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아모스 4장은 사마리아 산의 “바산의 암소들”(פָּרוֹת הַבָּשָׁן, 파로트 합바샨)에게 말씀을 들으라고 명한다. 목초지에서 살지게 자란 가축의 비유는 가난한 사람을 짓밟으며 안락을 누리는 이들을 겨냥한다. 여성 복수형으로 이어지는 고발과 “그들의 주인들”에게 마실 것을 요구하는 말에 근거하여, NET는 이들을 남편에게 욕구를 채우라고 요구하는 부유한 여성들로 읽는다.1 심판의 이유는 성별이나 외모가 아니라 약자를 학대하며 누린 풍요이다. 시편 22:12(BHS 22:13)도 바산의 힘센 소를 고난받는 이를 위협하는 세력에 비유한다.

“가장에게”(לַאֲדֹנֵיהֶם, 라아도네헴)는 “그들의 주인들에게”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남편들을 가리킨다.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는 짧은 요구에서 “술을”은 마신다는 문맥에 따라 개역개정이 보충한 말이다. 그 요구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압제가 같은 문장에 놓인다. 부를 직접 관리하는 사람뿐 아니라 그 풍요를 권리처럼 요구하는 사람도 책임을 진다. 3장에서 궁궐에 쌓인 폭력은 여기서 그 안에서 마시고 즐기는 생활로 드러난다.

2절에서 주 여호와는 “자기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신다. 가난한 사람을 짓밟는 삶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그 거룩함이 심판의 확실한 근거이다. 6:8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다. “때가 너희에게 이를지라”는 심판의 날들이 이미 다가온다는 긴박함을 담는다. 물건을 가져오라고 명령하던 이들이 이제 붙들려 끌려갈 대상이 된다.

2-3절의 추방 도구와 목적지는 불분명하다. 개역개정의 “갈고리”(בְּצִנּוֹת, 베친노트)와 “낚시”(בְּסִירוֹת דּוּגָה, 베시로트 두가)를 NET는 바구니와 어부의 통으로 옮기며, 어휘의 정확한 뜻과 하르몬의 위치가 불확실하다고 설명한다.1 따라서 강제 추방의 장면은 분명해도 도구의 사용법과 이동 경로는 알기 어렵다. 이들은 무너진 성벽 틈으로 각기 곧장 나가게 된다. 3절의 “각기”는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고 동사들도 여성 복수형이어서 처음 불린 여성들을 다시 지목한다. “던져지리라”(וְהִשְׁלַכְתֶּנָה, 베히쉴라크테나)는 BHS 모음대로는 “너희가 던지리라”라는 능동형이며 목적어가 없다. 개역개정은 끌려가는 이들을 주어로 수동 번역한다.

4절은 벧엘과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라는 반어적 명령으로 예배를 고발한다. “범죄하며”는 1-2장에서 각 나라의 죄를 고발한 말과 같은 어근이다. “가서”는 2절에서 심판의 날이 온다는 동사와 같아, 백성이 성소로 가는 동안 심판도 다가옴을 들려준다. 아침마다 희생을,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리는 부지런함도 그들을 구하지 못한다. “드리며”는 1절에서 마실 것을 “가져오라”고 했던 동사와 같아 향락과 제사의 열심을 연결한다. NET는 정의 없는 형식적 예배가 위선을 더한다고 풀이한다.1 성소를 향하는 발걸음은 이웃을 억누르는 삶을 바꾸지 않았다.

5절의 “수은제”는 감사의 제사이고 “낙헌제”는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이다. NET는 누룩 든 제물을 레위기 7:13의 감사제물 규정과 연결한다.1 유교병을 감사제물과 함께 드리는 것과 누룩을 제단에서 화제로 사르는 것은 구별된다. 레위기 2:11은 후자를 금한다. 백성은 이런 예물을 소리 내어 알리지만, 하나님은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라고 하신다. “기뻐하는”의 동사는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들이 사랑하는 종교 활동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압제와 병행하고 있었다.

6절의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며”(נִקְיוֹן שִׁנַּיִם, 니크욘 쉰나임)는 뒤의 양식 부족이 뜻을 밝힌다. 먹을 것이 없어 이에 남을 음식도 없는 기근의 모습이다. NET도 이를 기근의 생생한 비유로 풀이한다.1 “또 내가”라는 강조는 백성이 좋아하는 예물과 하나님께서 실제로 보내신 징벌을 맞세운다. 풍성한 제사를 자랑하던 백성에게 하나님은 빈 입을 주셨다고 하신다.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וְלֹא־שַׁבְתֶּם עָדַי, 벨로 샤브템 아다이)는 6, 8, 9, 10, 11절에 다섯 번 반복된다. 돌아올 대상은 벧엘이나 길갈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재앙의 종류는 달라도 백성의 응답은 같았다. 고통의 경험만으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1절의 여성 집단을 향한 고발은 4절부터 남성 복수 명령과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호칭으로 넓어져 공동체 전체를 향한다. 처음 지목된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

7-8절에서 하나님은 추수 석 달 전에 비를 막으셨고, 어떤 성읍에는 비를 주고 다른 성읍에는 주지 않으셨다. 여러 성읍의 사람들은 물을 찾아 비틀거리며 다녀도 충분히 마시지 못했다. “비틀거리며”(וְנָעוּ, 베나우)는 8:12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찾지만 얻지 못하는 방황에도 쓰인다. 1절에서 마실 것을 요구하던 향락과 8절에서 생존을 위해 물을 찾는 모습이 같은 “마시다”라는 동사로 연결된다. 그러나 물을 찾아 이동하던 백성도 하나님께는 돌아오지 않았다.

9절의 마름병과 깜부기,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먹는 팥중이는 곡식과 과실의 기반을 넓게 무너뜨린다. 10절의 전염병은 “애굽에서 한 것처럼” 임한다. 애굽의 재앙에서 구출받은 백성이 이제 같은 타격을 겪는다. 칼에 죽은 청년과 빼앗긴 말, 진영의 악취는 나라의 미래와 군사력도 그들을 지키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그 뒤에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는 후렴이 이어진다.

11절은 성읍들의 붕괴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견준다. “무너뜨리기를”과 “무너뜨림”은 같은 어근으로 두 사건을 묶는다. 살아남은 백성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כְּאוּד מֻצָּל מִשְּׂרֵפָה, 케우드 무찰 밋세레파)과 같았다. 이미 불에 탄 것이 밖으로 꺼내지듯 그들의 생명은 위태롭게 보존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후렴도 그들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고발한다. 보존된 생명에 합당한 응답은 없었다.

12절의 “그러므로”는 고발과 다섯 후렴의 결론을 이끈다. “이와 같이” 행하겠다는 말씀은 다가올 일을 상세히 밝히지 않은 채 앞의 재앙과 추방을 떠올리게 한다. 이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복수로 불리던 백성을 이제 단수로 불러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 앞의 예배 비판과 심판 선언에 비추면 더 많은 제물을 준비하라는 초청이 아니다. 그분은 여전히 “네 하나님”이시지만, 백성은 그 관계를 거스른 삶에 답해야 한다.

13절은 그 하나님을 산을 빚고 바람을 창조하며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וּמַגִּיד לְאָדָם מַה־שֵּׂחוֹ, 우막기드 레아담 마 세호)는 “사람에게 그의 생각을 알리는”이라는 뜻이다. “그의”는 문법상 하나님과 사람을 모두 가리킬 수 있지만 개역개정은 하나님의 뜻으로 읽는다. 하나님은 아침을 어둠으로 바꾸고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신다. 5:8의 송영도 빛과 어둠을 다스리는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라고 밝힌다. 7:9에서 제의 장소를 가리키기도 하는 “높은 데”까지 밟으시는 창조주를 백성은 성소의 의례 안에 가둘 수 없다. 그분의 이름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이다.

성경신학적 통찰

아모스 5:4-6은 벧엘과 길갈을 찾지 말고 여호와를 찾으면 살리라고 명한다. 4장의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가 가리키는 것은 성소로 다니는 발걸음과 구별되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응답이다. 예배하는 이스라엘은 가난한 이웃을 압제하는 삶을 버리고 자기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레위기 26:14-26은 언약을 배반할 때 질병과 패전, 메마른 땅과 양식 부족이 임하리라 경고하며, 그런 일을 겪어도 청종하지 않는 백성의 완고함을 반복한다. 아모스의 다섯 후렴도 이 경고와 이어진다. 레위기 26:13에서 종의 멍에를 벗겨 주신 하나님께 해방을 받은 백성이 이제 이웃을 압제한다. 재앙 회고의 배경에는 받은 자유를 잊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한 삶이 있다.

신명기 30:1-10은 복과 저주를 겪고 흩어진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와 말씀을 청종할 미래를 말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모으고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자신을 사랑하며 살게 하신다. 돌아옴은 땅과 풍요만 되찾는 일이 아니라 생명이신 여호와께 마음과 뜻을 다해 응답하는 일이다. 그 소망은 백성의 강한 의지보다 흩어진 이들을 모으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다.

아모스 4:11이 직접 불러오는 창세기 19:15-29에서는 롯이 지체할 때 천사들이 그를 이끌어 내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여 멸망 가운데서 그를 건지신다. 생존은 자기 의를 자랑할 근거가 아니라 자비에 대한 응답을 요구한다. 아모스는 소돔 같은 붕괴를 겪고 건져지고도 돌아오지 않은 이스라엘을 고발한다.

스가랴 3:1-7의 대제사장 여호수아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라 불린다. 하나님은 그를 고발하는 사탄을 책망하고 더러운 옷을 벗겨 죄를 제거하신 뒤, 자신의 길과 규례를 지키라고 명하신다. 아모스에서 같은 불의 비유는 건져지고도 완고한 백성을 드러내며, 스가랴에서는 남겨진 사람을 정결하게 하여 다시 섬기게 하는 은혜를 드러낸다.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은 자신을 정결하게 하시는 분께 돌아가야 한다.

이사야 1:10-20은 많은 제물과 기도가 피 묻은 손을 가려 주지 못한다고 경고하며, 악을 버리고 정의를 배워 학대받는 이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라고 요구한다. 죄를 희게 하시는 은혜에는 순종의 응답이 따른다. 아모스의 반어도 같은 모순을 지적한다. 레위기 7:11-14에 맞는 감사제물을 드리는 일조차 예배자의 신실한 삶을 보증하지 않는다. 이웃을 해치는 행동을 계속하며 예물만 늘릴 수는 없다.

호세아 6:1-6에서 백성은 여호와께 돌아가 고침받자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인애가 아침 구름과 이슬처럼 사라진다고 책망하신다. 제사보다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시는 그분은 지속적인 신실함을 요구하신다. 호세아에서 새벽과 비처럼 오시리라 기대된 하나님은 아모스에서 비를 막고 아침을 어둡게 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백성은 풍요에 대한 자기 기대에 하나님을 가두지 말고 그분의 거룩한 책망을 들어야 한다.

기독론적 해석

아모스 4장에서 반복된 경고와 제사에도 백성은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듣는다. 신약에서 그리스도는 회개를 부르시고 자기 피로 죄인을 정결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신다. 마가복음 1:14-15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긴박한 요청으로 선포된다.

누가복음 13:1-5에서 예수께서는 살해당한 갈릴리 사람들과 망대 붕괴로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았다는 생각을 거절하고, 듣는 이들에게 회개를 요구하신다. 타인의 고통으로 자기 무죄를 확인하려는 시선이 자신의 삶을 향하게 된다. 6-9절의 무화과나무 비유에서도 더 주어진 시간은 열매를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이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삶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는 보증이 될 수 없다.

누가복음 13:10-17에서 예수께서는 오랫동안 몸을 펴지 못한 여성을 안식일에 고치시고 아브라함의 딸이라 부르신다. 소와 나귀를 풀어 물을 먹이듯 이 딸을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신다. 아모스의 부유한 여성들이 약자의 생존을 짓밟으며 편의를 요구했던 데 비해, 예수는 약한 여성을 일으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예배는 주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사람의 삶과 연결된다.

마태복음 9:9-13에서 예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시며 호세아 6:6을 인용하여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배우라고 하신다. 누가복음 19:1-10의 삭개오에게도 먼저 찾아오신다. 삭개오는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고 부당하게 빼앗은 것을 갚겠다고 응답한다. 이 행동은 구원을 사는 대가가 아니라 자신을 찾아온 은혜의 열매이다. 아모스에서 예물이 늘어도 멈추지 않았던 압제는 구원자의 방문을 반기는 삶에서 중단된다.

누가복음 15:17-32에서 돌아온 아들은 죄를 고백하고, 아버지는 달려가 그를 아들로 맞아들인다. 큰아들은 자기 봉사의 실적을 내세우며 동생의 귀환을 기뻐하지 않지만 아버지는 그에게도 권한다. 죄인들과 함께 먹는다는 비판에 답하신 예수께서는 돌아온 죄인을 반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참여하도록 사람들을 부르신다.

히브리서 9:11-15의 그리스도는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고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신다. 죄인은 경건의 실적을 쌓아 하나님과의 만남을 확보하지 않고 새 언약의 중보자를 의지하여 나아간다. 24-28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기다리는 이들을 구원하려고 다시 오신다. 심판 앞의 소망은 죄를 담당하신 그분께 있다.

고린도후서 7:8-11에서 바울이 기뻐한 것은 근심의 크기보다 그 근심이 회개에 이르러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열심을 낳았기 때문이다. 아모스의 고통받고도 돌아오지 않은 백성과 달리, 복음의 책망을 들은 사람은 은혜에 의지하여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눈물과 큰 약속은 실제 책임의 이행으로 이어져야 한다.

베드로후서 3:8-13은 주님의 오래 참으심을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뜻으로 설명하며,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거룩한 행실을 요구한다. 아모스에서 산과 바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고 들은 백성처럼,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도 오늘의 불의를 미룰 수 없다. 받은 시간은 회개하고 이웃에게 정의와 자비를 행할 은혜의 시간이다.

현대적 적용

가난한 사람의 생계를 해치며 누리는 안락에는 책임이 따른다. 직접 돈을 관리하지 않아도 자신의 요구가 다른 사람을 짓누른다는 사실을 알면 그 요구를 바꾸어야 한다. 고발할 것은 성별과 외모가 아니라 착취의 행위이다. 예배와 헌금에 많이 기여한 사람도 자신이 입힌 피해에 같은 책임을 진다.

성소에 자주 가는 것과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다를 수 있다. 불의를 계속하면서 봉사와 예물을 늘려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은 빼앗은 것을 돌려주고, 거짓을 바로잡으며, 타인에게 떠넘긴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사과를 받는 사람에게 즉시 용서와 관계 회복을 요구하는 것으로 그 책임을 대신할 수 없다.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지목하신 이스라엘의 압제와 그 역사를 해석한다. 오늘의 재난이나 질병 피해자에게 숨은 죄가 있다고 이 목록을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다. 예수께서는 피해자가 더 큰 죄인이냐는 시선을 듣는 사람 자신의 회개로 돌리셨다. 살아남은 사람도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 없고, 상처 입은 사람의 슬픔을 완고함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여셨으므로 죄인은 불리한 사실도 고백하며 은혜를 구할 수 있다. 회개의 눈물은 이웃을 대하는 행동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하나님을 만날 날을 기다리는 교회는 평판을 지키려고 약자를 침묵시키거나, 아직 일이 잘 풀린다는 이유로 드러난 잘못을 미루지 말아야 한다. 오늘 주어진 시간을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며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