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분석

1:1은 이어질 말씀이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라고 먼저 밝힌다. 청중은 여섯 나라의 심판을 듣기 전에 그 말씀의 최종 수신자를 알게 된다. 표제는 이 말씀을 ‘아모스의 말들’이라 부르면서, 그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보았다’고 하여 계시로 받은 말씀임을 밝힌다. 개역개정은 이를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로 옮긴다. 아모스는 유다 드고아의 목자였고, 유다 왕 웃시야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의 시대에 북왕국을 향한 말씀을 받았다. 남쪽의 목자에게 주어진 말씀이 왕과 나라의 행위를 심판한다. “지진 전 이년”은 정확히 두 해를 가리키고, 정관사가 붙은 ‘그 지진’은 청중이 알던 특정한 지진이다. 스가랴 14:5도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해 도망한 일을 회상한다. 이 연대 표지는 예언을 공동체가 오래 기억한 실제 사건에 묶는다.

1:2에서 여호와는 시온에서 “부르짖으시며”(יִשְׁאָג, 이쉬아그) 예루살렘에서 “소리를 내시리니”(יִתֵּן קוֹלוֹ, 이텐 콜로). 같은 동사와 표현이 3:4에서 먹이를 앞둔 사자에게 쓰이고, 3:8은 사자가 부르짖으면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느냐고 물은 뒤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면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고 잇는다. 1:2는 여호와의 말씀을 위협과 임박한 행동을 알리는 사자의 소리로 들려준다. 개역개정이 두 번 ‘마르다’로 옮긴 동사도 히브리어에서는 다르다. 앞의 말(וְאָבְלוּ, 웨아벨루)은 다른 본문에서 흔히 ‘슬퍼하다’로 쓰이고, 뒤의 말(וְיָבֵשׁ, 웨야베쉬)은 물기가 말라 버리는 상태다. 목자의 초장이 애도하듯 시들고 갈멜 산 꼭대기가 마르는 그림은 목축과 경작을 지탱하는 자연도 그 목소리 앞에서 안전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남쪽 시온에서 나오는 말씀은 북이스라엘과 주변 나라들을 향하며, 어느 나라의 경계도 하나님의 권위를 제한하지 못한다.

1:3부터 반복되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는 각 선언을 하나님의 판결로 제시한다. 이어지는 “서너 가지 죄”는 히브리어로 ‘다메섹의 세 범죄 때문에, 그리고 넷 때문에’(עַל־שְׁלֹשָׁה פִּשְׁעֵי דַמֶּשֶׂק וְעַל־אַרְבָּעָה, 알 셸로샤 피쉬에 다메세크 웨알 아르바아)이며, 개역개정은 두 수를 우리말 관용어로 묶었다. Jan de Waard와 William A. Smalley의 UBS 해설은 셋에서 넷으로 나아가는 표현을 죄가 쌓이고 정도가 더해지는 것으로 설명한다.1 실제 고발도 죄를 네 항목씩 세지 않고 대표적인 잔혹 행위 하나를 든다. 셋에 넷이 더해지는 수사는 오래 쌓인 폭력에 여호와께서 이제 책임을 물으신다는 뜻을 전한다.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לֹא אֲשִׁיבֶנּוּ, 로 아쉬벤누)는 문자적으로 ‘내가 그것을 돌이키지 않겠다’이며, 히브리어에는 ‘벌’이라는 명사가 없다. 개역개정은 ‘그것’을 “그 벌”로 풀었다. UBS 해설은 이 목적어를 이어질 징벌로 읽는 풀이와 심판의 말씀으로 읽는 풀이를 함께 소개한다.1 어느 쪽이든 곧 나오는 불과 파괴의 선언이 그 내용을 채운다. 같은 동사는 1:8의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에서 다시 쓰인다. 여호와는 판결을 되돌리지 않으시고 자기 손을 범죄한 성읍으로 돌리신다.

다메섹의 범죄는 철 타작기로 길르앗을 타작한 일이다(1:3). 개역개정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로 비유임을 밝혔지만, 원문은 비교의 말 없이 ‘그들이 철 타작기들로 길르앗을 타작했다’고 직접 말한다. 타작기는 바닥에 날카로운 것을 박아 곡식 위로 끌던 썰매이며, 곡식을 으깨는 도구의 그림이 사람과 땅을 짓밟은 전쟁의 잔혹함을 드러낸다. 열왕기하 10:32-33도 아람 왕 하사엘이 요단 동쪽 길르앗을 공격했다고 기록한다. 여호와는 하사엘의 집에 불을 보내 벤하닷의 궁궐들을 사르겠다고 하신다(1:4). 여호와를 주어로 하는 “불을 보내리니”는 암몬 선언을 제외한 이후의 선언마다 되풀이된다. 여호와는 주민에게 가한 폭력과 왕실이 누리는 안전을 별개의 문제로 두지 않으신다.

1:5의 심판은 성문 빗장의 파괴, 주민과 통치자의 제거, 백성의 추방으로 이어진다. 아웬 골짜기의 주민과 벧에덴의 “규를 잡은 자”가 끊어지므로 백성의 삶과 왕권의 기반이 한 판결 아래 흔들린다. 아람 백성은 “기르에”(קִירָה, 키라) 사로잡혀 간다. 9:7에서 여호와는 아람 사람을 “기르에서”(מִקִּיר, 미키르) 올라오게 하셨다고 말씀하신다. 같은 지명이 1:5에서는 도착점으로, 9:7에서는 출발점으로 쓰인다. 아람이 기르로 끌려가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자리로 되돌려 보내시는 심판이다.

가사는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다”(1:6). 동사와 어근이 같은 명사가 목적어로 뒤따르며, “모든 사로잡은 자”(גָּלוּת שְׁלֵמָה, 갈루트 셸레마)는 포로 집단을 가리키는 명사와 ‘온전한’이라는 형용사의 결합이다. UBS 해설은 이를 한 민족 전원이 붙잡혔다는 뜻으로 좁히지 않고 포로 무리나 마을 주민이 통째로 끌려간 일로 설명하며, 강조점을 포로에게 가해진 비인간적인 처우에 둔다.2 붙잡은 사람들을 다른 이의 처분에 넘기는 것이 포획의 목적이었다. 본문은 거래의 값이나 조건을 말하지 않고, 사람들의 삶과 자유를 집단으로 빼앗아 타인의 손에 넘긴 행동 자체를 고발한다. 심판은 가사에서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과 블레셋의 남은 자들로 넓어진다(1:7-8). 다메섹에 쓰인 ‘주민을 끊고 규를 잡은 자를 끊는다’는 문장이 아스돗과 아스글론에도 다시 쓰여, 서로 다른 나라에 같은 판결이 적용된다. 피해자들은 ‘포로 집단’이라는 말 속에 이름 없이 묶였지만, 심판에서는 가해 공동체의 중심들이 하나씩 이름으로 불린다.

두로도 포로 집단을 에돔에 넘겼고, 여기에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라는 이유가 더해진다(1:9-10). “형제의 계약”(בְּרִית אַחִים, 베리트 아힘)은 지켜야 할 관계에 대한 책임을 나타낸다. 구약에서 기억은 과거의 사실을 아는 데 머물지 않고 약속에 맞게 행동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노아와 방주의 생물을 기억하사 물을 줄이셨고, 모든 생물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여 다시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다(창 8:1; 9:15). 두로의 계약 상대와 체결 시점은 본문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두로가 보호해야 할 관계를 외면하고 사람들을 넘겼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성벽과 궁궐을 삼키는 불은 그 배반으로 유지하던 번영과 안전을 겨냥한다.

에돔은 칼로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고 분을 끝없이 품었다(1:11-12). 한때의 충돌을 넘어 적대를 보존하고 되풀이한 모습이다. 두로 선언에서 지켜야 할 계약의 이름이던 형제가 에돔 선언에서는 칼에 쫓기는 대상이 된다. “긍휼”(רַחֲמָיו, 라하마브)은 ‘태’를 뜻하는 말과 어근이 같아, 에돔이 버린 것은 자기 안에 있어야 할 깊은 연민이었다. 본문은 그 형제의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에서와 야곱이 한 태에서 난 쌍둥이였으므로(창 25:21-26) 청중은 에돔과 이스라엘의 혈연을 떠올리게 된다. 관계가 가깝다는 사실은 가해의 책임을 줄이지 않고 배반의 깊이를 드러낸다. 데만과 보스라의 궁궐을 삼키는 불은 그 분노를 지탱한 권력에도 끝이 있음을 선언한다.

암몬 자손은 자기 지경을 넓히려고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다(1:13). “배를 갈랐음이니라”(בִּקְעָם, 비크암)는 ‘찢어 열다’라는 동사로, 그 목적어는 길르앗의 임신한 여성들이다.6 “넓히고자 하여”가 그 목적을 밝혀, 희생자의 몸에 가한 폭력과 국가의 팽창이 한 문장 안에서 행위와 목적으로 묶인다. 길르앗은 1:3에서 다메섹에게 짓밟힌 땅이기도 하여, 국경 지대 주민이 거듭 겪은 폭력이 드러난다. 암몬의 심판에서는 되풀이되던 ‘불을 보내다’가 “불을 놓아”(וְהִצַּתִּי, 웨힛차티)로 바뀌어, 여호와께서 랍바 성에 직접 불을 붙이신다(1:14). 전쟁의 외침과 회오리바람의 폭풍이 짝을 이루어 군대의 공격과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재앙이 함께 몰려온다. 백성을 동원하고 영토를 넓히던 왕과 지도자들은 함께 사로잡혀 간다(1:15). 남을 끌어가던 자들이 끌려가는 자리에 선다.

모압은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를 만들었다”(2:1). 이 말(לַשִּׂיד, 라시드)은 ‘석회가 되도록’이라는 뜻이어서, 우리말 ‘재’보다 뼈가 석회처럼 될 만큼 철저하게 태운 정도를 드러낸다. UBS 해설은 이를 유해의 철저한 소각과 모독으로 설명하면서 구체적인 역사 상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고 밝힌다.3 피해자가 에돔 왕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앞에서 형제를 해친 가해자로 고발된 나라가 여기서는 모압의 폭력을 당한 피해자로 나온다. 이 고발에는 이스라엘이 피해자로 등장하지 않으므로 여호와의 판결은 이스라엘의 이익을 지키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여호와는 나라들을 고정된 편으로 나누어 한쪽의 피해만 인정하지 않으시며, 자기 유해를 지킬 힘이 없는 죽은 이에게 행해진 모독도 물으신다.

2:2-3에서 모압은 요란함과 외침과 나팔 소리 가운데 죽는다. 세 소리가 겹겹이 쌓여 모압의 죽음을 귀로 듣게 한다. “재판장”(שׁוֹפֵט, 쇼페트)에 대해 UBS 해설은 여기서 나라를 다스리는 인물을 가리키며 정확한 지위는 특정하기 어렵다고 풀이한다.4 여호와께서 그와 지도자들을 직접 죽이신다. 여섯 선언을 잇는 불과 궁궐의 파괴는 백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권력의 중심을 친다. 모압 선언 뒤에는 같은 형식이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이어지고(2:4-16), 이스라엘의 죄는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판 일이다(2:6).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이라고 밝힌 표제가 이 전개를 준비했다. 이웃 나라들의 죄를 듣던 청중이 자기 행위의 책임을 묻게 된다.

성경신학적 통찰

아모스가 선포하는 여호와의 권위는 이스라엘의 국경에서 멈추지 않는다. 열국의 고발에는 이스라엘의 예배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보다 사람을 짓밟고 넘기며 배반한 일이 제시된다. 이 말씀은 전쟁의 승리나 영토의 크기가 나라의 정당함을 결정한다는 생각을 무너뜨린다. 하나님은 강한 자의 성공에 가려진 피해를 불러내시고 국가가 사람에게 한 일을 물으신다.

창세기 9:5-6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므로 생명을 해친 책임을 묻겠다고 노아와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세워지기 전 인류에게 주어진 이 책임은 특정 나라의 이익에서 생기지 않는다. 모압이 에돔에 저지른 범죄가 고발되는 것도 이 보편적인 책임과 이어진다. 같은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땅에 생명이 번성하도록 복을 주시고 다시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는 언약을 세우신다(9:1-17). 땅을 더 차지하려고 그 땅에서 살아갈 사람을 없앤 암몬의 행위(암 1:13)는 생명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근거는 인간의 가치를 승자와 패자, 동맹과 적대 관계에 따라 바꾸지 못하게 한다.

이스라엘의 구원 이야기도 생명을 해치는 국가의 힘 앞에서 시작한다. 애굽 왕은 이스라엘의 번성을 위협으로 여겨 무거운 노동을 강요하고 남자 아기들을 죽이려 했다(출 1:8-22). 국가가 자기 미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다른 이들의 미래를 빼앗는 일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한 산파들은 생명을 살렸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백성의 고통을 보고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그들을 건지셨다(3:7-10). 사람을 붙잡아 타인의 처분에 넘기는 세력과 달리, 출애굽의 하나님은 노역 아래 있는 사람을 해방하신다. 아모스 2:10이 출애굽의 은혜를 회상한 뒤 이스라엘의 죄를 묻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구원받은 기억은 힘없는 이를 팔고 억누르는 현재의 행동을 더욱 엄중하게 드러낸다.

율법은 힘을 잃은 사람을 보호하는 규정으로 그 구원을 공동체의 생활에 이어 간다. 신명기 23:15-16은 도망온 종을 돌려주지 말고 그가 선택한 곳에서 살게 하며 압제하지 말라고 한다. 사람들의 무리를 에돔에 넘긴 가사와 두로(암 1:6, 9)와 반대로, 이 규정은 힘을 잃은 사람에게 거주의 자리와 선택을 돌려준다. 레위기 19:33-34는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거류민이었으므로 거류민을 학대하지 말고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하며, 같은 장은 품꾼의 임금과 공정한 재판도 요구한다(19:13-18).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품꾼과 거류민을 대하는 행동도 요구하신다.

신명기 23:7은 에돔 사람을 형제라 부르며 미워하지 말라고 명한다. 친족이라는 기억은 관계를 지킬 책임을 낳는다. 두로의 형제 계약 배반과 에돔의 형제 추격은 각각 약속과 혈연을 배반한 일이며, 아모스는 관계의 이름만 남은 곳에서 실제 행위를 묻는다. 오바댜 1:10-14는 에돔이 예루살렘의 재난을 멀리서 구경하고 기뻐하며 재물에 손을 대고 도망자들을 원수에게 넘긴 일을 고발한다. 두 본문이 같은 사건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형제의 고통을 자기 유익의 기회로 삼은 책임은 이어진다. 폭력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는 생각만으로 방관과 약탈의 책임을 지울 수 없다.

잠언 22:22-23은 약하다는 이유로 탈취하지 말고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고 하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송사를 맡으신다고 말한다. 같은 장 2절은 가난한 자와 부자를 지으신 분이 모두 여호와이시라고 한다. 지혜의 가르침은 일상의 재판과 경제적 탈취를, 예언은 국제 전쟁과 강제 이주를 다루지만, 약함을 이용해 빼앗는 죄는 규모가 달라도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피하지 못한다.

이사야 2:1-4는 아모스 1:2처럼 시온에서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을 말하지만, 여러 민족이 그 말씀을 배우러 모여들고 하나님이 나라들 사이를 판단하신 뒤 무기가 농기구로 바뀌는 미래를 바라본다. 아모스에서 타작 도구는 사람을 짓밟는 전쟁을 묘사했지만, 이사야에서는 칼이 보습이 되어 사람을 먹이는 경작을 돕는다. 이 평화에는 여호와의 가르침과 판결이 있으며,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의 목소리를 지운 상태를 평화로 부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폭력을 심판하시는 목적은 나라들이 그분의 길을 배우고 더는 서로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데 있다.

열국 심판 뒤에 유다와 이스라엘의 고발이 나오는 구성은 이 모든 연결을 청중에게 되돌린다. 출애굽으로 구원받고 율법을 받은 백성도 가난한 사람을 팔고 약자의 길을 굽게 할 수 있다(암 2:4-12). 창조주께 속한 모든 사람의 존엄과 언약 백성에게 주어진 책임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의 잔혹함을 미워하신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자기 공동체의 거래와 관계와 권한 행사도 그분 앞에 내놓아야 한다. 다른 나라를 판단하는 말씀을 듣고 기뻐하는 데 머물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돌아보는 일이 언약의 응답이다.

기독론적 해석

아모스에서 나라들의 죄를 물으시는 분은 시온에서 말씀하시는 여호와다. 히브리서 1:1-4는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이 마지막 날들에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고 선포한다. 만유의 상속자인 아들을 통해 세계가 지어졌고 그분의 능력의 말씀이 만물을 붙든다. 그리스도의 권위는 한 지역이나 민족의 이해에 묶이지 않는다. 같은 장은 아들의 보좌와 공평한 규를 말하며 그분이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셨다고 밝힌다(1:8-9). 아모스의 ‘규를 잡은 자’들은 자기 나라의 힘을 행사하다 심판받지만, 아들의 통치는 의와 공평에 기초한다. 그 아들은 죄를 정결하게 하신 뒤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죄를 물으시는 하나님의 의와 죄인을 깨끗하게 하시는 사역이 아들의 왕권 안에서 만난다.

예수는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로 이웃 사랑을 가르치신다(눅 10:25-37).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나갔고, 사마리아인은 불쌍히 여겨 상처를 싸매고 돌볼 곳으로 데려가 비용을 부담했다. 사람을 통째로 끌고 가 타인의 처분에 넘긴 아모스의 나라들과 반대되는 돌봄이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웃의 범위를 묻던 율법교사는 누가 피해자의 이웃이 되었는지 답해야 한다. 민족적 경계가 자비를 중단할 이유가 되지 않으며, 종교적 신분이 돌봄을 대신하지 못한다.

같은 장에서 예수는 고라신과 벳새다를 책망하시며, 그곳에서 행한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다면 그들이 벌써 회개했으리라고 하신다(눅 10:13-16). 아모스에서 포로 인도로 고발된 두로가 여기서는 많은 은혜를 접하고도 돌이키지 않는 도시들의 책임을 드러내는 비교 대상이 된다. 말씀과 권능을 가까이 경험한 특권은 더 깊은 회개의 책임을 낳는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다른 나라를 향한 평가보다 말씀을 가까이 들은 공동체에 먼저 다가온다.

마태복음 25:31-46에서 인자는 영광의 보좌에 앉아 모든 민족을 심판하신다. 아모스가 선포한 열국의 책임은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심판과 이어진다. 굶주리고 나그네 되고 병들고 갇힌 이들을 어떻게 대했는지가 그 앞에서 드러나며, 왕은 지극히 작은 자기 형제에게 한 행동을 자신에게 한 것으로 받으신다. NET 번역 주석은 이 ‘형제’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로 설명한다.5 제자를 영접하는 것이 자신을 영접하는 일이라는 마태복음 10:40-42도 복음 때문에 취약해진 제자들과 왕의 연대를 밝힌다. 동시에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고통당하는 이웃에게 자비를 행할 넓은 책임을 가르친다. 교회는 고난받는 제자를 돌보며 다른 이웃의 고통에도 가까이 다가간다.

예수는 집권자들이 사람들을 임의로 지배하는 모습과 달리, 제자들 가운데 큰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다. 그 근거는 인자가 섬기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는 데 있다(막 10:42-45). 바로 앞에서 예수는 자신이 넘겨져 능욕과 죽음을 겪고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예고하셨다(10:32-34). 아모스에서 포로가 다른 이의 손에 넘겨지는 고발은 사람의 무력함을 드러냈다. 예수는 폭력의 손에 넘겨지는 고난을 알고도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시며, 그 죽음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으로 설명하신다. 십자가는 죄인의 행위를 폭로하면서 죄인을 구원하는 자기 봉헌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소모하는 길을 버린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모두 죄 아래 있어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롬 3:9-20). 이웃 나라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에 이르는 아모스의 흐름처럼, 자기 소속을 근거로 하나님의 판결에서 빠져나갈 길이 사라진다.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의 속량이 선포되고, 하나님은 그분의 피를 통해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며 예수를 믿는 사람을 의롭다 하신다(3:21-26).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면서 이방인의 하나님이시므로 누구도 자기 자랑을 구원의 근거로 세울 수 없다(3:27-30). 모압이 에돔에 행한 범죄까지 다루신 여호와의 보편적인 권위는 그리스도 안에서 민족을 넘어 죄인을 구원하시는 복음과 이어진다.

바울은 아덴에서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신 창조주께서 어디에 있는 사람이든 회개하라고 명하시며, 정하신 사람을 통해 세상을 공의로 심판할 날을 정하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선포한다(행 17:24-31). 예수의 부활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의로운 판결을 증언한다. 제국과 전쟁의 힘 앞에서 잊힌 피해도 그분 앞에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가 심판하시는 분이므로 폭력을 행사한 사람도 회개하라는 부름을 듣는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기다리는 성도에게 로마서 12:17-21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며, 원수가 주리면 먹이고 목마르면 마시게 하라고 권한다. 아모스에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심판은 신자가 원수에게 같은 폭력을 가해도 된다는 명령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악을 바로잡으신다는 약속에 의지하여 보복을 멈추고, 가해의 책임을 묻고 피해자를 보호하면서도 상대의 인간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은 그리스도께 속한 백성이 심판과 긍휼을 함께 믿는 방식이다.

현대적 적용

다른 나라나 집단의 잔혹한 일을 들을 때 생기는 분노를 자기편이 옳다는 증거로 바꾸기 전에 실제 피해를 살펴야 한다. 여호와는 여러 나라의 행위를 물은 뒤 유다와 이스라엘도 책망하신다. 교회가 전쟁과 억압의 피해자를 위해 기도한다면, 가까운 나라나 같은 신앙의 집단이 가해자로 드러날 때도 같은 태도로 사실을 듣는다. 아모스는 각 나라에 구체적인 행위와 책임을 물었다. 한 사건을 민족 전체의 본성으로 확대하거나 같은 국적과 혈통의 이웃에게 적대감을 옮기는 일은 이 말씀과 어긋난다.

포로 집단을 에돔에 넘긴 죄는 사람을 물품처럼 다루는 거래에 책임을 묻는다. 신분증을 빼앗거나 빚을 이유로 이동을 막고 부당한 노동을 강요하는 일이 오늘의 모습이다. 거래의 중간에 있다는 사실이 사람에게 가해지는 고통과 무관함을 뜻하지 않는다. 값이 싸고 결과가 빠르다는 이유로 누가 그 부담을 떠안았는지 묻지 않는다면, 사람을 타인의 손에 넘긴 나라들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있다. 낯선 땅에 온 사람을 도울 때에도 신명기의 피신한 종처럼 그가 자기 삶의 선택을 되찾도록 돕고, 도움의 대가로 종교 활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암몬을 향한 고발에서 영토 확장이라는 목적은 여성의 몸에 가한 폭력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교회와 가정도 더 큰 목표를 내세워 한 사람의 몸과 안전을 희생시키지 않는지 살펴야 한다. 피해를 호소한 사람에게 기관의 명예나 가족의 체면을 위해 침묵하라고 요구할 수 없고, 그의 이야기를 모임의 감동을 위한 자료로 써서도 안 된다.

두로가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않았다는 고발은 가까운 관계의 신뢰와 약점을 이용하는 행위를 돌아보게 한다. 에돔이 분노를 끝없이 품었다는 말씀은 과거의 피해를 대대로 물려주며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조상이나 집단 전체의 죄를 떠넘기는 일을 경계하게 한다. 실제 잘못은 기억하고 책임을 묻되 긍휼을 버린 분노가 새로운 피해를 만들지 않게 해야 한다. 모압을 향한 말씀은 적대하던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존엄을 지키라고 한다. 상대의 과거 범죄가 그의 유해와 유가족을 모욕할 권리가 되지 않는다.

불이 궁궐을 삼킨다는 반복은 큰 권한을 가진 사람의 책임을 드러낸다. 조직의 성과 뒤에서 누가 손해를 떠안는지 듣지 않고 높은 자리의 편안함이 다른 이들의 침묵으로 유지된다면,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지도력이 아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공동체는 빨리 용서하라고 요구하기보다 먼저 그의 말을 듣고 보호를 지속하며, 회복이 더디다는 이유로 믿음을 평가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한 피해를 알게 된 사람은 그리스도께 사함을 구하면서 잘못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돌려줄 것을 돌려주며, 상대에게 용서를 재촉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사람은 보복을 멈추고 원수가 주리면 먹이며, 폭력이 멈추고 피해자가 보호받으며 가해자가 돌이키기를 구한다.