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아모스 6장은 5:18과 같은 “화 있을진저”(הוֹי, 호이)로 시작한다.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던 사람들에게 향했던 탄식과 심판이 이제 시온과 사마리아의 지도자들에게 향한다. “교만한 자”(הַשַּׁאֲנַנִּים, 핫샤아난님)는 위험을 느끼지 않고 안일하게 지내는 사람들이다. “마음이 든든한 자”도 무엇인가에 기대어 안심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두 표현은 이사야 32:9-18에서도 짝을 이룬다.2 1절은 종교적 중심과 견고한 수도에 안주하는 태도를 고발한다.1 4:1이 이미 사마리아 산의 가난한 자에 대한 학대를 고발했듯, 이들의 안락 뒤에는 백성의 억압이 있다.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은 으뜸 민족의 이름난 유력자를 가리킨다. 이스라엘을 “민족들의 첫째”(רֵאשִׁית הַגּוֹיִם, 레쉬트 학고임)로 여기는 자의식이다.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는 문자적으로 ‘그들에게 온다’이며 누구에게 왜 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전통적으로 백성이 도움을 구하려고 지도자들을 거듭 찾는 장면으로 읽는다.2 이 읽기에서 지도자들은 도움을 구하는 백성의 형편을 외면하고 자기 안락에 머문다.
2절은 갈레와 하맛과 가드를 둘러보게 하며 이스라엘과 영토를 비교한다. 개역개정처럼 예언자의 질문으로 읽으면 이스라엘이 이웃 왕국보다 낫다는 생각에 대한 도전이다. NET는 지도자들이 백성에게 이웃 나라가 이스라엘보다 나으냐고 물으며 자기 우월함을 자랑하는 말로 읽는다. NET에 따르면 예언자가 지도자들에게 묻는 독법은 절 끝의 본문 수정을 필요로 한다.3 화자와 비교 대상을 달리 정하는 두 읽기는 모두 ‘민족들의 첫째’라는 자의식을 다룬다.
3절에서 지도자들은 재앙의 날을 생각 밖으로 밀어내면서 “포악한 자리”(שֶׁבֶת חָמָס, 셰베트 하마스)를 가까이 오게 한다. ‘자리’의 난점 때문에 본문 수정도 제안되었지만 이를 지지하는 고대 역본은 없다. UBS는 통치자의 보좌, 곧 ‘폭력의 통치’로 읽는 해석을 자연스럽게 본다.4 흉한 날을 멀리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자기 폭력으로 재앙을 앞당긴다. 여호와의 날을 편의대로 기대하거나 미루는 태도는 5:18-20의 경고와 이어진다.
4절의 “상아 상”(מִטּוֹת שֵׁן, 밋토트 셴)은 상아로 꾸민 침상이다. 3:15의 “상아 궁”과 열왕기상 22:39의 아합의 상아궁처럼 왕실의 부를 드러낸다. 지도자들은 몸을 늘어뜨리고 누워 양 떼의 어린 양과 우리에서 기른 송아지를 골라 먹는다. “우리”는 짐승을 매어 기르는 곳이며 가장 좋은 고기를 얻는 식탁을 나타낸다.5 “기지개 켜며”라는 표현은 7절에서 잔치의 끝을 말할 때 다시 나온다.
5절의 “노래를 지절거리며”(הַפֹּרְטִים, 합포르팀)는 이곳에만 나오는 동사여서 정확한 뜻이 불확실하나 비파에 맞춘 노래나 연주를 가리킨다.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도 문맥상 난점 때문에 일부 학자가 조금 수정하여 ‘다윗처럼 노래를 짓는다’로 읽는다.6 역대상 23:5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찬송하려고 악기를 만들었다. 이 연회에서는 다윗의 이름을 빌려 자기 즐거움을 위한 음악을 만든다.
6절에서 그들은 잔보다 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신다.7 “귀한 기름”(וְרֵאשִׁית שְׁמָנִים, 베레쉬트 셰마님)은 ‘기름들의 첫째’다. ‘첫째’는 1절의 으뜸 민족과 같은 낱말이다. 으뜸을 자처하는 이들이 자기 몸에도 가장 좋은 것을 쓴다.
그러나 “요셉의 환난”에는 근심하지 않는다. “근심하지”(נֶחְלוּ, 네흘루)는 병들거나 아프다는 뜻과 연결되어 남의 파멸 때문에 몸이 아플 만큼 괴로워하는 마음을 그릴 수 있다. 요셉은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며 5:6, 15에서도 백성의 이름으로 쓰인다. Jan de Waard와 William A. Smalley는 ‘부서짐, 파멸’을 뜻하는 환난을 앞으로 닥칠 사건으로 보고 아픔의 이미지를 살려 번역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7 자기 몸에는 좋은 것을 쓰는 지도자들이 가난한 자의 고통 속에 이미 시작된 부서짐과 나라 전체에 닥칠 파멸을 외면한다.
7절에서 이들은 포로 행렬의 맨 앞에 선다. “앞서”(בְּרֹאשׁ, 베로쉬)는 행렬의 머리를 뜻하여 지위나 품질의 으뜸을 뜻한 앞의 ‘첫째’와 의미가 같지는 않다. 그러나 비슷한 소리는 으뜸 민족을 자처하며 첫째가는 기름을 바른 사람들이 이제 포로의 첫째가 되는 역전을 만든다. “떠드는 소리”(מִרְזַח, 미르자흐)는 정확한 뜻이 불분명하지만 문맥상 잔치로 읽힌다. 4절에서 몸을 늘어뜨렸던 이들의 잔치가 여기서 끝난다.8
8절에서 여호와는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다. 4:2의 거룩함, 8:7의 야곱의 영광을 두고 하신 맹세와 이어지는 엄숙한 심판이다. “야곱의 영광”(גְּאוֹן יַעֲקֹב, 게온 야아코브)은 궁궐들과 병행되어 이스라엘의 오만과 그 부를 가리킨다.9 3:10의 궁궐에도 6:3과 같은 포학이 쌓여 있었다. 하나님은 그 성읍과 가득한 것을 넘기신다. ‘원수에게’는 개역개정이 보충한 대상이며 본문에는 없다. “넘기리라”는 1:6, 9에서 가사와 두로가 사로잡은 백성을 넘겼다는 고발에 쓰인 동사다. 이방의 죄를 심판한 말이 이스라엘의 운명에 적용된다.
9-10절에서는 한 집에 남은 열 사람마저 죽는다. 백 명 가운데 열 명이 남는다는 5:3보다 철저한 파멸이다. “죽은 사람의 친척”은 ‘그의 삼촌’이라는 말이며 가까운 친족이 시신을 거둔다. “그 시체를 불사를 자”(וּמְסָרְפוֹ, 우메사레포)는 이곳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화장하는 이, 향료를 태우거나 장례를 치르는 이, 일반 친족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스라엘에서 화장은 보통의 관습이 아니었으므로 장례를 위해 시신을 수습하는 사람으로도 읽는다.1011 집에 더 남은 이가 없다는 대답 뒤에 “잠잠하라”고 한다. 8:3의 시체 장면에도 같은 외침이 있다. 여호와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한다는 말이 대화인지 예언자의 해설인지, 그 동기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나님의 주목을 끌어 재앙을 다시 부를까 두려워한다는 해석이 대표적이다.10 연회의 노래는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는 침묵으로 바뀐다.
11절에서 집이 무너지는 이유는 여호와의 명령이다. “갈라지고”와 “터지리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명사는 부서진 조각과 갈라진 틈을 뜻한다. 큰 집과 작은 집 모두 조각나고 갈라져 부유한 이도 평범한 이도 피하지 못한다. 3:15의 상아궁 파괴가 다시 울리며 4절의 상아 침상을 둔 집도 무너진다.
12절은 말이 바위 위를 달리며 소가 그곳에서 밭을 갈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개역개정은 ‘거기서’를 보충하여 소도 바위에서 밭을 가는 것으로 읽는다. BHS의 בַּבְּקָרִים(밥베카림)은 ‘소들로’라는 한 낱말이어서 단독으로 읽으면 소로 밭을 가느냐는 질문에 긍정할 수도 있다. 많은 학자는 마지막 두 자음을 ‘바다’로 떼어 같은 자음을 ‘소로 바다를’로 재분절한다.12 NET도 이 제안을 따른다.13 이는 BHS의 모음점이 붙은 읽기와 구별되는 제안이다. 두 독법 모두 정의를 독으로 바꾼다는 고발로 이어진다. “쓸개”(לְרֹאשׁ, 레로쉬)는 쓴맛뿐 아니라 사람을 해치는 독성을 가리킨다.12 ‘독’과 7절의 ‘머리’는 철자가 같고 뜻은 다르다. “쓴 쑥”(לְלַעֲנָה, 렐라아나)은 5:7에서도 정의를 왜곡한 결과다. 사람을 살릴 정의와 공의를 독과 쓴 쑥으로 바꾸는 행동은 세상의 이치를 거스른다.
13절의 “허무한 것”(לְלֹא דָבָר, 렐로 다바르)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면서 로드발 성읍과 소리가 같다. “뿔들”(קַרְנָיִם, 카르나임)은 힘의 상징이며 가르나임 성읍의 이름이기도 하다.14 개역개정은 허무함과 힘을, NET는 지명을 살려 같은 말놀이의 다른 면을 드러낸다. 자랑하던 영토가 예언자의 입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우리의 힘으로” 얻었다는 자랑은 신명기 8:17이 경고한 망각을 되풀이한다.
14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칠 한 나라를 일으키신다. 그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민족들의 첫째’가 이제 다른 한 민족에게 학대받는다. ‘이스라엘 집’이라는 같은 표현이 1절과 14절을 감싼다. 지도자에게 찾아오던 백성이 압제받는 공동체가 된다. 하맛 어귀는 북쪽의 산맥 사이 길목으로, 아라바 시내는 사해 부근으로 추정되며 왕국의 양 끝을 나타낸다.15 열왕기하 14:25에서 하맛 어귀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회복한 영토가 이제 압제의 무대가 된다. 8, 14절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는 군사적 승리를 자랑하는 이들을 심판하실 모든 군대의 주인이시다.
성경신학적 통찰
신명기 8:11-20은 좋은 집과 늘어나는 가축, 은금 때문에 애굽과 광야에서 돌보신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경고한다.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얻었다고 여길 때 재물 얻을 능력과 언약을 주신 분을 기억해야 한다. 아모스 6:13의 “우리의 힘으로”라는 군사적 자랑은 이 망각이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의 경고가 풍요에 안주한 지도자들을 향한 심판이 된다.
열왕기하 14:23-27은 아모스 시대의 여로보암이 영토를 회복했지만 여호와 앞에서 악했다고 평가한다. 회복의 이유는 왕의 의로움이 아니라 도울 이 없이 고난받던 백성을 보신 하나님의 긍휼이었다. 아모스 6:14는 남쪽 지점의 명칭은 다르지만 그 확장된 영역을 다시 압제의 무대로 선언한다. 백성의 고난을 보신 하나님이 그 고난을 외면한 지도자들을 심판하신다. 구원의 유익을 누린 나라에도 불의의 책임을 물으신다.
이사야 5:7-13도 정의 대신 포학과 부르짖음이 있는 나라를 고발한다. 집과 땅을 늘리고 밤낮 술을 마시는 이들은 음악과 포도주가 있는 잔치에서도 여호와의 일에 관심이 없다. 이사야가 선언한 포로와 굶주림은 아모스 6:7의 결말과 같다. 두 예언자는 풍요에 가려진 이웃의 부르짖음을 듣게 하고 그 고통을 외면한 이들에게 심판을 선언한다.
이사야 32:9-18은 아모스 6:1과 같은 안일함과 안전감의 표현으로 시작한다.2 거짓 평온을 깨뜨린 뒤 영을 부어 광야를 아름다운 밭으로 바꾸고 정의와 공의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한다. 공의의 열매가 화평이며 그 결과가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다. 아모스 6:12의 지도자들은 바로 그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었다. 평안 자체가 아니라 공의를 버린 안전감이 문제다.
예레미야 22:13-17은 품삯을 주지 않고 큰 궁전을 세우는 여호야김을 책망한다. 그의 아버지 요시야도 먹고 마셨지만 정의를 행하고 가난한 이의 송사를 변호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일이다. 아모스의 지도자들에게도 백성이 도움을 구하러 오지만 그 집과 식탁은 백성의 환난과 단절되어 있다. 지도자는 자신의 안락을 위해 타인의 몫을 빼앗지 않고 정의를 구하는 이를 보호해야 한다.
아모스 4:2, 6:8, 8:7의 맹세는 안락과 자랑에 취한 지배층을 겨냥한다. 4:1은 가난한 이를 학대하며 술을 찾는 사마리아를, 8:4-6은 가난한 사람을 돈과 신 한 켤레에 사들이는 상인을 고발한다. 5:18은 여호와의 날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기대하는 이들을, 6:3은 그날을 멀리 미루는 이들을 경고한다. 8:10의 노래가 애곡이 되는 심판은 6장의 연회도 끝낸다. 그중에도 5:14-15는 선을 구하고 악을 미워하며 성문에 정의를 세우면 하나님이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며 회개의 길을 연다.
9:11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신다. 6:14에서 심판할 민족을 일으키신 것과 같은 동사다. 지도자들이 다윗의 이름으로 자기 즐거움을 구할 때 하나님은 그 집을 다시 세우신다. 9:14에서는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고 자기 포도주와 과일을 먹는다. 소수가 대접으로 마시고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던 연회에 이어 백성이 자기 수고의 열매를 누리는 회복이 약속된다.
사도행전 15:16-17에서 야고보는 아모스 9:11-12를 인용하여 다윗의 장막 회복과 이방인이 주를 찾는 일을 연결한다. 백성의 파멸을 막지 못한 지도자들에 이어 하나님이 친히 다윗의 나라를 세우신다. 구약이 약속하는 왕에게는 복 주신 분에 대한 기억과 공의의 열매, 가난한 자를 변호하는 통치가 요구된다. 신약은 이 왕을 예수 그리스도로 증언한다.
기독론적 해석
아모스 6장의 지도자들은 시온과 사마리아, 넓어진 영토와 다윗의 이름을 자랑했지만 백성의 파멸을 아파하지 않았다. 이 실패는 백성의 고통을 짊어지고 다스릴 왕을 기다리게 한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왕으로 증언한다.
누가복음 6:20-26에서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에게 복을 선언하신 뒤, 부요한 자, 지금 배부른 자, 지금 웃는 자에게 화를 선언하신다. 이 화 선언은 아모스 6:1의 ‘화 있을진저’와 같은 예언자의 형식을 따른다. 부요한 자는 이미 위로를 받았고, 지금 배부른 자는 주릴 것이며, 지금 웃는 자는 애통하며 울 것이다. 아모스가 연회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고 선언했듯이, 예수께서도 지금의 웃음이 애통으로 바뀌는 역전을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부유함이나 웃음 자체를 정죄하지 않는다. 같은 설교에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구하는 사람에게 주며,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명하신다. 위로를 이미 받았다는 말은 자기 위로에 갇혀 이웃의 고통을 보지 못하는 상태를 드러낸다. 아모스의 지도자들이 상아 침상과 대접의 포도주에서 위로를 얻는 동안 요셉의 파멸을 보지 못했듯이, 예수께서 화를 선언하신 사람들도 지금의 배부름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역전을 보지 못한다.
누가복음 12:13-21에서 예수는 유산 분배 문제를 들고 온 사람에게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시며,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가르치신다. 이어서 소출이 풍성한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부자는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고, 자기 영혼에게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한다. 이 독백은 아모스 6장의 지도자들이 가졌던 안일함과 안전감을 그대로 닮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밤에 그의 영혼을 도로 찾으신다. 아모스 6:3의 지도자들이 흉한 날을 멀리 밀어냈듯이 비유의 부자도 여러 해를 내다보았지만, 그 시간은 그의 손에 있지 않았다. 예수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사람이 이와 같다고 결론지으신다. 이어지는 12:31-34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시며,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하늘에 다함이 없는 보물을 두라고 명하신다. 예수 안에서 안전은 쌓아 둔 재물에서 오지 않는다. 자기 백성에게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께서 그 안전을 주신다.
누가복음 12:35-48은 아모스 6:3의 착각을 다른 각도에서 비춘다. 예수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하시며,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말씀하신다. 이어지는 비유에서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며 남녀 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고 취하는 종은, 생각하지 않은 날에 주인을 맞는다. 맡은 사람들을 학대하면서 먹고 마시는 이 종은 흉한 날을 멀리 밀어낸 아모스 6장의 지도자들과 놀랍도록 닮았다. 반면 주인이 맡긴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종은 복을 받는다. 예수는 많이 받은 사람에게 많이 요구하신다는 말로 비유를 맺으신다. 으뜸의 자리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누리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포로가 되는 아모스의 논리가 여기서도 이어진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는 그날을 두려움 속에 미루지 않고, 맡겨진 사람들을 먹이고 돌보는 신실함으로 준비한다.
누가복음 16:19-31의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긴다. 그 대문 앞에는 헌데투성이의 나사로가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려 한다. 부자의 식탁과 나사로 사이에는 대문 하나의 거리밖에 없지만, 부자는 그 거리를 건너지 않는다. 아모스 6장의 지도자들이 요셉의 파멸을 아파하지 않았듯이, 부자도 문 앞의 고통에 아파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이 단절을 죽음 이후의 역전으로 드러내신다. 나사로는 위로를 받고 부자는 고통을 받으며, 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구렁텅이가 놓인다. 살아 있을 때 부자가 건너지 않은 대문의 거리가 죽은 뒤에는 누구도 건널 수 없는 구렁이 된 것이다. 부자가 형제들에게 경고해 달라고 청하자,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서 들으라고 답한다. 아모스도 그 선지자들 가운데 하나다. 더 놀라운 징조를 기다리는 동안 이미 주어진 말씀과 이웃의 필요를 외면할 수 없다. 비유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사람이 있어도 권함을 받지 않으리라는 말로 끝나고, 이 말씀을 하신 예수께서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아모스가 고발한 지도자들과 가장 선명하게 대조되는 장면은 누가복음 19:41-44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오셔서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 성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여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사면으로 에워싸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을 날이 오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의 말씀도 아모스처럼 성읍의 파멸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 선언은 눈물과 함께 나온다. 사마리아의 지도자들은 요셉의 파멸 앞에서 아파하지 않았지만, 예수는 다가오는 예루살렘의 파멸 앞에서 우신다. 예수는 심판을 선언하시면서도 그 백성의 고통을 아파하신다. 히브리서 4:15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제사장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이 마음과 이어진다. 그리스도는 백성의 파멸을 근심하신 참된 머리이시다.
마가복음 10:42-45에서 예수는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백성을 임의로 주관하고 고관들이 권세를 부리는 모습을 말씀하신 뒤, 제자들 가운데서는 그러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아모스 6장의 ‘첫째’ 주제와 맞닿는다. 아모스 6장에서 민족들의 첫째를 자처하며 첫째가는 기름을 바르던 지도자들은 포로의 첫째가 된다. 예수께서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길을 가르치신다. 그 근거는 인자 자신이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섬기려 하며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려고 오셨다는 데 있다. 그분을 따르는 지도자는 공동체의 상처와 거리를 둔 채 자신에게 돌아올 몫만 키울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은 아모스 6:13의 자랑과도 반대 방향이다. 지도자들은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했다고 말했다. 빌립보서 2:6-8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증언한다. 고린도후서 8:9는 부요하신 이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것이 그의 가난함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아모스의 지도자들이 받은 심판과 그리스도의 고난은 죄의 책임에서 구별된다. 아모스 6:8에서 하나님은 성읍과 거기 가득한 것을 넘기시겠다고 하셨고, 지도자들은 자기 죄 때문에 포로 행렬의 맨 앞에서 끌려갈 것이었다. 히브리서 13:12는 예수께서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한다. 아모스의 지도자들이 자기 죄 때문에 심판의 선두에 섰다면,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심판의 자리에 먼저 서셨다. 지도자들의 ‘첫째’는 특권을 먼저 누리는 자리였고, 그리스도께서 먼저 서신 자리는 고난을 먼저 짊어지는 자리였다.
예수의 부활은 아모스서 끝의 회복 약속을 이룬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이방인 가운데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신 일을 아모스 9:11-12의 약속과 연결한다. 다윗처럼 악기를 만든다고 자랑하던 지도자들은 다윗의 집을 지키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그분을 중심으로 무너진 장막을 다시 세우신다. 그 장막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백성으로 모인다. 6:14에서는 이스라엘을 치는 민족이 일어났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여러 민족이 주를 찾는 백성으로 모여든다. 지도자들의 실패로 무너진 집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세우신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복음은 풍족한 성도가 다른 사람을 돌보는 삶의 근거가 된다. 자신을 위해 생명을 주신 주께 속했기에 이제 가진 시간과 재물과 권한을 이웃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1:20-22에서 바울은 주의 만찬 자리에서 각자 자기 음식을 먼저 먹어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하는 모습을 책망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십자가를 기념하는 식탁에서도 아모스 6장의 연회가 다시 벌어질 수 있다는 경고다. 야고보서 5:1-6은 일꾼의 삯을 주지 않고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며 살륙의 날에 마음을 살찌운 부자들에게, 추수한 사람들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다고 경고한다. 아모스 6장에서 맹세하시고 한 나라를 일으키시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도 같은 공의로 일하신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이 공의를 따라 섬길 힘을 준다.
현대적 적용
아모스가 고발한 안락은 백성의 환난을 외면하는 지도자의 생활이다. 요시야도 먹고 마셨지만 정의와 공의를 행하고 가난한 이를 변호했다(렘 22:15-16). 편안히 산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을 정죄할 수 없다. 자신의 편의를 위해 이웃의 정당한 품삯과 몫을 빼앗으면서 그 고통을 외면하는 태도가 심판의 대상이다.
6절에서 지도자들은 가장 좋은 기름을 자기 몸에 바르면서 백성의 파멸에는 아파하지 않는다. 성도는 다른 사람의 고통과 거리를 두기 위해 풍요를 사용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로마서 12:15는 우는 이들과 함께 울라고 권한다. 이사야 58장에서도 금식은 주린 사람에게 양식을 나누는 일과 이어진다. 절제와 나눔은 자기 즐거움에 갇힌 삶을 돌이키는 응답이다.
지도자의 책임은 누리는 지위와 자원이 클수록 무거워진다. 아모스의 유력자들은 가장 좋은 것을 먼저 차지했기에 포로의 맨 앞에 선다(7절). 교회와 사회에서 권한을 맡은 사람도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키우면서 맡겨진 사람들의 상처를 외면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으뜸이 되려는 사람에게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고 하셨고 친히 자기 목숨을 주셨다(막 10:42-45).
정의를 찾는 사람이 오히려 더 쓰라린 피해를 겪는다면 정의가 독과 쓴 쑥으로 바뀐 것이다(12절). 공동체의 평판과 평온을 지키려고 폭력과 피해를 감추는 행위도 이 고발 앞에 선다. 즐거운 분위기와 종교적인 음악은 불의를 덮을 수 없다. 하나님을 안다는 고백에는 억울한 이의 송사를 변호할 책임이 따른다(렘 22:16).
3절의 지도자들은 흉한 날을 밀어내면서 폭력을 가까이 불러들였다. 회개를 미루는 동안 계속되는 불의는 피해를 키운다. 말씀의 경고를 듣는 사람은 잘못을 멈추고 자기 행동으로 생긴 피해를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의 힘으로” 얻었다는 자랑 대신 능력과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여로보암 시대의 회복도 고난받는 백성을 보신 하나님의 긍휼에서 나왔다(왕하 14:23-27).
아모스는 특정한 지도자들의 폭력과 정의의 왜곡을 지적한다. 다른 사람이 재난이나 손실을 겪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이 심판의 죄목을 붙일 수 없다. 이 말씀은 권한과 자원을 가진 독자에게 자기 안전과 책임을 먼저 묻는다. 어려움을 겪는 이웃의 고통은 심판의 증거를 찾을 재료가 될 수 없다.
아모스 9:14의 회복된 백성은 자기 손으로 가꾼 포도주와 열매를 누린다. 그리스도의 식탁에서도 누군가는 굶주리고 누군가는 취하는 불의가 책망받는다(고전 11:20-22). 주께 생명을 받은 공동체는 이웃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아파하며 자기 몫을 나누고, 일한 사람이 정당한 열매를 누리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