절의 사자 울음에 반복된다. 질문에 답한 청중은 예언의 경고도 까닭 없이 나오는 소리가 아님을 듣게 된다.

6절은 성읍의 경보를 묻는다. “나팔”(שׁוֹפָר, 쇼파르)은 뿔나팔로, 2:2의 모압 전쟁에도 나온다. 나팔이 울리면 백성이 두려워하듯, 여호와가 행하시지 않는데 성읍에 재앙이 임하겠느냐고 묻는다. “재앙”(רָעָה, 라아)은 악한 행위도 나쁜 일도 뜻하지만 여기서는 재난이다. 이 말씀은 2절의 죄를 물으시겠다는 선언에 속한다. 청중이 들을 것은 여호와께서 사마리아의 죄를 다루신다는 경고다.

7절은 여호와께서 “자기의 비밀”(סוֹדוֹ, 소도)을 종 선지자들에게 알리지 않고는 행하지 않으신다고 밝힌다. 이 비밀은 은밀한 의논과 계획, 여기서는 심판의 뜻이다. 8절은 사자가 부르짖으면 누가 두려워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예언하다”는 2:12에서 금지되었던 것과 같은 동사다. 사자의 울음에 두려움이 따르듯 하나님의 말씀에 예언이 따른다. 아모스가 말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9절에서는 이방 궁궐들에게 사마리아의 억압을 보게 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선포하여”는 1절의 ‘듣다’와 같은 어근으로 ‘듣게 하라’는 뜻이다. 아스돗과 애굽의 궁궐들은 사마리아 산에 모여 성 안의 요란함과 학대를 보아야 한다. 아스돗은 1:8에서 심판을 들었던 블레셋 성읍이다. 1-2장에서 불살라지리라던 열방의 “궁궐”이라는 말이 이제 사마리아의 궁궐에 반복된다. 다른 나라의 죄를 듣던 이스라엘이 그 나라들 앞에서 자기 죄를 드러낸다.

10절의 궁궐에는 “포학과 겁탈”(חָמָס וָשֹׁד, 하마스 바쇼드)이 쌓인다. 저장한 재물과 그것을 얻은 폭력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 재산은 빼앗긴 사람의 고통을 증언한다. 그들은 바른 일 행할 줄을 “모른다”. 2절에서 하나님이 백성을 “알았다”는 것과 같은 동사가 부정으로 되풀이된다. 하나님께 알려진 백성이 그분이 원하시는 바른 행위를 모른다. 11절의 “그러므로”는 판결을 이끈다. 여성 단수로 불린 사마리아는 힘을 잃고 궁궐은 약탈당한다. 개역개정은 대적을 주어로 삼지만 히브리어는 궁궐이 약탈당하는 수동문이다. 겁탈을 쌓던 궁궐에 같은 일이 닥친다.

12절의 목자는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진다. 목자의 ‘건져냄’과 이스라엘의 ‘건짐받음’은 같은 동사의 능동과 수동으로 짝을 이룬다. 그러나 살아 있는 양이 아니라 찢긴 흔적만 남았다. UBS는 목자가 파괴의 증거를 가져오는 관행과 연결하고, 구원을 기대하던 청중에게 주는 반어로 읽는다.2 침상 구문도 번역이 갈린다. בִּפְאַת מִטָּה וּבִדְמֶשֶׁק עָרֶשׂ(비페아트 밋타 우비드메셰크 아레스)를 개역개정은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주민의 모습으로 옮긴다. UBS는 가구와 침대의 일부만 건져진 그림을 선호한다.2 한 읽기는 사치스럽게 앉은 사람을, 다른 읽기는 파괴 뒤 남은 소유의 조각을 부각하지만 모두 큰 손실을 경고한다.

13절은 “듣고”를 되풀이하며 야곱의 집에 증언하라고 명한다. 14절의 “보응하는 날에”와 “벌하여”도 2절의 동사를 되풀이한다. “모든 죄”는 1-2장의 “서너 가지 죄”와 같은 낱말이다. 벧엘 제단의 뿔은 꺾여 땅에 떨어진다. UBS는 제단의 파괴와 함께 마지막 피할 곳의 상실을 읽는다.3 종교적 장소가 죄를 계속할 보호 장치가 될 수 없다. 15절에서 겨울 궁과 여름 궁, 상아 궁과 큰 궁도 무너진다. 히브리어는 모두 ‘집’이라 하지만 개역개정은 호화로움을 따라 ‘궁’으로 옮긴다. “내가 치리니”라는 말씀은 대적의 침입으로 묘사된 파괴가 하나님의 심판임을 밝힌다. 사마리아의 물질적 안전과 벧엘의 종교적 안전이 같은 판결 아래 놓인다.

성경신학적 통찰

출애굽기 19:4-6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자기에게로 인도하셨다고 말씀하시며, 말씀을 듣고 언약을 지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부르신다. 온 세계가 그분께 속한 가운데 이스라엘은 특별한 소유가 된다. 아모스 3:1-2도 그 관계를 심판의 이유로 든다. 이스라엘만 그분의 판단 밖에 있을 수 없다. 애굽의 압제에서 구출된 백성이 이제 애굽 궁궐들 앞에 자기 학대를 드러낸다. 과거의 피해가 현재의 가해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신명기 7:6-11은 선택의 근거를 백성의 수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에 둔다. 종살이에서 속량하신 분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며, 백성은 그 계명을 지켜야 한다. 아모스의 “너희만을 알았나니”도 이 사랑을 상기시킨다. 풍요와 선택의 고백은 실제 행위가 옳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신실하심을 받은 백성에게 신실한 행위가 요구된다.

창세기 18:17-25에서 하나님은 소돔에 하실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고 물으신다. 그를 “택하였나니”라는 동사는 아모스 3:2의 “알았나니”와 같다. 그 앎에는 가족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듣고 의인을 위해 간구하며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의 정의를 붙든다. 특별히 아브라함을 아시는 하나님은 소돔의 큰 부르짖음도 들으신다. 아모스에서도 선지자가 들은 계획은 열방과 이스라엘의 폭력을 드러낸다. 계시를 받은 이는 타인의 멸망을 즐기기보다 그분의 정의를 따라야 한다.

출애굽기 22:10-13은 맡아 돌보던 가축이 맹수에게 찢기면 흔적을 가져와 증언하는 규정을 둔다. 아모스 3:12에서 목자의 손에 남은 다리와 귀도 살아 있는 양의 구출이 아니라 파괴의 증거가 된다. 양이나 소유를 맡았다는 말에는 보호와 설명의 책임이 따른다. 폭력을 쌓은 궁궐의 주인들이 기대한 안전은 이런 파괴 앞에서 무너진다.

예레미야 7:1-15는 성전에 들어와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을 계속하는 이들에게 길과 행위를 고치라고 요구한다. 성전의 이름으로 약자 압제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아모스의 벧엘과 예레미야의 예루살렘은 시대와 제도가 다르지만 예배하는 사람의 실제 행위를 물으시는 요구가 이어진다. 실로와 에브라임의 심판을 본 유다도 자기 성전만은 안전하다고 여길 수 없었다. 오늘의 교회도 이스라엘의 실패로 자기 지위를 높일 수 없으며 같은 경고를 들어야 한다.

열왕기상 2:28-34에서 요압은 제단의 뿔을 잡아도 무고한 피를 흘린 책임을 피하지 못한다. 아모스 3:14에서는 뿔 자체가 잘려 떨어진다. 거룩한 장소는 폭력을 지워주는 곳이 아니다. 출애굽의 은혜와 말씀을 받은 백성은 자신을 지키려 더 큰 재산과 종교적 권한을 쌓는 대신, 하나님 앞에서 행위를 바르게 하고 이웃에게 행한 억압에서 돌이켜야 한다.

기독론적 해석

마태복음 7:21-23에서 예수는 자기 이름으로 예언과 권능을 행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아버지 뜻을 행하라고 요구하신다. 불법을 행한 자들에게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선언하신다. 아모스 3:2의 “알았나니”와 맞닿는 말로, 종교적 성과보다 주님과의 관계와 행위를 묻는다. “그 날” 판단하실 권위를 지닌 예수는 회개하여 불법을 멈추고 자기 말씀을 따르게 하신다.

예수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을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사람에 비유하신다(마 7:24-27). 두 사람 모두 들었으나 행했는지가 달랐다. 아모스에서 궁궐은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다. 예수의 비유도 소유한 지식과 예배 경험보다 말씀에 응답하는 삶을 요구한다. 앞의 거짓 선지자 경고는 양의 옷을 입은 이리도 열매로 분별하라고 한다(7:15-20).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주장으로 실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

마가복음 11:15-19에서 예수는 성전의 매매를 뒤엎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꾸짖으신다. 예레미야 7장을 인용한 책망은 벧엘 제단 심판처럼 성소에 기대어 책임을 피하는 태도를 겨눈다. 그 말씀을 들은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일 방도를 찾는다. 요한복음 2:13-22에서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신 예수는 헐린 성전을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신다. 요한은 그 성전이 예수의 몸이며 제자들이 부활 뒤 그 말씀을 믿었다고 밝힌다. 하나님께 나아갈 중심은 죽고 살아나신 아들이다.

히브리서 13:12-16에서 예수는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받으신다. 신자는 그 치욕을 지고 주께 나아가 찬송의 제사를 드리고 선을 행하며 나누어야 한다. 아모스에서 폭력의 책임을 성소로 가릴 수 없었듯,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은 사람의 예배도 이웃에게 나누는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요한복음 10:14-18의 예수는 자기 양을 아시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다. 아버지와 아들의 앎에 비추어 설명된 이 관계는 자기 이익을 위해 양을 소모하는 대신 그들을 살리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분은 다른 양들도 모아 한 목자 아래 한 무리가 되게 하시며, 목숨을 버리고 다시 얻을 권세를 아버지께 받으셨다. 아모스 3:12의 찢긴 양은 참화를 경고하지만, 복음은 죄와 죽음에서 자신을 구할 수 없는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 목자를 증언한다. 그분의 양은 그 음성을 듣고 따른다.

히브리서 13:20-21은 영원한 언약의 피로 큰 목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께서 신자를 선한 일에 온전하게 하시기를 구한다. 아모스에서 백성은 바른 행위를 몰랐으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새로워진다. 순종은 자기 의를 자랑할 성과보다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은혜의 열매다.

사도행전 4:18-20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명령에도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답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는 아모스의 질문과 닮았다. 그들이 선포하는 것은 예수의 부활과 그 이름의 치유다. 풀려난 뒤에도 공동체는 말씀을 담대히 말할 힘을 구한다(4:23-31). 이어 각 사람의 필요대로 재물을 나누는 모습이 나온다(4:32-35). 사마리아 궁궐의 겁탈과 달리, 부활의 증언은 가난한 사람을 살리는 나눔으로 이어진다.

고린도전서 9:16-19에서 바울은 맡겨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으리라고 하며,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자기 권리를 다 쓰지 않고 사람들을 섬긴다. 하나님께서 맡기셨으므로 말해야 한다는 책임은 청중을 소유하여 이익을 얻을 권한이 아니다. 심판하시는 주님과 생명을 주시는 목자는 같은 그리스도시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는 죄를 인정하고 그 은혜에 기대어 소유와 권한으로 이웃을 섬겨야 한다.

현대적 적용

하나님께 사랑받고 알려진 백성이라는 고백은 잘못을 덮는 공로가 될 수 없다. 아모스의 “그러므로”는 받은 은혜와 행위의 책임을 잇는다. 신앙의 연륜과 공동체의 성장도 사람을 억압할 권리를 주지 않는다. 은혜를 받았기에 그분이 원하시는 정의를 따라야 한다.

3절의 동행 질문은 모든 사람이 지도자와 같은 의견을 가져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다. 만남과 동행의 관계에서 시작한 질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예언이 나오는 까닭을 설명한다. 7절도 오늘 지도자의 예측과 판단을 모두 하나님의 계획으로 보증하지 않는다. 누구도 자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고 몰아세울 수 없다.

6절의 재앙은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특정한 죄를 두고 받은 심판 말씀이다. 사고와 자연재해를 만난 이웃의 숨은 죄를 이 절로 판정할 수 없다. 이 경고를 듣는 공동체는 고통받는 이의 죄를 추측하기보다 자기 안의 불의를 인정하고 멈추어야 한다.

궁궐에 폭력을 쌓았다는 고발은 재산을 얻은 행위를 묻는다. 정당한 수입으로 불려도 누군가의 품삯을 빼앗고 손해를 강요했다면 그 돈은 피해의 흔적을 지닌다. 후원과 헌금의 크기가 그 책임을 없애지 못한다. 잘못으로 얻은 것을 돌려주고 피해를 회복하는 일이 필요하다.

찢긴 양의 조각은 사마리아가 기대한 건짐과 달랐다. 회복을 낙관하며 진행 중인 피해를 그대로 둘 수 없다. 제단의 뿔도 죄를 피할 마지막 안전이 되지 못했다. 교회의 이름과 직분, 같은 예배에 참여한다는 친밀함을 약한 이의 침묵을 요구하는 근거로 삼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양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시고 부활하여 선한 일을 행할 힘을 주신다. 그 은혜에 의지하는 사람은 평판과 소유를 지키려고 죄를 감추기보다 인정하고 배상하며 돌이킬 수 있다. 회개하는 이를 돌보는 일에도 피해자의 안전과 회복이 빠질 수 없다. 주님께 알려진 관계는 이웃의 생명을 지키고 필요한 것을 나누는 삶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