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열국을 향하던 고발이 이제 유다와 이스라엘에 이른다. 다메섹부터 모압까지 선언된 형식, 곧 ‘서너 가지 죄’와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가 두 왕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유다는 율법을 받은 백성이고 예루살렘을 가진 나라지만 이웃 나라들을 불사르던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4-5절). 이스라엘을 향한 선언은 훨씬 길어져 경제적 착취와 성적인 잘못, 예배의 타락,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거부한 일을 구체적으로 열거한다(6-12절). 다른 나라에 관한 판결을 듣던 청중이 이제 자기 책임을 묻는 말씀 앞에 선다. 하나님과 특별한 역사를 가졌다는 사실이 지금의 불의를 가리지 못한다.
유다가 심판받는 이유는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이다(4절). ‘멸시하다’는 문자적으로 ‘거절하다’이며, ‘율법’은 하나님이 이 백성에게 주신 가르침 전체를 가리킬 수 있다. 유다의 문제는 가르침을 접하지 못한 데 있지 않았다. 받은 말씀을 배척했다. 앞의 여섯 나라가 학살과 포로 매매, 시신 훼손 같은 잔혹 행위로 고발되었다면, 유다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절한 일로 고발된다. 말씀을 더 분명하게 받은 백성은 그 말씀 앞에서 책임을 진다. 4절 후반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וַיַּתְעוּם כִּזְבֵיהֶם, 바야트움 키즈베헴)는 히브리어로 ‘그들의 거짓들이 그들을 헤매게 했다’이며, 개역개정은 같은 내용을 유다가 미혹되었다는 수동 표현으로 옮겼다. 이 ‘거짓’은 우상을 가리키는 다른 단어들과 구별되어, 대상의 정체보다 하나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거짓이라는 성격을 드러낸다. 조상들이 그 거짓을 따라갔다는 관계절은 이어받은 관행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떠나게 하는 힘으로 작용했음을 보여 준다. 거짓을 전통으로 받았다는 사실이 그 책임을 없애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고발의 첫 항목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이다(6절). 유다의 고발이 말씀을 거절한 일로 시작했다면 이스라엘의 고발은 사람을 판 일로 시작한다. ‘의인’은 돈 때문에 처분되어서는 안 될 정당한 사람을, ‘가난한 자’는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가리킨다. 은과 신 한 켤레가 두 사람의 처지와 맞대어져 사람의 권리가 재물 때문에 짓밟히는 상황이 드러난다. Jan de Waard와 William A. Smalley의 UBS 해설은 누가 사람을 파는지 본문이 밝히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이 매매를 뇌물을 받은 재판관의 부패로 읽는 해석과 채권자가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을 종으로 파는 일로 읽는 해석을 검토하여, ‘팔다’를 평범한 뜻으로 유지하며 7절과도 이어지는 후자를 선호한다. 또 의인을 법정의 무죄 판결 대상에만 한정할 필요가 없으며, 사람에게 저지른 이 죄가 하나님께 저지른 죄이기도 하다는 점을 번역에서 드러내야 한다고 설명한다.3 이 독법에서 신 한 켤레는 사람을 종속시키는 채무가 얼마나 하찮았는지를 부각한다.
7절의 “발로 밟고”(הַשֹּׁאֲפִים, 하쇼아핌)에 대해 NET 해설은 이 동사를 ‘헐떡이다, 갈망하다’라는 어근에서 온 것으로 읽던 전통과 ‘짓밟다’라는 어근에서 온 것으로 읽는 해석을 구별하고, 오늘날 대다수 학자를 따라 후자를 택한다. 같은 해설은 가난한 이를 땅의 흙 속에 밟아 넣는 철저한 멸시의 그림으로 이 줄을 옮길 수 있다고 하며, 이 분사가 6절에서 사람을 판 ‘그들’을 다시 설명한다고 분석한다.1 사람을 팔던 이들이 가난한 이를 짓밟는 자들로 다시 묘사되는 셈이다. 이어지는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וְדֶרֶךְ עֲנָוִים יַטּוּ, 베데레크 아나빔 야투)는 정당한 대우를 구하는 사람의 길을 힘 있는 이들이 옆으로 밀어내는 그림이다. 매매로 사람을 종속시키는 경제적 힘과 자기 권리를 주장할 길을 막는 행동이 이어진다. 가난한 사람은 이익을 빼앗길 뿐 아니라 이의를 제기할 자리도 잃는다.
7절 후반은 성적인 잘못을 고발한다. 히브리어는 ‘한 남자와 그의 아버지’가 “한 젊은 여인”(הַנַּעֲרָה, 한나아라)에게 다닌다고 말하며, 이 명사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다. NET는 이를 살려 ‘같은 소녀’로 옮기고 두 남자가 같은 여성에게 간다는 점을 드러낸다. NET 해설은 대다수 해석자가 이 행동을 성적인 잘못으로 읽는다고 설명하면서, 그 여성의 정확한 신분은 불명확하며 이 명사가 창기를 뜻하는 전문어도 아니라고 밝힌다.1 그러므로 성전 창기나 여종이라는 특정 신분을 본문에서 확정할 수 없으며, 고발은 남성들의 행동에 집중한다.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를 이끄는 말은 보통 목적을 나타내지만, 개역개정과 NET는 이를 그 행동이 낳는 결과로 옮긴다. 그러면 남성들의 의도보다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이름에 끼친 결과가 강조된다. NET는 여기의 이름이 하나님의 성품과 명예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1
8절에서는 이웃에게서 취한 물건이 예배의 향락을 떠받친다. 그들은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눕고,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신다. ‘전당 잡은 옷’은 누군가의 곤궁 때문에 맡겨진 물건이며,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는 문자적으로 ‘벌금을 물게 된 사람들의 포도주’다. 7절에서 연약한 이의 길을 ‘굽게 한다’고 할 때 쓴 동사(יַטּוּ, 야투)가 여기서는 몸을 펴 “누우며”에 다시 쓰인다. 다른 사람의 길을 틀어 막은 사람들이 자기 몸은 편히 펼친다. “그들의 신전”(בֵּית אֱלֹהֵיהֶם, 베트 엘로헤헴)은 ‘그들의 하나님의 집’으로도 ‘그들의 신들의 집’으로도 읽을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예배 장소와 옷과 포도주가 함께 등장하여 신앙 고백 뒤에 숨겨진 착취를 생활의 장면으로 보여 준다.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마련한 즐거움은 어디에서 예배하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지지 않는다.
9절에서 말씀은 ‘그들’의 행동을 열거하다가 하나님 자신의 행동으로 방향을 바꾼다. 원문은 ‘내가’를 따로 앞세워 그 일을 행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백향목처럼 크고 상수리나무처럼 강한 아모리 사람을 위의 열매와 아래의 뿌리까지 멸하셨다. 이스라엘이 자기보다 강한 세력 앞에서 땅을 얻은 까닭은 하나님이 행하셨기 때문이다. 10절은 ‘내가’를 다시 앞세워 애굽에서의 구원과 사십 년의 광야 인도를 회고한다. 땅의 정복을 먼저 말하고 출애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순서는 지금 누리는 땅이 누구의 손에서 왔는지를 먼저 상기시킨다. 여기서 말씀은 ‘그들’ 대신 ‘너희를’이라고 이스라엘을 직접 부른다. UBS 해설은 이 전환을 지적하며 번역에서 6절부터 드러낼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3 큰 힘 앞에서 구원받은 백성이 이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생존을 위협하며, 은혜의 역사가 현재 행위의 책임을 더욱 선명하게 한다.
11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들들 가운데 선지자를, 청년들 가운데 나실인을 일으키셨다고 하신다. 땅을 주는 데서 그치지 않으시고 그 땅에서 말씀을 들으며 구별되어 살도록 사람들을 주셨다.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는 수사 질문은 백성 자신을 그 은혜의 증인으로 세운다. 12절은 백성의 응답을 드러낸다. 그들은 나실인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 8절에서 스스로 ‘마시던’ 동사와 달리 여기서는 다른 사람에게 마시게 하는 동사가 쓰여, 스스로 마시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에게도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 선지자에게는 “예언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금지했다. 나실인의 구별된 삶을 훼손하도록 압박한 사람들이 예언자의 말도 통제한다. 그들은 불의를 행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것을 듣고 바로잡을 통로도 막았다.
13절은 하나님의 응답을 “보라”로 시작한다. 개역개정은 “곡식 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흙을 누름 같이 내가 너희를 누르리니”로 옮기지만, ‘누르다’(מֵעִיק, 메이크; תָּעִיק, 타이크)의 뜻에는 논쟁이 있다. NET는 이 절의 정확한 뜻이 불분명하다고 밝히고 ‘누르다’를 택하면서도, 너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다, 수레가 땅을 가르듯 너희를 갈라 놓다, 너희 아래의 땅이 신음하게 하다 등의 제안을 함께 소개한다.2 히브리어는 “너희를” 자리에 ‘너희 아래에서’(תַּחְתֵּיכֶם, 타흐테켐)라는 전치사구를 쓰는데, 땅이 신음한다는 제안도 이와 맞닿아 있다. 이 구문은 곧 닥칠 일을 나타내며, 개역개정의 그림에서는 다른 사람을 짓누르던 백성이 이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눌린다.
14-16절은 빨리 달음박질하는 자와 강한 자, 용사와 활을 가진 자, 발이 빠른 자와 말 타는 자, 마음이 굳센 자를 차례로 부른다. 속도와 체력, 무기와 말, 용기가 모두 무력해진다. 14절 첫 줄(וְאָבַד מָנוֹס מִקָּל, 베아바드 마노스 믹칼)은 문자적으로 ‘빠른 자에게서 피할 곳이 사라진다’여서, 사라지는 것은 사람의 다리보다 도망할 자리 자체다. ‘자기 목숨을 구할 수 없으며’가 거듭 나와 생존의 길이 막혔음을 강조한다. 가장 용감하던 사람도 그 날에는 벌거벗고 도망한다. 8절에서 남의 옷 위에 눕던 공동체의 용사가 자기 옷도 없이 달아나고, 가난한 사람을 팔고 그 길을 막았던 공동체가 자신을 구할 길마저 잃는다.
성경신학적 통찰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시는지 묻는다. 율법을 멸시한 유다와 가난한 사람을 팔며 선지자의 입을 막은 이스라엘은 서로 다른 죄 목록을 받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만난다. 9-11절의 출애굽과 광야, 땅과 사람의 선물이 그 요구의 출발점이다. 하나님은 종살이에서 건져 자유와 기업을 주시고 그 은혜에 맞게 살도록 가르치셨다. 아모스는 이 은혜의 회고를 이웃을 종속시키는 현재의 고발 바로 뒤에 둔다.
그 요구는 율법의 담보 규정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출애굽기 22:25-27은 가난한 이의 곤궁을 이용하지 말고 전당 잡은 옷을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명한다. 그 옷은 밤에 몸을 가릴 유일한 옷이며, 그가 부르짖으면 자비로운 하나님이 들으시겠다고 하신다. 신명기 24:10-18은 채권자가 채무자의 집에 들어가지 말고 밖에서 전당물을 기다리라 하고, 품꾼의 임금을 제때 주며 과부의 옷을 담보로 잡지 말라고 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이었고 하나님께서 속량하셨기 때문이다. 아모스 2:8에서 그 옷 위에 누운 사람은 채무자가 돌려받아야 할 덮개를 자신의 안락에 쓴다. 제단 곁의 편안함과 가난한 사람의 추위가 같은 옷에 연결되며, 하나님은 두 자리를 모두 보신다.
레위기 19:9-18은 이삭과 남은 열매를 가난한 이에게 남기고, 품꾼의 삯을 미루지 않으며,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하면서 단락마다 ‘나는 여호와이니라’를 되풀이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도 그 가운데 있다. 아모스 2:7은 성적인 잘못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고 선언하고 곧바로 제단 옆의 옷과 포도주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이름을 공경한다는 고백은 몸과 재물과 권한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같은 장 15절은 가난한 자라고 편들지도,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도 말라고 한다. 약한 사람의 약함을 불리한 증거로 삼는 공동체에서는 정의가 작동하지 못한다.
신명기 8:2-18은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시며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우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하고, 땅에서 재물이 늘어날 때 자기 능력으로 얻었다고 말할 위험을 경고한다. 8:19-20은 여호와를 잊으면 이스라엘도 앞서 멸망한 민족들처럼 멸망하리라고 한다. 아모스가 아모리 사람의 큰 힘을 제거하신 하나님을 회고한 뒤 이스라엘 군대의 무너짐을 예고하는 순서와 맞닿는다. 재산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것을 얻고 쓰는 방식도 그분 앞에 내놓아야 한다.
민수기 6:1-8에서 나실인은 서원하여 자신을 여호와께 구별한 기간에 포도주를 멀리하고 머리를 자르지 않으며 시체의 부정을 피한다. 서원 기간이 끝나면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6:13-20). 그러므로 아모스의 고발에서 핵심은 하나님께 드린 그 구별을 다른 사람들이 강제로 무너뜨렸다는 데 있다. 나실인은 공동체가 어떤 분께 속했는지를 몸으로 증언했고, 선지자는 들은 말씀을 전했다. 이스라엘은 그 둘을 자기 요구에 맞추게 하여, 불의를 행하면서 그 불의를 비추는 삶과 말씀을 함께 밀어냈다. 감사의 제사와 구원 역사의 암송도 지금 말씀하시고 사람을 세우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일을 대신할 수 없다.
예배 장소를 믿는 거짓 안전은 남왕국 유다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예레미야 7:1-15에서 하나님은 도둑질과 간음과 거짓 맹세를 하면서 성전에 들어와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길과 행위를 바로잡으라고 하신다.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말을 되뇌며 안심하지 말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실로의 심판을 기억하게 하며 유다도 에브라임처럼 쫓겨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아모스가 유다와 이스라엘을 연속하여 고발한 구조처럼, 한 공동체의 실패를 다른 공동체가 관찰하며 자신은 안전하다고 여길 수 없다.
기독론적 해석
누가복음 4:16-21에서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를 읽으시고, 성령의 기름부음과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진 복음, 포로와 눌린 사람의 자유를 선포하신 뒤 그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하신다. 아모스의 고발과 이 선포는 억눌린 사람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뜻에서 이어진다. 그 앞에서 예수는 광야의 시험을 받으시며, 사람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신명기 8:3을 붙드시고 세상의 권세를 얻으려 다른 이를 경배하라는 요구를 거절하신다(눅 4:1-13). 구원의 역사를 받고도 재물과 권한을 따라 하나님의 가르침을 버린 아모스의 백성과 달리, 아들은 광야의 이스라엘이 배워야 했던 순종을 몸소 행하신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가 시돈의 과부와 수리아의 나아만을 들어 고향의 기대를 넘는 하나님의 긍휼을 말씀하시자 그를 쫓아내려 한다(눅 4:22-30). 선지자를 침묵시키려 한 아모스의 백성처럼, 말씀이 자기 기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말씀하시는 분을 배척한다. 은혜를 듣는 사람에게는 그 은혜를 베푸시는 분의 뜻도 받아들일 책임이 있다.
예수는 세리장이며 부자인 삭개오를 찾아가 그 집에 머무르겠다고 하신다(눅 19:1-10). 사람들은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고 수군거리지만, 예수의 방문은 평판을 보상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고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오시는 데서 시작한다. 삭개오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하며, 예수는 그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언하신다. 이웃에게서 취한 재물로 편히 눕던 아모스의 장면과 달리, 구원이 이른 집에서는 재물을 돌려주는 응답이 나온다. 회개가 종교적 말에 머물지 않고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실제 변화를 가져온다.
선지자의 입을 막은 2:12의 죄 앞에서 교회는 하나님이 지금 누구를 통해 말씀하시는지 묻는다.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고, 그 아들은 죄를 정결하게 하신 뒤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히 1:1-3). 죄를 드러내는 말씀이 공동체의 평판을 해친다는 이유로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주님이 그 죄를 드러내신다.
베드로전서 1:18-21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이 은이나 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아모스에서는 은 때문에 사람이 팔리고 전통의 이름으로 거짓을 따랐다. 복음은 그 헛된 길에서 사람을 건져내는 값비싼 구원을 선포하며, 구원받은 사람의 가치는 그를 위해 피 흘리신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데서 나온다. 같은 문맥은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에게 모든 행실에 거룩하라고 권하고(1:13-17),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신 목적이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는 데 있다고 말한다(2:24). 아모스가 고발한 착취와 성적인 잘못은 그 속죄가 다루는 실제 죄의 영역이다. 자기 힘으로 깨끗한 과거를 만들 수 없는 사람은 죄를 담당하신 주님을 의지하여 진실하게 죄를 인정하고, 사람을 팔고 침묵시키던 삶에서 이웃을 살리는 삶으로 돌아선다.
에베소서 2:1-10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한다. 구원은 은혜의 선물이어서 자랑할 근거가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받은 목적은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는 데 있다. 아모스도 먼저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비추어 백성의 현재 삶을 묻는다. 교회는 도덕적 성과로 구원을 사지 않지만,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하며 이웃을 계속 짓밟는 모순을 방치할 수도 없다.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고후 8:9). 아모스의 제단 곁에서는 타인의 곤궁이 자기 안락을 위한 자원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따르는 공동체에서는 자기의 넉넉함이 다른 사람의 부족을 채우는 자원이 된다. 바울은 다른 이들은 평안하게 하고 주는 사람은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가진 것에 따라 자원하여 참여하도록 권한다(8:12-15). 그리스도의 자기 내어 주심은 가난한 사람에게 더 큰 부담을 강요하는 말로 쓰일 수 없다.
히브리서 12:22-29는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께 나아온 신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이를 거역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은혜와 경고는 같은 주님의 백성을 향한다. 같은 장은 자신에게 거역한 죄인들의 적대를 참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신 예수를 바라보라고 권한다(12:1-3). 선지자의 목소리를 막고 자기 행위를 보호하려는 인간의 죄는 그리스도의 고난에서도 드러나지만 그분의 순종과 부활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은 사람은 군사력이나 재산이 아니라 중보자께서 여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안전을 두고, 그 관계 안에서 듣고 돌이킨다.
현대적 적용
이웃을 신 한 켤레 때문에 판다는 말씀은 돈과 사람의 삶을 어떻게 비교하고 있는지 묻는다. 돈을 빌려주거나 지원할 때 상대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붙이고, 작은 빚을 이유로 생계와 존엄을 빼앗는다면 이 고발과 같은 자리에 선다. 계약서에 서명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조건이 공정해지지는 않는다. 담보로 잡은 옷을 제단 옆에서 쓰는 장면은 타인의 절박함을 자기 편의에 쓰는 행동이다. 일한 사람의 임금을 미룬 채 기관의 예배와 행사를 먼저 유지하는 공동체도 이 말씀 앞에 선다.
가난한 이의 길을 굽게 한다는 말씀은 약한 사람이 도움과 공정한 판단에 이르는 길을 막는 일을 고발한다. 공동체가 영향력 있는 기부자나 오래된 지인의 말만 먼저 믿고 약한 사람의 말을 충분히 듣지 않는다면, 또 이의를 제기한 사람에게 믿음이나 감사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붙인다면, 그의 길을 굽게 하는 것이다. 레위기 19:15처럼 약한 자라고 편들지도,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도 않고 사실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헌금과 예배로 공동체의 건강을 평가할 때에는 그 재원이 어디서 왔는지도 물어야 한다. 임금을 미루거나 거래 상대를 속여 얻은 이익을 바치면서 하나님을 높였다고 말할 수 없다. 기부금이 크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사업과 행동에 관한 질문을 막지 않는다. 제단 곁의 즐거움이 채무자의 옷과 벌금으로 마련되었다는 장면은 좋은 목적이 수입의 불의를 감추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아버지와 아들을 향한 고발에서 문제로 제시되는 것은 남성들의 행동이다. 본문이 밝히지 않은 여성의 신분을 마음대로 붙여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오늘 성적인 피해를 다룰 때에도 피해자의 옷차림이나 과거를 먼저 문제 삼거나 영향력 있는 남성의 명예를 앞세워서는 안 된다. 아모스는 죄를 드러내는 말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다고 하지 않았다. 남성들의 행위와 이웃을 억누르는 삶이 그 이름을 더럽힌다고 선언했다. 교회의 이름과 지도자의 명성을 지키려고 당사자에게 침묵을 요구하면 고쳐야 할 행동이 그대로 남는다.
나실인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하고 선지자에게 예언하지 말라고 한 행동은 공동체가 다른 사람의 양심과 불편한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 묻는다. 관행이라는 이유로 거짓 보고를 요구하거나, 재정과 권한과 성적인 잘못을 다루는 말씀을 반복해 피하거나,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동기를 공격하는 일이 그런 모습이다. 조상들이 따르던 거짓을 이어받은 유다처럼, 처음부터 그렇게 해 왔다는 이유로 부당한 관행을 유지할 수도 없다. 출애굽과 광야를 기억하라는 말씀은 교회가 받은 도움을 기억하며 지금 누구의 짐을 덜어 줄지 묻게 하고, 재산과 숫자와 영향력을 잘못을 바로잡지 않아도 버틸 힘으로 여기지 않게 한다. 동시에 이 본문은 북왕국의 심판을 경고하므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그의 죄에 대한 판결을 대신 선고할 근거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 구원받은 사람은 삭개오처럼 자신이 취한 이익과 상대의 손해를 구체적으로 살피고, 돌려줄 것을 돌려주며, 피해자에게 용서를 재촉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