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아모스서의 다섯째 환상은 시작부터 앞의 네 환상과 다르다. 앞에서는 주께서 아모스에게 무엇인가를 보이셨고(7:1, 4, 7; 8:1) 셋째와 넷째 환상에서는 “네가 무엇을 보느냐”는 질문이 이어졌지만, 9:1은 “내가 보니”로 바로 시작하며 대화도 설명도 없이 명령이 떨어진다. 주께서 서 계신 모습은 7:7에서 담 곁에 서 계실 때와 같은 분사로 그려지고, “제단 곁에”의 전치사는 ‘곁에’와 ‘위에’를 모두 뜻할 수 있어 주께서 제물을 바치는 자리를 차지하고 서 계신 모습을 그린다. 본문은 성소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며, NET 해설은 벧엘의 제단일 가능성을 제시한다.1 아마샤가 벧엘을 왕의 성소라 부른 일(7:13)을 생각하면 자연스럽지만, 9:1이 강조하는 것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도망할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주께서는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라고 명하신다. 꼭대기의 장식과 바닥의 문턱이 함께 흔들리니 건물 전체가 무너진다. ‘움직이다’는 1:1의 “지진”과 같은 어근이어서, 책의 표제가 기억하는 지진이 마지막 환상에서 성소를 흔드는 심판의 언어로 다시 들린다. 주께서는 무너지는 건물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사람들까지 칼로 죽이겠다고 하신다. 절 끝은 같은 어근의 동사와 명사를 짝지어 ‘도망하는 자가 도망하지 못하고 피하는 자가 피하지 못한다’고 두 번 길을 닫는다. 빠른 자와 강한 자와 용사가 제 목숨을 건지지 못하리라던 2:14-16의 선언이 예배 현장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2:14의 ‘도망’과 2:15의 ‘건지다’도 같은 어근이다.

2-4절은 피할 곳을 차례로 가정한다. 히브리어는 ‘만일’을 다섯 번 되풀이하고 그때마다 ‘거기에서’로 하나님의 응답을 시작한다. 스올과 하늘, 갈멜 산꼭대기와 바다 밑이 이어지고,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구석구석 뒤져 찾아내신다. 1:2에서 여호와의 소리에 마르리라 했던 갈멜 산꼭대기가 여기서는 숨을 곳으로 다시 나온다. 바다 밑에서는 하나님이 뱀을 명하여 그들을 물게 하신다. 이 뱀은 5:19에서 집 안의 벽에 손을 댄 사람을 무는 뱀과 같은 낱말이며, NET 해설은 이를 혼돈 세력을 상징하는 바다 괴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욥기 26:13과 이사야 27:1을 참조한다.1 마지막 가정은 원수 앞에서 포로로 끌려가는 역사의 상황이다. 거기서도 하나님은 칼을 명하신다. 3-4절과 9절의 ‘명령하다’가 같은 동사여서 뱀과 칼과 체질이 모두 같은 분의 명령으로 움직인다. 단락은 ‘내가 내 눈을 그들 위에 두되 악을 위해서이고 선을 위해서가 아니다’라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끝난다. 시편 139:7-10이 하늘과 스올과 바다 끝의 임재를 위로로 고백했다면, 아모스 9:2-4는 같은 공간들을 피할 수 없는 심판으로 바꾼다.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는 5:14-15의 부름을 외면한 백성 위에 하나님의 눈이 화를 위해 머문다.

5-6절은 심판을 선언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찬양의 언어로 밝힌다. 4:13, 5:8과 함께 창조주를 노래하는 이 찬양은 여호와의 이름 선포로 끝나며, 9:6의 마지막 구절은 5:8의 마지막 구절과 히브리어 철자 하나를 빼면 같다. 주 만군의 여호와가 땅을 만지시자 땅이 녹고 주민이 애통한다. 온 땅이 나일강처럼 솟았다 가라앉는 모습은 8:8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며, 8:8은 가난한 자를 삼키고 저울을 속이는 죄(8:4-6)에 대한 반응이었다. 그러므로 이 찬양도 사회적 불의에 대한 심판과 떨어져 있지 않다. 6절의 “궁전”(מַעֲלוֹתָו, 마알로타브)은 문자적으로 ‘그의 계단들’이다. NET 해설은 마소라 본문대로 읽으면 하늘 성전이나 보좌로 올라가는 계단일 수 있다고 설명하고, NET 번역은 본문을 고쳐 ‘그의 윗방들’로 옮기며, “궁창”으로 옮긴 낱말의 뜻도 이 문맥에서 불분명하다고 밝힌다.1 1절에서 땅의 성소가 무너졌다면 6절은 하늘에 거처를 지으신 분을 보여 준다. 사람이 세운 성소는 무너져도 하늘과 땅과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의 통치는 흔들리지 않는다.

7절은 두 수사 의문문으로 이스라엘이 의지하던 역사를 묻는다.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에서 ‘내게’는 이 비교가 하나님이 보시는 관계 안에서 이루어짐을 밝힌다. 구스는 이스라엘이 알던 세계의 먼 남쪽 끝이다. 하나님께 가장 가깝다고 여긴 백성을 하나님은 먼 땅의 백성과 같은 자리에 두신다. 둘째 질문은 출애굽을 2:10과 3:1에서와 같은 ‘올라오게 하다’로 말하면서, 블레셋을 갑돌에서, 아람을 기르에서 올라오게 하신 일과 나란히 둔다. ‘갑돌에서’(מִכַּפְתּוֹר, 믹카프토르)와 1절의 ‘기둥 머리’(הַכַּפְתּוֹר, 학카프토르)는 전치사와 관사를 빼면 같은 말이어서, 성소를 무너뜨리는 명령의 소리가 이방 민족의 기원지 이름으로 다시 들린다. NET 해설은 갑돌을 그레데 섬과 연결할 가능성을 언급한다.1 1:5는 아람 백성이 기르로 사로잡혀 가리라고 선언했다. 하나님이 올라오게 하신 곳으로 다시 돌려보내실 수 있다면 출애굽도 자동으로 작동하는 보호막이 될 수 없다. 이 말씀은 출애굽을 부인하지 않는다. 3:2처럼 선택은 책임을 더 무겁게 만들며, 출애굽의 은혜를 민족적 우월감이나 심판 면제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

8절은 그 결론을 끌어낸다. 주 여호와의 눈이 “범죄한 나라”, 곧 죄를 지은 왕국을 주목한다. 이 ‘왕국’은 7:13에서 아마샤가 벧엘을 “나라의 궁궐”이라 부를 때와 같은 말이어서, 왕실의 성소를 지키려 했던 왕국이 하나님의 눈 아래 놓인다. “멸하리라”는 2:9에서 이스라엘 앞에서 아모리 사람을 멸하셨다고 회고할 때의 동사다. 그러나 곧바로 제한이 따른다.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לֹא הַשְׁמֵיד אַשְׁמִיד, 로 하쉬메드 아쉬미드)는 같은 동사를 겹친 강조 구문에 부정어가 붙은 형태이며, 개역개정의 “온전히”가 이 강조를 옮긴 말이다. 범죄한 왕국과 야곱의 집이 이렇게 구별된다. 왕국은 멸망해도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9절은 그 구별을 체질 비유로 설명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국 중에서 체로 체질하듯 흔드신다. ‘흔들다’는 8:12에서 말씀을 찾아 헤매던 백성의 동작과 같은 동사여서, 말씀을 듣지 않던 백성이 이제 열방 가운데서 흔들린다. 개역개정은 절 끝을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로 옮기지만, ‘알갱이’(צְרוֹר, 체로르)는 사무엘하 17:13에서 돌멩이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낱말이다. NET 해설은 돌멩이로 읽으면 체가 돌과 부스러기를 붙잡고 곡식을 떨어뜨리는 그림이, 곡식 알갱이로 읽으면 체가 곡식을 붙잡고 쓰레기를 떨어뜨리는 그림이 된다고 설명한다.1 알갱이 독법은 참된 백성을 하나도 잃지 않으시는 보존을, 돌멩이 독법은 죄인이 체질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심판을 강조한다. 두 독법 모두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신다는 결론에 이르며, 8절의 야곱 보존과 10절의 죄인 심판이 그 결론을 감싼다.

10절은 심판의 대상을 밝힌다. 내 백성 중 모든 죄인, 곧 범죄한 왕국의 죄에 가담한 사람들이 칼에 죽는다. 그들의 특징은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이르지 아니하리라”는 말이다. ‘미치지 아니하며’는 ‘가까이 오게 하다’라는 동사로, 6:3에서 흉한 날을 멀리하면서 포악한 자리를 ‘가까워지게’ 하는 자들을 책망할 때와 같다. 재앙의 날을 멀리 밀어 두는 사람이 실제로는 폭력을 가까이 끌어온다. 그들이 오지 않으리라 장담한 바로 그 ‘화’를 하나님은 4절에서 그들 위에 두셨다. 야곱의 집에 미래가 있다는 약속은 이런 자신감을 보증하지 않는다.

11절에서 하나님의 행동은 회복을 향한다. “그 날에”는 8:9와 8:13에서 해가 대낮에 지고 젊은이들이 쓰러지는 심판의 날이었는데, 같은 표현이 이제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날을 연다. 하나님은 “다윗의 무너진 장막”(סֻכַּת דָּוִיד הַנֹּפֶלֶת, 숙카트 다비드 한노페레트)을 일으키신다. ‘장막’은 초막이나 임시 거처를 뜻하며, NET 해설은 이를 약해진 다윗 왕조로 이해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보거나 모음을 달리 읽어 요단 동편의 숙곳으로 보는 견해도 소개한다.1 왕궁이나 성전 대신 초막이라는 말이 쓰여, 다윗의 집이 무너져 가는 초막처럼 약해져 있음을 보여 준다. ‘무너진’과 ‘일으키다’는 아모스서 안에서 이미 맞물려 있다. 5:2의 애가는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져 일으킬 자가 없다고 탄식했고, 8:14도 거짓 맹세하는 자들이 엎드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고 했다. 일으킬 자가 없다는 애가에 하나님이 직접 대답하신다. 이어 하나님은 성벽의 틈을 막고 폐허를 일으켜 옛적과 같이 세우신다. 4:3에서 사마리아 여인들이 끌려 나가던 ‘성 무너진 데’가 같은 낱말이다. 세 동작에 붙은 대명 접미어는 서로 다르며, NET 해설은 여성 복수가 이스라엘과 유다 또는 성벽의 틈을, 남성 단수가 다윗을 가리킬 수 있다고 설명한다.1 접미어가 무엇을 가리키든 장막과 벽과 다윗의 집 전체를 하나님이 다시 세우신다.

12절은 그 회복의 목적을 밝힌다. 개역개정은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로 옮긴다. ‘기업으로 얻다’는 땅이나 재산을 차지하여 소유한다는 동사이고, 주어 ‘그들’은 밝혀져 있지 않다. UBS 핸드북은 이를 다윗 계열의 왕들로 볼 수도 있으나 이스라엘 백성 전체로 보는 편이 낫다고 설명하고, “에돔의 남은 자”(שְׁאֵרִית אֱדוֹם, 셰에리트 에돔)를 에돔 땅에 남은 부분까지 이스라엘의 통치가 다시 미치는 모습으로 풀며 이 결과가 다윗 왕국의 회복에서 나온다고 본다.2 칼로 형제를 쫓던 에돔(1:11-12)과, 하나님이 혹시 불쌍히 여기실지 모른다던 ‘요셉의 남은 자’(5:15)를 생각하면, 겨우 살아남을 처지였던 이스라엘의 회복이 형제 민족 에돔의 남은 자까지 다윗의 통치 아래로 이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אֲשֶׁר־נִקְרָא שְׁמִי עֲלֵיהֶם, 아셰르-니크라 셰미 알레헴)은 직역하면 ‘내 이름이 그들 위에 불린’이다. NET 해설은 이를 소유를 나타내는 관용어로 보고 사무엘하 12:28을 참조하며,1 UBS 핸드북은 정복된 나라들이 여호와께 속했다는 뜻으로 설명하면서 번역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것을 빼앗는 것처럼 보이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2 절은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끝난다.

히브리어 12절과 사도행전 15장의 인용은 표현이 다르다. 칠십인역 아모스 9:12는 ‘사람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찾게 하려고’(ὅπως ἐκζητήσωσιν οἱ κατάλοιποι τῶν ἀνθρώπων, 호포스 엑제테소신 호이 카탈로이포이 톤 안트로폰)라고 읽어, 히브리어의 ‘에돔’ 자리에 ‘사람들’이, ‘기업으로 얻다’ 자리에 ‘찾다’가 있다. 사도행전 15:17은 칠십인역과 가깝게 인용하면서 찾는 대상을 ‘주’로 밝힌다(ὅπως ἂν ἐκζητήσωσιν οἱ κατάλοιποι τῶν ἀνθρώπων τὸν κύριον, 호포스 안 엑제테소신 호이 카탈로이포이 톤 안트로폰 톤 퀴리온). 사도행전 15:16은 “그 날에” 대신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로 인용을 시작한다. 아모스의 히브리어는 회복되는 다윗의 통치가 열방에 미치는 모습을 말하고, 야고보는 그 약속을 이방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건과 연결한다. 두 본문을 가장 긴밀하게 잇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 위에 불린 만국이라는 표현으로, 히브리어 본문과 칠십인역과 사도행전에 모두 남아 있다.

13절은 “보라 날이 이를지라”로 시작한다. 이 표지는 4:2에서 사마리아 여인들이 끌려갈 날을, 8:11에서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의 날을 알렸는데, 이제 풍성함의 날을 연다. 개역개정의 “파종하는 자”(חוֹרֵשׁ, 호레쉬)는 히브리어로 밭 가는 사람이다. ‘밭 가는 자가 추수하는 자에게 다가서고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잇는다’는 그림은 추수할 것이 너무 많아 거두기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밭갈이가 시작되는 모습이다.1 ‘다가서다’는 10절에서 화가 ‘가까이 오지’ 않으리라던 동사의 다른 형태다. 죄인들은 화가 가까이 오지 않으리라 장담했지만, 회복의 날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다음 수확을 준비하는 농부다. 언약에 순종하는 백성에게 타작이 포도 딸 때까지 이어지리라는 레위기 26:5의 복을 아모스는 더 과감한 시적 언어로 그린다.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고 작은 산들은 녹는다. ‘녹다’는 5절에서 하나님이 땅을 만지시자 땅이 녹을 때의 어근이어서, 같은 동사가 심판의 공포에서 풍요의 그림으로 뒤집힌다. 요엘 3:18(BHS 4:18)도 같은 그림을 쓴다.

14절의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는 ‘돌이키다’와 소리가 비슷한 명사를 겹친 표현이다. 개역개정은 그 명사를 “사로잡힌 것”으로 옮겼고, NET 해설은 같은 표현을 ‘운명을 회복하다’라는 관용어로 옮길 수 있다고 하며 신명기 30:3을 참조한다.1 4:6-11에서 하나님은 다섯 번이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탄식하셨는데, 그 후렴의 동사가 여기의 ‘돌이키다’와 같다. 백성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같은 동사로 그들의 처지를 돌이키신다. 이어지는 세 쌍의 동사는 앞의 저주를 하나씩 뒤집는다. 백성은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고, 포도원을 가꾸어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을 만들어 그 열매를 먹는다. 5:11은 힘없는 자를 밟은 자들에게 다듬은 돌로 집을 지어도 거기 살지 못하고 포도원을 가꾸어도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고 선언했다. 9:14는 같은 목적어를 쓰면서 그 부정어를 거두어 낸다. 거주와 노동과 식탁이 함께 회복된다.

15절은 하나님 자신의 심으심을 말한다. 14절에서 백성이 포도원을 ‘가꾸는’ 동작은 원래 포도나무를 심는 동작이며, 15절의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와 같은 동사다. 백성이 포도나무를 심듯 하나님은 백성을 땅에 심으신다. 7:11, 17은 이스라엘이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리라고 선언했는데, 9:15는 같은 ‘그 땅에서’라는 표현으로 그들이 다시 뽑히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5:2에서 자기 땅에 던져져 일으킬 자가 없던 처녀 이스라엘이 이제 그 땅에 심긴다. 책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로 끝난다. 4:12에서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는 심판의 소환이던 ‘네 하나님’이 땅을 주시고 다시 뽑히지 않게 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NET 해설은 5절의 “주 만군의 여호와”에서 군사적 함의가 있는 호칭이 책의 끝에서 빠지고 평화와 풍요로 마무리된다는 점에 주목한다.1

성경신학적 통찰

아모스 9장은 언약의 저주와 회복이 한 장 안에서 만나는 자리다. 1-10절은 이스라엘 왕국이 받을 심판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선언하고, 11-15절은 같은 하나님이 다윗의 집과 백성과 땅을 다시 세우시는 미래를 약속한다. 구약 전체에서 하나님은 언약을 어긴 백성을 징계하시면서도 언약 자체를 폐기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나타나며, 아모스 9장은 이 흐름을 다윗 언약, 레위기와 신명기의 복과 저주, 예언서의 메시아 기대, 열방에 대한 소망과 연결한다.

사무엘하 7:10-16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 집, 곧 왕조를 세우시겠다고 하시며 백성을 한 곳에 심어 다시 옮겨 다니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7:10). 후손이 죄를 지으면 징계하시되 인자를 거두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7:14-15). 아모스 9:15의 ‘심다’는 사무엘하 7:10과 같은 동사이며, 9:11-15는 왕조의 회복과 백성의 안정된 거주를 묶은 다윗 언약의 언어를 이어 간다. 이 약속을 들은 청중은 다윗의 집에서 갈라져 나온 북왕국이었다(왕상 12:16-20). 범죄한 왕국의 멸망과 다윗 장막의 회복이 차례로 선포된 것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여로보암의 왕실이나 벧엘의 성소가 보장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이 그 미래를 붙든다는 뜻이다. 같은 시대 북왕국의 호세아도 이스라엘이 마지막 날에 돌아와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으리라고 말한다(호 3:5).

레위기 26장은 순종하는 백성에게 타작이 포도 딸 때까지, 포도 따는 일이 파종할 때까지 이어지리라고 약속하고(26:5), 불순종하는 백성은 여러 민족 가운데 흩으시고 칼을 빼어 그 뒤를 따르게 하겠다고 경고한다(26:33). 아모스 9:13의 맞닿는 농사철과 9:4, 9의 포로지까지 따라가는 칼과 만국 중의 체질은 이 언약의 복과 저주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레위기 26:44-45는 원수의 땅에 있을 때에도 백성을 아주 멸하지 않고 언약을 기억하시겠다고 약속하며, 야곱의 집을 온전히 멸하지 않겠다는 9:8과 맞닿는다. 집을 지어도 살지 못하고 포도원을 심어도 마시지 못한다는 신명기 28:30, 39의 저주는 아모스 5:11에서 착취한 자들에게 선언되었고, 9:14에서 뒤집힌다. 아모스의 회복 약속은 모세 언약이 처음부터 내다본 결말을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이다.

신명기 30:1-10은 복과 저주가 모두 임한 뒤 흩어진 백성이 돌아오면 하나님이 그들의 포로 상태를 돌이키고 다시 모으시며(30:3),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리라고 말한다(30:6). 30:3은 9:14와 같은 관용 표현을 쓴다. 회복은 땅으로 돌아가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을 포함한다. 재앙이 이르지 않으리라 장담하며 회개 없는 안전을 주장한 9:10의 죄인들과 달리, 회복을 기다리는 백성은 하나님께 돌아오고 그 말씀에 순종한다.

이사야 11장은 다윗 왕조의 회복을 메시아 기대로 발전시킨다.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싹(11:1)은 무너진 초막처럼 약해진 다윗 왕조에서 하나님이 새 시작을 일으키신다는 그림이며, 그 통치자는 여호와의 영으로 가난한 자를 공의로 재판한다(11:2-4). 가난한 자를 팔고 짓밟는 일을 가장 날카롭게 고발한 아모스(2:6-7; 8:4-6)의 회복 약속이 지향하는 내용을 이 통치가 채운다. 이사야 11:10-14는 열방이 이새의 뿌리에게로 돌아오고, 흩어진 이스라엘과 유다가 모이며, 에브라임과 유다의 적대가 사라지고, 그들이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리라고 말한다. 다윗 계열 왕의 회복, 남북의 재통합, 에돔을 포함한 이웃 민족, 열방의 귀환이라는 아모스 9:11-12의 요소가 이사야 11장에서 한데 모인다.

백성을 땅에 심으신다는 그림은 다른 예언서에서도 회복의 핵심이다. 호세아 2:23(BHS 2:25)에서 하나님은 백성을 이 땅에 심고 내 백성이 아니던 자를 내 백성이라 하시며, 예레미야 24:6은 포로 된 유다를 심고 뽑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사람의 힘으로 붙든 땅은 다시 빼앗길 수 있지만 하나님이 심으신 백성은 뽑히지 않는다.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린다는 요엘 3:18(BHS 4:18), 백성이 지은 집에 살고 심은 것을 먹으리라는 이사야 65:21-22는 아모스 9:13-14와 같은 그림을 쓰며, 이사야는 그 약속을 새 하늘과 새 땅 안에 둔다(65:17). 구약의 회복 소망은 영혼만의 구원으로 줄어들지 않고 땅과 노동과 식탁과 공동체의 회복을 바라본다.

아모스서는 열국 심판으로 시작했고(1:3-2:3), 9:7은 블레셋과 아람의 이주 역사도 하나님이 이끄셨다고 말하며, 9:12는 하나님의 이름이 불리는 민족들을 바라본다. 아브라함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는 창세기 12:3, 애굽을 ‘내 백성’, 앗수르를 ‘내 손으로 지은 것’이라 부르는 이사야 19:24-25와 같은 방향이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다른 민족을 배제하는 특권으로 주어지지 않았고,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일하시는 통로였다. 남은 자 주제도 넓어진다. 사자 입에서 건진 양의 조각(3:12), 천 명 중 백 명(5:3), 요셉의 남은 자(5:15)는 우선 심판의 크기를 보여 주었지만, 9:8-9에서 남은 자는 야곱의 집을 온전히 멸하지 않으시는 증거가 되고 9:12에서는 에돔의 남은 자까지 하나님의 이름 아래 들어오는 소망이 된다. 바울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이 주제를 잇는다(롬 11:5).

아모스 이후 이 약속은 곧바로 성취되지 않았다. 북왕국은 앗수르에게, 유다는 바벨론에게 무너졌고, 포로에서 돌아온 공동체는 성전을 다시 지었지만 다윗 계열의 왕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다윗의 장막을 누가 어떻게 일으킬 것인가 하는 질문은 구약의 끝에서 열린 채로 남는다.

기독론적 해석

아모스 9장의 회복 약속은 이스라엘 안에서 스스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유다도 율법을 멸시한 죄로 심판을 선고받았고(2:4-5), 다윗의 집에 속한 왕들도 공의를 잃어 예루살렘이 무너지면서 다윗의 장막은 더 깊이 쓰러졌다. 11절의 회복 동사는 모두 1인칭이다. 하나님이 일으키시고 틈을 막으시며 세우신다. 신약은 이 한계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일으키신 다윗의 자손으로 증언한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주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고 그가 야곱의 집을 영원히 다스리리라고 말한다(눅 1:31-33). 9:8의 ‘야곱의 집’과 9:11의 ‘다윗’이 한 인물 안에서 만난다. 사가랴도 하나님이 그 종 다윗의 집에 구원의 뿔을 일으키셨다고 찬양한다(1:69). 하나님이 다윗의 집에 무엇인가를 일으키신다는 고백은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겠다는 약속과 같은 방향에 있으며,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출발점에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윗의 왕위에 오르시는 길은 9:1-4의 심판을 지나간다. 아모스의 환상에서 하나님은 성소에 모인 죄인들에게 피할 길을 남기지 않으셨다. 복음서의 예수는 그 심판의 자리에서 도망하지 않으시고,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기시며 칼로 저항하지 않으셨다(마 26:39, 52-54). 십자가에서 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막 15:34).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고(고후 5:21),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아 우리를 속량하셨다(갈 3:13). 기독론적으로 읽으면 9:4에서 화를 위해 죄인들 위에 머물던 하나님의 눈은 십자가에서 죄인을 대신하신 그리스도 위에 머물며, 그 결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정죄함이 없다(롬 8:1).

9:1에서 무너진 것은 성소였다. 예배의 자리가 죄를 덮는 방패가 되자 하나님은 그 기둥과 문지방을 치셨다. 예수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고, 요한은 그것이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킨 말씀이라고 설명한다(요 2:19-21). 죄 때문에 무너진 예배의 자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새로 세워지며,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된다.

베드로는 다윗의 무덤이 아직 남아 있음을 상기시키며, 하나님이 다윗의 자손 중 한 사람을 그 왕위에 앉게 하리라 맹세하신 약속을 다윗이 미리 보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했다고 선포한다(행 2:29-31). 하나님은 이 예수를 살리시고 오른편에 높여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2:32-36). 바울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일을 다윗에게 약속된 거룩하고 미쁜 은사와 연결한다(13:34).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신다는 약속은 다윗 자손의 부활과 즉위에서 결정적으로 성취되기 시작한다.

세례 요한은 오실 이가 키를 들고 알곡은 곳간에 모으고 쭉정이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말했다(마 3:12). 아모스에서 백성을 체질하신 하나님처럼 그리스도는 의인과 악인을 가르시는 심판자로 오신다. 동시에 예수는 사탄이 제자들을 밀 까부르듯 하려 하였으나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고 말씀하신다(눅 22:31-32).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했으나 돌이켜 형제들을 굳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체질하시는 심판자이시면서 체질 가운데 자기 백성을 붙드시는 중보자이시다.

사도행전 15장은 부활하신 다윗의 자손 아래 누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지를 묻는다.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는 주장 앞에서(15:1, 5), 베드로는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사 차별하지 않으셨으며 유대인도 이방인과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고백한다(15:8-11). 야고보는 하나님이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셨다고 하며 아모스 9:11-12로 이를 확인한다(15:14-17). 구약에서 주로 이스라엘을 가리키던 ‘백성’이 이방인 가운데서 부름받은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야고보의 논리에서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우시는 일과 이방인이 주께 돌아오는 일은 같은 사건의 두 면이다. 사도와 장로들은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으면서,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요긴한 것 외에는 짐을 지우지 않기로 한다(15:19-20, 28).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아모스의 약속이 이방인 신자들의 공동체적 자리를 설명한다.

이방인의 참여는 이스라엘을 지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수는 야곱의 집을 다스리시고, 야고보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이방인의 참여를 설명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으며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하고(롬 11:1-5), 이방인 신자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진 가지에 비유하며 뿌리가 가지를 보전한다고 경고한다(11:17-18). 백성을 땅에 심으신다는 9:15처럼 바울도 심고 접붙이는 언어로 하나님 백성의 연속성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새 사람으로 지으시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함께 지어 가신다(엡 2:11-22). 아모스의 회복은 성읍과 농사, 음식과 안전한 거주로 그려지며, 신약은 이를 영적 비유로만 다루지 않는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기를 고대하고(롬 8:19-21), 그리스도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다(고전 15:20). 생명나무가 열매를 맺고 다시 저주가 없는 새 예루살렘(계 21:3; 22:2-3)에서 아모스 9:13-15의 소망은 완성된다.

현대적 적용

9:1에서 심판은 성소에서 시작된다. 정의를 버린 채 드리는 예배가 계속되자 하나님은 그 기둥을 치셨다. 오늘의 교회도 오래된 역사와 좋은 평판, 활발한 예배를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지 않을 보장으로 삼을 수 없다. 교회 안에서 재정 문제나 권력 남용, 성적 비행이 제기되면 기관의 명예를 먼저 내세우기보다 어떤 일이 있었고 누가 손해를 입었는지 확인하고, 피해자가 계속 같은 환경에 노출되지 않게 해야 한다. 10절의 죄인들은 화가 자기들에게 미치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괜찮았으니 앞으로도 괜찮으리라는 태도나 신앙의 연수와 봉사 경력을 들어 회개를 미루는 태도는 그 말과 닮았다.

2-4절에서 하나님은 스올과 하늘, 산꼭대기와 바다 밑까지 살피신다. 장부 조작이나 익명의 비방, 가족 안에서만 감추어진 폭력도 하나님의 눈을 피하지 못한다. 같은 말씀은 숨겨진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다르게 들린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착취당하고 무시당한 사람의 처지도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 교회는 그 고백을 따라 눈에 잘 띄지 않고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이웃을 찾아간다.

하나님이 다른 민족의 역사도 이끄신다는 7절은 한 민족의 역사에서 섭리를 고백하는 일이 다른 민족을 낮추거나 자기 민족의 잘못을 덮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가르친다. 사도행전 15장처럼 교회는 복음에 꼭 필요한 요구와 익숙한 집단의 관습을 구별하여, 같은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불필요한 문턱을 덧붙이지 않는다. 12절에서 오랜 원한의 형제 민족 에돔의 남은 자까지 하나님의 이름 아래 들어온다는 약속은 교회가 원한을 대하는 방식도 바꾼다. 불의는 불의라 부르고 책임을 묻되,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화해의 길이 열릴 때 막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셨다는 고백은 원한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않을 근거가 된다.

죄가 드러난 공동체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체념과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장담을 모두 경계한다. 8절은 범죄한 왕국의 멸망과 야곱의 집의 보존을 함께 말하고, 9절의 체질은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을 너무 쉽게 정죄하지도 죄를 너무 쉽게 덮지도 않는다. 잘못한 사람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묻고, 회복을 바라는 일을 과거의 불의를 지우는 일로 바꾸지 않는다. 하나님이 무너진 장막의 틈을 막으신다는 약속은 교회가 분열과 상처로 생긴 틈을 방치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다. 무엇이 무너졌는지 정직하게 이름 붙이고, 상처를 준 쪽은 구체적으로 사과하며, 회복에 필요한 시간을 서두르지 않는다.

14절의 백성은 자신이 지은 성읍에 살고 가꾼 포도원의 포도주를 마신다. 5:11의 저주가 힘없는 자를 밟은 자들의 착취에서 나왔다면, 회복된 삶은 정당한 노동과 정당한 몫이 이어진 삶이다. 무너진 이웃을 도울 때 한 번의 지원으로 끝내지 않고 그가 다시 자기 일을 하고 그 결실을 누리도록 돕는 일, 자신이 고용한 사람에게 정당한 대가와 쉼을 보장하는 일이 이 소망에 어울린다. 다른 사람의 수고를 헐값에 사는 구조는 그 회복과 반대 방향에 있다. 9:13-15는 공동체 전체의 회복이며 개인의 부를 늘리는 공식으로 바꿀 수 없다. 일으킬 자가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5:2) 하나님이 직접 일으키신다는 9:11의 약속을 붙드는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으며, 자신이 감당할 책임과 화해의 걸음을 묻는다. 하나님의 이름이 열방 위에 불리는 미래(9:12; 행 15:17)를 믿는 교회는 우리 곁에 온 다른 언어의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고, 복음을 듣지 못한 민족을 향해 그 이름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